분당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그냥 가긴 아까워 한바퀴 휙 둘러 본다.
그 옛날 숯냇가에서 수영하고 썰매타며 놀았는데 이제는 어엿히 한자 이름 탄천으로 개명하고 신흥 부자촌을 유유히 흐르는 하천으로 탈바꿈 되있네.

춥지만 바람 한점없는 그런 겨울날,
숯냇가 뚝방에 앉아 반짝거리는 수정을 찾는다고 대못, 돌맹이 들을 동원해서 갓 쌓여진 뚝방 돌맹이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코흘리개들이 그립네.

그게 수정이든 아니든 반짝거리면 무조건 예쁘고 비싸게 보였던 어린시절엔 '이러다 혹시 다이아몬드라도 찾는거 아닌가?' 라는 순진한 생각들이 있었지.

그것도 시들해지면 동네 중앙시장 종합시장 제일시장등을 돌면서 떨어진 돈 주우러 다니기도하고 운 좋으면 신주나 구리전선을 주워서 고물상에 갖다 팔기도하고...

못 먹어서 지금은 북한 아오지에서나 볼 법한 홍조띈 얼굴에 반쯤 튼 그 시절의 어린아이들이 불현듯 생각이 난다.

가난과 부랑자의 마을 광주대단지!!
성남으로 분당으로 계속 발전해가는 걸 보며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난 아직도 내 어린시절이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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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4 20:11
추석전야 보름달 본다고 뜬눈으로 엄마랑 누나랑 평상에 앉아 있다 잠들다.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친구들과 놀 생각에 딱지 한줌 쥐고 밖으로 나서면 급격히 서늘해진 날씨에 괜히 코만 훌쩍거린다.

길거리엔 아무도 없다.
동네 어귀 까지 가 보기도 하고 이골목 저골목 돌아다녀 보지만 한놈도 안보인다.

아. 오늘이 추석이지~~
나만 남겨진 이 동네의 골목에서 하릴없이 바지주머니에 뽀개놓은 라면땅만 꺼내 먹는다.

어디선가 골목 모퉁이에서 말끔한 신사가 "내가 이 애비다. 사실은 죽은게 아니라 미국가서 돈 많이 벌어왔어" 라고 말한다면, 아버지로 받아들여야 되나 말아야되나 같은 즐겁고도 씁쓸한 상상을 하면서 아랫동네 시장까지 걸어간다.

굳게 닫힌 상점들과 나부끼는 흙먼지,
시장 한귀퉁이에서 술취해 쓰러져있는 노인 양반,
꼬까옷 입고 나들이 나서는 부잣집 가족들,
구름한점 없는 새파란 하늘 10월의 하늘,

그 사이를 나뭇가지 하나 손에 들고 돌리며 걸어가는 10살 박이의 내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2016년 추석,
쓸쓸함은 여전히 이어지고 아마 평생 계속될듯.
이 밤, 가슴이 벌렁거려 참을 수가 없네..
어떻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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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1.

들꽃이름, 별자리, 곤충이름 외우며 친구들과 총싸움하며 야산을 뛰어다니던 국민학교 시절의 막바지 겨울, 얼굴도 아주 예쁜 여 선생님은 왠지 몰라도 나에게 특별히 잘 해주신 것으로 기억이 된다.

하긴 2학년 3학년 때는 아줌마 선생님들이 나를 자주 안아 주었다. 무슨 선생님 같지가 않고 엄마처럼 자주 안아준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새벽 일찍 학교에 간 적도 많았고, 어스름 초저녁 잠깐 졸다가 깜짝놀라 가방메고 학교 간적도 있었다. (아... 가방이 없어서 책보 가지고 다녔지... 이건 뭐 일제시대도 아니고... 참... 그 시절에 가방이 없어서 책보라니...)

5.6 학년때는 경필부, 독서회 같은 자유교양부 라는 써클 활동도 하였다. (참고로 이런곳은 공부를 잘하는 어린이만 들어갈 수 있음. ~~)

또 언젠가는 키다리 미스터킴을 부른 김상희씨가 사회봤던 "모이자 노래하자" 인가?? 아무튼 뭐 이런  TV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노래에 맞춰 춤도 췄던 기억이 있다.


집에 TV 있는 사람?, 전화기 있는 사람?, 자전거 있는 사람? ..........

내가 유일하게 거의 나 혼자 손 든 가정 조사 항목은 "어머니가 대학나온 사람?" 이었다. 

재산과 다른 생활에 관한 조사에서는 늘 손 한 번도 못 들었었다.


2.

참으로 아쉽게도 난 국민학교 시절의 사진이 통틀어 약 3장 정도 있는데 내 독사진이라기 보다는 어쩌다 우연히 뒤에서 찍힌것이고 나를 위주로 찍은 사진은 단 한장도 없다. 

가난해서 카메라는 당연히 없었지만  유일한 사진은 졸업앨범의 사진 인데, 그것마저 졸업하자마자 칼로 내 얼굴만 도려내서 지금은 아에 없다. 

국민학교 5학년 정도에 아무튼 누군가가 안치는 기타를 주었는데, 어떻게 치는지도 뭔 잡아야 하는지 그 아무도 알려주질 않았는데 기타 역시 피아노와 마찬가지로 어찌어찌 내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다.

국민학교의 기억은 거의 이게 전부다. 

엄마가 신학대학 나와 그 신앙심의 발로로 어린이집을 꾸려 나갔고, 난 그 덕분에 어디선가 가져온 만화 200권 간식으로 받아 온 굳은 우윳가루 뭐 그런것을 좀 더 먹었을 뿐이다. 그것도 다른 아이들 먹을때 같이 먹은거지 절대로 개인적으로 나에게 주지는 않았다. 밥먹은 기억은 거의 없고 매일 배급타온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만 먹은것 같다.

엄마가 동네애들을 위한 것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당신만의 일종의 직업정신이다. 난 늘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어린이 였을 뿐이다. 혹여 엄마가 이 글을 본 다면 서운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들 이라기 보다는 그들중의 하나 그야말로 One of them 정도 였던것 같다.


뭐 그렇다고 큰 불만도 없었던 것으로 보아, 내 스스로도 뭐 아들이라는 특별함을 포기 했던 듯 하다. 

늘 10원만 달래서 라면땅 사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조금씩 뜯어 먹던 기억 밖에 없다.

가끔 지난 호 소년중앙 어깨동무 몇십권씩 들어오면 그 책 보는게 유일한 취미였고,

10원에 마음대로 신간만 볼 수 있었던 만화가게에 가서 아주 여러시간을 앉아서 만화 보는데만 열중 했던것 같고,

혼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걸어다니는게 최상의 취미 였던것 같다. (그 취미는 지금도 여전함)


3.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던 성남서중에 들어갔다. 

참 내 인생에서 희한한 일은 전부 내 대 혹은 내 전 대에 입학 시험이 없어졌다는것 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면 바로 입학 시험제도가 없어지고 뺑뺑이로 바꼈고, 시험으로 갈 수 있는 유명 고등학교 (당시 수원 유신, 인천 제물포등등)는 중1때 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난 중3때 다시 고향인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어 역시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국민학교 4학년 5학년때 같은 반, 중학교도 같은 곳으로 입학하게 된 김진현 이란 친구는 마치 우리가 애인 사인것 처럼 서로 다른반이었는데도 늘 서로를 기다려 주었다. 혹여 내가 청소당번이 걸리면 그 친구가, 그 친구가 좀 늦게 끝나면 내가 늘 기다렸다. 

수업을 마치고 서중앞의 길을 건너 희망대공원 아랫길로 서로 노래도 부르면서 내려 오기도 하고, 어느 지점을 정한 다음 서로 모르게 미행하기 게임을 주로 했다. 서중에서 집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꽤 먼거리 였는데 버스비를 아껴서 친구랑 떡볶기 같은것도 사먹고 영화도 많이 본 기억이 있다.

아무튼 늘 놀면서 귀가를 하니 하교길은 거의 한시간에서 두시간 정도 걸렸던것 같다. 

집에 도착하면 각자 밥을 먹는둥 마는 둥 다시 만나서 들깨밭도 걷기도 하고, 만화 보러도 자주 갔다.


언젠가 하교길에 동네 학교 안다니는 애들 (그나마도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니던 애들이 있었음) 우리 한테 욕을 해댔는데 그 욕이 하도 웃겨서 우리 둘이 아주 오랬동안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애용하며 깔깔댔던 기억이 있다. 그 욕은 "씹탱이" 였는데, 그 때는 왜 그렇게 그 욕이 웃긴지 아에 입에 달고 살았었다. ㅡㅡ;


그러던 어느 날...

중3 3월 내가 서울 광화문으로 이사 오면서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광화문에 살면서도 차를 두 번 이상 갈아타며 토요일 마다 성남시에 갔다. 교회에서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간 것이었고 늘 갈때마다 친구집에서 자고 일요일 저녁 쯤 서울로 돌아 왔다.

그것도 고등학교 입학 시험 준비 때문에 여름방학 전에 흐지부지 되면서 나중에 성남시에 갔을 때는 그 친구가 이사가고 더 이상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서로가 가난하여 전화기 한대도 없던 시절 유일한 만남의 방법은 그 집을 찾아가는 것 이었는데......,


내 평생 이사 간 횟수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다녔던 학교도 서울 서강국민학교 - 성남국민학교 - 성남제일 국민학교 - 성남제이 국민학교 - 성남서중 - 서울 인창중 - 서울 중앙고 ... 참으로 많기도 하다...

살던 동네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나서 - 천안 신아원 - 서울 마포 - 광주군 중부면 탄리 - (후에 성남시로 개칭) - 성남 모란 - 서울 광화문 - 계동 - 대학로 - 종로6가 - 서대문 무악재 - 해외 대만, 싱가폴, 홍콩, 심천 - 관악 대림동 - 방배동 - 역삼동 - 사당역 남현동 - 용인 영덕 - 중국 위해, 청도, 동관 - 수원 영통....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도 여러번 이사 갔으니.. 끔찍하다 생각만 해도..


4.

뭐 특별한 슬픔도 기쁨도 사건도 없이 그렇게 어린이에서 사춘기의 학생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중 3 때 학원 다니며 만났던 홍승희 라는 애가 아마 내가 처음으로 데이트 했던 여성이었다. 그 전에 중1때 중3누나를 좋아했었는데 그건 나의 일방적인 짝 사랑이었지만..

아무튼 홍승희라는 여학생은 중3때 만나서 같이 남산도 놀러가고 명동 무교동을 같이 싸돌아 다니다 서로 시험준비 때문에 소원해졌다. 

나는 중앙고를 들어갔고 그애는 경기여고에 들어갔는데, 고 2때 인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보고 약 10분간 대화..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우리학교의 축제에 놀러온 그녀를 또 보았다. 그것도 축제 주점을 하고 있는 우리 주점으로 어떤 남학생과 들어왔다. 서먹서먹하게 둘이 잠시 나와 별 잡다한 얘기 하다 또 헤어졌다.

그 흔한 삐삐 하나 없던 시절, 청춘남녀의 만남은 그리 쉽지 않은것 이었다.


매일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낙엽을 밟고 무교동을 지나 남산의 미니 동물원에서 혼자 배회하며 그렇게 중학교의 마지막 학년은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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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 있을 까?



광주대단지의 철거민 아이들의 부모들은 대부분 서울 근교에서 막노동을 하고 축처진 어깨에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키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다.
그런일을 하는 정도만 해도 양반이고 그 외에는 그나마 일자리도 없어서 빈둥대기 쉽상이다.

대부분의 내 또래 아이들은 갈곳이 없었다.
끽해야 산에 올라가서 애들하고 새총놀이나 하고,
봄에는 진달래꽃 따러 다니고 (어린시절의 낭만을 위해서가 아닌 그야말로 먹기위해서 따는것임), 칡도 캐러 다니고, 여름이면 숫냇가 너머에 가서 달랑무 같은 것을 캐서 먹기도 했다.
그리고 가을에는 도토리나 밤을 그리고 겨울에는 토끼를 잡으러 다녔다.
그러나 토끼를 실제로 잡았던 기억은 없다.
단지 동네 어른들은 가끔 꿩 이나 토끼를 인근 야산에서 잡아오곤 했다.

이건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어정쩡한 아수라장에서 아이들은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나중에 남들에게 시골에서 살았다고 하기도 뭐하고 도시에서 살았다 하기도 뭐한것이, 아주 시골 스럽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아주 도시적이지도 않은 삶의 행태였다.
오히려 시골과 서울을 동시에 안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듯 싶다.
보릿고개를 경험할 나이가 아닌데도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경험했으니,
참으로 별 그지같은 이것저것의 경험을 다 해봤다고 할 수 있다.

대략 3학년 정도가 되면 가끔 아이스케키 장사하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아이스케키를 약 100개 정도 주고 80개 어치만 입금 시키면 나머지 20개는 팔든 먹든지 알아서 하면 되는 아주 바람직한 장사 시스템 이었다.
구두닦이 보다는 그래도 덜 챙피해서 많은 아이들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러 다녔다.
"아에스케키~~ 케키나 하드 있어요~~"라고 외치며 방과후에 동네를 누빈다.
그러다 친구라도 만나면 한 두 개 뺏기는 것은 기본이고,
뺏어 먹은 아이는 친구 따라 장사 하는 데로 같이 따라 다녀 준다.
어짜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난 누나랑 한번은 껌 팔이를 해 본적이 있다.
서울에서 오는 버스 정류장에 가서 내리는 사람들에게 껌을 파는 것 이었다.
엄마에게 걸리면 혼이 나므로 엄마 오는 시간을 피해서 몰래 몰래 했었다.
돈 만지는 재미 보다는 스피아민트, 쥬시후레시 껌을 맘껏 씹을 수 있기 때문에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도 싫증나면 아이들은 시장에 돈 줏으러 간다.
옛날에는 왜 그리 사람들이 돈을 흘리고 다녔는지 시장에 가면 큰 돈은 아니더라도 5원 짜리로 바뀌기 전의 흰색50환 짜리 같은 작은 돈은 얼마든지 줏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껌종이 수집하는게 붐이라서 아무튼 시장은 여러모로 아이들에게는 이익이 되는 풍요로운곳 이었다.
운이 좋으면 쇠못이나 신주로 만든 쇠붙이도 줏을 수 있었는데 얼마든지 인근 고물상에 돈주고 팔 수 있었다.
전기줄을 줍는 날이면 즉석에서 불을 붙혀서 나일론 수지로 된 외피를 불에 태운 후 그 안의 구리만을 고물상에 가져다 줄 정도로 다들 전문가들 이었다.
나이만 어릴 뿐이지 경제 돌아가는 시스템이나, 당시의 고철 시세등은 당시 그 동네 살던 아이라면 누구나 파악하고 있었던것 같다.
물론 개중에는 잘사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그런 애들은 우리들의 놀이에 끼여 주지도 않았다.
시장에 뭐를 줏으러 다니는 것은 일종의 놀이 였다.
게다가 돈이 되면 더 좋고......,

여름방학 내내 이 시장 저 시장을 돌아 다니며 뭔가를 줏어본 기억도 있다.
아무튼 특이한것은 전부 수집의 대상이었던것 같다.

개중에는 일부러 산으로만 올라가던 아이들이 있었다.
그 이유는 삐라를 줏기 위해서였다.
삐라를 줏어서 파출소에 갖다주면 연필 한자루나 공책 한권을 탈 수 있었다.

당시의 간첩 식별법은 다음과 같다.
-. 이른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 운동화나 군화에 흙이 묻어있는 사람
-. 밤 늦게 까지 이불 뒤집어 쓰고 라디오를 듣는 사람
-. 물가를 몰라서 자주 물어 보는 사람
-. 은연중에 동무나 호상간 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사람
등등 .. 내가 기억하는 이것 보다 더 웃긴 식별법이 많았다.

아무튼 삐라는 도대체 누가 뿌리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야산에 가면 삐라가 반드시 있었다.
삐라를 처음 본 순간 어린아이들의 마음에는 당장이라도 삐라에서 김일성이 튀어 나올것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김일성은 당시의 반공 포스터에 항상 뿔달린 마귀 정도로 묘사 됐었으니까 머릿속에 그 이미지가 박힐 만도 했다.

당시의 아이들은 김일성 조차 공책이나 연필을 바꿀 수 있는 대상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가난함과 굶주림 앞에서 북한이고 삐라고 김일성이고 그 무슨 나발이고 간에 다 필요 없는것이다.

겨울이면 피해갈 수 없는 일이 한가지 있는데
바로 연탄까스 중독 이었다.
겨울내내 머리가 띵해서 다닌적도 있었다.
누군가 학교에 안나오면 거의 100%는 연탄까스 맡아서 였다.
대충 김칫국이나 동치미 한사발을 마시고 (최근의 TV 프로로그램을 보니까 전혀 약효가 없다고 함) 비틀거리며 학교로 향한다.

오전 내내 헛 구역질이다.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선생님은 공낙금 안 가져 온 새끼들 복도에 나가서 손들고 서 있으라고 한다.
쓰린 속에 휭휭도는 머리로 손들고 추운 복도에 벌 선다.

이 어린시절이 빨리 지나가기를...
어른이 되면 돈 많이 벌어야지 하며
이를 악 물고 서있다 쓰러진다.

하늘이 노래지면서 결국 헛구역질을 해댄다.
먹은게 김칫국물이니 김칫국물만 나온다.

남보다 일찍 돌아온 집은 텅 비어있고
아침에 먹다만 수제비만 냄비에 차게 얼어있다.

힘없이 숫가락을 들고
김치 한조각을 얹어서 얼은 풀 수제비를 떠 먹는다.

아~~ 이 좆같은 어린시절은 도대체 언제나 지나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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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연주회..
정말 콩쿨은 이번달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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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is the most popular artist in this area, especially, Violin, Piano and Classical Guitar.
However, worst is Violin.
Please endu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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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으로 애를 때렸다.
그것도 정식으로 종아리 다섯 대...
종아리에 피멍이 들었고, 내 가슴도 아팠지만 할수 없었다.

의연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맞는 자원이가 자랑스럽기 까지 했다. ^^;;

------------- 때린 이유의 전문 ---------------
Dear Mr Park
Thank you for your email.

Jawon made a mistake today, and I was also very surprised, as he is usually a very good student who does the right things and follows instructions. Today, he decided to play an internet game instead of the games we have set on our blog for mathematics.

I have talked about keeping safe on the internet and how important it is to only go onto the web sites that I have checked and put on the blog as links.

I am sure we won't have any more problems, but today the group of children who made this mistake needed to accept the consequences of their actions, which involved writing letters to their parents. I am pleased to say that Jawon admitted his mistake straight away, and was very honest when I asked him what he had been doing. I am sure Jawon will be back to his usual good behaviour again, and enjoying learning in class. He is a very capable student and I enjoy having him in my class.

Yours sincerely

Isabel Stanley

2012/2/2 PD <whereispark@gmail.com>
Dear Ms Stanley
I’m Jawon’s father.
I’ve just saw Jawon’s essay about his inappropriate behavior.
I was really surprised that and feel very sorry about that.
Jawon played another computer game when he has Math class. is right?
And he got a RED card from you.
No matter what,
This is caused by my mistake of our family education.
I will fix his wrong behavior from now on.
Please more scold him and more encourage him.
Best Regards
Da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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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가 학교 합창단이 되어 연말 공연을 한다.
전부 여자 남자는 자원이 친구 Luke 하고 자원이...
남자 놈 둘이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너무 웃기다.
어린 날 좋은 추억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얘는 왜 갑자기 합창팀에 들어가고 싶었을까?
누구 말대로 피는 못 속인다고... 어쩜 그리 나랑 닮았는지... 눈물이 다 나올 정도... 

표정없이 긴장 하는 것도 완전 어린시절의 나와 똑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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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날씨에 모처럼 과천 과학관을 찾았다. 원래는 동물원에 가려고 했으나 자원이가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온것인데, 얘는 경철서 옆을 지나가면 경찰관이 된다고 했다가, 버스 타면 버스운전 기사가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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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hot ---- almost 200 Yards

 
Jawon's putting 

 
주니어용 골프채를 사줬다.
막상 골프 연습장 등록 시키려고 하니, 주인놈들은 하나같이 13살 이하의 어린이는 안된단다.
그러나 주니어용 골프 클럽은 5살 부터 있고, 자원이는 9 살이다.

골프에서 물론 어린이는 정말 위험하다.
그러나 그냥 완구가 아니라 정말로 골프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골프연습장의 주인들은 본인들의 몸 만 사리는것 같다.

집에서 종이컵 놓고 연습하는데도 땀이 난다.
박자원 프로...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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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8살 짜리 자원이가 갑자기 건낸 편지 한 통.
초등 2학년이 무슨 속이 있어서 쓴건지는 모르겠지만... 엄마 아빠 돈 많이 있어서 좋은 학교 보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다.
웃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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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아버지, 아빠!!
내가 평생을 불러 보지 못한 유일한 단어, 그 단어를,
초롱초롱한 눈 망울의 아들에게서 들을 때 마다 가끔씩 그냥 아무 이유없이 눈가가 뜨거워 지는 이유는 왜 일까?

아버지 없이 살아온 세월의 회한은 아니고 애비없이 자란 놈 이라고 놀림 받은 일말의 경험은 더더욱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내가 아주 어려울 때, 불쑥 동네 골목 한켠에 나타나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던게 아니라 미국에 가서 살다가 돈 많이 벌어서 다시 나를 찾으러 왔다 라고 말하며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그런 희망적인 상상을 가슴속 깊은곳에 늘 지니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코 발생할 수 없을 현실을 두고 나 혼자 늦게라도 돌아온 아버지를 용서를 해 줄까 말까? 숱하게 머리속으로 고민했을 어렸을적, 아니 최근의 나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씁쓸한 희망이 주는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방금 전 SBS를 통해서 본 프로그램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자고 모인 모임에는 나이도 어린놈들도 끼여서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자식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렸을 때 매일 술 처마시고 집안의 왕 처럼 군림했던 아버지를 증오하며 당신과 닮지 않기를 곱씹으며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현재 자신의 자식과의 관계소원, 애들의 아버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한 상처등으로 좋은 아버지 되기 모임에 다니고 있는 것이다.
부전자전의 고리를 끊겟다는 어렸을적의 다짐은 어디가고 자기 스스로가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형태로 자식과의 벽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 좋아 좋은 아버지 되기 모임이지, 그냥 지들끼리 반성하며 질질짜고 있는 것을 보니 참 한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그 들을 동정하고 싶다.
애비가 있던 놈이나 없던 놈이나 이제는 다 같이 애비가 되어 자식에 대해 전전긍긍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실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아버지 뻘의 남자 어른들에게는 행동의 어색함이 있다. 또한 그런 아버지의 잔소리 없이 자랐기 때문에 그런 나이의 어른들이 뭐라고 하면, 특히 술집에서 옆에 앉아서 그야말로 씨부렁 거리면 난 참지 못한다.
그 대신 아줌마들 한테는 상당히 잘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줌마들은 나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또 아이러니 하게도 여자들 한테는 상당히 냉소적이고 신경질 적이다. 여자,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도 솔직히 있는 편이다. 혹시 여자를 너무 잘 알아서 그런것은 아닐런지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엄마를 비롯해서 누나, 엄마 친구들, 누나 친구들 등등.. 여자들이 나를 지배하는 구조에서 자랐기 때문에 여자에 대해서도 완전 평등 개념이 일찌감치 머릿속에 자랐는지도 모른다. 아니 원래는 불평등한 구조였는데 내 스스로가 유일한 남자로써 남성평등을 암암리에 쟁취하려고 노력했던 결과에서 비롯 됬었을수도 있다.

죽, 내 스스로는 모든 여자를 완전히 평등하게 대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약점도 이해해주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약하다는 점 등 누구나 인정하는 그러한 범위 밖의 즉,  여자니까 이해해 달라는 특유의 여성적인 행동들에 대해서는 과감 했었던것 같다. 과감했었다는 얘기는 이해를 해주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저 모자란 인간으로 봤을 수도 있다.
이제는 오히려 그 약점을 이용해서 성의 역차별이 자행되고 있지만... 아무튼...

남자는 결국은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아무도 이제는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다만 내 자식이 과연 언제 부터 나랑 같이 다니기 싫어할까?
내 자식이 언제부터 혹은 어떤 경우를 통해서 나와의 결별을 선언할까?
이것이 가장 걱정이다.

길떠나는 길동이가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호부호형!
나는 부도 형도 없어서 근본적으로 하지도 못했다.
누군가가 자기를 아버지라고 불러주는 자식들이 있는 세상의 남자들은 정말 행복한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 행복을 스스로 파괴하지만 않는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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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소나 프로그램을 돌린 후 피아노를 쳐보는 박자원.
그리고 재생, 수정, 반복...
구지 가르치지 않아도 혼자 열심히 하는 걸 보면 얘도 나처럼 딴따라 기질이 있는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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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까지는 팔이 전혀 안 닿다가, 최근 팔이 조금 닿는다. 왼손 운지를 제대로 하려면 오른쪽 줄이 안보이고, 오른쪽 줄을 제대로 튕기려면 왼손 운지가 안된다.
며칠전에 애가 "아빠 기타 줄 음이 미,시,솔,레,라,미 지?" 라고 물어보는데 정말 깜짝 놀랬다. 사실 음만 듣고 알았다면 더 천재적 이었겠지만, 얘가 피아노의 음과 비교해 보았나보다...
아무튼 어찌된 사연인지 기타 개방현의 음을 정확히 혼자서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방현의 음을 알고 혼자 도레미파솔라시도 까지 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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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 생애 첫 번째 미니 콘서트,
6살의 마지막 겨울,
피아노 학원에서 제일 어린애가 초중학교 중학교 형 누나들을 제치고 콘서트에서 3번째로 어려운 곡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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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면 사진이 커집니다


공항에서 비행기 기다리며 평균대 놀이를 하고있다.
점점 자기 주장이 생겨나고 사람의 모습과 생각으로 바뀌어간다.
나중에 나랑 안 놀아 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지금 같이 놀아줄때 정말 친하게 지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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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5 09:52
자원이는 어디서 봤는지 가끔 검객 흉내를 낸다.
망토를 두르고 나름대로 온갖 인상을 쓴다.
즐거운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영원히 간직하길......,
제발 나처럼 슬픔으로 기억되는 일이 없기를 가슴속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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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대회 후 상장과 메달을 수여받는 박자원군


1.
자원이는 동요대회 때문에 매일 밤 마다 나에게 피아노를 쳐 달랜다.
그래서 하루는 노래책 옆에 A4 용지 한 장 위에 오선지를 그려서 음표와 피아노 건반의 상관관계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몇 일 후
자원이가 혼자 동요를 피아노로 치고 있는게 아닌가?
7살에 클라식 악보를 그리는 절대음감의 천재는 아니지만 나는 5살짜리 아이가 피아노의 악보상의 음표를 보고 피아노를 혼자서 터득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혹시 얘도 7살 되면 클라식 악보 그리는거 아냐??

나도 어디가서 절대음감을 자랑하지만, 아마 자원이도 그런 음감을 타고난 모양이다.
자원이는 내 핸드폰으로도 "나비야 나비야" 같은 노래를 혼자 친다.
물론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발견했고 그 다음엔 저절로 외워서 치는것이겠지만 아무튼 음악적인것이 나랑 닮아있어 기분은 너무 좋다.

얘를 영재교육 비슷한거 한번 시켜볼까도 생각 했는데, 어린아이를 공부라는 울타리에 가둬놓게 될까봐 난 공부 하란 말은 안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 피아노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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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조 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박자원 군.


2.
일반적인 5살 짜리 애들은 동요라도 그 음을 정확히 못 잡는다. 열명에 1-2 명 정도가 비슷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자원이는 선생님의 피아노 치는 음을 정확히 듣고 그대로 따라 한다.
그러나 시합당일 걸린 목 감기 때문에 고음에 가서는 개그맨 "고음불가" 애들 처럼 음정을 처리해 버리는 쎈스도 발휘한다.

지정곡 "가을" 과 자유곡 "허수아비" 를 쉰 목소리로 열창했다. 그러나 너무 떨린 나머지 시선은 허공에 고정한채 몸은 뻣뻣하다.
그러나 노래가 끝나자 마자 바로 까분다.. ㅎㅎ

즐겁고 신나는 다섯살의 어느 한때로 기억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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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진을 보고도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



갑작스런 추위에 허겁지겁 동면으로 들어가 단잠을 잔다.
단잠 동안의 아름다운 꿈에는 언제나 어린시절이 풍경처럼 펼처져있고,
양 볼이 발그레 한채 곱은 두 손을 호호불며 콧물을 훌쩍 거리던 다섯살의 어린아이가 눈길을 헤메고 있다.

눈이오면 양놈에게 안 잡히려고 산으로 달음질쳐 올라
지난 가을 다람쥐가 숨긴 밤톨을 찾으며 하루종일 손꽁꽁 발꽁꽁 하고 있을 그 코흘리개 아이가 그립다.

내 다섯살의 언어는 자살, 신아원, 양놈, 옥수수떡, 수박화채, 깡패삼촌, 당원, 캬라멜, 뒷산, 야음, 도망, 벽장, 입양.... 이런 어눌한 언어로 차 있었다.

지금 내 아들이 좋아하는 붉은색 트럭은 전에 나를 유혹하던 양놈들의 미끼였다.
나는 엄마를 놔두고 가기는 싫었지만 그 붉은 장난감 트럭을 포기하기란 더더욱 싫었었다.
왜 내 아이는 나 와는 다른 세계에 살면서 같은색의 트럭을 좋아할까?

난 잠자는 아들의 얼굴을 볼때마다 눈물이 난다.
아니..... 그냥 줄줄 흘린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애틋하게 만드는 것일까?

다섯살....
내 인생은 다섯살때 이미 뒤틀렸다.
그래서 나는 내 다섯살짜리 아들을 보면 그냥 눈물이 줄줄 흐른다.
적어도 이 아이가 8살은 돼야 그 눈물이 멈출것 같다.


내 나이 다섯살 저런 곳에서 방황 했다니... 당시의 천안 삼거리가 아마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울하다
마냥 하늘로 올라갈듯 하루하루를 행복한 미소만 짓고 있는 다섯살짜리내 아이의 웃음을 시샘하는것일까?
얼굴은 나와 완벽한 닮은꼴인데 왜 저 아이는 저토록 행복해 해야하며, 또 다른 아이는 이 추운 새벽 눈길을 헤매는 것인가?

나는 잠자는 아이의 얼굴에서 나를 발견한다.
아이의 얼굴과 행동을 보면 마치 어린시절의 내 사진을 보고 있는것만 같아 갑작스럽게 가슴이 아파온다.

저렇게 착한 아이에게 그 토록 아픈 상처를 주다니......,

나는 잠자는 아이를 끌어안고 통곡을 한다.
나는 지금 다섯살 짜리 어린 나에게 어른들을 대신해서 용서를 구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 처럼 눈오는 추운 새벽에 하루종일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벽장으로 산으로 도망쳐 다니며 언제 올지 모를 엄마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 불쌍한 영혼을 위로하는 중이다.
눈물은 가슴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슴의 쥐어짜나보다.
내 가슴도 터질것만 같다.

오늘처럼 눈오는 밤이면,
그 시절 다섯살의 불행했던 아이가 더더욱 생각나서 눈물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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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팬놀이에 빠진 자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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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까불때 짓는 표정이다. 저만한 애들은 다 그런가부다.

난 유치원 다닐 때 즈음의 어린이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개다리춤을 추는것이다. 옛날 배삼룡처럼 다리를 떨면서 손은 번갈아 가며 머리를 넘기듯 쓰다듬는 동작이다.
이런걸 유치원에서 단체로 가르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보기싫다.

엊그제에는 자원이에게 물어봤다.
"너 개다리 춤 출 줄 알어?"
그랬더니 "아빠 이렇게 하는거야!!!" 라고 말하며 바로 일어나서 개다리 춤을 춘다.

예전에 내가 TV보면서 한 얘기를 애가 들었는지 내 앞에서는 한번도 안췄는데 막상 걔도 할줄 안다는것이 신기했다.

일전에 우리 애가 달라졌어요 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런,, 니미럴.. 유치원에서는 저런거 가르치나? 왜 애들은 너 나 할것없이 저런 춤들을 추지? 자원이 너는 저런거 추지마 알았지?" 바로 이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 그 춤 배웠으면서 왜 한번도 안췄어?" 라고 물어보니 별 할말이 없는 듯 이내 그만둔다.
"누가 가르쳐준거야? 선생님이?"
".............."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애들의 속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분명한것은 애들의 성격상 배운것은 집에와서 자랑하기 마련인데, 아마 자원이는 속으로 개다리춤을 무척 싫어하는 나를 배려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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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삼겹살을 구어먹고 있는데 갑자기 5살짜리 자원이가 나한테 "아빠 고기하고 야채하고 꼭 합체 해서 먹어야돼!!" 라고 말을 한다.
최근 마법전사 유캔도와 파워레인저를 즐겨 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합체! 변신! 파이널키!" 이런 말들을 중얼 거린다.
자원이의 눈에는 모든것이 합체이고 변신이다.

우리집에서는 할머니도 엄마도 고모도 고모부도 아무도 못알아듣는다.
나만 자원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난 얘가 보는것은 반드시 밤 늦게라도 인터넷에서 찾아본다. 그래야만 자원이의 정신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합체와 변신에관한 이야기는 나한테만 한다. 다른 사람은 못알아 들을것이라고 본인도 생각하는 모양이다.

새로 사귄 애인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자원이를 대한다. 우리 애인의 취미는 무엇이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지금 뭘 생각하고 있으며, 뭘 하고 싶어할까. 끊임없이 이러한것들이 궁금하다.
가끔 낮에도 유치원에가서 애를 데려오고 싶을만큼 보고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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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는
항상 뭔가를 궁금해 하고 한번들은말은 꼭 따라한다.
가끔 심심하면 나는 자원이를 데리고 버스를 탄다. 어디 목적있어서 가는것은 아니고 높은곳에서 차창밖의 풍경을 보기위해서이다.
버스에 앉으면 자원이는 쉴새없이 나에게 소근거린다.
"아빠, 여기는 올라가는 길이니까 빨리 가야돼!. 그리고 내려갈때는 조심해서 천천히 가야돼!"
"저기있는 오토바이 아빠꺼랑 똑같네?"
계속 이런식으로 중얼거린다.

그러다 한동안 말없이 차창밖의 풍경만 보면서 간다.

그럴 땐 얘가 도데체 뭘 생각하는걸까 궁금하다.

영어를 공부한다고 책을 사달라고 해서 마땅한 책이 없고 해서 초등학고 4학년 영어교과서를 사줬다. 1과는 나랑 같이 봤는데 얘가 어느 순간 제6과를 혼자 공부하고 있었다. 1과서 부터 순서적으로 그것을 다 본 모양이다.
내가 다 아는지 시험해 봤더니 대강 눈치로 아는 표정이다.

나는 어려서 부터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안주려고 국어고 영어고 공부하라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가르치지도 않는데 얘가 혼자 찾아서 한다.
한글도 이미 다 읽을 줄 알고 혼자서 쓰는 경지이며, 숫자도 100까지는 세는 모양이다. (쓰고 보니 자랑처럼 되 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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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까불기도 잘하고 웃기도 잘하고
항상 수줍어하고.....,

난 이 어린 애인이 배신할까봐 벌써부터 겁이 난다.
어느 순간 자원이도 내가 엄마에게 가끔 그러듯이 말을 안듣고 대들고 큰소리칠까봐 겁이난다.
TV에서 가끔 나오는 어떤 책임없는 새끼들 처럼 애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서 약초나 재배하면서 자연에서 살까?
그러면 나만 바라보고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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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는 요즘 매일 하루에 3번 이상 내 입술에 뽀뽀를 하는데 몇살 때 까지 할까 그것이 궁금하다.

지금 옆방에서 쌕쌕거리며 자고 있을텐데 그래도 보고 싶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요즘 집에서 많이 까분다 했더니, 유치원 홈피를 들어가보니 장난치는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다. 유치원 요리시간 맨 왼쪽에 앉아서 승리의 V자를 그리며 까불고 있다.

어제는 자꾸 놀이터에 가자고 해서 같이 갔는데, 그곳에서 유치원 친구들을 만났는지 30분 이상을 그 친구들과 뛰어 놀았다.
예전같으면 내가 어디있는지 항상 체크하며 노심초사하던 자원이가 나의 존재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만큼 친구들과의 놀이에 더 열중한다는 얘기다.
기분은 썩 좋지 않지만 나 보다는 친구가 더 좋다는 얘기다.(물론 그 시간 만큼은)
그러다 초등학교 들어가고 중학교 들어가면 점점 나 와는 멀어 지겠지?

아침 저녁으로 입술에 뽀뽀를 꼭 하는데 과연 몇살까지 할지 두고봐야겠다.

나 없이도 잘 노는 애를 보니 왠지 쓸쓸해지기 시작하네.
점점 멀어져가는 애인을 보는 듯한 심정 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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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애들은 다 놀거나 그냥 서 잇는데 혼자만 열심히 트위스트를 추고 있다.
모자가 너무 큰 듯 하다.



여전히 혼자서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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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念錄 (5.6.7세)  (3) 2006.12.17
Posted by PD 개인교수


난민수용소 같던 작은 교회에세 아이들이 율동을 하고 있다. 부모들은 다 일 나가고 갈데가 없는 아이들이다. 달콤한 간식을 기대하며 억지로 춤 추고 있는 듯 슬퍼보인다.


1.
그러고 보면 난 국민학교를 약 3-4번 전학 갔던 것 같다.
8살에 무너진 와우아파트 근처에 있는 서강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2반 이었던것으로 기억되며 내 짝궁은 상당히 예뻤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광주대단지로 철거 가서도 자주 생각 났던것으로 미루어 봐서 상당히 예뻤을게 틀림없다. 그리고 아마 그 아이는 우리동네 판자촌이 아닌 조금 잘 사는 동네의 아이 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와우 아파트가 무너지고 서강 똥물 옆에 살던 사람들은 강제 이주를 당해서 광주대단지 라는 생판 들어 본 적도 없는 볼모의 땅으로 떨궈졌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짜피 무허가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은 항변할 권리가 없었다.
허가가 안된곳에 임의로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엄마는 대졸 젊은 여자라 하여 그 동네 반장을 하고 있었고 연일 이어지던 데모에 주동적으로 참석을 했던것으로 기억된다.

데모라는거 참 우스운 것이다.
자기 땅도 아닌곳에 임의로 집 짓고 살면서 땅을 개발해야 하니 나가달라는 정부의 요구에 데모를 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누구인가? 독재는 했어도 빈민자들에게는 그리 야박하지 않던 시절 이었다.
아무튼 아이러니칼 하게도 명분 없는 데모의 결과 그 소산으로 광주 대단지 민둥산 20평을 얻은 것이다.

데모에 관한한 지금도 나의 생각은 아주 시니컬 하다.
원래 자기것도 아닌데 가져간다고 데모를 하지 않나, 아니면 그야말로 Not in my back yard 처럼 지역 이기주의의 일환으로 데모를 하는것이다.
데모,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것을 얻고자 하는 행위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렇게 하면 다들 다 같이 잘 살수 있을것 처럼 포장하며 남들에게 동조를 구하는것에 불과하다.
물론, 순수 권리를 주장하는 항의나 시위는 제외다.

거의 여름 쯤에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로 가서 성남 국민학교 라는곳으로 전학 갔다. 그리고 2개월만에 성남 제일 국민학교 라는곳으로 전학 갔다가 다시 일개월 후 성남제이 국민학교라는 곳으로 갔다. 성남제이국민학교가 내가 졸업한 학교이다.

원래는 민둥산을 대충 금 거놓고 무작위로 집을 지었기 때문에 주소도 없었다. 그러다 약 1-2년이 지난 후 대략 마을이 형성되자 우리에게도 주소가 생겼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 22-44호가 바로 민둥산 위에 지어 진 우리집 주소였다.

나중에 안 이야기 지만 그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대부분은 왕십리, 서강 등등 아무튼 서울에서 제일 더럽고 지저분 한곳에 있던 판자촌 주민들이었다.
당시 난 그렇게 여러지역에서 철거당해서 그리로 간줄은 모르고 있다가 약 8년전 성남시에서 살았다던 윤모씨를 만나서 그때야 알았다.

2.
처음으로 전학간 성남국민학교 라는 곳은  대략 지금의 성남시청 정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마침 당시 6월 장마가 한창 시작될 무렵 이어서 우리집 까지 오는길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개울도 건너고 조그마한 야산도 넘어야 했다.
난 1학년 밖에 안됐고 누나는 4학년이 었으므로 수업 끝나는 시간이 달랐다.

난 누나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학교 운동장을 빙빙 배회하거나 근처 개울가로 가서 돌맹이 쌓기 장난도 치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다 멀리서 누나가 보이면 너무나도 기뻐서 눈물이 날 정도 였다.
학교에서 집까지 8살 짜리 혼자 가기란 그리 쉽지 않은 코스였다.
그래서 대부분은 같은 동에 사는 애들끼리 모였다가 같이 걸어 오곤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화에서 처럼 노래를 부르면서 걸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단지 빨리 집에가서 수제비나 끓여 먹어야지 하는 생각 밖에 안했을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초여름의 여치, 방아깨비, 메뚜기, 사마귀 같은것을 잡으면서 놀았을 것이고, 이름모를 들꽃을 꺽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왔을 것이다.

집에 오면 난 항상 혼자였다.
엄마는 서울가고, 누나는 또래 아이들과 놀러 나간다.
나는 누나를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누나는 나 몰래 집을 빠져 나간다.

난 이방 저방 빈둥거리며 다니다가 집에 있는 만화책을 보다가 어린이 집에 있는 풍금을 치면서 놀았다.
아무도 가르쳐 준 사람 없었지만 이미 혼자 노는것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왠만한 국민학교 교과서에 있는 노래는 다 칠 줄 알았다.

그것도 심심하면 우리집 안에 있던 놀이터로 가서 미끄럼도 타고 그네도 탔다.
동네 아이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 본다.
그러면 나는 몰래 문을 열어주어 걔들을 들어오게 해서 같이 놀 곤 했다.

초여름 밤
미끄럼대 위에 등대고 누워서 별자리 관찰도 하고, 동네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그것도 심심하면 집앞의 들깨 밭에서 총싸움을 하였다.
그리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면 내 옷은 온통 들깨냄새로 범벅이 되곤 했다.

3.
그러던 중 가을 쯤에 우리집 뒤에 국민학교가 생겼다. 바로 성남제이국민학교 였다.
敎舍는 4층짜리 한동만 달랑 있고 운동장은 상당히 넓었다.
윗쪽으로는 계속해서 다른 교실 공사중이었다. 결국 그 공사는 내가 거의 4학년때 쯤해서 끝났던것 같다.
당시 가장 재수 좋았던 철거 이주민들은 바로 이 국민학교 앞의 도로에 집을 지은 사람들 이었다. 우리집은 학교 골목 바로 옆의 옆집 이었고, 학교 앞 도로에 들어선 집들은 100% 국민학교 학생들 상대로 장사를 했다.
가게도 하고 문방구도 하고..
당시 성남제2국민학교는 거의 학년별 10반 이상씩 있었고 (기억이 가물가물..) 한 학급에 학생이 거의 70명 가량 되었으니까, 그 애들에 의한 수요 창출도 엄청 났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 기억으로 약 260원 이던 공낙금 조차 제대로 못내서 복도에서 손들고 서 있어야 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에 돈 못냈다고 벌서고 집으로 돌아 왔어도 난 한번도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한적이 없었다.
대충 한번정도 "엄마 선생님이 공낙금 가져오래.." 이렇게 말 하곤 그대로 끝이었다.
그러나 누나는 달랐다. 누나는 끝까지 엄마를 괴롭혀서라도 돈을 받아갔다.

내가 착한아이라서 그랬을까? 반문해 보면 그것만은 아닌것 같았다.
"돈 안내서 학교 못 다니면 안 다니고 말지 뭐..." 라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라서 그리 그런것에 매달리지 않았던것 같다.

도데체 어린 나이에 계속해서 현실을 탈출하고 싶었던 이유와 원인은 뭘까?

난 한 때 정말로 엄마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내가 너무나 간절히 소망했던 탓일까? 엄마가 실제로 죽는 꿈도 많이 꿨다.
그때마다 꿈속에서 흐느껴 울다 일어나면 실제로 베게맡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엄마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난 그냥 자유롭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 인생을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참을수가 없다.

최근에도 난 항상 이혼을 꿈꾼다.
이유는 없다.
그냥 자유롭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뭘 해도 누구든 나에 대해서 신경 쓰는 자체가 싫은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난 지금도 아들하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산다.

고아원 시절에 몸에 배인 습관일까? 난 지금 이 나이에도 누가 조금만 참견하면 그게 그렇게 싫다. 하다못해 밥 먹으라는 와이프의 부르는 소리 조차 싫다.

실제로도 국민학교 때 부터 지금도 엄마는 절대 두 번 이상 밥 먹으라, 혹은 뭐 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어렸을 때 부터 신경질적으로 싫어했다.
내가 한번 안 먹는다고 대답 했는데도 또 한번 밥먹으라고 부르면 아에 1-2끼를 안먹어 버린다. 일종의 반항심은 아니다. 난 그저 항상 착한 아이였다.
뭐 시키면 하고..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아이였다.
공부도 학급에서 항상 1-2등 이었다.
그래서 학교건 집이건 거의 트러블이 없었다. 나에게 한 얘기 또 하지만 않는다면...

학창시절 내가 죽도록 싫어하는게 바로 단체 기합이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아이의 잘못으로 나 까지 벌받아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억울해서 운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아마 선생님은 내가 맞아서 아퍼서 운줄 알것이다.
사실 정확하게 얘기 하자면 너무 억울해서 운 것이었다.

4.
여전히 어린이집의 아이들은 즐겁게 율동을 한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도 제법 우리 교회에 많이 모인다.
걔들의 목적은 단 한가지다.
구호물자로 들어온 과자나 사탕을 타 먹기 위해서 이다.

단 돈 10원이면 라면땅 한봉지 사가지고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깨어 좋고 몰래 조금씩 꺼내먹던 동네의 코흘리개 아이들..
겨울이면 얼굴에 동상이 걸려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손등은 트기 시작한다.
요즘 TV에서나 볼 수있는 몽골초원의 얼굴 빨간 아이들 바로 그런 모습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을것 같고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죽을것만 같았던 그 시절의 아이들
그리고,
왜들 그렇게 코는 흘리고 다녔는지
국민학교 입학식때면 왼쪽 가슴에 코 닦을 수 있는 수건을 달고 다녔던 그때의 그 아이들..

지금은 다들 나처럼
그때를 추억 하겠지?


곱게 모은 두 손으로 기도하는 어린 영혼들.. 개중에는 저렇게 눈뜨고 장난치는 애도 있었다. 난 맨 오른쪽에서 두 손 꼭 모아 기도 하고 있는 착한아이 였다. 다들 잘되어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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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아주 추운 겨울
발을 동동구르며 집으로 돌아 와선
재빨리 아랫목에 펴 놓은 이불로 기어 들어가
지친 피로감에 그냥 눈이 스르르 감긴다.

어디선가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 잠이 깼을때는 이미 저녁밥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난 9시
엄마는 눈비비고 일어난 나를 보곤
소반에 밥과 김치를 차려놓고 나 숟가락 뜨기를 기다리신다.
엄마는 오늘 저녁 아침에 먹던 풀처럼 말라붙은 차가운 수제비를 숟가락으로 퍼 드셨을 게다.

밥 보단 시청에서 줄서서 배급 받아온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를 더 많이 먹었던 시절,
나의 8살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아직도 수제비 소리만 들으면 지긋지긋한데 최근엔 수제비만 파는 음식점도 생겼다고 하니 정말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수제비는 입맛을 돋우기 위한 특별식이 아니라, 쌀이 없어서 밥을 못 먹는 사람들이 배급받은 밀가루로 손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 이었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더 이상의 슬픔은 없었다. 단지 무거운 현실만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부실공사로 기록 된 와우 아파트가 내 눈 앞에서 반으로 꺽여서 무너지고 그걸 뒤로 한채 서강 판자촌 주민들은 강제 철거 이주 당해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으로 트럭에 몸을 싣고 터벅 거리며 떠나야만 했다.
그 행렬에는 8살의 나도 섞여 있었다.

강제 철거 당하기 한달전 부터 집 뒤에다 철망을 쳐 좋고 닭을 키우고 있었는데, 어짜피 차에 싣고 못 갈것이라고 하여 매일 닭을 잡아 먹었다.
거의 매일 한 마리씩은 먹은것 같다.

아마 8살에 나 처럼 매일 닭고기 한 달 이상 먹어 본 어린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어렸을 때 한 동안은 나의 자긍심을 부축이기에 충분한 아주 큰 사건 이었다.
그때 엄마가 닭 잡는 것을 하도 많이 봐서 아직까지 한번도 안 잡아 봤지만 지금이라도 내 스스로도 잡을 수 있을것만 같다.

닭의 목 아랫쪽을 발로 밟고 목을 살짝 비튼 다음 칼로 가볍게 목을 따 주면 몇 번 파닥거리다 바로 피 흘리며 쓰러진다.
마지막 생존을 위한 몇 번의 파닥거림이 전부이다.
닭은 그렇게 죽어갔지만 나는 파닥거리다 살아나고 또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세간살이를 실은 트럭은 어디론가 계속 가고 있고 나는 그 트럭 뒤에 타고 천천히 바깥 풍경을 감상하며 가고 있었다.
당시에는 트럭 뒤에 타면 걸렸는지 트럭을 천막으로 다 뒤엎어놓고 나는 그 천막안에서 숨 죽이며 있어야 했다. 그러다 심심하면 그 천막 틈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차와 막 보이기 시작한 2층 이상의 건물들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차는 말죽거리를 지났을 게다. 그리고 세곡동을 거쳐 광주군 중부면(지금의 성남시) 민둥산에 도착했다.


여기는 어렸을 적 우리집 건너편 산동네와 완전 흡사하다.



차가 어느 허허벌판에 도착하고 난 후 엄마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너 천막안에서 움직이는거 보면서 웃었어" 라고 하신다.
난민 신세가 되었지만 우리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사소한 일에 낄낄대면 웃었다. 아마 그 나이에서도 엄마와 같이 있고 아주 작은 일에도 가족이 함께 낄낄거릴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이미 작은 행복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난 어렸을 때 부터 애 어른 이라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많이 들었는데, 그것은 삶의 굴곡이 많았던 나로서는 당연히 취해야할 방어본능에 따른 것 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내 아들은 너무 빨리 커버리지 말길 지금 이 시간 바란다.)

그야말로 더도 덜도 아닌 산을 밤송이 벗겨 놓은듯 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그저 구획정리를 하여 20평 단위로 박아놓은 말뚝만 있다.
우리는 군용 인듯한 초록색 천막을 치고 생활을 시작 하였다.
그야말로 그 민둥산에는 곳곳에 천막이 늘어 나면서 그야말로 거지 소굴이나 다를바 없었다.

한편으로는 천막옆의 불하된 땅에서는 연일 집짓는 소리가 한창 이었다.
정부에서 땅은 꽁짜로 20평씩 준 것 같았다. 그러나 판잣집에 살던 철거민들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 1년이 지나도 천막에서 그대로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엄마가 누구에게 돈을 꿔서(대략 20만원 정도로 기억된다) 집을 빨리 지었다.
그리고 그 곳에 교회를 세우고 유아를 위한 어린이집을 꽁짜로 개원 했다.


아직도 오려 가지고 있는 당시 엄마에 관한 신문 기사..


아직도 갖고 있는 당시 신문 스크랩에는 "철거민 촌에서 평소에 아이들이 부모 전부 일하러 간 사이에 방치되어 있는것을 눈여겨 본 xxx여사는 부랑아들을 위해...... 개원 했다" 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개원 한 건지 신학대학을 나왔으니까 교회를 개척하려고 개원 한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리집은 남들보다 5~10평 정도의 땅을 더 사용했던것 같다.
그곳에 미끄럼틀, 시소, 그네, 뺑뺑이등을 설치해두고 교회 나오는 어린이와 당시 나 보다도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생활했다.

결국 그 집은 우리집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집의 3분의 2를 커다란 공간으로 사용하고 그 뒤쪽으로 골방 같은것 두개를 마련해서 우리는 거기서 생활을 했다.
나는 나중에는 다락방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게다가 갈 곳 없는것은 어린애들만이 아니었다. 그 어린애들을 봐주는 보모들도 갈곳이 없는 사람들이라 우리집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방 한쪽에는 외할아버지와 내가, 건너편 방에는 엄마, 누나 그리고 보모 2명 이런식으로 항상 지냈던것 같다. 난 어려서도 엄마랑 제대로 자 본 기억이 없는것 같다.


맨앞에 바지가 헐렁거려 히프의 골이 보이는 애가 바로 나다. 산토끼를 부르고 있는 중 같음.


엄마는 어린이집을 운영하려고 이리저리 도움의 손길을 구하러 다니셨다. 남들보다 배급 밀가루도 잘 타오시고, 가끔 유통기한과는 상관없는 지금의 스니커즈 초코렛바 등도 한박스씩 가져오시고, 가끔 만화책도 200권 300권씩 가져 오셨다.
그리고 시계랑 풍금이랑 전부 "차지철 기증" 이라고 써 있는것으로 보아 아마 박정희 죽을때 같이 총맞아 죽은 차지철 이라는 사람이 정치적 공세 비슷하게 선물을 준 모양이다.
그러나 엄마는 아이러니 하게도 10월유신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 하곤 하셨다.

누나랑 엄마랑 셋이 모여서 밀가루 반죽을 한다.
나도 나 나름대로 열심히 반죽하여 별 모양도 만들고, 달 모양도 만든다. 그리고 내가 만든것은 절대 남 못 먹게 한다. 하긴 드러운 손으로 코 닦으며 만든 수제비를 줘도 안먹었겠지만..
당시 유일한 재미는 그저 오손도손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얘기하면서 수제비 만드는것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수제비 라는게 아주 웃겨서 먹다 남은게 식으면 풀처럼 퍼진다. 어렸을때는 그것도 아까워서 떡 처럼 된 수제비를 한 숟가락 퍼서 그릇에 담아 김치 얹어서 그냥 꾸역꾸역 처 먹는다.

이건 음식을 먹는게 아니라 살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수제비 마저 배불리 먹어본 기억이 없다.

난 보릿고개 세대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작고 작은 부랑아 깡패들의 신 도시에서 그렇게 8살에 인생을 배워가고 있었다.

나의 8살 사진은 역시 단 한 장도 없다. 그러나 이전 보다는 훨씬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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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1.

서강의 오염된 하수도에는 부글부글 끓는 물이 오물과 함께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우마차 두 대 정도 비껴갈 만한 다리 위에는 소똥 만 질펀히 널 부러져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에 이리저리 채인다.

동대문을 떠난 전차는 이곳 서강을 지나 마포 종점으로 들어간다.
김두환 시절 우미관 골목에서 좌회전 하면 나오는 종로 위를 지나다녔던 그 전차를 6-7살의 나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전속력으로 뛰어서 잡아 타곤 했다.
마포 종점까지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가서는 돌아 올 때는 전찻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오곤 했다.

아마 그게 그 시절 가장 재미있었던 일과였을 게다.
당시의 부모들은 여섯 살 먹은 당신 자식들이 위험하게 달리는 전차를 잡아타는 놀이를 하는데도 전혀 손쓰지 못할 만큼 다들 어려웠었다.

아이들은 그저 부모님이 남겨주신 아침밥까지 실컷 먹고 하루 종일 집 밖에 나가서 놀다가, 아랫목에 묻어놓은 점심 챙겨먹고 다시 나가서 놀다 해가 뉘엿뉘엿 해질 무렵 집으로 기어들어오는 게 하루의 일과였다.

그것도 심심하면 집 앞에 아파트를 지으려고 잔뜩 쌓아둔 타이루(타일)따먹기를 하면서 놀았다. 아무것도 없던 어린 시절에 본 타일은 그야말로 어린애들의 최고의 놀이감 이었다. 형형색색의 타일을 모아서 블록 쌓기 놀이도 하고 땅을 파서 집을 짓듯이 쌓아 올리기 놀이도 하였다.


2.

마포나루의 배 근처에서 20대의 젊은 엄마는 먹고 살기 위해 고등어 임연수 등의 생선을 떼다가 동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파셨다.


집안에 하인을 둘 정도로 부유했던 집이 빛 바랜 흑백 사진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가 내 나이 1 살 무렵 돌아가신 다음, 깡패 청산을 목표로 군바리들이 날 뛰던 시절 당시 깡패였던 당신의 오빠 때문에 가산을 거덜나듯 다 빼앗기고 죽지 못해 살아가고 계셨을 것이다.


말이 좋아 건달이지 기업체의 사장들에게 협박하여 삥땅 뜯고, 건설 입찰 조작 하고, 행동대원들 몰고 다니며 선거 판 아작 내던 큰 외삼촌은 내 어린 시절의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삼촌은 내가 대학 졸업할 때 쯤에도 여전히 내 앞에서 “너 어디 취직 하고 싶어? 삼성? 내가 이병철이 한테 전화 넣어 줄까?” 이런 식으로 대단한 유세를 떨고 계셨다.


선 잠이 들 무렵 큰삼촌은 6.25때 신던 워커발로 쿵쿵거리며 우리 집에 쳐 들어와 돈 달라고 소란 피우다가 집안의 귀중품을 강제로 빼앗아 갔고, 심지어는 당시 인쇄업을 하고 계시던 엄마의 작업실로 쳐 들어가서 인쇄 기계를 모조리 팔아 먹는 등 그 행패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결국은 삼촌 때문에 전 재산을 잃고 마포나루에 가서 생선을 떼어다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나와 누나는 엄마 따라 마포나루 까지 갔다가 그만 돌아가라는 손짓에 울면서 뒤 돌아 섰다.
어렸을 때는 왜 그리 엄마가 보고 싶은지, 심지어는 엄마가 옆에 앉아 있어도 보고 싶었던것 같다.
코 질질 흘리며 누나와 나는 전찻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4살에서 5살로 넘어갈때 쯤 인것 같다. 유일한 사진이다. 근데 불현듯 의문이 떠오른다. 왜 엄마는 갑자기 이런 사진을 찍으려고 하셨던 걸까? 혹시 이 사진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고 찍은 것은 아니겠지....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족 셋이 영원히 깨어나지 못 할 뻔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생활고에 시달려 엄마는 연탄불을 방안에 피워놓고 자살을 시도 하셨던 것이다.
5살 어린 꼬마에게 9살 어린 소녀에게, 그리고 20대의 젊은 엄마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닥칠 무렵

아주 먼 친척인 이모가 그 날 새벽 우리 집에 들이 닥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슬픈 현실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갔을 것이다.
얼마나 살기 어려웠으면 20대의 젊은 나이에 자살을 선택 하셨을까?
평생의 혹 같은 자식 둘 때문에 젊은 어머니는 운신의 폭이 좁았을 것이다.


같은 날 밤 신앙심이 깊으신 이모는 새벽에 기도하던 중 “동쪽에 있는 과부를 구하라” 라는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워낙 우리 집과는 내왕이 없던 먼 친척이라 동쪽에 있는 과부가 누군지 계속 궁금하게 여기다가 그 새벽에 우리 집까지 뛰어 오신 것이다.

우리는 병원으로 옮겨져 죽을 고비를 넘겼을 것이다. 이 때가 바로 나 다섯 살 때의 일 이었다.


나는 참 희한하게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한다. 당시 살던 동네 등 아주 소소한 것도 다 기억난다.

이런 것은 기억에서 지워져도 좋으련만 당시를 상상할수록 더욱더 또렸해진다.

종교의 힘에 감동한 엄마는 아주 이상한 결심을 하신다. 신학대학을 다니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5살로 향할 무렵의 누나와 나, 나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이사진과 위의 사진이 10살 이전까지의 유일한 사진이다. 옷 차림에서 가난이 묻어 나온다. 오른손에 과자를 꽉 쥐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현재의 내 아들 모습니다. 그 자식 참..


어린 나와 누나는 그 덕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천안의 신아원 이란 곳으로 보내졌다.



(아! 여기구나 6-70년대 정도의 천안 삼거리 사진을 인터넷에서 어렵게 구했다)

3.

신작로의 아스팔트가 아직 굳지 않아, 고아원의 아이들은 아스팔트 원료인 검정 고무 같은 것을 껌 처럼 씹고 다녔다. 나도 그곳의 형들을 따라 열심히 아스팔트를 주어 먹는다. 화학물질 특유의 향이 입에 감돌면 그것도 하나의 맛으로 뇌는 인식 하나보다.


원래는 과자나 사탕이 없어서 먹었을 테지만 나중엔 습관이 되서 고아원 앞의 신작로가 다 말라 버리면 좀 더 먼 여정을 해서라도 공사하는 곳까지 가서 아스팔트를 씹었다.


고아원의 생활은 참으로 단조롭다. 여름이면 수박 먹고, 가을이면 도토리나 밤을 따러 다니고, 겨울이면 미국 원조로 들어온 옥수수가루로 만든 떡을 해 먹는다.

그리고 가끔 우유가루 같은 것을 먹어 보기도 한다. 그런데 원래는 가루였는지 몰라도 상당히 뭉쳐져서 이미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것을 망치 등으로 잘라서 아이들에게 한 입씩 나눠 주곤 했다.


당시 나는 상당히 귀여움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나는 유독 보모들이 챙겨주기도 하고 상급반에 있던 누나가 가끔 먹을 것을 가져와 주기도 했다.


무서운 현실이 다가올 때면 나는 벽장에 숨 곤 했다.

일년에 몇 번씩 외국 사람들이 선물을 잔뜩 가지고 나타나서 우리들과 즐겁게 놀아 주기도 하고 원장과 무슨 상담을 하기도 하였는데, 가끔씩 같이 놀던 친구들이 없어진 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 마수가 이미 나에게 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신아원은 원래는 고아들이 있는 곳인데, 가끔 나같이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맡아서 기르고 있는 기관 이었다. 누나는 나와 네 살 차이가 났으니까 아마 거기 부근의 국민학교를 다녔던 것 같다.


아무튼 외국인들은 특히 나에게 잘 해주었다. 최신형 덤프트럭 자동차도 나를 따로 주고 항상 그 다음번을 기약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렴풋이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고, 그들이 돌아간 다음 그들이 주고 간 장난감과 차들을 산속에 버려버렸다.
그러곤 낮에 가끔씩 버린 자동차를 다시 보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가곤 했다.
슬픈 6살 꼬마의 눈에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안떨어지는 발길을 돌려 숙사로 내려왔을 것이다.
당시 내가 자동차 종류를 워낙 좋아 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나를 찍은 그 외국인은 정기적으로 차 종류를 선물 하곤 한것 같다.


가끔 건달 삼촌이 신아원을 찾아와서 “이 개 같은 년 지 자식을 이런데다 놔두고.. 이런 식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나에게는 어린이들이 만져볼 수 없는 큰 돈과 카스테라 그리고 당원 3곽 (하얀 사카린 덩어리) 등을 사주고 가셨다.
어린 고사리 손으로 당원의 곽을 열어 알약같이 생긴 당원을 입에 넣고 음미한다.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며 6살 짜리 꼬마의 입가엔 환한 웃음이 솟는다.
너무 달아서 차라리 쓴맛이 난다.
마지막 곽의 당원을 거진 다 먹을 무렵이면 당원에 대한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하나하나 정성껏 빨아 먹는다.
그리고 아쉬움에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돈은 있지만 당원을 사려면 신작로를 따라 10리 이상을 더 걸어가야 한다. 아니 그보다 더 멀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단 한번도 내 돈으로 당원을 사 먹은 적이 없었다.

삼촌이 주고 간 그 귀한 당원은 주머니 안 쪽 깊숙이 숨기고 몰래 하나씩 꺼내 먹는다. 그 때의 그 맛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삼촌이 가고 난 후 나는  과거 무섭던 삼촌에 대해서 점점 호감을 가지는 쪽으로 변모해 갔다.


근데 참 이상하지?
내가 신아원에 있던 2년 동안 엄마가 나를 찾아 왔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 당연히 찾아 왔겠지만 이상하게 그런 기억은 하나도 없다.
엄마를 만나 너무 울어서 기억이 지워진 걸까? 아니면 정말 한 번도 안 찾아 온걸까?
아니면 정말로 마음 약해질까봐 찾아 왔다가 나 뛰어노는 모습만 보시고 가셨는지도 모른다.
누나만 살짝 만나고 서울로 올라 가셨을 수도 있다.


어느 해 초겨울 나를 좋아하던 외국인은 원장과 모종의 쇼부를 본 모양이다.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한 모양 이었다. 사실 그 해 여름부터 나는 그들이 오면 산 속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었다. 항상 어떤 보모 선생님이 나를 산으로 올려 보냈다.
왜냐하면 외국인들이 와서 맘에 드는 꼬마애들을 아무나 마음대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보호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엽다는 이유로 그들의 눈에 많이 띄었나 보다.
그래서 그들이 오늘날 이면 보모는 아에 나를 산 속으로 올려 보냈던 것이었다.
그들의 원조로 신아원 살림을 꾸리는 원장은 "저 애는 부모가 있으니 안됀다" 라는 말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었나 보다.


누나와 같이 산으로 올라간 6살의 나는 이름 모를 꽃도 따고, 가을이면 도토리도 줍고 하면서 하루 종일을 소비해야만 했다.

누나가 먼저 내려가서 손님들 가셨나 망 본 다음에야 나는 내려갈 수 있었다.


초겨울 엄마가 데려가기로 약속 한 날짜가 되 갈 무렵 그 외국인들은 다시 나를 찾아 왔고 나는 보모 선생님 방의 벽장 속에 숨어 있었다. 원장과 외국인 간에 모종의 쇼부가 이루어 졌다보다.
사실 당시에는 돈 조금 받고 일부러 자식을 외국인에게 파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최근 외국에서 한국을 찾아 온 당시 입양아들은 실제로 부모가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보호자의 양육이 어려워서 신아원에 보내진 나같은 꼬마아이 외국 보내는것은 아주 쉬운일이 었을 게다.
나를 숨겨중 보모 선생님은 급박하게 외숙모에게 연락해서 엄마에게 연락이 닿았는지 우리는 그날 새벽 마치 영화처럼 그 신아원을 도망쳐 나왔다.


난 항상 이 때의 일만 생각하면 울음이 복 받친다. 그러나 나보다 더 복받칠 엄마를 생각해서 내 인생에서 단 한번도 엄마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아마 엄마는 하도 어릴 적의 일이라 내가 잊고 있으리라고 생각 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4.

서울로 돌아온 7살의 나는 이미 상당히 삐뚤어져 있었다. 신아원에서는 심지어 여자애들과 섹스하는 흉내까지 냈었고, 이미 입은 거칠 대로 거칠어져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밥을 먹다가 난 엄마에게 “씨발년” 이라고 말을 하고 집을 나와 버렸다. 누나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나를 쫓아왔지만 나는 그 서강의 똥물이 흐르는 다리 밑으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머리 속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일단 당시에 가장 유행하던 구두닦이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는 돈 벌면 장사도 해서 큰 돈을 벌면 보란 듯이 다시 나타나고 싶었다.
한편으론 신아원에 있을 때 그 양부모를 따라 미국이든 어디든 갈걸 하는 생각에 다시 천안으로 혼자 내려갈 생각도 했었다.


7살 짜리 어린아이의 머리 속으로 이러한 계산을 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지만, 당시에는 어린아이가 구두닦이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흔한 풍경 이었다.

일부러 잡히기를 바랬을까? 하루밤을 세우고 그 다음날 날 찾으러 온 누나의 손에 끌려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엄마는 펑펑 우셨을 것이다.
나는 그 우는 모습 조차 외면 해버릴 정도의 차가운 아이였다.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며 평생 눈물로 사셨을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 하다.


그러나 난 마음 한 켠에 항상 생각해 왔다.

내 자신이 받은 어린 시절의 엄청난 스트레스는 내가 계획한 게 아니었다.

어린 나는 아무 계획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엄마와 주위 사람들이 나의 환경을 결정지은 것이었다. 오로지 그들의 성공과 이익을 위해서 어린 나를 희생시킨 것이다.


나의 7살 시절은 전차 잡아타기 놀이나 하면서, 타이루 따먹기 놀이나 하면서 그렇게 흘러갔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다.

그러나 아무런 후회도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그래도 자꾸 눈물이 나는 이유는 왜 일까?


엄마 얼굴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오고

누나 얼굴을 떠올려도 눈물이 나오고

아들 얼굴을 떠올려도 눈물이 나오고

내 스스로를 떠올려도 가슴이 미어진다.


한때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통곡도 해 봤다.

한때는 내 자신을 속이며 어린 시절을 낭만으로 기억하기로 마음 먹은 적도 있었다.


내 나이 7살

마포 나룻가에서 조개 잡다가 현기증으로 쓰러진다.

기억이 몽롱하다.

그래! 아마 그 강가에서의 허상이 지금의 기억으로 남은 걸 거야.

어린 놈이 너무 과하게 상상한 걸 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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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자원이는 가끔 심각하다.
4살짜리 아이가 생각하는게 한계가 있을텐데 가끔 멍하니 자신만의 상상에 잠기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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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걸까?

깨물어 주고 싶다는 말..
바로 이럴 때 쓰는말은 아닐까?
너무 이뻐서 어쩔줄을 모르겠다.
천진한 얼굴에 수줍음이 살짝 배어나오면서 나로 하여금 한없이 미소를 짓게 만든다.
애를 너무 늦게 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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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항상 수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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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불기도 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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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 하기도 하다.


수확이 끝난 충주의 어느 논에서 즐겁게 놀고 있다.
2006년 가을은 자원이의 수줍은 미소로 이렇게 흘러 간다.
평생에 한번 있는 2006년 어린날의 가을 풍경 소중히 간직하고 항상 밝고 착한 아이로 자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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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항상 수줍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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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벤 논에서 즐겁게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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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가을의 막바지에 문경새재를 다녀왔다. 이렇게 또 한 계절이 가는구나.
좀 있으면 눈이 오고 들뜬 연말이 지나면 또 속절없이 한 살 더 먹겠지?
자원이는 수줍음이 많은 아이다
이 가을과 수줍음... 조금은 어울리는 단어 조합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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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들을 배경으로 한 컷


어린아이들이 다 그러하듯이 자원이도 한없이 까분다.
저런것을 어디서 배워 왔는지는 몰라고 사랑의 총알을 날린다.
사진찍을때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항상 색다른 표정을 연출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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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총알 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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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 발사 후



그러나 역시 자원이는 수줍음이 많은 아이다.
그리고 떼도 안쓰고 작은일에 행복해 할 줄 아는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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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음어 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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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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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전에 흐뭇하게 독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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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우를 보면서 꽤나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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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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