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vs Truth/Occidental'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7.14 고대인의 비행물체
  2. 2005.10.21 고대 이집트 문자 해독방법 (2)
  3. 2005.07.15 초 고대 문명은 존재 했을까?
  4. 2005.06.10 고대 수메르 문명
인류가 하늘을 날기 시작한 역사는 언제부터였을까? 최초로 동력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 이전에 이미 하늘을 날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현존하는 고문서의 기록과 고대 문명의 발굴을 통하여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사실들을 살펴보자.

지난 2호에 소개한 신화나 설계도면, 이집트의 사카라에 있는 비행기의 나무모형, 남미 콜롬비아의 시누문명 유적지에서 발견한 황금비행기, 여러 고문서에 나타나는 비행 물체들 외에 다른 문명의 유적들도 살펴보기로 하자.


▲ 마야 팔렝케‘비문의 사원’석관의 덮개

ː아비도스 사원의 3,000년 전 비행물체

아비도스 사원은 3,000여 년 전 이집트 카이로에 있던 신전이다.

초기 왕조시대부터 성지로서 이집트 신앙의 중심지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었으며 부활 신앙의 바탕인 오시리스 신을 믿어 분묘와 신전을 많이 축조했다.

이집트 신앙의 최고 중심지인 바로 이 사원에서 고대에 비행기가 있어 하늘을 날아다녔다는 것을 의미하며 새로운 고대사 해석의 기점이 될 만한 조각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MUFON(Mutual UFO Network)의 심리학자이자 최면요법가인 루스 후버 박사이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이집트를 여행하다가 아비도스 사원에서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진 덧판 아래에 더 오래된 판넬이 드러나 있는 부분의 벽 판넬에서 충격적인 그림을 발견하였다. 고대의 비행기 이미지를 양각해 놓았는데 현대의 비행기나 헬리콥터와 너무나도 유사하였다.

맨 위쪽에 그린 것은 헬리콥터로 프로펠러를 장착하여 회전날개에서 생기는 양력과 추진력으로 비행하는 헬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날개는 일직선으로 새의 날개와는 전혀 달랐다. 앞쪽에는 조종석인 듯 돌출한 부분이 있고, 중앙에서 후미 쪽으로 연결된 몸체 역시 헬기와 비슷하다.

헬리콥터에 대한 발상은 1490년경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에서 처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미사일 모양의 물체이며 현재의 비행기 모양과 비슷한 물체인 것이다. 유선형 몸통 구조를 가진 비행물체로 공기의 저항을 적게 받도록 설계한 듯하다.

맨 아래에 있는 것은 현대의 전투기와 비슷한 형태로 조종사가 탈 수 있는 조종석을 뚜렷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꼬리부분이 완전한 수직을 이루어 고속성과 기민성, 비행성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공기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미끈하게 만든 앞부분이 특징적이다.

이것은 1999년 미국 폭스 텔레비전 방송국(FOX television)이 ‘Opening the Lost Tombs: Live from Egypt'라는 프로그램으로 소개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 외에도 아비도스 사원에는 여러 가지 물체들; 날개 달린 곤충모양의 물체, 물고기 모양의 물체 등이 있었다. 아비도스 사원에서는 하늘을 나는 비행물체와 관련한 것들이 상당히 많이 나왔고 이집트 박물관은 1982년에 글라이더와 헬리콥터 모습을 한 목각 골동품들을 공개한 바 있다.

이들은 유사한 종류의 물체를 나타내는 상형문자로 볼 수 있으며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물체들을 자연스럽게 형성하였거나 대상 없이 그려낸 상상의 산물로 보기에는 매우 구체적이며 자세하다.

현대의 비행물체와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오래 전의 그들이 어떻게 이런 물체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들의 과학문명 발달수준은 어디까지였을까 하는 호기심을 자아낸다.

ː마야의 우주선

1949년부터 1952년 사이 멕시코의 유명한 고고학자 알베르토 루스 루일리에르 박사는 멕시코 고원에 위치한 마야의 고성 팔렝케에 있는 ‘비문의 사원’에서 현실(玄室)을 발견했다. 계단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높은 고대(高臺)에 있는 사원 전실로부터 습기로 인해 미끄러운 경사진 층계가 약 25미터 깊숙이 즉 지표면에서 2미터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다.

신전바닥을 조사하다가 안 바닥이 커다란 돌로 되어 있음을 알고는 그것을 들어올릴 궁리를 하였다. 돌의 양끝에 구멍이 있음을 발견하여 들어 올리니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왔다. 그 계단은 흙과 모래로 메워져 있었는데, 4년에 걸쳐 그 흙과 모래를 제거, 드디어 1952년 6월 5일, 인물과 무늬가 새겨진 무게가 5톤이나 되는 거대한 석관의 덮개에서 화려하게 단장한 9위의 신관과 기이하게 머리를 장식한 한 청년 부조를 발견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그저 단순한 마야인의 고대 신화로 간주했었다. 그것을 판별해 낼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우주 왕복선을 발사한 후에야 이 우주항공연구에 참여했던 미국과학자들은 깨달았다. 바로 아름답고도 정교한 석상으로 묘 덮개 판에 새겨진 그림이 우주를 비행하는 우주조종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묘 덮개 판은 하나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틀 중앙에 어떤 인물이 몸을 앞으로 숙이고 앉아 있다. 조종실에 앉은 우주비행사처럼 헬멧을 쓰고, 그 헬멧에서 두 줄기 호스가 나와 뒤쪽으로 넘어간다. 두 손으로는 제어장치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위로 올린 한 손은 마치 앞에 있는 단추를 눌러 미세한 조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왼발 뒤꿈치로는 페달을 밟고 있으며, 코앞에는 산소기구가 있다. 조종사 뒤에는 내연기관과 비슷한 설비가 있다. 내연기관 상자 뒤에 화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현대와는 많은 변형을 보이지만, 그림 중에는 이 우주선의 공기 주입구, 배기관, 방향타, 안테나, 발판, 연 파이프 및 각종 계기판들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이 그림의 사진을 본 미국 우주항공국(NASA)의 전문가들은 무척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으며, 한결같이 그것을 바로 고대의 비행선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오래된 고대유물이 담고 있는 구체적인 비행체 구상과 그의 섬세한 지식은 너무나도 특이해서 최근에야 이해할 수 있었으며 많은 학자들도 이로 인하여 크게 놀라고 있다.

요즘의 비행기술만 보아도 지난 500년 간 인류가 이룩한 과학문명의 집결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비행기 제작기술은 그 시대의 과학수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에 그런 비행기를 실제로 사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 당시에 비행기 제작을 구상하였다거나 모형비행기 정도라도 시험 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대과학의 높은 기술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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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이집트 문자의 발전(發展)

이집트문자의 발전을 알려면 먼저 이집트의 발전을 알아야 한다. 고대 이집트는 대개 고왕국(古王國, Old Kingdom), 중왕국(中王國, Middle Kingdom)신왕국(新王國, New Kingdom)으로 나뉜다. 또 그 사이사이에 분열기인 제1중간기,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제2중간기 등이 있었고 신왕국 이후에는 그리스 인이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부터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 황제 때까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집트어는 차차로 발전해 왔으며 처음에는 글자 수도 얼마 안 되었던 것이 점점 늘어나 신왕국시대에는 2000~3000개 정도로 늘어났다.

그 한 예가 고왕국과 중왕국시대에는 없었던 말(馬)이란 가축이 신왕국시대에는 들어와서 그 후 신왕국시대의 상형문자를 보면 말을 뜻하는 상형문자들이 있다. 
 

이집트 문자의 범주 
이집트문자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먼저 대부분의 상형문자(象形文字)처럼 한 글자가 하나의 뜻을 가지는 표의문자(表意文字), 그리고 한 글자가 하나의 음가(音價, 소리값)를 가지는 표음문자(表音文字), 그리고 그 모양새와는 달리 속뜻을 가지고 있는 상징문자(象徵文字)가 그것이다.

예를 들자면 상형문자 중에 '오리'가 있다. 이 오리는 'SA' 라는 음을 가지고 있으며 오리를 뜻한다. 그러나 그 속뜻은 '아들' 이란 뜻으로 이집트 벽화 같은 걸 보면 오리 옆에 태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태양의 오리'가 아니라 '파라오의 아들'이란 뜻이다. 태양은 파라오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집트 문자의 옆모습

당신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이집트 사람들을 끄집어 내 보자. 당신의 지식 속에는 이집트 인들이 손에 빵을 들고 딱딱한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옆모습이 거의 90%이상을 넘는다.

 

이집트 문자의 해독(解讀)  

이집트 문자는 로마시대 이후 기원후 18세기까지 침묵의 언어로 남아 있었다. 1세기의 유태인 필로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이른 바 '신성(神聖)한' 문자들 안에 자신들의 철학을 드러내고 있다. 이집트인들의 언어는 그 자체가 곧, 갖가지 상징들로 표현되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또 3세기의 플로티노스(신플라톤주의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집트 현자들은 상징기호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들은 상징기호들을 써서 직관적으로, 이를테면 굳이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고도 자신의 의도를 십분 전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상형문자는 그 하나하나가 저마다 학문 또는 지혜의 한 체계를 이룬다고 하겠다."

이집트가 멸망한 직후의 이런 대사상가들은 이집트 어를 조금은 할 줄 알았다는 뜻이다. 또한 초기의 기독교인들도 상형문자의 탁월함에 놀랐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7세기, 아라비아 군은 이집트를 넘어 서쪽으로 진출해갔고 그 과정에서 이집트는 아랍에게 정복당한다. 그 후 근현대(오스만 투르크 제국)까지 아랍의 지배를 받으면서 '전혀' 다른 의상과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전혀' 다르게 바뀌어 가면서 이집트의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문명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집트 문자도 유럽 인과 아랍 인들에겐 무슨 마법의 주문 같은 것으로 여겨져 왔다.

 

[로제타석, Rosetta Stone]

18세기, 정확하게는 1799년 8월의 로제타(Rosetta) 마을에서는 프랑스 나폴레옹 장군의 원정대 장교인 부샤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참호를 파다가 역사적인 돌덩어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돌덩어리가 그 유명한 '로제타 석(石)'이다. 돌을 보면 3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리스 어, 데모틱 어(이집트 말기에 민중들에게서 쓰였던 언어), 그리고 상형문자로 쓰여져 있다. 사실 이것은 기원전 196년의 사제들이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다. 이 돌은 이집트가 영국 넬슨 제독에게 점령당하면서 영국에게 전리품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프랑스 인들은 사본을 복제해 놓았다. 그 후 수 년간 사람들은 상형문자를 해독하려고 애썼다. 18세기, 상형문자들을 소리없는 문자로 생각하던 독일인 키르허(Kircher)가 해독에 실패했다. 또 영국인 토머스 영(Thomas Young, 1773-1829)도 몇 개의 기호는 해독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샹폴리옹의 해독

그 후 쟝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 Franois Champollion, 1790~1832)이 등장한다. 샹폴리옹은 1790년 피자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엄청난 노력 끝에 로제타 석의 타원형의 글자('카르투슈'라 하며 이집트 어로는 SHEN이라 읽는다. 신성한 왕의 이름 둘레에 이런 것을 친다)를 읽어냈다. 1828∼1829년에는 이집트에 가서(샹폴리옹은 이집트에 단 한 번 밖에 가 보지 못했다)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신의 해독을 확인하여 정확하게 자신의 해독이 맞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후에도 영국의 가디너 경(sir A.H.Gardiner)의 연구가 있었고 그는 아주 유명한 Grammar>라는 책을 저술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집트 문자의 알파벳 체계

이집트어에는 자음(子音)만 있고 모음(母音)은 없다.

 

먼저 제일 위에 있는 이집트 독수리, A로 발음된다. 이것은 모음이라고 하기 보다 소리 약한 자음일 뿐이다.

두 번째 꽃핀 갈대, 이것도 역시 소리 약한 자음이다.

세 번째 팔을 쭉 뻗은 그림은 행위를 상징한다. A와 E의 중간음 정도라고 생각하자.

다음은 새끼 메추라기다. 이것은 W로 쓰여 있지만 실제 발음은 OU에 가깝다고 추측된다.

똑바로 선 다리는 B음이 난다. 다리 밑의 네모는 자리와 튼튼한 토대등을 나타내며 P로 발음된다.

그 다음 뿔 달린 살무사는 남성을 상징하며(참고로 여성은 독수리다. A와는 다른 암독수리가 있다.) F로 읽힌다.

올빼미 혹은 부엉이는 M을 나타내며 전치사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안에, ~안의 것' 등을 뜻한다.

 

 맨 위는 물이다. N으로 발음된다.

그 다음은 입인데 헤 벌린 입이다. R이다.

건축물의 윤곽을 나타낸 꼬불꼬불한 미로 같은 것은 H로 발음된다.

꼬인 그림은 아마천을 꼬아 만든 심지다. H로 발음된다.

그 다음은 아직도 학자들이 무엇인지 모르는 KH발음, 사실은 KH보다 CH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흙이나 이물질을 걸러내는 체라고 생각된다.

암짐승의 배는 KH로 소리난다.

빗장은 S다. 빗장 외에 귀족들이 접어 다니던 옷감도 S로 발음된다.

제일 위에 있는 것은 물이 가득 찬 수조다. SH로 읽힌다.

다음은 언덕이다. Q로 읽힌다.

손으로 엮어 만든 작은 바구니, 손잡이도 달렸다. K로 읽힌다.

그 다음은 항아리 받침이다. G로 읽힌다.

다음은 둥근 빵이다. T로 읽힌다.

다음은 짐승에 씌우는 멍에다. TSH(츠)에 가깝다.

주먹 쥔 손이다. D로 읽힌다.

다음은 꼬리로 서 있는 코브라다. DJ로 읽힌다. JESUS의 J발음과 비슷하다.이것들이 이집트 상형문자의 알파벳이다.  

로마 알파벳과는 다른 점도 많고 없는 글자도 많은데 이것을 사용하면 당신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상형문자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아까 알파벳에서는 못 보았던 글자들이 있다. 이것은 이집트 알파벳을 로마자(字) 알파벳에 맞추기 위해 끼워 넣은 것이다. 그 중에는 사자가 있다. 이 사자가 L로 발음된다. 그리고 당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따져서 남자라면 이름 뒤에 남자를 그려 놓아야 한다.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이집트어의 어순은 동사 + 주어 + 목적어 + 부사 + 명사 + 형용사 순이 기본적이다. pretty girl(예쁜 소녀)을 이집트식으로 표현한다면 girl pretty 가 되는 것이다.  

이집트어의 기본체계를 살펴보자. 먼저 이집트어의 체계도부터 보자. 이 체계도를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살펴보면 Egyptian Signs('이집트 문자' 정도로 해석하자) Ideograms(표의 문자)Phonograms(포르노그램이 아니다 --;;, '포노그램', 표음 문자다)으로 나뉜다. 먼저 Ideogrames를 보자. Ideogram은 Object(목적어) 그리고 Actions(활동, 행동)으로 나뉜다. 즉 목적어 같은 것들은 소리는 없는 표음문자인 것이다. 그리고 Phonograms는 1,2,3-letter signs로 나누는데 뒤에 배울 한소리글자, 두소리글자, 세소리글자를 뜻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소리글자는 음절이 하나인 글자를 뜻한다. 두, 세소리 글자도 마찬가지이다. 

한정사, 인칭대명사

 생소하지만 이집트어의 기본인 한정사(限定詞)는 영어에도 없고 우리말에도 없고 같은 고대어인 중국어에도 없는 품사이다. 한정사가 무엇일까?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알파벳을 배웠을 때를 기억해 보자.

분명히 이집트 알파벳에는 모음이 없다고 말했다. 모음이 없기 때문에 이집트어에는 엄청나게 많은 동음이의어(예를 들어 DSK라고 써놓으면 desk인지 disk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한정사이다. 그 뜻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단어 뒤에 그 단어가 가지는 성질을 써놓은 것이다.

아까 말했던 DSK라 쓰고 그 뒤에 '가구'라고 써 놓으면 그것이 책상이라는 뜻의 desk를 나타낸다는걸 알 수 있다. 이 경우 뒤에 써 놓은 '가구'가 한정사이다. 이집트의 한정사는 매우 많았다. 밑에 보이는 그림들이 모두 한정사다.

한정사는 매우 많았다. 이것들이 다는 아니다. 앞에서 당신의 이름을 쓸 때 당신 이름 뒤에 남잔지 여잔지를 알 수 있게 남자나 여자를 그려 놓으라고 했다. 그 남자와 여자 그림도 한정사이다.

 다음으로 인칭대명사(人稱代名詞)를 살펴보자. 인칭대명사란 나, 너, 그, 그녀 등의 사람을 대신하는 명사다. 이집트 어에는 3종류의 인칭대명사가 있다.  

1.Suffix-Pronouns(접미 인칭대명사)

이것들이 접미 인칭 대명사이다. 그럼 이 대명사의 역할을 보자.
명사 뒤에 붙어서 명사의 소유를 나타내기도 한다(his house etc.).
전치사 뒤에 붙어서 전치사가 가리키는 것을 대명사로서 받을 수 있다(to me etc.).
이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구실로써, 동사 뒤에 붙어서 주어가 되어 준다(He say etc.).
 

2.Dependent-Pronouns(종속 인칭대명사)

아까와 비슷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것들은 어떤 구실을 할까? 이것은 문장 맨 뒤에 붙어서 목적어가 되어 준다(You send me). 제일 위의 구실이 가장 큰 것이고 나머지는 별거 없다.

 

3.Independent-Pronouns(독립 인칭대명사) 

이것은 동사가 없을 때, 다시말해서 동사가 be동사(am. are, is)일 때 주어가 되어 준다. 참고로 이집트어에는 be동사가 없다. 

한소리, 두소리, 세소리글자

한소리, 두소리, 세소리글자란 이집트 어 단어의 음절(音節) 수로 구분한다. 즉 음절이 1개면 한소리글자, 2개면 두소리글자, 3개면 세소리글자이다. 한소리글자는 우리가 배웠던 알파벳이 거의 95% 이상을 차지한다. 그리고 알파벳에 끼지 못한 한소리글자들(이것들을 알파벳으로 간주하기도 한다)을 소개한다.

여기 있는 글자들이 바로 한소리글자 중 알파벳에 못 낀 것들이다.  

다음으로 두소리글자를 보자. 

다음 세소리글자를 보자. 세소리글자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두소리와 세소리가 섞여 있는 자료를 소개한다.

숫자와 시간

상형문자로 나타내는 이집트의 숫자를 살펴보자. 

맨 위의 유니트란 하나하나를 가리킬 때 쓰인다. 1이란 뜻.

두번째 ten은 10,

세 번째 hundred는 100,

네 번째 thousand는 1000,

다섯 번째 ten thousand는 10000,

여섯 번째 hundred thousand는 10만,

일곱 번째 million은 100만이다. 

이집트의 시간에 관해서 알아보자. 특히 알아야할 것은 inundation season은 작물이 자라고, 씨를 뿌리는 계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winter는 겨울이라기 보다 농한기, summer은 나일 강의 범람기라 할 수 있다. 이집트의 계절은 모두 3개였다(4개월씩).

이집트의 왕과 신

이집트의 왕들을 상형문자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들을 상형문자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상형문자의 단어를 공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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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말이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기 까지에는 6천만년이 걸렸다. 개미의 조상은 1억 5천만년 전에 살았는데 현재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이에 비해 인류는 고작 200만년 동안에 해상과 육상, 공중뿐만 아니라 우주를날 수 있게 되었다. 인류의 획기적인 진화에 비해 인류의 친척쯤 되는원숭이들이 아직도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다니고 있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같은 사실로 보아 인류는 존재가 밝혀지지 않은 다른 문명, 즉 인류의 조상보다 수백만년이나 더 나이를 먹은 다른 은하문명에 의해 특수한유전적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진화의 속도가 촉진되었다고 가정할 수도있는 것이다.특히 인류의 기억속에 남겨진 문명의 잔재를 살펴보면 인류 스스로의 힘만으로 진화하여 왔다는데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게 된다.

인류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를 고작 6천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대 인도의 브라만은 우주의 존속기간을 43억 2천만년으로 계산하였다. 레바논의 드루스파는 천지 창조의 시작을 34억 3천만년 전으로 설정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63만년 동안 천체 관측의 기록을 계속하였다.

고대 그리이스의 천문학자 하파프코스는, 앗시리아의 연대기는 27만년 전으로 소급된다고 하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게네스는 이집트의 천문학 기록은 B.C 49219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곳에 373회의일과 832회의 월식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비잔틴의 역사가 싱켈루스는 이집트의 여러 파라오의 연대기는 36525년 동안 모든 일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카펠라는 이집트의 현자들이 세계에 지식을 나누어 주기 전에 4만년이상 몰래 천문학을 연구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바빌로니아아의 태음력과 이집트의 태양력의 시작은 기원전 11542년에 일치되어 있다. 인도의 달력은 기원전 11652년부터 시작되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아틀란티스가 가라앉은 시기는 기원전 9850년이라고 했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책에는 시간의 시작이 기원전 9600년에 있었다고 하였다.

보통 나일강 유역에 최초로 국가가 세워진 연대를 기원전 4천년으로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와 동시대 사람들은 1만7천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의 고문서를 보존하고 있다고 하였다.

게다가 이집트의 역사를 서술한 이집트의 신관 마네톤은 그의 저서에서 기원전 1만 7천년보다 훨씬 오래된 책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리고비잔틴의 역사가 스넬리우스는 이집트의 신관들이 3만 6천 5백 12년 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쓴 {고대연대기}라는 고문서에 대해서도 썼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는 알렉산더 대왕보다 4만 8천 8백 6십 3년이나 오래된 기록을 이집트의 신관들이 보관하였다고 썼다.

이러한 사실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약 5만년전에 인류가 벌써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문자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문명이 번창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는 현 인류의 문명의 역사는 고작 6천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 이전의 역사는 역사라고도 할 수 없는 원시상태였다고만 배워왔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나에 대해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증거들은 최소한 인류의 문명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이상으로 오래 되었음을 입증한다. 또한 잊혀진 문명의 잔해들이 보여주는 문명 발달의 정도는 현대 인류에게 과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정확한인식을 요구한다. 현재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이 고대에 존재했었고, 어떤 이유로 일순간에 멸망해 버렸다는 증거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기 때문에 적어도 현대 인류가 6천년동안 이룩해 온 문명의 성과에 대해 오만해져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고대문명에서 읽게 된다.

즉, 현재의 인류문명이전에도 고도로 발달했던 고대문명이 다수 있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후예들이라는 것이다. 그럼 그 문명의 출발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 그것이 앞으로 말할 외계의 문명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안데스 산중에는 티아와나코라는 폐허가 된 고대도시가 있다. 이곳은 해발 4천미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해발에서는 인간이 생활하기 적합하지 않다. 그런데 이곳에서 항구의 흔적이나 조개껍질 등 바다동물의 화석 따위가 발견되었다. 즉 이 도시가 일찍이 바다근처에 있었거나 바다와 같은 높이에 있었음을 말한다.

이 티아와나코의 근처인 티티카카호수에서는 깊이 8미터 지점에서 하나의 무게가 200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덩이로 만든 벽의 파편과 건물 파편 등이 인양된 바 있었다. 벽은 포장된 도로 양측을 따라 1킬로 이상이나 뻗어 있었다.

타이와나코의 고고학연구소 소장 루벤윌레이 교수는 그 유적을 귀족의장례식이 행해졌던 해안사원이라고 단정지었다.

인도에는 흑파고다라는 이름의 사원이 있는데 이 사원의 높이는 75미터이며 지붕은 2,000톤이 넘는 돌로 만들어져 있다. 이 정도의 무게를들어 올리려면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기중기의 10배 이상의 힘이 있어야움직일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건물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이다. 이 등대는 기원전 3세기경에 프롤레마이오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팔로스 섬 위에 세워졌는데 그 높이가 150~200미터에 달하였다. 대략 16층 정도의 건물의 높이와 맞먹는 셈이다. 인류가 이렇게 높은 건물을 만드는데 필요한 건축술을 익힌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외에 소멸된 고대문명의 거석 건축물은 많다. 이집트의 피라밋, 레바논의 바르베크에 있는 4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쥬피터 신전의 토대, 영국의 스톤 헨지의 규질사암열석군, 그래스톤베리 주위에 있는 30마일에달하는 석조 12궁 칼렌더, 바다 속까지 뻗어 있는 프랑스의 카르나크의 거대한 입석열주, 페루의 삭크사이와만에 있는 거대하지만 완전히 다듬어 만든 성채등이 있다.

고대 마야인들은 수레바퀴를 알지 못했으며 도자기나 철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정확하게 천체의 회전 주기를 알고 있었다. 지구가 태양주위를 회전하는 시간은 그레고리오력에 의하면 365.242500일인데 비해마야인들은 365.24219일이라고 계산하였다. 대단히 정확한 천문기기를갖춘 오늘날에는 1의 길이를 365.242198일로 보고 있다. 또한 그들은 태음력의 길이도 0.0004일의 오차밖에 나지 않을 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정확한 고도의 지식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대단히 먼 과거로부터 지식이 축적되었음이 틀림없다.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의 역사에는 일식이373회, 월식이 832회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 횟수의 일식과 월식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만년 이상에 걸친 관측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천체관측이 시작되었음을 밝히는 자료도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춘분 무렵에 태양은 별자리중 물고기자리 속에 있다. 그러나 2천년 전에는 양자리속에 있었다. 이렇게 태양은 2만 5천 9백 20년에 걸쳐서 천체를 일주한다. 그런데 2만 5천 9백 20년 이라는 숫자를 수메르의 수많은 고문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수메르인들이 2만 5천 9백여년 이상 천체관측을 했음을 알리는 간접적인증거가 된다.

또한 18세기에 {걸리버 여행기}를 쓴 영국소설가 스위프트는 화성에 2개의 위성이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고대 학문과 고대서적 및 사본에대한 관심이 대단하였고, 이것들을 연구하는 도중에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더구나 이 당시에는 태양계의 행성에 위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는 성능 좋은 망원경도 없었다. 이후 156년이 지난 1877년에야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 사실이 증명되었다. 나아가 스위프트가 2개 이상의 회전시간과 성격에 대해 밝힌 내용은 후에 얻어진 정확한 정보와 많은 유사점을 가졌다.

소위 보이니크 사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뉴욕의 고대 유물 수집가 보이니크가 로마에 가까운 어떤 옛성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는 상자속에서 이 사본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 사본에 붙어있는 종이에는 아리송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 이같은 스핑크스는 그 주인 이외의 명령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고. 이 사본은 암호해독가에 의해서도 컴퓨터에 의해서도 완전히 해독되지 못하였다. 이 사본은 13세기 혹은 15세기에 씌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알아 볼 수 있는 내용만으로도 식물학적, 천문학적, 생물학적 문제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 중에는 현미경을 사용해야만 관찰할 수 있을 정도의 잎이나 뿌리의 횡단면을 그린 그림이 있는가하면, 페가수스의 중심과 안드로메다의 띠와 카시오페아자리 등에 대한 그림이 있다고 한다. 1920년대에 이 그림을 연구한펜실베니아 대학의 둘리틀은 그 그림이 틀림없이 성운을 표시한다고 단정짓기에 이르렀다.

1946년 프랑스 인류학자 그리올과 디틀렌은 당시 서부아프리카 말리공화국의 반디아가라 고원과 홈보리산 일대에 살고 있던 22만명 정도의 도곤족과 인근의 세 종족의 전설을 4년여간 수집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1951년 {수단 계통의 시리우스 시스템}이란 보고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보고는 1976년 언어학자이며 천문학자인 템플에 의해 도곤족의 전설이 천문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도곤족은 50년마다 한 번씩 시구이 축제를 벌인다. 이 축제의 날짜는 포 톨로라는 별을 보고 정하는데, 이 별은 약 50년을 주기로 제자리에 돌아오는 별인 것이다. 포라는 말은 도곤족이 먹는 곡식중 가장 알맹이가 작은 것의 이름이다.

* 그들이 기다란 호스 같은 것을 돌리며 그들 선조의 소리라고 하며 내는 소리는 UFO 가 내는 소리라는 것을 그방 알아챌 수 있다.

우리는 남쪽 하늘에서 제일 밝은 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일명 개의별, 천랑성이라고 불리는 시리우스이다. 고대부터 알려진 시리우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19세기의 천문학자 베쎌은 1834년 시리우스의 궤도가 마치 뱀이 기어가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그 후 12년에 걸쳐 시리우스를 관찰한 결과 시리우스의 궤도가 미지의 천체의 인력으로 주기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미지의 별에 시리우스 -B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상되는 위치를 끈질기에 찾았지만 당시의 최고 성능을 지닌 망원경으로도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1862년에 대형 망원경 제작으로 유명한 클라크에 의해 제작된 73cm짜리 망원경으로 확인되었다. 바로 이 별이 도곤족들 사이에서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별, 포이다.

오지에 사는 이들에게 누가 천문학적 지식을 알려 주었겠는가 ? 그들의 추장 오고템메리는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놈모의 후예라고 한다. 하늘 나라에서 놈모는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의 섬유를 가지고 지구에 왔다고 한다. 그는 땅을 만들고 식물과 동물을 만든 다음 사람을 창조했는데, 이들로부터 지상의 여덟개 종족이 생겨났으며 그들은 끝없이 오랜세월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전설의 사실이라면 그들은 시리우스-B에서 온 외계인의 후예라는 말이 된다.

시리우스 별까지의 거리는 7, 8 광년이다. 현재의 과학으로도 시리우스까지의 비행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곤족들은 놈모를 기리는 축제를 50년마다 벌이고 있다.

1633년 종교재판의 재판관들은 고문실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취조하였다. 그것은 갈릴레이가 지구는 둥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가 우주공간을 회전하는 구라는 사실은 이미 인류사의 여명기에도 인도, 이집트, 아메리카 각지의 경전과 고문서 속에 씌어 있었다. 특히 이집트인들은 이러한 사실 이외에 지구가 다른 행성들과 같은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천문기기나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지식도 없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지구는 공과 같고 그것이 회전하기 때문에 낮과 밤이 있다고 말했으며, 유대의 경전 {카바라}에는 인간이 사는 지구는 원처럼 회전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어떤 지역이 밤일 때 다른 어떤 지역은 낮이라고 적혀있고 그 근거로 태고의 서적을 들고 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로마 교황에게 제출한 논문의 서문에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고대인들이 쓴 책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고대인들은 조수의 간만이 달과 관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자 셀레우코스는 바다의 간만을 달의 인력에 의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하였다. 중국에서도 해면 상승의 원인이 달의 인력이라는 것에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았다. 로마의 시저도 만월 때 조수가 만조가 된다고 기록하였으며, 영국에 상륙하기 위해 조수가 만조가될 때까지 기다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16세기의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가 조수의 간만은 달에 의해 일어난다는 이론을 발표했을 때 그는 몹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반박할 수 없었다. 친척 중 한 사람이 마녀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고 그의 어머니는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죽었기 때문이다.

슬라브인들은 먼 옛날 이 세상에는 물밖에 없었고 훗날 땅이 생겼다고 하였다. 인도의 {리그베다}도 세계는 우주를 가득 채운 엄청난 물에서 탄생하였다고 썼다. 중국의 고문서는 태초에 땅은 모두 물로 뒤덮여 있었고 후에 이 대양에서 생명이 탄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남북아메리카의 인디오의 경전 {포플 부흐}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한 마리의 동물도 없었다. 새도 없었다. 물고기도, 게도, 나무도, 돌도, 계곡도, 풀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하늘뿐이었다. 육지의 표면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차가운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뿐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세계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달력에도 이러한 일치가 나타난다. 수메르, 바빌론, 고대이집트, 고대 인도에서는 1년을 12개월로 나누었다. 그리고 마야에서는1년이 360일이었고 이밖에 불행의 날, 이름이 없는 날로서 5일이 더 있었다. 이 동안은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무엇이든 나쁜 짓을 할 수 있었다. 이와 똑같은 관습이 고대 이집트와 바빌론뿐만 아니라 인도에도 있었다.

이밖에도 불가사의한 사실들이 있다. 그것은 지도에 관한 것이다.
지도는 알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과거 대륙의 모습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남겨진 지도에서 보면 그 제작자들은 현대인조차 20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발견한 곳을 그려 놓았다.

1559년에 터어키인 하지 아하마트의 지도에는 북아메리카의 해안선이 대략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1532년에 만들어진 오론티 피나우스의 지도에는 남극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1513년에 만들어진 피리 레이스의 지도는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룩한 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대서양의 반대측에 있는 쿠바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카리브해의 섬들이나, 중미 안데스 산맥을 포함한 남미대륙의 동서연안, 심지어 남극대륙의 일부까지 그려져 있다. 1528년에 제작된 그의 지도에는 그린랜드,뉴펀들랜드, 캐나다의 일부,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의 플로리다가 나타나 있다. 그보다 묘한 것은 그의 지도에는 아프리카의 바로 밑까지 연장되어 전혀 이름이 없는 남극대륙을 표시하고 있으며, 현재는 빙하에 파묻힌 산들의 높이까지 표시하였는데 아직까지도 그 산들의 높이는 측량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햅굿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남극대륙의 지도는 정말로 얼지않았을 때에 제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 지도에 붙은 설명 가운데에 이 지도의 원본의 출처를 알렉산드리아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지도는 모두 중세에는 발견되지 않았고 수세기 후에나 발견된 육지와 대륙에 대해서 상당히 정확한 윤곽을 묘사하였다.

또한 이러한 지도의 작성자 자신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관된 지도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시대에 만들어진 고대지도를 베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대 지도의 작성자들이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알고 있어서 경도와 위도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세계의 곳곳을 여행하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더우기 오론티의 지도와 현대지도를 비교해보면 전자에는 남극에 많은 하천과 그것이 흘러들어가는 피요르드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남극대륙에는 하천이나 피요르드가 전혀 없다. 대신에 오론티의 지도에서 하천이 있던 부분에 대양으로 천천히 흘러들어 가는 빙하가 있다. 이 사실은 오론티의 지도가 작성된 때는 빙하가 생기기 이전의 시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시기는 기원전 4천년경 남극 대륙이 얼음에 완전히 뒤덮이기 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수수께끼의 지도들로부터 많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미지의 문명이 존재했었고, 대양을 향해할 수 있는 배를 가지고 있었으며, 남극대륙과 그린랜드의 지도 제작에 필요한 천문학, 항해술, 수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옛 극지 탐험에 사용된 배는 크고 견고해야 했으며 고대의 이집트, 페니키아, 그리스 또는 로마가 소유하고 있던 배보다 훌륭해야 하였다. 이들 지도들은 이미 알려진 여타의 문명의 발생보다 훨씬 오래 전에 참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암시해 주는 증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야금술의 등장에도 의문점이 있다.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청동은 그 이전 단계인 구리시대가 거의 없이 전 유럽으로 퍼졌다. 최초의 청동제품은 매우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졌으며 사람들이 이 기술을 단계적으로 조금씩 익혀나갔다는 흔적도 없다. 멕시코에서도 유럽의경우처럼 청동의 생산이 복잡한 고도의 기술적 수법을 동반한 형태로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 야금술과 금속 가공기술을 항상 자신의 힘으로 단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때때로 완성된 형태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는 가설을 성립케한다.

이러한 가설을 뒷바침하는 사실 중의 하나는 청동을 최초로 이용한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에는 정련에 필요한 원료가 없었다는 점이다. 원료도 없는 상태에서 청동을 발명할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이들 문명국가들은 아연을 얻기 위해 카프카즈나 피레네 반도와 같이 엄청나게 먼 곳까지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이보다 더 먼곳으로는 브리튼제도가 있었다. 페니키아인이 브리튼제도를 아연의 섬이라고 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대 수메르의 유적인 셀레우키아의 폐허에서 고고학자들은 유약을 바른, 높이 10센티미터의 작은 점토로 만든 그릇을 발견하였다. 그 속에는 외형상 산에 의해 부식된 것으로 보이는 철제 축과 납땜으로 용접된구리로 만든 실린더가 들어 있었다. 이런 출토품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 수수께끼의 그릇이 일종의 전지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행해졌다. 끈질긴 연구 끝에 이 그릇을 본래 형태로 복원하자 놀랍게도 추정한대로 전기가 발생하였다. 고대 인도 문헌 중 {아가스티아 삼히타}에는 전지를 만드는 법이 적혀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주 깨끗하게 씻은 구리판을 도자기의 그릇속에 넣어라. 그것을우선 황산구리로 적시고 다음에 젖은 톱밥으로 덮는다. 다음에 편극을 피하기 위해 톱밥위에 수은과 화합시킨 아연의 엷은 판을 덮는다. 그접촉은 미트라-바루나(Mitra-Varuna)라고 부르는 에너지를 생산한다.

이 흐름에 의해 물은 프라나바유(Pranavayu)와 우다나바유(Udanavayu)로 분해된다. 100개의 항아리를 연결하면 대단히 활동적이고 유효한 힘을얻을 수 있다. "

1963년 남아프리카의 프레토리아에서 열린 가로 조명과 교통에 관한 회의에서 다우니라는 사람은 뉴기니의 서반부, 이리안에 있는 빌헬미나산 부근의 정글속에서 20세기의 것과 비교하여 우수하지는 않지만 같은정도의 인공조명계기를 가지고 있는 한 마을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발견으로 그동안 풀 수 없다고 여겨져 왔던 문제를 설명할 수있게 되었다. 그것은 4세기경의 유명한 중국장수 주처의 묘에서 나온 장식품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 묘에서 나온 장식품 중의 하나를 스펙트럼 분석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결과가 나왔다. 실험은 틀림없었다. 이장식품은 구리 10퍼센트, 마그네슘 5퍼센트, 알루미늄 85퍼센트의 합금제품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믿기 어려웠던 것은 알루미늄이었다. 알루미늄이 처음으로 추출된 시기는 전기분해법이 도입된 1808년이었다.

또 어떤 출토품들은 현대의 발명품을 모방해서 만든 것 같아 보인다.
그중에서도 현대의 삼각날개 비행기와 흡사한 황금제 축척의 모형이 발견된 것은 1천 5백년 전 콜롬비아의 한 묘지에서였다. 이보다 더 오랜고대 이집트에서는 글라이더 모형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시인 굴원은 고비 사막의 하늘 높이 서쪽으로 만년 눈으로 덮여 있는 곤륜산맥을 향해 비취의 전차로 비행한 것을 기록하였다. 그는 그 비행기가 어떻게 바람과 고비 사막의 모래 먼지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또 어떻게 자기가 항공 측량을 하였는지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서기 1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기술자 해론은 터빈과 제트엔진 양쪽 원리를 구체화한 증기 엔진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적어도 주행 거리를 기록하는 속도계를 헤론이 발명한 것은 사실이다. 한편 에게해의 해저에서 건져 올린 청동제의 물체는 몇년간의 연구 끝에 천문계산기로 판명되었다. 굴착기로 보이는 톱니바퀴, 차륜이 붙은 황금제 모형이 파나마에서 발견되었다. 확대렌즈가 고대 앗시리아의 유적과 에쿠아도르의 콜롬부스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 이집트의 사원에는 성수자동판매기가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성수의 양은 화폐투입구에 넣은 화폐의 무게에 직접 관련이 있었다. 이밖에 제우스 사원에도 꼭같은 자동제어 성수판매기가 있었다. 이밖에 자동기계들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 테베의 사원에는 이야기도 하고 제스처도 할 수 있는 신들의 동상이 있었다. 교황 실베스터 2세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청동의 자동기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항성과 행성의 어떤 위상에서> 라는 교황에 의해 제작 되었다. 이것은 정치와 종교에 관한 중요사건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마법의 두뇌는>는 교황이 죽은 다음 처분되었다.

레겐스부르크의 주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화학, 의학, 수학 및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20년 이상 걸려 안드로이드(Android)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이 자동기계는 별에 의해 선택된 금속과 미지의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기계는 걷고, 이야기하고, 가정의 잡일을 하였다. 알베르쿠스는 그의 제자 아퀴나스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안드로이드가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 어느날 말하기 좋아하는 수다와 험담으로 아퀴나스를 화나게 하여 아퀴나스가 망치로 깨뜨려 버렸다.

콤퓨터에 관한 기록도 있다. 아테네에 있는 그리스 국립 고고 박물관에는 1900년에 안티키테라 섬 부근에서 해녀가 발견한 부식된 금속체 단편이 몇 개 있다. 그 기계의 복잡한 눈금판과 톱니바퀴는 고대 그리스의 어떤 제품과도 같지 않았다. 그 기계와 같이 발견된 항아리에 새겨진 문자를 보면 이것은 기원전 65년경에 제작된 것이다. 그것은 박물관에 아스트롤라베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1959년 뉴저지의 프린스턴 대학 부속연구소에 근무하던 과학자 프라이스가 감정한 결과 현대 컴퓨터의 선조라고 단정짓게 되었다.

텔레비젼의 선조라고 불릴만한 것도 있다. 소련작가 막심 고리키의 경험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유물론자이기도 한 그가 20세기 초 카자흐 지방에서 인도인 요가 수행자를 만났다고 한다. 인도 수도자는 앨범을꺼내 인도의 풍경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고리키가 앨범을 펼치자 엷은 구리판 위에 인도의 아름다운 도시와 사원의 경치가 그려져 있었다고한다. 그런데 인도수도자가 앨범을 받아 입김을 불고는 다시 보여주었을때 앨범 속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구리판뿐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들이 비행기, 계산기, 굴착기, 전기, 컴퓨터, 텔레비젼 등이라고 알게 된 것은 그와같은 것들이 정식으로 발명되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먼 옛날 사람들도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는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고대 로마인은 복잡한 교통 시간에는 어떤 주요도로를 일방통행으로 제한하였다. 폼페이에서는 교통의 번잡을 피하기 위해 손을 흔드는 교통순경을 채용하였다. 바빌로니아에서는 2천 5백년 전에 도로표지가 사용되었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는 주차 금지표지가 사용되었다. 안티오크는 고대 도시 중 처음으로 가로등을 설치한 도시이다. 아즈텍인들은 원활한 교통의 소통을 위하여 영구적으로 변색하지 않는착색 끈을 포장도로의 중간에 박아 넣었다. 이것은 오늘날 페인트로 그려놓은 차선의 역할을 하였다.

어떤 민족도 고대 잉카인이 만든 것 같은 5천km의 고속도로를 건설하지는 못하였다. 이 고속도로는 좁고 험한 계곡을 건너, 현채도 사용되고 있는 굴을 지나 산맥을 관통하고 있다. 파키스탄 및 모헨조다로 하라파와 칼리방카의 발굴은 4천 5백년 전에 도시계획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들 고대 도시의 도로는 똑 발랐고, 구획i 직사각형이었다. 훌륭한 수도와 하수도도 발견되었다. 이들 도시에서 사용된 벽돌은 가마에서 구워낸 것이었다. 백년 전 영국인들은 이 벽돌을 카라치와 라호르 사이의 철도 건설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유럽에서 17세기말에 발명된 중앙 난방이나 온수 난방은 이미4천년 전 한국에서 온돌이라는 형태로 존재해 왔다. 석조의 하수구와 도자기제의 파이프를 가진 중앙집중 시스템의 가정용 수세식 변소는 4천년 전에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시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었다. 오리건 대학의 크레스먼 교수팀은 네바다 i주 동쪽의 라모스 동굴에서 섬유로 짠샌들 200켤레를 발견하였다. 어떤 훌륭한 기술자의 손으로 짜여진 것인데, 마이애미에서 오늘날 신고 다니는 비취샌들로 오인할 정도였다. 탄소측정 결과 이 샌들의 연령은 9천년을 훨씬 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할 것인가 ? 그 문명은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또 왜 절멸한 것인가. 이에 열거한 증거들은 인류의 여명기에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만약 그러한 문명이 존재하였다면 왜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알렉산더 고르보프스키는 "고대의 지식들이 일차적으로는 지식을 담당하던 사람들에 의해 숨겨졌기 때문이며 이차적으로는 고대문헌이 침략자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파괴되거나 소각당하는 운명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튼은 "위대한 연구자들은 금속의 변질이라는 비밀 외에 몇가지 엄청난 비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은 이유는 헤르메스가 쓴 진실을 입에 올리면 세계가 엄청난 위험에 빠지게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고르보프스키는 비밀지식을 갖춘 자들은 특별한 계급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들의 명칭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브리튼제도에서는 드루이드, 인도에서는 바라문, 이집트에서는 신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집트의 경우 국가가 생겨났을 때 신관들이 지식의 독점을 이용하여 신관층을 만들고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토투스는 이집트의 신관을 방문하였을 때 대를 이어 계승되어 온 가장 훌륭한 신관의 입상을 341개나 보았다고 한다. 이것으로 따져볼 때 그때까지의 신관제도가 적어도 1만년 이상이나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의 고전 {리그베다}에는 마법의 비밀을 터득한 자는 그것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숨기고 지켜야 한다는 구절이 있으며, 이집트의 마법을 기록한 파피루스에는 <입을 다물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지식을 숨기기 위해 그것을 구전으로만 전하거나 지식을 암호화하였다. 연금술에 대한 수많은 초고는 특히 그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 수는 10만 종에 달하는데 이것은 약 10만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종이 또는 양가죽에 써서 후세에 남기려고 했음을 알려준다. 이것으로 보아 지식을 갖춘 자들은 스스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건 혹은 지식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전해 줌으로써 파생되는 손해를 막기 위해서건 철저하게 지식을 한정된 사람에게만 전수하거나 암호로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지식은 비공개적인 지식의 전수 방식 이외에도 인간 스스로가 지식을 파괴함으로써 제대로 남겨지지 못하였다. 1549년 스페인의 수도사 디에고 데 란다는 종교 전파를 위해 정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멕시코를 찾아갔다. 그는 마야의 신전에 고문서를 소장한 거대한 도서관이 있는것을 발견하고는 이교도 신앙의 중심 자체를 파괴하기 위해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과 기호가 가득 찬 옛 서적과 문서를 불태워 버렸다. 이런 식으로 마야의 모든 도서관은 파괴되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고서 세 점뿐이다.

잉카에서도 비슷한 비극이 일어났다. 잉카제국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통치자가 예언자에게 그 대책을 물었더니 예언자는 문자 사용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잉카의 모든 문서와 책은 파괴되었고 문자의 사용은 금지당하였다. 진시황제는 분서갱유를 통해 셀수 없이 많은 책을 없애버렸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천문학과 점성술에 관한 모든 책을 소각시켰다.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에 있던 특별한 고문서를 20만권이나 소장한 도서관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하였는데 이들이 멸망하자 이 고문서들도 모두 불태워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멤피스에 있던 푸타 신전의 도서관이나 예루살렘 신전의 도서관도 모조리 소실되었다. 또 로마의 디오크레팃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고대 문서를 파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각지의 문화 사이에는 여러 유사점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정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바빌로니아의 신관인 베로소스의 책에서는 다양한 언어의 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최초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너무 믿어 신을 경멸하고 자신들이 신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바빌론이 있는 곳에 높은 탑을 쌓았다. 이 탑이 하늘에 닿으려 할 때 갑자기 신이 있는 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여 탑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그것을 쌓던 사람들은 땅 위로 떨어졌다. 탑의 폐허는 바벨이라 이름 붙여졌다. 사람들은 이때까지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은 그들에게 다른 말을 하게 만들었다.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11장에도 나온다. 한편 멕시코의 토르테카 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홍수 뒤에 몇명의 사람이 살아남아 차차 그 수가 늘어날 때 사람들은 높은 탑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갑자기 혼란되기 시작하여 그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는 곳을 바꾸려고 제각기 여러 지역으로 떠나갔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아메리카의 많은 민족들의 전설 속에는 <신의문>에 관한 몇가지 전설이 남아 있다. 그런데 바벨이란 말의 의미도 신의 문이다. 이밖에도 먼 옛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전설이 중동지방은 물론 이러한 내용이 씌어 있는 신전과 고서를 고대 인도나 고대 이집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민족의 차이는 있지만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가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고고학자 A.훔볼트는 이렇게 말했다.

"아메리카의 많은 신화, 기념물, 시간계산법, 우주발생에 관한 사고는 동아시아와 놀랄만큼 유사하다. 이 사실로 보아 태고 시대에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잇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33년 고고학자 바이덴라이히는 북경에 가까운 주구점 동굴에서 두개골과 해골을 발견하였다. 그 두개골 중의 하나는 나이 먹은 옛 유럽인의 것이었고, 또 다른 것은 좁은 머리를 가진 여자의 것이었는데, 특징적으로 보아 전형적인 멜라네시아인이었다. 세번째의 두개골은 뚜렷한 에스키모의 특징을 가진 젊은 여성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럽의 남자, 열대지방의 여자와 북극권의 여자가 중국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서남 아프리카의 브란드베르그 산중의 바위에 그려진 그림은 백인 여자들과 같이 있는 부시맨들을 그린 것이다. 이 여자들은 아주 유럽적인 얼굴인 흰색 페인트로 그려졌으며 머리털은 붉은 색이나 노랑색으로 나타냈다. 또 옷에는 보석들이 있고, 조개 껍질과 보석으로 정성스레 치장했으며 가슴에 활과 물주머니를 차고 있다. 이 여자들은 구두를 신고 있는데 흑인들은 신고 있지 않았다 이들 젊은 여자들은 3천 5백년 전에 크레타 섬이나 이집트로부터 왔음에 틀림없는 용감한 여행자라고 생각하는 고고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 백인여자들에게는 기묘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1만2천년 전에 살고 있는 북아프리카의 카스피언과 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둘 다 허리가 길고, 활을 가지고 있으며, 머리 장식을 하였고, 다리에는 양말 대님같은 같은 십자형의 리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촉은 동남아시아에서 태평양을 거쳐 아메리카의 해안에 이르는 길, 유럽 해안에서 유카탄에 이르는 길, 인도에서 남북 아메리카에 이르는 길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서로 수만 킬로 떨어진 민족간에 고도로 발달한 지식과 사고에서 놀랄만한 유사성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결합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 진원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다만 과학이 과거에 대한 정보와 사실을 축척함에 따라 문명이 발생한 근원지가 존재했었음이 틀림없다는 견해가 근거를 얻어가고 있을 뿐이다. 즉 문명의 여명기에는 모든 민족이 동일조건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상적 문명의 근원지를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문명이 존재했다고 생각되는 시기와 우리 시대 사이에는 수천년 혹은 수만년의 간격이 있다. 신화와 전설은 광대한 육지가 홀연히 모습을 감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플라톤도 이러한 육지가 대서양 한복판에 있었다고 적어 놓았다.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솔론에게 들었다고 하며 솔론은 이집트의 신관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신관은 솔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신적으로 당신네들은 모두 젊네. 그렇지만 고대로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옛 의견도 없으며 흰 머리에 서리를 얹어 놓은 것 같은 과학도없네"

그리고 플라톤 학원의 교사이기도 한 철학자 크라툴로스도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대서양에 가라앉은 거대한 섬의 역사가 기록된 둥근 기둥을 보았다고 말하였다. 또한 역사에 기록된 시대 이후도 대서양 해역에서는 일찍이 존재했던 몇 개의 육지가 차례로 바다 속으로 사라졌던 듯하다. 이것은 고대의 많은 역사가와 지리학자가 하나의 섬뿐 아니라 크로노스 섬과 포세이도노스 섬 등이 바다속으로 차례로 모습을 감추었다고 쓴 것에서도 확인된다. 지브랄타 해협 동쪽에 있었던 이 섬들은 대부분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제작년도가 분명하지 않은 고대 에게해 해도의 사본이 오늘날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 해도를 살펴보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섬들과 함께 오늘날의 해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섬들과 육지가 그려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도 대홍수가 일어남으로 인해 바다 속으로 많은 섬과 육지가 잠겨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태평양에서도 이런 전설은 전해져 오고 있다. 뉴질랜드 서남방에 있는 섬들의 전설 중에는 카 호우버 오 카네라는 이름의 육지가 태고 시대에 바다에 의해 삼켜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스터 섬의 주민은 모토우 마리오 히와라는 이름의 육지가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캐롤라인 제도에 속한 포나페 섬 근처에서 반 가량은 바다에 잠긴 큰 도시의 폐허가 발견되었다. 인도양에도 커다란 육지가 있었지만 태고 시대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씌여진 책에 태고 시대에는 인도와 아프리카가 육지로 이어져 있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오며, 고대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는 적도 밑 남인도양에는 일찌기 큰 섬이 존재했었다고 썼다.

이러한 고대학자들의 말은 최근에 이루어진 발견으로 확인되고 있다. 언어학자들은 남인도와 동아프카의 드라비다계 언어의 유사함을 찾아냈다. 또한 이들 지역의 식물과 동물도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마다가스카르 섬에는 아프리카 이외에는 인도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여우원숭이가 10종이나 살고 있다. 여우원숭이는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대양을 횡단했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이 섬에서 볼 수 있는 26종의 식물은 여기를 제외하면 남아시아에서 밖에 서식하지 않는다. 이 섬에서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에도 없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대서양의 중앙부로 나오면 아틀란티스의 본섬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아조레스 제도의 남쪽에서 비행기를 조종하던 조종사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는 보고를 하였다. 태양광선이 경사지게 비춰져 최고의 시계조건이 되어 물이 맑게 보일 때 80~200피트의 바다 속에 수중도시 같은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와서는 대서양의 마데이라 섬 부근에서 해저조사를 하고 있던 소련의 조사대가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사진들은 1974년, 깊이 600피트의 안펠 해산 정상에서 잠수함 아카데미샨 페트로프스키 호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이 조사는 고고학이 아니고 해양학상의 목적으로 행하여진 것인데 소련 해양학연구소의 일원이며 사진의 책임자인 우라지밀 마라케프는 사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벽과 윤곽이 선명한 돌 계단이 비쳐진 것을 지적하고 있다. 아틀란티스를 연구하는 학자인 비라우는 "대양의 바다 밑에 지금도 아틀란티스는 잠자고 있으며 현재도 보이는 것은 그 가장 높은 정상, 아조레스 제도뿐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세계의 곳곳에서도 수몰된 역사 이전의 유적은 존재하고 있다. 남미의 북쪽 연안에서는 아래쪽으로 커다랗게 부채꼴 모양으로 훑어가다 보면 베네주엘라 연안까지 백마일에 달하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인공물로서는 너무나 길어서 저연물로밖에 간주할 수 없다고 학자들이 말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혼두라스와 유카탄 반도 앞바다에는 육상에서는 소멸된 둑길이 바다 속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 지금도 보인다. 쿠바 북쪽의 바다에는 수 에이커에 걸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넓은 유적들이 있다.

플로리다 반도의 남쪽 약 40마일 에는 해면 밑 수백피트나 되는 곳에 피라밋을 닮은 거대한 물체가 잠수함 탐지기에 의하여 거의 윤곽이 드러났으며 희미하지만 틀립없는 영상이 수중 텔레비젼에 포착되고 있다.

페루의 나스카 해구 1.5마일의 깊은 곳에는 지금도 거대한 벽과 계단피라밋이 서 있으며 남태평양 제도, 일본, 남인도 등의 앞바다에도 미확인의 해저 유적이 잠자고 있다. 이와 같은 건축물의 폐허는 거의가 아틀란티스의 기억을 통해 전세계의 전설의 일부가 된 최후의 세계 대이변과 거의 관계가 있다고 보아도 좋을것이다

그 진원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시대 이전에 발달된 문명이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생각이 점차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가지게 하고 있다. 이 사실을 설명하는데 있어 혹자는 우주인의 방문설을 내세우고 있다. 에리히 폰 테니켄과 같은 사람의 가설인데, 그는 인간과 비슷한 지구 외의 생물이 방문하여 지구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서 세계문명을 쌓아올리는 정신적 능력을 적어도 10만년 이전부터 인류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 본다면 지구인이 스스로 한번이상 고도의 문명을 쌓아올렸고 그것이 파멸하여 근소하게 살아남은 것이 똑같은 과정을 다시 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도 설득력이 있을것이다.

이집트의 신관이 솔론에게 하였다는 말을 다시 들어보자.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인류는 가지가지의 원인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파멸을 경험할 것이네. 언젠가 시기가 오면 하늘에서 빗물이 질병과 같이 쏟아져 문자나 교육을 결여한 자들만 남게 하네. 이리하여 당신네들은 다시 어린애 시절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들에게, 당신네들에게도 옛 시대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무엇 하나 모르게 될 것일세.

그러면 고대문명이 멸망한 원인은 무엇일까.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알수 없다. 그러나 태고의 역사적, 종교적 문헌 가운데 문헌 가운데 보존되어 온 어떤 종류의 문화적 기록은 역사 이전 몇천년이나 옛날, 지구상에서 원폭과 비슷한 것이 전쟁에 사용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현대문명이 원시적인 형태에서 원폭의 개발까지는 약 6천년이 걸렸다. 그런데 인류는 천년의 단위가 아니고 백만년의 단위로 셈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발달된 두뇌는 적어도 10만년 전부터 현대인의 두뇌와 동등하였던 것이다.

최근 20여년간 고고학적 탐험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분명하게 드러난 불가사의한 문명의 잔재들은 당시의 인류가 과학적 진보의 시스템을 터득하고 있었다면 그들에게도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 동안 그들도 현재의 우리들과 같이 제어냐 파멸이냐 하는 따위의 고민에 직면하였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내용의 대부분은 고대 산스크리트어 문헌인 {마하바라타},{라마야나}, {프라주나}와 베다성전, {마하바라 차리타} 등에서 볼수있다. 이들 문헌은 지중해나 중동의 고대문헌이 거의 소실된 것과 달리 고대부터 현대까지 별탈없이 전해져 내려왔다. 특히 {마하바라타}에는 고대 전쟁의 가공할만한 신병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우주의 힘이 담겨진 단 한 개의 날으는 도구였다. 태양을 만 개 모아놓은 정도로 밝은 백열한 연기와 불기둥이 무섭게 빛나게 솟아올랐다. 그것은 미지의 무기이며 철의 번개, 거대한 죽음의 사자였다. 브리슈니와 애다카의 전 민족을 그것은 재로 변하게 하였다. 시체는 너무 타버려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털과 손톱은 빠져나와 도자기들은 이유없이 반동강이 나고 새들은 하얗게 변하였다.

또 {라마야나}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그것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지구를 순간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 연기와 불꽃을 피우며 우렁차게 올라가는 위대한 소리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자는 죽음 ---

이 문헌들이 처음으로 번역되어 서방세계에 알려진 19세기 후반에는 다분히 동양적 공상의 하나라고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면서 서방인들은 이들 고대문헌에 대한 생각을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이것을 믿을 수 없는 기록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쾌한 예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파키스탄에 있는 광대한 도시의 유적에 관한 이야기는 앞의 생각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이 유적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 역사 이전의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적은 모헨조다로, 하라파라고 불리우는데 실제 번영하고 있던 당시의 이름은 알 수 없다.그들의 문자와 체계는 아직 해독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러한 체계가 지구 정반대 쪽에서도 발견되었다.

다름아닌 태평양에 있는 이스터섬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아직 알 수는 없으나 두 곳 모두가 동시에 멸망하였다는 점은 부인할수 없다. 파멸이 너무나도 갑자기 찾아와 주민들은 피할 틈도 없이 잿더미 속에 파묻혀버렸다. 땅 속에서 한꺼번에 발견된 주민들의 유해는 몇천년이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 발견된 유해들 가운데 에서는 가장 강한 방사능을 나타내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사망자들이 나타내는 수치와 비슷할 정도이다. 또 방사능을 가진 해골이 인도에서 발견된 일이 있었다. 이 방사능은 보통 수준의 50배 가량이었다.

핵폭발로 인한 파멸이외에 세계 여러민족들의 경전과 신화속에서 나타나는 대홍수로 인한 파멸도 신빙성 있어 보인다. 성경의 창세기가 씌여지기 수천년 전에 씌여진 수메르의 점토판에서도 인류를 절멸시키기 위해 신이 불러일으킨 대홍수 이야기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경전이나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고문헌 속에서도, 태평양의 여러 민족의 민담속에서도 남북 아메리카의 원주민의 전설속에서, 한민족의 한단고기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파멸의 원인들, 즉 호우수 외에 폭풍, 지진, 분화활동 등을 동반한 대이변에 의한 전설은 아프리카 민족들 사이에서돛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들에 따르면 대홍수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어느 한 지점에서 일어난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대서양에서 멀어짐에 따라 이변의 규모가 점점 작아져 대홍수에 관한 전설만으로 한정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지구의 어떤 지역에서는 엄청난 밀물이 밀려와 물이 산꼭대기를 덮을 정도였지만, 반대지역에서는 썰물 현상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동쪽으로 가면서 수위는 점점 낮아진다. 따라서 중앙 아메리카에서는 물이 가장 높은 산의꼭대기까지 밀려왔지만 그리스에서는 언덕과 큰 나무꼭대기 부근까지, 페르시아에 이르면 사람의 키 정도까지만 차올랐다.

그런데 대홍수로 인한 파멸의 전설이 신빙성이 있게 하는 이유는 대홍수라는 사건의 보편적 분포보다는 이 사건에 대한 세세한 부분의 내용까지도 일치한다는 점이다.

모든 전설에 대홍수를 예견한 예언자들이 등장한다. 기독교의 신, 바빌론의 신, 아즈텍의 신, 인도의 신 모두가 다가올 재앙에 대해서 경고한다. 그리고 그 경고를 받아들여 목숨을 건진 사람은 거의가 남녀 한쌍이다. 그들은 갖가지 동물을 데리고 살아 남았다. 또한 불어난 물이빠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산꼭대기에 상륙하여 새를 날려 보낸다. 새가 나뭇가지를 물고 오면 물이 빠진 것으로 알고 밖으로 나갔으며, 그때 홍수가 끝났음을 아리는 무지개를 보게 된다. 이 무지개의 이야기는 아메리카 인디오에게서, 폴리네시아의 신화에서도 수메르의 서사시속에서도 나온다.

우리는 대홍수의 진원지가 바다였다는 내용의 많은 전설과 문헌을 접할 수 있었다. 대홍수가 일어날 당시 어떤 힘이 바다에 작용한 것인가 가 문제인 셈인데 이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갖가지 이야기는 거의가 어느날 하늘에서 알지 못하는 천체가 지구로 떨어졌다든가 멀어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500년 전의 일이다. 거대한 운석이 대기밀도가 높은 곳으로 빨려들어온 후 산산이 부서져 운석의 비가 된 채 지구에 떨어졌다. 이 운석중 하나는 무게 550톤에 달하였다. 이 운석은 수천입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멍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현제의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있는 거대한 호수 칼리뷰하얄과 호이다. 또 1868년에는 바르샤바에 운석비가 약 10만 개의 돌로 떨어져 내렸다. 어떤 것의 무게는 10킬로그램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모의 낙하는 오랜 세월 동안 종종 있었던 일이다.

우주에서 날라온 물체가 지구와 충돌했음을 보여주는 흔적 중에 1908년 6월 30일 아침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 상류에 있는 포토 카메니야 퉁그스카 천의 오른쪽 지류에 위치한 탐바 유역에 우주 물체가 떨어져 순식간에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은 퉁그스 운석의 수수께끼라고 불리우는데 아직도 그 정체가 해명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지구에 접근한 거대한 소행성의 인력에 의해 바닷물이 지구의 한쪽에서는 거대한 만조로 한쪽에서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지구가 과거에 혜성이나 혜성의 꼬리와 충돌하였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지구가 혜성과 충돌한다면 그때 방출되는 에너지는 수소폭탄 50만개 분에 상당한다고한다.

또 달이 바다에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가설도 있다. 달은 원래 지구에서 매우 가까운 궤도를 도는 소행성이었는데 달의 옆을 거대한 우주물체 가 지나갔기 때문에 달은 자신의 궤도를 잃고 지구의 인력권 안으로 떨어져 지구의 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달이 지구에 최대한도로 접근했을 때 만조의 높이가 수킬로미터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민족의 전설 속의 홍수 이전 시대에는 달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수석감독관이었던 아볼로니우스도 옛날에는 지구의 하늘에서 달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기원전 3세기경에 썼다.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낙사고라스도 달이 나타난 것은 지구가 생긴 훨씬 후의 일이라고 썼다.

그리고 대홍수만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와 함께 폭풍, 지진, 분화활동 등을 동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메리카의 인디오의 고서 {포플부흐}는 대이변 뒤에 극심한 추위가 시작되고 해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또 아마존의 열대림에 사는 부족은 홍수 뒤에 찾아온 오래 지속된 혹한에 사람들이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를 일으킨 또 하나의 원인은 지구 양극의 변화, 즉 궤도에 대한 그 경사각도의 변화이다. 남극과 북극 지역에서 석탄층이나 목재탄화물과나뭇잎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남극에도 2억5천만년 전에는 초목이 번성했으며, 6천만년 전의 북극은 태평양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거대한 지질학적 변동에 의해서 일어날수 있다.

그렇다면 대홍수를 동반한 지진, 분화활동 등 최악의 이변들은 언제 발생하였으며 그때의 양극의 위치는 어디일까 ? 미국의 지구물리학자 오겔리는 몇차례에 걸친 조사 끝에 마지막 빙하기에는 북극이 현재의 북위 60도선이 통과하는 지점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북극점 이 현재의 위치로 이동하게 만든 이변의 발생시기는 빙하기가 끝나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 다른 견해로는 미국의 지질학교수 챨스 허프크트의 이론이다. 그는 극이동은 지구 내부의 융용 마그마의 초석의 변동이 원인이되고 남극의 중량 증대에 따라 측면 방향에로의 회전팩톨에 도움을 받아서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지구의 지축은 움직이지 않고 지구의 외피, 즉 지각을 형성하는 표면만이 새로운 위치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지구는 지축상에서 요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공간을 회전하면서 미세하게 움직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과거 10만년 사이에 3번의 극이동이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북극이 캐나다 유콘 지역에서 그린랜드 해로 이동하고 다음에는 허드슨 만으로 옮겼으나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으며, 세번째의 이동의 시기는 약 1만 2천년 전에 끝넒다고 한다.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인 리비는 아메리카 대륙을 연구한 결과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약 1만4백년 전, 인간의 자취가 갑자기 사라졌으며 바로 이 무렵에 인류의 연속성에 단절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현상은 그에게 많은 의문을 던져주었다. 왜냐하면 남뵤 유럽, 프랑스 중부의 라스코 동굴벽화는 기원전 1만 5천년경의 것으로 이 당시에도 인류는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빙하기 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이 얼음에 덮여 있지 않은 이상 인간이 존재했을 것인데도 인간의 자취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영국이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도 인간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리는 가장 오래 된 유적은 약 1만 4백년 전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리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러한 단절을 아메리카, 중앙아시아에서도 볼수 있다.

소련학자 알렉산더 고르보프스키는 앞의 다양한 데이타 이외에도 고대 달력이 시작되는 해를 계산하여 기원전 1만년경을 고대문명의 파멸의 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가 계산해 본 결과 인도의 태음(태양력)이 시작되는 해는 기원전 1만 1천 6백 5십 2년이고, 마야의 달력이 시작되는 해는 기원전 1만 1천 6백 5십 3년임을 발견하였다. 또 이변이 끝난 해를 나타낸다는 앗시리아식과 이집트식의 두가지 달력을 조사해 본 결과 이집트 달력의 시작은 기원전 1만 1천 5백 4십 2년이었고, 앗시리아 달력의 시작은 기원전 1만 1천 5백 4십 2년이었다. 이를 근거로 그는 고대문명을 파멸로 이끈 크나큰 이변이 기원전 1만 1천 6백 5십 2년이나 1만1천 6백 5십 2년에서 기원전 1만 1천 5백 4십 2년까지의 기간중에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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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수메르인들은 우리 동양인을 닮은 인상을 주는 사람들로서 우리말과 비숫한 교착어를 썼다.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수메르와 그 주변 산악지대가 선사시대부터 문명의 발원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라크 북방티그리스강 상류지역 자그로스 산맥 북쪽에 '샤니다르 Shanidar 동굴'이 있었다. 오늘날 민족해방전쟁을 벌이고 있는 쿠르드족의 피난처가 되고 있는 이 동굴은 지난 10만 년 이상 인간의 거주 흔적이 시기적으로 잘 보존된 고고학적으로 귀중한 유적지이다

1957년 콜럼비아대학의 랠프 솔레키 Ralph L. Solecki 교수는 이 동굴을 조사하여 9인분의 초기 인류 유골을 발견했다( 그 중 4인은 동굴 내부에서 떨어진 낙석으로 죽은 곳으로 판명되었다.). 발굴을 계속한 결과 1만 년 전에서 멀리 10만 년~ 13만 년 전에 이르는 초기 인류의 주거 흔적이 나타났다.

그러나 연대에 따른 계통적 발굴이 진전됨에 따라 놀랍게도 인류문화는 차차 진보해 왔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퇴보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곧 어떤 표준시대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 세대들은 전보다 덜 발전된 생활을 해 왔던 것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서기전 27000~11000년 사이에 이 퇴보가 심했고, 게다가 거주자까지 점차 사라진 듯 마지막 시기에는 거의 무인지경이 되었던 것이다.(수메르의 전승에는 당시 빙하기의 막바지로 극심한 추위와 가뭄으로 인간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사나워지고 세상이 어지러웠기에 곧바로 대홍수가 닥쳐서 징벌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돌연 서기전 11000년 무렵 이해할 수 없는 진보된 수준의 문명생활이 시작되었던 증거가 드러났던 것이다.

고고인류학자들은 터키 중부 차탈휘유크와 유고슬라비아의 레페스키비르와 팔레스타인의 예리코 등지에 실로 9천년 전 이전에 형성되었던 도시의 유적을 발견하고 이것들이 수메르 문명보다 앞섰던 문명의 유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들은 실제로 샤니다르 동굴이나 그 주변 '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시작되었던 문화가 전파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들은 지역적으로 국한된 점조직 같은 문명 유적으로, 그것들이 더 발전, 확장되었던 증거도 뚜렷하지 않다.

인류 최초의 조직적인 농업활동은 중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Fertile Crescent 지대' 주변의 산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다. 연구가들이 정교한 방사성 탄소 측정법을 이용하여 밝혀 낸 결과. 보리와 야생 '엠메르 Emmer' 종의 밀이 인류가 최초로 재배한 곡물이었으며. 서서히 농업 기술을 터득하여 여러 가지 작물과 가축을 기르며 진보해 왔던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잘못된 것 같다. 놀랍게도 샤니다르 동굴에서 채취한 아주 초기의 곡물은 이미 종으로서 고도로 특화(特化)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이것은 고도의 유전공학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중근동에서는 보리와 밀과 함께 기장(millet), 라이(rye)밀, 스펠트밀(spelt)밀 같은 주식이며. 섬유를 얻고 열매로 기름을 짜는 아마(亞麻)와 갖가지 식용 과일이 열리는 관목과 과수가 빠른 속도로 펴져서 재배되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이것들은 유럽에 알려지기 실로 몇천 년 전부터 중근동에서 재배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놀랍고 돌연한 농업의 진보는 마치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에 의하여 중근동 지방이 일종의 식물 유전자 실험장이 되었던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또 야생포도의 재배가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북부 산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놀랄 것도 없이<창세기>실린 노아가 홍수후 첫 포도 재배업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지역은 인류 문명의 첫발생지였던 것이다.

사과, 배, 올리브, 무화과, 아몬드, 호도 등 과일나무도 중동이 원산지로 그곳에서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창세기>에서 '에덴'을 과수원으로 표현한 것은 결코 과장도 비유도 아닌 것이다.

가축사육은 어떠했는가?

인간이 처음으로 사귀어 가축으로 만든 동물은 개였다. 이것은 서기전 9500년 무렵의 일로, 가장 오래된 개의 뼈가 이란, 이라크 및 이스라엘에서 발굴되었다. 양과 염소는 개와 거의 동시에 사육되었으며, 서기전 9000년 무렵의 양의 유골이 샤니다르 동굴에서 출토되었다. 그 다음 돼지와 뿔 달린 가축이 길들여졌다.

이처럼 몇만 년 전에서 서기전 11000년 무렵 문명이 중근동에서 처음 시작되었던 시기까지를 학자들은 구석기 지대 Paleolithic Age라고 보고 있다(유럽에서는 이보다 약2천 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은 돌로 된 동굴집에서 살며 돌연장으로 씨를 뿌리며 동시에 가축사육자가 된 것이다. 앞서 말했던, 바위에 새겨진 고글을 쓴 '신'의 보습도 대충 이때(서기전10000년경) 만들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중석기 시대 Mesolithic Age가 대충 3천5백 년쯤 지속되었다가 서기전 7500년 무렵 신석기 시대 Neolithic Age가 도래했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토기를 빚어 만들이 시작했다. 서기전 5000년 무렵 중동에서는 상당히 수준이 높고 세련되고 환상적인 디자인을 보여 주는 토기 제품이 출현했다.

그러나 서기전 4500년 무렵 문화가 일시적으로 퇴보한 듯한 고고학적 증거가 드러났다. 토기 제품은 전보다 단순한 것으로 변모되었고 석기가 다시금 우위를 차지했다. 토기 제작이 위축되고 제작지가 버려진 것이 유적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곧 서기전 4000년 무렵 예측할 수도 없이 돌연히 중동지방에서 빛나는 문명이 출현했다. 앗시리아 학자 헨리 프랭크포트Henry Frankfort에 의하면 한마디로 '놀라운 것' 이며, 앙드레 빠로는 '돌연히 타오른 불길'이라고 표현하고, 신화학자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은 '놀라운 돌발성…이 좁은 수메르의 진흙바닥에 세계의 고등문명의 씨앗이 발아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18세기 말까지 오랫동안 서양인들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자기네 무명의 기원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옛 그리스의 학자들은 더 앞선 문명이었던 옛 이집트에 원정했을 때 서기전 196년에 제작된 '오제타 석비' 같은 고대 유물을 발굴, 연구하여 이 옛 문명 연구에 큰 진전이 있었다. 이집트 문명은 실로 그리스 문명보다 2천 년 이상 앞선 서기전320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 문명의 시조는 옛 이집트였던가? 그리스 학자들은 이집트 문명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리스어는 원래 이집트가 아닌 중동에서 생겨나 그리스 문명보다 앞섰던 '미노아 Minda '(트레타) 문명과 미케네 Micenae' 문명을 거쳐 그리스 본토로 도입되었던 것임이 밝혀졌다. 서기전 1300년경 도리아인의 그리스 본토 침입과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침입했던 시기가 거의 동시임에 착안한 학자들은 셈족문명과 그리스 문명이 서로 닮은 것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메사추세츠 주 브랜다이스대학의 고고역사학자 사이러스 고든 Cyres H. Gordon 교수는 <망각된 기록: 미노아어의 증거 Forgotten Scripts : Evidence for the Minoan Language>에서 셈어로 밝혀진 초기 미노아어[선형(線型)A/Linear A 문자)를 해명하여 이 분야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이로써 히브리어와 미노아문명이 서로 상당히 공통된 점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 예로크레타가 미노아어로 'ke-re-ta'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히브리어의 'ke-re-et'('성벽의 도시')이며 셈족의 가나안의 '케레트'왕 이야기와 일치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로마자와 현대 서양문자의 근원인 그리스 알파벳도 근동에서 온 것이었다. 옛그리스인들은 '카드모스 Kadmds' ('옛날의'란뜻)라는 페니키아왕이 알파벳을 가지고 왔으며(카드모스 는 전설적인 테베시의 건설자였다.). 원래 그 수효나 순서가 히부리 문자와 같았지만 서기전 5세기경 케오스의 '시모니데스' Simonides of Keos시대에 26자로 증가했다.

옛 그리스문헌에 나타난 페르시아 왕들, 예컨대 '키루스 Cyrus'. '다리우스 Darius'. '크세르크세스 Xerxes'등은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원래 서기전 2000년대 말기에 카스피해 근처 어디에선가 출현했던 아리안족의 한 파임이 확인되었다. 그 무리들은 각기 서쪽 소아시아로, 동남쪽으로는 성서에서 말하는 '메데아'와 '파르시'로,동쪽으로는 인도로 이주했다. 그들이 낯선 이민족이었음에도 북구하고 이상하게도《구약성서》에서는 그들을 동족의 일원인 양 호의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예컨대<에즈라서>에 의하면, 키루스왕은 그 자신을 '야훼에 의해서 기름부어진 자'로 생각했고 야훼를 '청산의 신'으로 믿었으며, 예루살렘의 신전을 재건 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와 그밖에 페르시아인들은 스스로 '아케메니드 Achae-menids'라고 불렀는데, 그 원어는 '하캄 acham-Anish' 로 아리안어가 아닌 완전한 셈어(히브리어)로 '현명한 인간' 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유대아로 들어온 페르시아의 세력과 함께 그 신앙인 미트라 Mithra 신앙 -세계는 최종적으로 광명과 암흑의 투쟁으로 끝날 것이라는 종말관을 가진 신앙 - 의 영향으로 유대 /기독교의 의 종말론(Eschatology)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종교사상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


히브리인의 주인인 야훼와 아케메이드인들이 불렀던 '현명한 주님'은 여러 점에서 유사하며, 이중에서 후자는 날개 달린 구체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다리우스왕의 문장(紋章)에 나타난 그림이다. 옛 페르지아 제국의 문자와, 종교와 역사적 근원은 그 이전의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1686년 페르시아의 옛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찾았던 엥겔베프트 캄퍼 Engelbert Kampfer는 왕들의 기념비와 문장에 나타난 이 지역 일대의 공통문자로 확인되었다. 1843년 프랑스의 폴 에밀 보타 Paul E. Botta 는 처음으로 이라크 근처에 있는 '호르사바드 Khorsabad'를 선정하여 조직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곳은 원래 '두르 새루 킨 Dur Sharru Kin'으로 알려졌던 곳이었다. 이 곳은 앗시리아와 사르곤 2세의 도읍지로, 이말 자체는 셈어로 '정의로운 왕의 성곽도시' 란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이 앗시리아왕의 수도에는 중앙에 웅장한 왕궁이 있었고, 연장1마일이 넘는 부조 조각 장식이 붙어 있는 기다란 성벽이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 도시 전체와 왕궁 건물을 호령하듯 높은 지구라트가 세워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들을 위한 '천상으로 오르는 계단' 이었다.

놀랍게도 이 거대하고 웅장한 도시의 모든 것이 단 5년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3천년 전 하나의 제국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왕궁, 성벽과 성문, 신전, 일반 주택 등 하나의 거대 도시를 완성할 만한 국력을 가졌던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는 1850년대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 Austen H. Layard가 호르사바드에서 10마일쯤 내려와 티그리스 강변의 '쿠윤지크 Kuyunjik'를 발견한 결과 이 곳이 성서에 나온 '니네베 Nineveh'임을 확인했다. 《구약성서》〈열왕기 하〉18:13에, "헤제키아왕 14년에 앗시리아왕 세나테리브가 유다야에 침입했으나, 야훼의 천사가 이들을 단 하룻밤 동안 전멸시키고 세나케리브는 되돌아가 니네베에 돌아갔다." 는 기록이 있듯이 니네베는 앗시리아의 마지막 세 왕 시절의 수도였다. 레이어드에 의해서 또 다시 박굴된 곳은 <창세기>에 나오는 '님르드 Nimrud'로 앗시리아의 군사본부였던 곳이다.

독일의 발터 안드레 Walter Andrae 발굴 팀은 1903년~1914년 사이에 앗시리아의 신앙의 본거지였던 '아수르 Ashur를 발굴했다. 이와 동시에 로베르트 콜데바이 Robert Koldewey 팀은 바빌론을 발굴하여 광대한 왕궁, 신전, 그리고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 정원의 유적과 지구라트를 찾아 냈다. 이로써 남쪽의 바빌로니아와 북쪽의 앗시리아라는 두 대제국의 역사를 밝혀 줄 문헌들이 속속 발굴되고 해독 되었다.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라는 두 제국은 서기전 1900년 무렵 일어나기 시작하여 약1천 5백 년간 전쟁과 공존을 거듭하며 흥망성쇠의 역사를 누려왔다. 결국 서기전 612년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아수르와 니네베가 함락되어 앗시리아는 멸망했고, 또 바빌론도 성서의 예언대로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의 공격으로 서기전539 년 불명예스러운 종말을 맞았던 것이다. 이 두 제국은 시종 전투적인 라이벌이었지만 문화나 물질 문명은 별 다른 차이가 없었고 또 앗시리아의 주신은 ' 아수르'( '천리안을 가진신')이고 바빌론의 주신은 '마르둑'(청정한 언덕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두 신들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들은 이들 옛 제국의 페허에서 약탈한 장식품-예컨대 의식용 성문(城門), 날개 달린 황소, 조각(bas-reliefs), 전차, 가구, 보석, 인물상 등 풍부한 유물을 자랑하고 잇지만 진정한 보물은 역사적 기록 문서들이다. 그것은 실로 몇만 장이 넘는 설형문자판들 - 우주 창생 전승, 서사시, 왕들의 역사, 신전 기록문서, 상업계약서, 혼인 및 이홍서류, 천문기록, 점성술 예언서, 수학공식집, 지리학 서적, 문법과 어휘 교과서, 신들의 존칭, 능력, 및 의무를 기록한 문서 등등 많은 기록들이다.

이 두 제국의 문화와 종교적 공통성을 이어 주는 언어는 '아카드 Akkad'어였다. 이것은 셈어로서, 히브리어, 아람어, 페니키아어 및 가나안어의 선구였다. 하지만 바빌론-앗시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이 언어를 고안한 것이 아니라고 했고, 그들이 남긴 많은 문서에는 전의 어떤 원어(原語) 것이라고 주(註)가 많은 문서 말미에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쐐기 문자를 최초로 고안했고 그처럼 풍부하고 자세한 어휘와 문법을 발전시켰던 것인가? <창세기>10장 27절을 보자.

"쿠쉬(키쉬)에게서 님로드가 났느데 …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였다. … 그의 나라는 세나르(수메르) 지방인 바벨과 에렉(우르크)과 '아카드'에서 시작되었다.…그(님로드)는 그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나와서 넓은 거리가 잇는 니네베를 세우고, 니네베와 '할라흐' 사이에 '레센'이라는 큰 성을 세웠다."(레센은 아직 미발굴인 곳으로, 대규모 왕실 군마 사육장이 있었던 곳 같다.)

여기에 나오는 아카드가 두 제국에 앞서 있었던 왕도였던가? 발굴된 문서에는 실제로 그 옛적에 '샤루킨 Sarrukin'('의로운 통치자')이라는 이름의 왕이 세웠던 '아카드' 왕국이 있었음을 나타냈다. 또 그는 자신의 제국이 " '엔릴'신의 은총으로 아랫 바다(페르시아만)에서 윗 바다(지중해?)까지 달하는 대제국을 세웠으며, 아카드의 부둣가에 먼 나라들에서 온 배를 정박하게 했다."고 호언하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에 학자들은 경악했다. 실로 5천 년 전인 기원전 3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에 놀라운 대제국이 있었던 것이다! 앗시리아의 두르샤르킨(사르곤 2세)으로부터 아카드의 사르곤(1세)왕까지 실로 2천년의 도약이 일어났다. 또 계속 발굴된 유적에도 바빌론/앗시리아보다 아주 오래 전에 빛나는 문예와 과학과 정치와 상업활동을 가졌던 문명이 존재함을 보여 주었다. 결국 바빌론/앗시리아는 이 아카드 문명이라는 큰 줄기의 가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아카드의 사르곤왕의 업적과 족보를 기록한 비명(碑銘)이 발견되자 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수께끼는 더욱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이 비명에는 사르곤왕의 명칭이 '아카드의 왕, 키쉬의 왕' 으로 나타났는데, 그가 왕이 되기 전 '키쉬의 통차자'의 자문관으로 봉직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 키쉬의 왕국이라는 것이 아카드에 앞서 존재했던가?

앞서 <창세기>의 구절을 보자. "쿠쉬에게서 님로드가 났는데…."학자들은 아카드의 사르곤이 이 님로드가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키쉬를 '쿠쉬'로 해석하기만 하면 사르곤이 말했듯 키쉬가 님로드보다 앞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사르곤 비명의 나머지 부분을 문면 그대로 믿기로 했다. "그는 우루크를 공격하여 그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는 '우르'의 주민과 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 그는 '라가쉬'에서 바닷가까지 모든 지역을 굴복시켰다."

성서의 '에렉'은 이 우루크와 같은 곳이었던가? 오늘날 '와르카 Warka' 라는 이라크 남부 지역을 발굴한 결과 사실 그대로 임이 드러났다. 또 우르는 바로<창세기>에 나온 아브라함의 출생지였다. 실로 발굴로 드러난 사실과 성서 기록이 서로 일치했을 뿐 아니라 서기전 3000년대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에 번듯한 국가와 도시와 문명이 있었음이 확인 되었다. 남은 의문은 문명이 얼마만큼 먼 고대로 소급되느냐 하는 문제뿐이었다

연구가 축적된 결과 학자들은 이윽고 성서와 히브리어이며 아카드어로 된 바빌론/앗시리아의 지명과 인명에도 각기 특정한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예컨대 '아브라함'은 '열국(列國)의 선조', '샤루킨' 은 '정의의 통치자'라는 뜻처럼].그런데 사르곤 이전 시대의 이름들은 전혀 무슨 뜻인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사르곤 자신이 자문관으로 봉사했던 왕의 이름인 '우르자바바 Urzababa'라던가, 에렉의 통치자였던 '루갈자게시 Lugalzagesi' 같은 것이 그 예였다. 이에 1853년 헨리 로린슨경 Sir Henry Rawlinson은 왕립 아시아학회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셈어도 인도-유럽어도 아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언어 그룹이나 민족에 속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들 미지의 언어는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었을까? 학자들은 아카드어 비명들을 다시금 검토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설형문자인 아카드어 문장은 음절(音節)문자로서, 각 문자 부호는 각기 하나의 완전한 음절(ab, ba, bat 따위)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 문장에는 음절이 아니면서도 '신', '도시','나라','생명', '고상한' 따위의 뜻을 가진 부호들이 광범위하게 쓰여져 있었다. 이 의문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이 부호들이 그림문자로 사용됐던 , 더 앞선 문자의 흔적인 것 같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아카드어 이전에 이집트의 그림문자를 닮은 문자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더욱 이른 시대에 문자 형태가 아닌 어떤 형태의 언어가 있었음이 명백해졌다. 학자들은 아카드어 문서에 많은 차용어가 있음에 착안했다[이것은 가령 영어의 weekend(주말)를 프랑스인들이 그대로 쓰는 것 같은 말이다.]. 특히 과학기술 용어에 이런 차용어가 많았으며, '신'과 '천계(天界)'에 관한 종교기록에도 그러했다. 또 A. H. 레이어드 경이 발굴했던 아슈르바니팔 왕 도서관에서 실로 2만 5천 장이 넘는 점토판 문서가 나왔는데, 그 중 많은 것에 '옛날의 텍스트'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었다. 예컨대 23장으로 된 한 묶음의 점토판 문서에는, "23번째 판, 수메르어에서 그대로 복사함"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또 다른 문서에는 아슈르바니팔 왕 자신이 기술한 수수께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서기(書記)들의 신께서 그의 재능의 지식의 선물을 나에게 베풀어 주셨다. 나는 기록하는 비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나는 슈메르어 Shumerian로 된 난해한 문서를 읽을 수 있다. 나는 홍수 이전에 있었던, 돌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마지막 구절, 곧 '슈메르어'로 된 홍수 이전 기록을 이해했다는 이야기는 더욱 신비를 두껍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1869년 줄 오페르 Jules Oppert는 프랑스 고전학(古錢學) 및 고고학 협의회에서 전(前) 아카드 시기에 어떤 언어와 민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미지의 민족과 그들의 땅을 '수메르인' 및 '수메르'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실로 '슈메르'대신 '수메르'로 잘못 쓴 것을 제외하면 오페르가 옳았던 것이다. "바벨과 아카드와 에렉이 '시나르 Shin'ar'땅에 있었다."는 기록에 있는 시나르가 곧 수메르인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이자마자 연구가 급진전되었다. 아카드 기록에 인용된 '옛날 텍스트"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가 됐으며, 기다란 단어들이 이어진 점토판 문서들은 다름아니라 아카드/수메르어 사전임이 판명되었고, 이로써 바빌론/앗시리아에서 최초로 필기에 쓰여진 언어인 수메르어를 배우게 되었다.

또 이 사전의 도움으로 발굴된 방대한 점토판 서적들을 해독할 길이 트였다. 또 수메르는 반쯤 굳어진 점토판에 갈대 펜으로 씌어졌는데, 이것은 문명의 환경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곧 옛 이집트에서는 강변에 무성한 파피루스 줄기가. 중국에서는 대나무 조각(竹簡) 이나 비단이 필기 재료로 쓰여졌듯이 중동에서는 주변에 흔한 찰흙판이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었고 거기에 기록하기 편하게 둥글거나 네모진 그림글자에서 쐐기형 문자로 간편하게 정형화되었던 것이다.

수메르어의 해독은 중동의 기나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였다 그런 이유로 북부가 아닌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 작업이 속속 개시되었다. 1877년 프랑스 발굴단은 처음으로 오늘날 이라크 남부에서 '텔로흐 Telloh'('언덕')하고 불리우는 '라가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 곳은 아카드의 사르곤왕이 정복했다고 호언한 도시였는데, 발굴된 물량이 너무나 엄청나서 1933년까지도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다.

이 곳은 사르곤왕의 칭호와 똑같은 수메르어 칭호 '엔시 EN. SI(정의 의 통치자)'가 다스렸던 도시로, 이 왕조는 서기전 2900년전 부터 시작되어 650년간 43인의 엔시들이 단절 없이 통치했다고 한다. 각 엔시의 이름, 족보, 재위 기간이 가지런히 기록되어 남아 있다. 또한 곡물의 순조로운 성장과 풍작을 신에게 기원하며 농토에 제대로 물을 대어 주어 곡식이 자라서 익게끔 기원하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조직적인 농업과 완비된 관개시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 ' 곡물 창고의 감시자'인 한 여신에게 봉헌된 컵에는, 곡물의 양이 재어지고 창고에 저장되고 또 거래되었음을 기록한 그림문자 표시판이 새겨져 있다. 또 ' 에안나툼'이라는 '엔시'는 수메르의 통치자들이 신의 승인이 있어야만 권좌에 오를 수 있었음을 점토벽돌에 새겨놓았다. 또한 그가 다른 도시를 정복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약5천년 전인 서기전 3000년경에 이미 여러 도시가 존재하고 번성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여기에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통치자의 정치적 정통성과 전쟁과 국방 및 외교에는 신들의 승인이 필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인간인 통차자들은 신들의 집사나 마찬가지였으며, 그가 다른 도시나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다른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많은 점토판 문서를 연구한 결과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거의 수메르의 멸망기인 서기전2000년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곧 수메르 시대는 한마디로 '신들'의 전권시대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들은 또한 앞서 말한, 샤니다르 동굴에서 발견되었던 고도로 특화된 보리와 밀의 종자를 보급하여 인류의 농업혁명을 촉진시켰던 '신들' 이었던 것 같아. 수메르 전승에서는 니누르타가 바로 그런 농업의 신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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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D 개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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