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vs Truth/Oriental'에 해당되는 글 26건

  1. 2013.10.02 신미대사 한글창제설
  2. 2012.03.29 삼성기 상..
  3. 2012.02.28 왕릉보다 화려 '김유신 장군묘' 실제 주인은?
  4. 2011.02.13 고대 한국과 일본 (1)
  5. 2010.10.13 역사 읽어볼 꺼리 스크랩 (1)
  6. 2007.05.04 ⑥ 두 마리의 물고기, 그 의미를 찾아 헤맨 40년
  7. 2007.05.04 ⑤ 신라王들의 고민 (1)
  8. 2007.05.04 ④ 韓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 馬ㆍ角杯ㆍ麻立干
  9. 2007.05.04 ③ 신라·가야·倭 지배층의 고향은 중국 서북방 알타이 지역
  10. 2007.05.04 ② 바이칼 호숫가의 자작나무숲, 그리고 新羅 金氏의 뿌리
  11. 2007.05.04 ① 그리스-알타이-신라를 이어 준 汗血馬의 질주
  12. 2006.10.09 한단고기에 대한 견해 (2)
  13. 2006.06.28 도올 김용옥, 학계 역사인식 정면비판 (2004. 1 한겨레 인터뷰)
  14. 2006.05.30 한국사 60가지 미스테리에 대한 반박글 (3)
  15. 2006.05.15 한단고기 위서 논란의 근거 및 반박
  16. 2006.05.15 고대문자 : 배달국(倍達國)과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문자(文字)
  17. 2006.03.06 신라--그들은 어디서 왔는가?
  18. 2006.02.03 한민족사에 등장하는 '여와'는 유대족의 '여호와'일까? (5)
  19. 2005.11.08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 (4)
  20. 2005.11.02 375년, 백제 땅 한반도에 신라가 침공했다
  21. 2005.10.30 중국만주에 있는 우리 민족이 건설한 피라미드
  22. 2005.10.28 유구(대만)은 백제의 속국?
  23. 2005.10.21 고조선의 개시 연대
  24. 2005.10.20 삼국의 중국대륙 존재설
  25. 2005.10.18 일본인도 모르는 일본 고대사 (2)
  26. 2005.07.17 옛 백제의 영토
충청북도 영동의 영산김씨 가문에서 부친 김훈과 모친 여흥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 입산 전에 부친께서 진사벼슬에 등과한 후 태종 때에 영의정까지 지낼 수 있는 귀족가문 출신이기에 속가에서 사서삼경을 모두 섭렵하고 출가 입산하여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범서장경이 중국에 들어와 여러 고승들에 의하여 번역된 경전들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서로 된 원전을 보기 위하여 범어 공부를 하였다.


1.한글창제의 주역으로 발탁된 신미대사
조선조 제4대 세종대왕은 중국의 한문 글이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문맹이 많아 배우기 쉬운 우리글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아침조회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우리도 우리글을 한번 만들어 보자. 우리글을 만들데 집현전을 확장하고 장안에도 우수한 학자들이 많지만 이번엔 전국을 총망라하여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여 집현전에 초빙하여 가장 배우기 쉽고 이해하기 쉬워 누구나 속히 터득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중 승려로서 유일하게 충청북도 속리산 복천암에 주석하고 있는 신미대사가 세종대왕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게 되었다.
1443년부터 한글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하여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논의를 한끝에 신미대사는 모음, 자음, 소리글을 범서(梵書)에서 착안하여 한글을 마무리 짓고 시험할 때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인하여 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에 토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시험을 끝내고 우리글이 완성되었다고 세종대왕께 보고하니 임금님은 너무 기뻐하며 1446년 9월 상달에 우리글을 훈민정음이라 공포하였고 우리글이 만들어졌으니 우리글로 노래도 한번 지어 보라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등의 노래를 지었다. 그 후 세종대왕은 신미대사의 수고를 치하하고 보답으로 주석하고 있는 속리산 복천암에 주불 아미타불과 좌우보처관음세지 양대보살을 복각 조성 시주하시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시호를 선교도총섭밀전정법비지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 지어 문종에게 위임하여 문종이 부왕을 대신하여 신미대사에게 사호(賜號) 하였다.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세상에 공포한 후 집현전에 같이 참석하였던 성삼문, 정인지 같은 유생들이 말하기를 한글에 대하여 신미대사의 공은 인정을 하되 최초 발기(發起)를 세종대왕이 하셨으니 그 공을 세종대왕께 돌리자하여 신미대사가 쾌히 승낙하니 그 후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지은 것으로 되었고 모든 문헌 등에 신미대사가 집현전에 참석함까지도 밝히지 않고 공은 왕께로 돌리기로 하였기에 거기에 대하여는 모든 문헌에도 신미대사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으나 유일하게 영산김씨 족보엔 세종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되어 있다.
유생들은 신미대사가 승려의 신분으로 한글을 주도한데 대하여 과소평가하기 시작하여 언문인 부녀자들이 뒷방에 앉아서 친정에 하소연하는 편지나 써서 보내는 글이니 통시 글(쉽다는 말)이니 하며 이것이 무슨 글이냐 장부들이 배울 글이 못 된다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미대사는 세종대왕의 뜻에 따라 누구든지 배우기 쉽게 만든 것뿐이기에 유생들의 그러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아다. 유생들은 유서(儒書)에만 능했고 신미대사는 불경, 유서, 범서 등 모두에 능하였으므로 범서에서 착안한 한글 논의에 대하여 유생들은 일체 반론을 못했고 시종일관 신미대사의 뜻한 바대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집현전에서 4년간이나 학자들이 머무를 때 학자들을 보살피는 한글도감으로 세종대왕은 수양대군을 명하였다.


2 신미대사 창제 설 근거
속리산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500m 정도 발걸음을 옮기면 신미(信眉)대사 부도탑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 1416호로, 공 모양의 탑신이 부드러운 곡선과 함께 안정감이 있다. 이 부도탑의 주인공인 신미대사(1403∼1486ㆍ속세고향 충북 영동)가 근래 들어 세인들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다. 세종의 왕사였던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은 종종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올 상반기 한국세종한림원 총재 강상원 박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 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책을 내면서 이 설이 다시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지금까지의 설은
한글 창제와 관련,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이 명령을 했고,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이의 실무 작업을 맡았다.’ 정도로 알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 입 발음기관을 본떴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국어학자들은 ‘세종실록 계해년 그믐조’에 나타나는 ‘是月上親製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문장을 들어 이에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다. 직역하면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古篆을 모방하였다’ 정도가 된다.
이중 핵심어인 ‘倣古篆’은 ‘古 篆字를 모방했다’는 뜻으로, 정인지가 지은 ‘훈민정음 해례’에도 이 문장이 나오고 있다. (象形而倣古篆ㆍ‘古 篆字를 모방해 글자상형을 삼았다’)
이 문장 하나 때문에 ‘발음기관을 본떴다’라는 설은 전통한옥 창문도형, 단군시대 가림토문자, 일본 신대문자, 범어(산스크리트어), 몽고어, 고려 각필 모방설 등의 도전을 받고 있다.
◆ 어느 설이 가장 유력한가?
발음기관설 외에 현재 가장 유력시되는 설은 이른바 범자(梵字ㆍ산스크리트어) 모방설이다.
조선초기 유학자인 성현(1439~1504)은 그의 저서 ‘용재총화’에서 ‘基字體依梵字爲之’라고 밝히고 있다. 직역하면 ‘그 글 자체는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정도로, ‘용재총화’는 훈민정음 반포 30년후에 쓰여진 책이다.
이수광도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諺書)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我國諺書字樣全倣梵字)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상당수 학자들은 앞서 언급된 ‘篆字’를 ‘梵字’의 한자식 표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세종대왕이 범자를 모방해 한글을 창제했을 경우 그 중간에 범자를 능통하게 사용하는 스님이 존재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부분이 규명되지 않았다. 이의 규명작업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 현 복천암 선원장 월성(법랍 50)스님이다.
◆ 최소 7개 증거가 있다.
30년 넘게 이 부분을 연구하고 있는 월성스님은 “조선 초기 속리산 복천암에 거주하던 신미대사가 세종을 부름을 받아 최소 7년간 복천암∼한양을 오가며 한글 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단언했다.
월성스님은 그 근거로 ▶신미대사가 범어에 능통했던 점 ▶유학 성향이 강했던 세종이 이례적으로 복천암에 불상을 조성해 주고 시주를 한 점 ▶세종이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린 점 등을 거론했다.
이밖에 ▶수양대군 세조가 복천암을 손수 찾았던 점 ▶유학자들이 당시는 물론 세종이 죽자마자 부녀자 글, 통시 글(화장실 글) 등의 말로 훈민정음을 비난하고 험담한 점 ▶신미대사의 본관인 영산김씨 족보에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로 언급된 점 ▶한글 창제 후 실험적으로 지은 곡과 문장이 유교가 아닌 불교내용을 담고 있는 점 등을 거론했다.
◆ 구체적인 근거는 있나
월성스님은 첫 번째에 대해 유학자 김수온(1410∼1481)이 지은 ‘복천보장’을 인용, “신미대사는 불경에 통달했으나 한자에 오역을 많음을 느끼고 이른바 원어, 즉 범어를 공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이는 지난 1975년 서울 인사동에서 발견된 신미대사 ‘범어진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밝혔다.
‘慧覺尊者’(혜각존자)라는 법호에 대해서는 “세종이 대사에게 극존칭 법호를 내린 것은 신미대사가 유일하다”며 “그 앞에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뜻인 ‘祐國利世 글귀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한글 창제와 관련, 세종이 아닌 수양대군 세조가 등장하는 것은 다소 이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월성스님은 세조의 복천암 방문도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복천보장’을 다시 인용, “세종은 유생들의 극심한 반대를 예상하고 신미대사,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5인에게만 한글창제 작업을 극비리에 명령한다.”며 “이후 세조는 왕위찬탈에 대한 흉금을 말하기 위해 옛정이 있는 신미대사를 찾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는 온양과 초정에서의 목욕을 핑계 삼았지만 속리산 복천암 방문이 실제 목적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때 생긴 것이 이른바 ‘정이품송 전설’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월성스님은 이밖에 “조선은 유교국가라 한글창제 실험용 책도 당연히 유교적인 내용이 됐어야 했다.”며 “그러나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은 불교적인 내용을 담은 곡과 문장으로, 이것 역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월성스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창제에 신미대사 이름이 빠져있는 것에 대해 “세종 사후 유생들은 신미대사와 불교에 관련된 문구를 모조리 삭제했음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며 “다만 영산김씨 족보에 ‘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의 문구가 나온다.”고 밝혔다. 직역하면 ‘守省(신미대사 속명)은 집현원 학사를 지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정도가 된다.


3. 기타 한글기원설
한글 창제와 관련, 현재 정설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입 발음기관을 본떴다’라는 설이다. 그러나 세종실록 등 여러 사료에 ‘倣古篆’(옛 전자를 모방했다)이라는 표현이 보이면서 무려 20여개의 또 다른 기원설이 등장해 있다.
이중 가장 논란을 빚고 있는 설이 일본 신대문자, 고조선 가림토 문자 모방설, 고려 각필부호 유래설이다. 일본학계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신대(神代) 문자는 그 모양이 한글과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자는 일본 사찰을 중심으로 조선통신사 왕래이후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문자 열등의식을 느낀 일본 일부 계층이 한글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수용되지 않고 있다.
고조선 가림토는 기서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문자로, 자ㆍ모음 38자가 한글 자ㆍ모음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일제시대 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누군가 위작한 책으로 보고 있다.
고려 각필부호 유래 설은 지난 2001년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처음 제기했다. 당시 이 교수는 “고려불경을 조사한 결과, 무려 17개의 각필이 훈민정음 모양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설은 ▶고려~조선 초기 승려들이 불경한자를 쉽게 읽기 위해 각필을 사용했고 ▶그 각필은 범자(梵字)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추론을 낳고 있다. 이 설은 훈민정음 범자 모방설과 선이 닿아 있거나 근친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4. 기타 관련 칼럼

1) “훈민정음 창제 일등공신은 신미대사”
훈민정음과 신미대사’주제 특강 강 상 원 박사
“우리말의 뿌리는 실담(범어의 음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도 범어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 일등 공신은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신미대사인 것입니다.”
지난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속리산 법주사 강원에서 개최한 특별강연회에서 한국세종한림원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은 집현전 학자도 세종대왕도 아닌 신미대사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 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주제로 강연한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 해제본에 나와 있는 초기 표기법을 검토하면 실담에서 유래한 흔적이 매우 많다”며 “이는 훈민정음이 실담을 기초로 제작됐고 따라서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에 의해 훈민정음이 제작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박사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범어의 음가인 실담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훈민정음도 이런 범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 했던 사람은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바로 집현전 학자였던 신미대사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해 신미대사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강 박사는 “당시 숭유억불이라는 강력한 통치이념을 추진했던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고의적으로 누락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강 박사는 “영산 김 씨의 족보와, 『복천보장』에 등장하는 기록에 의하면 신미대사는 한학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범어에도 능통한 학승으로 집현전에 초빙돼 한글 창제에 임했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나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 박사가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한 것은 10여년 전부터다. 1994년 동국대에서 ‘원효의 중도사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경전을 영문화하는 작업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존 영문 경전 곳곳에서 오류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범어본 경전을 직접 번역해야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범어를 공부하게 됐다. 범어 사전을 통독한 것도 15회 이상. 범어에 대한 연구가 지속될수록 그는 한글과 범어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동국정운』에 나타난 한글 고어 표기법이 실담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도 알아냈다. 이를 근거로 그는 훈민정음이 실담에서 나왔고 따라서 범어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강 박사는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범어 관련설 이외에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이후 『능엄경』,『원각경』등 총 28종의 불교경전이 제일 먼저 한글로 번역했다는 점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신미대사와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권오영 기자

2) 의문투성이 한글기원…신미대사가 열쇠
성현-이수광-이능화의 梵字 기원설과 부합
□ 의문투성이 한글 기원 --- 신미대사가 열쇠
<사진설명>훈민정음 보급의 일등공신 신미대사는 범자(梵字)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했다.(좌) 그러나 유학자들의 질시로 그가 번역한 경전마저 나중에는 삭제되는 비운을 맞는다. 초판본(中). 초판본에 들어있던 신미대사 법호가 재판본에는 빠져있다.
지난 2001년 12월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발표한 "훈민정음 각필부호 유래설"은 신미대사가 한글창제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각필’은 고대 문헌에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한자 옆에 점과 선, 또는 글자를 새겨 넣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는 양식으로 이 교수가 고려시대의 불교경전을 조사해본 결과 각필 중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과 무려 17개가 일치하고, 자음과 모음의 체계까지도 대단히 유사함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러한 학설은 세종대왕이 수양대군 등 아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불교경전에 정통한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토록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사료를 통해 밝히고 있듯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대왕이 한글이 창제되기 4년 전부터는 정사를 돌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고, 이로 인해 가장 중요한 일과의 하나인 경연(經筵)조차 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신미대사는 당시의 대표적인 학승으로 범어를 비롯한 인도어와 티베트에도 정통했으며, 불교경전에도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신미대사가 세조 2년(1456) 범어계통의 인도 문자와 티베트어로 쓴 친필 진언과 부적류들을 분석한 허일범 진각대 교수는 "상당히 많은 분량임에도 오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한글창제와 관련해 수백년 동안 ‘범자(梵字) 기원설’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조선전기 학자인 성현(1439~1504)은 "훈민정음은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으며, 이수광(1563~1628)도 "우리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 모양을 본떴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언어학자인 황윤석(1729~1791)은 "우리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범자에서 근본하였으며 범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이능화(186 9~1943)도 한글글자법이 범자에 근원한 것이라며 비슷한 용례까지 들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미국인 학자 헐버트(1863~1949) 등 외국인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도에서 범어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봉태 목사도 지난 2000년 말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을 통해 한글의 기원이 범어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학설들 또한 여전히 많은 연구와 검증의 절차를 남겨 놓고 있음에도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적극 참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범자기원설은 한글창제 당사자들이 불교경전 및 그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고 있었음을 의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자연스럽게 당시 왕과의 교분이 깊고 언해본 간행을 비롯해 경전언어에 깊은 조예가 있는 신미대사를 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실록에서는 왜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일까. 동국대 황인규 박사는 "당시 억불숭유의 정치적 상황에서 승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더욱 거셌을 것"이라며 "이는 세종대왕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자 대의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교의 이데올로기만을 숭상했던 조선시대가 초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난 94년 작고한 이숭녕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미대사만치 유명한 고승이 후세에 남긴 법어나 시, 글 한편 없이 너무나 적막한 생애를 스스로 걸어갔다"며 "학덕이 높고 국어학사상 특기할 인물이었지만 사회의 냉랭함에서 쓸쓸히 입적한 가여운 인재"라고 애석해했다.
지난 550여 년간 이념의 벽으로 인해 스스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고승 혜각존자 신미대사. 이제 그의 위상과 업적을 올곧게 복원하고 선양해야 하는 것은 이제 후학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3)“한글창제 주역은 신미대사”
한글날 특집‘훈민정음과 불교’
梵字-티베트어에 능통…불경 간행 주도
세종이‘존자’칭호…‘집현전 참여’ 기록도
억불 정책으로 공헌 가려져…재조명 있어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손꼽히는 한글.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분명하지만 한글의 기원이나 문자를 만드는데 기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의문점이 남아있다.
본지가 한글날 558돌을 기념한 특별취재에 따르면 훈민정음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혜각존자 신미(信眉, 1405?~1480?)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을 뿐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특히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2300여 쪽은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를 훈민정음으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신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도 크게 기여했을 거라는 주장이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먼저 세종대왕과의 관계다. 비록 신미대사가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세종이 죽기 5년 전인 세종 28년(1446)이지만 그 관계가 대단히 친밀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죽기 몇 달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닌 윗사람의 예로 신미대사를 대하고 있으며, 당시 신미대사가 머무르던 속리산 복천암 불사를 지원하고, 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존자’라는 명칭이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대사에게 내리는 칭호고, 더구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 영산 김씨 족보에 ‘수성(신미대사)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과 신미대사의 친동생이자 독실한 불자였던 김수온이 한글창제 이전에 이미 중앙에 진출한 상태였다는 점도 이와 관련된다는 가설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는 불교의 신성 숫자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은 새로운 문자의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김광해 서울대 교수) “방대한 양의 불경이 한글이 창제 된지 얼마 안 되는 기간에 한문본이 편찬되고 번역까지 됐다. 이는 한글 반포 이전부터 불경에 정통하고 있었으며, 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운용법과 표기법에 통달하고 있던 인사들이 있어서 이 사업을 추진했다는 증거다.”(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 같은 기존 학자들의 주장도 그 당시 대표적인 학승이었던 신미대사를 상정할 경우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특히 얼마 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한글 기원은 고려불경의 각필부호”라는 학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견해가 많다.
지난 30년째 신미대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오고 있는 복천암 주지 월성스님은 “억불숭유의 시대로 말미암아 신미대사의 공헌은 철저히 가려지고 삭제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라도 그 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신미대사는?
신미대사는 부친이 태종 때 정승까지 지낸 양반 가문인 까닭에 입산 전 유학 경전을 섭렵할 수 있었으며 출가 후에는 대장경에 심취했다. 그러나 한문 경전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어와 티베트어를 직접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세종, 문종, 세조 때에는 경전번역 등 불사를 이끌었으며 예종이 불교탄압하려 할 때는 최초의 언문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2004-09-29/773호>

4) 한글어지 108자 … 월인석보도 108쪽
한글창제와 숫자의 비밀
어느 종교건 특정 숫자를 신성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불교는 유독 그런 성향이 강하다. 심지어 0에서 무한대에 이르기까지 숫자를 불교적으로 해석한 『대명법수』라는 책이 나올 정도다. 이런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표면적인 목적 외에도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은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대 국문과 김광해 교수의 ‘훈민정음과 108’론이 바로 그것이다.
김 교수는 그동안 『한글창제와 불교신앙』(불교문화연구 제3집) 등 일련의 논문을 통해 창제 과정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불교의 대표적인 신성수 ‘108’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의 의도적인 조절임을 주장했다.
김 교수가 먼저 주목한 것은 ‘나랏말싸미듕귁에달아…’로 시작하는 한글 어지(御旨)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되는 한문 어지다. 한글은 모두 108자고 한문 어지는 108의 꼭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 교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더부러’ 등을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등 적어도 4글자 이상이 탈락됐다는 것이다. 또 한문 어지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而己矣’를 사용하지 않고 ‘耳’를 사용하고 있는 등, 글자의 수를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담겨 있음도 함께 지적했다.
훈민정음 창제과정에 나타나는 숫자의 비밀은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 교수는 108글자의 세종 어지가 실린 『월인석보』 제1권의 장수(張數)도 108쪽임도 밝히고 있다. 특히 다른 권들과는 달리 일련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 별도의 권으로 만들면서까지 쪽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 또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의 경우 불교적인 우주관을 상징이라도 하듯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이들 경우 외에 다양한 사례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훈민정음의 창제 당사자들이 이렇듯 일련의 주도면밀한 노력을 은밀히 기울인 것은 불교 보급의 목적이 담겨 있다”며 “그러한 종교적 염원이 숫자를 조절하는 은밀한 방법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맺고 있다.
실제 세종에서 연산군 때까지 발간된 훈민정음 문헌의 65%이상이 불교관련 문헌이며, 유교 문헌은 단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

5)“집현전 학자들 한글창제 무관”
훈민정음에 대한 오해
한글창제는 지금까지 신숙주와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만들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이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없는 쪽으로 굳혀지고 있다.
한글창제 이후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이 집현전 학자들이며, 당시 집현전 부제학으로 실무담당을 맡고 있던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조차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상소를 올리는 것 등의 정황으로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이 돕기는 커녕 몰랐던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1443년 12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선언할 때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비밀리에 추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성삼문은 한글이 창제될 무렵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신숙주는 창제 2년 전에 들어왔지만 그 다음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록에도 전혀 그런 말이 없다. 잘못된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세종께서 이런 사실을 알면 통탄할 것”이라는 여증동 경상대 국문과 명예교수의 말처럼 집현전 학자 창제설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따라서 이들 집현전의 소장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종의 명을 받들어 훈민정음의 보급에 앞장섰을 뿐이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
Posted by PD 개인교수



1. 太初의 桓國時代

吾桓建國 最高                                          오환건국이 최고라

       우리의 밝은 나라 환국을 세우시니 이 나라가 곧 가장 처음으로 세워진 나라 이다.

有一神 在斯白力之天 爲獨化之神              유일신이 재사백력지천하여 위독화지신하시니

     시메리아의 하늘에 스스로 변하여 신이 되신 분이 한 분이 있었으시니~,

光明 照宇宙 權化生萬物                               광명으로 조우주하시니 권화생만물하여라

        그분이 빛으로 우주를 비추시고 권능하신 조화로 만물을 창조 하시고,

長生久視 恒得快樂 乘遊至氣 妙契自然               장생구시하여 항득쾌락하시고 승유지기하여 묘계자연하시어

        오래토록 사시면서 항상 즐겁고 지극한 기운과 함께 하시니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어~,

無形而見 無爲而作 無言而行                          무형이현하고 무위이작하고 무언이행하시니

        일부러 드러내지도, 말로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자연스레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이루어 지도다.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                     일강동녀동남팔백어흑수맥산지지하시니

        어느날 동녀동남 팔백을 흑수(흑룡강)백산(백두산)으로 내려오게 하시니~,

於是 桓因 亦以監 居于天界                         어시에 환인이 역이감군으로 거우천계하시고~

그 때에 환인께서 이들을 이끌고 천계(바이칼호지역 파키르고원 일대라함)의 땅에 자리를 잡으시고~~,

掊石發火 始敎熟食 謂之桓國                          부석발화하여 시교숙식허시니 위지환국이라한다.

        돌을 부딧쳐 불을 만드시어 음식을 익혀 먹는 것을 가르치니 이곳을 최초의 국가 밝은나라 환국이라 하노라.

是謂天帝桓因氏 亦稱安巴堅也                        시위천제환인씨이시니 역칭안파견이라한다.

        모든 이들은 환인님을 천제로 모시고 안파견으로 부르며 따랏노라.

傳七世 年代 不可考也                                 전칠세라하나 연대는 불가고야니라

이렇게 7대을 이어 왓으나 그 년대는 확실치가 않노라.(삼성기하편에서는 3301년이라한다)

 

2. 桓雄님들이 다스린 倍達國

 

後 桓雄氏繼興 奉天神之詔                         후에 환웅씨계흥하시어 봉천신지조하시니

          이후 환웅님들은 개를 이어 번성하시고 천신을 정성으로 제를 지내어 받들었으니~

降于白山黑水之間 鑿子井女井於天坪                      강우백산흑수지간허사어 착자정녀넝어천평하시고

            훅수를 따라 백산에 이르러 넓고 좋은땅에 모든이들이 먹을 우물을 파시고~

劃井地於靑邱                                        획정지어청구하시며

          푸르른 구릉에 농지를 만드시고~,

持天符印 主五事 在世理化 弘益人間하            지천부인하시어 주오사하시며 재세이화하시고홍익인간하시고

          천신으로부터 받으신 부와 인을 지니시고 만사를 주관하시니 세상은 바른게되고 넓게 이로운 인간들이 되니~

立都神市 國稱倍達                                 입도신시하시고 국칭배달이라 하시다.

천신을 모시는 신시가 만들어지니 이나라가 곧 배달국이니라.

擇三七日 祭天神 忌愼外物 閉門自修                         택삼칠일하여 제천신하시며 기신외물하여 폐문자수하시며~

삼칠이되는 날(21일)을 잡아 천신께 제를 드리고 주위의 것들을 멀리하며 문을 걸고 스스로 수행을 쌓으며~

呪願有功 服藥成仙 劃卦知來                                 주원유공하시며 복약성선하시며 획괘지래하시며

소원을 빌어 공을 이루시고 좋은 것들을 드시고 신선에 이르시니 괘을 짚어 앞일에 통하시게 되고~

執象運神                                                       집상운신하시노라.

천신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시니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장악하시어 관장 하시노라.

靈諸哲爲輔 納熊氏女爲后                               명군령제철하시어 위보하시고 납웅녀하시어 위후하시니~

명석하고 뛰어난 인재를 찾아 보필케하고  웅씨 집안의 여자를 맞아  비로 맞으시고는~

定婚嫁之禮 以獸皮爲幣 耕種有畜                             정혼가지례하고 이수피로 위폐하고 경종유축하고~

혼사를 정하여 예를 지내는 것은 짐승의 가죽으로 예를 표하는 것으로 하고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가축을 키우게 하시고~

置市交易 九域 貢賦 鳥獸率舞                              치시교역하시고 구역이 공부하니 조수솔무라

물물교환을 할 수 았게 시장을 두고 아홉부족들이 짐승과 농작물을 바치니 새와 짐승들까지도 춤을 추는 살기좋은 나라 이니라.

後人 奉之爲地上最高之神 世祀不絶                   후인이 봉지위지상최고지신하여 제사부절하니라

후세에 이르러서고 천제님을 지상최고신으로 받들어 제가 끊이지가 않았다고 한다.

 

 3. 고조선의 후기 대부여 시대

丙辰 周考時 改國號 爲大夫餘                병진 주고시에 개국호하여 위대부여하고

 병진년 44대 구물단군(주나라 고왕때BC425) 나라이름을 대부여로 바꾸었다.

自白岳又徙於藏唐京 仍設八條 讀書習射 爲課    자백악으로 우사어장당경하여 잉설팔조하여 독서습사로 위과하며

       백악에서 어장당으로 도읍을 옮겨 팔조금법을 실시하고 문무를 닦는 것을 일과로 해야한다.

祭天 爲敎 田蠶是務                              제천으로 위교하며 전잠시무하며

천제를 지내는것으로 가르침을 삼으며 농사와 양잠에 힘쓰며.

山澤無禁 罪不及孥 與民共議 協力成治                            신택무금하며 죄불급노하며 여민공의하며 협력성취하니

    산과 못에서 금하느것이 없으며. 죄를 짖드라도 그 벌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으며 백성이 함께 의논하며, 협력하여 좋은 정치를 이루니~,

男有常職 女有好逑 家皆蓄積 山無盜賊                               남유상직하고 여유호구하며 가개축적하여 산무도적하며

   남자에게는 항상 일이 있어야하고 여자에게는 좋은 배필이 있어야 하며 집집마다 재산이 쌓이고 산에는 도적이 없고~,

野不見飢 鉉歌溢域                                                     야불연기하며 현가일역하니라~

 들에는 긂은자를 볼 수 없고 거문고소리와 노래소리가 나라밖까지 넘치누나.

檀君王儉 自戊辰統國 傳四十七世 歷 二千九十六年                 단군왕검이 자성진통국으로 전사십칠세하여 역이 이천구십육년 이니라

   단군 왕검께서 나라를 통일 (BC2333)한 후로부터 47대의 단군(고열기단군)에 이르기까지 2096년간 나라가 이어졌노라.

 

4.북부여 시조 해모수와 고주몽의 북부여 계승                            

壬戌 秦始時 神人大角羊慕 起於熊心山                          임술 진시시에 신인대해모수가 기어웅시산하시고

    임술년(BC239)진시횡 때에 신인 해모수가 웅심산(지금 장춘동쪽지역)에서 일어나시어

丁未 漢惠時 燕衛滿 窃居西鄙一隅                           정미 한혜시에 연추위만이 절거서비일우할새

    정미년(BC194)한의 혜왕 시에 연나라장수인 위만이 서쪽변방의 한모퉁이를 약탈하여

番韓 準 爲戰不敵 入海而亡                                          번한 준이 위전부적하여 입해이망하니

   번한의왕 준(74대마지막왕)이 대적하여 싸우지못하고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으니~

自此 三韓所率之衆 殆遷民於漢水之南                              자차로 삼한소솔지중이 태천민어한수지남하고

 이로써 삼한의 대다수의 백성들은(마한,진한,반힌) 한수(지금의한강)이남으로 이주를 하였다. 

一時 群雄 競兵於遼海之東                                          일시 군웅이 경병어요해지동이러니

 남아있든 한때의 무리들은 요해(지금의 하북성의 난하)동쪽에서 일어나 싸웠으나.

至癸酉 漢武時 漢 移兵 滅右渠                                     지계유 한무시에 한이 이병하여 멸우거하니라

 걔유년에 이르러 한의 무제가 군사를 이르켜 우거왕을(의만의손자) 멸함으로 (BC194~BC108,86년의 위만조선)

西鴨綠人 高豆莫汗 倡義興兵 亦稱檀君                           서압록인 고두막한이 창의흥병하여 역칭단군하고

 서압록(서요하)의 고두막한(임금)이 의를 앞세워 군사를 일으키며 스스로 역시 단군이라 칭하니고~

乙未 漢昭時 進據夫餘故都                        을미 한소시 진거부여고도하여

 을미년(BC86) 한 소제때 진격하여 부여의 엣도읍지(백악산 아사달)에 자리르 잡아~_

稱國東明是乃新羅故壤也                                칭국동명하시니 시내신라고양야라

나라이름을 동명이라 하였으니  이곳이 곧 신라의(지금의 경주지방에 자리잡은 진한) 옛 고향땅 이어라.

     고주몽이 동명왕이 아니고 고두막한이 세운 부여가 동명부여인 것이다.

至癸亥冬十月 高鄒牟                                     지계해동시월에 고추모가

     계해년(BC158) 시월에 고두막의 아들인 고무서단군이 붕어하시고 고추모(고주몽성제)가 ~                          

 亦以天帝之子繼北夫餘而興                                역이천제지자로 계북구여이흥하사

 이분 또한 천제의 아드님으로써 북구여를 계승하여 일어나시니~

復檀君舊章 祠角羊慕潄 爲太祖                            복단군구장하시고 사해모수하여 위태조하시고

 단군의 옛법을 다시 세우시고 해모수 단군의 사당을세우고 제를 지냄으로 나라(고구려)의 시조로 모시었다,

始建元 爲多勿 是爲高句麗始祖也            시건원하여 위다물하시니 시위고구려시조야니라

  차음으로 년호를 세우심에 다물(옛땅을 찾는가는뜻, 옛땅이라함은 배달국과 고조선의 옛영토)이라 하시니 이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 이시니라.

Posted by PD 개인교수
신라 왕릉만 파고든 고 이근직 교수 유저서 주장 … 다시 논란
이 교수 주장의 근거
① 12지신상 그 시대엔 없던 양식
② 무열왕릉보다 신하 무덤이 화려
③ 왕 아래 무덤 쓰던 풍습과 어긋나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김유신 장군 묘. 이근직 교수는 ‘김유신은 금산원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장군의 무덤은 들판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유신 장군 묘에는 봉분을 둘러가며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근직 교수 등은 12지신상과 난간 둘레석 등은 김유신 시대보다 후대인 성덕왕 이후에 등장 한다고 주장한다(사진 왼쪽). 김유신 장군 묘 앞에 세워진 비석.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고 적혀 있다.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당시 구전 등을 토대로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오른쪽).24일 경북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이곳에선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평일이지만 적잖은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묘의 왼쪽 앞에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 쓰인 비석이 보인다. 경주시 이채경(51) 학예연구사는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짚어가며 “비석은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웠다”고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595∼673)이라면 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재위 654∼661)을 도와 삼국을 통일한 주역이다.

 묘 앞에 어린이 키만 한 상석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봉분을 돌아가며 난간 둘레석과 12지신상이 장식돼 있다. 1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화려하고 장엄함이 느껴지는 무덤이다.

태종무열왕릉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새겨진 귀부가 발견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신라 왕릉 7곳 중 하나다. 신하인 김유신과 동시대 왕의 능인데도 김유신 묘에는 설치된 난간 둘레석도 12지신상도 없이 소박하다. 김유신 장군 묘를 나와 2㎞쯤 떨어진 태종무열왕릉을 찾았다. 능 입구에 비석은 사라지고 귀부(받침돌)만 남은 태종무열왕릉비(국보 25호)가 있다. 무열왕은 김유신과 동시대 인물이다. 『삼국유사』 등에 전하듯 무열왕의 왕비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며, 왕은 김유신보다 12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무열왕릉은 서악 고분군 앞 평지에 들어서 있다. 여기엔 화려한 난간 둘레석이나 12지신상은 없다. 봉분만 있는 소박한 왕릉이다. 신하인 김유신 묘와 비교하면 더 그렇다. 고(故) 이근직(1963∼2011) 교수는 이런 의문들에 매달렸다. 26일 경주에서 열린 『신라왕릉 연구』 출판기념회는 그의 유고작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대 문화재학과에 몸담았던 이 교수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신라 왕릉 고증에 천착했다.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와 이제는 ‘사실’로 굳어져 있는 신라 왕릉의 주인공을 바로잡는 일이다.

“김인문묘가 진짜 김유신묘” 태종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묘.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근직 교수는 이 김인문 묘를 김유신 장군 묘로 보았다. 신하는 왕 근처에 매장하는 ‘배장’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주=프리랜서 공정식] 이 교수는 왕릉의 주인공이 확실한 곳은 무열왕 등 7곳뿐이라며 나머지는 구전과 사실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곳이 김유신 장군 묘다. 이채경 학예연구사는 이 교수의 주장을 현장에서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 묘의 상석과 분묘 난간 둘레석은 분묘 형식으로 보아 훨씬 후대인 33대 성덕왕 이후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 ‘김유신은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원(原)은 봉우리가 아닌 들판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동시대 왕인 무열왕릉보다 신하의 무덤을 더 화려하게 했다는 건 상식에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왕릉 연구』에서 이런 논리적 근거를 내세우며 김유신 장군 묘를 35대 경덕왕릉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 묘를 김유신 묘로 보아야 한다고 기록했다. 그의 주장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무덤 위치가 들판이며, 당시 신하는 왕 아래 무덤을 쓰는 ‘배장(陪葬·딸린 무덤)’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무열왕릉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 묘 사이에 9대손 김양의 무덤이 있는 것도 김인문 묘가 되기 어려운 이유다.

 신라 왕릉 논란은 30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조선 영조 때 경주 선비 유의건은 “(영조 6년·1730년) 이름 없던 고분 17기의 피장자를 왕으로 바로잡는 과정에서 고증을 거치지 않고 능지기의 전언에 의존한 건 문제”라고 본격 문제를 제기했다.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56왕을 배출한 박·석·김 문중이 중심이 돼 구전을 바탕으로 당시 왕릉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왕릉 이름 바로잡기는 이후 추사 김정희, 한학자 정인보, 사학자 이병도로 이어졌다. 이병도 박사도 김유신 장군 묘는 왕릉이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김유신 장군 묘를 이 교수와 달리 45대 신무왕릉으로 보았다.

 이러한 학설 때문에 경주시는 사적 안내문 등에 한동안 확실치 않은 곳은 이름 앞에 ‘전해 온다’는 뜻으로 ‘전(傳)’이라는 글자를 붙였다. 문중의 항의로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 지금은 이 글자가 사라졌다.

 김유신 장군 묘에 제례를 올리는 김해 김씨 등 해당 문중은 이 교수의 깊이 있는 학설로 문제에 봉착했다. 이 교수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교과서의 관련 내용도 고치고 경주 지역의 수많은 안내문과 표지판도 바로잡아야 할 판이다. 김유신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숭무전 김성식(79) 전참봉은 “한 사람의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지만 학설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유물이 발굴돼 입증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경주시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문화재의 명칭 변경은 문화재청이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통과시켜야 한다는 절차 때문이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출처 Network of Corea history - 21세기 한국역사 | 조의선인
원문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016380183

<한국과 일본>

고대 일본 열도는 미개한 선주민들의 터전이었다. 그곳으로 선진국 한반도의 삼국(신라,백제,고구려) 사람들이 대형 선박을 이용해 잇따라 건너갔다. 이때부터 미개의 터전인 일본 열도에 한반도의 선진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삼국 사람들과 선주민 간의 혼혈도 자연스레 이루어지면서 고대 한국인들은 일본 열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먼저 한반도 남쪽에서 일본 남쪽의 키타큐슈(北九州)지역으로 건너간 세력이 지베의 터전을 일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경)다. 그 후 4세기 후반 무렵부터 한반도인(주로 백제인)들은 서서히 일본 열도의 동쪽으로 지배의 터전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진국 한반도의 사람드링 동진함으로써 일본 내해(內海, 세토나이카이) 일대며 오늘의 오오사카 지방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의 지명은 카와치(河內)였다.

이 시대의 한국인 지배자들로는 오우진(應神, 4세기경)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 5세기) 천황 부자를 꼽을 수 있다. 이들 백제인 부자에 의해 고대 일본이 카와치 왕조가 세워졌다. 백제의 정복왕인 닌토구 천황에 의해 성립된 카와치 왕조는 오오사카 지방을 중심무대로 번성하게 된다. 그들이 한국인 정복왕이라는 사실을 토우쿄우 대학 교수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1917~)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우진 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의 일본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와세다 대학 교수였던 미즈노 유우도 오우진 천황과 닌토쿠 천황 부자가 백제국 왕가의 왕들이라며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일본과 한반도와의 교섭에 있어서, 특히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오우진, 닌토쿠 천황 시대 이후부터 서로의 관계 역사 자료가 눈에 띄게 많이 나왔다. 오우진, 닌토쿠 천황 등 닌토쿠 왕조(카와치 왕조)는 외래민족의 세력으로서, 일본에 침입하여 일으킨 정복 왕조다. 닌토쿠 왕조는 대륙적인 성격을 갖는 새로운 왕조였으므로 대륙의 사정에도 정통했다. 따라서 그쪽 정세에 관해서도 민감했으며, 특히 그 지배층이 백제국 왕가와 동일 민족계통(백제왕은 부여족)에 속한다.



<저명 일본 사학자들의 '한일동족론'의 발자취>

일본 천황들이 한국의 천신을 제사 지내왔다는 내용의 논문 때문에 토우쿄우 대학에서 파직당한 쿠메 쿠니다케는 그후 와세다 대학의 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쿠메는 계속해서 일본 고대 문서들을 섭렵 연구한 끝에 마침내 68세에 이르러 『일본고대사』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스사노오노미코도'가 신라의 신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처음에 신라에 살면서 '소의 머리(소시모리)라고 하는 강원도 춘천부(春川府) 우두주(牛頭州)에 갔다가 그후 왜나라로 건너왔다. 소의 머리는 곧 우두(牛頭)로서 걸맞은 지명이나 너무 진번국(眞番國)에 접근했고, 고구려인들의 터전도 이 근처고 보면 신라로부터 좀 깊게 들어간 것 같다. 그러나 진번과 요지(要地)를 쟁탈하기 위해 우두산에 갔다는 것은 앞으로 연구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뒷날 우두천왕(牛頭天王)으로 부르게 되었고, 또한 신라명신(新羅明神)이라고도 불러 모시게 되었다. 이분에 대한 민중의 열렬한 추앙은 식지않고, 오늘날 이 분을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京都市東山區사원)는 쿄우토 굴지의 사당이다. 그 유래를 따진다면 실로 거룩하며 외경스럽다.

쿠메는 『일본고대사』의 제29절 「일한(日韓)의 옛 종교」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똑같은 종족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기도 하다. 

우선 한반도는 우리(일본)와 동종(同種)으로 인정되는 진인종(辰人種)이다. 「후한동이전」(後漢東夷傳)에 마한(馬韓)을 기록하기를, "항상 5월의 모내기를 끝내면 신을 제사드리며 주야로 술모임을 갖고 무리 지어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을 춘다. 수십 명이 서로 어울려 땅을 밟고 구르는데 손과 발이 서로 잘 맞는다. 10월에 농사가 다 끝나면 다시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본의 신상제(新嘗祭)와 서로 닮았다. 다음으로는 소도(蘇塗)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을 걸어 귀신을 제사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일본에서 현목(賢木, 사카키)을 제신(祭神)의 나무로 삼는 것과 똑같다.

『일본서기』의 중애기(仲哀紀, 추아이기)에 나오는 오카현주(오카노 아가타누시, 지금의 후쿠오카현 온가군 지역의 지방장관)와 이도현주(이도노 아가타누시, 지금의 후쿠오카현 이토지마군 지역의 지방장관)는 두사람 모두 뱃머리에다 현목(賢木)을 세워서 천황을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도현주는 신라왕의 후예이며 오카현은 신라인들의 터전으로서, 이 고장에서 지내는 제사는 스사노오노미코도의 나라인 신라의 제례양식과 거의 똑같다.

그는 예(濊), 부여(扶餘), 고구려의 제천행사에 대해 언급하고는 이와 같은 나라들의 제례는 모두 일본의 풍명절회(豊明節會)와 똑같은 것이라 했다. 또한 그는 신라의 신 스사노오노미코도가 동해바다 맞은편의 일본 이즈모(出雲) 지방으로 건너왔다는 것과, 이 지역의 신라 신사(神社)들이 많은 사실도 일일이 지적하고 있다. 또한 신라의 국호를 '카라쿠니(辛國) 또는 '시라기'(白木, 신라의 이두식 표현)로 표기하는 것 등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동해안에서 마주 건너다 보이는 이즈모가 있는 시마네현(島根縣)이 고대 신라가 최초로 건너간 정복의 터전인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들이 입증하고 있다. 미즈노 유우는 신라인들이 이즈모 지방이 신라신 스사노오노미코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논술하고 있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본래 일본의 신도 이즈모의 신도 아닌 신라의 신이다. 그는 신라에서 이즈모로 건너온 외래신이고 손님신(客人神)이다. 그의 본거지는 신라 왕성의 성지였다. 이즈모로 건너온 신라인들의 집단은 서부 이즈모 지역에서 분포되었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이즈모에서 다시 키이(紀伊, 지금의 和歌山縣)로 갔으며 지금 키이에서는 스사노오노미코도를 '기이국소좌대신'(紀伊國所坐大神)으로서 받들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 논술에서 미즈노 유우는 경남 지역과 이즈모 지역 사람들의 형질적 특징이 거의 똑같다고 말한다. 특히 ABO식 혈액형 분포에 있어서 A형률은 경남이 42.16%이며 이즈모는 42.80%이고, AB형률은 경남이 10.23%이며 이즈모는 9.58%인 유사성도 지적하고 있다.

고구려 사신 이리지공이 신라의 우두산(牛頭山)에서 스사노오노미코도의 신위(神位)를 모셔다가 받들게 되었다는 곳은 쿄우토의 기온사(祈園社)인 오늘의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이다.

우두산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을 말하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해왕(奈解王, 196~229) 27년(222) 10월 백제군이 우두주(牛頭州)에 침략했다는 기록에서 이 신라의 지명이 나온다. 동국여지승람(권46)에는 우두주는 강원도 춘천부(春川府)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춘천의 우두산은 고대 신라의 스사노오노미코도, 즉 우두천왕(牛頭天王)의 터전이었다고 추정하게 된다. 신라신 우두천왕을 받들고 있는 쿄우토 야사카 신사의 일본 최대의 기온 마쓰리(祈園祭)는 이른바 한일동족론에 앞서서 우리가 크게 주목할 만한 대축제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신사들이 거행해오고 있는 성대한 제사 의식을 이른바 '마쓰리(祭)'라고 부른다. 이 마쓰리라는 것은 신을 맞이하는 '맞으리'에서 생긴 한국어가 어원이라고 본다. 우리의 신은 하늘에 계시므로 지상의 인간들은 거룩한 신을 맞이해서 제사를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강신(降神)을 맞이하는 '강신을 맞으리'가 바로 '마쓰리'인 것이다.

일본 각 지역에 있는 사당인 신사며 신궁에서는 해마다 성대한 제사를 지내면서, 신령을 모신 가마(神輿, 미코시)를 메고 수십 명의 혈기방장한 가마꾼들이 '왔소이, 왔소이'하는 구령을 소리 높이 오치면서 큰 거리를 누벼댄다. 그들이 소리지르는 '왔소이'는 다름 아니라 한국에서 신이 '오셨다'는 한국어이다.

일본 전국에서 손꼽히는 마쓰리 행사는 바로 쿄우토의 기온마쓰리(祇園祭)다. 이 제신 축제 행사는 해마다 7월 17일부터 24일(옛날에는 음력 6월 7일부터 14일)까지 거행된다. 마쓰리를 주관하는 곳은 쿄우토 시의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이다. 거리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수십만의 구경꾼들로 성시를 이루는 가운데 가마꾼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가마꾼들은 이른바 '야마'(山車)라고 부르는 4개의 큰 나무바퀴가 달린 집채 같은 수레들을 끌고 밀고 달리는 것이다. 이 대형 수레에는 신령(神靈)을 모셨다. 그 신령이란 다름 아닌 우두천왕(牛頭天王)이라는 신라에서 온 신이다. 이 신라신 우두천왕을 일본 고대 역사에서는 '스사노오노미코도'라고 불러 온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한국에서 건너온 산이다"라고 하는 것은 쿠메 쿠니다케의 논술(日本古代史, 1907)로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황국사관을 신봉하는 극우 세력들이 쿠메 교수를 논박 질타했지만 일본 최초의 고문서학(古文書學)의 기초를 닦은 학자의 양식은 끝내 꺾을 수 없었다.

기온마쓰리에 참여하는 쿄우토 각 지역대표인 가마꾼들은 이른바 '야마'라고 부르는 신령을 모신 큰 수레들을 정해진 차례대로 거세게 몰면서 거리를 행진한다. 민속학자 니시쓰노이 마사요시는, "기온마쓰리에 등장하는 야마(山)와 호코는 오전 8시경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야마는 모두 14대(본래는 13대였다)고 호코는 6대다. 야마의 지붕에다 양날창을 곧추세운 것을 호코라고 부른다. 호코를 행렬의 선두에 세우고, 야마는 제비를 뽑은 순서대로 차례를 따라 쿄우토의 대로를 행진한 뒤 각기 자기 고장으로 향한다. 행진하는 것은 첫날인 7월 17일과 마지막 날인 24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 으뜸가는 제신 행사인 '기온마쓰리'가 신라에서 온 신인 스사노오노미노도(우두천왕)를 야사카 신사에서 모시는 것이라는 데 관한 옛 기록은 야사카 신사의 『유서기략』(由緖記略)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 655~661) 2년(656)에 고구려에서 왜왕실로 온 사신(調進副使)인 이리지(伊利之)가 신라국의 우두산(牛頭山)에 계신 스사노오노미코도 신을 쿄우토 땅(山城國八坂鄕)에 모시고 옴으로써 제사드리게 되었으며, 왕실로부터 팔판조(八坂造, 야사카노 미야쓰코)라는 사성(賜姓)을 받았다.

역시 야사카 신사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고문서인 『야사카어진좌대신지기』(八坂御鎭座大神之記)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분명하다.

사이메이 천황 2년에 한국의 조진사 이리지사주(이리지사주, 이리시노오미)가 다시 왔을 때, 신라국 우두산의 신 스사노오노미코도를 옮겨 모셔와서 제사드렸다.

즉 고구려의 사신 이리지가 당시(656) 왜나라에 온 것은 두 번째였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그때 신라의 스사노오노미코도신의 신위(神位)를 한국의 우두산에서 왜나라 야마시로(山城, 지금의 쿄우토의 야사카 신사 터전)로 모셔왔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역사 기사를 보면, "고구려에서 656년 8월 8일 대사달사(大使達沙)와 부사 이리지(伊利之) 등 모두 81명이 왔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바로 그 당시 고구려에서 고위 외교관들을 다수 파견한 것을 알 수 있고, 그들은 한국신인 스사노오노미코도의 신위까지 모시고 와서 이 쿄우토 지역을 새로운 한국신의 터전으로 삼아 사당을 크게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이리지 등 고구려 사신이 신라신의 신위를 모셔온 배경은 아직 사료가 없어서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둔다.

<조작된 역사서 『일본서기』에 대한 문헌비판>

우에다가 지적한 것처럼 일본서기는 허위 기사가 많이 있어서 매우 악명 높은 역사책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 기재된, 사실과 다른 기사들이 언제 어떻게 고쳐서 씌었는지는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이다.

8세기 초 일본서기며 고사기 등이 편찰될 당시부터 허위 기사가 실린 것인지, 아니면 뒷날 원본 기사들을 베끼던 과정에서 조작된 것인지는 아직 일본사학계에서 밝혀진 바 없다.

단지 지금까지는 기사가 조작되었다는 문헌적 비판이 계속되어 왔고, '진구우 황후의 신라침공설'이며 가야 지방의 소위 '임나일본부설'이 조작된 기록이라는 몇몇 사실만 확인됐을 뿐이다.

일본서기 등의 허위 기사들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가 무사정권을 집정하던 시기에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왜국이 신라와 백제왕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아온 사실들을 일본 역사 기록에서 뒤집어놓지 않고서는 조선 침략에 대한 명분 내지는 위신이 서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렇기에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를 칠지도(七枝刀)라고 하면서 공상(貢上)이니, 헌상(獻上) 따위의 글자로 터무니없이 조작하고, '진구우 황후의 신라침공설'이며 '임나일본부설'등 사실이 아닌 한반도 침략설을 들이대는가 하면, 실존하지도 않은 진무 천황(神武天皇) 등 9명의 인물들을 왕으로 만들어 일본사 연대를 윗대로 늘려놓는 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실존하지도 않은 일본왕 조작 기록에 대해서는 나오키 코우지로(直木孝次郞, 1919~)가 그의 저서 (『日本神話と古代國家』, 講談社 學術文庫, 1990)에서 이렇게 반박하고 있다.

천황의 기원을 가능한 한 오랜 옛날로 늘려잡기 위해 있지도 않았던 천황 이름을 조작하여 추가시켰다. 또한 참위설(讖緯說)에 입각해서 스이코 천황 9년(601)부터 1260년 전(BC 660)을 진무 천황의 즉위년으로 만들었다. 이 제1대 진무 천황의 이야기도 천황가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사실로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현대 일본 사학자들도 고사기며 일본서기 등 역사책들이 언제부터인가 조작, 변조된 것을 계속해서 논증, 비판해 오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저명한 사학자 김석형(金錫亨, 1915~96)도 "고사기의 원형 자체가 9세기 이후의 어떤 시기에 위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한다.

다시 칠지도 문제로 돌아가자. 칠지도가 중국 땅 동진(東晋)에서 만들어져 백제왕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됐다는 설은 쿠리하라 토모노부(栗原朋信)의 주장이다. 그는 칠지도 뒷면 명문에 있는 '성음'(聖音)이라는 글자를 '성진'(聖晋)이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백제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준 왜왕에게 상을 주기 위해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 해서공(海西公)이 칠지도를 만들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증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칠지도 명문에서 '성음'(聖音)을 '성진'(聖晋)으로 해독하는 경우, 문맥상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또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하사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는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기는커녕 한반도에서 막강한 국력을 한창 과시하던 시기였다.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백제는 태화(泰和) 4년(369)에 남하하던 고구려를 맞아 격렬하게 싸우면서 오히려 북진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371년에는 백제군이 고구려 왕도였던 평양에 침입했고,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전사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재일 사학자인 와코우(和光) 대학 교수 이진희(李鎭熙)도 쿠리하라 토모노부의 동진설은 "일본서기의 사실만을 중시하며, 칠지도의 명문 그 자체를 경시하고 있는 잘못"이라고 지적했다.(七支刀硏究の100年, 1974).

칠지도가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것은 1873년에서 1874년경의 일로 추찰된다. 이 칼을 찾아낸 사람은 스가 마사토모(管政友, 1824~97, '스가'(管)를 '칸'으로 읽는 사학자들도 있다)였다. 역사학자였던 스가가 이소노카미 신궁의 관리 책임자인 궁사(宮司)가 된 것은 1873년이었는데, 궁사 직책을 맡은 후 칠지도를 보고(寶庫)에서 찾아낸다고 한다.

그는 신궁에 부임한 초기에 이 칠지도를 꺼내보니 칼에 녹이 슬어 있어서 녹을 떼내니까 칼 몸체(刀身)에 금상감된 글씨가 나타났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칠지도의 그림을 그대로 본뜬 습본(摺本(접본), 지면을 접어서 펼쳐보도록 한 책)이 나온 것은 1875년 7월 15일의 일이다. 당시 니나카와 시키타네(권川式胤)가 이 습본을 펴냈는데, 크게 당황한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고대 백제왕이 왜왕을 후왕으로 거느리면서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명문이 습본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사이고다카모리(西鄕隆盛, 1822~77) 등은 1871년경부터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워 공공연하게 조선 침략을 획책하고 있었다. 또 1872년 11월 28일에는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재위 1867~1912)의 '징병고유'(徵兵告諭)가 포고되었다.

……예부터의 군제(軍制)를 보완해서 해군과 육군을 설치하며, 20세가 된 남자는 누구나 병적에 편입하여야 한다.……(法令全書)

이것이 바로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이었다. 급기야 1875년 9월 일본의 군함 운요우호(雲楊號)가 서해에 침공해서 '강화도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 군부는 이듬해인 1876년에는 쿠로다 키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를 특명전권대신으로 내세우고 군함 6척과 400여 명의 군인을 강화도에 보내 위협 시위를 하면서 조선 정부를 강압했고, 끝내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하던 시기에 칠지도 습본이 출판되었으니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았을까.


<천황의 한일동족 고문서 분서사건>

역사상 최초로 한일동족론을 세상에 공표한 사람은 일본 남조(南朝, 14세기)시대의 유력한 정치, 사상적 지도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1293~1354)다.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14세기 중엽)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한일동족론을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있으며, 한일동족론에 대한 분서사건의 놀라운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옛날 일본은 삼한과 동종(同種)이라고 전해 왔으며, 그 책들을 칸무(781~806) 천황 때에 불태워버렸느니라.'

칸무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고대 문헌 "袋草子"(1157경)에는 칸무천황의 생부인 코우닌(光仁)천황(770~781) 히라노신(平野神, 백제 성왕)의 증손임이 밝혀져있다. 그러기에 저명한 사학자 키타야마 시게오는 칸무 천황을 가리켜 "백제왕계 귀화인의 핏줄을 타고 났다"고 지적했다고 본다. 칸무 천황은 왕도인 헤이안경 북쪽(현재의 京都市 北區, 平野神社)에다 백제 성왕과 비류왕,초고왕 등 조상신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 지낸 일본천황이다. 그와 같이 백제왕들을 제신으로 섬기는 등 한반도인의 피를 이은 칸무 천황은 어째서 전국 각지의 관원들을 동원해서 한반도인과 일본인이 동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옛 서적(족보)들을 모두 불태운 것일까.

이 점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한일 양국 학자들 간에 전혀 논의된 바가 없다.

"신황정통기"의 저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는 예린한 역사관을 가진 학자며 정치가로, 전제군주 치하에서도 역사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올곧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칸무 천황 때의 한일동족 역사기록 분서사건을 지적할 수 있었던 근거는 9세기 초엽의 "코우닌시키(弘仁私記)"였다고 본다. 코우닌시키는 9세기의 일본왕인 사가(809~823)천황의 지시로 성립된 기록인데, 거기에는 단지 칸무 천황이 책을 불사르게 했다는 극히 짤막한 내용만이 실려 있다. 그러므로 분서 사건의 원인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더구나 일본 관찬 역사책인 '속일본기'와 '일본후기'의 칸무 천황조에는 분서사건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어서 그 원인 규명은 결코 쉽지 않다고 본다. 

분서사건에 대해서 몇가지 요인을 추찰하고 있다.

첫째는 원주민인 수많은 농민들의 조정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농민들은 백제인 왕가의 지배를 받으며 조공을 바치는 농노(농민 노예)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당시 징병과 부역에 강제로 징발되어 이러저리 끌려 다니며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이를테면 칸무 천황은 두 번씩이나 왕도를 옮기느라 수많은농민들을 징발해서 도성을 쌓게 했다. 785년 도성 축성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징발되어 온 농민은 자그마치 31만 4천 명에 달해다. 또 에미시(아이누족, 지금의 훗카이도 지역 등)의 침공으로 (783년부터) 토벌 전쟁에 농민들이 징병되어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등 농민들은 귀농하지 못하고 크게 시달렸던 것이다. 반면에 백제인 왕족과 귀족 및 승려들은 전국 각지의 산림과 농토를 소유하고 호의호식하며 부유하게 살았으며 지방관리들의 부패 또한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칸무 천황은 조정의 조신 등 고위 신하들을 백제왕족들을 중심으로 발탁했다.'(속일본기)

칸무 천황은 집권 후기에도 덕정을 베푸는데 힘썼으나 지방 귀족이며 토호(土豪)와 농민들 사이에는 날로 대립이 심해졌다. 그 당시에 키타야마 시게오는 이렇게 지적했다.

'칸무 천황의 2ㄹ대 정책인 군사와 조구에 의해 피폐해진 농민들의 형편은 이제 급기야 천황을 비롯해서 중앙의 권력자들을 위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천황은 만녀이 되자 천하에 덕정을 행하기로 마음속 깊이 결심했다. 이래서 제4차 에조 토벌의 중지와 헤이안궁 건설 공사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칸무 천황은 조정의 요직에 모두 백제인들을 앉혔다. 또 백제왕족인 조신들의 주청을 언제나 잘 들어주었던 내용들이 관찬 역사책 '속일본기'의 칸무 천황조에 허다하게 전하고 있다. 칸무 천황이 궁중의 백제왕족 조신들 중에서도 가장 총애한 신하는 백제왕 명신(明信, 메이신)이었다. '백제왕'이란 백제왕족의 통칭이다. 그 내용은 스가와라노 미치사네(管原道眞, 845~903)가 892년에 편찬한 '루이쥬 코쿠시'에 잘 나타나 있다. 795년 4월의 왕실 연회 때 칸무 천황이 몸소 명신(메이신)에게 와카(和歌)를 읊어주었다. 명신이 그 시가에 화답하지 않고 잠자코 있다 칸무 천황이 대신 화답했다. 

이와 같이 철두철미하게 백제왕족들을 거느리던 칸무 천황이 한일동족론 관련 서적들을 불태우게 한 이유는 모름지기 백제인 왜왕가가 '일본화'를 크게 서두른데 있다고도 추찰된다. 즉 고통받는 선주민 농민들이 백제인 천황가의 통치를 받으며 위화감과 열등감 등으로 불만이 고조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억제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본국인 백제는 이미 660년에 망한 지 벌써 백수십 년이나 되었고, 한반도는 백제를 멸망시킨 통일신라의 시대인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왜나라의 백제인 왕가는 통일신라 왕가에 분노와 적개심마저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오우진,니토쿠 천황이 백제왕족이라고 하는 미즈노 유우는 논술을 살핀 바 있다. 그런데 그는 그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게 된다.

'상고시대에 우리 왕조(일본왕조)는 끊임없이 백제와 연합했으며,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보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 유대적인 숙명을 지니고 왔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

즉 오우진,닌토쿠 천황은 백제인이고, 그러기에 왜왕가와 백제는 한 핏줄로서 신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연합해왔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이 삼한과 동족이다'라고 하는 발자취에 대해서 백제인 칸무 천황의 왕가는 비통한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하다.

그런데 칸무 천황 당대의 신라는 여러 왕의 계승이 이어졌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선덕왕(780~785), 원성왕(785~798), 소성왕(798~800), 애장왕(800~809)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전쟁이나 큰 충돌이 없었다. 한일 양국의 역사책을 보면, 우선 '삼국사기'에는 다음 두 대목의 기사가 있다. 

'애장왕 3년(802) 12월, 왕이 균정(均貞)에게 대아찬 벼슬을 주고 그를 가왕자(가짜왕자)로 삼아 왜국에 인질로 보내려고 했으나, 균정은 이를 거절했다.4년(803)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파견하고 황금 3백냥을 진상해 왔다. 

일본 관찬 역사책인 속일본기와 일본후기에 각기 칸무 천황 당시의 기사가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료에는 대신라 관계 기사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일본후기에만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칸무 천황 19년(799) 5월 29일 신라사 파견을 중지했다. 칸무 천황 24년 9월 18일 병부소승(兵部少丞) 정6위상 신마리를 신라국에 파견했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해둘 것은 일본후기의 칸무 천황조는 모두 13권이나 그중 네 권만이 전하고 나머지 아홉 권은 결권(缺卷)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결권들속에 '한일동족론 분서사건'의 기사가 그 어딘가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도 여기 덧붙여둔다. 결권에 관해서는 일본학자들도 원인규명이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우닌의 난(應仁之亂, 16세기)때 책이 흩어져 없어진 게 아닌가 한다'고 요시오카 마유키는 논술하기도 했다.(일본후기, 1975)

여하간 일본역사에서 한일동족론의 진원이 백제인 칸무 천황 당시에 불거져 나와 그것이 분서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면, 당시가 비록 전체 통치시대였다고 하더라고 그 파장은 왕가와 백성들 사이에 엄청나게 큰 것이 아니었던가 추찰케 한다. 한일동족론의 발설은 키타바다케 치카후사 이후 약 4백여 년이 지나야 다시 이야기된다. 

즉 한일동족론은 에도 시대의 토우테이칸(1732~97)을 비롯해서 메이지 시대(1868~1912)의 쿠메 쿠니다케(1839~1931) 일제 군국주의 치하의 키타 사타키치(喜田貞吉, 1871~1939) 카나자와 쇼사브로(1872~1967) 등의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다만 한 가지 미리 밝혀두자면 그들이 '한일동족론'을 어떤 목적으로 연구했건간에 '한국인과 일본인은 동일 민족'이라는 근본정신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의 다음과 같은 역사관은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라고 본다. 

고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한과 중국 대륙 및 남양 방면으로부터 일본 열도에는 끊임없이 씨족적으로 집단 이주해왔다. 그들은 어미 토우호쿠(東北) 지방의 변경지대며 이즈의 7개 섬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흩어져 토착하여 살았다. 또 당시는 아직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도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주해온 사람들은 어느 특정한 나라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부락민 또는 씨족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집단들과 뒤섞여 살게 되었다고 본다. 그런 가운데 그들 속에서 유력한 호족이 나타나게 되고, 본국으로부터 유력한 씨족들이 계속해서 건너옴으로써 차츰 중앙정권을 이루기 위한 권력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특히 바로 코앞에 있는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호족을 대표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이 일찍부터 일본 열도에서 조직적이고 강력한 세력을 이룬 한국인 호족들은 그들이 모시게 된 한국인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식민지 경영에 착수했다. 또 그들 역대 천황들은 사당(신사, 신궁)을 세우고 백제신, 신라신에게 신상제(新賞祭)라는 제사를 지냈다.


<백제인이 세운 일본 무사정권>

쿄우토의 히라노 신사에 모신 백제신들이 헤이씨의 씨신이 되었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헤이안 시대 후기의 최고 무장인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 1118~81)도 칸무 천황과 마찬가지로 백제인 후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타이라노 키요모리야말로 일본 역사상 겐씨(源氏) 가문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1123~60)를 무찌르고 왕조 국가의 군사력을 장악한 명장이다. 12세기 일본 무사시대는 백제인 타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멸망당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역시 백제인 무장이었다. 그는 백제인 세이와(淸和, 재위 858~876) 천황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 겐씨 가문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패배한 후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뒷날 '단노우라 전쟁'(1185)에서 헤이씨 가문을 멸망시킨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3남인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였다.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2년 왕도인 헤이안경(지금의 쿄토)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태평양 연안의 카마쿠라 땅에 무사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이른바 '카마쿠라 막부'였다. 쉽게 말해 그 당시부터 천황가는 실권을 빼앗긴 채 다만 상징적 존재로 머물기 시작한 것이다. 

1192년 7월 고토바 천황(1183~1198)은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운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무가 정치를 승인하면서 그를 '정이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이른바 '쇼군'(將軍)이라고 통칭되는 무단 정치는 이렇게 백제인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다. 정이대장군인 쇼군은 전국 각지에 부하 무장인 '다이묘'(大名)를 임명했고, 각 지역 다이묘들은 제 고장을 무력으로 관장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시대는 1336년에 두 번째 무사정권인 '무로마치' 막부를 탄생시킨다. 이것은 무장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58)가 이룩한 것이다. 1338년 그는 초대 쇼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무사정권은 200여 년이 지난 1573년에 막을 내린다.

이후 무장 오다 노부나가의 군사 독재 시대가 이어지고 계속해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의 군사독재 시대가 전개된다. 그러다가 1603년 지금의 토우쿄우에서 에도 막부가 탄생한다. 이 당시 무장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됨으로써 다시금 막부 무사정권 시대가 열렸다. 이 에도 막부 시대는 1867년 제 15대 장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마침내 천황 친정체제가 부활해서 1868년부터 이른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무상정권 시대의 발자취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무사정권은 백제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그 배후인 천황가 역시 백제인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황가에서 '니이나메사이(新嘗祭)라는 한국신 제사를 거행하고 있는 이유다. 

<백제인 혈통 입증하는 일본 고대문서> 

사실 한일동족론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역사시대는 8세기 칸무 천황 때를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일본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아스카(飛鳥, 592~645 또는 710) 문화 시대이다. 이 시기에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한번도 알려지지 않은 백제인 여왕이 존재했다. 일본 역사서에서는 이 백제인 여왕을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재위 592~628)이라고 부른다.

스이코 천황은 백제 왕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은 일본 최초의 정식 여왕이다. 신라의 선덕여황(재위 631~647)이 즉위하기 3년 전인 628년에 세상을 떠난 빼어난 여왕이었다. 선덕여왕이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여러 가지 업적을 쌓았다면, 백제인 스이코 천황 역시 당시 왜나라에서 한국 불교 문화의 눈부신 터전을 이루는 업적을 쌓았다.

스이코 천황은 백제불교를 바탕으로 '아스카 문화'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이 아스카 문화가 한반도에서 왜나라에 심어준 불교문화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8세기 초 왜왕실에서 편찬한 역사책인 일본서기에도 백제 불교가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스이코 천황은 백제의 관륵 스님을 모셔다가 천문지리학을 일으켰는가 하면, 백제의 음악가 미마지(味摩之)를 모셔다가 일본땅에 처음으로 한반도의 사자춤이며 아악을 이루었다.어디 그뿐인가. 고구려의 담징 스님을 모셔다가 호우류우지의 12면 금당벽화를 비롯한 미술 문화를 일으켰으며, 신라 진평왕의 환심을 사 대신라외교를 통해 신라 불교도 도입했다. 이처럼 스이코 천황은 모국인 한반도 3국(백제, 신라, 고구려)의 힘으로 아스카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운 슬기로운 여걸이었다. 그렇게나 출중한 그녀가 한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스이코 천황을 빼놓고는 '한일동족론'은 물론이고 '한일관계사'조차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스이코 천황에 관한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이른바 친일 식민사관이 아직도 이 땅에 잔존함을 입증하는 것일까.

<비다쓰 천황과 스이코 천황, 이복 남매간의 결혼>

킨메이 천황과 이시히메 사이에서 태어난 비다쓰 천황은 당연히 백제왕족이다. 그의 첫 번째 왕비는 히로히메였다. 비다쓰 천황은 왕위에 오른 지 4년이 된 575년 1월 히로히메를 황후로 맞이하였는데, 불과 10개월 만인 그해 11월 히로히메가 죽는 아픔을 겪었다. 히로히메의 사인은 밝혀져 있지 않다. 

히로히메 황후가 죽은 이듬해인 576년 3월 비다쓰 천황은 이복 여동생인 어여쁜 카시키야히메를 두 번째 황후로 맞았다. 이로써 왜나라 백제인 왕실에서 이복 남매간의 근친 결혼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이복 남매간의 근친 결혼은 흔한 일이므로 카시키야히메 공주로서도 자연스런 과정을 거쳐 결혼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 오늘날 일본 사가들의 시각이다. 일본서기는 스이코 천황이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용모가 아름답고,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여성이었다"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름답고 총명한 공주였던 카시키야히메는 상처한 이복오빠인 비다쓰 천황과 18세 때 결혼했다. 

스이코 천황과 비다쓰 천황의 사이는 원만했던 것같다. 물론 비다쓰 천황은 카시키야히메 황후 이외에도 여러 왕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카시키야히메 황후가 2남 5녀의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비다쓰 천황은 585년 48세로 죽고 만다. 그때 황후의 나이 32세였다.

미모의 젊은 과부는 남편과 사별한 후 즉각 거센 풍우에 휘말리게 된다. 죽은 남편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자들이 피비린내나는 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다쓰 천황이 승하하자 장례가 거행되었다. 일단 시신을 모시는 빈궁(모가리노미야)이 마련되었다. 당시 본국 백제에서는 왕릉을 마련하고 매장을 하기 전까지 3년간 빈궁에 시신을 가매장하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이 앞에서 살폈듯이 '백제의 대빈'이라고 일컫는 3년 국장이다. 비다쓰 천황의 시신은 히로세 땅에 마련한 빈궁에 가매장되었다. 히로세는 지금의 나라현으 코우료우쵸 백제였다.

카시키야히메 황후는 이 히로세의 빈궁 안에서 승하한 비다쓰 천황의 명복을 빌면서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조정 신하들도 빈궁에 찾아와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때 왕실 쪽에서 볼멘 소리를 하는 왕자가 한 명 있었다. 아나호베 왕자였다. 그는 이렇게 고함치며 다녔다. "어째서 죽은 왕의 빈소에만 모여들고 살아 있는 왕은 모실 줄을 모르느냐?"

혈수부 왕자, 즉 아나호베는 스스로가 왕위 계승권자라고 떠벌리고 다니면서 모두들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울분을 터뜨렸던 것이다. 

자칭 왕위 계승권자인 아나호베 왕자는 킨메이 천황과 그의 세 번째 왕비인 오아네키미 사이에 태어난 왕자였다. 즉 카시키야히메 황후의 이복오빠였다. 그는 행동이 난폭하고 경솔한 데다 엉뚱한 짓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이 무렵 아나호베 왕자는 모노노베노 모리야(515~587) 대련(大連, 조정 제2위의 벼슬)과 은밀하게 결탁하고 있었다. 즉 모노노베 모리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 계승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의 최고 권력자는 소가노 우마코(550~626)대신이었다. 그와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불교의 일본 전래에 대해 대립하고 있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숭불파였고,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배불파였다.

날이 갈수록 궁 안팎은 시끄러웠다. 마치 먹구름이 낀 폭풍 전야와도 같았다. 미모의 과부 카시키야히메 황후는 사태가 험악해지는 기미를 이미 알아차린 듯, 빈궁에서 꼼짝 않고 죽은 남편 비다쓰 천황의 명복만 빌 따름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심각한 대립을 막을 만한 묘수가 달리 없었다. 선왕 상중에 감히 누고도 함부로 일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또한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실제로 황후에게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빈궁 안에서 잘도 버텼다. 복상한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그 사이 새로 왕위를 계승한 것은 아나호베 왕자가 아닌 요우메이 천황이었다. 그는 이복형인 죽은 비다쓰 천황의 뒤를 이었다. 즉 그녀의 친 오빠가 남편 비다쓰 천황의 뒤를 계승한 것이다.

요우메이 천황을 옹립한 것은 최고대신이자 숭불파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카시키야히메 황후가 협의한 결과였다. 백제 불교의 철저한 옹호자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바로 백제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기 집(코우겐지)에 모셨던 죽은 소가노 이나메(505~570) 대신의 아들이다. 게다가 소가노 우마코는 카시키야히메 황후(뒤의 스이코 천황)의 친외삼촌이기도 했다 즉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친누님이 스이코 황후와 요우메이 천황의 생모였던 것이다.

5월의 어느날, 드디어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일본서기는 그 역사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5월, 초여름 어느날 아나호베 왕자는 카시키야히메 황후를 강간하려고 강제로 빈궁을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비다쓰 천황의 총신 미와노 키미사카후(三輪君逆)가 경비병들을 불러 아나호베 왕자의 침입을 막았다. 카시키야히메 황후가 혼자서 정숙하게 지키고 있는 빈궁에 왕자는 고함을 지르며 침입하려고 했으나, 그는 언쟁 끝에 쫓겨나고 말았다.

카시키야히메 황후는 미오노 키미사카후로부터 배다른 오빠인 아나호베 왕자의 난동을 보고받았다. 어느새 왕궁 안팎으로는 "왕위를 노리던 아나호베 왕자가 선왕의 황후를 욕보이려고 빈궁에 난입을 꾀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발끈한 아나호베 왕자는 빈궁을 지키면서 제 앞을 가로막았던 미와노 키미사카후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조정의 배불파(排佛派) 우두머리인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에게 미와노 키미사카후의 살해를 명령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부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미와노 키미사카후의 거처를 기습해 결국 죽여버렸다. 

드디어 왕궁을 둘러싸고 거센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아나호베 왕자는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일당과 반역을 모의해 마침내 요우메이 천황의 왕권을 뒤엎기로 작정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자신의 본거지인 아도(阿都, 현재 오오사카의 야오시)에서 반란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편 비다쓰 천황에 이어 왕위에 오른 요우메이 천황은 몸이 허약해서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친누이동생인 카시키야히메 황후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곧 병석에 눕게 되었던 것이다.

<한일 양국의 대실권자는 백제인 곤지왕자>

한편 동성왕의 아들들인 무령왕과 케이타이 천황을 각각 백제와 왜나라의 권력의 일인자로 등극시킨 할아버지 곤지왕자(昆支王子)야말로 당시 한일 양국에 걸쳐 막강한 '한왜연합왕가'(韓倭聯合王家)의 세력을 형성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에카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왜한연합왕국'(倭韓連合王國)의 왕(王)이라는 용어를 신라인 스진 천황(崇神天皇, 2~3세기경)에게 붙이기도 했다(『騎馬民族國家』, 岩波書店, 1967) 여하간 백제왕실에서 왜나라 왕실로 건너온 백제인 곤지왕자는 그 후에도 계속 왜왕실에서만 살다가 카와치(河內)땅에서 서거하게 된다.

지금 오오사카부(大阪府)의 하비키노시(羽曳野市)가 그 옛날 카와치의 아스카 터전인데, 이곳에는 유명한 '곤지왕 신사'(昆支王神社)가 있다. 이 신사는 요즘에 와서 주로 '아스카베 신사'(飛鳥戶神社)라고 부르는데, 곤지왕자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이 터전에 옛 문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유우랴쿠조(雄略朝)에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왕족인 곤지왕은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의 조상으로서, 이 터전을 본거지로 삼았다. 조선의 삼국사기의 고증에 의하면 그가 건너온 것은 유랴쿠조보다 좀더 거슬러 올라간 인교조(允恭朝) 무렵(5세기 초)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조상신(百濟)을 제사 모시는 씨신(氏神)으로서 아스카베 신사(飛鳥戶神社)를 창사(創社)했다. 또 한 씨사(氏寺)로는 아스카산 죠린지(飛鳥山 常林寺)라는 사찰을 산 남쪽 기슭에 세우고 있었다.(『古田文書』).

이와 같이 곤지왕자는 생전에 왜왕실에서 백제왕가의 조상신 제사를 도맡았으며, 죽어서는 왜나라 백제 왕부의 제신이 되었던 것이다. 아스카베 신사는 곤지왕자의 아들 중 하나인 비유왕(毘有王)도 중세 말까지 제사 지냈다고 한다.

현재 곤지왕 신사가 자리잡고 있는 일대는 곤지왕자의 후손들인 아스카베씨(飛鳥戶氏)·후나씨(船氏) 등 백제인 왕족들이 살고 있던 큰 고장이다. 그래서 이 일대에는 백제인 고분 수천 기가 있었고, 현재도 580여기의 옛 무덤들이 그 옛날의 백제인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카와치 아스카'(河內飛鳥)라고 일컬어지는 이 고장에서 주목받은 고분지대로는 우네비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고분들과 니이자와 천총(新澤千塚)을 들 수 있다.

특히 1960년 초 '니이자와 126호분'에서 발굴된 '방제형금관'(方製形金冠)은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왜냐하면 이 방제형금관과 똑같은 것이 1971년 백제 무령왕릉의 왕비 머리 부분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방제형금관과 똑같은 금관이 발굴된 '니이자와 126호분' 역시 모름지기 백제계 왜왕비의 무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뿐 아니라 이 무덤에서는 무령왕릉의 왕비 발끝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형태의 '청동 다리미'도 출토되어, 니이자와 126호분의 장법(葬法)이 모국 백제왕가의 장법과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실제로 니이자와 천총에서 발굴된 무덤들은 대부분 한반도 양식인 횡혈식 고분이라는 공통점도 보이고 있다.

한편, 니이자와 천총 바로 근처에 '센카 천황릉'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다음의 보고서를 보자.

니이자와 천총에 들어서면 곧 눈에 띄는 것은 왼쪽으로 보이는 센카 천황릉(宣化天皇陵)이다.......... 센카 천황릉 앞에서 서서 서쪽의 도로 양쪽으로 펼쳐지는 야트막한 구릉들을 바라보면 참으로 많은 고분들이 겹칠 듯이 있다.

이 보고서에서 주목할 것은 센카 천황(宣化天皇, 재위 535~539)이다. 무령왕의 동생인 케이타이 천황(繼體天皇)의 차남이 다름아닌 센카 천황이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의 유물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 출토된 니이자와 126호분, 그리고 니이자와 고분에서 바라보이는 센카 천황릉은 무령왕 조카의 무덤이고.......아무튼 니이자와 천총은 백제인 왜나라 왕부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물이다.


<근초고왕이 오우진 천황에게 하사한 칠지도>

그러면 1630여 년 전에 백제에서 만든 칠지도의 양면에 새겨진 한자어들을 살펴보자. 칼 앞면의 한자 명문은 다음과 같다.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年正陽造百練鐵七支刀以벽百兵宣

    供供侯王□□□□作

칼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先世以來末有此刀百滋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상과 같은 한자어 명문은 녹이슨 칠지도의 글자(금상감)들을 일본 학자들(福山敏男, 榧木杜人, 三品彰英, 栗原朋信)이 다각적으로 판독해낸 것이다. 이 한자어 명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서기 369년(태화 4년) 5월 16일 병오날 정양에 무수히 거듭 단근질한 강철로 이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적병을 물리칠 수 있도록 이 영도(靈刀)를 후왕에게 보내주는도다. □□□□작

(뒷면) 선대 이후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세자 귀수성음은 왜왕을 위해서 만들어주는 것이니, 이 칼을 후세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



이와 같이 당시 백제 근초고왕과 귀수세자(貴須世子, 후의 근구수왕, 재위 375~384)는 전대미문의 훌륭한 칠지도를 만들어서 왜에 있는 백제왕국의 후왕인 오우진 천황에게 보내주었다. 그 칼로 왜왕은 모든 적군을 무찔러 백제 식민지의 보전에 힘쓰며 번창할 것을 어명(御命)한 것이었다.

이 칠지도의 명문은 누가 읽더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하행문(下行文)임을 알 수 있다고 우에다 마사아키는 지적했다. 즉 본국 백제의 근초고왕과 귀수세자가 왜의 오우진 천황과 그의 후세를 축복하며 보낸 보도(寶刀)인 것이다. 당시 왜국이 백제인 후왕이 거느리던 백제의 터전이었음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말하자면 칠지도의 명문은 한일고대사에 있어서 백제가 일본을 백제왕부로서 다스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품인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일본 사학자들이 하사설을 뒤엎으려고 상납한 것이라는 헌상설을 내세우는 등 엉뚱한 주장을 하므로, 그들의 논의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어사전』(日本史辭典, 高柳光壽·竹內理三 編, 角川書店, 1976)의 칠지도 항목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검. 나라 텐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 신궁의 신역(神域)에서 출토, 이 칠지도는 일본서기의 진구우 황후 52년조 기록에 보이는 칠지도에 해당된다고 여겨진다. 전체 길이 약 75cm. 칼몸(刀身)의 좌우에 각 3개씩 양날의 가지칼(枝刀)을 서로 번갈아 뻗쳐 나오게 만든 생김새로 실용적인 칼은 아니다. 칼 몸체의 양면에는 금으로 상감된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칠지도는 당시 동아시아 각국의 이해와 갚이 관련되어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설(定說)은 밝혀지지 않았다. 369년 백제왕이 왜왕을 위해 만들었다고 추정되며, 백제에서 온 '헌상품'으로 보는 설이 있고,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물건'이라는 설, 그밖에 동진(東晋)에서 백제왕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한 물건'이라는 설이 있으며, 명문(銘文)을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의 왜왕에게 '바쳤다'(貢上)는 기사와 단순하게 연결짓는 점이 비판되고 있다. 국보.

먼저 쿄우토 대학 사학 교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의 하사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우에다는 칠지도를 연구 검토하기 위해 이소노카미 신궁을 3번이나 찾아가 칠지도를 직접 만져보면서 칼 앞뒷면의 명문을 조사했다. 우에다는 그의 저서(倭王の世界, 1976)에서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임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칠지도에 새겨진 60여 글자 중에 판독이 곤란한 부분도 있어서, 전문을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고심 끝에 해독하여 밝혀진 것을 따르자면 칼의 명문 그 어디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글귀는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는 일본서기의 진구우 황후 52년조 기록을 빙자하여 '헌상설'이 별로 의심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주장돼왔다. 명문 해석은 우선 명문 그 자체에 의거해야 한다. 일본서기는 귀중한 고전이기는 하되,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완성된 이 역사서에 의거해 칠지도의 명문을 해독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본다.

칠지도의 명문에는 백제왕이 '왜왕을 위해 만들어준 것이며, 이 칼을 후세까지 길이 잘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고 되어 있고, 따라서 이 칼을 만든 주체도 백제왕이다. 그뿐 아니라 칠지도처럼 생긴 칼이 중국에서 단 한 자루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동진(東晋)을 칠지도의 주체로 보려고 하는 설의 허점이다.

반면 한국에는 칠지도와 유사한 철기가 있다. 1962년 경북 칠곡군 인동면 황상동(仁同面 黃桑洞) 1호 고분에서 출토된 길이 24cm의 철기와 1971년 부산시 동래구 오륜대 유적에서 발굴된 길이 21cm 및 14.3cm의 이형(異形) 철기다. 이것들도 칠지도와 마찬가지로 칼의 좌우 양쪽에 가지(枝)가 3개씩 있다. 경남 함양 상백리(上栢里)의 고분군에서도 그런 것이 출토되었는데 의장용(儀仗用)이라고 한다.

당시 백제 세력은 한층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 위치에 있던 백제왕이 왜왕에게 복속(服屬)해서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하는 것은 백제 쪽 정세를 살필 때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다. 더구나 명문 자체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확증할 만한 글귀는 없다. 백제왕이 '모든 군사(百兵)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벽사(僻邪)의 주도(呪刀)를 만들어 왜왕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군사 동맹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었으리라. 

고사기의 오우진 천황조를 보면, '백제국의 근초고왕이 횡도(橫刀) 및 큰 거울(大鏡)을 바쳤다(貢上)'고 씌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횡도와 큰 거울을 칠지도와 칠자경으로 쓰고 있다. 어쩌면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칠지도가 실제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칠지도에 대한 기사를 쓴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에다 마사아키는 칠지도와 관련해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칠지도에서 없어진 네 글자>

칠지도의 명문을 살펴보면 명문 끝쪽의 4개의 글자가 깎여 있다. 즉 □□□□作으로 되어 있다. 누가 이 4개의 글자를 깎아버린 것인가. 우에다 마사아키는 그 4글자는 누군가 고의로 깎은 것이라고 했다.

칠지도 몸체의 앞뒷면에는 금상감으로 60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칼 아래쪽 약 3분의 1 되는 지점이 부러져 있으며, 명문(銘文)도 깎여 떨어진 부분이 적지 않고, 고의로 깎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石上神宮と七支刀, 1973)

이 칼을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처음으로 찾아내고 녹을 떼내 금상감이 된 명문을 세상에 알린 것이 스가마사토모였음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그가 칠지도의 녹만 떼어낸 것이 아니고 네 글자도 깎아버렸다는 말인가. 그는 칠지도 앞뒷면이 검게 녹슬어 있어서 모든 녹을 떼내고 금상감이 되어 있는 명문 글자들을 찾아냈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그는 1877년 이소노카미 신궁 궁사직을 떠나 일본 군국주의 내각이었던 태정관(太政官)의 편사국(編史局)으로 자리를 옮겨갔고, 1888년에는 토우쿄우 대학의 편사국 편사관이 되었다. 그는 편사국에서 일하면서 「임나고」(任那考, 『史學會雜誌』, 1893)라는 논문을 썼는데,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갖다 바쳤다는 일본서기의 헌상(獻上) 기사를 제시하고 일본서기의 허위 기사인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역설했다.

그가 이 논문을 발표한 시기는 25만 명의 일본군이 이미 조선반도에 들어와 머지 않아 청나라로 밀고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중책을 맡은 그도 아마 일본 군벌의 중압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임나고가 일본의 조선침략의 역사적 근거를 세우는 데 이용되지는 않았을까. 여하간 백제왕의 신보(神寶)인 칠지도 앞면의 네 글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깎인 것인가.

스가 마사토모가 이소노카미 신궁의 책임자(궁사)로 근무하던 시기(1873~77)였을까, 아니면 그 후의 일일까. 일본의 군국주의가 날로 팽창하여 '정한론'(征韓論)을 구체적으로 보강시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論吉)의 '탈아론'(脫亞論)이 주창된 1885년 3월 16일 이후의 일이 아닐까 추찰해 보기도 한다. 또 이런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군국주의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필경 깎여버린 그 넉 자는 '백제왕국' 이나 백제인 도검(刀劍)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온사 명칭 바꾼 군국주의자들>

야사카 신사의 축제를 기온마쓰리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 이 야사카 신사의 사당 명칭이 '기온사'(祇園社)였기 때문이다. 야사카 신사라는 사당의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이 지은 이름이다. 메이지 유신 때 일본 정부는 불교를 배척했다. 그래서 그때까지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신불 동일체의 종교적인 관습을 깨고 신만을 국가적으로 받들면서, 이른바 황국사상이라는 국수주의적인 종교 관념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러한 것이 군국주의 일본의 새로운 기치를 내거는 일이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에 의해 '기온사'는 이름이 '야사카 신사'가 되었고, 불교적인 요소는 제거되었다. 물론 기온사 사당은 고대부터 신라신인 우두천왕(스사노오노미코도)을 제신(祭神)으로 삼고 제사드려 왔다. 그러나 신사적인 성격보다는 불교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게 강했던 곳이다. 더구나 신라에서 기온사(祇園寺)라는 사찰을 진흥왕이 세웠는데, 이 사찰은 쿄우토의 기온사와 연관이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온마쓰리가 일본에서 가장 큰 제례 축제인 까닭은 기온사가 바로 마쓰리의 원류(源流)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3대 마쓰리는 쿄우토의 기온마쓰리, 오오사카의 텐만마쓰리(天滿祭)와 토우쿄우의 칸다마쓰리(神田祭)다. 그런데 오사카의 텐만마쓰리나 토우쿄우의 칸다마쓰리의 원류는 바로 기온사의 기온어령회(祇園御靈會)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고 보면 기온마쓰는 한국신 우두천왕제로서 일본의 모든 마쓰리의 총본산을 이루어오고 있는 것이다. 일본 천황가가 한국인 왕들에 의해 왜나라를 지배해 왔다는 것은 이와 같은 거창한 제신(祭神)의 마쓰리 전통 문화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는 데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쿄우토의 기온사인 야사카 신사는 전국 각지에 7만 9천1백52사(1992년 통계)를 지역 신사로 거느리고 있다. 이들 각지의 야사카 신사에서는 해마다 7월(음력 6월)에 한국신 우두천왕을 모시고 제사드리며 마쓰리를 성대하게 거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쿄우토의 야사카 신사는 총본사이거니와 이곳의 궁사(宮司, 최고 책임 신궁)는 고구려 사신이었던 이리지의 후손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고 야사카 신사의 궁사인 타카라 요시타다(高良美忠)씨는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야사카 신사는 이리지의 장남 마테(眞手)의 자손들이 대대로 야사카노 미야쓰코(八坂造, 齊明天皇이 고구려에서 온 사신 伊利之에게 내려준 양성)를 세습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八坂神社, 1972)

『신찬성씨록』에도 '야사카노 미야쓰코(八坂造)는 고구려인 이리지(伊利之)이다'라고 밝혀져 있다. 이리지는 옛 문헌에 고구려 사신 이리좌(伊利佐, 이리사)로도 간혹 표기되어 있으나 이리지와 틀림없는 동일 인물이다.

스이코 천황은 현재 우리 옷과 조금도 다름없는 고쟁이와 치마를 입고 코끝이 오똑한 버선을 신었다. 그녀는 596년 11월 백제식 대가람인 호우코우지(法興寺)를 준공시키면서 마침내 왜나라를 불교국가로 만들려는 기치를 높이 쳐들었다. 백제으 성왕이 왜나라 백제인 킨메이 천황에게 불교를 포교한 이후 불교는 배불파에게 두 번의 수난을 겪은 끝에 성왕의 포교 56년째인 반세기만에 왜나라 아스카(飛鳥) 땅에서 마침내 그 성업을 이룬 것이다.

스이코 천황은 아버지 킨메이 천황이 못다 이룬 불교국가를 이룩한 자랑스러운 한국 여성이다. 부왕인 킨메이 천황뿐만 아니라 부군 비다쓰 천황조차도 배불파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 대련 등에게 불교 배척의 시련을 겪은 것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본 스이코 천황은 이제 39세로 아스카 땅에서 등극한 왜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다행히 친외삼촌인 최고대신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0~626)가 목숨마저 내건 강력한 숭불 투쟁으로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당을 파멸시켰고, 드디어 아스카땅에 백제식 가람 호우코우지를 세웠다. 이 기쁜 소식을 스이코 천황은 본국인 백제의 위덕왕(威德王, 554~598)에게 즉시 알렸다.

위덕왕은 크게 기뻐했다. 부왕인 성왕의 큰 뜻이 이제야 비로소 왜나라 스이코 천황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위덕왕은 성왕이 554년에 서거한 뒤 그를 추모해서 훌륭한 불상을 만들었다. 그 불상은 녹나무(樟木)로 조각한 높이 1.7m의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이다.

위덕왕은 이 구세관음상을 잘 모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 왜나라에서 불교 포교에 앞장선 스이코 천황이 592년 등극한 것이다. 위덕왕은 매우 기뻐하며 구세관음상을 스이코 천황 원년에 보내주었다.(『부상략기』). 이 구세관음상은 현재 나라의 호우류우지(法興寺) 몽전(夢殿)에 모셔져 있는 일본 국보다. 더구나 이 구세관음상은 아무 때나 배관할 수 없는 호우류우지의 귀중한 비불(비불)로서, 봄 가을 두 번의 관람 기간에만 볼 수 있다.(4월 11~5월 5일, 10월 22일~11월 3일).

백제 위덕왕이 이 구세관음상을 스이코 천황에게 보내준 지 3년 만에 나라땅 아스카에서 호우코우지(아스카지)가 준공되었다. 588년 3월부터 백제인 최고 대신 소가노 우마코가 착공한지 8년 만인 596년 11월의 일이다. 그동안 이 호우코우지를 세우기 위해 백제에서 수많은 사찰 건축가와 각종 기사며 사신과 스님들이 왜나라로 건너왔다. 이 가람을 완성시키는데 앞장선 것은 소가노 우마코 대신만이 아니었고, 스이코 천황의 노력도 컸다. 또 독실한 불교신도인 성덕태자는 이 곳에 머물면서 고구려의 혜자(惠慈) 스님과 백제의 혜총(惠聰) 스님 문하에서 불경 공부를 했다. 법당들이 하나하나 세워지는 가운데 대패질이며 톱질소리, 주춧돌 쪼는 징소리를 온종일 들으면서 나이 어린 성덕태자는 불교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린 소년은 왜나라 땅에 불교를 포교시킨 성왕의 거룩한 뜻을 늘 가슴속에 아로새기며 호우코우지 완공의 날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성덕(聖德)'은 일종의 법명이며, 백제 성왕(聖王)의 덕(德)을 입었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본다.

호우코우지가 세워지면 불교국가를 이룩하겠다던 의지의 한국 여성 스이코 천황은 성덕태자의 친고모였다. 성덕태자는 스이코 천황의 친오빠 요우메이 천황(用明天皇, 588~587)의 왕자였다. 13세 때 부왕을 잃고 불경 공부에만 전념하던 성덕태자는 스이코 천황이 등극하자 소가노 우마코 대신에 의해 친고모의 태자가 되고 또한 정치적이 섭정이 되었던 것이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바로 성덕태자의 친외할아버지였다.

스이코 천황과 소가노 우마코 대신 그리고 성덕태자 이 세 사람은 아스카 시대 한국불교가 왜나라에 정착하는데 가장 공헌한 삼두마차였다. 이 세 사람이 없었다면 한국 불교의 왜나라 정착은 훨씬 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 고대 한국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아스카 문화, 곧 한국 불교 문화에 대해서 우리나라 역사책에도 상세하게 기록해두어야 한다.

<일본으로 전래된 고조선의 천신(天神) 신앙>

이 큰 나무인 솟대는 신목(神木)으로서 천신이 깃들이고 있는 신성한 나무다.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우리는 조상대대로 솟대를 섬기면서 마을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드리고 축제를 거행해왔다. 그와 같은 신목에 대한 솟대 신앙은 고대의 한국인 정복왕들에 의해 왜나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에다 마사아키는 솟대를 섬긴 고조선 사람들의 천신 신앙이 바로 일본의 신목제사(神木祭祀)터인 신리(神籬, 히모로기)임을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소도라고 부르는 별읍(別邑)이 있고, 그 곳에 큰 나무을 세워 방울을 걸어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하는 위지동이전의 한(韓)의 항목이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것은 실로 고대 일본의 신리(神籬, 히모로기)인 것이다. 신이 깃들이는 나무인 신목(神木)을 제사드리는 마쓰리(祭)였다.

일본의 고대 역사에서 신화시대에는 신성한 나무를 신목으로 삼고 신이 깃들이는 곳으로 삼아 신상제(新嘗祭, 니이나메사이)를 지냈던 자취들을 능히 살필 수 있다. 신화시대의 신들의 신상제는 가을의 수확을 농신(農神)에게 감사드리는 제례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제의를 거행한 신은 아메와카히코(天稚彦)와 야마사치히코(山幸彦)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뿐 아니라 농신에게 제사드린던 집을 '신상옥'(新嘗屋, 니이나메야)이라고 호칭했던 것이 고사기(古事記)에 실린 두 곡의 가요에 보인다. 그 내용을 보면 신상옥에는 신성한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지동이전의 고구려 항목에도 '궁실(宮室) 좌우에다 큰 집(大屋)을 세우고 신에게 제사지냈다'는 고구려 때의 제신(祭神) 유습의 기사가 있다. 즉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고구려의 동맹 또는 동명(東明) 제사 때 왕실에서 궁의 좌우에 천신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을 지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이와 같은 제례의식이 고대 왜나라로 옮겨간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왜나라 천황들이 한국신(백제신과 신라신)에게 제사드리는 신상제가 정식으로 기록된 곳이 일본서기다. 여기에는 코우교쿠 천황(皇極天皇(여왕), 642~645, 백제인 죠메이 천황의 황후) 원년 11월 16일 토끼날(卯日) 천황이 몸소 신상제를 거행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역대 천황들은 해마다 같은 날인 음력 11월의 두 번째 토끼날 신상제를 거행했으나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또 세이와 천황(淸和天皇, 858~876) 때는 11월 15일인 두 번째 범날(寅日) 거행한 일도 있다. 그후 히가시야마 천황(東山天皇, 1687~1709) 때부터 다시 거행되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3년부터는 천황가에서 신상제를 양력 11월 23일로 정했다. 한편 2차대전 패전 직후 미군점령기인 1947년부터는 이날을 '근로감사의 날'이라는 축일로 정했다. 당시 미군은 천황가를 견제했다. 이날이 일반국민에게는 평범한 공휴일의 하나지만 천황가의 궁중 신전에서는 여전히 신상제를 거행하며 지금에 이른다



<나라(奈良)는 '국가'라는 한국어>

아스카의 7당가람에서는 이제 누구든지 아스카의 호우코우지를 찾아가 예불할 수 있게 되었다. 감히 불전을 파괴한 국신파들은 모두 섬멸된 것이다. 그러기에 아스카의 '테라'로 사람들의 발길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절'을 말하는 일본어 '테라'는 한국어의 '절'에서 생긴 말이라고 불교사학자 타무라 엔쵸는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오늘의 평안도 사투리처럼 '절'을 '뎔'이라고 말했던 게 아닌가 한다. 호우코우지(아스카지)에 온 고구려 고승 혜자 스님 등이 '뎔'이라고 하는 말을 왜인들이 '뎌라' 등으로 발음하던 것이 '테라'로 변화한 것으로 본다. 여하간 아스카의 호우코우지로부터 본격적으로 '테라'라는 말이 퍼졌을 것 같다.

또 '나라'(奈良)로 말하자면 한국어의 '나라' 즉 '국가'를 말하는 이두식 한자어 표현이다. 그게 사실인가. 일본의 권위 있는 고어학자 마쓰오카 시즈오는 그의 명서 『일본어고어대사전』(1929)에서 일본어 '나라'는 한국어로 '국가'라고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나라'는 야마토(大和)의 지명. 도읍으로 유명하다. 나라는 한국어에서 국가라는 뜻이므로, 상고 시대에 이 고장을 점령하고 살던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마쓰오카 시즈오는 그후 8년 뒤인 1937년에 저술한 『신편 일본고어사전』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라(奈良):국가라는 뜻. 야마토의 옛 지명으로서, 상고 시대에 이 지역을 점거하고 살던 한국 출신의 이즈모족(出雲族, 신라인)이 쓴 이름이라고 본다.

나라(奈良)가 한국어의 국가라고 가장 먼저 밝힌 것은 저명한 역사지리학자 요시다 토우고(1864~1918, 문학박사)였다. 1900년에 간행한 저서에서 그는 "나라는 한국어의 국가다"라고 설명하면서 한글로 '나라'라고 굳이 표기하여(100쪽 도판의 표시부분) 주목을 끌었다.

일본 근대의 가장 권위 있는 국어학자 오오쓰키 후미히코(1847~1928)도 그의 저서인 『대언해』라는 일본어 사전에서 "나라는 조선어로서 도읍지(왕도)를 가리키는 말임"을 입증했다. 그밖에도 현대의 역사학자인 칸사이가쿠인 대학 교수 나가시마 후쿠타로우도 '일본역사학회'에서 편집한 그의 저서에서 나라는 한국어의 국가임을 입증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것이 있다. 현재의 일본 나라 지방을 가장 먼저 지배한 것은 신라인들이라는 점이다. 앞에 예시한 학자들이 '나라'라는 말을 만든 것이 신라인이라고 한 지적에서도 그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이 백여 년간 나라 땅을 지배한 후에야 그 고장으로 백제인들도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즉 카와치(오오사카) 지방에서는 4세기 후반에 백제왕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와치의 동쪽 멀이 떨어진 고장인 나라 땅에서 이미 2세기 말경부터 신라인들의 왕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오우진 천황과 닌토쿠 천황 시대(5세기) 이전에는 신라계의 스진(崇神) 천황이 3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정복왕으로서 나라 지방을 점거했던 것으로 본다. 그 과정은 토우쿄우 대학 교수 에카미 나미오가 쓴 『기마민족국가』(1948)에서의 '스진 천황의 왜나라 정복론' 및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 전설'등과 함께 밝히겠다.


<닌토쿠 천황이 천도한 백제군 터전 '나니와쓰'>

니이자와 천총의 고분들은 언제 누가 조성한 것일까. 카도와키 테이지(門脇禎二, 1925~)는 전체적으로 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형성된 후 6세기 전반기에 이르면서 쇠퇴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니이자와 천총은 백제인들이 키타큐우슈우(北九州)로부터 일본 내해(內海)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본토인 카와치 즉 지금의 오오사카 지방으로 상륙해 교두보를 탄탄하게 이루게 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당시 카와치 나루터는 그 이름이 나니와쓰(難波津)였고, 이 명칭은 백제인 왕인박사가 405년에 붙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노우에 마사오(井上正雄)는 일찍이 1922년에 "나니와쓰는 그 무렵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항구였으며, 이 항구를 본격적으로 건설한 것은 백제인들이었다"고 옛 문헌을 인용해 밝힌 바 있다. 나니와쓰로부터 동북쪽으로 인접한 곳에는 바로 백제인들의 무덤인 니이자와 천총이 자리잡고 있다.

또 나니와쓰, 즉 난파진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본국 백제에서 고대 왜나라 본토에 진입하는 데 가장 좋은 항구였다. 본국 백제에서 인력과 물자를 수월하게 지원받을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난파진 일대가 백제왕부의 새 터전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기에 오오사카 일대의 옛날 명칭은 '백제군'(百濟郡)이었다. 마치 영국 브리타니아의 가장 큰 도시였던 요크(York) 출신들이 대서양을 건너가 아메리카 땅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항구를 뉴욕이라고 이름붙였듯이, 고대 백제인들도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일본 열도에 건너가서 이룩한 새로운 식민지 항구를 난파진(나니와쓰)으로 명명하고 이 일대에 백제군이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 백제군이야말로 5세기 초 카와치 왕조(河內王朝)를 시작한 닌토쿠 천황의 본거지였다. 백제인 닌토쿠 천황은 부왕인 오우진 천황을 계승해서 왕위에 오른뒤 곧 지금의 오오사카땅인 카와치의 난파진 나루터에 왕궁(高津宮)을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파진은 카와치땅에서 닌토쿠 천황의 이른바 '카와치 왕조'의 번영의 터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노우에 마사오는 그의 저명한 고대백제 지정학사(地政學史) 격인 『오오사카부전지』(大阪府全志)에서 또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백제군에는 그 옛날 남백제촌(南百濟村)과 북백제촌(北百濟村)이 설치되어 있었다. 남백제촌에서는 응합촌(鷹合村)·사자촌(砂子村)·중야촌(中野村)이라고 하는 대단위 행정구역들이 있었다. 응합촌의 경우는 닌토쿠 천황 43년(5세기 중엽) 9월에, 아이고(阿耳古)가 잡은 매(鷹)를 백제인 주군(酒君, 사케노키미)에게 사냥에 쓸 매로 길들여 달라고 맡기면서 닌토쿠 천황이 이 터전에다 응감부(鷹甘部)라는 관청을 설치한 데서 생겨난 지명이다. 당시 닌토쿠 천황의 타카쓰궁(高津宮)은 난파진에 있었으며, 이 고장과 거리상 가까웠다. 백제의 주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 고장에서 장례를 지냈으며, 닌토쿠 천황은 그에게 '응견신'(鷹見神)이라는 제신(祭神)의 시호(諡號)까지 내렸던 것이다.

북백제촌에는 금재가촌(今在家村)을 비롯해서 신재가촌(新在家村), 금림촌(今林村) 등 큰 행정구역이 속해 있었다. 또한 천왕사촌(天王寺村, 현재의 大阪市 天王寺區)은 본래 백제군에 속한 큰 행정구역이었다. 그밖에도 석천백제촌(石川百濟村)과 백제대정(百濟大井)등의 지역이 난파진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군과 닌토쿠 천황의 교유는 일본서기에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닌토쿠 천황 43년 9월 1일 아이고가 이상한 새를 잡아다 천황에게 바치면서 "저는 항상 그물을 치고 새를 잡는데, 전에는 이런 새를 잡아본 일이 없습니다. 신기하기에 올리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천황은 주군(酒君)을 불러서 "이것이 무슨 새요?"라고 물었다. 주군이 대답하기를 "백제에는 이런 종류의 새가 많습니다. 잘 길들이면 사람을 곧잘 따릅니다. 또한 빠르게 날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새도 잡아옵니다"고 말했다. 이것은 지금의 매다. 왕은 매를 주군에게 길들이게 했다. 주군은 얼마 안 되어 매를 길들였다. 그는 가죽끈을 매의 발에 묶고 작은 방울을 꼬리에 달아 팔뚝에 얹어 천황에게 바쳤다. 이날 천황은 모즈노(百舌鳥野)에 납시어 사냥하게 되었다. 마침 암꿩이 많이 날았다. 매를 풀어서 잡으니 금세 수십 마리나 잡게 되었다. 이날 처음으로 응감부(鷹甘部)라는 부서를 설치했다.(日本書記).

닌토쿠 천황이 총애했던 주군은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백제에서 건너와서 카와치 조정에 근무했던 근신(近臣)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타계하자 천황이 애도하며 '응견신'이라는 시호까지 서슴지 않고 내렸던 것이다. 현재 카와치에는 커다란 주군의 비석이 서 있어서 그 옛날의 발자취를 입증해주고 있다.


<대 신라 외교에도 능통했던 슬기로운 스이코 천황>

길사반금은 신라에 갔다가 이듬해 4월 진평왕이 하사한 까치 두 쌍을 가지고 스이코 천황의 어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스이코 천황6년(598) 4월 사신 길사반금이 신라에서 돌아와 여왕에게 까치 두 쌍을 바쳤다. 여왕은 까치들을 난파(難派, 지금의 오사카 난바)의 사당(사당) 숲속에 풀어서 길렀다. 까치들은 나뭇가지에다 둥지를 틀더니 새끼를 쳤다. 8월 1일 신라에서는 공작도 한 쌍 보내주었다. 

백제인 스이코 천황이 신라의 진평왕에게 사신 길사반금을 친선차 보낸 것은 상호 두 국가의 화친은 물론 왜나라 불교 중흥을 위한 값진 외교 활동이었다. 진평왕에게 호우코우지가 준공된 사실을 알리면서 스이코 천황은 신라 불교의 지원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진평왕은 호감을 갖게 되어 당시 왜나라에는 없던 길조인 까치 두 쌍을 쾌히 보내준 것이다. 더구나 4개월 뒤에는 공작도 한 쌍 보내주었다. 스이코 천황이 난바(難波, 나니와)의 사당 숲에다 까치를 놓아 기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난바란 그 옛날 백제의 초기 닌토쿠 왕조가 자리했던 카와치의 항구이며, 그곳에는 백제의 왕가의 사당이 있었으므로 녹음이 짙은 숲에서 고국땅의 길조가 잘 자라기를 바랐던 것이다. 진평왕은 당시 왕위에 오른 지 19년째가 되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슬하에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덕만공주(德曼, 뒷날의 선덕여왕) 등 공주들만 있었다. 진평왕은 왜나라이 백제인 스이코 천황의 등극을 보고 덕만공주를 뒷날의 왕위 계승자로 삼고자 마음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서 왜나라 백제인 여왕의 존재는 신라 왕실과 신하들을 설득시킬 만한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스이코 천황이 진평왕에게 보낸 사신 길사반금은 백제인이 아닌 신라인 조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당시 나라땅의 신라인 호족 길사씨 가문의 후손이다. 그 무렵 스이코 천황의 조정에는 길사반금뿐 아니라 총애하던 또 한 사람의 신라인 조신 진하승(秦河勝, 하타노 카와카쓰, 6세기말~7세기경)이 있었다. 진하승은 그때 재무장관직을 맏았던 고관이며, 또한 야마사로(쿄우토) 땅 신라인 호족 진씨 가문의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스이코 천황의 조정에는 백제인 고관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신라인 고관들도 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조정의 고관으로서 선주민(先住民)인 왜인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왜인들은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들이며, 처음부터 한국인 정복왕(신라인 왕이나 백제인 왕)의 지배 아래 노예나 천민 등 하층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저명한 역사학자 세키 아키라의 저술(『歸化人』, 至文堂, 1968)에서도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문자를 다루는 일은 장기간에 걸쳐 귀화인(왜나라에 건너간 한국인) 씨족들이 도맡아서 전문적으로 처리해오고 있었다. 6세기 중엽이 되면 일본인(선주민)들 중에서도 조금씩이나마 문자를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생겼을 법한데도, 정치 관계 문서 등의 기록을 작성하거나 재물의 출납, 조세의 징수 또는 외교 문서의 취급과 같은 실무에 있어서는 역시 귀화계의 사람들, 즉 후히토(史, 한국인 고등 행정관리)들만의 독무대였다.'

이와 같이 한국인 정복왕조에서는 한국인 고관들이 선주민 왜인들을 지배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아스카 스이코 천황 시대에 특히 역량이 컸던 인물은 야마시로(山城, 지금의 京都 지역)의 호족 지배자며 부호였던 신라인 진하승이다. 재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재무장관을 지냈을 뿐 아니라 특히 섭정이던 성덕태자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스이코 천황이 진하승을 신라 진평왕에게 특사로 보낼 수도 있었으나 길사반금을 사신으로 보낸 것은 그동안 길사 가문이 대 한반도 외교에 솜씨를 발휘해 왔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을 보면 길사 가문에서는 외교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신라인 길사반금을 사신으로 보낸 것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두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무령왕과 케이타이 천황 형제 입증하는 '인물화상경'>

무령왕과 케이타이 천황이 친형제임은 고대 금석문이 그 내용을 입증한다. 무령왕이 503년에 아우인 케이타이 천황을 위해 왜나라로 보낸 청동거울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이 그 증거물이다. 이 청동거울이 '인물화상경'이라 불리는 것은 왕이며 왕족 등 말을 타고 있는 9명의 인물이 거울에 양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백제의 기마문화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무령왕이 아우에게 보내려고 만든 '인물화상경'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토우쿄우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 '인물화상경'을 처음에는 '스다하치만신사화상경'(隅田八幡神社畵像鏡)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한동안 우에노의 토우쿄우 국립박물관에 전시했지만 요즘에는 전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 박물관 어디엔가 보관해 놓은 것 같다.

이 '인물화상경'은 지름 19.8cm인 둥근 청동제 거울인데, 바깥 둘레를 따라 빙 돌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癸末年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柴紗加宮時, 斯麻, 念長壽, 遺開中費直穢人令州利二人等, 取白上銅二百早, 作此竟

이상과 같은 한자어 명문은 현대의 일본 역사학계가 판독하고 있는 글자들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503년 8월 10일 대왕(백제 무령왕)시대, 남동생인 왕(케이타이 천황. 오호도)이 오시사키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의 아들)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 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파견하는데,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이 명문은 무령왕이 친동생 케이타이 천황이 왜나라 땅에서 건강하게 오래도록 잘 살라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누가 읽거나 친형제간의 뜨거운 우애가 물씬 느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일본학자중에는 이 명문에 대해 엉뚱한 주장들을 펼치면서 본말을 전도하는 이들이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명문에 나타난 계미년(계미년)이 서기 몇 년을 가리키느냐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계미년을 443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63년 설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263년 설을 주장한 사람은 타카하시 켄지(高橋健自, 1871~1929)다. 그는 이 청동제 거울을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橋本市)에 있는 스다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라는 사당에서 찾아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 거울을 찾아낸 후 1914년에 논문을 발표하여 일본 사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263년 설은 오늘날 일본 학계에서는 근거 없는 것으로 묵살당하고 있다.

타가하시 켄지가 '263년의 계미년'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와다 아쓰무는 그것이 엉뚱한 주장이라며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타카하시설을 보면, 명문에 보이는 사마(斯麻)를 일본서기의 진구우기(神功紀)에 등장하는 사마숙니(斯麻宿녜 시마노스쿠네)와 연결짓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계미년에 관한 고증에는 무리가 있다.

사마숙니의 실존 여부를 떠나서 일본서기에 조신(朝臣)으로 묘사된 일개 신하가 주술적인 청동거울을 만들어 감히 왕에게 하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서기의 진구우기는 '가공의 조작된 기사'라는 게 공론화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사마숙니는 인물화상경의 '사마'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타카하시 켄지는 1911년에 왜국 왕가의 '3종(三種)의 신기(神器)', 즉 거울과 검(劍)과 옥(玉)에 관한 연구서 『鏡と劍と玉』를 써서 일본 사학계에 두각을 나타낸 고고학자다. 그런 그가 사마(斯麻)라는 휘를 가진 무령왕을 염두에 두지 않고 등장 인물조차 시대적으로 전혀 걸맞지 않은 사마숙니라는 일개 조신 쪽으로 논조를 몰고간 까닭이 석연치 않다. 그와 같은 터무니 없는 연대와 인물의 계기는 어쩌면 그가 의도적으로 무령왕을 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을 합병(1910년 8월 23일)한 직후였던 긴박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타카하시는 당시 토우쿄우 제실(帝室)박물관의 감사관이며 역사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한국 침략에 앞장선 서슬 퍼런 일제 고관들의 비위를 건드릴 만큼 어리석은 짓을 자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한반도를 무력으로 침략하는 비상시국에 하물며 고대 백제왕이 왜나라의 후왕(候王)의 친동생 케이타이 천황에게 장수를 기원하는 주술적 거울을 만들어 보낸 것을 스다하치 만궁에서 예부터 모셔왔다고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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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전에서 남부가 북부에게 승리한 이후 대체역사에서의 세가지 역사가정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312355
메흐메트2세가 조금만 더살았다면 바실레이오스2세의제국을부활시킬수있었을지도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321385
간지( 姦智 )가 살살( 殺殺 ) 넘치는 프랑크의 왕 클로도베크의 일화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322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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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阿踰陀國의 신비
수로왕릉 정문(納陵)에 새겨진 神魚像. 가락국 시절의 國章이다.
 옛날 경상남도 金海지방에 伽倻(가야)라는 나라가 있었다. 三韓(삼한)시대에 변진(弁辰 또는 弁韓)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자라난 고대국가인데 이 나라의 처음 이름이 駕洛國(가락국)이다.
 
  가락국의 초대왕인 金首露王(김수로왕)은 阿踰陀國(아유타국) 공주인 許黃玉(허황옥)과 결혼하였다.
 
  三國遺事에 수록된 駕洛國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서기 48년 7월27일 붉은 돛을 단 배가 해안에 도착한다. 배에서 20여 명이 상륙한다. 그 중 한 여인이 수로왕에게 자기를 소개한다.
 
  『저는 아유타국 공주입니다 성은 許(허), 이름은 黃玉(황옥), 나이는 16세입니다』
 
 
  「妾是 阿踰陀國 公主也. 姓許 名黃玉. 年二八矣」
 
 
  수로왕이 왕비를 맞아들이는 과정이다. 이들의 결혼으로 10왕자 2공주가 탄생하여 오늘날 金海 金氏의 조상이 되었고 아들 중에 두 사람에게는 어머니의 성인 許씨를 賜姓(사성)하여 김해 許氏의 조상이 되었다.
 
  아유타는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 있던 고대국가의 이름이다. 현대 인도어로 Ayodhia 라고 쓰고 「아윳다」라고 발음한다.
 
  허황옥의 한국 도착은 고대 항해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스터리로 치부되었고, 한국사에서는 이 시대가 희뿌연 안개 속에 싸여 있을 뿐이고, 인도 출신 허황옥의 가락국왕과의 결혼이야기는 한국사의 여명기인 2000년 전 일어난 국제결혼 사건 정도의 에피소드로 취급돼 왔다. 우리 역사에서는 신화시대 수준이지만, 서기 1세기 때는 세계사에서 중국은 後漢(후한) 때이고 서양사에서는 로마시대이다. 이미 중국의 諸子百家(제자백가) 시대가 지나갔고, 그리스 과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알렉산더가 인도를 다녀간 후이다.
 
 
  마주 보는 두 마리 물고기
 
  나의 아유타국 연구는 실로 하찮은 이유로 시작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피부가 유달리 검었다고 한다. 보통의 한국인들보다 훨씬 검게 타고난 피부 때문에 할머니로부터 자주 놀림을 받았고 집안 행사 때면 모이는 친척들까지도 나의 피부가 검은 것에 대하여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그까짓 일로 상심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사춘기 때부터 나기 시작한 여드름 때문에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自問하기 시작하였다.
 
  「역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김해 김씨의 조상인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 출신이기 때문에 그 후손의 한 사람인 나의 얼굴도 인도인처럼 검게 된 게 아닌가? 그래도 2000년 전에 있었던 국제결혼의 흔적이 설마 지금까지 계속 나타날 수는 없을 터인데」
 
  그 정도의 의문을 지닌 채 나는 대학에 진학하였다. 사회인류학 강의를 통해 族內婚과 族外婚의 풍속을 배우면서 한국인들은 同姓同本끼리는 혼인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異姓이면서도 同本인 경우에도 결혼을 꺼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예가 바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관계이다. 즉 김해 허씨는 허황옥 왕비의 성을 딴 자손들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부모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가 전하는 수로왕의 혼인 설화는 김씨族과 허씨族 사이에서는 단순한 설화 이상의 역사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의문의 원인 제공자인 김수로왕과 허황옥 할머니의 능을 참배하러 김해까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맞닥뜨린 것이 수로왕릉의 대문에 새겨 있는 神魚像(신어상)이었다.
 
  神魚像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며 가운데 있는 어떤 물체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두 왕릉의 배후에 있는 산의 이름도 신어산이고, 신어산에 있는 銀河寺(은하사)라는 절에도 수미단에 神魚像이 두 개나 조각되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검은 피부와 神魚像은 이렇게 어우러지면서 그 후 수십 년간 나로 하여금 인도와 아유타국 연구에 빠지게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神魚像은 가락국이 발전한 가야의 영역권인 경상남도 지방에 있는 오래된 불교사찰과 祠堂(사당)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惠超가 다녀온 다섯 天竺國 중 하나
 
  아유타국은 지금의 인도 땅 아요디아 (Ayodhia)인 것 같다고 선대의 학자들이 추측하였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 학자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추측만 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현장을 답사한 사람이 在野사학가인 故 李鍾琦(이종기)씨였다. 李씨는 펜클럽대회 참석차 인도에 갔다가 김수로왕릉에 그려져 있는 雙魚紋(쌍어문:신어상)이 아요디아에 무수히 많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돌아와 「駕洛國探査(가락국탐사)」라는 책을 써냈다. 1970년대의 일이다.
 
  가락국의 國章격인 神魚像이 한국 땅에는 가야문화가 퍼진 경남 일대를 중심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과 인도의 아요디아에서도 쌍어문이 사원의 대문마다 그려져 있다는 李鍾琦씨의 말을 듣고 나니 직접 인도를 답사하지 않으면 나에게 검은 피부의 인자를 제공했을지도 모르는 인도공주의 미스터리를 천착해 볼 길이 없게되었다.
 
  그래서 인도에 가게 되었다. 1985년의 일이었다 뉴델리에서 비행기 편으로 동쪽으로 한 시간쯤 가면 럭나우라는 도시에 내려서 차 편으로 150km를 동쪽으로 가는 곳에 아요디아가 있다. 아요디아는 산스크리트語로 「정복되지 않는 땅」이라는 뜻이다. 혜초의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에 기록된 다섯 개의 천축국 중에 中天竺國에 해당된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의 탄생지이다. 그런 만큼 아요디아에는 수많은 전설과 역사가 색색가지의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그 실타래를 조심스럽게 푸는 사람이 인도의 고대사를 잘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힌두교의 신비를 캐어 내는 작업의 단초를 찾는 사람이 된다.
 
 
  힌두교와 카스트의 나라
 
  카스트(Cast) 이야기를 조금 하자. 인도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적인 계급이 정해져 있다. 그들은 브라만(신앙지도자), 크샤트리아(통치계급), 바이샤(생산계급), 수드라(천민)의 네 계층 중 하나로 태어난다. 이들은 직업만 다른 것이 아니고 주거지역도 다르다. 그러니 다른 계급 간에 결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만약 이런 전통을 어기고 다른 계급의 사람과 결혼한 부부는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심지어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뭇매를 맞아 죽게 되는 일도 있다. 인도의 신분제도의 경직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때로는 용감한 젊은이들이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외국으로 탈출하여 살고 있는 예도 수없이 많다.
 
  그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새로운 신분 간 계급으로 불린다. 아버지가 상위 신분일 때와 어머니가 상위 신분일 때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계급이 또 새로운 신분을 탄생시켜 인도의 카스트는 수십 가지로 분화해 나갔지만 지금도 여전히 계층 간의 벽은 엄격하다. 심지어 어느 계층의 의사는 자기 계층의 환자만 치료하고 다른 계층의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님 같은 외국인이 인도인 환자를 돌보아야 할 이유가 생겼나 보다.
 
 
  믿을 수 없는 인도
 
  인도, 즉 인디아(India)라는 명칭은 페르시아 동쪽에 있는 험준한 산맥인 「힌두쿠시 산맥 너머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곳에 있는 강이 인더스 강이고 나라 이름도 인도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인도를 불교의 나라라고 우대하여 天竺國(천축국)이라고 불렀지만, 그전에는 「身毒(신독)」이라고 음역하였다. 인도인들의 피부가 검어서 혹시 몸속에 독이라도 들어 있지 않나 하는 해학적 명칭이다. 이웃 나라 이름을 비하해서 부르는 중국 사람들의 버릇 중에서도 매우 고약한 명칭이다.
 
  인도인에게 「인도」라는 역사적인 이름을 선물한 인더스 강은 지금 인도에 없다. 영국의 식민 통치를 벗어난 후 인도 대륙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면서 대륙 서북쪽의 인더스 강 유역인 펀잡 지방이 파키스탄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 반대쪽인 동쪽 지방의 갠지스 강은 하류의 벵골 지방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해 나가, 인도는 이리 찢기고 저리 뜯겨 상처 입은 공룡처럼 되고 말았다.
 
  인도 대륙의 주민들이 힌두교도들의 인도와 이슬람교도들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분리해 나가는 장면을 영화 「간디」를 통해서 본 사람들은 「과연 종교가 그 엄청난 인구를 이동시킬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했을 것이다. 인도인은 기본적으로 농업인들이다. 농업인들에게 토지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농토를 포기하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천지로 떠난 사람이 많다.
 
  그렇다. 정신적인 자유는 경제적인 자유보다 더 중요하다. 영국의 프로테스탄 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 플라워(May Flower)號에 몸을 싣고 아메리카라는 신천지로 이민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종교 생활이 자유로운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 오늘날 탄탄한 유태인 사회를 구축한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비록 힘든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도와 인도인을 깔볼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구한 인더스 문명을 모태로 살아온 인도인들은 인류 최대의 인구가 신봉하는 힌두교를 탄생 시켰고, 여기서 불교까지 꽃을 피워 지구 인구 몇 분의 일이 인도 철학의 영향 속에 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인도 대륙을 가장 멋지게 표현한 말이 「믿을 수 없는 인도(Incredible India)」이다. 10억 명의 인구가 힌두어·타밀어·우루두어·벵골어 등 수십 가지의 언어를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아직도 계급사회가 엄연히 존재하여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는 섞여 살지도 않고, 혼인도 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나라이다. 종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양대 축으로 하여 시크교·밀교 등이 섞여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한 사람의 총리가 통치하는 오묘한 구조의 나라이다. 정치·경제用 공용어는 영어이다.
 
  나에게 인도는 여러 색으로 구성된 무지개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각각의 색이 따로따로 보일 듯 말 듯하고 그 배경 뒤로 허황옥 공주의 모습 같은 영상이 희미하게 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영혼의 江- 갠지스
 
  힌두교의 源泉(원천)인 갠지스를 빼놓고 인도를 생각할 수 없다.
 
  대부분이 힌두교도인 인도인들은 그들의 영혼을 갠지스 강에 담고 있다. 갠지스 강에 걸려 있는 바라나시에서 힌두교도들의 성스러운 목욕의식과 엄숙한 화장의식은 처음 목격하는 사람에게는 섬뜩한 장면이다.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며칠 동안 식사도 못 한다. 반면에 사랑에 취한 사람들은 인도에 가면 타지마할에서 16세기 때인 모굴시대 「샤 자한」 왕이 먼저 세상을 떠난 愛妃(애비)를 기리는 남자의 애틋한 사랑의 표시를 만난다. 그래서 인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색깔로 보인다.
 
  내가 아요디아에 처음 도착하던 날은 갠지스 강의 지류인 사라유 강변에 석양이 비치고 있었다. 황토색 강물이 忍苦(인고)의 생활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힌두교도들의 몸과 마음을 씻어 주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강물에 몸을 담고 있었다. 먼길을 마다 않고 여기까지 오느라고 허비한 노력과 경비를 일순간에 상쇄하는 마력을 지닌 갠지스 강물이다.
 
  강가에는 이발사가 削刀(삭도)로 순례자의 체모를 깎아 주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들의 행복해하는 얼굴에서 우리는 인도인의 영원한 평화를 읽을 수 있다. 강변에 마련해 놓은 간이의자에 앉아 하루나 이틀쯤 후에 다가올 永眠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영면은 죽음이 아니다. 天刑(천형)과 같은 이승 시절의 카스트를 탈피하여 자유롭고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넓은 인도 대륙의 원래 주인은 드라비다族이다. 인더스 문명의 핵심지역인 「모헨조다로」와 「하라파」가 폐허된 후인 기원전 1600년경부터 카스피海 부근에 살고 있던 서양인 계통의 인종인 아리아 족들이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들 이민의 배경에는 철기문화의 확산에 따른 지역 간 전쟁이 있었다. 그 결과 유럽어 계통의 언어인 힌두語가 생겨났고 토착인들의 남하에 따라 드라비다語는 南인도 지역에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는 月刊朝鮮 2월호에서 이미 썼다. 어찌되었든 다신교인 힌두교는 소수의 집단이 큰 인구를 다스리는 통치이념으로 교묘하게 사용되었다.
 
 
  아요디아-코살(Kosala)國의 수도
 
  서기전 7세기 때쯤에 北인도는 간다라, 펀잡, 마치, 코살, 마가다, 앙가 등의 고대 왕국이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에 걸쳐 일어났다. 그 이남에는 이렇다 할 세력이 없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오늘날 네팔 땅에 있던 카피라 성에서 태어났을 때인 기원전 6세기에는 고대 왕국 중 코살국이 맹주였다. 아요디아는 코살국의 중심이었다.
 
  코살국의 조상신화엔 태고에 대홍수가 있었다. 그때 만물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때 위기에 처한 「마누」라는 인물이 커다란 물고기(Matsya)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마치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홍수 전설에서 「노아」가 살아나는 과정과 흡사하다. 마누의 먼 후손인 「익스바쿠」가 코살국을 세웠고, 그의 아들이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이다. 따라서 물고기는 코살국의 토템이자 힌두교의 한 神像이 된 것이다. 그래서 코살국의 국장이 神魚로 정해진 것이다.
 
  후대에 코살국이 망했어도 神魚를 숭앙하는 신앙은 그대로 전승되었고, 아요디아 출신의 힌두교도들은 왕조가 바뀌고 주민이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도 그들은 가는 곳마다 힌두교 사원을 세우고 그들의 神들을 경배하였다.
 
  과연 아요디아 시내에는 수백 개의 힌두교 사원이 서 있고, 사원의 대문마다 문설주 위에 神魚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박물관의 입구에 그려진 神魚는 시위가 당겨진 활과 어우러져 있고, 경찰의 계급장에도 神魚가 들어 있었다. 도처에서 神魚는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守禦者(수어자)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神魚는 아요디아 전체에서 흘러 넘치고 있고, 그 州(주)를 대표하는 州章으로 발전해 있었다. 여기는 글자 그대로 神魚國(신어국)이었다.
 
  그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神魚像은 인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었다. 집중 분포지는 이상하게도 아요디아가 중심도시인 우타르 푸라데시(Uttar Pradesh 北洲)뿐이었다. 즉 아유타국의 문화권에서만 神魚의 신비스러운 기능을 신봉하는 사상이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리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은 그해에 KBS 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아유타국의 신비, 1985」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물고기가 인류를 구해 준다는 이야기는 지구상 여러 민족의 민속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몽골 사람들도 물고기를 신성시하여 먹지 않는 풍속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기마민족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맹주 노릇을 하던 스키타이族들도 말의 장식으로 물고기 한 쌍을 달고 다녔다는 연구보고서가 있다.
 
 
  아무도 몰랐던 神魚의 상징 의미
 
  그러나 이러저러한 神魚의 흔적들이 지구의 도처에서 보이기 시작하였어도 神魚들이 상징하는 의미에 대하여는 알아낼 수 없었다. 아무도 그런 연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요디아의 박물관장도 모르고 스키타이 연구를 많이 하는 독일학계에서도 神魚의 상징성에 대한 전문가가 없었다.
 
  어느 해이었던가. 방글라데시의 다카 국립박물관 입구 바닥에 그려져 있는 神魚像들을 발견하고 박물관장과 큐레이터들에게 문의하였더니, 그들의 대답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지대인 페샤와르에서 시내를 굴러다니는 픽업 트럭에 멋지게 새겨져 있는 神魚像들을 발견하고 그 지역 미술사 권위자인 이슬라마바드 대학의 다니 교수에게 문의하였다.
 
  『글쎄요. 그런 장식을 그린 차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상징연구자가 아니라서 권위 있는 대답은 못 하겠습니다. 혹시 캘커타 대학의 무커지 교수라면 당신이 원하는 답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캘커타에 회의차 갈 일이 생겨 무커지 교수를 어렵게 수소문하여 만났더니 그는 오히려 다니 교수가 모른다면 자기도 추측성 설명밖에는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神魚의 의미에 대해 답변하는 사람은 없고 서로 핑퐁을 치고 있었다. 신성스러운 물고기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미궁으로 빠지는 듯하였다.
 
  나는 神魚에 중독되어 여기저기서 물고기만 나타나면 혹시 가락국과 관계가 있나 하고 살펴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그때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들르게 되었다. 도서실에서 미국에서 출판된 近東(근동) 미술사 책에서 두 사람이 물고기 모양의 옷을 입고 마주보고 있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유학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그 박물관의 동양부장이었던 제시카 로슨 여사에게 문의하였다. 제시카는 즉시 近東 담당 큐레이터를 소개해 주었다. 이 전문가는 나를 만나더니 단번에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 사진의 실물이 東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에게는 근동(Near East), 동양사람들에게는 西아시아로 되어 있는 이란으로부터 터키까지의 광활한 지역에 대한 문화연구는 진공상태가 되어 있다. 1960년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6일 전쟁」으로 시작된 정치적 소용돌이는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 미국과 이라크의 걸프전까지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이 지역을 한가롭게 다니면서 유적과 유물을 살피며 고대 사상이 이동하던 흔적을 찾는 유한계급들이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이 아무에게도 없었다.
 
 
  숙명적 해후에 화가 났다
 
  나는 다음날 독일로 날아갔다. 냉전 시대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은 관광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東베를린 지역에 페르가몬 박물관이 있었다. 거기에 내가 평생을 바쳐 만나려고 노력했던 마음속의 연인이 있었다. 돌로 만든 神魚像이 있었다.
 
  거대한 석제 水槽(수조)의 외벽에 양각으로 새겨진 神魚像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서 이름도 뜻도 모른 채 神魚像이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의 한 박물관에서 자기를 찾고 있는 지구상의 단 한사람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神魚像이 새겨 있는 수조는 바빌로니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센나게립王이 세운 궁전 중앙에 있던 신앙용 聖水를 담는 거대한 물통이었다.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복원한 것이었지만 조각은 선명하였다.
 
  神魚像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어떤 신앙의 상징이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신전 대문 위나 聖水용 수조에 조각하였다. 그들의 主神은 오아네스(Oaness·水神)이고 그 神을 물고기 모양의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 司祭가 양쪽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사제는 바빌로니아式 사각형 수염을 기르고, 왼손에는 물통을 들고 오른손에는 부채 같은 기구를 들고 主神을 향하여 물을 뿌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제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물고기의 껍질을 뒤집어쓴 것처럼 위로는 머리, 아래쪽으로는 물고기의 꼬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물고기의 비늘도 선명하게 선각되어 있었다.
 
  한국의 神魚像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평행으로 마주하고 있고, 아요디아의 神魚는 45도 정도로 일어선 채 마주보고 있는 데 비하여, 바빌로니아의 神魚는 사람처럼 일어선 채 마주보고 있는 차이가 있었다. 모두 페르시아의 가라에서 기원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나는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촬영하려면 큐레이터의 허가가 있어야 하지만 나는 그런 국제적 예의를 무시하였다. 유물이 너무 중요하였고, 훌륭한 만큼 나는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좋은 유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독 정부, 아니 페르가몬 박물관은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인가 무엇인가를 실험하느라고 나라의 문을 꼭 잠그고 비용이 없어서 수십 년간 박물관 소장품 圖錄(도록)조차 출판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동독이 서독과 합치지 않았다면 나 같은 바깥세상의 연구자들은 이런 중요한 유물을 보지도 못한 채 평생을 허송할 뻔하였다.
 
  다행히 나의 무례한 행동은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나는 神魚들을 애인의 얼굴처럼 쓰다듬으며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 우리의 숙명적인 해후에 감격하였다.
 
 
  페르시아 신화 속의 「가라」가 加羅
 
  神魚의 의미에 대한 나의 관심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으니까 40년이 훌쩍 지나갔다.
 
  이 21세기로 접어든 어느 날 새로 구입한 페르시아 신화 한국어 판을 읽게 되었다.
 
  인류의 만병을 고치는 영약이 있었다. 그 약은 「고케레나」라고 부르는 나무의 열매였다. 고케레나는 바다 속에서 자라는 나무였다. 인류를 파멸시키는 惡神(악신)이 나무의 뿌리를 파 버리려고 두꺼비를 파견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알고 보니 나무 뿌리를 지키고 있는 「두 마리의 神通한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물고기의 이름이 가라(Kara)이다. 가라가 지성으로 보호하여 고케레나 나무가 잘 자라났고 그 열매와 잎새를 먹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번창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라」가 바로 내가 필생을 바쳐 추적해 온 「神魚」아닌가? 아요디아의 마치 설화와 유사한 내용이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또 한 번 놀란 것은 페르시아 신화의 「가라」는 가락국의 별칭인 加羅(가라·Kara)와 똑같은 발음이라는 점이다. 페르시아에서는 인류를 살리는 靈藥(영약)을 내는 神木을 보호하는 물고기의 명칭이 한국 역사에서는 국명이 되었단 말인가? 과연 이런 추리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가락국은 신어국 아닌가.
 
  그렇다. 페르시아와 가락국, 이란과 한국의 시공을 뛰어넘는 문화의 동질성은 이렇게 뚜렷하니 쉽게 부정해 버리면 연구자의 태도가 아니다. 같은 시대에 신라고분에서는 페르시아 제품인 유리 술잔과 寶劍(보검)이 심심찮게 출토되고 있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음도 떠오른다.
 
  나의 神魚연구는 끝없는 길을 가고 있었다. 한 고개를 넘어가면 또 다른 준령이 내 앞을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구약성서 속에서 「魚門(어문·Fish Gate)」이라는 단어를 찾게 된다. 魚門은 바빌로니아의 어느 종족이 神殿을 세우고 그 대문에 물고기 모양을 새겨 놓았다는 내용이었다.
 
  고고학적 증거와 신화와 성경의 내용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오래 추적한 보람이 있었다.
 
  페르시아는 옛날부터 정치적으로 바빌로니아와 대립하면서 자라났다. 센나게립 왕 때의 神魚 복장을 한 司祭들의 기능이 페르시아 신화의 「가라」의 기능과 서로 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유타국 王孫
 
  神魚像을 연구하는 동안 나는 아요디아를 4회 방문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아요디아에 지금도 살고 있는 왕손인 미쉬라氏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의 인도는 공화국체제니까 총리가 다스리는 나라이지만 각 지역에는 前 시대부터의 토착세력인 土豪들이 있다. 중앙정부는 이들에게 재산권을 허용하고 있어서 미쉬라 가문은 학교·병원·莊園(장원) 등을 경영하고 있다.
 
  현재 아요디아의 왕손이 그 옛날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과 혈연으로 연결될는지는 다음 문제로 하고 우선 서로 역사적 정보만이라도 교환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총리 시절의 金鍾泌씨 초청으로 미쉬라氏 부처가 김해를 방문하였고, 이어서 김해 金氏 종친회원들과 김해 출신 실업인들이 아요디아를 방문하였다. 그 결과 아요디아에 허황옥 기념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2002년 부산에서 개최된 아시아경기 때 화려한 입장식이 있었다. 이때 인도 공주가 가락국에 시집오는 과정이 연출되었다. TV 감독이 내게 전화를 하여 입장식에 참석해 달라고 하였다. 인도 공주가 어떤 과정으로 한국에 시집오게 되었는지 해설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마침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한 고고학자의 연구내용이 국제 체육행사에 채택되어 TV 방송을 통하여 아시아人 모두에게 알려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긴 세월 동안 苦行에 가까운 추적과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전설이 역사로 굳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신라王들의 고민
고창의 죽림리 고인돌. 이 마을에는 약 800개의 고인돌이 한 군데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당시의 국립묘지 급의 성스러운 지역인 듯하다.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과 신라의 박혁거세, 김알지, 가야의 김수로처럼 알(卵)이나 상자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神話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神話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天孫神話는 기마민족들인 몽골 알타이 스키타이族들의 신화이고 卵生신화는 농경민족들인 대만의 빠이완族, 인도네시아의 자바族, 태국의 타이族, 인도의 문다族의 난생신화와 공통점이 있다. 이런 현상을 지도로 보면 천손신화는 한국보다 북쪽에 살던 기마민족들의 사유세계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열대와 아열대에 사는 사람들의 사유세계이다.
 
  신라의 첫 번째 王인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날아온 말(馬)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날아다니는 말은 그리스 신화의 페가수스이다. 그런 신화의 내용이 스키타이를 거쳐 알타이 민족들에게까지 전달되어 신라王의 탄생에 접목되어 있으니 고대사의 전개과정은 참으로 복잡하다.
 
  신라 金氏系 조상인 金閼智는 계림(木)에 달려 있는 상자 속에서 나오는 알(卵)에서 탄생하였다고 신화가 꾸며져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말은 기마민족의 상징이고 나무는 기마민족의 지도자인 칸(Khan)의 탄생과 관련 있는 토템(Totem)이다. 말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생명의 씨앗이 높은 나무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내용이 天孫降臨神話(천손강림신화)의 구조이다. 그런 기마민족의 신화에 웬 알이 등장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캐내어야 한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형식은 적석묘(Cairn 또는 Kurgan)로서 기마민족의 전통이다. 통나무집에다 주인공과 부장품을 집어넣고 그 위를 막돌로 덮는 모양이다. 그 풍속을 스키토-알타이式(Schytho-Altaic)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되고 그 주인공들은 모두 金氏系 인물인 내물(402년 死), 눌지, 자비, 소지, 지증 마립간(513년 死) 때에 해당되므로 핵심 기간은 400~500년 사이이다.
 
  월간조선 2004년 1월호에서 말하였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어서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게다가 김알지 후손들의 무덤인 경주 신라 왕족들의 무덤들은 분명히 북방 기마민족들의 매장 전통을 보여주고 있는데 선조인 김알지는 남방 농경민족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으로 분장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천손신화계 인물인 부여의 고주몽이 실제로 태어날 때는 알에서 나온 인물로 분장되어 있는 것과 같다.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和合·타협
 
  왜 그럴까? 기마민족이면 떳떳하게 기마민족式 신화인 하느님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天孫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처럼 꾸며져 있을까. 여기에 초창기 신라의 통치계층 인구들의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경주지방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는 수많은 고인돌이 증명하고 있다.
 
  그 후에 소수의 기마민족이 移民(이민)해 왔다. 삼국지 위지 東夷傳에 기록되어 있는 辰韓(진한)族이다. BC 3세기 중국 서북쪽의 秦(진)나라에서 勞役(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민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민집단의 인구는 先주민들인 농경인구에 비하여 소수였다. 다수의 토착 농경인들 위에 통치자로 군림하기에는 인구가 턱없이 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여러 代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드디어 미추왕(麻立干) 때 처음으로 金氏系 인물이 최고통치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소수의 金氏系 인구가 다수의 농경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金氏系 조상인 김알지도 토착농경인들처럼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분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주인공이 북방계 토템인 신령스러운 나무, 즉 계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자기네들의 전통을 일단 유지한 채 알(卵)에서 태어난다는 난생신화의 요소를 가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기마민족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 땅의 先주민이고 탄탄한 농경기반과 많은 인구를 갖고 있던 농경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기마민족들의 딱한 입장이 보인다.
 
 
  지도자는 민중에 영합해야
 
  현대에 와서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개신교 교회의 장로인 후보자가 불교사찰에 가서 부처님 點眼式에도 참석하고 평소에는 자주 다니지 않던 시장에 가서 아주머니들의 손을 붙잡는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치권으로 부상하려는 사람들이 좀더 많은 대중에게 영합하려는 노력은 실로 눈물겹다. 그들의 변신술에는 시공을 뛰어넘어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필리핀의 대통령이었던 마르코스는 청년 시절부터 정치지망생이었다. 그래서 미스 마닐라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미인 이멜다와 결혼하였다. 부인의 대중적 인기를 자신의 인기에 덮어 씌워 상승효과를 노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과연 마르코스는 대통령이 되었다.
 
  마르코스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그가 살던 궁전이 박물관으로 변하였을 때 필자가 구경가 보니 거기에 이멜다 여사의 탄생신화가 벽화로 그려 있었다. 이멜다 여사는 세상이 다 아는 스페인系 혼혈이다. 필리핀의 토착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제국주의 시절에 들어온 스페인 인구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토착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혈통인데도 불구하고 바다 속 진주조개에서 태어나 인어처럼 헤엄쳐 인간의 세계로 떠오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난생신화의 내용인 조개 속의 알(卵-진주)이 안에서 밖으로 나온다는 內(내)→外(외)의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는 마르코스 부부가 필리핀 원주민 사회에서 지도자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원주민의 생각인 「지도자는 난생신화의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믿음에 부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 벽화는 퍼스트 레이디의 출생을 민중의 구미에 맞게 粉飾(분식)해야만 했던 정치 지도자의 절박한 입장을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장면이었다. 신라 金氏系의 첫 번째 왕이 된 미추왕(味鄒尼師今)의 고민도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해석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조상 神話가 다른 두 사회의 만남
 
  고대국가 이전의 한반도에는 先주민들이 있었다. 우선 신석기 유적을 수백 개 이상 남겨 놓은 사람들이 생활용기인 빗살무늬 토기를 무수하게 만들어 쓴 흔적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지만 그들의 생활근거는 주로 강변과 바닷가에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경제 방식은 사냥과 어로, 초기 형태의 농사를 하여 조·기장·수수 등 주로 한랭지대 곡물을 먹고 살았다는 것이 희미하게 알려져 있다. 그 시절에 自生하던 볍씨들이 경기도 김포와 충북 오창에서 가끔 발견되지만 어디까지나 자연식물이었고 인간이 적극적으로 경작하던 벼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이 먹고 버린 조개 껍질이 쌓여 패총을 이룬 것이 사천의 烟臺島(연대도), 부산의 동삼동, 안면도의 고남리, 시흥의 오이도에서 발견되었다.
 
  그들의 문화를 이어받은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에 처음으로 벼농사 기술이 전달되었다. 경기도 흔암리를 시작으로 발견되기 시작한 볍씨의 흔적들은 모두 청동기시대에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의 집터에서 발견되고 그 시대는 대략 기원전 1000년경부터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이 때부터 한반도에 고인돌에다 사람을 매장하는 葬儀風俗이 생겨난다.
 
 
  인도인은 아리아人
 
  유학시절부터 나는 인도의 고인돌문화는 유럽-흑해-인도로 이어지는 선사시대 문화 벨트에 속하고 결국 고대 인도인 구성에 서양인인 아리아 인종의 이민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이론에 나는 큰 계시를 받았다. 인간 집단은 정치 사회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 때 사유세계와 풍속이 함께 이동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고인돌은 한국에도 무수하게 많은데 인도와 한국은 거리가 멀다고 관계가 없었을까.
 
  「한국의 고인돌 문화는 유럽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1960년대까지 우리는 이렇게 배웠다. 매우 민족적 주체사상이 강한 생각이다. 유럽과 한반도는 지구의 반대쪽에 있으니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아니면 그렇게 주장해야 애국적인 연구자이고 민족정신이 투철한 교수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인도와 한반도 사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群島(군도) 어느 곳에서라도 고인돌이 발견된다면 인도와 한국 사이에 문화적 징검다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해가 걸리더라도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을 하나씩 탐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여기에는 걸림돌이 있었다. 우선 한국인들의 정서가 문제였다. 한국인의 형성과정에서 대륙계 북방인들과의 관계를 규명하면 그런 대로 수긍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남쪽의 여러 섬들과의 관계가 보이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정서가 우리에게 있었다. 아마도 중국 문화를 숭상하는 오랜 전통이 있어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쪽은 모두 야만이라는 南蠻思想(남만사상)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를 뒤지다
 
  한반도 남쪽 부분에 살고 있던 선사시대 주민들은 南아시아의 주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을 가능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무슨 방법으로 정보를 교환하였을까. 혹은 지역 간에 인구의 이동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 문제는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나는 연구실에 앉아서 책만 읽으며 연구하는 소위 책상考古學(Desk Archaeologoy)을 과감하게 버렸다. 의문이 있는 땅을 직접 답사하면서 문제를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나의 인도네시아의 답사는 1979년부터 시작되었다. 연구비가 없으니까 조사단을 구성할 수는 없었고 나 혼자 1인 탐사를 계획하였다. 겨울 방학 때마다 섬 하나씩 조사하기로 작정하고 자바 섬부터 시작하였다.
 
  인도네시아 考古局에 찾아가서 협조를 구하였더니 1920년대에 네덜란드 학자가 수마트라에서 발견한 고인돌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하이네 겔던이란 학자가 南아시아 고고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아시아에서 처음 구석기를 발견한 사람도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콰이강에 다리를 놓는 공사에 투입되었던 네덜란드 젊은이였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튼 현지에서 본 빛 바랜 고인돌의 사진들은 나를 기쁘게 하였다. 아마추어도 충분히 구별할 수 있는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이었다.
 
  이 사진으로 나는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섬들에서 새로운 고인돌을 찾아 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나는 동서로 길다란 섬인 자바의 동쪽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세계 여러 나라 각종 형태의 고인돌 사진을 본 고고국장인 우카氏는 나에게 창광이란 마을을 권해 주었다.
 
  그곳의 작은 박물관에서 붉은색 간토기(紅陶)와 청동제 팔찌가 발견된 지역을 안내 받았다. 그 곳에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이 여러 개 있었다. 도로 공사 중에 몇 개의 유물이 나와서 철책을 치고 사람들이 더 이상 파괴하지 않도록 조치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을 그 사람들은 고인돌인 줄 모르고 있었다.
 
  받침돌이 아주 짧거나 아예 땅 속에 파묻혀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가지고 다니던 트라울(발굴용 꽃삽)로 바닥을 긁어 보니 가랑잎에 가려 있던 고인돌의 하부구조가 정연하게 나타났다.
 
 
  고인돌의 초승달
 
  이런 형식의 고인돌은 일견 자연석같이 보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고인돌인 줄 모르고 파괴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고인돌인 줄 모르기 때문에 도굴되지 않아서 유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창광 마을의 碁盤型 고인돌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자바 섬에는 탁자형 고인돌도 무수히 많았다. 모두 뚜껑 돌이 도굴꾼들 손에 파괴되어 땅에 나뒹굴고 있고, 하부구조인 받침돌들이 평면 직사각형의 石室로 남아 있었다.
 
  현지인들은 이 石室을 돼지우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옛날 사람들이 돼지를 여기다 가두고 길렀을 것이라고 생각해 붙인 이름이다. 이런 구조의 고인돌은 말레이시아 정글 속에도 수없이 많은 것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다음 해에 발리 섬을 조사하다가 발리 동쪽의 섬인 숨바 섬에서는 현대에도 추장이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고인돌을 만드는 풍습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등 수확이 많았다. 고인돌에 관한 한 고대와 현대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인도네시아였다. 고인돌을 만드는 풍속은 현대인들에게 전달되어 있고, 씨족의 聖所(성소)를 만들고 아주 작은 형태의 고인돌을 세워 놓는 민속이 발리 섬의 텡아난 마을에서 확인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고인돌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 나는 힘이 솟았다. 이제부터 인도네시아와 한국 사이에 있는 필리핀, 대만, 오키나와 등지에서 고인돌을 발견하게만 된다면 인도와 한국은 고인돌 분포지도로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南아시아와 한반도는 바다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배나 뗏목을 타고 사람들이 옛날부터 이동했을 가능성을 타진하기로 하였다.
 
  대만의 고인돌은 凌順聲(능순성) 교수가 보고한 적이 있고 나도 현지를 답사한 적이 있지만 한국의 고인돌처럼 완전한 탁자형이 아니었다. 완전한 것이 발견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필리핀과 오키나와를 답사해 볼 필요가 생겼다.
 
  다음 해에 필리핀에 가서 국립박물관 사람들과 협의하여 고인돌을 찾아보려 하였지만 아쉽게도 필리핀 학자들 중에 고인돌이 그 나라에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옹기 그릇으로 만든 쌀독이 하르방 모양으로 두 손을 가슴과 배에 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어 촬영한 것이 그해 여행의 유일한 수확이었다.
 
  겨울 방학 때마다 동남아의 여러 지역을 답사하여 드디어 아시아 고인돌의 분포지도가 완성되었다. 초승달 모양의 지도였다. 위 끝이 한반도에 걸리고 아래 끝이 인도 남부에 걸려 있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지도를 「고인돌의 초승달」(Dolmen Crescent)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또 한 가지 이 분포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 공통점은 이들 모두 난생신화를 믿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벼농사(경제방식)-고인돌(풍속)-난생신화(사유세계)가 일체가 되는 문화현상이다.
 
 
  벼농사 민족의 고인돌
 
  고인돌은 여러 개의 돌로 받침을 만들고 커다란 뚜껑 돌을 덮는 무덤구조로서 생긴 모양이 책상처럼 높은 것(북방식)과 바둑판처럼 낮은 것(남방식)이 있다. 고인돌의 발견지는 西유럽으로부터 지중해, 흑해로 이어지는 文化帶가 있고 인도에서 인도네시아, 오키나와, 한반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화대가 있다.
 
  東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의 넓은 내륙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중국의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지방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문화적 특징이 있다. 東아시아에서는 한반도가 고인돌의 중심지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가까운 규슈 지방에서 발견되고 중국에서는 황해 연안에서만 발견된다.
 
  고인돌의 발견지와 농업과의 관계로 보면 東아시아에서 고인돌 분포의 북방한계는 벼농사가 가능한 지역의 북방한계와 일치하는 현상이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한반도에 벼농사가 시작되는 청동기 시대가 열리고 나서 고인돌을 만드는 풍속이 생겨났다.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제일 쉬운 곳이 영산강 유역이다. 기후가 온난 다습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역이 우리나라 고인돌의 대부분이 발견된 지역이다. 생전에 벼농사 기술자들이 死後에 고인돌에 묻힌 것이다.
 
  벼라는 곡물은 원래 열대 작물이다. 기원지에 대하여는 인도설, 태국설, 중국설이 있지만 해당 국가 간에 자존심 싸움에 휘말리기는 싫다. 분명한 것은 적도지대에서는 1년에 4회를 추수할 수 있고 대만도 年 3모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겨우 年 1회의 수확만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지구 전체로 보면 한반도의 날씨는 벼농사의 적격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한반도의 고대 주민들이 굳이 벼농사를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벼의 수확량이 다른 곡물에 비해 월등하게 많아서였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벼는 남한 지역에서 자란다. 그 이유는 남한 지역이 북한 지역보다 따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인공적으로 볍씨를 발아시켜 移秧(이앙)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봄에 날씨가 쌀쌀하면 농부들은 벼의 모를 키우지 못하여 애태우곤 하였다. 그만큼 벼는 날씨에 민감하다.
 
 
  남방에 대한 거부감
 
  한국인의 숙명적인 고민이었던 보릿고개를 없애 버린 일등공신인 통일벼의 후속으로 신품종인 「노풍」을 개발한 적이 있었다. 통일벼보다 맛도 좋고 수확도 많은 것으로 실험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정부는 농가를 독려하여 노풍을 많이 심었다. 바로 그해인 1978년에 냉해현상이 있어서 노풍이 자라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해의 날씨는 평균온도보다 섭씨 0.3도 낮았다고 한다.
 
  벼는 이렇게 날씨에 민감한 식물이다. 그렇게 기르기 어려운 벼를 우리 조상들은 굳세게 길러 왔다. 어쩌면 쌀이 갖고 있는 습관성 식욕이랄까. 아니면 우리 민족이 모두 쌀 중독증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내용의 연구를 진행하던 중인 1981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한양대학이 공동 주최하여 서울에서 아시아 고인돌 연구 세미나가 있었다. 인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일본에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국에서 나름대로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고 자료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그 내용을 편집하여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Megalithic Cultures in Asia 1982).
 
  아시아의 고고학자들도 그 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던 고인돌에 대하여 서서히 눈을 떠가고 있었다.
 
  이 때 내가 발표한 고인돌 초승달 가설이 신문에 보도되자 金元龍 교수님이 전화를 하였다.
 
  『고인돌 남방 유래설은 매우 용기 있는 주장이지만 한국의 기존 학계에서는 한국과 남쪽 문화의 관련에 대하여 정서적으로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니 좀더 완곡하게 표현하게』
 
  老교수의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역력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그 옛날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설을 발표하여 일본의 만세일계의 황국신민 정서를 주장하던 극우파들을 잠재워 버리지 않았던가. 고고학은 과학이지 정서 따위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내게 있었다.
 
  중국 학계에도 이상스러운 정서가 있다. 이 세상 모든 발명은 모두 중국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나라이다. 소위 중화사상이다. 그래서 중국의 고고학은 아직도 신비스러운 고대문화를 발견해 내는 데 주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중국 고대 문화에 서양의 기술인 그리스式 전차가 秦始皇帝(진시황제)의 전국통일에 사용되었다든지, 로마에서 개발된 벽돌건축 기술이 漢(한)나라 때 고분축조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중국인의 목소리로 세상에 알려진 게 아니다.
 
  일본의 어느 고고학자는 세계 최고의 구석기 유물들을 여러 번 발견했다고 해서 일본의 매스컴들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지만 최근 모두 가짜였다는 게 밝혀졌다. 중국과 일본에서 이런 현상이 생겨나는 이유는 모두 지나친 나라 사랑이랄까 아니면 삐뚤어진 우월의식에 편승하여 인기를 얻어 보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름통 수백 개를 바다에…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대륙문화 짝사랑 현상이 있다. 그러나 고대 한국문화 요소들 중에 확실하게 보이는 非대륙계, 非중국적인 문화인자들인 고인돌 그리고 난생신화가 南아시아에서 발견되는 현상을 우리는 영영 장롱 속에 감춰두고 말 것인가. 향싼 종이에서 향내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 비린내 난다는 말이 떠오른다.
 
  해류의 방향은 문화 전파의 방향을 암묵적으로 설명한다. 赤道지대에서 표류하여 해류를 타고 제주도까지 온다면 며칠이나 걸릴까. 나는 이런 엉뚱한 질문을 스스로 해 놓고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동물의 이동을 연구하기 위해서 새의 발목에 고리를 다는 방법을 쓴다. 고리에는 새의 고향, 고리를 단 날짜 등을 기록한다. 그 새가 멀리 이동하여 다른 지역의 연구자에 발견되면 그 새의 이동 경로가 밝혀진다. 최근에는 바다 속의 생물에도 음파 발신 장치를 달아 그 생물의 이동 범위를 연구하기도 한다.
 
  이렇게 고급의 방법을 써보기에는 나는 너무 약했다. 나 같은 無名의 고고학 초년생에게 누가 그렇게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프로젝트를 인정해 주지도 않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연구비 신청을 아예 포기하였다. 대신 나 혼자만의 연구 방법을 고안해 내야만 하였다. 비용이 얼마 안 들고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름대로 지도를 보면서 생각에 잠기다가 사람 대신 해류 조사카드를 띄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즉 적도 지대에다 조사카드를 뿌려두면 해류를 타고 이리 저리 흘러가다가 혹시 단 한 개라도 한반도 근해에서 발견되는 행운이 있을 지도 모르고, 반대로 한반도 근해에서 뿌린 조사카드가 일본이나 알래스카 근해에서 발견된다면 더욱 흥미 있는 연구과제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행동으로 들어갔다
 
  조수였던 추연식(現 고려大 교수)군과 상의하여 조사카드에 쓸 내용을 적어 보았다. 조사목적, 조사자, 발견자의 이름, 발견지, 카드를 보내 줄 주소 등을 썼다. 이 카드가 어느 누구의 손에 발견될지 모르니까 여러 나라 말로 써야 했다. 똑 같은 내용을 한국어와 영어로 써서 작은 종이에 인쇄하였다. 조그만 필름통을 수백 개 구하여 그 속에 카드를 넣고 물이 새지 않도록 밀봉하였다.
 
  제주도로 내려가 배를 빌렸다. 그날 따라 안개가 심하여 視界(시계)가 매우 나빴는데도 선장은 나침반만 보며 우리를 마라도에 도착시켰다. 우리는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조사카드의 절반을 뿌렸다. 제발 이것들 중에 하나라도 멀리 태평양으로 나가서 누구에게 발견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뿌렸다.
 
 
  해류는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나머지 절반은 인도네시아로 가지고 갔다. 마침 한국해양대학의 실습선이 때맞춰 자바 섬에 들른다는 정보가 있었다. 해양대학 실습선의 선장을 만나 조사의 목적을 설명하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사이에다 네 번에 나누어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서 나는 두 개의 회신을 받았다. 하나는 마라도에서 뿌린 것으로 일본 소속 어선이 오키나와 해안에서 건진 것이고, 또 하나는 자바 섬 북쪽 해안에서 뿌린 것으로 태국만 쪽으로 역류한 것을 미국인 관광객이 발견하고 보내 준 것이었다. 태국에 표착한 카드는 동남아 여러 나라의 민족들이 얼마든지 해류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자료로 충분하였고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카드는 제주에서 표류하면 오키나와에 도착할 수 있는 증거로 충분하였다.
 
  부산 앞바다에서 해류를 타고 떠나면 일본 혼슈의 북쪽 해안에 도달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듣고 있었지만 마라도에서 떠난 카드가 오키나와 근해로 흘러간 것은 다소 의외였다.
 
  정작 적도에서 떠난 조사카드가 제주도 부근에 도착한 것은 없었다. 도착한 것이 아주 없었는지 발견한 사람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나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때까지 나는 해류 전문가를 만나지도 않고 시골 서당의 훈장처럼 골방에 앉아서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연구한답시고 끙끙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은인을 만나는 법이다 그가 탐험가인 윤명철 박사이다. 그는 뗏목을 타고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다가 난파당한 경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시도하여 부산에서 규슈까지 무동력 항해를 성공시킨 용기 있는 지식인이다. 결국 윤박사는 중국 절강성에서 뗏목으로 출항하여 목포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는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해류의 방향도 중요하지만 해수 표면에 부는 바람의 방향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거기에 더하여 東아시아에서 계절에 따라 흐르는 해류들의 방향이 자세하게 그려진 지도까지 주었다.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무턱대고 해류 조사카드만 많이 뿌려두면 되는 줄 알았던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정확한 자연과학의 지식도 없이 의욕만 앞서서 문화관계를 연구한답시고 조사카드가 우편으로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순진한 짓인가? 우선 조사카드의 표류하는 방향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일치한다고 해도 그 확률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설사 누가 그것을 발견하였다고 해서 꼭 보내 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당시 대부분 가난했던 아시아의 경제수준으로 비싼 국제우편료를 내면서 이름 모를 한국의 한 연구자에게 연락해 줄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도 생각해 보았어야 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입만 벌리고 기다린 사람 꼴이 되고 만 셈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 정도가 내 지식의 한계였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때 바다에서 난파당한 사람이 해류에 떠밀려간 이야기에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흘러갔다는 표현이 있다.
 
  조선 성종 때 사람인 崔溥(최부)가 쓴 「漂海錄(표해록)」이란 책이 있다. 관리의 신분으로 제주도에 출장 중 부친상을 당하여 급거 귀가하게 되었다. 바다를 건너오다가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어 천신만고 끝에 육지에 닿아 보니 조선 땅이 아니고 중국 절강성의 寧波(영파)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 선린관계에 있어서 崔溥는 우여곡절 끝에 육로로 조선까지 귀환했다는 내용이다.
 
  이 사람이 난파당한 위치는 분명 제주도와 육지 사이였을 터인데 표착한 지점은 영파였다는 게 무척 흥미 있었다. 영파는 목포 부근 신안에서 발견된 중국 원나라 때 무역선이 떠난 항구이고 윤명철 박사가 뗏목을 타고 목포를 향해 떠난 항구이다. 즉 절강성과 한국 사이에는 해류와 바람으로 쉽게 오가는 바닷길이 뚫려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조선시대 文淳得(문순득)이라는 사람이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필리핀의 루손 섬에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다가 나의 해류 조사카드는 제주도 남쪽의 마라도에서 오키나와까지 가지 않았나?
 
  제주도, 오키나와, 南중국, 필리핀이 해류나 바람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1991년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인도에서 일본까지의 해양문화를 조사하던 중 일본의 고인돌을 직접 답사할 기회가 생겼다. 그 때까지 일본의 고인돌은 규슈에만 있다고 보고되어 있었다.
 
  우선 나가사키(長崎)와 구마모토(熊本) 지역의 고인돌 유적과 관련된 유물을 두루 살펴보고 나는 오키나와로 날아갔다. 제주도에서 떠난 조사카드가 오키나와에 도착할 수 있다면 제주도에 수많은 고인돌이 수백 년간 만들어지던 중에도 제주도 사람들 중 오키나와에 표류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 아닌가. 게다가 오키나와에는 고구려 사람의 후예들도 살고 있는 곳 아닌가?
 
 
  黑潮를 타고 자연 移民
 
  오키나와에서 며칠간 나하(那霞)를 중심으로 하여 고인돌이나 하르방 비슷한 유적을 찾는 작업을 하였다. 어느 날 오키나와 대학의 교수들을 만나 인류학적인 탐문을 하던 중에 새로운 뉴스가 들렸다. 여러 섬들 중에 미야코(宮古) 섬에 가보라며 그곳에 고인돌이 있다는 정보가 있다는 것이었다. 현지의 기념물 관리소에서 낸 책에 고인돌 같은 존재에 대하여 서술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지도를 보니 미야코 섬은 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외딴 섬이었다. 다음날 시골 비행기를 타고 미야코에 도착한즉 관리인이 나를 현장으로 안내하였다. 제주도의 火山石과 비슷한 돌로 만든 고인돌이 있었다. 나이가 백년이 넘는 고목에 기대어 탁자모양의 고인돌이 서 있었다. 큼직한 중형의 고인돌이었는데 발리 섬이나 숨바 섬에서 엊그제까지도 만들던 고인돌의 모습과 같았다.
 
  아시아의 고인돌은 서서히 신비스러운 비밀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고 있었다. 아무리 감추고 있어도 결국 속에 숨어 있던 진실은 알려지고 마는 것 아닌가?
 
  해류도를 자세히 보면 필리핀을 떠난 黑潮라는 해류는 빠른 속도로 제주도 쪽으로 올라온다. 이 해류의 방향이 일년에 몇 번씩 한반도에 몰아치는 태풍의 이동방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제주도에서 거꾸로 필리핀 쪽으로 가기는 힘들 것 같다.
 
  아마도 文淳得은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일단 흘러갔다가 필리핀에 표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은 규슈의 나가사키를 떠나 필리핀 근해에서 난파하여 제주도로 떠밀려 온 사람이다(1653). 黑潮에 떠밀려 온 것임에 틀림없다. 어찌되었든 필리핀과 제주도는 바닷길을 통하여 上行과 下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류의 방향은 플랑크톤의 이동방향이다. 플랑크톤의 이동은 동물의 먹이사슬의 이동방향이고 그 먹이사슬의 제일 뒤에는 인류가 있다. 이쯤 생각하니 한반도에 南아시아 사람들이 해류를 타고 저절로 도착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 黑潮라는 해류는 어제오늘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지구의 自轉현상으로 생겨나는 적도 해류가 南美를 떠나 인도네시아까지 도달하는 결과로 발생한 傍系海流이다.
 
  그러니 지구에서 마지막 빙하가 끝난 때인 1만3000년 전부터 이 해류는 지금의 속도로 흘렀을 터인데 이 해류의 방향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南아시아인들이 한반도 쪽으로 자연이민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짐작된다.
 
 
  발리 섬의 돌하르방 신앙
 
  발리 섬을 떠난 비행기가 홍콩에 기착하였을 때 어느 신문사 기자가 옆 좌석에 앉게 되었다. 그가 마침 대학 때 친구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발리 섬 돌하르방 이야기 나왔다.
 
  발리 섬은 힌두교 사원이 매우 많은 곳이다. 그래서 서양의 어느 인류학자는 발리 섬을 神들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그중 파누리산이라는 이름의 힌두교 사원에서 나는 매우 우연하게도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돌하르방이 30개나 보관되어 있는 것과 마주쳤다. 왕방울 같은 눈에 두 손을 가슴에 대고 서있는 석상들은 제주도 돌하르방의 아이들처럼 작고 귀여웠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남녀노소가 모두 있고, 의관을 갖춘 것과 맨머리로 구별되었다. 아마도 하르방 세계에서의 사회적 위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였다.
 
  현지 考古局의 수타바氏에게 문의하였더니 그 석상들은 힌두교의 유품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석상의 의미는 모르지만 非힌두교적인 민속품들로 바닷가 마을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반갑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하였다. 돌하르방이라면 제주도 아닌가. 제주민속 연구자들에 의하면 하르방은 13세기 몽골이 고려에 침입하였을 때 따라온 몽골 풍속이라는 게 상식처럼 되어 있는데 뚱딴지처럼 발리 섬까지 흘러 들어와서 나를 놀라게 하나.
 
  나는 그에게 제주도의 돌하르방 사진들을 보내 주고 계속 연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1991년 다시 발리 섬에 조사하러 가서 수타바氏를 만났더니 그는 그 동안 하르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내게 고마워하였다. 그러면서 새로 수집한 100여 개의 하르방 사진들과 발리 섬 내의 분포도를 보여 주었다.
 
 
  학자는 「관념 학살」을 경계해야
 
  1980년에 하르방이 발리 섬에서 여러 개 발견되었다는 신문보도는 일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관광제주」라는 책에다 하르방을 南아시아 문화에다 관련시켜 해석하려는 의견에 못마땅한 글을 싣기도 하였고, 몽골의 元史(원사)를 전공하는 어느 교수도 부정적인 의견을 기고하였다. 그분들의 의견도 일리는 있으나 모두 몽골이나 발리 섬을 답사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의 정서적 반대를 하였다.
 
  이런 현상을 관념 암살(Idea Assassination)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학원에서는 꼭 學史(학사)를 가르치면서 미래에 학자가 될 젊은이들에게 15세기 가톨릭 신부였던 코페르니쿠스가 당대에 전지 전능한 교회의 반대를 우려하면서도 地動說(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공헌인가를 인식시킨다.
 
  제주도 관광의 대표 브랜드로 되어 있는 돌하르방은 선사시대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이 17세기 때 사람인 金夢奎가 남긴 「耽羅紀年」이라는 책에 翁仲石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사실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몽골에 하르방이 존재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한국의 학자들이 몽골에서 하르방을 찾으려고 여러 해 노력하였지만 우리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흔히 제주도하면 조랑말을 떠올리고 그 말들이 혹시 다리가 짧은 몽골 말과 혈통적으로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사라졌다. 제주도의 재래 말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제주도 말들의 혈청의 특징인 혈액 蛋白多型(단백다형)이 의외로 태국 말(學名으로는 광동마)과 같다는 연구가 있어서 더더욱 제주 말과 몽골 말의 관계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역시 제주도의 하르방 문화는 해류와 관계지어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확대해석하면 폴리네시아 群島인 이스터 섬 주변의 여러 섬에서 발견되는 대형 석상문화와 발리 섬의 석상들도 해류로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현 단계에서는 여기서 생각을 접는다.
 
  유능한 기자는 뉴스의 사냥꾼이다.
 
  나의 발리 섬 이야기를 듣던 기자는 귀국하자 곧바로 신문에 보도하였고, 이 보도는 다음날 영자신문인 코리아 헤럴드에 번역되어 실렸다. 그후 한 달쯤 지나서 어느 미국인이 편지를 보내왔다.
 
  「저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학생입니다. 고대 인도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에 관한 학위논문을 제출하였었습니다만 불행하게 자료 불충분으로 불합격 처리되었습니다. 코리아 헤럴드를 읽고 보니 선생님이 고대 한국과 南아시아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하고 계신 듯한데 혹시 고고학적으로 인도와 한국의 관계를 증명할 자료가 있으시면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동병상련이랄까. 나도 그 몇 년 전에 영국에서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제출하면서 자료 부족으로 속을 태운 적이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 중에는 기존학설이나 통념을 깨는 경우가 자주 있다.
 
  유럽 고고학 연구에서 불후의 명작인 「유럽문명의 여명」의 저자인 차일드(G. Childe)가 옥스포드 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논문인 「인도 유럽인 이민 (Indo-European Migration)」은 심사위원회에서 부결되었다. 그 내용은 현재의 인도인들이 기원전 17세기경 철기문화가 근동에서 발생하자 주변 사회들이 동요하여 유럽에 살던 아리안族이 인도로 이민을 가서 인도인과 인도 언어가 형성되었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 내용이었다.
 
  그 때까지 아무도 그런 연구를 한 적이 없었을 때였다. 더군다나 영국인에게 인도는 식민지였다. 영국인은 우월한 민족이고 인도인은 열등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리안族은 유럽인을 대표하는 종족 중 하나이고 영국인을 형성한 앵글로 색슨族도 아리안族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영국인과 인도인은 조상이 서로 피를 나눈 사이가 된다. 이 점이 選民의식에 빠져 있던 영국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어찌되었든 차일드는 박사학위 없이 에딘버러 대학 교수가 되었고 다시 런던대학 교수로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古代문명사에 관한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차일드의 학위논문을 부결시킨 1925년의 옥스포드 대학의 심사위원들은 두고두고 후회하였으리라. 이런 學史的(학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을 기억하면서 나는 즉시 버지니아로 자료를 보냈다. 인도, 인도네시아의 고인돌과 선돌들의 사진을 한국 자료와 함께 보내 주었다.
 
 
  한국어 속의 인도어 400개
 
  그리고 또 몇 달이 흘렀다. 미국에서 박사학위가 통과된 논문이 내게 도착하였다. 「한국어와 드라비다語 관계의 재조명」이라는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의 논문을 읽어보니 매우 어려운 내용이었다. 언어학 논문은 꼭 수학 공식들을 써놓은 것처럼 기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드라비다語는 인도 토착어군의 총칭이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나를 놀라게 한 부분이 있었다.
 
  한국어 속에 쌀, 벼, 풀, 씨 같은 농업용어는 모두 인도 토착어인 드라비다語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정보는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내게는 메가톤급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패전 후에 일본에서도 일본어와 드라비다語의 유사성을 연구한 학자가 있었는데 극우파 군국주의자들에 의하여 심한 핍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생각났다. 무슨 경로를 통했든지 한국어 속에 인도 어휘가 400개 이상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내게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고대 사회에서 새로운 종류의 농업기술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경제혁명을 의미한다. 그런 혁명적인 발전을 유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정에서 기술용어가 함께 소개된 것이다. 마치 한국에 자동차 기술이 들어올 때 기술용어인 엔진, 브레이크, 미션 등의 영어 용어가 함께 소개된 현상과 같은 정황이었을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다. 그 옛날 고대 인도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벼농사 기술을 한반도 주민에게 전수하면서 알려 준 말이 지금까지 한국어 속에 化石(화석)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다음 문제는 그 벼농사 기술자들은 봄이면 한반도로 농사지으러 왔다가 가을에 추수하면 그네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계절 이민자들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네들의 고향은 한 해에 서너 번씩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을 터인데 벼농사를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한반도로 계절이민을 다녔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들은 몇 년씩 또는 평생을 이 땅에서 살았음에 틀림없다. 나는 이 대목에서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반도에 고인돌을 세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고인돌이 많이 남아 있는 南아시아의 원주민들은 北아시아 기마 민족들에 비해 피부가 검다. 대체로 눈이 크고 얼굴은 사각형으로 하악골이 넓은 지역적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피부는 검지만 그 옛날 서양인들과의 혼혈로 얼굴 모양이나 체형은 서양인의 특징이 많다.
 
 
  黃石里人은 서양人種?
 
  그런데 한국의 고인돌 속에 실제로 묻혀 있던 주인공이 발견되었다. 1965년에 발굴된 충북 제천 황석리의 13호 고인돌에서는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신장이 170cm인 40代 남자였다. 사망연대는 기원전 410년경이었다. 발견지의 이름을 따서 황석리人이라고 부른다. 그의 두개골을 계측한 결과 한국 사람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서양사람처럼 코가 크고 두개골이 앞뒤로 뾰족한 사람이었다 학술용어로 超長頭型(초장두형)인 사람이었다.
 
  여기서 체질인류학 이야기를 조금하겠다. 사람의 두개골 형태를 계측할 때 앞이마와 뒤통수의 거리를 頭長(두장), 귀와 귀 사이를 頭幅이라고 한다. 두장을 100으로 계산하여 두폭을 비교하는 수치를 頭蓋指數(두개지수·Cephalic Index)라고 하는데 이를 기초로 인종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 한국인의 평균 두개지수는 80 전후로 短頭型(단두형)이라 하고 서양인의 두개지수는 70 전후로 長頭型(장두형)이라 한다.
 
  장두형은 머리가 앞뒤로 긴 모습이고 단두형은 얼굴이 넓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데 황석리人은 두개지수가 70 미만이었다. 얼굴이 좁고 뒤통수가 유달리 뒤로 빠진 北유럽인의 모습이다.
 
  이건 심각한 내용이었다. 이 사람이 한국사람과 다른 인종이었다면 큰 문제가 시작되는 사건이었다. 한국인은 단일 민족이라는 정서를 감안했었는지 보고서를 담당한 서울의대 해부학교실의 두 교수는 이 사람의 생긴 모양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국에서 발견된 고인돌 사회의 주인공이 서양인의 체질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발표하면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 때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으로는 어려운 해부학 용어로 쓰인 황석리人의 체질적 특징이 서양사람에 가깝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만일 수많은 고인돌에 묻혀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현대의 한국사람과 다른 인종이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러나 고인돌에서 발견된 사람들이 모두 그런 체질적 특징을 갖고 있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에 남아 있는 고인돌의 수가 3만 개나 되니까 분명히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인의 조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때는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세월이 지나 조용진 교수가 컴퓨터로 복원한 황석리人의 모습은 완전한 서양인의 모습이다. 황석리에서 발견된 서양인 모습의 남자는 누구인가. 古代 아시아에서 고인돌 풍속이 있고 벼농사를 경제기반으로 하면서 서양인의 두개골 모습을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은 인도인밖에는 없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한반도에 올 수가 있었느냐 하는 소박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황석리人의 생존기간은 BC 450~410년이다. 한국사에서는 그 때가 선사시대이지만 유라시아에서 그 기간은 황금의 역사 기간이었다. 중국은 공자 이후 諸子百家(제자백가)의 시대이고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涅槃(열반)한 이후이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히포크라테스가 생존하던 시기이다.
 
  고대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대규모의 관개기술을 성공적으로 실험하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역사시대에 일어난 일을 경악의 수준으로만 생각하면 판단이 어렵다. 황석리人의 한반도 도착을, 그 때까지 인류가 발전시켜 온 누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조감하면 아무런 경이도 아닐 수 있다.
 
  고대사에 대한 나의 知的 호기심은 황석리人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호기심은 지난 30년간 고고학 주변의 여러 인접과학에 관한 연구결과를 살펴보게 하였고, 나와 가까이 지내는 여러 과학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히게 되었다. 인접과학 중 하나가 ATL이란 병이었다.
 
  성인 T세포 백혈병(Adult T-Cell Leukemia)은 20세 전후에 나타나는데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父系遺傳(부계유전)이고 발병지역은 亞熱帶(아열대)지방이다. 중국으로 말하면 양자강 이남 지역이고 한국에서는 남부 해안지방에서 발병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이와 비슷한 통계로서 象皮病(상피병·Elephant Skin)이라는 것이 있다. 모기류에 물려서 다리가 코끼리의 다리(脚)처럼 붓고 피부가 거칠어지는 질병인데 조선시대까지 도서지방에서 자주 관찰되던 풍토병이다.
 
  이 두 가지 현상은 더운 환경에서 나타나는 공통성이 있는데 혹시 南아시아에서 한반도 쪽으로 흐르는 黑潮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벼농사를 도입한 사람들과 함께 지역성이 강한 풍토병도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기마민족이 농경 방법을 배우다
 
  고인돌의 주인공들은 기마 민족들보다 한반도의 先주민이고 그들의 농경사회는 잉여생산물 때문에 기마 민족들보다 인구도 많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기존의 농경사회에 뒤늦게 뛰어든 기마 민족들은 농경밖에 할 수 없는 땅에 와서 고생한 이야기가 陳壽(진수)의 三國志(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辰韓 사람들이 이주해 오니까 馬韓 사람들이 동쪽에 땅을 떼어 주어 살게 하였다.
 
  辰韓 사람, 즉 후의 신라인들은 마한 땅의 토착인에게서 사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기마 민족이 오곡을 기르는 농경인이 되면서 육식에서 채식으로 입맛을 바꾸어야 했을 것을 생각해 본다. 한민족도 이렇게 복잡한 과정과 多端한 뿌리를 기초로 이루어진 백성이라는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과연 민족이라는 말에서 民(민)은 百가지의 姓(성-氏族)이 합쳐진다는 뜻이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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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짜리 騎手
몽골의「나담」축제 때 국가대표급 騎手(기수)들이 출전하는 경기에 나온 다섯 살짜리 꼬마 선수.
 태양이 작열하는 7월, 몽골의 초원에는 여름축제인 「나담」이 진행중이었다. 씨름, 활쏘기, 집단무용은 영화에서 보던 대로였다. 남자들이 半裸의 차림으로 하는 씨름은 한국식 샅바 씨름과는 매우 다른 형식이었다. 씨름에서 이긴 사람이 자축하는 세리모니는 학의 춤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는데, 남자들의 옷 벗은 육체미에 남자인 나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경마였다. 멀리 40km 떨어진 출발지점에서 500마리의 말과 기수가 달려와 결승점인 스타디움으로 골인한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말과 기수들의 가쁜 숨이 관중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아주 놀라운 사건은 폐막식 후에 일어났다.
 
  대통령의 시상식이 끝나고 참석자들이 모두 일어서 나가고 있을 때 말 한 마리가 늦게 도착하였다. 말 위에는 꼬마 소년이 타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 기수였다. 어른들이 놀라서 소년 기수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너무 작아서 높은 말등에서 스스로 내릴 수도 없었다. 대통령이 뛰어내려가 그 소년을 번쩍 안고 연단으로 올라와 다시 연설을 하였다.
 
  『이 아이야말로 칭기즈칸의 정통 후예 답다』
 
  老대통령의 어조는 감격하여 목이 메어 있었다.
 
  몽골인들은 남녀노소 모두 자기 말[馬]이 있다. 몽골어로 말을 「멀」이라고 발음한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말을 탔을 테니까 평생 말을 타는 셈이다. 그러니 다섯 살쯤 되면 충분히 말을 다룰 수 있다. 아이들은 어린 말을 타기 때문이다. 몽골의 초원에서 어린이들이 말을 타고 학교에 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이번 나담에서 어른들의 경마 경기에 작은 아이가 다 자란 말을 타고 출전한 경우는 처음이다.
 
 
  몽골은 종족 이름
 
  중국인들은 주변 민족의 이름을 비하해서 부르는 버릇이 있다. 한민족이 포함된 東夷族(동이족)은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이다. 옛날 중국을 괴롭히던 匈奴(흉노) 또한 고약한 의미다. 蒙古(몽골) 또한 「무식하다」는 뜻이므로 점잖지 못하다.
 
  몽골이란 말은 원래 칭기즈칸의 출신 部族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니까 한국인까지 중국 사람처럼 몽골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겠다. 지금의 몽골인은 70%가 「할하」족이고 그 다음 「차하르」족 등 20여 종족이 모여 몽골 민족을 형성하고 있다. 총 인구는 400만 명인데 몽골, 내몽골, 아프가니스탄, 볼가 지방 등지에 퍼져 살고 있다.
 
  몽골의 중앙박물관에는 구석기부터 역사시대 유물까지 골고루 진열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발견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아술리안형 주먹도끼가 혹시 있나 하여 살펴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다만 찍개·긁개 계통의 석기들이 주종이었고, 다음 시대의 黑曜石製(흑요석제) 細石器(세석기)가 여러 점 눈에 띄었다.
 
  한국 문화와 직접 관련이 있는 유물로는 오르도스 지방에서 발견되는 曲劍(곡검)류가 있어서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유리창의 면이 고르지 못하여 포기하였다. 사진자료로 중요한 것은 신라 왕족들의 묘제인 적석총이 투르크族의 유산으로 9세기까지 계속된 증거들이었다.
 
  그 다음 기원 전후의 유적인 노인 울라(Noin Ula)에서 일본인들이 발굴한 綢緞(주단)의 그림들이 주의를 끌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은 투르크族의 적석묘에 비해 현저하게 구조가 다른 선비族의 무덤들은 모두 석관묘라는 사실이었다. 이 현상은 후에 내몽골 지방의 하이어랄에서도 수백 개의 발굴되지 않은 석관묘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곳이 1~2세기 때 선비族의 공동묘지였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 확인되었다.
 
 
  몽골인은 채소를 먹지 않는다
 
  여기서 잠시 몽골인들의 음식을 먹어 보자. 아침식사로는 속 없는 만두와 홍차를 마신다. 몽골어로도 만두는 「만도」라고 발음한다. 한국식으로 고기를 다져 넣은 만두는 「보츠」라고 한다. 모든 肉食음식에는 기본적으로 후춧가루가 들어가야 하는데 몽골인들에게는 그런 조미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몽골 음식은 느끼하다.
 
  유목민의 主食은 육류와 乳加工(유가공) 제품이다. 가축이 새끼를 기르는 여름에는 가축의 젖이나 유가공 음식인 버터, 치즈를 먹으며 지낸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짜낼 젖이 나오지 않아 할 수 없이 육류를 먹으면서 봄을 기다린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천막인 「겔」 속에 들어가면 동물 기름 냄새가 배어 있다. 게다가 유목민들은 채소를 먹지 않는 편식 때문에 심한 비타민 결핍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들의 평균 수명은 33세 정도라고 한다.
 
  『초원에 야채가 즐비한데 사람이 뜯어먹으면 좋을 텐데요』
 
  야생 나물을 잘 모르는 나에게도 몽골의 풀밭에서 자생하고 있는 쑥, 질경이, 비름나물 등이 수두룩하였다.
 
  『사람이 왜 풀을 먹습니까? 풀은 가축들이 먹어야 합니다. 사람은 풀을 먹고 자라는 가축을 먹으면 되지요』
 
  우리를 안내하던 몽골의 하나뿐인 신문인 「우넨신문」 국제부장의 이 말이 나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은 진심이었다. 몽골인들은 풀을 먹지 않는다.
 
  육식하는 민족에게 절대 필요한 야채 중 하나가 바로 양파인데 유목민족이 사는 지방은 너무 추워서 양파가 생산되지 않는다. 따라서 양파는 모두 따뜻한 나라에서 수입해야 한다. 몽골에서 발견한 문화현상은 필자를 혼절시킬 정도였다. 잘 기른 양 한 마리는 100kg까지 나가는데 그 양 한 마리를 舊소련에 산 채로 파는 가격이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5000원 정도였다.
 
 
  100kg 羊이 5000원
 
  양의 값이 너무 싼 것에 1차로 놀랐지만 그보다는 중국에서 수입한 양파 1개가 양 한 마리의 값과 같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같으면 흔한 양파, 오이, 양배추 같은 야채가 그 나라에서는 아무나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고급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나 나오는 희귀품들이었다.
 
  다음해 봄 나는 경상남도 진주지방을 여행하다가 농부들이 다 자란 양파밭을 갈아 엎어 버리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당국의 계산착오로 농민들에게 권유한 양파 생산량이 너무 초과해서 양파값이 땅에 떨어져 판로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곳곳에 양파 생산을 권유한 당국의 주먹구구식 행정을 규탄하는 현수막을 보면서 필자는 저 많은 양파를 통조림처럼 진공 포장하여 양파가 절실히 필요한 나라에 수출할 수는 없을까 하고 나의 인류학적 경험을 떠올렸다.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일이 상업의 기본이다. 누구에게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는 환경과 문화를 관찰하면 저절로 보인다.
 
  생활전통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이런 전통을 잘 연구하면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이 눈에 보인다.
 
  유목민들은 여름에는 가축을 죽이지 않지만 우리 같은 외국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에 특별히 양과 염소를 잡아서 접대해 주었다. 양을 잡는 데는 중요한 儀式(의식)이 있었다. 양의 귀에 대고 생명을 빼앗는 데 대하여 사과의 말을 하고 죽인다. 조선시대의 망나니가 칼을 휘두르며 처형당할 사람에게 사형집행인으로서의 자기 임무를 다하는 행동을 양해해 달라는 呪文(주문)과 같다. 양을 도살할 때는 땅에 한 방울의 피라도 흘려서는 안 된다. 도살 후 작은 주머니 칼 하나로 능숙하게 양의 껍질과 살을 구분해 내는데 그 솜씨가 놀랍다. 소질한 羊고기는 통에 넣고 찐다. 고기 중에 가장 맛있는 부분이 갈비에 붙은 노란색 기름이라고 한다. 나처럼 외국의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있는 사람도 느끼해서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그것도 겨우 삼켰다.
 
  양을 구울 경우에는 선사시대式으로 조리한다. 양의 머리와 다리만을 자른 후 목을 통해서 내장을 꺼낸다. 몸통을 잘 묶어서 기름이 새지 않도록 하고 헝겁에 잘 싼 다음 불에 달군 자갈돌을 목을 통하여 몸통에 집어넣고 불에 달군 뜨거운 돌 위에 양을 놓고서 흙으로 덮는다. 그 위에 불을 여러 시간 때고 나서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 증기로 고기가 잘 익는다. 이런 조리방법은 적도지대 원주민들이 돼지를 요리할 때도 쓰는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조리한 양의 몸통에서 나오는 뜨거운 기름을 컵에 따라 마신다. 소위 스태미나 식(食)이란다.
 
 
  실크와 玉은 무게로 물물교환
 
  실크로드라는 말은 지리학적 용어이다. 그 배경에는 물론 경제가 있다. 실크는 극동(한국을 포함)지역 제품이다. 장신구로서 으뜸인 玉(옥)의 主産地는 중앙아시아 복판에 우뚝 서 있는 알타이山이다. 몽골 여인들의 장신구로 玉이 빠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몽골 여인들은 실크 스카프 한두 개는 모두 갖고 있다. 중국인의 생활용품인 실크와 알타이山 주변의 유목민족들의 玉은 産地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수천 년 전이라 해도 상인들의 눈에 그런 최고급의 기호품이 高附價 상품이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개념으로 보면 유통 방법이 문제였다. 유목민 출신 상인들이 중국에 와서 꺼내 놓는 形形色色의 玉들은 중국 귀부인들의 눈을 현란케 하였고, 반면에 중국에서 가져온 깨끗한 실크는 유목민들의 사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실크는 유목민에게 高價로 팔리고 중국인에게는 玉이 高價로 팔렸다. 서쪽의 보석들은 동쪽으로 가고 동쪽의 비단은 서쪽으로 가게 되었다. 이런 상거래의 길이 바로 실크로드가 된 것이다.
 
  알타이 지방 玉의 原石은 비가 오면 탁류와 함께 흘러 내려오는데 대개 크기가 밤톨만 하고 큰 것은 주먹만 한 것도 있다. 原石 자체로서는 비싼 상품이 아니고 그것을 가공하여 장신구로 완성하였을 때 비로소 비싸진다. 알타이 지방에 사는 여인들은 玉구슬로 만든 목걸이와 팔찌를 하고 다니는데, 玉이 지니고 있는 呪力을 믿기 때문이다. 또한 알타이 지방은 한랭한 고원지대이므로 여인들이 모두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사는데 스카프로서 최고품은 역시 중국제 실크였다. 실크의 뛰어난 보온성과 아름다운 색채 때문이다.
 
  그래서 비싼 실크와 귀한 玉이 물물교환되었는데 공통의 화폐가 없던 때이므로 무게를 달아서 맞바꾸었다고 한다. 누가 이익이 컸을까? 물론 玉의 생산자인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유목민이 뛰어난 장사꾼이 된 것 같다. 특히 유목민은 환경적으로 주어진 말과 낙타를 이용한 기동성을 발휘하여 정착 농경인이 생산하는 실크를 상대적으로 헐값에 구입하여 페르시아나 중동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 高價로 판매하여 중계무역의 이익을 마음껏 챙겼다.
 
 
  로마 여인들을 벗긴 실크
 
  중국제 실크는 당시 서양 세계의 맹주인 로마까지 들어갔다.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고 유럽, 아프리카, 중동 지역을 장악한 로마사회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극에 달하였을 때 중국製 실크는 귀족 여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때까지 식물성 섬유나 모직을 입어야 했던 로마 귀족 여인들이 가볍고 몸에 꼭 붙는 실크로 단장하고 밤의 향연에 등장하였다. 이를 본 로마 남성들의 탄성 소리가 지금도 우리 귀에 들리는 듯하다.
 
  『중국제 실크가 여인의 옷을 벗긴 듯하다』
 
  영국 작가 그레이브스의 소설 「클라우디우스」에 나오는 표현이다.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알 수 없도록 육체미가 드러나게 하는 실크의 특성을 아주 잘 묘사한 대목이다
 
  로마 여인들이 다투어 중국제 실크를 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실크의 가격은 급등하였고 더 많은 상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실크가 공급되는 통로인 흑해지방, 걸프지역으로 몰려갔다. 이때에 로마사회의 사치품이었던 유리제의 구슬과 술잔 등이 극동으로 교역되어 갔다
 
  로마의 환경은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뜨거워도 저녁이면 싸늘해진다. 그래서 로마인들의 저녁 식사는 보통 오후 9시쯤 시작된다. 따라서 싸늘한 밤 공기에서도 보온력이 뛰어난 실크는 당연히 인기품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중국 산동성 滿城(만성)에서 발견된 前漢시대의 무덤에서는 玉으로 만든 壽衣(수의)가 발견되었다. 주인공은 前漢 武帝의 형님이었는데 부인은 흉노 출신이었다. 漢과 匈奴의 정략결혼의 결과였다. 그 부부는 모두 玉 수의를 입고 있었다. 얇은 정사각형 옥돌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서 금실로 잡아매어 물고기의 비늘처럼 옷을 만들었다. 도대체 玉이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상상을 못 할 지경이다. 그만큼 중국 사회에서는 玉이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 되었으니 그 과정에서 玉의 공급자들이 얻는 경제적 이익은 더더욱 상상을 초월한다.
 
  구매자 사회의 문화와 취향을 파악하여 얻을 수 있는 극도의 이익을 양측이 모두 얻은 사례이다. 옛날부터 상인들은 뛰어난 문화인류학자들이다.
 
  몽골인들은 채식도 하지 않지만, 물고기도 먹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물고기가 그들의 신앙 속에서 숭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물고기 숭배 사상은 저 멀리 앗시리아-바빌로니아에서 생겨난 자연숭배 신앙의 한 종류인데 물고기가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는 생명의 나무(고케레나 木)를 보호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이다.
 
  그런 신앙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人을 거쳐 몽골인에게 전파되었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민족적 종교인 라마교(티베트 불교)의 8가지 神像 중에 하나로 魚神像(어신상)을 모시고 있다. 이 魚神像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한 쌍으로 등장하는데 이런 雙魚紋은 남쪽으로는 티베트-네팔-인도, 방글라데시-南중국-가야로 전파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알타이-몽골-만주로 퍼져 있는 민간신앙 속에 단단히 뿌리 박혀 있다. 그래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릉의 대문에도 쌍어문이 여러 組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내몽골에서 필자를 태우고 다닌 택시 운전사의 자동차 열쇠고리에 칠보로 만든 雙魚가 장식으로 달려 있었다. 필자는 그것이 중국 제품인 줄 짐작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그 후 그것과 똑같은 물건이 한국의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판매되는 것을 보고 출처를 확인해 보니 의외로 한국 제품이었다. 全세계 라마교의 신봉자를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인구임을 간파한 한국의 어느 기업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틈새 시장을 개발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 정도의 문화식견이 있는 기업인의 눈에 기마민족 남자들이 꼭 쓰고 다니는 中折帽(중절모)는 왜 눈에 안 띄었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모자생산이 全세계에서 1등 자리를 차지한 지 이미 오래인데 모자 생산의 기술과 축적된 경험으로 기마민족 남자들의 필수품인 모자를 만들면 상당한 시장이 개척될 것으로 믿어진다.
 
 
  울란바토르의 화가
 
  「나싹 도르츠(b.1945)
 
  사범대학 미술과 졸업. 흡스구 출생. 우넨신문사 미술부 근무, 파리 전람회 경력, 유화 20점(풍속화(8)) 구입」
 
  이상이 내 수첩에 적혀 있는 울란바토르에서의 기록이다
 
  관광지인 보그드 궁전 앞에 길거리 그림 전람회가 눈에 띄어 잠시 멈추었다. 유화와 수채화로 그려진 몽골인의 민속이었다. 첫날은 구경만 하고 다음 답사지로 갔다. 다음날도 그 앞을 또 지나가게 되었다. 차를 멈추고 서서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는 방식은 아주 사실적인 구상화였다. 캔버스에 페인트로 그린 서양화 기법이었지만 그림의 내용은 몽골족의 생활이었다. 뛰는 말, 달아나는 말을 기다란 장대에 달린 고리로 붙잡는 장면 등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었다. 약 20점의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20호쯤 되는 중형이었다. 저녁 노을에 전통복장인 「델」을 입은 한 노파가 겔(천막 집)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문득 그 그림을 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며칠 전에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갤러리에 들렀었는데 서양사람의 그림을 흉내 낸 추상화 비슷한 유화들만 있어서 보다 말고 나온 적이 있는데, 이번 그림은 몽골 풍속을 그린 것이어서 기념으로 하나 사고 싶었다.
 
  『실례지만 작가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안내인인 수케바톨이 통역하였다. 작가의 이름은 나삭 도르츠이고 1945년생이란다. 수년 전에 독일에서 초청전람회에 출품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경력도 있는 작가가 관광지의 길거리에서 그림을 팔고 있는 게 그 나라의 현실이었다. 문득 한국화가 중에 박수근 화백도 한국전쟁 중에 미군에게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두말 않고 그 그림을 집었다. 그러고 나서 값을 물었다. 예술가의 인격을 생각해서 부르는 값대로 다 주기로 내심 작정하였다. 만일 내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다음날 주면 되지 하는 배짱이었다. 화가가 부른 가격은 매우 쌌다.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하는 그림값이었다. 하긴 우리나라처럼 그림값이 비현실적으로 비싼 나라는 全세계에 없다.
 
  파리의 몽마르트나 체코의 프라하의 거리 예술가들에게서 그림을 사 보았고, 캐리커처도 그려 보게 한 적이 있었음에도 몽골의 그림값은 터무니없이 쌌다. 내가 무슨 부자라서 싸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가난한 대학교수이다. 그때는 외국여행 중 아닌가? 그런데도 매우 싸다고 느낀 게 사실이다.
 
  결국 나는 그 화가가 그날 전시하고 있던 그림을 모두 샀다. 모두 얼마나 지불하였느냐는 그 예술가의 체통을 생각해서 밝히지 않겠다. 대부분이 소품이었기 때문에 비쌀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날 저녁 숙소에 돌아와서 일행에게 그림을 자랑하자 사람마다 한 점씩 나누어 달라고 하여서 즉석 경매시장이 열릴 뻔하였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림을 좋아하는 김태익씨에게 몽골 방문 기념으로 한 점을 주고 나머지는 싸 갖고 귀국하였다. 그때 산 노파 그림에 제목을 내가 붙였다
 
  「얼린우(또는 오메룬)」
 
  칭기즈칸 어머니의 이름이다
 
  세월이 지나 경기도 박물관에서 몽골 문물 특별전을 할 때 그때 산 그림 중 한 점을 출품하였다. 「얼린우」가 대표작으로 나간 것은 물론이다.
 
 
  신라와 몽골의 角杯 문화
 
  한국인들은 술을 마실 때 자신이 마신 잔으로 손님에게 술을 따라 권하는 습관이 있다. 이런 풍속은 현대적 감각으로 판단하면 비위생적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버릇은 일본인들의 군국주의 시절에 우리에게 전파한 倭色문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왜색문화일까?
 
  내몽골 包頭(포두)의 어느 식당에서 민속의상을 입은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한다. 「하타」라는 비단 보자기에 술이 가득한 술잔을 받쳐들고 고음의 목소리로 권주가를 부른다.
 
  『먼 나라에서 오신 손님에게 이 술을 바치노라』
 
  그리고 술잔을 손님에게 전하면 손님은 그 술을 한숨에 다 마셔야 한다. 그러면 그 잔을 다시 되돌려 받은 주인은 새로 술을 따라 붓고는 다른 손님에게 권한다. 즉 술잔 하나로 손님이 모두 돌려 가며 대취하는 것이다. 그 술잔은 밑이 뾰족하여 바닥에 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이름하여 角杯(각배)이다. 그러니까 각배로 술을 마시면 술잔이 쉴 새 없이 돌아가게 마련이다. 東夷傳(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弁辰(변진)의 行觴風俗(행상풍속)이 實演(실연)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셈이다.
 
  삼국유사에 「석탈해(昔脫解)」조에 보면 각배가 등장한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심부름하는 자를 시켜 물을 구하여 마시는데 심부름하는 자가 물을 길어 가지고 오던 도중에서 먼저 마시고 드리려 하니 각배가 입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탈해가) 나무랐더니 심부름하던 자가 맹세하여 말하기를 『다음 설혹 가깝고 멀고 간에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소이다』 하니 그때야 그만 角杯가 입에서 떨어졌다」
 
  여기서 角杯는 임금이 될 사람이 쓰는 물건이고 신통력이 있는 器皿(기명)으로 기술되어 있다.
 
  몽골을 답사하면서 나는 角杯가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를 여러 번 목격하였다. 칭기즈칸의 고향인 헨티에서 무당의 허리띠에 달려 있는 角杯는 검은색 소뿔이었다. 뾰족한 끝 부분에 까마귀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또 한 번은 내몽골 호화호트 市 교외에서 만난 브리야트族 여인이 어미가 죽은 어린 양에게 젖을 주는 데 角杯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角杯가 여러 개 발굴되었다. 신라·가야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왜 부여·고구려·백제권에서는 角杯가 사용되지 않았는지 의아스럽지만 그 해답은 간단하다. 부여·고구려·백제계는 신라·가야계와 풍속이 달랐다.
 
  이런 현상은 금관이 신라·가야에서만 발견되는 것과 결부하여 해석되어야 하겠다. 부여계와 신라계는 풍속이 달랐고, 어쩌면 언어도 달랐을 것이다. 삼국지의 저자인 陳壽(진수)도 弁辰(가야)의 풍속은 辰韓(신라)과 같다고 하였다. 신라·가야계통의 통치자급들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부여계보다 더욱 서북쪽의 유목민들의 그것들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추측은 角杯가 위굴지방을 지나 중앙아시아의 주인공이었던 스키타이族들과 이란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고대 주민들이 즐겨 쓰던 신성한 술잔이라는 데 기인한다.
 
 
  몽골인의 발성법
 
  角杯에 관련하여 아주 이상한 미스터리가 있었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문을 꼭꼭 잠그고 있던 1970년대에 중국에서 출판한 중국미술사 책에 희귀 보석인 馬瑙石(마노석)으로 만든 角杯가 등장하였다. 山羊의 머리를 조각한 정교한 제품이었다. 중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농민들이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角杯가 중국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의문은 내가 스스로 중국에 가게 된 1991년에야 풀렸다 그 마노석 각배는 西安박물관에 있었다. 설명서를 자세히 읽으니 당나라 때 소수민족이 황제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중국인이 匈奴風(흉노풍)의 술잔에 술을 따라 마셨을 리 없지 않은가.
 
  1999년 몽골 민속음악단이 한국에 공연하러 왔었다. 한 남자 가수가 처음에 고음으로 노래를 시작했을 때 내몽골에서 듣던 勸酒歌가 떠올랐다. 다음 순간 이 가수는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추어 소리를 내는데 먼저 소리는 그대로 내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또 한 옥타브 낮추어 소리를 내는데 먼저 내고 있던 두 개의 다른 소리들이 그대로 어울려 퍼졌다. 목소리 하나로 오케스트라의 효과음을 내고 있었다. 「쿠미」라는 특별 창법인데 유목민 특유의 발성법이라고 민족음악학자 권오성 교수가 설명해 주었다.
 
  삼국유사 「駕洛國記(가락국기)」에 수로왕이 誕降(탄강)할 때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었다(有殊常聲氣呼喚). 여기서 수상한 소리라는 것이 혹시 몽골인의 발성법인 쿠미가 아닐까. 이런 소리로 노래를 즐길 때 角杯에다 술을 따라 여럿이 돌려가며 마시면 한층 더 흥이 날 듯하다.
 
  角杯는 한 쌍도 나오지만 네 쌍짜리도 있어서 신라·가야인들의 술 마시던 풍류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하는데 현대인들은 왜 角杯 모양의 술잔을 만들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조선시대에도 출전하는 장수에게 왕이 술을 따라 주는 馬上杯(마상배: 빨리 마시는 잔)라는 뾰족한 잔이 있었다. 그런 것을 콘텐츠로 삼아 한국의 세계적인 기술인 백자로 고급상품을 개발하면 경쟁력이 있을 듯하다.
 
 
  休屠王의 아들 日
 
  유목민과 농민은 적대관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목민은 땅에서 자라는 풀을 가축에게 먹이고 살아가는데, 농민들은 땅을 파서 농작물을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목민의 감정으로는 농민들이 땅을 파는 행위는 땅에 상처를 입히는 가혹한 행위이다. 그러니 유목민인 匈奴가 농민인 漢族을 좋아할 수 없었다. 漢族과 흉노의 대결은 그래서 숙명적이다.
 
  한반도에 한사군을 세운 武帝는 흉노를 증오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흉노에게 침략당하면서 온갖 굴욕적인 조공을 바치는 漢나라의 현실을 보면서 자라난 武帝는 등극하면서 타도 흉노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漢나라에는 보병밖에 없었다. 武帝는 우선 흉노의 배후 세력인 서역의 여러 세력과 동맹을 꾀하였다. 張騫(장건)이 서역으로 가서 大碗(대완: 지금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지역)까지의 넓은 지역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고, 李廣利(이광리)가 서역의 명마 300여 두를 이끌고 왔을 때 무제는 「西極天馬歌」를 지어서 李廣利의 공적을 치하하였다. 이 때쯤의 일이다.
 
  漢나라의 ♥去病 장군이 甘肅省에 원정하여 휴도국의 왕자를 볼모로 데려온 사건이 있었다(太初 3년 BC 102). 휴도왕은 흉노의 일파로 동맹국에게 배반당하여 죽고 왕비인 閼知(옌즈)와 어린 아들인 日石單(일제)가 잡혀서 漢의 수도로 옮겨 살게 되었다. 日石單는 기마민족의 혈통을 따라 말을 잘 다루었다. 그가 기른 말들은 훌륭하게 자라 漢나라에게 기마군을 창설하게 하였다. 武帝는 기뻐서 왕족의 여인을 日石單에게 주어 결혼하게 해 日石單를 왕실가족으로 삼는다. 日石單에게는 姓(성)이 없었다. 흉노는 원래 성이 없다. 그러나 이제 漢人(한인)이 된 日石單에게 金(김)이라는 성이 賜姓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日石單의 아버지인 휴도왕은 祭天金人(제천금인)이었다. 즉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 金人(금인), 즉 알타이 族이었던 것이다. 알타이라는 지명은 「金」, 즉 「Gold」를 의미한다고 앞서 설명하였다. 祭天은 제사장의 직분을 갖는 왕족을 의미하고 金人은 알타이 사람(Altai Men)을 뜻한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金氏(김씨)가 생겨난 것이다. 이 사건이 한국의 金氏族들이, 왜 新羅 金氏와 伽倻 金氏가 있게 되었는지를 암시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한국 金氏族들의 고향이 바로 알타이였기 때문이다.
 
  日石單(일제)는 漢字(한자)식 발음이다. 흉노 말로는 「피디」 또는 「미디」라고 발음한다. 「선각자」라는 뜻이다. 어머니인 閼知(알지)는 흉노말로 「옌즈」라고 발음한다. 「왕의 정실부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신라의 金閼知(김알지)의 출신 성분도 흉노 왕족과 결부해서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철의 松江 歌詞(송강가사)에 나오는 「연지분」은 옌즈의 고향에서 나는 붉은색 화장품의 원료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인류 최초의 金氏族
 
  피디는 황제를 측근에서 호위하는 직책으로 평생을 살았고 그의 후손들도 대대로 황실에 외척으로 비서실장급의 위치에서 황제들을 보필하며 살았다. 그러나 王莽(왕망)의 쿠데타를 막지 못한 이유로 後漢(후한) 광무제(AD 26~57)는 金氏 일족을 모두 없앤다. 「피디」 이후 4대 만에 당한 사건이다. 1세기 때 한국사에 金氏族이 등장하는 것을 文正昌(문정창)씨는 피디 계통의 족속들이 한반도로 이민 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였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므로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볼 시간을 갖겠다.
 
  피디의 무덤은 서안 부근에 있다. 武帝의 무릉과 곽거병의 무덤에 나란히 피디의 묘가 있다. 평면 정사각형의 중국식 土築墓(토축묘)이고 봉분은 사각추 형이다. 피디가 흉노 땅에서 살다가 죽었다면 흉노식 무덤인 적석묘에 묻혔을 텐데 하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숙연해졌다.
 
  알타이 출신으로 신라 땅에서 살게 된 김알지계의 후손들은 유목민의 생활을 포기하고 농업에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굳세게 흉노계의 칭호인 尼師今(이사금)과 麻立干(마립간)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였고 알타이 문화 전통인 금관을 쓰고 조상 대대로의 흉노·투르크 전통인 적석묘에 묻혔다. 영혼은 새를 통하여 하늘로 날려 보냈다.
 
  나는 처음 피디의 묘를 발견하고 봉분 앞에서 술을 따라 올리고 절을 하였다. 한국계 金氏 중에서 처음 찾아온 사람으로서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안내하던 조선족 고고학자 金憲鏞(김헌용)씨도 덩달아 절을 하였다. 그리고 金氏 성을 갖고 저 멀리 한국 땅에서 태어난 고고학자와 고향을 떠나 漢나라 땅에서 金氏 성을 처음 시작한 피디와의 이런 기가 막힌 해후에 감격하여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하였다. 1991년 7월이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한국문화의 原形을 찾아서
야쿠티아 여인이 盛裝한 모습. 쓰고 있는 모자는 원주민 샤먼의 모자와 같은 디자인이고, 신라 서봉총 금관의 內帽(내모)와 같은 구조이다. 한국 민속에서 여자아기들에게 씌우던 모자인 굴레도 같은 모양이다.
 러시아 바이칼 지방의 원주민들은 한국사람의 모습과 똑같은 북방계 몽골로이드(Mongoloid)이다. 브리야트族과 에벵키族이 주력 인구이다. 지금은 舊러시아와 소련시대를 거치면서 슬라브族들이 많이 이주해 와서 동양인들과 서양인들이 섞여서 살고 있고 간혹 코사크族도 만날 수 있지만 역시 원주민들은 유목과 수렵에 의존하여 살던 동양계 인종들이다.
 
  이 지역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샤먼(薩滿, Shaman)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샤먼, 즉 무당은 원래 에벵키族의 말이다. 야쿠티아에서 남자 무당은 「어윤」이라고 부르고, 여자 무당은 「우다간」이라고 발음한다. 하늘세계와 지하세계를 모두 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뜻한다.
 
  바이칼과 북쪽의 야쿠티아 지방의 토착문화에 관하여 기초지식을 얻으려면 우선 노보시비르스크를 찾아가야 한다. 우랄지방에 있는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러시아 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는 박사급 학자들 수백 명이 연구하고 있는 대규모 연구 센터이다. 여기서 우랄 동쪽의 시베리아 전역과 극동까지의 인문학과 자연과학연구를 관장하고 있다. 알타이, 바이칼은 물론 북극지방까지 모두 이곳 과학자들의 연구대상이기 때문에 나도 우선 여기에 들러 기존의 연구성과와 현지조사에 대한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고고학 민족학 연구소를 방문하여 소장인 안드레이 데레비안코 박사와 해후를 하고 민족학자를 소개받았다. 이스마일 게누에브라는 중년의 학자가 친절하게 시베리아 문화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나의 관심은 첫째, 알타이 고원부터 바이칼, 북극지방의 야쿠트까지의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청동기시대 이래로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왔는지 살펴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역사시대에 들어와 중국 세력, 특히 漢(한:BC 202~AD 220)나라의 세력확대가 변변한 왕조를 갖지 못했던 북쪽 초원에 살던 여러 민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유물이나 풍습의 변화로 읽어내고 싶은 것이었다. 그 기간이 바로 한반도에 고대 왕국들이 태동하고 주민의 유입이 왕성하던 기간과 겹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알타이지역부터 바이칼을 지나 북쪽 툰드라까지 퍼져 있던 민족들의 토착문화를 통칭하여 알타이 문화라고 편의상 부르기로 한다. 그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고 이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광의의 개념으로 알타이語에 속하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알타이 語群에 속한다는 얘기는 앞서 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문화의 原形(원형)이랄까 文化因子(문화인자)랄까 하는 것들을 찾아내려면 우선 연구해야 하는 지역이 바로 이 넓고 추운 초원지대(Steppe)와 자작나무로 하늘이 가려있는 삼림지대(Taiga)의 토착문화일 수밖에 없다는 중간결론에 도달한다.
 
 
  年代-地域 가설
 
  게누에브 박사는 민족학자이지만 고고학에도 조예가 깊어 내게 많은 정보를 주었다. 원래 러시아의 고고학은 민속학 또는 민족학과 따로 떼어 연구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그 이유는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현재의 문화가 고고학 시대의 문화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한 지역이 많기 때문이다. 고고학 연구의 한 방법론에 의하면 과거인의 생활을 유추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원시사회(Modern Primitive Society)의 생활상을 관찰한다. 문명과 떨어져 살고 있는 원시사회의 모습이 과거 인류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론으로 언어학에서는 年代 地域(연대 지역) 가설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문화의 핵심 어휘가 인간의 이동에 따라 고향으로부터 멀리 퍼져나가고 나서 세월이 흐르면 고향의 어휘는 바뀌었는데 퍼져나간 지역에서는 옛날 어휘가 그대로 살아 있다는 이론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나갔지만 한국고대사의 여러 문화양상을 해석하려면 한국인과 비슷한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현대의 원시사회 주민들을 만나 보아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현대문명에 덜 오염된 시베리아 오지에 살고 있는 알타이 諸族(제족)들의 현대의 사회상을 관찰하다 보면 의외로 고대 한국인들이 남겨놓은 문물을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다.
 
  게누에브 박사는 나에게 오브(Ob)江 유역에 사는 한티族에 관한 영화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샤먼」이라는 다큐멘터리였다.
 
  <江의 精靈은 여인이다. 그 여인을 위로하는 굿을 강변에서 한다. 나무로 깎은 인형들과 사슴모양의 조각들에게 절을 하고 통나무집에 잘 보관한다. 소나무에 헝겊을 주렁주렁 달고 샤먼이 무수하게 절을 한다. 백색 천은 물(水), 적색 천은 불(火)을 의미한다. 공물로 빵을 놓는다.
 
  사슴을 잡아 제물로 쓴다. 그리고 나무에 여러 번 허리 굽혀 절을 한다. 나무 위에 밧줄을 던져 올려 천신(가족신)과 교감한다. 최후에 사슴고기를 삶아 공물로 바친다>
 
  이 영화 내용 중 우리 민속에서도 흔하게 보이는 堂木(당목)과 幣帛(폐백)이 특별하게 나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나라에서 무당이 제를 지내려면 당목 아래서 향을 피우고 기복행위를 하는데 이때 주민들이 폐백을 바친다. 부자는 옷감을 匹(필)로 낼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옷감을 조금씩밖에 내지 못한다. 그래서 다양한 색깔의 옷감이 당목에 걸리게 된다. 시베리아에서 당목은 檀君神話에서 단군이 탄생하는 神檀樹 같은 것이고 신라 金閼知의 탄생장소인 鷄林과 같이 지도자의 탄생과 관계 있는 宇宙木이다.
 
  한국 무당들의 옷이 알록달록한 이유는 당목에 바쳐진 여러 색깔의 옷감을 꿰매서 옷을 만들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민속학자 김광언 교수의 해석이다. 그럴 듯하다. 하지만 조선시대 포도대장의 제복도 붉은색, 노랑색, 검은색 천을 섞어서 알록달록하게 만들었고 어린이들의 색동 저고리도 여러 가지 색의 천으로 만들었는데 그 이유가 당목에 걸렸던 여러 색의 폐백과 관련이 있을까. 이 문제는 나중에 또 고민하기로 하자.
 
  차르 황제 시절의 舊러시아는 정력적으로 시베리아를 개척해 나갔다.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땅인데다가 일년의 절반이상이 눈으로 덮여 있는 땅이니까 기본적으로 농업인들이었던 슬라브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쓸모 없는 땅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지리상의 발견과 기계문명 발달은 광업자원의 필요를 낳았다. 따라서 제국주의 시대의 영토확장의 추세에 따라 버려졌던 시베리아도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시비르 汗國(한국)에서 시베리아 유래
 
  시비르는 원래 종족의 이름이다. 투르크 몽골계의 민족으로 元나라 때 기록으로는 昔必兒(석필아)이다. 15세기에 망할 때까지 말 타고 날이 휜 장검을 휘두르던 민족으로 동유럽의 여러 나라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던 민족이다.
 
  시비르族이 휘두르던 칼의 이름을 따라 시비르 劍이 생겼고 혹시 추측이지만 펜싱경기의 사브르(Sabre)도 여기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실제로 시비르 族의 직계 후손이라고 믿고 있는 헝가리 사람들은 부다페스트 국립박물관에 시비르 검을 잘 보관하고 있었다.
 
  舊러시아가 제일 먼저 개척한 땅은 바이칼 지방의 이르쿠츠크였다. 강인한 코사크인들을 시켜 눈과 자작나무로 덮인 땅을 개척하고 통나무로 성곽을 둘러막고 도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1661년의 일이다. 원주민인 브리야트族과 에벵키族들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겠지만 농경민족들의 토지 사랑과는 달리 유목민족들의 이동생활의 전통은 금세 이르쿠츠크를 그들에게 내어주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음직하다.
 
  露日 전쟁 때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이르쿠츠크까지만 연결되어 있었다. 급하게 병력과 무기를 극동까지 수송해야 했다. 남북으로 기다란 바이칼 호수를 우회하여 철도를 건설할 시간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호수 위에 배를 띄워 연결해 舟艇橋(주정교)를 놓고 철도를 연결하였다. 겨울에는 얼음 위로 임시 철로를 깔고 人馬를 수송하다가 얼음이 깨어지는 바람에 크게 낭패를 당한 사건을 영화를 통해 본적이 있다.
 
  바이칼의 명칭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어떤 원로 한국학자는 白卵(백란), 즉 백알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그럴 듯한 해석을 하였지만 역시 아마추어 수준이다. 바이칼은 브리야트 말로는 물고기가 가득 찬 호수라는 뜻이고, 알타이語로는 榮光(영광)의 바다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영광의 바다 또는 영혼의 바다쯤으로 해석하는 게 이 지역 주변 여러 민족들의 바이칼에 대한 경외심에 합당한 해석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바이칼 지역의 두 개의 중심 민족인 브리야트族과 에벵키族의 샤먼 복장은 그대로 신라 왕족들의 祭服(제복)의 원형을 설명하고 있는 듯하여 충분히 시간을 잡고 사진촬영과 스케치를 하였다. 특히 등과 가슴에 달려 있는 새들과 물고기의 수까지도 꼼꼼히 적었고, 화살촉이나, 낚시바늘이 달려 있는 위치까지도 기록하느라고 여러 날이 소모되었다.
 
  게다가 고고학 유물의 사진 자료를 팔지 않아서 일일이 유리창을 통하여 사진을 찍느라고 촬영 비용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물관을 떠나기 전에 뮤지엄 숍에서 팔고 있는 에벵키族의 샤먼 인형을 샀다. 소련 시절로서는 아주 비싼 가격을 요구하였지만 연구 자료라서 거금을 쾌척해야 했다.
 
 
  툰드라에 흐르는 강
 
  이르쿠츠크를 떠난 비행기가 거의 2시간을 북쪽으로 날아가야 야쿠티아에 도착한다. 완전히 북극지방이다. 저녁 때였는데도 白夜(백야) 현상으로 한낮처럼 환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땅에는 산도 나무도 없는 평지에 개울과 늪지뿐이다 강들은 초가을부터 얼어붙어 글자 그대로 凍土(동토)가 되었다가 다음해 여름이 되어야 녹는다. 녹은 개울물들은 북쪽으로 흐르는 레나江에 합쳐진다
 
  수도인 야쿠츠크를 중심으로 100만 명의 인구가 310만km2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겠다.
 
  국토의 60%는 타이가(森林)이고 40%가 툰드라이다. 내가 도착한 7월에는 짧은 여름을 한껏 즐기려는 듯이 강물이 소리를 내어 흐르고 풀밭에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도시라고는 페인트도 칠하지 않은 목조건물들이 모여 있는 것이 전부다. 그래도 야쿠티아는 나에게는 오랫동안의 매력의 땅이었다. 나는 이 곳에서 인문학 연구의 황금 鑛脈(광맥)을 찾으러 온 사람이 되었다. 왜냐하면 산업화하지 않은 원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땅이고 그 원주민들이 따지고 보면 한민족과 유전인자가 가장 비슷한 브리야트族에서 파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991년에 조선일보가 기획한 대륙탐사 일원으로 바이칼에 왔을 때도 야쿠티아까지 가고 싶었지만 일행이 여럿이어서 모두 관심이 달랐다. 그래서 나 혼자만 야쿠티아를 보러 가겠다고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야쿠티아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하였다. 1970년대에 영어로 출판된 알렉시에브 교수의 야쿠티아 보고서를 런던에서 사게 되었다. 철의 장막 속에 꽁꽁 숨어있던 정보를 보여준 귀한 내용이었다.
 
  고고학 시대의 유물이나 현재 사용되고 있는 민속품이나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考古 민속적인 내용이었다. 그 후 일본 학자들의 체질인류학적 연구에 한국인과 유전인자가 가장 가까운 종족이 바이칼 지방의 브리야트族이라는 내용에 접하게 되었다.
 
  내용인즉, 혈액 속에 GM 유전자 중 AB3 FD라는 유전자는 몽골로이드의 특징인데 브리야트族이 가장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야쿠트族이 바로 브리야트族의 일파라는 것이다.
 
  러시아 시절의 황제에게 대항하던 수많은 젊은 귀족들이 바이칼 지방으로 강제 流刑 당한 이래 슬라브族들의 바이칼 이주가 시작되었고, 바이칼 원주민들의 문화는 급속히 슬라브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다. 게다가 공산주의 통치에 대항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는 토착문화의 중심인물인 샤먼들을 모조리 학살하고부터 원주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모래 속에 물 스며들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현상은 역사시대에도 있었다. 기원 전 3세기부터 중국의 秦(진)나라와 漢(한)나라가 중원 땅을 제패하고 흉노, 즉 몽골족들을 위협하였을 때 몽골인들은 미련 없이 다른 草地(초지)를 찾아 이동하고 말았다. 이때 흉노의 일파가 서쪽으로 옮겨가서 박트리아 세력과 합쳤고, 동쪽으로는 辰韓(진한) 땅으로 내려와서 신라를 형성하는 중심 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후에 따로 말하겠다.
 
  10세기 때 중국의 唐(당)이 천하를 제패하고 제국을 세워 주변민족을 압도하자 돌궐族들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터키)로 들어갈 때쯤 브리야트族의 일파가 북쪽으로 이민하여 야쿠티아 지방까지 밀려 나가게 되었다.
 
 
  白馬 전설
 
  야쿠티아는 러시아式 이름이다. 이 지역 토착주민들은 자신들을 사하(Caxa) 族이라고 부른다. 공화국 이름도 사하공화국이다. 사하라는 말 의 뜻은 해 돋는 땅이다. 아마도 사하族이 동쪽으로부터 이민해 온 모양이다.
 
  이곳 사람들의 인상은 몽골계로 검은 눈에 매부리코를 한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동양인들과 서양계통 사람들의 혼혈이 있었음이 보인다. 사하 언어는 터키語 계통이고 말과 소를 기르며 산다. 북극지방에서는 순록의 사육과 어로, 수렵을 병행하고 있었다. 러시아 이후로 점차 농업기술을 받아들이고 있다.
 
  먼저 박물관으로 갔다. 옛날 교회 건물이었던 목조 건물을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쓰고 있었다. 역시 소련의 영향으로 考古品(고고품)과 민속품이 함께 어우러져 토착민의 과거생활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박제된 白馬(백마) 한 마리가 있었다. 다리가 짧은 몽골마 계통이었다. 성스러운 장소를 표시하는 禁(금)줄을 띄우고 줄에는 색깔 있는 헝겊을 달아 놓았다. 마치 우리 민속에 聖所(성소)나 잡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에 금줄을 쳐놓은 것을 연상시켰다.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하면 야생의 말이 사람에게 사육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말이란 사람에게 사냥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스페인에 있는 알타미라 동굴벽화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古代馬(고대마·Bison)는 飼育馬(사육마)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몽골인들이 말을 사육하면서 멋대로 달아나는 말을 목동이 말을 타고 뒤따라 가면서 장대 끝에 달린 올가미로 잡아채어 쓰러뜨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광경은 세월이 흘러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명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다. 목동의 능숙한 기마술과 올가미를 거는 순간이 스톱 모션처럼 살아난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자.
 
  여기서 白馬는 정의로운 통치자가 타는 말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성한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날개 달린 말이 가뭄에 우물을 찾아주는 페가수스(Pegasus)가 있고, 페르시아 신화에서 善神(선신)은 白馬를 타고 惡神(악신)은 黑馬(흑마)를 탄다. 즉 하얀색은 善(선)이고 正義(정의)라는 생각이다. 카자흐스탄의 이씩 지방에서 발굴된 스키타이 말기 때(BC 3세기) 고분의 주인공은 흰말을 타고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카자흐스탄 국립박물관이 복원한 그림을 전시하고 있었다.
 
  신라의 박혁거세도 白馬가 羅井(나정)에 놓고 간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 그 말은 박혁거세를 땅에다 내려주고 홀연히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경주 신라왕의 무덤에서는 白馬가 구름을 가르며 힘차게 뛰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障泥(장니)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 고분을 天馬塚(천마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白馬는 이렇게 정통성을 갖춘 통치자를 상징하는 기마민족들의 善神이다.
 
 
  솟대 새의 北向
 
  말과 白樺(백화)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곳에 여러 개의 솟대들이 박물관에 전시돼 있었다. 어느 솟대 위에는 까마귀가 한 마리 앉아 있고, 어느 솟대 위에는 여러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까마귀는 큰 몸집이고 여러 마리의 새들은 몸집이 작은 잡새들이었다. 솟대는 중앙아시아로부터 北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와 일본에 걸치는 실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골고루 발견되는 민속현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강릉 端午祭(단오제) 때 만들어 세우는 솟대 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는 게 보편적인 현상이고, 신라 서봉총 北墳(북분)에서 발견된 여인의 금관 위에도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되어 있다는 것은 앞서도 이야기하였다.
 
  솟대는 나무(宇宙木 또는 生命木)이고 솟대 위에 앉아있는 새는 인간의 생명 또는 영혼을 인도하는 파일럿이다. 아시아 원주민들에게는 새가 사람의 생명을 하늘로부터 가져오고 사람이 죽으면 영혼을 다시 하늘나라로 가져간다는 믿음이 있어 왔다.
 
  즉 영특한 인물은 신성한 나무 밑에서 기도하는 여인에게 하늘의 절대자가 새를 통하여 보내는 정령으로 인해 탄생한다는 이야기는 月刊朝鮮 9월호에서도 이야기하였다.
 
  신라의 김알지가 계림에서 童子로 발견되었을 때도 새들이 지저귀었다고 하며, 毗處王(비처왕, 일명 炤智王) 때인 488년 왕을 시해하려던 사람과 궁녀가 간통하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을 만나도록 인도하는 까마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三國遺事 射琴匣).
 
  경남 진주 옥전리의 가야고분에서 발견된 금속장식에도 여러 마리의 새가 앉아 있어서 통치자의 탄생과 죽음에 새가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시아인들의 새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고고학 유물로 가장 큰 새는 인도네시아의 가루다(Garuda)일 것이다. 상상의 새이지만 얼마나 큰지 날개를 펴면 태양을 가려 세계가 암흑이 된다는 神鳥(신조)이다. 그래서 발리 섬에 있는 아주 오래된 힌두교 사원의 정문은 가루다가 날개를 편 모양으로 두 기둥을 삼고 있다.
 
  이 조각은 현대의 여러 조각가들이 모방하여 자카르타의 중심부에도 雄姿(웅자)를 보이고 있고, 그것을 본딴 듯한 조각이 우리나라 천안의 독립기념관에도 서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마음속의 새는 태양 속에 사는 까마귀인 三足烏(삼족오)에서부터 솟대 위의 새들인 오리, 원앙, 기러기 등이다.
 
  四神圖(사신도)에서 북방을 상징하는 玄武(현무)에 대칭되는 남방의 새는 朱雀(주작)이다. 그러나 주작은 미안하게도 한국인의 솟대 위에 앉는 새가 아니다. 솟대 위의 새들은 모두 철새이고 北向하여 앉아 있다.
 
  왜 한국의 솟대 위의 새들은 모두 北向하고 있나? 그들의 고향이 추운 북쪽지방이기 때문이다. 겨울을 지나기 위하여 잠시 越冬(월동)하러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새들에게 간절한 소원을 실어 보내는 과정이 솟대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 기복행위를 하는 한국사람들 중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北國(북국)이 마음의 고향인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여기서 북국은 어디일까? 아마도 少昊國(소호국)일 가능성이 있다.
 
 
  신라·가야·倭의 조상은 어디서 왔나?
 
  少昊國. 즉 작은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少昊는 중국 고전인 山海經(산해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西方(서방)의 神이다. 소호는 皇娥(황아)라는 선녀의 아들이다. 황아는 베를 짜는 여인으로 뗏목을 타고 은하를 저어나가 窮桑(궁상)이라는 뽕나무 밑에서 白帝(백제)라는 소년을 만나 사귀었다. 이때 그들이 타고 놀던 뗏목의 돛대 위에 옥으로 깎은 비둘기를 달아놓아 방향을 잃지 않게 하였다.
 
  황아와 백제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인물이 바로 소호이다. 뽕나무 아래서 태어났다고 하여 일명 窮桑氏(궁상씨)라고도 한다. 소호는 장성하여 고향을 떠나 동방의 바다 밖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 소호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호국에서는 모든 公卿大夫(공경대부)가 각종의 새(鳥)였다. 즉 소호국은 새의 왕국이었다.
 
  조금 긴 이야기를 소개한 이유는 이 내용에서 한국 고대사의 주인공들의 탄생신화와 한국인들의 민속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신라 金씨의 조상인 김알지는 계림이라는 나무에서 발견되고 알지의 탄생을 기뻐하여 새들이 노래하고 동물들이 뛰놀았다고 한다(삼국유사).
 
  또 황아의 배의 돛대 위에 달린 玉鳥(옥새)는 앞서 말한 가야시대의 玉田(옥전)고분에서 발굴된 철제 무기에 조각되어 있는 새들의 바로 그 모티브가 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 나라의 후지노키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에서 돛단배 위에 앉아 있는 새들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통치자의 탄생장면 배경에는 나무와 새가 기본적으로 등장하고 때로는 돛단배도 등장하는 내용은 山海經의 소호의 탄생을 설명하는 것이다. 신라, 가야, 倭(왜)의 지배층의 마음속에 왜 서방신인 소호의 탄생신화가 깊이 뿌리 박고 있을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신라, 가야, 倭의 지배층들이 北아시아의 주민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신라, 가야, 倭의 지배층들의 조상이 소호의 신화가 생겨난 중국 서북방 어느 곳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는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의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의 내용이 신화와 민속으로도 증명되는 것이다. 東京대학의 에가미 교수는 일본이 패전하여 의기 소침해 있을 때 기원 전 3세기부터 아시아 대륙에 살던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를 침입하였다는 학설을 내놓아 일본을 충격으로 몰아간 사건을 일으켰다.
 
  기마민족의 이동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며 기마 민족들의 신화가 한국의 신라와 가야를 거쳐 일본으로 간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알타이에서 발굴된 얼음 공주라는 귀족여인의 미라가 있다. 2000년이 넘었지만 얼음으로 싸여 있었기 때문에 원상을 복원해 볼 수 있었다. 이 여인은 머리카락을 높게 빗어 솟대 모양을 하고 거기에다 13마리의 금제 새(鳥)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 새들도 황아의 뗏목에 달렸던 새나, 서봉총 금관에 달렸던 새들과 마찬가지로 유목민족의 민속신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단풍이 곱게 물든 백화나무가 백마의 흰 빛깔과 어울리게 배치해 놓았는데 단풍든 백화나무의 잎새가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 빛깔은 황금색이었다.
 
  그 잎새의 모양은 신라금관에 달려 있는 瓔珞(영락)과 똑 같았다. 개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고, 고고학자의 눈에는 황금색의 백화나무 잎새가 순금제 영락으로 보이는 걸 어찌하랴. 사실 신라와 가야에서 발견되는 금관이나 금동관 디자인의 모티브는 나무이다. 그러니 당연하게 잎새가 달린 것이고 때로는 열매인 曲玉(곡옥)도 매달리게 되는 게 무엇이 이상한가. 신라의 國名도 일본어로는 「하얀 나무」(白木·시라기)가 될 만큼 신라인의 마음속의 토템으로 굳어 있는 백화나무의 잎새가 금관에 달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이 이야기는 따로 자세하게 하겠다.
 
 
  신라·가야에서만 나오는 角杯
 
  솟대가 군집한 바로 옆에 특이한 솟대가 있었다. 기둥 하나 위에 가로로 올려놓은 나무 위에 새들 대신 여러 개의 술잔이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 술잔들은 모두 밑이 뾰족한 모양으로 동물의 뿔처럼 생겼다. 이 술잔이 바로 기마민족들의 角杯(각배)였다. 각배는 그리스語로 「Rhyton」이라는 제사용 술잔인데 이스라엘 민족, 스키타이族에서부터 아시아의 기마민족 문화가 퍼진 全지역에서 유행한 술잔이다.
 
  한국에서는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것이다. 부산 福泉洞(복천동) 가야고분에서 발굴된 馬頭(마두) 장식 각배는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말머리와 角杯가 어우러진 걸작품이다. 그런 角杯가 솟대 위에 꽂혀 있었다.
 
  내가 지코프 미하일로비라는 박물관 직원에게 묻기도 전에 그가 설명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쿠무스(Kymus·馬乳酒)를 따라 놓는 잔들입니다』
 
  마유주는 말의 젖을 발효시켜서 만드는 유목민들의 독특한 술로서 막걸리 빛깔에 맛도 쉰 막걸리와 비슷하다. 기마민족이 사는 곳에는 어디라도 쿠무스가 준비되어있어서 나도 몽골에서 처음 마셨을 때는 약간 거부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카자흐스탄과 알타이를 답사하면서 여러 번 마시게 되어 점점 익숙해졌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쿠무스가 생각보다 독해서 막걸리 마시듯이 벌떡 벌떡 받아 마셨다가는 다음날 고생하게 된다. 乳製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조심스럽지만 나는 한 두어 사발까지는 견딜 만했다.
 
  다시 야쿠티아의 박물관을 살펴보자. 솟대 위의 새들은 크기가 달랐다. 커다란 까마귀는 한 개의 솟대 위에 한 마리가 앉아 있고 작은 새들은 한 솟대 위에 여러 마리가 줄지어 앉아 있었다. 소호국에 있었다는 공경대부의 모습이었다.
 
  ―까마귀를 야쿠트語로 무어라고 발음합니까.
 
  내 질문에 지코프는 안경을 고쳐 쓰더니 내 수첩에 영어로 적어 주었다.
 
  그는 「Sol」이라고 쓰고 발음은 「소르」라고 하였다. 솔은 라틴어로 태양을 의미한다. 동양에서는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검은 까마귀가 살고 있다고 믿는다. 즉 까마귀와 태양은 동서양 모두 同義語인 셈이다. 그리고 소르는 샤먼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야쿠트 사람들은 절대로 까마귀를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까마귀는 장수와 지혜의 상징이라고 한다. 까마귀가 새들 중에 제왕적인 대접을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人肉(인육)을 먹기 때문이다. 알타이 문화권에는 아직도 鳥葬(조장)의 민속이 있다. 鳥葬은 글자 그대로 사람의 시신을 새를 통하여 하늘나라로 보내는 엄숙한 의식이다. 까마귀 또는 독수리가 내려와 쪼아먹는다. 특히 전통적인 샤먼의 주검이나 후대에 유행하는 라마교 승려의 주검은 철저하게 鳥葬으로 처리되는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
 
  토착인들의 믿음으론 원래 인간의 생명은 하늘에서 새를 통하여 내려온 것이다. 그러니 육신이 죽고 나면 영혼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새들을 이용하여 영혼을 고향인 하늘나라로 돌려보내는 의식이다. 서기 3세기 때 사람인 陳壽(진수)가 쓴 三國志(삼국지)에 弁辰(변진), 즉 伽倻(가야)에서 대가(大家·족장)가 죽으면 집 앞에 커다란 새의 날개를 건다.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라는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왕족 여인의 무덤인 서봉총에서 발굴된 금관의 굴레모자(內帽)의 정수리에 앉아 있는 세 마리의 새도 주인공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파일럿이 아니고 무엇인가.
 
 
  『까마귀 神이여!』
 
  鳥葬이 현대인들의 의식으로는 끔찍하게 여겨질 것이지만 막상 그런 민족들의 입장이 되어 관찰한다면 死者의 영혼을 하늘로 귀환시키는 의식의 극치이다. 오래 전 몽골의 새벽 안개 속에서 라마승의 鳥葬을 목격하고 나도 한 두어 시간쯤 식욕을 잃은 적이 있지만 인류학적 체험의 최고 경지였다.
 
  까마귀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다. 다음날 까마귀와 白馬가 어우러지는 장면을 만났다. 짧은 여름을 한껏 즐기고 있는 북극지방의 우윳빛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원주민의 무당춤이 實演(실연)되었다. 사하族 무당춤의 인간문화재 격인 포드로프 아프나시 세묘노비치(63)라는 이름의 무용수가 보여주었다. 이 사람은 전통적인 무당춤 기능 보유자로서 한국으로 친다면 人間文化財에 해당되는 인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민속축제 때에 초대받는 유명한 인사였다.
 
  무용수가 가죽 두루마기를 입고 늙은 당목 밑에 섰다. 그는 왼손에 가죽 북, 오른손에 북채를 들고 있었다. 무당은 성냥을 꺼내 마른나무 가지로 불을 피웠다.
 
  그 불길 위에다 동물의 털을 태웠다. 白馬의 꼬리털이라고 하였다. 독특한 냄새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 주위로 퍼져나갔다. 타오르는 불길 위에 술을 한 잔 뿌리자 술 향기와 말의 꼬리 털이 타는 냄새가 섞여 묘한 향기가 되었다. 무당이 움직일 때마다 가죽 두루마기에 달려 있는 금속제 장식들이 소리를 냈다. 가슴에는 오리 모양의 새와 창(槍)들이 달렸고 등에는 여러 개의 방울이 달렸다. 두루마기의 소매에는 가죽끈을 여러 줄 달아매어 팔을 벌리면 새가 날개를 편 모양이 되게 하였다.
 
  이윽고 무당이 노래를 시작하였다. 주문인지 단순한 소리인지 불분명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1930년대부터 舊소련이 자행한 무당 말살 정책 때문에 무당의 주문을 암송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니 무용수가 주문을 확실하게 전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무당이 북을 치며 하늘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아, 아, 아, 두둥, 두둥, 으암, 으암』
 
  그리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냈다. 몸을 세차게 흔들며 새가 날아오르는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까악, 까악하는 까마귀 울음소리를 냈다.
 
  우리나라의 鶴舞(학춤)처럼 겅중겅중 뛰면서 주문을 말하였다. 사하族의 말이 아니라 러시아語였다. 동행하던 카자흐스탄 출신 게르만 김씨가 알아듣고 통역해 주었다.
 
  『외국인들이 왔다 이 땅에 처음 왔다. 木神(목신)은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까마귀 神이여, 여행자들의 신변을 보살펴다오』
 
  무당춤은 약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무용수의 모습은 엑스타시(Ecstasy)에 몰입한 경지로 보였다. 춤을 끝낸 무당이 허리를 숙여 사방에 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절실한 무당의 기도가 정말 하늘에 전달되었는지 실제로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우리가 있던 당목 위를 천천히 선회하고 있었다. 말의 꼬리털이 타는 냄새를 맡고 날아온 모양이었다.
 
  말과 까마귀와 사람이 높은 나무를 통하여 交感(교감)하는 순간이었다.
 
  5세기 때 신라에서는 금관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허리띠에도 순금제 장식을 10여 가지 정도 다는 게 유행하였다. 바로 그때 인물인 鳥生夫人(조생부인)은 자비왕(慈悲麻立干)의 여동생이고 지증왕(智證麻立干)의 生母(생모)이다. 鳥生은 祭官(제관)이었다. 5세기 신라 제관의 복장은 분명하게도 사하族의 두루마기 차림에 曲玉, 물고기, 칼, 숫돌, 매미 등 온갖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있지 않았나.
 
  鳥生부인이 환생하여 그 여러 가지 장식들의 의미를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속시원하게 설명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계속)●
Posted by PD 개인교수
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바이칼湖는 알타이語族의 子宮




<바이칼 호숫가의 堂木. 브리야트族은 백화나무에 하얀 헝겊을
매어 행운을 빈다. 우리나라 무속에서의 祈福行爲 그대로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거대한 호수가 바이칼이다. 지도로 보기에는 작아 보이지만, 바이칼은 매우 큰 바다이다. 그 크기가 유럽의 작은 나라인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합친 것 만하고, 물의 양은 미국 5대호의 물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안내인이 설명한다. 이 일대는 저지대의 분지이기 때문에 주변의 높은 지역에서 물이 흘러 들어와 호수에 모인다. 도합 336개에 달하는 작은 하천의 물을 끌어모은 바이칼湖는 인체의 맹장처럼 호수 남서쪽 끝에 매달려 있는 앙가라江을 配水口(배수구)로 삼는다. 앙가라江을 통해 바이칼湖의 물은 예니세이江과 합류하여 다시 北極海로 흘러 들어간다

이 지역의 주인은 브리야트族이다. 알타이語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터키族, 카자크族, 몽골族, 브리야트族, 한국族, 일본族 중에서도 한국인과 유전인자가 가장 가까운 종족이 브리야트族이다. 이들은 森林(삼림)과 호수를 생활근거로 하고 남쪽의 말 달리는 평원을 경제생활의 무대로 삼았다.

예니세이江 유역의 광활한 지역에 살고있는 全주민들에게 바이칼은 정신적 고향이다. 그 이유는 바이칼의 신비스러운 물 때문이다.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북극지방의 야쿠티아에 사는 주민들이 브리야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까마귀를 조상신으로 모시며, 지도자는 나무 밑에서 기도하는 여인의 몸에 엑스터시 과정으로 잉태된다는 믿음이 바이칼 지방 주민들과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이유가 의아하였었다.

타이가(森林) 지대인 바이칼과 툰드라 지대인 야쿠티아와는 전혀 딴판인 환경이지만 예니세이江으로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역시 지리학은 문화학의 기초가 된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오는 데 하루와 반나절이 걸렸다. 문학 하는 사람들에게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한 무대이었기에 매력이 있는 곳이고, 정치학도들에게는 17세기 러시아 청년 장교들이 반란사건의 결과로 참혹한 유형을 당한 곳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고고학자에게 바이칼은 흉노의 땅이자 鮮卑族(선비족)의 고향으로 더욱 매력 있는 땅이다.

한국인보다 더 韓國人 같은 브리야트族





여기 사는 사람들은 나와 똑같은 모습의 사람들이 많다. 아니 나보다 더 한국사람을 닮았다. 나는 한국사람치고는 약간 검은 피부를 타고난 사람이다. 金海(김해) 김씨의 조상이 되는 駕洛國(가락국) 金首露王(김수로왕)의 부인이 印度(인도)의 아유타國 출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인 중에는 유난히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 많은데, 나도 그중 한 사람인가 보다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여기 브리야트族들은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것처럼 동양인치고는 화사하다. 나처럼 南아시아적인 유전인자가 섞이지 않은 순수 몽골人인 셈이다

안내양의 모습은 순수 몽골人이 아니었다. 「스베타」라는 이름의 전문대학 3년생은 슬라브系 처녀였다. 여기서 태어나지도 않은 듯 이 지역의 인구라든지 산의 이름 같은 지역문화에 대한 상식적인 질문에도 머뭇거린다. 우리 대중가요에 등장한 「아무것도 모르는 順伊(순이)」 같은 시골 처녀였다. 하긴 당시의 소련은 帝國(제국)다운 큰 영역을 경영하고 있을 때이니까 우랄산맥 서쪽의 러시아 지방 출신도 시베리아에 와서 자유롭게 직업을 찾을 수 있을 때였다. 「순이」를 앞세우고 민속박물관으로 갔다.
1883년에 개관한 박물관은 지역문화 유물로 가득 차 있었다.


샤먼 수만 명을 학살한 蘇聯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라서 조명은 희미하고 진열장도 유리가 나빠 얼룩거렸다. 그러나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말이 실증되었다. 박물관 건물이 초라하다고 해서 소장품도 초라할 이유는 없는 법이다. 전시품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이 있었다. 샤먼(shaman: 무당)의 복장이었다.

소련의 사회주의는 원주민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 舊러시아 시절부터 소련 통치까지 오랜 기간 시베리아에 살던 샤먼 수만 명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넓은 대륙에 퍼져 살고 있는 다양한 원주민들의 정신적 버팀목 노릇을 하던 샤먼의 존재는 공산주의 이념으로 통치하려던 소련의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러운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지금 시베리아에는 샤먼이 한 사람도 없다. 世襲巫(세습무)는 이미 代가 끊겼고 가끔 神이 내린 降神巫(강신무)가 탄생한다고 해도 스승이 없으니 전통이 이어질 수 없다.

따라서 춤이나 비손(神에게 손을 비비면서 소원을 비는 일)도 잊혀졌다. 1995년에 야쿠티아 공화국에서 만난 샤먼 춤 전공자는 呪文(주문)을 암기하지 못했다. 공산주의는 70년밖에 계속되지 않았는데, 그 실패한 실험의 결과는 人文學(인문학)에 커다란 空洞現狀(공동현상)을 초래하였다. 공산주의 소련이 해체되어 러시아공화국이 된 지금이라도 누가 정신을 차려 잊혀진 말과 노래를 採錄(채록)해 둔다면 문화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임이 틀림없겠다.

샤먼의 복장은 두 개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하나는 가죽으로 만든 에벵키族의 것이고, 또 하나는 야쿠트族의 털 복장이었다. 에벵키族의 무당 옷은 가죽 모자와 가죽 두루마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자는 둥근 형태로 이마 높이로 帶輪(대륜)을 돌리고 대륜이 흘러내리지 않게 귀와 귀를 연결하고 이마와 뒤통수를 잇는 헝겊이 정수리에서 열 십(十) 자로 교차하게 만들었다. 한국 여자 아이들이 설빔으로 쓰던 모자인 「굴레」와 같은 모양이었다. 이런 모자는 신라 시대 귀족인 瑞鳳塚(서봉총)의 여자 주인공이 썼던 金製(금제) 모자와 北燕(북연)의 馮素弗(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金銅(금동) 모자와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두루마기 앞면에는 얇은 철판으로 만든 날짐승 여러 마리와 활촉·칼 등을 달아 놓았고, 뒷면에는 역시 철판으로 만든 사람, 포유동물, 물고기, 반달 모양의 칼 등을 주렁주렁 달아 놓았다. 이것은 샤먼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다스린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야쿠트族의 샤먼 복장은 털이 달린 두루마기라고 앞서 말하였다. 다만 모자에 사슴 뿔 모양으로 장식한 것과 털가죽 장화가 달려 있는 게 에벵키族의 복장과의 차이점이었다. 하긴 야쿠트 지방은 툰드라 지대이니까 거기에 서식하는 순록이 주민의 경제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샤먼도 거기에 걸맞은 복장을 입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환경·경제·신앙의 3요소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문화의 색깔이 결정되는 현상이 가슴에 전달되어 왔다.


바이칼에 보이는 빗살무늬 토기 문화





빗살무늬 토기는 한국 新石器(신석기)시대의 간판격인 유물이다. 바이칼 민속박물관에 보이는 고대 유물로는 舊石器(구석기) 시대의 打製石器(타제석기)부터 신석기 시대의 통나무 베는 돌도끼가 특징적이었다. 바닥 부분이 뾰족하고 몸체에 선과 점을 陰刻(음각)하여 마치 머리칼을 빗는 빗으로 그린 平行線(평행선)들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빗살무늬 토기는 한반도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데, 바이칼에서는 한반도 보다 늦은 시기인 靑銅器 시대의 제품이다. 함께 사용된 유물로는 石製(석제) 어망추와 동물 뼈로 만든 바늘이 있어서 당시 주민들의 어로생활을 설명하고 있었다.

조금 어려운 얘기지만, 한국 신석기문화의 대표유물인 빗살무늬 토기가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 전체에서 발견되는 현상을 놓고 나는 고고학도로서 평생토록 고민하고 있다. 先史時代(선사시대)에 유라시아의 문화현상을 보면 한반도부터 시베리아 헝가리·독일·스칸디나비아로 연결되는 環北極圈(환북극권: Circum Polar) 음각토기 文化帶(문화대)와 따뜻한 남쪽 지역인 중국·이란·터키로 연결되는 彩色土器(채색토기) 문화대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다. 음각토기는 추운 지방의 수렵 어로인들이 만들었고, 채색토기는 따뜻한 지역의 농경인들이 만든 것이다.

도대체 토기가 무엇이기에 공을 들여 뜻 모를 선들을 陰刻하거나 붉고 검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단 말인가. 이건 내 추측인데 先史人(선사인)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현대인들보다 더 깊었던 모양이다. 기후나 환경이 경제생활을 완전히 지배하던 때이었으니까 풍요를 희구하는 의미의 그림을 토기에다 그려서 주술적인 혜택을 기원하였던 것 같다. 아무튼 이때 토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모두 抽象畵(추상화) 계통으로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인 具象畵(구상화) 계통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한국의 빗살무늬 토기가 유라시아 대륙의 陰刻土器(음각토기) 문화권 중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현상을 놓고 민족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토기에 그려진 무늬가 고대인들의 신앙을 표시한 것이라면 한반도에서 발생한 어떤 신앙의 내용이 음각토기 문화권으로 퍼져 나갔다고 추리된다. 이때 혹시 신앙과 함께 사람의 遺傳因子(유전인자)도 퍼져 나갔다면 한국인은 수억이 넘는 北方 유라시아 인구의 DNA 구성에 깊이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인가?

문화는 따뜻한 지방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한반도는 음각토기 문화권에서는 가장 따뜻한 땅이다. 언어학에서는 다른 견해일지 몰라도 음각토기 문화권 사람들끼리는 유사한 언어인 우랄語와 알타이語를 사용하고 있다. 고고학적 문화 벨트와 언어문화권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현상이 나로 하여금 학문적 고민에 빠지게 한다.

이건 인문학적 상상이지만, 자연과학의 연구성과가 축적될수록 이런 해석에 힘이 실린다. 학문 발달사를 보아도 인문학적 발상이 자연과학을 선도한 적이 많다. 예를 들면 맬서스(Malthus)의 人口論은 適者生存(적자생존)이 키워드인데, 다윈 (Darwin)의 進化論(진화론)도 適者生存의 시각에서 動物界(동물계)를 해석한 것이다.





先史時代부터 숟가락 사용






잠시 과거 속으로 갔었지만, 이제 바이칼로 돌아가자. 레나 강변 일가(Ilga) 지방의 청동기 시대 유물 중에 청동제 낚시바늘과 함께 사슴 이빨로 만든 목걸이 장식이 있어서 어로와 사냥이 당시 그곳 주민의 생활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동물 뼈로 만든 숟가락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시베리아 주민들은 先史時代부터 숟가락을 사용하였다. 돌로 만든 숟가락은 「西 시베리아 先史文化」라는 책에 소개된 적이 있어서 놀라운 일은 전혀 아니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뼈로 만든 숟가락이었다. 정교하게 갈아 만들어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일상 생활용의 수준을 넘는 儀禮用品(의례용품) 같아 보였다. 한국의 先史時代 유적에서는 이렇게 정교한 숟가락이 발견된 적이 없기에 나의 고질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숟가락의 용도는 술이나 국물을 떠먹기 위한 것이다. 특히 뜨거운 국물은 숟가락 없이는 먹을 수 없다. 뜨거운 국물을 만들려면 물을 끓일 솥이나 냄비 같은 容器(용기)가 있었다는 얘기다. 어떻게 생긴 容器였을까?

이 의문은 다음날 대번에 풀렸다. 바이칼 호반의 호텔에서 점심을 먹을 때 뜨거운 스프가 나왔다. 어른 주먹 두 개 합친 것만 한 오뚝한 오지 단지에 담긴 스프를 먹게 되었다. 쇠고기 국물에 끓인 야채국이었다. 러시아말로 「쉬」라고 한다. 오지 그릇이니까 스프의 온도가 오래 보존되어 뜨거워서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밖에 없었다. 西유럽의 미지근한 스프는 납작한 그릇에 담겨 나오는 데 비해 이곳의 단지는 깊어서 국물을 떠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씩 떠서 입으로 불어 가며 먹는 「쉬」의 맛은 별미였다.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야채가 귀한 탓에 야채가 가득한 「쉬」는 감칠맛이 있었다. 역시 추운 지방에서 뜨거운 湯(탕)류를 먹는 습관이 숟가락을 일찍부터 발전시켰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일본사람 이치이로 하치로(一色八郞)가 쓴 「젓가락(箸)의 文化史」라는 책을 보면 南중국에서부터 적도지방까지는 모두 젓가락을 사용하는 문화권이다. 지금이니까 위생적으로 젓가락을 쓰지 옛날에는 모두 손가락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매운 커리 음식도 손으로 먹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南아시아를 여행하면 스프를 먹어 볼 기회가 드물다. 날씨가 더운 지방이라서 뜨거운 스프가 없는 것인지 몰라도 스프를 먹는 문화가 없어서 숟가락이 불필요한지도 모른다.



바이칼 自然史 박물관


바이칼 호수를 연구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박물관이 있었다. 지은 지 오래된 목조 건물 속에 각종 어류의 표본을 전시하고 있다. 바이칼은 원래 바다였다. 地質時代(지질시대)에 화산 활동으로 생긴 深淵(심연)이 융기하여 바다에 있던 동·식물을 고스란히 품은 채 호수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바다에서만 사는 물고기들이 내륙호수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짠물은 서서히 단물이 되고 그 속의 생물들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여 매우 특수하게 진화하였다. 바이칼湖는 길이 636km, 최대 폭 79km, 표면적 3만1500km2, 가장 깊은 곳 1742m, 투명도는 한때 40m였고 200여 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南美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갈라파고스 섬에서 살고 있는 도마뱀을 연구한 다윈도 아마 여기는 못 와본 것 같다. 그 사람의 책에 바이칼湖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는 걸 보니….

호숫가에는 수영복 입은 아이들이 있었는데, 정작 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이 너무 차갑기 때문이다. 물가에 서서 낚시하는 사람도 있어 一見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호수를 건너다니는 여객선이 도착하여 사람과 짐들을 내리느라고 잠시 어수선하였다가 이내 太古風의 평화로 돌아왔다.

바이칼湖 서쪽 언덕 위는 나무 숲이었고, 숲 속엔 굵은 백화나무에 흰색 광목 조각이 무수하게 매여 있었다. 우리나라 巫俗(무속)에도 등장하는 堂木(당목)이었다. 한국에서는 당목에 五方色(5방색)인 검은색(북) 붉은색(남) 푸른색(동) 흰색(서) 황색(중앙)의 천을 매단다. 한국 것과 비교하면 바이칼 것은 흰색 한 가지뿐이어서 단순하지만, 나무에다 헝겊이나 종이를 매달면서 인간의 소원을 비는 신앙의 내용은 똑같은 것이다.

『나무와 헝겊을 러시아말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순이가 알 턱이 없었다. 하긴 러시아말로 알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원주민인 브리야트族이나 인근에 살고 있는 에벵키族의 말이어야 우리말과 비교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목이 있는 곳에 장승이 있는 법이다. 호텔 입구에 텁석부리 영감 모습의 장승이 있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듯한, 安東 하회탈을 쓴 모습의 장승이었다. 먹과 붓이 있었다면 「天下大將軍」이라고 써 주고 싶었다.





사냥꾼들은 통나무집에 산다. 우선 혹한을 이겨 내려면 보온이 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통나무집은 견고하기 때문이다. 한번 내리면 몇 미터씩 오는 폭설의 무게를 이기려면 우선 집이 튼튼해야 한다. 또한 여기 주민들이 시베리아 삼림지대의 맹주들인 호랑이나 곰 같은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통나무집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굵은 재목으로 지은 귀틀집들이 타이가(Taiga) 지대 곳곳에 있었다. 평면이 직사각형이고 중앙에 출입구, 좌우에 들창이 있는 게 기본형이다. 이 경우는 방이 하나 짜리다. 조금 큰 집은 2층으로 아래층은 창고, 위층이 살림공간이다.



신라 積石木槨墓의 原型





「타이가 하우스」(멋대로 命名한다면)의 기본형은 유목민인 스키타이-알타이族들의 무덤방으로 전용되었다. 예니세이 상류의 유명한 파지리크 古墳(고분)은 초기 금속기 시대의 族長級(족장급) 주인공이 통나무집을, 저승생활을 위한 집으로 삼아 쉬고 있었다. 수많은 副葬品(부장품)들이 통나무집 속에서 발견되었다. 주인공과 유품들이 도굴되지 않도록 통나무집 위에 천문학적 분량의 돌이 산처럼 쌓여 있는 구조였다.

유사한 구조가 인근의 얼음공주의 묘, 카자흐스탄의 이씩 쿠르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것이 바로 新羅(신라) 왕족들의 무덤인 積石木槨墓(적석목곽묘)의 구조다. 돌을 쌓아 통나무집을 덮은 구조인 것이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거리는 요즘의 제트기로 날아가도 다섯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이고 알타이지방의 이씩 쿠르간이나 파지리크 古墳이 만들어진 때는 신라왕들의 무덤보다 800년 이상 빠르다.

중앙아시아의 古代민족들과 新羅의 왕족들은 무슨 관계가 있었기에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고고학자들은 世紀(세기)를 넘기면서 고심하고 있다. 인간의 이동인가? 그렇더라도 기나긴 시간 가운데 傳承(전승)의 錯誤(착오)현상도 없었단 말인가? 이에 관한 고민은 일단 나중에 하기로 하자.

타이가 하우스 정문에 물고기 그림이 있었다.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金海 首露王陵(김해 수로왕릉)의 雙魚文(쌍어문: 神魚)이었다. 앞서 말한 쌍어문의 문화사적 의미는 단순한 文樣(문양) 이상으로 심오한 것인데, 여기서 발견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도(아요디아)-南중국(安岳)-가야-倭(왜)까지의 이민 루트 때문에 首露王이 神魚思想(신어사상)에 접하게 되었겠지만, 바이칼 지방의 雙魚 무늬 그림은 약간 의외의 존재였다. 어쩌면 바빌로니아-스키타이-알타이-바이칼까지 주민들이 이동한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前者가 농업사회 간의 이민이라면, 後者는 騎馬民族(기마민족)들 간의 접촉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백화나무는 新羅의 토템


타이가 지대의 한복판인 바이칼 지대는 「白樺(백화)나무」(자작나무)로 덮여 있는 땅이다. 백화나무의 고향은 寒冷(한랭)지대다. 한반도의 기후는 백화나무가 탐스럽게 자라기에는 너무 덥다.

그런데도 신라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백화나무를 숭상하였다. 天馬塚(천마총)에서 발견된 승마용 障泥(장니:말다래)를 백화나무 껍질로 만들고, 그 위에 하늘을 날아가는 天馬를 그렸다. 하고많은 재료 중에서 하필이면 백화나무 껍질을 썼을까? 그뿐만 아니라 천마총의 주인공은 白樺皮(백화피)로 만든 모자도 쓰고 있었다. 신라인들에게 백화나무는 무슨 의미가 있었기에 저승으로 가는 사람의 말다래와 모자를 백화나무 껍질로 만들었을까. 여기에 신라인들의 신비성이 있다.

백화나무는 영어로 「birch」이고 러시아 말로는 「베로이자」이다. 유목민들이었던 스키타이族이나 사냥꾼인 에벵키族들이 이승의 집이나 저승의 집을 모두 백화목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나를 흥분시켰다. 왜냐하면 日本書紀(일본서기)에서는 신라를 「白木」이라고 쓰고 「시라키」라고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히 백화목이 新羅라는 國名으로 발전하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다.

新羅 金氏의 조상인 金閼智(김알지)는 鷄林(계림)에서 탄생하였다. 유목민들의 민속 중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는 항상 커다란 나무를 통해서 생명이 내려온다는 것은 月刊朝鮮 9월호에서 설명하였다. 新羅人에게 그 나무가 바로 한랭지대에서만 자라는 白樺木이었다는 것이 민속과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모두 일치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인들의 고향은 따라서 白樺木이 잘 자라고 있는 시베리아 지역이다. 그 지역 종족 중에서 한국인들과 假定(가정) 유전인자가 가까운 바이칼 지역의 브리야트族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金秉模의考古學 여행

新羅의 신화·알타이의 눈보라·무덤 속의 女戰士·曲玉·금관·積石목곽분·싸랑·솟대·샤먼…

그 속에 감춰진 우리의 原形과 만나다




비로소 피부로 접한 알타이 文化




알타이는 산 이름이다. 동시에 산맥 이름이며, 그 주변 지역의 이름이다. 중앙아시아 내륙지방의 고원지대에 알타이산이 솟아 있고 알타이 산맥이 東西로 흐른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카자흐인, 퉁구스인, 브리야트인, 에벤키인, 야쿠트인, 몽골인 등이 넓은 의미의 알타이족들이다. 이들의 각종 언어는 모두 알타이어족에 속하며 한국어와 일본어와도 깊은 親緣(친연) 관계에 있다.
 

나의 알타이에 대한 관심은 박시인 교수가 소개한 알타이 신화 때문이었다. 朴교수는 알타이 지역을 답사해 보지 못한 채 2차 자료만 가지고 알타이 문화를 소개하였지만, 그 내용에는 한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 수두룩하였다. 이를테면 영특한 새로서 까마귀의 기능이라든지, 씨족의 조상이나 최초의 왕이 등장하는 장소가 「신령스러운 나무(神樹)」 밑이라는 것 같은 내용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三足烏(삼족오)나, 鷄林(계림:경주)에서 발견되는 김알지 설화 같은 것이었다. 그런 내용을 읽어 가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어는 알타이 계통의 언어다. 왜 가까운 중국어와 비슷하지 않고 저 멀리 알타이와 가깝단 말인가? 이런 소박한 의문에 대한 역사적·인류학적 해답이 없던 시절은 의외로 오래 계속되었다. 1990년 이후 러시아가 문호를 개방하고 나 같은 인문학 연구자들이 광활한 시베리아와 스텝지대를 자유롭게 탐사할 수 있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글자로만 접하던 알타이 문화를 피부로, 肉聲(육성)으로 만날 수 있었음은 참으로 커다란 행운이었다.
 

스키타이 女戰士의 모자
 

 
알타이 남서쪽에 살고 있는 카자흐족의 민속신앙에 위대한 샤먼의 탄생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즉, 아기를 낳고 싶은 여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다. 그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되면 새들이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그러면 그 여인이 잉태한다. 엑스터시 과정이다. 그런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나무 - 새- 엑스터시 잉태- 위대한 샤먼의 탄생이라는 圖式이다. 그래서 알타이 문화권에서 태어난 유능한 지도자는 모두 아버지가 없다.
 

한국사에서도 탄생과정이 신화로 처리되어 있는 사람이 씨족의 始祖(시조)나 왕으로 등장한 경우가 많다.
 

신라의 朴赫居世(박혁거세)와 김알지의 부모가 불분명하고, 昔脫解(석탈해)와 金首露(김수로)도 누구의 후손인지 모른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동쪽 이시크(Issyk) 고분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경 사람인 스키타이 여자 戰士(전사)는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아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알타이에 발굴되어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은 여자 귀족의 높이 올린 머리장식에서 금으로 만든 새가 여러 마리 달려 있어 솟대에도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음을 보여 준 사실이다.
 
신라 자비마립간의 여동생인 鳥生夫人(조생부인)은 이름도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이지만 그 여인의 직업도 의례를 관장하는 祭官(제관)이었다. 신라와 유사한 민족구성과 문화양상을 지닌 弁辰(변진)에서 大家(대가)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魏志 東夷傳).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인 실물로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조각품에 나무 위에 새들이 앉아 있는 것들은 한둘이 아니고, 경주 瑞鳳塚(서봉총)에서 발굴된 신라 금관은 여성용이었는데, 머리 부분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역사 속의 새는 아마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일 것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 형식은 積石墓(적석묘·Cairn)로서 기마민족의 전통이다. 통나무집에다 시신과 부장품을 집어넣고 막돌로 둥글게 덮는 모양이다. 그 문화를 스키타이-알타이式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 금관의 제작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金씨계 인물들이다.
 
 
金씨계의 조상은 김알지이다. 그는 계림에서 발견한 상자 속에 있던 어린아이였다. 같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도 하늘에서 날아온 말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成人(성인)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알이나 상자(櫃)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천손)신화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난생)신화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천손신화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알타이, 몽골족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농경민족인 대만의 빠이완족, 타이족, 자바족, 인도의 문다족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즉 천손신화는 北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족들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농경민족들의 신화이다.
 

漢字로 금(金)이라는 뜻은 「쇠(鐵)」의 뜻과 「순금」의 의미도 있지만 역사에 등장한 신라 김알지로 시작되는 「김」은 순금의 뜻이다.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기마민족의 언어인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다. 멀리 터키어에서부터 퉁구스어, 브리야트어, 몽골어에 이르기까지 알트, 알튼, 알타이 등이 모두 알타이어족의 공통적인 의미로 금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라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신라인의 이중 구조: 북방+남방族
 
 
신라 金씨의 조상인 김알지의 이름도 알타이 계통 사람이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알지-알치-알티로 어원 추적이 가능하므로 김알지의 이름은 알타이 출신 金씨라는 뜻으로 Gold-Gold라는 뜻이 중복된 흥미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김알지가 알타이 계통의 인물이라는 것은 그의 탄생설화가 얽혀 있는 곳이 鷄林(계림)으로 알타이적인 영웅탄생에 나무(神木)와 직결되어 있고, 그의 후손들의 무덤인 경주의 신라 왕족들의 積石木槨(적석목곽) 형식의 무덤들은 북방 기마민족들의 매장 전통을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김알지는 계림에서 발견된 상자 속에서 동자의 모습으로 발견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상자 속에서 동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난생신화의 구조이다. 나무, 즉 神木에서 주인공이 태어난다는 내용은 분명히 기마민족인 알타이적 천손신화인데, 정작 태어나는 순간은 남방 농경민족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으로 분장되어 있다.
 

왜 그럴까?
 

기마민족이면 떳떳하게 기마민족식 (알타이 민족의 신화인 하느님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天孫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못하고 왜 구차하게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처럼 탄생하였다고 꾸며져 있을까? 여기에 초창기 신라의 통치계층 인구들의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경주지방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인 인구가 살고 있었다. 이는 경주 지역의 수많은 고인돌이 증명하고 있다. 그 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소수의 기마민족이 이민 왔다.
 

신라인들은 삼국지 위지 東夷傳(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辰韓(진한)족이다. 중국 서북쪽의 秦(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민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다수의 토착 농경인들 위에 통치자로 군림하기에는 인구가 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여러 代(대)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드디어 미추왕(麻立干) 때 처음으로 金氏系 인물이 최고통치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소수의 기마민족 출신 金氏系 인물이 다수의 농경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농경인들처럼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분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궤짝 속에서 동자로 발견된 주인공이 북방계 토템인 신령스러운 나무, 즉 계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꾸몄을 가능성이 짙다.
 

현대에 와서도 각종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후보자가 평소 믿지도 않던 불교의 부처님 點眼式(점안식)에도 참석하고, 한 번도 가 보지 않던 시장에 가서 아주머니들의 손을 붙잡는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치권으로 부상하려는 사람들이 별의별 변신방법을 다 동원하는 현상은 똑같다.
 

알타이 고분에서 미라로 발견된 동양계 여인의 盛裝한 모습에서 올린 머리에 장식된 순금제 새들이 있다. 이 새들도 주인공의 탄생과 죽음에 깊이 관여하였던 영혼의 새들로서 여주인공의 혼을 天上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이마 부분에 커다란 새의 날개 한 쌍(鳥翼形 裝飾)이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고대인의 영혼관이다.
 
南아시아적 생활+北아시아적 정신
 

 
얼마 전까지 나에게는 큰 근심이 있었다. 내가 대표로 되어 있는 유네스코 산하 국제박물관협의회(ICOM·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의 한국지부에서 세계총회를 서울로 유치하는 데 성공한 뒤였다. ICOM 총회는 3년에 한 번씩 개최되며 한 번은 박물관 문화가 일찍 발달한 유럽에서 다음 한 번은 非유럽 국가에서 개최해 왔다.
 

 
ICOM의 회원국은 145개국이고 등록회원수가 평균 1만7000명이다. 총회에 참석하는 인원은 평균 2000~2500명으로 주최도시가 얼마나 문화적 흡인력이 있느냐가 최대의 관건이고, 주최 측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홍보하느냐에 따라 참가인원이 크게 달라진다. 2004년의 서울 대회는 ICOM 100여 년의 역사상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인 만큼 세계의 수많은 박물관 전문가들이 지대한 관심을 표해 오고 있어서 어느 대회보다 큰 규모의 행사가 될 전망이다.
 
그런데 세계대회를 하려면 본부 집행위원회가 인정하는 로고를 디자인하여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준비위원들은 지난 몇 달 동안 고민을 하였다. 아시아에서 처음 하는 행사이니까 로고의 내용을 아시아인 공통의 상징으로 할까, 아니면 서울市에서 개최하니까 서울의 상징인 북한산, 청와대, 남대문에서 로고를 딸까. 또는 이번 대회의 주제가 무형문화재이니까 탈춤이나 사물놀이를 내용으로 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하였다. 사람마다 주장이 그럴듯하고 어느 아이디어 하나 버릴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위에 열거된 상징들은 이미 다른 행사에서도 한두 번 이상 사용되었음직한 것들이라는 공통성이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명언이다. 한국 토착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유산으로는 농경문화의 상징으로 고인돌이 있고, 北아시아인들의 敬天(경천)사상을 상징하는 솟대(Totem Pole)가 있다. 한국에 수만 개나 남아 있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중에 나타난 南아시아 지역의 벼농사 기술자들 사회의 매장풍속이다. 반면에 솟대는 알타이, 야쿠티아, 바이칼, 몽골 지역 사람들의 神鳥思想(신조사상)이 그 뿌리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국인의 경제방식은 南아시아적인 농경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세계는 北아시아적인 敬天사상이 지배해 왔다.

솟대 위에 앉은 새는 지상의 인간들이 하늘에 계신 절대자를 향하여 祈福(기복) 행위를 할 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媒介者(매개자)이다. 그래서 端午祭(단오제) 때 솟대를 세우고 솟대 위에 새를 깎아 앉힌다. 새가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神鳥사상이 퍼져 있는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서 고루 발견된다. 카자흐족, 퉁구스족, 위구르족, 브리야트족, 몽골족, 한국, 일본의 민속이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반드시 새가 등장한다.
 


솟대를 로고로 채택한 까닭
 

중국 고전 山海經(산해경)에 기록된 少昊國(소호국)에서는 모든 공경대부가 새(鳥)일 만큼 새들은 東아시아의 신화 속에서 중요한 주인공들이다.

신라 金氏 왕들의 조상인 김알지가 계림에서 발견되었을 때 온갖 새들이 노래하였다고 하며, 고구려 고분벽화의 태양 속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가 있음은 너무도 유명하다.
 

일본 古墳時代(고분시대)의 벽화에는 死者(사자)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船)의 항해사로 새들이 앉아 있다. 나라(奈良)의 후지노키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에는 십여 마리의 새들이 앉아 있다. 일본 神祠(신사)의 입구를 지키는 도리(鳥居: 門)도 새들이 앉는 곳이다.
 

이 모두가 알타이 문화권의 오랜 전통으로부터 현대 민속으로 계속되고 있는 솟대의 원형들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神鳥사상은 뿌리가 깊은 것이고 동북아시아 전체에 흐르고 있는 문화의 맥이다.
 

한국적인 것이 틀림없지만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도도히 흐르는 문화의 저류를 민속행사에 등장하는 솟대를 통하여 실감한다. 이처럼 새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있는 중요한 토템이자 東아시아 여러 민족의 공통적 토템이기에 아시아에서 처음 개최되는 세계 박물관 총회에 로고로 사용해도 격조에 맞을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로고는 단오제의 솟대를 기초로 하여 도안되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르기 직전의 흰색 오리 두 마리가 앞뒤로 앉아 있는 모습이 탄생하였다. 최선호 화백의 작품이다.
 

알타이산 북쪽은 고원지대로서 예니세이江의 발원지이다. 옛날부터 유목민들이 양(羊)을 기르며 평화롭게 살고 있는 땅인데 철기문명이 확산되면서 여러 민족이 드나들게 되었다. 지금 이 지역의 주민들은 러시아의 영향으로 백인들과 황인종이 섞여 있지만, 옛날에는 아시아계 몽골족 들이 이 땅의 주인이었다.
 

알타이 기사의 부적-曲玉의 의미
 

 
그 증거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루덴코라는 학자가 이 지역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2500년 전에 만들어진 고분들을 발굴하여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 보고서는 1953년 러시아어로 출판되었고 1970년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필자가 이 고분들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적석목곽묘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보다 시간적으로는 약 900년 가량 빠른 것들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구조가 같은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즉, 통나무집에 사람과 유물이 들어 있고 그 위에 막돌을 두껍게 덮어 놓은 형식이다.
 
어느 민족이든 고분 구조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좀처럼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고분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은 주인공들이 생전에 유사한 사유세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어쩌면 종족적인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신라인과 파지리크人과의 관계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다. 파지리크 5호 고분에서 나온 물건 중 통나무집 벽에 걸어 놓았던 모직 담요 펠트(Felt)가 있다. 수놓아 그린 그림에 두 사람이 보인다. 왼쪽 사람은 의자에 앉았는데, 동양인 얼굴에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이고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발굴자는 이 사람을 여성으로 보고 있다. 머리에는 가죽 같은 재질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 왼손에 구불구불한 가지가 많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어서 직업은 샤먼(巫師)이라고 해석되었다.
 

오른쪽 사람은 말 위에 앉은 남자 기사인데 튜닉형의 半두루마기를 입고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감아 올린 아랍인 型이다. 목 뒤로 날리는 스카프로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말은 다리가 긴 아라비아 계통의 말로서 옛날 漢(한) 武帝(무제)가 흉노를 격퇴하기 위해 간절하게 원했던 汗血馬(한혈마)이다.
 

 
두 사람 중에 샤먼은 크게 그렸고 기사는 상대적으로 작은 비례로 그려져 있다. 고대 그림 기법으로 지체가 높은 사람은 크게, 낮은 사람은 작게 그려진 것을 감안하면 동양계 여인이 그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주인공임을 알 수 있고, 아랍인 기사는 아마도 멀리서 온 방문객이거나 용병쯤으로 해석된다.
 

내가 이 그림에서 눈여겨본 부분은 말에 달려 있는 曲玉(곡옥)이었다. 곡옥은 굽은 옥으로 커다란 머리와 가는 꼬리로 구성되고 머리 부분에 구멍이 뚫려 끈을 꿰어 매달 수 있는 장신구이다. 대부분 푸른 玉 제품이고 때로는 金製 또는 石製도 있다. 신라 왕족의 금관, 목걸이, 허리띠에 여러 개 달려 있어서 신라미술품 연구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다.
 
신라 왕족들이 왜 曲玉 장식을 좋아했는지, 왜 曲玉이 동물의 태아 때 모양을 하고 있는지, 사람마다 제각기 의견들을 제시하였다. 어떤 이는 맹수의 발톱 모양이니까 유능한 사냥꾼의 장식이라고 그럴듯한 해석을 하였고, 또 다른 이는 초승달 모양이므로 月神(월신)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적도 있다. 어느 의견도 1970년에 나온 S. 루덴코의 파지리크 보고서를 보지 못하고 내린 추측들이었다.
 
 
한국고대사에서 曲玉은 신라, 가야에서만 유행하였다. 고구려, 백제에서는 인기가 없는 디자인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曲玉의 의미를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데, 한국 문화의 영향권 안에 있던 일본 이외의 외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었으므로 비교연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추측성 의견들만 난무하였었다.
 

파지리크의 曲玉은 기사가 탄 말의 가슴에 한 개, 콧잔등에 한 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보고서의 그림으로는 그 색깔이 코발트색으로 그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이 바뀐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지(Hermitage) 박물관에서 내가 본 실물은 신라의 曲玉과 같은 색인 초록색에 가까웠다.
 
 
 
신라와 그리스는 馬로 연결
 

 
曲玉의 의미는 지루한 추적 끝에 生命(생명)의 상징이라고 결론이 났다. 그리스에서는 이런 모양의 장식을 가지(Egg Plant)라고 부르고, 씨(種)를 잘 퍼뜨리는 열매로 규정하고 있다. 신라에서 왕으로 등장한 사람의 친부모의 금관에서만 曲玉이 달려 있는 현상도 曲玉의 의미가 多産(다산)과 관계 있는 것으로 쉽게 이해된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있는 남자가 파지리크가 있는 알타이 지역의 원주민인 몽골로이드(Mongoloid)가 아닌 이란-아랍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2500년 전 알타이 지역을 방문한 아랍계 기사는 누구인가? 혹시 黑海(흑해)지역에서 맹주 노릇을 하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족은 아닐까.
 

그리스와 교역하며 화려한 그리스 문화에 눈이 부셔 엄청난 생필품을 주고 그리스의 금·은·옥 제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던 바로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후에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투스가 만난 용맹하고 민첩한 스키타이족이었다면 그 사람의 말에 장신구로 달려 있는 曲玉은 그리스에서 처음 디자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고 보니 신라 유물 중에 동물 뿔 모양의 술잔인 角盃(각배)도 그리스, 스키타이, 알타이 지역에서 고루 발견되고 경주에서 발견된 기와에 그려진 날개 달린 天馬(천마)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가수스(Pegasus)라고 해석해야 될 판이다. 그렇다면 신라인과 그리스인은 비록 時空을 달리하였지만 스키타이-알타이를 통한 말의 문화로 단단히 연결되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나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도대체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고금의 동서양을 떠도는 이상한 구름에서 문득문득 내리는 비와 무지개를 찾는 작업인 듯하여서이다.
 

 
에르미타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의 주인공인 기사여, 그대는 왜 푸른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오셨는가? 파지리크에 왔더니 그곳 샤먼이 선물로 알타이 원산의 옥으로 깎은 曲玉을 부적 삼아 선물로 준 것인가?
 


이시크의 적석목곽묘에서 발견된 女戰士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 동쪽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이시크(Issyk) 호수가 있다. 중국의 天山山脈(천산산맥)의 한 자락이 남북으로 달리는 끝자락에 스키타이 마지막 시기의 고분군이 있다. 이 지역은 고도가 높아서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만년설이 녹은 물이 흘러내려 이시크澔로 들어간다. 스키타이 왕족들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땅에다 조상을 모셨다.
 

이시크는 알타이 남쪽 天山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있다. 현재는 카자흐스탄의 영역이고, 옛날에 스키타이족의 마지막 활동 무대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BC 8세기부터 BC 3세기 사이에 꽃피웠는데 이시크 시기는 BC 3세기에 해당된다. 알타이산의 북쪽 고원인 파지리크 문화보다 약 3세기 늦은 시기이다. 이시크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쿠르간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 몇 개를 러시아系 카자흐인 고고학자 아키세브 교수가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순금 장식으로 덮은 갑옷을 입은 청년 戰士(전사)가 발견되어 「황금인간」이란 별명이 생겼다. 이 황금인간은 최근 프랑스 과학자들에 의하여 17세 전후의 여성으로 판명되어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다. 남성 중심의 기마민족 사회에서 최고 통치자급의 의상과 유물을 갖고 있던 사람이 여성이라면 이 여성의 생전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실로 많은 연구과제를 던지고 있는 인물이다.
 
알타이 지방의 여러 곳을 탐사하던 중 알아낸 귀중한 한마디 말이 바로 「사랑」이란 단어의 뜻이다 한국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자 모든 유행가 노랫말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말의 뜻은 의외에도 알타이 언어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었다. 알타이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로 세계적인 악명을 날리고 있다. 몽골 루트, 시베리아 루트, 중국 루트가 있는데 필자는 몽골·시베리아 루트는 과거에 탐사하였고 마지막으로 중국 루트를 탐사하게 되었다.
 

1996년 여름, 모험심에 가득 찬 소년들처럼 동문 임상현, 김두영, 김명용 제씨가 필자와 함께 항공편으로 실크로드(비단길)의 오아시스인 신강 위구르족 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 도착하였다. 전세 낸 9인승 마이크로 버스에 몸을 싣고 북쪽으로 800km나 펼쳐진 중가리아 사막을 17시간이나 걸려 건너갔다
 

알타이는 산의 이름이다. 알타이산에서 동쪽으로 내달리는 산맥 이름이 알타이 산맥이고, 그 북쪽의 고원지대가 알타이 지방이다. 알타이라는 말은 금(Gold)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알타이 산맥 중에 해발 4974m의 만년설을 머리에 쓴 友誼峰(우의봉·중국식 이름) 밑에 마을이 있었다.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이었는데, 이름도 아르타이(阿勒泰)이다. 그곳에서 알타이어를 사용하며 살고 있는 유목민 카자흐족 마을에서 인류학 조사를 하던 중 듣게 된 이야기가 바로 사랑 이야기이다.
 
유목민들에게는 귀한 손님에게 부인을 하룻밤 빌려 주는 풍습이 있다.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 남자는 부인을 텐트 속에 남겨 둔 채 집을 나가는 풍습이다. 인류학 용어로 貸妻婚(대처혼)이다. 어느 날 카자흐족 마을에 중국인 畵家(화가) 한 사람이 오게 되었다. 그 마을의 絶景(절경)인 깊은 계곡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였다.
 


 

밤이 되자 카자흐족 남편은 손님 대접을 잘 하려는 풍습대로 텐트 속에 손님과 자기 부인을 남겨 둔 채 집을 나갔다. 남겨진 두 남녀는 좁은 텐트 속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두 남녀의 잠자리 사이에는 베개를 하나 놓아 도덕적인 경계를 삼았다. 아무도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은 채 며칠이 흘렀다.
 

 
하루는 벼랑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손님에게 여인이 間食(간식)인 양젖을 가져왔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여인이 쓰고 있던 실크 스카프가 그만 바람에 날려 깊은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유목민에게 실크는 비싼 보석을 주고 중국에서 수입한 귀중품이다. 실크로드라는 경제용어가 있으니 알 만한 일이다.
 

아악! 여인의 비명 소리에 사정을 알게 된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십 길의 벼랑을 기어 내려가 스카프를 주워다 여인에게 주었다. 그 순간 여인이 기이한 소리로 절규하는 게 아닌가.
 

『싸랑! 싸랑!』 소리를 지르며 손에 쥐어 준 스카프를 다시 골짜기 밑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싸랑-무정한 바보

 

 
싸랑. 그 의미는 「무정한 바보」라고 한다. 손님은 자기에게 싸랑이라고 소리친 카자흐 여인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을까.
 

우리 탐사 단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현지 안내인의 설명이 걸작이었다. 한 뼘 높이의 베개도 못 넘는 남자가 어떻게 수십 길 아래의 벼랑 밑까지 내려갔다가 기어서 올라올 수 있느냐는 의미의 바보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기마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40代의 카자흐 族長(족장) 아들과 한국인 탐사대원들은 양젖과 馬腸(마창: 말 순대)을 안주 삼아 경쟁적으로 독주를 마시고 대취하였다.
 

 
오래 전에 헤어진 알타이족들끼리의 혈연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듯이 경쟁적으로 산타이주(三臺酒)를 여러 병 비웠다. 수 만 리 먼 곳에서 찾아온 우리들에게 꼭 하룻밤만 지내고 가라는 카자흐인의 간곡한 청을 들어 줄 수 없었던 게 못내 아쉬웠다. 떠나오는 우리 등에다 대고 카자흐인들의 합창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첫째, 둘째 글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생각이 어떠하든, 다시 여기서, 나의 이야기가 대단한 논문이나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여기 저기서 곁눈질로, 혹은 어깨너머로 줏어듣고 훔쳐본 장똘뱅이의 시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써내려간 글이라는 점을 알려드린다.

  제목을 X파일이라 붙여놓은 만큼 신기한 이야기가 나와야겠지만 그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는?”이라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독자들 머리에 당장 떠오르는 것은 “신라”다. 그러나 정답은 “단군조선”이다. 왜 우리는 단군조선을 나라로조차 여기기 싫어하고 있을까?

  하느님의 서얼 환웅과 마늘 먹은 곰 사이에서 난 단군이 나라를 세웠고 뒤에는 중국에서 흘러온 기자나 위만에게 강탈 당했고 그러다 한나라와 싸워 망해 버렸다...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운 단군조선의 모습이다. 나는 이 상태에서 이야기를 진 행할 수가 없다. 설화의 한토막으로 시작하기에 이 시대는 너무 중요하고 중요한 우리 역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1984년 김정빈이라는 소설가가 쓴 “단(丹)”이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로 등장한 후 얼마 안있어, 시중에 “환단고기 (한단고기,桓檀古記)”라는 황당한 책이 나왔다.

  그야말로 우리가 알고있던 민족고대사의 정석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정말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 책은 사학계는 물론이고, 목마르게 전씨 아저씨 치하의 답답한 대한민국을 탈출하고 싶던 젊은 사람들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환웅이나 단군은 모두 왕조의 이름이고 그 이전 환인시대의 12지파중 하나가 수메르요 우르요 우리라는, “수수께끼의 고대문명”을 논한 것같은, 나라 역사가 일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이 책 때문에, 상당히 많은 젊은 사학도들이 충격을 받고, 주류사학계로 진출하기를 거부했다.(내가 알고있는 사람만도 꽤 된다)

  하지만 변변한 연구없이, 사학계는 이 책을 위서(조작한 책)로 규정했다. 한마디로 역사학적인 동화책에 불과하며, 희망 사항을 연대기로 조작해 잘 정리한, 치밀한 가짜라는 것이었다.

  그 증거는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고, 이 책의 편찬자인 계연수라는 사람은 대종교와 밀접한 연관을 가졌고, 편찬연대도 기껏해야 1920년이며, 그 전에 있던 책을 가지고 재편집했 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소리고, 이런 식의 책을 죄다 인정해주기 시작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한 권씩 만들어서 이러네 저러네 할 것이므로 인정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취급하지도 않겠다는 태도였다.

  더군다나 이 책은 그 근거가 되는 고문서, 예를 들면 천부경을 묘향산의 암벽에 새겨진 글에서 떠왔다(탁본)는 기괴한 전설의 고향 수준이어서, 대종교를 위 해 계획적으로 조작했다는 의심이 가는가하면,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의 무덤이 발견되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을 써놓는 등, 아예 최근에 와서 밝혀진 것들을 엮어놓는 치명적 실수까지 범했으므로, 짜가 치고는 상당히 노력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짜가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답답한 고대사의 비밀을 중국의 그 많은 위서들이 줄줄줄 풀어헤치고, 일본역사의 최초기록인 일본서기마저도 위조로 볼 수 있는 많은 내용이 있는데, 상당히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설령 조작이라해도 철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가치를 지닌 천부경 때문에, 또는 환인, 환웅, 단군조를 한 사람이 아닌“왕조”로 서술하면서 민족의 창세기에 서 대진국(발해)에 이르는 역사를 총괄하고 있어 사람들을 기분좋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물론 국사 시험과는 무관하다)

  독자 여러분! X파일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가장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사건이 바로 우리민족의 20세기말을 장식하는 환단고기 사건이다.

  우리는 의식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일 20세기 후반에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민족사의 대사건으로 기록될, 희귀한 사건이다.

  일만년을 꿰뚫는 역사책이 어디서 숨어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무슨 “쇼”하는 것처럼 나타날 수 있는가? 이게 우리의 슬픔이고 아픔이고 기쁨이다.

  나는 단언컨데,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닐 뿐만아니라, 위서라해도 우리가 지켜 야할 자존심이다. 이런 책을 면밀한 연구도 없이 무시하는 태도 자체가 바로 식민사학이 뿌리까지 오염시킨 우리의 초라 한 발상법이다.

  만약 이 책이 일본에서 나타났다면? “빛나는 일본고대사의 비밀을 드디어 풀다!”라고 학계의 거두들이 나서고,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설립하고, 문부성에서도 틈틈히 작업내용을 국제언론에 언급하고, 과정은 공개하지 않더라도 기자회견에 난리법석을 떨면서... 황국 신민들은 그야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미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비의 임나일본부 사건에서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국제 사학계의 아무런 공감과 동의 없이 교과서에 “꾹”찍어서 가르치고 있다. 문헌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학설”이야 교과서 왜곡시비에 휘말리지도 않 을 것이고, 어쨌든 암묵적으로 그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면 효과야 똑같은 거다.(실제로 일본 고대사의 진위 를 따지는 소장학파들도 임나일본부를 심정적으로는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그렇게 근거를 만들어서까지 바꾸는 이유가 무얼까? 오늘 우리가 잘난 사람이 되려면 내 조상도 잘나야겠다는 비록 옹졸하지만 치열한 발상법으로 그들은 동양의 자존심을 지키는 맹주가 되었다.

  그 열등감을 본받을 필요가 없으되, 있는 것마저 버리는 우리의 치졸함을 깨우칠 타산지석은 충분히 되렷다.

  위서시비 따위는 학술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조작된 부분을 밝혀내고 다른 사서와 비교해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취하면 된다. 고대사 문헌연구는 언제나 비교연구와 취사선택의 문제일 뿐, 완전히 옳은 책도, 완전히 틀린 책도 있을 수 없다.

  나는 환단고기가 비록 후대의 편집자의 시각이 들어갔을지언정 완전히 조작된 책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니, 중국의 역사책은 안 그런 것이 어디 있던가? 우리가 택스트라고 일컫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조차 춘추필법이라는 왜곡과 과장의 시험장이었다!

  중국책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우리 쪽에서 나온 책은 중국책에 비추어보아 위서다?

  그러나 백번을 양보해서 “위서일 수도 있잖은가?”라는 반론에 점잖게 말씀드리자면, 고려조까지도 이런 류의 서적들은 “공인역사”로는 등장시키지 못하되 삼국유사같은 식으로 유포할 수 있을 정도로 공공연한 것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리 고대국가를 서술했고 그 역사가 중국보다 위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완전히 금서로 낙인찍혀서 소지나 배포를 금지당했다.

  그런 책이 발견되면 “사문난적”으로 찍혀서 완전히 집안이 박살났다.(우리만 이랬던 것은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지은“장미의 이름”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조차 “웃음이 경건함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서가 된다)

  조선 세조(수양대군) 때, 수 백종의 수 십만권을 거두어 없애버렸고, 그 중 몇 몇 견본을 궁중 서각에 보관했는데, 일제 시대에 와서 “조선사편수위원회”가 이걸 조직적으로 없애버렸다.

  이 때, 조선조로 전해지던 이른바 비전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 속에 있는 내용들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일본의 것이기도 했건만...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 우리민족의 출발을 찾는다해도 환웅은 등장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웅배달국은 거대한 연맹국가로 바이칼(배달)호를 기준으로 부채꼴 모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시기적으로는 대략 BC 3898년이었으다.

  18대를 전하고 1500년을 지속한 왕조였으니 환웅이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한 왕조의 이름이라는 이야기다.

  마지막 환웅에 이르러 우리가 선조로 섬기는 단군왕검을 추대해 단군조선을 창건하는데, 중국에서 요임금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단군조선은 국가체제를 삼신사상에 두고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신(진)한, 변(불)한, 마(말)한이 그것 이다.

  세 개의 한국 이야기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나오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신채호선생이 밝힌 강역으로는 신조선(진한)이 시베리아에서 내몽고를 거쳐 만주 이북과 황하 이북을 차지하고, 말조선(마한)이 연해주와 동 만주, 한반도와 중국 동부해안을 위시하고, 변조선(불한)이 황하와 서역에 이르는 강역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삼조선이 깨지면서 삼한의 후예들이 옛 고조선의 이름을 걸고 대거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 때가 바로 우리 가 알고있는 삼한시대이다. 이 때가 우리 종족의 열국시대로서, 부여, 신라, 고구려, 마한, 백제 등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이후 아시다시피 우리는 오랜 삼국시대를 지나서 대진국과 신라의 남북국시대, 그 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다.

  어쨌거나 환단고기라는 책을 통해 재정립하면, 단군조선이란 한 사람의 단군이 살았던 몇 백년 시기가 아니라 일천오백 년 환웅왕조의 신시배달국이 분열의 기로에 서자 삼한사상으로 새로운 종족연맹국을 세우고, BC 2333년부터 BC 295년 까지 왕조를 유지하며, 부여(해모수)와 고구려(고주몽)로 그 계통을 이어준 고대 아시아의 굳건한 강역, 문화공동체였다.

  우리가 알고있는 단군신화는 그 아득하고도 끝없는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해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일연승려의 한 방편이었다.

  일연승려가 이런 신화를 엮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러한 역사 이야기들이 매우 일반적이었던 배경이 숨어 있다.

  실제로 환단고기의 대부분은 고려시대에 작성한 것들이다. 최근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소장파 학자들에 의하면 “가짜 책 시비”보다는 “연구대상”이라는 생각으로 느리지만 서서히 일어나 퍼지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위서가 아니라 동아시아 고대사의 비밀을 풀 열쇠로 인정하는 학자들도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발간 초기에, 열에 들떠 국수주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아예 배척하던 경향에 비하면 상당히 진보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고대사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와 중국과 일본과 다른 소수민족 전부의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진지한 태도가 필요하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박현씨에 따르면, 환단고기의 책중 하나인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대진국(발해)의 문제(文帝)의 연호가 대흥(大興) 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없었다. 중국 사서에는 발해를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제후로 묘사 하였기 때문에 연호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발해의 정효공주의 묘비가 1980년에 발견되었다. 이 비문에는 문제의 연호가 글자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적혀있었다!
  정말 위서라면 1980년 이후에 발견한 이 사실을 환단고기에 집 어넣어야 하는데...?

  민족이 기마종족의 특성을 잃고 대륙중국의 부분으로 전락하면서 우리의 손을 떠나 금서로 낙인찍힌채 “비전(秘傳)” 으로 떠돌아야했던 고대제국의 기록이 20세기에 들어와 자신의 모습을 찾기 시작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눈물 나게 기쁘다. 나는 너무 고맙다.

  우리가 못나서 환단고기는 일본서기만한 대접을 못받고있지만, 나는 안다, 때가 되면 다들 알아차릴 것이다. 우리는 돌고 돌아왔지만 결국 우리의 뿌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게 도대체 나랑 무슨 상관인가?”라는 반문과 “니나 잘해”라는 멸시 속에서도 나는 빛나는 민족혼을 지키던 몇 몇 선인들, 우리에게 한글이라는 문화의 요약본을 지켜준 사람들을 기억한다.

  아무리 걷어들여 태워없애고 죽이고 멸족시킨다며 겁을 주어도, 어쩌겠는가!

  아직도 아이를 업어길러 안짱다리를 만드 는 우리 기마민족의 면면한 전통을 누가 어떻게 없애겠는가. 더 늦기 전에 지키면 그것은 우리 것이다.

  걸어놓으면 멋있던 바지였는데, 입기만 하면 맵시가 죽어버리는 내 안짱다리가 오늘은 어쩐지 자랑스럽다.

  말(馬)이 없다고 뭐 문제가 있으랴, 나는 언제나 저 넓은 광야를 선인들과 함께 달리며 푸른 꿈을 꾼다.

  이 꿈을 여러 독자들께도 나누어 드리고 싶을 뿐이다.

고대사 x-파일"(원작자: 박창규)

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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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중세→근대? 우린 그런 패턴 안밟았다”

도올 김용옥 중앙대 석좌교수가 우리학계의 역사인식 방법론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지난 5일 밤 첫 회가 방영된 <문화방송> ‘도올 특강’에서다. 그는 지난 99년부터 3년 동안 <교육방송>과 <한국방송>에서 유·불·도를 중심으로 한 동양사상 텔레비전 강의를 해온 그가 이번에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한국학 강의에 나선 것이다. 특히 그는 첫날 강의에서 역사를 고대(노예제)-중세(봉건제)-근대(자본주의)로 구분하는 역사해석 방식을 통렬하게 비판해 관심을 끌었다.

도올과의 인터뷰는 예상 밖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첫 방송 다음날인 6일 전화통화에서 그는 15분 이상 특유의 입담을 펼치다가 “지금 곧 오라”며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다. 평소 일대일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그로서는 상당한 파격이었다. 인터뷰는 30여권에 이르는 도올의 저서를 출간한 서울 대학로 통나무출판사 거실에서 이뤄졌다. 넓은 흙마당이 있는 2층 양옥이었다.


[인터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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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는 해석된 과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대-중세-근대 시대구분도 유용하지 않습니까?

=유용성의 기준이 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가 돼야 하느냐 하는 것은 서양 중심의 지극히 라틴웨스턴 중심 지역적으로 굉장히 한정된 역사의 패턴이고 그런식의 패턴을 밟았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과거 우리가 왕조사라고 했던 것(통일신라-고려-조선)을 구태의연한 역사라고 하는데 고-중-근보다 훨씬 나은 개념이라는 거예요, 편견 없이 볼 수 있으니까. 우리가 시대구분이라고 얘기하면 되는데 거기에 해석의 문제가 있단 말예요, 이를테면 생활사적으로 담론을 만들어도 되잖아요. 사회계층변동이라고 얘기한다면 부족사회, 호족사회, 귀족사회 해도 되는 거고, 음식별로 해도 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그리고 ‘듀레이션’이란 개념도 있듯이 역사라는 게 반드시 단계적으로 변화하지만은 않는 지속성의 측면에서도 역사를 볼 수 있고…. 그런 담론의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있는 패러다임을 고-중-근으로 절대로 부당하다, 거기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어요. 그런 언어를 안쓰고도 역사를 얼마든지 쓸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는 거요. 역사학의 과제입니다. 하다못해 왕조사적 시대구분이라 해도 고중근보다는 낫다. 우리가 신라 혹은 조선 왕조라고 할 때 거기에 편견은 안들어가거든요. 어느 왕조가 다른 어느 왕조보다 유치하다는 것 같은 그런 편견….

-신라, 고려, 조선은 단지 개별국가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인데, 그렇게 구분하면 역사의 맥락적 특성이 드러나지 않지 않습니까?

=서양사에서 민족(국가) 개념은 19세기 들어서야 나타나므로 왕조사라든가 민족국가 단위의 역사 쓰기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왕조사가 훨씬 더 의미가 있어요. 왜냐면 고려, 조선왕조도 500년 역사를 지속했고. 서양은 500년 역사도 못씁니다. 말이 안되는 거지. 그래서 그런 얘기도 편견이라고. 왕조사가 우리에겐 훨씬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사상 우리 역사처럼 왕조의 지속력이 긴 유례가 없고 최소한 고중근보다 낫다 이거야. 왕조사가 낫다는 얘기가 아니야. 왕조사 치워버려야죠, 딴 개념이 있으면 더 좋죠. 예를 들면 고려 호족사회, 조선 양반관료사회라고 분류해도 고대-중세-근대 구분보다는 낫다고. 여러가지 기준이 있다는 거지.

-민족주의가 서구에서 부정적인 양태의 국가주의(파시즘)으로 나타났던 경험을 의식하면서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경향도 있는데?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이 등치되는 현상도 19세기만 해도 세계사에서 없거든요. 과거 유럽사회에서 국가와 민족 개념은 일치하지 않아요. 민족국가라는 엄밀한 개념에서는, 한국민족도 반만년 유지해왔다는 것도 있을 수 없어. 서양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단군신화 체계의 상징적 의미가 국가 개념이 민족단위로 뚜렷해지면서 그 필요성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거든요. 우리는 그런 민족국가 개념의 형성을 고려 말로 본다 하더라도 굉장히 이른 편이라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이 다른 것보다 더 정당성이 있고 그런 만큼 위험성이 큽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아주 특수한 케이스라고. 그러나 나는 절대로 우리역사를 민족과 국가를 등치시키는 의미에서 내셔널리즘은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런 류의 담론은 전부가 일제시대 때 일본 우익을 통해 들어온 거예요. 우리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조선 사람들도 우리가 민족국가라는 개념보다 소중화(小中華)라든가 유교적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이런 거지, 민족국가를 지킨다는 개념에서 구한말 척양세력들이 외세 배척했던 게 아닙니다. 그니까 지금 아주 쇼비니스틱한(국수주의적인) 근세적 내셔녈리즘은 일본X들이 대동아전쟁을 하기 위해 만든 우익적 근세개념이 우리나라에 전이된 현상이라고. 우리나라 모든 우익은 전부 일본 아류야, 100%. 우리는 그런 식으로 역사를 안봤어요.

-일본에서 우익개념이 들어온 것도 있지만 근대 학문도 일본을 통해 들어왔고….

=(말 끊으면서)Marx도 그래요, 나는 ‘맑스’를 쓴다고. 근데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라고 안쓰면 이상하게 생각해. 일본은 ‘ㄹ’‘ㄱ’ 둘을 겹칠 수 있는 발음이 없어요. 그래서 마르크스라고 쓰는데 이건 세계적으로 없어요. 이게 아주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어쨌든 우익 뿐 아니라 근대학문, 특히 80년대 과학적 사회주의도 상당수가 일본 번역서로 들어왔고, 서구적 역사해석도 일본을 한 번 거쳐 들어온 측면이 있습니다.

=20세기 한국의 진보세력이 전부 레프트를 빌렸단 말야. 좌익적 사고체계를 빌렸다고. 그런 사람들이 역사를 맑시즘 도식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노예제 봉건제를 가장 철저하게 주장해요. 그게 없으면 정치사를 못쓴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맑시스트 경제사관 논리가 여태까지 사가들이 안봤던 경제사적 하부구조 토대를 밝힌다는 의미에서는 소중해요. 그건 인정해야 됩니다. 근데 그 하부구조 토대를 밝힌다고 하는 면이 왜 반드시 봉건제-자본제의 틀 속에서만 이뤄져야 하느냐, 응? 일본의 왜색좌파들은 역사를 기본적으로 서양의 계몽주의가 인류의 근대를 독점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그 틀 속에서 맑시즘이란 진보주의도 성립하고 있기 때문에, 맑스도 계몽주의 말단에 불과하단 말야. 이게 우리 국학적 개념에서는 비극이란 말야.(분위기 서서히 달아올라)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나 내재적 발전론과 같은, 아시아적 특수성을 설명하려는 개념도 있는데요.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든, 엥겔스의 사유재산 논의(엥겔스가 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가리키는 듯)까지 다 포괄해서 그런 언어를 가지고 역사를 보지 말자는 거야. 부곡제면 부곡제, 굴품제면 골품제, 그것 같고 얘기하자 이거야. 그게 노예제냐 아니냐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지 말자는 거야. 서구적 담론에 말려들어가지 말고 우리 역사 개념만 갖고 얘기하자고.(말엽적인 얘기로 가면 안된다며 다소 흥분). 왜 우리 역사가 근대를 꼭 필요로 해야만 하고 근대를 거쳐야먄 하느냐, 근대라는 이름 없이도, 예컨대 우리는 과학을 좋아해서 받아들였고. (갑자기 격앙)무슨 아시아적 생산양식, 노예제 이런 것 몰라도 우리 잘 할 수 있잖아, 공부 잘 한다고, 응? 사회과학이고 뭐고 논의가 잘못돼 있다고, 논의할 필요가 없는 것을 자꾸만 논의한단 말예요.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서구적 근대의 성과물 중 우리가 건질 수 있는 걸 생각해보자는 거야, 과학이라든가, 자본주의적 부의 증대방식의 효율성이라든가, 의회민주주의라든가. 훌륭한 예술 같은 거, 난 서양의 종교는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대냐 아니냐”, “근대의 기점이 어디냐” 하는 게 전혀 무의미합니다. 우리 역사 개념은 “주자학이 우리 민족에게, 우리 오늘의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게 뭐냐” 이런 걸 토론하자는 겁니다. 근대적 체계로 말한다면, 우리가 주자학 도입해서 만들어 놓은 중앙관료체제는 서유럽이 봉건제에서 탈피해서 19세기에서부터나 생각하기 시작한 뷰로크라시와 같아요. 막스 베버가 말하는 뷰로크라시를 이미 우리는 15세기에 충분히 논의했어요. 막스베버의 사회학만이 근대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말 들으면 조금도 얘기 안된다고. “근대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유니크한(고유한) 정체성을 서구적 역사패턴의 전제가 없이 봐야하고, 오늘의 우리 현실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성과물을 우리 역사로부터 건져내야 한다는 얘기지.

-엉뚱한 질문일 수 있는데, 흔히 ‘역사가 발전한다’는 말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요. 근대담론은 역사발전(프로그레스)이라고 하는 진보사관의 오류의 결과입니다. 그 진보사관은 기독교 섭리사관에서 온 겁니다. 프로비던스(providence)라고 하지요? 섭리사관은 쉽게 말하면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구조예요. 역사를 직선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예를 들어 말이죠, 당장 이렇게 생각해보자고. 지금 우리가 서기를 쓰는데 이것만해도 우리에게 엄청나게 불리한 역사죠. 서기로 고침으로 해서 역사가 우리 머리 속에서 주르르륵 일직선으로 나열되는 겁니다. 옛날에 갑자(60년 주기)로만 역사를 계산했던 사람들의 역사의식은 전혀 다를 겁니다. 그니까 역사라는 게 유니크한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 진보라는 말은 쓸 수 없다고 봐요.

그런데 여기서 궁금할 거예요. 문제가 생긴다고. 그러면 역사라는 게 진보 안하면 무엇 때문에 사는가, 미래가 보장이 안되는데…. 이게 중요한 건데, 진보란 말은 부분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진보라는 말은 명확한 가치기준을 만들어놨을 때, 그 기준 아래에서 일어난 현상들을 묶는 개념으로 쓸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이 녹음기의 역사, 어떻게 작은 용량에 더 많은 콘텐츠를 담고 에너지 적게 효율적으로 쓰는 그런 기준을 세운다면 녹음기의 역사는 진보가 가능하잖아요.

-‘발달’이나 ‘개선’이란 개념과 ‘진보’라는 개념은 구분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발달이란 말은 진보란 말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는데, 역사가 반드시 과거보다 더 나아진다는 거야, 가치관적으로. 그런데 녹음기가 발달이 되면 남의 것 청취하고 나쁜 짓 하기 쉬워지고 그걸로 인해 나빠지는 부분이 많이 생긴단 말야 또. 이게 인간세상이란 말예요. 그런데 음양론적, 태극론적 사유 속에서는 전체가 발달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개념이란 말야. 근데 프로그레스란 서양의 개념은 인류 전체가 발달한다는 거야~, 지금. 역사 전체, 인류사 전체가 발달이 된다는 거야. 이런 사기가 어딨냐 이거야. 기술혁명 과정에서 진보란 말 쓸 수 있지요, 근데 인류역사에서 그 말은 없습니다. 그니까 그 기준을 헤겔도 제시했어요, 변증법적 아우프헤벤(지양)이라고 그러죠. 헤겔이 정확하게 <역사철학>에서 정확하게 제시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프라이하이트(자유)의 증대’라고. 인간의 자유가 소수독점 시대에서 다수 공유시대로 나아간다. 그런데 얼핏 보면 그 말이 굉장히 그럴 듯 하지만 나는 “천만에!”라 이거죠. 과거 고대사로 올라가면 자유로운 인간이 지금보다 더 많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지. 지금 우리가 물질적 법적 보장은 나아졌을 수 있지만, 현재 인간이 과연 자유로운 인간이냐….

그러니까 역사라는 걸 그렇게 프로그레스란 개념으로 볼 적에, 이건 넌센스다,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진보라는 개념은.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를 굉장히 오류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 역사가 전체적으로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되기 때문에 이 역사를 살 가치가 있다기보다는, 역사적 과제라는 것이 우리의 당장의 삶 속에서 주어지는, 내재적으로 주어지는 삶의 이유가 있을 거란 얘기야. 오늘날 우리가 스트러글(투쟁)해야 할 문제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우리 삶 속에서 발견해야지, 역사는 진보하고 있고 그 진보의 기준에 따라 인류의 역사가 가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담론 자체가 픽션(허구)라는 얘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역사의 각각의 국면에서 주어지는 삶의 이유를 진보사관의 전략과 전술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진보사관의 강점이 바로 지금 말한 데 있거든요. 역사를, 사람을 모빌라이징(조직, 동원) 하는데 무한한 좋은 에너지와 구심점을 제공하거든요. 서양사람들이 인류역사를 드라이브(주도)해온 그런 거죠. 그런데 그런 문제와 관련지어서, 뭐냐면 현재 우리가 스트러글하고 있는 문제도 꼭 어떠한 제도적 민주사회가 오고 점점 풀려나가는 것이 좋다는 그런 거는 분명히 있는데, 그런 것도 가치기준을 잘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야. 과연 우리의 미래에서 어떤 틀이 가장 좋을 것이냐는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지. 노동계가 주장한다고 해서 진보된 방향으로 가는 거냐, 이건 문제가 있다는 거야. 그런 것보다는, 부패한 정치는 나쁜 거니까 그럼 반부패하자, 이러면 쉽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역사라는 것 전체를 묶어낼 수 있는 이상이라든가 모든 사람이 굴복해야 하는 진보의 이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현재도 안나온다는 거야. 나는 역사를 그렇게 드라이브해서 전체를 몰고 가는 것은 다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5일 방송강연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가장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동학에도 가장 중요한 게 개벽이론, 음양의 세계 이런 게 있다고. 그게 유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서양의 발전도식적 사관보다 훨씬 더 나은 사관이라는거야. 맹자가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고 그랬어요. 한번 다스렸다가 한번 어지러운 것. 반복적으로 뵈는데 그게 반복의 역사가 아니라는 거죠. 동학에서 개벽이란 개념이라든가, 김일부의 ‘저녁’ 개념 같은 것도 보면, 그 사람들은 이제 그 어둠의 세계가 빛이 되어 온다라든가, 선천개벽세가 지났다가 이제 후천개벽세가 온다, 이제 그러면 다시 개벽이다. 그런 얘기는 역사를 단계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음양론적으로 보는 거예요. 여태까지 우리가, 어두웠던 측면을 떨쳐버리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 이런 것만 해도 역사의 위대한 비전이 된다는 거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하느냐 하는 거는, 우리가 우리 민족사를 볼 때 왕정과 민주라는 두 측면만 가지고도 충분히 역사기술이 가능하다 이거야. 고조선에서부터 최근세사까지 기본적으로 왕정 패러다임의 역사다 이거지. 왕정의 패러다임을 민주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꿔논 게 개벽이예요. 우리 민족이 말하는 개벽론적 개념을 나는 왕정과 민주라는 음양론적 개념으로 쓴다고. 그 왕정적 요소와 민주적 요소는 이게 단계적으로 딱 되는 게 아니예요. 왕정이나 민주는 음양론적 구조로 항상 같이 있는거야. 고조선시대에도 민주가 있었어요. 예를 들면, 활빈당, 임꺽정은 민주에 가까운 걸 꺼라고. 과거는 기본적으로 왕정적 요소가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강했던 시대라고. 태극의 마크가 그렇게 생겼듯이 이제는 민주적 패러다임으로 바뀌어가는 거라고, 그러면 개벽이라고 본단 말이야. 그 요소의 많고 적음이라든가 이런 걸로 구분이 되는 거죠. 민주라고 하는 이 패러다임의 변화가 굉장히 본질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기 때문에 20세기는 거의 완충적인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한 거요. 1945년 이래로 오늘날까지 왕정의 패러다임이 계속돼왔다는 거지, 나는. 그것이 비로소 이제 와서 민주라는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데 동아시아 역사에서 어느 나라도 그런 근원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동아시아에서 보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가장 앞서간다는 거예요.

-진보적 사관은 역사발전을 확신하므로 기본적으로 낙관적 세계관일 수 밖에 없는데, 도올은 진보적 사관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낙관적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뭐냐면, 그 낙관이라는 게 역사의 진보적 비전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유학의 경우에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하는, 맹자의 성선설적인 낙관론, 인간은 선한 존재이므로 인간이 만들어가려고 하는 사회는 선한 사회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선해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낙관론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건데, 그게 자기 최면일지도 몰라요. 과거로부터 유교교육이라고 하는 게 일종의 자기최면같은 거거든요. 맹자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는 거야, 보통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항상스러운 마음이 없어. 문제는, 지식인은, 최소한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은 항산이 없이도 항심이 있어야만 한다. 돈이 없어도, 배가 고파도 도덕적 양심은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 그 사회의 리더 자격이 있다는 거야.

-그게 지식인, 리더에게 요구되는 덕목일지 모르겠으나, 흔히 얘기할 때 역사는 거시적으로 민중이 이끌어가는 것이라는데….

=민중의 역사는 항산이 보장이 안되면 개똥이라고. 민중의 역사 이런 얘기는 맑시스트들이 막연하게 하는 얘기예요. 서구는 유교처럼 민중에 대한 존중의 역사가 없어요. 그러나 민심이라는 건 굉장히 본능적인 거예요.

-항심은 어떤 덕목이자 ‘당위’입니다. 그러나 ‘당위’를 역사 해석의 도구나 역사의 동력으로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다시 약간 격앙)그렇게 들어가면, 논리적으로 비슷한 얘기가 될 수 있는데, 서양의 담론에서 프로그레스도 ‘당위’거든요, ‘사실’이 아니란 말야. 내가 분노하는 것은 사실체계가 아닌 것을 사실체계인 것처럼, 그리고 동양은 도덕적 당위만을 강조하는 엉터리 전근대적 역사인 것처럼, 이게 엉터리란 말야. 똑같은 얘긴데. 걔들은 무슨 객관적인 것 같은 큰 걸개그림 딱 걸어논 것 같은 거고, 우리는 그 걸개그림을 마음 속에 몰래몰래 숨겨둔 것 같은 거고, 이런 느낌이 온단 말야. 그 질문 정확하게 했는데, 어치피 역사라는 게 픽션이란 말야. 미래는 체험된 사태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미래는 ‘구성된 미래’일 수밖에 없단 말예요. “밝은 미래를 향해 나갑시다”, 이게 다 사기라고, 미래란 모르는 건데.

동양적 사유세계에서는 미래를 강조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고 가장 건강한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도덕적 프로그램이 DNA안에 내재돼 있다는 얘기거든. 그런데 그런 도덕프로그램이 과연 디엔에이에 있는냐, 이게 좀 어려운 얘기에요, 이건 심성론까지 들어가게 되는 건데. 역사라는 게 최소한 ‘인의예지’라고 하는 도덕적 프로그램만을 강조한 역사가 훨씬 더 여러 모로 오류가 적은 역사일 수 있지 않느냐 이거야. 미리 컨디션(조건, 전제)만 말하지 프로그램의 내용을 얘기 안해요. 그래서 오류가 적을 수 있고 항상 플렉시빌리티(탄력성)가 있고 프로그램 자체를 변경하는 게 가능해진단 말야. 역사를 프로그램화하는 것은 ‘역사의 목표를 역사 밖에 둔다’ 는 거거든, 서양의 역사는, 모든 직선 사관은 역사의 목표를 역사 밖에 두는 오류를 범한다구요. 낙관론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기초적인 것은 픽티셔스, 그러니까 가공적인 건데, 그런 미래라고 한다면 최소한 사는 동안에는 낙관적이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가 있다는 거야. 그 의무를 저버리면 유자의 자격이 없어요. 맹자의 대장부론이거든. 최소한 대장부는 그러한 역사의 도덕적 낙관적인 믿음을 견지해서 그것을 철저하게 구현해주는 것만으로 밥을 먹고 살아라 이거야, 그 대신 그 사회가 공짜로 먹여준다 이거야. 그게 대장부라고 하는, 맹자의 아주 결정적인 얘기거든. 그런 논리가 나한테는 있는 거죠.

-민주주의 언급과 낙관론 언급을 통합해서 애기해보면….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 제도가 있느냐 없느냐 이거라고, 그런데 선거제도의 출현이 주로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역사를 통해서 7,800년 거쳐서 오늘날까지 온 거 아녜요? 근데 그건 서양 역사에서는 귀족사회의 왕권 견제라고, 조선왕조도 철저하게 양반귀족이 왕권을 제약시켜온 역사라고, 왕권 제약은 왕조사를 보면 아주 치열했어요. 그나마 그런 치열성 때문에 조선 왕조가 500년 유지했다고. 한국 민주주의 근본은, 과거부터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왕이 민심을 듣지 못하면 혁명의 가능성, 그 정당성까지 열어논 역사란 말예요. 정도전의 <경국대전>에 보면 명문화돼있다고. 그니까 우리 민족은 왕조사라 해도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도덕적 기반을 이미 조선 왕조로부터 계승했다는 거예요.

거기에 더해서, 해방 이후 선거제도를 도입한 겁니다. 이 선거제도를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가장 빨리 정착을 시켰다고, 우리가. 일본도 우리만한 선거가 이뤄지지 않고 있고. 서양 민주주의 헌정적인 질서감이라는 게 우리는 이미 유교에서부터 몸에 배어 있었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것도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거야. 의회민주주의 역사를 본다면 영국이 700년 걸린 것을 우리는 50년만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본다면 근대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진다는 거야. 근대라는 성과는 반드시 그런 제도적 근대가 낳은 산물이 있어야 하는 건데, 우리는 그런 걸 요 몇십년 내에 다 만들었다고 한다면 꼭 조선왕조사에서 근대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하는 복잡한 문제가 생긴단 말야. 그런 본질적인 질문을 계속 해보라고, 나도 정리 좀 해보게.(인터뷰가 시작된지 1시간이 넘어섰다. 도올의 얼굴에서 조금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으나 여전히 정열적인 답변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시비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시각과 반응도 학계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패권주의로 나가고 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 받아들이는 양식이 월드스타예요. 걔들 동북공정은 남북의 통일에 대비하는 방식입니다. 미리 고토 문제에 쐐기를 박으려는 거지요. 그런데 나는, 통일신라 이후에는 비교적 단일국가적 개념의 역사기술방식이 맞아들어가지만, 그 이전 삼국시대는 민족국가 개념으로는 접근이 안되는 역사란 말예요. 토인비가 만든 문화사 개념하고 똑같아요. 삼국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면 문화사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요동반도와 일본 큐수지방을 연결하는 하나의 문화권, 또 고구려는 북부-만주로 하는 문화권, 이런 문화권들이 있고 그 안에 또 세부적인 문화권이 또 있단 말예요.

우리도 그런 점에서 역사를 우리민족 단위로만 쓸 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사적 개념으로 우리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나한테는 옛날부터 있었어요. 이런 얘기가 안먹혀들어갔는데. 그거를 빨리 보편적 문화사로 우리 민족이 정리를 해야 한다는 거야. 예컨대, <일본서기>나 중국자료를 우리 고대사 자료로도 쓰잔 말이야. 폭넓은 세계사적 시각에서 우리 고구려사도 다시 써야 한다고 보고, 그러나 그것이 우리 영토의 주장은 아닐꺼고. 문제는 중국이 어떤 주장을 하든지간에 거기에 대해 우리가 제재를 하기는 어렵죠. 그런 역사를 얼마나 폭넓게 보고 빨리 일본 식민사관을 탈피해서 그 경제·지역사회에서 우리역사를 되찾아 놓느냐 하는 것은 시급한 문제죠. 그러나 민족국가로는 아니다 이거야.

-중국은 자국영토 내 역사는 소수민족사도 변방사라고 해서 자국사로 주장하는데, 민족국가 단위로 설명이 되지 않는 공유된 문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역사의 정체성, 우리 역사의 뿌리찾기 문제는 여전히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정체성 자체를 민족국가 개념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운 거고 , 폭넓은 시각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사료를 동원해서 학생들을 교육시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토분쟁은 역사문제는 아니고 다른 차원의 문제고. 과거 식민사관에 얽매여 고구려사를 보던 정통우익사학자들이, 지금 우익들은 만주 찾자고 그러는데, 새로운 자료 무시하다가 이제 와서 난리가 났다 그러는 거란 말이야. <화랑세기>가 위서라는데 그게 어떻게 위서예요. (주류 역사학계가) 좁은 시각에서 역사를 써왔단 말예요. 빨리 국력을 신장하는 방향으로 해야지,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없단 말예요.

-고구려사왜곡공대위나 사학계가 이 문제를 영토 문제로 인식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고구려사를 우리의 역사로 폭넓게 우리의 문화로 쓰는 작업이 시급한 문제요. 보다 더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고. 광개토대왕비 해석도 우리가 선취해야지,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씨가 광개토왕비를 해석하고 그랬던 건데. 비문을 재해석하든지 간에 확고한 정설로 만들어놓고 접근해 들어가야 하는데 일본사람들이 축소 왜곡시켜 놓은 그 범위, 민족국가 역사 안에서 우리 역사를 보려고 하는 게 문제예요.

-최근 국내에서도 미시사적 접근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것도 주제별로 보는 건데, 그런 것들이 피차간에 거시적 거대담론의 영향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거대담론의 좋은 영향을 받아야 하고 그것이 반영되고 그러면서 역사가 넓어져야 하는데, 거기에서 제일 먼저 깨져야 하는게 고대-중세-근대 도식이란 말예요. 근대 복식만 좋은 거고 고대 복식 유치한 걸로 보면, 고구려 복식은 고대복식이예요? 그게 어떻게 말이 돼? 원피스 시대, 투피스 시대, 쓰피피스 시대, 뭐 이런 식으로 써야지.(웃음)

-고대-중세-근대 개념이 단순한 시대구분이 아니라 가치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인가?

=그럼! 개입되지 않을 수 없지. 그런데 불행하게도 모두가 그걸 의식을 못하고 휘말린다는 게 비극이라는 거야. 실학도 마찬가지요. 일본 메이지 유신 만들었던 실학 가지고 우리 경우에도 실학이란 말 쓰지 말고 실사구시학풍 이렇게 쓰면 문제 없잖아요.

-최근 패션쇼 구경하셨던 장면이 인터넷에 돌아다닙니다.(좌중 폭소) 관심이 없으신 분야가 없는데, 지금까지 텔레비전 강연에서 주로 유교사상과 노장사상을 다루다가 이제 (한)국학으로 주제를 돌렸는데 그 배경이나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그게 필연이예요, 필연. 원래 대학시절에 의식 있으면 다 좌파거든. 근데 난 좌파를 거부한 거거든. 뭔가 새로운 학문을 해야겠는데, 그러러면 국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이상은 선생이라고 고려대 철학과에 대단한 석학이 계셨어요. 당시 북경대 철학과에서 최고수재란 말을 들었으니까. 그런 대학자가 국학을 강조하셨다고. 그 때 생각해보니까 국학만 하면 ‘전문가 바보’(한 분야만 좁은 시각으로 통달한 사람을 일컫는 듯)가 된다 이거야. 국학을 하려면 우선 한문을 제대로 읽어야 되니까 중국 고전에 달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해서 중국 철학에 들어갔고, 그때 중국철학은 이미 서양철학과 세계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단 말이죠. 그래서 서양철학 제대로 안하면 중국철학에서 큰 소리 못친다, 그래서 자꾸 영역을 확대하다보니까 철학에서 과학까지 나오게 됐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의 삶의 체험은 다 나의 전공이다”, 이래가면서 30년 세월이 흘렀어요. 그런데 나는 원래 국학을 하려고 했어요. 중국철학사를 쓰려고도 했어요. 근데 그거 쓰면 뭐하냐 이거야. 그 여력이 있으면 한국철학사를 써야 된다는 거고.

나는 유불도를 다 전문적으로 봤고, 거기에 더해 서양철학과 서양역사를 봤기 때문에 그거를 가지고 이제 내 남은 인생은 국학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제 통일담론으로 가는 거란 말야. 통일의 시대에 국체가 서지 않으면 통일을 맞이할 수 없죠, 우리가. 그러니까 앞으로는 온 국민이 국학으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우리 역사의 가치를 알고 우리 역사의 새로운 주체를 세워서 우리 역사의 새로운 헌법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 헌법은 어떻게 쓰느냐, 한국철학이 없으면 못쓰죠. 국학이 우선 완벽하게 발전해서 콘센서스(사회적 합의)를 이뤄야죠. 이런 것이 거시적인 준비란 말예요.

20세기는 우리가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던 시기지만, 21세기는 보편성보다는 주체성·국부성·특수성 이런 거를 더 추구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보편성 기반이 마련돼 있으므로. 나의 개인적 체험이나 우리 민족의 체험이 비슷해요. 영화도 헐리우드를 이기는 유일한 나라가 되어가도 있고. 그런데 학문도 이겨야 된다. 그러러면 고대-중세-근대가 파기돼야 된다 이거야. 이거 파기하지 않으면 절대 서양 역사 못이깁니다. 한국영화가 뛰어나게 된 이유는 그게 헐리우드 패턴에 안잡혀요, 엉~뚱하다고. 예측불가능하다 이거야. 고대-중세-근대 도식은 헐리우드 영화처럼 빤히 끝이 보인다고. 그게 아직도 역사학의 대 기본가설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너무 익숙해있단 말야.

-학계에서 우리 학문의 대외종속성이 심각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고 자생학문의 움직임들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국학이 발전하려면 고전번역에 박사학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각 대학에서 고전번역문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서구 대학은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나오는 중요 고전번역이 대학교 학위논문입니다. 국학의 기본이 서려면 국학자들이 앞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료로 번역하는 것만도 몇십년이 걸려요. 주역에 대한 논문은 십여편이 있어. 근데 주역사전은 없어. 이건 사기예요. 우리가 한 30년만 고전번역에 매달리면 국학 제대로 될 거야.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 완역한 것은 정말 대단한 작업이예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민족문화대백과, 그거 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칭찬해줘야 합니다. 국가가 벤처투자 100분의1만 투자해도 인재들 다 끌어모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화적 마인드…. 문화는 돈이 안들어요, 안목만 있으면 작은 투자예요, 현대사회에서. 국학자료들이 다 번역되는데 돈이 별로 안들어요, 그런데 국가가 그거 지원 안하잖아요. 대학까지 총동원해서 하면 우리나라의 국학이 섭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스케일이 달라지는데요, 당∼당해지고.

-최근 한국학을 전공하는 한 미국 교수의 논문을 봤습니다. 한국에서 민족(의식)이란 개념이 언제 형성됐는가 하는 건데, 지금 우리학계 통설은 일제 내지는 구한말 계몽기 정도로 잡는데 그 학자는 <임진록> 구전본을 텍스트로 삼아서 한국 민중의 민족의식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겁니다. 학계통설을 반박하는 건데요, 동의 여부를 떠나서 왜 이런 주장들이 우리 학자들이 아닌 외국학자들에게서 나와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어떤 의미로 본다면 외국학자들처럼 역사를 밖에서 보는 데 익숙해진 거야. (외국)언어를 일찍 익히고 이러면서. 평상적인 국사학자들이 자라나온 과정을 나는 전혀 안거친 거거든. 그러니까 항상 자유롭게, 전체적으로 볼 수 있고, 아웃사이더 입장에서 보는 거지. 학풍에 구애받지 않고. 이게 결정적인 거야. 내가 양심선언하고 나왔던 이후에 고려대 다시 돌아간다고 했을 때 나를 받아줬으면 내가 거기 딱 엮이는거야, 그런데 내가 고려대 돌아가고 안돌아가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학풍이 끊어진 거야. 그러면서 나는 자유로운 사상가가 된 거야. 대학에서는 제자들이 자기 스승을 비판하지 못해요. 누구라도 글 쓰는데 문제가 좀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거든, 그런 건 고치면 되는데. 그래서 글에 모순이 많으면 과감하게 고치고 뺄 건 빼고, 왜, 역사는 변하는 거니까.

내 글에도 상당히 문제가 있어요. 과거 그 시점에 나의 의식이 강하게 반영됐기 때문에. 지금 <도올문집>을 100권 분량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앞으로 될 수 있는대로 그런 것들도 정비를 하려고 그래요. 앞으로 영구하게 후학들이 전체적 비전 속에서 볼 수 있도록. 그런 면에서 어떻게 정석을 쌓아가느냐 이런 걸 심어주려고 그러거든, 이제는. 큰 시대적 의식이라든가 이런 거는 많은 후학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거고. (기자는 이 대목에서 도올 특유의 당당함과 자신감과의 이면에 숨겨진 어떤 고독감 같은 것이 배어나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외적 발언이나 투쟁은 전혀 안하겠다는 뜻인가요?

=그게 아니라, 내 소신에 따른 어떤 영구한 초석을, 내 나름대로 시스템을 놓아가야지, 국부적인 문제에 너무 휘말리면 내 인생에 에너지가 낭비되니까. 가급적 마이너한 언어들은 트리밍을 할(다듬을) 필요가 있겟다 하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이제 그 방송강의도 고민이 많은데, 한국사회라는 게 엄청난 갈등이 있더라고. 국학에 덤비려고 하니까 문중도 걸리고 종교도 걸리고, 그나마 나 정도의 자유로운 처지가 있기 때문에 하는 거라고.

이제 국학을 총체적으로 각 사상가들의 입장에서 보겠다, 그렇게 하고. 될 수 있는대로 정제된 패러다임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고대-중세-근대’ 도식을 깨고 나서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내 마음속에 뚜렷하게 정해진 건 없어요. 그걸 이제 찾아가는 과정에 있죠. 과연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보는 게 좋겠느냐, 분류방식이라든가, 기준이라든가, 개념이라든가, 이런 거를 어떻게 새롭게 정립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이제 고민해 들어가야 하는데, 최소한 고대-중세-근대의 역사, 서양에서 제기한 역사학적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생동하는 역사를 쓸 수 있을 겁니다. 역사라고 하는 거는 현대인들에게 얼마만큼 공감이 될 수 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서구적 개념을 안쓰더라도 우리 삶의 문제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기술하면 엄청난 공감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체적 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원칙이나 방향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현재는 1차 목표로, 조선역사 전체를 쓰기는 버겁고, 정도전을 기점으로 해서 이제마에 이르기까지 조선사상사 하나만이라도 뭔가 아주 색다르게, 유교라고 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고-중-근 개념이 배제된, 유교 이념의 역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리론·주기론·당쟁과의 관계, 이런 함수를 다 계산해서 그들의 사상의 내용과 그들의 정치적 현실과 어떻게 교섭해가면서 조선왕조 500년이 지속됐는가, 거기에 대한 결정적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번 문화방송 특강에서도 예정하고 있는 것입니까?

=6개월인데 너무 짧으니까, 그나마 이런 게 주어진다는 게 대단한 건데, 또 어떻게 보면 너무 시간이 적단 말야. 이게 비극인데, 시청율 같은 것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고 깊이 있게 강의하는 게 소원이고.

그는 이 즈음에서 100권 발간을 예정하고 있다는 <도올문집>을 소개했다.

=첫 권 <청계천 이야기>가 최근 나왔고, 2권 <독기학설> 수정판, 3권 <혜강 최한기와 유교>, 4권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이 다음 주에 나와요. 이게 나오면 사람들이 감을 잡기 시작할 거야, 나는 상당히 좋은 책이라고 자부합니다. 한 500매 분량인데. 또 5권이 이제만의 <동의수세보원>, 그 다음에 <동경대전>.

-100권에 아우르는 문집들은 모두 한국학입니까?

=그동안 썼던 것들도 있고 또 새로 쓸 것도 있고. 주로 국학분야가 많지. 10년 정도면 충분히 완성돼요, 그러면 <한국철학사> <한국사상사>라는 이름의 책, 세계적인 저술을 하려고 해요. 책임 있는 한국사상사를 완성하는 겁니다. 대개 뭐 철학사라고 하면 이론적인데만 국한되는데 사상사라고 하면 여러 분야를 다 섭렵해 쓴다는 거지.

-그야말로 다방면을 아울렀던 학문과 삶의 여정의 목적지랄까 종착점이 국학으로 모아지는 걸로 봐도 되는 겁니까?

=100프로. 그렇게 봐도 되는 게 아니라 100프로 거기로 가는 거고, 한의학도 내가 그것을 위해 했던 거고. (신중한 분위기, 도올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근데 나는 어떠한 그…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내 나름대로 이론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는데, 그것이 지금도 포기하고 있지 않지만, (다시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상사적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이론서가 칸트 시대에는 칸트 철학이 대단한 의미를 가졌지만, 앞으로 21세기…, 어떤 특수한 형이상학적 체계가 의미를 갖는 시대가 올까 하는 회의감도 있고…. 여러가지 그런 고민이 있는 거죠. 머리 속에 구상중입니다. 그런데 사상사는 리얼한 거니까. 내 지식의 범위를 넓히고. 사상사적 작업의 성과를 가지고 죽기 전에 기철학을 하나 쓰든가 그런 스타일이 되지 않을까, 내 인생이.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죠(웃음).

-건강관리는 어떻게? 수련 같은 것 하십니까?

=수련도 하고, 내 기철학적 이론에 따라 만든 수련법도 있고. 사람이 수련 안하면 건강 유지 못하니까. 음식, 사람이 먹는다는 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먹는 거, 자는거, 그리고 섹스. 그런 식색지성의 문제가 인간에게 중요한 건데…. 서양의 근대담론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가 모든 걸 이성 중심으로 생각을 한거예요. 그런데 이성이라고 하는 거는 인간의 총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인데, 이것이 근대생활을 하는 데 굉장히 도움을 주는 거였다고. 그런 것에 의해서 근대사회를 편하게 유지하려고 했던 거예요. 지금 현대 동양담론과 서양담론의 가장 큰 차이가 그런 이성주의적 인간, 근대성의 담론에 다 걸려있는 건데, 근대적 인간이라고 하는 서구적, 이성의 주체가 된 인간을 가지고는 사회적 리더도 만들어내기도 어렵고, 한 국가사회를 잘 이끌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학계 일부에서는, 단선적 사관에 비약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경우 근대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는데 무슨 탈근대냐 하는….

=(말 끊으며)그게 잘못된 말이예요. 우리 역사는 근대/탈근대를 가지고 얘기하면 안되는 역사란 말이예요. 그게 아주 위험한 애기고. 문제는 이성주의적 인간도 훌륭한 면이 있다라는 점에서 근대를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성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데리다가 어떻고 푸코가 어떻고 이런 얘기 아무리 해봐야, 인간의 언어가 복잡할 게 없어요, 이성을 빼놓으면 뭐가 있냐면 결국 정욕의 문제예요. 동양인들이 생각한 주자학은 이성적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것보다는 -그런 것 필요하죠, 주자학도 이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성적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기의 욕망을 절제하느냐,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쉽게 말해서 희로애락의 문제라든가 이런 것이 동양에서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란 말이에요.

한국사회도 만나서 얘기하면 서로 이성적이라고 거품을 물어요. 우익이나 좌익이 만나면.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감정처리가 안돼. 무조건 남을 증오하고 질시하고, 그러면서 자기 주장만 이성적이라고 주장하거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예요. 그러니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이성적으로 보기 전에 감정적으로 본단 말이야. 이런 게 우리사회에서 99%지. 감정순화가 바로 서구학문이 실패하고 있는 부분이야. 이런 문제가 좌파적 논리만으로 안되는 거야. 보다 더 해방된 사회, 더 많은 사람이 자유를 공유하는 사회, 이건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에요, 이런 걸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있어야지.

학계에도 자이언트(거인)가 있어야 돼. 방대한 자료와 이론을 통합해서 누가봐도 대단하다 할 정도로 해야 하는데 국학의 경우는 지금은 역부족이지. 더 깊게 공부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학문을 세워야 해,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스칼라쉽이 확고하게 있어야 해요.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만큼 그는 진솔하고 거침없는 특유의 화법으로 2시간 동안의 대화를 이어갔다. 도올은 인터뷰를 마치고 여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자신의 편저 <삼국통일과 한국통일>(1994, 통나무)에 “내 인생에 가장 본격적인 인터뷰였던 것 같다, 갑신년 정월초 도올”이라는 소감을 적어 기자에게 주면서 한마디 더 보탰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강렬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내 말이 (학계와 지식인사회에) 충격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글 조일준 기자

Posted by PD 개인교수
TAG 도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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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방의 베스트로 뜬 한국사 60가지 미스테리를 보고 한심해서 반박들을 올립니다...

요즘사람들.... 무언가 그럴듯하고 알지못했던 신비한 외부정보에 너무 취약합니다. 이런거 믿으면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지요...
무한경쟁시대..정보공유도 좋지만 스스로의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는게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출처: 초록불의 잡학다식 http://orumi.egloos.com/1779098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에른스트 폰 헤쎄-봐르테크의 라는 책 때문에 나온 말이다. 존 로스는 중국 선교사다. 문제는 저런 말은 그 책에 있지 않다는 것 뿐이다. 국내신문의 보도내용은 이렇다.
<뉴스메이커>[간도를 되찾자]동북공정에 반격 시작됐다<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OD&office_id=033&article_id=0000004098>

저 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중국 사신들이 봉황성문과 의주 사이를 왕래할 때는 조선측이 관할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런 말이 하북성이 근대 조선 것이라고 옮겨지는 것이다. 신촌에서는 기침한 사람이 동대문에서는 죽은 격이다.

2. 중국의 '중국고금지명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있다.

중국고금지명사전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금과옥조다. 저 사전은 중국지명에 대해 각종 사서의 기록을 모두 옮겨놓은 책인데, 시대를 따지지 않고 자기 주장에 유리하면 다 채용해서 견강부회하여 자기 주장에 이용해먹고 있다. 당연히 저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글쓴이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겠다는 것, 이해한다. 역사공부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에는 함정이 있다. <좋은 말>이라는 말을 넣어서 특정한 품종을 얻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몽골은 제주도라는 섬을 통째로 목장으로 만들어버린 것 뿐이다. 이런 간단한 문장 안에도 사람을 현혹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들의 실상이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중국 측에는 실제 연구결과를 적용하고 우리나라 쪽은 최치원이 써놓은 기록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수법도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런 것을 이중잣대라고 부른다. 수양제가 동원한 백만대군(여기에 보급병력까지 합하면 2백만이 된다.) 이런 것은 왜 예로 들지 않을까?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반도에서 그게 왜 불가능하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옛날에 내가 증명해 준 적이 있다. 또한 올해(2005년) 호남지방에만 폭설이 내린 것도 한번 생각해 봐라.
홍수기록으로 본 삼국의 강역: http://www.dragon5.com/news/news199910071.htm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저 주장은 처음에 정용석에 의해서 삼국이 한반도에 있지 않은 증거로 쓰였다. 그후에 고려, 조선에도 메뚜기 피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다 내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논리적인 귀결로 고려, 조선도 다 중국 땅에 옮겨놓게 된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는 삼국사기와 같은 메뚜기 피해 사례가 숱하게 적혀 있다. 제발 찾아나 보고 이야기하기 바란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근거없는 이야기. 애신각라가 신라를 사랑하라는 말이라는 해석과 더불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일뿐이다.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보다 찾을 수 없는 지명이 더 많다.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이런 시각이 이런 자들이 역사를 보는 자세다. 세월이 변해도 언어가 변하지 않고, 지명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눈물을 마시는 새>라도 읽어보기를 바란다. 중국의 지명도 한반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중국의 대표적 수도로 모든 이들이 말 들어봤을 <장안>만 해도 <호경>, <함양>, <장안>, <서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저 <함양>은 경상남도에 있는 지명이니 장안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겠는가?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있다.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수양제의 별동대가 압록강을 건넌 뒤 평양성에서 물러나다가 일격을 당한 것을 알 수 있다. 청천강 설은 그런 기반 하에 나온 것이다. 평소에는 김부식을 있는대로 깔아뭉개다가 이럴 때는 권위있는 척 이야기한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되었다.

그래서? 남한에 아파트가 서 있으니 미국 땅이라고 주장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인가? 서울에 관제묘가 있으니 중국땅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경상남도에 왜식 성이 세워져 있으니 일본 땅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더구나 저 이야기는 내몽골자치구와 요녕성의 경계 부근에서 발견된 성에 대한 이야기다. 지도에서 내몽골 자치구가 얼마나 넓은 땅인지, 또 요녕성과의 경계라면 어딘지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저 <내몽골>이라는 말 때문에 지금 몽골의 어디쯤인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오산. 저런 말이 나온 근거는 이 기사다. <주간조선>고구려 정복로 1만3000리를 가다 <http://www.dragon5.com/news/news199910071.htm>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닮은 부분도 있고, 닮지 않은 부분도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볼 뿐. 고구려칸이라니? 이런 헛소리는 처음 본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있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치우를 중국에서 고리국 황제라고 이야기한다는 말은 처음 본다. 황제라는 개념 자체가 진시황때 만들어진 것인데 무슨 헛소리인가? 치우는 우리 민족과 아무 관련도 없다. 헛물 켜지 말기를. 저런 주장은 오히려 중국인들이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지껄이는 헛소리인데, 우리가 거기에 장단맞춰주는 셈이다. 제발 정신차리기 바란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중국에도 없다. 증거도 없는 이야기를 너무 좋아한다.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거짓말이다. 박혁거세의 무덤은 경주에 가면 금방 찾을 수 있다. 경주는 땅만 파면 신라 유물이 나온다. 대체 그 유물은 뭘까? 중국에서 파와서 거기다 묻어두었겠냐? 그럼 석가탑, 다보탑은 왜 안 묻어두었겠냐? 무구정광다라니경이나 석가탑에서 나와 그동안 보관해 두었다가 과학의 발전으로 해독하게 된 불국사중창기(고려때 기록)는 뭘까 생각해 보기 바란다.

15. 고려, 조선등의 무역 내역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역시 거짓말이다. 대체 뭘 수출했는지는 대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품목도 대지 않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옮긴이 주: 고려에서는 향신료와 물소뿔, 그리고 진귀한 구슬류를 역수출 한 듯하다.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여길 보라.
박창범-나대일의 삼국시대 일식 연구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http://hkh336.egloos.com/374099
참고로 이것도 같이 보면 좋겠다.
고대 천문학 기록 연구에 대한 반론: http://orumi.egloos.com/214633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위의 것과 동일하다.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문항 수만 불려놓는 것도 파렴치한 짓이다.

18. 백제의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의 인구보다 많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의 각도별 인구를 합산한 뒤에 내놓은 결론이다. 그렇게 세면 조선 시대 인구가 형편없이 줄어든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19.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 현 중국대륙의 장안(시안)과 소름끼치도록 일치한다.

평양성을 장안성이라고 불렀다는 데서 착안한 발칙한 아이디어다. 이런 결과 어떤 이는 중국의 장안은 페르시아에 있다는 등의 헛소리를 하게 된다. 최근에는 중국의 장안은 티벳에 있었다는 주장도 보았다. 나는 중국의 장안이 경상남도 함양군이었다는 말을 차라리 믿겠다.

20. 당 13만 군에 의해 백제 수도가 함락된 후에도 백제 장군 흑치상지는 200여개의 성을 기반으로 당에게 저항해 당은 40만군을 증원한다.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성으로 뒤덮여있어야한다.

저 인간들은 성이 중세 유럽에 나오는 거대한 규모인줄만 알아서 저런 소리를 한다. 경주 시내에만 성이 6개 있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옮긴이 주: 한반도가 성으로 뒤덮인게 맞다. 동네에서 한시간 반경에 조그만 읍성이나 산성이 없다면 연락 부탁드린다.

21. 조선 초 인구가 37만명인데 1000년전의 국가인 백제나 고구려의 군인만 100만이었다.

18번에서 이미 다뤘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최치원이 한 말을 증거로 하는 이중 잣대까지 동원하고 있다. 재야학자 중 어떤 이는 조선도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과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끼리 싸워서 결론을 좀 낸 뒤에 와줬으면 좋겠다. 조선이 중국 땅에 있었다는 사람 이야기로는 얄타회담 때 전승국들이 한국의 힘을 무서워해서 한민족을 한반도로 보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하다. (이런 이야기가 책으로도 나와 있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중국 대륙내의 요동이란 수나라때 설치된 요산현을 가리킨다. 지도에서 <요>자만 나오면 요동이라 우기고 있다.

23. 18~19c 외국인 선교사 또는 탐험가들이 작성한 지도에는 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어떤 지돈지 나도 보고 싶다. 지난번 유조변 지도(http://orumi.egloos.com/1762044 참조) 같은 황당한 내용일 것이 분명하다.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고구려를 칠 때 군인들이 징병된 곳이 저곳들이다. 그곳에서 싸웠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왜곡을 하다니 한숨만 나온다.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우리 서울을 한자로 한성漢城이라 불렀다. 서울이 중국 땅이었나 보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있다.

25번과 동일한 이야기다.

*옮긴이 주: 이것은 반대한다. 영락태왕이 북경지역을 경략한건 요즈음 들어 꽤나 긍정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게다가 모본왕 기사엔 유주를 공략한 사실이 기록되어있고, 태조태왕 기사엔 요서에 10성을 쌓았다고 기록한다.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옳다고 본다.

27. 고구려 고씨가 아직도 중국 대륙에 살고있다. 특히 장수왕 후손인 사람은 고구려 유리왕의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베이징 근처에 유리왕묘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국의 왕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후손은 한국말 하던가? 고구려 역사가 중국 것이라는 증거로나 이용될 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28. 중국대륙에 있는 수많은 성들이 현지인들에게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고려성, 또는 고구려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증거나 제출하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역시 25, 26번과 같은 말로 문항수 부풀리기의 수법에 불과하다.

29. 백제의 의자왕, 흑치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중국대륙에만 존재한다.

고려할 가치가 없는 말이다. 지명에 대한 부분은 이미 위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모두 설명이 된다.

30. 백제가 패망할 당시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모두 있다.

위 항목과 마찬가지다. 위 항목과 같이 이 역시 문항 수 부풀리기.

31.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359개나 된다. 이들 모두가 중국대륙에는 존재한다.

위 항목과 마찬가지다.

32. 한단고기외에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규원사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는 양립이 되지 않는 사서다. 규원사화 진본을 믿고자 한다면 환단고기는 폐기해야 한다. 더불어 규원사화의 원본이라는 것은 그것이 숙종 때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이 아니다.

33. 중국의 고문헌에 나와있는 발음법으로 정확하게 한자를 읽는 민족은 우리민족밖에 없다.

무슨 고문헌일까? 저 주장은 반절로 한자를 읽는데 우리나라가 가장 정확하다는 주장이며, 그런 주장을 통해 한자를 우리가 만들었다고 우기기 위한 것이다. 중국인을 몽땅 우리민족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에 어떤 논리도 먹히지 않는다. 중국 땅에서 출토되는 갑골문자의 주인공도 우리 민족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나라 말의 어순대로 쓰인 자료가 없다는 말을 하면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우리 말에서 빼먹을 수 없는 <를>과 같은 글자는 한자도 없다. 우리가 만든 한잔데, 우리가 자주 쓰는 발음의 한자가 왜 없는지는 생각이나 해봤을까? 이런 글자가 한 두개가 아니다.

34.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이름은 화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도 토함산의 화산활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현 경주의 토함산은 공교롭게도 화산이 아니다.

토함산 뒤에 함월산이 있다는 건 아는지 모르겠다. 토함산이 화산이라는 것은 삼국사기에 토함산에 구덩이가 생기고 불이 3년간 탔다는 기록(삼국사기 태종무열왕 4년)에 의거해서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화구로 보기에는 너무나 작다는 것을 지적해도 못 알아듣는다. 아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토함산 화산론의 허구: http://orumi.egloos.com/214076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 중국 기록이 대체 어디 있을까? 이런 식의 주장은 정말 무책임한 것이다. 중국의 문헌? 이름조차 대지 않고는 있다고 우기는 것 뿐이다. 한마디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저런 문헌을 가져올 수 있는가?

36.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인 애신각라 는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아래 37번에 나오듯이 애신각라는 여진어로 "금족金族"이라는 뜻이다.

37.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 라고 발음된다.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신라의 왕족은 금(金)씨이다. 청나라의 원래 이름은 금(金)나라 이다.

청은 본래 나라이름을 후금後金이라고 했다. 이것은 본래 아골타가 한 말에서 기인한다. 아골타는 <요>와 원수지간이었다. 요를 멸망시키고자 맹세하면서 요는 빈철=좋은 철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나라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는 아니다.) 그래서 쇠보다 강하고 변하지 않는 금을 자기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금사에 나온다. 그런데 금사 지리지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금이라는 국호는 여진 완안부의 고향인 按出虎水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다. 여진어로 按出虎는 금이라는 뜻이다. 이 물에서 금이 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것으로 나라 이름을 취했다고 한다. 신라 성씨가 거기에 왜 끼겠는가?

38. 임진왜란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조선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다.

그렇다. 그리고 청 태종이 인조에게 삼고구두배를 시킨 뒤에는 자신들이 부모의 나라라고 했다. 옛날 동아시아는 부모-형제의 관계로 나라 관계를 정립했었다. 힘이 약한 쪽이 자식 나라가 되거나 아우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역사학의 기본에 속한다. 즉 기본도 모르는 소리인 것이다.

*옮긴이 주: 금나라에서 고려에게 보낸 전서에서는 "우리는 대방고지를 고향으로 삼고 당신네 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었다" 고 한 전서가 기록돼있다 한다.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렇다. 왕의 출신에 따라 나라의 역사가 바뀐다는 한심한 생각에 기인한 이야기다. 영국 왕실은 독일에서 왔다. 그러면 영국은 독일땅인가? 노르만인 윌리엄이 영국왕이 되면 영국 역사는 노르만의 역사로 변하나?

*욺긴이 주: 여진족을 통합한 자가 고려 출신임을 두고 이야기한다.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원문 제시라도 하면서 이런 주장을 해줬으면 좋겠다.

41.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 건국직전에 여진족이 부족국가 형태일때의 추장이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있다.

39번과 동일한 이야기다.

42. 현재 우리나라 부안 김씨의 족보에 금 태조의 이름이 나와있다.

39번과 동일한 이야기다. 우리나라 족보에는 공자를 조상으로 삼는 사람도 있으며, 중국의 유명 인물을 시조로 삼는 집안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43. 백제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그런 상식으로 생각해도 백제 북쪽은 대방에게 막혀 있어야 한다. 말갈 문제는 복잡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주장으로 백제가 중국 땅에 있었다고 한들 지리 공간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더불어 설명한 것도 본 적이 없다. 고대의 지리 주장은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가 매우 많다. 그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 설명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오늘날 우리처럼 방향을 정확하게 알 수도 없었고,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재야학자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대목만 뽑아내서 자기들 주장에 이용한다. 사료를 자기 목적에 맞춰 취사선택하는 것인데, 결론을 내린 뒤에 취사선택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는 역사학이 금기로 삼는 방법이다.

*옮긴이 주: 온조왕 13년 5월 이후엔 낙랑군과의 불화로 낙랑군이 말갈을 배후에 움직여 백제를 공격했다. 아마 말갈부족이 낙랑과 백제 사이에 자리잡은듯 하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그렇다. 유주자사가 관직이었으니 태수들을 거느린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자들은 이런 것을 증거로 고구려가 유주를 다스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려면 자사라는 관직이 고구려의 관직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머리 속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는 자사라는 관직이 없었다.

*옮긴이 주: 여기에서 거느린 태수중 요동태수가 포함돼있다는걸 주목. 유주자사 진은 유주를 모두 들어 투항하고 댓가로 그 관직을 이어받은듯 하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대개 이 대목은 요서백제설과 연관짓거나, 고구려의 오기라고 본다. 기록이 북쪽에 정통하지 못한 남중국에서 나왔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옮긴이 주: 동성왕대 기사에 "위가 군을 들어 우리를 공격했으나 패한바 되겠다" 고 하였다. 이는 백제가 중국 해안가에 어떤 거점이 있었음을 가리킬수 잇는 근거로 볼수있다.

46.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강역은 동서 너비가 2천여 리, 남북 길이 1천 5백여리, 신라, 백제를 병합하니 고려의 동북(東北)쪽이 넓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송사(宋史),.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들을 보더라도 역사서 원전에 의한 조선의 선조 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은 모두 동서(東西)가 넓고 남북이 짧은 지역을 통치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송인이자 외국(外國)인 서긍이 직접 고려로 가서 보고 온 고려의 통치 영역의 지형구조가 동서(東西)가 넓은 구조였다고 했다. 현재의 한반도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고려도경에는 이렇게 나온다. "옛날에는 그 영토가 동서로는 2천여리, 남북으로는 1,500여리였는데 현재는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동쪽과 북쪽이 약간 넓어졌고 서북쪽은 거란과 접해 있다." 여기서 옛날이라 함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는 <옛날에는>이라는 부분을 똑 떼어놓고 있다. 재야학자들이 사료를 인용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식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식의 주장은 사기치는 것에 불과하다.

47. 몽고에서는 징기츠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고구려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는지 정말 알고 싶다. 이것은 칭기즈칸의 조상인 알랑-고아가 임신을 한 내용이 고주몽의 신화와 동일하다는 점, 그리고 그 부족 이름 중에 "코리"가 들어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오해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칭기즈칸의 어머니와 아내로까지 이야기가 변한 모양이다. 신촌에서 재채기한 사람이 동대문에서는 죽었다고 소문나는 격이다.

48.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명사, 선조실록, 난중일기, 이순신전서, 임진전란사, 은봉야사별록 등) 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명, 상황전개, 위치, 방위, 거리 및 전후사정이 한반도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면서 꼬투리를 하나하나 잡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보면 한국전쟁도 한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49.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에 나오는 지명들은 중국에는 모두 존재한다.

중국 지명도 상당수 한반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50. 난중일기의 원문을 직접 번역한 현역 해군 중령 최두환씨(해군본부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는 난중일기 번역을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지명을 추적하여 임진왜란의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겨놓자 쉽게 풀려나갔다고 한다.

세상에는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 여럿 있는 법이다. 본인이 한문 실력이 안 되는 것을 저렇게 변명하나?

51. 임진왜란 당시 기록을 보면 왜가 침입해오자 조선의 왕은 서쪽으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식적으로는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어느 기록일까?

52. 어제신도비명 에 보면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길로 나눠 서쪽으로 진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반도라면 당연히 북상 하는 것이 옳다.

51번과 동일하다. 그리고 서쪽으로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53. 지도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 등을 두루섭렵하고 있어야 제대로 만들 수있다. 한반도 전역을 3차례 둘러보고 정교한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연하다.

54. 김정호는 일제시대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것 역시 일제시대이다.

그래서?

*옮긴이 주: 이미 대동여지도는 일본군이 청일전쟁때 군사지도로 보급했다.

55. 대동여지도에 씌여있는 글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이 1만 9백리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글옆의 지도, 즉 한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蓋我東邦域 三面際海 一隅連陸 周一萬九百二十里 凡三海沿一百二十八邑 總八千四十三里

이것은 조선을 뺑돌았을 때의 거리라고 명기되어 있다.

56.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쓰고 있다. 한반도에는 낙양이라는 지명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낙양은 중국의 천년고도의 도시이다.

어디에 나온 말인지도 적어놓지 않았다. 이 말도 대동여지도에 적혀 있는 <낙양>이라는 단어 하나를 보고 상상한 내용이다. 한문을 읽을 줄 모르면 떠들지나 말았으면 싶다.

*옮긴이 주: 域民以太平之仁 習俗有箕壇之化 況均四方來廷之道 正亥坐南面之位 實猶周之洛陽 非東西關 三京所可比也 其爲天府金城 誠億萬世無疆之休也 歟嗚呼偉哉

백성은 태평의 인으로써 습속에 기자 단군의 교화 있어 사방에 내정의 도가 고루 미치고, 정해좌 남면지위가 실로 주나라 ((낙양))과 같으니, 동서관 삼경이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천부 금성이 되어 삼가 억만세 무강지휴라, 아아 훌륭하도다. <-가 원문이다.


57. 세스페데스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16c 에 쓴 책에 의하면 꼬라이 또는 꼬리아라는 왕국은 일본에서 10일정도 걸리며 왕국의 끝은 티벳까지 달한다고 씌여있다. 또한 조선의 북쪽에 타타르가 있었는데 그것도 조선땅이다 라고 씌여있다. 타타르는 내몽고에서 활동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조선대륙의 강들은 수량이 풍부한데 강의 폭이 3레구아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세스페데스는 임진왜란 때 종군 신부다. 무슨 책에 나오는 이야긴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대체 이자들은 조상이 남긴 기록은 하나도 믿지 않으면서 어디선가 줏어들었다는 이야기에는 목을 맨다. 저 타타르라는 말은 일본에서 여진족을 부르던 이름에 불과하다.


58. 루이스 프로이스 라는 신부가 쓴 조선의 강역에 대한 글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과 거대한 사막이 존재한다고 씌여있다.

루이스 프로이스도 임진왜란 때 종군한 신부다. 이 사람의 책에는 이렇게 조선이 나온다. <남북의 길이는 2,500리, 동서의 길이는 90리 또는 그 이상이다.> <몇몇 큰 강이 있고 그 중 하나는 하구의 넓이가 10리나 된다. 또한 중국과 인접해 있는 변경에는 통과하기 매우 어려운 넓은 사막이 있다고 한다.> 마술사의 마술처럼 그 본질을 알게 되면 저런 주장은 매우 초라해지는 것이다.

21번 항목에서는 조선 인구가 37만명이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조선 인구를 근거로 조선과 삼국은 같은 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 48 - 58번 주장은 조선도 중국에 있었다는 근거 아래 만들어진 내용이다. 서로 간에 모순되는 주장이 이 글 안에 있다는 이야기다.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부분을 재야학자들끼리 정리 좀 하고 떠들어 주기 바란다.

59.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불태운 우리 역사서가 약 20만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딱 두 권만 남겨두었다.

이것은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다. 일제는 20만권의 사서를 태웠나를 읽어보기 바란다. 더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남겨두었다고 하니 견강부회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고려시대 역사기록으로는 제왕운기와 동국이상국집, 익재난고 등이 남아있고, 조선초기에 제작된 삼국시대 역사서들도 많이 남아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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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가 공개된 지 20년이 넘도록 대학강단의 대다수 학자들은 사료적 신뢰성의 문제를 지적하며 {한단고기}를 상고사연구의 기본사료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한단고기}의 사료채택 여부를 놓고 세 가지 엇갈린 주장으로 분파 되어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단고기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은

 

첫째는 {한단고기}가 위서(僞書)라고 보는 시각으로 대체로 강단사학의 입장입니다.
둘째, {한단고기}가 정통사서라고 보는 견해로 재야사학과 소수의 강단학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셋째,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중도적 입장입니다.
 

이 가운데 {한단고기}에 대해 위서론은 제기하는 역사가들은 {한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에서 모순되는 연대기록과 국제관계 기술이 발견되고, 국가·문화·인류·세계 등 근대적 용어 사용, 그리고 삼신일체론(三神一體論)·천지창조 개념이 기독교 교리와 유사한 점등으로 비추어 기독교 사상에 익숙한 근대의 인물이 위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마디로 한민족사의 역사관의 기반인 신교문화의 정신세계를 전혀 볼 줄 모르는 철학 없는 위인들의 소견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현존자료를 놓고도 그 진실성과 의미를 밝히려 한다기보다는 지엽적 헛점만 찾아 부각시키고 핵심적 내용까지 모두 부정하려드는 것입니다.

이 책을 엮은 운초 계연수 선생이나 감수자 해학 이기 선생, 출간한 이유립 옹 모두 20세기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안 할 때 근대적 언어가 가미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필된 사료를 위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필된 사료를 위작이라고 한다면 지구상에 위작 아닌 사료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일부 술어와 연대상의 고증문제가 제기될 수는 있으나 민족사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시원사와 한민족사의 국통(國統), 한(韓)문화 뿌리의 심층구조와 대세를 보는 데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음을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하의 내용은 몇 년 전 단군학회에서 주최한 1999년 전반기 학술회의에 오간 토론내용과 그 밖의 논고를 중심으로 엮은 것입니다.


1) 위서론


대부분의 우리 역사학자들은 {한단고기}를 위서임을 입증하는 근거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 첫째, {한단고기}가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편찬된 해(1911년)로부터 약 70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점인데 계연수와 이유립이 이 책의 공개를 늦추었던 동기가 충분히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에 의혹이 제기된다는 점입니다.
     

  • 둘째, 이 책에 기록된 관직과 인명, 지명, 용어 등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교육기관인 경당이나 그 관직인 욕살(褥薩) 등이 단군조선 때도 그대로 등장하고 있고 '원시국가', '문화(文化)', '남녀평권(男女平權)', '부권(父權)' 등을 비롯한 근대적 용어가 등장하는 점입니다.
     

  • 셋째, {한단고기}에서 인용한 사서들은 현존하지 않거나 서명(書名)만 남아있으므로 그 이름만 도용해서 위작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 넷째, 위서라고 낙인된 {단기고사}와 그 유사한 내용들이 나타나는 점을 위서론의 증거가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위서론으로 제기된 네 가지 가운데 강단사학이 집중적으로 거론해온 것은 {한단고기}에 등장하는 용어들의 문제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제시해온 것은 [단군세기]의 기록에 청나라 때 사용된 지명<영고탑(寧古塔), 장춘(長春)>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조인성 교수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전설과 관련하여 생긴 지명이므로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성립 이전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기록을 들어 영고탑은 중국 청(淸)나라의 조상 여섯 형제가 이곳 언덕에 자리잡고 산 데서 생긴 지명인데 청나라 때 생긴 이 지명이 청(淸)나라 이전의 단군조선 시대에는 나올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토대로 {한단고기}를 청나라 건국 이후에 조작된 위작으로 단정한 바 있습니다.

또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와 {단군세기}에 나오는 상춘(常春)은 장춘(長春)의 오기(誤寫)로 보고 장춘이 청 가경(嘉慶) 연간(1796∼1820)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므로 {태백일사}와 {단군세기}가 위작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단군세기}의 [서문]에서

'나라가 형(形)이라면 역사는 혼(魂)이다. 형이 혼을 잃고 보존될 수 있는가.'라고 한 부분은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1915)에 나오는 '대개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다. 지금 한국은 형은 허물어졌으나 신만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인가.'라고 한 것과 비슷하며,

또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하는데 성(姓)은 연씨(淵氏)이다. 그 선조는 봉성인(鳳城人)이다. 아버지는 태조(太祚)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고 하며 증조는 광(廣)이라고 한다. 모두가 막리지(莫離支)였다.'라는 기록은 [조대기]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인성 교수는 '자유'와 '태조'는 1923년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묘지(泉南生墓誌)가 발견됨으로써 알려진 것이므로 {태백일사}가 1923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며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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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서론


현재 전하고 있는 {한단고기}는 1949년 이유립이 오형기로 하여금 정서(正書)시킨 것인데, 원본과 인쇄본, 필사본 등이 사라지게 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손을 거치면서, 저술된 시대와 다른 근대적 용어가 사용되고 비전문가로서 역사가에 의하지 않은 인쇄와 필사 등을 통하고 보니 본문(本文)과 주해(註解)가 혼동되어 진실성에 의구심이 확대되고 결국 위서 논쟁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한단고기} 진서론임을 주장해온 송호수, 박성수, 임승국 등은 강단 사학계의 위서론은 {한단고기}에 대한 충분한 내용 검토 없이 몇 개의 자구에만 얽매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반론의 근거들을 제시하였습니다.

특히 위서론에서 제기되어 온 용어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반론하였는데 영고탑의 문제에 대해서는 반론의 근거로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영고탑(寧古塔)에 대한 기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寧古)'이며 자리는 '특(特)'으로 '영고탑(寧古塔)'이 청(淸)나라의 시조와 관련되고 있다는 학설은 와전된 것으로 주장합니다. 즉, 구설(舊說)로서 지명이 아니므로 청나라 시조 운운하는 {만주원류고}의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라는 것이죠. 상춘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춘(常春)이라는 본래의 지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청나라 가경제 때 지명을 장춘으로 바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조대기]에 나오는 '연개소문'의 父인 '太祚'와 조부인 '子遊'의 문제에 대해서는 도리어 이 부분이 {한단고기}가 진서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북경 낙양에는 중국식 발음 표기인 '천(泉)씨'로 되어 있지만, {한단고기}에는 '연씨(淵氏)'로 되어 있고, 선조가 봉성인이라는 사실과 증조부의 이름이 '광(廣)'이라는 사실까지 상세히 나와 있으므로 이것을 다 위작이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강단사학이 지적해온 {한단고기}에 나타나는 근대적 용어의 문제에 대해서,

송호수 박사는 위서론자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문화', '산업' 같은 용어는 {한비자(韓非子)}와 류향(劉向, B.C77∼6)의 {설원(說苑)} 등에도 나오는 용어로 근대 이후에 사용된 단어가 아니라고 반론하였고 이희근은 {한단고기}에 나타나는 근대적 용어 등은 후세에 가필되었다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이 책의 모든 내용이 후세에 창작 조작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고 {한단고기} 서문에서 20세기에 편집했음을 스스로 밝힌 책에 '20세기 용어들이 사용되었다'고 위서라고 비판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며 계연수가 기존 책들을 재편찬할 때에 자신의 지식을 첨가하여 가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를 비난하는 데 쓸 역량을 그 내용의 검토와 분석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의 발전이나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는 데 도움되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또 한 가지, 강단사학이 {한단고기}에서 인용한 사서들이 현존하지 않거나 서명(書名)만 남아있다고 해서 이름만 도용해서 쓴 위작이라고 단정지은 주장에 대해 진서론자들은 일제시대 총독부가 우리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사서들을 압수하여 파기하거나 은닉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성수 교수는 단군학회 1999년 전반기 학술회의 지정토론에서 조선사편수회의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이 태종실록과 세조실록에 나오는 고기(古記)들이 고려왕실의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음을 시인한 바 있다고 밝히고 또 이병도가 쓴 진단학보 창간사에 현재 3종의 고조선비사 이본(異本)이 있다는 기록을 들어 일제 시대 1920년대까지 상고시대를 밝혀줄 고서들이 남아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서론자들 가운데는 독특한 방법으로 {한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발굴해낸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한단고기} 내용에 나오는 기록과 중국사서와 발굴유물을 비교 검토하여 {한단고기}의 신빙성을 높일 수 있는 사실들을 찾아냈다. 이것은 {한단고기}가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날조된 책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문학 교수인 박창범, 라대일은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의 천문기록에 주목하였습니다. 두 문헌에는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현상'이 기록되어 있고 일식 현상이 10건, 큰 썰물이 1건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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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와 단기고사에 기록된 고조선시대의 천문기록】

시기 기록내용
B.C.2183년 2세 단군 부루 58년 日蝕
B.C.1733년 13세 단군 흘달 50년 五星聚婁
B.C.1533년 17세 단군 여을 20년 여름 日蝕
B.C.935년 29세 단군 마휴 9년 南海潮水退三倜
B.C.918년 6세 기자 2년 7월 七月 日蝕
B.C.837년 32세 단군 추밀 13년 3월 三月 日蝕
B.C.765년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 四月 日蝕
B.C.579년 19세 기자 1년 봄 日蝕
B.C.423년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 二月 日蝕
B.C.258년 47세 단군 고열가 48년 10월 十月 朔日 日蝕
B.C.241년 36세 기자 인한 35년 日蝕
 


슈퍼 컴퓨터를 동원한 조사결과 오행성 결집현상 부분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단군세기} 13대 흘달단군 50년, 즉 B.C.1733년에 다섯 개의 별이 누성(婁星) 근처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1년 전인 B.C.1734년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 해 7월 13일 저녁 다섯 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였습니다. B.C.1733년을 기점으로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 밖에 없었죠. 박교수는 1년 정도 오차가 발생한 점에 대해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현재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기록에 대해 누군가 중국문헌의 천문현상이나 혹은 컴퓨터를 동원해 측정한 기록, 또는 무작위로 {단군세기}에 기술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국문헌에 나타난 천문현상의 기록은 훨씬 늦은 기원전 776년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유립이 {한단고기}를 내놓은 1979년 이전에 이러한 기술을 동원하여 위작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작위로 천문기록을 기술했다해도 맞을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결과 0.007%에 불과하므로 거의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은 제29세 마휴 단제 9년(B.C.935년)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있는데 같은 방법으로 조사한 결과 전후 2백 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있었던 것은 4년 후였다. 누군가 작위로 기술해서 맞을 확률은 0.04%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식현상의 기록입니다. 일식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므로 일식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단군조선 때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뿐이므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기록이 주나라 때인 B.C.776년인데 비해, 2세 부루 단군 때인 B.C.2183년의 일식 기록은 중국의 기록보다 무려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 그리고 10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 중 두 개는 해 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창범은 밝혔습니다.



⑶ 중도론

학자들 가운데는 {한단고기}의 진위성을 가리는데 있어서 신중한 태도를 강조하며 일방적인 비판도 추종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한때 조인성 교수와 더불어 {한단고기}의 진실성에 의혹을 제기해왔던 이도학 교수는 {한단고기}를 무조건 부정하는 태도도 문제가 있음을 시인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단고기}를 전면 부정하기에는 아쉬운 구석이 남아있다. 그 이유는 {한단고기}가운데 사서로서의 성격이 가장 두드러진 {태백일사}에서 발견하게 된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사의 광배명(光背銘)에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은 '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壬子年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卽位年 稱元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불상 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같은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의 묘지(墓誌)에서는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밖에 {태백일사}에는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의 '타이'라고 하는 아유타국(阿踰 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 이는 백제의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시사 받을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한단고기}가 지닌 사료가치도 1911년에 {한단고기}가 편집되었다는 전제하에서만이 가능함을 명백히 해 둔다. {한단고기}는 역사연구의 개별적인 사료로서보다는 그 속에 담긴 사상이나 사학사적인 의의가 더욱 값질 것으로 믿어진다. 각기 다른 4권의 책을 하나로 엮은 {한단고기}는 현존하지 않는 기존 문헌들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다. {한단고기}가 인용하고 있는 문헌들을 통해 우리 나라의 사상사나 사학사적인 체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 일조(一助)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되풀이해서 이야기 하지만, 이것 또한 {한단고기}의 출간 내력이 서지학적인 검토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단고기}를 사료뿐만 아니라 사학사적인 측면에서도 이용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한단고기}에 나타난 이른 바 '대조선주의'가 관념의 산물이었는지의 여부를 앞으로의 고고학적 성과에 물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 고대문화와 밀접히 관련된 중국 요녕성 객좌현(喀左縣)에서 5천년 전의 대형 제단(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 빗살무늬 토기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사실을 부기(附記)하면서 끝맺는다.
 

윤내현 교수는 단군조선의 역대 임금을 논하면서 {한단고기}에 나오는 47대 단군 임금을 소개하고 있는데 역시 서지학적 검토가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중도론적 견해는 {한단고기}가 사료적 진실성이 있다는 점에 심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서지학적 검토 없이 활용하는 데에는 반대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현 역사학계의 주류는 대체로 위서론이거나 유보적 입장이기 때문에 {한단고기}를 토대로 한 역사연구는 제도권 안에서는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 재야학계에서만 진행되고 있는데 과학적 검증 절차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죠.

대체로 중도론적 견해는 {한단고기}가 사료적 진실성이 있다는 점에 심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지학적 검토 없이 활용하는 데에는 반대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단고기}의 진실성 여부를 둘러싼 학계의 쟁점토론의 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한단고기}가 가필된 점은 있을지언정 위서는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졌습니다.
 


얼마 전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된 [한단고기]에서는 진서론을 앞에 소개하고 위서론으로 뒤집는 바람에 시청자들에게 {한단고기}가 위서라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만일 위서론을 먼저 소개하고 진서론으로 {한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입증했다면 결론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한단고기} 내용 중 몇몇 가필된 부분은 대일 항전과정을 치르던 복잡한 상황에서 누군가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또는 이유립 선생이 태전(太田)에 거주하면서 가필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위서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이유립 선생이 단학회의 창시자 이기 선생으로부터 여러 손을 거쳐 전수 받았음은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은 이유립 선생의 부인이 단단학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 역사 찾기를 평생 소원했던 이유립 옹은 생전에 많은 책을 썼으며, {한단고기}와 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한단고기 평주}(이유립의 {한단고기} 번역본)는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한단고기} 번역 출간하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이 {한단고기 평주}는 이유립 선생이 {한단고기}를 풀이해 놓은 것으로, 이것을 책으로 펴내기 직전에 이유립 선생은 운명하셨죠. 1979년에 펴낸 {한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는데 정오표는 책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으로 이 정오표의 글씨는 이유립 선생의 글씨가 분명합니다. 이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 원문을 직접 수정한 흔적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단고기}가 적어도 이전부터 존재했던 책이며 이유립 선생이 {한단고기}를 부분 가필한 점 역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건이 일어난 당대에 저술된 1차 사료가 아니라면 가필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한 문헌사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고대사서를 대표하는 {서경(書經)}, {죽서기년(竹書紀年)}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문헌들이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대량으로 가필이 가해졌음은 이미 청나라 고증가(考證家)에 의해 밝혀진 역사학의 상식이다. 그러나 가필이 좀 있다고 사료적 가치까지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물론 사료는 신빙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
단고기}에 대한 연구에 앞서 서지학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학계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한단고기}의 사료 채택을 무기한 유보시키는 구실로 오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발상은 이미 우리 현대사의 큰 흐름이 되어버린 상고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도외시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서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여 역사학계 스스로가 설자리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

 

 

가림토 문자에 대한 부언

오늘날 우리는 한글 자모 24자가 세종 때 창제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훈민정음의 '正音'에서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은 문자를 반포한 것이라기 보다는 음을 바로 잡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글 자모의 기원이 되는 가림토 문자는 이미 단군 3세 부루 때에 처음 만들어져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 '桓檀古記'나 '대쥬신제국사'등 에서 언급한 된 있다. 실제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7번이나 만주에 왕래하게 한 역사적 사실은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오랑캐 정도로 알고 있는 여진이나 거란 몽고족은 바로 가림토 문자를 사용하던 우리 민족이란 것이다. 중국이란 나라는 이들 우리민족이 지배했을 때 강성한 제국을 유지하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여러 나라로 분열되곤 하였다 한다.

이를 근거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잃은 중국이 분열될 것이라는 예견 또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가림토 문자가 특이한 것은 전세계 어느 나라 문자와도 다른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바로 문자가 대단히 반듯하다는 것이다. 갑골문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원시 한자의 모양도 구불구불 하였던 것이 단군 3세때 처음 만들어진 우리민족(쥬신족)의 가림토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편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쥬신족의 일부가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로 진출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아메리카 인디언의 기원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적 중에서 가림토 문자 'ㄷ' 'ㅁ' 'ㅐ'등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 뿐 아니라 사대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인도대륙의 한 고장에서는 지금 우리가 보아도 뜻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가림토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고 하여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더욱 실제적인 고증을 거치기를 기대한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고대문자 : 배달국(倍達國)과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문자(文字)>



1. 머리말

문자는 역사기록에 대한 도구이지만 우리나라 문자발달사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는 것 같다. 이러한 이유 중의 하나는 과거 당시의 문자 유물이 거의 없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문자에 대한 연구는 역사내용에 대한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훈민정음이란 좋은 문자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는 문자에 대한 연구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동안 연구 또는 발표된 문자에 관한 내용을 모아, 편집하였다. 이러한 자료가 우리나라 고대 문자에 관한 관심을 일깨우는 데 일조를 했으면 한다.

신시고각, 녹도문, 치우전목, 가림토 문자와 가림토문자의 발전형태로 추정되는 왜의 신대문자 등의 순서로 편집하였다.


2. 신시고각(神市古刻)

과거 역사에 대한 기록이 있기 위해서는 문자가 있어야 한다. 고구려의 『유기(留記)』라든지 백제의 『서기(書記)』같은 사서를 문자없이 어떻게 썼을까. 또 문자없이 율령(律令)을 어떻게 반포하였을까. 역서(曆書)는 또 어떻게 적었을까(주1) 고조선의 문화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당연히 문자를 만들어 썼을 것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이동면 낭하리 금산 바위에 고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에 관한 내용이다.





주1)

『단군세기』 13세 단군 흘달 50년 (BC1733년)에 기록된 “오성취루(五星聚婁) : 오성(수성, 금성, 화성, 금성, 토성)이 루 자리로 모이다.”란 천문 사실은 기록된 지 3726년만에 사실로 증명되었다. (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1933, 박창범, 라대일 참조, 다물지 100호 게재)

이런 천문 사실이 역사서에 채록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문자 또는 어떤 전달수단(내용을 모두 외우게 하는 방법으로)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3천7백여년전 (BC1733년) 기록이 사실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이 내용을 담고 있는 「단군세기」나 『환단고기』의 역사 상한(단군왕검은 4천3백년전, 환웅 배달국은 5천9백년전까지)부터 어떠한 문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가. 『환단고기』 해석


환단고기에는 “환웅천왕이 사냥 나왔다가 제(祭)를 삼신(三神)께 드리다.”로 해석되어 있다.(주2)

(주2) 『환단고기』, 임승국 역주, 정신세계사, 242쪽



나. 『조선사연구』 해석


①번 : 사냥개를 형상화한 것이다.

②번 :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②-1번 : 머리(모자)에 꽂은 두 개의 깃(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양식이다.)


②-2번 : 몸을 지탱하여 고삐를 잡은 것이 은밀히 요약됨을 볼 수 있다.
②-3변 : 뒷바퀴(車輪)
②-4번 : 분명치 않지만 소나 말이 수레를 끄는 형상. ②-3번과 ②-4번을 보면 뒤에는 수레바퀴가 있고 앞에는 수레를 끌고 가는 짐승을 표현하여 (움직이는 수레의 골격을) 모두 갖추었다.

③번 : 짐승이 화살을 맞은 형상이다.
③-1번 : (육지) 짐승
③-2번 : 화살촉 두 개가 짐승에 명중한 형상이다.

④-1번 : 두 마리의 새가 앞과 뒤에서 서로 연이어 날아가는 형상이다.
④-2번 : 화살촉. 대개 명중의 요체는 화살촉에 있으므로 화살촉을 그려 화살을 쏜 것을 보인 것이다.

⑤번 : 물고기류를 그린 것이다.
⑤-1번 : 물고기 지느러미
⑤-2번 : 꼬리를 비스듬히 그려 헤엄치는 것을 보임

⑥번 : 깃대위에 기수가 있고, 깃대에 두 개의 깃발을 묶는 것이 나와 있고 말뚝도 있어 그 깃대를 말뚝에 꽂았음을 표시한다.
⑥-1번 : 깃대
⑥-2번 : 旗手
⑥-3번 : 위 깃발(잠깐 말리어 자태가 좋다)


⑥-4번 : 아래 깃발 ( 쫙 펴져 날림)
⑥-5번 : 말뚝


이 모든 것을 종합해 그 배치된 순서에 의해 해석하면,

“ 사냥개를 뒤에 딸리우고 수레를 몰며, 옆으로 짐승을 쏘며 앞으로는 새를 쏘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건너서 기와 깃대를 꽂았으니 기간(旗竿)을 세우는 것은 요컨대 국경을 표시하던 것인데 물고기의 형상을 격지로 놓고 그 너머에 깃발을 세운 형상을 붙인 것을 보면 사냥하던 길에 한 물(경상남도 육지와 남해도 사이에 있는 바닷물)을 건너서 국경을 획정한 어떠한 제왕 대인의 기공명(紀功銘:공을 기록한 것)인 것 같은데 남해의 지형이 正히 육지에 가까운 섬이니 물고기상(像)을 중간에 놓음이 더욱 들어맞는 바이다.”

머리 위의 두 개의 획은 모자에 두 개의 새 깃털을 꼽는 우리나라 풍속과 이상히도 들어맞는다. (고구려 벽화, 백제, 신라 금관) 또한 깃발 끝이 둘,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용강고분 갑사수기도(龍岡古墳 甲士手旗圖)”를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각도 가로쓰기인 데 『속 박물지』에 “ 왜, 진여국, 혹 횡서 혹 좌서(倭, 辰餘國, 或 橫書 惑 左書)”라는 기록이 있다.주3)

주3) 담원 정인보 전집 4. 『조선사연구 하』, 연세대, 1983, 233 ~ 237쪽



다. 현지 안내판


“이 석각은 일명 서시과차(徐市過此:서기가 여기를 지나가다)라 불려지는 평평한 자연암에 새겨진 그림문자를 말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중국 진시황 때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시종인 서시가 동남동녀 500여명을 거느리고 이 곳 금산(錦山)을 찾아와서 한 동안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진시황 때는 이미 한문자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주4) 그 이전의 고문자가 아닐까 추측된다.
 
이 고문자는 동양 最古의 문자로서 금산 부소암의 가로 7m 세로 4m의 평평한 바위에 가로 1m 세로 50Cm 넓이로 새겨져 있다.“


주4)

진시황 때는 사용된 문자는 소전(한자에 가까움)이었으므로 서시가 소전이 아닌 “금산 부소암과 같은 그림문자”를 사용했을 리가 없으며, 안내판 자체도 이를 시인하면서도 유적의 유래를 추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각의 주인공이 “서시”가 아님을 알고서도 굳이 “서시의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닌가 한다.

환단고기에는 “진(秦) 때 서불(徐市)는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 바로 나패(유구국 = 오끼나와)에 이르러 다네시마(種島 = 대우국의 남포섬. 일본)를 거쳐 세포나이까이(일본 내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세(伊勢)는 옛날 서복(徐福)의 무덤이 있었다. 또는 단주(亶洲)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한다.” (임승국 역주, 『환단고기』, 267쪽)

(coo2.net 보충 주)
이주나 단주는 송나라 중국고지도를 보면 대만으로 표시하고 있다
왜는 7세기 이전 양자강 이남에서 활동하였다

3. 녹도문(鹿圖文)과 치우(蚩尤) 투전목(鬪佃目)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우리나라 고대 문자에 관한 간략한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신시에는 산(算)가지가 있고 치우에게는 투전목(鬪佃目)이 있으며 부여에는 서산(書算)이 있었다. 산가지(算目)과 투전목은 아래 그림과 같다. 단군세기 단군 가륵(嘉勒) 2년(BC2181년)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를 지었는 데 이를 가림다(加臨多)라 이르며, 이는 아래 그림과 같다.”

이태백전서 옥진총담에 이르기를 ‘대진국(大震國)에서 당나라에 글을 보낸 것이 있는 데 온 조정에 그것을 해독하는 사람이 없었는 데 이태백이 능히 해독하여 답주(答奏)하였다’ 고 했다.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헌강왕 12년 봄에 北鎭에서 아뢰되 대진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서 나뭇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갔는 데 마침내 그걸 가져다 바쳤다.

목서(木書)로 열다섯 자를 써 놓았으니 그 뜻은 ’보로국이 흑수국 사람과 더불어 신라국을 향하여 모두 사이 좋게 지낸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또 고려 광종 때에 장유(張儒)는 접반사로 이름이 났다.

처음에 난리를 피하여 오월(吳越)에 이르렀더니 월나라에 떠벌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문고 밑바닥에 우리나라의 한송정곡(寒松亭曲)을 물에 띄워 물결에 거슬러 보냈는 데 그들은 그 글을 해득하지 못하였다. 마침 장유를 만나 그 글의 뜻을 공손히 물으니 그가 즉석에서 한시로 풀이하여 말하였다. ‘한송정 달 밝은 밤에 경포호(鏡浦湖)의 물결이 잔잔한 가을, 슬피 울며 오가는 모랫벌의 저 갈매기 소식을 전해오네’ 아마도 거문고 밑바닥에 새겨진 글은 옛 가림토 종류였을 것이다.


원동중 삼성기 주에 이르기를 ‘신한?부여?왜국이 혹 가로쓰기를 하고 혹 새끼 매듭을 쓰고 혹 나무토막을 쓰기도 했는 데 오직 고구려만이 영법(潁法)을 모사(模寫)한 것을 보면 생각건대 틀림없이 환단 상세(上世)에 문자의 모각(摸刻)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최치원이 일찍이 신지의 옛 비석에 새긴 천부경을 구하여 다시 서첩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였다 하니 이것이 곧 낭하리 암각(신시 고각)과 더불어 그 실증의 자취라 하겠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 신시에는 녹서(鹿書)가 주5) 있었고 자부에게는 우서(雨書)가 있었으며 치우에게는 화서(花書)와 투전(鬪佃) 문속(文束)이 있었다 하니 이 모두가 그 남은 흔적이요 복희에게는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게는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 글자들의 백산(白山)?흑수(黑水)?청구(靑邱)?구려(九黎)의 지역에서 두루 쓰이다가 부여 사람 왕문이 비로소 전자(篆字)를 번거롭게 여겨 차츰 그 획을 덜어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적었다.

秦나라 때에 정막(程邈)이 사신을 받들어 조선에 왔다가 한수에서 왕문의 예서법을 얻어서 그 획을 따랐으나 조금 변형(變形)한 것이 지금의 팔분체(八分體)이다. 晉나라 때에 왕차중(王次仲)이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이제 그 글자의 근원을 찾아보면 모두 신시의 남긴 법이요 지금의 한자 또한 그 지류를 계승했음이 분명하다. 주6)

(주5)

신시의 전자 또는 녹도문으로 추정되는 첫 번째 유물은 1942년 발간된 『영변지』에 실린 16자이며 두 번째는 『대배달민족사』에 수록된 평양 법수교의 古碑文이며, 세 번째는 해강 김규진의 『서법진결』에 수록된 녹도문자 11자이며, 네 번째는 창힐의 고향인 중국 백수현 사관촌에 있는 「창성조적서비」에 조각된 녹도문자 28자이며, 다섯 번째는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녹도문자 2자 등이다.

(다물지 편집자 주 :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창힐의 비석에 새겨진 녹도문자이다. 창힐은 황제 헌원의 史官이었으며, 중국에서 문자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다. 물론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창힐이 공공?헌원?대요와 함께 신시 배달국의 자부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다고 되어 있다. 이런 창힐의 비석에 28자의 녹도문자로 추정되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신시 녹도문자의 존재를 방증하는 자료로 추정되는 것이다.)

(주6)
임승국 역주, 『환단고기』「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244 ~ 246쪽

4. 가림토 발전형태


가.  단군세기의 가림토문자 실체 확인


베일에 싸여왔던 고대문자인 가림토문자가 신비를 벗고 있다. 강단학자에게는 <실체없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백안시를 당해왔던 가림토문자, 반면 재야사학자들에게는 고조선 고유의 표음문자로 숭앙돼 왔던 문제의 고대문자 원형(原形)이 초대형과 대형의 금석문 형태로 2종이 동시에 공개(본보 1994년 12월 26일자, 일부지방 27일자 보도)된 것이다.

이 탁본은 우선 재야사학자 김인배-인문 형제가 지난 19일 공개했던 일본 마토노 신사 석비 4基의 고문자의 성격규명 작업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인 문제는 조작이라는 혐의 아래 아예 학문적 분석의 대상에서 제쳐져 있던 가림토 문자에 대한 실체 확인과 연구에 불을 댕길 것이 기대된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성학계와 재야사학계간에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고조선 등 상고사 연구에도 진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가림토 문자는 현재의 한글 자모와 형태가 비슷하고, 표음문자라는 밀접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세종이 독창적으로 창제했다고 알려져 온 훈민정음과 가림토와의 관계 등도 규명이 요구되고 있다.
 
우선 탁본의 솜씨와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만주탁본에 음각된 글자수 7백여개는 종래 수십자이거나 많아야 2백여 글자 안팎에 불과하던 금석문 발견에 비춰 국내 초유의 정보량 수록에 해당한다. 더욱이 이번 탁본은 모서리가 상하로 각각 잘려 있어 본래의 비석은 현 탁본보다 훨씬 컸음이 확실하다. 이 정도 비문이라면, 규모면에서만 봐도 상당한 국가권력이 동원된 기록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주탁본을 가림토 문자의 원형으로 보는 중요한 이유는 최근 들어 사서로서 가치를 부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토 38글자와 글자꼴이 너무도 흡사한데다가 자모의 상당부분이 겹친다는 요소 때문이다.

가림토 문자에 대한 근세적인 언급은 고려시대 이암(李?)의 저서 <단군세기>에 나온다.  제3세 단군 가름이 을보륵에게 정음 38자(상기 그림 참조)를 짓게 했다는 얘기와 함께 구체적인 자모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번 만주 탁본중에는 가림토 문자와 상당부분 자모가 일치한다. 또 가림토 자모와 형태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가림토 문자 음가(音價) 확인에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주는 흥미로운 자모도 있다. 만주 탁본을 본 김씨 형제는 탁본이 등장하는 U는 가림토 39글자의 U와 같은 것이자, 현재 한글의 ㅂ 과 같은 음가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일본의 마토노 신사의 비석에서 보이는 U ㅏ 의 음가를 현재 한글의 [바]로 읽을 경우 문맥이 바로 통한다는 점이다.

만주탁본의 성격 규명에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은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글바위골(경북 경산군 와촌면 강학동) 탁본이다. 기호로서 추상도가 높은 만주 탁본과 비교해 거의 상형문자에 가까운 점이 특징인 이 금석문은 자연상태의 균열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인공적 작업의 결과로 판명됐다.

그러나, 가까운 중세나 현대의 각인 솜씨는 아닌 것으로 보이며, 일본 신사비석은 물론 만주 탁본보다도 시기가 외려 앞서는 관계로 보아 가림토 문자가 정착되기 훨씬 이전 형성기의 금석문으로 보인다.

탁본을 공개한 정도화(鄭道和) 교수와 경상대 여증동(呂增東) 교수(61세, 국문학과)는 “만주와 글바위골의 탁본은 가림토 문자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말했으나 마토노 신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즉, 지난 19일 공개된 마토노 신사의 비문은 李寧熙씨의 견해처럼 神代문자의 한 종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는 얘기다. 정?여교수의 견해는 만주탁본과 일본 마토노 신사의 문자는 연계관계가 없는 각각 독립적인 기호 내지 문자라는 것이다.

반면 김인배, 인문 형제는 새로 공개된 2종의 탁본은 가림토 문자는 물론 일본 마토노 신사의 비문과도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주장, 정?여교수와는 상반된 새로운 시각을 보였다. 이런 가설을 세울 경우 미궁에 빠져 있는 가림토 문자의 음가추적과 해독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 김씨 형제의 적극적 견해다.

이에 따르면 글바위골 탁본은 가림토 문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라면, 만주탁본은 단군세기 38자 정착 직전의 자모꼴을 보여준다. 또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진공속에서 이뤄진 창조]라기 보다는 가림토 문자의 새로운 체계화 작업 결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자모를 늘어놓는 병렬형 글자인 가림토 문자를 자모를 조합시키는 형태로 바꿔 훈민정음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다음 기사 참조)

그렇다면 역시 조합형인 일본 마토노 신사의 비석의 문자란 가림토의 일본적 변형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훈민정음이 가림토의 15세기 한반도의 자체적인 변형이자 체계화라면 마토노 신사의 문자 역사 뿌리를 가림토에 두고 있는 또 다른 일본의 변형이라는 얘기다.

즉 신대문자란 것도 말 그대로 야요이 시대 등 일본의 신화시대 문자란 뜻인 데, 별도의 체계를 갖는 문자라기보다는 가림토 문자의 일본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경우 고조선의 강역이나 문화적 영향력이 만주를 비롯해 한반도와 대마도를 포함한 일본열도에서 광범위하게 퍼졌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김씨 형제는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가림토 문자로 된 금석문이 고형이든, 아니면 보다 발전된 형태이든 간에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일본지역에서 나오고 있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정?여교수도 동의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가림토 문자 금석문은 앞으로 중국지역과 티베트 지역 등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해온 고조선 문화의 강역에서 얼마든지 추가로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결국 이번 탁본의 동시 발견은 가림토 문자의 실체가 분명하다는 증거이자 아직은 미해독인 가림토 문자의 해독 가능성에 한발짝 다가 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가람토문자를 한글의 고문자이자 고조선의 고유문자로 보는 것을 다분히 <심정적인 好古취미>이자 국수주의 발로에 따른 비약이라는 기성학계의 외면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외면 태도는 아무리 가림토 문자이고 고조선이라 해도 보편성의 기반 위에서 거론돼야 한다는 시각 때문이다.

즉, 현재 거론되고 있는 가림토 문자의 경우 추정되는 제정 연대가 최고 기원전 200 내지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나일강 하구에서 18세기말 나폴레옹군에 의해 발견돼 훗날 해독했던 로제타스톤 위의 고대 이집트 문자(디모딕)만 하더라도 기원전 196년경의 문자로 판명이 됐다. 그렇다면 가림토 문자의 실체를 기원전 3000년으로까지 소급하는 것은 인류사의 발전단계와는 커다란 격차를 보이는 독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결국 이런 논란은 만주탁본의 내용이 해독될 경우 폭발적인 반향과 함께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주탁본의 공개에 따라 훈민정음과 가림토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이제 첫발을 딛게 됐다. 지금까지 기성 국문학계의 훈민정음에 대한 접근은 한글의 독창성을 [방어]해야 한다는 다분히 국민정서 차원이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만주 탁본과 글바위골 탁본의 공개는 훈민정음 제정의 모태이자 기반으로서의 가림토문자에 대한 주목의 계기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 경상대 국문학자 여증동교수는 중요한 전거를 들고 있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에 발문을 쓸 때 “ (훈민정음)의 글자꼴은 옛 글자를 모방했다 : 자방고전(字倣古篆)”고 뚜렸한 명문을 남겼다는 점이다.

이 때 [고전(古篆)]이라는 용어를 두고 지금까지 한글학자들은 몽고어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교수는 [전(篆)]이라는 말의 원뜻은 [꼬불꼬불한 글자]인 데 당시 정황으로 보아 일반 민중에게 알려져 있던 문자이고 이번 만주탁본에서 모습을 드러내 가림토를 참조한 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또 성삼문 등의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기초조사 단계에서 당대의 일급 언어학자인 몽고의 황찬을 여러 차례 찾아갔던 일화도 당시 이 지역에 남아있던 가림토 문자를 참조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여교수는 말했다.

이런 가설이 맞을 경우 훈민정음은 단순한 창작이라기 보다는 가림토의 후광(後光)아래 이뤄진 <가장 오래된 글자>중의 하나라는 새로운 특성을 더하게 된다.

연세대 문효근(文孝根)교수는 지난 3월 훈민정음의 창제 당시 중국 후한 때의 한자 해설서이자 언어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텍스트를 참조했다는 설을 발표한 바 있다.

문교수의 주장은 훈민정음이 15세기 당시까지 이뤄진 언어학의 주요성과들을 토대로 창제됐음을 말해주는 근거로 더욱 주목된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의 지평에 가림토 문자가 포함됐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다음은 이번 공개된 경산 글바위꼴 탁본과 만주탁본 및 일본 신대문자 비석의 탁본이다.

<문화일보>. 1994년 12월 28일 조우석 기자










(그림설명)
고(故) 이상백(李相佰) 前 서울대 교수가 1930년 만주지역서 작업한
길이 2미터의 탁본전체 모습
무려 700여자의 정보량을 담고 있으며 탁본상태가 극히 양호하다



나.  《수진전》의 일본 고대문자와 가림토 한글


근년에 《수진전》 원전을 발굴하고 연구에 전념하는 마쓰모토 젠노스케의 저서 《수진전》을 읽었다. 지금까지 다른 학자들의 번역 발표한 《수진전》은 한자본에서 옮긴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수진전》원전의 문자가 특별하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는 데 1992년 어느 날 버릇대로 자다 깨어 머리가 맑아진 시간 문득 《수진전》문자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다른 모든 일본 고대 문자가 한글의 모방 내지 영향인 데, 어찌하여《수진전》문자만이 유독 그렇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그 문자의 진상을 깨우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한 결과, 그 문자의 진상을 단시일에 알아냈다. 그것은 한글의 내용 그대로이며 원시 한글인 가림토에서 간 것이다. 나는 언어학자도 고대 문자 연구가도 아니지만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이나 아시라아, 수메르 등의 고대법을 비교?연구하여 얻은 문자 상식이 있었다. (중략)...
 

일본에는 한자에서 차용한 글자인 가다가나와 히라가나 외에 신자(神字)니 의자(疑字, 의심스러운 글자)니 하는 고대 문자가 31종이나 있다. 일본의 고대 문자에 대한 마쓰모토의 주장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일본말에는 순수한 화어(和語)와 한자에 맞춘 것이 있는 데 한자에 맞춘 것 중에는 무리하게 맞춘 것도 있다.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의 일본 상고 문자연구소 《신자일본문(神字日本文)》에 《수진전》문자를 포함해 31종의 신대(神代)문자가 실려 있다.
 
일본학자들에 의하면 소위 일본 신자(神字) 31종 가운데 《다케우치 문서》와 《상기》문자는 같은 도요쿠니(豊國) 문자를 쓰고 있는 데 이는 저급한 것이라고 한다. 신자의 대다수는 조선문자를 약간 고친 것이라고 해서 일찍부터 부정되었다가 최근 고대사 연구 물결을 타고 재등장하는 듯하다.

 
마쓰모토는 《수진전》문자가 《일본서기》《고사기》 이전의 가장 완전한 일본 고유 문자라고 주장한다. 《수진전》문자는 한눈으로도 그 외양이 한글과 아주 다르다. 과연 특이한 모양이고 또 가장 고급의 일본 고대 글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내가 알아본 바 《수진전》문자의 모양은 한글과 다르다 해도 그 내용은 한글 그대로인 것이다. 시가(詩歌)로 엮어진 《수진전》의 문자를 ‘아 이 우 에 오’로 추려놓고 보면 일본말에 소용될 것만을 골라 ㅏ ㅣ ㅜ ㅔ ㅗ 의 모음과 ㅇ ㄱ ㅅ ㄷ ㄴ ㄹ ...... 의 자음을 맞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글자의 모양만 보면 한글과 아주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실속은 자음과 모음으로 된 한글 그대로인 것이다. 모음 안에 자음을 집어넣으면 글자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일본의 고대 문자 중 모양이 한글과 가장 유사한 것 한 종류와 가장 특이한 《수진전》문자 중 내가 일본 가나의 음순으로 추려낸 것을 소개한다. 나는 밤잠도 못 자고 《수진전》문자의 진상을 연구하느라 애썼지만, 독자들은 내가 제시한 <1> <2>을 보면 당장에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독자가 알기 쉽도록 한글의 자음(초성), 모음(중성), 받침(종성), 합자(모듬 글자)와 비교한 《수진전》문자를 <3>으로 들겠다. 일본에서 필요한 것만을 한글에서 뽑아서 그 글자의 모양을 아주 다르게 만든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한글에서 간 일본말 이두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일본 임금이 ‘哀號’하면서 곡했다”는 고대 기록에서 애호는 ‘아이고(アイコ)’로 발음한다. 이 세상에서 ‘아이고’하면서 곡하는 종족은 한국인뿐이다. ‘이렇게 해놓고 어찌 살라고’란 뜻의 ‘타마호(우치사오, ウチサオ)’, ‘사등농(사라고, サラコ)’도 있다.

『인간단군을 찾아서』, 최태영, 학고재, 2000, 278 ~ 282쪽






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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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바닷가 작은 마을에 마음씨 곱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꺼비 한 마리가 이 아가씨를 찾아와 결혼해달라고 졸랐습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반대했지만 이 아가씨, 두꺼비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결혼한 바로 그 날 밤에 신랑은 두꺼비 허물을 벗고
얼굴은 해사하고 몸은 커서 씩씩한 사나이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아가씨는 이 두꺼비 신랑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아가씨를 두꺼비에게 빼앗긴 동네 총각들이 두꺼비 신랑을 자꾸 못 살게
구는 겁니다. 동네 총각들은 두꺼비 신랑을 혼내주려고 쉬운 물고기잡이보다는 힘든 사냥내기를 해서 두꺼비 신랑의 콧대를 꺾으려 했습니다. 얼굴도
하얗고 말도 없는 녀석이 덩치만 컸지 무슨 사냥을 하겠냐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가까운 야산에서 사냥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꺼비 신랑, 말에 오르자마자 활을 날려서 여우·노루·오소리를 닥치는 대로 잡아냅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저렇게 날렵한 사냥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날 이후 두꺼비 신랑은 이 마을의 스타(star)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어촌마을이면 흔히 나타나는 '두꺼비 신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미술 해부학의 전문가인 조용진 교수는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석합니다. 두꺼비는 북방계 사람들이 남방으로 오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피부 질환을 상징한다는 것이죠. 피부병이 나으니 흰 얼굴이 나타나고 체격이 크니 씩씩한 남자로 보일 수밖에요.  

  사냥 일도 마찬가지죠. 남방계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는 일이 쉬운데, 그래서 남방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사냥은 매우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두꺼비 신랑에게는 그것이 북방에 살 때의 본업이었죠. 그러니 쉬울 수밖에요.  

  결국 이 같은 경로를 거쳐서 북방계 두꺼비 신랑들이 힘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용진 교수는 조선시대까지도 우리나라의 임금들의 얼굴은
북방계의 형상을 하고 있고 북방계의 관상을 좋은 관상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마가 높으면(북방계) 관운(官運)이 있다거나 이마가
좁으면(남방계) 부모덕 보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피부가 검다든가 쌍꺼풀이 있다든가 눈이 크면(남방계) 천한 관상이라고 하는 식이죠.

  

  (1) 신라,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우리의 뿌리와 관련하여 특이한 나라 중의 하나가 신라입니다. 부여 - 고구려 - 백제 - 일본 등은 여러 가지의 기록들이나 사료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신라는 좀 다릅니다. 신라(新羅)의 기원이 어딘지를 알기도 어렵고 이들의 고분들 속에서는 기원이 불투명한 유목민
유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신라의 유물은 로마나 유럽에서 출몰한 훈족의 유물과 매우 유사하여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라에 결국은 병합되었지만 한반도 남단의 가야고분에서는 순장된 사람의 흔적도 있고 말들도 묻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유목민들의 매장풍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경상도 출토 유물 중에는 기마부족이 사용하던 마구가 고구려벽화의 실물과 유사한 경우가
있었죠.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동안 많은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도학 교수는 4세기 경 고구려군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벌했을 때 울주·동래 등에서 6세기 중반까지, 일부 지역에서는 장기간 상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이도학, 「고구려의 낙동강유역진출과 신라·가야경영」 『국학연구』 1988). 그리고 신라의 김씨 왕실이 시베리아의
기마민족에서 유래하였다거나 선비의 한 부족인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모용황의 군대 중의 일부가 남하하여 신라를 지배하고 가야 지역까지
점령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비슷한 얘기지만 금관가야 건국도 흉노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일단 신라에 대해서 좀 더 소상하게 알아봅시다.

  

  『삼국사기』에 신라를 구성한 6부족은 고조선(古朝鮮)의 유민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始祖). 이 부족 가운데 고허촌장(高墟村長
: 후일 최씨)이 숲에서 말울음 소리를 듣고 들어가 보니 말은 간 데 없고 큰 알이 있어 그 알을 깨어보니 어린 아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더니 훌륭하게 성장하여 신라의 시조(박혁거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기본적으로 신라는 외래 유이민이 건설한 나라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요동지역과 한반도 북부에서 이주한 세력이 신라를
구성했을 것이라는 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력은 부여계의 이동만큼 조직적이지 못하고 고조선이 쇠망한 이후 그 유이민들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일종의 부족공동체 사회로 판단됩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고조선의 멸망이 B. C. 108년 정도이고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건국이 B. C. 57년경(漢 宣帝 五鳳元年)으로 돼
있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는 합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신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부여계나 고구려계의 국가보다는 고대국가 형성이 다소
느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고조선의 직계 왕가를 주축으로 그 주류세력이 남하했다기보다는 여러 호족들이 전란을 피해 남하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조 박혁거세라는 분도 신화(말과 알, 버드나무[楊山])로 판단해 보면 역시 외부(북방)에서 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잠시 박혁거세(朴赫居世)라는 말을 한번 봅시다. 박(朴)은 '밝다[明, 또는 東]'는 말을 한자의 음을 빌려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혁(赫)이라는 말도 역시 '밝다'는 말인데 이 말은 한자의 뜻을 빌려서 쓴 말입니다. 이병도 박사는 거세(居世)는 거서간(居西干)의 거서(居西)와
같으며 이 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나는 거슬감(居瑟邯 : 여기서 邯도 干의 뜻)의 거슬(居瑟)과도 같다고 합니다. 이전에 우리가 본
건길지(鞬吉支)의 길지(吉支)와 일본에서 사용하는 고니키시(コニキシ : 鞬吉支)의 키시(キシ)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합니다[이병도, 譯註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 2001) 1쪽]. 따라서 박혁거세라는 말은 동명성왕(東明聖王)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박[東 : 밝]혁[明]거세[聖王]이라는
말이지요.  

  부지영 선생(『일본, 또 하나의 한국』저자)은 박혁거세를 '비치세'로 보고 있습니다. 즉 한국이나 일본이나 당시의 한자말을 읽는 방식은
이두식으로 읽었는데 이 점은 일본편에서 이미 일부를 보셨을 것으로 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박혁거세 역시 이두식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박(밝다) + 혁(빛) + 거세(居世)'에서 거세(居世)에서 거(居)가 일본 말로는 '이루(いる)'이므로 居는 '이'이고 世는 그대로 우리말로
세라는 것이죠. 그래서 '赫(빛) + 居(이) + 世(세)'로 '비치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매우 타당한 분석입니다.

  

  제가 보기엔 '비치세'의 의미를 확장하여 '(세상을) 밝히세'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차이가 없는 말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박혁거세는
세상을 밝히는 임금[東明聖王]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따라서 부여계의 군주 이름과도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라 역시 쥬신의
성격을 가진 나라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고대의 한문을 읽는 방식은 일본어의 발음과 대조하여 추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참고로 19세기 이전까지 박혁거세왕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일본에는 2천 7백여 곳이 있었고 아직도 2천여 곳이 있다고 합니다[부지영, 『일본,
또 하나의 한국』(한송 : 1998) 75쪽].  

  신라 초기의 국호는 서나벌(徐那伐)인데 이병도 박사는 서(徐)는 '솟다[高, 또는 上]', 나(那)는 '나라(國)', 벌(伐)은
'성(城)', 또는 도시(capital)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결국 서나벌은 '높은 나라의 도읍', 또는 '해가 솟는 나라의 도읍(the
capital of rising sun)'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서 오늘의 서울(Seoul)이 나타난 것이지요. 참고로 나라[國]의 고어로
사용된 한자어는 나(那)·라(羅)·야(耶)·로(盧) 등이고 도읍지를 의미하는 한자어는 불(弗)·화(火)·비리(卑離)·부리(夫里) 등입니다[이병도
,譯註 『삼국사기』상 1쪽]. 그러니까 부여와 고구려는 불[火 : 해가 타오르는 모습을 상징]을 신라는 태양[日 :히···]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신라는 그 세력이 미약하여 여러 소국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이익 선생이 쓴 글 가운데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속국이었다(『성호선생전집』46)."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이 때의 진한과 변한은 신라와 일치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당시에
신라는 남부여(백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대단히 허약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 남부는 마한 왕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진(秦)나라 말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마한왕은 그들이 진한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기록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246) 초기에는 고구려가 잘 막아내었으나
수도가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를 받아 고구려의 지도부가 남으로 피난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당시 옥저로 달아났던 일부 고구려인이 남하하여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신라 김씨들의 특유한 묘제(墓制)로 이해되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등장하는 것도 이 사건 및
미추왕(262~284)의 등장과 모두 시기가 비슷하여 어떤 큰 변화가 신라사회에 나타났다는 것이지요[정경희, 『한국 고대사회 문화연구』(일지사
: 1990)]. [그림 ①] 제 2 차 요동전쟁(고구려-위나라 전쟁)

    



시기는 석씨에서 김씨로 왕위가 바뀌는 시기인데 신라의 외교노선이 친백제(親百濟 : 친부여)에서 친고구려(親高句麗)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영락대제(광개토대왕)의 비문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영락대제 비문 가운데 신라와 관련된 부분만을
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 영락 9년(399) …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여 태왕이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이에 대해 대비를 시켰다.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수많은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구려) 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고 이에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더라도 신라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영락대제 시기에는 사실상의 속국, 또는 고구려의 보호국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신라의 왕계가 관구검의 침입으로 남하한 고구려의 장수들이나 호족 세력일까 하는 것은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이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2) 금관의 나라, 신라  

  초기 신라에 대한 기록은 많이 부족한 편이라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는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 기원전 57년경에 건국한 다음 기원후 1~2세기 경 지금의 경북지방과 경남일대를 무력으로 정복함으로써
영토를 넓혀갔다고 합니다. 이 같은 기록들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중국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는 신라가 진한(辰韓)을 구성한 12국 가운데 작은 나라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세기 초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대외적인 성장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고구려의 통제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 후 6세기에 들면서
우경(牛耕)이 실시되어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불교가 공인(527)됨으로써 새로운 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입니다. 이 책에서 "신라는 눈부신 황금의 나라(『日本書紀』卷八 「仲哀紀」)"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러나 『삼국지』의 기록에는 "(삼한의 생활상을 보면) 구슬을 귀하게 여기고 금·은과 비단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三國志』魏書 東夷)."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책 『삼국지』에서 고구려는 공식적인 복장에서는 금·은으로 장식하고 부여의 경우에도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초기의 신라와 중기 이후의 신라에는 상당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고구려계가 신라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이라고 봐야할까요? 앞서 본
영락대제의 비문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정치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분명한데 금(gold) 문화에 관한 한, 신라는 고구려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도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지는 않고
정치적으로만 영향을 받은 듯 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라가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크게 의존하던 시기 이전에 이미 세련된 '황금(黃金)의
문화'가 있었다는 말인데요.  

  그런데 이 금(金) 문화라는 것은 바로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유목민들의 대표적인 브랜드(상표)가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보면 금관은 마립간 시대(417~514), 즉 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에 집중적으로 출토된다고 합니다[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 2004) 88쪽]. 그러니까 5세기를 전후로 해서 신라의 지배층의 변화가 있었고 그 지배층이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유난스러울 만큼 금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금관(金冠)은 모두 합하여 봐도 10여 점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금관이 무려 8점이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출토된
금관총의 금관을 비롯, 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등 출토지가 분명한 것과 나머지 3개는 경주 교동에서 도굴되어 압수된 교동금관, 호암
미술관 소장 가야금관, 도쿄의 오쿠라 컬렉션(도굴품) 등이 있습니다[조유전·이기환, 앞의 책, 88쪽].  

  원래 금으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은 고대 유목민족 사이에 크게 유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흉노족이나 선비족, 거란족의 무덤에서 황금 유물, 또는
머리장식이나 금관 등이 자주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신라나 가야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금관은 알타이 문화권인
만주·몽골·알타이·카자흐스탄 등의 지역에서 금으로 장식한 모자가 많이 발견되지만 인디아·태국·인도네시아·라오스·베트남 등과 같은 동남아시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김병모,『금관의 비밀』(푸른 역사 : 1998)].

    아시다시피 신라의 금관(金冠)은 나무와 사슴의 뿔 모양처럼 생겼는데 흑해 북쪽 해안 지방인 사르마트(Sarmat)에서 발견된 금관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사르마트 금관은 그리스풍의 옷을 입은 여인이 있고 가운데 가장 큰 나무를 중심으로 생명수를 표시하는 나무와 사슴 등이 만들어져 있고
신라의 금관처럼 수많은 나뭇잎이 매달려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라 금관을 가장 직설적으로 묘사한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또 신라 금관과 유사한 다른 것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Tillya Tepe)에서 발견된 금관을 들 수 있겠습니다. 대체로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로 나무 장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금테두리를 금꽃(金花) 스무 송이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높이는 13cm 정도로 작은 것이라 여성용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내몽골의 아로시등(阿魯柴登) 유적에서 출토된 금관은 독수리가 날개를 편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금관은 신라의 금관과는 다른 형태이지만
독수리를 숭상하는 일면을 볼 수 있으므로 전통적인 쥬신의 토템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신라 금관 가운데서도 새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뒤에 설명). 


 




  그리고 고구려와 기원이 동일한 탁발선비족(타브가치 : 북위 건설)의 금관 장식은 신라의 금관과 이미지가 대단히 유사합니다. 타브가치는
몽골쥬신 계열로 그들의 유적지인 서하자향(西河子鄕)에서 출토된 금관 장식은 소머리, 또는 사슴의 머리 위에 나뭇가지의 형상을 한 것입니다. 이
장식은 신라 금관과 같이 샤먼적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고구려의 경우 평양의 청암리에서 출토된 금동관(金銅冠)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속에 인동초가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한상 교수(동양대)에 따르면 신라 금관의 기원이 정확히 어딘지 알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신라와 가까운 고구려만 해도 금동관에 신라 금관의 특징인 곡옥이나 세움 장식이 없죠. 다만 선비족들의 금제 관식이 금이라는 재질과 나뭇가지를
머리에 장식한다는 측면에서 그 유사점을 찾아서 최병현 교수(숭실대)는 신라의 마립간 시대에 기마민족들에 의한 왕족 교체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신라시대의 김씨 왕족들이 등장하던 4세기 중반에서 6세기까지의 왕호는 마립간(麻立干)인데 이 말은 마루(宗) + 칸(王)의 의미로
추정되며 여러 부족 가운데 중심이 되는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신라의 금관은 이러한 금관들의 영향을 모두 받은 듯하면서도 각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시킨 듯합니다.  

  신라 금관은 스키타이 문화에도 나타나는 녹각수지형(鹿角樹枝形 : 사슴뿔 모양)과는 달리 사슴의 뿔과 나무를 동시에 형상화한 느낌이 있습니다.
요즘 고고학자들은 신라 금관의 형식을 직각수지형(直角樹枝形 : 나무 가지 모양)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단순히 나무만을
형상화했다기 보다는 순록의 뿔도 함께 형상화하여 우두머리[長]를 동시에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금관은 수목숭배(樹木崇拜)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타브가치의 금관 장식[서하자향(西河子鄕) 출토]의 경우를 봐도 사슴의 뿔과 나무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유물에서 사슴의 뿔 가운데 나무가 있죠? 그런데 신라의 금관도 같은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신라 금관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윗부분은 나무와 사슴의 뿔을 추상화 시켰고 금관을 지탱하는 관(冠)은 사르마트와 틸리아테페의 형태와
유사하고 금관을 고정하는 것은 고구려의 금관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선비족들의 보요관도 추상화되어 나무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베리아의
은제관(러시아 알렉산드로플 출토)과 수목형 금관(러시아 돈강의 노보체르카스트 출토)과도 유사한 특징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금관에 붙어있는 둥근
잎새 모양의 구슬을 꿴 장식들[영락(瓔珞)]도 동아시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의 흔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서봉총(瑞鳳塚)은 조생부인(鳥生夫人)의 무덤으로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된 금관이 출토되었고 천마총과 금관총, 황남총의 금관
장식도 새의 날개 모양이 있습니다. 새는 쥬신의 대표적인 표상이기도 합니다. 이 조생부인은 신라 왕통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조생부인은
지증왕의 어머님으로 눌지 마립간의 따님이자 자비마립간의 동생이며, 소지왕의 고모님으로 전문가들에 따르면 성골(聖骨) 중의 성골(聖骨)이라고
합니다(혹시 샤먼은 아니었을까요?).  

  신라 금관은 하나같이 많은 곡옥(曲玉)들이 있는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것은 태아(胎兒)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명과 다산(多産)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이 곡옥은 알타이의 파지리크 고분에서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결국 신라 금관들이 만들어진 의도와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신라
금관이 출토되고 있는 적석목곽분과 함께 신라가 쥬신의 선주민(흉노)들의 후예들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금관은 중앙아시아나 알타이 몽골 만주 지역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모두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
⑨]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신라 금관의 모습은 가야의 금관과도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가야와 신라는 같은 계열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야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전기가야 토기문화와 신라의 4세기
이전 토기문화가 대체로 일치하며, 철기문화의 특징도 두 지역이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경상 남·북도지역의 진한과 변한에
문화의 공통적인 기반이 존재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쥬신족들은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나무와 새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쥬신의 문양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나무와 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얘기했지만 좀 다른 각도에서 간략히 짚어보고 넘어갑시다.  

  첫째, 나무 이야기입니다. 쥬신의 나무와 관련하여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는 학자가 있었죠? 바로 존 코벨 선생입니다.  

  존 코벨 선생은 북방 유목민들은 순록 사슴과 우주 수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즉 신화에 따르면, 순록의 황금 뿔 때문에
해[太陽]가 빛나고 순록사슴 그 자체가 햇빛의 운행과정을 나타낸다는 말이죠. 그리고 금관에 있는 나무는 영험한 힘을 가진 나무로 하늘[天]을
향해 뻗어 오른 나무를 말하는데 존 코벨 선생은 이들 나무가 북방지역에 많은 흰 자작나무라고 말합니다[존 카터 코벨,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학고재 : 1999), 150~155쪽.].  

  그런데 경주나 가야 지역은 흰 자작나무가 자랄만한 곳은 아니죠. 그런데 그 금관에는 이 흰 자작나무의 장식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로
그것이 이들이 북방에 살았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자작나무는 타이가 지대나 그 주변지역에서 신목으로 숭배되는 나무라고
합니다(소나무나 상수리나무는 흑룡강 하류 지역과 한반도, 버드나무는 초원지대나 초원과 삼림이 혼재된 지역에서 주로 숭배된다고 합니다).  

  존 코벨 선생은 신라의 문화와 시베리아의 문화는 비슷한 점이 많으며, 금관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금관은 샤머니즘의 흔적, 즉
무속 예술품이라는 것입니다. 금관에서 나는 경이로운 소리가 악을 물리치는 힘의 상징이며 금관을 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옥과 금판으로 된 수백
개의 장식이 미세한 움직임과 반짝이는 빛을 냅니다.  

  둘째, 새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새가 등장합니다. 유네스코 국제 박물관 협의회(ICOM)의
서울 총회 기념로고(2004)는 솟대였지요. 이것은 바로 일본의 '도리'와 같은 형태입니다. 우리 눈에 가장 익숙한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삼족오(三足烏)]일 것입니다.


  

  김병모 교수는 카자흐족의 민속신앙에 위대한 샤먼의 탄생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기를 낳고 싶은 여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다. 그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되면 새들이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그러면 그 여인이 잉태한다. 엑스터시 과정이다. 그런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김병모, 「고고학
여행」)."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의 알마타 동쪽 이시크(Issyk) 고분(B. C. 3세기경)에서 발견된 여인은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다고 합니다.『삼국지』에는 "변진(弁辰)에서 대가(大家)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三國志』「魏書」東夷傳)."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의미겠죠. 경주 서봉총(瑞鳳塚) 신라 금관도
머리 부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데 이 또한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알은 태양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새와 태양에서 알이 나오는 것이라는 말도 되지요. 그렇다면
부여·고구려·신라·가야 등의 신화에서 나타나는 알의 이미지는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쥬신의 종교 및 정치적 수장인 샤먼의 지팡이의 머리에 달린 장식은 바로 솟대라는 것이지요. 솟대 위의 새는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매개자라는 애깁니다.

  

  


신라의 금관은 바로 신라인들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고구려나 백제 등 쥬신의 어떤 나라보다도 알타이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라의 무덤 양식도 이 점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미추왕 이후 신라 김씨 왕족들의 무덤[천마총(天馬冢)이라든가 황남대총(皇南大冢) 등]은
전형적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인데 이러한 양식은 알타이를 역사적 무대로 삼았던 이른바 흉노의 무덤과 흡사하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형태의
목곽분이 이전에서부터 있어온 것이 아니라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고 합니다. 금관의 제작 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김(金)씨계
인물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최병현,『新羅古墳硏究』(일지사
: 1988)]"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사마염이 건국한 진(晋)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약화되면서 쥬신족들이 대규모로 남진해 오고(5호16국
시대), 그들의 일부가 경주까지 내려와 김씨(알타이, 또는 아이신) 왕조를 세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신라는 흉노계로, 오르도스 철기 문화의
주인공들이 한(漢)의 팽창으로 일부는 유럽 쪽으로 가서 헝가리 건국의 주체가 되고 동쪽으로 이동해가서 한반도와 일본의 건국 주체가 되었다고
합니다[이종선,『古新羅 王陵硏究』(학연문화사)].  

  글쎄요. 이런 분석들은 과연 사실일까요? 제가 보기엔 4세기에 벼락처럼 나타난 것은 아닌 듯한데요. 일단 이 의문들을 푸는 문제는 뒤로
미루고 계속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를 들어보지요.

  

  이종호 박사는 신라와 흉노의 유물은 서유럽 훈족에게서 발견되는 유물들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독일 텔레비전 방송에
소개되었습니다[이종호,「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韓民族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백산학보』66호].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인 PD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가 한민족과 훈족의 직접적인 연계 증거로 제시한 것은 엉뚱하게도 청동으로 된 솥입니다.  

  청동 솥은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인데 가야 지방에서 발견되고 그 형태가 신라의 유물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지요. 훈족은 이동식
취사도구인 청동 솥을 말의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재미있는 것은 신라의 기마인물상(국보 91호)이 바로 그 형태라는 것입니다(요즘으로 치면 차 뒤
트렁크에다 버너와 코펠을 싣고 다니는 것이지요). 청동 솥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도 많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증거를 들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신라인들이 서유럽까지 갔다기보다는 흉노의 일부는 서유럽 쪽으로 가고 일부는
남진하여 경주·가야 등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요? 흉노가 한반도의 남단인 신라로 들어 왔다고요?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둘러싸인 마치 섬과도 같은 지역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의문들이 최근 들어서 많이 풀리고 있습니다.  

  최근 신라 건국의 비밀을 풀기 위한 많은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바로 사천왕사에 있는 문무대왕의
능비(陵碑)에 있는 비문의 내용입니다.


  

  (4) 흉노의 나라, 신라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이란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말이 신라와 흉노와의 연계성을 밝혀주는 가장 큰
단서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투후제천((秺侯祭天)이라는 말은 흉노 단군(제사장) 출신의 제후인 김일제(金日磾)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의
비문은 "김일제(金日磾) 이후 7대가 흘렀다"는 말입니다. 이 비문에서 문무왕은 자신의 선조가 이 김일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죠.
조금 구체적으로 한번 봅시다.  

  신라계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金閼智)'라고 하고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를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금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도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김일제라는 것[文定昌, 『가야사』(백문당 : 1978)]인데
이 김일제라는 분이 바로 (김수로와?) 김알지의 선조라는 얘깁니다.  

  한무제(漢武帝) 당시 곽거병(霍去病·140∼117 BC)은 흉노 정벌에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金日磾)와 그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 휴도왕의 아들을 한무제가 특히 아껴서 김씨 성을 하사하고 측근에 둡니다. 한무제는 어린 시절을 외롭고 불우하게 보낸
사람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김일제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데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생명의 은인(한무제 암살을 막음)이기도 하니 특히 김일제를 총애한
듯합니다.

    당시 휴도왕(김일제의 아버지)은 돈황에 가까운 깐수성 지역을 다스린 사람이었는데 이웃 왕이었던 곤사왕(昆邪王)의 계략에 빠져 죽고
김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힙니다. 이 김일제의 일대기는 『한서(漢書)』에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漢書』金日磾傳 ).  

  현재 김일제의 묘소는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한무제의 능(무릉 : 茂陵) 가까이에 초라히 묻혀있다고 합니다[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 김일제에 대해 중국 측에서는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秺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라고 합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김씨 시조」『신동아』 1999년 8월호]. 여기서 말하는 투후(秺侯)는
제후국의 왕이라고 합니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의 후손이다(秺侯祭天之胤)"이라고 합니다. 『한서(漢書)』에는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祭天]한 까닭에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서 좀 이상한 대목들이 있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김알지(金閼智), 즉 경주 김씨의 시조와 유사한 이름이
나오지요? 무언가 관계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김일제라는 이름이 문무대왕(661~681)의 선조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여기서 잠시 김일제의 후손들을 한번 알아봅시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한나라 원제(元帝) 초에 김일제의 차남인 김건(金建)의 손자 김당(金當)을
투후로 봉하여 김일제의 뒤를 잇게 했고 다시 김당의 아들인 김성(金星)이 투후를 계승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문무왕 선조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문무왕의 비(국립 경주박물관 소재)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합시다.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靈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이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하였다. 큰 마루(宗)가 정해지고 그 갈래가 형성되어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제 7대를 전하고 있다. 15대 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 진백(秦伯)의 바탕이 되는 덕이 다시 일어났다 … 장례(葬事)는 간소하게 하여 서역식으로 다비하고
동쪽 바다에 띄우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너희 나라를 지킬 것이니 …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시니 대를 잇는 (새)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도다. 우러나는 효성과 우애는 끝이 없었네."

  

  김대성 선생(한국문자학회 부회장)에 따르면, 위의 문무왕의 비문에 나타난 문무왕 선조에 대한 기록인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 B. 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 B. 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 B. C. 200년대), ④ 투후(秺侯 : B. 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 B. 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 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 661~681)
등에서, ②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을 말하고,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피난한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라는
것입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金氏始祖」『신동아』 1999년 8월호].  

  그런데 김일제 이후 문무왕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의 터울이 놓여있지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과연 여기서 말하는 성한왕(星漢王)이
바로 김알지(金閼智)였을까요? 이 점들을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한(漢)나라는 당시의 이름 높은 신하였던 왕망(王莽 : B. C. 45∼23)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신(新)나라(8~23)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망은 바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 : 김성의 아버지)의 이모부였습니다.  

  한나라 당시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선양(禪讓 : 평화적 정권교체)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왕망은 쉽게 정권을 장악했지만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고대 유교에 치우친 정책을 시행하여 결국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후 왕망은 중국사의 대표적인 역적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니 왕망의 외가(外家)였던 김일제 집안은 이제 중원에서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죠. 아마 이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이후 이들 김일제의 후손들이 비교적 안전한 한반도의 남부로 피신했다는 말입니다. 연구자들은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부 김해, 일본의 규슈 등지에 이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문제는 성한왕이 김알지인가 하는 점으로 돌아가 보면 김알지라는 이름 자체가 김일제의 어머니(알지)와 유사한데다 대개 시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다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김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김일제와 김윤)을 잘 가르쳐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는데 김일제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고 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이제 한반도의 김알지가 출현하는 장면을 봅시다. 참고로 알지의 지(智)나 씨(氏)는 모두 음을 빌려
쓴 말이고 발음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알지를 발견한 사람은 탈해 이사금(57~80)인데 『삼국사기』에 나타난 이 사건의 대목이 좀 이상합니다. 한번 보시죠.

    "(65년) 왕이 금성 서편 시림(始林)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새벽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 금궤(金櫃)가 있어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총명하여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고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고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三國史記』新羅本紀 脫解尼師今)."

  

  위의 내용을 보면 금궤에서 아기가 나오니 자기의 아들로 삼고 나중에 나라 이름까지도 바꾼다? 이상한 일이죠. 금궤에서 나온 사람이니 토착민은
아니겠죠?(혹시 금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런 구전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예 나라 이름도 김알지를 상징하여
바꾸었다고 하니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보기엔 위의 기록은 김알지와 탈해이사금의 연합세력이 신라를 장악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탈해이사금도 힘든 과정을
통해 왕이 되었으니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반대 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김알지 세력이 탈해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탈해 이사금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겠지요. 이에 대하여 김알지가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262~284)이 신라의 13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따라서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을 보좌하면서 긴
세월동안 착실히 힘을 키운 것으로 보입니다. 인내심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탈해에 대한 의리를 지켰겠지요.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왕망이 실각한 후 김일제의 일족들은 피의 숙청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씨(王氏)로
바꾸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휴도국 고지(故地)에 있는 비석으로 확인이 된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새겨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은 나무(木)라는 것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 : 백화수)는 바로 생명(生命)을
의미하는 신수(神樹)라고 합니다. 열도 쥬신(일본)이 신라(新羅)를 가리켜 시라기(白木)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림(鷄林)이라는 말과 관련해 보면, 쥬신 신앙에서 새는 인간과 하늘[天神]을 연결하는 매개체(媒介者)입니다. 즉 쥬신 가운데는 조장(鳥葬)을
치르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김병모 교수는 이런 내용의 기록들이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김알지의 성(姓)인 김(金)은 금(Gold)이고 이름인 알지(閼智)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Gold)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金) + 금(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궤라는 말도 "문자 그대로" 금궤로 이해해도 될 듯도 합니다. 즉 신라의 선주민들이 이전엔 한 번도 보지도 못한 화려한 각종 금세공
장식품들을 가득 담은 궤짝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된 것은 모두 금궤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금궤에 들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금궤를 들고 온 이방인(strangers carrying golden
chest)"이었겠지요. 아니면 금마차를 타고 온 이방인일 수도 있겠지요. 이전까지 신라지역 사람들이 중요시한 것은 구슬이지 금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김알지가 성한왕인가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으니 일단은 연구과제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김알지의 후손인 문무왕(태종
무열왕의 아들)이 자신의 선조로 김일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신라 왕계, 즉 경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 계열이므로 그들의 문화가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이 신라
금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겠습니다.  

  즉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주요 활동 무대가 오로도스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쥬신의 장수
여포(呂布)의 고향 가까운 곳이었단 말입니다. 현재로 본다면 란저우(蘭州) - 타이위안(太原) 북부 지역이라는 말이지요[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사계절 : 2001) 262쪽]. 바로 몽골쥬신의 활동영역입니다.

    흉노는 스키타이와 더불어 유럽, 중앙아시아 - 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즉 흉노는 알타이를 기반으로 하여 유럽,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세력으로 때로는 중국과 교역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다. 흉노는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상인 세력으로 중개무역을
주관했습니다. 마치 오늘 날의 한국이나 일본처럼 당시 흉노나 스키타이는 국제무역(중개무역)의 중심 세력의 하나였다는 것이죠[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249쪽 참고]. 그러니 흉노가 금을 중시할 수밖에요. 금은 매우 고가(高價)인데다 상대적으로 매우 가볍기 때문에 유목민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교역품이 없지요. 비유하자면 요즘의 반도체나 휴대폰과도 다르지 않지요.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듯이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그 기마민족들이
신라를 점령 지배하여 신라 왕족이 된 것이 아니라, 1세기경에 이미 신라에 와 있던 흉노 휴도왕의 아들(김일제)의 후손들이 점점 세력을 키워서
4세기경에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초원길을 통하여 상당한 부분 중앙아시아나 유럽 쪽의 금장식 제품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거나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신라의 김씨 왕계는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 초원길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위(386~543)의 시기와 신라의 마립간
시대가 대체로 일치합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비로소 중국(양나라)과의 교역로가 열립니다(522 : 법흥왕 8년). 이 시기부터는
금관도 사라집니다(아마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겠지요. 쥬신 고유의 샤머니즘 전통도 약해져갔을 것입니다). 즉 금관은 마립간 시대[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417~514)]에 집중적으로 출토됩니다[조유전·이기환,『한국사 미스터리』88쪽].

  

  그러면 김씨 세력이 신라에서 정권을 잡는 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초기 신라 사회가 가진 복잡성(複雜性)에 기인한다고 봐야겠습니다(신라는 작은 나라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① 신라 자체가 워낙 허약하여 오랫동안 외침에 시달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수준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② 김일제의 후손들의
이동도 부여의 경우와는 달리 국가적 규모가 아니라 일종의 가문의 이동이었으므로 세력을 키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③ 부여처럼 6부
촌장의 연합체(고조선 유민)가 일찌감치 구성되어 이들 세력이 강력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록들이 『삼국사기』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절을 하는 등 살아가는 행태를 보면, 고구려와 서로 비슷하다. 신라는 문자가 없어 나무에 새겨
서로의 신표롤 삼는다. 그리고 말은 백제를 통해서 통역이 될 수 있다(其拜及行與高麗相類.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南史
』「列傳」)"고 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기록인데 신라가 문화나 습속이 고구려와 매우 유사하며 말은 백제와 대단히 유사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기원이 된 6촌이 고조선 유민이라고 하니 그 고조선의 습속과 고구려의 습속 또한 차이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 모두는
요동(遼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무에 새겨 신표로 삼는 것은 유목민들의 습속이기 때문에 『남사(南史)』의 기록은 신라가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쥬신의 나라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족(漢族)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타난 기록과 같이 진(秦)
나라에서 이주해온 신라의 일부 유민들도 진나라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므로 신라와 한족(漢族)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죠.  

  


여기서 신라와 진시황(秦始皇)의 진(秦)과의 연관성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니 한번은
거론해야겠군요.

    『삼국지』에는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진(秦)나라 때 사람들이 괴로운 노역을 피해 한(韓)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의 일부를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성(城)과 울타리(柵)가 있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는 다르고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三國志』魏書 東夷傳 辰韓)"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진나라 유민들의 일부가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도 "진한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가 망해서 도망해 온 사람으로 피난 가는 것이 고역이라고 말했다. 한국(韓國)의
마한 땅이 적당할 것 같아서 마한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진(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後漢書』東夷傳 辰韓)."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 때 난리가 나서 시달려서 동쪽으로 오는 자가 많아서 대개 마한의 동쪽 땅으로 몰려들어 진한과 어울려
살더니 점차 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한이 이를 꺼리어 신라에 대해 책망하였다(『三國史記』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후한서』의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죠? 『삼국사기』(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의 기록으로 보면 『후한서』의 기록과는
달리 진나라 사람들이 신라의 주 세력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에 6부 촌장들에게 신라건국의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姓)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산촌장은 이씨(李氏), 고허촌장은 최씨(崔氏), 대수촌장은 손씨(孫氏), 진지촌장은 정씨(鄭氏), 가리촌장은
배씨(裵氏), 고야촌장은 설씨(薛氏) 등으로 성씨를 하사 하였다고 합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儒理尼師今).

  

  그런데 위의 기록(진 나라 사람들의 이주)과 관련한 문제는 시기적으로 진나라 말기라면 B. C. 3세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김일제와는 일단 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진(秦)나라는 정통 중화를 표방하는 한족(漢族)과는 거리가 먼 민족입니다. 춘추 전국시대까지도 중국의 영역은
작아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초나라 왕이) 나는 야만적인 오랑캐[蠻夷]라서 중국의 호시(號諡)와 같을 수 없다(「楚世家」)." 라든가
"진(秦)나라는 중국의 제후들의 회맹(會盟)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랑캐[夷翟]로 간주되었다(「秦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진나라나 양자강 유역에 있던 초나라 등을 제외한 황하 유역의 국가들을 중국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우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신라 왕족인 김씨들도 진시황(秦始皇)과 연계를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진나라 자체가 흉노의
계열인 점도 있겠지만 이것은 간단히 해명될 문제만은 아닌 듯도 합니다.  

  즉 신라 건국의 비밀을 밝히는 많은 견해 가운데 휴도왕을 진시황(秦始皇)의 아들인 부소와 연계를 시키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시황의 맏아들인
부소(扶蘇)는 당시 정치적 정변의 희생물이었지만 총명하고 용맹하며 충성심이 매우 강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참고로 전등사의 삼랑성(정족산성)을
쌓은 단군의 세 아들의 이름도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라고도 합니다. 머리 아프죠? 일단 넘어갑시다].  

  간단히 말하면 진(秦)과 신라(新羅) 및 금관가야(伽倻)의 지도층은 공교롭게도 그 조상을 모두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동일하게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호씨(少昊氏)는 원래 동방의 큰 신으로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동해 밖의 먼 곳에 소호의 나라가 있고 그의 왕국은 온갖 새들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 2004) 164쪽]. 한 마디로 '새의 나라'지요. 소호씨는 산동반도 - 요동 -
한반도 등(일반적으로 보는 동이의 영역)에 이르는 쥬신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신입니다.  

  후일 소호씨는 서쪽으로 가서 서방의 신이 됩니다. 그래서 가을의 신인 욕수와 더불어 서방을 다스립니다. 뿐만 아니라 북방에 사는 외눈박이
일목국(一目國 : 눈이 작은 흉노로 추정됨) 사람들도 소호씨의 후손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소호씨는 동이(東夷)와 서융(西戎),
북적(北狄)의 신이라는 것입니다(그래서 대부분 쥬신의 시조들이 알에서 태어나시는 모양이죠?). 소호의 후손이 처음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기도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163~165쪽]. 영락없는 쥬신의 신입니다. 이 점을 좀 살펴봅시다.  

  먼저『좌전(左傳)』에 따르면 "진(秦)은 소호(少昊)씨의 후예다."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시죠.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어서 성(姓)을 김씨로 하였다(新羅人自以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

  

  이 기록은 경주 김씨였던 김부식(『삼국사기』편찬자)이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기록만으로 나타난 것을 토대로 퍼즐을 맞추어 보면

    진시황(秦始皇) → 부소 → 휴도왕 → 김일제 → 김알지 → 내물왕 → 문무왕 등의 계보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12대조는 수로왕인데 황제(黃帝)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직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가야와 신라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강조합니다(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三國史記』金庾信列傳).
그런 면에서 보면, 김일제의 후손이 한쪽으로는 가야로 가고 한쪽은 신라로 왔다는 일부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겠군요.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갑시다. 즉 위에서 말하는 황제(黃帝)는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보고 있어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황제는 농경민인 한족의 신인데 소호씨는 이미 보셨다시피 쥬신의 신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왜곡이나 해석상의 오류가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황제가 동방의 신들을 낳은 것처럼 묘사한다는 말이죠. 즉 황제 이후에 쥬신이 있는 듯이 묘사한단 말입니다('황하문명의 주역, 쥬신' 참고).
이런 식의 신화 조작은 중화사상이 구체화되는 한(漢)나라 이후의 일로 생각됩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소호씨가 황제의 아들이라는 말은
없지요(『史記』第一 五帝本紀).  




  일단 제가 보기에 김일제 이전은 고증 및 연구가 어렵기 때문에 김일제 이후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분석을 토대로 나타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라가 알타이 지역의 쥬신 선민족(흉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겠죠.  

  그래서 일단 신라는 고조선계와 흉노계의 연합세력으로 봐야겠습니다. 앞으로 더 깊이 있는 다른 연구결과가 나오게 되면 다소 수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신라와 흉노의 관계를 문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대표적인 예로 제철기법과 편두로 나눠 살펴봅시다.  

  먼저, 2000년 「황남대총 발굴 기념 학술대회」에서 박장식ㆍ정광용 두 교수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철기유물을 분석한 결과 당시
경주지역에 유행한 대표적인 기술체계는 저온환원법에 의한 제강법이었으며 이는 비슷한 시기 백제지역에서 유행하던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판이하다고
합니다.

  

  박장식 교수(홍익대)는 B. C. 1500년부터 사용된 철의 제강법은 크게 두 가지, 중국식과 유럽식으로 나뉘는데 유럽식은 액체상태의
주철(탄소함량이 많아 단단하나 쉽게 부서지고 낮은 온도에서 녹는다)로 도구를 제작한데 반해 중국식은 탄소를 거의 함유하지 않은 순철을 두드려
모양을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이 두 가지 철강법이 동시에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신라에서는 유럽식 기술이 쓰인 반면 백제는 전통 중국식으로 철을 다뤘다 합니다.

  

  보존과학자인 정동영 박사 또한 황남대총 출토 금동제품의 분석을 통해 신라의 금동제품이 금순도 98% 이상의 아말감도금의 방법을 이용했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여 당시 신라의 금속공예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강조합니다.


  

  다음으로, 신라와 흉노의 관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를 봅시다.  

  편두(扁頭)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있고 고랑 같은 주름이 머리에 죽 둘러 있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것인데 이것은 두개골이 인위적으로
변형된 상태를 말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편두를 하면 말 타고 투구를 쓰고 전투하기가 쉬워 생존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편두와 같은
습속은 유목민들의 일반적인 습속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편두라는 것이 마치 흉노족의 자취처럼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흉노의 이동경로로 추정되는 몽고에서부터 프랑스까지 유적을
발굴해보면, 그 유적의 주인공들이 편두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게르만 지역의 튀링겐과 오덴발트에서도 훈족의 편두가 발견되는 것으로 추정해보면
훈족의 영웅 아틸라의 제국에서 편두는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에서도 "만주지방에서는 고래로 편두하는
관습이 있다.(제2권)"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도 흉노의 일반적인 습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지󰡕 에서도 "진한(辰韓) 사람들은 편두(󰡔三國志󰡕 魏書 東夷傳)"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라의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공도 편두인데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대의 목곽묘에서 모두 10여 개의 변형두개골 즉
편두가 보고 되었습니다. 아니, 금령총은 그렇다 쳐도 김해라면 한반도의 남단인데 그 곳까지 이 습속이 나타나고 있다니오?  

  놀라운 일이지만 좀 깊이 생각해보면, 이 사실은 신라인들이 흉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금관이 왜 유달리
작은지를 알 수 있게도 하는 것이지요. 편두가 아니면 이 왕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편두가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귀족이나 왕족들은 편두라는 얘기지요. 최치원도 봉암사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 "편두(扁豆)는 지존(至尊)의
상징"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편두는 북방계의 남하를 보여주는 예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 『후한서(後漢書)』는 "진한 사람들이 갓난아기의 두개골을 판판하게
만들려고 유아의 머리를 돌로 눌러놓는 특이한 관습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삼국지(三國志)』의 내용("아이를 낳으면 이내 돌로
머리를 누르는데 이것은 머리를 작게 만들려는 것이다" : 『三國志』魏書 東夷傳 弁辰)을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두를 마치 '몬도가네'식(엽기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의 명군(明君) 건륭제(乾隆帝)는 분통을 터뜨리며 한족(漢族)의 역사가(歷史家)들이 몰상식하다고 말합니다.

  

  건륭제는 기본적으로 만주 쥬신들이 자신의 습속에 대해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아서 생긴 문제로 개탄하면서 "만주 땅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나무로 만든 요람에 넣어두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요람 속 유아의 머리 뒷부분이 편편하게 되는 것이고 진한
사람들도 분명히 똑같은 관습을 가졌을 것(『欽定 滿洲源流考』卷首 諭旨)"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한족들은 이민족들을
엽기적으로 몰아가서 야만인으로 몰아 부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류의 일은 명나라가 가장 심했습니다.  

  어쨌거나 이 장에서는 편두라는 만주의 풍속이 한반도 남부 지역까지 멀리 전하여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신라와 북방의 연계성을
더욱 쉽게 분석할 수 있지요.

    신라가 단순히 고구려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최근의 고분 발굴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1998년과 2003년 각각
발굴된 삼연(三燕) 시기 선비족의 무덤인 랴오닝(遼寧)성 베이퍄오(北票)시 라마(喇口麻)동 묘지와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고구려 태왕릉이
바로 그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연(三燕) 시기란 4세기 초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이 붕괴하고 쥬신이 남하하여 세운
전연(前燕 : 337~370)·후연(後燕 : 384~409)·북연(北燕 : 409~438)의 시기를 말합니다. 전연과 후연은 모용(慕容)씨의
나라입니다.

  

  전문가들은 2004년 4월 출판된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고고학보(2004년 제2기)』에 나타난 라마동 묘지 출토 각종 마구(馬具)들은
신라고분의 출토품뿐만 아니라 가야와 백제, 왜의 마구의 연원까지 추적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300여기에 달하는 라마동 묘지에서 나온 부장유물은 3670여 점에 달하는데 여기에는 생활용품·무기류·마구 등 매우 다양한 유물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토기는 고구려와 유사하고 각종 마구들은 신라초기 고분 출토품과 비슷하며 금동제 말안장 가리개는 전체 형태가 왜의
5세기경의 대표적인 금제품인 오사카(大板)부 하비키노(羽曳野)시 곤다마루야마(譽田丸山) 고분의 출토품과도 흡사하다고 합니다.  

  미술사가인 권영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는 당시 고신라가 북방 유목민족 세력권에 있었으며 황남대총 유물은 그 문화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신라는 고대 동-서 교역로였던 비단길과 동해안 통로를 통해 4~5세기 국제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통일 이전의 신라는 황남대총
축조시기를 기점으로 이전의 전기 초원문화와 이후의 후기 초원문화로 나누고 중앙아시아 흉노족이 한나라 멸망직후의 국제정세 혼란을 틈타 신라에
영향력을 미쳤다고 풀이합니다. 금관에 나타나는 나무 가지형의 모양새는 알타이 주변과 중앙아시아 수렵민족의 신앙적 상징과 거의 같고 금장식편(영락)이
달린 형식은 중국에 없고 러시아 돈강 유역이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출토된 기원 전후의 유물과 비슷한데다 얇은 금판을 새 날개 형태로 오리고
수많은 영락을 단 금관 장식이나 금제 귀고리, 허리띠 조형 등은 로마와 터키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이라고 합니다[권영필,「황남대총과 신라의
국제교류」『황남대총의 재조명 국제학술회의』자료집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2000)].

    저는 이 견해와는 조금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이전에 있어왔던 흉노 세력(김일제 후손의 김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선택적으로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서 중앙아시아나 유럽의 금 문화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5) 북으로 가는 신라, 남으로 가는 부여  

  황남대총의 거대한 무덤 속에는 수많은 유물들이 있는데 그 속에는 뜻밖의 유물이 있었죠. 바로 투명한 색깔의 그릇 파편들, 바로 유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리 목걸이에서 발견된 사람의 얼굴은 동양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인숙 박사는 유리 분석실험을 통해 황남대총의 유리는 중국계 유리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로마계 유리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였습니다. 결국 로마의 유리가 신라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로마의 유리는 중국이나 바다가 아니라 초원의 길을 통해서 왔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 드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4~5 세기 신라 지배자급 무덤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묘제, 적석목곽분이라고 합니다. 적석 목곽분은 남러시아의 시베리아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스키타이 민족(기마민족)의 매장 풍습인데다 유물들도 기마민족들의 애호품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초원의 길에는 이들 스키타이인들과 또 다른 주인공, 흉노(쥬신의 선민족)가 있었던 것이지요. 대체로 초원길 서부지역은
스키타이, 동부 지역(알타이)은 흉노라고 보시면 됩니다. B. C. 2세기경 스키타이는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초원지대를 장악한 새로운 유목세력에
의해 동과 서로 교역은 계속 유지됩니다.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신라는 로마문화를 수용하여 자기의 환경에 걸맞게 변형·발전시킴으로써 각종 장신구와 금은제품을 로마와 공유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수일 교수는 로마의 누금감옥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세공 장식품들이
신라에는 흔하게 나오지만 당시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고구려에도 별반 없으며, 백제는 신라와 관계가 좋을 때의 유물에서만 약간
나온다고 합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계통과 부여-고구려-백제가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신라 쪽이 보다 고조선계와 흉노(쥬신 선민족)
쪽에 더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쥬신이라도 한족(漢族)과의 교류와 그 영향력의 강약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신라가 중국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에 좀 더 흉노적이라는 말이지 근본적으로 이들이 다르다는 말은 아니지요. 희한한 말이겠지만
한족(漢族)의 영향을 받은 부여계보다는 경제력·제도·문화의 면에서 세련되지는 못하면서도 금은 세공 기술이나 유물들은 훨씬 더 발달해 있는 나라가
신라라는 말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금관의 나라, 신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려웠지만 여명기의 신라에 대하여 개략적인
그림을 그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기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은 연구들이 있었고 분석 범위도 광범위하여 매우 복잡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알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들을 모두 종합하고 여러분들이 보다 읽기 쉽게 요약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신라의 금(金)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신라의 후예(後裔)들에 의해 후일 나라 이름이 금(金)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라의 후예 만주
쥬신은 금(金)이라는 같은 이름의 나라를 만들어 두 차례나 중국을 경영하기도 합니다.  

  이미 본 대로, 금나라를 세운 시조는 경주 김씨로 대립하는 부족들을 화해시킴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었고 현지인과 결혼하여 아들·딸을 낳고서
정착합니다. 후금은 바로 이 나라를 이은 나라지요. 금나라는 신라와의 연계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비롯한 다른 여러 기록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려사』에도 금나라 태조(아골타) 계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의 태조가 고려 예종에 국서를 보냈는데 그 국서 내용은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금나라의 태조가 요나라를 공격하면서 발해 유민들을 포섭하여 말하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女眞 渤海 同本一家)"라고 하고 있지요.

  

  금나라 태조의 말씀에서 금나라(금·청)가 바로 신라계와 고구려의 후예(신라·고구려 연합세력)이며 고구려 - 발해 - 금(반도에서는 고려) -
후금(청) 등으로 이어지는 쥬신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금(금·후금)나라를 건설한 만주쥬신은 황족의 성은 경주 김씨로 반도 쥬신과는 항상 친밀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고로 17세기의 자료이긴
하지만 몽골 칸국의 황실인 보르지긴 씨족도 알탄오락(黃金氏族), 즉 김씨(金氏)로 되어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라는 부여·고구려·백제 등과 마찬가지로 쥬신의 공통된 특징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그 성격이 일부 알타이 서부 지역과 유사한
형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는 고조선계와 선쥬신계(흉노계)의 연합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문화는 토착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쥬신의 대륙문화에 중앙아시아·로마 문화까지 수용하여 융합시킨 하나의 복합적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쥬신의 전체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즉 부여는 남쪽으로-반도부여(백제)로-열도부여(일본)로 향하는 동안, 신라는
북쪽으로-만주(금)로-중국(청)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한민족사에 등장하는 여와 

중국의 인류창조신 여와   

우리나라 배달국에 있어서 여와(女?)는 소호김천씨의 할머니이며, 중국의 삼황에 해당하는 태호복희씨와는 남매지간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중국의 인류창조신 여와  

중국신화에서 인류의 창조는 여와라는 여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후한(後漢) 시대에 응소(應邵)가 지은 ‘풍속통의’(風俗通義)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겼을 때 아직 사람은 없었다.  

이때 여신 여와가 황토를 뭉쳐 사람을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 하나 만들다 보니 나중에는 힘이 들어 많이 만들어 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노끈을 진흙탕 속에 담갔다가 꺼내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랬더니 흩어진 진흙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였다."  

원용국 씨는 그의 저서 <구약사>에서 모세연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렁이가 팀나의 성전에서 발굴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인두사신이 교미(상기 그림)하는 복희와 여와씨의 그림과 대조적이다


태호 복희와 여와 (한재규) 

여와의 이야기는 고구려의 을파소가 지었다는 '참전계경'에도 나온다.

바로 '여와가 흙을 빚어 사람의 상을 만든 다음 혼을 불어넣어 7일만에 사람이 되게 한뒤 그들을 모두 전쟁에 사용하니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스타인이 발견한 '복희 여와도'

19세기 초, 영국의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스타인이 신강성 위구르 투르판 분지에서 고분을 발굴하다가 7세기 전반에 멸망한 고창국 귀족의 그림을 발견했는데, 흰 명주에 선명하게 채색된 그 그림에는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뱀으로 이루어진 남녀가 묘사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복희, 여와도이다.  

이 그림속의 두 사람은 손에 규구를 나눠들고있었다. * 規矩 자와 콤파스 '통지'에 '한나라 시대 석각 그림과 벽들 그림 가운데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인 복희씨와 여와씨가 교미하는 모양을 흔히 볼수 있다' 라는 기록이 있어서 이 그림이 곧 복희와 여와씨임을 알 수있다.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 13년 (191)때 재상 을파소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참전계경'에도 나온다.

바로 '여와가 흙을 빚어 사람의 상을 만든 다음 혼을 불어넣어 7일만에 사람이 되게 한뒤 그들을 모두 전쟁에 사용하니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또한 단기 4281(1948)년에 채록된 함흥지역의 '셍굿'두가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사람이라 옛날에 생길 적에 어디서 생겼습니까.
 천지 암녹산에 가 황토라는 흙을 모아서 남자를 만들어놓으니 어찌 생산될까?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아담의 어원

'아담'이라는 이름은 수메르어나 히브리어가 아니라 본래는 아카드어AKKAD:아무르족 언어였다고한다.

아카드족은 아모리Amorie으로 아무로Amarru라는 형태로 발음된다.

이 족명은 곧 한Han 족으로 조선chosen족이다.'성서백과사전'

이 아무르에 '아담'은 '붉은 찰흙 인간'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 곧 하느님이 '붉은 찰흙'으로 사람을 만든 것이 된다.  

"아담과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느님께 제사 지낼때, '붉은 황토'를 그 제단 주변에 뿌렸고, 신위를 만들때도 자단토紫壇土라는 '붉은 흙'으로 만들어 봉안했으며, 옹기와 토기도 '붉은 찰흙'으로 만들었다. 

또한 고대 시베리아 에스키모족을 '적이赤夷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곧 동이족 가운데 붉은 피부를 가졌던 종족에 붙인 별칭이다.' 

이 적이를 비롯한 고대 시베리아에서 둥지를 틀고 살았던 황인종들은 모두 한국인과 같은 혈통이다. 그래서 시베리아 평야와 만주평야를 하나의 지역명인 동야東野로 일컬었던 것이다.

 

'성경'의 인간 창조 설화는 우리의 '참전계경' 및 '풍속통의'의 부분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본따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26~27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라는 복수형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본떠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라고 한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유일신이라면 당연히 단수형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왜 복수형으로 표현된 것일까?

이 문제는 앞의 나반과 아만의 장에서 이야기했던 가나안의 최고의 신 '이브-아담(인간의 아버지)'의 별칭인 '엘El'을 통해야 풀수있다. 

 

엘로힘의 어원

'엘'은 우리 말의 '얼'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했다.

이 '엘'이 바로 창세기 하나님, 곧 '엘로힘Elohim'의 복수형이다. 곧 '엘로힘'이 우리의 얼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얼'은 고구려에서도 널리 쓰였던 우리의 순수한 고유어로서 '육체에서 솟아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뜨거운 샘물은 땅에서 솟아니고 얼은 육체에서 솟아난다'는 말이 지금까지 전래되고 있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가시적인 것이지만, 육체에서 솟아나는 얼은 불가시적인 것으로, 곧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정신精神'을 말한다.

'정신'은 곧 '마음의 신'이다.  

까마득한 옛날에 우리의 인지가 깨이면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했던 신(얼)은 누구일까? 바로 하느님이다.

우리 하느님님을 통해야만 비로소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난해한 복수형 문장에 관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 하느님이 유일신인 동시에 '조화, 교화, 치화'의 작용을 하는 복수형의 삼신삼신이기때문이다.

 

제주대학교 안창범 교수는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에서 여호와를 성부 성자 성신의 3위 일체 하나님(하느님)이라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호와는 우리 민족이 3신, 3신 상제 또는 3신 하느님으로 일컫고 있는 하느님과 비슷하다고 생각할수있다.  

그러나 '하느님'이라는 용어는 기독교를 우리나라에 보급시키기위해 포교전략상 '영어의 갇 God 또는 히브리어 엘로힘 Elohim'을 우리말의 하나님으로 국역한 것일뿐이다.

곧, 기독교측에서 우리 말의 하느님을 차용해 쓴것이다.  

더욱이 서유럽인들의 의식구조에는 하나님이라는 관념자체가 없고, 서유럽의 언어에도 하나님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다. 이러한 것을 보아도 하느님은 우리말의 차용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신이라는 용어는 바이블에 보이나 이들이 3위 일체라는 용어는 일체 찾아볼 수가 없고, 갇 또는 엘로힘의 어디에도 3위 일체라는 뜻이 없다. 그러므로 3위 일체라는 용어 역시 우리 민족의 3신 일체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와의 유래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 이어 두번째로 등장한 인물이 아담의 배필인 '하와'이다.

흔히 하와를 아담의 첫번째 여자로 알고 있으나, 사실 첫번째는 '릴리스 Lilith'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릴리스는 바빌로니아 의 흡혈귀인 릴리스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여하튼 하와는 우리 민족의 조상 '여와YHWH'와 그 이름이 같다. 

수메르에서는 '하와'를 '갈비뼈 숙녀' 또는 '생명의 숙녀'로 설명하고 '성경'에서는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이는 성경이 수메르의 '갈비뼈 숙녀'를 취해 '아담의 갈비뼈' 곧, '하와'가 만들어진 것으로 상징할수있다.  

"반만년

그런데 주목을 끄는 것은 '여자가 남자의 몸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시베리아 베딜족(Bedil) 타타르족(Tatars)에게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 라는 것이다. 하와Hawwah의 일명은 하바Haba이고, 헬라어로는 유와Eua인데, 이 '유아'는 우리의 '여와'와 동의음이다. '성경' '창세기' 첫장에는 창조할 무렵에 이미 2가지 성(남.녀)의 존재가 인식되고있다. '창세기 1:27' 

또한 '이것은 남자에게서 취한즉, 여자라 칭하리라'라는 구절로 남자라는 생명이 여자와 함께 묶여져있다.'창세기 2:25', 이것은 곧 우리 태극에서의 음과 양이 공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원래의 여와는 그의 오빠 태호복희와의 관계 후 나뭇잎으로 부채를 만들어 몸을 가렸다.

이것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친남매끼리의 혼인을 의미하는 것일뿐, 결코 타락의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여자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해 간음죄를 지은 인간 최초의 원죄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동양의 우주 창조적 신격인 여와를 서양으로 끌고가 상위 개념으로서의 서양과 서양 남성의 사고를 정당화시키기위해 여와를 타락한 존재로 부각시킨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쓰여졌던 그 무렵에 히브리족들이 지녔던 사고방식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와, 문명개척을 위해 서쪽으로 떠나다.

상고대의 동양에서 우주를 창조하고 흙으로 사람을 만든 것으로 널리 알려졌던 여와는 그 무렵 한민족의 서방 진출과 함께 서방으로 건너가 '여호와 신'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의 기록이 입증하고 있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마침내 진陣에 옮겨 수인, 유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냈다. 그 무렵 복희씨는 누이동생 여와와 함께 신천지를 개척하기 위해 서쪽으로 떠났던 것이다.

여와신은 아브라함의 가계 혈통에 따라 이드로까지 내려왔고, 또 그 사위 모세에게 전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의 가족 신앙에 지나지 않았던 여와신이 세계적 신앙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는 기원전 2166 여년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모세 이후에 1000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여와 신은 종주권을 잃어버리고 히브리 지역의 여러 신들과 혼재되었다가 지방에 따라 두 갈래 모양으로 변화 되었다.
 

하나는 히브리 지역의 '여와-유와-하바-하와'로 인류의 어머니로 변신되었고,
또 하나는 헬라 지역의 '여와-여호와-야웨'의 창조신으로 변화되었다. 이것은 곧 여와의 육신은 하와로, 여와의 영혼은 여호와로 전혀 다른 존재로 히브리족들의 신앙속에 심어지게 된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신앙이 기원전 300년경에 비로소 '구약성서'로 편집되는데, 이 때 원래 하나의 존재였던 여와는 영혼과 육신이 나누어져 땅에서는 하와로 등장하고, 하늘에서는 여호와라는 서로 다른 존재로 등장했다. 

곧 아브라함이 고대 한민족의 점령군들로부터 받아들인 여와신이 그뒤 이삭, 야곱으로 대를 이어 내려오며 사람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가족 신이 되었으나, 모세 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오는 과정에서 여호와 신이 된 다음 완전히 하늘위로 올라가 '질투의 신' '폭력의 신' '전쟁의 신' '공포의 신'등으로 변했다.

 여와, 유대족의 민족신 여호와로 바뀌다.

우리는 여와가 '성경'의 여호와로 변했다는 증거는, 본래 자비와 사랑의 어머니로서의 여성이었던 여와가 '구약성서'에서 여성신인 여호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호와를 모태표상인 레헴rehem 또는 라하밈rahamim(자비를, 라힘rahim자비를 나타내다 등의 의미로 자주 쓰고 있다. 특히 '구약성서' '예레미아'에서는 '여호와이신 어머니는 비애를 은혜로 바꾼다'는 등 여성적, 모태적 표상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12:5, 30:18

이처럼 적어도 구약시대에는 여호와가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로 해석되어졌던 것이다.

본래 하나의 명칭이었던 여와는 '성경'에서 하와와 여호와로 나뉘어 인류사의 첫 여성으로, 그리고 우주 창조신으로서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3.

메소포타미아 문명 

한편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지역으로 이주한 동방족과 수메르족은 조상이 같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세계고대문화사'  

문정창, 임승국, 김태영 등의 학자들도 '여와'가 이스라엘 민족신인, '여호와'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문정창은 '기원전 1200년경에 모세가 '창세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신을 '조선피플 chosen people'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곧 그들 사상의 고향을 가리키는 환국, 배달국, 고조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진시황릉의 병마용에서 해답을 찾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단기 4327(1994)년에 우리나라에서 전시되었던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유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래야 이 난해한 수수께끼를 풀수 있다. 

진시황제의 지하 군단인 병마용들은 7,000명이 넘는 군사들과 말 500필, 전차 130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하군단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명령만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듯한 생동감으로 가득차 있다. 신체의 비례와 감정표현, 자세의 다양함등을 살펴볼때 오히려 살아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만약 고대에 이런 생동감 있는 조각품에 진짜 사람들을 섞어 놓았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사람으로 착각 했을 것이다. 또한 그 조각품을 만든 사람을 진짜 인간을 창조한 신으로 착각해 그를 추앙했을 것이다.

"중국 

 

바로 이런 방법을 여와가 전쟁 중에 사용했고, 그래서 후세인들이 여와를 인간을 창조한 신으로 기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가능성은 발해 연안의 북부 대퉁하 유역에 있는 우하량 돌무지무덤 부근의 여신교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3500년경의 '소조 여신상'의 세련된 조각 기법을 통해 충분히 제기해 볼수 있다. 

지나측의 이러한 여와 이야기의 구성원리는 우리의 나반과 아만 이야기의 구성원리와 거의 같다. 여와가 황토로 사람을 만들고 오색의 돌을 반죽했다는 내용은, 인류 최초의 여인이었던 아만이 아이를 낳고 그 후손이 오색인종 이었다는 것과 같다. 또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과 그 대용품으로 등장하는 거북은, 나반과 아만의 혼례식때 나타난 4신수(주작, 거북, 백호, 청룡) 또는 5신수(곰 포함)과 같다.  

원래 신화란 전래되는 과정에서 각색되고 첨삭되기 마련이다. 또한 원형을 좇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여과시켜야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복희와 여와는 배달국 제5대 태우의 환웅천황의 아들과 딸로서 기원전 3528~3413년의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배달국 태우의 환우의 막내아들 태호복희씨

복희와 여와는 태우의 환웅천황이 낳은 13남매 가운데 막내아들과 고명딸로 태어났다. 그 무렵 우사의 직책에 있던 태호 복희씨가 환국시대의 '천부경'을 바탕으로 역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환역桓易이다.

이 환역이 나중에 주나라에 전해져 '주역'이 되었다. 이 환역의 또 다른 명칭이 복희팔괘 또는 선천팔괘로, 태극기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희씨와

태호 복희씨

 환역을 만든 태호복희씨는 역사에 역리의 원조로 큰 자취를 남겼으며, 또한 그의 천天사상과 어진 인仁가르침은 뒤에 공자가 이어받아 유교를 창시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기원전 3418년 맏형 다의말이 아버지 태우의의 뒤를 이어 배달국 제 6대 환웅천황으로 등극하자, 앞에서 이야기 한바와 같이 태호 복희씨는 누이동생 여와씨와 함께 배달국을 떠나 서쪽의 진陣에 이르러 터전을 잡고 계속 서쪽 진출을 꾀하여 메소포타미아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영민했던 태호복희씨도 천명은 어쩔 수 없었든지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여와씨는 오빠이자 남편인 태호복희씨의 유지를 받들어 메소포타미아에 지속적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바로 이러한 여와씨의 덕교德敎가 그 무렵 사람들의 의식 속에 '여와 신'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성경'에 수록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태호복희씨의 성은 원래 새중의 새인 봉鳳과 같은 의미인 풍風씨였는데, 이것이 인류 최초의 성이다. 그러나 15대 만에 대가 끊겨 '풍골 좋다, 풍채 좋다, 풍신 좋다'는 등의 용어만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신 2순위에 있던 염제 신농씨의 강시성이 되어 그 자리를 차지하여 다시 인류 최초의 성으로 자리매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오석은 스타인이 복희 여와도를 발견한 옛 고창국에 대해 "여와의 신화는 중원의 원주민이 지나인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그 원주민이란 오늘날 지나의 서남 변경에 자리한 산악지대의 소수 민족인 묘족이나 야오족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곧 고창국이 옛날 동이족의 일파였음을 시사했다. 

또한 이일봉은 고창국의 지명인 투루판을 삼한의 하나인 번한 (또는 변한)으로 추정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2. 중국의 '중국고금지명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있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보다 찾을 수 없는 지명이 더 많다.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있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되었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많이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있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15. 고려, 조선등의 무역 내역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18. 백제의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의 인구보다 많다.

19.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 현 중국대륙의 장안(시안)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20. 당 13만 군에 의해 백제 수도가 함락된 후에도 백제 장군 흑치상지는 200여개의 성을 기반으로 당에게 저항해 당은 40만군을 증원한다.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성으로 뒤덮여있어야한다.

21. 조선 초 인구가 37만명인데 1000년전의 국가인 백제나 고구려의 군인만 100만이었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23. 18~19c 외국인 선교사 또는 탐험가들이 작성한 지도에는 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있다.

27. 고구려 고씨가 아직도 중국 대륙에 살고있다. 특히 장수왕 후손인 사람은 고구려 유리왕의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베이징 근처에 유리왕묘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국의 왕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28. 중국대륙에 있는 수많은 성들이 현지인들에게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고려성, 또는 고구려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29. 백제의 의자왕, 흑치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중국대륙에만 존재한다.

30. 백제가 패망할 당시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모두 있다.

31.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359개나 된다. 이들 모두가 중국대륙에는 존재한다.

32. 한단고기외에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규원사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33. 중국의 고문헌에 나와있는 발음법으로 정확하게 한자를 읽는 민족은 우리민족밖에 없다.

34.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이름은 화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도 토함산의 화산활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현 경주의 토함산은 공교롭게도 화산이 아니다.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36.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인 애신각라 는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37.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 라고 발음된다.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신라의 왕족은 금(金)씨이다. 청나라의 원래 이름은 금(金)나라 이다.

38. 임진왜란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조선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다.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41.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 건국직전에 여진족이 부족국가 형태일때의 추장이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있다.

42. 현재 우리나라 부안 김씨의 족보에 금 태조의 이름이 나와있다.

43. 백제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46.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강역은 동서 너비가 2천여 리, 남북 길이 1천 5백여리, 신라, 백제를 병합하니 고려의 동북(東北)쪽이 넓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송사(宋史),.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들을 보더라도 역사서 원전에 의한 조선의 선조 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은 모두 동서(東西)가 넓고 남북이 짧은 지역을 통치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송인이자 외국(外國)인 서긍이 직접 고려로 가서 보고 온 고려의 통치 영역의 지형구조가 동서(東西)가 넓은 구조였다고 했다. 현재의 한반도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47. 몽고에서는 징기츠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고구려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48.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명사, 선조실록, 난중일기, 이순신전서, 임진전란사, 은봉야사별록 등) 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명, 상황전개, 위치, 방위, 거리 및 전후사정이 한반도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49.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에 나오는 지명들은 중국에는 모두 존재한다.

50. 난중일기의 원문을 직접 번역한 현역 해군 중령 최두환씨(해군본부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는 난중일기 번역을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지명을 추적하여 임진왜란의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겨놓자 쉽게 풀려나갔다고 한다.

51. 임진왜란 당시 기록을 보면 왜가 침입해오자 조선의 왕은 서쪽으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식적으로는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52. 어제신도비명 에 보면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길로 나눠 서쪽으로 진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반도라면 당연히 북상 하는 것이 옳다.

53. 지도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 등을 두루섭렵하고 있어야 제대로 만들 수있다. 한반도 전역을 3차례 둘러보고 정교한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54. 김정호는 일제시대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것 역시 일제시대이다.

55. 대동여지도에 씌여있는 글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이 1만 9백리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글옆의 지도, 즉 한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56.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쓰고있다. 한반도에는 낙양이라는 지명은 단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낙양은 중국의 천년고도의 도시이다.

57. 세스페데스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16c 에 쓴 책에 의하면 꼬라이 또는 꼬리아라는 왕국은 일본에서 10일정도 걸리며 왕국의 끝은 티벳까지 달한다고 씌여있다. 또한 조선의 북쪽에 타타르가 있었는데 그것도 조선땅이다 라고 씌여있다. 타타르는 내몽고에서 활동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조선대륙의 강들은 수량이 풍부한데 강의 폭이 3레구아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58. 루이스 프로이스 라는 신부가 쓴 조선의 강역에 대한 글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과 거대한 사막이 존재한다고 씌여있다.

59.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불태운 우리 역사서가 약 20만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딱 두 권만 남겨두었다.

60. 한국의 국사의 기초와 체계는 모두 일제시대때 일본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 역시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씌여진 '조선사' 라는 책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의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라는 고문헌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슬프다!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나 죽어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北崖子의 <규원사화> 서문 中에서.



http://blog.naver.com/solongo/120017118576
신라가 유목민의 후손이라는 글이 있네요 ......ㅡㅡ;

http://kin.naver.com/knowhow/entry.php?eid=DJL1B2f9Ws5sh37imUlySNEmBvwi%2Bhcr
규원사화,한단고기,부도지는 위서가 아니다 라는 글도 있네요 글을 읽다보면....우리나라 역사서들이
많이 없어졌다고 되어 있네요.
역사는....항상 승전국이 기록을 날조하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당위성을 위해서 초대왕을 신격화 시키죠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 이래 중국에 살았다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
 


‘사고전서’에서 단군과 동이족의 실체를 확인한 심백강 원장.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여러 ‘고기(古記)’ 들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역사서적이 적지 않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36년에 달하는 일제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비롯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 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 역사를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 중의 동이사료’ 등 4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이야말로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이며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필적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 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 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 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퍉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 등이 그것이다. 이(夷)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올라가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서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존재하는 융적(戎狄)의 유래가 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 이적(夷狄)들이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개벽(開闢) 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중국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탏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뿐만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사부’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흲)이다(夷者흲也).”

여기서 이(夷)를 저(흲)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흲)란 과연 무엇인가. 저(흲)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흲)’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흲)·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흲)의 의미를 다시 저지(흲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 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뿌리 내리고 움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흲地)의 저(흲)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흲)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라는 뜻으로 변질되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고전서’에는 “맹자가 추나라 사람으로,
추나라는 춘추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동이국가”라고 기록돼 있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진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퍉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 夷 曰?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 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모두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토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 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퍉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토·낙랑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토·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 무제가 설치한 현토·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퍉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는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한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명의고(名義考)’ 5권은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고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해 자칭 군자라고 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를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 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나라 이전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 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 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 16)에 각각 건국된 것으로 기술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를 갖고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섭렵할 수 없다 보니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만큼 잘못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하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토·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임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동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제의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신농과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 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출발점 없는 한국사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몰골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갈래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그로 인한 민족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해 우리의 실제 역사가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東京) 도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는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 이후 19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19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끝)
Posted by PD 개인교수
역사클럽 발췌

한반도에 가야는 없었다. 가야는 양자강 하류에 있었다. 한반도에 가야가 있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지역에서 출토되는 갑옷은 백제와 신라의 것이 혼재되어 있다.

몽고발형투구? 몽고는 몽고고원에 없었다. 대진국이 시베리아에서 일식관측한 기록이 일본 역사책에 일본의 일식기록으로 둔갑해 있다. 고구려는 몽고고원 이서, 이동에서 일식관측했다. 몽고고원 역시 고구려 땅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고구려가 없었다. 온조가 황하 하류에서 스타노보이산맥로 이어지는 영토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몽고발형투구는 백제의 투구였던 것이다.

몽고발형투구가 북방민족의 영향이 강한 투구? 북방민족은 없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를 훔치면서 날조해냈을 뿐이다. 중토 너머 타림분지에는 북흉노와 선비 등이 있었고, 중토의 서쪽에는 남흉노와 예맥이 있었다. 모두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은 종족이다. 당연히 우리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가야 고분에 부장된 중국계, 북방 유목민족의 물품? 한수 하류와 발해만은 백제 영토였고, 양자강 이북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오르도스형 동복? 오르도스는 고구려 영토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서 갈라진 나라이기 때문에 똑같은 문화를 갖고 있었다.

유목민족을 중국이 날조한 몽한이나, 금한, 요한 등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몽한, 금한, 요한은 고려의 역사를 배당받은 나라다. 유목민의 실체는 지금의 몽고고원이나, 티벳고원의 유목민을 보면 알 수 있다. 천박 하나 쳐놓고, 온 가족이 기거하며, 천막만 걷어서 손쉽게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이주하는 민족이다. 오늘날 몽고의 도시나 티벳의 도시는 현대화된 산물이다. 그 옛날 몽고가 그처럼 우수한 문화를 개발했다면, 몽한 이후에는 퇴보만 거듭했다는 건가. 일례로 몽고족의 일파인 예맥족은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다.” 몽고족이 중앙아시아에서 살 때도 그랬다.

한반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은 유물로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375년이 백제에 한자가 들어온 해라 했다. 그러나 한자는 우리나라가 개발했다. 한자의 원형 갑골문자가 발견된 현황하 하류는 삼국의 영토가 맞댄 곳이다. 글자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이 발견되는 지역도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 등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발해만 북쪽에서 출토되었다. 지금의 한자꼴은 발해만과 산동반도에서 먼저 나타났다. “병신년(B.C. 925)에 한수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번한세가) 이 당시 벌써 한자가 개발되었기에 이두법을 지었다. 한자조차 우리나라가 개발한 문자다. 한자는커녕 갑골문자조차 중국이 개발한 문자가 아니다. 375년에 신라가 한반도로 침공한 것이다. 우리나라를 모두 집어넣은 한반도에 신라가 상륙작전을 펼쳤다고 할 수 없어서 백제에 한자가 들어온 해라 날조했다.

신라는 백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내물왕 37년(393)에 이르러 고구려 편으로 돌아선다. 고구려가 강성하다 하여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인질로 보냈다고 하지만, 실은 백제 땅 한반도를 침공한 탓에 백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를 감추느라 신라가 강자 편에 붙었다고 날조했다.




400년의 이 사건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이 끝나면서다. 4세기 말까지도 금관가야는 고분 묘광의 크기가 10m 이상이고, 그 안에서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는 아주 광대한 세력이었다. 그런데 5세기 초 이후에는 김해지역에서 묘광 크기가 2m 이상 되는 고분이 나오지 않는다.

400년 무렵부터 철갑옷을 함께 묻은 대형 고분들이 돌연 자취를 감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가야가 멸망한 6세기 중엽까지 계속 만들어지던 대형 고분이 가야의 출발지이자, 절대적인 맹주였던 금관가야에서만은 5세기 초엽에 중단된다.(역사스페셜 1권)




금관가야가 고분에 철갑옷을 부장품으로 넣지도 못할 만큼 무장해제되었다면, 맹주의 지위를 다른 가야가 넘겨받았다면, 상식적으로 국력이 신장된 나라가 금관가야를 멸망시켰을 것이다. 그 결과 금관가야 지역에는 새로 떠오른 가야가 지배자를 파견했을 것이고, 여전히 대형 고분에, 철갑옷이 발견되어야 한다.

신라가 375년에 한반도를 침공하고, 393년에는 고구려 편으로 돌아섰다. 전투가 한창인 지역에 대형 고분을 만들 수 없었던 건 당연하다. 철갑옷 제작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탓에 전쟁 중에 부장품으로 넣어줄 수도 없었다. 금관가야로 착각하는 지역에 신라가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신라는 청구대륙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했으므로 고분 제작자를 충분히 동반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사자의 집은 만들어야 하니까, 고분의 크기를 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세기를 기준으로 목곽묘의 부장품 위치가 달라진 것도 신라 진출이 원인이다.

동북아 전체가 백제 영토인 상황에서 중국 동부의 신라가 배 타고 황해를 건너와서 한반도에 직접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륙작전은 육상작전보다 훨씬 어렵다. 신라는 남해의 섬을 전진기지화했던 것이다. 전진기지는 진공목표지점에서 가까운 대마도다.

신라의 대규모 전함이 황산강을 따라 나와 동지나해 및 황해를 항해했으므로 백제도 신라가 한반도를 침공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연히 황해에 상륙할 것이라 예상하고, 서해안 수비를 강화했다. 그래서 신라는 상륙지점으로 김해를 선택했다.

김해는 3세기에는 수심 5m 내외의 만이었고, 4세기에는 평야였다. 김해가 육지화되었다면, 만이 물러난 지역에 상륙했다. 한반도는 백제인의 휴양지 같은 곳이라, 제왕의 근위대 및 치안유지군에 급파된 전투병력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1만 내지 2만 명으로도 한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 교두보 확보에 성공하면, 증원군은 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한반도로 직행했다. 고도의 철기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백제였다.

787년 이후의 신라 일식의 최적관측지가 경주보다 저위도다. 신라는 한반도 기상관측을 5백년부터 했다. 기상관측만 하고 천문관측은 후대로 미루지 않았다. 북애도 규원사화(1675년)에서 첨성대가 천 수백 년이 지났다고 했다. 화하와 예맥은 신라가 한반도에서 건국했다고 날조했으므로 첨성대 건립 연도까지 날조할 이유는 없다. 신라가 한반도에서 천문관측하기 시작한 것은 400년 이전이었던 것이다. 교두보를 확보하자마자 천문대부터 세웠던 것이다. 문무 4년(679) 8월 10일(양력) 새벽에 일어난 태백입월 현상도 경주가 아니라, 남해안에서 관측했다.

경주로 첨성대를 옮긴 것은 이씨조선이다. 한 장소에서 천문관측했다면 통상 수도에서 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예에서 우리나라는 영토를 확보하면, 천문대부터 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나타나는 이씨조선 초의 하늘이 38.4°(38°가 아니라,)인 것으로 보아, 신라는 삼국 통일 후 한반도에서 두 군데(남해안과 38.4°)에서 천문관측했다.

“가야가 멸망한 6세기 중엽까지 계속 만들어지던 대형 고분이 가야의 출발지이자, 절대적인 맹주였던 금관가야에서만은 5세기 초엽에 중단된” 것은 신라가 교두보를 넓혀가면서 신라의 지휘관들도 전쟁터에서 죽어갔기 때문이다. 이미 김해지역은 신라의 후방이 되었던 것이다.

4세기 이후 편두(두개골이 뒤쪽으로 치우치게 인위적으로 만든 머리)인골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김해지역을 백제가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인은 편두인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반도 일대의 무수한 고분 벽화의 등장인물 가운데 편두인은 없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라는 삼국지가 사실이라면, 청구대륙 중부와 황하 하류에서 다수의 편두인골이 발견되어야 한다. 삼국지는 위, 촉, 오의 역사로 배당한 책이고, 위, 촉, 오는 3세기에 존재한 나라다. 진한을 물려받은 나라가 고구려고, 백제가 고구려에서 나왔으므로 결국 고구려인과 백제인이 모두 편두라는 소리다. 백제인이 편두라면, 백제 식민지 일본에서도 편두인골이 발굴되어야 한다. 그런데 편두인은 이 땅의 사학자들이 가야라고 착각하는 협소한 지역에서 극소수만 출토되었을 뿐이다. 고구려, 백제인은 편두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편두인은 어디서 왔을까. 중토다.

백제가 가릉강 이서 즉 티벳고원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티벳고원 북부는 중토였다. 백제는 과거 오, 월, 연, 제, 노가 있었던 중토의 상당부분도 지배하고 있었다. 한위노라는 말까지 만들지 않았던가. 말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백제인 상당수가 화하를 노예로 삼았다. “백제왕은 곤핍해서 남녀생구 일천인과 세포 천필을 내어 헌납하였다.”는 날조기사에서 보듯이 옛날에는 사람으로 조공을 하기도 했었다. 중토의 남조로 날조된 나라들은 자신들의 노예를 백제에 바친 것이다. 백제인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화하 출신의 노예들도 함께 데려온 것이다. 신라는 중토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화하를 노예로 삼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5호가 중토에 나라를 세운 지도 백년이 지났을 때라, 편두 풍습은 거의 사라졌다. 5호가 중토의 토착민에게 편두를 강요할 리 없고, 5호를 막기에 여념이 없던 남조(?)에서도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있어 편두풍습도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제에 화하의 노예는 꽤 있었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편두를 강요하지 않으므로 2세 이후로는 무시무시한 풍습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중노가 편두였다는 사실은 현역사책에도 남아 있다. 삼국지에서는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라고 했고, 후한서에서는 “진한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 한국의 마한 땅이 적당할 것 같아 마한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진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진한이라고 하였다.”고 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라는 기술은 진나라 유민 다시 말해 중노가 편두라는 뜻이다. 중노는 역사책을 날조하면서도 제 조상들이 편두였다는 사실을 없애지 못한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편두가 그 당시 미인의 조건이었을 거라고 추정하는데, 그랬다면 전세계로 편두풍습이 퍼져야 했다. 오히려 편두는 희귀풍속이다. 그보다는 종족식별을 위해 고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오지 한웅의 정벌 이후 중토로 우리민족이 상당수 이주했다. 중토의 미개 토착민들이 우리민족의 노예로 전락했으리라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중노사에도 우리민족이 세운 은나라가 노예사회였다고 했다. 화하를 노예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전적 교류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남자들은 적극적으로 토착민 여자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토착민 여자를 괴상한 모습으로 바꾸었던 게 아닐까. 편두가 미의 조건이었다면, 중노는 기꺼이 제 역사라 인정했다. 편두가 노예식별 표시라서 중노가 제 풍속임을 부정했던 것이다.(종교의식과 관련된 고대 이집트 조각품에 등장하는 6천 년 전의 여인이 편두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무녀는 신에게 바쳐진 처녀다. 편두는 태어난 직후에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므로 스스로 원해서 무녀가 된 것이 아니다. 일반인과 생김새가 똑같다면, 모든 무녀가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요컨대 종교의식을 신성시하는 시대에 무녀의 도주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서 간난아기를 데려와 편두로 만들고 무녀로 키운 것이다.)

그러나 편두인골이 중토에서 발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토의 예속민들은 죽은 자를 땅에 묻지 않았다.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송서에 “옹관은 동호의 풍습”이라 했다. 그렇다면 “염(殮)을 할 때도 관에 넣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장사지내는 도구가 없으면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두었다.”는 풍습은 누구의 풍습인가. 고려도경의 저 미개 풍습은 명초까지 지속된 중토의 풍습이다. 그러나 티벳고원은 산사태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그때 죽은 사람들의 인골이 토굴이나 땅속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209년 진승의 난 때 번조선에 귀순한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인”의 상당수도 편두인이었을 것이고, 백제가 요서를 지배할 당시, 화하를 노예로 거느렸으므로 티벳고원 남부에서도 편두인골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백제 땅에서는 중노들도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두”는 걸 자제했을 것이므로 티벳고원 남부에서 편두인골이 발견될 가능성이 더 높다.

순장제도는 백제문화(고구려문화)다. 그러나 순장제도의 특성상, 피매장자나 매장자의 선호에 달렸지, 모든 지배자의 무덤에 순장을 한 것은 아니다. 3세기 말부터 등장하는 순장제도는 백제가 수도에서 한반도에 제왕을 파견한 시기가 3세기 중반 이후라고 추정할 근거가 못 되는 것이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다 동굴로 옮겨서 천신과 나란히 모시고 이어 제사지냈다. 뒤엔 혹은 땅을 평평히 하고 장사지내는 자도 있고, 둘레에 박달나무・버드나무・소나무・잣나무 등을 심어 이로써 표시를 하였다. 이는 신시의 시절엔 능이나 묘를 쓰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중고시대에 이르러 나라는 풍부해지고 민족은 강성하게 되었으니 점차 번거로워져서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르게도 되었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가 있었고, 묘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였으며, 높이・크기・넓이・폭 모지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생겼으며, 안쪽은 벽과 바깥쪽은 덮는 것까지 고르게 정밀하고 교묘하였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태백일사 신시본기)




고구려 때 기술이 따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중고시대는 조선시대다. 국왕이라 함은 배달의 제후들이다. “땅을 평평히 하고 장사지낸다.” 함은 고인돌을 말한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조선을 부정하기 때문에 모든 분묘를 삼국시대의 것으로 몰아간다. 삼국사를 기술하는 것을 보면, 이 땅의 사학자들 대부분이 배달, 조선사를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옹관묘는 기원전부터 사용된 고대 무덤 양식의 하나인데, 황해도 일부와 경기 이남 전지역에서 해안에 고루 분포한다. 특히 영산강 유역의 수많은 옹관들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늦은 6세기 중반까지 이어진다.(역사스페셜 1권)




옹관묘가 분포하는 지역이 해안이나 평야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인구가 적은 시대에는 살기 편한 해안과 평야에 몰리는 게 당연하다. 영산강을 비롯해서 한반도 서해안은 우리나라 중심지가 있는 청구대륙으로의 연안항해도 가능한 교통의 요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전쟁은 내륙, 해안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 전역을 무대로 벌어졌다. 그러므로 백제와 신라가 옹관을 만들었다면, 해안, 내륙을 가리지 않고 옹관묘가 분포해야 한다.

한반도에는 배달시대의 고인돌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전세계 고인돌의 60~70%가 한반도에 몰려 있다. 신시가 현요수 하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조선시대의 고분은 없다. 물론 이 땅의 사학자들이 조선을 부정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날조사에서 주나라, 한나라로 접어들면서 옹관 사용이 점점 쇠퇴·소멸했다고 한 점에서 옹관은 조선시대의 풍습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송서에 “옹관은 동호의 풍습”이라 쓰여 있는 걸로 보아 소멸시기에는 시차가 있다. 송서를 기준으로 옹관이 6세기까지 사용됐다고 하는데, 역사책은 그 나라가 존속할 당시의 풍속을 적는 거지, 역사책을 쓸 당시의 풍속을 적는 게 아니다. 더구나 명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끼면서 연대를 일치시키지 않았으므로 5세기까지 옹관이 사용됐다고 단정할 근거조차 못 된다. 옹관묘가 한반도에서 사라진 시기는 몇 백 년은 더 빠르다. 큐슈의 옹관묘는 기원전 3세기부터 한반도인들이 건너가서 만들었다.

나주평야가 있고, 영산강이 흐르는 지역을 백제군이 순순히 포기할 리도 없고, 신라군이 지나칠 리도 없다. 신라는 영산강 유역을 확보하고 나서 청구대륙의 본국에서 증원군이 도착하는 항구로 사용했다. 영산강 유역은 지형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백제군과 신라군의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전략적 요충지다.

6세기 중엽까지는 한반도 남해안 대부분이 전장으로 화했다. 남해안 동부에서는 위쪽으로 밀려난 백제군이 상실한 땅을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하고, 신라군은 남해안 서부로 진출하고 있었다.

375년에 상륙작전을 실시했는데, 2백년 가까이 남해안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건 그만큼 전쟁이 치열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신라군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백제군이 점점 더 고분을 제작할 여력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백제의 반격이 거세질수록 신라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고분을 제작할 여력이 없으므로 대안을 찾아야 했다.

영산강 유역의 상당수 옹관들은 이전 옹관의 피매장자를 바꾸면서 부장품까지 새로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에 이겼다 해도, 다음 전투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므로 서둘러 무덤을 마련해야 했다. 사망자는 계속 나오고 고분을 만들 시간은 없고 해서 이전 무덤의 피매장자를 꺼내고, 사망자를 매장한 것이다.

고분에 묻히는 인물은 승자의 지휘관급에 해당하는 귀족이므로 나주에 있는 500~600개(상당수의 고분이 멸실되었다고 보면, 원래 고분의 수는 그보다 더 많았다.)에 달하는 고분의 피매장자 전부가 전사자는 아닐 것이다. 나주 고분의 피매장자 상당수가 전사자인지 아닌지는 시신의 성별을 확인하면 간단히 알 수 있다. 전사자는 남자지만, 평화 시에는 부부가 같이 묻히거나 인근에 묻히기 때문이다.

나주 복암리 3호분 96석실에서 출토된 나주 금동신은 백제나 신라 것과는 다르다? 장인이 다르면, 작품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옹관묘가 다수 있는 걸로 보아 한반도인의 무덤이고, 7세기 초의 부장품이 있는 걸로 보아 신라가 나주를 차지한 후에 완성된 고분이다. 나주 복암리 3호분은 수십 기의 무덤이 있는 걸로 보아 가족묘로 시작했다. 가족묘로 사용할 고분을 만든 걸 보면 그 지방의 지배층에 속하는 집안이었을 테니, 신라 진출 후에도 그 땅에 눌러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소한 상층의 고분은 가족묘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가지형 금동관? 고작 교두보만 마련한 지역에 왕급 인물을 파견했을 리도 없고, 무덤 부장품으로 일반적으로 만드는 물건으로 추정된다.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역시 신라 것이다. 한반도의 왕이라면 백제 후왕과 6세기 말 이후의 신라 후왕뿐이다.




한반도 동남부 일각에서 일찌기 꽃핀 가야문화를 포용한 신라문화에는 상층문화건 기층문화건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로마문화의 흔적이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흔적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신라 고분 유적과 유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비교문화적인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확연하지는 않지만, 소재와 형식, 기법 등을 감안하면, 대체로 로마문화와 공유성을 갖고 있는 것과 로마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 그리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것 등 세 가지 내용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것은 신라문화 특유의 국제성과 진취성, 독창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신라문화와 로마문화의 공유성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유물로는 나무가지를 형상화한 수목형 금제 관식을 들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이러한 관식을 단 고대 금관은 합해서 10점밖에 안되는데, 그 중 7점이 가야(1점)와 신라의 것이다.

신라의 유물 중에는 교류를 통해 로마문화를 고스란히 그대로 수용한 것들도 다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각종 유리제품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리용기류는 총 80여 점에 달하는데, 그 중 출토지가 분명한 22점은 모두가 9기의 신라 고분에서 나왔으며, 그 소재나 제조기법, 장식무늬, 색깔 등으로 보아 거의가 후기 로만유리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특이한 유물로는 미추왕릉지구에서 발굴된 유명한 ‘미소짓는 상감옥’ 목걸이가 있다. 지름이 1.8cm밖에 안되는 이 작은 상감옥 속에는 정후면에 모두 6명(그 중 2명은 왕과 왕비로 추정)의 인물과 6마리의 백조, 2개의 나무가지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 작은 유리구슬 속에 이렇게 많은 조형물을 그토록 정교하게 상감하여 장식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물은 피부가 희고 눈이 동그라며 눈썹이 맞닿아 있다. 또 콧날이 오뚝하고 얼굴이 길며 목걸이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백조가 사는 북방계 백인종(아리안)임에 틀림없다.

로마세계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 중에는 장식보검이란 특이한 단검이 하나 있다. 미추왕릉지구의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36cm의 황금장식보검(일명 계림로단검)이 바로 그것인데, 칼자루는 반타원형이고 칼집은 끝이 넓으며 표면은 금알갱이와 옥으로 상감하는 등 이른바 다채장식 양식(필리그리기법)으로 꾸몄다.

가야와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손잡이 달린 토기잔이나 용기류가 적지 않은데, 이것은 분명히 로마세계로부터 들여온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을 비롯한 중국이나 일본 등 동양문명권에서는 잔이나 용기에 손잡이를 달지 않는 것이 고금의 관행이지만, 로마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손잡이를 붙이는 것이 전통이다. 이런 것이 바로 문명간의 이질적 요소로서 교류의 증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의 유물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용기가 거의 발견되지 않아서 신라문화만이 갖는 "로마문화성"을 증언하고 있다.(비단길 따라온 로마, 로마를 넘어선 신라, 한겨레)




우선 신라는 375년에 한반도를 침공했는데, 4세기 말이 아니라 4세기인 점, 가지형 금동관이 가야라고 단정한 지역에서도 발견된다는 점, 미추왕은 262년에 즉위해 282년에 붕어했다는 점에서 소위 “로마문화의 영향”은 신라가 한반도를 침공하기 전부터 있었다. 삼국 말까지도 한반도 남부는 전쟁터였으므로 “교역품”은 절대 아니다. “신라의 위상이나 교류상을 실증하는 귀중한 보물”이 아닌 것이다.

한반도는 후국이었다. 한반도 남부는 가장 후미진 곳이 아닌가. 전쟁 전에도 “로마나 그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에서 교역을 위해 찾아올 리도 없고, 후국에서 본국이 있는 청구대륙을 넘어 교역에 나섰을 리도 없다. 교역이라면, 로마 문화의 영향을 본국이 있는 청구대륙이 더 크게 받아야 한다. 청구대륙이 동서 교역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청구대륙에서는 “로마 문화의 영향”이 발견되지 않는가.

기행(奇行)? 그 어떤 서양인이 청구대륙은 지나치고, 작디작은 한반도로 교역을 하러 온단 말인가. 명, 청을 휘젓고 다니던 그 수많은 서양인도 한반도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역사는 상식이다. 교역품이나 선물이라면, 청구대륙에서도 똑같은 것들이 발견되어야 한다. 당연히 삼국이, 우리나라가 청구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자 중국이 의도적으로 감추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로마 문화의 영향”이 아니라, “한문화 가운데서도 한반도 문화가 서방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결론이다.

전투에서 패한 백제는 퇴각하면서 철기술자 등 전쟁 무기나 운반수단을 만드는 기술자는 모조리 데려갔겠지만, 전쟁과 관련 없는 물건을 만드는 장인까지 일일이 후방으로 이송할 여유는 없었다. 청구대륙에서 바다 건너 상륙한 소규모 신라군도 격퇴하지 못할 정도면, 기습을 당한 것이므로 전쟁 초기에는 더욱 급박했을 것이다. 한반도로 진출한 신라도 고급 지휘관 및 행정관이 있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장인은 신라로 넘어간 지역에서 계속 거주하면서 생활필수품을 만들고, 이들의 무덤에 넣을 부장품을 만들고, 그들의 기술을 다음 세대에 가르쳐 발전시켜 나가도록 해야 했다.

수목형 금제 “관식을 단 고대 금관은 합해서 10점밖에 안되는데, 그 중 7점이 가야와 신라의 것”? “지금까지 출토된 유리용기류는 총 80여 점”? 이걸 알아야 한다. 노예국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한반도를 강점했을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 고분을 모조리 파헤치고, 유물을 쓸어가 숨겨놓고 있다는 사실. “손잡이 달린 토기잔이나 용기류”도 반응이 신통치 않거나 유행이 변하면, 더 이상 안 만든다.

또한 청구대륙에는 교역 등을 위해서온 백인종이 드물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강역은 우랄산맥 이서와 흑해까지였다.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 백부인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다.”(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발레곡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가 썼다. 시베리아에도 백조는 살았던 것이다.

황금이 넘쳐나는 황제나 권력자에게 황금 장식품을 선물해봤자, 환심을 살 수 없다. 뒤떨어지는 기술로 만든 것이라면 냉담한 반응일 것이다. 차라리 신기한 동물을 선물하는 것이 낫다. 기린이나 코끼리는 운반하기가 힘들지만, 백조 같이 작은 동물은 쉽게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코끼리는 동남아에도 살았다. (티벳의 신화에도 코끼리가 나오지만, 티벳은 명 이전까지 중앙아시아에 있었으므로 티벳고원에 코끼리가 있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런데 단군세기에는 33세 단군 감물 2년에 주나라 사람이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고 했다. 중토 역시 무역을 했으므로 주나라가 코끼리 가죽을 바치는 것은 문제가 없다. 티벳고원에 무역할 만한 게 있었을까. 은이 노예사회였다는 건 중국도 인정한다. 중토는 노예무역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비용도 황금 장식품보다 엄청 싸게 먹힌다. 본국에 가본 적이 있는 장인이라면, 다른 장인과의 차별성 부각을 위해서라도 이왕이면 그가 본 특이한 것을 만들려고 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쨌거나 한반도 남부까지 서양인들이 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반도에서 로마까지 영향을 미치려면, 우선 청구대륙의 본국부터 영향을 미치거나 최소한 한반도 이북의 만주에서도 가지형 금동관이나 유리제품 등을 만들었어야 했다. 결국 중국 및 일본이 수많은 유물을 감추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태백일사에도 백제가 왜를 시켜 신라를 침범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가야를 침범했다는 기록은 없다. 가야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백제 영토와 직접 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무한 일대에서 건국한 신라는 황산강(양자강) 이남의 백제 영토까지 진출하며 성장한 나라다. 백제는 고구려와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으므로 신라가 자국 땅을 침공할 여력을 갖지 못하도록 왜로 하여금 신라를 수시로 침입하게 한 것이다.

왜가 신라성을 함락시킨 것(광개토경대훈적비)은 시기적으로 신라가 한반도를 침공한 뒤에 일어난 사건이다. 신라가 한반도를 침입하자, 백제가 보복에 나선 것이다. 백제가 왜를 사주한 것이지, 가야군이 주축이 되어 왜와 합동작전을 펼친 것이 아니다.

6가야. 부여라는 이름은 3천년을 두고 6번이나 등장한 나라지만, 가야는 동시에 여섯 나라나 있었다고 한다. 여섯 나라가 일시에 가야라는 국호를 사용했다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 신라 동쪽에 소국이 여섯이나 된다면, 당장 신라에게 정복되고 만다. 광개토경대훈적비에도 가야라고 나오지 가야가 6국이라는 언급은 없다. 이 역시 우리나라의 전쟁을 가상의 나라에 배당하기 위한 수법이다. 또한 중앙집권국가로서 발달하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고 날조하기 위해서다. 연맹체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중토의 나라다. 삼성기전 상편의 “연나라 ‘추장’이었던 위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국사기에서 가야에 관한 기술을 대량으로 빼버린 것은 성계와 주원장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중국사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인가 있는 것은 삼국의 역사였지만, 삼국의 역사를 훔치면서 가야의 역사를 남겨두면, 삼국사기가 아니라, 가야국사가 되므로 같이 빼버린 것이다. 하긴 가야국사도 유용하게 써먹을 것이다. 5호 16국의 소국들이나 춘추전국 시대의 소국들에 배당해야 할 역사도 있어야 하니까.

일본의 최초왕은 응신이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신무가 최초의 왕이라고 적혀 있지만, 18세기 이후 역사왜곡하면서 꾸며낸 것이고, 다무라 엔초 등 일본학자들도 응신 혹은 인덕을 일본 최초의 왕으로 본다. 일본 최초의 왕은 응신이다. 인덕(닌토쿠 313~399. 간지 두 바퀴에 해당하는 120년만큼 끌어올려졌다는 이노우에 미쓰시다의 주장에 따르면, 인덕은 대략 433년에서 519년 사이에 백제 후왕으로 있었던 인물이다.)이 매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덕이 생전 처음 보는 새를 보고 주군(酒君)에게 무슨 새냐고 묻자 주군이 “백제에는 이런 종류의 새가 많습니다. 잘 길들이면 사람을 곧잘 따릅니다. 또한 빠르게 날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새도 잡아옵니다.”고 대답했다. 이 매를 길들이고 실제로 매가 수많은 꿩을 잡은 날, 비로소 응감부라는 부서를 설치했다고 일본서기에도 나온다. 중국왜라면, 매가 백제, 신라 땅에는 날아가면서, 신라, 백제와 인접한 왜만 피해 날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인덕은 열도에서 태어났고, 응신이 일본 최초의 왕이다.

열도왜가 중국왜가 옮겨간 것이 아니라면, 倭라는 국명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倭는 지극히 아름답지 못한 이름이라서 왜(倭)가 아니라면 倭라 이름 붙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구당서) 의미가 좋지 않은 말이라서 일본도 왜(倭)라고 부르는 것을 엄청 싫어한다. 그래서 일본은 18세기 이후 倭 외에도 和, 大倭, 大和(왜는 백제 식민지고, 대화는 신라 식민지다. 하지만 일본사를 늘리기 위해 중국왜도 열도왜에 슬쩍 포갠 일본이다. 신라 식민지도 백제 식민지에 포개버렸다.)까지 만들어냈다. 倭, 和, 大倭, 大和의 이두식 발음이 모두 야마토라고 하면서. 이유는 응신이 중국왜의 왕이었거나 왕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응신은 백제 출신이다.

倭는 왜 혹은 위라는 두 가지 음에 왜국, 두르다, 순하다, 추하다는 뜻이다. 왜국은 왜(倭)라는 국명이 생겨난 후에 파생된 의미다. ‘왜소하다’라는 뜻도 있다고 하지만, 편두인골이 난장이라는 지적은 없다. 왜인은 청구대륙 끝으로 이주하기 전, 금사강 상류 너머 호수 일대에 살았다. 화하인 것이다. 화하가 난장이가 아닌데, 같은 종족 왜노가 난장이일 수는 없다. 왜가 왜소하다는 뜻이면, 백제인들이 처음 열도로 건너가 나라를 세울 때 왜라고 했겠는가. 키 작은 백제인들만 건너갔던가.

‘왜소하다’는 말은 일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