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vs Truth'에 해당되는 글 33건

  1. 2013.10.02 신미대사 한글창제설
  2. 2012.09.06 檄黃巢書
  3. 2012.03.29 삼성기 상..
  4. 2012.02.28 왕릉보다 화려 '김유신 장군묘' 실제 주인은?
  5. 2011.02.13 고대 한국과 일본 (1)
  6. 2010.10.13 역사 읽어볼 꺼리 스크랩 (1)
  7. 2009.07.14 고대인의 비행물체
  8. 2007.05.04 ⑥ 두 마리의 물고기, 그 의미를 찾아 헤맨 40년
  9. 2007.05.04 ⑤ 신라王들의 고민 (1)
  10. 2007.05.04 ④ 韓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 馬ㆍ角杯ㆍ麻立干
  11. 2007.05.04 ③ 신라·가야·倭 지배층의 고향은 중국 서북방 알타이 지역
  12. 2007.05.04 ② 바이칼 호숫가의 자작나무숲, 그리고 新羅 金氏의 뿌리
  13. 2007.05.04 ① 그리스-알타이-신라를 이어 준 汗血馬의 질주
  14. 2006.10.09 한단고기에 대한 견해 (2)
  15. 2006.08.18 초고대 문명은 존재 하는가? -2 (1)
  16. 2006.08.18 초고대 문명은 존재 하는가? - 1 (2)
  17. 2006.06.28 도올 김용옥, 학계 역사인식 정면비판 (2004. 1 한겨레 인터뷰)
  18. 2006.05.30 한국사 60가지 미스테리에 대한 반박글 (3)
  19. 2006.05.15 한단고기 위서 논란의 근거 및 반박
  20. 2006.05.15 고대문자 : 배달국(倍達國)과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문자(文字)
  21. 2006.03.06 신라--그들은 어디서 왔는가?
  22. 2006.02.03 한민족사에 등장하는 '여와'는 유대족의 '여호와'일까? (5)
  23. 2005.11.08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 (4)
  24. 2005.11.02 375년, 백제 땅 한반도에 신라가 침공했다
  25. 2005.10.30 중국만주에 있는 우리 민족이 건설한 피라미드
  26. 2005.10.28 유구(대만)은 백제의 속국?
  27. 2005.10.21 고조선의 개시 연대
  28. 2005.10.21 고대 이집트 문자 해독방법 (2)
  29. 2005.10.20 삼국의 중국대륙 존재설
  30. 2005.10.18 일본인도 모르는 일본 고대사 (2)
충청북도 영동의 영산김씨 가문에서 부친 김훈과 모친 여흥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 입산 전에 부친께서 진사벼슬에 등과한 후 태종 때에 영의정까지 지낼 수 있는 귀족가문 출신이기에 속가에서 사서삼경을 모두 섭렵하고 출가 입산하여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범서장경이 중국에 들어와 여러 고승들에 의하여 번역된 경전들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서로 된 원전을 보기 위하여 범어 공부를 하였다.


1.한글창제의 주역으로 발탁된 신미대사
조선조 제4대 세종대왕은 중국의 한문 글이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문맹이 많아 배우기 쉬운 우리글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아침조회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우리도 우리글을 한번 만들어 보자. 우리글을 만들데 집현전을 확장하고 장안에도 우수한 학자들이 많지만 이번엔 전국을 총망라하여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여 집현전에 초빙하여 가장 배우기 쉽고 이해하기 쉬워 누구나 속히 터득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중 승려로서 유일하게 충청북도 속리산 복천암에 주석하고 있는 신미대사가 세종대왕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게 되었다.
1443년부터 한글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하여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논의를 한끝에 신미대사는 모음, 자음, 소리글을 범서(梵書)에서 착안하여 한글을 마무리 짓고 시험할 때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인하여 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에 토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시험을 끝내고 우리글이 완성되었다고 세종대왕께 보고하니 임금님은 너무 기뻐하며 1446년 9월 상달에 우리글을 훈민정음이라 공포하였고 우리글이 만들어졌으니 우리글로 노래도 한번 지어 보라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등의 노래를 지었다. 그 후 세종대왕은 신미대사의 수고를 치하하고 보답으로 주석하고 있는 속리산 복천암에 주불 아미타불과 좌우보처관음세지 양대보살을 복각 조성 시주하시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시호를 선교도총섭밀전정법비지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 지어 문종에게 위임하여 문종이 부왕을 대신하여 신미대사에게 사호(賜號) 하였다.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세상에 공포한 후 집현전에 같이 참석하였던 성삼문, 정인지 같은 유생들이 말하기를 한글에 대하여 신미대사의 공은 인정을 하되 최초 발기(發起)를 세종대왕이 하셨으니 그 공을 세종대왕께 돌리자하여 신미대사가 쾌히 승낙하니 그 후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지은 것으로 되었고 모든 문헌 등에 신미대사가 집현전에 참석함까지도 밝히지 않고 공은 왕께로 돌리기로 하였기에 거기에 대하여는 모든 문헌에도 신미대사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으나 유일하게 영산김씨 족보엔 세종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되어 있다.
유생들은 신미대사가 승려의 신분으로 한글을 주도한데 대하여 과소평가하기 시작하여 언문인 부녀자들이 뒷방에 앉아서 친정에 하소연하는 편지나 써서 보내는 글이니 통시 글(쉽다는 말)이니 하며 이것이 무슨 글이냐 장부들이 배울 글이 못 된다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미대사는 세종대왕의 뜻에 따라 누구든지 배우기 쉽게 만든 것뿐이기에 유생들의 그러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아다. 유생들은 유서(儒書)에만 능했고 신미대사는 불경, 유서, 범서 등 모두에 능하였으므로 범서에서 착안한 한글 논의에 대하여 유생들은 일체 반론을 못했고 시종일관 신미대사의 뜻한 바대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집현전에서 4년간이나 학자들이 머무를 때 학자들을 보살피는 한글도감으로 세종대왕은 수양대군을 명하였다.


2 신미대사 창제 설 근거
속리산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500m 정도 발걸음을 옮기면 신미(信眉)대사 부도탑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 1416호로, 공 모양의 탑신이 부드러운 곡선과 함께 안정감이 있다. 이 부도탑의 주인공인 신미대사(1403∼1486ㆍ속세고향 충북 영동)가 근래 들어 세인들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다. 세종의 왕사였던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은 종종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올 상반기 한국세종한림원 총재 강상원 박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 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책을 내면서 이 설이 다시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지금까지의 설은
한글 창제와 관련,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이 명령을 했고,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이의 실무 작업을 맡았다.’ 정도로 알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 입 발음기관을 본떴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국어학자들은 ‘세종실록 계해년 그믐조’에 나타나는 ‘是月上親製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문장을 들어 이에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다. 직역하면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古篆을 모방하였다’ 정도가 된다.
이중 핵심어인 ‘倣古篆’은 ‘古 篆字를 모방했다’는 뜻으로, 정인지가 지은 ‘훈민정음 해례’에도 이 문장이 나오고 있다. (象形而倣古篆ㆍ‘古 篆字를 모방해 글자상형을 삼았다’)
이 문장 하나 때문에 ‘발음기관을 본떴다’라는 설은 전통한옥 창문도형, 단군시대 가림토문자, 일본 신대문자, 범어(산스크리트어), 몽고어, 고려 각필 모방설 등의 도전을 받고 있다.
◆ 어느 설이 가장 유력한가?
발음기관설 외에 현재 가장 유력시되는 설은 이른바 범자(梵字ㆍ산스크리트어) 모방설이다.
조선초기 유학자인 성현(1439~1504)은 그의 저서 ‘용재총화’에서 ‘基字體依梵字爲之’라고 밝히고 있다. 직역하면 ‘그 글 자체는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정도로, ‘용재총화’는 훈민정음 반포 30년후에 쓰여진 책이다.
이수광도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諺書)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我國諺書字樣全倣梵字)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상당수 학자들은 앞서 언급된 ‘篆字’를 ‘梵字’의 한자식 표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세종대왕이 범자를 모방해 한글을 창제했을 경우 그 중간에 범자를 능통하게 사용하는 스님이 존재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부분이 규명되지 않았다. 이의 규명작업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 현 복천암 선원장 월성(법랍 50)스님이다.
◆ 최소 7개 증거가 있다.
30년 넘게 이 부분을 연구하고 있는 월성스님은 “조선 초기 속리산 복천암에 거주하던 신미대사가 세종을 부름을 받아 최소 7년간 복천암∼한양을 오가며 한글 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단언했다.
월성스님은 그 근거로 ▶신미대사가 범어에 능통했던 점 ▶유학 성향이 강했던 세종이 이례적으로 복천암에 불상을 조성해 주고 시주를 한 점 ▶세종이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린 점 등을 거론했다.
이밖에 ▶수양대군 세조가 복천암을 손수 찾았던 점 ▶유학자들이 당시는 물론 세종이 죽자마자 부녀자 글, 통시 글(화장실 글) 등의 말로 훈민정음을 비난하고 험담한 점 ▶신미대사의 본관인 영산김씨 족보에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로 언급된 점 ▶한글 창제 후 실험적으로 지은 곡과 문장이 유교가 아닌 불교내용을 담고 있는 점 등을 거론했다.
◆ 구체적인 근거는 있나
월성스님은 첫 번째에 대해 유학자 김수온(1410∼1481)이 지은 ‘복천보장’을 인용, “신미대사는 불경에 통달했으나 한자에 오역을 많음을 느끼고 이른바 원어, 즉 범어를 공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이는 지난 1975년 서울 인사동에서 발견된 신미대사 ‘범어진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밝혔다.
‘慧覺尊者’(혜각존자)라는 법호에 대해서는 “세종이 대사에게 극존칭 법호를 내린 것은 신미대사가 유일하다”며 “그 앞에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뜻인 ‘祐國利世 글귀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한글 창제와 관련, 세종이 아닌 수양대군 세조가 등장하는 것은 다소 이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월성스님은 세조의 복천암 방문도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복천보장’을 다시 인용, “세종은 유생들의 극심한 반대를 예상하고 신미대사,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5인에게만 한글창제 작업을 극비리에 명령한다.”며 “이후 세조는 왕위찬탈에 대한 흉금을 말하기 위해 옛정이 있는 신미대사를 찾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는 온양과 초정에서의 목욕을 핑계 삼았지만 속리산 복천암 방문이 실제 목적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때 생긴 것이 이른바 ‘정이품송 전설’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월성스님은 이밖에 “조선은 유교국가라 한글창제 실험용 책도 당연히 유교적인 내용이 됐어야 했다.”며 “그러나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은 불교적인 내용을 담은 곡과 문장으로, 이것 역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월성스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창제에 신미대사 이름이 빠져있는 것에 대해 “세종 사후 유생들은 신미대사와 불교에 관련된 문구를 모조리 삭제했음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며 “다만 영산김씨 족보에 ‘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의 문구가 나온다.”고 밝혔다. 직역하면 ‘守省(신미대사 속명)은 집현원 학사를 지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정도가 된다.


3. 기타 한글기원설
한글 창제와 관련, 현재 정설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입 발음기관을 본떴다’라는 설이다. 그러나 세종실록 등 여러 사료에 ‘倣古篆’(옛 전자를 모방했다)이라는 표현이 보이면서 무려 20여개의 또 다른 기원설이 등장해 있다.
이중 가장 논란을 빚고 있는 설이 일본 신대문자, 고조선 가림토 문자 모방설, 고려 각필부호 유래설이다. 일본학계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신대(神代) 문자는 그 모양이 한글과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자는 일본 사찰을 중심으로 조선통신사 왕래이후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문자 열등의식을 느낀 일본 일부 계층이 한글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수용되지 않고 있다.
고조선 가림토는 기서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문자로, 자ㆍ모음 38자가 한글 자ㆍ모음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일제시대 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누군가 위작한 책으로 보고 있다.
고려 각필부호 유래 설은 지난 2001년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처음 제기했다. 당시 이 교수는 “고려불경을 조사한 결과, 무려 17개의 각필이 훈민정음 모양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설은 ▶고려~조선 초기 승려들이 불경한자를 쉽게 읽기 위해 각필을 사용했고 ▶그 각필은 범자(梵字)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추론을 낳고 있다. 이 설은 훈민정음 범자 모방설과 선이 닿아 있거나 근친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4. 기타 관련 칼럼

1) “훈민정음 창제 일등공신은 신미대사”
훈민정음과 신미대사’주제 특강 강 상 원 박사
“우리말의 뿌리는 실담(범어의 음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도 범어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 일등 공신은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신미대사인 것입니다.”
지난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속리산 법주사 강원에서 개최한 특별강연회에서 한국세종한림원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은 집현전 학자도 세종대왕도 아닌 신미대사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 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주제로 강연한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 해제본에 나와 있는 초기 표기법을 검토하면 실담에서 유래한 흔적이 매우 많다”며 “이는 훈민정음이 실담을 기초로 제작됐고 따라서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에 의해 훈민정음이 제작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박사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범어의 음가인 실담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훈민정음도 이런 범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 했던 사람은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바로 집현전 학자였던 신미대사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해 신미대사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강 박사는 “당시 숭유억불이라는 강력한 통치이념을 추진했던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고의적으로 누락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강 박사는 “영산 김 씨의 족보와, 『복천보장』에 등장하는 기록에 의하면 신미대사는 한학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범어에도 능통한 학승으로 집현전에 초빙돼 한글 창제에 임했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나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 박사가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한 것은 10여년 전부터다. 1994년 동국대에서 ‘원효의 중도사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경전을 영문화하는 작업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존 영문 경전 곳곳에서 오류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범어본 경전을 직접 번역해야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범어를 공부하게 됐다. 범어 사전을 통독한 것도 15회 이상. 범어에 대한 연구가 지속될수록 그는 한글과 범어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동국정운』에 나타난 한글 고어 표기법이 실담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도 알아냈다. 이를 근거로 그는 훈민정음이 실담에서 나왔고 따라서 범어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강 박사는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범어 관련설 이외에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이후 『능엄경』,『원각경』등 총 28종의 불교경전이 제일 먼저 한글로 번역했다는 점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신미대사와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권오영 기자

2) 의문투성이 한글기원…신미대사가 열쇠
성현-이수광-이능화의 梵字 기원설과 부합
□ 의문투성이 한글 기원 --- 신미대사가 열쇠
<사진설명>훈민정음 보급의 일등공신 신미대사는 범자(梵字)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했다.(좌) 그러나 유학자들의 질시로 그가 번역한 경전마저 나중에는 삭제되는 비운을 맞는다. 초판본(中). 초판본에 들어있던 신미대사 법호가 재판본에는 빠져있다.
지난 2001년 12월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발표한 "훈민정음 각필부호 유래설"은 신미대사가 한글창제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각필’은 고대 문헌에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한자 옆에 점과 선, 또는 글자를 새겨 넣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는 양식으로 이 교수가 고려시대의 불교경전을 조사해본 결과 각필 중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과 무려 17개가 일치하고, 자음과 모음의 체계까지도 대단히 유사함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러한 학설은 세종대왕이 수양대군 등 아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불교경전에 정통한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토록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사료를 통해 밝히고 있듯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대왕이 한글이 창제되기 4년 전부터는 정사를 돌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고, 이로 인해 가장 중요한 일과의 하나인 경연(經筵)조차 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신미대사는 당시의 대표적인 학승으로 범어를 비롯한 인도어와 티베트에도 정통했으며, 불교경전에도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신미대사가 세조 2년(1456) 범어계통의 인도 문자와 티베트어로 쓴 친필 진언과 부적류들을 분석한 허일범 진각대 교수는 "상당히 많은 분량임에도 오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한글창제와 관련해 수백년 동안 ‘범자(梵字) 기원설’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조선전기 학자인 성현(1439~1504)은 "훈민정음은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으며, 이수광(1563~1628)도 "우리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 모양을 본떴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언어학자인 황윤석(1729~1791)은 "우리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범자에서 근본하였으며 범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이능화(186 9~1943)도 한글글자법이 범자에 근원한 것이라며 비슷한 용례까지 들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미국인 학자 헐버트(1863~1949) 등 외국인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도에서 범어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봉태 목사도 지난 2000년 말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을 통해 한글의 기원이 범어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학설들 또한 여전히 많은 연구와 검증의 절차를 남겨 놓고 있음에도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적극 참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범자기원설은 한글창제 당사자들이 불교경전 및 그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고 있었음을 의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자연스럽게 당시 왕과의 교분이 깊고 언해본 간행을 비롯해 경전언어에 깊은 조예가 있는 신미대사를 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실록에서는 왜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일까. 동국대 황인규 박사는 "당시 억불숭유의 정치적 상황에서 승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더욱 거셌을 것"이라며 "이는 세종대왕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자 대의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교의 이데올로기만을 숭상했던 조선시대가 초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난 94년 작고한 이숭녕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미대사만치 유명한 고승이 후세에 남긴 법어나 시, 글 한편 없이 너무나 적막한 생애를 스스로 걸어갔다"며 "학덕이 높고 국어학사상 특기할 인물이었지만 사회의 냉랭함에서 쓸쓸히 입적한 가여운 인재"라고 애석해했다.
지난 550여 년간 이념의 벽으로 인해 스스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고승 혜각존자 신미대사. 이제 그의 위상과 업적을 올곧게 복원하고 선양해야 하는 것은 이제 후학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3)“한글창제 주역은 신미대사”
한글날 특집‘훈민정음과 불교’
梵字-티베트어에 능통…불경 간행 주도
세종이‘존자’칭호…‘집현전 참여’ 기록도
억불 정책으로 공헌 가려져…재조명 있어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손꼽히는 한글.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분명하지만 한글의 기원이나 문자를 만드는데 기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의문점이 남아있다.
본지가 한글날 558돌을 기념한 특별취재에 따르면 훈민정음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혜각존자 신미(信眉, 1405?~1480?)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을 뿐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특히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2300여 쪽은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를 훈민정음으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신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도 크게 기여했을 거라는 주장이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먼저 세종대왕과의 관계다. 비록 신미대사가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세종이 죽기 5년 전인 세종 28년(1446)이지만 그 관계가 대단히 친밀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죽기 몇 달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닌 윗사람의 예로 신미대사를 대하고 있으며, 당시 신미대사가 머무르던 속리산 복천암 불사를 지원하고, 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존자’라는 명칭이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대사에게 내리는 칭호고, 더구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 영산 김씨 족보에 ‘수성(신미대사)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과 신미대사의 친동생이자 독실한 불자였던 김수온이 한글창제 이전에 이미 중앙에 진출한 상태였다는 점도 이와 관련된다는 가설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는 불교의 신성 숫자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은 새로운 문자의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김광해 서울대 교수) “방대한 양의 불경이 한글이 창제 된지 얼마 안 되는 기간에 한문본이 편찬되고 번역까지 됐다. 이는 한글 반포 이전부터 불경에 정통하고 있었으며, 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운용법과 표기법에 통달하고 있던 인사들이 있어서 이 사업을 추진했다는 증거다.”(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 같은 기존 학자들의 주장도 그 당시 대표적인 학승이었던 신미대사를 상정할 경우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특히 얼마 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한글 기원은 고려불경의 각필부호”라는 학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견해가 많다.
지난 30년째 신미대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오고 있는 복천암 주지 월성스님은 “억불숭유의 시대로 말미암아 신미대사의 공헌은 철저히 가려지고 삭제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라도 그 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신미대사는?
신미대사는 부친이 태종 때 정승까지 지낸 양반 가문인 까닭에 입산 전 유학 경전을 섭렵할 수 있었으며 출가 후에는 대장경에 심취했다. 그러나 한문 경전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어와 티베트어를 직접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세종, 문종, 세조 때에는 경전번역 등 불사를 이끌었으며 예종이 불교탄압하려 할 때는 최초의 언문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2004-09-29/773호>

4) 한글어지 108자 … 월인석보도 108쪽
한글창제와 숫자의 비밀
어느 종교건 특정 숫자를 신성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불교는 유독 그런 성향이 강하다. 심지어 0에서 무한대에 이르기까지 숫자를 불교적으로 해석한 『대명법수』라는 책이 나올 정도다. 이런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표면적인 목적 외에도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은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대 국문과 김광해 교수의 ‘훈민정음과 108’론이 바로 그것이다.
김 교수는 그동안 『한글창제와 불교신앙』(불교문화연구 제3집) 등 일련의 논문을 통해 창제 과정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불교의 대표적인 신성수 ‘108’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의 의도적인 조절임을 주장했다.
김 교수가 먼저 주목한 것은 ‘나랏말싸미듕귁에달아…’로 시작하는 한글 어지(御旨)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되는 한문 어지다. 한글은 모두 108자고 한문 어지는 108의 꼭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 교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더부러’ 등을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등 적어도 4글자 이상이 탈락됐다는 것이다. 또 한문 어지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而己矣’를 사용하지 않고 ‘耳’를 사용하고 있는 등, 글자의 수를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담겨 있음도 함께 지적했다.
훈민정음 창제과정에 나타나는 숫자의 비밀은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 교수는 108글자의 세종 어지가 실린 『월인석보』 제1권의 장수(張數)도 108쪽임도 밝히고 있다. 특히 다른 권들과는 달리 일련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 별도의 권으로 만들면서까지 쪽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 또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의 경우 불교적인 우주관을 상징이라도 하듯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이들 경우 외에 다양한 사례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훈민정음의 창제 당사자들이 이렇듯 일련의 주도면밀한 노력을 은밀히 기울인 것은 불교 보급의 목적이 담겨 있다”며 “그러한 종교적 염원이 숫자를 조절하는 은밀한 방법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맺고 있다.
실제 세종에서 연산군 때까지 발간된 훈민정음 문헌의 65%이상이 불교관련 문헌이며, 유교 문헌은 단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

5)“집현전 학자들 한글창제 무관”
훈민정음에 대한 오해
한글창제는 지금까지 신숙주와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만들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이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없는 쪽으로 굳혀지고 있다.
한글창제 이후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이 집현전 학자들이며, 당시 집현전 부제학으로 실무담당을 맡고 있던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조차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상소를 올리는 것 등의 정황으로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이 돕기는 커녕 몰랐던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1443년 12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선언할 때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비밀리에 추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성삼문은 한글이 창제될 무렵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신숙주는 창제 2년 전에 들어왔지만 그 다음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록에도 전혀 그런 말이 없다. 잘못된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세종께서 이런 사실을 알면 통탄할 것”이라는 여증동 경상대 국문과 명예교수의 말처럼 집현전 학자 창제설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따라서 이들 집현전의 소장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종의 명을 받들어 훈민정음의 보급에 앞장섰을 뿐이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
Posted by PD 개인교수
2012.09.06 22:37



檄黃巢書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尉某官 告黃巢 夫守正修常曰道臨危制變曰權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生死難期 而萬事主心 是非可辨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 軍政則先惠後誅 

將期剋復上京 固且敷陳大信 敬承嘉諭 用戢奸謀 且汝素是遐甿 

驟爲勍敵 偶因乘勢 輒敢亂常 遂乃包藏禍心 竊弄神器 侵凌城闕 

穢黷宮闈 旣當罪極滔天 必見敗深遁地 噫 唐虞已降 苗扈弗賓 

無良無賴之徒 不義不忠之輩 爾曹所作 何代而無 遠則有劉曜王敦覬覦晉室 

近則有祿山朱 吠噪皇家 彼皆或手握强兵 或身居重任叱叱則雷奔電走 

喧呼則霧塞烟橫 然猶暫逞奸圖 終殲醜類 日輪闊輾 

豈縱妖氛 天綱高懸 必除凶族 況汝出自閭閻之末 起於隴畝之間以焚劫爲良謀 

以殺傷爲急務 有大 可以擢髮 無小善可以贖身 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 

仰亦地中之鬼已議陰誅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凡爲人事 莫若自知 吾不妄言 汝須審聽 比者我國家德深含垢 

恩重棄瑕 授爾節旄 寄爾方鎭 爾猶自懷鴆毒 不斂梟聲 動則齧人 

行唯吠主 乃至身負玄化 兵纏紫微 公侯犇竄危途 警蹕則巡遊遠地 

不能早歸德義 但養頑凶 斯則聖上於汝有赦罪之恩 汝則於國有辜恩之罪 

必當死亡無日 何不畏懼于天 況周鼎非發問之端 漢宮豈偸安之所 

不知爾意終欲奚爲 汝不聽乎 道德經云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又不聽乎 春秋傳曰 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公汝藏奸匿暴 惡積禍盈 危以自安迷以不復 

所謂燕巢幕上 漫恣騫飛 魚戲鼎中 卽看燋爛 我緝熙雄略糺合諸軍 

猛將雲飛 勇士雨集 高旌大旆 圍將楚塞之風 戰艦樓船 

塞斷吳江之浪 陶太尉銳於破敵 楊司空嚴可稱神 旁眺八維 橫行萬里 

旣謂廣張烈火 爇彼鴻毛 何殊高擧泰山 壓其鳥卵 卽日金神御節水伯迎師 

商風助肅殺之威 晨露滌昏煩之氣 波濤旣息 道路卽通 當解纜於石頭 

孫權後殿 佇落帆於峴首 杜預前驅 收復京都 剋期旬朔但以好生惡殺 

上帝深仁 屈法申恩 大朝令典 討官賊者不懷私忿 諭迷途者固在直言 

飛吾折簡之詞 解爾倒懸之急 汝其無成膠柱 早學見機 

善自爲謀 過而能改 若願分茅列土 開國承家 免身首之橫分 

得功名之卓立 無取信於面友 可傳榮於耳孫 此非兒女子所知 實乃大丈夫之事 

早須相報 無用見疑 我命戴皇天 信資白水 必須言發響應 

不可恩多怨深 或若狂走所牽 酣眠未寤 猶將拒轍 固欲守株 則乃批熊拉豹之師 

一麾撲滅 烏合鴟張之衆 四散分飛 身爲齊斧之膏 

骨作戎車之粉 妻兒被戮 宗族見誅 想當燃腹之時 必恐噬臍不及 爾須酌量進退 

分別否臧 與其叛而滅亡 曷若順而榮貴 但所望者 必能致之 

勉尋壯士之規 立期豹變 無執愚夫之慮 坐守狐疑 某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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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1. 太初의 桓國時代

吾桓建國 最高                                          오환건국이 최고라

       우리의 밝은 나라 환국을 세우시니 이 나라가 곧 가장 처음으로 세워진 나라 이다.

有一神 在斯白力之天 爲獨化之神              유일신이 재사백력지천하여 위독화지신하시니

     시메리아의 하늘에 스스로 변하여 신이 되신 분이 한 분이 있었으시니~,

光明 照宇宙 權化生萬物                               광명으로 조우주하시니 권화생만물하여라

        그분이 빛으로 우주를 비추시고 권능하신 조화로 만물을 창조 하시고,

長生久視 恒得快樂 乘遊至氣 妙契自然               장생구시하여 항득쾌락하시고 승유지기하여 묘계자연하시어

        오래토록 사시면서 항상 즐겁고 지극한 기운과 함께 하시니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어~,

無形而見 無爲而作 無言而行                          무형이현하고 무위이작하고 무언이행하시니

        일부러 드러내지도, 말로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자연스레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이루어 지도다.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                     일강동녀동남팔백어흑수맥산지지하시니

        어느날 동녀동남 팔백을 흑수(흑룡강)백산(백두산)으로 내려오게 하시니~,

於是 桓因 亦以監 居于天界                         어시에 환인이 역이감군으로 거우천계하시고~

그 때에 환인께서 이들을 이끌고 천계(바이칼호지역 파키르고원 일대라함)의 땅에 자리를 잡으시고~~,

掊石發火 始敎熟食 謂之桓國                          부석발화하여 시교숙식허시니 위지환국이라한다.

        돌을 부딧쳐 불을 만드시어 음식을 익혀 먹는 것을 가르치니 이곳을 최초의 국가 밝은나라 환국이라 하노라.

是謂天帝桓因氏 亦稱安巴堅也                        시위천제환인씨이시니 역칭안파견이라한다.

        모든 이들은 환인님을 천제로 모시고 안파견으로 부르며 따랏노라.

傳七世 年代 不可考也                                 전칠세라하나 연대는 불가고야니라

이렇게 7대을 이어 왓으나 그 년대는 확실치가 않노라.(삼성기하편에서는 3301년이라한다)

 

2. 桓雄님들이 다스린 倍達國

 

後 桓雄氏繼興 奉天神之詔                         후에 환웅씨계흥하시어 봉천신지조하시니

          이후 환웅님들은 개를 이어 번성하시고 천신을 정성으로 제를 지내어 받들었으니~

降于白山黑水之間 鑿子井女井於天坪                      강우백산흑수지간허사어 착자정녀넝어천평하시고

            훅수를 따라 백산에 이르러 넓고 좋은땅에 모든이들이 먹을 우물을 파시고~

劃井地於靑邱                                        획정지어청구하시며

          푸르른 구릉에 농지를 만드시고~,

持天符印 主五事 在世理化 弘益人間하            지천부인하시어 주오사하시며 재세이화하시고홍익인간하시고

          천신으로부터 받으신 부와 인을 지니시고 만사를 주관하시니 세상은 바른게되고 넓게 이로운 인간들이 되니~

立都神市 國稱倍達                                 입도신시하시고 국칭배달이라 하시다.

천신을 모시는 신시가 만들어지니 이나라가 곧 배달국이니라.

擇三七日 祭天神 忌愼外物 閉門自修                         택삼칠일하여 제천신하시며 기신외물하여 폐문자수하시며~

삼칠이되는 날(21일)을 잡아 천신께 제를 드리고 주위의 것들을 멀리하며 문을 걸고 스스로 수행을 쌓으며~

呪願有功 服藥成仙 劃卦知來                                 주원유공하시며 복약성선하시며 획괘지래하시며

소원을 빌어 공을 이루시고 좋은 것들을 드시고 신선에 이르시니 괘을 짚어 앞일에 통하시게 되고~

執象運神                                                       집상운신하시노라.

천신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시니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장악하시어 관장 하시노라.

靈諸哲爲輔 納熊氏女爲后                               명군령제철하시어 위보하시고 납웅녀하시어 위후하시니~

명석하고 뛰어난 인재를 찾아 보필케하고  웅씨 집안의 여자를 맞아  비로 맞으시고는~

定婚嫁之禮 以獸皮爲幣 耕種有畜                             정혼가지례하고 이수피로 위폐하고 경종유축하고~

혼사를 정하여 예를 지내는 것은 짐승의 가죽으로 예를 표하는 것으로 하고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가축을 키우게 하시고~

置市交易 九域 貢賦 鳥獸率舞                              치시교역하시고 구역이 공부하니 조수솔무라

물물교환을 할 수 았게 시장을 두고 아홉부족들이 짐승과 농작물을 바치니 새와 짐승들까지도 춤을 추는 살기좋은 나라 이니라.

後人 奉之爲地上最高之神 世祀不絶                   후인이 봉지위지상최고지신하여 제사부절하니라

후세에 이르러서고 천제님을 지상최고신으로 받들어 제가 끊이지가 않았다고 한다.

 

 3. 고조선의 후기 대부여 시대

丙辰 周考時 改國號 爲大夫餘                병진 주고시에 개국호하여 위대부여하고

 병진년 44대 구물단군(주나라 고왕때BC425) 나라이름을 대부여로 바꾸었다.

自白岳又徙於藏唐京 仍設八條 讀書習射 爲課    자백악으로 우사어장당경하여 잉설팔조하여 독서습사로 위과하며

       백악에서 어장당으로 도읍을 옮겨 팔조금법을 실시하고 문무를 닦는 것을 일과로 해야한다.

祭天 爲敎 田蠶是務                              제천으로 위교하며 전잠시무하며

천제를 지내는것으로 가르침을 삼으며 농사와 양잠에 힘쓰며.

山澤無禁 罪不及孥 與民共議 協力成治                            신택무금하며 죄불급노하며 여민공의하며 협력성취하니

    산과 못에서 금하느것이 없으며. 죄를 짖드라도 그 벌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으며 백성이 함께 의논하며, 협력하여 좋은 정치를 이루니~,

男有常職 女有好逑 家皆蓄積 山無盜賊                               남유상직하고 여유호구하며 가개축적하여 산무도적하며

   남자에게는 항상 일이 있어야하고 여자에게는 좋은 배필이 있어야 하며 집집마다 재산이 쌓이고 산에는 도적이 없고~,

野不見飢 鉉歌溢域                                                     야불연기하며 현가일역하니라~

 들에는 긂은자를 볼 수 없고 거문고소리와 노래소리가 나라밖까지 넘치누나.

檀君王儉 自戊辰統國 傳四十七世 歷 二千九十六年                 단군왕검이 자성진통국으로 전사십칠세하여 역이 이천구십육년 이니라

   단군 왕검께서 나라를 통일 (BC2333)한 후로부터 47대의 단군(고열기단군)에 이르기까지 2096년간 나라가 이어졌노라.

 

4.북부여 시조 해모수와 고주몽의 북부여 계승                            

壬戌 秦始時 神人大角羊慕 起於熊心山                          임술 진시시에 신인대해모수가 기어웅시산하시고

    임술년(BC239)진시횡 때에 신인 해모수가 웅심산(지금 장춘동쪽지역)에서 일어나시어

丁未 漢惠時 燕衛滿 窃居西鄙一隅                           정미 한혜시에 연추위만이 절거서비일우할새

    정미년(BC194)한의 혜왕 시에 연나라장수인 위만이 서쪽변방의 한모퉁이를 약탈하여

番韓 準 爲戰不敵 入海而亡                                          번한 준이 위전부적하여 입해이망하니

   번한의왕 준(74대마지막왕)이 대적하여 싸우지못하고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으니~

自此 三韓所率之衆 殆遷民於漢水之南                              자차로 삼한소솔지중이 태천민어한수지남하고

 이로써 삼한의 대다수의 백성들은(마한,진한,반힌) 한수(지금의한강)이남으로 이주를 하였다. 

一時 群雄 競兵於遼海之東                                          일시 군웅이 경병어요해지동이러니

 남아있든 한때의 무리들은 요해(지금의 하북성의 난하)동쪽에서 일어나 싸웠으나.

至癸酉 漢武時 漢 移兵 滅右渠                                     지계유 한무시에 한이 이병하여 멸우거하니라

 걔유년에 이르러 한의 무제가 군사를 이르켜 우거왕을(의만의손자) 멸함으로 (BC194~BC108,86년의 위만조선)

西鴨綠人 高豆莫汗 倡義興兵 亦稱檀君                           서압록인 고두막한이 창의흥병하여 역칭단군하고

 서압록(서요하)의 고두막한(임금)이 의를 앞세워 군사를 일으키며 스스로 역시 단군이라 칭하니고~

乙未 漢昭時 進據夫餘故都                        을미 한소시 진거부여고도하여

 을미년(BC86) 한 소제때 진격하여 부여의 엣도읍지(백악산 아사달)에 자리르 잡아~_

稱國東明是乃新羅故壤也                                칭국동명하시니 시내신라고양야라

나라이름을 동명이라 하였으니  이곳이 곧 신라의(지금의 경주지방에 자리잡은 진한) 옛 고향땅 이어라.

     고주몽이 동명왕이 아니고 고두막한이 세운 부여가 동명부여인 것이다.

至癸亥冬十月 高鄒牟                                     지계해동시월에 고추모가

     계해년(BC158) 시월에 고두막의 아들인 고무서단군이 붕어하시고 고추모(고주몽성제)가 ~                          

 亦以天帝之子繼北夫餘而興                                역이천제지자로 계북구여이흥하사

 이분 또한 천제의 아드님으로써 북구여를 계승하여 일어나시니~

復檀君舊章 祠角羊慕潄 爲太祖                            복단군구장하시고 사해모수하여 위태조하시고

 단군의 옛법을 다시 세우시고 해모수 단군의 사당을세우고 제를 지냄으로 나라(고구려)의 시조로 모시었다,

始建元 爲多勿 是爲高句麗始祖也            시건원하여 위다물하시니 시위고구려시조야니라

  차음으로 년호를 세우심에 다물(옛땅을 찾는가는뜻, 옛땅이라함은 배달국과 고조선의 옛영토)이라 하시니 이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 이시니라.

Posted by PD 개인교수
신라 왕릉만 파고든 고 이근직 교수 유저서 주장 … 다시 논란
이 교수 주장의 근거
① 12지신상 그 시대엔 없던 양식
② 무열왕릉보다 신하 무덤이 화려
③ 왕 아래 무덤 쓰던 풍습과 어긋나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김유신 장군 묘. 이근직 교수는 ‘김유신은 금산원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장군의 무덤은 들판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유신 장군 묘에는 봉분을 둘러가며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근직 교수 등은 12지신상과 난간 둘레석 등은 김유신 시대보다 후대인 성덕왕 이후에 등장 한다고 주장한다(사진 왼쪽). 김유신 장군 묘 앞에 세워진 비석.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고 적혀 있다.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당시 구전 등을 토대로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오른쪽).24일 경북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이곳에선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평일이지만 적잖은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묘의 왼쪽 앞에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 쓰인 비석이 보인다. 경주시 이채경(51) 학예연구사는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짚어가며 “비석은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웠다”고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595∼673)이라면 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재위 654∼661)을 도와 삼국을 통일한 주역이다.

 묘 앞에 어린이 키만 한 상석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봉분을 돌아가며 난간 둘레석과 12지신상이 장식돼 있다. 1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화려하고 장엄함이 느껴지는 무덤이다.

태종무열왕릉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새겨진 귀부가 발견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신라 왕릉 7곳 중 하나다. 신하인 김유신과 동시대 왕의 능인데도 김유신 묘에는 설치된 난간 둘레석도 12지신상도 없이 소박하다. 김유신 장군 묘를 나와 2㎞쯤 떨어진 태종무열왕릉을 찾았다. 능 입구에 비석은 사라지고 귀부(받침돌)만 남은 태종무열왕릉비(국보 25호)가 있다. 무열왕은 김유신과 동시대 인물이다. 『삼국유사』 등에 전하듯 무열왕의 왕비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며, 왕은 김유신보다 12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무열왕릉은 서악 고분군 앞 평지에 들어서 있다. 여기엔 화려한 난간 둘레석이나 12지신상은 없다. 봉분만 있는 소박한 왕릉이다. 신하인 김유신 묘와 비교하면 더 그렇다. 고(故) 이근직(1963∼2011) 교수는 이런 의문들에 매달렸다. 26일 경주에서 열린 『신라왕릉 연구』 출판기념회는 그의 유고작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대 문화재학과에 몸담았던 이 교수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신라 왕릉 고증에 천착했다.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와 이제는 ‘사실’로 굳어져 있는 신라 왕릉의 주인공을 바로잡는 일이다.

“김인문묘가 진짜 김유신묘” 태종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묘.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근직 교수는 이 김인문 묘를 김유신 장군 묘로 보았다. 신하는 왕 근처에 매장하는 ‘배장’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주=프리랜서 공정식] 이 교수는 왕릉의 주인공이 확실한 곳은 무열왕 등 7곳뿐이라며 나머지는 구전과 사실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곳이 김유신 장군 묘다. 이채경 학예연구사는 이 교수의 주장을 현장에서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 묘의 상석과 분묘 난간 둘레석은 분묘 형식으로 보아 훨씬 후대인 33대 성덕왕 이후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 ‘김유신은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원(原)은 봉우리가 아닌 들판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동시대 왕인 무열왕릉보다 신하의 무덤을 더 화려하게 했다는 건 상식에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왕릉 연구』에서 이런 논리적 근거를 내세우며 김유신 장군 묘를 35대 경덕왕릉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 묘를 김유신 묘로 보아야 한다고 기록했다. 그의 주장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무덤 위치가 들판이며, 당시 신하는 왕 아래 무덤을 쓰는 ‘배장(陪葬·딸린 무덤)’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무열왕릉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 묘 사이에 9대손 김양의 무덤이 있는 것도 김인문 묘가 되기 어려운 이유다.

 신라 왕릉 논란은 30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조선 영조 때 경주 선비 유의건은 “(영조 6년·1730년) 이름 없던 고분 17기의 피장자를 왕으로 바로잡는 과정에서 고증을 거치지 않고 능지기의 전언에 의존한 건 문제”라고 본격 문제를 제기했다.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56왕을 배출한 박·석·김 문중이 중심이 돼 구전을 바탕으로 당시 왕릉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왕릉 이름 바로잡기는 이후 추사 김정희, 한학자 정인보, 사학자 이병도로 이어졌다. 이병도 박사도 김유신 장군 묘는 왕릉이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김유신 장군 묘를 이 교수와 달리 45대 신무왕릉으로 보았다.

 이러한 학설 때문에 경주시는 사적 안내문 등에 한동안 확실치 않은 곳은 이름 앞에 ‘전해 온다’는 뜻으로 ‘전(傳)’이라는 글자를 붙였다. 문중의 항의로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 지금은 이 글자가 사라졌다.

 김유신 장군 묘에 제례를 올리는 김해 김씨 등 해당 문중은 이 교수의 깊이 있는 학설로 문제에 봉착했다. 이 교수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교과서의 관련 내용도 고치고 경주 지역의 수많은 안내문과 표지판도 바로잡아야 할 판이다. 김유신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숭무전 김성식(79) 전참봉은 “한 사람의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지만 학설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유물이 발굴돼 입증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경주시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문화재의 명칭 변경은 문화재청이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통과시켜야 한다는 절차 때문이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출처 Network of Corea history - 21세기 한국역사 | 조의선인
원문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016380183

<한국과 일본>

고대 일본 열도는 미개한 선주민들의 터전이었다. 그곳으로 선진국 한반도의 삼국(신라,백제,고구려) 사람들이 대형 선박을 이용해 잇따라 건너갔다. 이때부터 미개의 터전인 일본 열도에 한반도의 선진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삼국 사람들과 선주민 간의 혼혈도 자연스레 이루어지면서 고대 한국인들은 일본 열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먼저 한반도 남쪽에서 일본 남쪽의 키타큐슈(北九州)지역으로 건너간 세력이 지베의 터전을 일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경)다. 그 후 4세기 후반 무렵부터 한반도인(주로 백제인)들은 서서히 일본 열도의 동쪽으로 지배의 터전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진국 한반도의 사람드링 동진함으로써 일본 내해(內海, 세토나이카이) 일대며 오늘의 오오사카 지방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의 지명은 카와치(河內)였다.

이 시대의 한국인 지배자들로는 오우진(應神, 4세기경)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 5세기) 천황 부자를 꼽을 수 있다. 이들 백제인 부자에 의해 고대 일본이 카와치 왕조가 세워졌다. 백제의 정복왕인 닌토구 천황에 의해 성립된 카와치 왕조는 오오사카 지방을 중심무대로 번성하게 된다. 그들이 한국인 정복왕이라는 사실을 토우쿄우 대학 교수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1917~)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우진 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의 일본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와세다 대학 교수였던 미즈노 유우도 오우진 천황과 닌토쿠 천황 부자가 백제국 왕가의 왕들이라며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일본과 한반도와의 교섭에 있어서, 특히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오우진, 닌토쿠 천황 시대 이후부터 서로의 관계 역사 자료가 눈에 띄게 많이 나왔다. 오우진, 닌토쿠 천황 등 닌토쿠 왕조(카와치 왕조)는 외래민족의 세력으로서, 일본에 침입하여 일으킨 정복 왕조다. 닌토쿠 왕조는 대륙적인 성격을 갖는 새로운 왕조였으므로 대륙의 사정에도 정통했다. 따라서 그쪽 정세에 관해서도 민감했으며, 특히 그 지배층이 백제국 왕가와 동일 민족계통(백제왕은 부여족)에 속한다.



<저명 일본 사학자들의 '한일동족론'의 발자취>

일본 천황들이 한국의 천신을 제사 지내왔다는 내용의 논문 때문에 토우쿄우 대학에서 파직당한 쿠메 쿠니다케는 그후 와세다 대학의 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쿠메는 계속해서 일본 고대 문서들을 섭렵 연구한 끝에 마침내 68세에 이르러 『일본고대사』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스사노오노미코도'가 신라의 신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처음에 신라에 살면서 '소의 머리(소시모리)라고 하는 강원도 춘천부(春川府) 우두주(牛頭州)에 갔다가 그후 왜나라로 건너왔다. 소의 머리는 곧 우두(牛頭)로서 걸맞은 지명이나 너무 진번국(眞番國)에 접근했고, 고구려인들의 터전도 이 근처고 보면 신라로부터 좀 깊게 들어간 것 같다. 그러나 진번과 요지(要地)를 쟁탈하기 위해 우두산에 갔다는 것은 앞으로 연구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뒷날 우두천왕(牛頭天王)으로 부르게 되었고, 또한 신라명신(新羅明神)이라고도 불러 모시게 되었다. 이분에 대한 민중의 열렬한 추앙은 식지않고, 오늘날 이 분을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京都市東山區사원)는 쿄우토 굴지의 사당이다. 그 유래를 따진다면 실로 거룩하며 외경스럽다.

쿠메는 『일본고대사』의 제29절 「일한(日韓)의 옛 종교」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똑같은 종족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기도 하다. 

우선 한반도는 우리(일본)와 동종(同種)으로 인정되는 진인종(辰人種)이다. 「후한동이전」(後漢東夷傳)에 마한(馬韓)을 기록하기를, "항상 5월의 모내기를 끝내면 신을 제사드리며 주야로 술모임을 갖고 무리 지어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을 춘다. 수십 명이 서로 어울려 땅을 밟고 구르는데 손과 발이 서로 잘 맞는다. 10월에 농사가 다 끝나면 다시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본의 신상제(新嘗祭)와 서로 닮았다. 다음으로는 소도(蘇塗)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을 걸어 귀신을 제사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일본에서 현목(賢木, 사카키)을 제신(祭神)의 나무로 삼는 것과 똑같다.

『일본서기』의 중애기(仲哀紀, 추아이기)에 나오는 오카현주(오카노 아가타누시, 지금의 후쿠오카현 온가군 지역의 지방장관)와 이도현주(이도노 아가타누시, 지금의 후쿠오카현 이토지마군 지역의 지방장관)는 두사람 모두 뱃머리에다 현목(賢木)을 세워서 천황을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도현주는 신라왕의 후예이며 오카현은 신라인들의 터전으로서, 이 고장에서 지내는 제사는 스사노오노미코도의 나라인 신라의 제례양식과 거의 똑같다.

그는 예(濊), 부여(扶餘), 고구려의 제천행사에 대해 언급하고는 이와 같은 나라들의 제례는 모두 일본의 풍명절회(豊明節會)와 똑같은 것이라 했다. 또한 그는 신라의 신 스사노오노미코도가 동해바다 맞은편의 일본 이즈모(出雲) 지방으로 건너왔다는 것과, 이 지역의 신라 신사(神社)들이 많은 사실도 일일이 지적하고 있다. 또한 신라의 국호를 '카라쿠니(辛國) 또는 '시라기'(白木, 신라의 이두식 표현)로 표기하는 것 등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동해안에서 마주 건너다 보이는 이즈모가 있는 시마네현(島根縣)이 고대 신라가 최초로 건너간 정복의 터전인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들이 입증하고 있다. 미즈노 유우는 신라인들이 이즈모 지방이 신라신 스사노오노미코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논술하고 있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본래 일본의 신도 이즈모의 신도 아닌 신라의 신이다. 그는 신라에서 이즈모로 건너온 외래신이고 손님신(客人神)이다. 그의 본거지는 신라 왕성의 성지였다. 이즈모로 건너온 신라인들의 집단은 서부 이즈모 지역에서 분포되었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이즈모에서 다시 키이(紀伊, 지금의 和歌山縣)로 갔으며 지금 키이에서는 스사노오노미코도를 '기이국소좌대신'(紀伊國所坐大神)으로서 받들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 논술에서 미즈노 유우는 경남 지역과 이즈모 지역 사람들의 형질적 특징이 거의 똑같다고 말한다. 특히 ABO식 혈액형 분포에 있어서 A형률은 경남이 42.16%이며 이즈모는 42.80%이고, AB형률은 경남이 10.23%이며 이즈모는 9.58%인 유사성도 지적하고 있다.

고구려 사신 이리지공이 신라의 우두산(牛頭山)에서 스사노오노미코도의 신위(神位)를 모셔다가 받들게 되었다는 곳은 쿄우토의 기온사(祈園社)인 오늘의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이다.

우두산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을 말하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해왕(奈解王, 196~229) 27년(222) 10월 백제군이 우두주(牛頭州)에 침략했다는 기록에서 이 신라의 지명이 나온다. 동국여지승람(권46)에는 우두주는 강원도 춘천부(春川府)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춘천의 우두산은 고대 신라의 스사노오노미코도, 즉 우두천왕(牛頭天王)의 터전이었다고 추정하게 된다. 신라신 우두천왕을 받들고 있는 쿄우토 야사카 신사의 일본 최대의 기온 마쓰리(祈園祭)는 이른바 한일동족론에 앞서서 우리가 크게 주목할 만한 대축제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신사들이 거행해오고 있는 성대한 제사 의식을 이른바 '마쓰리(祭)'라고 부른다. 이 마쓰리라는 것은 신을 맞이하는 '맞으리'에서 생긴 한국어가 어원이라고 본다. 우리의 신은 하늘에 계시므로 지상의 인간들은 거룩한 신을 맞이해서 제사를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강신(降神)을 맞이하는 '강신을 맞으리'가 바로 '마쓰리'인 것이다.

일본 각 지역에 있는 사당인 신사며 신궁에서는 해마다 성대한 제사를 지내면서, 신령을 모신 가마(神輿, 미코시)를 메고 수십 명의 혈기방장한 가마꾼들이 '왔소이, 왔소이'하는 구령을 소리 높이 오치면서 큰 거리를 누벼댄다. 그들이 소리지르는 '왔소이'는 다름 아니라 한국에서 신이 '오셨다'는 한국어이다.

일본 전국에서 손꼽히는 마쓰리 행사는 바로 쿄우토의 기온마쓰리(祇園祭)다. 이 제신 축제 행사는 해마다 7월 17일부터 24일(옛날에는 음력 6월 7일부터 14일)까지 거행된다. 마쓰리를 주관하는 곳은 쿄우토 시의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이다. 거리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수십만의 구경꾼들로 성시를 이루는 가운데 가마꾼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가마꾼들은 이른바 '야마'(山車)라고 부르는 4개의 큰 나무바퀴가 달린 집채 같은 수레들을 끌고 밀고 달리는 것이다. 이 대형 수레에는 신령(神靈)을 모셨다. 그 신령이란 다름 아닌 우두천왕(牛頭天王)이라는 신라에서 온 신이다. 이 신라신 우두천왕을 일본 고대 역사에서는 '스사노오노미코도'라고 불러 온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한국에서 건너온 산이다"라고 하는 것은 쿠메 쿠니다케의 논술(日本古代史, 1907)로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황국사관을 신봉하는 극우 세력들이 쿠메 교수를 논박 질타했지만 일본 최초의 고문서학(古文書學)의 기초를 닦은 학자의 양식은 끝내 꺾을 수 없었다.

기온마쓰리에 참여하는 쿄우토 각 지역대표인 가마꾼들은 이른바 '야마'라고 부르는 신령을 모신 큰 수레들을 정해진 차례대로 거세게 몰면서 거리를 행진한다. 민속학자 니시쓰노이 마사요시는, "기온마쓰리에 등장하는 야마(山)와 호코는 오전 8시경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야마는 모두 14대(본래는 13대였다)고 호코는 6대다. 야마의 지붕에다 양날창을 곧추세운 것을 호코라고 부른다. 호코를 행렬의 선두에 세우고, 야마는 제비를 뽑은 순서대로 차례를 따라 쿄우토의 대로를 행진한 뒤 각기 자기 고장으로 향한다. 행진하는 것은 첫날인 7월 17일과 마지막 날인 24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 으뜸가는 제신 행사인 '기온마쓰리'가 신라에서 온 신인 스사노오노미노도(우두천왕)를 야사카 신사에서 모시는 것이라는 데 관한 옛 기록은 야사카 신사의 『유서기략』(由緖記略)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 655~661) 2년(656)에 고구려에서 왜왕실로 온 사신(調進副使)인 이리지(伊利之)가 신라국의 우두산(牛頭山)에 계신 스사노오노미코도 신을 쿄우토 땅(山城國八坂鄕)에 모시고 옴으로써 제사드리게 되었으며, 왕실로부터 팔판조(八坂造, 야사카노 미야쓰코)라는 사성(賜姓)을 받았다.

역시 야사카 신사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고문서인 『야사카어진좌대신지기』(八坂御鎭座大神之記)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분명하다.

사이메이 천황 2년에 한국의 조진사 이리지사주(이리지사주, 이리시노오미)가 다시 왔을 때, 신라국 우두산의 신 스사노오노미코도를 옮겨 모셔와서 제사드렸다.

즉 고구려의 사신 이리지가 당시(656) 왜나라에 온 것은 두 번째였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그때 신라의 스사노오노미코도신의 신위(神位)를 한국의 우두산에서 왜나라 야마시로(山城, 지금의 쿄우토의 야사카 신사 터전)로 모셔왔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역사 기사를 보면, "고구려에서 656년 8월 8일 대사달사(大使達沙)와 부사 이리지(伊利之) 등 모두 81명이 왔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바로 그 당시 고구려에서 고위 외교관들을 다수 파견한 것을 알 수 있고, 그들은 한국신인 스사노오노미코도의 신위까지 모시고 와서 이 쿄우토 지역을 새로운 한국신의 터전으로 삼아 사당을 크게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이리지 등 고구려 사신이 신라신의 신위를 모셔온 배경은 아직 사료가 없어서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둔다.

<조작된 역사서 『일본서기』에 대한 문헌비판>

우에다가 지적한 것처럼 일본서기는 허위 기사가 많이 있어서 매우 악명 높은 역사책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 기재된, 사실과 다른 기사들이 언제 어떻게 고쳐서 씌었는지는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이다.

8세기 초 일본서기며 고사기 등이 편찰될 당시부터 허위 기사가 실린 것인지, 아니면 뒷날 원본 기사들을 베끼던 과정에서 조작된 것인지는 아직 일본사학계에서 밝혀진 바 없다.

단지 지금까지는 기사가 조작되었다는 문헌적 비판이 계속되어 왔고, '진구우 황후의 신라침공설'이며 가야 지방의 소위 '임나일본부설'이 조작된 기록이라는 몇몇 사실만 확인됐을 뿐이다.

일본서기 등의 허위 기사들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가 무사정권을 집정하던 시기에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왜국이 신라와 백제왕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아온 사실들을 일본 역사 기록에서 뒤집어놓지 않고서는 조선 침략에 대한 명분 내지는 위신이 서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렇기에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를 칠지도(七枝刀)라고 하면서 공상(貢上)이니, 헌상(獻上) 따위의 글자로 터무니없이 조작하고, '진구우 황후의 신라침공설'이며 '임나일본부설'등 사실이 아닌 한반도 침략설을 들이대는가 하면, 실존하지도 않은 진무 천황(神武天皇) 등 9명의 인물들을 왕으로 만들어 일본사 연대를 윗대로 늘려놓는 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실존하지도 않은 일본왕 조작 기록에 대해서는 나오키 코우지로(直木孝次郞, 1919~)가 그의 저서 (『日本神話と古代國家』, 講談社 學術文庫, 1990)에서 이렇게 반박하고 있다.

천황의 기원을 가능한 한 오랜 옛날로 늘려잡기 위해 있지도 않았던 천황 이름을 조작하여 추가시켰다. 또한 참위설(讖緯說)에 입각해서 스이코 천황 9년(601)부터 1260년 전(BC 660)을 진무 천황의 즉위년으로 만들었다. 이 제1대 진무 천황의 이야기도 천황가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사실로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현대 일본 사학자들도 고사기며 일본서기 등 역사책들이 언제부터인가 조작, 변조된 것을 계속해서 논증, 비판해 오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저명한 사학자 김석형(金錫亨, 1915~96)도 "고사기의 원형 자체가 9세기 이후의 어떤 시기에 위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한다.

다시 칠지도 문제로 돌아가자. 칠지도가 중국 땅 동진(東晋)에서 만들어져 백제왕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됐다는 설은 쿠리하라 토모노부(栗原朋信)의 주장이다. 그는 칠지도 뒷면 명문에 있는 '성음'(聖音)이라는 글자를 '성진'(聖晋)이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백제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준 왜왕에게 상을 주기 위해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 해서공(海西公)이 칠지도를 만들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증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칠지도 명문에서 '성음'(聖音)을 '성진'(聖晋)으로 해독하는 경우, 문맥상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또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하사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는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기는커녕 한반도에서 막강한 국력을 한창 과시하던 시기였다.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백제는 태화(泰和) 4년(369)에 남하하던 고구려를 맞아 격렬하게 싸우면서 오히려 북진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371년에는 백제군이 고구려 왕도였던 평양에 침입했고,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전사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재일 사학자인 와코우(和光) 대학 교수 이진희(李鎭熙)도 쿠리하라 토모노부의 동진설은 "일본서기의 사실만을 중시하며, 칠지도의 명문 그 자체를 경시하고 있는 잘못"이라고 지적했다.(七支刀硏究の100年, 1974).

칠지도가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것은 1873년에서 1874년경의 일로 추찰된다. 이 칼을 찾아낸 사람은 스가 마사토모(管政友, 1824~97, '스가'(管)를 '칸'으로 읽는 사학자들도 있다)였다. 역사학자였던 스가가 이소노카미 신궁의 관리 책임자인 궁사(宮司)가 된 것은 1873년이었는데, 궁사 직책을 맡은 후 칠지도를 보고(寶庫)에서 찾아낸다고 한다.

그는 신궁에 부임한 초기에 이 칠지도를 꺼내보니 칼에 녹이 슬어 있어서 녹을 떼내니까 칼 몸체(刀身)에 금상감된 글씨가 나타났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칠지도의 그림을 그대로 본뜬 습본(摺本(접본), 지면을 접어서 펼쳐보도록 한 책)이 나온 것은 1875년 7월 15일의 일이다. 당시 니나카와 시키타네(권川式胤)가 이 습본을 펴냈는데, 크게 당황한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고대 백제왕이 왜왕을 후왕으로 거느리면서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명문이 습본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사이고다카모리(西鄕隆盛, 1822~77) 등은 1871년경부터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워 공공연하게 조선 침략을 획책하고 있었다. 또 1872년 11월 28일에는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재위 1867~1912)의 '징병고유'(徵兵告諭)가 포고되었다.

……예부터의 군제(軍制)를 보완해서 해군과 육군을 설치하며, 20세가 된 남자는 누구나 병적에 편입하여야 한다.……(法令全書)

이것이 바로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이었다. 급기야 1875년 9월 일본의 군함 운요우호(雲楊號)가 서해에 침공해서 '강화도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 군부는 이듬해인 1876년에는 쿠로다 키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를 특명전권대신으로 내세우고 군함 6척과 400여 명의 군인을 강화도에 보내 위협 시위를 하면서 조선 정부를 강압했고, 끝내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하던 시기에 칠지도 습본이 출판되었으니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았을까.


<천황의 한일동족 고문서 분서사건>

역사상 최초로 한일동족론을 세상에 공표한 사람은 일본 남조(南朝, 14세기)시대의 유력한 정치, 사상적 지도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1293~1354)다.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14세기 중엽)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한일동족론을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있으며, 한일동족론에 대한 분서사건의 놀라운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옛날 일본은 삼한과 동종(同種)이라고 전해 왔으며, 그 책들을 칸무(781~806) 천황 때에 불태워버렸느니라.'

칸무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고대 문헌 "袋草子"(1157경)에는 칸무천황의 생부인 코우닌(光仁)천황(770~781) 히라노신(平野神, 백제 성왕)의 증손임이 밝혀져있다. 그러기에 저명한 사학자 키타야마 시게오는 칸무 천황을 가리켜 "백제왕계 귀화인의 핏줄을 타고 났다"고 지적했다고 본다. 칸무 천황은 왕도인 헤이안경 북쪽(현재의 京都市 北區, 平野神社)에다 백제 성왕과 비류왕,초고왕 등 조상신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 지낸 일본천황이다. 그와 같이 백제왕들을 제신으로 섬기는 등 한반도인의 피를 이은 칸무 천황은 어째서 전국 각지의 관원들을 동원해서 한반도인과 일본인이 동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옛 서적(족보)들을 모두 불태운 것일까.

이 점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한일 양국 학자들 간에 전혀 논의된 바가 없다.

"신황정통기"의 저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는 예린한 역사관을 가진 학자며 정치가로, 전제군주 치하에서도 역사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올곧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칸무 천황 때의 한일동족 역사기록 분서사건을 지적할 수 있었던 근거는 9세기 초엽의 "코우닌시키(弘仁私記)"였다고 본다. 코우닌시키는 9세기의 일본왕인 사가(809~823)천황의 지시로 성립된 기록인데, 거기에는 단지 칸무 천황이 책을 불사르게 했다는 극히 짤막한 내용만이 실려 있다. 그러므로 분서 사건의 원인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더구나 일본 관찬 역사책인 '속일본기'와 '일본후기'의 칸무 천황조에는 분서사건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어서 그 원인 규명은 결코 쉽지 않다고 본다. 

분서사건에 대해서 몇가지 요인을 추찰하고 있다.

첫째는 원주민인 수많은 농민들의 조정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농민들은 백제인 왕가의 지배를 받으며 조공을 바치는 농노(농민 노예)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당시 징병과 부역에 강제로 징발되어 이러저리 끌려 다니며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이를테면 칸무 천황은 두 번씩이나 왕도를 옮기느라 수많은농민들을 징발해서 도성을 쌓게 했다. 785년 도성 축성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징발되어 온 농민은 자그마치 31만 4천 명에 달해다. 또 에미시(아이누족, 지금의 훗카이도 지역 등)의 침공으로 (783년부터) 토벌 전쟁에 농민들이 징병되어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등 농민들은 귀농하지 못하고 크게 시달렸던 것이다. 반면에 백제인 왕족과 귀족 및 승려들은 전국 각지의 산림과 농토를 소유하고 호의호식하며 부유하게 살았으며 지방관리들의 부패 또한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칸무 천황은 조정의 조신 등 고위 신하들을 백제왕족들을 중심으로 발탁했다.'(속일본기)

칸무 천황은 집권 후기에도 덕정을 베푸는데 힘썼으나 지방 귀족이며 토호(土豪)와 농민들 사이에는 날로 대립이 심해졌다. 그 당시에 키타야마 시게오는 이렇게 지적했다.

'칸무 천황의 2ㄹ대 정책인 군사와 조구에 의해 피폐해진 농민들의 형편은 이제 급기야 천황을 비롯해서 중앙의 권력자들을 위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천황은 만녀이 되자 천하에 덕정을 행하기로 마음속 깊이 결심했다. 이래서 제4차 에조 토벌의 중지와 헤이안궁 건설 공사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칸무 천황은 조정의 요직에 모두 백제인들을 앉혔다. 또 백제왕족인 조신들의 주청을 언제나 잘 들어주었던 내용들이 관찬 역사책 '속일본기'의 칸무 천황조에 허다하게 전하고 있다. 칸무 천황이 궁중의 백제왕족 조신들 중에서도 가장 총애한 신하는 백제왕 명신(明信, 메이신)이었다. '백제왕'이란 백제왕족의 통칭이다. 그 내용은 스가와라노 미치사네(管原道眞, 845~903)가 892년에 편찬한 '루이쥬 코쿠시'에 잘 나타나 있다. 795년 4월의 왕실 연회 때 칸무 천황이 몸소 명신(메이신)에게 와카(和歌)를 읊어주었다. 명신이 그 시가에 화답하지 않고 잠자코 있다 칸무 천황이 대신 화답했다. 

이와 같이 철두철미하게 백제왕족들을 거느리던 칸무 천황이 한일동족론 관련 서적들을 불태우게 한 이유는 모름지기 백제인 왜왕가가 '일본화'를 크게 서두른데 있다고도 추찰된다. 즉 고통받는 선주민 농민들이 백제인 천황가의 통치를 받으며 위화감과 열등감 등으로 불만이 고조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억제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본국인 백제는 이미 660년에 망한 지 벌써 백수십 년이나 되었고, 한반도는 백제를 멸망시킨 통일신라의 시대인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왜나라의 백제인 왕가는 통일신라 왕가에 분노와 적개심마저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오우진,니토쿠 천황이 백제왕족이라고 하는 미즈노 유우는 논술을 살핀 바 있다. 그런데 그는 그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게 된다.

'상고시대에 우리 왕조(일본왕조)는 끊임없이 백제와 연합했으며,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보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 유대적인 숙명을 지니고 왔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

즉 오우진,닌토쿠 천황은 백제인이고, 그러기에 왜왕가와 백제는 한 핏줄로서 신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연합해왔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이 삼한과 동족이다'라고 하는 발자취에 대해서 백제인 칸무 천황의 왕가는 비통한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하다.

그런데 칸무 천황 당대의 신라는 여러 왕의 계승이 이어졌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선덕왕(780~785), 원성왕(785~798), 소성왕(798~800), 애장왕(800~809)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전쟁이나 큰 충돌이 없었다. 한일 양국의 역사책을 보면, 우선 '삼국사기'에는 다음 두 대목의 기사가 있다. 

'애장왕 3년(802) 12월, 왕이 균정(均貞)에게 대아찬 벼슬을 주고 그를 가왕자(가짜왕자)로 삼아 왜국에 인질로 보내려고 했으나, 균정은 이를 거절했다.4년(803)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파견하고 황금 3백냥을 진상해 왔다. 

일본 관찬 역사책인 속일본기와 일본후기에 각기 칸무 천황 당시의 기사가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료에는 대신라 관계 기사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일본후기에만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칸무 천황 19년(799) 5월 29일 신라사 파견을 중지했다. 칸무 천황 24년 9월 18일 병부소승(兵部少丞) 정6위상 신마리를 신라국에 파견했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해둘 것은 일본후기의 칸무 천황조는 모두 13권이나 그중 네 권만이 전하고 나머지 아홉 권은 결권(缺卷)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결권들속에 '한일동족론 분서사건'의 기사가 그 어딘가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도 여기 덧붙여둔다. 결권에 관해서는 일본학자들도 원인규명이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우닌의 난(應仁之亂, 16세기)때 책이 흩어져 없어진 게 아닌가 한다'고 요시오카 마유키는 논술하기도 했다.(일본후기, 1975)

여하간 일본역사에서 한일동족론의 진원이 백제인 칸무 천황 당시에 불거져 나와 그것이 분서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면, 당시가 비록 전체 통치시대였다고 하더라고 그 파장은 왕가와 백성들 사이에 엄청나게 큰 것이 아니었던가 추찰케 한다. 한일동족론의 발설은 키타바다케 치카후사 이후 약 4백여 년이 지나야 다시 이야기된다. 

즉 한일동족론은 에도 시대의 토우테이칸(1732~97)을 비롯해서 메이지 시대(1868~1912)의 쿠메 쿠니다케(1839~1931) 일제 군국주의 치하의 키타 사타키치(喜田貞吉, 1871~1939) 카나자와 쇼사브로(1872~1967) 등의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다만 한 가지 미리 밝혀두자면 그들이 '한일동족론'을 어떤 목적으로 연구했건간에 '한국인과 일본인은 동일 민족'이라는 근본정신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의 다음과 같은 역사관은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라고 본다. 

고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한과 중국 대륙 및 남양 방면으로부터 일본 열도에는 끊임없이 씨족적으로 집단 이주해왔다. 그들은 어미 토우호쿠(東北) 지방의 변경지대며 이즈의 7개 섬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흩어져 토착하여 살았다. 또 당시는 아직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도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주해온 사람들은 어느 특정한 나라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부락민 또는 씨족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집단들과 뒤섞여 살게 되었다고 본다. 그런 가운데 그들 속에서 유력한 호족이 나타나게 되고, 본국으로부터 유력한 씨족들이 계속해서 건너옴으로써 차츰 중앙정권을 이루기 위한 권력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특히 바로 코앞에 있는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호족을 대표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이 일찍부터 일본 열도에서 조직적이고 강력한 세력을 이룬 한국인 호족들은 그들이 모시게 된 한국인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식민지 경영에 착수했다. 또 그들 역대 천황들은 사당(신사, 신궁)을 세우고 백제신, 신라신에게 신상제(新賞祭)라는 제사를 지냈다.


<백제인이 세운 일본 무사정권>

쿄우토의 히라노 신사에 모신 백제신들이 헤이씨의 씨신이 되었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헤이안 시대 후기의 최고 무장인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 1118~81)도 칸무 천황과 마찬가지로 백제인 후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타이라노 키요모리야말로 일본 역사상 겐씨(源氏) 가문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1123~60)를 무찌르고 왕조 국가의 군사력을 장악한 명장이다. 12세기 일본 무사시대는 백제인 타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멸망당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역시 백제인 무장이었다. 그는 백제인 세이와(淸和, 재위 858~876) 천황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 겐씨 가문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패배한 후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뒷날 '단노우라 전쟁'(1185)에서 헤이씨 가문을 멸망시킨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3남인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였다.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2년 왕도인 헤이안경(지금의 쿄토)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태평양 연안의 카마쿠라 땅에 무사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이른바 '카마쿠라 막부'였다. 쉽게 말해 그 당시부터 천황가는 실권을 빼앗긴 채 다만 상징적 존재로 머물기 시작한 것이다. 

1192년 7월 고토바 천황(1183~1198)은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운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무가 정치를 승인하면서 그를 '정이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이른바 '쇼군'(將軍)이라고 통칭되는 무단 정치는 이렇게 백제인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다. 정이대장군인 쇼군은 전국 각지에 부하 무장인 '다이묘'(大名)를 임명했고, 각 지역 다이묘들은 제 고장을 무력으로 관장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시대는 1336년에 두 번째 무사정권인 '무로마치' 막부를 탄생시킨다. 이것은 무장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58)가 이룩한 것이다. 1338년 그는 초대 쇼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무사정권은 200여 년이 지난 1573년에 막을 내린다.

이후 무장 오다 노부나가의 군사 독재 시대가 이어지고 계속해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의 군사독재 시대가 전개된다. 그러다가 1603년 지금의 토우쿄우에서 에도 막부가 탄생한다. 이 당시 무장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됨으로써 다시금 막부 무사정권 시대가 열렸다. 이 에도 막부 시대는 1867년 제 15대 장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마침내 천황 친정체제가 부활해서 1868년부터 이른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무상정권 시대의 발자취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무사정권은 백제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그 배후인 천황가 역시 백제인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황가에서 '니이나메사이(新嘗祭)라는 한국신 제사를 거행하고 있는 이유다. 

<백제인 혈통 입증하는 일본 고대문서> 

사실 한일동족론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역사시대는 8세기 칸무 천황 때를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일본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아스카(飛鳥, 592~645 또는 710) 문화 시대이다. 이 시기에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한번도 알려지지 않은 백제인 여왕이 존재했다. 일본 역사서에서는 이 백제인 여왕을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재위 592~628)이라고 부른다.

스이코 천황은 백제 왕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은 일본 최초의 정식 여왕이다. 신라의 선덕여황(재위 631~647)이 즉위하기 3년 전인 628년에 세상을 떠난 빼어난 여왕이었다. 선덕여왕이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여러 가지 업적을 쌓았다면, 백제인 스이코 천황 역시 당시 왜나라에서 한국 불교 문화의 눈부신 터전을 이루는 업적을 쌓았다.

스이코 천황은 백제불교를 바탕으로 '아스카 문화'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이 아스카 문화가 한반도에서 왜나라에 심어준 불교문화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8세기 초 왜왕실에서 편찬한 역사책인 일본서기에도 백제 불교가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스이코 천황은 백제의 관륵 스님을 모셔다가 천문지리학을 일으켰는가 하면, 백제의 음악가 미마지(味摩之)를 모셔다가 일본땅에 처음으로 한반도의 사자춤이며 아악을 이루었다.어디 그뿐인가. 고구려의 담징 스님을 모셔다가 호우류우지의 12면 금당벽화를 비롯한 미술 문화를 일으켰으며, 신라 진평왕의 환심을 사 대신라외교를 통해 신라 불교도 도입했다. 이처럼 스이코 천황은 모국인 한반도 3국(백제, 신라, 고구려)의 힘으로 아스카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운 슬기로운 여걸이었다. 그렇게나 출중한 그녀가 한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스이코 천황을 빼놓고는 '한일동족론'은 물론이고 '한일관계사'조차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스이코 천황에 관한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이른바 친일 식민사관이 아직도 이 땅에 잔존함을 입증하는 것일까.

<비다쓰 천황과 스이코 천황, 이복 남매간의 결혼>

킨메이 천황과 이시히메 사이에서 태어난 비다쓰 천황은 당연히 백제왕족이다. 그의 첫 번째 왕비는 히로히메였다. 비다쓰 천황은 왕위에 오른 지 4년이 된 575년 1월 히로히메를 황후로 맞이하였는데, 불과 10개월 만인 그해 11월 히로히메가 죽는 아픔을 겪었다. 히로히메의 사인은 밝혀져 있지 않다. 

히로히메 황후가 죽은 이듬해인 576년 3월 비다쓰 천황은 이복 여동생인 어여쁜 카시키야히메를 두 번째 황후로 맞았다. 이로써 왜나라 백제인 왕실에서 이복 남매간의 근친 결혼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이복 남매간의 근친 결혼은 흔한 일이므로 카시키야히메 공주로서도 자연스런 과정을 거쳐 결혼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 오늘날 일본 사가들의 시각이다. 일본서기는 스이코 천황이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용모가 아름답고,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여성이었다"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름답고 총명한 공주였던 카시키야히메는 상처한 이복오빠인 비다쓰 천황과 18세 때 결혼했다. 

스이코 천황과 비다쓰 천황의 사이는 원만했던 것같다. 물론 비다쓰 천황은 카시키야히메 황후 이외에도 여러 왕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카시키야히메 황후가 2남 5녀의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비다쓰 천황은 585년 48세로 죽고 만다. 그때 황후의 나이 32세였다.

미모의 젊은 과부는 남편과 사별한 후 즉각 거센 풍우에 휘말리게 된다. 죽은 남편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자들이 피비린내나는 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다쓰 천황이 승하하자 장례가 거행되었다. 일단 시신을 모시는 빈궁(모가리노미야)이 마련되었다. 당시 본국 백제에서는 왕릉을 마련하고 매장을 하기 전까지 3년간 빈궁에 시신을 가매장하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이 앞에서 살폈듯이 '백제의 대빈'이라고 일컫는 3년 국장이다. 비다쓰 천황의 시신은 히로세 땅에 마련한 빈궁에 가매장되었다. 히로세는 지금의 나라현으 코우료우쵸 백제였다.

카시키야히메 황후는 이 히로세의 빈궁 안에서 승하한 비다쓰 천황의 명복을 빌면서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조정 신하들도 빈궁에 찾아와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때 왕실 쪽에서 볼멘 소리를 하는 왕자가 한 명 있었다. 아나호베 왕자였다. 그는 이렇게 고함치며 다녔다. "어째서 죽은 왕의 빈소에만 모여들고 살아 있는 왕은 모실 줄을 모르느냐?"

혈수부 왕자, 즉 아나호베는 스스로가 왕위 계승권자라고 떠벌리고 다니면서 모두들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울분을 터뜨렸던 것이다. 

자칭 왕위 계승권자인 아나호베 왕자는 킨메이 천황과 그의 세 번째 왕비인 오아네키미 사이에 태어난 왕자였다. 즉 카시키야히메 황후의 이복오빠였다. 그는 행동이 난폭하고 경솔한 데다 엉뚱한 짓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이 무렵 아나호베 왕자는 모노노베노 모리야(515~587) 대련(大連, 조정 제2위의 벼슬)과 은밀하게 결탁하고 있었다. 즉 모노노베 모리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 계승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의 최고 권력자는 소가노 우마코(550~626)대신이었다. 그와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불교의 일본 전래에 대해 대립하고 있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숭불파였고,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배불파였다.

날이 갈수록 궁 안팎은 시끄러웠다. 마치 먹구름이 낀 폭풍 전야와도 같았다. 미모의 과부 카시키야히메 황후는 사태가 험악해지는 기미를 이미 알아차린 듯, 빈궁에서 꼼짝 않고 죽은 남편 비다쓰 천황의 명복만 빌 따름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심각한 대립을 막을 만한 묘수가 달리 없었다. 선왕 상중에 감히 누고도 함부로 일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또한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실제로 황후에게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빈궁 안에서 잘도 버텼다. 복상한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그 사이 새로 왕위를 계승한 것은 아나호베 왕자가 아닌 요우메이 천황이었다. 그는 이복형인 죽은 비다쓰 천황의 뒤를 이었다. 즉 그녀의 친 오빠가 남편 비다쓰 천황의 뒤를 계승한 것이다.

요우메이 천황을 옹립한 것은 최고대신이자 숭불파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카시키야히메 황후가 협의한 결과였다. 백제 불교의 철저한 옹호자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바로 백제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기 집(코우겐지)에 모셨던 죽은 소가노 이나메(505~570) 대신의 아들이다. 게다가 소가노 우마코는 카시키야히메 황후(뒤의 스이코 천황)의 친외삼촌이기도 했다 즉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친누님이 스이코 황후와 요우메이 천황의 생모였던 것이다.

5월의 어느날, 드디어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일본서기는 그 역사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5월, 초여름 어느날 아나호베 왕자는 카시키야히메 황후를 강간하려고 강제로 빈궁을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비다쓰 천황의 총신 미와노 키미사카후(三輪君逆)가 경비병들을 불러 아나호베 왕자의 침입을 막았다. 카시키야히메 황후가 혼자서 정숙하게 지키고 있는 빈궁에 왕자는 고함을 지르며 침입하려고 했으나, 그는 언쟁 끝에 쫓겨나고 말았다.

카시키야히메 황후는 미오노 키미사카후로부터 배다른 오빠인 아나호베 왕자의 난동을 보고받았다. 어느새 왕궁 안팎으로는 "왕위를 노리던 아나호베 왕자가 선왕의 황후를 욕보이려고 빈궁에 난입을 꾀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발끈한 아나호베 왕자는 빈궁을 지키면서 제 앞을 가로막았던 미와노 키미사카후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조정의 배불파(排佛派) 우두머리인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에게 미와노 키미사카후의 살해를 명령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부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미와노 키미사카후의 거처를 기습해 결국 죽여버렸다. 

드디어 왕궁을 둘러싸고 거센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아나호베 왕자는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일당과 반역을 모의해 마침내 요우메이 천황의 왕권을 뒤엎기로 작정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자신의 본거지인 아도(阿都, 현재 오오사카의 야오시)에서 반란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편 비다쓰 천황에 이어 왕위에 오른 요우메이 천황은 몸이 허약해서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친누이동생인 카시키야히메 황후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곧 병석에 눕게 되었던 것이다.

<한일 양국의 대실권자는 백제인 곤지왕자>

한편 동성왕의 아들들인 무령왕과 케이타이 천황을 각각 백제와 왜나라의 권력의 일인자로 등극시킨 할아버지 곤지왕자(昆支王子)야말로 당시 한일 양국에 걸쳐 막강한 '한왜연합왕가'(韓倭聯合王家)의 세력을 형성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에카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왜한연합왕국'(倭韓連合王國)의 왕(王)이라는 용어를 신라인 스진 천황(崇神天皇, 2~3세기경)에게 붙이기도 했다(『騎馬民族國家』, 岩波書店, 1967) 여하간 백제왕실에서 왜나라 왕실로 건너온 백제인 곤지왕자는 그 후에도 계속 왜왕실에서만 살다가 카와치(河內)땅에서 서거하게 된다.

지금 오오사카부(大阪府)의 하비키노시(羽曳野市)가 그 옛날 카와치의 아스카 터전인데, 이곳에는 유명한 '곤지왕 신사'(昆支王神社)가 있다. 이 신사는 요즘에 와서 주로 '아스카베 신사'(飛鳥戶神社)라고 부르는데, 곤지왕자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이 터전에 옛 문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유우랴쿠조(雄略朝)에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왕족인 곤지왕은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의 조상으로서, 이 터전을 본거지로 삼았다. 조선의 삼국사기의 고증에 의하면 그가 건너온 것은 유랴쿠조보다 좀더 거슬러 올라간 인교조(允恭朝) 무렵(5세기 초)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조상신(百濟)을 제사 모시는 씨신(氏神)으로서 아스카베 신사(飛鳥戶神社)를 창사(創社)했다. 또 한 씨사(氏寺)로는 아스카산 죠린지(飛鳥山 常林寺)라는 사찰을 산 남쪽 기슭에 세우고 있었다.(『古田文書』).

이와 같이 곤지왕자는 생전에 왜왕실에서 백제왕가의 조상신 제사를 도맡았으며, 죽어서는 왜나라 백제 왕부의 제신이 되었던 것이다. 아스카베 신사는 곤지왕자의 아들 중 하나인 비유왕(毘有王)도 중세 말까지 제사 지냈다고 한다.

현재 곤지왕 신사가 자리잡고 있는 일대는 곤지왕자의 후손들인 아스카베씨(飛鳥戶氏)·후나씨(船氏) 등 백제인 왕족들이 살고 있던 큰 고장이다. 그래서 이 일대에는 백제인 고분 수천 기가 있었고, 현재도 580여기의 옛 무덤들이 그 옛날의 백제인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카와치 아스카'(河內飛鳥)라고 일컬어지는 이 고장에서 주목받은 고분지대로는 우네비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고분들과 니이자와 천총(新澤千塚)을 들 수 있다.

특히 1960년 초 '니이자와 126호분'에서 발굴된 '방제형금관'(方製形金冠)은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왜냐하면 이 방제형금관과 똑같은 것이 1971년 백제 무령왕릉의 왕비 머리 부분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방제형금관과 똑같은 금관이 발굴된 '니이자와 126호분' 역시 모름지기 백제계 왜왕비의 무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뿐 아니라 이 무덤에서는 무령왕릉의 왕비 발끝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형태의 '청동 다리미'도 출토되어, 니이자와 126호분의 장법(葬法)이 모국 백제왕가의 장법과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실제로 니이자와 천총에서 발굴된 무덤들은 대부분 한반도 양식인 횡혈식 고분이라는 공통점도 보이고 있다.

한편, 니이자와 천총 바로 근처에 '센카 천황릉'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다음의 보고서를 보자.

니이자와 천총에 들어서면 곧 눈에 띄는 것은 왼쪽으로 보이는 센카 천황릉(宣化天皇陵)이다.......... 센카 천황릉 앞에서 서서 서쪽의 도로 양쪽으로 펼쳐지는 야트막한 구릉들을 바라보면 참으로 많은 고분들이 겹칠 듯이 있다.

이 보고서에서 주목할 것은 센카 천황(宣化天皇, 재위 535~539)이다. 무령왕의 동생인 케이타이 천황(繼體天皇)의 차남이 다름아닌 센카 천황이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의 유물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 출토된 니이자와 126호분, 그리고 니이자와 고분에서 바라보이는 센카 천황릉은 무령왕 조카의 무덤이고.......아무튼 니이자와 천총은 백제인 왜나라 왕부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물이다.


<근초고왕이 오우진 천황에게 하사한 칠지도>

그러면 1630여 년 전에 백제에서 만든 칠지도의 양면에 새겨진 한자어들을 살펴보자. 칼 앞면의 한자 명문은 다음과 같다.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年正陽造百練鐵七支刀以벽百兵宣

    供供侯王□□□□作

칼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先世以來末有此刀百滋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상과 같은 한자어 명문은 녹이슨 칠지도의 글자(금상감)들을 일본 학자들(福山敏男, 榧木杜人, 三品彰英, 栗原朋信)이 다각적으로 판독해낸 것이다. 이 한자어 명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서기 369년(태화 4년) 5월 16일 병오날 정양에 무수히 거듭 단근질한 강철로 이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적병을 물리칠 수 있도록 이 영도(靈刀)를 후왕에게 보내주는도다. □□□□작

(뒷면) 선대 이후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세자 귀수성음은 왜왕을 위해서 만들어주는 것이니, 이 칼을 후세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



이와 같이 당시 백제 근초고왕과 귀수세자(貴須世子, 후의 근구수왕, 재위 375~384)는 전대미문의 훌륭한 칠지도를 만들어서 왜에 있는 백제왕국의 후왕인 오우진 천황에게 보내주었다. 그 칼로 왜왕은 모든 적군을 무찔러 백제 식민지의 보전에 힘쓰며 번창할 것을 어명(御命)한 것이었다.

이 칠지도의 명문은 누가 읽더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하행문(下行文)임을 알 수 있다고 우에다 마사아키는 지적했다. 즉 본국 백제의 근초고왕과 귀수세자가 왜의 오우진 천황과 그의 후세를 축복하며 보낸 보도(寶刀)인 것이다. 당시 왜국이 백제인 후왕이 거느리던 백제의 터전이었음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말하자면 칠지도의 명문은 한일고대사에 있어서 백제가 일본을 백제왕부로서 다스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품인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일본 사학자들이 하사설을 뒤엎으려고 상납한 것이라는 헌상설을 내세우는 등 엉뚱한 주장을 하므로, 그들의 논의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어사전』(日本史辭典, 高柳光壽·竹內理三 編, 角川書店, 1976)의 칠지도 항목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검. 나라 텐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 신궁의 신역(神域)에서 출토, 이 칠지도는 일본서기의 진구우 황후 52년조 기록에 보이는 칠지도에 해당된다고 여겨진다. 전체 길이 약 75cm. 칼몸(刀身)의 좌우에 각 3개씩 양날의 가지칼(枝刀)을 서로 번갈아 뻗쳐 나오게 만든 생김새로 실용적인 칼은 아니다. 칼 몸체의 양면에는 금으로 상감된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칠지도는 당시 동아시아 각국의 이해와 갚이 관련되어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설(定說)은 밝혀지지 않았다. 369년 백제왕이 왜왕을 위해 만들었다고 추정되며, 백제에서 온 '헌상품'으로 보는 설이 있고,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물건'이라는 설, 그밖에 동진(東晋)에서 백제왕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한 물건'이라는 설이 있으며, 명문(銘文)을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의 왜왕에게 '바쳤다'(貢上)는 기사와 단순하게 연결짓는 점이 비판되고 있다. 국보.

먼저 쿄우토 대학 사학 교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의 하사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우에다는 칠지도를 연구 검토하기 위해 이소노카미 신궁을 3번이나 찾아가 칠지도를 직접 만져보면서 칼 앞뒷면의 명문을 조사했다. 우에다는 그의 저서(倭王の世界, 1976)에서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임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칠지도에 새겨진 60여 글자 중에 판독이 곤란한 부분도 있어서, 전문을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고심 끝에 해독하여 밝혀진 것을 따르자면 칼의 명문 그 어디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글귀는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는 일본서기의 진구우 황후 52년조 기록을 빙자하여 '헌상설'이 별로 의심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주장돼왔다. 명문 해석은 우선 명문 그 자체에 의거해야 한다. 일본서기는 귀중한 고전이기는 하되,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완성된 이 역사서에 의거해 칠지도의 명문을 해독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본다.

칠지도의 명문에는 백제왕이 '왜왕을 위해 만들어준 것이며, 이 칼을 후세까지 길이 잘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고 되어 있고, 따라서 이 칼을 만든 주체도 백제왕이다. 그뿐 아니라 칠지도처럼 생긴 칼이 중국에서 단 한 자루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동진(東晋)을 칠지도의 주체로 보려고 하는 설의 허점이다.

반면 한국에는 칠지도와 유사한 철기가 있다. 1962년 경북 칠곡군 인동면 황상동(仁同面 黃桑洞) 1호 고분에서 출토된 길이 24cm의 철기와 1971년 부산시 동래구 오륜대 유적에서 발굴된 길이 21cm 및 14.3cm의 이형(異形) 철기다. 이것들도 칠지도와 마찬가지로 칼의 좌우 양쪽에 가지(枝)가 3개씩 있다. 경남 함양 상백리(上栢里)의 고분군에서도 그런 것이 출토되었는데 의장용(儀仗用)이라고 한다.

당시 백제 세력은 한층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 위치에 있던 백제왕이 왜왕에게 복속(服屬)해서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하는 것은 백제 쪽 정세를 살필 때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다. 더구나 명문 자체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확증할 만한 글귀는 없다. 백제왕이 '모든 군사(百兵)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벽사(僻邪)의 주도(呪刀)를 만들어 왜왕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군사 동맹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었으리라. 

고사기의 오우진 천황조를 보면, '백제국의 근초고왕이 횡도(橫刀) 및 큰 거울(大鏡)을 바쳤다(貢上)'고 씌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횡도와 큰 거울을 칠지도와 칠자경으로 쓰고 있다. 어쩌면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칠지도가 실제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칠지도에 대한 기사를 쓴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에다 마사아키는 칠지도와 관련해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칠지도에서 없어진 네 글자>

칠지도의 명문을 살펴보면 명문 끝쪽의 4개의 글자가 깎여 있다. 즉 □□□□作으로 되어 있다. 누가 이 4개의 글자를 깎아버린 것인가. 우에다 마사아키는 그 4글자는 누군가 고의로 깎은 것이라고 했다.

칠지도 몸체의 앞뒷면에는 금상감으로 60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칼 아래쪽 약 3분의 1 되는 지점이 부러져 있으며, 명문(銘文)도 깎여 떨어진 부분이 적지 않고, 고의로 깎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石上神宮と七支刀, 1973)

이 칼을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처음으로 찾아내고 녹을 떼내 금상감이 된 명문을 세상에 알린 것이 스가마사토모였음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그가 칠지도의 녹만 떼어낸 것이 아니고 네 글자도 깎아버렸다는 말인가. 그는 칠지도 앞뒷면이 검게 녹슬어 있어서 모든 녹을 떼내고 금상감이 되어 있는 명문 글자들을 찾아냈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그는 1877년 이소노카미 신궁 궁사직을 떠나 일본 군국주의 내각이었던 태정관(太政官)의 편사국(編史局)으로 자리를 옮겨갔고, 1888년에는 토우쿄우 대학의 편사국 편사관이 되었다. 그는 편사국에서 일하면서 「임나고」(任那考, 『史學會雜誌』, 1893)라는 논문을 썼는데,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갖다 바쳤다는 일본서기의 헌상(獻上) 기사를 제시하고 일본서기의 허위 기사인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역설했다.

그가 이 논문을 발표한 시기는 25만 명의 일본군이 이미 조선반도에 들어와 머지 않아 청나라로 밀고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중책을 맡은 그도 아마 일본 군벌의 중압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임나고가 일본의 조선침략의 역사적 근거를 세우는 데 이용되지는 않았을까. 여하간 백제왕의 신보(神寶)인 칠지도 앞면의 네 글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깎인 것인가.

스가 마사토모가 이소노카미 신궁의 책임자(궁사)로 근무하던 시기(1873~77)였을까, 아니면 그 후의 일일까. 일본의 군국주의가 날로 팽창하여 '정한론'(征韓論)을 구체적으로 보강시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論吉)의 '탈아론'(脫亞論)이 주창된 1885년 3월 16일 이후의 일이 아닐까 추찰해 보기도 한다. 또 이런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군국주의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필경 깎여버린 그 넉 자는 '백제왕국' 이나 백제인 도검(刀劍)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온사 명칭 바꾼 군국주의자들>

야사카 신사의 축제를 기온마쓰리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 이 야사카 신사의 사당 명칭이 '기온사'(祇園社)였기 때문이다. 야사카 신사라는 사당의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이 지은 이름이다. 메이지 유신 때 일본 정부는 불교를 배척했다. 그래서 그때까지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신불 동일체의 종교적인 관습을 깨고 신만을 국가적으로 받들면서, 이른바 황국사상이라는 국수주의적인 종교 관념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러한 것이 군국주의 일본의 새로운 기치를 내거는 일이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에 의해 '기온사'는 이름이 '야사카 신사'가 되었고, 불교적인 요소는 제거되었다. 물론 기온사 사당은 고대부터 신라신인 우두천왕(스사노오노미코도)을 제신(祭神)으로 삼고 제사드려 왔다. 그러나 신사적인 성격보다는 불교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게 강했던 곳이다. 더구나 신라에서 기온사(祇園寺)라는 사찰을 진흥왕이 세웠는데, 이 사찰은 쿄우토의 기온사와 연관이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온마쓰리가 일본에서 가장 큰 제례 축제인 까닭은 기온사가 바로 마쓰리의 원류(源流)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3대 마쓰리는 쿄우토의 기온마쓰리, 오오사카의 텐만마쓰리(天滿祭)와 토우쿄우의 칸다마쓰리(神田祭)다. 그런데 오사카의 텐만마쓰리나 토우쿄우의 칸다마쓰리의 원류는 바로 기온사의 기온어령회(祇園御靈會)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고 보면 기온마쓰는 한국신 우두천왕제로서 일본의 모든 마쓰리의 총본산을 이루어오고 있는 것이다. 일본 천황가가 한국인 왕들에 의해 왜나라를 지배해 왔다는 것은 이와 같은 거창한 제신(祭神)의 마쓰리 전통 문화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는 데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쿄우토의 기온사인 야사카 신사는 전국 각지에 7만 9천1백52사(1992년 통계)를 지역 신사로 거느리고 있다. 이들 각지의 야사카 신사에서는 해마다 7월(음력 6월)에 한국신 우두천왕을 모시고 제사드리며 마쓰리를 성대하게 거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쿄우토의 야사카 신사는 총본사이거니와 이곳의 궁사(宮司, 최고 책임 신궁)는 고구려 사신이었던 이리지의 후손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고 야사카 신사의 궁사인 타카라 요시타다(高良美忠)씨는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야사카 신사는 이리지의 장남 마테(眞手)의 자손들이 대대로 야사카노 미야쓰코(八坂造, 齊明天皇이 고구려에서 온 사신 伊利之에게 내려준 양성)를 세습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八坂神社, 1972)

『신찬성씨록』에도 '야사카노 미야쓰코(八坂造)는 고구려인 이리지(伊利之)이다'라고 밝혀져 있다. 이리지는 옛 문헌에 고구려 사신 이리좌(伊利佐, 이리사)로도 간혹 표기되어 있으나 이리지와 틀림없는 동일 인물이다.

스이코 천황은 현재 우리 옷과 조금도 다름없는 고쟁이와 치마를 입고 코끝이 오똑한 버선을 신었다. 그녀는 596년 11월 백제식 대가람인 호우코우지(法興寺)를 준공시키면서 마침내 왜나라를 불교국가로 만들려는 기치를 높이 쳐들었다. 백제으 성왕이 왜나라 백제인 킨메이 천황에게 불교를 포교한 이후 불교는 배불파에게 두 번의 수난을 겪은 끝에 성왕의 포교 56년째인 반세기만에 왜나라 아스카(飛鳥) 땅에서 마침내 그 성업을 이룬 것이다.

스이코 천황은 아버지 킨메이 천황이 못다 이룬 불교국가를 이룩한 자랑스러운 한국 여성이다. 부왕인 킨메이 천황뿐만 아니라 부군 비다쓰 천황조차도 배불파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 대련 등에게 불교 배척의 시련을 겪은 것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본 스이코 천황은 이제 39세로 아스카 땅에서 등극한 왜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다행히 친외삼촌인 최고대신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0~626)가 목숨마저 내건 강력한 숭불 투쟁으로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당을 파멸시켰고, 드디어 아스카땅에 백제식 가람 호우코우지를 세웠다. 이 기쁜 소식을 스이코 천황은 본국인 백제의 위덕왕(威德王, 554~598)에게 즉시 알렸다.

위덕왕은 크게 기뻐했다. 부왕인 성왕의 큰 뜻이 이제야 비로소 왜나라 스이코 천황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위덕왕은 성왕이 554년에 서거한 뒤 그를 추모해서 훌륭한 불상을 만들었다. 그 불상은 녹나무(樟木)로 조각한 높이 1.7m의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이다.

위덕왕은 이 구세관음상을 잘 모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 왜나라에서 불교 포교에 앞장선 스이코 천황이 592년 등극한 것이다. 위덕왕은 매우 기뻐하며 구세관음상을 스이코 천황 원년에 보내주었다.(『부상략기』). 이 구세관음상은 현재 나라의 호우류우지(法興寺) 몽전(夢殿)에 모셔져 있는 일본 국보다. 더구나 이 구세관음상은 아무 때나 배관할 수 없는 호우류우지의 귀중한 비불(비불)로서, 봄 가을 두 번의 관람 기간에만 볼 수 있다.(4월 11~5월 5일, 10월 22일~11월 3일).

백제 위덕왕이 이 구세관음상을 스이코 천황에게 보내준 지 3년 만에 나라땅 아스카에서 호우코우지(아스카지)가 준공되었다. 588년 3월부터 백제인 최고 대신 소가노 우마코가 착공한지 8년 만인 596년 11월의 일이다. 그동안 이 호우코우지를 세우기 위해 백제에서 수많은 사찰 건축가와 각종 기사며 사신과 스님들이 왜나라로 건너왔다. 이 가람을 완성시키는데 앞장선 것은 소가노 우마코 대신만이 아니었고, 스이코 천황의 노력도 컸다. 또 독실한 불교신도인 성덕태자는 이 곳에 머물면서 고구려의 혜자(惠慈) 스님과 백제의 혜총(惠聰) 스님 문하에서 불경 공부를 했다. 법당들이 하나하나 세워지는 가운데 대패질이며 톱질소리, 주춧돌 쪼는 징소리를 온종일 들으면서 나이 어린 성덕태자는 불교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린 소년은 왜나라 땅에 불교를 포교시킨 성왕의 거룩한 뜻을 늘 가슴속에 아로새기며 호우코우지 완공의 날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성덕(聖德)'은 일종의 법명이며, 백제 성왕(聖王)의 덕(德)을 입었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본다.

호우코우지가 세워지면 불교국가를 이룩하겠다던 의지의 한국 여성 스이코 천황은 성덕태자의 친고모였다. 성덕태자는 스이코 천황의 친오빠 요우메이 천황(用明天皇, 588~587)의 왕자였다. 13세 때 부왕을 잃고 불경 공부에만 전념하던 성덕태자는 스이코 천황이 등극하자 소가노 우마코 대신에 의해 친고모의 태자가 되고 또한 정치적이 섭정이 되었던 것이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바로 성덕태자의 친외할아버지였다.

스이코 천황과 소가노 우마코 대신 그리고 성덕태자 이 세 사람은 아스카 시대 한국불교가 왜나라에 정착하는데 가장 공헌한 삼두마차였다. 이 세 사람이 없었다면 한국 불교의 왜나라 정착은 훨씬 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 고대 한국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아스카 문화, 곧 한국 불교 문화에 대해서 우리나라 역사책에도 상세하게 기록해두어야 한다.

<일본으로 전래된 고조선의 천신(天神) 신앙>

이 큰 나무인 솟대는 신목(神木)으로서 천신이 깃들이고 있는 신성한 나무다.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우리는 조상대대로 솟대를 섬기면서 마을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드리고 축제를 거행해왔다. 그와 같은 신목에 대한 솟대 신앙은 고대의 한국인 정복왕들에 의해 왜나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에다 마사아키는 솟대를 섬긴 고조선 사람들의 천신 신앙이 바로 일본의 신목제사(神木祭祀)터인 신리(神籬, 히모로기)임을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소도라고 부르는 별읍(別邑)이 있고, 그 곳에 큰 나무을 세워 방울을 걸어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하는 위지동이전의 한(韓)의 항목이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것은 실로 고대 일본의 신리(神籬, 히모로기)인 것이다. 신이 깃들이는 나무인 신목(神木)을 제사드리는 마쓰리(祭)였다.

일본의 고대 역사에서 신화시대에는 신성한 나무를 신목으로 삼고 신이 깃들이는 곳으로 삼아 신상제(新嘗祭, 니이나메사이)를 지냈던 자취들을 능히 살필 수 있다. 신화시대의 신들의 신상제는 가을의 수확을 농신(農神)에게 감사드리는 제례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제의를 거행한 신은 아메와카히코(天稚彦)와 야마사치히코(山幸彦)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뿐 아니라 농신에게 제사드린던 집을 '신상옥'(新嘗屋, 니이나메야)이라고 호칭했던 것이 고사기(古事記)에 실린 두 곡의 가요에 보인다. 그 내용을 보면 신상옥에는 신성한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지동이전의 고구려 항목에도 '궁실(宮室) 좌우에다 큰 집(大屋)을 세우고 신에게 제사지냈다'는 고구려 때의 제신(祭神) 유습의 기사가 있다. 즉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고구려의 동맹 또는 동명(東明) 제사 때 왕실에서 궁의 좌우에 천신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을 지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이와 같은 제례의식이 고대 왜나라로 옮겨간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왜나라 천황들이 한국신(백제신과 신라신)에게 제사드리는 신상제가 정식으로 기록된 곳이 일본서기다. 여기에는 코우교쿠 천황(皇極天皇(여왕), 642~645, 백제인 죠메이 천황의 황후) 원년 11월 16일 토끼날(卯日) 천황이 몸소 신상제를 거행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역대 천황들은 해마다 같은 날인 음력 11월의 두 번째 토끼날 신상제를 거행했으나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또 세이와 천황(淸和天皇, 858~876) 때는 11월 15일인 두 번째 범날(寅日) 거행한 일도 있다. 그후 히가시야마 천황(東山天皇, 1687~1709) 때부터 다시 거행되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3년부터는 천황가에서 신상제를 양력 11월 23일로 정했다. 한편 2차대전 패전 직후 미군점령기인 1947년부터는 이날을 '근로감사의 날'이라는 축일로 정했다. 당시 미군은 천황가를 견제했다. 이날이 일반국민에게는 평범한 공휴일의 하나지만 천황가의 궁중 신전에서는 여전히 신상제를 거행하며 지금에 이른다



<나라(奈良)는 '국가'라는 한국어>

아스카의 7당가람에서는 이제 누구든지 아스카의 호우코우지를 찾아가 예불할 수 있게 되었다. 감히 불전을 파괴한 국신파들은 모두 섬멸된 것이다. 그러기에 아스카의 '테라'로 사람들의 발길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절'을 말하는 일본어 '테라'는 한국어의 '절'에서 생긴 말이라고 불교사학자 타무라 엔쵸는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오늘의 평안도 사투리처럼 '절'을 '뎔'이라고 말했던 게 아닌가 한다. 호우코우지(아스카지)에 온 고구려 고승 혜자 스님 등이 '뎔'이라고 하는 말을 왜인들이 '뎌라' 등으로 발음하던 것이 '테라'로 변화한 것으로 본다. 여하간 아스카의 호우코우지로부터 본격적으로 '테라'라는 말이 퍼졌을 것 같다.

또 '나라'(奈良)로 말하자면 한국어의 '나라' 즉 '국가'를 말하는 이두식 한자어 표현이다. 그게 사실인가. 일본의 권위 있는 고어학자 마쓰오카 시즈오는 그의 명서 『일본어고어대사전』(1929)에서 일본어 '나라'는 한국어로 '국가'라고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나라'는 야마토(大和)의 지명. 도읍으로 유명하다. 나라는 한국어에서 국가라는 뜻이므로, 상고 시대에 이 고장을 점령하고 살던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마쓰오카 시즈오는 그후 8년 뒤인 1937년에 저술한 『신편 일본고어사전』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라(奈良):국가라는 뜻. 야마토의 옛 지명으로서, 상고 시대에 이 지역을 점거하고 살던 한국 출신의 이즈모족(出雲族, 신라인)이 쓴 이름이라고 본다.

나라(奈良)가 한국어의 국가라고 가장 먼저 밝힌 것은 저명한 역사지리학자 요시다 토우고(1864~1918, 문학박사)였다. 1900년에 간행한 저서에서 그는 "나라는 한국어의 국가다"라고 설명하면서 한글로 '나라'라고 굳이 표기하여(100쪽 도판의 표시부분) 주목을 끌었다.

일본 근대의 가장 권위 있는 국어학자 오오쓰키 후미히코(1847~1928)도 그의 저서인 『대언해』라는 일본어 사전에서 "나라는 조선어로서 도읍지(왕도)를 가리키는 말임"을 입증했다. 그밖에도 현대의 역사학자인 칸사이가쿠인 대학 교수 나가시마 후쿠타로우도 '일본역사학회'에서 편집한 그의 저서에서 나라는 한국어의 국가임을 입증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것이 있다. 현재의 일본 나라 지방을 가장 먼저 지배한 것은 신라인들이라는 점이다. 앞에 예시한 학자들이 '나라'라는 말을 만든 것이 신라인이라고 한 지적에서도 그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이 백여 년간 나라 땅을 지배한 후에야 그 고장으로 백제인들도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즉 카와치(오오사카) 지방에서는 4세기 후반에 백제왕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와치의 동쪽 멀이 떨어진 고장인 나라 땅에서 이미 2세기 말경부터 신라인들의 왕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오우진 천황과 닌토쿠 천황 시대(5세기) 이전에는 신라계의 스진(崇神) 천황이 3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정복왕으로서 나라 지방을 점거했던 것으로 본다. 그 과정은 토우쿄우 대학 교수 에카미 나미오가 쓴 『기마민족국가』(1948)에서의 '스진 천황의 왜나라 정복론' 및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 전설'등과 함께 밝히겠다.


<닌토쿠 천황이 천도한 백제군 터전 '나니와쓰'>

니이자와 천총의 고분들은 언제 누가 조성한 것일까. 카도와키 테이지(門脇禎二, 1925~)는 전체적으로 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형성된 후 6세기 전반기에 이르면서 쇠퇴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니이자와 천총은 백제인들이 키타큐우슈우(北九州)로부터 일본 내해(內海)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본토인 카와치 즉 지금의 오오사카 지방으로 상륙해 교두보를 탄탄하게 이루게 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당시 카와치 나루터는 그 이름이 나니와쓰(難波津)였고, 이 명칭은 백제인 왕인박사가 405년에 붙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노우에 마사오(井上正雄)는 일찍이 1922년에 "나니와쓰는 그 무렵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항구였으며, 이 항구를 본격적으로 건설한 것은 백제인들이었다"고 옛 문헌을 인용해 밝힌 바 있다. 나니와쓰로부터 동북쪽으로 인접한 곳에는 바로 백제인들의 무덤인 니이자와 천총이 자리잡고 있다.

또 나니와쓰, 즉 난파진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본국 백제에서 고대 왜나라 본토에 진입하는 데 가장 좋은 항구였다. 본국 백제에서 인력과 물자를 수월하게 지원받을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난파진 일대가 백제왕부의 새 터전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기에 오오사카 일대의 옛날 명칭은 '백제군'(百濟郡)이었다. 마치 영국 브리타니아의 가장 큰 도시였던 요크(York) 출신들이 대서양을 건너가 아메리카 땅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항구를 뉴욕이라고 이름붙였듯이, 고대 백제인들도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일본 열도에 건너가서 이룩한 새로운 식민지 항구를 난파진(나니와쓰)으로 명명하고 이 일대에 백제군이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 백제군이야말로 5세기 초 카와치 왕조(河內王朝)를 시작한 닌토쿠 천황의 본거지였다. 백제인 닌토쿠 천황은 부왕인 오우진 천황을 계승해서 왕위에 오른뒤 곧 지금의 오오사카땅인 카와치의 난파진 나루터에 왕궁(高津宮)을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파진은 카와치땅에서 닌토쿠 천황의 이른바 '카와치 왕조'의 번영의 터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노우에 마사오는 그의 저명한 고대백제 지정학사(地政學史) 격인 『오오사카부전지』(大阪府全志)에서 또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백제군에는 그 옛날 남백제촌(南百濟村)과 북백제촌(北百濟村)이 설치되어 있었다. 남백제촌에서는 응합촌(鷹合村)·사자촌(砂子村)·중야촌(中野村)이라고 하는 대단위 행정구역들이 있었다. 응합촌의 경우는 닌토쿠 천황 43년(5세기 중엽) 9월에, 아이고(阿耳古)가 잡은 매(鷹)를 백제인 주군(酒君, 사케노키미)에게 사냥에 쓸 매로 길들여 달라고 맡기면서 닌토쿠 천황이 이 터전에다 응감부(鷹甘部)라는 관청을 설치한 데서 생겨난 지명이다. 당시 닌토쿠 천황의 타카쓰궁(高津宮)은 난파진에 있었으며, 이 고장과 거리상 가까웠다. 백제의 주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 고장에서 장례를 지냈으며, 닌토쿠 천황은 그에게 '응견신'(鷹見神)이라는 제신(祭神)의 시호(諡號)까지 내렸던 것이다.

북백제촌에는 금재가촌(今在家村)을 비롯해서 신재가촌(新在家村), 금림촌(今林村) 등 큰 행정구역이 속해 있었다. 또한 천왕사촌(天王寺村, 현재의 大阪市 天王寺區)은 본래 백제군에 속한 큰 행정구역이었다. 그밖에도 석천백제촌(石川百濟村)과 백제대정(百濟大井)등의 지역이 난파진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군과 닌토쿠 천황의 교유는 일본서기에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닌토쿠 천황 43년 9월 1일 아이고가 이상한 새를 잡아다 천황에게 바치면서 "저는 항상 그물을 치고 새를 잡는데, 전에는 이런 새를 잡아본 일이 없습니다. 신기하기에 올리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천황은 주군(酒君)을 불러서 "이것이 무슨 새요?"라고 물었다. 주군이 대답하기를 "백제에는 이런 종류의 새가 많습니다. 잘 길들이면 사람을 곧잘 따릅니다. 또한 빠르게 날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새도 잡아옵니다"고 말했다. 이것은 지금의 매다. 왕은 매를 주군에게 길들이게 했다. 주군은 얼마 안 되어 매를 길들였다. 그는 가죽끈을 매의 발에 묶고 작은 방울을 꼬리에 달아 팔뚝에 얹어 천황에게 바쳤다. 이날 천황은 모즈노(百舌鳥野)에 납시어 사냥하게 되었다. 마침 암꿩이 많이 날았다. 매를 풀어서 잡으니 금세 수십 마리나 잡게 되었다. 이날 처음으로 응감부(鷹甘部)라는 부서를 설치했다.(日本書記).

닌토쿠 천황이 총애했던 주군은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백제에서 건너와서 카와치 조정에 근무했던 근신(近臣)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타계하자 천황이 애도하며 '응견신'이라는 시호까지 서슴지 않고 내렸던 것이다. 현재 카와치에는 커다란 주군의 비석이 서 있어서 그 옛날의 발자취를 입증해주고 있다.


<대 신라 외교에도 능통했던 슬기로운 스이코 천황>

길사반금은 신라에 갔다가 이듬해 4월 진평왕이 하사한 까치 두 쌍을 가지고 스이코 천황의 어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스이코 천황6년(598) 4월 사신 길사반금이 신라에서 돌아와 여왕에게 까치 두 쌍을 바쳤다. 여왕은 까치들을 난파(難派, 지금의 오사카 난바)의 사당(사당) 숲속에 풀어서 길렀다. 까치들은 나뭇가지에다 둥지를 틀더니 새끼를 쳤다. 8월 1일 신라에서는 공작도 한 쌍 보내주었다. 

백제인 스이코 천황이 신라의 진평왕에게 사신 길사반금을 친선차 보낸 것은 상호 두 국가의 화친은 물론 왜나라 불교 중흥을 위한 값진 외교 활동이었다. 진평왕에게 호우코우지가 준공된 사실을 알리면서 스이코 천황은 신라 불교의 지원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진평왕은 호감을 갖게 되어 당시 왜나라에는 없던 길조인 까치 두 쌍을 쾌히 보내준 것이다. 더구나 4개월 뒤에는 공작도 한 쌍 보내주었다. 스이코 천황이 난바(難波, 나니와)의 사당 숲에다 까치를 놓아 기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난바란 그 옛날 백제의 초기 닌토쿠 왕조가 자리했던 카와치의 항구이며, 그곳에는 백제의 왕가의 사당이 있었으므로 녹음이 짙은 숲에서 고국땅의 길조가 잘 자라기를 바랐던 것이다. 진평왕은 당시 왕위에 오른 지 19년째가 되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슬하에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덕만공주(德曼, 뒷날의 선덕여왕) 등 공주들만 있었다. 진평왕은 왜나라이 백제인 스이코 천황의 등극을 보고 덕만공주를 뒷날의 왕위 계승자로 삼고자 마음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서 왜나라 백제인 여왕의 존재는 신라 왕실과 신하들을 설득시킬 만한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스이코 천황이 진평왕에게 보낸 사신 길사반금은 백제인이 아닌 신라인 조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당시 나라땅의 신라인 호족 길사씨 가문의 후손이다. 그 무렵 스이코 천황의 조정에는 길사반금뿐 아니라 총애하던 또 한 사람의 신라인 조신 진하승(秦河勝, 하타노 카와카쓰, 6세기말~7세기경)이 있었다. 진하승은 그때 재무장관직을 맏았던 고관이며, 또한 야마사로(쿄우토) 땅 신라인 호족 진씨 가문의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스이코 천황의 조정에는 백제인 고관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신라인 고관들도 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조정의 고관으로서 선주민(先住民)인 왜인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왜인들은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들이며, 처음부터 한국인 정복왕(신라인 왕이나 백제인 왕)의 지배 아래 노예나 천민 등 하층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저명한 역사학자 세키 아키라의 저술(『歸化人』, 至文堂, 1968)에서도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문자를 다루는 일은 장기간에 걸쳐 귀화인(왜나라에 건너간 한국인) 씨족들이 도맡아서 전문적으로 처리해오고 있었다. 6세기 중엽이 되면 일본인(선주민)들 중에서도 조금씩이나마 문자를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생겼을 법한데도, 정치 관계 문서 등의 기록을 작성하거나 재물의 출납, 조세의 징수 또는 외교 문서의 취급과 같은 실무에 있어서는 역시 귀화계의 사람들, 즉 후히토(史, 한국인 고등 행정관리)들만의 독무대였다.'

이와 같이 한국인 정복왕조에서는 한국인 고관들이 선주민 왜인들을 지배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아스카 스이코 천황 시대에 특히 역량이 컸던 인물은 야마시로(山城, 지금의 京都 지역)의 호족 지배자며 부호였던 신라인 진하승이다. 재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재무장관을 지냈을 뿐 아니라 특히 섭정이던 성덕태자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스이코 천황이 진하승을 신라 진평왕에게 특사로 보낼 수도 있었으나 길사반금을 사신으로 보낸 것은 그동안 길사 가문이 대 한반도 외교에 솜씨를 발휘해 왔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을 보면 길사 가문에서는 외교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신라인 길사반금을 사신으로 보낸 것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두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무령왕과 케이타이 천황 형제 입증하는 '인물화상경'>

무령왕과 케이타이 천황이 친형제임은 고대 금석문이 그 내용을 입증한다. 무령왕이 503년에 아우인 케이타이 천황을 위해 왜나라로 보낸 청동거울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이 그 증거물이다. 이 청동거울이 '인물화상경'이라 불리는 것은 왕이며 왕족 등 말을 타고 있는 9명의 인물이 거울에 양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백제의 기마문화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무령왕이 아우에게 보내려고 만든 '인물화상경'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토우쿄우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 '인물화상경'을 처음에는 '스다하치만신사화상경'(隅田八幡神社畵像鏡)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한동안 우에노의 토우쿄우 국립박물관에 전시했지만 요즘에는 전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 박물관 어디엔가 보관해 놓은 것 같다.

이 '인물화상경'은 지름 19.8cm인 둥근 청동제 거울인데, 바깥 둘레를 따라 빙 돌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癸末年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柴紗加宮時, 斯麻, 念長壽, 遺開中費直穢人令州利二人等, 取白上銅二百早, 作此竟

이상과 같은 한자어 명문은 현대의 일본 역사학계가 판독하고 있는 글자들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503년 8월 10일 대왕(백제 무령왕)시대, 남동생인 왕(케이타이 천황. 오호도)이 오시사키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의 아들)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 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파견하는데,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이 명문은 무령왕이 친동생 케이타이 천황이 왜나라 땅에서 건강하게 오래도록 잘 살라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누가 읽거나 친형제간의 뜨거운 우애가 물씬 느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일본학자중에는 이 명문에 대해 엉뚱한 주장들을 펼치면서 본말을 전도하는 이들이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명문에 나타난 계미년(계미년)이 서기 몇 년을 가리키느냐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계미년을 443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63년 설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263년 설을 주장한 사람은 타카하시 켄지(高橋健自, 1871~1929)다. 그는 이 청동제 거울을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橋本市)에 있는 스다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라는 사당에서 찾아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 거울을 찾아낸 후 1914년에 논문을 발표하여 일본 사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263년 설은 오늘날 일본 학계에서는 근거 없는 것으로 묵살당하고 있다.

타가하시 켄지가 '263년의 계미년'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와다 아쓰무는 그것이 엉뚱한 주장이라며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타카하시설을 보면, 명문에 보이는 사마(斯麻)를 일본서기의 진구우기(神功紀)에 등장하는 사마숙니(斯麻宿녜 시마노스쿠네)와 연결짓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계미년에 관한 고증에는 무리가 있다.

사마숙니의 실존 여부를 떠나서 일본서기에 조신(朝臣)으로 묘사된 일개 신하가 주술적인 청동거울을 만들어 감히 왕에게 하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서기의 진구우기는 '가공의 조작된 기사'라는 게 공론화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사마숙니는 인물화상경의 '사마'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타카하시 켄지는 1911년에 왜국 왕가의 '3종(三種)의 신기(神器)', 즉 거울과 검(劍)과 옥(玉)에 관한 연구서 『鏡と劍と玉』를 써서 일본 사학계에 두각을 나타낸 고고학자다. 그런 그가 사마(斯麻)라는 휘를 가진 무령왕을 염두에 두지 않고 등장 인물조차 시대적으로 전혀 걸맞지 않은 사마숙니라는 일개 조신 쪽으로 논조를 몰고간 까닭이 석연치 않다. 그와 같은 터무니 없는 연대와 인물의 계기는 어쩌면 그가 의도적으로 무령왕을 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을 합병(1910년 8월 23일)한 직후였던 긴박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타카하시는 당시 토우쿄우 제실(帝室)박물관의 감사관이며 역사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한국 침략에 앞장선 서슬 퍼런 일제 고관들의 비위를 건드릴 만큼 어리석은 짓을 자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한반도를 무력으로 침략하는 비상시국에 하물며 고대 백제왕이 왜나라의 후왕(候王)의 친동생 케이타이 천황에게 장수를 기원하는 주술적 거울을 만들어 보낸 것을 스다하치 만궁에서 예부터 모셔왔다고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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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마지막 황제들은 행복했다-선양한 역대 군주들의 최후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238774
회교세계를 파괴한 회교도의 군주이자 전사, 첩목아( 帖木兒: Tīmūr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251952
중국의 굴욕? 동아( 東亞 )문명은 어찌하여 외부로 진출하지 못하였는가-동아문명의 팽창과 확산의 좌절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252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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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률빈( Philippines )의 역사-중국문명권이 될번하였던 비률빈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260417
중국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당나라의 명장 설인귀( 薛仁貴: 한문번역판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296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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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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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고 아름다움 "만을 따진다면 나치 독일도 보로서 독일 못지않게 크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307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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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갤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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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인류가 하늘을 날기 시작한 역사는 언제부터였을까? 최초로 동력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 이전에 이미 하늘을 날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현존하는 고문서의 기록과 고대 문명의 발굴을 통하여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사실들을 살펴보자.

지난 2호에 소개한 신화나 설계도면, 이집트의 사카라에 있는 비행기의 나무모형, 남미 콜롬비아의 시누문명 유적지에서 발견한 황금비행기, 여러 고문서에 나타나는 비행 물체들 외에 다른 문명의 유적들도 살펴보기로 하자.


▲ 마야 팔렝케‘비문의 사원’석관의 덮개

ː아비도스 사원의 3,000년 전 비행물체

아비도스 사원은 3,000여 년 전 이집트 카이로에 있던 신전이다.

초기 왕조시대부터 성지로서 이집트 신앙의 중심지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었으며 부활 신앙의 바탕인 오시리스 신을 믿어 분묘와 신전을 많이 축조했다.

이집트 신앙의 최고 중심지인 바로 이 사원에서 고대에 비행기가 있어 하늘을 날아다녔다는 것을 의미하며 새로운 고대사 해석의 기점이 될 만한 조각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MUFON(Mutual UFO Network)의 심리학자이자 최면요법가인 루스 후버 박사이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이집트를 여행하다가 아비도스 사원에서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진 덧판 아래에 더 오래된 판넬이 드러나 있는 부분의 벽 판넬에서 충격적인 그림을 발견하였다. 고대의 비행기 이미지를 양각해 놓았는데 현대의 비행기나 헬리콥터와 너무나도 유사하였다.

맨 위쪽에 그린 것은 헬리콥터로 프로펠러를 장착하여 회전날개에서 생기는 양력과 추진력으로 비행하는 헬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날개는 일직선으로 새의 날개와는 전혀 달랐다. 앞쪽에는 조종석인 듯 돌출한 부분이 있고, 중앙에서 후미 쪽으로 연결된 몸체 역시 헬기와 비슷하다.

헬리콥터에 대한 발상은 1490년경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에서 처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미사일 모양의 물체이며 현재의 비행기 모양과 비슷한 물체인 것이다. 유선형 몸통 구조를 가진 비행물체로 공기의 저항을 적게 받도록 설계한 듯하다.

맨 아래에 있는 것은 현대의 전투기와 비슷한 형태로 조종사가 탈 수 있는 조종석을 뚜렷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꼬리부분이 완전한 수직을 이루어 고속성과 기민성, 비행성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공기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미끈하게 만든 앞부분이 특징적이다.

이것은 1999년 미국 폭스 텔레비전 방송국(FOX television)이 ‘Opening the Lost Tombs: Live from Egypt'라는 프로그램으로 소개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 외에도 아비도스 사원에는 여러 가지 물체들; 날개 달린 곤충모양의 물체, 물고기 모양의 물체 등이 있었다. 아비도스 사원에서는 하늘을 나는 비행물체와 관련한 것들이 상당히 많이 나왔고 이집트 박물관은 1982년에 글라이더와 헬리콥터 모습을 한 목각 골동품들을 공개한 바 있다.

이들은 유사한 종류의 물체를 나타내는 상형문자로 볼 수 있으며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물체들을 자연스럽게 형성하였거나 대상 없이 그려낸 상상의 산물로 보기에는 매우 구체적이며 자세하다.

현대의 비행물체와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오래 전의 그들이 어떻게 이런 물체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들의 과학문명 발달수준은 어디까지였을까 하는 호기심을 자아낸다.

ː마야의 우주선

1949년부터 1952년 사이 멕시코의 유명한 고고학자 알베르토 루스 루일리에르 박사는 멕시코 고원에 위치한 마야의 고성 팔렝케에 있는 ‘비문의 사원’에서 현실(玄室)을 발견했다. 계단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높은 고대(高臺)에 있는 사원 전실로부터 습기로 인해 미끄러운 경사진 층계가 약 25미터 깊숙이 즉 지표면에서 2미터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다.

신전바닥을 조사하다가 안 바닥이 커다란 돌로 되어 있음을 알고는 그것을 들어올릴 궁리를 하였다. 돌의 양끝에 구멍이 있음을 발견하여 들어 올리니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왔다. 그 계단은 흙과 모래로 메워져 있었는데, 4년에 걸쳐 그 흙과 모래를 제거, 드디어 1952년 6월 5일, 인물과 무늬가 새겨진 무게가 5톤이나 되는 거대한 석관의 덮개에서 화려하게 단장한 9위의 신관과 기이하게 머리를 장식한 한 청년 부조를 발견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그저 단순한 마야인의 고대 신화로 간주했었다. 그것을 판별해 낼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우주 왕복선을 발사한 후에야 이 우주항공연구에 참여했던 미국과학자들은 깨달았다. 바로 아름답고도 정교한 석상으로 묘 덮개 판에 새겨진 그림이 우주를 비행하는 우주조종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묘 덮개 판은 하나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틀 중앙에 어떤 인물이 몸을 앞으로 숙이고 앉아 있다. 조종실에 앉은 우주비행사처럼 헬멧을 쓰고, 그 헬멧에서 두 줄기 호스가 나와 뒤쪽으로 넘어간다. 두 손으로는 제어장치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위로 올린 한 손은 마치 앞에 있는 단추를 눌러 미세한 조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왼발 뒤꿈치로는 페달을 밟고 있으며, 코앞에는 산소기구가 있다. 조종사 뒤에는 내연기관과 비슷한 설비가 있다. 내연기관 상자 뒤에 화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현대와는 많은 변형을 보이지만, 그림 중에는 이 우주선의 공기 주입구, 배기관, 방향타, 안테나, 발판, 연 파이프 및 각종 계기판들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이 그림의 사진을 본 미국 우주항공국(NASA)의 전문가들은 무척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으며, 한결같이 그것을 바로 고대의 비행선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오래된 고대유물이 담고 있는 구체적인 비행체 구상과 그의 섬세한 지식은 너무나도 특이해서 최근에야 이해할 수 있었으며 많은 학자들도 이로 인하여 크게 놀라고 있다.

요즘의 비행기술만 보아도 지난 500년 간 인류가 이룩한 과학문명의 집결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비행기 제작기술은 그 시대의 과학수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에 그런 비행기를 실제로 사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 당시에 비행기 제작을 구상하였다거나 모형비행기 정도라도 시험 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대과학의 높은 기술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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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阿踰陀國의 신비
수로왕릉 정문(納陵)에 새겨진 神魚像. 가락국 시절의 國章이다.
 옛날 경상남도 金海지방에 伽倻(가야)라는 나라가 있었다. 三韓(삼한)시대에 변진(弁辰 또는 弁韓)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자라난 고대국가인데 이 나라의 처음 이름이 駕洛國(가락국)이다.
 
  가락국의 초대왕인 金首露王(김수로왕)은 阿踰陀國(아유타국) 공주인 許黃玉(허황옥)과 결혼하였다.
 
  三國遺事에 수록된 駕洛國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서기 48년 7월27일 붉은 돛을 단 배가 해안에 도착한다. 배에서 20여 명이 상륙한다. 그 중 한 여인이 수로왕에게 자기를 소개한다.
 
  『저는 아유타국 공주입니다 성은 許(허), 이름은 黃玉(황옥), 나이는 16세입니다』
 
 
  「妾是 阿踰陀國 公主也. 姓許 名黃玉. 年二八矣」
 
 
  수로왕이 왕비를 맞아들이는 과정이다. 이들의 결혼으로 10왕자 2공주가 탄생하여 오늘날 金海 金氏의 조상이 되었고 아들 중에 두 사람에게는 어머니의 성인 許씨를 賜姓(사성)하여 김해 許氏의 조상이 되었다.
 
  아유타는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 있던 고대국가의 이름이다. 현대 인도어로 Ayodhia 라고 쓰고 「아윳다」라고 발음한다.
 
  허황옥의 한국 도착은 고대 항해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스터리로 치부되었고, 한국사에서는 이 시대가 희뿌연 안개 속에 싸여 있을 뿐이고, 인도 출신 허황옥의 가락국왕과의 결혼이야기는 한국사의 여명기인 2000년 전 일어난 국제결혼 사건 정도의 에피소드로 취급돼 왔다. 우리 역사에서는 신화시대 수준이지만, 서기 1세기 때는 세계사에서 중국은 後漢(후한) 때이고 서양사에서는 로마시대이다. 이미 중국의 諸子百家(제자백가) 시대가 지나갔고, 그리스 과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알렉산더가 인도를 다녀간 후이다.
 
 
  마주 보는 두 마리 물고기
 
  나의 아유타국 연구는 실로 하찮은 이유로 시작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피부가 유달리 검었다고 한다. 보통의 한국인들보다 훨씬 검게 타고난 피부 때문에 할머니로부터 자주 놀림을 받았고 집안 행사 때면 모이는 친척들까지도 나의 피부가 검은 것에 대하여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그까짓 일로 상심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사춘기 때부터 나기 시작한 여드름 때문에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自問하기 시작하였다.
 
  「역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김해 김씨의 조상인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 출신이기 때문에 그 후손의 한 사람인 나의 얼굴도 인도인처럼 검게 된 게 아닌가? 그래도 2000년 전에 있었던 국제결혼의 흔적이 설마 지금까지 계속 나타날 수는 없을 터인데」
 
  그 정도의 의문을 지닌 채 나는 대학에 진학하였다. 사회인류학 강의를 통해 族內婚과 族外婚의 풍속을 배우면서 한국인들은 同姓同本끼리는 혼인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異姓이면서도 同本인 경우에도 결혼을 꺼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예가 바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관계이다. 즉 김해 허씨는 허황옥 왕비의 성을 딴 자손들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부모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가 전하는 수로왕의 혼인 설화는 김씨族과 허씨族 사이에서는 단순한 설화 이상의 역사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의문의 원인 제공자인 김수로왕과 허황옥 할머니의 능을 참배하러 김해까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맞닥뜨린 것이 수로왕릉의 대문에 새겨 있는 神魚像(신어상)이었다.
 
  神魚像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며 가운데 있는 어떤 물체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두 왕릉의 배후에 있는 산의 이름도 신어산이고, 신어산에 있는 銀河寺(은하사)라는 절에도 수미단에 神魚像이 두 개나 조각되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검은 피부와 神魚像은 이렇게 어우러지면서 그 후 수십 년간 나로 하여금 인도와 아유타국 연구에 빠지게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神魚像은 가락국이 발전한 가야의 영역권인 경상남도 지방에 있는 오래된 불교사찰과 祠堂(사당)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惠超가 다녀온 다섯 天竺國 중 하나
 
  아유타국은 지금의 인도 땅 아요디아 (Ayodhia)인 것 같다고 선대의 학자들이 추측하였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 학자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추측만 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현장을 답사한 사람이 在野사학가인 故 李鍾琦(이종기)씨였다. 李씨는 펜클럽대회 참석차 인도에 갔다가 김수로왕릉에 그려져 있는 雙魚紋(쌍어문:신어상)이 아요디아에 무수히 많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돌아와 「駕洛國探査(가락국탐사)」라는 책을 써냈다. 1970년대의 일이다.
 
  가락국의 國章격인 神魚像이 한국 땅에는 가야문화가 퍼진 경남 일대를 중심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과 인도의 아요디아에서도 쌍어문이 사원의 대문마다 그려져 있다는 李鍾琦씨의 말을 듣고 나니 직접 인도를 답사하지 않으면 나에게 검은 피부의 인자를 제공했을지도 모르는 인도공주의 미스터리를 천착해 볼 길이 없게되었다.
 
  그래서 인도에 가게 되었다. 1985년의 일이었다 뉴델리에서 비행기 편으로 동쪽으로 한 시간쯤 가면 럭나우라는 도시에 내려서 차 편으로 150km를 동쪽으로 가는 곳에 아요디아가 있다. 아요디아는 산스크리트語로 「정복되지 않는 땅」이라는 뜻이다. 혜초의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에 기록된 다섯 개의 천축국 중에 中天竺國에 해당된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의 탄생지이다. 그런 만큼 아요디아에는 수많은 전설과 역사가 색색가지의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그 실타래를 조심스럽게 푸는 사람이 인도의 고대사를 잘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힌두교의 신비를 캐어 내는 작업의 단초를 찾는 사람이 된다.
 
 
  힌두교와 카스트의 나라
 
  카스트(Cast) 이야기를 조금 하자. 인도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적인 계급이 정해져 있다. 그들은 브라만(신앙지도자), 크샤트리아(통치계급), 바이샤(생산계급), 수드라(천민)의 네 계층 중 하나로 태어난다. 이들은 직업만 다른 것이 아니고 주거지역도 다르다. 그러니 다른 계급 간에 결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만약 이런 전통을 어기고 다른 계급의 사람과 결혼한 부부는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심지어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뭇매를 맞아 죽게 되는 일도 있다. 인도의 신분제도의 경직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때로는 용감한 젊은이들이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외국으로 탈출하여 살고 있는 예도 수없이 많다.
 
  그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새로운 신분 간 계급으로 불린다. 아버지가 상위 신분일 때와 어머니가 상위 신분일 때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계급이 또 새로운 신분을 탄생시켜 인도의 카스트는 수십 가지로 분화해 나갔지만 지금도 여전히 계층 간의 벽은 엄격하다. 심지어 어느 계층의 의사는 자기 계층의 환자만 치료하고 다른 계층의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님 같은 외국인이 인도인 환자를 돌보아야 할 이유가 생겼나 보다.
 
 
  믿을 수 없는 인도
 
  인도, 즉 인디아(India)라는 명칭은 페르시아 동쪽에 있는 험준한 산맥인 「힌두쿠시 산맥 너머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곳에 있는 강이 인더스 강이고 나라 이름도 인도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인도를 불교의 나라라고 우대하여 天竺國(천축국)이라고 불렀지만, 그전에는 「身毒(신독)」이라고 음역하였다. 인도인들의 피부가 검어서 혹시 몸속에 독이라도 들어 있지 않나 하는 해학적 명칭이다. 이웃 나라 이름을 비하해서 부르는 중국 사람들의 버릇 중에서도 매우 고약한 명칭이다.
 
  인도인에게 「인도」라는 역사적인 이름을 선물한 인더스 강은 지금 인도에 없다. 영국의 식민 통치를 벗어난 후 인도 대륙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면서 대륙 서북쪽의 인더스 강 유역인 펀잡 지방이 파키스탄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 반대쪽인 동쪽 지방의 갠지스 강은 하류의 벵골 지방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해 나가, 인도는 이리 찢기고 저리 뜯겨 상처 입은 공룡처럼 되고 말았다.
 
  인도 대륙의 주민들이 힌두교도들의 인도와 이슬람교도들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분리해 나가는 장면을 영화 「간디」를 통해서 본 사람들은 「과연 종교가 그 엄청난 인구를 이동시킬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했을 것이다. 인도인은 기본적으로 농업인들이다. 농업인들에게 토지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농토를 포기하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천지로 떠난 사람이 많다.
 
  그렇다. 정신적인 자유는 경제적인 자유보다 더 중요하다. 영국의 프로테스탄 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 플라워(May Flower)號에 몸을 싣고 아메리카라는 신천지로 이민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종교 생활이 자유로운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 오늘날 탄탄한 유태인 사회를 구축한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비록 힘든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도와 인도인을 깔볼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구한 인더스 문명을 모태로 살아온 인도인들은 인류 최대의 인구가 신봉하는 힌두교를 탄생 시켰고, 여기서 불교까지 꽃을 피워 지구 인구 몇 분의 일이 인도 철학의 영향 속에 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인도 대륙을 가장 멋지게 표현한 말이 「믿을 수 없는 인도(Incredible India)」이다. 10억 명의 인구가 힌두어·타밀어·우루두어·벵골어 등 수십 가지의 언어를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아직도 계급사회가 엄연히 존재하여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는 섞여 살지도 않고, 혼인도 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나라이다. 종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양대 축으로 하여 시크교·밀교 등이 섞여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한 사람의 총리가 통치하는 오묘한 구조의 나라이다. 정치·경제用 공용어는 영어이다.
 
  나에게 인도는 여러 색으로 구성된 무지개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각각의 색이 따로따로 보일 듯 말 듯하고 그 배경 뒤로 허황옥 공주의 모습 같은 영상이 희미하게 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영혼의 江- 갠지스
 
  힌두교의 源泉(원천)인 갠지스를 빼놓고 인도를 생각할 수 없다.
 
  대부분이 힌두교도인 인도인들은 그들의 영혼을 갠지스 강에 담고 있다. 갠지스 강에 걸려 있는 바라나시에서 힌두교도들의 성스러운 목욕의식과 엄숙한 화장의식은 처음 목격하는 사람에게는 섬뜩한 장면이다.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며칠 동안 식사도 못 한다. 반면에 사랑에 취한 사람들은 인도에 가면 타지마할에서 16세기 때인 모굴시대 「샤 자한」 왕이 먼저 세상을 떠난 愛妃(애비)를 기리는 남자의 애틋한 사랑의 표시를 만난다. 그래서 인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색깔로 보인다.
 
  내가 아요디아에 처음 도착하던 날은 갠지스 강의 지류인 사라유 강변에 석양이 비치고 있었다. 황토색 강물이 忍苦(인고)의 생활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힌두교도들의 몸과 마음을 씻어 주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강물에 몸을 담고 있었다. 먼길을 마다 않고 여기까지 오느라고 허비한 노력과 경비를 일순간에 상쇄하는 마력을 지닌 갠지스 강물이다.
 
  강가에는 이발사가 削刀(삭도)로 순례자의 체모를 깎아 주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들의 행복해하는 얼굴에서 우리는 인도인의 영원한 평화를 읽을 수 있다. 강변에 마련해 놓은 간이의자에 앉아 하루나 이틀쯤 후에 다가올 永眠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영면은 죽음이 아니다. 天刑(천형)과 같은 이승 시절의 카스트를 탈피하여 자유롭고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넓은 인도 대륙의 원래 주인은 드라비다族이다. 인더스 문명의 핵심지역인 「모헨조다로」와 「하라파」가 폐허된 후인 기원전 1600년경부터 카스피海 부근에 살고 있던 서양인 계통의 인종인 아리아 족들이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들 이민의 배경에는 철기문화의 확산에 따른 지역 간 전쟁이 있었다. 그 결과 유럽어 계통의 언어인 힌두語가 생겨났고 토착인들의 남하에 따라 드라비다語는 南인도 지역에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는 月刊朝鮮 2월호에서 이미 썼다. 어찌되었든 다신교인 힌두교는 소수의 집단이 큰 인구를 다스리는 통치이념으로 교묘하게 사용되었다.
 
 
  아요디아-코살(Kosala)國의 수도
 
  서기전 7세기 때쯤에 北인도는 간다라, 펀잡, 마치, 코살, 마가다, 앙가 등의 고대 왕국이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에 걸쳐 일어났다. 그 이남에는 이렇다 할 세력이 없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오늘날 네팔 땅에 있던 카피라 성에서 태어났을 때인 기원전 6세기에는 고대 왕국 중 코살국이 맹주였다. 아요디아는 코살국의 중심이었다.
 
  코살국의 조상신화엔 태고에 대홍수가 있었다. 그때 만물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때 위기에 처한 「마누」라는 인물이 커다란 물고기(Matsya)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마치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홍수 전설에서 「노아」가 살아나는 과정과 흡사하다. 마누의 먼 후손인 「익스바쿠」가 코살국을 세웠고, 그의 아들이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이다. 따라서 물고기는 코살국의 토템이자 힌두교의 한 神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코살국의 국장이 神魚로 정해진 것이다.
 
  후대에 코살국이 망했어도 神魚를 숭앙하는 신앙은 그대로 전승되었고, 아요디아 출신의 힌두교도들은 왕조가 바뀌고 주민이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도 그들은 가는 곳마다 힌두교 사원을 세우고 그들의 神들을 경배하였다.
 
  과연 아요디아 시내에는 수백 개의 힌두교 사원이 서 있고, 사원의 대문마다 문설주 위에 神魚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박물관의 입구에 그려진 神魚는 시위가 당겨진 활과 어우러져 있고, 경찰의 계급장에도 神魚가 들어 있었다. 도처에서 神魚는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守禦者(수어자)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神魚는 아요디아 전체에서 흘러 넘치고 있고, 그 州(주)를 대표하는 州章으로 발전해 있었다. 여기는 글자 그대로 神魚國(신어국)이었다.
 
  그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神魚像은 인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었다. 집중 분포지는 이상하게도 아요디아가 중심도시인 우타르 푸라데시(Uttar Pradesh 北洲)뿐이었다. 즉 아유타국의 문화권에서만 神魚의 신비스러운 기능을 신봉하는 사상이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리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은 그해에 KBS 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아유타국의 신비, 1985」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물고기가 인류를 구해 준다는 이야기는 지구상 여러 민족의 민속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몽골 사람들도 물고기를 신성시하여 먹지 않는 풍속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기마민족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맹주 노릇을 하던 스키타이族들도 말의 장식으로 물고기 한 쌍을 달고 다녔다는 연구보고서가 있다.
 
 
  아무도 몰랐던 神魚의 상징 의미
 
  그러나 이러저러한 神魚의 흔적들이 지구의 도처에서 보이기 시작하였어도 神魚들이 상징하는 의미에 대하여는 알아낼 수 없었다. 아무도 그런 연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요디아의 박물관장도 모르고 스키타이 연구를 많이 하는 독일학계에서도 神魚의 상징성에 대한 전문가가 없었다.
 
  어느 해이었던가. 방글라데시의 다카 국립박물관 입구 바닥에 그려져 있는 神魚像들을 발견하고 박물관장과 큐레이터들에게 문의하였더니, 그들의 대답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지대인 페샤와르에서 시내를 굴러다니는 픽업 트럭에 멋지게 새겨져 있는 神魚像들을 발견하고 그 지역 미술사 권위자인 이슬라마바드 대학의 다니 교수에게 문의하였다.
 
  『글쎄요. 그런 장식을 그린 차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상징연구자가 아니라서 권위 있는 대답은 못 하겠습니다. 혹시 캘커타 대학의 무커지 교수라면 당신이 원하는 답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캘커타에 회의차 갈 일이 생겨 무커지 교수를 어렵게 수소문하여 만났더니 그는 오히려 다니 교수가 모른다면 자기도 추측성 설명밖에는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神魚의 의미에 대해 답변하는 사람은 없고 서로 핑퐁을 치고 있었다. 신성스러운 물고기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미궁으로 빠지는 듯하였다.
 
  나는 神魚에 중독되어 여기저기서 물고기만 나타나면 혹시 가락국과 관계가 있나 하고 살펴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그때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들르게 되었다. 도서실에서 미국에서 출판된 近東(근동) 미술사 책에서 두 사람이 물고기 모양의 옷을 입고 마주보고 있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유학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그 박물관의 동양부장이었던 제시카 로슨 여사에게 문의하였다. 제시카는 즉시 近東 담당 큐레이터를 소개해 주었다. 이 전문가는 나를 만나더니 단번에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 사진의 실물이 東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에게는 근동(Near East), 동양사람들에게는 西아시아로 되어 있는 이란으로부터 터키까지의 광활한 지역에 대한 문화연구는 진공상태가 되어 있다. 1960년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6일 전쟁」으로 시작된 정치적 소용돌이는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 미국과 이라크의 걸프전까지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이 지역을 한가롭게 다니면서 유적과 유물을 살피며 고대 사상이 이동하던 흔적을 찾는 유한계급들이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이 아무에게도 없었다.
 
 
  숙명적 해후에 화가 났다
 
  나는 다음날 독일로 날아갔다. 냉전 시대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은 관광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東베를린 지역에 페르가몬 박물관이 있었다. 거기에 내가 평생을 바쳐 만나려고 노력했던 마음속의 연인이 있었다. 돌로 만든 神魚像이 있었다.
 
  거대한 석제 水槽(수조)의 외벽에 양각으로 새겨진 神魚像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서 이름도 뜻도 모른 채 神魚像이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의 한 박물관에서 자기를 찾고 있는 지구상의 단 한사람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神魚像이 새겨 있는 수조는 바빌로니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센나게립王이 세운 궁전 중앙에 있던 신앙용 聖水를 담는 거대한 물통이었다.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복원한 것이었지만 조각은 선명하였다.
 
  神魚像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어떤 신앙의 상징이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신전 대문 위나 聖水용 수조에 조각하였다. 그들의 主神은 오아네스(Oaness·水神)이고 그 神을 물고기 모양의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 司祭가 양쪽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사제는 바빌로니아式 사각형 수염을 기르고, 왼손에는 물통을 들고 오른손에는 부채 같은 기구를 들고 主神을 향하여 물을 뿌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제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물고기의 껍질을 뒤집어쓴 것처럼 위로는 머리, 아래쪽으로는 물고기의 꼬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물고기의 비늘도 선명하게 선각되어 있었다.
 
  한국의 神魚像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평행으로 마주하고 있고, 아요디아의 神魚는 45도 정도로 일어선 채 마주보고 있는 데 비하여, 바빌로니아의 神魚는 사람처럼 일어선 채 마주보고 있는 차이가 있었다. 모두 페르시아의 가라에서 기원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나는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촬영하려면 큐레이터의 허가가 있어야 하지만 나는 그런 국제적 예의를 무시하였다. 유물이 너무 중요하였고, 훌륭한 만큼 나는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좋은 유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독 정부, 아니 페르가몬 박물관은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인가 무엇인가를 실험하느라고 나라의 문을 꼭 잠그고 비용이 없어서 수십 년간 박물관 소장품 圖錄(도록)조차 출판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동독이 서독과 합치지 않았다면 나 같은 바깥세상의 연구자들은 이런 중요한 유물을 보지도 못한 채 평생을 허송할 뻔하였다.
 
  다행히 나의 무례한 행동은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나는 神魚들을 애인의 얼굴처럼 쓰다듬으며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 우리의 숙명적인 해후에 감격하였다.
 
 
  페르시아 신화 속의 「가라」가 加羅
 
  神魚의 의미에 대한 나의 관심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으니까 40년이 훌쩍 지나갔다.
 
  이 21세기로 접어든 어느 날 새로 구입한 페르시아 신화 한국어 판을 읽게 되었다.
 
  인류의 만병을 고치는 영약이 있었다. 그 약은 「고케레나」라고 부르는 나무의 열매였다. 고케레나는 바다 속에서 자라는 나무였다. 인류를 파멸시키는 惡神(악신)이 나무의 뿌리를 파 버리려고 두꺼비를 파견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알고 보니 나무 뿌리를 지키고 있는 「두 마리의 神通한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물고기의 이름이 가라(Kara)이다. 가라가 지성으로 보호하여 고케레나 나무가 잘 자라났고 그 열매와 잎새를 먹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번창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라」가 바로 내가 필생을 바쳐 추적해 온 「神魚」아닌가? 아요디아의 마치 설화와 유사한 내용이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또 한 번 놀란 것은 페르시아 신화의 「가라」는 가락국의 별칭인 加羅(가라·Kara)와 똑같은 발음이라는 점이다. 페르시아에서는 인류를 살리는 靈藥(영약)을 내는 神木을 보호하는 물고기의 명칭이 한국 역사에서는 국명이 되었단 말인가? 과연 이런 추리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가락국은 신어국 아닌가.
 
  그렇다. 페르시아와 가락국, 이란과 한국의 시공을 뛰어넘는 문화의 동질성은 이렇게 뚜렷하니 쉽게 부정해 버리면 연구자의 태도가 아니다. 같은 시대에 신라고분에서는 페르시아 제품인 유리 술잔과 寶劍(보검)이 심심찮게 출토되고 있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음도 떠오른다.
 
  나의 神魚연구는 끝없는 길을 가고 있었다. 한 고개를 넘어가면 또 다른 준령이 내 앞을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구약성서 속에서 「魚門(어문·Fish Gate)」이라는 단어를 찾게 된다. 魚門은 바빌로니아의 어느 종족이 神殿을 세우고 그 대문에 물고기 모양을 새겨 놓았다는 내용이었다.
 
  고고학적 증거와 신화와 성경의 내용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오래 추적한 보람이 있었다.
 
  페르시아는 옛날부터 정치적으로 바빌로니아와 대립하면서 자라났다. 센나게립 왕 때의 神魚 복장을 한 司祭들의 기능이 페르시아 신화의 「가라」의 기능과 서로 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유타국 王孫
 
  神魚像을 연구하는 동안 나는 아요디아를 4회 방문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아요디아에 지금도 살고 있는 왕손인 미쉬라氏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의 인도는 공화국체제니까 총리가 다스리는 나라이지만 각 지역에는 前 시대부터의 토착세력인 土豪들이 있다. 중앙정부는 이들에게 재산권을 허용하고 있어서 미쉬라 가문은 학교·병원·莊園(장원) 등을 경영하고 있다.
 
  현재 아요디아의 왕손이 그 옛날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과 혈연으로 연결될는지는 다음 문제로 하고 우선 서로 역사적 정보만이라도 교환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총리 시절의 金鍾泌씨 초청으로 미쉬라氏 부처가 김해를 방문하였고, 이어서 김해 金氏 종친회원들과 김해 출신 실업인들이 아요디아를 방문하였다. 그 결과 아요디아에 허황옥 기념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2002년 부산에서 개최된 아시아경기 때 화려한 입장식이 있었다. 이때 인도 공주가 가락국에 시집오는 과정이 연출되었다. TV 감독이 내게 전화를 하여 입장식에 참석해 달라고 하였다. 인도 공주가 어떤 과정으로 한국에 시집오게 되었는지 해설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마침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한 고고학자의 연구내용이 국제 체육행사에 채택되어 TV 방송을 통하여 아시아人 모두에게 알려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긴 세월 동안 苦行에 가까운 추적과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전설이 역사로 굳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신라王들의 고민
고창의 죽림리 고인돌. 이 마을에는 약 800개의 고인돌이 한 군데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당시의 국립묘지 급의 성스러운 지역인 듯하다.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과 신라의 박혁거세, 김알지, 가야의 김수로처럼 알(卵)이나 상자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神話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神話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天孫神話는 기마민족들인 몽골 알타이 스키타이族들의 신화이고 卵生신화는 농경민족들인 대만의 빠이완族, 인도네시아의 자바族, 태국의 타이族, 인도의 문다族의 난생신화와 공통점이 있다. 이런 현상을 지도로 보면 천손신화는 한국보다 북쪽에 살던 기마민족들의 사유세계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열대와 아열대에 사는 사람들의 사유세계이다.
 
  신라의 첫 번째 王인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날아온 말(馬)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날아다니는 말은 그리스 신화의 페가수스이다. 그런 신화의 내용이 스키타이를 거쳐 알타이 민족들에게까지 전달되어 신라王의 탄생에 접목되어 있으니 고대사의 전개과정은 참으로 복잡하다.
 
  신라 金氏系 조상인 金閼智는 계림(木)에 달려 있는 상자 속에서 나오는 알(卵)에서 탄생하였다고 신화가 꾸며져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말은 기마민족의 상징이고 나무는 기마민족의 지도자인 칸(Khan)의 탄생과 관련 있는 토템(Totem)이다. 말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생명의 씨앗이 높은 나무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내용이 天孫降臨神話(천손강림신화)의 구조이다. 그런 기마민족의 신화에 웬 알이 등장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캐내어야 한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형식은 적석묘(Cairn 또는 Kurgan)로서 기마민족의 전통이다. 통나무집에다 주인공과 부장품을 집어넣고 그 위를 막돌로 덮는 모양이다. 그 풍속을 스키토-알타이式(Schytho-Altaic)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되고 그 주인공들은 모두 金氏系 인물인 내물(402년 死), 눌지, 자비, 소지, 지증 마립간(513년 死) 때에 해당되므로 핵심 기간은 400~500년 사이이다.
 
  월간조선 2004년 1월호에서 말하였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어서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게다가 김알지 후손들의 무덤인 경주 신라 왕족들의 무덤들은 분명히 북방 기마민족들의 매장 전통을 보여주고 있는데 선조인 김알지는 남방 농경민족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으로 분장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천손신화계 인물인 부여의 고주몽이 실제로 태어날 때는 알에서 나온 인물로 분장되어 있는 것과 같다.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和合·타협
 
  왜 그럴까? 기마민족이면 떳떳하게 기마민족式 신화인 하느님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天孫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처럼 꾸며져 있을까. 여기에 초창기 신라의 통치계층 인구들의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경주지방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는 수많은 고인돌이 증명하고 있다.
 
  그 후에 소수의 기마민족이 移民(이민)해 왔다. 삼국지 위지 東夷傳에 기록되어 있는 辰韓(진한)族이다. BC 3세기 중국 서북쪽의 秦(진)나라에서 勞役(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민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민집단의 인구는 先주민들인 농경인구에 비하여 소수였다. 다수의 토착 농경인들 위에 통치자로 군림하기에는 인구가 턱없이 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여러 代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드디어 미추왕(麻立干) 때 처음으로 金氏系 인물이 최고통치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소수의 金氏系 인구가 다수의 농경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金氏系 조상인 김알지도 토착농경인들처럼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분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주인공이 북방계 토템인 신령스러운 나무, 즉 계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자기네들의 전통을 일단 유지한 채 알(卵)에서 태어난다는 난생신화의 요소를 가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기마민족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 땅의 先주민이고 탄탄한 농경기반과 많은 인구를 갖고 있던 농경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기마민족들의 딱한 입장이 보인다.
 
 
  지도자는 민중에 영합해야
 
  현대에 와서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개신교 교회의 장로인 후보자가 불교사찰에 가서 부처님 點眼式에도 참석하고 평소에는 자주 다니지 않던 시장에 가서 아주머니들의 손을 붙잡는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치권으로 부상하려는 사람들이 좀더 많은 대중에게 영합하려는 노력은 실로 눈물겹다. 그들의 변신술에는 시공을 뛰어넘어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필리핀의 대통령이었던 마르코스는 청년 시절부터 정치지망생이었다. 그래서 미스 마닐라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미인 이멜다와 결혼하였다. 부인의 대중적 인기를 자신의 인기에 덮어 씌워 상승효과를 노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과연 마르코스는 대통령이 되었다.
 
  마르코스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그가 살던 궁전이 박물관으로 변하였을 때 필자가 구경가 보니 거기에 이멜다 여사의 탄생신화가 벽화로 그려 있었다. 이멜다 여사는 세상이 다 아는 스페인系 혼혈이다. 필리핀의 토착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제국주의 시절에 들어온 스페인 인구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토착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혈통인데도 불구하고 바다 속 진주조개에서 태어나 인어처럼 헤엄쳐 인간의 세계로 떠오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난생신화의 내용인 조개 속의 알(卵-진주)이 안에서 밖으로 나온다는 內(내)→外(외)의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는 마르코스 부부가 필리핀 원주민 사회에서 지도자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원주민의 생각인 「지도자는 난생신화의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믿음에 부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 벽화는 퍼스트 레이디의 출생을 민중의 구미에 맞게 粉飾(분식)해야만 했던 정치 지도자의 절박한 입장을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장면이었다. 신라 金氏系의 첫 번째 왕이 된 미추왕(味鄒尼師今)의 고민도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해석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조상 神話가 다른 두 사회의 만남
 
  고대국가 이전의 한반도에는 先주민들이 있었다. 우선 신석기 유적을 수백 개 이상 남겨 놓은 사람들이 생활용기인 빗살무늬 토기를 무수하게 만들어 쓴 흔적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지만 그들의 생활근거는 주로 강변과 바닷가에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경제 방식은 사냥과 어로, 초기 형태의 농사를 하여 조·기장·수수 등 주로 한랭지대 곡물을 먹고 살았다는 것이 희미하게 알려져 있다. 그 시절에 自生하던 볍씨들이 경기도 김포와 충북 오창에서 가끔 발견되지만 어디까지나 자연식물이었고 인간이 적극적으로 경작하던 벼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이 먹고 버린 조개 껍질이 쌓여 패총을 이룬 것이 사천의 烟臺島(연대도), 부산의 동삼동, 안면도의 고남리, 시흥의 오이도에서 발견되었다.
 
  그들의 문화를 이어받은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에 처음으로 벼농사 기술이 전달되었다. 경기도 흔암리를 시작으로 발견되기 시작한 볍씨의 흔적들은 모두 청동기시대에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의 집터에서 발견되고 그 시대는 대략 기원전 1000년경부터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이 때부터 한반도에 고인돌에다 사람을 매장하는 葬儀風俗이 생겨난다.
 
 
  인도인은 아리아人
 
  유학시절부터 나는 인도의 고인돌문화는 유럽-흑해-인도로 이어지는 선사시대 문화 벨트에 속하고 결국 고대 인도인 구성에 서양인인 아리아 인종의 이민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이론에 나는 큰 계시를 받았다. 인간 집단은 정치 사회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 때 사유세계와 풍속이 함께 이동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고인돌은 한국에도 무수하게 많은데 인도와 한국은 거리가 멀다고 관계가 없었을까.
 
  「한국의 고인돌 문화는 유럽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1960년대까지 우리는 이렇게 배웠다. 매우 민족적 주체사상이 강한 생각이다. 유럽과 한반도는 지구의 반대쪽에 있으니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아니면 그렇게 주장해야 애국적인 연구자이고 민족정신이 투철한 교수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인도와 한반도 사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群島(군도) 어느 곳에서라도 고인돌이 발견된다면 인도와 한국 사이에 문화적 징검다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해가 걸리더라도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을 하나씩 탐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여기에는 걸림돌이 있었다. 우선 한국인들의 정서가 문제였다. 한국인의 형성과정에서 대륙계 북방인들과의 관계를 규명하면 그런 대로 수긍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남쪽의 여러 섬들과의 관계가 보이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정서가 우리에게 있었다. 아마도 중국 문화를 숭상하는 오랜 전통이 있어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쪽은 모두 야만이라는 南蠻思想(남만사상)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를 뒤지다
 
  한반도 남쪽 부분에 살고 있던 선사시대 주민들은 南아시아의 주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을 가능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무슨 방법으로 정보를 교환하였을까. 혹은 지역 간에 인구의 이동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 문제는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나는 연구실에 앉아서 책만 읽으며 연구하는 소위 책상考古學(Desk Archaeologoy)을 과감하게 버렸다. 의문이 있는 땅을 직접 답사하면서 문제를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나의 인도네시아의 답사는 1979년부터 시작되었다. 연구비가 없으니까 조사단을 구성할 수는 없었고 나 혼자 1인 탐사를 계획하였다. 겨울 방학 때마다 섬 하나씩 조사하기로 작정하고 자바 섬부터 시작하였다.
 
  인도네시아 考古局에 찾아가서 협조를 구하였더니 1920년대에 네덜란드 학자가 수마트라에서 발견한 고인돌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하이네 겔던이란 학자가 南아시아 고고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아시아에서 처음 구석기를 발견한 사람도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콰이강에 다리를 놓는 공사에 투입되었던 네덜란드 젊은이였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튼 현지에서 본 빛 바랜 고인돌의 사진들은 나를 기쁘게 하였다. 아마추어도 충분히 구별할 수 있는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이었다.
 
  이 사진으로 나는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섬들에서 새로운 고인돌을 찾아 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나는 동서로 길다란 섬인 자바의 동쪽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세계 여러 나라 각종 형태의 고인돌 사진을 본 고고국장인 우카氏는 나에게 창광이란 마을을 권해 주었다.
 
  그곳의 작은 박물관에서 붉은색 간토기(紅陶)와 청동제 팔찌가 발견된 지역을 안내 받았다. 그 곳에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이 여러 개 있었다. 도로 공사 중에 몇 개의 유물이 나와서 철책을 치고 사람들이 더 이상 파괴하지 않도록 조치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을 그 사람들은 고인돌인 줄 모르고 있었다.
 
  받침돌이 아주 짧거나 아예 땅 속에 파묻혀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가지고 다니던 트라울(발굴용 꽃삽)로 바닥을 긁어 보니 가랑잎에 가려 있던 고인돌의 하부구조가 정연하게 나타났다.
 
 
  고인돌의 초승달
 
  이런 형식의 고인돌은 일견 자연석같이 보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고인돌인 줄 모르고 파괴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고인돌인 줄 모르기 때문에 도굴되지 않아서 유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창광 마을의 碁盤型 고인돌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자바 섬에는 탁자형 고인돌도 무수히 많았다. 모두 뚜껑 돌이 도굴꾼들 손에 파괴되어 땅에 나뒹굴고 있고, 하부구조인 받침돌들이 평면 직사각형의 石室로 남아 있었다.
 
  현지인들은 이 石室을 돼지우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옛날 사람들이 돼지를 여기다 가두고 길렀을 것이라고 생각해 붙인 이름이다. 이런 구조의 고인돌은 말레이시아 정글 속에도 수없이 많은 것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다음 해에 발리 섬을 조사하다가 발리 동쪽의 섬인 숨바 섬에서는 현대에도 추장이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고인돌을 만드는 풍습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등 수확이 많았다. 고인돌에 관한 한 고대와 현대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인도네시아였다. 고인돌을 만드는 풍속은 현대인들에게 전달되어 있고, 씨족의 聖所(성소)를 만들고 아주 작은 형태의 고인돌을 세워 놓는 민속이 발리 섬의 텡아난 마을에서 확인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고인돌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 나는 힘이 솟았다. 이제부터 인도네시아와 한국 사이에 있는 필리핀, 대만, 오키나와 등지에서 고인돌을 발견하게만 된다면 인도와 한국은 고인돌 분포지도로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南아시아와 한반도는 바다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배나 뗏목을 타고 사람들이 옛날부터 이동했을 가능성을 타진하기로 하였다.
 
  대만의 고인돌은 凌順聲(능순성) 교수가 보고한 적이 있고 나도 현지를 답사한 적이 있지만 한국의 고인돌처럼 완전한 탁자형이 아니었다. 완전한 것이 발견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필리핀과 오키나와를 답사해 볼 필요가 생겼다.
 
  다음 해에 필리핀에 가서 국립박물관 사람들과 협의하여 고인돌을 찾아보려 하였지만 아쉽게도 필리핀 학자들 중에 고인돌이 그 나라에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옹기 그릇으로 만든 쌀독이 하르방 모양으로 두 손을 가슴과 배에 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어 촬영한 것이 그해 여행의 유일한 수확이었다.
 
  겨울 방학 때마다 동남아의 여러 지역을 답사하여 드디어 아시아 고인돌의 분포지도가 완성되었다. 초승달 모양의 지도였다. 위 끝이 한반도에 걸리고 아래 끝이 인도 남부에 걸려 있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지도를 「고인돌의 초승달」(Dolmen Crescent)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또 한 가지 이 분포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 공통점은 이들 모두 난생신화를 믿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벼농사(경제방식)-고인돌(풍속)-난생신화(사유세계)가 일체가 되는 문화현상이다.
 
 
  벼농사 민족의 고인돌
 
  고인돌은 여러 개의 돌로 받침을 만들고 커다란 뚜껑 돌을 덮는 무덤구조로서 생긴 모양이 책상처럼 높은 것(북방식)과 바둑판처럼 낮은 것(남방식)이 있다. 고인돌의 발견지는 西유럽으로부터 지중해, 흑해로 이어지는 文化帶가 있고 인도에서 인도네시아, 오키나와, 한반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화대가 있다.
 
  東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의 넓은 내륙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중국의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지방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문화적 특징이 있다. 東아시아에서는 한반도가 고인돌의 중심지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가까운 규슈 지방에서 발견되고 중국에서는 황해 연안에서만 발견된다.
 
  고인돌의 발견지와 농업과의 관계로 보면 東아시아에서 고인돌 분포의 북방한계는 벼농사가 가능한 지역의 북방한계와 일치하는 현상이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한반도에 벼농사가 시작되는 청동기 시대가 열리고 나서 고인돌을 만드는 풍속이 생겨났다.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제일 쉬운 곳이 영산강 유역이다. 기후가 온난 다습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역이 우리나라 고인돌의 대부분이 발견된 지역이다. 생전에 벼농사 기술자들이 死後에 고인돌에 묻힌 것이다.
 
  벼라는 곡물은 원래 열대 작물이다. 기원지에 대하여는 인도설, 태국설, 중국설이 있지만 해당 국가 간에 자존심 싸움에 휘말리기는 싫다. 분명한 것은 적도지대에서는 1년에 4회를 추수할 수 있고 대만도 年 3모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겨우 年 1회의 수확만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지구 전체로 보면 한반도의 날씨는 벼농사의 적격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한반도의 고대 주민들이 굳이 벼농사를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벼의 수확량이 다른 곡물에 비해 월등하게 많아서였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벼는 남한 지역에서 자란다. 그 이유는 남한 지역이 북한 지역보다 따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인공적으로 볍씨를 발아시켜 移秧(이앙)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봄에 날씨가 쌀쌀하면 농부들은 벼의 모를 키우지 못하여 애태우곤 하였다. 그만큼 벼는 날씨에 민감하다.
 
 
  남방에 대한 거부감
 
  한국인의 숙명적인 고민이었던 보릿고개를 없애 버린 일등공신인 통일벼의 후속으로 신품종인 「노풍」을 개발한 적이 있었다. 통일벼보다 맛도 좋고 수확도 많은 것으로 실험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정부는 농가를 독려하여 노풍을 많이 심었다. 바로 그해인 1978년에 냉해현상이 있어서 노풍이 자라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해의 날씨는 평균온도보다 섭씨 0.3도 낮았다고 한다.
 
  벼는 이렇게 날씨에 민감한 식물이다. 그렇게 기르기 어려운 벼를 우리 조상들은 굳세게 길러 왔다. 어쩌면 쌀이 갖고 있는 습관성 식욕이랄까. 아니면 우리 민족이 모두 쌀 중독증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내용의 연구를 진행하던 중인 1981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한양대학이 공동 주최하여 서울에서 아시아 고인돌 연구 세미나가 있었다. 인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일본에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국에서 나름대로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고 자료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그 내용을 편집하여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Megalithic Cultures in Asia 1982).
 
  아시아의 고고학자들도 그 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던 고인돌에 대하여 서서히 눈을 떠가고 있었다.
 
  이 때 내가 발표한 고인돌 초승달 가설이 신문에 보도되자 金元龍 교수님이 전화를 하였다.
 
  『고인돌 남방 유래설은 매우 용기 있는 주장이지만 한국의 기존 학계에서는 한국과 남쪽 문화의 관련에 대하여 정서적으로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니 좀더 완곡하게 표현하게』
 
  老교수의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역력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그 옛날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설을 발표하여 일본의 만세일계의 황국신민 정서를 주장하던 극우파들을 잠재워 버리지 않았던가. 고고학은 과학이지 정서 따위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내게 있었다.
 
  중국 학계에도 이상스러운 정서가 있다. 이 세상 모든 발명은 모두 중국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나라이다. 소위 중화사상이다. 그래서 중국의 고고학은 아직도 신비스러운 고대문화를 발견해 내는 데 주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중국 고대 문화에 서양의 기술인 그리스式 전차가 秦始皇帝(진시황제)의 전국통일에 사용되었다든지, 로마에서 개발된 벽돌건축 기술이 漢(한)나라 때 고분축조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중국인의 목소리로 세상에 알려진 게 아니다.
 
  일본의 어느 고고학자는 세계 최고의 구석기 유물들을 여러 번 발견했다고 해서 일본의 매스컴들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지만 최근 모두 가짜였다는 게 밝혀졌다. 중국과 일본에서 이런 현상이 생겨나는 이유는 모두 지나친 나라 사랑이랄까 아니면 삐뚤어진 우월의식에 편승하여 인기를 얻어 보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름통 수백 개를 바다에…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대륙문화 짝사랑 현상이 있다. 그러나 고대 한국문화 요소들 중에 확실하게 보이는 非대륙계, 非중국적인 문화인자들인 고인돌 그리고 난생신화가 南아시아에서 발견되는 현상을 우리는 영영 장롱 속에 감춰두고 말 것인가. 향싼 종이에서 향내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 비린내 난다는 말이 떠오른다.
 
  해류의 방향은 문화 전파의 방향을 암묵적으로 설명한다. 赤道지대에서 표류하여 해류를 타고 제주도까지 온다면 며칠이나 걸릴까. 나는 이런 엉뚱한 질문을 스스로 해 놓고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동물의 이동을 연구하기 위해서 새의 발목에 고리를 다는 방법을 쓴다. 고리에는 새의 고향, 고리를 단 날짜 등을 기록한다. 그 새가 멀리 이동하여 다른 지역의 연구자에 발견되면 그 새의 이동 경로가 밝혀진다. 최근에는 바다 속의 생물에도 음파 발신 장치를 달아 그 생물의 이동 범위를 연구하기도 한다.
 
  이렇게 고급의 방법을 써보기에는 나는 너무 약했다. 나 같은 無名의 고고학 초년생에게 누가 그렇게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프로젝트를 인정해 주지도 않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연구비 신청을 아예 포기하였다. 대신 나 혼자만의 연구 방법을 고안해 내야만 하였다. 비용이 얼마 안 들고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름대로 지도를 보면서 생각에 잠기다가 사람 대신 해류 조사카드를 띄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즉 적도 지대에다 조사카드를 뿌려두면 해류를 타고 이리 저리 흘러가다가 혹시 단 한 개라도 한반도 근해에서 발견되는 행운이 있을 지도 모르고, 반대로 한반도 근해에서 뿌린 조사카드가 일본이나 알래스카 근해에서 발견된다면 더욱 흥미 있는 연구과제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행동으로 들어갔다
 
  조수였던 추연식(現 고려大 교수)군과 상의하여 조사카드에 쓸 내용을 적어 보았다. 조사목적, 조사자, 발견자의 이름, 발견지, 카드를 보내 줄 주소 등을 썼다. 이 카드가 어느 누구의 손에 발견될지 모르니까 여러 나라 말로 써야 했다. 똑 같은 내용을 한국어와 영어로 써서 작은 종이에 인쇄하였다. 조그만 필름통을 수백 개 구하여 그 속에 카드를 넣고 물이 새지 않도록 밀봉하였다.
 
  제주도로 내려가 배를 빌렸다. 그날 따라 안개가 심하여 視界(시계)가 매우 나빴는데도 선장은 나침반만 보며 우리를 마라도에 도착시켰다. 우리는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조사카드의 절반을 뿌렸다. 제발 이것들 중에 하나라도 멀리 태평양으로 나가서 누구에게 발견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뿌렸다.
 
 
  해류는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나머지 절반은 인도네시아로 가지고 갔다. 마침 한국해양대학의 실습선이 때맞춰 자바 섬에 들른다는 정보가 있었다. 해양대학 실습선의 선장을 만나 조사의 목적을 설명하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사이에다 네 번에 나누어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서 나는 두 개의 회신을 받았다. 하나는 마라도에서 뿌린 것으로 일본 소속 어선이 오키나와 해안에서 건진 것이고, 또 하나는 자바 섬 북쪽 해안에서 뿌린 것으로 태국만 쪽으로 역류한 것을 미국인 관광객이 발견하고 보내 준 것이었다. 태국에 표착한 카드는 동남아 여러 나라의 민족들이 얼마든지 해류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자료로 충분하였고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카드는 제주에서 표류하면 오키나와에 도착할 수 있는 증거로 충분하였다.
 
  부산 앞바다에서 해류를 타고 떠나면 일본 혼슈의 북쪽 해안에 도달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듣고 있었지만 마라도에서 떠난 카드가 오키나와 근해로 흘러간 것은 다소 의외였다.
 
  정작 적도에서 떠난 조사카드가 제주도 부근에 도착한 것은 없었다. 도착한 것이 아주 없었는지 발견한 사람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나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때까지 나는 해류 전문가를 만나지도 않고 시골 서당의 훈장처럼 골방에 앉아서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연구한답시고 끙끙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은인을 만나는 법이다 그가 탐험가인 윤명철 박사이다. 그는 뗏목을 타고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다가 난파당한 경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시도하여 부산에서 규슈까지 무동력 항해를 성공시킨 용기 있는 지식인이다. 결국 윤박사는 중국 절강성에서 뗏목으로 출항하여 목포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는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해류의 방향도 중요하지만 해수 표면에 부는 바람의 방향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거기에 더하여 東아시아에서 계절에 따라 흐르는 해류들의 방향이 자세하게 그려진 지도까지 주었다.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무턱대고 해류 조사카드만 많이 뿌려두면 되는 줄 알았던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정확한 자연과학의 지식도 없이 의욕만 앞서서 문화관계를 연구한답시고 조사카드가 우편으로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순진한 짓인가? 우선 조사카드의 표류하는 방향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일치한다고 해도 그 확률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설사 누가 그것을 발견하였다고 해서 꼭 보내 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당시 대부분 가난했던 아시아의 경제수준으로 비싼 국제우편료를 내면서 이름 모를 한국의 한 연구자에게 연락해 줄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도 생각해 보았어야 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입만 벌리고 기다린 사람 꼴이 되고 만 셈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 정도가 내 지식의 한계였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때 바다에서 난파당한 사람이 해류에 떠밀려간 이야기에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흘러갔다는 표현이 있다.
 
  조선 성종 때 사람인 崔溥(최부)가 쓴 「漂海錄(표해록)」이란 책이 있다. 관리의 신분으로 제주도에 출장 중 부친상을 당하여 급거 귀가하게 되었다. 바다를 건너오다가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어 천신만고 끝에 육지에 닿아 보니 조선 땅이 아니고 중국 절강성의 寧波(영파)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 선린관계에 있어서 崔溥는 우여곡절 끝에 육로로 조선까지 귀환했다는 내용이다.
 
  이 사람이 난파당한 위치는 분명 제주도와 육지 사이였을 터인데 표착한 지점은 영파였다는 게 무척 흥미 있었다. 영파는 목포 부근 신안에서 발견된 중국 원나라 때 무역선이 떠난 항구이고 윤명철 박사가 뗏목을 타고 목포를 향해 떠난 항구이다. 즉 절강성과 한국 사이에는 해류와 바람으로 쉽게 오가는 바닷길이 뚫려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조선시대 文淳得(문순득)이라는 사람이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필리핀의 루손 섬에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다가 나의 해류 조사카드는 제주도 남쪽의 마라도에서 오키나와까지 가지 않았나?
 
  제주도, 오키나와, 南중국, 필리핀이 해류나 바람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1991년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인도에서 일본까지의 해양문화를 조사하던 중 일본의 고인돌을 직접 답사할 기회가 생겼다. 그 때까지 일본의 고인돌은 규슈에만 있다고 보고되어 있었다.
 
  우선 나가사키(長崎)와 구마모토(熊本) 지역의 고인돌 유적과 관련된 유물을 두루 살펴보고 나는 오키나와로 날아갔다. 제주도에서 떠난 조사카드가 오키나와에 도착할 수 있다면 제주도에 수많은 고인돌이 수백 년간 만들어지던 중에도 제주도 사람들 중 오키나와에 표류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 아닌가. 게다가 오키나와에는 고구려 사람의 후예들도 살고 있는 곳 아닌가?
 
 
  黑潮를 타고 자연 移民
 
  오키나와에서 며칠간 나하(那霞)를 중심으로 하여 고인돌이나 하르방 비슷한 유적을 찾는 작업을 하였다. 어느 날 오키나와 대학의 교수들을 만나 인류학적인 탐문을 하던 중에 새로운 뉴스가 들렸다. 여러 섬들 중에 미야코(宮古) 섬에 가보라며 그곳에 고인돌이 있다는 정보가 있다는 것이었다. 현지의 기념물 관리소에서 낸 책에 고인돌 같은 존재에 대하여 서술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지도를 보니 미야코 섬은 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외딴 섬이었다. 다음날 시골 비행기를 타고 미야코에 도착한즉 관리인이 나를 현장으로 안내하였다. 제주도의 火山石과 비슷한 돌로 만든 고인돌이 있었다. 나이가 백년이 넘는 고목에 기대어 탁자모양의 고인돌이 서 있었다. 큼직한 중형의 고인돌이었는데 발리 섬이나 숨바 섬에서 엊그제까지도 만들던 고인돌의 모습과 같았다.
 
  아시아의 고인돌은 서서히 신비스러운 비밀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고 있었다. 아무리 감추고 있어도 결국 속에 숨어 있던 진실은 알려지고 마는 것 아닌가?
 
  해류도를 자세히 보면 필리핀을 떠난 黑潮라는 해류는 빠른 속도로 제주도 쪽으로 올라온다. 이 해류의 방향이 일년에 몇 번씩 한반도에 몰아치는 태풍의 이동방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제주도에서 거꾸로 필리핀 쪽으로 가기는 힘들 것 같다.
 
  아마도 文淳得은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일단 흘러갔다가 필리핀에 표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은 규슈의 나가사키를 떠나 필리핀 근해에서 난파하여 제주도로 떠밀려 온 사람이다(1653). 黑潮에 떠밀려 온 것임에 틀림없다. 어찌되었든 필리핀과 제주도는 바닷길을 통하여 上行과 下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류의 방향은 플랑크톤의 이동방향이다. 플랑크톤의 이동은 동물의 먹이사슬의 이동방향이고 그 먹이사슬의 제일 뒤에는 인류가 있다. 이쯤 생각하니 한반도에 南아시아 사람들이 해류를 타고 저절로 도착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 黑潮라는 해류는 어제오늘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지구의 自轉현상으로 생겨나는 적도 해류가 南美를 떠나 인도네시아까지 도달하는 결과로 발생한 傍系海流이다.
 
  그러니 지구에서 마지막 빙하가 끝난 때인 1만3000년 전부터 이 해류는 지금의 속도로 흘렀을 터인데 이 해류의 방향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南아시아인들이 한반도 쪽으로 자연이민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짐작된다.
 
 
  발리 섬의 돌하르방 신앙
 
  발리 섬을 떠난 비행기가 홍콩에 기착하였을 때 어느 신문사 기자가 옆 좌석에 앉게 되었다. 그가 마침 대학 때 친구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발리 섬 돌하르방 이야기 나왔다.
 
  발리 섬은 힌두교 사원이 매우 많은 곳이다. 그래서 서양의 어느 인류학자는 발리 섬을 神들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그중 파누리산이라는 이름의 힌두교 사원에서 나는 매우 우연하게도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돌하르방이 30개나 보관되어 있는 것과 마주쳤다. 왕방울 같은 눈에 두 손을 가슴에 대고 서있는 석상들은 제주도 돌하르방의 아이들처럼 작고 귀여웠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남녀노소가 모두 있고, 의관을 갖춘 것과 맨머리로 구별되었다. 아마도 하르방 세계에서의 사회적 위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였다.
 
  현지 考古局의 수타바氏에게 문의하였더니 그 석상들은 힌두교의 유품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석상의 의미는 모르지만 非힌두교적인 민속품들로 바닷가 마을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반갑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하였다. 돌하르방이라면 제주도 아닌가. 제주민속 연구자들에 의하면 하르방은 13세기 몽골이 고려에 침입하였을 때 따라온 몽골 풍속이라는 게 상식처럼 되어 있는데 뚱딴지처럼 발리 섬까지 흘러 들어와서 나를 놀라게 하나.
 
  나는 그에게 제주도의 돌하르방 사진들을 보내 주고 계속 연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1991년 다시 발리 섬에 조사하러 가서 수타바氏를 만났더니 그는 그 동안 하르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내게 고마워하였다. 그러면서 새로 수집한 100여 개의 하르방 사진들과 발리 섬 내의 분포도를 보여 주었다.
 
 
  학자는 「관념 학살」을 경계해야
 
  1980년에 하르방이 발리 섬에서 여러 개 발견되었다는 신문보도는 일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관광제주」라는 책에다 하르방을 南아시아 문화에다 관련시켜 해석하려는 의견에 못마땅한 글을 싣기도 하였고, 몽골의 元史(원사)를 전공하는 어느 교수도 부정적인 의견을 기고하였다. 그분들의 의견도 일리는 있으나 모두 몽골이나 발리 섬을 답사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의 정서적 반대를 하였다.
 
  이런 현상을 관념 암살(Idea Assassination)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학원에서는 꼭 學史(학사)를 가르치면서 미래에 학자가 될 젊은이들에게 15세기 가톨릭 신부였던 코페르니쿠스가 당대에 전지 전능한 교회의 반대를 우려하면서도 地動說(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공헌인가를 인식시킨다.
 
  제주도 관광의 대표 브랜드로 되어 있는 돌하르방은 선사시대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이 17세기 때 사람인 金夢奎가 남긴 「耽羅紀年」이라는 책에 翁仲石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사실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몽골에 하르방이 존재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한국의 학자들이 몽골에서 하르방을 찾으려고 여러 해 노력하였지만 우리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흔히 제주도하면 조랑말을 떠올리고 그 말들이 혹시 다리가 짧은 몽골 말과 혈통적으로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사라졌다. 제주도의 재래 말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제주도 말들의 혈청의 특징인 혈액 蛋白多型(단백다형)이 의외로 태국 말(學名으로는 광동마)과 같다는 연구가 있어서 더더욱 제주 말과 몽골 말의 관계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역시 제주도의 하르방 문화는 해류와 관계지어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확대해석하면 폴리네시아 群島인 이스터 섬 주변의 여러 섬에서 발견되는 대형 석상문화와 발리 섬의 석상들도 해류로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현 단계에서는 여기서 생각을 접는다.
 
  유능한 기자는 뉴스의 사냥꾼이다.
 
  나의 발리 섬 이야기를 듣던 기자는 귀국하자 곧바로 신문에 보도하였고, 이 보도는 다음날 영자신문인 코리아 헤럴드에 번역되어 실렸다. 그후 한 달쯤 지나서 어느 미국인이 편지를 보내왔다.
 
  「저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학생입니다. 고대 인도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에 관한 학위논문을 제출하였었습니다만 불행하게 자료 불충분으로 불합격 처리되었습니다. 코리아 헤럴드를 읽고 보니 선생님이 고대 한국과 南아시아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하고 계신 듯한데 혹시 고고학적으로 인도와 한국의 관계를 증명할 자료가 있으시면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동병상련이랄까. 나도 그 몇 년 전에 영국에서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제출하면서 자료 부족으로 속을 태운 적이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 중에는 기존학설이나 통념을 깨는 경우가 자주 있다.
 
  유럽 고고학 연구에서 불후의 명작인 「유럽문명의 여명」의 저자인 차일드(G. Childe)가 옥스포드 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논문인 「인도 유럽인 이민 (Indo-European Migration)」은 심사위원회에서 부결되었다. 그 내용은 현재의 인도인들이 기원전 17세기경 철기문화가 근동에서 발생하자 주변 사회들이 동요하여 유럽에 살던 아리안族이 인도로 이민을 가서 인도인과 인도 언어가 형성되었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 내용이었다.
 
  그 때까지 아무도 그런 연구를 한 적이 없었을 때였다. 더군다나 영국인에게 인도는 식민지였다. 영국인은 우월한 민족이고 인도인은 열등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리안族은 유럽인을 대표하는 종족 중 하나이고 영국인을 형성한 앵글로 색슨族도 아리안族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영국인과 인도인은 조상이 서로 피를 나눈 사이가 된다. 이 점이 選民의식에 빠져 있던 영국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어찌되었든 차일드는 박사학위 없이 에딘버러 대학 교수가 되었고 다시 런던대학 교수로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古代문명사에 관한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차일드의 학위논문을 부결시킨 1925년의 옥스포드 대학의 심사위원들은 두고두고 후회하였으리라. 이런 學史的(학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을 기억하면서 나는 즉시 버지니아로 자료를 보냈다. 인도, 인도네시아의 고인돌과 선돌들의 사진을 한국 자료와 함께 보내 주었다.
 
 
  한국어 속의 인도어 400개
 
  그리고 또 몇 달이 흘렀다. 미국에서 박사학위가 통과된 논문이 내게 도착하였다. 「한국어와 드라비다語 관계의 재조명」이라는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의 논문을 읽어보니 매우 어려운 내용이었다. 언어학 논문은 꼭 수학 공식들을 써놓은 것처럼 기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드라비다語는 인도 토착어군의 총칭이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나를 놀라게 한 부분이 있었다.
 
  한국어 속에 쌀, 벼, 풀, 씨 같은 농업용어는 모두 인도 토착어인 드라비다語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정보는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내게는 메가톤급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패전 후에 일본에서도 일본어와 드라비다語의 유사성을 연구한 학자가 있었는데 극우파 군국주의자들에 의하여 심한 핍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생각났다. 무슨 경로를 통했든지 한국어 속에 인도 어휘가 400개 이상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내게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고대 사회에서 새로운 종류의 농업기술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경제혁명을 의미한다. 그런 혁명적인 발전을 유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정에서 기술용어가 함께 소개된 것이다. 마치 한국에 자동차 기술이 들어올 때 기술용어인 엔진, 브레이크, 미션 등의 영어 용어가 함께 소개된 현상과 같은 정황이었을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다. 그 옛날 고대 인도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벼농사 기술을 한반도 주민에게 전수하면서 알려 준 말이 지금까지 한국어 속에 化石(화석)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다음 문제는 그 벼농사 기술자들은 봄이면 한반도로 농사지으러 왔다가 가을에 추수하면 그네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계절 이민자들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네들의 고향은 한 해에 서너 번씩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을 터인데 벼농사를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한반도로 계절이민을 다녔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들은 몇 년씩 또는 평생을 이 땅에서 살았음에 틀림없다. 나는 이 대목에서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반도에 고인돌을 세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고인돌이 많이 남아 있는 南아시아의 원주민들은 北아시아 기마 민족들에 비해 피부가 검다. 대체로 눈이 크고 얼굴은 사각형으로 하악골이 넓은 지역적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피부는 검지만 그 옛날 서양인들과의 혼혈로 얼굴 모양이나 체형은 서양인의 특징이 많다.
 
 
  黃石里人은 서양人種?
 
  그런데 한국의 고인돌 속에 실제로 묻혀 있던 주인공이 발견되었다. 1965년에 발굴된 충북 제천 황석리의 13호 고인돌에서는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신장이 170cm인 40代 남자였다. 사망연대는 기원전 410년경이었다. 발견지의 이름을 따서 황석리人이라고 부른다. 그의 두개골을 계측한 결과 한국 사람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서양사람처럼 코가 크고 두개골이 앞뒤로 뾰족한 사람이었다 학술용어로 超長頭型(초장두형)인 사람이었다.
 
  여기서 체질인류학 이야기를 조금하겠다. 사람의 두개골 형태를 계측할 때 앞이마와 뒤통수의 거리를 頭長(두장), 귀와 귀 사이를 頭幅이라고 한다. 두장을 100으로 계산하여 두폭을 비교하는 수치를 頭蓋指數(두개지수·Cephalic Index)라고 하는데 이를 기초로 인종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 한국인의 평균 두개지수는 80 전후로 短頭型(단두형)이라 하고 서양인의 두개지수는 70 전후로 長頭型(장두형)이라 한다.
 
  장두형은 머리가 앞뒤로 긴 모습이고 단두형은 얼굴이 넓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데 황석리人은 두개지수가 70 미만이었다. 얼굴이 좁고 뒤통수가 유달리 뒤로 빠진 北유럽인의 모습이다.
 
  이건 심각한 내용이었다. 이 사람이 한국사람과 다른 인종이었다면 큰 문제가 시작되는 사건이었다. 한국인은 단일 민족이라는 정서를 감안했었는지 보고서를 담당한 서울의대 해부학교실의 두 교수는 이 사람의 생긴 모양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국에서 발견된 고인돌 사회의 주인공이 서양인의 체질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발표하면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 때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으로는 어려운 해부학 용어로 쓰인 황석리人의 체질적 특징이 서양사람에 가깝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만일 수많은 고인돌에 묻혀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현대의 한국사람과 다른 인종이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러나 고인돌에서 발견된 사람들이 모두 그런 체질적 특징을 갖고 있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에 남아 있는 고인돌의 수가 3만 개나 되니까 분명히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인의 조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때는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세월이 지나 조용진 교수가 컴퓨터로 복원한 황석리人의 모습은 완전한 서양인의 모습이다. 황석리에서 발견된 서양인 모습의 남자는 누구인가. 古代 아시아에서 고인돌 풍속이 있고 벼농사를 경제기반으로 하면서 서양인의 두개골 모습을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은 인도인밖에는 없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한반도에 올 수가 있었느냐 하는 소박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황석리人의 생존기간은 BC 450~410년이다. 한국사에서는 그 때가 선사시대이지만 유라시아에서 그 기간은 황금의 역사 기간이었다. 중국은 공자 이후 諸子百家(제자백가)의 시대이고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涅槃(열반)한 이후이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히포크라테스가 생존하던 시기이다.
 
  고대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대규모의 관개기술을 성공적으로 실험하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역사시대에 일어난 일을 경악의 수준으로만 생각하면 판단이 어렵다. 황석리人의 한반도 도착을, 그 때까지 인류가 발전시켜 온 누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조감하면 아무런 경이도 아닐 수 있다.
 
  고대사에 대한 나의 知的 호기심은 황석리人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호기심은 지난 30년간 고고학 주변의 여러 인접과학에 관한 연구결과를 살펴보게 하였고, 나와 가까이 지내는 여러 과학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히게 되었다. 인접과학 중 하나가 ATL이란 병이었다.
 
  성인 T세포 백혈병(Adult T-Cell Leukemia)은 20세 전후에 나타나는데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父系遺傳(부계유전)이고 발병지역은 亞熱帶(아열대)지방이다. 중국으로 말하면 양자강 이남 지역이고 한국에서는 남부 해안지방에서 발병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이와 비슷한 통계로서 象皮病(상피병·Elephant Skin)이라는 것이 있다. 모기류에 물려서 다리가 코끼리의 다리(脚)처럼 붓고 피부가 거칠어지는 질병인데 조선시대까지 도서지방에서 자주 관찰되던 풍토병이다.
 
  이 두 가지 현상은 더운 환경에서 나타나는 공통성이 있는데 혹시 南아시아에서 한반도 쪽으로 흐르는 黑潮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벼농사를 도입한 사람들과 함께 지역성이 강한 풍토병도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기마민족이 농경 방법을 배우다
 
  고인돌의 주인공들은 기마 민족들보다 한반도의 先주민이고 그들의 농경사회는 잉여생산물 때문에 기마 민족들보다 인구도 많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기존의 농경사회에 뒤늦게 뛰어든 기마 민족들은 농경밖에 할 수 없는 땅에 와서 고생한 이야기가 陳壽(진수)의 三國志(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辰韓 사람들이 이주해 오니까 馬韓 사람들이 동쪽에 땅을 떼어 주어 살게 하였다.
 
  辰韓 사람, 즉 후의 신라인들은 마한 땅의 토착인에게서 사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기마 민족이 오곡을 기르는 농경인이 되면서 육식에서 채식으로 입맛을 바꾸어야 했을 것을 생각해 본다. 한민족도 이렇게 복잡한 과정과 多端한 뿌리를 기초로 이루어진 백성이라는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과연 민족이라는 말에서 民(민)은 百가지의 姓(성-氏族)이 합쳐진다는 뜻이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계속)●
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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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짜리 騎手
몽골의「나담」축제 때 국가대표급 騎手(기수)들이 출전하는 경기에 나온 다섯 살짜리 꼬마 선수.
 태양이 작열하는 7월, 몽골의 초원에는 여름축제인 「나담」이 진행중이었다. 씨름, 활쏘기, 집단무용은 영화에서 보던 대로였다. 남자들이 半裸의 차림으로 하는 씨름은 한국식 샅바 씨름과는 매우 다른 형식이었다. 씨름에서 이긴 사람이 자축하는 세리모니는 학의 춤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는데, 남자들의 옷 벗은 육체미에 남자인 나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경마였다. 멀리 40km 떨어진 출발지점에서 500마리의 말과 기수가 달려와 결승점인 스타디움으로 골인한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말과 기수들의 가쁜 숨이 관중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아주 놀라운 사건은 폐막식 후에 일어났다.
 
  대통령의 시상식이 끝나고 참석자들이 모두 일어서 나가고 있을 때 말 한 마리가 늦게 도착하였다. 말 위에는 꼬마 소년이 타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 기수였다. 어른들이 놀라서 소년 기수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너무 작아서 높은 말등에서 스스로 내릴 수도 없었다. 대통령이 뛰어내려가 그 소년을 번쩍 안고 연단으로 올라와 다시 연설을 하였다.
 
  『이 아이야말로 칭기즈칸의 정통 후예 답다』
 
  老대통령의 어조는 감격하여 목이 메어 있었다.
 
  몽골인들은 남녀노소 모두 자기 말[馬]이 있다. 몽골어로 말을 「멀」이라고 발음한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말을 탔을 테니까 평생 말을 타는 셈이다. 그러니 다섯 살쯤 되면 충분히 말을 다룰 수 있다. 아이들은 어린 말을 타기 때문이다. 몽골의 초원에서 어린이들이 말을 타고 학교에 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이번 나담에서 어른들의 경마 경기에 작은 아이가 다 자란 말을 타고 출전한 경우는 처음이다.
 
 
  몽골은 종족 이름
 
  중국인들은 주변 민족의 이름을 비하해서 부르는 버릇이 있다. 한민족이 포함된 東夷族(동이족)은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이다. 옛날 중국을 괴롭히던 匈奴(흉노) 또한 고약한 의미다. 蒙古(몽골) 또한 「무식하다」는 뜻이므로 점잖지 못하다.
 
  몽골이란 말은 원래 칭기즈칸의 출신 部族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니까 한국인까지 중국 사람처럼 몽골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겠다. 지금의 몽골인은 70%가 「할하」족이고 그 다음 「차하르」족 등 20여 종족이 모여 몽골 민족을 형성하고 있다. 총 인구는 400만 명인데 몽골, 내몽골, 아프가니스탄, 볼가 지방 등지에 퍼져 살고 있다.
 
  몽골의 중앙박물관에는 구석기부터 역사시대 유물까지 골고루 진열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발견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아술리안형 주먹도끼가 혹시 있나 하여 살펴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다만 찍개·긁개 계통의 석기들이 주종이었고, 다음 시대의 黑曜石製(흑요석제) 細石器(세석기)가 여러 점 눈에 띄었다.
 
  한국 문화와 직접 관련이 있는 유물로는 오르도스 지방에서 발견되는 曲劍(곡검)류가 있어서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유리창의 면이 고르지 못하여 포기하였다. 사진자료로 중요한 것은 신라 왕족들의 묘제인 적석총이 투르크族의 유산으로 9세기까지 계속된 증거들이었다.
 
  그 다음 기원 전후의 유적인 노인 울라(Noin Ula)에서 일본인들이 발굴한 綢緞(주단)의 그림들이 주의를 끌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은 투르크族의 적석묘에 비해 현저하게 구조가 다른 선비族의 무덤들은 모두 석관묘라는 사실이었다. 이 현상은 후에 내몽골 지방의 하이어랄에서도 수백 개의 발굴되지 않은 석관묘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곳이 1~2세기 때 선비族의 공동묘지였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 확인되었다.
 
 
  몽골인은 채소를 먹지 않는다
 
  여기서 잠시 몽골인들의 음식을 먹어 보자. 아침식사로는 속 없는 만두와 홍차를 마신다. 몽골어로도 만두는 「만도」라고 발음한다. 한국식으로 고기를 다져 넣은 만두는 「보츠」라고 한다. 모든 肉食음식에는 기본적으로 후춧가루가 들어가야 하는데 몽골인들에게는 그런 조미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몽골 음식은 느끼하다.
 
  유목민의 主食은 육류와 乳加工(유가공) 제품이다. 가축이 새끼를 기르는 여름에는 가축의 젖이나 유가공 음식인 버터, 치즈를 먹으며 지낸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짜낼 젖이 나오지 않아 할 수 없이 육류를 먹으면서 봄을 기다린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천막인 「겔」 속에 들어가면 동물 기름 냄새가 배어 있다. 게다가 유목민들은 채소를 먹지 않는 편식 때문에 심한 비타민 결핍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들의 평균 수명은 33세 정도라고 한다.
 
  『초원에 야채가 즐비한데 사람이 뜯어먹으면 좋을 텐데요』
 
  야생 나물을 잘 모르는 나에게도 몽골의 풀밭에서 자생하고 있는 쑥, 질경이, 비름나물 등이 수두룩하였다.
 
  『사람이 왜 풀을 먹습니까? 풀은 가축들이 먹어야 합니다. 사람은 풀을 먹고 자라는 가축을 먹으면 되지요』
 
  우리를 안내하던 몽골의 하나뿐인 신문인 「우넨신문」 국제부장의 이 말이 나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은 진심이었다. 몽골인들은 풀을 먹지 않는다.
 
  육식하는 민족에게 절대 필요한 야채 중 하나가 바로 양파인데 유목민족이 사는 지방은 너무 추워서 양파가 생산되지 않는다. 따라서 양파는 모두 따뜻한 나라에서 수입해야 한다. 몽골에서 발견한 문화현상은 필자를 혼절시킬 정도였다. 잘 기른 양 한 마리는 100kg까지 나가는데 그 양 한 마리를 舊소련에 산 채로 파는 가격이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5000원 정도였다.
 
 
  100kg 羊이 5000원
 
  양의 값이 너무 싼 것에 1차로 놀랐지만 그보다는 중국에서 수입한 양파 1개가 양 한 마리의 값과 같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같으면 흔한 양파, 오이, 양배추 같은 야채가 그 나라에서는 아무나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고급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나 나오는 희귀품들이었다.
 
  다음해 봄 나는 경상남도 진주지방을 여행하다가 농부들이 다 자란 양파밭을 갈아 엎어 버리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당국의 계산착오로 농민들에게 권유한 양파 생산량이 너무 초과해서 양파값이 땅에 떨어져 판로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곳곳에 양파 생산을 권유한 당국의 주먹구구식 행정을 규탄하는 현수막을 보면서 필자는 저 많은 양파를 통조림처럼 진공 포장하여 양파가 절실히 필요한 나라에 수출할 수는 없을까 하고 나의 인류학적 경험을 떠올렸다.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일이 상업의 기본이다. 누구에게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는 환경과 문화를 관찰하면 저절로 보인다.
 
  생활전통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이런 전통을 잘 연구하면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이 눈에 보인다.
 
  유목민들은 여름에는 가축을 죽이지 않지만 우리 같은 외국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에 특별히 양과 염소를 잡아서 접대해 주었다. 양을 잡는 데는 중요한 儀式(의식)이 있었다. 양의 귀에 대고 생명을 빼앗는 데 대하여 사과의 말을 하고 죽인다. 조선시대의 망나니가 칼을 휘두르며 처형당할 사람에게 사형집행인으로서의 자기 임무를 다하는 행동을 양해해 달라는 呪文(주문)과 같다. 양을 도살할 때는 땅에 한 방울의 피라도 흘려서는 안 된다. 도살 후 작은 주머니 칼 하나로 능숙하게 양의 껍질과 살을 구분해 내는데 그 솜씨가 놀랍다. 소질한 羊고기는 통에 넣고 찐다. 고기 중에 가장 맛있는 부분이 갈비에 붙은 노란색 기름이라고 한다. 나처럼 외국의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있는 사람도 느끼해서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그것도 겨우 삼켰다.
 
  양을 구울 경우에는 선사시대式으로 조리한다. 양의 머리와 다리만을 자른 후 목을 통해서 내장을 꺼낸다. 몸통을 잘 묶어서 기름이 새지 않도록 하고 헝겁에 잘 싼 다음 불에 달군 자갈돌을 목을 통하여 몸통에 집어넣고 불에 달군 뜨거운 돌 위에 양을 놓고서 흙으로 덮는다. 그 위에 불을 여러 시간 때고 나서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 증기로 고기가 잘 익는다. 이런 조리방법은 적도지대 원주민들이 돼지를 요리할 때도 쓰는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조리한 양의 몸통에서 나오는 뜨거운 기름을 컵에 따라 마신다. 소위 스태미나 식(食)이란다.
 
 
  실크와 玉은 무게로 물물교환
 
  실크로드라는 말은 지리학적 용어이다. 그 배경에는 물론 경제가 있다. 실크는 극동(한국을 포함)지역 제품이다. 장신구로서 으뜸인 玉(옥)의 主産地는 중앙아시아 복판에 우뚝 서 있는 알타이山이다. 몽골 여인들의 장신구로 玉이 빠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몽골 여인들은 실크 스카프 한두 개는 모두 갖고 있다. 중국인의 생활용품인 실크와 알타이山 주변의 유목민족들의 玉은 産地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수천 년 전이라 해도 상인들의 눈에 그런 최고급의 기호품이 高附價 상품이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개념으로 보면 유통 방법이 문제였다. 유목민 출신 상인들이 중국에 와서 꺼내 놓는 形形色色의 玉들은 중국 귀부인들의 눈을 현란케 하였고, 반면에 중국에서 가져온 깨끗한 실크는 유목민들의 사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실크는 유목민에게 高價로 팔리고 중국인에게는 玉이 高價로 팔렸다. 서쪽의 보석들은 동쪽으로 가고 동쪽의 비단은 서쪽으로 가게 되었다. 이런 상거래의 길이 바로 실크로드가 된 것이다.
 
  알타이 지방 玉의 原石은 비가 오면 탁류와 함께 흘러 내려오는데 대개 크기가 밤톨만 하고 큰 것은 주먹만 한 것도 있다. 原石 자체로서는 비싼 상품이 아니고 그것을 가공하여 장신구로 완성하였을 때 비로소 비싸진다. 알타이 지방에 사는 여인들은 玉구슬로 만든 목걸이와 팔찌를 하고 다니는데, 玉이 지니고 있는 呪力을 믿기 때문이다. 또한 알타이 지방은 한랭한 고원지대이므로 여인들이 모두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사는데 스카프로서 최고품은 역시 중국제 실크였다. 실크의 뛰어난 보온성과 아름다운 색채 때문이다.
 
  그래서 비싼 실크와 귀한 玉이 물물교환되었는데 공통의 화폐가 없던 때이므로 무게를 달아서 맞바꾸었다고 한다. 누가 이익이 컸을까? 물론 玉의 생산자인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유목민이 뛰어난 장사꾼이 된 것 같다. 특히 유목민은 환경적으로 주어진 말과 낙타를 이용한 기동성을 발휘하여 정착 농경인이 생산하는 실크를 상대적으로 헐값에 구입하여 페르시아나 중동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 高價로 판매하여 중계무역의 이익을 마음껏 챙겼다.
 
 
  로마 여인들을 벗긴 실크
 
  중국제 실크는 당시 서양 세계의 맹주인 로마까지 들어갔다.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고 유럽, 아프리카, 중동 지역을 장악한 로마사회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극에 달하였을 때 중국製 실크는 귀족 여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때까지 식물성 섬유나 모직을 입어야 했던 로마 귀족 여인들이 가볍고 몸에 꼭 붙는 실크로 단장하고 밤의 향연에 등장하였다. 이를 본 로마 남성들의 탄성 소리가 지금도 우리 귀에 들리는 듯하다.
 
  『중국제 실크가 여인의 옷을 벗긴 듯하다』
 
  영국 작가 그레이브스의 소설 「클라우디우스」에 나오는 표현이다.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알 수 없도록 육체미가 드러나게 하는 실크의 특성을 아주 잘 묘사한 대목이다
 
  로마 여인들이 다투어 중국제 실크를 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실크의 가격은 급등하였고 더 많은 상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실크가 공급되는 통로인 흑해지방, 걸프지역으로 몰려갔다. 이때에 로마사회의 사치품이었던 유리제의 구슬과 술잔 등이 극동으로 교역되어 갔다
 
  로마의 환경은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뜨거워도 저녁이면 싸늘해진다. 그래서 로마인들의 저녁 식사는 보통 오후 9시쯤 시작된다. 따라서 싸늘한 밤 공기에서도 보온력이 뛰어난 실크는 당연히 인기품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중국 산동성 滿城(만성)에서 발견된 前漢시대의 무덤에서는 玉으로 만든 壽衣(수의)가 발견되었다. 주인공은 前漢 武帝의 형님이었는데 부인은 흉노 출신이었다. 漢과 匈奴의 정략결혼의 결과였다. 그 부부는 모두 玉 수의를 입고 있었다. 얇은 정사각형 옥돌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서 금실로 잡아매어 물고기의 비늘처럼 옷을 만들었다. 도대체 玉이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상상을 못 할 지경이다. 그만큼 중국 사회에서는 玉이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 되었으니 그 과정에서 玉의 공급자들이 얻는 경제적 이익은 더더욱 상상을 초월한다.
 
  구매자 사회의 문화와 취향을 파악하여 얻을 수 있는 극도의 이익을 양측이 모두 얻은 사례이다. 옛날부터 상인들은 뛰어난 문화인류학자들이다.
 
  몽골인들은 채식도 하지 않지만, 물고기도 먹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물고기가 그들의 신앙 속에서 숭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물고기 숭배 사상은 저 멀리 앗시리아-바빌로니아에서 생겨난 자연숭배 신앙의 한 종류인데 물고기가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는 생명의 나무(고케레나 木)를 보호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이다.
 
  그런 신앙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人을 거쳐 몽골인에게 전파되었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민족적 종교인 라마교(티베트 불교)의 8가지 神像 중에 하나로 魚神像(어신상)을 모시고 있다. 이 魚神像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한 쌍으로 등장하는데 이런 雙魚紋은 남쪽으로는 티베트-네팔-인도, 방글라데시-南중국-가야로 전파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알타이-몽골-만주로 퍼져 있는 민간신앙 속에 단단히 뿌리 박혀 있다. 그래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릉의 대문에도 쌍어문이 여러 組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내몽골에서 필자를 태우고 다닌 택시 운전사의 자동차 열쇠고리에 칠보로 만든 雙魚가 장식으로 달려 있었다. 필자는 그것이 중국 제품인 줄 짐작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그 후 그것과 똑같은 물건이 한국의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판매되는 것을 보고 출처를 확인해 보니 의외로 한국 제품이었다. 全세계 라마교의 신봉자를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인구임을 간파한 한국의 어느 기업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틈새 시장을 개발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 정도의 문화식견이 있는 기업인의 눈에 기마민족 남자들이 꼭 쓰고 다니는 中折帽(중절모)는 왜 눈에 안 띄었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모자생산이 全세계에서 1등 자리를 차지한 지 이미 오래인데 모자 생산의 기술과 축적된 경험으로 기마민족 남자들의 필수품인 모자를 만들면 상당한 시장이 개척될 것으로 믿어진다.
 
 
  울란바토르의 화가
 
  「나싹 도르츠(b.1945)
 
  사범대학 미술과 졸업. 흡스구 출생. 우넨신문사 미술부 근무, 파리 전람회 경력, 유화 20점(풍속화(8)) 구입」
 
  이상이 내 수첩에 적혀 있는 울란바토르에서의 기록이다
 
  관광지인 보그드 궁전 앞에 길거리 그림 전람회가 눈에 띄어 잠시 멈추었다. 유화와 수채화로 그려진 몽골인의 민속이었다. 첫날은 구경만 하고 다음 답사지로 갔다. 다음날도 그 앞을 또 지나가게 되었다. 차를 멈추고 서서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는 방식은 아주 사실적인 구상화였다. 캔버스에 페인트로 그린 서양화 기법이었지만 그림의 내용은 몽골족의 생활이었다. 뛰는 말, 달아나는 말을 기다란 장대에 달린 고리로 붙잡는 장면 등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었다. 약 20점의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20호쯤 되는 중형이었다. 저녁 노을에 전통복장인 「델」을 입은 한 노파가 겔(천막 집)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문득 그 그림을 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며칠 전에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갤러리에 들렀었는데 서양사람의 그림을 흉내 낸 추상화 비슷한 유화들만 있어서 보다 말고 나온 적이 있는데, 이번 그림은 몽골 풍속을 그린 것이어서 기념으로 하나 사고 싶었다.
 
  『실례지만 작가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안내인인 수케바톨이 통역하였다. 작가의 이름은 나삭 도르츠이고 1945년생이란다. 수년 전에 독일에서 초청전람회에 출품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경력도 있는 작가가 관광지의 길거리에서 그림을 팔고 있는 게 그 나라의 현실이었다. 문득 한국화가 중에 박수근 화백도 한국전쟁 중에 미군에게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두말 않고 그 그림을 집었다. 그러고 나서 값을 물었다. 예술가의 인격을 생각해서 부르는 값대로 다 주기로 내심 작정하였다. 만일 내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다음날 주면 되지 하는 배짱이었다. 화가가 부른 가격은 매우 쌌다.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하는 그림값이었다. 하긴 우리나라처럼 그림값이 비현실적으로 비싼 나라는 全세계에 없다.
 
  파리의 몽마르트나 체코의 프라하의 거리 예술가들에게서 그림을 사 보았고, 캐리커처도 그려 보게 한 적이 있었음에도 몽골의 그림값은 터무니없이 쌌다. 내가 무슨 부자라서 싸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가난한 대학교수이다. 그때는 외국여행 중 아닌가? 그런데도 매우 싸다고 느낀 게 사실이다.
 
  결국 나는 그 화가가 그날 전시하고 있던 그림을 모두 샀다. 모두 얼마나 지불하였느냐는 그 예술가의 체통을 생각해서 밝히지 않겠다. 대부분이 소품이었기 때문에 비쌀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날 저녁 숙소에 돌아와서 일행에게 그림을 자랑하자 사람마다 한 점씩 나누어 달라고 하여서 즉석 경매시장이 열릴 뻔하였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림을 좋아하는 김태익씨에게 몽골 방문 기념으로 한 점을 주고 나머지는 싸 갖고 귀국하였다. 그때 산 노파 그림에 제목을 내가 붙였다
 
  「얼린우(또는 오메룬)」
 
  칭기즈칸 어머니의 이름이다
 
  세월이 지나 경기도 박물관에서 몽골 문물 특별전을 할 때 그때 산 그림 중 한 점을 출품하였다. 「얼린우」가 대표작으로 나간 것은 물론이다.
 
 
  신라와 몽골의 角杯 문화
 
  한국인들은 술을 마실 때 자신이 마신 잔으로 손님에게 술을 따라 권하는 습관이 있다. 이런 풍속은 현대적 감각으로 판단하면 비위생적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버릇은 일본인들의 군국주의 시절에 우리에게 전파한 倭色문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왜색문화일까?
 
  내몽골 包頭(포두)의 어느 식당에서 민속의상을 입은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한다. 「하타」라는 비단 보자기에 술이 가득한 술잔을 받쳐들고 고음의 목소리로 권주가를 부른다.
 
  『먼 나라에서 오신 손님에게 이 술을 바치노라』
 
  그리고 술잔을 손님에게 전하면 손님은 그 술을 한숨에 다 마셔야 한다. 그러면 그 잔을 다시 되돌려 받은 주인은 새로 술을 따라 붓고는 다른 손님에게 권한다. 즉 술잔 하나로 손님이 모두 돌려 가며 대취하는 것이다. 그 술잔은 밑이 뾰족하여 바닥에 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이름하여 角杯(각배)이다. 그러니까 각배로 술을 마시면 술잔이 쉴 새 없이 돌아가게 마련이다. 東夷傳(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弁辰(변진)의 行觴風俗(행상풍속)이 實演(실연)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셈이다.
 
  삼국유사에 「석탈해(昔脫解)」조에 보면 각배가 등장한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심부름하는 자를 시켜 물을 구하여 마시는데 심부름하는 자가 물을 길어 가지고 오던 도중에서 먼저 마시고 드리려 하니 각배가 입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탈해가) 나무랐더니 심부름하던 자가 맹세하여 말하기를 『다음 설혹 가깝고 멀고 간에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소이다』 하니 그때야 그만 角杯가 입에서 떨어졌다」
 
  여기서 角杯는 임금이 될 사람이 쓰는 물건이고 신통력이 있는 器皿(기명)으로 기술되어 있다.
 
  몽골을 답사하면서 나는 角杯가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를 여러 번 목격하였다. 칭기즈칸의 고향인 헨티에서 무당의 허리띠에 달려 있는 角杯는 검은색 소뿔이었다. 뾰족한 끝 부분에 까마귀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또 한 번은 내몽골 호화호트 市 교외에서 만난 브리야트族 여인이 어미가 죽은 어린 양에게 젖을 주는 데 角杯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角杯가 여러 개 발굴되었다. 신라·가야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왜 부여·고구려·백제권에서는 角杯가 사용되지 않았는지 의아스럽지만 그 해답은 간단하다. 부여·고구려·백제계는 신라·가야계와 풍속이 달랐다.
 
  이런 현상은 금관이 신라·가야에서만 발견되는 것과 결부하여 해석되어야 하겠다. 부여계와 신라계는 풍속이 달랐고, 어쩌면 언어도 달랐을 것이다. 삼국지의 저자인 陳壽(진수)도 弁辰(가야)의 풍속은 辰韓(신라)과 같다고 하였다. 신라·가야계통의 통치자급들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부여계보다 더욱 서북쪽의 유목민들의 그것들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추측은 角杯가 위굴지방을 지나 중앙아시아의 주인공이었던 스키타이族들과 이란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고대 주민들이 즐겨 쓰던 신성한 술잔이라는 데 기인한다.
 
 
  몽골인의 발성법
 
  角杯에 관련하여 아주 이상한 미스터리가 있었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문을 꼭꼭 잠그고 있던 1970년대에 중국에서 출판한 중국미술사 책에 희귀 보석인 馬瑙石(마노석)으로 만든 角杯가 등장하였다. 山羊의 머리를 조각한 정교한 제품이었다. 중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농민들이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角杯가 중국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의문은 내가 스스로 중국에 가게 된 1991년에야 풀렸다 그 마노석 각배는 西安박물관에 있었다. 설명서를 자세히 읽으니 당나라 때 소수민족이 황제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중국인이 匈奴風(흉노풍)의 술잔에 술을 따라 마셨을 리 없지 않은가.
 
  1999년 몽골 민속음악단이 한국에 공연하러 왔었다. 한 남자 가수가 처음에 고음으로 노래를 시작했을 때 내몽골에서 듣던 勸酒歌가 떠올랐다. 다음 순간 이 가수는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추어 소리를 내는데 먼저 소리는 그대로 내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또 한 옥타브 낮추어 소리를 내는데 먼저 내고 있던 두 개의 다른 소리들이 그대로 어울려 퍼졌다. 목소리 하나로 오케스트라의 효과음을 내고 있었다. 「쿠미」라는 특별 창법인데 유목민 특유의 발성법이라고 민족음악학자 권오성 교수가 설명해 주었다.
 
  삼국유사 「駕洛國記(가락국기)」에 수로왕이 誕降(탄강)할 때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었다(有殊常聲氣呼喚). 여기서 수상한 소리라는 것이 혹시 몽골인의 발성법인 쿠미가 아닐까. 이런 소리로 노래를 즐길 때 角杯에다 술을 따라 여럿이 돌려가며 마시면 한층 더 흥이 날 듯하다.
 
  角杯는 한 쌍도 나오지만 네 쌍짜리도 있어서 신라·가야인들의 술 마시던 풍류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하는데 현대인들은 왜 角杯 모양의 술잔을 만들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조선시대에도 출전하는 장수에게 왕이 술을 따라 주는 馬上杯(마상배: 빨리 마시는 잔)라는 뾰족한 잔이 있었다. 그런 것을 콘텐츠로 삼아 한국의 세계적인 기술인 백자로 고급상품을 개발하면 경쟁력이 있을 듯하다.
 
 
  休屠王의 아들 日
 
  유목민과 농민은 적대관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목민은 땅에서 자라는 풀을 가축에게 먹이고 살아가는데, 농민들은 땅을 파서 농작물을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목민의 감정으로는 농민들이 땅을 파는 행위는 땅에 상처를 입히는 가혹한 행위이다. 그러니 유목민인 匈奴가 농민인 漢族을 좋아할 수 없었다. 漢族과 흉노의 대결은 그래서 숙명적이다.
 
  한반도에 한사군을 세운 武帝는 흉노를 증오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흉노에게 침략당하면서 온갖 굴욕적인 조공을 바치는 漢나라의 현실을 보면서 자라난 武帝는 등극하면서 타도 흉노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漢나라에는 보병밖에 없었다. 武帝는 우선 흉노의 배후 세력인 서역의 여러 세력과 동맹을 꾀하였다. 張騫(장건)이 서역으로 가서 大碗(대완: 지금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지역)까지의 넓은 지역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고, 李廣利(이광리)가 서역의 명마 300여 두를 이끌고 왔을 때 무제는 「西極天馬歌」를 지어서 李廣利의 공적을 치하하였다. 이 때쯤의 일이다.
 
  漢나라의 ♥去病 장군이 甘肅省에 원정하여 휴도국의 왕자를 볼모로 데려온 사건이 있었다(太初 3년 BC 102). 휴도왕은 흉노의 일파로 동맹국에게 배반당하여 죽고 왕비인 閼知(옌즈)와 어린 아들인 日石單(일제)가 잡혀서 漢의 수도로 옮겨 살게 되었다. 日石單는 기마민족의 혈통을 따라 말을 잘 다루었다. 그가 기른 말들은 훌륭하게 자라 漢나라에게 기마군을 창설하게 하였다. 武帝는 기뻐서 왕족의 여인을 日石單에게 주어 결혼하게 해 日石單를 왕실가족으로 삼는다. 日石單에게는 姓(성)이 없었다. 흉노는 원래 성이 없다. 그러나 이제 漢人(한인)이 된 日石單에게 金(김)이라는 성이 賜姓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日石單의 아버지인 휴도왕은 祭天金人(제천금인)이었다. 즉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 金人(금인), 즉 알타이 族이었던 것이다. 알타이라는 지명은 「金」, 즉 「Gold」를 의미한다고 앞서 설명하였다. 祭天은 제사장의 직분을 갖는 왕족을 의미하고 金人은 알타이 사람(Altai Men)을 뜻한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金氏(김씨)가 생겨난 것이다. 이 사건이 한국의 金氏族들이, 왜 新羅 金氏와 伽倻 金氏가 있게 되었는지를 암시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한국 金氏族들의 고향이 바로 알타이였기 때문이다.
 
  日石單(일제)는 漢字(한자)식 발음이다. 흉노 말로는 「피디」 또는 「미디」라고 발음한다. 「선각자」라는 뜻이다. 어머니인 閼知(알지)는 흉노말로 「옌즈」라고 발음한다. 「왕의 정실부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신라의 金閼知(김알지)의 출신 성분도 흉노 왕족과 결부해서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철의 松江 歌詞(송강가사)에 나오는 「연지분」은 옌즈의 고향에서 나는 붉은색 화장품의 원료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인류 최초의 金氏族
 
  피디는 황제를 측근에서 호위하는 직책으로 평생을 살았고 그의 후손들도 대대로 황실에 외척으로 비서실장급의 위치에서 황제들을 보필하며 살았다. 그러나 王莽(왕망)의 쿠데타를 막지 못한 이유로 後漢(후한) 광무제(AD 26~57)는 金氏 일족을 모두 없앤다. 「피디」 이후 4대 만에 당한 사건이다. 1세기 때 한국사에 金氏族이 등장하는 것을 文正昌(문정창)씨는 피디 계통의 족속들이 한반도로 이민 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였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므로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볼 시간을 갖겠다.
 
  피디의 무덤은 서안 부근에 있다. 武帝의 무릉과 곽거병의 무덤에 나란히 피디의 묘가 있다. 평면 정사각형의 중국식 土築墓(토축묘)이고 봉분은 사각추 형이다. 피디가 흉노 땅에서 살다가 죽었다면 흉노식 무덤인 적석묘에 묻혔을 텐데 하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숙연해졌다.
 
  알타이 출신으로 신라 땅에서 살게 된 김알지계의 후손들은 유목민의 생활을 포기하고 농업에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굳세게 흉노계의 칭호인 尼師今(이사금)과 麻立干(마립간)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였고 알타이 문화 전통인 금관을 쓰고 조상 대대로의 흉노·투르크 전통인 적석묘에 묻혔다. 영혼은 새를 통하여 하늘로 날려 보냈다.
 
  나는 처음 피디의 묘를 발견하고 봉분 앞에서 술을 따라 올리고 절을 하였다. 한국계 金氏 중에서 처음 찾아온 사람으로서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안내하던 조선족 고고학자 金憲鏞(김헌용)씨도 덩달아 절을 하였다. 그리고 金氏 성을 갖고 저 멀리 한국 땅에서 태어난 고고학자와 고향을 떠나 漢나라 땅에서 金氏 성을 처음 시작한 피디와의 이런 기가 막힌 해후에 감격하여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하였다. 1991년 7월이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한국문화의 原形을 찾아서
야쿠티아 여인이 盛裝한 모습. 쓰고 있는 모자는 원주민 샤먼의 모자와 같은 디자인이고, 신라 서봉총 금관의 內帽(내모)와 같은 구조이다. 한국 민속에서 여자아기들에게 씌우던 모자인 굴레도 같은 모양이다.
 러시아 바이칼 지방의 원주민들은 한국사람의 모습과 똑같은 북방계 몽골로이드(Mongoloid)이다. 브리야트族과 에벵키族이 주력 인구이다. 지금은 舊러시아와 소련시대를 거치면서 슬라브族들이 많이 이주해 와서 동양인들과 서양인들이 섞여서 살고 있고 간혹 코사크族도 만날 수 있지만 역시 원주민들은 유목과 수렵에 의존하여 살던 동양계 인종들이다.
 
  이 지역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샤먼(薩滿, Shaman)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샤먼, 즉 무당은 원래 에벵키族의 말이다. 야쿠티아에서 남자 무당은 「어윤」이라고 부르고, 여자 무당은 「우다간」이라고 발음한다. 하늘세계와 지하세계를 모두 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뜻한다.
 
  바이칼과 북쪽의 야쿠티아 지방의 토착문화에 관하여 기초지식을 얻으려면 우선 노보시비르스크를 찾아가야 한다. 우랄지방에 있는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러시아 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는 박사급 학자들 수백 명이 연구하고 있는 대규모 연구 센터이다. 여기서 우랄 동쪽의 시베리아 전역과 극동까지의 인문학과 자연과학연구를 관장하고 있다. 알타이, 바이칼은 물론 북극지방까지 모두 이곳 과학자들의 연구대상이기 때문에 나도 우선 여기에 들러 기존의 연구성과와 현지조사에 대한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고고학 민족학 연구소를 방문하여 소장인 안드레이 데레비안코 박사와 해후를 하고 민족학자를 소개받았다. 이스마일 게누에브라는 중년의 학자가 친절하게 시베리아 문화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나의 관심은 첫째, 알타이 고원부터 바이칼, 북극지방의 야쿠트까지의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청동기시대 이래로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왔는지 살펴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역사시대에 들어와 중국 세력, 특히 漢(한:BC 202~AD 220)나라의 세력확대가 변변한 왕조를 갖지 못했던 북쪽 초원에 살던 여러 민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유물이나 풍습의 변화로 읽어내고 싶은 것이었다. 그 기간이 바로 한반도에 고대 왕국들이 태동하고 주민의 유입이 왕성하던 기간과 겹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알타이지역부터 바이칼을 지나 북쪽 툰드라까지 퍼져 있던 민족들의 토착문화를 통칭하여 알타이 문화라고 편의상 부르기로 한다. 그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고 이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광의의 개념으로 알타이語에 속하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알타이 語群에 속한다는 얘기는 앞서 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문화의 原形(원형)이랄까 文化因子(문화인자)랄까 하는 것들을 찾아내려면 우선 연구해야 하는 지역이 바로 이 넓고 추운 초원지대(Steppe)와 자작나무로 하늘이 가려있는 삼림지대(Taiga)의 토착문화일 수밖에 없다는 중간결론에 도달한다.
 
 
  年代-地域 가설
 
  게누에브 박사는 민족학자이지만 고고학에도 조예가 깊어 내게 많은 정보를 주었다. 원래 러시아의 고고학은 민속학 또는 민족학과 따로 떼어 연구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그 이유는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현재의 문화가 고고학 시대의 문화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한 지역이 많기 때문이다. 고고학 연구의 한 방법론에 의하면 과거인의 생활을 유추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원시사회(Modern Primitive Society)의 생활상을 관찰한다. 문명과 떨어져 살고 있는 원시사회의 모습이 과거 인류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론으로 언어학에서는 年代 地域(연대 지역) 가설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문화의 핵심 어휘가 인간의 이동에 따라 고향으로부터 멀리 퍼져나가고 나서 세월이 흐르면 고향의 어휘는 바뀌었는데 퍼져나간 지역에서는 옛날 어휘가 그대로 살아 있다는 이론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나갔지만 한국고대사의 여러 문화양상을 해석하려면 한국인과 비슷한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현대의 원시사회 주민들을 만나 보아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현대문명에 덜 오염된 시베리아 오지에 살고 있는 알타이 諸族(제족)들의 현대의 사회상을 관찰하다 보면 의외로 고대 한국인들이 남겨놓은 문물을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다.
 
  게누에브 박사는 나에게 오브(Ob)江 유역에 사는 한티族에 관한 영화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샤먼」이라는 다큐멘터리였다.
 
  <江의 精靈은 여인이다. 그 여인을 위로하는 굿을 강변에서 한다. 나무로 깎은 인형들과 사슴모양의 조각들에게 절을 하고 통나무집에 잘 보관한다. 소나무에 헝겊을 주렁주렁 달고 샤먼이 무수하게 절을 한다. 백색 천은 물(水), 적색 천은 불(火)을 의미한다. 공물로 빵을 놓는다.
 
  사슴을 잡아 제물로 쓴다. 그리고 나무에 여러 번 허리 굽혀 절을 한다. 나무 위에 밧줄을 던져 올려 천신(가족신)과 교감한다. 최후에 사슴고기를 삶아 공물로 바친다>
 
  이 영화 내용 중 우리 민속에서도 흔하게 보이는 堂木(당목)과 幣帛(폐백)이 특별하게 나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나라에서 무당이 제를 지내려면 당목 아래서 향을 피우고 기복행위를 하는데 이때 주민들이 폐백을 바친다. 부자는 옷감을 匹(필)로 낼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옷감을 조금씩밖에 내지 못한다. 그래서 다양한 색깔의 옷감이 당목에 걸리게 된다. 시베리아에서 당목은 檀君神話에서 단군이 탄생하는 神檀樹 같은 것이고 신라 金閼知의 탄생장소인 鷄林과 같이 지도자의 탄생과 관계 있는 宇宙木이다.
 
  한국 무당들의 옷이 알록달록한 이유는 당목에 바쳐진 여러 색깔의 옷감을 꿰매서 옷을 만들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민속학자 김광언 교수의 해석이다. 그럴 듯하다. 하지만 조선시대 포도대장의 제복도 붉은색, 노랑색, 검은색 천을 섞어서 알록달록하게 만들었고 어린이들의 색동 저고리도 여러 가지 색의 천으로 만들었는데 그 이유가 당목에 걸렸던 여러 색의 폐백과 관련이 있을까. 이 문제는 나중에 또 고민하기로 하자.
 
  차르 황제 시절의 舊러시아는 정력적으로 시베리아를 개척해 나갔다.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땅인데다가 일년의 절반이상이 눈으로 덮여 있는 땅이니까 기본적으로 농업인들이었던 슬라브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쓸모 없는 땅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지리상의 발견과 기계문명 발달은 광업자원의 필요를 낳았다. 따라서 제국주의 시대의 영토확장의 추세에 따라 버려졌던 시베리아도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시비르 汗國(한국)에서 시베리아 유래
 
  시비르는 원래 종족의 이름이다. 투르크 몽골계의 민족으로 元나라 때 기록으로는 昔必兒(석필아)이다. 15세기에 망할 때까지 말 타고 날이 휜 장검을 휘두르던 민족으로 동유럽의 여러 나라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던 민족이다.
 
  시비르族이 휘두르던 칼의 이름을 따라 시비르 劍이 생겼고 혹시 추측이지만 펜싱경기의 사브르(Sabre)도 여기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실제로 시비르 族의 직계 후손이라고 믿고 있는 헝가리 사람들은 부다페스트 국립박물관에 시비르 검을 잘 보관하고 있었다.
 
  舊러시아가 제일 먼저 개척한 땅은 바이칼 지방의 이르쿠츠크였다. 강인한 코사크인들을 시켜 눈과 자작나무로 덮인 땅을 개척하고 통나무로 성곽을 둘러막고 도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1661년의 일이다. 원주민인 브리야트族과 에벵키族들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겠지만 농경민족들의 토지 사랑과는 달리 유목민족들의 이동생활의 전통은 금세 이르쿠츠크를 그들에게 내어주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음직하다.
 
  露日 전쟁 때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이르쿠츠크까지만 연결되어 있었다. 급하게 병력과 무기를 극동까지 수송해야 했다. 남북으로 기다란 바이칼 호수를 우회하여 철도를 건설할 시간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호수 위에 배를 띄워 연결해 舟艇橋(주정교)를 놓고 철도를 연결하였다. 겨울에는 얼음 위로 임시 철로를 깔고 人馬를 수송하다가 얼음이 깨어지는 바람에 크게 낭패를 당한 사건을 영화를 통해 본적이 있다.
 
  바이칼의 명칭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어떤 원로 한국학자는 白卵(백란), 즉 백알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그럴 듯한 해석을 하였지만 역시 아마추어 수준이다. 바이칼은 브리야트 말로는 물고기가 가득 찬 호수라는 뜻이고, 알타이語로는 榮光(영광)의 바다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영광의 바다 또는 영혼의 바다쯤으로 해석하는 게 이 지역 주변 여러 민족들의 바이칼에 대한 경외심에 합당한 해석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바이칼 지역의 두 개의 중심 민족인 브리야트族과 에벵키族의 샤먼 복장은 그대로 신라 왕족들의 祭服(제복)의 원형을 설명하고 있는 듯하여 충분히 시간을 잡고 사진촬영과 스케치를 하였다. 특히 등과 가슴에 달려 있는 새들과 물고기의 수까지도 꼼꼼히 적었고, 화살촉이나, 낚시바늘이 달려 있는 위치까지도 기록하느라고 여러 날이 소모되었다.
 
  게다가 고고학 유물의 사진 자료를 팔지 않아서 일일이 유리창을 통하여 사진을 찍느라고 촬영 비용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물관을 떠나기 전에 뮤지엄 숍에서 팔고 있는 에벵키族의 샤먼 인형을 샀다. 소련 시절로서는 아주 비싼 가격을 요구하였지만 연구 자료라서 거금을 쾌척해야 했다.
 
 
  툰드라에 흐르는 강
 
  이르쿠츠크를 떠난 비행기가 거의 2시간을 북쪽으로 날아가야 야쿠티아에 도착한다. 완전히 북극지방이다. 저녁 때였는데도 白夜(백야) 현상으로 한낮처럼 환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땅에는 산도 나무도 없는 평지에 개울과 늪지뿐이다 강들은 초가을부터 얼어붙어 글자 그대로 凍土(동토)가 되었다가 다음해 여름이 되어야 녹는다. 녹은 개울물들은 북쪽으로 흐르는 레나江에 합쳐진다
 
  수도인 야쿠츠크를 중심으로 100만 명의 인구가 310만km2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겠다.
 
  국토의 60%는 타이가(森林)이고 40%가 툰드라이다. 내가 도착한 7월에는 짧은 여름을 한껏 즐기려는 듯이 강물이 소리를 내어 흐르고 풀밭에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도시라고는 페인트도 칠하지 않은 목조건물들이 모여 있는 것이 전부다. 그래도 야쿠티아는 나에게는 오랫동안의 매력의 땅이었다. 나는 이 곳에서 인문학 연구의 황금 鑛脈(광맥)을 찾으러 온 사람이 되었다. 왜냐하면 산업화하지 않은 원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땅이고 그 원주민들이 따지고 보면 한민족과 유전인자가 가장 비슷한 브리야트族에서 파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991년에 조선일보가 기획한 대륙탐사 일원으로 바이칼에 왔을 때도 야쿠티아까지 가고 싶었지만 일행이 여럿이어서 모두 관심이 달랐다. 그래서 나 혼자만 야쿠티아를 보러 가겠다고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야쿠티아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하였다. 1970년대에 영어로 출판된 알렉시에브 교수의 야쿠티아 보고서를 런던에서 사게 되었다. 철의 장막 속에 꽁꽁 숨어있던 정보를 보여준 귀한 내용이었다.
 
  고고학 시대의 유물이나 현재 사용되고 있는 민속품이나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考古 민속적인 내용이었다. 그 후 일본 학자들의 체질인류학적 연구에 한국인과 유전인자가 가장 가까운 종족이 바이칼 지방의 브리야트族이라는 내용에 접하게 되었다.
 
  내용인즉, 혈액 속에 GM 유전자 중 AB3 FD라는 유전자는 몽골로이드의 특징인데 브리야트族이 가장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야쿠트族이 바로 브리야트族의 일파라는 것이다.
 
  러시아 시절의 황제에게 대항하던 수많은 젊은 귀족들이 바이칼 지방으로 강제 流刑 당한 이래 슬라브族들의 바이칼 이주가 시작되었고, 바이칼 원주민들의 문화는 급속히 슬라브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다. 게다가 공산주의 통치에 대항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는 토착문화의 중심인물인 샤먼들을 모조리 학살하고부터 원주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모래 속에 물 스며들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현상은 역사시대에도 있었다. 기원 전 3세기부터 중국의 秦(진)나라와 漢(한)나라가 중원 땅을 제패하고 흉노, 즉 몽골족들을 위협하였을 때 몽골인들은 미련 없이 다른 草地(초지)를 찾아 이동하고 말았다. 이때 흉노의 일파가 서쪽으로 옮겨가서 박트리아 세력과 합쳤고, 동쪽으로는 辰韓(진한) 땅으로 내려와서 신라를 형성하는 중심 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후에 따로 말하겠다.
 
  10세기 때 중국의 唐(당)이 천하를 제패하고 제국을 세워 주변민족을 압도하자 돌궐族들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터키)로 들어갈 때쯤 브리야트族의 일파가 북쪽으로 이민하여 야쿠티아 지방까지 밀려 나가게 되었다.
 
 
  白馬 전설
 
  야쿠티아는 러시아式 이름이다. 이 지역 토착주민들은 자신들을 사하(Caxa) 族이라고 부른다. 공화국 이름도 사하공화국이다. 사하라는 말 의 뜻은 해 돋는 땅이다. 아마도 사하族이 동쪽으로부터 이민해 온 모양이다.
 
  이곳 사람들의 인상은 몽골계로 검은 눈에 매부리코를 한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동양인들과 서양계통 사람들의 혼혈이 있었음이 보인다. 사하 언어는 터키語 계통이고 말과 소를 기르며 산다. 북극지방에서는 순록의 사육과 어로, 수렵을 병행하고 있었다. 러시아 이후로 점차 농업기술을 받아들이고 있다.
 
  먼저 박물관으로 갔다. 옛날 교회 건물이었던 목조 건물을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쓰고 있었다. 역시 소련의 영향으로 考古品(고고품)과 민속품이 함께 어우러져 토착민의 과거생활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박제된 白馬(백마) 한 마리가 있었다. 다리가 짧은 몽골마 계통이었다. 성스러운 장소를 표시하는 禁(금)줄을 띄우고 줄에는 색깔 있는 헝겊을 달아 놓았다. 마치 우리 민속에 聖所(성소)나 잡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에 금줄을 쳐놓은 것을 연상시켰다.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하면 야생의 말이 사람에게 사육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말이란 사람에게 사냥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스페인에 있는 알타미라 동굴벽화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古代馬(고대마·Bison)는 飼育馬(사육마)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몽골인들이 말을 사육하면서 멋대로 달아나는 말을 목동이 말을 타고 뒤따라 가면서 장대 끝에 달린 올가미로 잡아채어 쓰러뜨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광경은 세월이 흘러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명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다. 목동의 능숙한 기마술과 올가미를 거는 순간이 스톱 모션처럼 살아난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자.
 
  여기서 白馬는 정의로운 통치자가 타는 말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성한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날개 달린 말이 가뭄에 우물을 찾아주는 페가수스(Pegasus)가 있고, 페르시아 신화에서 善神(선신)은 白馬를 타고 惡神(악신)은 黑馬(흑마)를 탄다. 즉 하얀색은 善(선)이고 正義(정의)라는 생각이다. 카자흐스탄의 이씩 지방에서 발굴된 스키타이 말기 때(BC 3세기) 고분의 주인공은 흰말을 타고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카자흐스탄 국립박물관이 복원한 그림을 전시하고 있었다.
 
  신라의 박혁거세도 白馬가 羅井(나정)에 놓고 간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 그 말은 박혁거세를 땅에다 내려주고 홀연히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경주 신라왕의 무덤에서는 白馬가 구름을 가르며 힘차게 뛰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障泥(장니)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 고분을 天馬塚(천마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白馬는 이렇게 정통성을 갖춘 통치자를 상징하는 기마민족들의 善神이다.
 
 
  솟대 새의 北向
 
  말과 白樺(백화)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곳에 여러 개의 솟대들이 박물관에 전시돼 있었다. 어느 솟대 위에는 까마귀가 한 마리 앉아 있고, 어느 솟대 위에는 여러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까마귀는 큰 몸집이고 여러 마리의 새들은 몸집이 작은 잡새들이었다. 솟대는 중앙아시아로부터 北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와 일본에 걸치는 실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골고루 발견되는 민속현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강릉 端午祭(단오제) 때 만들어 세우는 솟대 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는 게 보편적인 현상이고, 신라 서봉총 北墳(북분)에서 발견된 여인의 금관 위에도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되어 있다는 것은 앞서도 이야기하였다.
 
  솟대는 나무(宇宙木 또는 生命木)이고 솟대 위에 앉아있는 새는 인간의 생명 또는 영혼을 인도하는 파일럿이다. 아시아 원주민들에게는 새가 사람의 생명을 하늘로부터 가져오고 사람이 죽으면 영혼을 다시 하늘나라로 가져간다는 믿음이 있어 왔다.
 
  즉 영특한 인물은 신성한 나무 밑에서 기도하는 여인에게 하늘의 절대자가 새를 통하여 보내는 정령으로 인해 탄생한다는 이야기는 月刊朝鮮 9월호에서도 이야기하였다.
 
  신라의 김알지가 계림에서 童子로 발견되었을 때도 새들이 지저귀었다고 하며, 毗處王(비처왕, 일명 炤智王) 때인 488년 왕을 시해하려던 사람과 궁녀가 간통하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을 만나도록 인도하는 까마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三國遺事 射琴匣).
 
  경남 진주 옥전리의 가야고분에서 발견된 금속장식에도 여러 마리의 새가 앉아 있어서 통치자의 탄생과 죽음에 새가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시아인들의 새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고고학 유물로 가장 큰 새는 인도네시아의 가루다(Garuda)일 것이다. 상상의 새이지만 얼마나 큰지 날개를 펴면 태양을 가려 세계가 암흑이 된다는 神鳥(신조)이다. 그래서 발리 섬에 있는 아주 오래된 힌두교 사원의 정문은 가루다가 날개를 편 모양으로 두 기둥을 삼고 있다.
 
  이 조각은 현대의 여러 조각가들이 모방하여 자카르타의 중심부에도 雄姿(웅자)를 보이고 있고, 그것을 본딴 듯한 조각이 우리나라 천안의 독립기념관에도 서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마음속의 새는 태양 속에 사는 까마귀인 三足烏(삼족오)에서부터 솟대 위의 새들인 오리, 원앙, 기러기 등이다.
 
  四神圖(사신도)에서 북방을 상징하는 玄武(현무)에 대칭되는 남방의 새는 朱雀(주작)이다. 그러나 주작은 미안하게도 한국인의 솟대 위에 앉는 새가 아니다. 솟대 위의 새들은 모두 철새이고 北向하여 앉아 있다.
 
  왜 한국의 솟대 위의 새들은 모두 北向하고 있나? 그들의 고향이 추운 북쪽지방이기 때문이다. 겨울을 지나기 위하여 잠시 越冬(월동)하러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새들에게 간절한 소원을 실어 보내는 과정이 솟대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 기복행위를 하는 한국사람들 중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北國(북국)이 마음의 고향인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여기서 북국은 어디일까? 아마도 少昊國(소호국)일 가능성이 있다.
 
 
  신라·가야·倭의 조상은 어디서 왔나?
 
  少昊國. 즉 작은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少昊는 중국 고전인 山海經(산해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西方(서방)의 神이다. 소호는 皇娥(황아)라는 선녀의 아들이다. 황아는 베를 짜는 여인으로 뗏목을 타고 은하를 저어나가 窮桑(궁상)이라는 뽕나무 밑에서 白帝(백제)라는 소년을 만나 사귀었다. 이때 그들이 타고 놀던 뗏목의 돛대 위에 옥으로 깎은 비둘기를 달아놓아 방향을 잃지 않게 하였다.
 
  황아와 백제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인물이 바로 소호이다. 뽕나무 아래서 태어났다고 하여 일명 窮桑氏(궁상씨)라고도 한다. 소호는 장성하여 고향을 떠나 동방의 바다 밖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 소호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호국에서는 모든 公卿大夫(공경대부)가 각종의 새(鳥)였다. 즉 소호국은 새의 왕국이었다.
 
  조금 긴 이야기를 소개한 이유는 이 내용에서 한국 고대사의 주인공들의 탄생신화와 한국인들의 민속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신라 金씨의 조상인 김알지는 계림이라는 나무에서 발견되고 알지의 탄생을 기뻐하여 새들이 노래하고 동물들이 뛰놀았다고 한다(삼국유사).
 
  또 황아의 배의 돛대 위에 달린 玉鳥(옥새)는 앞서 말한 가야시대의 玉田(옥전)고분에서 발굴된 철제 무기에 조각되어 있는 새들의 바로 그 모티브가 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 나라의 후지노키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에서 돛단배 위에 앉아 있는 새들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통치자의 탄생장면 배경에는 나무와 새가 기본적으로 등장하고 때로는 돛단배도 등장하는 내용은 山海經의 소호의 탄생을 설명하는 것이다. 신라, 가야, 倭(왜)의 지배층의 마음속에 왜 서방신인 소호의 탄생신화가 깊이 뿌리 박고 있을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신라, 가야, 倭의 지배층들이 北아시아의 주민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신라, 가야, 倭의 지배층들의 조상이 소호의 신화가 생겨난 중국 서북방 어느 곳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는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의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의 내용이 신화와 민속으로도 증명되는 것이다. 東京대학의 에가미 교수는 일본이 패전하여 의기 소침해 있을 때 기원 전 3세기부터 아시아 대륙에 살던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를 침입하였다는 학설을 내놓아 일본을 충격으로 몰아간 사건을 일으켰다.
 
  기마민족의 이동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며 기마 민족들의 신화가 한국의 신라와 가야를 거쳐 일본으로 간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알타이에서 발굴된 얼음 공주라는 귀족여인의 미라가 있다. 2000년이 넘었지만 얼음으로 싸여 있었기 때문에 원상을 복원해 볼 수 있었다. 이 여인은 머리카락을 높게 빗어 솟대 모양을 하고 거기에다 13마리의 금제 새(鳥)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 새들도 황아의 뗏목에 달렸던 새나, 서봉총 금관에 달렸던 새들과 마찬가지로 유목민족의 민속신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단풍이 곱게 물든 백화나무가 백마의 흰 빛깔과 어울리게 배치해 놓았는데 단풍든 백화나무의 잎새가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 빛깔은 황금색이었다.
 
  그 잎새의 모양은 신라금관에 달려 있는 瓔珞(영락)과 똑 같았다. 개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고, 고고학자의 눈에는 황금색의 백화나무 잎새가 순금제 영락으로 보이는 걸 어찌하랴. 사실 신라와 가야에서 발견되는 금관이나 금동관 디자인의 모티브는 나무이다. 그러니 당연하게 잎새가 달린 것이고 때로는 열매인 曲玉(곡옥)도 매달리게 되는 게 무엇이 이상한가. 신라의 國名도 일본어로는 「하얀 나무」(白木·시라기)가 될 만큼 신라인의 마음속의 토템으로 굳어 있는 백화나무의 잎새가 금관에 달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이 이야기는 따로 자세하게 하겠다.
 
 
  신라·가야에서만 나오는 角杯
 
  솟대가 군집한 바로 옆에 특이한 솟대가 있었다. 기둥 하나 위에 가로로 올려놓은 나무 위에 새들 대신 여러 개의 술잔이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 술잔들은 모두 밑이 뾰족한 모양으로 동물의 뿔처럼 생겼다. 이 술잔이 바로 기마민족들의 角杯(각배)였다. 각배는 그리스語로 「Rhyton」이라는 제사용 술잔인데 이스라엘 민족, 스키타이族에서부터 아시아의 기마민족 문화가 퍼진 全지역에서 유행한 술잔이다.
 
  한국에서는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것이다. 부산 福泉洞(복천동) 가야고분에서 발굴된 馬頭(마두) 장식 각배는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말머리와 角杯가 어우러진 걸작품이다. 그런 角杯가 솟대 위에 꽂혀 있었다.
 
  내가 지코프 미하일로비라는 박물관 직원에게 묻기도 전에 그가 설명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쿠무스(Kymus·馬乳酒)를 따라 놓는 잔들입니다』
 
  마유주는 말의 젖을 발효시켜서 만드는 유목민들의 독특한 술로서 막걸리 빛깔에 맛도 쉰 막걸리와 비슷하다. 기마민족이 사는 곳에는 어디라도 쿠무스가 준비되어있어서 나도 몽골에서 처음 마셨을 때는 약간 거부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카자흐스탄과 알타이를 답사하면서 여러 번 마시게 되어 점점 익숙해졌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쿠무스가 생각보다 독해서 막걸리 마시듯이 벌떡 벌떡 받아 마셨다가는 다음날 고생하게 된다. 乳製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조심스럽지만 나는 한 두어 사발까지는 견딜 만했다.
 
  다시 야쿠티아의 박물관을 살펴보자. 솟대 위의 새들은 크기가 달랐다. 커다란 까마귀는 한 개의 솟대 위에 한 마리가 앉아 있고 작은 새들은 한 솟대 위에 여러 마리가 줄지어 앉아 있었다. 소호국에 있었다는 공경대부의 모습이었다.
 
  ―까마귀를 야쿠트語로 무어라고 발음합니까.
 
  내 질문에 지코프는 안경을 고쳐 쓰더니 내 수첩에 영어로 적어 주었다.
 
  그는 「Sol」이라고 쓰고 발음은 「소르」라고 하였다. 솔은 라틴어로 태양을 의미한다. 동양에서는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검은 까마귀가 살고 있다고 믿는다. 즉 까마귀와 태양은 동서양 모두 同義語인 셈이다. 그리고 소르는 샤먼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야쿠트 사람들은 절대로 까마귀를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까마귀는 장수와 지혜의 상징이라고 한다. 까마귀가 새들 중에 제왕적인 대접을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人肉(인육)을 먹기 때문이다. 알타이 문화권에는 아직도 鳥葬(조장)의 민속이 있다. 鳥葬은 글자 그대로 사람의 시신을 새를 통하여 하늘나라로 보내는 엄숙한 의식이다. 까마귀 또는 독수리가 내려와 쪼아먹는다. 특히 전통적인 샤먼의 주검이나 후대에 유행하는 라마교 승려의 주검은 철저하게 鳥葬으로 처리되는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
 
  토착인들의 믿음으론 원래 인간의 생명은 하늘에서 새를 통하여 내려온 것이다. 그러니 육신이 죽고 나면 영혼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새들을 이용하여 영혼을 고향인 하늘나라로 돌려보내는 의식이다. 서기 3세기 때 사람인 陳壽(진수)가 쓴 三國志(삼국지)에 弁辰(변진), 즉 伽倻(가야)에서 대가(大家·족장)가 죽으면 집 앞에 커다란 새의 날개를 건다.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라는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왕족 여인의 무덤인 서봉총에서 발굴된 금관의 굴레모자(內帽)의 정수리에 앉아 있는 세 마리의 새도 주인공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파일럿이 아니고 무엇인가.
 
 
  『까마귀 神이여!』
 
  鳥葬이 현대인들의 의식으로는 끔찍하게 여겨질 것이지만 막상 그런 민족들의 입장이 되어 관찰한다면 死者의 영혼을 하늘로 귀환시키는 의식의 극치이다. 오래 전 몽골의 새벽 안개 속에서 라마승의 鳥葬을 목격하고 나도 한 두어 시간쯤 식욕을 잃은 적이 있지만 인류학적 체험의 최고 경지였다.
 
  까마귀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다. 다음날 까마귀와 白馬가 어우러지는 장면을 만났다. 짧은 여름을 한껏 즐기고 있는 북극지방의 우윳빛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원주민의 무당춤이 實演(실연)되었다. 사하族 무당춤의 인간문화재 격인 포드로프 아프나시 세묘노비치(63)라는 이름의 무용수가 보여주었다. 이 사람은 전통적인 무당춤 기능 보유자로서 한국으로 친다면 人間文化財에 해당되는 인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민속축제 때에 초대받는 유명한 인사였다.
 
  무용수가 가죽 두루마기를 입고 늙은 당목 밑에 섰다. 그는 왼손에 가죽 북, 오른손에 북채를 들고 있었다. 무당은 성냥을 꺼내 마른나무 가지로 불을 피웠다.
 
  그 불길 위에다 동물의 털을 태웠다. 白馬의 꼬리털이라고 하였다. 독특한 냄새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 주위로 퍼져나갔다. 타오르는 불길 위에 술을 한 잔 뿌리자 술 향기와 말의 꼬리 털이 타는 냄새가 섞여 묘한 향기가 되었다. 무당이 움직일 때마다 가죽 두루마기에 달려 있는 금속제 장식들이 소리를 냈다. 가슴에는 오리 모양의 새와 창(槍)들이 달렸고 등에는 여러 개의 방울이 달렸다. 두루마기의 소매에는 가죽끈을 여러 줄 달아매어 팔을 벌리면 새가 날개를 편 모양이 되게 하였다.
 
  이윽고 무당이 노래를 시작하였다. 주문인지 단순한 소리인지 불분명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1930년대부터 舊소련이 자행한 무당 말살 정책 때문에 무당의 주문을 암송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니 무용수가 주문을 확실하게 전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무당이 북을 치며 하늘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아, 아, 아, 두둥, 두둥, 으암, 으암』
 
  그리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냈다. 몸을 세차게 흔들며 새가 날아오르는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까악, 까악하는 까마귀 울음소리를 냈다.
 
  우리나라의 鶴舞(학춤)처럼 겅중겅중 뛰면서 주문을 말하였다. 사하族의 말이 아니라 러시아語였다. 동행하던 카자흐스탄 출신 게르만 김씨가 알아듣고 통역해 주었다.
 
  『외국인들이 왔다 이 땅에 처음 왔다. 木神(목신)은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까마귀 神이여, 여행자들의 신변을 보살펴다오』
 
  무당춤은 약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무용수의 모습은 엑스타시(Ecstasy)에 몰입한 경지로 보였다. 춤을 끝낸 무당이 허리를 숙여 사방에 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절실한 무당의 기도가 정말 하늘에 전달되었는지 실제로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우리가 있던 당목 위를 천천히 선회하고 있었다. 말의 꼬리털이 타는 냄새를 맡고 날아온 모양이었다.
 
  말과 까마귀와 사람이 높은 나무를 통하여 交感(교감)하는 순간이었다.
 
  5세기 때 신라에서는 금관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허리띠에도 순금제 장식을 10여 가지 정도 다는 게 유행하였다. 바로 그때 인물인 鳥生夫人(조생부인)은 자비왕(慈悲麻立干)의 여동생이고 지증왕(智證麻立干)의 生母(생모)이다. 鳥生은 祭官(제관)이었다. 5세기 신라 제관의 복장은 분명하게도 사하族의 두루마기 차림에 曲玉, 물고기, 칼, 숫돌, 매미 등 온갖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있지 않았나.
 
  鳥生부인이 환생하여 그 여러 가지 장식들의 의미를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속시원하게 설명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계속)●
Posted by PD 개인교수
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바이칼湖는 알타이語族의 子宮




<바이칼 호숫가의 堂木. 브리야트族은 백화나무에 하얀 헝겊을
매어 행운을 빈다. 우리나라 무속에서의 祈福行爲 그대로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거대한 호수가 바이칼이다. 지도로 보기에는 작아 보이지만, 바이칼은 매우 큰 바다이다. 그 크기가 유럽의 작은 나라인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합친 것 만하고, 물의 양은 미국 5대호의 물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안내인이 설명한다. 이 일대는 저지대의 분지이기 때문에 주변의 높은 지역에서 물이 흘러 들어와 호수에 모인다. 도합 336개에 달하는 작은 하천의 물을 끌어모은 바이칼湖는 인체의 맹장처럼 호수 남서쪽 끝에 매달려 있는 앙가라江을 配水口(배수구)로 삼는다. 앙가라江을 통해 바이칼湖의 물은 예니세이江과 합류하여 다시 北極海로 흘러 들어간다

이 지역의 주인은 브리야트族이다. 알타이語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터키族, 카자크族, 몽골族, 브리야트族, 한국族, 일본族 중에서도 한국인과 유전인자가 가장 가까운 종족이 브리야트族이다. 이들은 森林(삼림)과 호수를 생활근거로 하고 남쪽의 말 달리는 평원을 경제생활의 무대로 삼았다.

예니세이江 유역의 광활한 지역에 살고있는 全주민들에게 바이칼은 정신적 고향이다. 그 이유는 바이칼의 신비스러운 물 때문이다.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북극지방의 야쿠티아에 사는 주민들이 브리야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까마귀를 조상신으로 모시며, 지도자는 나무 밑에서 기도하는 여인의 몸에 엑스터시 과정으로 잉태된다는 믿음이 바이칼 지방 주민들과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이유가 의아하였었다.

타이가(森林) 지대인 바이칼과 툰드라 지대인 야쿠티아와는 전혀 딴판인 환경이지만 예니세이江으로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역시 지리학은 문화학의 기초가 된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오는 데 하루와 반나절이 걸렸다. 문학 하는 사람들에게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한 무대이었기에 매력이 있는 곳이고, 정치학도들에게는 17세기 러시아 청년 장교들이 반란사건의 결과로 참혹한 유형을 당한 곳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고고학자에게 바이칼은 흉노의 땅이자 鮮卑族(선비족)의 고향으로 더욱 매력 있는 땅이다.

한국인보다 더 韓國人 같은 브리야트族





여기 사는 사람들은 나와 똑같은 모습의 사람들이 많다. 아니 나보다 더 한국사람을 닮았다. 나는 한국사람치고는 약간 검은 피부를 타고난 사람이다. 金海(김해) 김씨의 조상이 되는 駕洛國(가락국) 金首露王(김수로왕)의 부인이 印度(인도)의 아유타國 출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인 중에는 유난히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 많은데, 나도 그중 한 사람인가 보다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여기 브리야트族들은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것처럼 동양인치고는 화사하다. 나처럼 南아시아적인 유전인자가 섞이지 않은 순수 몽골人인 셈이다

안내양의 모습은 순수 몽골人이 아니었다. 「스베타」라는 이름의 전문대학 3년생은 슬라브系 처녀였다. 여기서 태어나지도 않은 듯 이 지역의 인구라든지 산의 이름 같은 지역문화에 대한 상식적인 질문에도 머뭇거린다. 우리 대중가요에 등장한 「아무것도 모르는 順伊(순이)」 같은 시골 처녀였다. 하긴 당시의 소련은 帝國(제국)다운 큰 영역을 경영하고 있을 때이니까 우랄산맥 서쪽의 러시아 지방 출신도 시베리아에 와서 자유롭게 직업을 찾을 수 있을 때였다. 「순이」를 앞세우고 민속박물관으로 갔다.
1883년에 개관한 박물관은 지역문화 유물로 가득 차 있었다.


샤먼 수만 명을 학살한 蘇聯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라서 조명은 희미하고 진열장도 유리가 나빠 얼룩거렸다. 그러나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말이 실증되었다. 박물관 건물이 초라하다고 해서 소장품도 초라할 이유는 없는 법이다. 전시품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이 있었다. 샤먼(shaman: 무당)의 복장이었다.

소련의 사회주의는 원주민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 舊러시아 시절부터 소련 통치까지 오랜 기간 시베리아에 살던 샤먼 수만 명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넓은 대륙에 퍼져 살고 있는 다양한 원주민들의 정신적 버팀목 노릇을 하던 샤먼의 존재는 공산주의 이념으로 통치하려던 소련의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러운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지금 시베리아에는 샤먼이 한 사람도 없다. 世襲巫(세습무)는 이미 代가 끊겼고 가끔 神이 내린 降神巫(강신무)가 탄생한다고 해도 스승이 없으니 전통이 이어질 수 없다.

따라서 춤이나 비손(神에게 손을 비비면서 소원을 비는 일)도 잊혀졌다. 1995년에 야쿠티아 공화국에서 만난 샤먼 춤 전공자는 呪文(주문)을 암기하지 못했다. 공산주의는 70년밖에 계속되지 않았는데, 그 실패한 실험의 결과는 人文學(인문학)에 커다란 空洞現狀(공동현상)을 초래하였다. 공산주의 소련이 해체되어 러시아공화국이 된 지금이라도 누가 정신을 차려 잊혀진 말과 노래를 採錄(채록)해 둔다면 문화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임이 틀림없겠다.

샤먼의 복장은 두 개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하나는 가죽으로 만든 에벵키族의 것이고, 또 하나는 야쿠트族의 털 복장이었다. 에벵키族의 무당 옷은 가죽 모자와 가죽 두루마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자는 둥근 형태로 이마 높이로 帶輪(대륜)을 돌리고 대륜이 흘러내리지 않게 귀와 귀를 연결하고 이마와 뒤통수를 잇는 헝겊이 정수리에서 열 십(十) 자로 교차하게 만들었다. 한국 여자 아이들이 설빔으로 쓰던 모자인 「굴레」와 같은 모양이었다. 이런 모자는 신라 시대 귀족인 瑞鳳塚(서봉총)의 여자 주인공이 썼던 金製(금제) 모자와 北燕(북연)의 馮素弗(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金銅(금동) 모자와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두루마기 앞면에는 얇은 철판으로 만든 날짐승 여러 마리와 활촉·칼 등을 달아 놓았고, 뒷면에는 역시 철판으로 만든 사람, 포유동물, 물고기, 반달 모양의 칼 등을 주렁주렁 달아 놓았다. 이것은 샤먼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다스린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야쿠트族의 샤먼 복장은 털이 달린 두루마기라고 앞서 말하였다. 다만 모자에 사슴 뿔 모양으로 장식한 것과 털가죽 장화가 달려 있는 게 에벵키族의 복장과의 차이점이었다. 하긴 야쿠트 지방은 툰드라 지대이니까 거기에 서식하는 순록이 주민의 경제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샤먼도 거기에 걸맞은 복장을 입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환경·경제·신앙의 3요소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문화의 색깔이 결정되는 현상이 가슴에 전달되어 왔다.


바이칼에 보이는 빗살무늬 토기 문화





빗살무늬 토기는 한국 新石器(신석기)시대의 간판격인 유물이다. 바이칼 민속박물관에 보이는 고대 유물로는 舊石器(구석기) 시대의 打製石器(타제석기)부터 신석기 시대의 통나무 베는 돌도끼가 특징적이었다. 바닥 부분이 뾰족하고 몸체에 선과 점을 陰刻(음각)하여 마치 머리칼을 빗는 빗으로 그린 平行線(평행선)들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빗살무늬 토기는 한반도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데, 바이칼에서는 한반도 보다 늦은 시기인 靑銅器 시대의 제품이다. 함께 사용된 유물로는 石製(석제) 어망추와 동물 뼈로 만든 바늘이 있어서 당시 주민들의 어로생활을 설명하고 있었다.

조금 어려운 얘기지만, 한국 신석기문화의 대표유물인 빗살무늬 토기가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 전체에서 발견되는 현상을 놓고 나는 고고학도로서 평생토록 고민하고 있다. 先史時代(선사시대)에 유라시아의 문화현상을 보면 한반도부터 시베리아 헝가리·독일·스칸디나비아로 연결되는 環北極圈(환북극권: Circum Polar) 음각토기 文化帶(문화대)와 따뜻한 남쪽 지역인 중국·이란·터키로 연결되는 彩色土器(채색토기) 문화대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다. 음각토기는 추운 지방의 수렵 어로인들이 만들었고, 채색토기는 따뜻한 지역의 농경인들이 만든 것이다.

도대체 토기가 무엇이기에 공을 들여 뜻 모를 선들을 陰刻하거나 붉고 검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단 말인가. 이건 내 추측인데 先史人(선사인)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현대인들보다 더 깊었던 모양이다. 기후나 환경이 경제생활을 완전히 지배하던 때이었으니까 풍요를 희구하는 의미의 그림을 토기에다 그려서 주술적인 혜택을 기원하였던 것 같다. 아무튼 이때 토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모두 抽象畵(추상화) 계통으로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인 具象畵(구상화) 계통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한국의 빗살무늬 토기가 유라시아 대륙의 陰刻土器(음각토기) 문화권 중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현상을 놓고 민족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토기에 그려진 무늬가 고대인들의 신앙을 표시한 것이라면 한반도에서 발생한 어떤 신앙의 내용이 음각토기 문화권으로 퍼져 나갔다고 추리된다. 이때 혹시 신앙과 함께 사람의 遺傳因子(유전인자)도 퍼져 나갔다면 한국인은 수억이 넘는 北方 유라시아 인구의 DNA 구성에 깊이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인가?

문화는 따뜻한 지방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한반도는 음각토기 문화권에서는 가장 따뜻한 땅이다. 언어학에서는 다른 견해일지 몰라도 음각토기 문화권 사람들끼리는 유사한 언어인 우랄語와 알타이語를 사용하고 있다. 고고학적 문화 벨트와 언어문화권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현상이 나로 하여금 학문적 고민에 빠지게 한다.

이건 인문학적 상상이지만, 자연과학의 연구성과가 축적될수록 이런 해석에 힘이 실린다. 학문 발달사를 보아도 인문학적 발상이 자연과학을 선도한 적이 많다. 예를 들면 맬서스(Malthus)의 人口論은 適者生存(적자생존)이 키워드인데, 다윈 (Darwin)의 進化論(진화론)도 適者生存의 시각에서 動物界(동물계)를 해석한 것이다.





先史時代부터 숟가락 사용






잠시 과거 속으로 갔었지만, 이제 바이칼로 돌아가자. 레나 강변 일가(Ilga) 지방의 청동기 시대 유물 중에 청동제 낚시바늘과 함께 사슴 이빨로 만든 목걸이 장식이 있어서 어로와 사냥이 당시 그곳 주민의 생활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동물 뼈로 만든 숟가락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시베리아 주민들은 先史時代부터 숟가락을 사용하였다. 돌로 만든 숟가락은 「西 시베리아 先史文化」라는 책에 소개된 적이 있어서 놀라운 일은 전혀 아니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뼈로 만든 숟가락이었다. 정교하게 갈아 만들어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일상 생활용의 수준을 넘는 儀禮用品(의례용품) 같아 보였다. 한국의 先史時代 유적에서는 이렇게 정교한 숟가락이 발견된 적이 없기에 나의 고질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숟가락의 용도는 술이나 국물을 떠먹기 위한 것이다. 특히 뜨거운 국물은 숟가락 없이는 먹을 수 없다. 뜨거운 국물을 만들려면 물을 끓일 솥이나 냄비 같은 容器(용기)가 있었다는 얘기다. 어떻게 생긴 容器였을까?

이 의문은 다음날 대번에 풀렸다. 바이칼 호반의 호텔에서 점심을 먹을 때 뜨거운 스프가 나왔다. 어른 주먹 두 개 합친 것만 한 오뚝한 오지 단지에 담긴 스프를 먹게 되었다. 쇠고기 국물에 끓인 야채국이었다. 러시아말로 「쉬」라고 한다. 오지 그릇이니까 스프의 온도가 오래 보존되어 뜨거워서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밖에 없었다. 西유럽의 미지근한 스프는 납작한 그릇에 담겨 나오는 데 비해 이곳의 단지는 깊어서 국물을 떠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씩 떠서 입으로 불어 가며 먹는 「쉬」의 맛은 별미였다.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야채가 귀한 탓에 야채가 가득한 「쉬」는 감칠맛이 있었다. 역시 추운 지방에서 뜨거운 湯(탕)류를 먹는 습관이 숟가락을 일찍부터 발전시켰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일본사람 이치이로 하치로(一色八郞)가 쓴 「젓가락(箸)의 文化史」라는 책을 보면 南중국에서부터 적도지방까지는 모두 젓가락을 사용하는 문화권이다. 지금이니까 위생적으로 젓가락을 쓰지 옛날에는 모두 손가락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매운 커리 음식도 손으로 먹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南아시아를 여행하면 스프를 먹어 볼 기회가 드물다. 날씨가 더운 지방이라서 뜨거운 스프가 없는 것인지 몰라도 스프를 먹는 문화가 없어서 숟가락이 불필요한지도 모른다.



바이칼 自然史 박물관


바이칼 호수를 연구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박물관이 있었다. 지은 지 오래된 목조 건물 속에 각종 어류의 표본을 전시하고 있다. 바이칼은 원래 바다였다. 地質時代(지질시대)에 화산 활동으로 생긴 深淵(심연)이 융기하여 바다에 있던 동·식물을 고스란히 품은 채 호수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바다에서만 사는 물고기들이 내륙호수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짠물은 서서히 단물이 되고 그 속의 생물들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여 매우 특수하게 진화하였다. 바이칼湖는 길이 636km, 최대 폭 79km, 표면적 3만1500km2, 가장 깊은 곳 1742m, 투명도는 한때 40m였고 200여 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南美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갈라파고스 섬에서 살고 있는 도마뱀을 연구한 다윈도 아마 여기는 못 와본 것 같다. 그 사람의 책에 바이칼湖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는 걸 보니….

호숫가에는 수영복 입은 아이들이 있었는데, 정작 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이 너무 차갑기 때문이다. 물가에 서서 낚시하는 사람도 있어 一見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호수를 건너다니는 여객선이 도착하여 사람과 짐들을 내리느라고 잠시 어수선하였다가 이내 太古風의 평화로 돌아왔다.

바이칼湖 서쪽 언덕 위는 나무 숲이었고, 숲 속엔 굵은 백화나무에 흰색 광목 조각이 무수하게 매여 있었다. 우리나라 巫俗(무속)에도 등장하는 堂木(당목)이었다. 한국에서는 당목에 五方色(5방색)인 검은색(북) 붉은색(남) 푸른색(동) 흰색(서) 황색(중앙)의 천을 매단다. 한국 것과 비교하면 바이칼 것은 흰색 한 가지뿐이어서 단순하지만, 나무에다 헝겊이나 종이를 매달면서 인간의 소원을 비는 신앙의 내용은 똑같은 것이다.

『나무와 헝겊을 러시아말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순이가 알 턱이 없었다. 하긴 러시아말로 알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원주민인 브리야트族이나 인근에 살고 있는 에벵키族의 말이어야 우리말과 비교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목이 있는 곳에 장승이 있는 법이다. 호텔 입구에 텁석부리 영감 모습의 장승이 있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듯한, 安東 하회탈을 쓴 모습의 장승이었다. 먹과 붓이 있었다면 「天下大將軍」이라고 써 주고 싶었다.





사냥꾼들은 통나무집에 산다. 우선 혹한을 이겨 내려면 보온이 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통나무집은 견고하기 때문이다. 한번 내리면 몇 미터씩 오는 폭설의 무게를 이기려면 우선 집이 튼튼해야 한다. 또한 여기 주민들이 시베리아 삼림지대의 맹주들인 호랑이나 곰 같은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통나무집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굵은 재목으로 지은 귀틀집들이 타이가(Taiga) 지대 곳곳에 있었다. 평면이 직사각형이고 중앙에 출입구, 좌우에 들창이 있는 게 기본형이다. 이 경우는 방이 하나 짜리다. 조금 큰 집은 2층으로 아래층은 창고, 위층이 살림공간이다.



신라 積石木槨墓의 原型





「타이가 하우스」(멋대로 命名한다면)의 기본형은 유목민인 스키타이-알타이族들의 무덤방으로 전용되었다. 예니세이 상류의 유명한 파지리크 古墳(고분)은 초기 금속기 시대의 族長級(족장급) 주인공이 통나무집을, 저승생활을 위한 집으로 삼아 쉬고 있었다. 수많은 副葬品(부장품)들이 통나무집 속에서 발견되었다. 주인공과 유품들이 도굴되지 않도록 통나무집 위에 천문학적 분량의 돌이 산처럼 쌓여 있는 구조였다.

유사한 구조가 인근의 얼음공주의 묘, 카자흐스탄의 이씩 쿠르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것이 바로 新羅(신라) 왕족들의 무덤인 積石木槨墓(적석목곽묘)의 구조다. 돌을 쌓아 통나무집을 덮은 구조인 것이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거리는 요즘의 제트기로 날아가도 다섯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이고 알타이지방의 이씩 쿠르간이나 파지리크 古墳이 만들어진 때는 신라왕들의 무덤보다 800년 이상 빠르다.

중앙아시아의 古代민족들과 新羅의 왕족들은 무슨 관계가 있었기에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고고학자들은 世紀(세기)를 넘기면서 고심하고 있다. 인간의 이동인가? 그렇더라도 기나긴 시간 가운데 傳承(전승)의 錯誤(착오)현상도 없었단 말인가? 이에 관한 고민은 일단 나중에 하기로 하자.

타이가 하우스 정문에 물고기 그림이 있었다.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金海 首露王陵(김해 수로왕릉)의 雙魚文(쌍어문: 神魚)이었다. 앞서 말한 쌍어문의 문화사적 의미는 단순한 文樣(문양) 이상으로 심오한 것인데, 여기서 발견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도(아요디아)-南중국(安岳)-가야-倭(왜)까지의 이민 루트 때문에 首露王이 神魚思想(신어사상)에 접하게 되었겠지만, 바이칼 지방의 雙魚 무늬 그림은 약간 의외의 존재였다. 어쩌면 바빌로니아-스키타이-알타이-바이칼까지 주민들이 이동한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前者가 농업사회 간의 이민이라면, 後者는 騎馬民族(기마민족)들 간의 접촉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백화나무는 新羅의 토템


타이가 지대의 한복판인 바이칼 지대는 「白樺(백화)나무」(자작나무)로 덮여 있는 땅이다. 백화나무의 고향은 寒冷(한랭)지대다. 한반도의 기후는 백화나무가 탐스럽게 자라기에는 너무 덥다.

그런데도 신라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백화나무를 숭상하였다. 天馬塚(천마총)에서 발견된 승마용 障泥(장니:말다래)를 백화나무 껍질로 만들고, 그 위에 하늘을 날아가는 天馬를 그렸다. 하고많은 재료 중에서 하필이면 백화나무 껍질을 썼을까? 그뿐만 아니라 천마총의 주인공은 白樺皮(백화피)로 만든 모자도 쓰고 있었다. 신라인들에게 백화나무는 무슨 의미가 있었기에 저승으로 가는 사람의 말다래와 모자를 백화나무 껍질로 만들었을까. 여기에 신라인들의 신비성이 있다.

백화나무는 영어로 「birch」이고 러시아 말로는 「베로이자」이다. 유목민들이었던 스키타이族이나 사냥꾼인 에벵키族들이 이승의 집이나 저승의 집을 모두 백화목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나를 흥분시켰다. 왜냐하면 日本書紀(일본서기)에서는 신라를 「白木」이라고 쓰고 「시라키」라고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히 백화목이 新羅라는 國名으로 발전하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다.

新羅 金氏의 조상인 金閼智(김알지)는 鷄林(계림)에서 탄생하였다. 유목민들의 민속 중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는 항상 커다란 나무를 통해서 생명이 내려온다는 것은 月刊朝鮮 9월호에서 설명하였다. 新羅人에게 그 나무가 바로 한랭지대에서만 자라는 白樺木이었다는 것이 민속과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모두 일치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인들의 고향은 따라서 白樺木이 잘 자라고 있는 시베리아 지역이다. 그 지역 종족 중에서 한국인들과 假定(가정) 유전인자가 가까운 바이칼 지역의 브리야트族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金秉模의考古學 여행

新羅의 신화·알타이의 눈보라·무덤 속의 女戰士·曲玉·금관·積石목곽분·싸랑·솟대·샤먼…

그 속에 감춰진 우리의 原形과 만나다




비로소 피부로 접한 알타이 文化




알타이는 산 이름이다. 동시에 산맥 이름이며, 그 주변 지역의 이름이다. 중앙아시아 내륙지방의 고원지대에 알타이산이 솟아 있고 알타이 산맥이 東西로 흐른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카자흐인, 퉁구스인, 브리야트인, 에벤키인, 야쿠트인, 몽골인 등이 넓은 의미의 알타이족들이다. 이들의 각종 언어는 모두 알타이어족에 속하며 한국어와 일본어와도 깊은 親緣(친연) 관계에 있다.
 

나의 알타이에 대한 관심은 박시인 교수가 소개한 알타이 신화 때문이었다. 朴교수는 알타이 지역을 답사해 보지 못한 채 2차 자료만 가지고 알타이 문화를 소개하였지만, 그 내용에는 한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 수두룩하였다. 이를테면 영특한 새로서 까마귀의 기능이라든지, 씨족의 조상이나 최초의 왕이 등장하는 장소가 「신령스러운 나무(神樹)」 밑이라는 것 같은 내용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三足烏(삼족오)나, 鷄林(계림:경주)에서 발견되는 김알지 설화 같은 것이었다. 그런 내용을 읽어 가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어는 알타이 계통의 언어다. 왜 가까운 중국어와 비슷하지 않고 저 멀리 알타이와 가깝단 말인가? 이런 소박한 의문에 대한 역사적·인류학적 해답이 없던 시절은 의외로 오래 계속되었다. 1990년 이후 러시아가 문호를 개방하고 나 같은 인문학 연구자들이 광활한 시베리아와 스텝지대를 자유롭게 탐사할 수 있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글자로만 접하던 알타이 문화를 피부로, 肉聲(육성)으로 만날 수 있었음은 참으로 커다란 행운이었다.
 

스키타이 女戰士의 모자
 

 
알타이 남서쪽에 살고 있는 카자흐족의 민속신앙에 위대한 샤먼의 탄생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즉, 아기를 낳고 싶은 여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다. 그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되면 새들이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그러면 그 여인이 잉태한다. 엑스터시 과정이다. 그런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나무 - 새- 엑스터시 잉태- 위대한 샤먼의 탄생이라는 圖式이다. 그래서 알타이 문화권에서 태어난 유능한 지도자는 모두 아버지가 없다.
 

한국사에서도 탄생과정이 신화로 처리되어 있는 사람이 씨족의 始祖(시조)나 왕으로 등장한 경우가 많다.
 

신라의 朴赫居世(박혁거세)와 김알지의 부모가 불분명하고, 昔脫解(석탈해)와 金首露(김수로)도 누구의 후손인지 모른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동쪽 이시크(Issyk) 고분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경 사람인 스키타이 여자 戰士(전사)는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아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알타이에 발굴되어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은 여자 귀족의 높이 올린 머리장식에서 금으로 만든 새가 여러 마리 달려 있어 솟대에도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음을 보여 준 사실이다.
 
신라 자비마립간의 여동생인 鳥生夫人(조생부인)은 이름도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이지만 그 여인의 직업도 의례를 관장하는 祭官(제관)이었다. 신라와 유사한 민족구성과 문화양상을 지닌 弁辰(변진)에서 大家(대가)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魏志 東夷傳).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인 실물로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조각품에 나무 위에 새들이 앉아 있는 것들은 한둘이 아니고, 경주 瑞鳳塚(서봉총)에서 발굴된 신라 금관은 여성용이었는데, 머리 부분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역사 속의 새는 아마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일 것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 형식은 積石墓(적석묘·Cairn)로서 기마민족의 전통이다. 통나무집에다 시신과 부장품을 집어넣고 막돌로 둥글게 덮는 모양이다. 그 문화를 스키타이-알타이式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 금관의 제작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金씨계 인물들이다.
 
 
金씨계의 조상은 김알지이다. 그는 계림에서 발견한 상자 속에 있던 어린아이였다. 같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도 하늘에서 날아온 말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成人(성인)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알이나 상자(櫃)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천손)신화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난생)신화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천손신화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알타이, 몽골족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농경민족인 대만의 빠이완족, 타이족, 자바족, 인도의 문다족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즉 천손신화는 北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족들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농경민족들의 신화이다.
 

漢字로 금(金)이라는 뜻은 「쇠(鐵)」의 뜻과 「순금」의 의미도 있지만 역사에 등장한 신라 김알지로 시작되는 「김」은 순금의 뜻이다.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기마민족의 언어인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다. 멀리 터키어에서부터 퉁구스어, 브리야트어, 몽골어에 이르기까지 알트, 알튼, 알타이 등이 모두 알타이어족의 공통적인 의미로 금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라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신라인의 이중 구조: 북방+남방族
 
 
신라 金씨의 조상인 김알지의 이름도 알타이 계통 사람이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알지-알치-알티로 어원 추적이 가능하므로 김알지의 이름은 알타이 출신 金씨라는 뜻으로 Gold-Gold라는 뜻이 중복된 흥미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김알지가 알타이 계통의 인물이라는 것은 그의 탄생설화가 얽혀 있는 곳이 鷄林(계림)으로 알타이적인 영웅탄생에 나무(神木)와 직결되어 있고, 그의 후손들의 무덤인 경주의 신라 왕족들의 積石木槨(적석목곽) 형식의 무덤들은 북방 기마민족들의 매장 전통을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김알지는 계림에서 발견된 상자 속에서 동자의 모습으로 발견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상자 속에서 동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난생신화의 구조이다. 나무, 즉 神木에서 주인공이 태어난다는 내용은 분명히 기마민족인 알타이적 천손신화인데, 정작 태어나는 순간은 남방 농경민족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으로 분장되어 있다.
 

왜 그럴까?
 

기마민족이면 떳떳하게 기마민족식 (알타이 민족의 신화인 하느님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天孫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못하고 왜 구차하게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처럼 탄생하였다고 꾸며져 있을까? 여기에 초창기 신라의 통치계층 인구들의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경주지방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인 인구가 살고 있었다. 이는 경주 지역의 수많은 고인돌이 증명하고 있다. 그 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소수의 기마민족이 이민 왔다.
 

신라인들은 삼국지 위지 東夷傳(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辰韓(진한)족이다. 중국 서북쪽의 秦(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민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다수의 토착 농경인들 위에 통치자로 군림하기에는 인구가 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여러 代(대)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드디어 미추왕(麻立干) 때 처음으로 金氏系 인물이 최고통치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소수의 기마민족 출신 金氏系 인물이 다수의 농경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농경인들처럼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분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궤짝 속에서 동자로 발견된 주인공이 북방계 토템인 신령스러운 나무, 즉 계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꾸몄을 가능성이 짙다.
 

현대에 와서도 각종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후보자가 평소 믿지도 않던 불교의 부처님 點眼式(점안식)에도 참석하고, 한 번도 가 보지 않던 시장에 가서 아주머니들의 손을 붙잡는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치권으로 부상하려는 사람들이 별의별 변신방법을 다 동원하는 현상은 똑같다.
 

알타이 고분에서 미라로 발견된 동양계 여인의 盛裝한 모습에서 올린 머리에 장식된 순금제 새들이 있다. 이 새들도 주인공의 탄생과 죽음에 깊이 관여하였던 영혼의 새들로서 여주인공의 혼을 天上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이마 부분에 커다란 새의 날개 한 쌍(鳥翼形 裝飾)이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고대인의 영혼관이다.
 
南아시아적 생활+北아시아적 정신
 

 
얼마 전까지 나에게는 큰 근심이 있었다. 내가 대표로 되어 있는 유네스코 산하 국제박물관협의회(ICOM·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의 한국지부에서 세계총회를 서울로 유치하는 데 성공한 뒤였다. ICOM 총회는 3년에 한 번씩 개최되며 한 번은 박물관 문화가 일찍 발달한 유럽에서 다음 한 번은 非유럽 국가에서 개최해 왔다.
 

 
ICOM의 회원국은 145개국이고 등록회원수가 평균 1만7000명이다. 총회에 참석하는 인원은 평균 2000~2500명으로 주최도시가 얼마나 문화적 흡인력이 있느냐가 최대의 관건이고, 주최 측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홍보하느냐에 따라 참가인원이 크게 달라진다. 2004년의 서울 대회는 ICOM 100여 년의 역사상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인 만큼 세계의 수많은 박물관 전문가들이 지대한 관심을 표해 오고 있어서 어느 대회보다 큰 규모의 행사가 될 전망이다.
 
그런데 세계대회를 하려면 본부 집행위원회가 인정하는 로고를 디자인하여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준비위원들은 지난 몇 달 동안 고민을 하였다. 아시아에서 처음 하는 행사이니까 로고의 내용을 아시아인 공통의 상징으로 할까, 아니면 서울市에서 개최하니까 서울의 상징인 북한산, 청와대, 남대문에서 로고를 딸까. 또는 이번 대회의 주제가 무형문화재이니까 탈춤이나 사물놀이를 내용으로 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하였다. 사람마다 주장이 그럴듯하고 어느 아이디어 하나 버릴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위에 열거된 상징들은 이미 다른 행사에서도 한두 번 이상 사용되었음직한 것들이라는 공통성이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명언이다. 한국 토착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유산으로는 농경문화의 상징으로 고인돌이 있고, 北아시아인들의 敬天(경천)사상을 상징하는 솟대(Totem Pole)가 있다. 한국에 수만 개나 남아 있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중에 나타난 南아시아 지역의 벼농사 기술자들 사회의 매장풍속이다. 반면에 솟대는 알타이, 야쿠티아, 바이칼, 몽골 지역 사람들의 神鳥思想(신조사상)이 그 뿌리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국인의 경제방식은 南아시아적인 농경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세계는 北아시아적인 敬天사상이 지배해 왔다.

솟대 위에 앉은 새는 지상의 인간들이 하늘에 계신 절대자를 향하여 祈福(기복) 행위를 할 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媒介者(매개자)이다. 그래서 端午祭(단오제) 때 솟대를 세우고 솟대 위에 새를 깎아 앉힌다. 새가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神鳥사상이 퍼져 있는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서 고루 발견된다. 카자흐족, 퉁구스족, 위구르족, 브리야트족, 몽골족, 한국, 일본의 민속이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반드시 새가 등장한다.
 


솟대를 로고로 채택한 까닭
 

중국 고전 山海經(산해경)에 기록된 少昊國(소호국)에서는 모든 공경대부가 새(鳥)일 만큼 새들은 東아시아의 신화 속에서 중요한 주인공들이다.

신라 金氏 왕들의 조상인 김알지가 계림에서 발견되었을 때 온갖 새들이 노래하였다고 하며, 고구려 고분벽화의 태양 속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가 있음은 너무도 유명하다.
 

일본 古墳時代(고분시대)의 벽화에는 死者(사자)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船)의 항해사로 새들이 앉아 있다. 나라(奈良)의 후지노키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에는 십여 마리의 새들이 앉아 있다. 일본 神祠(신사)의 입구를 지키는 도리(鳥居: 門)도 새들이 앉는 곳이다.
 

이 모두가 알타이 문화권의 오랜 전통으로부터 현대 민속으로 계속되고 있는 솟대의 원형들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神鳥사상은 뿌리가 깊은 것이고 동북아시아 전체에 흐르고 있는 문화의 맥이다.
 

한국적인 것이 틀림없지만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도도히 흐르는 문화의 저류를 민속행사에 등장하는 솟대를 통하여 실감한다. 이처럼 새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있는 중요한 토템이자 東아시아 여러 민족의 공통적 토템이기에 아시아에서 처음 개최되는 세계 박물관 총회에 로고로 사용해도 격조에 맞을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로고는 단오제의 솟대를 기초로 하여 도안되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르기 직전의 흰색 오리 두 마리가 앞뒤로 앉아 있는 모습이 탄생하였다. 최선호 화백의 작품이다.
 

알타이산 북쪽은 고원지대로서 예니세이江의 발원지이다. 옛날부터 유목민들이 양(羊)을 기르며 평화롭게 살고 있는 땅인데 철기문명이 확산되면서 여러 민족이 드나들게 되었다. 지금 이 지역의 주민들은 러시아의 영향으로 백인들과 황인종이 섞여 있지만, 옛날에는 아시아계 몽골족 들이 이 땅의 주인이었다.
 

알타이 기사의 부적-曲玉의 의미
 

 
그 증거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루덴코라는 학자가 이 지역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2500년 전에 만들어진 고분들을 발굴하여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 보고서는 1953년 러시아어로 출판되었고 1970년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필자가 이 고분들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적석목곽묘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보다 시간적으로는 약 900년 가량 빠른 것들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구조가 같은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즉, 통나무집에 사람과 유물이 들어 있고 그 위에 막돌을 두껍게 덮어 놓은 형식이다.
 
어느 민족이든 고분 구조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좀처럼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고분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은 주인공들이 생전에 유사한 사유세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어쩌면 종족적인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신라인과 파지리크人과의 관계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다. 파지리크 5호 고분에서 나온 물건 중 통나무집 벽에 걸어 놓았던 모직 담요 펠트(Felt)가 있다. 수놓아 그린 그림에 두 사람이 보인다. 왼쪽 사람은 의자에 앉았는데, 동양인 얼굴에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이고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발굴자는 이 사람을 여성으로 보고 있다. 머리에는 가죽 같은 재질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 왼손에 구불구불한 가지가 많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어서 직업은 샤먼(巫師)이라고 해석되었다.
 

오른쪽 사람은 말 위에 앉은 남자 기사인데 튜닉형의 半두루마기를 입고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감아 올린 아랍인 型이다. 목 뒤로 날리는 스카프로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말은 다리가 긴 아라비아 계통의 말로서 옛날 漢(한) 武帝(무제)가 흉노를 격퇴하기 위해 간절하게 원했던 汗血馬(한혈마)이다.
 

 
두 사람 중에 샤먼은 크게 그렸고 기사는 상대적으로 작은 비례로 그려져 있다. 고대 그림 기법으로 지체가 높은 사람은 크게, 낮은 사람은 작게 그려진 것을 감안하면 동양계 여인이 그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주인공임을 알 수 있고, 아랍인 기사는 아마도 멀리서 온 방문객이거나 용병쯤으로 해석된다.
 

내가 이 그림에서 눈여겨본 부분은 말에 달려 있는 曲玉(곡옥)이었다. 곡옥은 굽은 옥으로 커다란 머리와 가는 꼬리로 구성되고 머리 부분에 구멍이 뚫려 끈을 꿰어 매달 수 있는 장신구이다. 대부분 푸른 玉 제품이고 때로는 金製 또는 石製도 있다. 신라 왕족의 금관, 목걸이, 허리띠에 여러 개 달려 있어서 신라미술품 연구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다.
 
신라 왕족들이 왜 曲玉 장식을 좋아했는지, 왜 曲玉이 동물의 태아 때 모양을 하고 있는지, 사람마다 제각기 의견들을 제시하였다. 어떤 이는 맹수의 발톱 모양이니까 유능한 사냥꾼의 장식이라고 그럴듯한 해석을 하였고, 또 다른 이는 초승달 모양이므로 月神(월신)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적도 있다. 어느 의견도 1970년에 나온 S. 루덴코의 파지리크 보고서를 보지 못하고 내린 추측들이었다.
 
 
한국고대사에서 曲玉은 신라, 가야에서만 유행하였다. 고구려, 백제에서는 인기가 없는 디자인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曲玉의 의미를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데, 한국 문화의 영향권 안에 있던 일본 이외의 외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었으므로 비교연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추측성 의견들만 난무하였었다.
 

파지리크의 曲玉은 기사가 탄 말의 가슴에 한 개, 콧잔등에 한 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보고서의 그림으로는 그 색깔이 코발트색으로 그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이 바뀐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지(Hermitage) 박물관에서 내가 본 실물은 신라의 曲玉과 같은 색인 초록색에 가까웠다.
 
 
 
신라와 그리스는 馬로 연결
 

 
曲玉의 의미는 지루한 추적 끝에 生命(생명)의 상징이라고 결론이 났다. 그리스에서는 이런 모양의 장식을 가지(Egg Plant)라고 부르고, 씨(種)를 잘 퍼뜨리는 열매로 규정하고 있다. 신라에서 왕으로 등장한 사람의 친부모의 금관에서만 曲玉이 달려 있는 현상도 曲玉의 의미가 多産(다산)과 관계 있는 것으로 쉽게 이해된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있는 남자가 파지리크가 있는 알타이 지역의 원주민인 몽골로이드(Mongoloid)가 아닌 이란-아랍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2500년 전 알타이 지역을 방문한 아랍계 기사는 누구인가? 혹시 黑海(흑해)지역에서 맹주 노릇을 하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족은 아닐까.
 

그리스와 교역하며 화려한 그리스 문화에 눈이 부셔 엄청난 생필품을 주고 그리스의 금·은·옥 제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던 바로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후에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투스가 만난 용맹하고 민첩한 스키타이족이었다면 그 사람의 말에 장신구로 달려 있는 曲玉은 그리스에서 처음 디자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고 보니 신라 유물 중에 동물 뿔 모양의 술잔인 角盃(각배)도 그리스, 스키타이, 알타이 지역에서 고루 발견되고 경주에서 발견된 기와에 그려진 날개 달린 天馬(천마)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가수스(Pegasus)라고 해석해야 될 판이다. 그렇다면 신라인과 그리스인은 비록 時空을 달리하였지만 스키타이-알타이를 통한 말의 문화로 단단히 연결되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나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도대체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고금의 동서양을 떠도는 이상한 구름에서 문득문득 내리는 비와 무지개를 찾는 작업인 듯하여서이다.
 

 
에르미타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의 주인공인 기사여, 그대는 왜 푸른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오셨는가? 파지리크에 왔더니 그곳 샤먼이 선물로 알타이 원산의 옥으로 깎은 曲玉을 부적 삼아 선물로 준 것인가?
 


이시크의 적석목곽묘에서 발견된 女戰士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 동쪽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이시크(Issyk) 호수가 있다. 중국의 天山山脈(천산산맥)의 한 자락이 남북으로 달리는 끝자락에 스키타이 마지막 시기의 고분군이 있다. 이 지역은 고도가 높아서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만년설이 녹은 물이 흘러내려 이시크澔로 들어간다. 스키타이 왕족들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땅에다 조상을 모셨다.
 

이시크는 알타이 남쪽 天山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있다. 현재는 카자흐스탄의 영역이고, 옛날에 스키타이족의 마지막 활동 무대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BC 8세기부터 BC 3세기 사이에 꽃피웠는데 이시크 시기는 BC 3세기에 해당된다. 알타이산의 북쪽 고원인 파지리크 문화보다 약 3세기 늦은 시기이다. 이시크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쿠르간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 몇 개를 러시아系 카자흐인 고고학자 아키세브 교수가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순금 장식으로 덮은 갑옷을 입은 청년 戰士(전사)가 발견되어 「황금인간」이란 별명이 생겼다. 이 황금인간은 최근 프랑스 과학자들에 의하여 17세 전후의 여성으로 판명되어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다. 남성 중심의 기마민족 사회에서 최고 통치자급의 의상과 유물을 갖고 있던 사람이 여성이라면 이 여성의 생전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실로 많은 연구과제를 던지고 있는 인물이다.
 
알타이 지방의 여러 곳을 탐사하던 중 알아낸 귀중한 한마디 말이 바로 「사랑」이란 단어의 뜻이다 한국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자 모든 유행가 노랫말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말의 뜻은 의외에도 알타이 언어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었다. 알타이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로 세계적인 악명을 날리고 있다. 몽골 루트, 시베리아 루트, 중국 루트가 있는데 필자는 몽골·시베리아 루트는 과거에 탐사하였고 마지막으로 중국 루트를 탐사하게 되었다.
 

1996년 여름, 모험심에 가득 찬 소년들처럼 동문 임상현, 김두영, 김명용 제씨가 필자와 함께 항공편으로 실크로드(비단길)의 오아시스인 신강 위구르족 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 도착하였다. 전세 낸 9인승 마이크로 버스에 몸을 싣고 북쪽으로 800km나 펼쳐진 중가리아 사막을 17시간이나 걸려 건너갔다
 

알타이는 산의 이름이다. 알타이산에서 동쪽으로 내달리는 산맥 이름이 알타이 산맥이고, 그 북쪽의 고원지대가 알타이 지방이다. 알타이라는 말은 금(Gold)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알타이 산맥 중에 해발 4974m의 만년설을 머리에 쓴 友誼峰(우의봉·중국식 이름) 밑에 마을이 있었다.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이었는데, 이름도 아르타이(阿勒泰)이다. 그곳에서 알타이어를 사용하며 살고 있는 유목민 카자흐족 마을에서 인류학 조사를 하던 중 듣게 된 이야기가 바로 사랑 이야기이다.
 
유목민들에게는 귀한 손님에게 부인을 하룻밤 빌려 주는 풍습이 있다.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 남자는 부인을 텐트 속에 남겨 둔 채 집을 나가는 풍습이다. 인류학 용어로 貸妻婚(대처혼)이다. 어느 날 카자흐족 마을에 중국인 畵家(화가) 한 사람이 오게 되었다. 그 마을의 絶景(절경)인 깊은 계곡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였다.
 


 

밤이 되자 카자흐족 남편은 손님 대접을 잘 하려는 풍습대로 텐트 속에 손님과 자기 부인을 남겨 둔 채 집을 나갔다. 남겨진 두 남녀는 좁은 텐트 속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두 남녀의 잠자리 사이에는 베개를 하나 놓아 도덕적인 경계를 삼았다. 아무도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은 채 며칠이 흘렀다.
 

 
하루는 벼랑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손님에게 여인이 間食(간식)인 양젖을 가져왔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여인이 쓰고 있던 실크 스카프가 그만 바람에 날려 깊은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유목민에게 실크는 비싼 보석을 주고 중국에서 수입한 귀중품이다. 실크로드라는 경제용어가 있으니 알 만한 일이다.
 

아악! 여인의 비명 소리에 사정을 알게 된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십 길의 벼랑을 기어 내려가 스카프를 주워다 여인에게 주었다. 그 순간 여인이 기이한 소리로 절규하는 게 아닌가.
 

『싸랑! 싸랑!』 소리를 지르며 손에 쥐어 준 스카프를 다시 골짜기 밑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싸랑-무정한 바보

 

 
싸랑. 그 의미는 「무정한 바보」라고 한다. 손님은 자기에게 싸랑이라고 소리친 카자흐 여인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을까.
 

우리 탐사 단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현지 안내인의 설명이 걸작이었다. 한 뼘 높이의 베개도 못 넘는 남자가 어떻게 수십 길 아래의 벼랑 밑까지 내려갔다가 기어서 올라올 수 있느냐는 의미의 바보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기마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40代의 카자흐 族長(족장) 아들과 한국인 탐사대원들은 양젖과 馬腸(마창: 말 순대)을 안주 삼아 경쟁적으로 독주를 마시고 대취하였다.
 

 
오래 전에 헤어진 알타이족들끼리의 혈연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듯이 경쟁적으로 산타이주(三臺酒)를 여러 병 비웠다. 수 만 리 먼 곳에서 찾아온 우리들에게 꼭 하룻밤만 지내고 가라는 카자흐인의 간곡한 청을 들어 줄 수 없었던 게 못내 아쉬웠다. 떠나오는 우리 등에다 대고 카자흐인들의 합창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첫째, 둘째 글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생각이 어떠하든, 다시 여기서, 나의 이야기가 대단한 논문이나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여기 저기서 곁눈질로, 혹은 어깨너머로 줏어듣고 훔쳐본 장똘뱅이의 시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써내려간 글이라는 점을 알려드린다.

  제목을 X파일이라 붙여놓은 만큼 신기한 이야기가 나와야겠지만 그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는?”이라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독자들 머리에 당장 떠오르는 것은 “신라”다. 그러나 정답은 “단군조선”이다. 왜 우리는 단군조선을 나라로조차 여기기 싫어하고 있을까?

  하느님의 서얼 환웅과 마늘 먹은 곰 사이에서 난 단군이 나라를 세웠고 뒤에는 중국에서 흘러온 기자나 위만에게 강탈 당했고 그러다 한나라와 싸워 망해 버렸다...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운 단군조선의 모습이다. 나는 이 상태에서 이야기를 진 행할 수가 없다. 설화의 한토막으로 시작하기에 이 시대는 너무 중요하고 중요한 우리 역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1984년 김정빈이라는 소설가가 쓴 “단(丹)”이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로 등장한 후 얼마 안있어, 시중에 “환단고기 (한단고기,桓檀古記)”라는 황당한 책이 나왔다.

  그야말로 우리가 알고있던 민족고대사의 정석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정말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 책은 사학계는 물론이고, 목마르게 전씨 아저씨 치하의 답답한 대한민국을 탈출하고 싶던 젊은 사람들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환웅이나 단군은 모두 왕조의 이름이고 그 이전 환인시대의 12지파중 하나가 수메르요 우르요 우리라는, “수수께끼의 고대문명”을 논한 것같은, 나라 역사가 일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이 책 때문에, 상당히 많은 젊은 사학도들이 충격을 받고, 주류사학계로 진출하기를 거부했다.(내가 알고있는 사람만도 꽤 된다)

  하지만 변변한 연구없이, 사학계는 이 책을 위서(조작한 책)로 규정했다. 한마디로 역사학적인 동화책에 불과하며, 희망 사항을 연대기로 조작해 잘 정리한, 치밀한 가짜라는 것이었다.

  그 증거는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고, 이 책의 편찬자인 계연수라는 사람은 대종교와 밀접한 연관을 가졌고, 편찬연대도 기껏해야 1920년이며, 그 전에 있던 책을 가지고 재편집했 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소리고, 이런 식의 책을 죄다 인정해주기 시작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한 권씩 만들어서 이러네 저러네 할 것이므로 인정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취급하지도 않겠다는 태도였다.

  더군다나 이 책은 그 근거가 되는 고문서, 예를 들면 천부경을 묘향산의 암벽에 새겨진 글에서 떠왔다(탁본)는 기괴한 전설의 고향 수준이어서, 대종교를 위 해 계획적으로 조작했다는 의심이 가는가하면,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의 무덤이 발견되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을 써놓는 등, 아예 최근에 와서 밝혀진 것들을 엮어놓는 치명적 실수까지 범했으므로, 짜가 치고는 상당히 노력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짜가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답답한 고대사의 비밀을 중국의 그 많은 위서들이 줄줄줄 풀어헤치고, 일본역사의 최초기록인 일본서기마저도 위조로 볼 수 있는 많은 내용이 있는데, 상당히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설령 조작이라해도 철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가치를 지닌 천부경 때문에, 또는 환인, 환웅, 단군조를 한 사람이 아닌“왕조”로 서술하면서 민족의 창세기에 서 대진국(발해)에 이르는 역사를 총괄하고 있어 사람들을 기분좋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물론 국사 시험과는 무관하다)

  독자 여러분! X파일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가장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사건이 바로 우리민족의 20세기말을 장식하는 환단고기 사건이다.

  우리는 의식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일 20세기 후반에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민족사의 대사건으로 기록될, 희귀한 사건이다.

  일만년을 꿰뚫는 역사책이 어디서 숨어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무슨 “쇼”하는 것처럼 나타날 수 있는가? 이게 우리의 슬픔이고 아픔이고 기쁨이다.

  나는 단언컨데,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닐 뿐만아니라, 위서라해도 우리가 지켜 야할 자존심이다. 이런 책을 면밀한 연구도 없이 무시하는 태도 자체가 바로 식민사학이 뿌리까지 오염시킨 우리의 초라 한 발상법이다.

  만약 이 책이 일본에서 나타났다면? “빛나는 일본고대사의 비밀을 드디어 풀다!”라고 학계의 거두들이 나서고,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설립하고, 문부성에서도 틈틈히 작업내용을 국제언론에 언급하고, 과정은 공개하지 않더라도 기자회견에 난리법석을 떨면서... 황국 신민들은 그야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미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비의 임나일본부 사건에서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국제 사학계의 아무런 공감과 동의 없이 교과서에 “꾹”찍어서 가르치고 있다. 문헌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학설”이야 교과서 왜곡시비에 휘말리지도 않 을 것이고, 어쨌든 암묵적으로 그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면 효과야 똑같은 거다.(실제로 일본 고대사의 진위 를 따지는 소장학파들도 임나일본부를 심정적으로는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그렇게 근거를 만들어서까지 바꾸는 이유가 무얼까? 오늘 우리가 잘난 사람이 되려면 내 조상도 잘나야겠다는 비록 옹졸하지만 치열한 발상법으로 그들은 동양의 자존심을 지키는 맹주가 되었다.

  그 열등감을 본받을 필요가 없으되, 있는 것마저 버리는 우리의 치졸함을 깨우칠 타산지석은 충분히 되렷다.

  위서시비 따위는 학술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조작된 부분을 밝혀내고 다른 사서와 비교해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취하면 된다. 고대사 문헌연구는 언제나 비교연구와 취사선택의 문제일 뿐, 완전히 옳은 책도, 완전히 틀린 책도 있을 수 없다.

  나는 환단고기가 비록 후대의 편집자의 시각이 들어갔을지언정 완전히 조작된 책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니, 중국의 역사책은 안 그런 것이 어디 있던가? 우리가 택스트라고 일컫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조차 춘추필법이라는 왜곡과 과장의 시험장이었다!

  중국책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우리 쪽에서 나온 책은 중국책에 비추어보아 위서다?

  그러나 백번을 양보해서 “위서일 수도 있잖은가?”라는 반론에 점잖게 말씀드리자면, 고려조까지도 이런 류의 서적들은 “공인역사”로는 등장시키지 못하되 삼국유사같은 식으로 유포할 수 있을 정도로 공공연한 것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리 고대국가를 서술했고 그 역사가 중국보다 위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완전히 금서로 낙인찍혀서 소지나 배포를 금지당했다.

  그런 책이 발견되면 “사문난적”으로 찍혀서 완전히 집안이 박살났다.(우리만 이랬던 것은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지은“장미의 이름”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조차 “웃음이 경건함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서가 된다)

  조선 세조(수양대군) 때, 수 백종의 수 십만권을 거두어 없애버렸고, 그 중 몇 몇 견본을 궁중 서각에 보관했는데, 일제 시대에 와서 “조선사편수위원회”가 이걸 조직적으로 없애버렸다.

  이 때, 조선조로 전해지던 이른바 비전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 속에 있는 내용들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일본의 것이기도 했건만...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 우리민족의 출발을 찾는다해도 환웅은 등장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웅배달국은 거대한 연맹국가로 바이칼(배달)호를 기준으로 부채꼴 모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시기적으로는 대략 BC 3898년이었으다.

  18대를 전하고 1500년을 지속한 왕조였으니 환웅이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한 왕조의 이름이라는 이야기다.

  마지막 환웅에 이르러 우리가 선조로 섬기는 단군왕검을 추대해 단군조선을 창건하는데, 중국에서 요임금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단군조선은 국가체제를 삼신사상에 두고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신(진)한, 변(불)한, 마(말)한이 그것 이다.

  세 개의 한국 이야기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나오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신채호선생이 밝힌 강역으로는 신조선(진한)이 시베리아에서 내몽고를 거쳐 만주 이북과 황하 이북을 차지하고, 말조선(마한)이 연해주와 동 만주, 한반도와 중국 동부해안을 위시하고, 변조선(불한)이 황하와 서역에 이르는 강역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삼조선이 깨지면서 삼한의 후예들이 옛 고조선의 이름을 걸고 대거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 때가 바로 우리 가 알고있는 삼한시대이다. 이 때가 우리 종족의 열국시대로서, 부여, 신라, 고구려, 마한, 백제 등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이후 아시다시피 우리는 오랜 삼국시대를 지나서 대진국과 신라의 남북국시대, 그 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다.

  어쨌거나 환단고기라는 책을 통해 재정립하면, 단군조선이란 한 사람의 단군이 살았던 몇 백년 시기가 아니라 일천오백 년 환웅왕조의 신시배달국이 분열의 기로에 서자 삼한사상으로 새로운 종족연맹국을 세우고, BC 2333년부터 BC 295년 까지 왕조를 유지하며, 부여(해모수)와 고구려(고주몽)로 그 계통을 이어준 고대 아시아의 굳건한 강역, 문화공동체였다.

  우리가 알고있는 단군신화는 그 아득하고도 끝없는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해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일연승려의 한 방편이었다.

  일연승려가 이런 신화를 엮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러한 역사 이야기들이 매우 일반적이었던 배경이 숨어 있다.

  실제로 환단고기의 대부분은 고려시대에 작성한 것들이다. 최근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소장파 학자들에 의하면 “가짜 책 시비”보다는 “연구대상”이라는 생각으로 느리지만 서서히 일어나 퍼지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위서가 아니라 동아시아 고대사의 비밀을 풀 열쇠로 인정하는 학자들도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발간 초기에, 열에 들떠 국수주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아예 배척하던 경향에 비하면 상당히 진보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고대사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와 중국과 일본과 다른 소수민족 전부의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진지한 태도가 필요하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박현씨에 따르면, 환단고기의 책중 하나인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대진국(발해)의 문제(文帝)의 연호가 대흥(大興) 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없었다. 중국 사서에는 발해를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제후로 묘사 하였기 때문에 연호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발해의 정효공주의 묘비가 1980년에 발견되었다. 이 비문에는 문제의 연호가 글자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적혀있었다!
  정말 위서라면 1980년 이후에 발견한 이 사실을 환단고기에 집 어넣어야 하는데...?

  민족이 기마종족의 특성을 잃고 대륙중국의 부분으로 전락하면서 우리의 손을 떠나 금서로 낙인찍힌채 “비전(秘傳)” 으로 떠돌아야했던 고대제국의 기록이 20세기에 들어와 자신의 모습을 찾기 시작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눈물 나게 기쁘다. 나는 너무 고맙다.

  우리가 못나서 환단고기는 일본서기만한 대접을 못받고있지만, 나는 안다, 때가 되면 다들 알아차릴 것이다. 우리는 돌고 돌아왔지만 결국 우리의 뿌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게 도대체 나랑 무슨 상관인가?”라는 반문과 “니나 잘해”라는 멸시 속에서도 나는 빛나는 민족혼을 지키던 몇 몇 선인들, 우리에게 한글이라는 문화의 요약본을 지켜준 사람들을 기억한다.

  아무리 걷어들여 태워없애고 죽이고 멸족시킨다며 겁을 주어도, 어쩌겠는가!

  아직도 아이를 업어길러 안짱다리를 만드 는 우리 기마민족의 면면한 전통을 누가 어떻게 없애겠는가. 더 늦기 전에 지키면 그것은 우리 것이다.

  걸어놓으면 멋있던 바지였는데, 입기만 하면 맵시가 죽어버리는 내 안짱다리가 오늘은 어쩐지 자랑스럽다.

  말(馬)이 없다고 뭐 문제가 있으랴, 나는 언제나 저 넓은 광야를 선인들과 함께 달리며 푸른 꿈을 꾼다.

  이 꿈을 여러 독자들께도 나누어 드리고 싶을 뿐이다.

고대사 x-파일"(원작자: 박창규)

Posted by PD 개인교수

5) 고대 문명의 진원지

 가상적 문명의 근원지를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문명이 존재했다고 생각되는 시기와 우리 시대 사이에는 수천년 혹은 수만년의 간격이 있다.  신화와 전설은 광대한 육지가 홀연히 모습을  감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플라톤도 이러한 육지가 대서양 한복판에 있었다고 적어 놓았다.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솔론에게 들었다고 하며 솔론은 이집트의  신관으로 부터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신관은 솔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신적으로 당신네들은 모두 젊네.  그렇지만 고대로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옛 의견도 없으며 흰 머리에 서리를 얹어 놓은 것  같은  과학도없네"

 

 그리고 플라톤 학원의 교사이기도 한 철학자  크라툴로스도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대서양에 가라앉은 거대한 섬의 역사가 기록된 둥근 기둥을 보았다고 말하였다.  또한 역사에 기록된 시대 이후도 대서양  해역에서는 일찍이 존재했던 몇 개의 육지가 차례로 바다 속으로 사라졌던  듯하다.  이것은 고대의 많은 역사가와 지리학자가 하나의 섬뿐 아니라 크로

노스 섬과 포세이도노스 섬 등이 바다속으로 차례로 모습을감추었다고 쓴 것에서도 확인된다.  지브랄타 해협 동쪽에 있었던 이 섬들은 대부분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제작년도가 분명하지 않은 고대 에게해 해도의 사본이 오늘날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 해도를 살펴보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섬들과 함께 오늘날의 해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섬들과 육지가 그려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도 대홍수가 일어남으로 인해 바다 속으로 많은 섬과  육지가  잠겨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태평양에서도 이런 전설은 전해져 오고 있다.  뉴질랜드 서남방에  있는 섬들의 전설 중에는 카 호우버 오 카네라는 이름의 육지가 태고 시대에 바다에 의해 삼켜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스터  섬의  주민은 모토우 마리오 히와라는 이름의 육지가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

다.  캐롤라인 제도에 속한 포나페 섬 근처에서 반 가량은 바다에  잠긴큰 도시의 폐허가 발견되었다.  인도양에도 커다란 육지가 있었지만  태고 시대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씌여진책에 태고 시대에는 인도와 아프리카가 육지로  이어져 있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오며, 고대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는 적도  밑

남인도양에는 일찌기 큰 섬이 존재했었다고 썼다.

 이러한 고대학자들의 말은 최근에 이루어진 발견으로 확인되고  있다. 언어학자들은 남인도와 동아프카의 드라비다계 언어의 유사함을  찾아냈다.  또한 이들 지역의 식물과 동물도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마다가스카르 섬에는 아프리카 이외에는 인도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여우원숭이가 10종이나 살고 있다.  여우원숭이는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대양

을 횡단했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이 섬에서 볼 수 있는 26종의  식물은 여기를 제외하면 남아시아에서 밖에 서식하지 않는다.  이 섬에서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에도 없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대서양의 중앙부로 나오면 아틀란티스의 본섬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아조레스 제도의  남쪽에서  비행기를 조종하던 조종사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는 보고를  하였다.   태양광선이 경사지게 비춰져 최고의 시계조건이 되어 물이 맑게 보일 때 80~200피트의 바다 속에 수중도시 같은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와서는대서양의 마데이라 섬 부근에서 해저조사를 하고 있던 소련의  조사대가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사진들은 1974년, 깊이 600피트의 안펠 해산 정상에서 잠수함 아카데미샨 페트로프스키 호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이 조사는 고고학이 아니고 해양학상의 목적으로 행하여진 것인데  소련 해양학연구소의 일원이며 사진의 책임자인 우라지밀 마라케프는 사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벽과 윤곽이 선명한 돌 계단이 비쳐진 것을  지적하고 있다.  아틀란티스를 연구하는 학자인 비라우는 "대양의 바다 밑에 지금도 아틀란티스는 잠자고 있으며 현재도 보이는 것은 그 가장  높은 정상, 아조레스 제도뿐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세계의 곳곳에서도 수몰된 역사 이전의 유적은  존재하고 있다.  남미의 북쪽 연안에서는 아래쪽으로 커다랗게 부채꼴  모양으로 훑어가다 보면 베네주엘라 연안까지 백마일에 달하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인공물로서는 너무나  길어서  저연물로밖에 간주할 수 없다고 학자들이 말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혼두라스와  유카탄 반도 앞바다에는 육상에서는 소멸된둑길이 바다 속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 지금도 보인다.  쿠바 북쪽의 바다에는 수 에이커에 걸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넓은 유적들이 있다.  

플로리다 반도의 남쪽 약 40마일 에는 해면 밑 수백피트나 되는 곳에 피라밋을 닮은 거대한 물체가  잠수함 탐지기에 의하여 거의 윤곽이 드러났으며 희미하지만 틀립없는  영상이 수중 텔레비젼에 포착되고 있다.

페루의 나스카 해구 1.5마일의 깊은 곳에는 지금도 거대한 벽과  계단피라밋이 서 있으며 남태평양 제도, 일본, 남인도 등의 앞바다에도 미확인의 해저 유적이 잠자고 있다.  이와 같은 건축물의 폐허는 거의가  아틀란티스의 기억을 통해 전세계의 전설의 일부가 된 최후의 세계 대이변과 거의 관계가 있다고 보아도 좋을것이다.

6) 발굴되는 멸망의 화석들

 그 진원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시대 이전에 발달된 문명이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생각이 점차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가지게 하고 있다.  이 사실을 설명하는데 있어 혹자는  우주인의 방문설을 내세우고 있다.  에리히 폰 테니켄과 같은 사람의 가설인데, 그는 인간과 비슷한 지구 외의 생물이 방문하여 지구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서 세계문명을 쌓아올리는 정신적 능력을  적어도  10만년 이전부터 인류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 본다면 지구인이 스스로 한번이상 고도의 문명을 쌓아올렸고 그것이 파멸하여 근소하게 살아남은  것이 똑같은 과정을 다시 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도 설득력이 있을것이다.

 이집트의 신관이 솔론에게 하였다는 말을 다시 들어보자.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인류는 가지가지의 원인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파멸을 경험할 것이네.  언젠가 시기가 오면 하늘에서  빗물이 질병과 같이 쏟아져 문자나 교육을 결여한 자들만 남게 하네.   이리하여 당신네들은 다시 어린애 시절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들에게, 당신네들에게도 옛 시대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무엇  하나  모르게될 것일세.

 그러면 고대문명이 멸망한 원인은 무엇일까.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알수 없다.  그러나 태고의 역사적, 종교적 문헌 가운데  문헌  가운데 보존되어 온 어떤 종류의 문화적 기록은 역사 이전 몇천년이나 옛날, 지구상에서 원폭과 비슷한 것이 전쟁에 사용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현대문명이 원시적인 형태에서 원폭의 개발까지는 약 6천년

이 걸렸다.  그런데 인류는 천년의 단위가 아니고 백만년의 단위로 셈하는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무네 그 발달된 두뇌는 적어도 10만년 전부터 현대인의 두뇌와 동등하였던 것이다.

 최근 20여년간 고고학적 탐험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분명하게  드러난 불가사의한 문명의 잔재들은 당시의 인류가 과학적 진보의 시스템을  터득하고 있었다면 그들에게도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 동안 그들도 현재의 우리들과 같이 제어냐 파멸이냐 하는 따위의 고민에 직면하였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내용의 대부분은 고대 산스크리트어 문헌인  {마하바라타},{라마야나}, {프라주나}와 베다성전, {마하바라 차리타} 등에서  볼수있다.  이들 문헌은 지중해나 중동의 고대문헌이 거의 소실된 것과 달리 고대부터 현대까지 별탈없이 전해져 내려왔다.  특히  {마하바라타}에는고대 전쟁의 가공할만한 신병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우주의 힘이 담겨진

 단 한 개의 날으는 도구였다.

 태양을 만 개 모아놓은 정도로 밝은

 백열한 연기와 불기둥이

 무섭게 빛나게 솟아올랐다.

 그것은 미지의 무기이며

 철의 번개,

 거대한 죽음의 사자였다.

 브리슈니와 애다카의 전 민족을

 그것은 재로 변하게 하였다.

 시체는 너무 타버려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털과 손톱은 빠져나와

 도자기들은 이유없이 반동강이 나고

 새들은 하얗게 변하였다.

 또 {라마야나}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그것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지구를 순간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

 연기와 불꽃을 피우며 우렁차게 올라가는 위대한 소리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자는 죽음 ---

 이 문헌들이 처음으로 번역되어 서방세계에 알려진  19세기  후반에는 다분히 동양적 공상의 하나라고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면서 서방인들은 이들 고대문헌에 대한 생각을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이것을 믿을 수 없는 기록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쾌한 예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파키스탄에 있는 광대한 도시의 유적에 관한 이야기는 앞의 생각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이 유적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 역사  이전의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적은 모헨조다로,  하라파라고 불리우는데 실제 번영하고 있던 당시의 이름은 알 수 없다.그들의  문자와 체계는 아직 해독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러한 체계가 지구 정반대 쪽에서도 발견되었다.

 다름아닌 태평양에 있는 이스터섬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는 아직 알 수는 없으나 두 곳 모두가 동시에 멸망하였다는 점은 부인할수 없다.  파멸이 너무나도 갑자기 찾아와 주민들은 피할 틈도 없이  잿더미 속에 파묻혀버렸다.  땅 속에서 한꺼번에 발견된 주민들의  유해는 몇천년이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 발견된 유해들 가운데 에서는 가장 강한 방사능을 나타내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사망자들이 나타내는 수치와 비슷할 정도이다.  또 방사능을 가진  해골이 인도에서 발견된 일이 있었다.  이 방사능은 보통 수준의 50배 가량이었다.

 핵폭발로 인한 파멸이외에 세계 여러민족들의 경전과 신화속에서 나타나는 대홍수로 인한 파멸도 신빙성 있어 보인다.  성경의 창세기가 씌여지기 수천년 전에 씌여진 수메르의 점토판에서도 인류를 절멸시키기  위해 신이 불러일으킨 대홍수 이야기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경전이나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고문헌 속에서도, 태평양의 여러 민족의 민담속에서도 남북 아메리카의 원주민의 전설속에서,  한민족의  한단고기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파멸의 원인들, 즉 호우수 외에 폭풍, 지진, 분화활동 등을 동반한 대이변에 의한 전설은 아프리카 민족들 사이에서돛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들에 따르면 대홍수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어느 한 지점에서 일어난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대서양에서 멀어짐에 따라 이변의 규모가 점점  작아져 대홍수에 관한 전설만으로 한정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지구의  어떤 지역에서는 엄청난 밀물이 밀려와 물이 산꼭대기를 덮을 정도였지만, 반대지역에서는 썰물 현상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동쪽으로 가면서  수위는 점점 낮아진다.  따라서 중앙 아메리카에서는 물이 가장 높은 산의꼭대기까지 밀려왔지만 그리스에서는 언덕과 큰  나무꼭대기  부근까지, 페르시아에 이르면 사람의 키 정도까지만 차올랐다.

 그런데 대홍수로 인한 파멸의 전설이 신빙성이 있게 하는 이유는 대홍수라는 사건의 보편적 분포보다는 이 사건에 대한 세세한 부분의 내용까지도 일치한다는 점이다.



7)고대문명의 파멸

 

 모든 전설에 대홍수를 예견한 예언자들이 등장한다.  기독교의 신, 바빌론의 신, 아즈텍의 신, 인도의 신 모두가 다가올 재앙에 대해서  경고한다.  그리고 그 경고를 받아들여 목숨을 건진 사람은 거의가 남녀  한쌍이다.  그들은 갖가지 동물을 데리고 살아 남았다.  또한 불어난 물이빠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산꼭대기에  상륙하여 새를 날려 보낸다.  새가 나뭇가지를 물고 오면 물이 빠진 것으로  알고 밖으로 나갔으며, 그때 홍수가 끝났음을 아리는  무지개를  보게  된다. 이 무지개의 이야기는 아메리카 인디오에게서, 폴리네시아의 신화에서도 수메르의 서사시속에서도 나온다.

그림설명: 케찰코아틀,

 우리는 대홍수의 진원지가 바다였다는 내용의 많은 전설과 문헌을  접할 수 있었다.  대홍수가 일어날 당시 어떤 힘이 바다에 작용한  것인가 가 문제인 셈인데 이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갖가지 이야기는 거의가 어느날 하늘에서 알지 못하는 천체가 지구로 떨어졌다든가 멀어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500년 전의 일이다.  거대한 운석이 대기밀도가 높은 곳으로  빨려들어온 후 산산이 부서져 운석의 비가 된 채 지구에 떨어졌다.   이  운석중 하나는 무게 550톤에 달하였다.  이 운석은 수천입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멍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현제의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있는  거대한 호수 칼리뷰하얄과 호이다.  또 1868년에는  바르샤바에  운석비가

약 10만 개의 돌로 떨어져 내렸다.  어떤 것의  무게는  10킬로그램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모의 낙하는 오랜 세월 동안 종종 있었던  일이다.

 우주에서 날라온 물체가 지구와 충돌했음을 보여주는 흔적 중에  1908년 6월 30일 아침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 상류에 있는  포토  카메니야 퉁그스카 천의 오른쪽 지류에 위치한 탐바 유역에 우주  물체가  떨어져 순식간에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은 퉁그스 운석의 수수께끼라고 불리우는데 아직도 그 정체가 해명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지구에 접근한 거대한 소행성의 인력에 의해 바닷물이  지구의 한쪽에서는 거대한 만조로 한쪽에서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지구가 과거에  혜성이나 혜성의 꼬리와 충돌하였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지구가  혜성과 충돌한다면 그때 방출되는 에너지는 수소폭탄 50만개  분에  상당한다고한다.

 또 달이 바다에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가설도 있다.  달은 원래 지구에서 매우 가까운 궤도를 도는 소행성이었는데 달의 옆을 거대한 우주물체 가 지나갔기 때문에 달은 자신의 궤도를 잃고 지구의 인력권 안으로  떨어져 지구의 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달이 지구에 최대한도로  접근했을 때 만조의 높이가 수킬로미터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민족의 전설 속의 홍수 이전 시대에는 달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수석감독관이었던  아볼로니우스도 옛날에는 지구의 하늘에서 달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기원전 3세기경에 썼다.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낙사고라스도 달이 나타난 것은 지구가 생긴 훨씬 후의 일이라고 썼다.

 그리고 대홍수만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와 함께 폭풍, 지진, 분화활동 등을 동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메리카의 인디오의 고서 {포플부흐}는 대이변 뒤에 극심한 추위가 시작되고 해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또 아마존의 열대림에 사는 부족은 홍수 뒤에 찾아온 오래  지속된 혹한에 사람들이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를 일으킨 또 하나의 원인은 지구 양극의 변화, 즉 궤도에 대한 그 경사각도의 변화이다.  남극과 북극 지역에서  석탄층이나 목재탄화물과나뭇잎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남극에도  2억5천만년 전에는 초목이 번성했으며, 6천만년 전의 북극은 태평양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거대한 지질학적 변동에 의해서  일어날수 있다.

 그렇다면 대홍수를 동반한 지진, 분화활동 등 최악의  이변들은  언제 발생하였으며 그때의 양극의 위치는 어디일까 ?   미국의  지구물리학자 오겔리는 몇차례에 걸친 조사 끝에 마지막 빙하기에는 북극이 현재의 북위 60도선이 통과하는 지점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북극점 이 현재의 위치로 이동하게 만든 이변의 발생시기는 빙하기가 끝나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 다른 견해로는 미국의 지질학교수 챨스 허프크트의 이론이다.   그는 극이동은 지구 내부의 융용 마그마의 초석의 변동이 원인이되고 남극의 중량 증대에 따라 측면 방향에로의 회전팩톨에 도움을 받아서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지구의 지축은 움직이지 않고 지구의 외피, 즉 지각을 형성하는 표면만이 새로운 위치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지구는 지축상에서 요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공간을 회전하면서  미세하게 움직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과거 10만년 사이에  3번의 극이동이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북극이 캐나다 유콘 지역에서 그린랜드 해로 이동하고 다음에는 허드슨 만으로 옮겼으나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으며, 세번째의 이동의 시기는 약 1만 2천년 전에 끝넒다고 한다.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인 리비는 아메리카 대륙을 연구한 결과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약  1만4백년 전, 인간의 자취가 갑자기 사라졌으며 바로 이 무렵에 인류의  연속성에 단절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현상은 그에게 많은 의문을 던져주었다.  왜냐하면 남뵤 유럽, 프랑스 중부의 라스코 동굴벽화는 기원전 1만 5천년경의 것으로 이 당시에도 인류는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빙하기 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이 얼음에 덮여 있지 않은 이상 인간이 존재했을 것인데도 인간의 자취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영국이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도 인간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리는 가장 오래 된 유적은 약 1만 4백년 전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리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러한 단절을 아메리카, 중앙아시아에서도 볼수 있다.

 소련학자 알렉산더 고르보프스키는 앞의 다양한 데이타 이외에도 고대 달력이 시작되는 해를 계산하여 기원전 1만년경을 고대문명의 파멸의 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가 계산해 본 결과 인도의 태음(태양력)이 시작되는 해는 기원전 1만 1천 6백 5십 2년이고, 마야의 달력이 시작되는 해는 기원전 1만 1천 6백 5십 3년임을 발견하였다.  또 이변이 끝난  해를 나타낸다는 앗시리아식과 이집트식의 두가지 달력을 조사해 본 결과  이집트 달력의 시작은 기원전 1만 1천 5백 4십 2년이었고, 앗시리아 달력의 시작은 기원전 1만 1천 5백 4십 2년이었다.  이를 근거로 그는  고대문명을 파멸로 이끈 크나큰 이변이 기원전 1만 1천 6백 5십 2년이나 1만1천 6백 5십 2년에서 기원전 1만 1천 5백 4십 2년까지의 기간중에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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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초고대문명  (1)   인류와  외계문명

우가리트 알파벳

 말이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기 까지에는 6천만년이 걸렸다.  개미의 조상은 1억 5천만년 전에 살았는데 현재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이에 비해 인류는 고작 200만년 동안에 해상과 육상, 공중뿐만  아니라  우주를날 수 있게 되었다.  인류의 획기적인 진화에 비해 인류의 친척쯤  되는원숭이들이 아직도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다니고 있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설명-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원형의날틀을 타고 하늘을나는 모습

 이같은 사실로 보아 인류는 존재가 밝혀지지 않은 다른 문명, 즉 인류의 조상보다 수백만년이나 더 나이를 먹은 다른 은하문명에 의해 특수한유전적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진화의 속도가 촉진되었다고  가정할  수도있는 것이다.

 특히 인류의 기억속에 남겨진 문명의 잔재를 살펴보면 인류  스스로의 힘만으로 진화하여 왔다는데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게 된다.

 인류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를 고작 6천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대 인도의 브라만은 우주의  존속기간을 43억 2천만년으로 계산하였다.  레바논의 드루스파는 천지 창조의 시작을 34억 3천만년 전으로 설정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63만년 동안 천체 관측의 기록을 계속하였다.

 고대 그리이스의 천문학자 하파프코스는, 앗시리아의 연대기는 27만년 전으로 소급된다고 하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게네스는 이집트의 천문학 기록은 B.C 49219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곳에 373회의일과 832회의 월식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비잔틴의 역사가 싱켈루

스는 이집트의 여러 파라오의 연대기는 36525년 동안 모든 일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카펠라는 이집트의 현자들이 세계에 지식을 나누어 주기  전에  4만년이상 몰래 천문학을 연구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바빌로니아아의 태음력과 이집트의 태양력의 시작은 기원전 11542년에 일치되어 있다.  인도의 달력은 기원전 11652년부터 시작되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아틀란티

스가 가라앉은 시기는 기원전 9850년이라고 했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책에는 시간의 시작이 기원전 9600년에 있었다고 하였다.

우가리트 알파벳

 보통 나일강 유역에 최초로 국가가 세워진 연대를  기원전  4천년으로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와 동시대 사람들은 1만7천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의 고문서를 보존하고 있다고  하였다.

게다가 이집트의 역사를 서술한 이집트의 신관 마네톤은 그의  저서에서 기원전 1만 7천년보다 훨씬 오래된 책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리고비잔틴의 역사가 스넬리우스는 이집트의 신관들이 3만 6천 5백 12년  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쓴 {고대연대기}라는 고문서에  대해서도  썼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는 알렉산더 대왕보다 4만 8천 8백 6십 3년이나 오래된 기록을 이집트의 신관들이 보관하였다고 썼다.    

 이러한 사실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약 5만년전에 인류가 벌써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문자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문명이 번창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

문이다.  분명 우리는 현 인류의 문명의 역사는 고작 6천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 이전의 역사는 역사라고도 할 수 없는 원시상태였다고만  배워왔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나에 대해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증거들은 최소한 인류의 문명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이상으로 오래 되었음을 입증한다.  또한 잊혀진 문명의 잔해들이  보여주는 문명 발달의 정도는 현대 인류에게 과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정확한인식을 요구한다.  현재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이 고대에 존재했었고, 어떤 이유로 일순간에 멸망해 버렸다는 증거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기 때문에 적어도 현대 인류가 6천년동안 이룩해 온 문명의 성과에 대해 오만해져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고대문명에서 읽게 된다.

 즉, 현재의 인류문명이전에도 고도로 발달했던 고대문명이 다수  있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후예들이라는 것이다.  그럼 그  문명의  출발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  그것이 앞으로 말할 외계의 문명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2) 잊혀진 황금시대

우가리트 알파벳

 안데스 산중에는 티아와나코라는 폐허가 된 고대도시가 있다.  이곳은 해발 4천미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해발에서는 인간이 생활하기  적합하지 않다.  그런데 이곳에서 항구의 흔적이나 조개껍질 등  바다동물의 화석 따위가 발견되었다.

즉 이 도시가 일찍이 바다근처에 있었거나 바다와 같은 높이에 있었음을 말한다.

 이 티아와나코의 근처인 티티카카호수에서는 깊이 8미터 지점에서  하나의 무게가 200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덩이로 만든 벽의 파편과 건물 파편 등이 인양된 바 있었다.  벽은 포장된 도로 양측을 따라 1킬로  이상이나 뻗어 있었다.

 타이와나코의 고고학연구소 소장 루벤윌레이 교수는 그 유적을 귀족의장례식이 행해졌던 해안사원이라고 단정지었다.

 인도에는 흑파고다라는 이름의 사원이 있는데 이 사원의 높이는  75미터이며 지붕은 2,000톤이 넘는 돌로 만들어져 있다.  이 정도의  무게를들어 올리려면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기중기의 10배 이상의 힘이 있어야움직일 수 있다.

우가리트 알파벳

 이보다 더 큰 건물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이다.  이 등대는 기원전  3세기경에 프롤레마이오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팔로스 섬 위에  세워졌는데 그 높이가 150~200미터에 달하였다.  대략 16층 정도의 건물의  높이와 맞먹는 셈이다.  인류가 이렇게 높은 건물을 만드는데 필요한 건축술을 익힌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외에 소멸된 고대문명의 거석 건축물은 많다.  이집트의 피라밋, 레바논의 바르베크에 있는 4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쥬피터 신전의 토대, 영국의 스톤 헨지의 규질사암열석군, 그래스톤베리 주위에 있는  30마일에달하는 석조 12궁 칼렌더, 바다 속까지 뻗어 있는 프랑스의  카르나크의 거대한 입석열주, 페루의 삭크사이와만에 있는 거대하지만 완전히  다듬어 만든 성채등이 있다.

우가리트 알파벳

 고대 마야인들은 수레바퀴를 알지 못했으며  도자기나  철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정확하게 천체의 회전 주기를 알고 있었다.  지구가 태양주위를 회전하는 시간은 그레고리오력에 의하면 365.242500일인데  비해마야인들은 365.24219일이라고 계산하였다.  대단히 정확한  천문기기를갖춘 오늘날에는 1년의 길이를 365.242198일로 보고 있다.  또한 그들은태음력의 길이도 0.0004일의 오차밖에 나지 않을 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정확한 고도의 지식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대단히 먼 과거로부터 지식이 축적되었음이 틀림없다.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의  역사에는  일식이373회, 월식이 832회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 횟수의 일식과 월식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만년 이상에 걸친 관측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천체관측이 시작되었음을 밝히는  자료도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춘분 무렵에 태양은 별자리중  물고기자리 속에 있다.  그러나 2천년 전에는 양자리속에 있었다.  이렇게 태양은 2만 5천 9백 20년에 걸쳐서 천체를 일주한다.  그런데 2만 5천 9백  20년 이라는 숫자를 수메르의 수많은 고문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수메르인들이 2만 5천 9백여년 이상 천체관측을 했음을 알리는 간접적인증거가 된다.

 또한 18세기에 {걸리버 여행기}를 쓴 영국소설가 스위프트는 화성에 2개의 위성이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고대 학문과 고대서적 및 사본에대한 관심이 대단하였고, 이것들을 연구하는 도중에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더구나 이 당시에는 태양계의 행성에 위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는 성능 좋은 망원경도 없었다.  이후 156년이  지난 1877년에야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 사실이 증명되었다.  나아가  스위프트가 2개 이상의 회전시간과 성격에 대해 밝힌 내용은 후에 얻어진 정확한 정보와 많은 유사점을 가졌다.

 소위 보이니크 사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뉴욕의 고대 유물 수집가 보이니크가 로마에 가까운 어떤 옛성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는  상자속에서 이 사본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 사본에 붙어있는 종이에는 아리송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 이같은 스핑크스는 그 주인 이외의 명령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고.  이 사본은 암호해독가에 의해서도  컴퓨터에 의해서도 완전히 해독되지 못하였다.  이 사본은 13세기 혹은 15세기에 씌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알아 볼 수 있는 내용만으로도 식물학적, 천문학적, 생물학적 문제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  중에는 현미경을 사용해야만 관찰할 수 있을 정도의 잎이나 뿌리의 횡단면을 그린 그림이 있는가하면, 페가수스의 중심과 안드로메다의 띠와  카시오페아자리 등에 대한 그림이 있다고 한다.  1920년대에 이 그림을 연구한펜실베니아 대학의 둘리틀은 그 그림이 틀림없이 성운을 표시한다고  단정짓기에 이르렀다.

* 콜린윌슨의  세계불가사의백과 참조.

 1946년 프랑스 인류학자 그리올과 디틀렌은 당시 서부아프리카 말리공화국의 반디아가라 고원과 홈보리산 일대에 살고 있던 22만  명  정도의도곤족과 인근의 세 종족의 전설을 4년여간 수집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1951년 {수단 계통의 시리우스 시스템}이란 보고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보고는 1976년 언어학자이며 천문학자인  템플에  의해도곤족의 전설이 천문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도곤족은 50년마다 한 번씩시구이 축제를 벌인다.  이 축제의 날짜는 포 톨로라는 별을 보고  정하는데, 이 별은 약 50년을 주기로 제자리에 돌아오는 별인 것이다.  포라는 말은 도곤족이 먹는 곡식중 가장 알맹이가 작은 것의 이름이다.

* 그들이 기다란 호스 같은 것을 돌리며 그들 선조의 소리라고 하며 내는  소리는 UFO 가 내는 소리라는 것을 그방 알아챌 수 있다.

 도곤족에 대해서는 리더스다이제스트사의 세계의 진문기담 참조요.

 { 포는 남쪽 하늘에서 제일 밝게 빛나는 별을 50년에 한  번씩  돈다. 그러나 그 별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별이다.  포는 별들중에서 가장 무거운 별이며 사람의 눈에 잘 보이는 별의 주위를 돌면서  그  별의궤도를 결정하는 별이다 }

 우리는 남쪽 하늘에서 제일 밝은 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일명  개의별, 천랑성이라고 불리는 시리우스이다.  고대부터  알려진  시리우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19세기의 천문학자 베쎌은 1834년 시리우스의  궤도가 마치 뱀이 기어가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그 후 12년에 걸쳐 시리우스를 관찰한 결과 시리우스의 궤도가  미지의 천체의 인력으로 주기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미지의 별에 시리우스 -B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상되는 위치를 끈질기에 찾았지만 당시의 최고 성능을 지닌 망원경으로도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1862년에 대형 망원경으로 제작으로 유명한 클라크에 의해  제작된 73cm짜리 망원경으로 확인되었다. 바로 이 별이 도곤족들  사이에서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별, 포이다.

 오지에 사는 이들에게 누가 천문학적 지식을 알려 주었겠는가 ?  그들의 추장 오고템메리는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놈모의 후예라고 한다. 하늘 나라에서 놈모는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의 섬유를 가지고 지구에 왔다고 한다.  그는 땅을 만들고 식물과 동물을 만든 다음 사람을  창조했는데, 이들로부터 지상의 여덟개 종족이 생겨났으며 그들은 끝없이 오랜세월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전설의 사실이라면  그들은  시리우스-B에서 온 외계인의 후예라는 말이 된다.

 시리우스 별까지의 거리는 7, 8 광년이다.  현재의 과학으로도 시리우스까지의 비행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곤족들은 놈모를 기리는 축제를 50년마다 벌이고 있다.

 1633년 종교재판의 재판관들은 고문실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취조하였다.  그것은 갈릴레이가 지구는 둥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지구가 우주공간을 회전하는 구라는 사실은 이미  인류사의  여명기에도인도, 이집트, 아메리카 각지의 경전과 고문서 속에 씌어 있었다.  특히이집트인들은 이러한 사실이외에  지구가 다른 행성들과  같은  법칙에따라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천문기기나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지식도 없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가리트 알파벳

 플라톤은 지구는 공과 같고 그것이 회전하기 때문에 낮과 밤이 있다고 말했으며, 유대의 경전 {카바라}에는 인간이 사는 지구는 원처럼 회전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어떤 지역이 밤일 때 다른 어떤 지역은 낮이라고적혀있고 그 근거로 태고의 서적을 들고 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로마 교황에게 제출한 논문의 서문에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고대인들이 쓴 책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고대인들은 조수의 간만이 달과 관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자 셀레우코스는 바다의 간만을 달의 인력에 의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하였다.  중국에서도 해면 상승의 원인이 달의  인력이라는 것에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았다.  로마의 시저도 만월 때  조수가 만조가 된다고 기록하였으며, 영국에 상륙하기 위해 조수가 만조가될 때까지 기다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16세기의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가 조수의 간만은 달에  의해일어난다는 이론을 발표했을 때 그는 몹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반박할 수 없었다.  친척 중 한 사람이 마녀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고 그의 어머니는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죽었기 때문이다.

< 인디오의 경전 >

 슬라브인들은 먼 옛날 이 세상에는 물밖에 없었고 훗날 땅이 생겼다고 하였다.  인도의 {리그베다}도 세계는 우주를 가득 채운 엄청난  물에서 탄생하였다고 썼다.  중국의 고문서는 태초에 땅은 모두 물로 뒤덮여 있었고 후에 이 대양에서 생명이 탄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남북아메리카의 인디오의 경전 {포플 부흐}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한 마리의 동물도 없었다.   새도  없었다.

물고기도, 게도, 나무도, 돌도, 계곡도, 풀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하늘뿐이었다.  육지의 표면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차가운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뿐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세계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달력에도 이러한 일치가 나타난다.  수메르, 바빌론,  고대이집트, 고대 인도에서는 1년을 12개월로 나누었다.  그리고 마야에서는1년이 360일이었고 이밖에 불행의 날, 이름이 없는 날로서 5일이 더  있었다.  이 동안은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무엇이든 나쁜 짓을 할 수 있었다.  이와 똑같은 관습이 고대 이집트와 바빌론뿐만 아니라  인도에도 있었다.

3) 황금제국을 찾아서

 이밖에도 불가사의한 사실들이 있다.  그것은  지도에  관한  것이다.

지도는 알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과거 대륙의 모습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남겨진 지도에서 보면 그 제작자들은 현대인조차 20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발견한 곳을그려 놓았다.

   < 남극대륙이 그려진 지도 >

 1559년에 터어키인 하지 아하마트의 지도에는 북아메리카의  해안선이대략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1532년에 만들어진 오론티 피나우스의  지도에는 남극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1513년에 만들어진 피리 레이스의 지도는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룩한 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대서

양의 반대측에 있는 쿠바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카리브해의 섬들이나, 중미 안데스 산맥을 포함한 남미대륙의 동서연안, 심지어  남극대륙의 일부까지 그려져 있다.  1528년에 제작된 그의  지도에는  그린랜드,뉴펀들랜드, 캐나다의 일부,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의 플로리다가  나타나 있다.  그보다 묘한 것은 그의 지도에는 아프리카의 바로 밑까지 연장되어 전혀 이름이 없는 남극대륙을 표시하고 있으며, 현재는 빙하에  파묻힌 산들의 높이까지 표시하였는데 아직까지도 그 援湧?높이는  측량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햅굿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남극대륙의 지도는 정말로 얼지않았을 때에 제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 지도에  붙은  설명 가운데에 이 지도의 원본의 출처를 알렉산드리아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지도는 모두 중세에는 발견되지 않았고 수세기 후에나 발견된 육지

와 대륙에 대해서 상당히 정확한 윤곽을 묘사하였다.

 또한 이러한 지도의 작성자 자신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관된  지도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시대에 만들어진 고대지도를 베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대 지도의 작성자들이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알고 있어서 경도와 위도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세계의 곳곳을  여행하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더우기 오론티의 지도와 현대지도를 비교해보면 전자에는 남극에 많은하천과 그것이 흘러들어가는 피요르드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남극대륙에는 하천이나 피요르드가 전혀 없다.   대신에 오론티의 지도에서 하천이 있던 부분에 대양으로 천천히  흘러들어

가는 빙하가 있다.  이 사실은 오론티의 지도가 작성된 때는 빙하가  생기기 이전의 시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시기는 기원전 4천년경 남극 대륙이 얼음에 완전히  뒤덮이기  전이라고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수수께끼의 지도들로부터 많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미지의 문명이 존재했었고, 대양을 향해할 수 있는 배를  가지고  있었으며, 남극대륙과 그린랜드의 지도 제작에 필요한 천문학, 항해술, 수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옛 극지 탐험에 사용된 배는  크고

견고해야 했으며 고대의 이집트, 페니키아, 그리스 또는 로마가  소유하고 있던 배보다 훌륭해야 하였다.  이들 지도들은 이미  알려진  여타의 문명의 발생보다 훨씬 오래 전에 참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암시해 주는 증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야금술의 등장에도 의문점이 있다.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청동은 그 이전 단계인 구리시대가 거의 없이 전 유럽으로 퍼졌다.   최초의 청동제품은 매우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졌으며 사람들이 이 기술을 단계적으로 조금씩 익혀나갔다는 흔적도 없다.  멕시코에서도 유럽의경우

처럼 청동의 생산이 복잡한 고도의 기술적 수법을 동반한 형태로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 야금술과 금속 가공기술을 항상  자신의 힘으로 단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때때로 완성된 형태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는 가설을 성립케한다.

 이러한 가설을 뒷바침하는 사실 중의 하나는 청동을 최초로 이용한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에는 정련에 필요한 원료가 없었다는  점이다.  원료도 없는 상태에서 청동을 발명할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이들 문명국가들은 아연을 얻기 위해 카프카즈나 피레네 반도와 같이 엄

청나게 먼 곳까지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이보다 더 먼곳으로는  브리튼제도가 있었다.  페니키아인이 브리튼제도를 아연의 섬이라고 부는 것도이 때문이다

< 고대의 전지 >

 고대 수메르의 유적인 셀레우키아의 폐허에서 고고학자들은 유약을 바른, 높이 10센티미터의 작은 점토로 만든 그릇을 발견하였다.  그  속에는 외형상 산에 의해 부식된 것으로 보이는 철제 축과 납땜으로  용접된구리로 만든 실린더가 들어 있었다.  이런 출토품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

되었는데 이 수수께끼의 그릇이 일종의 전지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행해졌다.  끈질긴 연구 끝에 이 그릇을 본래 형태로  복원하자  놀랍게도 추정한대로 전기가 발생하였다.  고대 인도 문헌 중  {아가스티아  삼히타}에는 전지를 만드는 법이 적혀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주 깨끗하게 씻은 구리판을 도자기의 그릇속에  넣어라.   그것을우선 황산구리로 적시고 다음에 젖은 톱밥으로 덮는다.  다음에  편극을피하기 위해 톱밥위에 수은과 화합시킨 아연의 엷은 판을  덮는다.   그접촉은 미트라-바루나(Mitra-Varuna)라고  부르는  에너지를  생산한다.

이 흐름에 의해 물은 프라나바유(Pranavayu)와 우다나바유(Udanavayu)로분해된다.  100개의 항아리를 연결하면 대단히 활동적이고 유효한  힘을얻을 수 있다. "

< 고대의 알루미늄 >

 1963년 남아프리카의 프레토리아에서 열린 가로 조명과  교통에  관한 회의에서 다우니라는 사람은 뉴기니의 서반부, 이리안에 있는  빌헬미나산 부근의 정글속에서 20세기의 것과 비교하여 우수하지는 않지만  같은정도의 인공조명계기를 가지고 있는 한 마을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발견으로 그동안 풀 수 없다고 여겨져 왔던 문제를 설명할  수있게 되었다.  그것은 4세기경의 유명한 중국장수 주처의  묘에서  나온장식품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 묘에서 나온 장식품 중의 하나를 스펙트럼 분석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결과가 나왔다.  실험은 틀림없었다.   이장식품은 구리 10퍼센트, 마그네슘 5퍼센트, 알루미늄 85퍼센트의  합금제품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믿기 어려웠던 것은 알루미늄이었다.  알루미늄이 처음으로 추출된 시기는 전기분해법이 도입된 1808년이었다.

< 고대의 비행기 >

 또 어떤 출토품들은 현대의 발명품을 모방해서 만든 것 같아  보인다.

그중에서도 현대의 삼각날개 비행기와 흡사한 황금제 축척의 모형이  발견된 것은 1천 5백년 전 콜롬비아의 한 묘지에서였다.  이보다 더  오랜고대 이집트에서는 글라이더 모형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시인  굴원은 고비 사막의 하늘 높이 서쪽으로 만년 눈으로 덮여 있는 곤륜산맥을  향해 비취의 전차로 비행한 것을 기록하였다.  그는 그  비행기가  어떻게 바람과 고비 사막의 모래 먼지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또 어떻게 자기가 항공 측량을 하였는지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림설명: 콜롬비아 보고타의 황금비행기

 서기 1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기술자 해론은 터빈과 제트엔진 양쪽 원리를 구체화한 증기 엔진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적어도 주행 거리를 기록하는 속도계를 헤론이  발명한 것은 사실이다.  한편 에게해의 해저에서 건져 올린 청동제의 물체

는 몇년간의 연구 끝에 천문계산기로 판명되었다.  굴착기로 보이는  톱니바퀴, 차륜이 붙은 황금제 모형이 파나마에서 발견되었다. 확대렌즈가 고대 앗시리아의 유적과 에쿠아도르의 콜롬부스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 이집트의 사원에는 성수자동판매기가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성수의 양은 화폐투입구에 넣은 화폐의 무게에 직접 관련이 있었다.  이밖에 제우스 사원에도 꼭같은 자동제어 성수판매기가  있었다.  이밖에 자동기계들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 테베의  사원

에는 이야기도 하고 제스처도 할 수 있는 신들의 동상이 있었다.   교황 실베스터 2세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청동의 자동기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항성과 행성의 어떤 위상에서> 이 교황에 의해  제작 되었다.   이것은 정치와 종교에 관한 중요사건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마법의 두뇌는>는 교황이 죽은 다음 처분되었다.

 레겐스부르크의 주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화학, 의학, 수학 및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20년 이상 걸려 안드로이드(Android)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이 자동기계는 별에 의해 선택된  금속과  미지의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기계는 걷고, 이야기하고, 가정의  잡일을 하였다.  알베르쿠스는 그의 제자 아퀴나스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안드로이드가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  어느날 말하기 좋아하는 수다와  험

담으로 아퀴나스를 화나게 하여 아퀴나스가 망치로 깨뜨려 버렸다.

 콤퓨터에 관한 기록도 있다.  아테네에 있는 그리스 국립 고고 박물관에는 1900년에 안티키테라 섬 부근에서 해녀가 발견한 부식된 금속체 단편이 몇 개 있다.  그 기계의 복잡한 눈금판과 톱니바퀴는 고대  그리스의 어떤 제품과도 같지 않았다.  그 기계와 같이 발견된 항아리에  새겨

진 문자를 보면 이것은 기원전 65년경에 제작된 것이다.  그것은 박물관에 아스트롤라베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1959년 뉴저지의 프린스턴 대학 부속연구소에 근무하던 과학자 프라이스가 감정한 결과 현대 컴퓨터의 선조라고 단정짓게 되었다.

 텔레비젼의 선조라고 불릴만한 것도 있다. 소련작가 막심 고리키의 경험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유물론자이기도 한 그가 20세기 초 카자흐 지방에서 인도인 요가 수행자를 만났다고 한다.   인도 수도자는 앨범을꺼내 인도의 풍경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고리키가 앨범을  펼치자 엷

은 구리판 위에 인도의 아름다운 도시와 사원의 경치가 그려져 있었다고한다. 그런데 인도수도자가 앨범을 받아 입김을 불고는 다시 보여주었을때 앨범 속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구리판뿐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들이 비행기, 계산기, 굴착기, 전기, 컴퓨터, 텔레비젼 등이라고 알게 된 것은 그와같은 것들이 정식으로 발명되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먼 옛날 사람들도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는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고대 로마인은 복잡한 교통 시간에는 어떤 주요도로를  일방통행으로 제한하였다.  폼페이에서는 교통의 번잡을 피하기 위해 손을  흔드는 교통순경을 채용하였다.  바빌로니아에서는 2천 5백년 전에 도로표지가 사용되었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는 주차 금지표지가 사용

되었다.  안티오크는 고대 도시 중 처음으로 가로등을 설치한 도시이다.

아즈텍인들은 원활한 교통의 소통을 위하여 영구적으로  변색하지  않는착색 끈을 포장도로의 중간에 박아 넣었다.  이것은 오늘날 페인트로 그려놓은 차선의 역할을 하였다.

4)고대의 지식들

어떤 민족도 고대 잉카인이 만든 것 같은 5천km의 고속도로를  건설하지는 못하였다.  이 고속도로는 좁고 험한 계곡을 건너, 현채도  사용되고 있는 굴을 지나 산맥을 관통하고 있다.  파키스탄 및 모헨조다로  하라파와 칼리방카의 발굴은 4천 5백년 전에 도시계획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들 고대 도시의 도로는 똑 발랐고, 구획i  직사각형

이었다.  훌륭한 수도와 하수도도 발견되었다.  이들  도시에서  사용된 벽돌은 가마에서 구워낸 것이었다.  백년 전 영국인들은 이 벽돌을 카라치와 라호르 사이의 철도 건설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유럽에서 17세기말에 발명된 중앙 난방이나 온수 난방은  이미4천년 전 한국에서 온돌이라는 형태로 존재해 왔다.   석조의  하수구와 도자기제의 파이프를 가진 중앙집중 시스템의 가정용 수세식 변소는 4천년 전에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시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었다.  오리건 대학의 크레스먼 교수팀은 네바다 i주 동쪽의 라모스 동굴에서  섬유로  짠샌들 200켤레를 발견하였다.  어떤 훌륭한 기술자의 손으로 짜여진 것인데, 마이애미에서 오늘날 신고 다니는 비취샌들로 오인할 정도였다.  탄소측정 결과 이 샌들의 연령은 9천년을 훨씬 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림설명: 모헨죠다로의 유적지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할 것인가 ?  그 문명은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또 왜  절멸한  것인가. 이에 열거한 증거들은 인류의 여명기에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만약 그러한 i문명이 존재하였다면왜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알렉산더 고르보프스키는 "고대의 지식들이 일차적으로는 지식을 담당하던 사람들에 의해 숨겨졌기 때문이며  이차적으로는  고대문헌이 침략자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파괴되거나 소각당하는 운명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튼은 "위대한 연구자들은  금속의  변질이라는 비밀 외에 몇가지 엄청난 비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은 이유는 헤르메스가 쓴 진실을 입에 올리면  세계가 엄청난 위험에 빠지게 i홱명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고르보프스키는 비밀지식을 갖춘 자들은 특별한 계급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들의 명칭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브리튼제도에서는 드루이드, 인도에서는 바라문, 이?트에서는 신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집트의 경우 국가가 생겨났을 때 신관들이 지식의 독점을 이용하여 신관층을 만들고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토투스는  이집트의 신관을 방문하였을 때 대를 이어 계승되어 온 가장 훌륭한 신관의  입상을 341개나 보았다고 한다.i  이것으로 따져볼 때 그때까지의 신관제도가 적어도 1만년 이상이나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의 고전 {리그베다}에는 마법의 비밀을 터득한 자는 그것을  다른모든 사람에게 숨기고 지켜야 한다는 구절이 있으며,  이집트의  마법을 기록한 파피루스에는 <입을 다물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지식을 숨기기 위해 그것을 구전으로만  전하거나  지식을  암호화하였다. 연금술에 대한 수많은 초고는 특히 그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 수는 10만 종에 달하는데 이것은 약  10만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종이 또는 양가죽에 써서 후세에 남기려고 했음을 알려준다.  이것으로 보아 지식을 갖춘 자들은 스스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건 혹은 지식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전해  줌으로써 파생되는 손해를 막기 위해서건 철저하게 지식을 한정된 사람에게만  전수하거나 암호로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지식은 비공개적인 지식의 전수 방식 이외에도 인간 스스로가 지식을 파괴함으로써 제대로 남겨지지 못하였다.  1549년 스페인의 수도사디에고 데 란다는 종교 전파를 위해 정복한 지 얼마i 되지 않은 멕시코를 찾아갔다.  그는 마야의 신전에 고문서를 소장한 거대한 도서관이  있는것을 발견하건는 이교도 신앙의 중심 자체를 파괴하기 위해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과 기호가 가득 찬 옛 서적과 문서를 불태워 버렸다.  이런 식으로 마야의 모든 도서관은 파괴되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고서 세 점뿐이다.

그림설명: 해독불능의 글자들.에쿠아도르의 크레스피에 위치.

 잉카에서도 비슷한 비극이 일어났다.  잉카제국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통치자가 예언자에게 그 대책을 물었더니 예언자는 문자 사용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잉카의 모i든 문서와 책은  파과되었고 문자의 사용은 금지당하였다.  진시황제는 분서갱유를 통해 셀수 없이 많은 책을 없애버렸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천문학과점성술에 관한 모든 책을 소각시켰다.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에 있던 특별한 고문서를 20만권이나 소장한 도서관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하였는데  이들이멸망하자 이 고문서들도 모두 불태워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멤피스에 있던 푸타 신전의 도서관이나 예루살렘 신전의 도서관도 모조리 소실되었다.  또 로마의 디오크레i릿㈌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고강화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고대 문서를 파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각지의 문화 사이에는 여러 유사점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정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바빌로니아의 신관인 베로소스의 책에서는 다양한 언어의 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최초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너무 믿어 신을  경멸하고  자신들이 신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바빌론이 있는 곳에  높은 탑을 쌓았다.  이 탑이 하늘에 닿으려 할 때 갑자기 신이 있는  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시박하여 탑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그것을 쌓던 사람들은 땅 위로 떨어졌다.  탑의 폐허는 바벨이라 이름 붙여졌다.  사람들

은 이때까지 같은 어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은 그들에게 다른 말을  하게 만들었다.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11장에도 나온다.  한편 멕시코의  토르테카 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홍수 뒤에 몇명의 사람이 살아남아 차차 그 수가 늘어날 때 사람들은 높은 탑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갑자기 혼란되기 시작하여 그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는 곳을 바꾸려고 제각기  여러 지역으로 떠나갔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아메리카의 많은 민족들의 전설  속에는  <신의문>에 관한 몇가지 전설이 남아 있다.  그런데 바벨이란 말의 의미도 신의 문이다.  이밖에도 먼 옛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전설이 중동지방은 물론 이러한 내용이 씌어 있는 신전과 고서를  고대 인도나 고대 이집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민족의 차이는 있지만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가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고고학자 A.훔볼트는 이렇게 말했다.

 "아메리카의 많은 신화, 기념물, 시간계산법, 우주발생에 관한 사고는동아시아와 놀랄만큼 유사하다.  이 사실로 보아 태고 시대에는서로 어떤 관계가 잇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설명: 마야의 숫자체계

 한편 1933년 고고학자 바이덴라이히는 북경에 가까운 주구점 동굴에서 두개골과 해골을 발견하였다.  그 두개골 중의 하나는 나이 먹은 옛  유럽인의 것이었고, 또 다른 것은 좁은 머리를 가진  여자의  것이었는데, 특징적으로 보아 전형적인 멜라네시아인이었다.  세번째의 두개골은  뚜렷한 에스키모의 특징을 가진 젊은 여성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럽의

남자, 열대지방의 여자와 북극권의 여자가 중국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것이었다.

 서남 아프리카의 브란드베르그 산중의 바위에 그려진 그림은 백인  여자들과 같이 있는 부시맨들을 그린 것이다.  이 여자들은 아주 유럽적인 얼굴인 흰색 페인트로 그려졌으며 머리털은 붉은 색이나 노랑색으로  나타냈다.  또 옷에는 보석들이 있고, 조개 껍질과 보석으로 정성스레  치장했으며 가슴에 활과 물주머니를 차고 있다.  이 여자들은 구두를 신고 있는데 흑인들은 신고 있지 않다.  이들 젊은 여자들은 3천 5백년  전에 크레타 섬이나 이집트로부터 왔음에 틀림없는 용감한 여행자라고 생각하는 고고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 백인여자들에게는 기묘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1만2천년 전에 살고 있는 북아프리카의 카스피언과 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둘 다 허리가 길고, 활을 가지고 있으며, 머리 장식을 하였고, 다리에는양말 대님같은 같은 십자형의 리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촉은 동남아시아에서 태평양을 거쳐 아메리카의 해안에 이르는 길, 유럽 해안에서 유카탄에 이르는 길, 인도에서  남북  아메리카에 이르는 길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서로 수만  킬로  떨어진 민족간에 고도로 발달한 지식과 사고에서 놀랄만한 유사성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결합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 진원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다만 과학이  과거에 대한 정보와 사실을 축척함에 따라 문명이 발생한 근원지가 존재했었음이 틀림없다는 견해가 근거를 얻어가고 있을 뿐이다.  즉 문명의 여명기에는 모든 민족이 동일조건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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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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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중세→근대? 우린 그런 패턴 안밟았다”

도올 김용옥 중앙대 석좌교수가 우리학계의 역사인식 방법론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지난 5일 밤 첫 회가 방영된 <문화방송> ‘도올 특강’에서다. 그는 지난 99년부터 3년 동안 <교육방송>과 <한국방송>에서 유·불·도를 중심으로 한 동양사상 텔레비전 강의를 해온 그가 이번에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한국학 강의에 나선 것이다. 특히 그는 첫날 강의에서 역사를 고대(노예제)-중세(봉건제)-근대(자본주의)로 구분하는 역사해석 방식을 통렬하게 비판해 관심을 끌었다.

도올과의 인터뷰는 예상 밖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첫 방송 다음날인 6일 전화통화에서 그는 15분 이상 특유의 입담을 펼치다가 “지금 곧 오라”며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다. 평소 일대일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그로서는 상당한 파격이었다. 인터뷰는 30여권에 이르는 도올의 저서를 출간한 서울 대학로 통나무출판사 거실에서 이뤄졌다. 넓은 흙마당이 있는 2층 양옥이었다.


[인터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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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는 해석된 과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대-중세-근대 시대구분도 유용하지 않습니까?

=유용성의 기준이 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가 돼야 하느냐 하는 것은 서양 중심의 지극히 라틴웨스턴 중심 지역적으로 굉장히 한정된 역사의 패턴이고 그런식의 패턴을 밟았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과거 우리가 왕조사라고 했던 것(통일신라-고려-조선)을 구태의연한 역사라고 하는데 고-중-근보다 훨씬 나은 개념이라는 거예요, 편견 없이 볼 수 있으니까. 우리가 시대구분이라고 얘기하면 되는데 거기에 해석의 문제가 있단 말예요, 이를테면 생활사적으로 담론을 만들어도 되잖아요. 사회계층변동이라고 얘기한다면 부족사회, 호족사회, 귀족사회 해도 되는 거고, 음식별로 해도 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그리고 ‘듀레이션’이란 개념도 있듯이 역사라는 게 반드시 단계적으로 변화하지만은 않는 지속성의 측면에서도 역사를 볼 수 있고…. 그런 담론의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있는 패러다임을 고-중-근으로 절대로 부당하다, 거기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어요. 그런 언어를 안쓰고도 역사를 얼마든지 쓸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는 거요. 역사학의 과제입니다. 하다못해 왕조사적 시대구분이라 해도 고중근보다는 낫다. 우리가 신라 혹은 조선 왕조라고 할 때 거기에 편견은 안들어가거든요. 어느 왕조가 다른 어느 왕조보다 유치하다는 것 같은 그런 편견….

-신라, 고려, 조선은 단지 개별국가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인데, 그렇게 구분하면 역사의 맥락적 특성이 드러나지 않지 않습니까?

=서양사에서 민족(국가) 개념은 19세기 들어서야 나타나므로 왕조사라든가 민족국가 단위의 역사 쓰기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왕조사가 훨씬 더 의미가 있어요. 왜냐면 고려, 조선왕조도 500년 역사를 지속했고. 서양은 500년 역사도 못씁니다. 말이 안되는 거지. 그래서 그런 얘기도 편견이라고. 왕조사가 우리에겐 훨씬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사상 우리 역사처럼 왕조의 지속력이 긴 유례가 없고 최소한 고중근보다 낫다 이거야. 왕조사가 낫다는 얘기가 아니야. 왕조사 치워버려야죠, 딴 개념이 있으면 더 좋죠. 예를 들면 고려 호족사회, 조선 양반관료사회라고 분류해도 고대-중세-근대 구분보다는 낫다고. 여러가지 기준이 있다는 거지.

-민족주의가 서구에서 부정적인 양태의 국가주의(파시즘)으로 나타났던 경험을 의식하면서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경향도 있는데?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이 등치되는 현상도 19세기만 해도 세계사에서 없거든요. 과거 유럽사회에서 국가와 민족 개념은 일치하지 않아요. 민족국가라는 엄밀한 개념에서는, 한국민족도 반만년 유지해왔다는 것도 있을 수 없어. 서양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단군신화 체계의 상징적 의미가 국가 개념이 민족단위로 뚜렷해지면서 그 필요성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거든요. 우리는 그런 민족국가 개념의 형성을 고려 말로 본다 하더라도 굉장히 이른 편이라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이 다른 것보다 더 정당성이 있고 그런 만큼 위험성이 큽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아주 특수한 케이스라고. 그러나 나는 절대로 우리역사를 민족과 국가를 등치시키는 의미에서 내셔널리즘은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런 류의 담론은 전부가 일제시대 때 일본 우익을 통해 들어온 거예요. 우리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조선 사람들도 우리가 민족국가라는 개념보다 소중화(小中華)라든가 유교적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이런 거지, 민족국가를 지킨다는 개념에서 구한말 척양세력들이 외세 배척했던 게 아닙니다. 그니까 지금 아주 쇼비니스틱한(국수주의적인) 근세적 내셔녈리즘은 일본X들이 대동아전쟁을 하기 위해 만든 우익적 근세개념이 우리나라에 전이된 현상이라고. 우리나라 모든 우익은 전부 일본 아류야, 100%. 우리는 그런 식으로 역사를 안봤어요.

-일본에서 우익개념이 들어온 것도 있지만 근대 학문도 일본을 통해 들어왔고….

=(말 끊으면서)Marx도 그래요, 나는 ‘맑스’를 쓴다고. 근데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라고 안쓰면 이상하게 생각해. 일본은 ‘ㄹ’‘ㄱ’ 둘을 겹칠 수 있는 발음이 없어요. 그래서 마르크스라고 쓰는데 이건 세계적으로 없어요. 이게 아주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어쨌든 우익 뿐 아니라 근대학문, 특히 80년대 과학적 사회주의도 상당수가 일본 번역서로 들어왔고, 서구적 역사해석도 일본을 한 번 거쳐 들어온 측면이 있습니다.

=20세기 한국의 진보세력이 전부 레프트를 빌렸단 말야. 좌익적 사고체계를 빌렸다고. 그런 사람들이 역사를 맑시즘 도식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노예제 봉건제를 가장 철저하게 주장해요. 그게 없으면 정치사를 못쓴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맑시스트 경제사관 논리가 여태까지 사가들이 안봤던 경제사적 하부구조 토대를 밝힌다는 의미에서는 소중해요. 그건 인정해야 됩니다. 근데 그 하부구조 토대를 밝힌다고 하는 면이 왜 반드시 봉건제-자본제의 틀 속에서만 이뤄져야 하느냐, 응? 일본의 왜색좌파들은 역사를 기본적으로 서양의 계몽주의가 인류의 근대를 독점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그 틀 속에서 맑시즘이란 진보주의도 성립하고 있기 때문에, 맑스도 계몽주의 말단에 불과하단 말야. 이게 우리 국학적 개념에서는 비극이란 말야.(분위기 서서히 달아올라)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나 내재적 발전론과 같은, 아시아적 특수성을 설명하려는 개념도 있는데요.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든, 엥겔스의 사유재산 논의(엥겔스가 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가리키는 듯)까지 다 포괄해서 그런 언어를 가지고 역사를 보지 말자는 거야. 부곡제면 부곡제, 굴품제면 골품제, 그것 같고 얘기하자 이거야. 그게 노예제냐 아니냐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지 말자는 거야. 서구적 담론에 말려들어가지 말고 우리 역사 개념만 갖고 얘기하자고.(말엽적인 얘기로 가면 안된다며 다소 흥분). 왜 우리 역사가 근대를 꼭 필요로 해야만 하고 근대를 거쳐야먄 하느냐, 근대라는 이름 없이도, 예컨대 우리는 과학을 좋아해서 받아들였고. (갑자기 격앙)무슨 아시아적 생산양식, 노예제 이런 것 몰라도 우리 잘 할 수 있잖아, 공부 잘 한다고, 응? 사회과학이고 뭐고 논의가 잘못돼 있다고, 논의할 필요가 없는 것을 자꾸만 논의한단 말예요.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서구적 근대의 성과물 중 우리가 건질 수 있는 걸 생각해보자는 거야, 과학이라든가, 자본주의적 부의 증대방식의 효율성이라든가, 의회민주주의라든가. 훌륭한 예술 같은 거, 난 서양의 종교는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대냐 아니냐”, “근대의 기점이 어디냐” 하는 게 전혀 무의미합니다. 우리 역사 개념은 “주자학이 우리 민족에게, 우리 오늘의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게 뭐냐” 이런 걸 토론하자는 겁니다. 근대적 체계로 말한다면, 우리가 주자학 도입해서 만들어 놓은 중앙관료체제는 서유럽이 봉건제에서 탈피해서 19세기에서부터나 생각하기 시작한 뷰로크라시와 같아요. 막스 베버가 말하는 뷰로크라시를 이미 우리는 15세기에 충분히 논의했어요. 막스베버의 사회학만이 근대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말 들으면 조금도 얘기 안된다고. “근대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유니크한(고유한) 정체성을 서구적 역사패턴의 전제가 없이 봐야하고, 오늘의 우리 현실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성과물을 우리 역사로부터 건져내야 한다는 얘기지.

-엉뚱한 질문일 수 있는데, 흔히 ‘역사가 발전한다’는 말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요. 근대담론은 역사발전(프로그레스)이라고 하는 진보사관의 오류의 결과입니다. 그 진보사관은 기독교 섭리사관에서 온 겁니다. 프로비던스(providence)라고 하지요? 섭리사관은 쉽게 말하면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구조예요. 역사를 직선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예를 들어 말이죠, 당장 이렇게 생각해보자고. 지금 우리가 서기를 쓰는데 이것만해도 우리에게 엄청나게 불리한 역사죠. 서기로 고침으로 해서 역사가 우리 머리 속에서 주르르륵 일직선으로 나열되는 겁니다. 옛날에 갑자(60년 주기)로만 역사를 계산했던 사람들의 역사의식은 전혀 다를 겁니다. 그니까 역사라는 게 유니크한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 진보라는 말은 쓸 수 없다고 봐요.

그런데 여기서 궁금할 거예요. 문제가 생긴다고. 그러면 역사라는 게 진보 안하면 무엇 때문에 사는가, 미래가 보장이 안되는데…. 이게 중요한 건데, 진보란 말은 부분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진보라는 말은 명확한 가치기준을 만들어놨을 때, 그 기준 아래에서 일어난 현상들을 묶는 개념으로 쓸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이 녹음기의 역사, 어떻게 작은 용량에 더 많은 콘텐츠를 담고 에너지 적게 효율적으로 쓰는 그런 기준을 세운다면 녹음기의 역사는 진보가 가능하잖아요.

-‘발달’이나 ‘개선’이란 개념과 ‘진보’라는 개념은 구분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발달이란 말은 진보란 말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는데, 역사가 반드시 과거보다 더 나아진다는 거야, 가치관적으로. 그런데 녹음기가 발달이 되면 남의 것 청취하고 나쁜 짓 하기 쉬워지고 그걸로 인해 나빠지는 부분이 많이 생긴단 말야 또. 이게 인간세상이란 말예요. 그런데 음양론적, 태극론적 사유 속에서는 전체가 발달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개념이란 말야. 근데 프로그레스란 서양의 개념은 인류 전체가 발달한다는 거야~, 지금. 역사 전체, 인류사 전체가 발달이 된다는 거야. 이런 사기가 어딨냐 이거야. 기술혁명 과정에서 진보란 말 쓸 수 있지요, 근데 인류역사에서 그 말은 없습니다. 그니까 그 기준을 헤겔도 제시했어요, 변증법적 아우프헤벤(지양)이라고 그러죠. 헤겔이 정확하게 <역사철학>에서 정확하게 제시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프라이하이트(자유)의 증대’라고. 인간의 자유가 소수독점 시대에서 다수 공유시대로 나아간다. 그런데 얼핏 보면 그 말이 굉장히 그럴 듯 하지만 나는 “천만에!”라 이거죠. 과거 고대사로 올라가면 자유로운 인간이 지금보다 더 많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지. 지금 우리가 물질적 법적 보장은 나아졌을 수 있지만, 현재 인간이 과연 자유로운 인간이냐….

그러니까 역사라는 걸 그렇게 프로그레스란 개념으로 볼 적에, 이건 넌센스다,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진보라는 개념은.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를 굉장히 오류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 역사가 전체적으로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되기 때문에 이 역사를 살 가치가 있다기보다는, 역사적 과제라는 것이 우리의 당장의 삶 속에서 주어지는, 내재적으로 주어지는 삶의 이유가 있을 거란 얘기야. 오늘날 우리가 스트러글(투쟁)해야 할 문제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우리 삶 속에서 발견해야지, 역사는 진보하고 있고 그 진보의 기준에 따라 인류의 역사가 가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담론 자체가 픽션(허구)라는 얘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역사의 각각의 국면에서 주어지는 삶의 이유를 진보사관의 전략과 전술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진보사관의 강점이 바로 지금 말한 데 있거든요. 역사를, 사람을 모빌라이징(조직, 동원) 하는데 무한한 좋은 에너지와 구심점을 제공하거든요. 서양사람들이 인류역사를 드라이브(주도)해온 그런 거죠. 그런데 그런 문제와 관련지어서, 뭐냐면 현재 우리가 스트러글하고 있는 문제도 꼭 어떠한 제도적 민주사회가 오고 점점 풀려나가는 것이 좋다는 그런 거는 분명히 있는데, 그런 것도 가치기준을 잘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야. 과연 우리의 미래에서 어떤 틀이 가장 좋을 것이냐는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지. 노동계가 주장한다고 해서 진보된 방향으로 가는 거냐, 이건 문제가 있다는 거야. 그런 것보다는, 부패한 정치는 나쁜 거니까 그럼 반부패하자, 이러면 쉽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역사라는 것 전체를 묶어낼 수 있는 이상이라든가 모든 사람이 굴복해야 하는 진보의 이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현재도 안나온다는 거야. 나는 역사를 그렇게 드라이브해서 전체를 몰고 가는 것은 다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5일 방송강연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가장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동학에도 가장 중요한 게 개벽이론, 음양의 세계 이런 게 있다고. 그게 유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서양의 발전도식적 사관보다 훨씬 더 나은 사관이라는거야. 맹자가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고 그랬어요. 한번 다스렸다가 한번 어지러운 것. 반복적으로 뵈는데 그게 반복의 역사가 아니라는 거죠. 동학에서 개벽이란 개념이라든가, 김일부의 ‘저녁’ 개념 같은 것도 보면, 그 사람들은 이제 그 어둠의 세계가 빛이 되어 온다라든가, 선천개벽세가 지났다가 이제 후천개벽세가 온다, 이제 그러면 다시 개벽이다. 그런 얘기는 역사를 단계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음양론적으로 보는 거예요. 여태까지 우리가, 어두웠던 측면을 떨쳐버리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 이런 것만 해도 역사의 위대한 비전이 된다는 거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하느냐 하는 거는, 우리가 우리 민족사를 볼 때 왕정과 민주라는 두 측면만 가지고도 충분히 역사기술이 가능하다 이거야. 고조선에서부터 최근세사까지 기본적으로 왕정 패러다임의 역사다 이거지. 왕정의 패러다임을 민주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꿔논 게 개벽이예요. 우리 민족이 말하는 개벽론적 개념을 나는 왕정과 민주라는 음양론적 개념으로 쓴다고. 그 왕정적 요소와 민주적 요소는 이게 단계적으로 딱 되는 게 아니예요. 왕정이나 민주는 음양론적 구조로 항상 같이 있는거야. 고조선시대에도 민주가 있었어요. 예를 들면, 활빈당, 임꺽정은 민주에 가까운 걸 꺼라고. 과거는 기본적으로 왕정적 요소가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강했던 시대라고. 태극의 마크가 그렇게 생겼듯이 이제는 민주적 패러다임으로 바뀌어가는 거라고, 그러면 개벽이라고 본단 말이야. 그 요소의 많고 적음이라든가 이런 걸로 구분이 되는 거죠. 민주라고 하는 이 패러다임의 변화가 굉장히 본질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기 때문에 20세기는 거의 완충적인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한 거요. 1945년 이래로 오늘날까지 왕정의 패러다임이 계속돼왔다는 거지, 나는. 그것이 비로소 이제 와서 민주라는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데 동아시아 역사에서 어느 나라도 그런 근원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동아시아에서 보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가장 앞서간다는 거예요.

-진보적 사관은 역사발전을 확신하므로 기본적으로 낙관적 세계관일 수 밖에 없는데, 도올은 진보적 사관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낙관적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뭐냐면, 그 낙관이라는 게 역사의 진보적 비전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유학의 경우에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하는, 맹자의 성선설적인 낙관론, 인간은 선한 존재이므로 인간이 만들어가려고 하는 사회는 선한 사회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선해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낙관론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건데, 그게 자기 최면일지도 몰라요. 과거로부터 유교교육이라고 하는 게 일종의 자기최면같은 거거든요. 맹자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는 거야, 보통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항상스러운 마음이 없어. 문제는, 지식인은, 최소한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은 항산이 없이도 항심이 있어야만 한다. 돈이 없어도, 배가 고파도 도덕적 양심은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 그 사회의 리더 자격이 있다는 거야.

-그게 지식인, 리더에게 요구되는 덕목일지 모르겠으나, 흔히 얘기할 때 역사는 거시적으로 민중이 이끌어가는 것이라는데….

=민중의 역사는 항산이 보장이 안되면 개똥이라고. 민중의 역사 이런 얘기는 맑시스트들이 막연하게 하는 얘기예요. 서구는 유교처럼 민중에 대한 존중의 역사가 없어요. 그러나 민심이라는 건 굉장히 본능적인 거예요.

-항심은 어떤 덕목이자 ‘당위’입니다. 그러나 ‘당위’를 역사 해석의 도구나 역사의 동력으로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다시 약간 격앙)그렇게 들어가면, 논리적으로 비슷한 얘기가 될 수 있는데, 서양의 담론에서 프로그레스도 ‘당위’거든요, ‘사실’이 아니란 말야. 내가 분노하는 것은 사실체계가 아닌 것을 사실체계인 것처럼, 그리고 동양은 도덕적 당위만을 강조하는 엉터리 전근대적 역사인 것처럼, 이게 엉터리란 말야. 똑같은 얘긴데. 걔들은 무슨 객관적인 것 같은 큰 걸개그림 딱 걸어논 것 같은 거고, 우리는 그 걸개그림을 마음 속에 몰래몰래 숨겨둔 것 같은 거고, 이런 느낌이 온단 말야. 그 질문 정확하게 했는데, 어치피 역사라는 게 픽션이란 말야. 미래는 체험된 사태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미래는 ‘구성된 미래’일 수밖에 없단 말예요. “밝은 미래를 향해 나갑시다”, 이게 다 사기라고, 미래란 모르는 건데.

동양적 사유세계에서는 미래를 강조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고 가장 건강한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도덕적 프로그램이 DNA안에 내재돼 있다는 얘기거든. 그런데 그런 도덕프로그램이 과연 디엔에이에 있는냐, 이게 좀 어려운 얘기에요, 이건 심성론까지 들어가게 되는 건데. 역사라는 게 최소한 ‘인의예지’라고 하는 도덕적 프로그램만을 강조한 역사가 훨씬 더 여러 모로 오류가 적은 역사일 수 있지 않느냐 이거야. 미리 컨디션(조건, 전제)만 말하지 프로그램의 내용을 얘기 안해요. 그래서 오류가 적을 수 있고 항상 플렉시빌리티(탄력성)가 있고 프로그램 자체를 변경하는 게 가능해진단 말야. 역사를 프로그램화하는 것은 ‘역사의 목표를 역사 밖에 둔다’ 는 거거든, 서양의 역사는, 모든 직선 사관은 역사의 목표를 역사 밖에 두는 오류를 범한다구요. 낙관론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기초적인 것은 픽티셔스, 그러니까 가공적인 건데, 그런 미래라고 한다면 최소한 사는 동안에는 낙관적이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가 있다는 거야. 그 의무를 저버리면 유자의 자격이 없어요. 맹자의 대장부론이거든. 최소한 대장부는 그러한 역사의 도덕적 낙관적인 믿음을 견지해서 그것을 철저하게 구현해주는 것만으로 밥을 먹고 살아라 이거야, 그 대신 그 사회가 공짜로 먹여준다 이거야. 그게 대장부라고 하는, 맹자의 아주 결정적인 얘기거든. 그런 논리가 나한테는 있는 거죠.

-민주주의 언급과 낙관론 언급을 통합해서 애기해보면….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 제도가 있느냐 없느냐 이거라고, 그런데 선거제도의 출현이 주로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역사를 통해서 7,800년 거쳐서 오늘날까지 온 거 아녜요? 근데 그건 서양 역사에서는 귀족사회의 왕권 견제라고, 조선왕조도 철저하게 양반귀족이 왕권을 제약시켜온 역사라고, 왕권 제약은 왕조사를 보면 아주 치열했어요. 그나마 그런 치열성 때문에 조선 왕조가 500년 유지했다고. 한국 민주주의 근본은, 과거부터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왕이 민심을 듣지 못하면 혁명의 가능성, 그 정당성까지 열어논 역사란 말예요. 정도전의 <경국대전>에 보면 명문화돼있다고. 그니까 우리 민족은 왕조사라 해도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도덕적 기반을 이미 조선 왕조로부터 계승했다는 거예요.

거기에 더해서, 해방 이후 선거제도를 도입한 겁니다. 이 선거제도를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가장 빨리 정착을 시켰다고, 우리가. 일본도 우리만한 선거가 이뤄지지 않고 있고. 서양 민주주의 헌정적인 질서감이라는 게 우리는 이미 유교에서부터 몸에 배어 있었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것도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거야. 의회민주주의 역사를 본다면 영국이 700년 걸린 것을 우리는 50년만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본다면 근대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진다는 거야. 근대라는 성과는 반드시 그런 제도적 근대가 낳은 산물이 있어야 하는 건데, 우리는 그런 걸 요 몇십년 내에 다 만들었다고 한다면 꼭 조선왕조사에서 근대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하는 복잡한 문제가 생긴단 말야. 그런 본질적인 질문을 계속 해보라고, 나도 정리 좀 해보게.(인터뷰가 시작된지 1시간이 넘어섰다. 도올의 얼굴에서 조금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으나 여전히 정열적인 답변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시비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시각과 반응도 학계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패권주의로 나가고 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 받아들이는 양식이 월드스타예요. 걔들 동북공정은 남북의 통일에 대비하는 방식입니다. 미리 고토 문제에 쐐기를 박으려는 거지요. 그런데 나는, 통일신라 이후에는 비교적 단일국가적 개념의 역사기술방식이 맞아들어가지만, 그 이전 삼국시대는 민족국가 개념으로는 접근이 안되는 역사란 말예요. 토인비가 만든 문화사 개념하고 똑같아요. 삼국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면 문화사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요동반도와 일본 큐수지방을 연결하는 하나의 문화권, 또 고구려는 북부-만주로 하는 문화권, 이런 문화권들이 있고 그 안에 또 세부적인 문화권이 또 있단 말예요.

우리도 그런 점에서 역사를 우리민족 단위로만 쓸 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사적 개념으로 우리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나한테는 옛날부터 있었어요. 이런 얘기가 안먹혀들어갔는데. 그거를 빨리 보편적 문화사로 우리 민족이 정리를 해야 한다는 거야. 예컨대, <일본서기>나 중국자료를 우리 고대사 자료로도 쓰잔 말이야. 폭넓은 세계사적 시각에서 우리 고구려사도 다시 써야 한다고 보고, 그러나 그것이 우리 영토의 주장은 아닐꺼고. 문제는 중국이 어떤 주장을 하든지간에 거기에 대해 우리가 제재를 하기는 어렵죠. 그런 역사를 얼마나 폭넓게 보고 빨리 일본 식민사관을 탈피해서 그 경제·지역사회에서 우리역사를 되찾아 놓느냐 하는 것은 시급한 문제죠. 그러나 민족국가로는 아니다 이거야.

-중국은 자국영토 내 역사는 소수민족사도 변방사라고 해서 자국사로 주장하는데, 민족국가 단위로 설명이 되지 않는 공유된 문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역사의 정체성, 우리 역사의 뿌리찾기 문제는 여전히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정체성 자체를 민족국가 개념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운 거고 , 폭넓은 시각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사료를 동원해서 학생들을 교육시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토분쟁은 역사문제는 아니고 다른 차원의 문제고. 과거 식민사관에 얽매여 고구려사를 보던 정통우익사학자들이, 지금 우익들은 만주 찾자고 그러는데, 새로운 자료 무시하다가 이제 와서 난리가 났다 그러는 거란 말이야. <화랑세기>가 위서라는데 그게 어떻게 위서예요. (주류 역사학계가) 좁은 시각에서 역사를 써왔단 말예요. 빨리 국력을 신장하는 방향으로 해야지,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없단 말예요.

-고구려사왜곡공대위나 사학계가 이 문제를 영토 문제로 인식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고구려사를 우리의 역사로 폭넓게 우리의 문화로 쓰는 작업이 시급한 문제요. 보다 더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고. 광개토대왕비 해석도 우리가 선취해야지,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씨가 광개토왕비를 해석하고 그랬던 건데. 비문을 재해석하든지 간에 확고한 정설로 만들어놓고 접근해 들어가야 하는데 일본사람들이 축소 왜곡시켜 놓은 그 범위, 민족국가 역사 안에서 우리 역사를 보려고 하는 게 문제예요.

-최근 국내에서도 미시사적 접근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것도 주제별로 보는 건데, 그런 것들이 피차간에 거시적 거대담론의 영향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거대담론의 좋은 영향을 받아야 하고 그것이 반영되고 그러면서 역사가 넓어져야 하는데, 거기에서 제일 먼저 깨져야 하는게 고대-중세-근대 도식이란 말예요. 근대 복식만 좋은 거고 고대 복식 유치한 걸로 보면, 고구려 복식은 고대복식이예요? 그게 어떻게 말이 돼? 원피스 시대, 투피스 시대, 쓰피피스 시대, 뭐 이런 식으로 써야지.(웃음)

-고대-중세-근대 개념이 단순한 시대구분이 아니라 가치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인가?

=그럼! 개입되지 않을 수 없지. 그런데 불행하게도 모두가 그걸 의식을 못하고 휘말린다는 게 비극이라는 거야. 실학도 마찬가지요. 일본 메이지 유신 만들었던 실학 가지고 우리 경우에도 실학이란 말 쓰지 말고 실사구시학풍 이렇게 쓰면 문제 없잖아요.

-최근 패션쇼 구경하셨던 장면이 인터넷에 돌아다닙니다.(좌중 폭소) 관심이 없으신 분야가 없는데, 지금까지 텔레비전 강연에서 주로 유교사상과 노장사상을 다루다가 이제 (한)국학으로 주제를 돌렸는데 그 배경이나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그게 필연이예요, 필연. 원래 대학시절에 의식 있으면 다 좌파거든. 근데 난 좌파를 거부한 거거든. 뭔가 새로운 학문을 해야겠는데, 그러러면 국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이상은 선생이라고 고려대 철학과에 대단한 석학이 계셨어요. 당시 북경대 철학과에서 최고수재란 말을 들었으니까. 그런 대학자가 국학을 강조하셨다고. 그 때 생각해보니까 국학만 하면 ‘전문가 바보’(한 분야만 좁은 시각으로 통달한 사람을 일컫는 듯)가 된다 이거야. 국학을 하려면 우선 한문을 제대로 읽어야 되니까 중국 고전에 달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해서 중국 철학에 들어갔고, 그때 중국철학은 이미 서양철학과 세계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단 말이죠. 그래서 서양철학 제대로 안하면 중국철학에서 큰 소리 못친다, 그래서 자꾸 영역을 확대하다보니까 철학에서 과학까지 나오게 됐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의 삶의 체험은 다 나의 전공이다”, 이래가면서 30년 세월이 흘렀어요. 그런데 나는 원래 국학을 하려고 했어요. 중국철학사를 쓰려고도 했어요. 근데 그거 쓰면 뭐하냐 이거야. 그 여력이 있으면 한국철학사를 써야 된다는 거고.

나는 유불도를 다 전문적으로 봤고, 거기에 더해 서양철학과 서양역사를 봤기 때문에 그거를 가지고 이제 내 남은 인생은 국학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제 통일담론으로 가는 거란 말야. 통일의 시대에 국체가 서지 않으면 통일을 맞이할 수 없죠, 우리가. 그러니까 앞으로는 온 국민이 국학으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우리 역사의 가치를 알고 우리 역사의 새로운 주체를 세워서 우리 역사의 새로운 헌법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 헌법은 어떻게 쓰느냐, 한국철학이 없으면 못쓰죠. 국학이 우선 완벽하게 발전해서 콘센서스(사회적 합의)를 이뤄야죠. 이런 것이 거시적인 준비란 말예요.

20세기는 우리가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던 시기지만, 21세기는 보편성보다는 주체성·국부성·특수성 이런 거를 더 추구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보편성 기반이 마련돼 있으므로. 나의 개인적 체험이나 우리 민족의 체험이 비슷해요. 영화도 헐리우드를 이기는 유일한 나라가 되어가도 있고. 그런데 학문도 이겨야 된다. 그러러면 고대-중세-근대가 파기돼야 된다 이거야. 이거 파기하지 않으면 절대 서양 역사 못이깁니다. 한국영화가 뛰어나게 된 이유는 그게 헐리우드 패턴에 안잡혀요, 엉~뚱하다고. 예측불가능하다 이거야. 고대-중세-근대 도식은 헐리우드 영화처럼 빤히 끝이 보인다고. 그게 아직도 역사학의 대 기본가설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너무 익숙해있단 말야.

-학계에서 우리 학문의 대외종속성이 심각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고 자생학문의 움직임들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국학이 발전하려면 고전번역에 박사학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각 대학에서 고전번역문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서구 대학은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나오는 중요 고전번역이 대학교 학위논문입니다. 국학의 기본이 서려면 국학자들이 앞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료로 번역하는 것만도 몇십년이 걸려요. 주역에 대한 논문은 십여편이 있어. 근데 주역사전은 없어. 이건 사기예요. 우리가 한 30년만 고전번역에 매달리면 국학 제대로 될 거야.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 완역한 것은 정말 대단한 작업이예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민족문화대백과, 그거 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칭찬해줘야 합니다. 국가가 벤처투자 100분의1만 투자해도 인재들 다 끌어모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화적 마인드…. 문화는 돈이 안들어요, 안목만 있으면 작은 투자예요, 현대사회에서. 국학자료들이 다 번역되는데 돈이 별로 안들어요, 그런데 국가가 그거 지원 안하잖아요. 대학까지 총동원해서 하면 우리나라의 국학이 섭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스케일이 달라지는데요, 당∼당해지고.

-최근 한국학을 전공하는 한 미국 교수의 논문을 봤습니다. 한국에서 민족(의식)이란 개념이 언제 형성됐는가 하는 건데, 지금 우리학계 통설은 일제 내지는 구한말 계몽기 정도로 잡는데 그 학자는 <임진록> 구전본을 텍스트로 삼아서 한국 민중의 민족의식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겁니다. 학계통설을 반박하는 건데요, 동의 여부를 떠나서 왜 이런 주장들이 우리 학자들이 아닌 외국학자들에게서 나와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어떤 의미로 본다면 외국학자들처럼 역사를 밖에서 보는 데 익숙해진 거야. (외국)언어를 일찍 익히고 이러면서. 평상적인 국사학자들이 자라나온 과정을 나는 전혀 안거친 거거든. 그러니까 항상 자유롭게, 전체적으로 볼 수 있고, 아웃사이더 입장에서 보는 거지. 학풍에 구애받지 않고. 이게 결정적인 거야. 내가 양심선언하고 나왔던 이후에 고려대 다시 돌아간다고 했을 때 나를 받아줬으면 내가 거기 딱 엮이는거야, 그런데 내가 고려대 돌아가고 안돌아가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학풍이 끊어진 거야. 그러면서 나는 자유로운 사상가가 된 거야. 대학에서는 제자들이 자기 스승을 비판하지 못해요. 누구라도 글 쓰는데 문제가 좀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거든, 그런 건 고치면 되는데. 그래서 글에 모순이 많으면 과감하게 고치고 뺄 건 빼고, 왜, 역사는 변하는 거니까.

내 글에도 상당히 문제가 있어요. 과거 그 시점에 나의 의식이 강하게 반영됐기 때문에. 지금 <도올문집>을 100권 분량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앞으로 될 수 있는대로 그런 것들도 정비를 하려고 그래요. 앞으로 영구하게 후학들이 전체적 비전 속에서 볼 수 있도록. 그런 면에서 어떻게 정석을 쌓아가느냐 이런 걸 심어주려고 그러거든, 이제는. 큰 시대적 의식이라든가 이런 거는 많은 후학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거고. (기자는 이 대목에서 도올 특유의 당당함과 자신감과의 이면에 숨겨진 어떤 고독감 같은 것이 배어나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외적 발언이나 투쟁은 전혀 안하겠다는 뜻인가요?

=그게 아니라, 내 소신에 따른 어떤 영구한 초석을, 내 나름대로 시스템을 놓아가야지, 국부적인 문제에 너무 휘말리면 내 인생에 에너지가 낭비되니까. 가급적 마이너한 언어들은 트리밍을 할(다듬을) 필요가 있겟다 하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이제 그 방송강의도 고민이 많은데, 한국사회라는 게 엄청난 갈등이 있더라고. 국학에 덤비려고 하니까 문중도 걸리고 종교도 걸리고, 그나마 나 정도의 자유로운 처지가 있기 때문에 하는 거라고.

이제 국학을 총체적으로 각 사상가들의 입장에서 보겠다, 그렇게 하고. 될 수 있는대로 정제된 패러다임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고대-중세-근대’ 도식을 깨고 나서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내 마음속에 뚜렷하게 정해진 건 없어요. 그걸 이제 찾아가는 과정에 있죠. 과연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보는 게 좋겠느냐, 분류방식이라든가, 기준이라든가, 개념이라든가, 이런 거를 어떻게 새롭게 정립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이제 고민해 들어가야 하는데, 최소한 고대-중세-근대의 역사, 서양에서 제기한 역사학적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생동하는 역사를 쓸 수 있을 겁니다. 역사라고 하는 거는 현대인들에게 얼마만큼 공감이 될 수 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서구적 개념을 안쓰더라도 우리 삶의 문제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기술하면 엄청난 공감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체적 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원칙이나 방향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현재는 1차 목표로, 조선역사 전체를 쓰기는 버겁고, 정도전을 기점으로 해서 이제마에 이르기까지 조선사상사 하나만이라도 뭔가 아주 색다르게, 유교라고 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고-중-근 개념이 배제된, 유교 이념의 역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리론·주기론·당쟁과의 관계, 이런 함수를 다 계산해서 그들의 사상의 내용과 그들의 정치적 현실과 어떻게 교섭해가면서 조선왕조 500년이 지속됐는가, 거기에 대한 결정적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번 문화방송 특강에서도 예정하고 있는 것입니까?

=6개월인데 너무 짧으니까, 그나마 이런 게 주어진다는 게 대단한 건데, 또 어떻게 보면 너무 시간이 적단 말야. 이게 비극인데, 시청율 같은 것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고 깊이 있게 강의하는 게 소원이고.

그는 이 즈음에서 100권 발간을 예정하고 있다는 <도올문집>을 소개했다.

=첫 권 <청계천 이야기>가 최근 나왔고, 2권 <독기학설> 수정판, 3권 <혜강 최한기와 유교>, 4권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이 다음 주에 나와요. 이게 나오면 사람들이 감을 잡기 시작할 거야, 나는 상당히 좋은 책이라고 자부합니다. 한 500매 분량인데. 또 5권이 이제만의 <동의수세보원>, 그 다음에 <동경대전>.

-100권에 아우르는 문집들은 모두 한국학입니까?

=그동안 썼던 것들도 있고 또 새로 쓸 것도 있고. 주로 국학분야가 많지. 10년 정도면 충분히 완성돼요, 그러면 <한국철학사> <한국사상사>라는 이름의 책, 세계적인 저술을 하려고 해요. 책임 있는 한국사상사를 완성하는 겁니다. 대개 뭐 철학사라고 하면 이론적인데만 국한되는데 사상사라고 하면 여러 분야를 다 섭렵해 쓴다는 거지.

-그야말로 다방면을 아울렀던 학문과 삶의 여정의 목적지랄까 종착점이 국학으로 모아지는 걸로 봐도 되는 겁니까?

=100프로. 그렇게 봐도 되는 게 아니라 100프로 거기로 가는 거고, 한의학도 내가 그것을 위해 했던 거고. (신중한 분위기, 도올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근데 나는 어떠한 그…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내 나름대로 이론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는데, 그것이 지금도 포기하고 있지 않지만, (다시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상사적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이론서가 칸트 시대에는 칸트 철학이 대단한 의미를 가졌지만, 앞으로 21세기…, 어떤 특수한 형이상학적 체계가 의미를 갖는 시대가 올까 하는 회의감도 있고…. 여러가지 그런 고민이 있는 거죠. 머리 속에 구상중입니다. 그런데 사상사는 리얼한 거니까. 내 지식의 범위를 넓히고. 사상사적 작업의 성과를 가지고 죽기 전에 기철학을 하나 쓰든가 그런 스타일이 되지 않을까, 내 인생이.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죠(웃음).

-건강관리는 어떻게? 수련 같은 것 하십니까?

=수련도 하고, 내 기철학적 이론에 따라 만든 수련법도 있고. 사람이 수련 안하면 건강 유지 못하니까. 음식, 사람이 먹는다는 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먹는 거, 자는거, 그리고 섹스. 그런 식색지성의 문제가 인간에게 중요한 건데…. 서양의 근대담론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가 모든 걸 이성 중심으로 생각을 한거예요. 그런데 이성이라고 하는 거는 인간의 총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인데, 이것이 근대생활을 하는 데 굉장히 도움을 주는 거였다고. 그런 것에 의해서 근대사회를 편하게 유지하려고 했던 거예요. 지금 현대 동양담론과 서양담론의 가장 큰 차이가 그런 이성주의적 인간, 근대성의 담론에 다 걸려있는 건데, 근대적 인간이라고 하는 서구적, 이성의 주체가 된 인간을 가지고는 사회적 리더도 만들어내기도 어렵고, 한 국가사회를 잘 이끌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학계 일부에서는, 단선적 사관에 비약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경우 근대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는데 무슨 탈근대냐 하는….

=(말 끊으며)그게 잘못된 말이예요. 우리 역사는 근대/탈근대를 가지고 얘기하면 안되는 역사란 말이예요. 그게 아주 위험한 애기고. 문제는 이성주의적 인간도 훌륭한 면이 있다라는 점에서 근대를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성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데리다가 어떻고 푸코가 어떻고 이런 얘기 아무리 해봐야, 인간의 언어가 복잡할 게 없어요, 이성을 빼놓으면 뭐가 있냐면 결국 정욕의 문제예요. 동양인들이 생각한 주자학은 이성적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것보다는 -그런 것 필요하죠, 주자학도 이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성적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기의 욕망을 절제하느냐,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쉽게 말해서 희로애락의 문제라든가 이런 것이 동양에서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란 말이에요.

한국사회도 만나서 얘기하면 서로 이성적이라고 거품을 물어요. 우익이나 좌익이 만나면.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감정처리가 안돼. 무조건 남을 증오하고 질시하고, 그러면서 자기 주장만 이성적이라고 주장하거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예요. 그러니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이성적으로 보기 전에 감정적으로 본단 말이야. 이런 게 우리사회에서 99%지. 감정순화가 바로 서구학문이 실패하고 있는 부분이야. 이런 문제가 좌파적 논리만으로 안되는 거야. 보다 더 해방된 사회, 더 많은 사람이 자유를 공유하는 사회, 이건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에요, 이런 걸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있어야지.

학계에도 자이언트(거인)가 있어야 돼. 방대한 자료와 이론을 통합해서 누가봐도 대단하다 할 정도로 해야 하는데 국학의 경우는 지금은 역부족이지. 더 깊게 공부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학문을 세워야 해,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스칼라쉽이 확고하게 있어야 해요.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만큼 그는 진솔하고 거침없는 특유의 화법으로 2시간 동안의 대화를 이어갔다. 도올은 인터뷰를 마치고 여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자신의 편저 <삼국통일과 한국통일>(1994, 통나무)에 “내 인생에 가장 본격적인 인터뷰였던 것 같다, 갑신년 정월초 도올”이라는 소감을 적어 기자에게 주면서 한마디 더 보탰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강렬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내 말이 (학계와 지식인사회에) 충격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글 조일준 기자

Posted by PD 개인교수
TAG 도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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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방의 베스트로 뜬 한국사 60가지 미스테리를 보고 한심해서 반박들을 올립니다...

요즘사람들.... 무언가 그럴듯하고 알지못했던 신비한 외부정보에 너무 취약합니다. 이런거 믿으면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지요...
무한경쟁시대..정보공유도 좋지만 스스로의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는게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출처: 초록불의 잡학다식 http://orumi.egloos.com/1779098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에른스트 폰 헤쎄-봐르테크의 라는 책 때문에 나온 말이다. 존 로스는 중국 선교사다. 문제는 저런 말은 그 책에 있지 않다는 것 뿐이다. 국내신문의 보도내용은 이렇다.
<뉴스메이커>[간도를 되찾자]동북공정에 반격 시작됐다<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OD&office_id=033&article_id=0000004098>

저 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중국 사신들이 봉황성문과 의주 사이를 왕래할 때는 조선측이 관할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런 말이 하북성이 근대 조선 것이라고 옮겨지는 것이다. 신촌에서는 기침한 사람이 동대문에서는 죽은 격이다.

2. 중국의 '중국고금지명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있다.

중국고금지명사전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금과옥조다. 저 사전은 중국지명에 대해 각종 사서의 기록을 모두 옮겨놓은 책인데, 시대를 따지지 않고 자기 주장에 유리하면 다 채용해서 견강부회하여 자기 주장에 이용해먹고 있다. 당연히 저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글쓴이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겠다는 것, 이해한다. 역사공부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에는 함정이 있다. <좋은 말>이라는 말을 넣어서 특정한 품종을 얻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몽골은 제주도라는 섬을 통째로 목장으로 만들어버린 것 뿐이다. 이런 간단한 문장 안에도 사람을 현혹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들의 실상이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중국 측에는 실제 연구결과를 적용하고 우리나라 쪽은 최치원이 써놓은 기록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수법도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런 것을 이중잣대라고 부른다. 수양제가 동원한 백만대군(여기에 보급병력까지 합하면 2백만이 된다.) 이런 것은 왜 예로 들지 않을까?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반도에서 그게 왜 불가능하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옛날에 내가 증명해 준 적이 있다. 또한 올해(2005년) 호남지방에만 폭설이 내린 것도 한번 생각해 봐라.
홍수기록으로 본 삼국의 강역: http://www.dragon5.com/news/news199910071.htm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저 주장은 처음에 정용석에 의해서 삼국이 한반도에 있지 않은 증거로 쓰였다. 그후에 고려, 조선에도 메뚜기 피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다 내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논리적인 귀결로 고려, 조선도 다 중국 땅에 옮겨놓게 된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는 삼국사기와 같은 메뚜기 피해 사례가 숱하게 적혀 있다. 제발 찾아나 보고 이야기하기 바란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근거없는 이야기. 애신각라가 신라를 사랑하라는 말이라는 해석과 더불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일뿐이다.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보다 찾을 수 없는 지명이 더 많다.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이런 시각이 이런 자들이 역사를 보는 자세다. 세월이 변해도 언어가 변하지 않고, 지명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눈물을 마시는 새>라도 읽어보기를 바란다. 중국의 지명도 한반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중국의 대표적 수도로 모든 이들이 말 들어봤을 <장안>만 해도 <호경>, <함양>, <장안>, <서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저 <함양>은 경상남도에 있는 지명이니 장안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겠는가?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있다.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수양제의 별동대가 압록강을 건넌 뒤 평양성에서 물러나다가 일격을 당한 것을 알 수 있다. 청천강 설은 그런 기반 하에 나온 것이다. 평소에는 김부식을 있는대로 깔아뭉개다가 이럴 때는 권위있는 척 이야기한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되었다.

그래서? 남한에 아파트가 서 있으니 미국 땅이라고 주장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인가? 서울에 관제묘가 있으니 중국땅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경상남도에 왜식 성이 세워져 있으니 일본 땅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더구나 저 이야기는 내몽골자치구와 요녕성의 경계 부근에서 발견된 성에 대한 이야기다. 지도에서 내몽골 자치구가 얼마나 넓은 땅인지, 또 요녕성과의 경계라면 어딘지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저 <내몽골>이라는 말 때문에 지금 몽골의 어디쯤인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오산. 저런 말이 나온 근거는 이 기사다. <주간조선>고구려 정복로 1만3000리를 가다 <http://www.dragon5.com/news/news199910071.htm>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닮은 부분도 있고, 닮지 않은 부분도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볼 뿐. 고구려칸이라니? 이런 헛소리는 처음 본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있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치우를 중국에서 고리국 황제라고 이야기한다는 말은 처음 본다. 황제라는 개념 자체가 진시황때 만들어진 것인데 무슨 헛소리인가? 치우는 우리 민족과 아무 관련도 없다. 헛물 켜지 말기를. 저런 주장은 오히려 중국인들이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지껄이는 헛소리인데, 우리가 거기에 장단맞춰주는 셈이다. 제발 정신차리기 바란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중국에도 없다. 증거도 없는 이야기를 너무 좋아한다.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거짓말이다. 박혁거세의 무덤은 경주에 가면 금방 찾을 수 있다. 경주는 땅만 파면 신라 유물이 나온다. 대체 그 유물은 뭘까? 중국에서 파와서 거기다 묻어두었겠냐? 그럼 석가탑, 다보탑은 왜 안 묻어두었겠냐? 무구정광다라니경이나 석가탑에서 나와 그동안 보관해 두었다가 과학의 발전으로 해독하게 된 불국사중창기(고려때 기록)는 뭘까 생각해 보기 바란다.

15. 고려, 조선등의 무역 내역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역시 거짓말이다. 대체 뭘 수출했는지는 대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품목도 대지 않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옮긴이 주: 고려에서는 향신료와 물소뿔, 그리고 진귀한 구슬류를 역수출 한 듯하다.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여길 보라.
박창범-나대일의 삼국시대 일식 연구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http://hkh336.egloos.com/374099
참고로 이것도 같이 보면 좋겠다.
고대 천문학 기록 연구에 대한 반론: http://orumi.egloos.com/214633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위의 것과 동일하다.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문항 수만 불려놓는 것도 파렴치한 짓이다.

18. 백제의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의 인구보다 많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의 각도별 인구를 합산한 뒤에 내놓은 결론이다. 그렇게 세면 조선 시대 인구가 형편없이 줄어든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19.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 현 중국대륙의 장안(시안)과 소름끼치도록 일치한다.

평양성을 장안성이라고 불렀다는 데서 착안한 발칙한 아이디어다. 이런 결과 어떤 이는 중국의 장안은 페르시아에 있다는 등의 헛소리를 하게 된다. 최근에는 중국의 장안은 티벳에 있었다는 주장도 보았다. 나는 중국의 장안이 경상남도 함양군이었다는 말을 차라리 믿겠다.

20. 당 13만 군에 의해 백제 수도가 함락된 후에도 백제 장군 흑치상지는 200여개의 성을 기반으로 당에게 저항해 당은 40만군을 증원한다.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성으로 뒤덮여있어야한다.

저 인간들은 성이 중세 유럽에 나오는 거대한 규모인줄만 알아서 저런 소리를 한다. 경주 시내에만 성이 6개 있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옮긴이 주: 한반도가 성으로 뒤덮인게 맞다. 동네에서 한시간 반경에 조그만 읍성이나 산성이 없다면 연락 부탁드린다.

21. 조선 초 인구가 37만명인데 1000년전의 국가인 백제나 고구려의 군인만 100만이었다.

18번에서 이미 다뤘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최치원이 한 말을 증거로 하는 이중 잣대까지 동원하고 있다. 재야학자 중 어떤 이는 조선도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과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끼리 싸워서 결론을 좀 낸 뒤에 와줬으면 좋겠다. 조선이 중국 땅에 있었다는 사람 이야기로는 얄타회담 때 전승국들이 한국의 힘을 무서워해서 한민족을 한반도로 보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하다. (이런 이야기가 책으로도 나와 있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중국 대륙내의 요동이란 수나라때 설치된 요산현을 가리킨다. 지도에서 <요>자만 나오면 요동이라 우기고 있다.

23. 18~19c 외국인 선교사 또는 탐험가들이 작성한 지도에는 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어떤 지돈지 나도 보고 싶다. 지난번 유조변 지도(http://orumi.egloos.com/1762044 참조) 같은 황당한 내용일 것이 분명하다.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고구려를 칠 때 군인들이 징병된 곳이 저곳들이다. 그곳에서 싸웠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왜곡을 하다니 한숨만 나온다.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우리 서울을 한자로 한성漢城이라 불렀다. 서울이 중국 땅이었나 보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있다.

25번과 동일한 이야기다.

*옮긴이 주: 이것은 반대한다. 영락태왕이 북경지역을 경략한건 요즈음 들어 꽤나 긍정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게다가 모본왕 기사엔 유주를 공략한 사실이 기록되어있고, 태조태왕 기사엔 요서에 10성을 쌓았다고 기록한다.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옳다고 본다.

27. 고구려 고씨가 아직도 중국 대륙에 살고있다. 특히 장수왕 후손인 사람은 고구려 유리왕의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베이징 근처에 유리왕묘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국의 왕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후손은 한국말 하던가? 고구려 역사가 중국 것이라는 증거로나 이용될 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28. 중국대륙에 있는 수많은 성들이 현지인들에게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고려성, 또는 고구려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증거나 제출하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역시 25, 26번과 같은 말로 문항수 부풀리기의 수법에 불과하다.

29. 백제의 의자왕, 흑치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중국대륙에만 존재한다.

고려할 가치가 없는 말이다. 지명에 대한 부분은 이미 위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모두 설명이 된다.

30. 백제가 패망할 당시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모두 있다.

위 항목과 마찬가지다. 위 항목과 같이 이 역시 문항 수 부풀리기.

31.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359개나 된다. 이들 모두가 중국대륙에는 존재한다.

위 항목과 마찬가지다.

32. 한단고기외에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규원사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는 양립이 되지 않는 사서다. 규원사화 진본을 믿고자 한다면 환단고기는 폐기해야 한다. 더불어 규원사화의 원본이라는 것은 그것이 숙종 때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이 아니다.

33. 중국의 고문헌에 나와있는 발음법으로 정확하게 한자를 읽는 민족은 우리민족밖에 없다.

무슨 고문헌일까? 저 주장은 반절로 한자를 읽는데 우리나라가 가장 정확하다는 주장이며, 그런 주장을 통해 한자를 우리가 만들었다고 우기기 위한 것이다. 중국인을 몽땅 우리민족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에 어떤 논리도 먹히지 않는다. 중국 땅에서 출토되는 갑골문자의 주인공도 우리 민족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나라 말의 어순대로 쓰인 자료가 없다는 말을 하면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우리 말에서 빼먹을 수 없는 <를>과 같은 글자는 한자도 없다. 우리가 만든 한잔데, 우리가 자주 쓰는 발음의 한자가 왜 없는지는 생각이나 해봤을까? 이런 글자가 한 두개가 아니다.

34.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이름은 화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도 토함산의 화산활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현 경주의 토함산은 공교롭게도 화산이 아니다.

토함산 뒤에 함월산이 있다는 건 아는지 모르겠다. 토함산이 화산이라는 것은 삼국사기에 토함산에 구덩이가 생기고 불이 3년간 탔다는 기록(삼국사기 태종무열왕 4년)에 의거해서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화구로 보기에는 너무나 작다는 것을 지적해도 못 알아듣는다. 아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토함산 화산론의 허구: http://orumi.egloos.com/214076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 중국 기록이 대체 어디 있을까? 이런 식의 주장은 정말 무책임한 것이다. 중국의 문헌? 이름조차 대지 않고는 있다고 우기는 것 뿐이다. 한마디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저런 문헌을 가져올 수 있는가?

36.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인 애신각라 는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아래 37번에 나오듯이 애신각라는 여진어로 "금족金族"이라는 뜻이다.

37.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 라고 발음된다.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신라의 왕족은 금(金)씨이다. 청나라의 원래 이름은 금(金)나라 이다.

청은 본래 나라이름을 후금後金이라고 했다. 이것은 본래 아골타가 한 말에서 기인한다. 아골타는 <요>와 원수지간이었다. 요를 멸망시키고자 맹세하면서 요는 빈철=좋은 철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나라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는 아니다.) 그래서 쇠보다 강하고 변하지 않는 금을 자기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금사에 나온다. 그런데 금사 지리지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금이라는 국호는 여진 완안부의 고향인 按出虎水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다. 여진어로 按出虎는 금이라는 뜻이다. 이 물에서 금이 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것으로 나라 이름을 취했다고 한다. 신라 성씨가 거기에 왜 끼겠는가?

38. 임진왜란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조선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다.

그렇다. 그리고 청 태종이 인조에게 삼고구두배를 시킨 뒤에는 자신들이 부모의 나라라고 했다. 옛날 동아시아는 부모-형제의 관계로 나라 관계를 정립했었다. 힘이 약한 쪽이 자식 나라가 되거나 아우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역사학의 기본에 속한다. 즉 기본도 모르는 소리인 것이다.

*옮긴이 주: 금나라에서 고려에게 보낸 전서에서는 "우리는 대방고지를 고향으로 삼고 당신네 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었다" 고 한 전서가 기록돼있다 한다.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렇다. 왕의 출신에 따라 나라의 역사가 바뀐다는 한심한 생각에 기인한 이야기다. 영국 왕실은 독일에서 왔다. 그러면 영국은 독일땅인가? 노르만인 윌리엄이 영국왕이 되면 영국 역사는 노르만의 역사로 변하나?

*욺긴이 주: 여진족을 통합한 자가 고려 출신임을 두고 이야기한다.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원문 제시라도 하면서 이런 주장을 해줬으면 좋겠다.

41.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 건국직전에 여진족이 부족국가 형태일때의 추장이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있다.

39번과 동일한 이야기다.

42. 현재 우리나라 부안 김씨의 족보에 금 태조의 이름이 나와있다.

39번과 동일한 이야기다. 우리나라 족보에는 공자를 조상으로 삼는 사람도 있으며, 중국의 유명 인물을 시조로 삼는 집안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43. 백제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그런 상식으로 생각해도 백제 북쪽은 대방에게 막혀 있어야 한다. 말갈 문제는 복잡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주장으로 백제가 중국 땅에 있었다고 한들 지리 공간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더불어 설명한 것도 본 적이 없다. 고대의 지리 주장은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가 매우 많다. 그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 설명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오늘날 우리처럼 방향을 정확하게 알 수도 없었고,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재야학자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대목만 뽑아내서 자기들 주장에 이용한다. 사료를 자기 목적에 맞춰 취사선택하는 것인데, 결론을 내린 뒤에 취사선택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는 역사학이 금기로 삼는 방법이다.

*옮긴이 주: 온조왕 13년 5월 이후엔 낙랑군과의 불화로 낙랑군이 말갈을 배후에 움직여 백제를 공격했다. 아마 말갈부족이 낙랑과 백제 사이에 자리잡은듯 하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그렇다. 유주자사가 관직이었으니 태수들을 거느린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자들은 이런 것을 증거로 고구려가 유주를 다스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려면 자사라는 관직이 고구려의 관직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머리 속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는 자사라는 관직이 없었다.

*옮긴이 주: 여기에서 거느린 태수중 요동태수가 포함돼있다는걸 주목. 유주자사 진은 유주를 모두 들어 투항하고 댓가로 그 관직을 이어받은듯 하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대개 이 대목은 요서백제설과 연관짓거나, 고구려의 오기라고 본다. 기록이 북쪽에 정통하지 못한 남중국에서 나왔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옮긴이 주: 동성왕대 기사에 "위가 군을 들어 우리를 공격했으나 패한바 되겠다" 고 하였다. 이는 백제가 중국 해안가에 어떤 거점이 있었음을 가리킬수 잇는 근거로 볼수있다.

46.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강역은 동서 너비가 2천여 리, 남북 길이 1천 5백여리, 신라, 백제를 병합하니 고려의 동북(東北)쪽이 넓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송사(宋史),.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들을 보더라도 역사서 원전에 의한 조선의 선조 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은 모두 동서(東西)가 넓고 남북이 짧은 지역을 통치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송인이자 외국(外國)인 서긍이 직접 고려로 가서 보고 온 고려의 통치 영역의 지형구조가 동서(東西)가 넓은 구조였다고 했다. 현재의 한반도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고려도경에는 이렇게 나온다. "옛날에는 그 영토가 동서로는 2천여리, 남북으로는 1,500여리였는데 현재는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동쪽과 북쪽이 약간 넓어졌고 서북쪽은 거란과 접해 있다." 여기서 옛날이라 함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는 <옛날에는>이라는 부분을 똑 떼어놓고 있다. 재야학자들이 사료를 인용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식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식의 주장은 사기치는 것에 불과하다.

47. 몽고에서는 징기츠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고구려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는지 정말 알고 싶다. 이것은 칭기즈칸의 조상인 알랑-고아가 임신을 한 내용이 고주몽의 신화와 동일하다는 점, 그리고 그 부족 이름 중에 "코리"가 들어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오해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칭기즈칸의 어머니와 아내로까지 이야기가 변한 모양이다. 신촌에서 재채기한 사람이 동대문에서는 죽었다고 소문나는 격이다.

48.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명사, 선조실록, 난중일기, 이순신전서, 임진전란사, 은봉야사별록 등) 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명, 상황전개, 위치, 방위, 거리 및 전후사정이 한반도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면서 꼬투리를 하나하나 잡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보면 한국전쟁도 한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49.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에 나오는 지명들은 중국에는 모두 존재한다.

중국 지명도 상당수 한반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50. 난중일기의 원문을 직접 번역한 현역 해군 중령 최두환씨(해군본부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는 난중일기 번역을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지명을 추적하여 임진왜란의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겨놓자 쉽게 풀려나갔다고 한다.

세상에는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 여럿 있는 법이다. 본인이 한문 실력이 안 되는 것을 저렇게 변명하나?

51. 임진왜란 당시 기록을 보면 왜가 침입해오자 조선의 왕은 서쪽으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식적으로는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어느 기록일까?

52. 어제신도비명 에 보면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길로 나눠 서쪽으로 진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반도라면 당연히 북상 하는 것이 옳다.

51번과 동일하다. 그리고 서쪽으로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53. 지도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 등을 두루섭렵하고 있어야 제대로 만들 수있다. 한반도 전역을 3차례 둘러보고 정교한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연하다.

54. 김정호는 일제시대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것 역시 일제시대이다.

그래서?

*옮긴이 주: 이미 대동여지도는 일본군이 청일전쟁때 군사지도로 보급했다.

55. 대동여지도에 씌여있는 글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이 1만 9백리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글옆의 지도, 즉 한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蓋我東邦域 三面際海 一隅連陸 周一萬九百二十里 凡三海沿一百二十八邑 總八千四十三里

이것은 조선을 뺑돌았을 때의 거리라고 명기되어 있다.

56.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쓰고 있다. 한반도에는 낙양이라는 지명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낙양은 중국의 천년고도의 도시이다.

어디에 나온 말인지도 적어놓지 않았다. 이 말도 대동여지도에 적혀 있는 <낙양>이라는 단어 하나를 보고 상상한 내용이다. 한문을 읽을 줄 모르면 떠들지나 말았으면 싶다.

*옮긴이 주: 域民以太平之仁 習俗有箕壇之化 況均四方來廷之道 正亥坐南面之位 實猶周之洛陽 非東西關 三京所可比也 其爲天府金城 誠億萬世無疆之休也 歟嗚呼偉哉

백성은 태평의 인으로써 습속에 기자 단군의 교화 있어 사방에 내정의 도가 고루 미치고, 정해좌 남면지위가 실로 주나라 ((낙양))과 같으니, 동서관 삼경이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천부 금성이 되어 삼가 억만세 무강지휴라, 아아 훌륭하도다. <-가 원문이다.


57. 세스페데스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16c 에 쓴 책에 의하면 꼬라이 또는 꼬리아라는 왕국은 일본에서 10일정도 걸리며 왕국의 끝은 티벳까지 달한다고 씌여있다. 또한 조선의 북쪽에 타타르가 있었는데 그것도 조선땅이다 라고 씌여있다. 타타르는 내몽고에서 활동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조선대륙의 강들은 수량이 풍부한데 강의 폭이 3레구아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세스페데스는 임진왜란 때 종군 신부다. 무슨 책에 나오는 이야긴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대체 이자들은 조상이 남긴 기록은 하나도 믿지 않으면서 어디선가 줏어들었다는 이야기에는 목을 맨다. 저 타타르라는 말은 일본에서 여진족을 부르던 이름에 불과하다.


58. 루이스 프로이스 라는 신부가 쓴 조선의 강역에 대한 글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과 거대한 사막이 존재한다고 씌여있다.

루이스 프로이스도 임진왜란 때 종군한 신부다. 이 사람의 책에는 이렇게 조선이 나온다. <남북의 길이는 2,500리, 동서의 길이는 90리 또는 그 이상이다.> <몇몇 큰 강이 있고 그 중 하나는 하구의 넓이가 10리나 된다. 또한 중국과 인접해 있는 변경에는 통과하기 매우 어려운 넓은 사막이 있다고 한다.> 마술사의 마술처럼 그 본질을 알게 되면 저런 주장은 매우 초라해지는 것이다.

21번 항목에서는 조선 인구가 37만명이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조선 인구를 근거로 조선과 삼국은 같은 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 48 - 58번 주장은 조선도 중국에 있었다는 근거 아래 만들어진 내용이다. 서로 간에 모순되는 주장이 이 글 안에 있다는 이야기다.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부분을 재야학자들끼리 정리 좀 하고 떠들어 주기 바란다.

59.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불태운 우리 역사서가 약 20만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딱 두 권만 남겨두었다.

이것은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다. 일제는 20만권의 사서를 태웠나를 읽어보기 바란다. 더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남겨두었다고 하니 견강부회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고려시대 역사기록으로는 제왕운기와 동국이상국집, 익재난고 등이 남아있고, 조선초기에 제작된 삼국시대 역사서들도 많이 남아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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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가 공개된 지 20년이 넘도록 대학강단의 대다수 학자들은 사료적 신뢰성의 문제를 지적하며 {한단고기}를 상고사연구의 기본사료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한단고기}의 사료채택 여부를 놓고 세 가지 엇갈린 주장으로 분파 되어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단고기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은

 

첫째는 {한단고기}가 위서(僞書)라고 보는 시각으로 대체로 강단사학의 입장입니다.
둘째, {한단고기}가 정통사서라고 보는 견해로 재야사학과 소수의 강단학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셋째,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중도적 입장입니다.
 

이 가운데 {한단고기}에 대해 위서론은 제기하는 역사가들은 {한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에서 모순되는 연대기록과 국제관계 기술이 발견되고, 국가·문화·인류·세계 등 근대적 용어 사용, 그리고 삼신일체론(三神一體論)·천지창조 개념이 기독교 교리와 유사한 점등으로 비추어 기독교 사상에 익숙한 근대의 인물이 위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마디로 한민족사의 역사관의 기반인 신교문화의 정신세계를 전혀 볼 줄 모르는 철학 없는 위인들의 소견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현존자료를 놓고도 그 진실성과 의미를 밝히려 한다기보다는 지엽적 헛점만 찾아 부각시키고 핵심적 내용까지 모두 부정하려드는 것입니다.

이 책을 엮은 운초 계연수 선생이나 감수자 해학 이기 선생, 출간한 이유립 옹 모두 20세기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안 할 때 근대적 언어가 가미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필된 사료를 위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필된 사료를 위작이라고 한다면 지구상에 위작 아닌 사료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일부 술어와 연대상의 고증문제가 제기될 수는 있으나 민족사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시원사와 한민족사의 국통(國統), 한(韓)문화 뿌리의 심층구조와 대세를 보는 데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음을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하의 내용은 몇 년 전 단군학회에서 주최한 1999년 전반기 학술회의에 오간 토론내용과 그 밖의 논고를 중심으로 엮은 것입니다.


1) 위서론


대부분의 우리 역사학자들은 {한단고기}를 위서임을 입증하는 근거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 첫째, {한단고기}가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편찬된 해(1911년)로부터 약 70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점인데 계연수와 이유립이 이 책의 공개를 늦추었던 동기가 충분히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에 의혹이 제기된다는 점입니다.
     

  • 둘째, 이 책에 기록된 관직과 인명, 지명, 용어 등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교육기관인 경당이나 그 관직인 욕살(褥薩) 등이 단군조선 때도 그대로 등장하고 있고 '원시국가', '문화(文化)', '남녀평권(男女平權)', '부권(父權)' 등을 비롯한 근대적 용어가 등장하는 점입니다.
     

  • 셋째, {한단고기}에서 인용한 사서들은 현존하지 않거나 서명(書名)만 남아있으므로 그 이름만 도용해서 위작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 넷째, 위서라고 낙인된 {단기고사}와 그 유사한 내용들이 나타나는 점을 위서론의 증거가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위서론으로 제기된 네 가지 가운데 강단사학이 집중적으로 거론해온 것은 {한단고기}에 등장하는 용어들의 문제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제시해온 것은 [단군세기]의 기록에 청나라 때 사용된 지명<영고탑(寧古塔), 장춘(長春)>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조인성 교수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전설과 관련하여 생긴 지명이므로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성립 이전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기록을 들어 영고탑은 중국 청(淸)나라의 조상 여섯 형제가 이곳 언덕에 자리잡고 산 데서 생긴 지명인데 청나라 때 생긴 이 지명이 청(淸)나라 이전의 단군조선 시대에는 나올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토대로 {한단고기}를 청나라 건국 이후에 조작된 위작으로 단정한 바 있습니다.

또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와 {단군세기}에 나오는 상춘(常春)은 장춘(長春)의 오기(誤寫)로 보고 장춘이 청 가경(嘉慶) 연간(1796∼1820)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므로 {태백일사}와 {단군세기}가 위작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단군세기}의 [서문]에서

'나라가 형(形)이라면 역사는 혼(魂)이다. 형이 혼을 잃고 보존될 수 있는가.'라고 한 부분은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1915)에 나오는 '대개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다. 지금 한국은 형은 허물어졌으나 신만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인가.'라고 한 것과 비슷하며,

또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하는데 성(姓)은 연씨(淵氏)이다. 그 선조는 봉성인(鳳城人)이다. 아버지는 태조(太祚)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고 하며 증조는 광(廣)이라고 한다. 모두가 막리지(莫離支)였다.'라는 기록은 [조대기]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인성 교수는 '자유'와 '태조'는 1923년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묘지(泉南生墓誌)가 발견됨으로써 알려진 것이므로 {태백일사}가 1923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며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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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서론


현재 전하고 있는 {한단고기}는 1949년 이유립이 오형기로 하여금 정서(正書)시킨 것인데, 원본과 인쇄본, 필사본 등이 사라지게 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손을 거치면서, 저술된 시대와 다른 근대적 용어가 사용되고 비전문가로서 역사가에 의하지 않은 인쇄와 필사 등을 통하고 보니 본문(本文)과 주해(註解)가 혼동되어 진실성에 의구심이 확대되고 결국 위서 논쟁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한단고기} 진서론임을 주장해온 송호수, 박성수, 임승국 등은 강단 사학계의 위서론은 {한단고기}에 대한 충분한 내용 검토 없이 몇 개의 자구에만 얽매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반론의 근거들을 제시하였습니다.

특히 위서론에서 제기되어 온 용어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반론하였는데 영고탑의 문제에 대해서는 반론의 근거로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영고탑(寧古塔)에 대한 기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寧古)'이며 자리는 '특(特)'으로 '영고탑(寧古塔)'이 청(淸)나라의 시조와 관련되고 있다는 학설은 와전된 것으로 주장합니다. 즉, 구설(舊說)로서 지명이 아니므로 청나라 시조 운운하는 {만주원류고}의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라는 것이죠. 상춘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춘(常春)이라는 본래의 지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청나라 가경제 때 지명을 장춘으로 바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조대기]에 나오는 '연개소문'의 父인 '太祚'와 조부인 '子遊'의 문제에 대해서는 도리어 이 부분이 {한단고기}가 진서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북경 낙양에는 중국식 발음 표기인 '천(泉)씨'로 되어 있지만, {한단고기}에는 '연씨(淵氏)'로 되어 있고, 선조가 봉성인이라는 사실과 증조부의 이름이 '광(廣)'이라는 사실까지 상세히 나와 있으므로 이것을 다 위작이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강단사학이 지적해온 {한단고기}에 나타나는 근대적 용어의 문제에 대해서,

송호수 박사는 위서론자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문화', '산업' 같은 용어는 {한비자(韓非子)}와 류향(劉向, B.C77∼6)의 {설원(說苑)} 등에도 나오는 용어로 근대 이후에 사용된 단어가 아니라고 반론하였고 이희근은 {한단고기}에 나타나는 근대적 용어 등은 후세에 가필되었다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이 책의 모든 내용이 후세에 창작 조작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고 {한단고기} 서문에서 20세기에 편집했음을 스스로 밝힌 책에 '20세기 용어들이 사용되었다'고 위서라고 비판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며 계연수가 기존 책들을 재편찬할 때에 자신의 지식을 첨가하여 가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를 비난하는 데 쓸 역량을 그 내용의 검토와 분석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의 발전이나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는 데 도움되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또 한 가지, 강단사학이 {한단고기}에서 인용한 사서들이 현존하지 않거나 서명(書名)만 남아있다고 해서 이름만 도용해서 쓴 위작이라고 단정지은 주장에 대해 진서론자들은 일제시대 총독부가 우리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사서들을 압수하여 파기하거나 은닉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성수 교수는 단군학회 1999년 전반기 학술회의 지정토론에서 조선사편수회의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이 태종실록과 세조실록에 나오는 고기(古記)들이 고려왕실의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음을 시인한 바 있다고 밝히고 또 이병도가 쓴 진단학보 창간사에 현재 3종의 고조선비사 이본(異本)이 있다는 기록을 들어 일제 시대 1920년대까지 상고시대를 밝혀줄 고서들이 남아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서론자들 가운데는 독특한 방법으로 {한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발굴해낸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한단고기} 내용에 나오는 기록과 중국사서와 발굴유물을 비교 검토하여 {한단고기}의 신빙성을 높일 수 있는 사실들을 찾아냈다. 이것은 {한단고기}가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날조된 책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문학 교수인 박창범, 라대일은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의 천문기록에 주목하였습니다. 두 문헌에는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현상'이 기록되어 있고 일식 현상이 10건, 큰 썰물이 1건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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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와 단기고사에 기록된 고조선시대의 천문기록】

시기 기록내용
B.C.2183년 2세 단군 부루 58년 日蝕
B.C.1733년 13세 단군 흘달 50년 五星聚婁
B.C.1533년 17세 단군 여을 20년 여름 日蝕
B.C.935년 29세 단군 마휴 9년 南海潮水退三倜
B.C.918년 6세 기자 2년 7월 七月 日蝕
B.C.837년 32세 단군 추밀 13년 3월 三月 日蝕
B.C.765년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 四月 日蝕
B.C.579년 19세 기자 1년 봄 日蝕
B.C.423년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 二月 日蝕
B.C.258년 47세 단군 고열가 48년 10월 十月 朔日 日蝕
B.C.241년 36세 기자 인한 35년 日蝕
 


슈퍼 컴퓨터를 동원한 조사결과 오행성 결집현상 부분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단군세기} 13대 흘달단군 50년, 즉 B.C.1733년에 다섯 개의 별이 누성(婁星) 근처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1년 전인 B.C.1734년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 해 7월 13일 저녁 다섯 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였습니다. B.C.1733년을 기점으로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 밖에 없었죠. 박교수는 1년 정도 오차가 발생한 점에 대해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현재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기록에 대해 누군가 중국문헌의 천문현상이나 혹은 컴퓨터를 동원해 측정한 기록, 또는 무작위로 {단군세기}에 기술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국문헌에 나타난 천문현상의 기록은 훨씬 늦은 기원전 776년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유립이 {한단고기}를 내놓은 1979년 이전에 이러한 기술을 동원하여 위작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작위로 천문기록을 기술했다해도 맞을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결과 0.007%에 불과하므로 거의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은 제29세 마휴 단제 9년(B.C.935년)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있는데 같은 방법으로 조사한 결과 전후 2백 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있었던 것은 4년 후였다. 누군가 작위로 기술해서 맞을 확률은 0.04%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식현상의 기록입니다. 일식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므로 일식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단군조선 때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뿐이므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기록이 주나라 때인 B.C.776년인데 비해, 2세 부루 단군 때인 B.C.2183년의 일식 기록은 중국의 기록보다 무려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 그리고 10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 중 두 개는 해 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창범은 밝혔습니다.



⑶ 중도론

학자들 가운데는 {한단고기}의 진위성을 가리는데 있어서 신중한 태도를 강조하며 일방적인 비판도 추종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한때 조인성 교수와 더불어 {한단고기}의 진실성에 의혹을 제기해왔던 이도학 교수는 {한단고기}를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도 문제가 있음을 시인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단고기}를 전면 부정하기에는 아쉬운 구석이 남아있다. 그 이유는 {한단고기}가운데 사서로서의 성격이 가장 두드러진 {태백일사}에서 발견하게 된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사의 광배명(光背銘)에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은 '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壬子年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卽位年 稱元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불상 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같은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의 묘지(墓誌)에서는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밖에 {태백일사}에는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의 '타이'라고 하는 아유타국(阿踰 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 이는 백제의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시사 받을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한단고기}가 지닌 사료가치도 1911년에 {한단고기}가 편집되었다는 전제하에서만이 가능함을 명백히 해 둔다. {한단고기}는 역사연구의 개별적인 사료로서보다는 그 속에 담긴 사상이나 사학사적인 의의가 더욱 값질 것으로 믿어진다. 각기 다른 4권의 책을 하나로 엮은 {한단고기}는 현존하지 않는 기존 문헌들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다. {한단고기}가 인용하고 있는 문헌들을 통해 우리 나라의 사상사나 사학사적인 체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 일조(一助)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되풀이해서 이야기 하지만, 이것 또한 {한단고기}의 출간 내력이 서지학적인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단고기}를 사료뿐만 아니라 사학사적인 측면에서도 이용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한단고기}에 나타난 이른 바 '대조선주의'가 관념의 산물이었는지의 여부를 앞으로의 고고학적 성과에 물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 고대문화와 밀접히 관련된 중국 요녕성 객좌현(喀左縣)에서 5천년 전의 대형 제단(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 빗살무늬 토기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사실을 부기(附記)하면서 끝맺는다.
 

윤내현 교수는 단군조선의 역대 임금을 논하면서 {한단고기}에 나오는 47대 단군 임금을 소개하고 있는데 역시 서지학적 검토가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중도론적 견해는 {한단고기}가 사료적 진실성이 있다는 점에 심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서지학적 검토 없이 활용하는 데에는 반대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현 역사학계의 주류는 대체로 위서론이거나 유보적 입장이기 때문에 {한단고기}를 토대로 한 역사연구는 제도권 안에서는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 재야학계에서만 진행되고 있는데 과학적 검증 절차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죠.

대체로 중도론적 견해는 {한단고기}가 사료적 진실성이 있다는 점에 심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지학적 검토 없이 활용하는 데에는 반대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단고기}의 진실성 여부를 둘러싼 학계의 쟁점토론의 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한단고기}가 가필된 점은 있을지언정 위서는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졌습니다.
 


얼마 전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된 [한단고기]에서는 진서론을 앞에 소개하고 위서론으로 뒤집는 바람에 시청자들에게 {한단고기}가 위서라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만일 위서론을 먼저 소개하고 진서론으로 {한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입증했다면 결론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한단고기} 내용 중 몇몇 가필된 부분은 대일 항전과정을 치르던 복잡한 상황에서 누군가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또는 이유립 선생이 태전(太田)에 거주하면서 가필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위서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이유립 선생이 단학회의 창시자 이기 선생으로부터 여러 손을 거쳐 전수 받았음은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은 이유립 선생의 부인이 단단학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 역사 찾기를 평생 소원했던 이유립 옹은 생전에 많은 책을 썼으며, {한단고기}와 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한단고기 평주}(이유립의 {한단고기} 번역본)는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한단고기} 번역 출간하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이 {한단고기 평주}는 이유립 선생이 {한단고기}를 풀이해 놓은 것으로, 이것을 책으로 펴내기 직전에 이유립 선생은 운명하셨죠. 1979년에 펴낸 {한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는데 정오표는 책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으로 이 정오표의 글씨는 이유립 선생의 글씨가 분명합니다. 이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 원문을 직접 수정한 흔적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단고기}가 적어도 이전부터 존재했던 책이며 이유립 선생이 {한단고기}를 부분 가필한 점 역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건이 일어난 당대에 저술된 1차 사료가 아니라면 가필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한 문헌사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고대사서를 대표하는 {서경(書經)}, {죽서기년(竹書紀年)}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문헌들이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대량으로 가필이 가해졌음은 이미 청나라 고증가(考證家)에 의해 밝혀진 역사학의 상식이다. 그러나 가필이 좀 있다고 사료적 가치까지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물론 사료는 신빙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
단고기}에 대한 연구에 앞서 서지학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학계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한단고기}의 사료 채택을 무기한 유보시키는 구실로 오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발상은 이미 우리 현대사의 큰 흐름이 되어버린 상고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도외시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서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여 역사학계 스스로가 설자리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

 

 

가림토 문자에 대한 부언

오늘날 우리는 한글 자모 24자가 세종 때 창제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훈민정음의 '正音'에서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은 문자를 반포한 것이라기 보다는 음을 바로 잡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글 자모의 기원이 되는 가림토 문자는 이미 단군 3세 부루 때에 처음 만들어져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 '桓檀古記'나 '대쥬신제국사'등 에서 언급한 된 있다. 실제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7번이나 만주에 왕래하게 한 역사적 사실은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오랑캐 정도로 알고 있는 여진이나 거란 몽고족은 바로 가림토 문자를 사용하던 우리 민족이란 것이다. 중국이란 나라는 이들 우리민족이 지배했을 때 강성한 제국을 유지하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여러 나라로 분열되곤 하였다 한다.

이를 근거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잃은 중국이 분열될 것이라는 예견 또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가림토 문자가 특이한 것은 전세계 어느 나라 문자와도 다른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바로 문자가 대단히 반듯하다는 것이다. 갑골문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원시 한자의 모양도 구불구불 하였던 것이 단군 3세때 처음 만들어진 우리민족(쥬신족)의 가림토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편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쥬신족의 일부가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로 진출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아메리카 인디언의 기원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적 중에서 가림토 문자 'ㄷ' 'ㅁ' 'ㅐ'등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 뿐 아니라 사대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인도대륙의 한 고장에서는 지금 우리가 보아도 뜻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가림토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고 하여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더욱 실제적인 고증을 거치기를 기대한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고대문자 : 배달국(倍達國)과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문자(文字)>



1. 머리말

문자는 역사기록에 대한 도구이지만 우리나라 문자발달사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는 것 같다. 이러한 이유 중의 하나는 과거 당시의 문자 유물이 거의 없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문자에 대한 연구는 역사내용에 대한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훈민정음이란 좋은 문자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는 문자에 대한 연구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동안 연구 또는 발표된 문자에 관한 내용을 모아, 편집하였다. 이러한 자료가 우리나라 고대 문자에 관한 관심을 일깨우는 데 일조를 했으면 한다.

신시고각, 녹도문, 치우전목, 가림토 문자와 가림토문자의 발전형태로 추정되는 왜의 신대문자 등의 순서로 편집하였다.


2. 신시고각(神市古刻)

과거 역사에 대한 기록이 있기 위해서는 문자가 있어야 한다. 고구려의 『유기(留記)』라든지 백제의 『서기(書記)』같은 사서를 문자없이 어떻게 썼을까. 또 문자없이 율령(律令)을 어떻게 반포하였을까. 역서(曆書)는 또 어떻게 적었을까(주1) 고조선의 문화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당연히 문자를 만들어 썼을 것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이동면 낭하리 금산 바위에 고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에 관한 내용이다.





주1)

『단군세기』 13세 단군 흘달 50년 (BC1733년)에 기록된 “오성취루(五星聚婁) : 오성(수성, 금성, 화성, 금성, 토성)이 루 자리로 모이다.”란 천문 사실은 기록된 지 3726년만에 사실로 증명되었다. (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1933, 박창범, 라대일 참조, 다물지 100호 게재)

이런 천문 사실이 역사서에 채록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문자 또는 어떤 전달수단(내용을 모두 외우게 하는 방법으로)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3천7백여년전 (BC1733년) 기록이 사실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이 내용을 담고 있는 「단군세기」나 『환단고기』의 역사 상한(단군왕검은 4천3백년전, 환웅 배달국은 5천9백년전까지)부터 어떠한 문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가. 『환단고기』 해석


환단고기에는 “환웅천왕이 사냥 나왔다가 제(祭)를 삼신(三神)께 드리다.”로 해석되어 있다.(주2)

(주2) 『환단고기』, 임승국 역주, 정신세계사, 242쪽



나. 『조선사연구』 해석


①번 : 사냥개를 형상화한 것이다.

②번 :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②-1번 : 머리(모자)에 꽂은 두 개의 깃(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양식이다.)


②-2번 : 몸을 지탱하여 고삐를 잡은 것이 은밀히 요약됨을 볼 수 있다.
②-3변 : 뒷바퀴(車輪)
②-4번 : 분명치 않지만 소나 말이 수레를 끄는 형상. ②-3번과 ②-4번을 보면 뒤에는 수레바퀴가 있고 앞에는 수레를 끌고 가는 짐승을 표현하여 (움직이는 수레의 골격을) 모두 갖추었다.

③번 : 짐승이 화살을 맞은 형상이다.
③-1번 : (육지) 짐승
③-2번 : 화살촉 두 개가 짐승에 명중한 형상이다.

④-1번 : 두 마리의 새가 앞과 뒤에서 서로 연이어 날아가는 형상이다.
④-2번 : 화살촉. 대개 명중의 요체는 화살촉에 있으므로 화살촉을 그려 화살을 쏜 것을 보인 것이다.

⑤번 : 물고기류를 그린 것이다.
⑤-1번 : 물고기 지느러미
⑤-2번 : 꼬리를 비스듬히 그려 헤엄치는 것을 보임

⑥번 : 깃대위에 기수가 있고, 깃대에 두 개의 깃발을 묶는 것이 나와 있고 말뚝도 있어 그 깃대를 말뚝에 꽂았음을 표시한다.
⑥-1번 : 깃대
⑥-2번 : 旗手
⑥-3번 : 위 깃발(잠깐 말리어 자태가 좋다)


⑥-4번 : 아래 깃발 ( 쫙 펴져 날림)
⑥-5번 : 말뚝


이 모든 것을 종합해 그 배치된 순서에 의해 해석하면,

“ 사냥개를 뒤에 딸리우고 수레를 몰며, 옆으로 짐승을 쏘며 앞으로는 새를 쏘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건너서 기와 깃대를 꽂았으니 기간(旗竿)을 세우는 것은 요컨대 국경을 표시하던 것인데 물고기의 형상을 격지로 놓고 그 너머에 깃발을 세운 형상을 붙인 것을 보면 사냥하던 길에 한 물(경상남도 육지와 남해도 사이에 있는 바닷물)을 건너서 국경을 획정한 어떠한 제왕 대인의 기공명(紀功銘:공을 기록한 것)인 것 같은데 남해의 지형이 正히 육지에 가까운 섬이니 물고기상(像)을 중간에 놓음이 더욱 들어맞는 바이다.”

머리 위의 두 개의 획은 모자에 두 개의 새 깃털을 꼽는 우리나라 풍속과 이상히도 들어맞는다. (고구려 벽화, 백제, 신라 금관) 또한 깃발 끝이 둘,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용강고분 갑사수기도(龍岡古墳 甲士手旗圖)”를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각도 가로쓰기인 데 『속 박물지』에 “ 왜, 진여국, 혹 횡서 혹 좌서(倭, 辰餘國, 或 橫書 惑 左書)”라는 기록이 있다.주3)

주3) 담원 정인보 전집 4. 『조선사연구 하』, 연세대, 1983, 233 ~ 237쪽



다. 현지 안내판


“이 석각은 일명 서시과차(徐市過此:서기가 여기를 지나가다)라 불려지는 평평한 자연암에 새겨진 그림문자를 말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중국 진시황 때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시종인 서시가 동남동녀 500여명을 거느리고 이 곳 금산(錦山)을 찾아와서 한 동안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진시황 때는 이미 한문자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주4) 그 이전의 고문자가 아닐까 추측된다.
 
이 고문자는 동양 最古의 문자로서 금산 부소암의 가로 7m 세로 4m의 평평한 바위에 가로 1m 세로 50Cm 넓이로 새겨져 있다.“


주4)

진시황 때는 사용된 문자는 소전(한자에 가까움)이었으므로 서시가 소전이 아닌 “금산 부소암과 같은 그림문자”를 사용했을 리가 없으며, 안내판 자체도 이를 시인하면서도 유적의 유래를 추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각의 주인공이 “서시”가 아님을 알고서도 굳이 “서시의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닌가 한다.

환단고기에는 “진(秦) 때 서불(徐市)는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 바로 나패(유구국 = 오끼나와)에 이르러 다네시마(種島 = 대우국의 남포섬. 일본)를 거쳐 세포나이까이(일본 내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세(伊勢)는 옛날 서복(徐福)의 무덤이 있었다. 또는 단주(亶洲)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한다.” (임승국 역주, 『환단고기』, 267쪽)

(coo2.net 보충 주)
이주나 단주는 송나라 중국고지도를 보면 대만으로 표시하고 있다
왜는 7세기 이전 양자강 이남에서 활동하였다

3. 녹도문(鹿圖文)과 치우(蚩尤) 투전목(鬪佃目)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우리나라 고대 문자에 관한 간략한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신시에는 산(算)가지가 있고 치우에게는 투전목(鬪佃目)이 있으며 부여에는 서산(書算)이 있었다. 산가지(算目)과 투전목은 아래 그림과 같다. 단군세기 단군 가륵(嘉勒) 2년(BC2181년)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를 지었는 데 이를 가림다(加臨多)라 이르며, 이는 아래 그림과 같다.”

이태백전서 옥진총담에 이르기를 ‘대진국(大震國)에서 당나라에 글을 보낸 것이 있는 데 온 조정에 그것을 해독하는 사람이 없었는 데 이태백이 능히 해독하여 답주(答奏)하였다’ 고 했다.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헌강왕 12년 봄에 北鎭에서 아뢰되 대진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서 나뭇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갔는 데 마침내 그걸 가져다 바쳤다.

목서(木書)로 열다섯 자를 써 놓았으니 그 뜻은 ’보로국이 흑수국 사람과 더불어 신라국을 향하여 모두 사이 좋게 지낸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또 고려 광종 때에 장유(張儒)는 접반사로 이름이 났다.

처음에 난리를 피하여 오월(吳越)에 이르렀더니 월나라에 떠벌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문고 밑바닥에 우리나라의 한송정곡(寒松亭曲)을 물에 띄워 물결에 거슬러 보냈는 데 그들은 그 글을 해득하지 못하였다. 마침 장유를 만나 그 글의 뜻을 공손히 물으니 그가 즉석에서 한시로 풀이하여 말하였다. ‘한송정 달 밝은 밤에 경포호(鏡浦湖)의 물결이 잔잔한 가을, 슬피 울며 오가는 모랫벌의 저 갈매기 소식을 전해오네’ 아마도 거문고 밑바닥에 새겨진 글은 옛 가림토 종류였을 것이다.


원동중 삼성기 주에 이르기를 ‘신한?부여?왜국이 혹 가로쓰기를 하고 혹 새끼 매듭을 쓰고 혹 나무토막을 쓰기도 했는 데 오직 고구려만이 영법(潁法)을 모사(模寫)한 것을 보면 생각건대 틀림없이 환단 상세(上世)에 문자의 모각(摸刻)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최치원이 일찍이 신지의 옛 비석에 새긴 천부경을 구하여 다시 서첩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였다 하니 이것이 곧 낭하리 암각(신시 고각)과 더불어 그 실증의 자취라 하겠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 신시에는 녹서(鹿書)가 주5) 있었고 자부에게는 우서(雨書)가 있었으며 치우에게는 화서(花書)와 투전(鬪佃) 문속(文束)이 있었다 하니 이 모두가 그 남은 흔적이요 복희에게는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게는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 글자들의 백산(白山)?흑수(黑水)?청구(靑邱)?구려(九黎)의 지역에서 두루 쓰이다가 부여 사람 왕문이 비로소 전자(篆字)를 번거롭게 여겨 차츰 그 획을 덜어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적었다.

秦나라 때에 정막(程邈)이 사신을 받들어 조선에 왔다가 한수에서 왕문의 예서법을 얻어서 그 획을 따랐으나 조금 변형(變形)한 것이 지금의 팔분체(八分體)이다. 晉나라 때에 왕차중(王次仲)이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이제 그 글자의 근원을 찾아보면 모두 신시의 남긴 법이요 지금의 한자 또한 그 지류를 계승했음이 분명하다. 주6)

(주5)

신시의 전자 또는 녹도문으로 추정되는 첫 번째 유물은 1942년 발간된 『영변지』에 실린 16자이며 두 번째는 『대배달민족사』에 수록된 평양 법수교의 古碑文이며, 세 번째는 해강 김규진의 『서법진결』에 수록된 녹도문자 11자이며, 네 번째는 창힐의 고향인 중국 백수현 사관촌에 있는 「창성조적서비」에 조각된 녹도문자 28자이며, 다섯 번째는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녹도문자 2자 등이다.

(다물지 편집자 주 :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창힐의 비석에 새겨진 녹도문자이다. 창힐은 황제 헌원의 史官이었으며, 중국에서 문자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다. 물론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창힐이 공공?헌원?대요와 함께 신시 배달국의 자부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다고 되어 있다. 이런 창힐의 비석에 28자의 녹도문자로 추정되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신시 녹도문자의 존재를 방증하는 자료로 추정되는 것이다.)

(주6)
임승국 역주, 『환단고기』「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244 ~ 246쪽

4. 가림토 발전형태


가.  단군세기의 가림토문자 실체 확인


베일에 싸여왔던 고대문자인 가림토문자가 신비를 벗고 있다. 강단학자에게는 <실체없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백안시를 당해왔던 가림토문자, 반면 재야사학자들에게는 고조선 고유의 표음문자로 숭앙돼 왔던 문제의 고대문자 원형(原形)이 초대형과 대형의 금석문 형태로 2종이 동시에 공개(본보 1994년 12월 26일자, 일부지방 27일자 보도)된 것이다.

이 탁본은 우선 재야사학자 김인배-인문 형제가 지난 19일 공개했던 일본 마토노 신사 석비 4基의 고문자의 성격규명 작업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인 문제는 조작이라는 혐의 아래 아예 학문적 분석의 대상에서 제쳐져 있던 가림토 문자에 대한 실체 확인과 연구에 불을 댕길 것이 기대된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성학계와 재야사학계간에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고조선 등 상고사 연구에도 진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가림토 문자는 현재의 한글 자모와 형태가 비슷하고, 표음문자라는 밀접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세종이 독창적으로 창제했다고 알려져 온 훈민정음과 가림토와의 관계 등도 규명이 요구되고 있다.
 
우선 탁본의 솜씨와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만주탁본에 음각된 글자수 7백여개는 종래 수십자이거나 많아야 2백여 글자 안팎에 불과하던 금석문 발견에 비춰 국내 초유의 정보량 수록에 해당한다. 더욱이 이번 탁본은 모서리가 상하로 각각 잘려 있어 본래의 비석은 현 탁본보다 훨씬 컸음이 확실하다. 이 정도 비문이라면, 규모면에서만 봐도 상당한 국가권력이 동원된 기록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주탁본을 가림토 문자의 원형으로 보는 중요한 이유는 최근 들어 사서로서 가치를 부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토 38글자와 글자꼴이 너무도 흡사한데다가 자모의 상당부분이 겹친다는 요소 때문이다.

가림토 문자에 대한 근세적인 언급은 고려시대 이암(李?)의 저서 <단군세기>에 나온다.  제3세 단군 가름이 을보륵에게 정음 38자(상기 그림 참조)를 짓게 했다는 얘기와 함께 구체적인 자모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번 만주 탁본중에는 가림토 문자와 상당부분 자모가 일치한다. 또 가림토 자모와 형태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가림토 문자 음가(音價) 확인에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주는 흥미로운 자모도 있다. 만주 탁본을 본 김씨 형제는 탁본이 등장하는 U는 가림토 39글자의 U와 같은 것이자, 현재 한글의 ㅂ 과 같은 음가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일본의 마토노 신사의 비석에서 보이는 U ㅏ 의 음가를 현재 한글의 [바]로 읽을 경우 문맥이 바로 통한다는 점이다.

만주탁본의 성격 규명에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은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글바위골(경북 경산군 와촌면 강학동) 탁본이다. 기호로서 추상도가 높은 만주 탁본과 비교해 거의 상형문자에 가까운 점이 특징인 이 금석문은 자연상태의 균열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인공적 작업의 결과로 판명됐다.

그러나, 가까운 중세나 현대의 각인 솜씨는 아닌 것으로 보이며, 일본 신사비석은 물론 만주 탁본보다도 시기가 외려 앞서는 관계로 보아 가림토 문자가 정착되기 훨씬 이전 형성기의 금석문으로 보인다.

탁본을 공개한 정도화(鄭道和) 교수와 경상대 여증동(呂增東) 교수(61세, 국문학과)는 “만주와 글바위골의 탁본은 가림토 문자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말했으나 마토노 신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즉, 지난 19일 공개된 마토노 신사의 비문은 李寧熙씨의 견해처럼 神代문자의 한 종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는 얘기다. 정?여교수의 견해는 만주탁본과 일본 마토노 신사의 문자는 연계관계가 없는 각각 독립적인 기호 내지 문자라는 것이다.

반면 김인배, 인문 형제는 새로 공개된 2종의 탁본은 가림토 문자는 물론 일본 마토노 신사의 비문과도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주장, 정?여교수와는 상반된 새로운 시각을 보였다. 이런 가설을 세울 경우 미궁에 빠져 있는 가림토 문자의 음가추적과 해독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 김씨 형제의 적극적 견해다.

이에 따르면 글바위골 탁본은 가림토 문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라면, 만주탁본은 단군세기 38자 정착 직전의 자모꼴을 보여준다. 또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진공속에서 이뤄진 창조]라기 보다는 가림토 문자의 새로운 체계화 작업 결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자모를 늘어놓는 병렬형 글자인 가림토 문자를 자모를 조합시키는 형태로 바꿔 훈민정음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다음 기사 참조)

그렇다면 역시 조합형인 일본 마토노 신사의 비석의 문자란 가림토의 일본적 변형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훈민정음이 가림토의 15세기 한반도의 자체적인 변형이자 체계화라면 마토노 신사의 문자 역사 뿌리를 가림토에 두고 있는 또 다른 일본의 변형이라는 얘기다.

즉 신대문자란 것도 말 그대로 야요이 시대 등 일본의 신화시대 문자란 뜻인 데, 별도의 체계를 갖는 문자라기보다는 가림토 문자의 일본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경우 고조선의 강역이나 문화적 영향력이 만주를 비롯해 한반도와 대마도를 포함한 일본열도에서 광범위하게 퍼졌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김씨 형제는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가림토 문자로 된 금석문이 고형이든, 아니면 보다 발전된 형태이든 간에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일본지역에서 나오고 있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정?여교수도 동의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가림토 문자 금석문은 앞으로 중국지역과 티베트 지역 등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해온 고조선 문화의 강역에서 얼마든지 추가로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결국 이번 탁본의 동시 발견은 가림토 문자의 실체가 분명하다는 증거이자 아직은 미해독인 가림토 문자의 해독 가능성에 한발짝 다가 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가람토문자를 한글의 고문자이자 고조선의 고유문자로 보는 것을 다분히 <심정적인 好古취미>이자 국수주의 발로에 따른 비약이라는 기성학계의 외면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외면 태도는 아무리 가림토 문자이고 고조선이라 해도 보편성의 기반 위에서 거론돼야 한다는 시각 때문이다.

즉, 현재 거론되고 있는 가림토 문자의 경우 추정되는 제정 연대가 최고 기원전 200 내지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나일강 하구에서 18세기말 나폴레옹군에 의해 발견돼 훗날 해독했던 로제타스톤 위의 고대 이집트 문자(디모딕)만 하더라도 기원전 196년경의 문자로 판명이 됐다. 그렇다면 가림토 문자의 실체를 기원전 3000년으로까지 소급하는 것은 인류사의 발전단계와는 커다란 격차를 보이는 독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결국 이런 논란은 만주탁본의 내용이 해독될 경우 폭발적인 반향과 함께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주탁본의 공개에 따라 훈민정음과 가림토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이제 첫발을 딛게 됐다. 지금까지 기성 국문학계의 훈민정음에 대한 접근은 한글의 독창성을 [방어]해야 한다는 다분히 국민정서 차원이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만주 탁본과 글바위골 탁본의 공개는 훈민정음 제정의 모태이자 기반으로서의 가림토문자에 대한 주목의 계기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 경상대 국문학자 여증동교수는 중요한 전거를 들고 있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에 발문을 쓸 때 “ (훈민정음)의 글자꼴은 옛 글자를 모방했다 : 자방고전(字倣古篆)”고 뚜렸한 명문을 남겼다는 점이다.

이 때 [고전(古篆)]이라는 용어를 두고 지금까지 한글학자들은 몽고어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교수는 [전(篆)]이라는 말의 원뜻은 [꼬불꼬불한 글자]인 데 당시 정황으로 보아 일반 민중에게 알려져 있던 문자이고 이번 만주탁본에서 모습을 드러내 가림토를 참조한 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또 성삼문 등의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기초조사 단계에서 당대의 일급 언어학자인 몽고의 황찬을 여러 차례 찾아갔던 일화도 당시 이 지역에 남아있던 가림토 문자를 참조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여교수는 말했다.

이런 가설이 맞을 경우 훈민정음은 단순한 창작이라기 보다는 가림토의 후광(後光)아래 이뤄진 <가장 오래된 글자>중의 하나라는 새로운 특성을 더하게 된다.

연세대 문효근(文孝根)교수는 지난 3월 훈민정음의 창제 당시 중국 후한 때의 한자 해설서이자 언어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텍스트를 참조했다는 설을 발표한 바 있다.

문교수의 주장은 훈민정음이 15세기 당시까지 이뤄진 언어학의 주요성과들을 토대로 창제됐음을 말해주는 근거로 더욱 주목된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의 지평에 가림토 문자가 포함됐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다음은 이번 공개된 경산 글바위꼴 탁본과 만주탁본 및 일본 신대문자 비석의 탁본이다.

<문화일보>. 1994년 12월 28일 조우석 기자










(그림설명)
고(故) 이상백(李相佰) 前 서울대 교수가 1930년 만주지역서 작업한
길이 2미터의 탁본전체 모습
무려 700여자의 정보량을 담고 있으며 탁본상태가 극히 양호하다



나.  《수진전》의 일본 고대문자와 가림토 한글


근년에 《수진전》 원전을 발굴하고 연구에 전념하는 마쓰모토 젠노스케의 저서 《수진전》을 읽었다. 지금까지 다른 학자들의 번역 발표한 《수진전》은 한자본에서 옮긴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수진전》원전의 문자가 특별하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는 데 1992년 어느 날 버릇대로 자다 깨어 머리가 맑아진 시간 문득 《수진전》문자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다른 모든 일본 고대 문자가 한글의 모방 내지 영향인 데, 어찌하여《수진전》문자만이 유독 그렇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그 문자의 진상을 깨우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한 결과, 그 문자의 진상을 단시일에 알아냈다. 그것은 한글의 내용 그대로이며 원시 한글인 가림토에서 간 것이다. 나는 언어학자도 고대 문자 연구가도 아니지만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이나 아시라아, 수메르 등의 고대법을 비교?연구하여 얻은 문자 상식이 있었다. (중략)...
 

일본에는 한자에서 차용한 글자인 가다가나와 히라가나 외에 신자(神字)니 의자(疑字, 의심스러운 글자)니 하는 고대 문자가 31종이나 있다. 일본의 고대 문자에 대한 마쓰모토의 주장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일본말에는 순수한 화어(和語)와 한자에 맞춘 것이 있는 데 한자에 맞춘 것 중에는 무리하게 맞춘 것도 있다.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의 일본 상고 문자연구소 《신자일본문(神字日本文)》에 《수진전》문자를 포함해 31종의 신대(神代)문자가 실려 있다.
 
일본학자들에 의하면 소위 일본 신자(神字) 31종 가운데 《다케우치 문서》와 《상기》문자는 같은 도요쿠니(豊國) 문자를 쓰고 있는 데 이는 저급한 것이라고 한다. 신자의 대다수는 조선문자를 약간 고친 것이라고 해서 일찍부터 부정되었다가 최근 고대사 연구 물결을 타고 재등장하는 듯하다.

 
마쓰모토는 《수진전》문자가 《일본서기》《고사기》 이전의 가장 완전한 일본 고유 문자라고 주장한다. 《수진전》문자는 한눈으로도 그 외양이 한글과 아주 다르다. 과연 특이한 모양이고 또 가장 고급의 일본 고대 글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내가 알아본 바 《수진전》문자의 모양은 한글과 다르다 해도 그 내용은 한글 그대로인 것이다. 시가(詩歌)로 엮어진 《수진전》의 문자를 ‘아 이 우 에 오’로 추려놓고 보면 일본말에 소용될 것만을 골라 ㅏ ㅣ ㅜ ㅔ ㅗ 의 모음과 ㅇ ㄱ ㅅ ㄷ ㄴ ㄹ ...... 의 자음을 맞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글자의 모양만 보면 한글과 아주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실속은 자음과 모음으로 된 한글 그대로인 것이다. 모음 안에 자음을 집어넣으면 글자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일본의 고대 문자 중 모양이 한글과 가장 유사한 것 한 종류와 가장 특이한 《수진전》문자 중 내가 일본 가나의 음순으로 추려낸 것을 소개한다. 나는 밤잠도 못 자고 《수진전》문자의 진상을 연구하느라 애썼지만, 독자들은 내가 제시한 <1> <2>을 보면 당장에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독자가 알기 쉽도록 한글의 자음(초성), 모음(중성), 받침(종성), 합자(모듬 글자)와 비교한 《수진전》문자를 <3>으로 들겠다. 일본에서 필요한 것만을 한글에서 뽑아서 그 글자의 모양을 아주 다르게 만든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한글에서 간 일본말 이두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일본 임금이 ‘哀號’하면서 곡했다”는 고대 기록에서 애호는 ‘아이고(アイコ)’로 발음한다. 이 세상에서 ‘아이고’하면서 곡하는 종족은 한국인뿐이다. ‘이렇게 해놓고 어찌 살라고’란 뜻의 ‘타마호(우치사오, ウチサオ)’, ‘사등농(사라고, サラコ)’도 있다.

『인간단군을 찾아서』, 최태영, 학고재, 2000, 278 ~ 282쪽






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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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바닷가 작은 마을에 마음씨 곱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꺼비 한 마리가 이 아가씨를 찾아와 결혼해달라고 졸랐습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반대했지만 이 아가씨, 두꺼비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결혼한 바로 그 날 밤에 신랑은 두꺼비 허물을 벗고
얼굴은 해사하고 몸은 커서 씩씩한 사나이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아가씨는 이 두꺼비 신랑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아가씨를 두꺼비에게 빼앗긴 동네 총각들이 두꺼비 신랑을 자꾸 못 살게
구는 겁니다. 동네 총각들은 두꺼비 신랑을 혼내주려고 쉬운 물고기잡이보다는 힘든 사냥내기를 해서 두꺼비 신랑의 콧대를 꺾으려 했습니다. 얼굴도
하얗고 말도 없는 녀석이 덩치만 컸지 무슨 사냥을 하겠냐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가까운 야산에서 사냥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꺼비 신랑, 말에 오르자마자 활을 날려서 여우·노루·오소리를 닥치는 대로 잡아냅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저렇게 날렵한 사냥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날 이후 두꺼비 신랑은 이 마을의 스타(star)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어촌마을이면 흔히 나타나는 '두꺼비 신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미술 해부학의 전문가인 조용진 교수는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석합니다. 두꺼비는 북방계 사람들이 남방으로 오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피부 질환을 상징한다는 것이죠. 피부병이 나으니 흰 얼굴이 나타나고 체격이 크니 씩씩한 남자로 보일 수밖에요.  

  사냥 일도 마찬가지죠. 남방계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는 일이 쉬운데, 그래서 남방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사냥은 매우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두꺼비 신랑에게는 그것이 북방에 살 때의 본업이었죠. 그러니 쉬울 수밖에요.  

  결국 이 같은 경로를 거쳐서 북방계 두꺼비 신랑들이 힘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용진 교수는 조선시대까지도 우리나라의 임금들의 얼굴은
북방계의 형상을 하고 있고 북방계의 관상을 좋은 관상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마가 높으면(북방계) 관운(官運)이 있다거나 이마가
좁으면(남방계) 부모덕 보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피부가 검다든가 쌍꺼풀이 있다든가 눈이 크면(남방계) 천한 관상이라고 하는 식이죠.

  

  (1) 신라,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우리의 뿌리와 관련하여 특이한 나라 중의 하나가 신라입니다. 부여 - 고구려 - 백제 - 일본 등은 여러 가지의 기록들이나 사료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신라는 좀 다릅니다. 신라(新羅)의 기원이 어딘지를 알기도 어렵고 이들의 고분들 속에서는 기원이 불투명한 유목민
유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신라의 유물은 로마나 유럽에서 출몰한 훈족의 유물과 매우 유사하여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라에 결국은 병합되었지만 한반도 남단의 가야고분에서는 순장된 사람의 흔적도 있고 말들도 묻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유목민들의 매장풍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경상도 출토 유물 중에는 기마부족이 사용하던 마구가 고구려벽화의 실물과 유사한 경우가
있었죠.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동안 많은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도학 교수는 4세기 경 고구려군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벌했을 때 울주·동래 등에서 6세기 중반까지, 일부 지역에서는 장기간 상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이도학, 「고구려의 낙동강유역진출과 신라·가야경영」 『국학연구』 1988). 그리고 신라의 김씨 왕실이 시베리아의
기마민족에서 유래하였다거나 선비의 한 부족인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모용황의 군대 중의 일부가 남하하여 신라를 지배하고 가야 지역까지
점령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비슷한 얘기지만 금관가야 건국도 흉노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일단 신라에 대해서 좀 더 소상하게 알아봅시다.

  

  『삼국사기』에 신라를 구성한 6부족은 고조선(古朝鮮)의 유민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始祖). 이 부족 가운데 고허촌장(高墟村長
: 후일 최씨)이 숲에서 말울음 소리를 듣고 들어가 보니 말은 간 데 없고 큰 알이 있어 그 알을 깨어보니 어린 아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더니 훌륭하게 성장하여 신라의 시조(박혁거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기본적으로 신라는 외래 유이민이 건설한 나라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요동지역과 한반도 북부에서 이주한 세력이 신라를
구성했을 것이라는 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력은 부여계의 이동만큼 조직적이지 못하고 고조선이 쇠망한 이후 그 유이민들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일종의 부족공동체 사회로 판단됩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고조선의 멸망이 B. C. 108년 정도이고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건국이 B. C. 57년경(漢 宣帝 五鳳元年)으로 돼
있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는 합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신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부여계나 고구려계의 국가보다는 고대국가 형성이 다소
느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고조선의 직계 왕가를 주축으로 그 주류세력이 남하했다기보다는 여러 호족들이 전란을 피해 남하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조 박혁거세라는 분도 신화(말과 알, 버드나무[楊山])로 판단해 보면 역시 외부(북방)에서 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잠시 박혁거세(朴赫居世)라는 말을 한번 봅시다. 박(朴)은 '밝다[明, 또는 東]'는 말을 한자의 음을 빌려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혁(赫)이라는 말도 역시 '밝다'는 말인데 이 말은 한자의 뜻을 빌려서 쓴 말입니다. 이병도 박사는 거세(居世)는 거서간(居西干)의 거서(居西)와
같으며 이 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나는 거슬감(居瑟邯 : 여기서 邯도 干의 뜻)의 거슬(居瑟)과도 같다고 합니다. 이전에 우리가 본
건길지(鞬吉支)의 길지(吉支)와 일본에서 사용하는 고니키시(コニキシ : 鞬吉支)의 키시(キシ)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합니다[이병도, 譯註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 2001) 1쪽]. 따라서 박혁거세라는 말은 동명성왕(東明聖王)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박[東 : 밝]혁[明]거세[聖王]이라는
말이지요.  

  부지영 선생(『일본, 또 하나의 한국』저자)은 박혁거세를 '비치세'로 보고 있습니다. 즉 한국이나 일본이나 당시의 한자말을 읽는 방식은
이두식으로 읽었는데 이 점은 일본편에서 이미 일부를 보셨을 것으로 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박혁거세 역시 이두식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박(밝다) + 혁(빛) + 거세(居世)'에서 거세(居世)에서 거(居)가 일본 말로는 '이루(いる)'이므로 居는 '이'이고 世는 그대로 우리말로
세라는 것이죠. 그래서 '赫(빛) + 居(이) + 世(세)'로 '비치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매우 타당한 분석입니다.

  

  제가 보기엔 '비치세'의 의미를 확장하여 '(세상을) 밝히세'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차이가 없는 말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박혁거세는
세상을 밝히는 임금[東明聖王]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따라서 부여계의 군주 이름과도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라 역시 쥬신의
성격을 가진 나라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고대의 한문을 읽는 방식은 일본어의 발음과 대조하여 추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참고로 19세기 이전까지 박혁거세왕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일본에는 2천 7백여 곳이 있었고 아직도 2천여 곳이 있다고 합니다[부지영, 『일본,
또 하나의 한국』(한송 : 1998) 75쪽].  

  신라 초기의 국호는 서나벌(徐那伐)인데 이병도 박사는 서(徐)는 '솟다[高, 또는 上]', 나(那)는 '나라(國)', 벌(伐)은
'성(城)', 또는 도시(capital)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결국 서나벌은 '높은 나라의 도읍', 또는 '해가 솟는 나라의 도읍(the
capital of rising sun)'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서 오늘의 서울(Seoul)이 나타난 것이지요. 참고로 나라[國]의 고어로
사용된 한자어는 나(那)·라(羅)·야(耶)·로(盧) 등이고 도읍지를 의미하는 한자어는 불(弗)·화(火)·비리(卑離)·부리(夫里) 등입니다[이병도
,譯註 『삼국사기』상 1쪽]. 그러니까 부여와 고구려는 불[火 : 해가 타오르는 모습을 상징]을 신라는 태양[日 :히···]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신라는 그 세력이 미약하여 여러 소국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이익 선생이 쓴 글 가운데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속국이었다(『성호선생전집』46)."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이 때의 진한과 변한은 신라와 일치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당시에
신라는 남부여(백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대단히 허약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 남부는 마한 왕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진(秦)나라 말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마한왕은 그들이 진한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기록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246) 초기에는 고구려가 잘 막아내었으나
수도가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를 받아 고구려의 지도부가 남으로 피난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당시 옥저로 달아났던 일부 고구려인이 남하하여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신라 김씨들의 특유한 묘제(墓制)로 이해되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등장하는 것도 이 사건 및
미추왕(262~284)의 등장과 모두 시기가 비슷하여 어떤 큰 변화가 신라사회에 나타났다는 것이지요[정경희, 『한국 고대사회 문화연구』(일지사
: 1990)]. [그림 ①] 제 2 차 요동전쟁(고구려-위나라 전쟁)

    



시기는 석씨에서 김씨로 왕위가 바뀌는 시기인데 신라의 외교노선이 친백제(親百濟 : 친부여)에서 친고구려(親高句麗)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영락대제(광개토대왕)의 비문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영락대제 비문 가운데 신라와 관련된 부분만을
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 영락 9년(399) …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여 태왕이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이에 대해 대비를 시켰다.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수많은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구려) 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고 이에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더라도 신라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영락대제 시기에는 사실상의 속국, 또는 고구려의 보호국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신라의 왕계가 관구검의 침입으로 남하한 고구려의 장수들이나 호족 세력일까 하는 것은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이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2) 금관의 나라, 신라  

  초기 신라에 대한 기록은 많이 부족한 편이라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는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 기원전 57년경에 건국한 다음 기원후 1~2세기 경 지금의 경북지방과 경남일대를 무력으로 정복함으로써
영토를 넓혀갔다고 합니다. 이 같은 기록들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중국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는 신라가 진한(辰韓)을 구성한 12국 가운데 작은 나라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세기 초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대외적인 성장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고구려의 통제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 후 6세기에 들면서
우경(牛耕)이 실시되어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불교가 공인(527)됨으로써 새로운 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입니다. 이 책에서 "신라는 눈부신 황금의 나라(『日本書紀』卷八 「仲哀紀」)"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러나 『삼국지』의 기록에는 "(삼한의 생활상을 보면) 구슬을 귀하게 여기고 금·은과 비단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三國志』魏書 東夷)."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책 『삼국지』에서 고구려는 공식적인 복장에서는 금·은으로 장식하고 부여의 경우에도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초기의 신라와 중기 이후의 신라에는 상당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고구려계가 신라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이라고 봐야할까요? 앞서 본
영락대제의 비문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정치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분명한데 금(gold) 문화에 관한 한, 신라는 고구려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도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지는 않고
정치적으로만 영향을 받은 듯 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라가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크게 의존하던 시기 이전에 이미 세련된 '황금(黃金)의
문화'가 있었다는 말인데요.  

  그런데 이 금(金) 문화라는 것은 바로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유목민들의 대표적인 브랜드(상표)가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보면 금관은 마립간 시대(417~514), 즉 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에 집중적으로 출토된다고 합니다[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 2004) 88쪽]. 그러니까 5세기를 전후로 해서 신라의 지배층의 변화가 있었고 그 지배층이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유난스러울 만큼 금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금관(金冠)은 모두 합하여 봐도 10여 점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금관이 무려 8점이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출토된
금관총의 금관을 비롯, 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등 출토지가 분명한 것과 나머지 3개는 경주 교동에서 도굴되어 압수된 교동금관, 호암
미술관 소장 가야금관, 도쿄의 오쿠라 컬렉션(도굴품) 등이 있습니다[조유전·이기환, 앞의 책, 88쪽].  

  원래 금으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은 고대 유목민족 사이에 크게 유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흉노족이나 선비족, 거란족의 무덤에서 황금 유물, 또는
머리장식이나 금관 등이 자주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신라나 가야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금관은 알타이 문화권인
만주·몽골·알타이·카자흐스탄 등의 지역에서 금으로 장식한 모자가 많이 발견되지만 인디아·태국·인도네시아·라오스·베트남 등과 같은 동남아시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김병모,『금관의 비밀』(푸른 역사 : 1998)].

    아시다시피 신라의 금관(金冠)은 나무와 사슴의 뿔 모양처럼 생겼는데 흑해 북쪽 해안 지방인 사르마트(Sarmat)에서 발견된 금관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사르마트 금관은 그리스풍의 옷을 입은 여인이 있고 가운데 가장 큰 나무를 중심으로 생명수를 표시하는 나무와 사슴 등이 만들어져 있고
신라의 금관처럼 수많은 나뭇잎이 매달려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라 금관을 가장 직설적으로 묘사한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또 신라 금관과 유사한 다른 것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Tillya Tepe)에서 발견된 금관을 들 수 있겠습니다. 대체로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로 나무 장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금테두리를 금꽃(金花) 스무 송이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높이는 13cm 정도로 작은 것이라 여성용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내몽골의 아로시등(阿魯柴登) 유적에서 출토된 금관은 독수리가 날개를 편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금관은 신라의 금관과는 다른 형태이지만
독수리를 숭상하는 일면을 볼 수 있으므로 전통적인 쥬신의 토템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신라 금관 가운데서도 새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뒤에 설명). 


 




  그리고 고구려와 기원이 동일한 탁발선비족(타브가치 : 북위 건설)의 금관 장식은 신라의 금관과 이미지가 대단히 유사합니다. 타브가치는
몽골쥬신 계열로 그들의 유적지인 서하자향(西河子鄕)에서 출토된 금관 장식은 소머리, 또는 사슴의 머리 위에 나뭇가지의 형상을 한 것입니다. 이
장식은 신라 금관과 같이 샤먼적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고구려의 경우 평양의 청암리에서 출토된 금동관(金銅冠)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속에 인동초가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한상 교수(동양대)에 따르면 신라 금관의 기원이 정확히 어딘지 알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신라와 가까운 고구려만 해도 금동관에 신라 금관의 특징인 곡옥이나 세움 장식이 없죠. 다만 선비족들의 금제 관식이 금이라는 재질과 나뭇가지를
머리에 장식한다는 측면에서 그 유사점을 찾아서 최병현 교수(숭실대)는 신라의 마립간 시대에 기마민족들에 의한 왕족 교체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신라시대의 김씨 왕족들이 등장하던 4세기 중반에서 6세기까지의 왕호는 마립간(麻立干)인데 이 말은 마루(宗) + 칸(王)의 의미로
추정되며 여러 부족 가운데 중심이 되는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신라의 금관은 이러한 금관들의 영향을 모두 받은 듯하면서도 각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시킨 듯합니다.  

  신라 금관은 스키타이 문화에도 나타나는 녹각수지형(鹿角樹枝形 : 사슴뿔 모양)과는 달리 사슴의 뿔과 나무를 동시에 형상화한 느낌이 있습니다.
요즘 고고학자들은 신라 금관의 형식을 직각수지형(直角樹枝形 : 나무 가지 모양)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단순히 나무만을
형상화했다기 보다는 순록의 뿔도 함께 형상화하여 우두머리[長]를 동시에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금관은 수목숭배(樹木崇拜)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타브가치의 금관 장식[서하자향(西河子鄕) 출토]의 경우를 봐도 사슴의 뿔과 나무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유물에서 사슴의 뿔 가운데 나무가 있죠? 그런데 신라의 금관도 같은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신라 금관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윗부분은 나무와 사슴의 뿔을 추상화 시켰고 금관을 지탱하는 관(冠)은 사르마트와 틸리아테페의 형태와
유사하고 금관을 고정하는 것은 고구려의 금관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선비족들의 보요관도 추상화되어 나무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베리아의
은제관(러시아 알렉산드로플 출토)과 수목형 금관(러시아 돈강의 노보체르카스트 출토)과도 유사한 특징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금관에 붙어있는 둥근
잎새 모양의 구슬을 꿴 장식들[영락(瓔珞)]도 동아시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의 흔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서봉총(瑞鳳塚)은 조생부인(鳥生夫人)의 무덤으로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된 금관이 출토되었고 천마총과 금관총, 황남총의 금관
장식도 새의 날개 모양이 있습니다. 새는 쥬신의 대표적인 표상이기도 합니다. 이 조생부인은 신라 왕통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조생부인은
지증왕의 어머님으로 눌지 마립간의 따님이자 자비마립간의 동생이며, 소지왕의 고모님으로 전문가들에 따르면 성골(聖骨) 중의 성골(聖骨)이라고
합니다(혹시 샤먼은 아니었을까요?).  

  신라 금관은 하나같이 많은 곡옥(曲玉)들이 있는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것은 태아(胎兒)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명과 다산(多産)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이 곡옥은 알타이의 파지리크 고분에서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결국 신라 금관들이 만들어진 의도와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신라
금관이 출토되고 있는 적석목곽분과 함께 신라가 쥬신의 선주민(흉노)들의 후예들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금관은 중앙아시아나 알타이 몽골 만주 지역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모두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
⑨]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신라 금관의 모습은 가야의 금관과도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가야와 신라는 같은 계열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야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전기가야 토기문화와 신라의 4세기
이전 토기문화가 대체로 일치하며, 철기문화의 특징도 두 지역이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경상 남·북도지역의 진한과 변한에
문화의 공통적인 기반이 존재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쥬신족들은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나무와 새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쥬신의 문양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나무와 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얘기했지만 좀 다른 각도에서 간략히 짚어보고 넘어갑시다.  

  첫째, 나무 이야기입니다. 쥬신의 나무와 관련하여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는 학자가 있었죠? 바로 존 코벨 선생입니다.  

  존 코벨 선생은 북방 유목민들은 순록 사슴과 우주 수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즉 신화에 따르면, 순록의 황금 뿔 때문에
해[太陽]가 빛나고 순록사슴 그 자체가 햇빛의 운행과정을 나타낸다는 말이죠. 그리고 금관에 있는 나무는 영험한 힘을 가진 나무로 하늘[天]을
향해 뻗어 오른 나무를 말하는데 존 코벨 선생은 이들 나무가 북방지역에 많은 흰 자작나무라고 말합니다[존 카터 코벨,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학고재 : 1999), 150~155쪽.].  

  그런데 경주나 가야 지역은 흰 자작나무가 자랄만한 곳은 아니죠. 그런데 그 금관에는 이 흰 자작나무의 장식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로
그것이 이들이 북방에 살았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자작나무는 타이가 지대나 그 주변지역에서 신목으로 숭배되는 나무라고
합니다(소나무나 상수리나무는 흑룡강 하류 지역과 한반도, 버드나무는 초원지대나 초원과 삼림이 혼재된 지역에서 주로 숭배된다고 합니다).  

  존 코벨 선생은 신라의 문화와 시베리아의 문화는 비슷한 점이 많으며, 금관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금관은 샤머니즘의 흔적, 즉
무속 예술품이라는 것입니다. 금관에서 나는 경이로운 소리가 악을 물리치는 힘의 상징이며 금관을 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옥과 금판으로 된 수백
개의 장식이 미세한 움직임과 반짝이는 빛을 냅니다.  

  둘째, 새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새가 등장합니다. 유네스코 국제 박물관 협의회(ICOM)의
서울 총회 기념로고(2004)는 솟대였지요. 이것은 바로 일본의 '도리'와 같은 형태입니다. 우리 눈에 가장 익숙한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삼족오(三足烏)]일 것입니다.


  

  김병모 교수는 카자흐족의 민속신앙에 위대한 샤먼의 탄생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기를 낳고 싶은 여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다. 그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되면 새들이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그러면 그 여인이 잉태한다. 엑스터시 과정이다. 그런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김병모, 「고고학
여행」)."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의 알마타 동쪽 이시크(Issyk) 고분(B. C. 3세기경)에서 발견된 여인은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다고 합니다.『삼국지』에는 "변진(弁辰)에서 대가(大家)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三國志』「魏書」東夷傳)."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의미겠죠. 경주 서봉총(瑞鳳塚) 신라 금관도
머리 부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데 이 또한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알은 태양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새와 태양에서 알이 나오는 것이라는 말도 되지요. 그렇다면
부여·고구려·신라·가야 등의 신화에서 나타나는 알의 이미지는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쥬신의 종교 및 정치적 수장인 샤먼의 지팡이의 머리에 달린 장식은 바로 솟대라는 것이지요. 솟대 위의 새는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매개자라는 애깁니다.

  

  


신라의 금관은 바로 신라인들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고구려나 백제 등 쥬신의 어떤 나라보다도 알타이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라의 무덤 양식도 이 점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미추왕 이후 신라 김씨 왕족들의 무덤[천마총(天馬冢)이라든가 황남대총(皇南大冢) 등]은
전형적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인데 이러한 양식은 알타이를 역사적 무대로 삼았던 이른바 흉노의 무덤과 흡사하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형태의
목곽분이 이전에서부터 있어온 것이 아니라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고 합니다. 금관의 제작 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김(金)씨계
인물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최병현,『新羅古墳硏究』(일지사
: 1988)]"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사마염이 건국한 진(晋)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약화되면서 쥬신족들이 대규모로 남진해 오고(5호16국
시대), 그들의 일부가 경주까지 내려와 김씨(알타이, 또는 아이신) 왕조를 세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신라는 흉노계로, 오르도스 철기 문화의
주인공들이 한(漢)의 팽창으로 일부는 유럽 쪽으로 가서 헝가리 건국의 주체가 되고 동쪽으로 이동해가서 한반도와 일본의 건국 주체가 되었다고
합니다[이종선,『古新羅 王陵硏究』(학연문화사)].  

  글쎄요. 이런 분석들은 과연 사실일까요? 제가 보기엔 4세기에 벼락처럼 나타난 것은 아닌 듯한데요. 일단 이 의문들을 푸는 문제는 뒤로
미루고 계속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를 들어보지요.

  

  이종호 박사는 신라와 흉노의 유물은 서유럽 훈족에게서 발견되는 유물들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독일 텔레비전 방송에
소개되었습니다[이종호,「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韓民族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백산학보』66호].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인 PD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가 한민족과 훈족의 직접적인 연계 증거로 제시한 것은 엉뚱하게도 청동으로 된 솥입니다.  

  청동 솥은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인데 가야 지방에서 발견되고 그 형태가 신라의 유물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지요. 훈족은 이동식
취사도구인 청동 솥을 말의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재미있는 것은 신라의 기마인물상(국보 91호)이 바로 그 형태라는 것입니다(요즘으로 치면 차 뒤
트렁크에다 버너와 코펠을 싣고 다니는 것이지요). 청동 솥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도 많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증거를 들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신라인들이 서유럽까지 갔다기보다는 흉노의 일부는 서유럽 쪽으로 가고 일부는
남진하여 경주·가야 등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요? 흉노가 한반도의 남단인 신라로 들어 왔다고요?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둘러싸인 마치 섬과도 같은 지역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의문들이 최근 들어서 많이 풀리고 있습니다.  

  최근 신라 건국의 비밀을 풀기 위한 많은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바로 사천왕사에 있는 문무대왕의
능비(陵碑)에 있는 비문의 내용입니다.


  

  (4) 흉노의 나라, 신라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이란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말이 신라와 흉노와의 연계성을 밝혀주는 가장 큰
단서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투후제천((秺侯祭天)이라는 말은 흉노 단군(제사장) 출신의 제후인 김일제(金日磾)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의
비문은 "김일제(金日磾) 이후 7대가 흘렀다"는 말입니다. 이 비문에서 문무왕은 자신의 선조가 이 김일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죠.
조금 구체적으로 한번 봅시다.  

  신라계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金閼智)'라고 하고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를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금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도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김일제라는 것[文定昌, 『가야사』(백문당 : 1978)]인데
이 김일제라는 분이 바로 (김수로와?) 김알지의 선조라는 얘깁니다.  

  한무제(漢武帝) 당시 곽거병(霍去病·140∼117 BC)은 흉노 정벌에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金日磾)와 그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 휴도왕의 아들을 한무제가 특히 아껴서 김씨 성을 하사하고 측근에 둡니다. 한무제는 어린 시절을 외롭고 불우하게 보낸
사람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김일제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데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생명의 은인(한무제 암살을 막음)이기도 하니 특히 김일제를 총애한
듯합니다.

    당시 휴도왕(김일제의 아버지)은 돈황에 가까운 깐수성 지역을 다스린 사람이었는데 이웃 왕이었던 곤사왕(昆邪王)의 계략에 빠져 죽고
김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힙니다. 이 김일제의 일대기는 『한서(漢書)』에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漢書』金日磾傳 ).  

  현재 김일제의 묘소는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한무제의 능(무릉 : 茂陵) 가까이에 초라히 묻혀있다고 합니다[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 김일제에 대해 중국 측에서는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秺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라고 합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김씨 시조」『신동아』 1999년 8월호]. 여기서 말하는 투후(秺侯)는
제후국의 왕이라고 합니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의 후손이다(秺侯祭天之胤)"이라고 합니다. 『한서(漢書)』에는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祭天]한 까닭에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서 좀 이상한 대목들이 있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김알지(金閼智), 즉 경주 김씨의 시조와 유사한 이름이
나오지요? 무언가 관계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김일제라는 이름이 문무대왕(661~681)의 선조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여기서 잠시 김일제의 후손들을 한번 알아봅시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한나라 원제(元帝) 초에 김일제의 차남인 김건(金建)의 손자 김당(金當)을
투후로 봉하여 김일제의 뒤를 잇게 했고 다시 김당의 아들인 김성(金星)이 투후를 계승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문무왕 선조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문무왕의 비(국립 경주박물관 소재)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합시다.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靈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이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하였다. 큰 마루(宗)가 정해지고 그 갈래가 형성되어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제 7대를 전하고 있다. 15대 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 진백(秦伯)의 바탕이 되는 덕이 다시 일어났다 … 장례(葬事)는 간소하게 하여 서역식으로 다비하고
동쪽 바다에 띄우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너희 나라를 지킬 것이니 …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시니 대를 잇는 (새)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도다. 우러나는 효성과 우애는 끝이 없었네."

  

  김대성 선생(한국문자학회 부회장)에 따르면, 위의 문무왕의 비문에 나타난 문무왕 선조에 대한 기록인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 B. 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 B. 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 B. C. 200년대), ④ 투후(秺侯 : B. 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 B. 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 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 661~681)
등에서, ②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을 말하고,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피난한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라는
것입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金氏始祖」『신동아』 1999년 8월호].  

  그런데 김일제 이후 문무왕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의 터울이 놓여있지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과연 여기서 말하는 성한왕(星漢王)이
바로 김알지(金閼智)였을까요? 이 점들을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한(漢)나라는 당시의 이름 높은 신하였던 왕망(王莽 : B. C. 45∼23)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신(新)나라(8~23)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망은 바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 : 김성의 아버지)의 이모부였습니다.  

  한나라 당시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선양(禪讓 : 평화적 정권교체)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왕망은 쉽게 정권을 장악했지만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고대 유교에 치우친 정책을 시행하여 결국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후 왕망은 중국사의 대표적인 역적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니 왕망의 외가(外家)였던 김일제 집안은 이제 중원에서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죠. 아마 이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이후 이들 김일제의 후손들이 비교적 안전한 한반도의 남부로 피신했다는 말입니다. 연구자들은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부 김해, 일본의 규슈 등지에 이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문제는 성한왕이 김알지인가 하는 점으로 돌아가 보면 김알지라는 이름 자체가 김일제의 어머니(알지)와 유사한데다 대개 시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다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김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김일제와 김윤)을 잘 가르쳐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는데 김일제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고 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이제 한반도의 김알지가 출현하는 장면을 봅시다. 참고로 알지의 지(智)나 씨(氏)는 모두 음을 빌려
쓴 말이고 발음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알지를 발견한 사람은 탈해 이사금(57~80)인데 『삼국사기』에 나타난 이 사건의 대목이 좀 이상합니다. 한번 보시죠.

    "(65년) 왕이 금성 서편 시림(始林)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새벽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 금궤(金櫃)가 있어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총명하여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고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고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三國史記』新羅本紀 脫解尼師今)."

  

  위의 내용을 보면 금궤에서 아기가 나오니 자기의 아들로 삼고 나중에 나라 이름까지도 바꾼다? 이상한 일이죠. 금궤에서 나온 사람이니 토착민은
아니겠죠?(혹시 금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런 구전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예 나라 이름도 김알지를 상징하여
바꾸었다고 하니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보기엔 위의 기록은 김알지와 탈해이사금의 연합세력이 신라를 장악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탈해이사금도 힘든 과정을
통해 왕이 되었으니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반대 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김알지 세력이 탈해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탈해 이사금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겠지요. 이에 대하여 김알지가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262~284)이 신라의 13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따라서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을 보좌하면서 긴
세월동안 착실히 힘을 키운 것으로 보입니다. 인내심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탈해에 대한 의리를 지켰겠지요.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왕망이 실각한 후 김일제의 일족들은 피의 숙청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씨(王氏)로
바꾸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휴도국 고지(故地)에 있는 비석으로 확인이 된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새겨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은 나무(木)라는 것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 : 백화수)는 바로 생명(生命)을
의미하는 신수(神樹)라고 합니다. 열도 쥬신(일본)이 신라(新羅)를 가리켜 시라기(白木)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림(鷄林)이라는 말과 관련해 보면, 쥬신 신앙에서 새는 인간과 하늘[天神]을 연결하는 매개체(媒介者)입니다. 즉 쥬신 가운데는 조장(鳥葬)을
치르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김병모 교수는 이런 내용의 기록들이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김알지의 성(姓)인 김(金)은 금(Gold)이고 이름인 알지(閼智)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Gold)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金) + 금(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궤라는 말도 "문자 그대로" 금궤로 이해해도 될 듯도 합니다. 즉 신라의 선주민들이 이전엔 한 번도 보지도 못한 화려한 각종 금세공
장식품들을 가득 담은 궤짝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된 것은 모두 금궤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금궤에 들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금궤를 들고 온 이방인(strangers carrying golden
chest)"이었겠지요. 아니면 금마차를 타고 온 이방인일 수도 있겠지요. 이전까지 신라지역 사람들이 중요시한 것은 구슬이지 금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김알지가 성한왕인가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으니 일단은 연구과제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김알지의 후손인 문무왕(태종
무열왕의 아들)이 자신의 선조로 김일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신라 왕계, 즉 경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 계열이므로 그들의 문화가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이 신라
금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겠습니다.  

  즉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주요 활동 무대가 오로도스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쥬신의 장수
여포(呂布)의 고향 가까운 곳이었단 말입니다. 현재로 본다면 란저우(蘭州) - 타이위안(太原) 북부 지역이라는 말이지요[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사계절 : 2001) 262쪽]. 바로 몽골쥬신의 활동영역입니다.

    흉노는 스키타이와 더불어 유럽, 중앙아시아 - 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즉 흉노는 알타이를 기반으로 하여 유럽,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세력으로 때로는 중국과 교역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다. 흉노는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상인 세력으로 중개무역을
주관했습니다. 마치 오늘 날의 한국이나 일본처럼 당시 흉노나 스키타이는 국제무역(중개무역)의 중심 세력의 하나였다는 것이죠[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249쪽 참고]. 그러니 흉노가 금을 중시할 수밖에요. 금은 매우 고가(高價)인데다 상대적으로 매우 가볍기 때문에 유목민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교역품이 없지요. 비유하자면 요즘의 반도체나 휴대폰과도 다르지 않지요.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듯이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그 기마민족들이
신라를 점령 지배하여 신라 왕족이 된 것이 아니라, 1세기경에 이미 신라에 와 있던 흉노 휴도왕의 아들(김일제)의 후손들이 점점 세력을 키워서
4세기경에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초원길을 통하여 상당한 부분 중앙아시아나 유럽 쪽의 금장식 제품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거나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신라의 김씨 왕계는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 초원길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위(386~543)의 시기와 신라의 마립간
시대가 대체로 일치합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비로소 중국(양나라)과의 교역로가 열립니다(522 : 법흥왕 8년). 이 시기부터는
금관도 사라집니다(아마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겠지요. 쥬신 고유의 샤머니즘 전통도 약해져갔을 것입니다). 즉 금관은 마립간 시대[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417~514)]에 집중적으로 출토됩니다[조유전·이기환,『한국사 미스터리』88쪽].

  

  그러면 김씨 세력이 신라에서 정권을 잡는 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초기 신라 사회가 가진 복잡성(複雜性)에 기인한다고 봐야겠습니다(신라는 작은 나라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① 신라 자체가 워낙 허약하여 오랫동안 외침에 시달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수준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② 김일제의 후손들의
이동도 부여의 경우와는 달리 국가적 규모가 아니라 일종의 가문의 이동이었으므로 세력을 키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③ 부여처럼 6부
촌장의 연합체(고조선 유민)가 일찌감치 구성되어 이들 세력이 강력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록들이 『삼국사기』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절을 하는 등 살아가는 행태를 보면, 고구려와 서로 비슷하다. 신라는 문자가 없어 나무에 새겨
서로의 신표롤 삼는다. 그리고 말은 백제를 통해서 통역이 될 수 있다(其拜及行與高麗相類.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南史
』「列傳」)"고 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기록인데 신라가 문화나 습속이 고구려와 매우 유사하며 말은 백제와 대단히 유사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기원이 된 6촌이 고조선 유민이라고 하니 그 고조선의 습속과 고구려의 습속 또한 차이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 모두는
요동(遼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무에 새겨 신표로 삼는 것은 유목민들의 습속이기 때문에 『남사(南史)』의 기록은 신라가 고구려·백제와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