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gion vs Truth'에 해당되는 글 31건

  1. 2006.05.17 일루미나티(Illuminati,광명회)
  2. 2006.05.17 프리메이슨 그리고 음모들...
  3. 2006.05.15 프리메이슨 그들은 누구인가? -8
  4. 2006.05.15 프리메이슨 그들은 누구인가? -7
  5. 2006.05.15 프리메이슨 그들은 누구인가? -6
  6. 2006.05.15 프리메이슨 그들은 누구인가? -5
  7. 2006.05.15 프리메이슨 그들은 누구인가? -4
  8. 2006.05.15 프리메이슨 그들은 누구인가? -3
  9. 2006.05.15 프리메이슨 그들은 누구인가? -2 (1)
  10. 2006.05.15 프리메이슨 그들은 누구인가? -1
  11. 2006.05.12 예수와 바울 이야기는 날조된 작품이다 (2)
  12. 2006.02.03 예수의 12 - 30 세 까지의 행적
  13. 2005.11.08 향유를 발라줄 수 있는 사람은 예수의 신부 뿐이었다.
  14. 2005.10.21 성서 왜곡의 실체 (4)
  15. 2004.01.17 성배와 성혈 [ 16. 결론과 미래의 전조 ]
  16. 2004.01.17 성배와 성혈 [ 15. 성배왕조 ]
  17. 2004.01.17 성배와 성혈 [ 14.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3 ]
  18. 2004.01.17 성배와 성혈 [ 13.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2 ]
  19. 2004.01.17 성배와 성혈 [ 12.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1 ]
  20. 2004.01.17 성배와 성혈 [ 11. 시나리오 ]
  21. 2004.01.17 성배와 성혈 [ 10. 십자가 사건의 실상 ]
  22. 2004.01.17 성배와 성혈 [ 9. 바라바는 누구였는가? ]
  23. 2004.01.17 성배와 성혈 [ 8. 십자가 사건 ]
  24. 2004.01.17 성배와 성혈 [ 7. 예수 왕조 ]
  25. 2004.01.17 성배와 성혈 [ 6. 사랑하는 제자 ]
  26. 2004.01.17 성배와 성혈 [ 5. 예수의 아내 ]
  27. 2004.01.17 성배와 성혈 [ 4. 예수의 결혼 ]
  28. 2004.01.17 성배와 성혈 [ 3. 복음서들의 역사 ]
  29. 2004.01.17 성배와 성혈 [ 2. 예수시대의 팔레스타인 ]
  30. 2004.01.16 성배와 성혈 [ 2. 예수시대의 팔레스타인 ]
표제에 수록한 인물은 유명한 사탄주의자이며 '요기('요가'의 달인)'였고 또한 '비틀즈(Beatles)'의 멤버들이 존경한다는, 프리메이슨(Freemason) 33도이자 일루미나티의 회원인 '알리스터 크로우리(Alister Crowley)'라는 이미 죽은 인물이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악마주의자라는 자타의(?!) 인정을 받고 있다. 또한 많은 헤비메탈(Heavy Metal) 및 블루스(Blues) 연주자 및 보컬(Vocal)들이 그를 숭배하고 있다. 가령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Jimmy Page)' 라든가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검은안식일)'의 보컬(Vocal)이었던 '오지 오스본(Ozzy Osborne)' 등은 노골적 으로 그에게 대한 존경의 표시를 하고 있다. 오지 오스본은 그의 노래 '미스터 크로우리(Mr.Crowley)'를 통해 그에 대한 존경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잘 보게 되면 그의 모자에 있는 '제3의 눈'의 징표가 바로 '프리메이슨'의 상징이자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상징인 '호루스의 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프리메이슨을 언급할 적에도 언급하였지만 이들은 프리메이슨과는 한때는 다소 마찰이 있었지만 지금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세칭 '계몽주의자' 들의 '비밀결사단'이다. 거의 프리메이슨 편에서 다수 언급하여서 중복성이 있을 수 있으므로 언급치 않은 것을 중심으로 말하겠지만 그들의 세력 또한 이제는 무시 못할 정도로 강력하다. 그들의 커넥션(Connection)은 일단 세계적인 조직인 '프리메이슨'과 긴밀하며 '싸이언톨로지(Scientology)'라는 전체주의 이단 교회와 연결되어 있고 언급한 대로 미국 최고의 '자산(개인재산)'을 가지고 있는 'Bill Gates(William H. Gates III)'와 '자동차계의 거부 크라이슬러 (그 회사의 심볼(Symbol)을 잘 보면 '오각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부자 '록펠러(Rockefeller)' 그리고 영화계의 산실이라는, 프리메이슨과도 연관된 '헐리우드(Hollywood)'의 많은 영화사들(MGM, Warner Brothers etc) 또한 기타 여러 산업분야와 'CIA', 국방성 그리고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 또한 '백악관'과 'CFR(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즉 '외교관계위원회' 등의 사회, 문화, 정치, 경제계의 미국의 배후를 가지고 있는 결코 만만치 않은 단체이다. 'New World Order'라는 기독서점의 '낮은 울타리'의 책을 읽었다면 알겠지만 그들은 '계몽주의자'들이다. 잠깐 언급하자면 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프리메이슨 33도이자 현재도 '일루미나티'의 핵심계층이다! 심지어는 이미 죽은 영화배우 '서부의 총잡이' '존 웨인"까지....! 말도 않된다고 생각하겠지만 UFO와 외계인(사실은 프리메이슨 편에서 언급했듯이 '외계인'이 아닐 것으로 사료된다)도 그들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

UFO는 과연 사탄적이다! 단순한 '세기말적 현상'이라고 매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무서워 떨게하기도 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한 동경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UFO의 3대 체험자라고 할 수 있는 '빌리마이어 ('셈 야제'라는 외계인을 만났다는 사람)'과 '조지 아담스키' 그리고 'UFO종교인 '라에리안 무브먼트' 의 창시자인 '클로드 보리롱 라엘'이라는 자들의 언급한 것을 유심히 보면 그들끼리도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자세히 보게 되면 일치성이 의외로(?) 적다. 물론 그것을 UFO긍정론 주장자들의 입장에서보면 상당히 역설적으로 합리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Crill(Krill) file'도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일부러 슬쩍 거짓 정보를 흘려서 그것이 사실인 양 떠들게 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유포한 사람이 암살됨으로써 그것이 더욱 사실임을 부축일 수 도 있다.배후조직들의 고도로 발달된 음모의 전술이 내재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부가 사실일지라도 유포과정에서 왜곡되었거나 혹은 첨가/삭제되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것도 미국 정부의 개입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들 외계인이라는 존재들은 '외계인'이 아니며 사탄의 조직들의 다른 활동 유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성경적인 해석의 종합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을 개인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은 지금까지 일어난 현상적인 면들을 모두 섭렵했을 때의 성경적인 해석이라고 사료되므로 가히 그들 악한 세력들의 치밀한 음모의 전말을 두고 볼 만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이 부분은 상당한 부분이 필자 주관이 개입되었지만 대부분의 하나님의 테두리안에서 UFO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평가하고 있는 수준에서 주관을 언급한 것이므로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같은 그의 보조 단체 보다도 더 큰 조직이 과연 있다! 바로 그들을 막후에서 조정하는 '유대인'들인 것이다! '유대인의정서'라는 책을 보게 되면 유대인들의 세계정복의 야욕이 잘 드러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런데 문제는 야훼 하나님을 반대하는 이집트의 신들이나 상징들 혹은 각종 다신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 유대인들(특히 극단주의자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바알(Baal)'을 숭배하고 '야훼 하나님'을 전적으로 배척하고 있다. 물론 이는 극히 배후에서 사탄의 조정을 당하는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의 음모가 농후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서 예를 드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지 1998년 1월초에 한 기독 서적에서 그러한 그들의 전말을 폭로한 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을 때 그들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참고로 인터넷 상에서 혹자는 '일루미나티'를 '유대인 마피아 (Jewish Mafia)'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본래 유대인들의 배후 조직중의 중요한 일부라는 얘기가 성립되며 실제로도 1980년초에 이탈리아에서 '프리메이슨' 조직이 발각되었을 때 그들의 실체를 논평한 글에서 그들(프리메이슨)이 유대인들의 밀교적인 조직임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한마디로 프리메이슨은 '사탄숭배조직'이다. 그들의 계급은 1도(degree)에서 최고33도(degree)까지 있으며, 그들의 최고의 인간 우두머리는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한다.컴퍼스와 삼각자 그리고 '호루스(이집트의 '빛(광명)'과 '매'의 신)의 눈' 혹은 이를 '디스코디아(Discordia)'에서는 'Eris 여신의 눈'으로 간주하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물론 '피라미드'는 그들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상징이다.아울러 머리가 두개 달린 '독수리'와 '매'까지! 그들은 로마 카톨릭에서 기생하던 '사탄숭배조직'과 결탁한 '길드(guild)'의 조직이었다. 원래 그들은 건축가들이었다. 물론 지금은 '사탄의 나라(이 세상)'의 '건축가들'이다. 그들의 리스트(famous man list)는 이미 공개되었으며우리가 각종 매체에서 체험하고 실제로 매우 존경해오고 교과서에 까지 나오는 위인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안에서 성공하였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라고 일컬어져 온 사람들까지도......(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link와 필자가 입수한 리스트를 공개하겠다. 미국의 '이단색출단체'과 'freemason'자체에서 공개하는 리스트가 다소 다를수 있다. 왜 그러는지는 아마 독자들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이미 교황청은 그들의 '아지트'가 되어 버렸다. 적지 않은 수의 대주교들이 연루되어 있고 그리고 어쩌면 '교황(?)'까지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리고 각종 종교 단체 그리고 '미국방성'과 CIA, UN 그리고 각종 뉴에이지(New Age)단체들과 종교 및 이념단체들 그리고 그린피스(Green Peace)와 같은 상당히 유명한 단체와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들은 그(이단종교의 창시자)가 프리메이슨이 아니라고 거부하지만 그들의 핵심층들은 알고 있을, '여호와의 증인(Jehovah's 'False(!)' Witness)', '모르몬교(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심지어는 '통일교('문선명'교)'까지.... 물론 당연히 미국의 계몽주의자들의 집단인 '일루미나테(Illuminati)'도 상호 긴밀한 연계성을 맺고 있다. 어떠한가? 이제 알겠는가? 그외에도 밝혀지지 않은 군소의 이단 종교들과 단체 그리고 상업주의 집단들을 도합하면 과연 혀를 내두를 매우 광범위한 규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쉽게도 유다의 왕 그리고 그 유명한 '잠언', '전도서','솔로몬의 노래'의 저자이면서 한때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었던 '솔로몬'이 '화근'이었다. '시초(창시자)'였다는 얘기다. 그의 성전 건축의 동역자 두로왕 '히람'과 더불어서.... 오~ 하나님 이럴수가......!그들의 전략과 전술은 유명한 동양의 병참서 '삼국지'를 읽으면 잘 알 수 있다! 물론 성경에도 잘 나와 있지만... 그들은 서로 속고 속이는 교묘한 암흑의 조직들을 가지고 있다. '마피아'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가까이 있는 홍콩의 '트라이어드(Triad)'도 '일루미나테'의 계보인 만큼 연계되어 있다.그리고 그들은 기독인(그리스도인) 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에도 모종의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사탄도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메시아)로 상징된다고 구약성서 '에스겔서 28:14'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그들도 성경을 잘 그리고 즐겨본다. 그들은 성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해석상의 극단적인 차이가 당연히 있으며 또한 오히려 그들의 교리에 매우 헌신적으로 충실하다는 것을 숙지하기 바란다.그들 중에서 모 기독교 단행본(한국에서 기독교 어린이를 위하여 발간된!)에서 버젓이 위대한 기독교 위인으로 선정되어 있고 심지어는 어느 유명한 선교단체의 성경공부 책자에서도 인용되어 있는 미국 백화점의 대부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는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말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문제를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영원한 원리를 따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곧잘 편한 입장에서 쉽게 결정하려고 하는 이 불확실한 세대에서 나는 성경 공부의 가치와중요성에 대해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존 워너메이커'는 '프리메이슨(freemason)'이었다!그대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없는가?

지금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해주고자 한다. 유감스럽게도 프리메이슨에서의 하나님은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아니다.바로 '바알(Baal)'이라고도 하는 '귀신의 왕', '사탄'인 것이다! 곧 '사탄 하나님'인 것이다.이에 대해 근거가 있는가? 있다! 확실한 근거가!프리메이슨 교황(법황) 곧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이었던 '알버트 파이크(Albert Pike)'는 1889년 7월 14일 다음과 같이 그들의 회원들에게 언급한 적이 있다.

"절대권자이며 대감찰장이신 당신에게 32도 31도 30도에 있는 현제들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메이슨교는 이제 막 시작한 자로부터 고위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 계명성(Lucifer)의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계명성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불행하게도아도나이(여호와, 야훼)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계명성(Lucifer)이여, 빛의 신이고 선의 신이며 어두움과 악의 신인아도나이(여호와, 야훼)와 인류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예언대로 그들의 막강한 계보의 배후세력들은 암암리에 일반 군중들은 모르게'신세계질서'로 집결시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한경직 목사, 빌 브라이트 박사(CCC창설자), 찰스 콜슨 등에게도 프리메이슨이 정한 상을 수여하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는 것)사실 그 상을 받은 사람드들은 열이면 열 모두 '에큐메니칼 주의자'들이다)이 그들의 치밀한 전략 전술이다. 사탄과 그 수하의 타락한 천사들(마귀)도 지상에 예수 그리스도, 아들 하나님께서 오셨을 때에 사람들에게서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큰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부(아첨)'하였던 것을 성경을 통해서 익히 접해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양의 탈을 쓴 늑대요, 삼키는 사자로 나타나는 것은 무척 당연하면서도 예전부터 주욱 써오고 있는, 현재 우리가 조금의 영적인 틈 곧 지식적인 분별력에서의 우매함만 보여도 매우 잘 들어먹히고 있는 '수법(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중 심지어는 많은 목사들도 얼마나 완벽하게 속아 왔는지는 최근에 미국 교계에서 무척이나 떠들썩한 '제시 잭슨(민주당, 목사)'과 '빌리 그래함(목사)'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수많은 근거들의 한파속에서도 잘 찾아 볼 수 있다. 한국은 특히 빌리 그래함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이다.

그러므로 여파는 상당하므로 본 필자가 알기로는 공식적으로 한국 교계에서 이에 대해 논평을 자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이에 따라 모든 기독교 관련 서적과 성경공부 교재들 그리고 많은 이때까지의 그의 글이 도마위에 놓여지게 되었다. 놓여져야 한다!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사실은 사탄의 하수인이며 고정간첩이었던 것이라는것이 현재 미국 교계에서의 그에 대한 판단과 논평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만약 의심이 된다면 사이버 스페이스(인터넷)으로 그의 이름을 영어로 검색어로 타이프하고 검색해보기를 바란다.우리는 참으로 때로는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바보'처첨 살아왔고 힘없이 살아왔을 수 있다.툭하면 '초능력'이니 'UFO'니 '외계인'이니 하는 것이나 '단(丹)' 혹은 '기(氣)'등의 '뉴에이지(New Age)'에 솔깃 했었을 것이다.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들에 그리고 이러한 문화들에 빠져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분별력도 둔감하고 분별 자체를 귀찮게 여겨서 알려고도 들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성경도 잘 읽지 않는다!잘못되게 성경을 읽다가 이단으로 많이 가기도 한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들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들을 무척 슬퍼하고 계신다!그 슬픔은 '마태복음 9:36'을 통해 알 수 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어찌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탄의 이단 종교 확장에 대한 결재서류에 싸인(signiture)을 해주게 된 것이 이해가 된다.왜냐하면 이것은 그만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차리고 각성하라는 또 다른 하나님의 징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한국에는 '공식적인' 프리메이슨의 본거지요 기본 단위인 '랏지(Lodge)'가 없다.그만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보수주의 기독교의 성향이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프리메이슨'은 곧 사탄의 집결체들은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지체인 '여호와의 증인'그리고 '모르몬교', '크리스찬 사이언스', '통일교' 그리고 여러 '뉴에이지 단체'들을 잠입시켜왔다.이미 효과적으로 그들은 잘 성장하고 있는 것이 이제는 놀랄만한 일도 아닌 것처럼 되어 버렸다.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은 솔선해서 반성해야 한다. 또한 복잡 다변화된 사탄의 전략과 전술에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빌 게이츠' 곧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세계 굴지의 기업이며 미국에서개인 재산이 '최고'라고 하는 그는 사실 그 단체의 유명한 회원이며 심지어는 그의 회사에서 생산하는 프로그램들 중에 일부는 '사탄의 영'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아직도 한국의 '빌 게이츠'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유명한'사탄주의자'이다. 그의 '저작'인 인터넷을 위한 '동적 객체의 규약'인 'Active X'는 사실은 '활동적인 사탄'이라는 뜻임을 그대들은 과연 알고 있었는지? 컴퓨터를 프로그래밍 하는 사람이면 잘 아는 'OLE(동적 객체 포함)'의 'IUnknown' API 함수 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Interface Unknown(Power)!'

'Unknown(미지의)'라는 것은 흔히 'X'라는 글자로 상징되어진다. 유감스럽게도 최근의 일본의 저패니메이션(Japanimation)에서는 이것을 '용(dragon)'이라는 말에 사용하고 있다. 그것의 '제목'이기도 하고 말이다.또한 일루미나테의 창시자인 계몽주의자 '아담 웨이샤우프트(Adam Weishaupt)'의 이름의 본래의 의미는'사탄을 알게된 최초의 사람(the first man to know the Superiors)'라는 뜻임을 그대는 알고 있었는가?물론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초월자(the Superiors)'는 '사탄'이다!

그 의미 하나하나에 벌써 냄새가 난다. 우리는 이미 그 냄새를 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뎌져 있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바래야(반사해야) 한다! 세상속으로....

우리는 이미 빌 게이츠, 그 사탄주의자에게 많은 돈을 투자하였다. 물론 그것을 불법복제해서 쓰는 사람들도 수다하다. 그것이 없으면 못사는 사람들도 많다. 마치 계시록을 보는 듯하다! 잘 생각해보기를......쓰는 것 자체도 문제가 있겠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를 통해서도 역사하고 계신다. 사탄도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거꾸로 이용한다고나할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연 '능력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본인도 현재 그들의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있고 보는 독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알고 쓰시기를바란다. 중요한 것은 그러할 지라도 오직 주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그들과 싸우기 위해서 쓰시기를...... 어차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악하다.(요한일서 2:14,15)그는 힘을 키우고 있다. 그는 미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하고 있으면서 사탄의 좋은 찬조자가 되고 있다.계시록의 '바벨론'과 그의 상업주의자들처럼 부유해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일이다. 차라리 그는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사탄 제일 교회'의 '안톤 샌더 라베이(Anton Szandor LaVey)'보다도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정말 '빌 게이츠'가 되고자 한다면 '빌 게이츠'를 대항할 수 있는 하나님을 위한 벤처기업을 만들기를 바란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만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여태까지 너무나 많은 직간접적인 그들의 영향을 받아왔다. 실제적으로도 그들의 '힘'의 그늘 아래에서 있었던 적도 있었다. 세상의 주도적인 힘들! 미국 대통령중 14명이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은 공식적인 사실이며 다른 대통령들 예컨대 미국 남침례교도였던 '카터'또한 그들의 영향력하에 철저하게 이용당한 어리석은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최근에는 모 기독출판사에서 카터에 대한 신앙에 대해 출간된 것('97.12월 현재)으로 알고 있는데 그도 사실은 직접적으로 프리메이슨의 영향력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이에 대해서는 '낮은 울타리'에서 최근에 발간한 'Pat Robertson'목사의 'New World Order(신세계질서)'를 참조해 본다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이 'Pat' Robertson에 대해서도 좋지 않게 보는 이단 색출 단체들도 있음을 주지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freemason에 대한 정보는 믿을만하다고 한다. 또한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링턴' 조차도 프리메이슨이었다는 근거들이 '사이버 스페이스'상에 뜨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의 공방전이 존재하고 있다.가령 이단 색출단체에서는 '빌 클링턴'에 대해서 프리메이슨 33도이며 프리메이슨의 계보인 'demolay'의 회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서 - 물론 그는 성추행('구강 성교' 강요한 죄)과 연루된 명목상으로 '감리교도'이다 - 프리메이슨 자신들은 그는 프리메이슨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비록 프리메이슨이 아니라고 프리메이슨들은 주장할 지라도...(그들의 주장이 거짓일 수도 있다)'조지 부시'전 대통령은 엄연하고 명백한 프리메이슨 33도이며 계보인 '일루미나테'의 구성원이다.'밥 돌(Bob Dole)'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로 대적('공화당'과 '민주당'(?!))하지 않는다. 사실 배후에서는 서로 협력하고 있기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있으면서 뉴에이지와 그들을 선호하는 매스컴의 노예가 되어온 우리가 이 때까지 얼마나 실제적으로 타락한 세상앞에 여호와(야훼)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는가하는 문제가 실제적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우리는 얼마나 영적으로 잠자고 있었던가?이제는 알아야 한다. '여호와의 (잘못된) 증인'들도 지금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그 자신이 자신들이 싫어하는 사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별도로 언급하겠지만 다음의 사람들은 그들이 위선자임을 적나라하게 증거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그들이 사탄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들은 프리메이슨 32내지는 33도이었다는 것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확실한 근거있는언급이다. 본 필자도 예전에는 이단(여호와의 (잘못된) 증인)에 6년동안 열심히(!) 활동한 경험이 있다. 유심히 보기를 바란다!어쩌면 예전의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에 구속시킨 '박계동' 파일이나 결국 밝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장엽' 파일보다 더 무시무시한 파일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이 리스트(list)는 사실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직접 다른 위인(?!)들의 List를 보고 싶으면 backward하여서 본(main) 페이지에서 Link해보기를 바란다!)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 '찰스 테이즈 러셀(Charles Taze Russel)' : 33도

/'크리스찬 싸이언스'의 창시자 '에디 부인(Mrs. Eddy)'의 남편(1999.9.22 정정함) : 32도

프리메이슨은 원래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여성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동방 별단', '동방 별의 딸들', '욥의 딸들'이라는 여성단체가 창립되어 여성 프리메이슨들로서 활동하고 있다.

/'피라미드'식 조직의 세계 기업 '암웨이(Amway)'의 사장(boss) '리치 드보스' : 33도

/'통일교'의 창시자 '문선명(Moon~~)' : 33도

/'싸이언톨로지'의 창시자 '론 허버드(L. Ron Hubbard)' : 일루미나테('광명파' 프리메이슨)

/'라마교'의 절대자 '달라이 라마' : 33도

/'모르몬교'의 창시자 '죠셉 스미스(Joseph Smith jr.)' : 33도


위에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더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단지 현재까지 사이비 종교들이나 잘 사이버 스페이스상의 공식적인 Famous Freemason List에 없지만 본 필자가 확인한 사람들만을 언급한 것임을 주지하기를 바란다!


그들이 불교도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중국의 '흥'조직의 '아미타불'의식은 프리메이슨에게 32도로 진입하는 의식적 행사에 도입되었고 그들의 뉴에이지적인 사상적 근거는 불교와 상당한 부분 일치한다.불교도들은 뉴에이저를 좋아하고 뉴에이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미 오래전 '맨리 홀'이라는 프리메이슨 회원은 그의 저서 '잃어버린 프리메이슨의 열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최초의 메이슨 법제정자는 .....'부처(Buddah)'였다."
놀라지 말라! 어차피 다 이러한 일이 예견 되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아셨고 지금 이순간 여러분에게얘기構?계신다!굳이 더 놀라운 일을 말하라면 한국에서도 유명한 '불교' '조계종'의 이미 작고한 '성철' 종정 승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할 수 있다. 이 글은 '1987년(불기2531년)음력4월8일'에 발표된 법어(法語)를 수록한 '이성철 큰스님의 큰 빛 큰 지혜(思社硏:사상 사회 연구소:1987.6.30(중판))'에 출전되어 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요.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읍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중략)................
아!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이 진리를 두고 어디에서 따로 진리를 구하겠습니까?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속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후략)"물론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에는 당황하게 되다가도 나중에는 당연히 이해가 될 것이다.그러나 과연 그럴까? 부연하겠지만 사탄은 '악마'이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프리메이슨의 전통적인 복장을 한 청년.
다양한 상징으로 점철된 이 복장은 주요 예식에서 필수적이다.


지금까지의 연재를 통해서 중세 스코틀랜드를 기반으로 한 프리메이슨이 어떻게 유럽에 전파되었고 이어 미국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지난 편에서는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이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기도 했다. 또한 프리메이슨이 연결되어 있는 고대의 비의, 장미 십자단 등과도 관련되어 있는, 이집트나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비전의 지식, 이를 재현시키려 했던 중세의 연금술 등 또한 짚어가 보았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바로 '비의' 로 한번 돌아가 보자. 결국 이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프리메이슨과 그 언저리의 모든 활동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하다. 이토록 중요하고도 비밀스러운 그 무엇이 정말 있다면 그것은 과연 뭘까?

국장은 전편들에서 돌의 키워드, 연금술, 힘과 명분 등의 이야기를 통해 이 비의의 정체에 대해 조금이라도 접근해 보고자 했다.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고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형태의 문명과 다른 정신적 배경을 가진 시대에서 비롯

2. 돌과 관련. 그러나 '현자의 돌' 같은 구체적 물질이라기 보다는 돌에 직간접적으로 기록된 고대 문명의 정보일 가능성.

3. 연금술이 추구하던 영생불사, 혹은 재탄생과 관련.

4. 현실에서 막강한 권위와 힘을 가질 수 있는 그 무엇.

5. 분야를 막론한 인재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강력한 흡인력과 명분을 갖춤.

6. 기성 종교를 초월하는 영적 포용력(?)을 가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기초하면 프리메이슨이 소유하고 있을 지 모르는 그 무엇, 아마도 물건이라기 보다는 정보일, 은 위의 여섯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 정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추리해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국장은 위의 조건들을 바탕으로, 비록 모호하긴 하지만 상당히 치명적인 어떤 것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잘났건 못났건 부자건 가난하건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것,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적인 키워드로 작용하는 것,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대부분의 인간이 평생 모은 전재산과 자기 신념마저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것, 수백년, 혹은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가면서도 포기되거나 잊혀지지 않은 채 대를 이어 전승되고, 그럴 가치와 중요성을 가진 것...

그렇다. 국장이 떠올린 이런 '정보'는 단 하나. 바로 죽음의 비밀 이었다.


* * *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이 가져오는 극단적인 아이러니는 참으로 극복하기 힘든 부분이다. 우리는 살아있고, 그로 인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보고 우주를 인식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후회하는 존재다. 다시 말해 인식의 주체인 각자에게 우주는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 모든 것이 종결되어 정지되고 만다는 것은 우주의 난데없는 소멸 만큼이나 개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근세 이후 분석적 방법론을 중시하는 과학 및 의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몸, 생명은 이제 일종의 기계로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런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죽음 = 소멸이라는 등식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지금도 많은 종교가 여전히 존재하고 사후 세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가르침을 펴고 있지만, 지난 몇백년 동안 우리 인류 문명의 대세가 이런 생각과 믿음을 제거하는 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 영향력 또한 지구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의미를 알 수 없던 많은 신비들이 과학과 수학을 통해
단순한 법칙 하에서의 기계적인 자연 현상으로 밝혀졌고,
이어 이런 사고 방식은 인간과 생명 그 자체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뉴튼과 함께 근대 물리학과 수학의 기초를 정립한 라플라스.


그리고 이렇게 된 데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 시대 전반에 걸쳐 우리 스스로가 과학 아닌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의 진실, 결국은 삶과 생명의 진실이 될 수도 있는 그 비밀을 제대로 파악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물론 중세 유럽 문명을 지배했던 기독교를 위시해 이슬람교, 심지어 동양의 불교 등등 많은 종교에서 주장해온 내세관은 이를 신봉하는 종교인들에게는 '믿음' 이라는 방식으로 어필해 왔고 죽음의 공포와 존재의 덧없음을 위로하는 역할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너의 삶은 기나긴 네 존재의 짧은 과정이자 한 장에 불과하며, 죽음은 끝이 아니다' 라는 대부분 종교들의 공통된 가르침을 정말로 눈꼽만큼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 죽음을 학교의 한 과정을 마치는 것처럼 맘 편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은 독실한 종교인 중에도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이유는 죽음이라는 것은 '말과 글에 대한 믿음' 만으로 초월하기에 그 무게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정 종교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즉시 죽음과 삶의 진실을, 경전으로 읽거나 사제에게서 전해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직접 경험하고 느낄 수 있다면 이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기존의 종교들은 이런 기회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내가 직접 사후 세계를 방문하여 내 눈으로 이를 보고 죽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생과 사의 프로세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그 모든 가르침들은 결국 모호한 신념의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신념은 중세처럼 사회 전체가 하나의 종교에 대한 철저한 옹호로 뭉쳐져 있지 않은 경우에는 단지 개인의 선택일 뿐인 것이고, 이런 선택에 나를 모두 맡겨 버리기에는 인간은 턱없이 약한 존재인 것이다.

한편 검증되지 않는 것/객관적이지 않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는 고대 미신적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근대 과학의 기본 정신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처럼 영혼을, 신을, 사후 세계를 내 눈앞에 보여달라는 근대인의 요구에 답을 줄 수 없었던, 그리하여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객관적인 답 또한 제공할 수 없었던 종교는 과학의 유물론적 관점에 그 자리를 빼앗겨 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종교적, 영적 성향이 일반 종교들에 못지 않게 강한 프리메이슨 만큼은 반대로 이런 근대와 함께 끝없이 뻗어나갔다는 사실이다.

* * *


사후 세계와 영혼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기독교적인 가치에 경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이에 대한 관점은 기독교나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종교들이 창시되기 훨씬 이전부터 매우 정교한 형태로, 어쩌면 더 정교한 형태로 존재했었다.

사실 대부분의 고대인들에게 사후 세계와 영혼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도 없는 사실이었다. 거대한 문명권에서부터 북아메리카나 중앙아프리카의 부족민들에게 이르기까지 죽음을 존재의 '끝'으로 보는 시각은 전혀 없다시피 했었고, 죽음은 현세에서의 이별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라는 시각이 우리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던 대표적인 거대 문명권은, 바로 프리메이슨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한 고대 이집트다. 이집트인들의 저승에 대한 시각과 지식은 이승을 설명하는 것보다도 더 세밀하다. '사자의 서'(죽은 자의 책)를 통해 이들은 인간이 죽고 난 후 영혼이 겪게 되는 그 모든 과정들을 마치 여행 책자처럼 자세하고도 세부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여기에는 자기가 눈으로 보면서 직접 그 길을 밟고 간 것이 아니라면 쓰여지기 어려운 듯한 디테일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들은 수천 년에 걸친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이런 관점을 계속 흔들림 없이 견지했다.

물론 현대에 있어서 이는 단지 오랜 상상의 중첩이 빚어낸 일종의 신화로 해석될 뿐이다. 하긴 그 오래 전 아무것도 모르던 무지한 원시인들이 죽음이 무서워 자기들 맘대로 끄적거려 놓은 망상들이 현대에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나 싶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고대 이집트인에게서 죽음은 말 그대로 '진실의 순간' 이었다.
따라서 사자의 서는 죽은 사람의 삶과 지위에 맞춰 무덤에
길잡이용 책으로 부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은 BC 1200 년경의 사자의 서. 브리티쉬 뮤지엄 소장.


생각해보자. 우리는 인간이 과거에 비해 '머리가 좋아졌다' 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당연하다. 돌도끼를 사용하던 인간이 컴퓨터를 쓰고, 말을 타던 우리가 이제 달에 간다. 이 모든 현대의 성과가 두뇌 활동에 절대적으로 영향 받은 것이 분명할 진대, 우리 자신들도 그만큼 똑똑해졌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똑똑해 진 것은 우리들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인간 집단, 즉 문명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컴퓨터를 쓰고 달에 가는 것은 그런 과학 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계기와 함께, 그런 노력들이 중첩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더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때문이다. 전임자가 해놓은 일을 조금씩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과학은 진보해 온 것이지, 과거에 비해 빨리 돌아가게 된 개개인의 머리로서 그 성과를 이뤄 낸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흔히 IQ 같은 방식으로 측정하는 개별 인간의 지능은 지금이나 수만년 전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식을 1만년 전에 갖다 놓으면 나머지 애들과 아무 차이도 없는 원시 소년으로 크고, 1만년 전의 어린애를 여기에 갖다 놓으면 역시나 부족함 없는 21세기 소년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래 전의 인간들이 일구었던 문명들을 단지 지금 우리 것과 다르다는 이유, 옛날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쉽사리 무시할 수는 없게 된다. 지금 우리가 자랑하는 찬란한 과학 문명의 역사가 겨우 삼백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과거의 어느 시점에, 나름의 계기로 인해 또 다른 방향으로 중첩된 지식을 통해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경지를 이루었던 문명이 있었을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천재지변이나 기타 이유들로 그 문명이나 그들이 쌓은 지식들이 계속 중첩, 유지해 나갈 수 없었을 가능성도 언제나 존재한다.

이런 예는 굳이 너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의 역사 시대에 포함되는 고대 그리스와 중세만을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2200년 전 사람인 그리스의 에라토스테네스는 그림자와 방위각의 측정을 통해 지구의 둘레를 실제에 상당히 가까운 4만6250 킬로미터로 측정해 냈다. 그러나 1700년 후인 15세기에 콜롬부스가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는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기는커녕,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만도 상당한 고생을 해야 했다. 이처럼 자연과학에 관한 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중세인들 보다 훨씬 '진보된' 존재였다. 2천 년에 가까운 시간의 흐름이 과학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퇴보시켰던 것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특정한 날 정오가 되면 시에나에 세워진 기둥에
그림자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같은 시각 800 킬로미터 떨어진
알렉산드리아의 그림자 길이와 비교함으로써 지구 둘레를 측정해 냈다.
이처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현대인에게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상식이었다.


이처럼 지식과 기술은 실제로 잊혀지고, 그것이 재발견 될 때까지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조차 없다. 만약 이집트인들이, 혹은 이집트의 모체가 된 더 오래된 어떤 문명이 있었다면 그들이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논리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다. 그들은 아마 달에 가지는 못했겠지만, 그와는 다른 방향의 학문들을 발전시켰을 지도 모른다. 소위 영적인 탐구에 보다 전념했을 수도 있고, 그런 세월이 수천 년 이상 쌓이면서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부족 등에게 남아 있는 수법들, 이승과 저승,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들은 우리가 달의 신비를 벗겨 냈듯이 죽음의 신비를 벗겨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비의의 정체가 아닐까.

* * *

앞서 말했듯이 프리메이슨은 기성 종교들이 그 권위를 급속도로 상실해 가는 근대와 현대를 통해 커 갔다. 그들이 고대 이집트와 그보다 오래된 세계에 남아 비밀스럽게 전수되어 오던 지식, 일반인들이 공유하기에는 너무 크고도 오묘한 이 죽음과 삶의 비밀, 혹은 그렇다고 스스로 믿는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고 생각해 보자.

오래된 종교들의 모호함과 전근대성에 진력 내던 당시 지식인들에게 이는 아주 큰 지적인 유혹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삶의 가장 심각하고도 치명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이기조차 하다면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는 경전이나 교리 등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프리메이슨 특유의 의식(ritual)을 통해 대상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주술적인 것이든, 일종의 최면이나 심지어는 마약을 사용한 것이든 간에 메이슨에 입문하여 일정한 위계에 도달한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직접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 아닐까.

예를 들면, 이들은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을 육체와 분리시켜 소위 저승이라는 세계를 직접 체험하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정말로 영혼이 육신을 떠나 일시적인 여행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매우 정교하게 유도된 망상에 불과한 것인지는 국장이 말할 수 있는 차원은 아니다. 그러나 설사 후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직접 오감을 통해 체험한 것은 책으로 읽은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갖게 된다. 객관적인 사실 여부를 떠나 스스로가 죽음의 세계를 직접 방문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면 그것이 주는 신념과 확신의 무게는 경전이나 사제의 말을 통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현실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수단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소위 접신이나 종교적 은사, 혹은 유체이탈 따위의 심령적 능력에 의해 메이슨 외부에서도 실현되고 있을 수 있다. 다만 메이슨은 이를 조직적이고 집단적이면서도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서포트하며,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진 것으로 알려진 능력을 어떤 기술적인 방법에 의해 메이슨 내에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황홀경에 빠진 샤먼.
이들은 이 속에서 저승을 포함한 다양한 세계를 방문하고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프리메이슨은 이런 능력을 보다 세련된 형태로 제공해 주는 것일까.

암튼 그 결과 이를 통해 메이슨은 다른 종교들이 갖지 못한 무기를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근대와 현대를 통틀어 내노라 할 유력자들을 끊임없이 조직에 가입시킬 수 있었고, 또한 일반 종교들을 아예 포괄해 버릴 정도의 배포를 가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떤 종교를 믿던 간에 '초월자'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가입할 수 있는 메이슨의 수칙은 그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은 더욱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메이슨이 비의의 모든 것을 100퍼센트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이들 역시 성당기사단을 필두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비의의 내용에 파편적으로 접근한 것일 뿐, 그 진정한 핵심에는 여지껏 도달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중세의 연금술은 아마도 메이슨과 그 언저리에서 고대의 비의에 더욱 가깝게 근접하기 위한 실험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연금술을 통해 그들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살아가는 통합체로서의 인간을 추구함으로써, 보다 '고차원적' 인 생물로 진화하고자 하는 메이슨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었을까. 이집트는 물론 거의 모든 문명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신적인 존재들의 모습은, 사실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죽음과 삶의 비밀을 알고 이를 다루며 살았던 초월적 존재로서 고대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비의란 인간이 뛰어넘을 수 없다고 여기고 있는 한계, 다시 말해 삶의 덧없음과 죽음의 공포의 문제를 해결할 때만이 그 진정한 권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말고 과연 무엇이 비의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을 것인가. 돈, 권력, 명예, 지위 같은 세속의 덧없는 가치들이 감히 수천 년 이상을 간직해 온 인류 역사상 최대 비밀이자 최고 지혜의 자리를 넘볼 수 있을 것인가.





실제로 존재하던 하지 않던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대상들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그것은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내면적 속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프리메이슨과 미국 (3)

지금까지 국장이 제시한, 프리메이슨과 미국 관련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시간이 꽤 지난 만큼 한 번 더 되새겨 보자.

1. 미국 땅이 처음부터 유럽 프리메이슨이 그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선택한 땅일 가능성.

2. 조지 워싱턴을 비롯 미국 건국과 관련된 프리메이슨의 깊은 관여. 이는 미국 1달러 지폐 뒷면에도 있는 '그레이트 씰' 을 통해 확인 가능함.

3.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이집트식 오벨리스크인 워싱턴 기념비와 밀레니엄 행사의 면면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아직도 살아있는 프리메이슨과 그 의식(ritual)의 자취.

그럼 이제 오늘은 지난 번에 말씀드린 대로 9.11 사건에 대해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이 세기의 大테러가 과연 프리메이슨 및 그 언저리의 갈등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1977 년에 완성된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지상 110 층, 412 미터에 달하는 높이에 총 대여(사무) 공간 28 만 평, 내부 활동 인원 5 만명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 일단 9.11 테러를 다시 기억해보자. 다들 알다시피 이 사건은 미국 뉴욕 맨해튼에 소재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 두 동이 계획된 테러에 의해, 여객기 2 대의 충돌로 거의 동시에 무너져 내린 사건이다. 물론 이와 함께 미국 국방성 건물의 측면에도 비행기가 충돌하여 일부 파손되었고, 어디론가 향하던 또 다른 한 대의 비행기는 중간에서 승객들에 의해 강제 추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 이 사건은 규모 자체가 너무 엄청나고 상황이 극적이기 때문에 발생 당시는 물론 그 후에도 한참 동안 사람들의 얼을 빼놓았다. 티비로 생중계된 무역 센터의 파괴는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국장(당시 캐나다 토론토에 있던)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잠시 동안 실제 상황으로 인식을 하지 못했을 정도다.

이후 조사에 의해 사건의 주동자는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 억만장자 집안의 아들이자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조직 알 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으로 알려졌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 알 카에다에 협조적인 것으로 알려진 탈레반 정부를 전복시킴은 물론 이후 후세인과의 연계를 주장하며-물론 대량 살상 무기 문제도 함께 -이라크까지 침략, 정복한 바 있다.

... 그런데 이 거대한 규모의 사건들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와중에 좀 납득이 안가는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테러 자체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만약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로 미국을 상대로 911 규모의 엄청난 테러를 감행한다면 그 목표물로는 현실적으로 미국에 괴멸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장소들을 고르게 되지 않을까. 즉, 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처럼 파괴될 경우 대통령 사망이나 의회 정지 등을 초래함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치와 사회에 대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그런 타겟을 말이다.

만약 국장이 오사마 빈 라덴이고 네 군데의 비행기 테러 타겟을 골라야 하다면 그 우선 순위는 당연히 백악관, 국회의사당, CIA 본부, 국방성 등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에는 각 두 대의 비행기를 보내서 실수 가능성을 줄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타겟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 빌딩이었다. 그러나 사실 거창한 이름과 달리 이 건물은 기본적으로 수많은 크고 작은 회사가 입주해 있는 오피스 빌딩일 뿐이다. 도대체 왜 이 빌딩이 이런 세기의 테러의 타켓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더욱 납득이 안 가는 것은, 놓치기 쉬운 부분이지만. 건물 두 동을 모두 타겟으로 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자. 하이 재킹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자살 테러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아무 데나 추락시키는 것이 아닌, 수백 킬로미터 속도로 달리는 항공기를 몰아 목표물에 정확히 부딪혀야 하는 이 테러를 위해 알카에다 요원들은 비행기 조종 학교에서 교육까지 받았다. 힘들게 탈취한 비행기는 물론 이처럼 고도로 훈련 받은 테러범들을 겹으로 소모시키면서까지 이 오피스 건물을 '둘 다' 무너뜨려야 할 필요성이 어디에 있을까.

만약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선택한 것이 유명 민간 건물을 파괴함으로써 미국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게 목적이라면 그 중 한 동을 부수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하고, 비행기 한 대는 다른 곳을 목표로 하는 것이 자원의 활용이라는 점에서 훨씬 효율적이라는 점,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우리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결국, 이 사람들은 이 모든 비효율 및 하나뿐인 생명과 맞바꾸면서까지 월드 트레이드 센터 두 개를 다 무너뜨려야만 하는 남 모르는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비밀스러우면서도, 구체적이면서도, 치명적인 그 어떤 이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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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이 미스테리를 풀어줄지도 모를 답을 한 번 찾아 나가 보자. 일단 아래 그림을 보시기 바란다.

이것은 미국 오하이오주의 프리메이슨 그랜드 랏지 문장이다. 잘 알려진 전시안() 및
컴퍼스 등의 상징과 함께 보이는 것은 바로 두 개의 기둥. 같은 모양과 높이로 뻗은 거대한 수직 기둥이다.

그리고 아래 그림은 그들 스스로가 만든 프리메이슨 템플의 모형이다. 사진 핀트가 좀 나가긴 했지만 역시나 두 개의 수직 기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래는 더 직접적으로, 잉글랜드 남서부의 Hayle 지방에 있는 지역 '프리메이슨 홀' 의 내부 사진이다.

... 이쯤되면 국장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거다.

그렇다. 프리메이슨 국가 미국의 심장부에 서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고 거대하면서도 유명한 두 개의 수직 기둥, 월드 트레이드 센터. 어쩌면 이 단순무비하고도 무지막지한 건물은 원래부터 프리메이슨의 기념비라는 의미를 염두에 둔 채-물론 오피스 빌딩으로의 실용적인 용도도 함께겠지만- 지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기둥을 둘 다 박살내버린 9.11 테러의 상황은 결국 이 미국 프리메이슨의 자신감 넘치는 기념비를 철저히 괴멸시킨다는 상징적이면서도 단도직입적인 행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것은 어쩌면, 프리메이슨과 원칙적으로 같은 (고대의) 지식이나 정보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 길과 철학을 달리하는 다른 집단의 공격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메이슨의 상징인, 그럼에도 그 현대적 외양 때문에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던 트윈 타워를 박살냄으로써 '우리는 너희의 정체를 알고 있고,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메이슨적 의미도 알고 있으며, 너희 생각처럼 약하지도 않다' 는 메세지를 전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한 편, 다른 타겟이었던 국방성 건물조차 펜타곤(오각형)으로 헥사곤(육각형, 다윗의 별로 알려진 포개놓은 삼각형 두 개) 등과 함께 메이슨의 상징물인 것이다.

... 세계 최대의 오벨리스크인 워싱턴 기념비와 자유의 여신상-자유의 여신상은 대략 프랑스에서 미국에 선물로 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는 1884 년 프랑스 프리메이슨(French Grand Orient Temple Masons)이 미국 프리메이슨에 선물로 준 것이다. 이 여신상을 세우면서 뉴욕 프리메이슨(the Masonic lodges of New York)은 엄숙한 메이슨 의식을 치루기도 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여신상은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 모델 자체가 고대 그리스로 소급하는 이교도적 인물상이다. 이 여자가 왜 공공연한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관문에 세워질 수 있는지, 어째서 자유를 상징하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리고 두 개의 거대한 기둥, 오각형의 펜타곤이 세워져 있는 프리메이슨 제국 미국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또 다른 세력.

자유의 여신상과 프리메이슨의 관련은 괜한 추측이 아니다. 설계자인 Frederic Auguste Bartholdi 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는 이 카드의 아래쪽에 선명한 메이슨의 컴퍼스와 삼각자 심볼을 눈여겨 보시기 바란다. 참고로 여신상의 실제 건축가인 구스타프 에펠 역시 프랑스 프리메이슨의 주요 인물이다.

기독교와 유태교, 이슬람 등이 그렇듯 실은 같은 뿌리를 가졌음에도 오랫동안 다른 세계관을 발전시킴으로써 오히려 더 치명적인 숙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관계... 유럽과 미국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성당기사단/프리메이슨 계열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이들을 이단시하며 자신들이 진정한 비의의 계승자이자 정통이라고 믿는 세력... 바로 이런 세력이 지구상에 따로 존재하는 것 아닐까.

만약 이런 강력한 안티 프리메이슨 세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들의 진정한 거점이 될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지구상에 단 한 군데 뿐일 것이다.

그렇다. 4 대 문명 발상지 중 한 곳, 동서양 문명의 교차점, 아브라함과 예수, 마호멧이 태어나고 활동한 곳, 3 대 주요 종교의 발상지, 열강의 각축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당 기사단이 고대의 비의를 배워 온 바로 그 곳.

중.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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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기사단이 예루살렘에서 백 년 가까이 거주하며 무언가를 가져오거나 배워 왔다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들이 이럴 수 있었다면 실제로 예루살렘을 훨씬 오랫동안 지배했던 중동 지역의 이슬람 세력은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실은 이 사람들이 성당 기사단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간 장본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중동의 현지인들이 성당 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과는 별도로 이 비의를 간직, 계승하고 있었다면 그것 역시 어떤 형태로든 현대에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일반에게는 전혀 열람이 허락되지 않은 채 비밀 엄수를 맹세한 특수층에게만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 내내 지성적, 사회적 우위를 점하고 유럽과 동등하게 경쟁하던 중동 세력은 19 세기 말과 20 세기 초를 기점으로 국제 무대에서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 과학과 합리주의를 수용한 유럽과 미국은 더욱 승승장구하여 이른바 세계의 리더로서 등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적 침략이 만연하고 서양 위주로 세계 질서가 철저히 재편되고 말았다. 특히 미국의 약진은 고대 로마 제국을 연상케 할 정도로 눈부신 바 있었고, 이를 바라보는 중동의 시각은 착찹했을 것이다.

중동(Middle East)은 2 차대전 후에 지금과 같은 뜻을 갖게 된 용어로서 원칙적으로 터키, 그리스, 키프로스,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이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 수단,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예멘, 오만, 바레인, 카타르, 아랍 에미레이트 등 서남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을 의미한다.

상상해보자. 그들도 비의를 알고 있었다. 그 비의는 일반에 알려질 경우 인간의 삶을 바닥부터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고, 이런 너무 큰 무게에 의해 오히려 영원히 비밀로 남을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는 점은 지난 번에 이야기한 바와 같다. 이런 이유로 인해 중동의 전수자들은 그저 이를 깊숙히 숨겨 놓기만 했다.

그러나 유럽의, 성당 기사단의 계승자들은 비밀은 비밀대로 남겨 두면서 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우두머리가 되어 철저한 계획과 계산 하에 '신세계 질서' 의 이상을 구현해 낼 수 있도록 극히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넓은 가능성의 땅에 프리메이슨 국가 미국을 건설, 번영시킴으로써 그 활동은 절정에 다다른다. 한 마디로, 중동이 수동적으로 때를 기다렸다면 유럽과 미국은 능동적으로 때를 스스로 만들어 온 것이다.

중동의 전수자들이 이를 심각하게 인지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버렸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 차 대전의 판단 착오로 거의 괴멸에 가까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이미 부와 힘을 거머쥔 미국과 유럽의 열강들은 중동의 정치, 경제에 관여하여 이 땅을 사분오열하다시피 한다. 특히 석유와 관련된 이권 쟁탈에서 백인들의 행보는 신속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권리를 서양인들에게 빼앗기고 난 다음이었다. 이런 현실 사회/정치에서의 파멸적인 수세는 2 차대전 후 이스라엘의 건국-중동의 미국 거점으로 작용하는-과 잇다른 중동 전쟁 패배 등으로 극에 다다르게 되고, 미국은 모든 면에서 점차 중동에 있어서 같은 하늘을 이고 살기 힘든 숙적이 되어 갔을 것이다.

일반인들도 견디기 힘든 이런 모멸적인 상황에서, 비의의 정통 수호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미국은 과연 어떤 존재로 비춰졌을까. 비의의 진정한 의미도 모른 채 힘만 믿고 날뛰는 악동.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세계 질서를 억지로 창출하려는 위험한 철부지. 프리메이슨 같은 조직을 통해 신성한 비의를 친목 단체 수준으로 끌어내린 싸구려 정치꾼들... 가르침의 고향인 중동을 무시하고 물심 양면으로 어떻게든 지배하려 드는 침략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멸시켜야만 할 웃자란 이단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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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한 번 살펴보자.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이라크 침공의 명분이었던 대량 살상 무기니 빈 라덴과의 연결이니 운운하는 것들이 대부분 근거 없는, 명분을 위한 명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실 이는 최근 미국 정부에 의해서조차 확인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라크 침공의 진짜 이유는 미국의 석유 확보에 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아마 이것이 정답일 거다.

그러나 이 글의 맥락을 통해 상황을 다른 각도로 함 생각해보자. 국장이 뇌리에서 지우기 힘든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이라크의 석유가 미국이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그 모든 전쟁 경비와 정치적 부담, 자국인을 포함한 인명 살상은 물론 범지구적 비난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후세인과 빈라덴을 합치시키면서 전쟁을 벌일 정도로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어차피 전세계에 매장된 석유는 불과 몇십 년 내로 바닥이 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 정부도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럼 이런 와중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써 얻게 되는 석유의 양은 과연 얼마나 될까. 3 년치? 5 년치?

요컨대, 어차피 바닥이 눈에 보이는 자원을 불과 몇 년어치 더 쌓기 위해 이런 규모의 활동을 벌인다는 것이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인가 이 말씀이다. 물론 부시 가문이 미국 석유 메이저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사적인, 사업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석유 매장량의 절대량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이라크 침공이 미국에 가져다 줄 이익의 한계는 여전히 명백하다. 결국 고작 몇 년치의 잉여 석유가 그것이다.

이라크에 다량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거시적인 의미에서 이라크의 중요성은 중동의 중심에 위치한 국가로서 세계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유서깊은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우리가 이 글을 통해 가정하고 있는 초고대의 지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상식적인 상황에서라면, 전쟁 수행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바람직한 방법은 이 모든 천문학적 전쟁 경비를 대체 에너지 사업으로 돌려 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대비하는 것이다. 석유 사업자들의 이권 문제를 이야기 하지만 이런 전쟁을 벌여 전세계의 공분을 사는 것 보다는 국내에서 대체 에너지 사업권을 석유 기업들에 배타적으로 이관해 줌으로써 향후 이들의 수익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고도 부작용이 적지 않았을까. 부시와 그 주변인들은 정녕 이다지도 생각이 없단 말인가.

아니면, 석유조차도 실은 진정한 침공의 목적을 은폐하기 위한 또 하나의 연막에 불과한 것일까. 조지 부시의 이 모든 바보 짓들이 실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라면?

트윈 타워 공격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 챈 미국의 숨은 지도자들이 상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재빠르게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라면 어떨까. 그 모든 경비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수백억 달러의 돈이나 몇 천, 몇 만 명 정도의 인명을 희생시키면서도 늦출 수 없는 과업. 그것은 혹시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또다른 라인의 비의 수호자들을 찾아내서 이 기회에 제거해 버리는 작업일까.

혹은, 이라크 지역에 아직 묻혀 있을지 모를, 그들의 선조가 근 천년 전에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 터에서 파낸 모종의 물건들과 같은 기원을 가진 그 무엇을 찾아내려는 것일까. 어쩌면 지난 천년동안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바, 특히 9.11 공격을 계기로 이를 더 이상 늦출 수가 없게 된 것 아닐까. 그리고 그럼으로써 비의와 관련된 힘과 정보의 발란스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는 것은 물론 '신세계 질서' 의 구축에 마지막 구둣점을 찍으려는 것일까.

그리고 설마, 그런 이유때문에 있지도 않은 대량 살상 무기를 찾는답시고 온 나라를 헤집고 파헤친 것일까...?

그렇다. 5 천년 전에 일어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기초로 하는 수메르 등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 만약 초고대로부터 모종의 비의가 전해졌다면 이집트와 함께 마땅히 그 중심지였을 장소. 바로 이라크인 것이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프리메이슨과 미국 (2) 

지난 시간에 살펴본 great seal 만으로도 이집트에 대한 미국의 이상한 집착은 충분히 드러나지만, 사례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오벨리스크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가? 글타. 의당 이집트에 있어야 할 것 같지만 놀랍게도 그 답은 미국이다. 그리고 이 오벨리스크는 런던, 바티칸, 파리에 있는 것들과는 달리 이집트에서 뜯어 옮겨간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이 직접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이름은 '워싱턴 기념비' 다.

1885 년에 완성된 높이 170 미터(63 빌딩은 249 미터), 총무게 9 만 854 톤의 거대한 워싱턴 기雅奏?사진에서 보듯 그 구조와 비례 등 모든 면에서 이집트 오벨리스크의 완벽한 복사판이다.

물론 조지 워싱턴이 마스터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사실은 지난 시간에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수십 년 후에나 착공된 이 오벨리스크가 단순히 프리메이슨 단원으로서의 조지 워싱턴 개인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기에는 사업의 규모가 너무 큰 데다가 이렇게 티나는 디자인을 채용하는 것도 좀 명분이 서지 않는다. 이런 거대한 공사는 당시로서는 국가차원의 대사업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정황을 통해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비석이 조지 워싱턴 개인에게 바쳐진 것이라기보다는, 프리메이슨이었던 워싱턴의 이름으로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오벨리스크를 신세계 미국에 건설함으로써 이집트 및 고대의 법맥 계승을 주장하려 했을 가능성인데, 지난 시간에 살펴본 미국 건국의 배경을 고려한다면 이는 허황된 생각만은 아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현재 전 세계에 20 개밖에 남아 있지 않는 오리지널 오벨리스크 중 15 개가 현재 이집트 바깥으로 옮겨져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 하다. 바위 덩어리인 오벨리스크를 분해한 뒤 배로 옮기는 일은 지금도 많은 돈과 노력이 드는 지난한 작업이고, 실제 이런 작업이 이루어졌던 19 세기에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왜 유럽인들은 이 단순한 건조물을 자기네 나라로 옮기는데 이렇게 큰 노력을 기울었을까. 런던의 템즈강변과 프랑스의 콩코드 광장 한 가운데로 옮겨진 오벨리스크들은 대체 무엇을 상징하는가? 더욱 이상한 것은 가톨릭의 총본산 바티칸에 옮겨져 있는 오벨리스크다. 이 전형적이고도 노골적인 이교도의 상징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뜰 한 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럼 이제 아래 사진을 보시기 바란다.

이 장면은 지난 1999 년 12 월 31 일 자정 미국의 밀레니엄 축제를 찍은 것이다. 그리고 오색찬란한 조명과 장식으로 무장한 이 기둥은 물론 워싱턴 기념비다. 미국정부는 기존의 돌로 된 워싱턴 기념비 전체를 옷처럼 감싸는 거대한 철 구조물을 입히고(이 구조물은 97 년도부터 수리와 청소라는 명분으로 붙여진 것이긴 하다), 여기에 각종 조명과 불꽃놀이 장치 등을 설치했다. 그 결과는 보는 바와 같이 150 미터가 넘는 오벨리스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하고도 웅장한 빛과 색의 향연이다. 규모나 모든 면에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압도하고도 남는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좀 생각해보면 이 행사는 아무래도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아무리 격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미국이라지만 '국부' 로 추앙받는 엄숙하고도 지엄한 조지 워싱턴을 기념하는 비석을 이런 용도로 사용한 것은 좀 지나친 것 아닐까. 이건 마치 고구려의 영광을 기념한답시고 광개토대왕 비석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게 하는 류의 발상이 아닌가 말이다. (한편, 같은 시각에 파리의 에펠탑도 워싱턴 기념비와 거의 같은 형태의 장식을 달고 비슷한 역할을 했다. 짐작할만 하겠지만 에펠탑의 건립자인 구스타브 에펠 역시 프리메이슨 단원이다.)

물론 미국의 영광을 상징하기 위해 이 거대한 기념비만큼 좋은 것도 없긴 하겠지만,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사용하는 것은 그만한 동기가 없다면 납득하기 어렵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순간에, 워싱턴을 빙자해 세워진 이 거대한 고대의 상징물은 왜 이처럼 화려하게 빛나야 했을까.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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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을 보자.

... 이 그림은 마치 밀레니엄 축제에 사용할 워싱턴 기념비 장식의 디자인 시안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이것은 미국이나 워싱턴 기념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멀고 먼 아프리카의 한 부족이 자신들의 오랜 전설에 따라 그려놓은 그림이다.

도곤족이라는 이 부족이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중 하나인 시리우스를 숭상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20 세기 초에 이들을 방문한 백인학자들은 이들이 서양학계에서도 발견한 지 몇십년 되지 않은, 지름이 지구의 3 배밖에 안되는 관계로 육안은 물론 천체 망원경으로도 보기 힘든, 시리우스의 동반성인 백색 왜성 '시리우스 B' 의 존재와 특성-강력한 중력, 색깔, 크기, 시리우스 A 와의 궤도 관계 등-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도곤족의 전설에 따르면 수천년 전 시리우스에서 어떤 존재들이 그들을 방문했으며, 시리우스 B 에 대해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이 외계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디자인 시안은 이들이 타고 온 '날틀' 을 도곤족이 전설에 따라 이미 수백년 전에 그려 놓은 것이다.

머 이 외계인들의 존재와 방문의 사실성 여부는 우리의 논지를 다소 벗어나는 것인 만큼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던 간에 이 아프리카의 전형적인 원시 부족이 시리우스 B 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인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시리우스가 바로 이집트 신화에서 명부, 즉 죽음을 관할하는 오시리스의 동생/아내이자, 이집트의 단군인 호루스의 어머니이자, 생명과 탄생을 관장하는 최고신 중 하나인 이시스의 상징, 동격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에게 있어서 오시리스와 이시스, 호루스 가족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 워싱턴 기념비를 둘러싼 세기말 레이저 쇼의 미스테리는 조금씩 풀려 나간다. 워싱턴 기념비 자체가 프리메이슨의 미국 건국과 그 이상을 상징한다는 점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세계 최대의 오벨리스크가 미국의 수도 한 가운데 세워져 있다는 것은 이런 맥락이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백여년 전 이것의 '건립' 이 프리메이슨 국가로서의 미국의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미 20 세기를 통해 그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지금의 미국은 단연 최고의 부와 권력, 군사력을 가진 거대 제국으로서 지구상에 대적할 자가 없다. 설사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승부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현재 미국의 힘은 압도적이다. 이것은 우리 논의의 맥락에서는 프리메이슨의 염원이 성취일로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인 새천년 교체기에 이르러 미국의 발전을 기원하던 이 워싱턴 기념비는 이제 보다 구체적이고도 극적이면서도 화려한 형태로 탈바꿈하여 미국-프리메이슨- 의 진정한 시대가 현실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모습은 아마도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조차도 그 디자인을 빌려온, 이집트 이전에 존재했고 도곤족의 전설에 남아 있는 어떤 원형을 직접적으로 흉내냄으로써 프리메이슨이 재현하고자 하는 옛날 황금기를 더욱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원형' 이 도곤족의 주장처럼 시리우스에서 온 외계인의 비행체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최소한 도곤족이 수천년 이상 유지하고 있는-다소 변질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전설과 이집트 신화, 오벨리스크의 디자인, 프리메이슨의 믿음 등등이 최소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이집트 이전의 잊혀진 문명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아마도 오벨리스크보다 더 과거로 회귀한 워싱턴 기념비의-어쩌면 에펠탑도- 화려한 장식은, 수천년 전 이집트 제국 이후 처음으로,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욱 직접적으로 과거의 잊혀진 문명을 확실하게 계승하는 미국 프리메이슨의 자신감과 성취감의 반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이제 때가 이르렀다' 는 모종의 선언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국장은 아직 이 초고대의 정체 자체에 깊이 파고들 생각은 없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료로 인해 너무 많은 가정과 상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정도를 근거로 '초고대
아틀란티스 문명은 시리우스에서 온 우주인들이 만든 것이다!' 라는 식의 주장을 펼치는 것은 국장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접근은 유럽 이야기 중의 이집트 편에서 다루어 봤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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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밀레니엄 축제 언저리에서 보이는 이런 이상 징후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축제를 바라보고 있는 당시 대통령 빌 클린턴 가족의 사진을 보자.

얼핏 별로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빌 클린턴의 턱시도 왼쪽 가슴 위에 작은 뱃지 같은 게 달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현직 대통령이 이런
중요한 행사에 달고 나온 뱃지라면 그만큼의 중요성과 의미를 갖고 있어야 마땅한데, 이 단순한 디자인의 뱃지는 대통령으로서의 클린턴과 관련된 정부 부처 등 기타 어떤 상징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는 단순한 도안의 이 뱃지는, 그러나 자세히 보면 놀랍게도 오시리스/호루스의 상징이자 미국 1 달러 지폐에도 그려져 있는 '전시안' 과 아주 비슷한 형태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미국 대통령이 밀레니엄의 역사적 순간에 턱시도 위에 굳이 전시안 뱃지를 달고 나타난 것이 사실이라면 (여자들은 오히려 브로치 등 아무런 장식도 하고 있지 않음을 참고하시라), 이것은 워싱턴 기념비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프리메이슨 류의 의식(ritual) 과 관련짓지 않으면 해명이 불가능할 것이다.

한편 위 사진은 워싱턴의 밀레니엄 기념식을 독점 중계한 미국 CBS TV 의 심볼인데, 이것 뭘 연상시키는지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지 싶다.

이 또다른 '전시안' 로고는 밀레니엄 행사 생방송 내내 TV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 고정되어 있었다. 결국, TV로 행사를 바라보던 수억의 시청자들은 새천년이 시작되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오벨리스크-꼭대기에 피라미드 형태를 포함하는-와 전시안이라는 두 개의 고대 이집트, 혹은 잊혀진 초고대 문명의 상징물에 동시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CBS 의 모회사 VIACOM 은 유태계 미디어 재벌로서 CBS 방송사는 물론 메이저 영화사인 파라마운트, 영화 배급사 UIP, 북미 전역과 유럽에까지 뻗어 있는 거대 비디오 렌탈 체인인 블록버스터 비디오, MTV 등을 산하에 거느린다. 회장 SUMNER M. REDSTONE 은 미국의 유태인 사회는 물론 재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단지 우연일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약 이것이 모두 어떤 목적에 의해 치밀하게 프로그램 된 것이라면 프리메이슨과 그들의 믿음, 계획이 미국의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작금의 국제정세로 볼 때 이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프리메이슨과 미국 (1)

공식 명칭 United States of America. 줄여서 USA, 흔히 그냥 아메리카라고도 불리는-그러나 이 표현은 북/중앙/남 아메리카 대륙 바깥의 국가들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캐나다 사람들에게 미국을 '아메리카' 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다. 이럴 때는 'US유에스)' 라고 하면 된다-이 나라가 2004 년 현재 국제 무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다.

흔히 미국의 저력은 프론티어 정신, 광활한 국토에서 비롯되는 자원과 가능성, 합리주의, 사회/정치적 안정, 20 세기 이전부터 착실히 쌓아올린 부(노예가 바탕이 되기도 한), 1,2 차 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얻어낸 국제적인 파워와 경제력 그리고 과학 기술력 등등의 맥락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위와 같은 긍정적 일색의 평가는 대부분 미국인들 자신에 의해 퍼트려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미국이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한 자본주의 계열의 제 3 세계 국가들-울나라 같은-에서는 이런 평가들이 마치 신화처럼 정착되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카네기나 록펠러 같은 미국 부자들의 전기를 읽고, 워싱턴이나 링컨 등 미국 정치가들의 전설적인 인격에 감동하며 에디슨, 아인슈타인 등의 지적인 업적에 매혹된다. 또 포스터의

개인적으로 그저 그런 노래들을 학교에서 정식으로 배우고 아카데미, 그래미 어워드의 권위를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우리는 다양한 계기를 통해 미국의 다른 이면들을 보게 되었다. 제국주의 수탈 국가로서의 폭압적 면모, 해결될 것 같지 않은 흑백 갈등과 인종 차별, 극심한 빈부 격차, 각종 강력 범죄 등은 미국이 분명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며 더 이상 이상화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암튼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각도의 해석과 접근이 가능한데,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 우리의 테마는 물론 위와 같은 일반적이고도 정석적인 관점이 아닌 '이설' 에 가깝다. 그러나 미국을 연구하는 학자나 지식인층의 철저한 외면에도 불구하고 이 '이설' 적인 요소들이 미국의 건국과 발전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그리고 어쩌면 미국의 정체성 자체와 아직도 밀접하게, 혹은 절대적으로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 거대한 제국 USA와 고대 비의의 전승 집단 프리메이슨은 과연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우리가 아는 미국은, 17 세기 초 탄압받던 영국의 청교도-신교도-들이 건너가 만든 영국의 식민지를 모태로 하여 18 세기에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 정식으로 세운 나라로서, 프로테스탄티즘, 즉 기독교의 개신교가 정신적 바탕이다. 물론 현재는 수많은 인종과 지구상의 거의 모든 종교가 어우러진 사회로서 아무도 미국을 '기독교 국가' 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사회 지도층과 백인 중산층에 있어서 기독교/개신교의 영향력은 여전히 지대하다. 가톨릭 신자였던 존 F 케네디 등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미국 대통령들이 개신교 신자라는 사실만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국기에 대한 맹세라고 할 'Pledge of Allegiance' 에도 이러한 종교적 성향은 명백히 드러난다.

I pledge allegiance to the flag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o the republic for which it stands; one nation under God, indivisible, with liberty and justice for all. (참고로 Metallica 의 4집 '...and justice for all' 은 여기서 따온 것)

물론 울나라 애국가에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운운하는 표현이 있지만 이때는 그야말로 하늘, 운명 정도의 의미로 구체적인 종교적 색채는 거의 없다. 그러나 애시당초 기독교인들이 세운 국가인 미국에서 'God' 의 무게는 우리와는 전혀 다르고, 이는 아직도 분명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런 배경을 기억한 채 아래 사진을 보자.

이것은 미국에서(아마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발행되고 사용되는 지폐인 1 dollar bill 이다. 앞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 그리고 뒷면에는 두 개의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뒷면의 왼쪽 그림을 확대해 보자.

다름 아닌 이집트 풍의 피라밋이다.

...아마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미국의 1 달러 지폐에 피라밋이 그려져 있다는 걸 이미 아시는 분들도 많을 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정황과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피라밋 그림은 단지 1 달러 지폐를 위해 도안된 것이 아니라, 뒷면 오른쪽에 있는 독수리 그림과 함께 미국을 상징하는 'The Great Seal' -seal 에는 '옥새' 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문장' 정도로 해석 가능-의 양면 중 하나다. 1782 년에 확정된 이 씰은 이후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1 달러 지폐에도 이처럼 큰 자리를 차지하고-앞면 워싱턴 사진 보다 별로 작지 않다- 인쇄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피라밋 도형과 글자들이 대체 어떻게 미국을 상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술했다시피 미국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국가이며, 1782 년 당시에 그 영향력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피라밋 문양은 도무지 기독교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이교도의 것이다. 게다가 피라밋 꼭대기의 all seeing eye 는 (전시안이라고 번역함) 고대 이집트의 신 호루스-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의 눈을 사실적으로 바꾼 것이다. 이런 문양이 청교도 미국의 'The Great Seal' 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호루스의 눈. 호루스는 신의 아들로서 한국의 단군,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등에 비견할 이집트의 전설적인 시조다.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 아폴로와 동일시 되기도 한다.
그럼 피라밋 위 아래의 라틴어들을 살펴보자. 내용을 보기에 앞서, 여기에 라틴어가 사용되었다는 자체도 그리 자연스럽지 않다. 로마 제국의 언어이자 중세 가톨릭의 문자인 라틴어가 개신교와는 여러모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아버지인 마틴 루터의 주된 업적 중 하나가 바로 라틴어로 된, 따라서 일부 식자층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 출판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성직자의 해석을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의 말씀' 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종교 개혁/개신교의 발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런 개신교 신자들이 모여 만든 나라인 미국의 상징에 왜 다시 라틴어가 등장해야 하는 것일까.

내용도 좀 부자연스럽다. 위의 'ANNUIT COEPTIS' 는 영어로는 'God has favored our undertaking.' 이 되고 직역하면 '신은 우리의 사업/노력을 지지하신다.' , 즉 '신은 우리편' 이라는 정도의 의미다. 머 여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싶지만, 아래의 'NOVUS ORDO SECLORUM' 는 좀 느낌이 다르다.

이 문장은 영어로 'a new order for the world' 가 되므로 '신세계 질서' 라는 뜻이다. 머 미국쯤되는 거대한 나라라면 좀 건방지긴 하지만 이런 표현을 쓸 수도 있지 않나... 싶겠지만, 18 세기 독립 당시의 미국은 동부의 13 개 주에 불과한 상태로 지금과 같은 초강대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에 견주어 본다면 신세계 질서 수립과는 좀 거리가 먼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처음부터 어떤 구체적인 건국의 목적과 강력한 배경 사상이 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영국에 비싼 세금내기 싫으니 새땅에서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 는 정도의 독립 개념으로는 '신세계 질서' 라는 표현이 등장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데, 이 피라밋 그림과 글자들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미국과는 전혀 관련이 없거나 모순되는 것들임에 틀림이 없다. 어떻게 이런 것이 미국의 문장이 되었으며, 왜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널리 쓰이는 종이 쪼가리인 '1달러 빌' 에 저토록 크게 인쇄되어 수억명의 손과 눈을 거쳐가고 있는지는 일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심지어 미국 정부에서 발간된 간행물에조차 그 의미는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은 채-The Great Seal 제정 당시에 그림과 문자들의 정확한 뜻을 정의한 문건이 남아 있지 않음- 현대적 관점에서의 불명확한 해석만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림 하나만으로도 대략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아마도 미국의 건국에는 개신교만이 아닌,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다른 비기독교적 사상이나 세계관이 개입되었을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상은 건국 시점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발전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남은 의문은 그 사상이 과연 무엇이며, 도대체 얼마나,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냐는 점이다.



위 사진은 1867 년에 제작된 석판화다. 그리고 중앙에서 흙손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다. 아시다시피 워싱턴은 단순히 초대 대통령을 넘어 미국의 탄생과 동격으로 취급되는 인물로서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근데 왜 갑자기 워싱턴 석판화를 등장시켰냐고? 그건, 그가 입고 있는 '앞치마' 를 자세히 보면 프리메이슨의 공식 문양, 즉 컴퍼스와 자를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미국의 정신' 이라는 이 인물이 프리메이슨의 정식 회원, 마스터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때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물론 이를 근거로 '조지 워싱턴 = 프리메이슨 = 미국' 이라는 등식까지 도출하는 것은 좀 성급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이런 정황을 통해 미국 건국에 프로테스탄티즘 외에 프리메이슨의 사상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다. 역시 건국의 산파이자 번개의 정체를 알아낸 실험으로도 유명한 동시대의 벤자민 프랭클린 역시 공인된 프리메이슨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프리메이슨 시리즈 첫편에서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43 명의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소 십여 명이 공개적으로 프리메이슨에 가입된 인물이었다. 그 중에는 루즈벨트와 트루먼 등 대공황과 2 차 대전 등 현대 미국의 운명을 결정짓던 시점에서의 대통령들도 포함된다. 링컨과 레이건, 부시는 프리메이슨의 정식 멤버가 아니었지만 여러가지로 관련된 각종 활동들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연구자에 따라서는 빌 클린턴을 비롯한 미국 대통령 대부분이 33 도-최고위- 프리메이슨이라고도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부족한 실정이고, 따라서 국장은 가급적 프리메이슨쪽에서 내놓은 자료를 근거로 삼고 있다.

) 대통령들이 이러할진대, 미국의 각종 정책의 향방을 관여하는 상류층, 고위직의 인물들 중 얼마나 많은 프리메이슨이 활동하고 있을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일례로, UN 에 관련된 활동을 하던 국장의 지인이 수년 전 국장을 찾아와 '프리메이슨이 대체 뭐길래, 유엔이 프리메이슨으로 꽉 차 있냐?' 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더욱이, 앞서 살펴본 그레이트 씰의 '신세계 질서' 라는  슬로건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의 그것과 내용상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그레이트 씰의 피라밋 바닥에 새겨져 있는 로마 숫자는 1776 은 물론 미국의 독립선언이 이루어진 해지만, 동시에 독일에서 일루미나티가 성립된 바로 그 해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1776 년 5 월의 일루미나티 창립과 같은 해 7 월의 미국 독립 선언, 과연 아무 관련도 없는 우연이었을까. 한편 피라밋 위쪽 전시안 주변의 번쩍거리는 광휘는 말 그대로 일루미나티-광명이라는 뜻-을 떠올리게 한다.

초대 대통령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워싱턴은 '프리메이슨 국가' 미국의 1 달러 지폐를 장식할 자격을 가진 유일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지난 시간에 국장이 추측한 것을 되새겨 보자. 1620 년 개신교도들을 실은 메이플라워가 영국을 떠날 때부터 아마도 프리메이슨은 신천지 아메리카의 가능성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고대의 비의는 단순히 기술적 지식만이 아닌, 이를 가능케 했던 고대 황금시대의 전반적 사상이었고 그들의 임무는 이를 지상에서 다시 구현함으로써 중세 유럽의 기독교 도그마에서 벗어난 새세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새세상은 과거에 이미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찬란한 문명의 재건이다.

만약 우리가 알고 있는 교과서적 역사, 즉 5 천년 전 이전에 화려하고도 발전된 거대 문명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아틀란티스와 유사한 곳이었을 것이다. 물론 현대의 진지한 자리에서 아틀란티스를 논하는 것은 거의 우스개에 가깝지만, 과거 유럽인들의 삶에서 아틀란티스는 단순히 공상에 그치는 장소만은 아니었다. 유럽의 대양, '대서양' 의 공식 영어 명칭이 Atlantic sea-아틀란티스의 바다-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 무게가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아틀란티스는 아주 높은 수준의 문명을 누리던 고대 국가로서, 실재했다면 아마도 성당 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이 주장하는 이른바 '비의' 의 시발점일 것이다.
또 미국에는 아틀란타, 아틀란틱 시티라는 지명들이 있는데, 대서양에서 그 이름을 따왔을 것 같지만 실제로 조지아주의 주도인 아틀란타는 항구 도시가 아니며 대서양과 수백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내륙 지역이다. 이처럼 아틀란티스라는 단어와 개념은 유럽과 서구 문명에 있어서 단순한 신화나 전설 이상의 기묘한 정서적 무게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결국 미국은 애시당초부터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신 아틀란티스' 로 처음부터 계획되고 준비된 곳이 된다. 사실 이쯤 되면 이미 '비의' 운운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규모다. 그리고 불과 이백여 년 남짓한 역사 동안 미국이 이뤄낸 것들로 볼 때 그 계획, 신이 지지한다는 undertaking, 사업은 아주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고대의 은밀한 지식과 사상은 비록 극소수에게만 전수되어 왔을지 몰라도, 실제 현실로서의 세상은 지난 백 년 가까이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이상에 맞추어 재편되고 있으니 말이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 수 있을까?

...아직 많은 다른 증거들이 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프리메이슨의 역사 (하)

1717 년의 프리메이슨의 설립을 이해하려면 그 언저리 유럽의 상황을 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17 세기 말부터 18 세기에 걸쳐 있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읽기 좋게 나열해 보자.


1689 년: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몽테스키외 탄생

1694 년: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 탄생

1704 년: 영국 계몽/경험주의 사상가 존 로크 사망

1711 년: 영국 철학자 데이빗 흄 탄생

1712 년: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 탄생

1712 년: 초기 형태의 대기압 증기기관 발명

1715 년: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 세의 사망

1717 년: 프리메이슨 런던 그랜드 랏지 설립

1723 년: 영국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탄생

1724 년: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탄생

1743 년: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지에 탄생

1749 년: 프랑스 천문학자/수학자 라플라스 탄생

1756 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모차르트 탄생

1767 년: 하아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발명(산업혁명의 시작)

1776 년: 미국 독립 선언

1789 년: 프랑스 대혁명

 

이상의 연표에서 알 수 있는 이 즈음의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루이 14 세로 대변되는 유럽의 절대왕정이 약화되며 계몽주의가 퍼져 나감.
2. 기독교 철학을 대신하는 관념론, 경험론 등 근대 철학 대두됨.
3. 증기기관과 산업혁명의 시작 - 자본주의의 기틀이 마련됨.
4. 음악 및 문화의 전성시기
5. 화학, 수학 등 근대 과학이 발전함
6. 미국의 성립과 프랑스 대혁명 등 정치 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나타남

... 이 시기는 한 마디로, 유럽 대륙이 기독교 중세의 공고한 틀을 벗어나면서 명실공히 근대를 향해 나아가는 혁명적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점에 프리메이슨이 발흥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일단, 프리메이슨은 초월자의 인정을 그 가입조건으로 한다는 데서 분명히 종교적 성향을 갖고 있지만  비기독교적-그다지 반기독교는 아님-이다. 살펴봤다시피 프리메이슨의 모태는 분명 성당 기사단의 잔존 세력이나 그 언저리와 관련이 있지만, 이미 성당 기사단 때부터 이들은 기독교의 테두리에 머물기에는 너무 많은 외부 개념을 받아들여 버렸다.

그러나 중세라는 시대는 어떤 경우에도 비기독교를 표방하는 대형 종교적 단체가 존재하기에 적합한 때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은 장미 십자회 같은 유사 기독교 단체의 외형을 취하거나-포괄적인 의미에서 기독교를 '포함' 했을 것이다- 석공 조합 등 엉뚱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성당 기사단의 비참한 최후에서 교훈을 얻은 이들은 비록 비밀결사의 형태로라도 감히 큰 조직으로 발전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16 세기는 물론 17 세기까지도 이단을 화형시키는 풍조는 유럽에 엄연히 남아 있었다. 프리메이슨 그랜드 랏지의 성립이 이 시기를 지난 직후인 18 세기 초라는 점은 조직의 성격과 관련되어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던 것이,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15 세기, 16 세기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중세 기독교의 파워는 상당히 약화되었고 종교개혁과 계몽사상 등으로 교황권과 왕권이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학 및 수학, 기술의 발전과 기독교 교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각종 철학이 등장하면서 지식인들은 점차적으로 기독교에서 이탈하는 기미를 보였다. 한 마디로 도그마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시대를 지배하던 도그마의 붕괴는 곧 사회 전반의 헤쳐모여를 의미한다.

이런 시점은 그간 숨죽이고 있던 은비주의 계열의 인물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수백년간의 암중 모색을 끝내고 보다 큰 규모의 전 유럽적 조직을 건설함으로써 세상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가 된 것이다. 그 결과 1717 년 런던 그랜드 랏지가 야심차게 성립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18 세기 초 프리메이슨의 발흥의 배경으로 여겨지는 시대적 상황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생각은 실은 앞뒤가 완전히 뒤집혀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무슨 이야기냐구?



... 과연 프리메이슨이 이렇게 수동적으로 시류에 편승할 수준에 불과했을까.

장미 십자회가 등장했을 때 데카르트, 라이프니츠를 비롯한 유럽의 지식인들이 오랜 기간동안 큰 관심을 나타냈었다는 사실,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연금술 등에 뉴튼 등 당대의 석학들이 크게 경도되었던 점 등을 기억하실 거다. 이는 기독교 도그마로 억눌렸던 중세 기독교 유럽에서조차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성당 기사단 등에서 흘러나온 고대의 비의가 파편적인 형태로라도 돌아다니고 있었음을 암시한다는 점, 지난 편들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다.

그리고 장미 십자회가 발흥했던 것은 1614 년으로 프리메이슨이 창립되기 거의 정확히 한 세기 전이다.

알다시피 장미 십자회는 선언문 등을 통해 독일과 프랑스 등지에서 대놓고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동지가 되고 싶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접촉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 결과 결국 장미 십자회는 로젠크로이츠라는 허구의 인물을 배경으로 한 정체불명의 해프닝으로 일반에 인식되어 버린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생각해보자. 장미 십자회는 철저한 비밀 결사고, 동지들을 불러 모은다면서도 정작 자신들에게 연락할 방법은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때문에 유명 인사를 포함해서 관심있던 많은 사람들이 접촉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뭔가를 정말로 알고 있던 사람들, 장미 십자회의 선언문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암호화 되었을지도 모를-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수백년동안 이런 호출을 기다려 오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말이다.

일반인에게는 무의미한 숫자의 나열도 이를 해독할 수단을 가진 사람에게는 중대한 메세지가 될 수 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암호의 제시는 이를 풀어낼 수 있는 숨은 사람들, 즉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대중 속에서 끌어 모을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장치다.

아마도 이들이라면 즉각 장미십자회의 부름에 응할 수 있었 것이고, 그 결과 기독교 유럽에서 파편화되어있던 '전수자 네트워크' 의 재편이 가능했을 것이다. 장미 십자회의 철저한 비밀주의를 고려한다면 누군가가 이런 방법으로 접촉했다고 해도 어차피 일반인들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리고 접촉하는 사람들도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처럼 대놓고 눈에 띄게 행동했을리 만무하다. 매우 은밀하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움직였을 것임에 분명하다.

이런 각도로 상상해 보면 이렇다. 장미 십자회의 소집령이 떨어진 후, 이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마도 사회의 지도층도 포함되어 있었을, 자신들이 전수받은 암호 풀이 방법을 통해 다각도로 장미 십자회에 접촉한다. 단적인 예를 들면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라는 이름은 실은 어떤 장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크로이츠는 십자가이기도 하지만 십자 교차로를 뜻할 수도 있고, 장미는 실제로 유럽의 지명에 잘 들어가는 단어다. 이들은 이 이름을 통해 로즈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어느 도시의 교차로가 있는 교회 (Rose + Cross + Christian) 라는 회합 장소를 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와중에 관련 없는 유명 인물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은 오히려 이들의 움직임을 가려 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고, 회합과 네트워킹은 일반인의 관심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상태로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이들이 왜 만났는지, 그리고 무엇을 논의했는지는 명약관화하다. 성당 기사단의 부활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고-어쩌면 이것들조차도 이 사람들이 암암리에 관여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흐름의 변화는 일치감치 감지되었다. 문화,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의 리더급 인물들이었던 이들은 비밀스러운, 그러나 조직적 행보를 통해 이를 더욱 앞당기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소집령이 떨어진 후 불과 6 년후인 1620 년에 있었던  영국 청교도의 미국 이주(메이플라워 호)에 동행하기도 하는데, 이는 신대륙에 프리메이슨의 이상을 실현할 새롭고도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사회 각계에서 비밀스럽게 영향을 미친 지 백년이 지나자 유럽은 바야흐로 근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짐은 곧 국가' 를 외쳤던 루이 14 세가 사망하면서 프랑스의 전제정치는 급속히 흔들렸다(프랑스는 당시 유럽을 리드하는 나라였고, 성당 기사단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세상은 과거와는 다른 곳으로 변할 준비가 된 것이고, 이 작업의 상당 부분이 장미 십자회의 이름하에 모였던 그들에 의해 시행된 것이다.

이 시점에 이르자 이제 이들은 새로운 조직, 여전히 비밀스럽지만 장미 십자회보다는 훨씬 규모가 크고, '전수자' 들은 아니지만 지성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보다 넓게 끌어들일 수 있는 모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기독교 도그마에 반감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혁명가들,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예술가들, 왕족과 귀족들에게 집중된 부와 권력을 나눠갖고자 하는 부르주아지들, 우주의 비밀을 습득하고자 하는 과학자들, 부패한 가톨릭의 박해를 피하고자 하는 프로테스탄트들... 모두가 프리메이슨의 포섭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실제로 프리메이슨에 참여했다.

게다가 프리메이슨은 사해동포주의에 입각한 사고 방식을 통해 자유, 평등, 박애 등 진보적이면서도 계몽적인 슬로건을 내세웠고, 이는 역시 18 세기에 있었던 프랑스 대혁명의 모토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근대의 정신과 철저하게 부합되는 그 무엇이었다. 물론, 프리메이슨 자체가 근대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 마, 이렇게 추론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 말씀이다.

위의 상상/추론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해도 프리메이슨은 1717 년 런던 그랜드 랏지 창설 이전에도 존재했던 조직이다. 따라서 기존의 프리메이슨 조직과 장미 십자회의 소집령으로 모인 인물들이 모두 합쳐 대규모로 확장된 것이 이때부터의 프리메이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프리메이슨이 석공 조합이라고 하지만 그랜드 랏지가 창설되기 전부터 이미 돌을 만지는 프로페셔널의 모임만은 아니었다. 이미 17 세기 이전부터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은 Operative Mason 과 Speculative Mason 의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자는 실제 석공으로서 석공 노동조합의 일원으로 활동한 경우였고, 후자는 소위 '사변적 석공' 으로 프리메이슨의 정신적인 리더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이들 사변적 석공이 바로 성당 기사단의 맥을 잇는 사람들임에는 두 말할 나위 없다.

초기의 석공 조합적 면모는 장미 십자회의 소집령과 사회 재편의 틈바구니에서 사라져가고, 1717 년 당시의 프리메이슨은 이미 사변적 석공만을 모으기 위한 단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불과 20 년이 채 지나지 않은 1733 년에는 이미 126 개 지부를 거느리게 된 것을 보면 당시 유럽에서 그들의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영국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던 프리메이슨은 성당 기사단의 본거지였던 프랑스, 장미 십자회의 발흥지인 독일 등의 유사한 군소 조직을 흡수하거나 그들과 연계한다. 그중 특히 중요한 조직은 독일에서 결성된 일루미나티(illuminati)이다. '광명' 이라는 뜻의 이 조직은 1776 년 5 월 독일 바이에른의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에 의해 창설됐다. 이미 이십대에 잉골슈타트 대학의 법학부장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그는 독일의 유태인 금융업자인 로쓰차일드-원래 bauer 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로쓰차일드 가문은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를 연상시키는 유서깊은 금융 가문으로 현재 미국 정부의 주요 정책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건국에 큰 역할을 했다. 담에 유태인들을 다루게 되면 한 번 접근해 볼지도-의 가세 속에서 프리메이슨과는 별개로 이 조직을 만들었는데, 역시 고대의 비의에 기반을 두기는 마찬가지였다.

Mayer Amschel Rothschild (1744-1812)
일루미나티 창설 당시 불과 32 세였던 그는 이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큰 돈을 벌게 되고, 이를 종잣돈으로 하여 다섯 형제를 거부로 만들어낸다. 이들의 전설적인 치부는 일루미나티 및 프리메이슨 조직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로 로쓰차일드 자본은 울나라의 IMF 때 들어오기도 했다.

일루미나티의 사상은 기본적으로는 프리메이슨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에 1782 년 7 월 하나의 조직으로 합병하게 된다. 그 결과 프리메이슨은 전체 조직원이 3 백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신생 조직 일루미나티 조직원들은 젊고 행동력이 강한 데다가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오랜 역사를 가진 프리메이슨과는 노선의 차이가 있었고, 혁명적 군사 행동 등에 대한 견해차로 인해 갈등 또한 없지 않았다.

이후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가 유지한 관계에 대해 많은 주장이 있지만 아무도 구체적인 사실은 알지 못한다. 다만 프리메이슨은 전면에 나선 거대 조직으로서 전체 그림을 그려 나가고 일루미나티는 프리메이슨 내의, 다소간 독립적인 또 다른 비밀결사로서 보다 급진적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대의 프리메이슨이 상당히 대중적인 조직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에 반해 일루미나티는 보다 은밀한 활동을 음지에서 펼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편 프리메이슨의 수뇌들 중 일루미나티에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고도 알려져 있다.

여튼간에, 프리메이슨은 이렇게 조직을 확장해 가면서 유럽 전역에 지부를 건설하고 유럽의 거의 대부분의 주요 사건에 이런저런 영향을 미치면서 일종의 숨은 세계 정부로서 커 간다.

특히 1789 년에 있었던 프랑스 대혁명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구체적인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또한 앞서 연표에 나왔던 몽테스키외, 루소 등의 계몽철학자들-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바탕이 된- 또한 대부분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 후 공포정치의 주인공인 로베스 삐에르와 자코뱅당 또한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하니, 이렇게 보면 유럽의 근대가 프리메이슨의 작품이라는 것도 그리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의 야심은 유럽의 근대화에서 멈추지 않았다.

유럽에서 막대한 인원과 조직, 자금력,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이들은 동시에 대서양 건너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 중세 유럽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의 건설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던 이들에게 있어서 끝을 알 수 없는 저 거대한 신천지는 강한 유혹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들은 이미 백년전부터 동료들을 그 먼 곳에까지 보내며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그렇다. 어쩌면 이미 유럽은 너무 늙었고,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고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톨릭과 교황청의 영향력도, 비록 쇠퇴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대중들 역시 천년이 넘는 가톨릭의 도그마에 철저히 젖어 있다. 그러나 그 곳에서라면 모든 것을 우리 뜻에 맞게 새로이 건설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성당 기사단은 물론,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고대의 꿈을, 어쩌면 그 옛날 황금시대의 기억을 현실에서 다시 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잊혀진 제국의 영광, 세계 단일정부의 이상, 신세계 질서의 수립.

그렇다. 저 푸른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서라면...

Posted by PD 개인교수
연금술

국장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관심이 전혀 없는 분들도 연금술이라는 말은 들어봤을 거다. 근대 화학의 초석임과 동시에 미신과 비과학의 상징이기도 한 연금술은 한 때 중세 유럽을 풍미하며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 연금술의 주된 목적은 납 등의 싼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별의 별 수법이 다 쓰이는데 기상천외한 각종 촉매 물질-때로는 마술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을 집어넣는 것에서부터 온갖 형태의 시행 방법 등이 총동원된다. 물론 이렇게 해서 실제로 금을 만들었다는 공식 보고는 없으며, 현대 과학에서는 이것이 명백하게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물질의 화학 반응을 접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화학의 발전에 크게 일조한 공로는 인정받고 있다.

그럼 이 연금술이 성당 기사단, 장미 십자회,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 그리고 프리메이슨 등등과 대체 무슨 상관이냐?

... 이 시점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연금술의 실제 목적이 단순한 금 만들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해리 포터 1 편이 묘사하고 있듯이, 연금술은 사실 '현자의 돌(elixir)' 이라고 불리우는 특수한 물질을 만들어내 내기 위한 것이며 납을 금으로 바꾸는 것은 이 현자의 돌이 가진 기능의 한 측면일 뿐이다. 왜냐 하면 이 물질의 보다 중요한 기능은 바로 인간을 늙지도 죽지도 않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에서 악한 마법사 볼더몰트는 (반쯤) 잃어버린 자신의 생명을 되찾기 위해 호그와츠 학교 깊숙히 숨겨져 있는 현자의 돌을 가질려구 발버둥치다가 실패하고 만다. 이처럼 무한한 생명을 주는 물질인 현자의 돌은 금 따위와는 달리 수많은 야심가들에게 성취의 표적이 될 가치가 충분하다. (참고로 교장 덤블도어의 친구로서 현자의 돌을 만들어 내고 수백년동안이나 살아 있는 것으로 나오는 니콜라스 플라멜은 실존했던 인물로 다른 금속으로 금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도 전해짐.)

연금술은 화학 실험 방법의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과학 발전에 공헌했지만, 그 발상 자체는 사실 신비주의와 마법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해리포터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현자의 돌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의미에서의 불로불사와는 좀 다르다. 그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인간이 아닌 일종의 '다른 존재' 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 특징 중 하나는 양성구유, 즉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게 되는 것인데, 다만 현대적인 '트랜스 젠더' 이미지나 양성의 성기를 갖는 수준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성의 통합에 가까운 의미로 보다 모호하고 철학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데, 현자의 돌을 통해 연금술사들이 추구한 것은 금을 통해 재산을 늘리는 것도 아니요, 단지 늙음과 죽음을 방지하기 위한 조제법을 찾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마치 화학 물질들이 서로 반응하면서 전혀 다른 물질로 변화하듯이 스스로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이를 통해 삶과 죽음, 선과 악을 초월함은 물론 그 비밀을 이해하고 나아가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바로 연금술의 최종적인 목표였던 것이다. 쓸모없는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현자의 돌에 보통 인간을 초월적 존재로 변환시키는 능력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이런 거창한 목표가 있었기에 수은과 납 중독으로 죽어가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몇백년간이나 매달릴 수 있었다. 연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중세 최고 지성인이었던 토마스 아퀴나스나 로저 베이컨 등이 포함되며, 특히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17세기의 아이작 뉴튼은 만년에 매우 진지하게 이 주제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로 인해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현대에는 물론 완전한 헛고생에 불과했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초의 근대 과학자로 불리우는 뉴튼은 한편 '최후의 마법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연금술에 심취했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장미 십자회 책자들의 기초자로 믿어지는 요한 발렌틴 안드레아에는 이전에 이미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의 화학적 결혼' 이라는 저서를 발간한 적이 있었다.

화학적 결혼이라는 말은 물론 완벽한 연금술 용어다. 실제로 연금술사들은 금속간의 결합을 결혼이라는 단어로 사용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미 십자회, 그리고 그 주창자로 여겨지는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와 연금술의 사상과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가 실은 실존하지 않는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미 살펴봤듯 현존하는 단체인 '골든 로젠크로이츠' 는 그가 '새로운 인간, 다시 태어난 인간의 원형' 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상징적인 용어이자 비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화학적 결혼', 즉 연금술을 통해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현자의 돌을 사용함으로써 질적으로 변화된 초월적 인간, 연금술의 최종 결과로 완성된 새로운 인간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는 아랍과 이집트 등을 다니며 고대의 비의를 전승받았다고 하는데, 만약 그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면 이런 그의 일대기는 물론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이 경우 이 인물 자체가 고대의 비의를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연금술은 중세의 금만들기 화학 실험은 물론 불로초 찾기 작업도 아닌, 잊혀진 고대의 비의를 찾아나가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연금술사들에게 있어서 고대인들로 하여금 인간을 초월하는 모종의 능력을 허락했던 잊혀진 비밀-그게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별문제-, 인간과 신이 같이 어울리던 전설 속의 황금 시대를 되찾아 줄 초월적 지식과 능력, 그리고 당면한 현실 문제를 타파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의 가능성은 바로 이 현자의 돌이라는 정체불명의 물질을 찾거나 만들어내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로저 베이컨이나 아이작 뉴튼을 유혹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제쯤 눈치챘겠지만, 이렇게 우리는 다시 돌의 키워드를 만나게 된다.

돌의 힘인가 돌에 남은 기억인가

이처럼 현자의 돌이 상징하는 것은 고대의 지식, 영원한 생명, 초월, 통합 등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를 가진 돌은 반드시 연금술의 현자의 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실은 유럽 역사의 전반에 걸쳐서 각종 신비하고 신성한 돌은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굴러다니며 지식인층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프리메이슨 시리즈의 첫편에서 소개한 성궤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썼다는 십계명, 그것은 바로 두 개의 돌판에 새겨져 있다. 나무도 점토도 아닌 돌판이며, 구약에 따르면 이것이 이후 엄청난 힘의 근원이 되곤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전설적인 십계명 판 및 성궤와 관련된 대부분의 바탕이 실은 모세의 배경인 이집트 최고위층에서 흘러나왔을 수 있다는 점,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또 성궤와 이 돌판들은 당시 유태인들에게 단지 신성한 물건이 아니라 신 그 자체와 동일시 되었고, 따라서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의 제단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돌로는 역시 기독교 계통에서 신성시되는 '성배' (The holy grail) 가 있다. 이것은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잔이고, 골고다 언덕에서 그의 피를 받은 잔으로 알려져 있으니 무슨 돌이냐 싶겠지만, 실제로 중세에는 이 성배가 잔 모양 속에 사각형의 돌이 들어 있는 형태로 종종 묘사되었으며, 실제로 아직 남아 있는 고딕 성당에 있는 부조에도 이렇게 표현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성배를 이렇게 묘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배는 단순히 액체를 받는 잔 이상의 무엇이었거나 아예 다른 물건의 상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성배와 성궤를 아예 같은 것-혹은 같은 성질을 가진 물건-으로 보기도 했던 것이다.

다양한 성배 모형 중 하나. 중세에는 이처럼 신의 아들 예수의 권능에 어울리는 화려한 성배를 상상하곤 했으나, 가난했던 예수가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된 잔을 사용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예는 중세 기독교 사회가 예수의 본래 가르침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집트로 되돌아가보면, 전설 속의 벤벤석이라는 돌이 나온다. 이 돌은 과거 오벨리스크의 꼭대기에 놓여 있었다는 피라미드 형의 돌인데, 태양신 라의 직접적인 현신으로 여겨졌다. 이후의 오벨리스크들은 언젠지도 알 수 없는 이 고대의 벤벤석 오벨리스크를 흉내내 지은 것으로 이야기되곤 하고, 기자의 것들을 포함한 여러 피라미드조차도 이 벤벤석의 모양을 흉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간에 신이 직접 강림한 돌이라는 점에서 역시 성궤, 성배 등과 그 의미를 같이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돌들이 실제 물체로 말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힘이나 지식 등의 추상적인 것으로도 이야기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성배는 구체적인 물체가 아니라 무한한 지식을 상징하는 개념이라던가, 심지어 예수의 피를 담은 그릇이 아니라 예수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예수가 죽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자손을 이었다는 주장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혹자들은 5 ~ 8세기 경의 초기 프랑스(프랑크 왕국) 왕가인 메로빙거 왕조가 바로 이 예수의 직계라고 한다-을 뜻한다는 등의 주장들이 있다.

매트릭스에 나오는 이 넘 이름은 Merovigian 으로 메로빙거 가문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적 알레고리로 가득찬 이 영화에 그가 등장하는 것은 메로빙거 왕조와 예수의 관련설에 기초한 것임에 분명하다. 구세주의 혈통을 빈 세속의 권력 정도 될까. 

... 이들 돌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정말로 이와 같은 권능을 간직하고 있는지는 국장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전설적인 돌들의 이야기가 비록 종교적 색채에 의해 덧칠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장/윤색되었을 망정, 그 원칙적인 유사성으로 보아 사실 서로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가정이 가능하다. 더우기 구체적인 돌이 아니라 흔히 지식이나 사람으로까지 확대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이 전설들이 특정 물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물체들이 대변하는 어떤 지식 체계나 사상, 문명 등을 의미한다고도 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자의 돌을 만드는 거나 성궤를 추척하는 일이나 성배를 찾는 일은 사실상 전부 같은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물체로서의 성궤나 성배, 현자의 돌 등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사람들은 그 진의를 다소간 곡해한 것인지도 모른다. 국장이 고대 이집트 편을 쓰면서 내세웠던 돌의 키워드는 어떤 특정한 돌에 새겨진 비밀이나 신비한 능력을 가진 돌 조각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피라미드와 기타 아직도 남아 있는 불가사의한 건축물들의 비밀에 접근함으로써 지금은 잊혀진 고대의 기술이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집트에서조차 람세스 전후의 신왕조에서는 이미 이런 기억은 거의 잊혀져 있었고, 극히 일부에 의해 그 비밀이 추상적인 의미를 알기 힘든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의 이집트인 자신들에게조차 구왕조의 작품인 피라미드는 이미 불가사의였을 수도 있다. (
이 시기의 인물인 모세는 마흔 살 되던 무렵에 이집트 궁정을 떠나 미디안 땅으로 가서 여든 살이 될 때까지 사십 년이나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후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돌아온 그는 이집트의 신관이나 마술사들을 대적해 압승을 거둘 정도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상상이긴 하지만 명민했던 모세는 타지에서의 그 40 년동안 젊은 시절 자신이 이집트 궁정에서 배운 잊혀져가던 고대의 지식을 스스로의 힘으로 재구성해서 갈고 닦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결과 실제로는 고대의 지식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던 신관들을 타파할 수 있었을지도.)

이집트 왕조가 소멸하면서 그 구전들도 결국 어디론가 사라졌을 것이고, 여타 고대의 전설들과 맞물려 전설 속에서, 혹은 일부 간접적인 전수자들의 가르침 속에서나 전해졌을 것이다. 어쩌면 이 과정에서 '돌을 찾으라' 나 '비밀은 돌에 담겨져 있다' 같은 말들이 전해지고 회자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특정한 힘을 가진 고대의 돌에 관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예를 들면 우라늄도 일종의 돌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돌을 통해서 고대 문명의 자취를 추적해 들어가면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시대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였을 가능성도 높다.

만약 지금의 문명이 깡그리 멸망하고 수천, 수만년 후에 새로 중세와 같은 문명이 시작된다면 우리가 현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많은 물질들이 '신비의 돌' 로 일컬어질 것이다. 이 물질들이 그들 시각에 기적이나 힘과 관련된 것은 분명하겠지만 그 사용은 전체 문명의 고른 기술적 발달 속에서만 가능하다. 사진의 실리콘이 컴퓨터의 존재를 전제로만 의미가 있듯이 말이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기독교 사상이나 드루이드교, 게르만 설화 등과 섞이면서 점점 전적인 보물찾기의 개념으로 둔갑하고 만다. 성배, 성궤, 현자의 돌 등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띄게 된 이 돌들은 고대 황금 시대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황금 시대를 재현할 수 있는 절대적 권위와 힘의 근원으로 인식되고, 그 내용은 점점 더 과장되어 갔을 것이다. 신이 깃든 돌, 불로불사, 인간을 초월한 존재의 영약, 생사의 신비를 풀어내는 열쇠... 급기야는 연금술사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이론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리고 장미 십자회와 로젠크로이츠의 시기에 이 혼란은 절정에 달한다.

만약 이때 연금술로 상징되는 괴력난신의 기술보다 고래의 지식, 지혜에 무게를 두는 전수자들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심정은 착찹했을 것이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연금술이나 성배 추적 보다는-물론 시대가 시대인 만큼 관련이 없을 수는 없다- 돌의 키워드 자체에 숨은 역사의 비밀을 읽어낼 수 있거나, 그러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어쩌면 고대 황금 시대에 돌을 만지던 바로 그 사람들의 전통을 이은 자들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성당 기사단이 전해온 고대의 정보를 전수받고 이어 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수백년에 걸쳐 스스로가 일종의 석공들이 되어 갔을 것이다.

이들 역시 연금술이나 중세의 각종 마술에 못지 않은 구체적인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점은 이들은 보다 거시적인 의미에서의 역사관과 우주관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종교 집단은 바로 이런 그들의 여유를 대변하는 모습이다. 이런 그들에게 죽음을 물리적으로 피하기 위한 연금술 같은 것은 어쩌면 근시안적이고도 유치한 관점이 아니었을까. 삶과 죽음의 진정한 비밀을 모르는 자만이 약물의 힘을 빌려서라도 지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할 테니 말이다.

암튼 이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들은 유럽 세계를 망라하는 통일된 조직을 통한 교통정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간 쌓여온 힘과 지식에서 자신감을 얻고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등 시대적 변화 속에서 약해지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비집고 비록 비밀결사의 모습으로나마 세상사에 관여하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괴멸된 성당 기사단의 이상을 근대적 의미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하여 1717 년. 서방 세계의 수도 런던에서 최초의 프리메이슨 그랜드 랏지가 문을 연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프리메이슨의 역사 (중)

미국 펜실베니아의 그랜드 랏지. 필라델피아가 위치한
펜실베니아는 미국에서 가장 유서깊은 지역 중 하나다.

/ 성당 기사단의 역할

지난 시간에 간략하나마 프리메이슨의 알려진 역사와 약간의 뒷 이야기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머 아시는 분들도 많을 그 이야기에 더해, 국장은 이집트나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돌의 키워드를 강조하며 프리메이슨의 이름을 풀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프리메이슨과 그 바탕인 은비주의는 원체 베일에 쌓여 있는 데다가 복잡한 사상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 간단히 이야기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난 시간의 글은 논의를 끌어가기 위한 기초 지식을 전해 드리는 인트로 정도로 생각하시고, 오늘부터 좀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논의해 들어가야지 싶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리메이슨의 무게는 그들이 유럽 은비주의의 원조인 성당 기사단의 정통을 잇고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들이 성당 기사단의 후예라는 점은 사실 확실한 것이 아니다. 현대 프리메이슨 자신들이 대외적인 문서나 자료를 통해 이를 대놓고 표방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설사 그런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직접적인 연결점이 있다는 뜻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당 기사단의 정신을 계승' 했다는 단체는 프리메이슨 외에도 중세는 물론 현대에도 수십, 수백개가 넘고 이들 단체의 대부분은 실제 법통을 이어받은 곳들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사상적 후예라고 믿고 싶어하는 군소 모임들이다. 단적으로 말해 과대망상가들 집단이라는 말씀이다.

프리메이슨이 이들보다 유리한 입지에 있는 이유는 지난 시간에 논의한 바와 같이 이들이 스코틀랜드라는 성당 기사단의 도피처를 기반으로 했다는 사실과-이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도주 중의 성당 기사단에게 자신들의 궤적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매우 빠른 속도로 세계의 중심이었던 영국과 런던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과 미국의 지식인 사회와 리더들을 흡수하며 강력하게 팽창했다는 점, 그리고 현대까지도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점들이 프리메이슨의 정통성을 의심할 바 없이 증명해 준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프리메이슨 이야기를 접어두고 다시 성당 기사단 언저리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겠다. (소제목은 '프리메이슨의 역사' 라고 붙이면서 계속 다른 걸 다루게 되는데, 마 결국 넓은 의미로는 다 포함이 되는 이야기로 이해하시라.)

... 아홉 명의 프랑스 귀족 청년들에 의해 결성된 성당 기사단은 성 베르나르두스라는 당대 기독교 사회의 영향력 있는 인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성당 기사단처럼 십자군에 종군한 기사단들은-병원 기사단, 튜튼기사단 등- 일종의 수도회로서 의미지어졌고 따라서 소속 기사들은 투사이자 동시에 수도사라는 기묘한 입지에 놓이게 된다. 이런 성당 기사단을 교황청 산하의 공식 수도회로서 인정토록 힘을 쓴 이가 바로 베르나르두스다. 그런데 이 인물의 배경을 살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양반이 사실상 중세 신비주의 기독교의 태두 중 하나라는 점이다.

본 '유럽이야기' 중 '유럽과 기독교' 편에서 살펴보기도 했지만 중세 기독교는 원칙적으로 헬레니즘, 즉 그리스계통 문화와 헤브라이즘, 즉 유태 문화의 통합물이다. 그러나 시대와 지역, 분파에 따라 그 사조는 조금씩 다르게 마련인데, 중세 기독교의 경우 그리스적 이성을 중요시하는 스콜라 계열-후대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필두로 하는-과 신과의 직접적인 교우를 우선시하는 수도회 계열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불교에도 크게 교리 공부를 중요시하는 교종과 참선에 의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종이 있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4 세기 로마 말기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영향을 강하게 받은 수도회의 신비주의 계통은 신을 직시하고, 따라서 신과 영적으로 합일됨을 추구한다. 이런 관점은 '공부' 보다는 묵상과 기도를 통한 수도/깨달음에 가까운 방향이 되는 만큼, 이성과 논리를 중시했다는 그리스보다는 분명 동쪽, 즉 팔레스타인이나 중앙아시아, 혹은 인도의 사상과 가깝다. 그리고 이런 신비주의적 기독교를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시토회 수도원의 중흥자이기도 한 베르나르두스인 것이다.

라틴어 이름인 생 베르나르두스를 영어식으로 읽으면 세인트 버나드가 된다. 개의 품종 중 하나인 세인트 버나드는 이 개가 키워지던 스위스의 수도원 명칭을 따른 것으로,이 수도원은 생 베르나르두스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것...

이런 이유로 인해 성당 기사단의 사상에도 베르나르두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아니, 어쩌면 성당 기사단 자체가 사실상 베르나르두스에 의해 창설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성당 기사단에게 있어서 고대 모세 시절 하나님의 손이 직접 닿았다고 여겨지는 성궤나 십계명판, 혹은 예수의 피를 담은 성배 같은 것들의 중요성은 일반적인 의미보다 더욱 커지는데, 이는 성물을 통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신비주의 사상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베르나르두스가 실은 켈트족의 고대 종교인 드루이교의 신자였다고도 한다. 켈트족은 프랑스/아일랜드인들의 선조로서 로마인들은 갈리아 족으로 불렀음.

이들이 솔로몬 성전 터에 천막을 짓고 수십년간 생활하면서 발굴 작업을 했다는 것은 지난 편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의도했던 아니던 이들의 활동은 솔로몬 왕의 보물을 탐사하는 데서 끝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십자군 원정은 유럽의 민간 군대와 기사단이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 시대 이후 아시아, 즉 동방으로 진출한 최초의 사건이다. 특히 이 경우가 과거의 원정과 달랐던 것은, 그 주인공들이 철학적이었던 그리스 인들이나 현실적이었던 로마인들과 달리 종교적 열정에 흠뻑 빠져 있던 중세의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성당 기사단원들이라면, 과거에는 그저 지나쳐 버렸던 동방의 종교적 면면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들여다 보았을 것임에 분명하다.

굳이 신비주의 관련된 부분이 아니더라도 이슬람 계통의 아라비아 철학과 기독교는 공히 고대 그리스 철학과 유태교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바 있었다. 따라서 비슷한 사고 방식을 여기저기 공유할 수밖에 없고, 막상 현지에 와서 칼을 맞대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다양한 지적 교류가 없을 수 없게 된다. 일례로 13 세기 경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를 맞게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십자군 원정 등을 통해 아랍권에서 유럽으로 역수입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라면 이들이 예루살렘과 그 언저리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동양의 신비주의적 종교, 예를 들어 유태교의 비법인 카발라, 이슬람교 신비주의(이후 시아파의 수피즘으로 발전되는), 힌두교(우파니샤드)와 불교 등에서 자신들의 방법론과 유사한 점들을 발견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유하고 있던 기간이 백년 가까이 되는 만큼 이 과정에서 성당 기사단의 사고 방식과 세계관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백년전인 1904년과 현재 울나라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생각해 보시라.)

가정하자면, 기왕에 솔로몬 성전터에서 중요한 '뭔가' 를 찾아낸 성당 기사단은 동시에 다양한 종교의 신비주의적 가르침-상당부분이 고대의 비의와 관련된-을 접하면서 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그들만의 독특한 신념으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이 신념은 그들 생각에, 기독교 사회는 물론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키가 될 진리를 포함하는 그 무엇이었다. 일반 종교 단체와의 차이라면 이들이 신념 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해주는 뭔가 구체적이고 확실한 플러스 알파를 동시에 갖고 있었을 거라는 점이다. (여기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흐릿하게나마 운을 띄운 바 있다.)

한 때 성당 기사단이 가졌던 부와 명예, 힘은 이것에 의해 유지되었고, 급기야는 이것을 두려워한 위정자들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때, 어째서 그런 강한 힘 혹은 비전의 지식을 가졌으면서 그토록 철저하게 파괴될 수 있느냐는 반문이 가능하다. 여기까지가 사실이라면 답은 둘 중 하나다. 그 힘/비밀이라는 것이 성당 기사단의 세력 확대를 위해 스스로에 의해 과대 포장되었을 뿐 실은 별볼일 없는 내용이었던가, 아니면 그 힘/비밀이 너무 강해/중요해서 자신들의 파멸 앞에서도 차마 사용/공개할 수 없었거나. 어느 쪽이든, 성당 기사단은 그 특이한 생멸의 과정 등을 통해 중세 유럽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후 유럽 은비주의의 모태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 장미 십자회와 성당 기사단

프리메이슨이 공식적으로 발족한 것은 18 세기 초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은비주의 및 성당 기사단 전설과 관련되어 유럽을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다. 장미 십자회라고 불리는 이 단체는 1614 년 독일에서 두 가지의 출판물을 통해 일반에 알려졌다. 요한 발렌틴 안드레아에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믿어지는 이 책자들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고대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장미 십자회의 존재와 이를 통해 실행될 세상의 파격적인 변화의 운명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를 이어 전해지는 '밀지' 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 책자들은 단체 이름의 배경이 된 창립자 독일인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직역하면 '기독교인 장미십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실존 여부가 불확실한 이 로젠크로이츠라는 사람은 젊어서 이집트와 아랍 등지를 돌아다니며 비전의 지식을 전수받았다고 하며, 이후 독일로 돌아와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장미 십자회를 결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장미 십자회가 특히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책자의 말미에 유럽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장미 십자회에 대한 '개인적인, 혹은 서면상의 접촉' 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장미 십자회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이며 그 회원들은 누구인지에 대한 구구한 억측이 난무하게 되었다. 실제로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와 미적분의 창시자이기도 한-뉴튼과 함께- 독일의 라이프니츠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가 반쯤 가상의 인물인 만큼 장미 십자회 역시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유령 단체였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이 경우 장미 십자회는 관련 책자들을 집필한 것으로 생각되는-그는 죽을 때까지 이를 부정했다- 요한 발렌틴 안드레아에 자신이 스스로의 사상을 가상의 인물과 단체를 통해 표현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를 표현한 그림. 긴 수염에 마법사 모자를 쓰고 해골을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체로서의 장미 십자회가 실존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로젠크로이츠건 안드레아에건 기독교 중세에 이런 주장을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혹할만큼 그럴 듯 하게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건 결국 중세 유럽 문명의 기저에 이단적이고도 파격적인 장미 십자회 같은 단체가 먹혀들 수 있는 정신적 배경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장미 십자회가 책자를 통해 선보인 고대의 비의나 세계의 급변 같은 것이 이미 유럽인들-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리 새로운 정보가 아닌, 낮은 목소리로나마 회자되고 전해져 오던 개념이라는 의미다.

그게 아니라면 '방법서설' 을 통해 근대 철학의 기초를 세운 데카르트나 세기적인 대천재 라이프니쯔 등이 콧방귀라도 뀌었을 리 만무하다. 결국 장미 십자회는 단지 때맞춰 이를 단체와 책자라는 수단으로 표면화/공식화하면서 스스로를 비의의 법통을 이은 공식적인 계승자들로 비치게 한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이에 목말라 왔던 유럽 지식인들을 자극한 것이다.

이 목마름의 배경에는 수백년 전 비극적인 파국을 맞은 성당 기사단과 그에 부수되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해체되던 당시 성당 기사단은 이미 2 백년의 전통과 함께 프랑스 전역에 3 천개나 되는 수도원을 소유하고 있었던 거대 단체였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프랑스 전역에 뿌리를 내렸던 단체라면 아무리 철저하게 숨겨진 비밀이라도 조금씩 새어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대부분의 일반 성당 기사들은 그들 조직의 핵심인 비의-그런 게 정말 있었다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몰랐겠지만, 이교적인 입회식의 경험이나 기타 위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통해 조금씩 줏어들은 이야기조차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때로는 생략되고 때로는 과장되면서 성당기사들이 돌아다니는 영역들에서 회자되곤 했을 것이고, 대숙청이 감행되는 와중에서는 성당 기사단 자체가 큰 뉴스거리가 된 만큼 더욱 더 널리 퍼져 나갔을 것이다. (실제로 성당 기사단의 몰락은 중세 유럽사 전체를 통해서도 보기 드문 큰 사건이었다) 이렇게 비공식적인 루머 수준의 경로로 떠도는 성당 기사단의 비의 이야기는 수백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틀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고, 일부는 상당한 신빙성을 갖추면서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줏어 전해진 불확실하고 파편적인 정보들은 심히 불만족스러웠을 것임에 분명하다. 고대로부터 성당 기사단을 통해 전해져 오는 고급스러운 지식이 있는 듯 한데, 그 실체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바로 이때 장미 십자회가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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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십자회와 성당 기사단은 확연하고도 중요한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이집트와 아랍 비전의 지식' 운운하는 이교적 신비주의 색채를 배경으로 당시의 가톨릭 교회는 물론 현대적 관점의 개방된 기독교 교리와도 매우 다른 세계관이나 의례 절차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적으로 기독교 단체를 표방한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기독교 사회였던 중세 유럽에서도 실제로는 악마주의를 비롯한 매우 다양한 비기독교적 비밀 종교와 각종 마법-실제로 작동했는지는 별문제-들이 횡행했었다. 따라서 기왕에 비밀 결사인 이상 장미 십자회라고 해서 굳이 기독교적 단체임을 가장할 이유는 없었다. 지식인들을 '초청' 한 만큼 외부에만 그렇게 위장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소위 고대의 절대적 비의를 소유하고 있다는 수준의 단체에서 그렇게 간단히 자기 기만적인 행위를 하는 것 역시 있을 법 하진 않다.

성당 기사단의 죄목 중 하나였던 바포멧(염소머리)과 뒤집어진 별을 묘사한
펜타그램. 원래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사타니즘 계열의 상징으로 흔히 이용/인식되고 있다. 사타니즘은 기독교의 억압에 대한 극단적인 반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편의 논의와는 무관.

이 점은 성당 기사단도 마찬가지로, 엉덩이에 키스를 하거나 십자가에 침을 뱉는 등의 이교적 행위를 하면서도 교황청 산하의 공식 수도회로 2 백년 이상이나 계속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체포 및 괴멸 과정에서도 일체의 물리적 반항이 없었다. 한 편 당시로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끔찍한 배교적 죄상들이 열거되었음에도 아비뇽의 교황 클레멘스 5 세는 프랑스 왕 필립보 4 세의 탄압에 대해 성당 기사단을 보호해 주기 위해 간접적이나마 노력했었다. 역시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결국 이들은 기독교도를 가장했다기보다는 실제로 모종의 기독교 단체-로마 가톨릭과는 다르지만 최소한 내부 성원들은 그렇게 믿고 있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특징은 한 가지 눈여겨 볼 만한 가능성들을 시사한다. 이는 두 단체가 중세에 횡행하던 다른 군소 사이비성 집단들과는 차별화 되는 의미에서 '같은 뿌리' 를 갖고 있거나 근본적으로 같은 사상을 다른 경로를 통해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극도의 자기 부정이나 기만적인 위장 없이 기독교도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려면 그 사상은 안티 크라이스트 류의 극단주의 반기독교와는 다른, 그리고 이슬람교나 유태교 같은 유일신교와도 다른 배경하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반기독교나 다른 유일신교는 기독교의 교리와 전면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을 수 없다. 잠깐 위장하는 거라면 몰라도 수백년동안 공식 수도회로 존속한다거나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출판물의 형태로 만천하에 표방하는 것은 무리인 거다.

성당 기사단과 장미 십자회가 그 이교적 특성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단체로 남을 수 있었다면, 이때는 그 배경이 되는 숨은 사상이 기독교가 필요로 하는 세계관의 범위를 완전히 포괄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이거나 혹은 아예 완전히 다른 체제로서 기독교와 큰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초월 명상이나 단전 호흡 등 동양적 수련법들이 서양에서 많은 기독교도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호흡을 통해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단전 호흡은 특성상 일반 종교의 가르침과 상충할 여지가 적다. 설사 몸이 공중에 뜬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진의 진위 여부는 불명)

이 경우라면 성당 기사단과 장미 십자회로서는 굳이 자신들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기독교와 본질적인 갈등을 겪을 필요 없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다. 예수를 믿으면서 동시에 고대의 비의를 간직하고 신봉하는 것이 가능했을 거라는 말이다. 물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는 분명한 차이들이 있기 때문에 이단으로 낙인찍힐 위험성은 언제나 존재하지만-성당 기사단의 최후가 말해주듯- 사실 이것은 외부적인 위협일 뿐, 더욱 치명적인 내부적인 신념과 양심의 혼란은 아니다. 그리고 장미 십자단의 경우 비밀결사라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성당 기사단의 실패가 반복되는 것을 피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미 십자단은 과연 성당 기사단을 계승한 것일까? 다시 말해, 성당 기사단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 찾아낸 '뭔가' 를 장미 십자단, 로젠크로이츠가 직접 이어받았던 것일까? 사실 장미 십자단이 조직으로서의 실재했다는 증거도 없는 이상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저간의 상황들로 미루어 볼 때 장미 십자단을 그저 해프닝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만약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런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낸대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네덜란드에 본부를 두고 세계 각지에 지부를 거느린 기독교적 단체 '골든 로젠크로이츠-현재 활동중이며, 17 세기 장미 십자회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주장' 에 따르면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는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 다시 태어난 인간의 원형' 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상징적인 용어이자 비유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개념이야말로 은비주의의 가장 기저에 있는 핵심인지도 모른다.

마, 오늘은 요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좀 더 찾아나가도록 하자.


참.. 성당 기사단이나 장미 십자회와 마찬가지로, 정통 기독교와는 다른 사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음에도 기독교 세계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또 하나의 단체가 있다. 이 단체에 가입하려면 '인간을 넘어서는 신성/초월자의 존재' 를 믿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분명 종교적인 면이 있지만 그 신성이 예수건 마호멧이건, 단군이던 강증산이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일본의 천조대신)던, 아니면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개인 차원의 믿음이건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 종교 단체와는 분명 다르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초월자를 이야기하면서도 지구상의 모든 종교와 개인 신념을 포용할 정도의 배포를 지닌 이 단체의 이름. 바로 프리메이슨이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이번 호부터는 무슨 이야기를 쓸까 고민이 많았다. 온건한 역사 서술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사회 문제나 유럽의 복지 정책에 대해 다뤄 볼까? 영국 노동당과 보수당의 대립 역사?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나치? 아일랜드 독립운동?

그런데,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대단히 현실적인 이야기 말고 뭔가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국장이 요즘 몇 달째 그런 삘인데, 그 결과가 이揮?피라미드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글들이었을 거다. 사는 게 빠듯하다 보니 당면한 현실 문제보다는 좀 다른 세계를 기웃거려 버리고 싶은가본데, 이런 것들이 또 국장의 부전공 분야다 보니 유혹을 쉽게 떨쳐버리기가 힘들다.

게다가 며칠 전에 한 독자의 항의성 독촉 메일까지 받은 바, 이를 핑계 삼아 이번 시간부터는 그 무게로 인해 그 동안 미뤄왔던 복잡 미묘하고도 예민한 주제 하나를 슬슬 시작해볼까 싶다.

숨은 지배자, 세계 정부, 악마 숭배자, 세계 멸망을 획책하는 광신 단체, 새시대의 위대한 리더, 흑마술과 이교도의 총본산, 비밀 결사, 평범한 친목 단체 등 수많은 얼굴을 가진, 세계 최대의 권위와 최고(古)의 역사를 자랑하는 범 지구적 민간 조직.

프리메이슨.

프리메이슨의 상징인
자와 컴퍼스. 이 밖에도
다양하고 신비한 형태의
도형들을 중요시한다.


* 인트로덕숀 *


일단 문제 하나. 다음 인물들의 공통점들은 무엇일까?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리스트, 시벨리우스, 괴테, 키플링, 코난 도일, 마크 트웨인, 오스카 와일드, 푸시킨, 볼테르, 실러, 맥아더, 나폴레옹, 에펠(에펠탑 설계자), 헨리 포드, 극지 탐험가 피어리와 스콧, 재즈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 카운트 베이시, 듀크 엘링튼, 냇 킹 콜, 우주비행사 존 글렌, 마술사 후디니, 조지 워싱턴과 루즈벨트, 트루먼을 포함한 18 명의 미국 대통령들, 다섯 명의 영국 왕들과 윈스턴 처칠을 포함한 여섯명의 영국 수상들, 골프 선수 아놀드 파머...

답 : 남자, 서양 사람(흑인도 포함) 그리고 프리메이슨 회원.


국장이 프리메이슨의 실체에 대해 깊이 탐구해 들어가기 전에 이 이름들을 열거한 것은 조직으로서의 프리메이슨이 가지고 있는 영역의 넓이와 깊이를 열분들께 실감나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물론 위의 이름들은 문서에 의해 증명된 프리메이슨 회원 중 아주 유명한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며 이들의 영역은 인종과 직업, 종교에 구애됨 없이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바흐, 워싱턴 등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프리메이슨은 시기적으로도 이미 2, 300 년 전부터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백인사회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음을 알 수 있다. 18 세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유럽 문명이 도달한 세계 각지, 각 분야 지도자급 인물들의 대부분이 프리메이슨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모차르트와 헨리 포드, 맥아더가 동시에 가입되어 있는 이 단체는 대체 뭐냐? 왜 모여 있으며, 회원들은 모여서 뭘 하나...?

다른 걸 다 떠나서 위 명단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인종과 국경, 종교, 체제를 초월한 지도급 인사들을 회원으로 가입시킬 수 있는 힘 또는 흡인력을 지난 수백년간 흔들림없이 보유해 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건 엄청난 것이다.

생각해보자. 지난 2, 300 년 동안 세상은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변화를 겪었다. 기존 사회와 종교의 권위는 해체되고 민주주의의 개념, 유물론과 사회주의, 진화론이 등장했다. 제국주의와 팽창주의가 전세계를 휩쓸었고 국제질서는 몇 번이나 다시 짜여졌다. 국가들간의 헤쳐모여, 동맹의 성립과 붕괴, 이데올로기 냉전 등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힘든 갈등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급속한 과학의 발전은 자동차와 컴퓨터, 그리고 비행기와 미사일을 낳았다. 원자탄이 발명되고 사용되었으며, 인터넷은 전세계를 실시간으로 연결하고 있다. 보이저와 파이오니어 등 우주 탐사선은 태양계 바깥으로 날아갔으며 지구 궤도에 떠있는 허블 망원경은 수백억 광년 떨어진 우주를 감시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화성에 착륙한 미국의 오퍼튜너티는 선명한 칼라 사진을 전송해 옴은 물론 암석에 구멍을 뚫고 표본을 모으고 있다.

이 모든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종교단체도 정치단체도 아닌 프리메이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아니 어쩌면 과거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으로 오대양 육대주-일본과 중국, 필리핀 포함. 울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음-로 뻗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수백년전 설립시 그대로의 기치를 온전히 유지한 채 말이다.

프리메이슨이 유지 발전되고 있는 동안 쇠락하거나 소멸한 나라나 조직은 그 얼마나 많은가. 열거해보자. 로마 교황청, 대영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신성 로마제국, 대일본제국, 나치의 제3 제국,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제국, 소비에트 연방... 한 때는 세계를 호령하던 이들 중 대부분은 이제 상징적인 존재로 남았거나 지역의 소국으로 전락했거나 아예 소멸해 버렸다. 오직 미국만이 프리메이슨의 영속성에 비견될 수 있는 근현대사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나중에 다시 다루겠지만 이 점은 열라 중요하고, 우연이 아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렇게 천지가 뒤집어지는 범 지구적 난세 속에서, 종교가 몰락하고 삶의 가치관이 뒤엉켜 가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유지되는 프리메이슨의 힘은 과연 뭘까. 인류의 리더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포섭해 나갈 수 있는 그 마력은 어디에서 올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단 프리메이슨의 뿌리부터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바로, 설립과 그 배경에 놓여 있는 이 전설같은 이야기들이야말로 어쩌면 프리메이슨이 가진 힘의 원천 그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의 역사 (상)

런던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한 프리메이슨 홀. 여기가
전세계 프리메이슨의 시초이자 총본산으로 United Grand Lodge of England 라고 불리운다. 건물은 20세기에 지어짐.

/ 창 설

프리메이슨(Freemason) 이라는 단어를 뜻 그대로 풀면 자유 석공이 된다. 개인이 아닌 집단인 만큼 우리 말로 뜻이 맞게 해석을 하자면 '자유 석공 조합' 정도의 의미다. 왠 석공? 하실 분들이 많을 텐데 솔직히 열라 지당한 문제제기다. 바하나 워싱턴, 헨리 포드, 아놀드 파머가 석공이 아님은 두 말할 나위도 없고, 설사 취미로 돌을 좀 매만졌다 한들 조합에 가입할 정도의 프로페셔널이었을 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석공들의 권익 보호 같은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는 아님에 분명하다. 그럼 대체 왜 프리메이슨일까?

하긴 '라이온스 클럽' 이라고 사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닌 걸 보면 이름이야 먼 상관이냐 싶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이름을 붙인 걸 보면 어떤 식으로든 돌과 전혀 관련이 없을 수는 없다. 뒤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실은 있어도 아주 많이 있다. 다만 그 관련성의 성격이 석공 권익 보호 따위보다 훨씬 심층적일 뿐이다.

어쨌거나, 프리메이슨의 배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우리는 12 세기의 중세 십자군 원정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 를 위시한 다양한 저작에 등장하는 십자군 내의 한 조직인 성당기사단(Ordre des Templiers)을 빼놓고는 프리메이슨은 언급조차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당 기사단은 십자군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단체다. 1118 년 프랑스에서 9 명의 기사에 의해 처음 발족된 기사단은 이어 당시 십자군이 탈환하고 있던 성지 예루살렘으로의 길목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이스라엘 땅으로 떠난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 터를 기반으로-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 중 하나- 발전과 확대를 거듭한 성당 기사단은 수령한 기부금과 이를 통한 금융업 등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게 되었고, 이렇게 거대해진 기사단은 이후 이슬람에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긴 후에도 백여 년 이상 번창하며 한때 교황청과 유럽의 왕들에 필적할 정도의 부와 권세를 누리는 등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1307 년, 프랑스 왕 필립보 4 세의 전격적인 체포명령과 대대적인 탄압으로 인해 성당 기사단은 갑작스러운 몰락을 맞게 된다. 체포와 탄압에 동원된 주된 명분은 '이단, 배교 행위' 로서 당시 기독교 유럽에서는 치명적인 중죄였다. 구체적인 죄목 속에는 바포멧이라는 '염소 머리' 를 한 악마를 우상으로 숭배한 죄, 십자가에 침을 뱉고 동료 기사의 항문에 키스를 하는 음란하고 이단적인 입회식 등의 섬칫하고도 지저분한 내용들이 포함된다. 유럽 전역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성당기사들이 모진 고문에 시달리게 되었고 기사단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단장이었던 자크 드 몰레는 수년에 걸친 고문 후 화형에 처해지고 체포가 시작된 6 년 후 기사단은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여기까지가 알려진 성당 기사단의 간략한 역사다.

성당 기사의 이미지는 은빛 투구와 흰 옷,
붉은 십자가로 잘 알려져 있다. 비록 영화나
만화에서는 삐까뻔쩍한 분위기지만 실제 전장에서의 모습은 아마도 위와 같았을 것이다. 실제로 옷의 수와 덮고 자는 이불의 수도 제한을 받았고, 기사 2 명당 하나의 식기만이 허락되는 등 청빈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며 해체되고 말았음에도 성당 기사단은 쉽게 죽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거대한 집단을 한꺼번에 말살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만큼 탄압을 피해 살아남은 상당수의 잔존 기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앙의 힘이 미치기 힘들었던 유럽 변방의 스코틀랜드와 포르투갈 지역은 이들에게 좋은 피신처였다. 포르투갈로 피신한 기사들은 이후 조직을 재정비, 그리스도 기사단이라는 명칭으로 부활하여 교황청의 재가까지 받고 활발하게 활동한다(유명한 여행가 바스코 다 가마 도 이 기사단 소속임).

그리고 스코틀랜드로 도피한 기사들은 '석공' 으로 변신, 비밀스럽게 조직을 유지하게 된다. 십자군과 석공은 일견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고딕 건축 양식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바로 다름아닌 성당 기사단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에 갑작스레 고딕 건축 양식이 출현한 것은 다소 갑작스럽고도 불가사의한 일로 여겨지는데, 그것은 고딕 양식의 정교하고도 선진적인 기법이 유럽 문명에서는 그 바탕이나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성당 기사단원은 그 활동 와중에 모종의 방법으로 돌 세공 기술 및 석조 건출 기술을 배워서 유럽에 도입하게 되었을 것이고, 최초의 본격 고딕 건축물로 알려진 성 사르트르 대성당은 바로 이런 활동의 결과물이었다. 이런 만큼 아마도 '석공' 은 기반을 상실한 성당 기사단원들에게는 암중모색을 위해 부족함이 없는 모양새였을 것이다.

이렇게 스코틀랜드로 숨어든 이들은 실제 석공으로 수백 년간 살면서 생활을 영위했던 모양이다. 그러던 것이 탄압 후 약 400 년이 지난 1717 년, 흩어져 있던 지부(랏지 lodge 라고 함)들이 규합하면서 프리메이슨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창설된다. 그후 불과 몇 십 년만에 유럽 각지의 유명인사들을 영입하면서 석공조합으로의 면모는 순식간에 사라지게 되는 것, 앞서 말한 바와 같다.

/ 의 문

한 편, 프리메이슨의 모태라고 할 성당 기사단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 불과 9 명으로 시작된 성당기사단의 초기 명분은 예루살렘으로의 길목을 사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명감과 혈기에 넘치는 젊은 기사들이라 한들, 9 명이라는 소수의 인원으로는 이 일에 아무런 현실적 도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당기사단은 실제로 이것과는 다른 배후의 목적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십자군의 주요 기사단이라는 특성에 걸맞지 않는 섬짓한 죄목들이다. 물론 중세 역사를 통틀어, 특히 사제와 귀족들 사이에서마저도 이교도 우상 숭배나 악마 숭배 같은 행위는 그리 드물지 않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수천 명의 인원과 범유럽적 조직, 200 년의 역사와 막대한 부를 가진 교황청 직속의 기사단에서 이런 일들이 대놓고 행해지고 있었다는 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한 편, 설사 이 죄목들이 교황청에서 정략적으로 덮어 씌운 것이라 한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분명 어느 정도의 실제 근거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본다면 성당 기사단은 원래부터 기독교적 이상의 실현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임이었거나 세월이 지나면서 어떤 이유로 인해 변해갔을 가능성이 없쟎다. 만약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현대는 물론, 근세와 중세의 관련 연구가들의 상당수는 성당 기사단의 목적 중 하나가 솔로몬 성전의 보물을 찾는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솔로몬은 다윗과 함께 대표적인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왕으로 그 특출난 지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이교적인 마법에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튼 이 솔로몬 성전의 지하에는 수많은 고대의 보물들이 숨겨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중에는 모세가 십계명판을 전수받아 간직하는데 사용된 성궤-해리슨 포드 주연의 '레이더스' 의 소재가 된-도 포함된다.

영화 레이더스에 등장하는 성궤(Ark). 비교적 구약성서의 고증에 충실한 모습이다.

특기할 것은 성당 기사단의 이스라엘 쪽 본거지가 바로 이 솔로몬 성전 자리에 세워졌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이 수십년간 여기에 머물면서 분명 일종의 발굴 및 탐사작업을 폈다는 점이다. 중세의 야심있는 기독교도 귀족이라면 기독교 세계 최고의 보물인 성궤나 성배(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러가던 중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를 받았다는 잔) 등에 관심이 없을 리 만무하며, 이를 찾기 위해 일생을 건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이것은 세속적인 욕심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열정에 의해 촉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은 그 노력의 결과 이들이 성과를 얻어냈는지, 만약 얻어냈다면 그것이 뭐였냐는 것이다. 만약 실제로 이런 성과가 있었다면, 성궤나 성배가 아니라 그 언저리의 뭐라도 얻어낸다면 그것은 이후 성당 기사단의 내외적 정체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또한 간접적으로나마 현대의 프리메이슨에까지 계승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까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끌어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프리메이슨의 불가사의한 생명력과 흡인력은 천년 전 성당 기사단에 그 바탕이 있으며, 이 성당 기사단은 솔로몬의 보물/비밀과 모종의 관련을 맺고 있었다. 솔로몬에서부터 성당 기사단을 통해 프리메이슨에까지 전해진 이 '뭔가' 는 근대와 현대의 대석학과 정치가들, 각 분야의 대표적 천재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의미나 힘을 지닌 그 무엇이다. 또한 경천동지의 격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영속적 가치를 지닌 무엇일 것이다. 이게 바로 프리메이슨의 힘과 권위, 존속의 비결일 것이다. 참으로 간단한 논리다.

그러나 실은 이로써 본바닥의 의문은 더 커지고 만다. 과연,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종교보다도, 당대의 세계를 뒤흔든 이데올로기보다도, 고래의 가치관을 휘저어 놓는 현대 과학보다도 강한 생명력을 지닌, '이것' 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이 의문에 무턱대고 덤벼들기 전에 '이것' 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강력한 구심점으로 작용하기 위한 전제들을 살펴보자.

첫째. 실제적인 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간들은 언제나 힘이 있는 곳을 찾아 모여들게 되어 있다. 이 힘은 물리적인 힘 자체던가, 물리적인 힘으로 변환될 수 있는 무엇이다. 현대 사회를 기준으로 보자면 경제력, 군사력, 기술력, 조직력 등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무 힘도 없는 석공 조합에 세기의 천재들이 모여들진 않는다.

둘째. 주요한 철학적 해답을 품고 있어야 한다. 앞서 제기한 명단의 인물 대부분은 남다른 재능과 노력으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존경받는 사람들로, 오로지 힘만을 보고 덤벼드는 야심가들과는 좀 다르다. 이런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설득력 강한 철학과 사상, 즉 명분이 있어야만 한다. 단순한 친목 모임이나 지역 유지 모임/조직과는 다른 수준의 정신적인 구심력이 바로 여기서 비롯될 수 있다.

셋째. 외부세계와는 구별되는 차별성을 내재해야 한다. 이후에 논의하겠지만 프리메이슨은 고대에서 전승된 것 같은 독특한 입회 의식을 아직도 치르고 있으며, 이 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은 외부에는 비밀로 되어 있다. 그밖에도 비회원들에게 알리지 않는 여러 가지 비밀들이 공공연하게 존재한다. 또 회원들 내부도 33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각의 계급은 아래 계급과는 차별화되는 지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 열거한 유명 인사들의 상당수가 바로 33 도(33 degree) 프리메이슨이다.

고로, 프리메이슨이 성당 기사단으로부터 전수받은 '이것' 은 힘과 사상, 비밀을 두루 갖춘 그 무엇일 수밖에 없다. 과연 무엇이 그런 것이 될 수 있을까.


/ 과거로, 과거로

이쯤에서 우리는 그레이엄 핸콕이 저서 '암호와 봉인' 을 통해 밝힌 관련 성과를 한 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프리메이슨을 직접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궤의 행방을 좇은 내용이지만, 그 추적의 과정에서 솔로몬 성전에 주목하고 필연적으로 성당 기사단과 프리메이슨에 접근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논의와 관련 깊은 부분이 많다.

물론 성당 기사단과 프리메이슨의 관계는 근세 이후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익히 알려져 있던 것이었고 이를 솔로몬의 보물 및 성궤와 관련짓는 것 역시 핸콕의 독자적 아이디어는 아니다. 그러나 핸콕은 저서를 통해 이 모든 것들의 성공적인 논리적 결합을 제시했다. 그리고 핸콕의 성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은, 성궤의 진정한 기원과 관련된 그의 고찰이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나 유태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성궤는 모세가 유태인 노예들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떠나갈 시점에 시나이 산에 올라 하나님을 직접 뵙고, 그의 불타는 손가락에 의해 직접 새겨진 십계명의 돌판을 받아 내려온 후 안장하기 위해 나무와 금으로 만든 손잡이가 달린 궤짝이다.

산을 내려온 모세는 동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에 분노하여 십계명판을 내던져 부숴 버린다. 이후 성궤에 담기게 된 것은 모세가 두 번째로 받아온 판이다.

이 궤짝은 물론 신성한 물건을 담는 그릇으로서 무한한 권위와 상징을 갖지만, 동시에 실제적이고 물리적 힘을 행사한 것으로 구약에는 묘사되어 있다. 모세의 형인 아론의 아들들이 성궤에 함부로 접근했다가 죽음을 당한 사건을 필두로, 성궤는 피아 구분없이 치명적인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물건으로 나타난다. 한 편 조심해서 다룰 경우 성궤는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가나안 땅에 도착한 유태인들은 이 성궤의 물리적 파워를 통해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다. (이런 모습은 다소 과장된 형태로 레이더스의 결말 부분에도 등장한다. 함부로 성궤의 뚜껑을 연 나치 독일군들은 성궤에서 풀려 나온 유령과 강력한 광선에 의해 몸이 녹아내리고 심장이 꿰뚫어져 몰살하고 만다.)

그러던 것이 이스라엘이 안정되면서 솔로몬이 성궤를 위해 만든 성전의 지하에 소중히 안장되고, 어느 시점부터는 아예 성경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지금의 논의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성궤의 기원인 만큼 이후 그 행방을 찾아나가는 그레이엄 핸콕의 구체적 행적은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관심있는 분들은 '신의 암호' 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저서를 읽어 보시도록.)

물론 성궤라는 물건 자체는 모세가 십계명판을 받은 후 현장에서 미장이에게 주문하여 만들도록 한-모세는 이를 위해 아주 상세한 치수를 제시하고 있다- 것이다. 그러나 그레이엄 핸콕은 십계명판과 여호와의 권위 대신 모세라는 인물의 배경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 등을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모세는 이집트에서 태어나고 파라오의 궁정에서 자란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받은 교육, 가지고 있는 교양과 지식의 대부분은 당시 노예상태로 있던 유태의 전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 그것도 최고위층에서 직접적으로 전수받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의 신분으로 보아 파라오와 신관 계급만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을 일별할 수 있는 자격이, 아마도, 모세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십계명판이나 성궤를 통해 정말로 모종의 능력을 보여줬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라기보다는 차라리 이집트에서 전수받은 비전의 지식을 응용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개연성이 크다. 머 굳이 성궤의 초자연적 이적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모세가 자신이 전수받은 이집트의 숨겨진 고급 지식을 함께 탈출한 유태인들과 함께 가나안 땅, 이스라엘 땅으로 전수해 갔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지식은 아마도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최고위층, 즉 왕과 고위 신관을 통해 후세로 전달되었을 것이며, 그와 관련된 정보들이 모세의 직접적 유물인 성궤와 그 주변의 물건들에 다양한 형태로 기록되었을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지식과 철학의 존재야말로 성궤를 안치하고 보존하는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던 솔로몬 왕의 지혜와 이교적 행적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국장이 브리티쉬 뮤지엄에서 직접 찍은 로마 공화정 시대의 궤짝. 위의 성궤와 재질은 다르지만 지붕 위에 서로 다른 쪽을 보고 앉아있는 천사상(케루빔이라고 한다) 등 전반적인 디자인의 컨셉이 매우 유사하다. 시기상 이 궤짝이 유태의 구약성서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없는 만큼, 모세의 성궤 디자인의 이집트 기원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증거이다. 이집트의 카이로 박물관에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상자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자. 이렇게 되면 이제 프리메이슨의 진정한 배경은 더 이상 12 세기 예루살렘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보다 2,500 년 전인 BC 13 세기 경 모세와 시나이 산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그 기원은 대 피라미드의 시대인 기원전 2,500 년 전보다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

십여 년 전 미국의 저명한 지질학자 로버트 쇼크는 유명한 스핑크스의 지질학적 검사를 토대로 이 유적이 '최소' 7,000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고, 미국 지질학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7,000 년 전 이집트 땅에는 원시 부족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야 했음에도 스핑크스의 석회암 표면에 남은 빗자국-사하라 사막에 비가 내리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들은 이런 거대 석조 건축을 가능케 한 화려한 초고대 문명의 존재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모세가 전수받은 고급 지혜가 이처럼 오래된 고대로부터 전해진 것이라면, 그가 행했다는 모든 이적과 놀라운 성궤의 능력 역시 모두 이에 기초한 것일지도 모른다.


... 국장은 얼마 전 이집트 피라미드에 대한 연재물에서 초고대 문명의 가능성을 언급하며 이를 풀어나갈 수 있는 현실의 키워드를 하나의 단어로 제시한 바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었다.

글타. 돌을 빼놓고는 고대를 언급할 수가 없다. 전기 드릴이나 초음파, 레이저 장비가 없이도 현무암과 화강암 덩어리를 마음대로 파내고 깎아내는 놀라운 세공 기술, 피라미드와 기타 수백톤 짜리 바위 덩어리를 뜻대로 다루는 능력 등 고대에 사용된 돌의 신비를 캐낼 수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과거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발달된 문명을 이해하고 파헤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국장은 주장한 바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돌이야말로 고대의 신비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은 자유 석공 조합이다.

그렇다. 돌의 키워드. 이집트 최고위층 간의 직접적인 비전의 전수가 끊어진 후 그것을 다시 찾아낸 사람들은 바로 성궤와 솔로몬의 보물을 찾아 나섰던 천 년 전의 성당 기사단-국장이 아닌-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마도) 기독교의 보물인 성궤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질적으로 전혀 다른 그 무엇인가를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깊이 파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 결과 묻혀져 있던 새로운 세계관과 사상 체계를 재발굴해 내고 말았던 것 아닐까.

그들이 찾아낸 것, 혹은 믿는 것이 무엇이던 간에 그것은 오랜 세월과 탄압을 건너뛰어 성당 기사단에서 프리메이슨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의 뜬금 없어 보이는 명칭이야말로 바로 돌의 키워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표식, 바로 그 자체인 셈이다.

석공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석공 조합.  스스로의 정체성을 일반인들의 시선에서 감출 수 있는, 그러나 이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한껏 열어 보여주는 선택적 암호로 만들어진 이 이름. 고대의 숨겨진 지혜를 이어나가는, 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집단에게 이보다 더 명칭이 있을 수 있을까.

... 다음 시간에 계속.

Posted by PD 개인교수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책 <예수는 신화다>에서 예수와 바울 이야기가 어떻게 날조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로마 교회는 자체 신앙에 어울리는 역사를 필요로 했다. 적을 비방하고, 하나님이 허락한 승리를 자축하는 역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진실은 엄격히 억압되었고 좀더 수용 가능한 역사가 날조되었다. 이렇게 날조된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올바른 역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정식으로 당당하게 가공의 복음서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신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저술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예수 이야기 자체인데, 저자는 그런 저술들이 비유적 허구 이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문자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허구를 만들어 냈을 때, 그들은 그것이 역사적 기록으로 통용되기를 원했다. 기독교 전통 역사의 토대가 된 그런 저술들은 날조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2세기 말에 바울의 원래 편지들은 새롭게 개찬되어 바울을 문자주의 기독교의 계보에 끼워 넣음으로써 바울을 영지주의에서 격리시켰다. 기독교를 철저히 로마화하기 위해 바울을 유명한 로마 정치가 세네카와 가까운 인물로 조작하기까지 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원고 300편에는 바울의 편지 8통과 세네카의 답장 11통이 담겨 있는데, 물론 모든 편지가 완전히 위조이지만 최근까지도 진짜 편지인 것으로 믿었다! 그 편지들 속에서 세네카는 기독교를 수용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바울은 황제의 궁전에서 복음을 공식 설교하는 사람으로 세네카를 지명한다.
4세기에는 이런 날조를 기초로 해서 제롬은 자신의 기독교 성자 목록에 세네카를 포함시켰다. 여러 사도들의 이름을 빌려 편지가 위조되기도 했다. 그 편지들이 지금은 신약에 포함되어 <성경>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신빙성이 의문시되었다.

가톨릭의 대변자였던 유세비우스조차도 야고보서와 유다서, 베드로서, 요한서의 출처를 의심했고 계시록은 전적으로 날조된 것이라고 보았다.
순교자 유스티누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로마의 클레멘스와 같은 초기 기독교인이 썼다는 편지들은 5세기까지 계속해서 위조되고 희석되고 첨삭되었다. 라틴어로 번역할 때도 수많은 왜곡이 이루어졌다. 기독교 철학자 오리게네스의 가르침 등 여러 가르침도 이때 왜곡되어, 당시 정통으로 간주된 가르침과 일치하도록 수정되었다.

기독교 성자들에 대해서는 상습적으로 허구의 전기를 만들어냈다. 흔히 그런 허구는 죽은 이교도 현자들의 생애와 전설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기독교 권력의 핵심인 로마 교회를 신임하기 위해 베드로가 로마로 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못 박혔다는 이야기를 꾸며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너무 늦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무도 이것을 신약에 포함시키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인기 있는 영지주의 저술은 영지주의 색채를 지운 채 편집해서 문자주의 문서로 만들었다. 심지어 이교도의 저술까지 각색해서 자신들의 도그마를 뒷받침하는 저술로 만들었다.

예수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는 이교도 시빌의 신탁은 4세기 초에 위조되어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직접 예수의 신격을 입증하는 자료로 제시했다. 그들은 <오르페우스의 증언>도 위조해서 고대 미스테리아의 예언자가 자신의 원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바꿔 놓았다.

유대인 피타고라스 학파인 필론의 저술을 서툴게 첨삭하기도 했고, 필론이 사도 요한과 율법 논쟁을 했다거나 로마에서 베드로를 만났다는 우스꽝스러운 전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를 기독교인으로 탈바꿈시켜서 신약에 나오는 아리마대의 요셉과 요세푸스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요세푸스가 역사적 예수의 존재를 증언한 것처럼 내용을 덧붙여 놓기도 했다. 요세푸스가 썼다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후기 문서도 위조된 것인데, 그것은 요세푸스가 직접 문자주의 교리를 가르친 것처럼 꾸민 앞서의 위조를 보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면밀한 언어학 연구를 통해 오늘날 학자들은 이 문서를 위조한 사람을 의심의 여지없이 밝혀냈다. 다름 아닌 이레나이우스의 제자이자, 이단자 사냥꾼 원조인 히폴리토스(220년대)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학자들은 또 바울이 썼다는 데살로니가후서의 언어와 문체가 히폴리토스의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 냈다---이 후서는 데살로니가전서(진짜)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그러니 데살로니가후서를 위조한 것이 히폴리토스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나중에 연구해 보려고 스크랩 해 논 것임. 그러니 기독교인들 흥분해서 리플달지 마세요)
Posted by PD 개인교수
예수 그리스도가 인도에서 요가와 명상을 하면서 수 년을 보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ANI 통신이 19일 보도했다. 저명한 힌두교 지도자인 고(故)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는 자신의 사후에 출간된 `그리스도의 재림 :너 안에서의 예수의 부활'이란 저서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보기 위해 베들레헴에 갔던 3명의 현자(賢者)가 모두 인도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인도에서 건너간 이들 현자가 예수를 산스크리트어로 구세주(Lord)를 뜻하는 `이사(Isa)'라고 칭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아가 예수 역시 나중에 인도로 건너가 현지의 위대한 철인(哲人)들과 요가와 명상으로 수행했는데 이 때가 성경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아 `잃어버린 시절'로 표현되는 13세에서 30세 사이였다고 주장했다.

1천642쪽의 이 책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요가난다 자아인식 장학재단'이 그의 사후 52년만에 생존 당시의 강연과 저서를 기반으로 펴낸 것이다.
ANI 통신은 이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더 깊은 의미와 함께 기독교의 가르침이 요가와 본질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병궁복음서』
서양의 고대천문학(점성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태양계는 멀리 떨어진 또 다른 중심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고 있으며, 그 일주(一周) 기간은 약 2만 6천 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태양이 도는 궤도를 황도대(黃道帶)라 부르는데, 이 황도대는 12궁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태양이 12궁의 한 자리를 지나가는 시간은 약 2,100년이 조금 넘는다.


이 시간의 마디가 천도섭리 측정의 한 시대가 된다. 6,000년 전 아담이 살던 시대는 태양이 금우궁(金牛宮) 시대에 들어갔을 때이며, 4,000여 년 전 아브라함이 살던 때는 백양궁(白羊宮) 시대이며, 로마제국의 건국 시기와 2,000여 년 전 예수가 탄생한 때는 쌍어궁(雙漁宮) 시대에 해당되며, 지금은 쌍어궁 시대를 마감하고 우리의 태양이 보병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대전환기라고 한다.(『보병궁의 성약』, 11∼13쪽)

그러므로 『보병궁복음서』는 다가오는 새 시대의 복음서인 반면, 기존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과거시대(금우궁, 쌍어궁 시대)의 복음서가 된다. 이 『보병궁복음서』는, 신약성서에 빠져 있는 예수의 구체적 생애와 그가 전하고자 한 근본진리의 말씀이 실려 있는 기독교 ‘제3의 복음서’이자 ‘제3의 성경’이다.

예수의 인간 구원의 길 

신약성서의 3대 공관복음서(「마태」·「마가」·「누가」) 내용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는 『보병궁복음서』의 가장 큰 특징은 신약성서에 빠져 있는 예수의 생애, 특히 12세부터 30세에 이르는 삶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예수가 전한 가르침의 연원(배경)과 진수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제 『보병궁복음서』를 통해 예수가 걸은 구도(求道)의 과정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원래,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러 왔던 세 명의 동방박사(호르, 룬, 메르)는 페르시아의 마기(magi, 사제)들이었다(『보병궁의 성약』 5장, 38장). 그 후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벳과 마리아 성모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아기 예수와 요한을 안고 이집트로 피난갔을 때, 조안(zoan)이라는 곳에서 엘리후와 살로메라는 현자를 만나게 된다. 엘리자벳과 마리아는 이 두 현자의 성림(聖林)의 구도장에서 사랑, 생명의 통일, 두 개의 자아, 삼위일체의 신(神), 도신(道神), 브라만교, 유대의 성서, 석가부처의 교훈, 페르시아의 종교 등에 대하여 3년간의 영적 교육을 받은 후 다시 유대로 귀국한다.(『보병궁의 성약』, 7∼12장)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 소년시절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유대의 여러 예언을 명쾌하게 해석하고 또한 진리에 두루 정통하여 율법학자들과 막힘 없이 논하기도 하자, 어떤 이들은 소년 예수를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이거나 그리스도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자라 12세가 된 예수는 목수가 되어 아버지 요셉을 돕고 있었다. 이 때 남부 인도 오릿사 주(州)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의 제례(祭禮)에 참석하러 왔다가 성전에서 만난 예수의 총명함에 반하여, 예수의 부모를 찾아가 그에게 동양의 지혜를 배우도록 인도 유학을 청원한다(『보병궁의 성약』, 21장). 예수가 동양의 지혜를 배웠다는 구도의 편력은 『보병궁복음서』 외에도, 러시아의 역사가이며 고전학자인 니콜라스 노토비치(Nicholas Notovitch, 1858~?)가 인도 북부의 케시미르 지방에 있는 헤미스 사원에서 라마승으로부터 전해 받은(1887년) 예수에 관한 두 권의 기록을 바탕으로 출간한 『이사전』*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해뜨는 방향을 향해 떠난 예수
이사(예수)가 아버지의 집을 은밀히 빠져 나와 예루살렘을 떠나 상인들과 함께 신드(Sind)로 향했던 게 바로 그 때였으니 이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하고 대붓다(the great Buddha)의 법을 연구하기 위함이라.(『이사전』 4:12∼13 /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180쪽 재인용)
 

‘해뜨는 방향’을 향해 떠난 예수는 남부 인도 오릿사 지방의 쟈간나스의 절에 들어가 4년간 수행하면서 『베다』성전과 『마니』법전을 배우고 승려 라마스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쟈간나스의 광장을 걸으면서 라마스가 “유대의 선생, 진리란 무엇이라 생각하오?”라고 물었을 때, 예수가 말한다.


예수-진리는 변치 않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리와 허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진리란 있는 그대로의 것이고, 허위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진리는 유(有)로 원인은 없지만 일체의 것의 원인이 됩니다. 허위는 무(無)이면서 유(有)의 표현을 합니다. 이미 만들어진 것은 무엇이든지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시작된 것은 끝나야 합니다.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은 유(有)의 표현이지만 본래는 무(無)이므로 사라져 버려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에테르가 진동하는 동안만 반영의 표현을 하고 사정이 변하면 소멸합니다. 성스러운 기(氣)는 진리입니다. 과거·현재·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화될 수도 소멸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라마스-과연 그렇겠구나. 그럼 인간이란 무엇인가?
예수-인간이란 진리와 허위의 이상한 혼합체입니다. 이 양자가 싸웁니다.
 

라마스-힘(power)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힘(power), 그것은 무(無)에 지나지 않는 환영(幻影)입니다. 진기(眞氣, force)는 변치 않지만, 힘은 에테르가 변하면 변합니다. 절대적인 기(氣, force)는 신의 의지이며 전능한 것입니다. 힘은 성기(聖氣)에 이끌려 나타난 신의 뜻이죠. 바람에도 힘이 있고, 파도, 전기, 인간의 팔, 눈에도 힘이 있습니다. 에테르는 이와 같은 힘(power)을 일으키고, 엘로힘·천사·인간 그 밖에 사고하는 것의 사상을 진기(眞氣, force)가 지도합니다.
 

라마스-예지(叡智)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예지란 인간이 이것을 토대로 삼아 그 위에 자기자신을 세우는 바위입니다. 그것은 유(有)나 무(無), 진리와 허위를 구별하는 영지(靈知)입니다.


라마스-신앙이란 무엇인가?
예수-신앙이란 하느님과 인간이 전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며, 인간이 신적인 생활에 도달할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마음에서 신의 마음에 이르는 사다리로, 구원에는 삼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신념으로 이것은 인간이 아마 그것이 진리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둘째는 신앙으로 그것은 인간이 진리를 아는 것, 셋째는 완성 즉 인간 자신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신념은 신앙 속으로 승화되고, 신앙은 완성으로 열매맺고 그럼으로써 자기와 신이 하나가 될 때 인간은 구원을 받습니다.(『보병궁의 성약』 22:1∼31)


예수는 라마스와 함께 갠지스 강 주변 마을의 노예(수드라), 농부(바이샤)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그들에게 인류는 한 동포라는 것과 만민평등, 인간의 절대평등을 가르친다.(『보병궁의 성약』 23∼25장)


이사(예수)께서 주거나웃, 라자그리하, 베나레스 그리고 다른 성지에서 6년을 지내셨더라. 그가 바이샤와 수드라에게 경전을 가르치시고 또한 그들과 함께 평화롭게 거하시니 모든 이들이 그를 사랑하였더라.(『이사전』 5:5/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181쪽 재인용)

Posted by PD 개인교수
예수처럼 왕가의 혼례에 적용되는 법칙은 일반 유대인 민족이 따르는 혼례법과 상당히 달랐다. 왕가에서 성관계가 허용되는 이유는 유일하게 수태였다. 모든 결혼과 성관계 관습은 철저하게 통제를 받았다. 우선 3개월간의 약혼 기간을 거쳐 9월에 성유를 바르는 일과 함께 첫 번째 결혼식이 열린다. 이는 부부의 연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전반 때가 되어서야 성관계가 허용된다. 이는 아이가 9월에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9월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달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때 여자가 임신을 하면 두 번 째 결혼식을 올리고 합법적인 결혼이 성사된다. 두 번 째 결혼식은 다음에 오는 3월에 열린다. 그런데 만일 첫 번째 결혼을 한 후 12월에 성관계를 맺었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다음 해 12월이 되어야 다시 성관계를 맺을 수가 있었다.


두 번째 결혼식 때까지 여자는 '알마(almah)'로 보는데 '알마'란 성관계가 없는 '젊은 여자'를 뜻한다. 알마는 또한 '처녀'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논리적으로 정확하지 않지만 '숫처녀'라고 해석한다. 3월에 두 번째 결혼식을 거행하면 신부는 임신 3개월이 되어 있다. 3개월까지 기다렸다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는 이유는 유산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신부가 불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남편은 혼인을 파기할 수 있다.

성관계가 허용된 12월을 제외하고는 남편과 아내는 떨어져 산다. 남편과 떨어져 있는 시기에 아내는 '과부'로 통했는데 그 지위는 '알마'보다 아래이다. 그녀는 의무적으로 남편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는 누가복음 7:38의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였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다'에 잘 나타나 있다.



결혼식에 사용하는 향유 중 하나는 감송향이었다. 베다니의 마리아, 다른 말로 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바를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녀는 혁명당원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발랐다. (누가 복음 ) 서기 30년 6월에 가나에서 열린 결혼 피로연에서 예수의 발에 감송향을 발랐다. 요한은 사실 가나에서 열린 잔치를 실제 결혼식이라 하지 않고 단지 결혼 피로연이라만 했다. 결혼 피로연에 온 하객들 가운데는 예수의 제자들과 '불결한' 비유대인들이 있었다. 이때 신랑은 분명히 예수인 것 같다. 성찬식 포도주가 부족하자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예수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하라고 했다. 예수가 하객이었다면 결혼 피로연에서 이런 권리를 가졌을 리가 없다. 실제 결혼식은 이어서 오는 9월에 있었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서기 33년 3월 다시 한 번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발랐다. 감송향으로 향유를 발라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의 신부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오직 첫 번째 결혼식과 두 번째 결혼식에서만 할 수 있었다.


이집트의 왕들은 관례적으로 누이와 결혼을 하게 되어 있었다. 유대의 왕들은 이러한 관습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같은 이름이 아내로 맞는 여성들에게 전해졌다. 세례 요한은 자독이라는 남자의 자손이다. 그리고 이 가문의 부인이 된 여성들은 항상 엘리셰바(엘리자베스)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속한 다윗왕 가문에서 아내로 맞은 여성들은 마리아란 이름을 가졌다. 왜 예수의 어머니와 아내를 마리아라고 부느는지 그 이유가 나타난다.



<빌립보 복음과 토마 복음 뒤에 감춰진 사실>

그리스도교 교회가 억압한 그노시스파 복음서의 하나인 빌립보 복음은 그리스도교회는 이단이라고 몰아붙였고 <다빈치 코드>의 레이 티빙은 이 복음서를 '시작하기에 항상 좋은 복음서'라고 칭했다. 참고로 레이 티빙이란 이름은 <성혈, 성배>의 작가들 중 레이와 배전트의 이름을 조합한 것으로 티빙이란 이름은 배전트의 아나그램이다. 한편 댄 브라운이 말한 대로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 사이의 애정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반려자는 막달라 마리아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제자들보다도 그녀를 사랑했으며 종종 그녀의 입에 입맞춤을 했다. 이에 감정이 상한 나머지 제자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들은 예수에게 "왜 주님은 우리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대답해 말했다. "내가 왜 너희들을 그녀처럼 사랑하지 않는가? .............. 결혼의 신비는 위대하다. 결혼이 없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존재하느냐는 인간, 바로 결혼하는 인간의 존재에 달렸다."


입맞춤을 하는 일은 오직 결혼한 부부들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댄 브라운이 언급하지 않은 것은 토마 복음에 있다. 토마 복음에 따르면 베드로가 "여자는 영생에 맞지가 않습니다."라고 하자 예수는 "내 스스로가 여성을 이끌어 남성적으로 만들 것이다...... 스스로를 남성적으로 만드는 여성은 모두 천국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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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원전(原典)에 대한 결론

원전(原典)은 없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모순 투성이의 복사본 성경이 있을 뿐이다.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조작이다.

한마디로 말해 Bible의 원전(原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한 존재다. 그럼 무엇이 있다는 것일까? 모두가 기원 4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생겨난, 무수한 카피(copy-模寫本)들인 것이다. 5천 5백 종류를 헤아리는 모사본들은 역시 모사를 거듭한 모사본인데다가 내용 또한 똑같은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는 형편인 것이다. <원전>이란 것들 중에는 모순이 드러나지 않는 페이지란 단 한 페이지도, 제대로 눈에 띄지 않는다. 손으로 베껴 쓸 때마다, 내용이 달리 파악되었고, 그때 그때의 요청에 의해서 고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성서의 <원전>에는 얼른 지적할 수 있는 틀린 부분이 얼마든지 나타난다. 가장 중요한 원전인 <시나이 사본>이 역시 바티칸 사본과 마찬가지로 기원후 4세기경에 씌어졌다는 것으로 1844년에 시나이의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시나이 사본>에는 수정된 곳이 1만 6천 군데나 된다. 이것은 <저자>들로 보여지는 7명의 교정자들의 손에 의한 것들로 세 번 수정되고 네 번째의 <원전>에 의해 바꿔진 대목도 허다하다. 히브리어 사전을 저술해 낸 일류 전문가 프리드리히 데리츄는 시나이 사본인 이 <원전> 속에 3천 군데나 베낄 때 잘못 쓴 대목을 지적하고 있다.


초기교회 장로들도 <원전>이 날조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비록 그 범인에 대한 견해만은 구구했었지만 벌써부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또 성경의 원전에 대해 삽입, 모독, 파기, 개량, 말소 등 이런 말들을 공공연히 입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원전>에 있어서의 날조에 대한 화제가 나오게 될 때 좋은 표정들을 짓지 않는다. 날조자들을 감싸고 나온다거나, 의식적인 변경이니 뭐니 늘어 놓으면서 이들은 신의 진리를 표현시키는 언어, 문장을 만들려는 관심 하에 그렇게 고쳤었다는 등으로 주장으로 버틴다.


날조라는 문제에 대해 쮜리히의 로버트케일 박사의 저서를 넘겨본다.


"같은 대목을 고친 두 명의 수정자들은 각기 정반대의 뜻으로 돌려 놓은 경우도 있다. 이건 그가 소속되어 있는 교파의 독단적 교리 즉, 도그마 해석에 따라서 생긴 의도적 변개(變改)다. 하였든간에 산발적인 <교정>에 의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텍스트에 혼란이 일게 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제네바의 산 피엘 주교좌 성당에서 오랜 동안 성직을 맡고 있었던 쟌죠라 신부는 "성경이 전면적으로 영감에 의해 씌어졌고, 하나님이 직접 저술했다고 하는 테제(these)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로버트케일 박사는 그의 저서 『현대인의 종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이 애당초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 줄로 단정하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 옛날부터 존재했었다는 식으로 고지식하게 믿고 있다. 그들은 모르고 있다. 초기 기독교 겨레는 2백년 동안에 걸쳐 구약성서 이외에는 성경을 갖고 있지 못했었다는 것에 대해서 대개가 알아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또 구약의 중요부분이 기독교 초기에는 아직 정리되지 못했었다는 사실(예수가 설교의 바탕으로 삼고 있던 이사야서도 기원 2, 3세기경에 마무리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 <신약>의 기술은 아주 천천히 씌어지기 시작했었다.


오랜 세월동안 그 누구도 이 신약문서를 성경으로 쳐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때와 더불어 이 문서를 신자 단체 내부에서 낭독하는 습관이 생겨났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까지도 그것을 성스러운 책이라 해서 구약과 같이 대우해 주려는 생각은 갖지 않았었다. 기독교 여러 종파들이 싸움질을 시작하기에 이르렀고 이것들을 서로 손잡게 만들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을 즈음에야 비로소 성서로 격상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그리스도 사후 2백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그 문서를 성서로 간주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즉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조작인 것이다. [백남철 편저<코즈믹바이블> 중에서]


♣ 바이블은 모두 필사본일 뿐이다


김용옥 교수의 바이블에 대한 고견을 들어보자.


"바이블(Bible)이란 파피루스, 페이퍼와 통하는 말로서 종이쪽, 문헌이란 뜻이다. 바이블의 구성은 편지와 전기(biography)밖에 없는데, 예수의 전기를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가정되는 네 사람이 쓴 것이 "복음서"이고 거기에 「사도행전」이라는 역사기록과 초기에 활약한 사람들의 편지가 더해진 것입니다. 그것들 역시 모두 필사본이며 사도 바울의 편지도 모두 필사본입니다. 예를들어 「에베소서」의 성립과정을 따로 든다면,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던 중 에베소라는 데에 가서 교회를 만든 다음 떠나가면서 이제는 너희들끼리 예수찬양하고 살아라 하고 떠나가겠죠. 그런데 바울이 거기에 있을 당시에는 교회가 잘 운영되었지만, 바울이 떠나고 한참 지나니까 개판이 되어 버릴 것이 아닙니까? 몇 달만에 만든 교회니 지금의 터키에 있는 에베소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의 나자렛에서 나서 예루살렘에서 죽은 예수라는 사람을 알게 뭐야? 그래서 에베소교회에서는 서로 내가 옳으니 니가 옳으니 쌈박질을 벌이게 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메신저가 헬레벌떡 바울이 있는 곳으로 뛰어 갑니다.

그러나 교통이 좋지 않은 당시에 바울이 다시 돌아가서 설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울은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탄의 꾀에 빠지지 마라........." 등등의 내용을 써서 그 메신저에게 건네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성경』 에 있는 「에베소서」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니, 「고린도 후서」니, 「로마서」니 전부 이런 식으로 성립이 된 거예요. 지금 어느 사람이 당시 바울이 직접 쓴 그 편지의 원본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떼돈을 벌테지만 어떤게 사본이고 어떤게 원본인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 초기에는 사도들의 이름을 가장한 온갖 위조편지가 많았어요. 그런 편지들의 온갖 사본들을 모아서 A.D. 4세기경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데에서 편찬한 것이 바로 『바이블』이에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293∼373)가 한 짓이죠. 그러므로 유실되지 않고 성경27편에 들어간 글들은 아주 재수가 좋은 것이죠."[ 김용옥 <도올선생 중용강의> 중에서 ]


♣ 성경은 원본자체가 번역본이다. 따라서 성경은 예수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도 없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설사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 해도 그것은 분명 인간의 말(언어)을 빌린 것입니다. 인간의 말인 이상, 그것은 인간의 말의 구조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읽고 있는 기독교성서의 원본(지구상의 최초의 기록)은 희랍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희랍어로 적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희랍어 원본이야말로 예수님말씀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아닌가? 이것은 매우 무식한 사람의 질문입니다.

예수는 희랍어를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는 지금은 死語가 되어 버린 아람어라는 토착말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의 원본(희랍어)도 예수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최초의 기록도 단지 예수님 말씀일 것이라고 떠도는 말들을 예수님이 죽은지 4∼50년 경 후에, 그것도 아람어에서 희랍어로 번역하여 적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혀 몰랐던 희랍어로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성서는 이러한 최초의 기록에서 수십차의 개정(가감)과 번역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엉터리 번역이 빚어낸 성서의 문제들은 싸구려 엉터리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의 번역판들이 빚어내는 문제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집에 있는 성서에도 보통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글개역판이고 하나는 공동번역판입니다. 그런데 이 두 판의 성경이 똑같은 장 똑같은 절의 기술에 있어서, 문장의 표현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전혀 다를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게 맞습니까? 도대체 어느 쪽이 하나님 말씀입니까?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한 자 한 획도 어김없이 모두 절대적으로 하나님 말씀이라면 도대체 이 어찌된 일입니까? ........성경에는 예수의 말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도 없습니다. 그러한 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여러 나라 말 번역이 있을 뿐입니다. 원본자체가 번역본이니까요. " [김용옥 <고교생을 위한 철학강의> 중에서]


정경(正經)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라는 조직의 "정통성"의 타당화를 위하여 정경(正經)을 성립시켰다. 성서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조작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지금 소위 우리가 말하는 정경 대 외경의 구분이 부재했었다. ........ 그들(초대교회의 신도)의 사고를 지배한 것은 파루시아 즉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기대였다. 사도바울 자신이 자기 생전에 예수가 호령을 치면서 천사들의 소리와 신의 나팔소리를 반주로 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리라고 확신했고 그 때는 이미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나고 자기를 포함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구름에 휩싸여 공중에서 예수를 맞이할 것이라고 믿었다(데전 5:16∼18). 그리고 이 미래사실이야말로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최대의 위로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바울의 상징적, 은유적, 추상적 이해가 아니다. 예수의 재림이란 그러한 사실의 모습으로 이 시간 이 공간 속에서 현실화되어 일어난다고 확신했고, 후년에 그는 재림 전에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인간적 불안감을 표시하기도 했다(빌 1:20∼25)[류형기 <성서주해> Ⅳ:561] ......대체적으로 초대교인들은 최저한 AD150년경까지는 긴박한 파루시아의 기대 속에서 살았다. 즉 자기들이 살고 있는 현세는 단순한 준비과정에 불과했으므로 현세 속에서, 즉 역사 속에서 자기 이름을 남긴다든지 역사 속에서 무엇을 성취해 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경전이 일차적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물론 파루시아는 계속 지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는 그들이 기다리던 모습으로 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영화는 상연되지 않고 계속 연기공고만 나붙은 것이다. 이러한 지연 속에서 초기 기독교는 파루시아를 비종말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비종말화는 점차적으로 역사의식의 증대를 가져오고 그러한 역사의식은 교회론으로 종결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라는 조직으로서 이 세계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이다. 교회야말로 천국의 지상에 있어서의 역사적 표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론의 사상적 물줄기의 완성을 바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카톨릭 교회론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초대기독교 문헌의 정경화는 이러한 교회론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정경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경을 성립시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라는 조직의 "정통성"의 타당화를 위하여 "정통적" 경전을 구분해 내어야만 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여튼 A.D. 150년 경까지만 해도 예수사도나 기존경전의 인물이름을 빌어 무명으로 혹은 가명으로 경을 쓰는 일은 전혀 위작의 나쁜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권장되었다. ...........

우리는 케리그마, 즉 예수의 수난,죽음,부활,승천의 보고, 그리고 그의 행위와 말의 수집이 원래 구전의 전통(oral tradition)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구전은 예수의 언어였던 아람어가 주축이었고 이 구전 자체가 희랍어로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희랍어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를 직접 경험한 사도들이 다 죽고 난 후에는 이 구전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게 된다. 복음서의 최초의 제작은 이러한 구전의 보존을 위하여 이루어졌고, 또 구전간의 상이에서 오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 파벌들이 자기들의 구전을 기록하게된다.

그리고 교회의 성립은 교회의 예배와 의례(liturgy)를 위한 기록의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이러한 조류 속에서 제1세기 말경에는 상당수의 복음서들이 제작된다. 어떤 복음서들은 사도의 이름을 빙자하지 않고 부활한 예수의 직언이라고 하여 그 권위의 우위성을 보장받으려고 하였고 이러한 복음서들은 사도들의 충실한 기록이라고 여겨진 복음서에 대해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단에 대해서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여기는 복음서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는데 그 정통성의 근거는 사도 저작성(apostolicity)이었다.

이 사도저작성이라는 기준자체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애매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준으로는 분쟁의 결정적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고 2세기에는 이미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 알렉산드리아의 소아세아를 중심으로한 동방교회 사이에 정경의 기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심각히 대두되었다.

이러한 견해차이는 2세기 말엽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3세기의 오리겐(Origen), 4세기초의 유세비우스(Eusevius)등에 의한 신학적 논란을 거쳐 조정과정을 거치는데 당시에 널리 유행했던 히브리인 복음서(Gospel of the Hebrews), 애굽인 복음서(Gospel of the Egyptions), 바나바서(Letter of Barnabas), 12사도 교의서(Didache), 헤르마스의 목자서(Shepherd of Hermas), 바울행전(Acts of Paul),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 베드로 묵시록(Apocalypse of Peter), 요한행전(Acts of John), 그리고 도마복음서(Gospel of Thomas) 등등은 여러 분류방법에 의해 외전으로 탈락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오늘의 27서가 정경으로 규정된 것은 아리아니즘(Arianism)의 비판에 심혈을 기울였던 기독교정통성의 옹호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 의해서였다. 라틴교회는 제롬(Jerome)의 영향 하에 아타나시우스의 결정을 받아 들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27서 형태는 4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의 권위가 일시에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동서방교회에서는 기존의 성경을 썼다. 예를 들면 4세기 중엽의 시나이티쿠스 코우덱스판본(Codex Sinaiticlus)은 바나바서와 헤르마스서를 정경에 포함시키고 있다 시리아의 교회에서는 타티안이 편집한 디아테사론(Diatessaron)이 5세기까지 쓰였고,....... 7세기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시리아에서는 27서짜리 경전이 쓰여지게 된다.

그 뒤로 1546년에 라틴 벌게이트(the Vulgate)가 인쇄되기까지 텍스트 그 자체는 계속 유동적었다. 마틴 루터는 경전성의 기준을 "사도성"과 "그리스도에게로 귀결되는 것"의 두 척도에 두었는데,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은 후자의 척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했으나 관습의 권위에 복종하여 이 네 편을 신약의 마지막에다가 포괄시켰다. 이러한 텍스트의 역사를 고찰해 볼 때 우리는 현존 텍스트 그 자체에 절대적 권위를 두고 일점일획이 모두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성찰되지 않은 통념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성서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조작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김용옥 <절차탁마대기만성> 중에서]


♣ 15세기 인쇄술이 개발되기 이전의 모든 성경의 판본은 하나도 동일 한 것이 없다. 1,200년경에나 장의 구분이 생겨나고 1,550년경에나 절의 구분이 생겨난다.


" 신약성경의 원저자의 원사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인용된 성구들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구절들과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국론>을 번역할 때는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성경지식을 기준으로 해야 하며 우리의 성경지식으로 번역할 수 없다. 이와같이 성경이란 원래 제멋대로인 것이다. 오늘까지 존재하는 사본 중에서 신약 27서 전체를 보전하고 있는 판본은 50종에 불과하며, 15세기 인쇄술이 개발되기 이전의 모든 판본은 하나도 동일 한 것이 없다. 그리고 고판본은 모두 액센트와 쉼표의 표기조차도 없는 글자의 나열에 불과하며, 1200년경에나 장의 구분이 생겨나고 1550년경에나 절의 구분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고판본의 해독에 있어서 많은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구두점 없는 한문 고전이 갖는 문제점과 대동소이하다." [ 김용옥 <절차탁마대기만성> 중에서]


▣ 성서(Bible)에 대한 결론


성서는 다음과 같은 왜곡의 과정을 거쳤다. 신약성서에 대해 한 번 살펴 보자.


1) 1단계 왜곡(구전): 예수의 육성음(아람어)은 예수의 죽음과 함께 증발했으며, 예수의 말씀이 구두로 전달되던 시대가 최소한 한 세대 (30년)이상 흐른 뒤 서서히 쓰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의 사람들이 기억력이 좋긴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일점일획의 왜곡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2) 2단계 왜곡(번역): 예수가 구사했던 언어(아람어)는 최초로 희랍어(그리스어)로 쓰여지기 시작한다. 즉 번역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번역에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왜곡이 따르기 마련이다. 가령 영어 번역판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 것은 이러한 왜곡을 적게 하려는 수많은 노력과 몸부림인 것이다.


3) 3단계 왜곡(필사): 이 희랍어로 쓰여진 것조차 원본은 없다. 모두 필사본일 뿐이다. 필사본들은 하나도 동일한 것이 없으며, 필사의 과정에서 왜곡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4) 4단계 왜곡(취사 선택): 1~3단계를 거쳐 만들어진 5,000종이 넘는 사본들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예수가 말한 바와 가까운가 하는 것을 원문비평을 통해서 취사선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또한 약간의 왜곡이 발생한다.


5) 5단계 왜곡(번역):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비평판 그리스어 성서를 대본으로 하여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또 왜곡이 일어난다.


6) 기타 왜곡: 고판본은 모두 액센트와 쉼표의 표기조차도 없는 글자의 나열에 불과하며 장과 절의 구분시 많은 오류 발생, 정경과 외경으로 분류하는 과정(예수 사후 200년 이상 지난 후에야 현재의 27서 형태를 갖춤) , 복음서 변조(수정,가감,삭제 편집) 등의 왜곡도 무시할 수 없다.


이상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전혀 일점일획의 왜곡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 내지는 사기(詐欺)에 불과하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거짓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힘이다. 그러나 과연 성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져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걸까? 여기까지 글을 읽은 독자들은 누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것이다.


☞ 한마디로 바이블(bible)의 원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태어나 보지도 못했다. 원본이라는 것 자체가 번역본일 뿐 아니라 복사본이다. 바이블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없이 왜곡되었으며[注1], 그러한 결과로 모순과 오류투성이다. 교회라는 조직이 그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성경만을 정경(正經)이라고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앞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의 말씀도 없다. 예수가 말했던 아람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에 의해 쓰여졌으며,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느니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엄청난 사기(詐欺)이다. 아직도 이러한 사기를 밑천으로 밥먹고 사는 한심한 성직자들이 우리 주변엔 많다. 괴팅겐 대학에서 신약을 강의하는 한스 코첼만 교수는 기독교가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은 비판적 성서 연구 결과가 알려져 있지 않은 덕분임을 자인한다. 10억의 그리스도인 중에서 신학 도서관을 기웃거려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심지어 삼위일체나 예수의 신성(神性)과 같은 중요한 교리조차도 몇 차례의 종교회의를 거쳐 찬반투표로 인간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퍼 옴---
Posted by PD 개인교수
성배와 성혈 [ 16. 결론과 미래의 전조 ]
그러나 만일 일레로서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는 진술이 문자 그대로 이해되지 않고 상징적을 이해된다면 그 때에는 이해가 상충되지가 않고 그 진술의 의미를 해치지도 않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적인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불사에 대한 소망에 종국을 고한다는 반론의 의미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도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류는 사후의 생명을 믿게 되었고 그 결과 부활사건은 불사에 대한 보증으로서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이해되어 교회에서 그대로 가르쳐진 신화가 갑작스럽게 c철저하게 거부될 것이라는 위험이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팽배해 가고 있다. 기독교 신화는 파괴되는 대신 한 번 쯤은 상징적으로 이헤되어져야 할 시기가 아닌가?

----칼 융, 《미 발견된 자아》전집 10권 (1956) p.266
우리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입증하거나, 반증하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따라서 그 어떤 결론도 입증하거나 반증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우리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 교의 중 어떤 것도 그 신빙성을 의심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어떤 당혹케 하는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하고자 하였고, 어떤 수수께끼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처음에 어느 정도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무엇과 마주치게 되었다. 우리는 깜짝 놀랄만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상식을 벗어난 듯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의 생애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이로한 점에 관심을 돌렸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기독교에 대해서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도달한 결론이 합당한 것인지 어떤지를 알아내려는 노력만 기울였다. 성서 자료를 철저하게 고찰함으로 그것이 실제의 사건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결론이 주장할 만한 결론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들이 내린 결론의 정확성을 입증할 수 없었으며 지금도 여전이 입증할 수 없다. 적어도 이 결론은 하나의 가설이 되고 있다. 이 가설은 그럴 듯한 가설로 상당히 조리있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그래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한 우리가 접한 2천년 전에 서구인들의 의식속에 새겨져 후대의 서구문화와 문명을 형성한 그 어떤 사건이나 인물보다 더 이 가설은 역사적으로 가능성이 짙은 기술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결론을 입증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시온의 수도회가 얻을 수 있는 방대한 증거--그 기록과 표본의 양면에서 --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되는 기록된 힌트와 개별적인 대담을 밑받침으로 해서 우리는 시온 수도회가 우리가 발전시킨 이 가설에 대해 어느 정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명'에 이르게 되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될지는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의 식견있는 추측은 할 수 있다.

만일 우리의 가설이 옳은 것이라면 예수의 아내와 후손--예수는 16세 또는 17세에서 추측된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녀들을 두었을 것이다.--은 성지를 도망한 후 프랑스 남부에다 은신처를 마련하고 한 유대인 공동체내에서 그들의 혈통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5세기에 이 혈통은 프랑스 왕국의 교훈이 이루어져 그 결과 메르빙 왕조를 탄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496년 교회는 이 왕조와 협종을 체결하고 영원히 메르빙 왕조의 혈통임을 서약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사실이 메르빙 왕조의 참 정체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왜 클로비스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상, 즉 '새로운 콘스탄티누스'의 상으로 표현되었는지를 설명해 줄 것이며 또한 왜 그가 왕으로 임명되지 아니하고 이렇게만 인정되었는지를 설명해 줄 것이다. 교회가 다고베르의 암살에 은밀히 결탁함으로써 그 결과 메르빙 왕조의 혈통을 배반하게 되었을 때 그 일은 합리화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말살될 수 없는 범죄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일은 단지 비밀로 감추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은 비밀로 감추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메르빙왕조의 참 정체에 대한 발각은 적국에 대해서 로마교회의 입장을 강화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혈통__어느 정도는 메로빙가의 혈통__은 그 혈통을 근절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존속되었다. 부분적으로 카롤링 왕조를 통해서도 존속되었다. 카롤링 왕조는 그들의찬탈에 대해서 로마교회가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죄책을 분명히 느꼈으며 메로빙 왕조의 공주들과 왕족간의 결혼을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합리화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다고베르의 아들 시지스베르를 통해 그 혈통이 존속되었다는 사실이며 그의 후손 중에는 귀염 드 겔론느라는 셉티마니아 유대인 왕국의 통치자가 있었음 최후의 인물은 고드프라 드 부용이다. 1099년 고드프라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예수의 혈통은 정통적 세습재산, 즉 구약시대에 수여된 세습재산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기간 동안 고드프라의 참 혈통이 로마가 바랐던 것처럼 비밀에 싸여 있었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교회의 헤게모니가 그대로 있었다면 물론 공공연하게 폭로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문이나 전승, 전설이 유행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승 전설은 로엥그린과 같은 설화에 매우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례로서 고드프라의 신비에 싸인 조상이며 성배의 일화에 꾸밈없이 나오는 것들이다.

만일 우리의 가설이 옳다면 성배는 동시에 최소한 두 가지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상 랄(Sang Raal)', 즉 시온수도회에 의해 결성된 성당기사단들이 수호자들로 임명된 '참' 또는 '왕의피'가 될 것이다. 동시에 성배는 문자 그대로 예수의 피를 받아 담은 그릇 또는 잔 이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배는 막달라 마리아의 자궁이었을 것이다.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막달라 마리아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세에 놀리 퍼졌던 막달라 마리아 제의가 나타나 성모 마리아 제의와 혼동을 일으키게 되었을 것이다.

실례로서 그리스도교 초기의 많은 유명한 '검은 성모들' 또는 '검은 마돈나들'은 성모 마리아의 신당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의 신당으로서 그 신당들은 모자(母子)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 고딕 대성당들--- '노트르담'에 헌납된 자궁의 거대한 석조 모사품들---도 역시 <붉은 뱀>에서 기술한 바처럼 예수의 어머니의 신당이기보다 예수의 배우자의 신당이었다는 점도 역시 논의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배는 예수의 혈통과 그녀의 자궁으로부터 형통이 생겨난 막달라 마리아를 상징화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밖에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70년 유대의 대반란시 티투스 휘하의 로마 군단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였다. 성전의 약탈된 보물은 최후에는 피레네산맥에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플랑타르는 대담을 통해 오늘날 이 보물이 시온수도회의 손안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는 티투스 백부장들에 의해 약탈된 보물이외에 많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교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될 수가 없었다. 메시아는 제왕(祭王)으로 그의 권위는 영적분야와 세속적 분야에 꼭같이 미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성전은 이스라엘 왕가에 관련된 공문서들, 즉 출생증명서, 결혼허가증 및 현대의 어떤 왕가가 귀족등의 가문에 관한 자료와 유사한 자료들을 소장했다는 것은 매우 그럴 듯한 견해이다. 만일 예수가 실제로 유대인의 왕이었다면 이 성전에 관한 많은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 성전에는 한 때 복음서에 나오는 일시적인 무덤에서 옮겨진 그의 시신이 들어 있을 것이다. 시신이 없다면 적어도 그의 무덤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티투스가 70년 성전을 약탈했을 때 조금이라도 예수와 관련있는 어떤 것을 얻었다는 언급은 없다. 만일 이러한 자료가 존재했다면 그것은 물론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역시 숨겨졌을 것이다. 티투스의 병사들은 전리품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러한 자료를 찾는 일엔 고심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성당에는 제사장들만이 드나드는 통로가 있었을 것이다.

제사장은 자기를 행하여 다가오는 백부장들의 방진(方陣)을 바라보며 그들이 찾을 만한 금, 보석 및 재보를 그들에게 남겨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보다 더 중요한 품목들은 아마도 성당 지하에다 감추었을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품목이란 이스라엘의 정통적인 왕, 인정된 메시아 및 왕가에 관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1100년이 되어 예수의 후손들은 유럽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며 팔레스타인에서도 역시 고드프라 드 부용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혈통과 조상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를 확실하게 세상에다 입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증명은 그들 차후의 계획에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증명이 성전경내에 있었거나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면 그것을 찾아내는 데는 별반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성당기사단들의 역학을 설명해 줄 것인데 그들은 비밀리에 소위 솔로몬의 마굿간이라고 알려진 성전지하를 발굴하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증거를 토대로 성당기사단들은 사실 무엇을 발견하거나 얻으려는 분명한 목적 하에 파견되어 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한 우리가 고찰한 증거를 토대로 보면 어떻게 하든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아 그것을 유럽으로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비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당기사단의 4대 단장인 베트랑전드 블랑슈포르의 후원 하에 게르만 공병 분견대가 땅을 파 은닉처를 만들기 위해 매우 엄중한 보안을 하고 파견된 렌느 르 사토 부근에 무엇인가가 감추어졌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곳에 무엇인가가 감추어졌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이라화한 예수의 시신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결혼허가증, 그의 자녀들의 출생신고서 같은 것들로 비교적 중요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의 일부 또는 전부가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카타리 이교도들에게 넘겨져 몽세귀르의 신비한 보물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고드프라와 보두엥 드 부용을 통해 하나의 '왕가의 전승'이 존속했다는 것이다.

이 왕가는 그것이 '시온의 반석 위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유럽의 주요한 왕국들과 그 지위가 같았다. 만일 - 신약성서와 프리메이슨단이 주장하는 것처럼 - '시온의 반석'이 예수와 동의어라고 한다면 그 그 주장은 불시에 의미있게 될 것이다. 실제로 만일 무슨 연관이 있다면 그것은 줄잡아하는 말일 것이다.

한때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던 메로빙 왕조는 그 왕국의 참 계보에 대한 암시를 시인하고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성배의 일화들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언제 어디서 일어났었나를 설명해 줄 것이며 그 일확들이 성당기사단들과 왜 그렇게 분명하게 연관되었던가를 설명해 줄 것이다. 때를 맞춰 한때 팔레스타인에서 그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고드프라와 보두엥을 통해 혈통이 이어진 '왕가의 전승'은 아마도 그 기원을 밝혀줄 것이다.

예루살렘의 왕은 당시 유럽의 모든 군주들보다 상석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는 교황을 대신했을 것이다. 로마를 대신해서 예루살렘은 당시 기독교국의 진정한 수도로 아마도 기독교국 밖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가 생명이 유한한 예언자로, 제왕으로, 다윗 혈통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되었다면 그는 무슬림과 유대인 모두에게 인정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蝡 왕으로서 그의 직계의 후손은 당시 성당기사단의 정책에 대한 주요한 교의 주의 하나 - 유대교 및 이슬람교와 기독교와의 화해 -를 이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적 정황은 결코 이러한 사태가 발생되도록 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프랑크 왕국은 그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없었다. 무슬림 군대에 의해 전면이 포위당해 그 자체의 통치와 행정마저 불안했던 프랑크 왕국은 존속에 필요한 세력과 내적 안정마저도 취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유럽의 왕가들과 로마의 교회에 대해 그 우월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웅대한 계획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1291년 성지의 상실과 더불어 그 계획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메로빙 왕가는 다시 한번 무관이 되었다. 그리고 성당기사단은 더욱 부유해졌을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소비도 할 수 있었다. 후대로 이어지면서 메로빙 왕조 - 시온수도회에 의해 원조도 받고, 지휘도 받고, 보호도 받았던 - 는 그들의 상속재산을 다시 차지하기 휘한 시도를 되풀이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유럽에 국한되었다. 그들은 최소한 세가지의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 구분이 되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계획은 정신적인 분위기, 로마의 정신적 헤게모니를 부식시키려는 의도의 비밀 전승을 만드는 것이었다 - 이러한 전승은 연금술 및 비전의 사상 속에, 장미십자회의 선언서 및 유사한 저술 속에, 프리메이슨단의 어떤 의식들 속에 그리고 물론 아르카디아의 상징들과 비밀 풍조 속에 표현되었다.

두 번째 계획은 정치적 음모와 숭책을 꾀하고 할 수만 있다면 능력을 확고히 소유하는 것이었다. 16세기 귀즈가와 로렌느가에 의해 사용된 기술과 17세기 프롱드가의 건축가들에 의해 사용된 기술이 그 능력이었다. 세 번째 계획은 메로빙 왕가가 그들의 상속재산을 되찾은 계획으로 왕국간의 상호 결혼이었다.

이런한 비잔틴이蝡 절차들은 불필요한 것들로 보였으리라고 맨먼저 생각된다. 메로빙 왕가는 - 만일 그들이 실제로 예수의 후손들이었다면 - 그들의 우위권을 내세우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참 정체를 폴로하여 입증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세상은 그들을 인정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자신은 로마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되면 교회는 다고베르의 살해를 시인하고 그의 혈통이 깊어지는데 대해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은 갖지 않았다. 그들의 혈통을 너무 서둘러 폭로하므로 베로빙 왕가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오히려 불발을 하여 당파적인 분쟁을 야기시키고 신앙의 위기를 촉진시키고 교회와 다른 세속 주권자들로부터 도전을 유발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더라면 메로빙 왕가는 그러한 반발을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정체나 그들의 으뜸패 카드의 비밀은 말하자면 그대로 지켜져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역사와 정치의 현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으뜸캐 카드는 권력의 디딤돌로서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권력이 이미 요구되어졌을 때 그 카드는 오직 작용되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힘의 위치로부터 작용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을 재건키 위해서 메로빙 왕가는 보다 협정적인 절차, 즉 의문에 싸인 특수한 시대에 인정된 절차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절차는 적어도 네 번이나 성공할 듯하다가 좌절되었고 단지 계산착오로, 주위사정 또는 전적으로 예기치 못한 일로 방해를 받았다. 예를 들어 16세기에 귀즈가는 프랑스 왕위를 거의 획득할 뻔하였다.

17세기에 프롱드가는 루이 14세를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고 그를 대신해서 로렌느의 후계자가 될 뻔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일종의 복원된 신성동맹의 청사진이 마련되었는데 이것은 카톨릭 유럽 -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을 함스부르크가의 영도하에 연합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독일 및 러시아 양국의 변칙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때 독일과 러시아는 주요 동맹국들 사이에다 끊임없는 변화를 유발시켰고 그 결과 유럽대륙의 모든 왕국들을 와해시킨 전쟁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메로빙 왕가의 혈통이 그 목표의 실편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었던 시기는 18세기였다. 함스부르크가와의 교훈 덕분으로 로렌느가는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인 오스트리아의 왕위를 얻었다.

프랑소아드 로렌느의 딸 마리 앙토와네트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을 때 프랑스 왕위 역시 어느 정도 기울어가는 시대였다. 만일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함스부르크 로렌느가는 1800년대 초까지는 순조롭게 전유럽의 영토를 지배하였을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메로빙가의 희망과 열망에 참으로 커다란 타격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로 보인다. 단 한번으로 산산조각으로 박살나게 한 대변동으로 일세기 반에 걸친 세심하게 준비되고 필요한 권한을 얻으려는 계획은 갑작스럽게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시온수도회의 기록에 언급된 것을 보면 시온은 프랑스 대혁명의 혼란기간 동안 가장 귀중한 기록들 중에 많은 것을 상실하였으며 게다가 그 밖에 다른 것들도 역시 상실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당기사단의 단장직의 변화, 특별히 노디에와 같은 또 다른 얻을 수 없는 자료에 접근한 문화적인 프랑스 인물들로의 변화를 설명해 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소니에르의 역할도 설명해 줄 적이다. 소니에르의 전임자인 안토와네 비구는 프랑스 대혁명 바로 전날 저녁에 법전화된 양피지 문서를 감추어 그것을 정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스페인으로 도망가 얼마 후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시온수도외에서는 적어도 한 동안은 그 양피지 문서가 어디 있었는지를 분명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만일 그 문서들이 렌느 르 샤토에 있는 교회에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을지라도 그 사본들은 그곳에 있던 마음이 맞는 한 사제가 없었더라면 쉽게 회수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난처한 질문을 하지 말고 비밀을 지키며 수도회의 이해와 활동에 간섭을 하지 말라는 시온수도회의 명령을 행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만일 양피지 문서들, 그 밖에 무엇인가 - 렌느 르 샤토 부근에 감추어진 무엇인가를 언급하고 있었더라면 이러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더 필요하였을 것이다.

소니에르는 그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의 가정부 마리 드나르토도 마찬가지었다.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렌느 르 샤토 부근에는 여러차례 발굴작업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어떤 것도 발굴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추측하는 것처럼 어떤 기폭적인 품목들이 한때 그 주변지역에 감추어져 있었다면 그것들은 분명 소니에르의 이야기가 주의를 끌어 보물 사냥꾼들을 불러 모았을 때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만일 이런 품목들이 보물 사냥꾼드龁 눈을 피한 지하토굴, 예를 들어 개인소유의 인공연못 아래에 있는 어떤 창고에 감추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러한 토굴은 어떠한 월권적인 발굴에 대해서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고 견디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떠한 발굴도 연못에서 먼저 물을 빼내지 않으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일은 절대적 비밀리에 행해질 수는 없었다 특별히 사유지에 침입한 틈입자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사실 인공연못 하나가 렌느 르 샤토 부근에 있었는데 상당히 그럴 듯한 견해에 따르면 라발듀(하나님의 골짜기 또는 계곡)라 불리는 유적지 부근이라고 한다. 이 연못은 당연히 지하토굴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반면 지하통로를 통해 둘러싸인 산에 벌집처럼 뚫려있는 무수한 동굴 중의 몇몇개에 쉽게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니에르에 의해서 발견된 양피지 문서에 관해서 살펴보자.

그중의 두 개는 - 혹은 어떻게 되어서든 그 중의 2개의 복사 - 는 새로이 만들어져 출판되자 널리 유포되었다. 반대로 다른 두 개는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다. 플랑타르는 대담을 통해 이 사본들이 현재 런던 로이드 은행의 귀중품 보관소에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 사보들에 대해 더 이상 추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소니에르의 돈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돈의 일부가 재정거래를 통하여 대공 요한 폰 합스부르크에게 넘겨졌으리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실질적인 총액은 소니에르뿐만 아니라 렌니 레뱅의 신부인 앙리 부데에 의헤 카르카손느의 주교에게도 이용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소니에르 수입의 대부분이 소니에르의 가정부인 중개자 마리 드나르노를 통해 부데가 그에게 지급하게 된 결과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개 가난 교구 신부에 지나지 않는 부데가 이러한 재원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물론 비밀에 싸여 있다.

그는 분명 시온수도회의 상속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이 시온 수도회에게 직접 유출되었느냐 하는 점은 대답할 수 없는 의문이다. 그 돈은 합스부르크의 보고에서 유출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렇지 않으면 바티칸에서부터 유출되었으리라고 보는데 바티칸은 시온과 합스부르크가에 의해 고도의 정치적 공납을 받았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그 돈에 대한 의문이나 돈으로 바꾸어진 보물에 관한 의문은 우리에게 그 결과로서 일어난 발견과 비교해 볼 때 점점 보수적인 문제로 변했다. 되돌아보면 그것의 주요 역할은 우리의 관심을 비밀속으로 이끌어 갔다. 그후 이것은 비교적 덜 중요하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 한 혈통에 대한 가설을 구체화해 왔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가설이 모든 세부적인 면에서 옳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도처의 특별한 부분들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가설의 본질적인 개요는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아마도 우리는 특수한 수도원 총장의 활동이나 18세기 정치의 권력투쟁과 정치적 음모술수 등의 결연의 의미를 잘못 해석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나 이러한 조사를 통해 우리는 렌느 르 샤토의 비밀이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실제적 유럽이 아니라고 한다면 적어도 프랑스에서 메르빙 왕국을 재건하려는 중요한 시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왕국에 대한 합법적인 주장이 메르빙 왕가가 예수의 후손이라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로 살펴보면 우리의 조사에 의해서 야기된 수많은 예외적인 것, 수수께끼, 해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분명해지게 된다.

하찮은 듯이 보이면서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단편적인 것들도 역시 분명해진다. 이러한 내용의 책으로는 니콜라 플라멜의 다음과 같은 책들이 있다. 그 밖에 르네 당주의 상징적 성배, 이 잔은 그것을 단숨에 마시는 사람에게 하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환상을 보여준 잔이다. 또 안드레아의 <크리스찬 로젠크로츠의 화학적 결혼>은 보트로 해안에 밀려온 왕가의 혈통을 이은 신비의 소녀에 관한 것인데 이 소녀의 정당한 상속재산은 이슬람교도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또한 푸생에 내밀히 관여된 비밀-- 성체회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고 말해지는 비밀과 같은 비밀이다.

조사를 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밖의 또 다른 단편적인 일들에 많이 직면했다. 그 당시에는 그러한 일들이 전혀 무의미하거나 무관하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들도 역시 의미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왜 루이 11세가 막달라 마리아를 프랑스 왕가의 혈통의 근원으로 여겼는가가 분명해질 것이다. -- 이러한 신념은 15세기의 정황하에서도 처음에는 불합리하게 보였다.

또한 왜 샤를르마뉴의 왕관-- 지고한 합스부르크가의 왕보(王寶)의 일부분이 되어있는 복사--에 '솔로몬 왕'이라고 명각되어 있는지도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가 왜 '다윗의 거룩한 후손'의 새로운 왕에 관해서 말하고 있나도 분명해질 것이다. 제2차 대전동안 결코 만족할 만하게 설명될 수 없는 이유로 로렝의 십자가는 새롤르 드골 휘하의 자유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그 자체로서는 이것은 다소 기묘하다. 로렌느의 십자가-- 르네 당주의 고안--는 왜 프랑스와 같다고 생각 되었을까? 로렌느는 결코 프랑스의 심장부가 아니었다. 사실 로렌느의 대부분의 역사는 하나의 독립된 공국(公國)으로 구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를 구성하는 독일국가였다.

부분적으로 로렌느의 십자가는 시온수도회가 프랑스 저항운동시 활약한 중요한 역할 때문에 채택되었으리라는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플랑타르처럼 시온수도회의 멤버와 드골장군과의 연합 때문에 채택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30년전에 로렌느의 십자가는 샤롤프 페귀의 시에 선동적으로 표현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1914년 마르네 전투에서 죽기 얼마 전에 페귀--<영감의 언덕>의 저자인 모리스 바레의 절친한 친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Les armes de Je'sus s'est la croix de Lorraine,
Et le sang dans L'artere et le sang dans la veine,
Et la source de grace et la claire fontaine;
Les armes de Satan c'est la croix de lorraine,
Et c'est la meme artere et c'est la meme veine
Et c'est le memp sang et la trouble fontaine ……


예수의 두 팔은 로렌느의 십자가,
두 팔은 동맥의 피와 정맥의 피
두 팔은 은혜의 원천, 맑은 샘
사탄의 두 팔은 로렌느의 십자가
그리고 동맥의 피와 정맥의 피
그리고 같은 피, 고난의 샘 ……


17세기 후반 당시의 역사가요, 고물연구가인 신부 빙상은 로렌느의 시온에 관한 역사를 집필했다.

그는 또한 <성 시지스베르의 진정한 역사>라는 책도 집필하였는데 이 책은 또한 다고베르2세의 생애에 관한 설명도 수록되어 있다. 이 저술의 표지에는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다. 「그는 너희 가운데 있으나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

조사를 시작하기 바로 전에는 우리 자신도 찬크리스삻도 반크리스챤도 알지 못했다. 비교종교에 대한 우리들의 배경과 연극덕분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세계 주요 신앙에 내재해 있는 타당성의 핵심에는 호의적이었으나 그들 신앙의 상부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교의, 신학, 장국에 대해서는 무심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모든 신조에 관해서는 일치할 수 있었던 반면 그들중에 진리가 독점된 어떤 것에 대해서는 일치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사가 예수에게 이르렀을 때 우리는 우리가 희망했던 균형있고 전망있는 감각으로 그를 조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쪽에도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지 않았으며 어떤 일을 증명하거나 반증해서 얻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객관'이 가능한 한에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예수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미 마치 역사가 알렉산더나 카이사르에게 접근하는데 기대되는 태도와 같은 것이리라. 그리하여 우리에게 내려진 결론은 비록 확실히 놀라운 것이기는 하지만 산산조각은 나지 않았다. 그러한 결론은 우리의 개인적 확신에 대한 재평가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또한 우리의 개인적 가치체계를 뒤흔들어 놓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수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가 되시고 구속주가 되시는 세상의 수백만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역사적 예수, 우리의 조사로 나타난 제왕이신 예수, 그 예수는 그들의 신앙을 어느 정도나 위협하는가?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성전(聖典)에 대해 그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이해에 대해서 어는 정도 침해하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우리의 연구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즉 현대 기독교의 기본적인 어떤 교의들에 불리한 결론-- 이교적인 결론 심지어 불경스럽기까지 한 결론이다.

어떤 기존 교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러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진정으로 숭앙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아 그를 모독하거나 심지어 비하시킨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예수의 신성에 찬성할 수 없는 한 우리의 결론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못하게 금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극히 솔직히 말해서 예수가 그의 신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한 결혼하여 자녀를 갖지 못했을 이유가 없다.

그의 신성이 성적 순결에 의존해야만 할 이유는 없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할지라도 그가 결혼하여 가족을 갖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예수가 성육화(聖育化)하였다는 가설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에 동정을 가지고 그 창조물 속으로 자신을 육화(肉化)하여 인간의 형상을 취했다.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은 직접으로 그 자신을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상황을 자세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직접으로 인간존재의 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그는 가장 심원한 의미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의 상태가 동반하는 외로움, 번민, 무력함, 비극적 유한성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된 덕분으로 하나님은 구약성서가 허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인간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거룩한 초연함과 원격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은 직접 인간의 상태를 구속하신 것이며 인간의 상태에 참여함으로써, 그 상태로부터 고난을 받아 그 결과 희생됨으로 인간의 상태를 정당화하고 의롭게 할 것이다.

예수의 상징적 의미는 그가 인간 경험의 스펙트럼에 노출된 하나님이라는 것이며 인간 실존이 동반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에 노출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로 육신화한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 되었다고, 인간조건의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국면 중의 두 가지를 알지 못하고 인간 경험의 스펙트럼을 포괄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성욕과 부성(父性)이라는 인간성의 가장 본질적인 두가지 측면을 않고 인간 실존의 전체성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성육화가 예수가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두지 않고 상징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을 참으로 상징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복음서의 예수는 기존 기독교의 예수는 긍정적으로 불완전하며 인간으로의 그의 성육화는 다만 부분적에 자나지 않는 하나님이다. 우리의 연구로 나타난 예수는 우리의 견해대로 기독교가 그를 만들고자 하는 것에 대해 보다 더 명로한 주장을 즐기고 있다. 그리하여 대체로 우리가 예수를 손상시키거나 비하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우리의 연구 결과로 고난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연구로 살아 있는, 그럴 듯한 예수가 나타난다. 이 예수는 그의 생활이 현대인들에게 의미를 주고 이해할 수 있는 예수이다.

우리는 한 사람을 지적하면서 이 사람이 예수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이다 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가계라는 원목(原木)은 두갈래로 갈리고 세분화되어 수세기를 흐르는 과정을 통해 울창한 숲으로 증가되었다. 오늘날 영국과 유럽에는 메르빙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가문이 적어도 12가문--수 많은 방계(傍系)를 가진--은 있다. 이러한 가문 가운데에는 합스부르크--로렌느가--현재는 이름뿐인 로렌느의 공작들과 예루살렘의 왕들--플랑타르크가, 룩셈부르가, 몽페자가, 몽테스키외가 및 그 밖에 여러 가문이 있다. 시온수도회의 기록에 따지면 영국에 있는 생클레어 가문도 스튜어트의 여러 가문과 마찬가지로 이 혈통과 결연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가문들 가운데 데번셔가문은 이 비밀에 세밀히 관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가문 중에 대부분의 가문이 예수의 혈통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한 사람이 미래의 어는 시점에서 새로운 제왕이라고 주장된다면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여튼 여러 가지 일들은 분명하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한 예수의 혈통을 이은 후손들은 우리들 이상으로 더 이상 신적일수 없으며, 더 이상 본질적으로 신비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동조되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더구나 예수의 후손인 개인 또는 개인들의 그룹의 비밀폭로는 가까운 1세기가 2세기 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철머 그렇게 세상을 뒤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 설혹 이러한 혈통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명'을 할 수가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은 단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하고는 질문하는 정도일 것이다.

하나의 결과로 시온수도회의 정교한 계획안에는 만일 그러한 계획들이 어느정도 결정적인 방법으로 정치와 연결되지 않았더라면 거의 의미가 없어 보일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결론에 대해 신학적인 반응이 어떠할지라도 다른 반응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것은 매우 자명하다.

예를 들어 잠재적으로 거대한 충격을 지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계의 사고, 가치, 제도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반응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 과거에는 메르빙 왕조의 후손들의 여러 가문들은 완전히 정치에 몰두해 있었고 그들의 목적 가운데에는 정치적 권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시온수도회의 많은 단장들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정치가 시온수도 혈통 양면에 동일하게 중시되어서는 안된다고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실로 모든 증거가 시온수도회가 교회와 국가라고 불리웠던 것 사이의 원칙, 즉 현세와 정신, 성과 속, 정치와 종교의 일치라는 견지에서 생각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많은 기록을 통하여 시온수도회는 메르빙 왕가의 전통에 일치하는 새로운 왕은 「다스리기는 하나 지배하지는 않으리라」고 주장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의식(儀式)과 상징의 능력으로 주로 역할을 다하는 제왕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통치하는 일은 그외의 다른 사람, 생각되는 바로는 시온수도회에 의해서 처리될 것이다.

19세기 시온수도회는 프리메이슨단과 발도르의 제롬수도회를 통해 일하며 합스부르크가와 근본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동시에 지배되는 일종의 신정하의 유럽합중국인 부활된 세로운 신성로마젝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험은 제1차 세계대전과 유럽의 지배왕국들의 몰락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시온수도회의 현재 목표가 발도르의 성 제롬수도회 목표와 -- 적어도 그 목표의 전체적인 개괄이 근본적으로 유사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부당한 일은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들 목표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단지 추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목표는 신정하의 유럽합중국-- 현대 제국으로 회합되어 예수의 후손 왕조에 의해 지배되는 초(超) 또 범(汎) 유럽 합중국이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이 왕조는 정치적 또는 세속적 권력의 옥좌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성 베드로의 옥좌까지도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최고의 권력하에 왕국의 연합과 교훈으로 연결된 왕국 또는 공국들의 상호, 밀접한 조직망, 즉 흔히 말로만 연합된 그런 연합이 아닌 일종의 20세기의 '봉건체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통치의 실제방법은 실행권 또는 입법권이 주어진 소위 유럽의회의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유럽은 국제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새로이 통합된 정치적 힘을 형성하였을 것인데 이러한 힘의 실상(實像)은 근본적으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나 미합중국의 그것에 비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힘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이거나 이념적인 토대 위에 구축되기보다 깊이 뿌리를 내린 정신적·정서적 토대 위에 구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힘은 인간의 머리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까지 호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힘은 서유럽의 공동적 정신을 두드려 근본적인 종교적 충동을 일깨움으로 그 힘을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동키호테식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공동적 정신과 그것을 이용하여 얻어지게 되는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했었다. 몇 년 전에는 한 사람의 종교적 열광자-- 자신의 군대도 없는, 배후에 정당도 없는, 카르스마와 사람에 대한 종교적 굶주림 외에 자신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가 이란에서 현대의 훌룡하게 체계를 갖춘 신정권(Shah's regime)의 조직을 한 손으로 뒤흔들 수 있었던 사실은 생각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분명히 아야톨과 호메이니가 해치운 일이다.

물론 우리는 경고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암시적이든 또는 명시적이든 시온수도회를 아야톨가에 비유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이란의 선동자들 생각하듯 시온을 불길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란의 선동자는 인간의 종교적 충동에 깊이 뿌리박은 성품, 원동력, 가능성을 훌륭하게 입증하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충동이 정치적 목적에로 돌려질 수 있는 방법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들은 권위의 남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목적들은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처칠이나 드골의 목적처럼 위대한 것일 수 있다. 종교적 충동은 무수한 방향 중의 그 어떤 방향으로도 돌려질 수 있다. 그것은 무한한 잠재력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이성에만 기존을 두어 간혹 그것에 사로잡히는 오늘날의 정부에 의해서 너무나도 자주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종교적 충동은 심오한 심리학적·정서적 필요를 반영한다. 그리고 심리학적·정서적 필요들은 그 하나하나가 빵이나 집, 물질적 안정에 대한 필요처럼 실제적이다.

우리는 시온수도회가 '발광한 회색'조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조직이 재정적으로 풍부하며 정치, 경제, 보도기관 예술 등의 분야에서 책임질 수 있고 영향력있는 위치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적어도 그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1956년 이후 그 회원의 수가 4배 이상이나 증가되어 마치 무슨 일을 위해 동원을 하거나 준비하는 것 같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플랑타르는 시온수도회가 어느 정도 분명한 시간표에 맞춰 일하고 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또한 우리는 1956년 이후 시온수도회가 신중하게, 관심을 끌면서, 조금씩조금씩 유혹하는 암시들에 대처하기에 충분히 적당한 양의 이용할 만한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러한 암시들이 이 책을 쓰게 하였다.

만일 시온수도회가 '그 카드들을 보여 주고자'한다면 그때는 일을 하기에 때가 무르익었을 때이다. 20세기 초 매우 많은 것을 약속한 듯한 정치적 제도와 이데올로기들은 모두 실제적으로 어느 정도 파탄을 나타내 보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자본주의, 서구식 민주주의 등 이 모든 것들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들의 약속을 배반했고, 그들의 추종자들을 빙퉁그러지게 하였고 그들이 제시한 꿈을 실현시키는데 실패하였다.

그들의 무기력한 욕구, 가망성의 결핍, 권력의 남용 때문에 정치가들은 더 이상 신뢰를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오직 불신만 조장하였다. 오늘날 서구에서의 혼합주의, 불만, 환멸이 증가해 가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의미, 정서적 성취, 우리의 생에 대한 영적 중요성, 참으로 믿어야 할 것에 대한 열정적인 탐구도 있다. 성(聖)의 새로워진 의미에 대한 열망도 있어 이러한 열망은 결과적으로 철저한 종교적 부흥운동에 이르렀는데 그러한 실례들은 종파와 제의의 증식에 의해서 예증이 되었다. 또한 미국에 있어서 근본주의의 팽창된 물결에 의해서 예증이 되었다. 또한 참된 '지도자'에 대한 열망도 증가되고 있다. 그런데 참된 지도자는 지휘자가 아니고, 일종의 현명하고 자비로운 영적 인물로 인류가 안전하게 신뢰를 할 수 있는 '제왕'를 의미하고 있다.

우리들의 문명은 물질로 충만해 있으나 그 과정 속에서 보다 심원한 굶주림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어느 곳에서나 정서적·심리학적·영적 필요들의 성취를 기대하기 시작하고 있고 찾기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분명히 시온수도회의 목적들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시온수도회의 기존의 사회적 제도와 정치적 제도에 양자택일을 제안할 수 있는 위치에다 두고 있다. 그러한 양자택일은 유토피아 또는 새 예루살렘을 건설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기존의 제도가 인정하지조차도 않는 필요들을 충족시키기까지 그것은 무한히 매력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중심 전번제(全燔祭)라고 설명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많은 열성스런 기독교인들이 있다. 예수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들의 출현은 어떻게 설명되어질까? 감수성이 예민한 독자들에게 그 출현이 일종의 '제2의 재림'이 될 것이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성배와 성혈 [ 15. 성배왕조 ]
나그 하마디 문서에만 근거해서 판단해 보더라도 예수로부터 직접 이어진 혈통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상당히 타탕성이 있다. 소위 '영지주의 복음서들'중 어떤 것은 신약성서의 책들 만큼이나 커다랗게 그 진실성이 주장되었다. 결국 그것들이 명시적으로 건암시적으로 건 증거해 주고 있는 것들은, 즉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 베드로와 막달라 사이의 계속적인 불화, 막달라와 예수 사이의 결혼, '인자의 아들'의 출생 등은 아무리 그것들이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라 하더라도 다루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다루지 않는 것이지 신학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 시대의 역사는 오늘날의 역사만큼이나 복합적이었고 다면적이었고 실용주의적이었다.
나그 하마디 문서에 나타나는 베드로와 막달라 사이의 불화는 우리가 가정했었던 충돌, 즉 '메시아 지지자들'이었다. 학문,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문서작용 등에 관하여 그들이 점점 더 독점권을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족이 존재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증거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그 가족과 메르빙 왕조 사이의 연관성을 확증해 주는 증거는 더욱이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메시지 지지자들'이 사태를 완전히 장악했던 것은 아니다. 첫 두 세기의 기독교 역사가 무절제한 이단들에 의해 괴로움을 당했다면 그후의 여러 세기들은 휠씬 더 그랬다. 정통주의가 신학적으로는 이레나이우스 아래서 정치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 아래서 자신의 위치를 굳히기는 했지만 이단들은 계속해서 전례없는 규모로 급격히 증가했다.

신학적인 세부적 내용에 있어서는 아무리 다르다 할지라도 주요 이단들의 대부분의 어떤 결정적인 요인들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영지주의적이거나 영지주의적 영향을 받는 것으로 로마의 계급적 구조를 논발했으며 맹목신앙에 대한 개인적 계몽의 우위성을 찬양했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또한 이러저러한 의미에서 이원론적이었으며 선과 악을 세속적인 윤리적 문제로서 간주했다. 마지막으로 그들 중의 대부분은 예수를 유한하며, 하나의 자연적 임신과정에 의해 태어난 존재로 생각하는 점에서 일치하였다.

즉 그들은 예수를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었거나 아니면 결코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신적으로 영감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신 아닌 예언자로 간주하였다. 예수의 그 인간성을 강조할 때 이단들 중 많은 것들은 사도 바울의 존엄한 권위에 의존했다. 바울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롬1:3)에 관해 말했다. 아마 그 이단들 중 가장 유명하며 가장 급진적인 것은 마니교였을 것이다. 마니교는 본래 영지주의적 기독교를 조로아스터적 전통 및 미드라스적 전통과 혼합한 것이다. 마니교는 마니라는 어떤 개인에 의해 창도되었다. 그런데 마니는 A.D. 214년 바그다그 근처에서 페르시아 왕가의 한집에서 태어났다.

마니가 젊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금욕과 독신생활을 강조하며 침례를 행하고 흰옷을 입는 어떤 종파해 소개해 주었다. 아마 그 종파는 영지주의적 종파였을 것이다. A.D. 240년경 마니는 자기 자신의 독특한 가르침들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처럼 그의 영적 치유와 귀신축출 때문에 유명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새로운 예수'라고 선포하였으며 심지어는 그가 처녀탄생을 하였다고 믿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처녀 탄생은 그 당신 신들의 선결조건이었다.

그는 또한 '구세주', '사도', '계몽자', '주', '죽은 자를 살리는 자',' 필로트', 헬스만' 등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마지막 두 개의 칭호들은 특히 사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시온 수도회의 단장이 가지는 공식 명칭인 '노토니에'와 대치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대의 아랍 역사가들에 따르면 마니는 많은 책들을 썼는데 그 책들에서 그는 예수가 단지 모호하고 간접적으로만 언급했던 비밀들을 자기가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그는 짜라투스투라, 불타 그리고 예수를 그의 선지자들로 간주했으며 자기도 그들처럼 동일한 원천으로부터 동일한 계몽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그의 가르침들은 장엄하고 정교한 우주론적 구조와 결합된 하나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빛과 어두움의 우주적인 투쟁이 모든 것에 충만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두 적대적인 원리들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 영혼이다. 후대의 카타리인들처럼 마니도 재생육신 교리를 지지했다. 카타리인들처럼 그도 역시 주도 계급, 즉 '계몽되어 선택된 계급'를 강조했다.

그는 예수를 '과부의 아들'이라고 언급했는데 이 구절은 그후 프리메이슨단에 의해 사용된 구절이다. 동시에 그는 예수의 유한적 존재라고 선언했으며 그가 설령 신이었다 하더라도 계몽에 의한 상징적 또는 은유적 의미에[서의 신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마니도 바실리드처럼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 의해 대치되었다고 주장했다.

A.D. 276년에 마니는 왕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으며 살가죽이 벗겨져 참수되었다. 목이 잘린 그의 몸은 공중 앞에 제시되었는데 아무도 이것은 부활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들은 그의 순교에 의해 촉진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후대의 지지자들 가운데는―적어도 한동안은 ―지지한 아우구스티누스도 있었다.

마니교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기독교 세계전역에 퍼졌다. 그를 없애려는 무수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살아남아 후대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에 까지도 계속되어 왔다.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에서는 마니교의 학교들이 특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십자군 원정 무렵에는 이들 학교들이 특히 이탈리아와 불가리아에서 온 다른 마니교 종파들과 연결되었다. 카타리인들이 불가리아 보고밀(Bogomils)의 일파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타당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가장 최근의 연구에 의해 제시되는 바에 따르면 카다리인들은 프랑스에 오랫동안 확립되어 있는 마니교 학교들로부터 생겨났다고 한다. 어쨌든 알비겐시아의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은 본래 마니교에 대하여 싸운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로마의 계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니교적'이란 단어는 계속 살아남아 우리 언어와 어휘와 공인된 부분이 되었다.

물론 마니교 이외에도 많은 다른 이단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통적인 기院교 교리의 1천년 역사에 가장 위험스런 위협을 가했던 것은 아리우스 이단이었다. 아리우스는 318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으며 335년에 죽었다. 정통주의와 그의 논쟁은 상당이 단순하였으며 단 하나의 전제에 의존하였다. 즉 예수의 전적으로 유한적 존재였으며 단 하나의 전제에 의존하였다. 즉 예수는 전적으로 유한적 존재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도 신이 아니었으며 하나의 영감된 교사 이상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단 하나의 전능하고 절대적인 하나님, 즉 육신으로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피조물에 의해 굴욕과 죽음을 당하지 않은 하나님을 설정함으로써 아리우스는 실제로 기독교를 본질적인 유대교적 가르침들, 예를들면 에비온파의 가르침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동시에 아리우스주의의 절대적인 하나님은 서방에서 커다란 매력을 느끼게 하였다. 기독교가 점차로 세속된 권력을 획득해감에 따라 그러한 하나님은 점점 매력적이 되어갔다. 왕들과 군주들은 아마 저항도 없이 순교하며 세상과의 접촉을 꺼리는 연약하고 수동적인 신에 대해서보다는 그러한 하나님에게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아리우스주의가 335년에 니케아공의회에 의해 정죄되긴 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언제난 그것에 대해 동정적이었으며 그의 생애 말년에는 더 그렇게 되었다. 콘스탄디우스는 즉시 아리우스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후원하에 여러 공의회들이 소집되어 정통주의 교회 지도자들을 추방하였다.

360년경 아리우스주의는 로마 기독교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리고 비록 아리우스주의는 381년에 재차 공식적으로 정죄되긴 했지만 여전히 번성하였으며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5세기에 메르빙왕조의 왕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실제로 기독교계의 모든 주교좌는 아리우스파의 주교좌였던가 아니면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아리우스주의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 가운데는 4세기에 이교로부터 개종되어졌던 고트인들이 있었다. 쉬바비아인, 롬바르트인, 알란인, 반달인, 부르군디인 그리고 오스트로고트인은 모두 아리우스파였다. 비지고트인들도 그랬다.

그런데 그들은 480년에 로마를 습격했을 때 기독교 교회는 습격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만일 클로비스 이전의 초기 메르빙왕조 왕들이 조금이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그들의 바로 이웃에 있는 비지고트와 부르군디의 아리우스파 기독교였을 것이다.

비리고트의 후원하에 아리우스주의는 스페인,페레네 그리고 오늘날 남부 프랑스의 지배적인 기독교 형태가 되었다. 만일 예수의 가족이 실제로 고올에 피난하였다면 5세기까지 그들을 지배한 최고주권자들은 아리우스파의 비지고트인들이었을 것이다. 아리우스파의 정권하에서 그 가족은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가족은 대단히 존중시되었을 것이며 프랑크인들과 결혼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비지고트의 후원과 보호를 받아 그 가족은 로마로부터의 모든 위협을 피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비지고트의 귀족과 왕족 가운데 베라(Bara)와 같은 셈족 이름들이 나타나는 것은 특별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고베르2세는 한 비지고트 공주―그의 아버지는 베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와 결혼했다. 베라라는 이름은 다고베르2세와 시지스베르 4세로부터 이어져 온 비지고트 메르빙 가(家)의 계보에 거듭하여 나타난다.

로마교회는 다고베르의 아들이 아리우스주의로 개종했었다고 선언했다 한다. 그리고 그가 아리우스주의로 그렇게 개종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교회와 클리비스 사이의 조약에도 불구하고 메르빙 왕조는 언제나 아리우스주의에 동조했었다. 클리비스의 손자들 중 하나인 킬페릭은 그의 아리우스적 경향을 감추지 않았다.

만일 아리우스주의가 유대교를 적대시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7세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슬람교도 적대시하지 않았다. 예수에 관한 아리우스적 견해는 코란의 견해와 상당히 일치하였다. 코란에서 보면 예수는 '하나님의 사자'와 「메시아를 포함하여 수많은 인상적인 칭호들로 35회 정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 보아도 그는 유한한 예언자, 모하멧의 선구자, 그리고 단일한 절대적 하나님의 대변자 이상의 어떤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고 있다.」그리고 바실리드와 마니처럼 코란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으며 그를 십자가에 달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그를 죽였다고 착각했을 뿐이다.」코란 자체는 이 애매한 진술을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주석자들은 그것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들 대부분에 따르면 한 명의 대리인이 있었는데 그는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시렌네 시몬이었다고 추정된다.

어떤 이슬람교 작가들은 예수가 벽감 속에 숨어 대리인이 십자가 사건을 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나그 하마디 문서에서 이미 인용된 단편들과도 일치한다.


유대교와 메르빙 왕조

가장 강렬한 박해에 직면하여서조차도 이단들이 특히 아리우스주의가 그렇게 강렬하게 예수의 유한성과 인간성을 강조한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중 누군가가 그처럼 끈질기게 고수한 전제에 관해 필연적으로 어떤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그 하마디 문서들 제외하면 그들이 어떤 혈통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어떤 증거는 휠씬 더 적다. 물론 나그 하마디 문서와 유사한 문서들, 즉 족보들과 공문서들이 존재했었을 가능성은 있다. 지독하게 악랄한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러한 증거를 가지기 두려워했을 것이며 그런 증거를 영원히 숨기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로마가 성공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단들은 예수의 가족과 약 4세기 후에 세계사에 등장한 메르빙 왕조 사이의 관련성에 관해서는 아무런 결정적인 확증도 제시해주지 않았다. 그러한 혹증을 위해서는 다른것, 즉 메로밍 왕조의 왕들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야 한다. 언뜻 볼 때 그 증거는 자체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미 메로베의 전설적인 출생, 즉 두 아버지의 아들이며, 그 두 아버지 중 하나는 바다를 건너 온 신비한 수중생물이라는 전설을 생각해 보았으며, 이 기묘한 우화는 어떤 왕조적 동맹 또는 결혼을 반영하며, 동시에 감추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고기 상징은 시사적이긴 하였지만 거의 결정적이지는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클로비스와 로마교회 사이의 협정은 우리의 각본에 있어서 대단히 의미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협정 자체는 구체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메로빙 왕조의 혈통에는 신성하고 기적적이며 신적인 본성이 인정되긴 하였지만 이 피가 실제로 예수의 피였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명백하게 진술되지 않았다. 어떤 결정적인 증거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연구를 더 진행해야 한다. 우리는 실재적인 증거를 가지는 단편들을 가려내어 이 증거들로 하나의 일관성있는 형태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먼저 메로빙 왕조에는 어떤 독특한 유대교적 영향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확실히 메로빙 왕조의 왕들은 반셈족이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로마 교회의 계속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토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대하여 관용적이었을 뿐만아니라 노골적으로 동조하기까지 했다. 혼합 결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많은 유대인들 특히 남부에 있는 유대인들은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인 노예들과 하은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메로빙 왕조의 군주들을 위한 행정관들과 고위 장관들이었다. 대체로 유대교에 대한 메로빙 왕조의 태도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의 서구역사에 있어서 그 유례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메로빙 왕조의 왕들 자신은 그들의 기적적인 힘이 주로 그들의 머리털에서 주어진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머리털을 자르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삼손이 그 한 회원이었던 구약성서의 나실인들의 입장과 같았다. 예수도 나실인 이었음을 암시하는 많은 증거가 있다. 초대 기독교 작가들과 현대의 학자들은 모두 그의 형제 야고보는 논란의 여지없이 나실인이었다는데 동의하였다.

메로빙 왕조의 왕가(家) 및 그 왕조와 관련된 왕실에는 대단히 많은 수의 특수하게 유대교적인 이름들이 있었다. 이리하여 577년에는 클로타이르 2세의 한 형제가 삼손으로 이름지어졌다. 그후의 르 레비트(le Levite) 는 브잘롱(Besalon)의 백작이자 제로나(Gerona)의 주교였다.

루시용(Roussillon)의 한 백작은 솔로몬이라는 이름이었으며 또다른 솔로몬은 브리타니(Brittany)의 왕이 되었다. 엘리자샤르(Elisachar)라는 수도원장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엘르아잘'과 '나사로'의 별명이다. 그리고 메로베(Merovee)라는 이름은 중동지방에서 유래된 명칭인 것처럼 보인다. 유대교적 이름들은 메르빙 왕조와 비지고트 사이의 왕조적 결혼을 통하여 점점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러한 이름들은 비지고트의 귀족과 왕족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소위 많은 '비지고트' 가족들이 사실은 유대교적 가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역사가들이 '고트(Goth)'와 '유대(Jew)'라는 말을 빈번하게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곤 했다는 사실에 의해 더 확증된다.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국경지역들에는 즉 메로빙 왕조와 카롤링 왕조 시대에 셉티마니아로 알려졌던 지역에는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지역은 '고티' 또는 '고티아'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따라서 그 지역의 유대인 거주자들은 'Goths' 라고 불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고의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 오류이다. 이러한 오류 때문에 유대인들은 특수한 성명에 의하지 않고는 구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고베르의 장인은 베라라는 셈족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베라의 누이는 레위라는 가족의 한 사람과 결혼했다.

물론 이름들과 머리카락에 대한 신비주의적 태도만 가지고는 메로빙 왕조와 유대교 사이의 관련을 확정 지을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더 설득력있는 또 다른 증거 단편이 있었다. 메로빙 왕조는 튜튼적 종족법을 고수한 튜튼 족인 프랑크인들의 왕조였다.

5세기 말에 이 법은 로마적인 체계로 성문화되어 샐릭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샐릭법은 궁극적으로 튜튼적 종족법이었으며 로마의 기독교가 서구에 등장하기 이전에 작성되었다. 그후 몇세기 동안 그 법은 로마적인 체계로 성문화되어 샐릭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몇세기 동안 그법은 계속해 서 로마에 의해 전파된 교회법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중세기 전반에 걸쳐 그법은 신성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세속법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무렵에 독일의 농부들과 기사들은 교회에 대한 그들의 불평에 있어서 전통적인 샐릭법을 무시한 루터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샐릭법의 한 전체 부분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제목 45, 「De Mirrantibus」로 계속해서 학자들과 주석가들을 혼란시켜 왔으며 끊임없는 법적 논쟁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여러 규정들 및 유랑인들이 정착하여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상황에 관한 조항들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단원이다. 그것에 관해 흥미있는 것은 그것이 원래는 튜튼적 법이 아니라는 것과 작가들은 그것이 샐릭법에 포함되어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상한 가정을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 비로소 샐릭법의 이 단원이 유대교적 법에서 직접 기원되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것은 탈무드에 있는 한 단원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따라서 샐릭법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법으로부터 직접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것이 샐릭법을 법전화하도록 후원한 르빙 왕조의 왕들이 순히 유대교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유대교적 본문들을 접하기도 했었음을 암시해 주고있다.


셉마티아 공국

그러한 단편들은 자극적이긴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가정을 위해서는 빈약하게 지지해 주었을 뿐이다. 즉 예수로부터 이어진 혈통이 프랑스 남부에 존재했었으며 이 혈통은 메르빙 왕조의 왕들과 결혼했다는 것과 메르빙 왕조는 결국 부분적으로는 유대교적이 되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메르빙 왕조 세대는 우리의 가정을 위해 어떤 결정적인 증거도 제시해 주지 못했지만 그 바로 다음 왕조의 시대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해 주었다. 이러한 '소급 증거'에 의하여 우리의 가정은 갑자기 타당성이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메르빙 왕조의 혈통이 가롤링 왕조의 왕들에 의해 폐위된 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 바 있다. 그, 탐구 과정에서 우리는 150년 동안 프랑스의 남부에 존재했던 자치공국을 만났었다. 그 공국의 가장 유명한 통치자는 귀염 드 겔론느였다.

귀염 드는 그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영웅들 중 하나였다. 그는 또한 볼프람 폰 에센바하에 의 씌어진 빌레할룸의 주인공이기도 하였으며 성배가족과 관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놀랍고 흥미있는 증거를 발견한 것은 귀염과 그의 배경에서 였다.

전성기의 귀염 드 겔론느의 영 토에는 스페인 북동부, 피레네, 그리고 셉티마니아로 알려져 있는 프랑스 남부지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역에는 오랫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6세기와 7세기에 이들은 아리우스적 기독교를 지지하는 비지고트 군주들과 대단히 진심어린 관계를 맺고있었다. 사실 이러한 관계는 너무나 밀접하여 혼합 결혼이 통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고트'라는 단어와 '유대'라는 말이 종종 상호 대치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711년경에는 셉티마니아와 스페인 북동부에 있는 유대인들의 상황이 크게 악화되었다. 그 무렵 다고베르 2세가 살해되었으며 그의 가문은 렌느 르 샤토를 포함하여 그 주변 지역인 라제로 은신하였다. 그리고 메로빙 왕조와 같은 계열이 아직도 명목상으로는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유일한 실제적인 권력은 카롤링 왕조의 침략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의 재가와 지지를 얻어 그들 자신의 왕조를 수집하는데 착수했다. 그 무렵에는 또한 비지고트인들도 로마기독교로 전향했었으며 그들 영토 내에 있는 유대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었다. 따라서 비지고트 스페인이 711년에 무어인들에 의해 침략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 침략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슬람교의 통치하에서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번성하였다.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너그러웠으며 때로는 그들에게 코르도바, 그라나다, 그리고 톨레도와 같은 피정복 도시들의 행정장관직을 부여하기도 했다. 유대의상업과 무역은 조장되었으며 새로운 번영을 누렸다.

유대교적 사상은 이슬람교의 사상과병존하였으며 그 둘은 서로를 보완해 주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무어인 수도였던 코르도바를 포함한 마을들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8세기 초에 무어인들은 피레네를 가로질러 셉티마니아로 갔다. 그리고 720년부터 759년까지 다고베르의 손자와 증손자는 계속 라제에 비밀리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셉티마니아는 이슬람교의 수중에 있었다. 셉티마니아는 자치적인 무어인의 공국이 되었다. 그 공국은 나르본을 수도로 가지고 있었으며 코르도바의 왕족에 대해서는 단지 명목상으로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르본으로부터 무어인들은 계속 북진하여 리용과 같은 프랑스 영토 깊숙한 곳에있는 도시들도 정복했다.

무어인들의 진군은 궁정장관이자 샤를르마뉴의 조부인 샤를르마르털에 의해저지되었다. 샤를르는 무어인들을 나르본으로 몰아 내었으며 그다음에는 그곳마저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무어인들과 유대인들에 의해 공동으로 방어된 나르본은 난공불락 이었다. 그리하여 샤를르는 주변에있는 지방을 파괴함으로써 그의 욕구불만을 해소했다.

752년경 샤를르의 아들 페팽은 지방 귀족들과 동맹을 맺어 셉티마니아를 완전히 자기의 수중에넣었다. 그러나 나르본은 7년동안에 걸친 페팽 군대의 포위공격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저항했다. 페팽, 그의 위치를 굳히는 것이 가장 긴급한 마당에 있어서 그 도시는 페팽측에서 볼 때 하나의 가시였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메르빙 왕조의 왕좌를 찬탈한 책임에 대단히 민감해 있었다. 합법적인 자격을 확립하기 위해 그는 메르빙 왕조의 남은 혈족들과 등맹을 가장했다. 그의 대관식을 준비할 때 성서적인 기름붓는 의식을 넣어 특색있게 하였다. 그때 교회는 왕을 즉위시키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기름붓는 것은 그 프랑크 군주국이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유대교적 군주국의 복사판이었음을--실제로 그 군주국의 계승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말이다.--암시하고자 하는 고의적인 시도였다.

이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극히 흥미있다. 왜 찬탈자 페팽이 성서적 모형에 의하여 자신을 합법화하고자 했는가? 그가 폐위시켰던 왕조, 즉 메로빙 왕조는 정확하게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합법화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페팽은 두 개의 문제에 직면했다. 즉 나르본의 계속적인 저항과 성서적 전례를 언급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왕권을 합법적으로 확립하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콜럼비아 대학의 아더 즈커맨, (Arthur Zuckerman) 교수가 설명했듯이 그는 759년에 나르본의 유대인들과 협정함으로써 그 두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결심했다.

이 협정에 따르면 페팽은 성서적 계승에 대한 그의 요구를 위해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또한 무어인들에 대하여 싸울때 유애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 보답으로 그는 셉티마니아의 유대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하나의 공국과 하나의 왕을 허락했을 것이다.

759년에 나르본에 있는 유대인들은 갑자기 그 도시의 이슬람 수비대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살해했으며 성문을 포위 공격하는 프랑크인들에게 열어주었다. 잠시 후 유대인들은 페팽을 그들의 정규적인 군주로 인정하였으며 합법적인 정서적 계승에 대한 그의 요구를 승인했다.

한편 페팽도 그의 계약을 지켰다. 768년에 셉티마니아에는 하나의 공국이 세워졌는데 그 공국은 명목상으로는 페팽에게 충성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독립된 나라였다. 하나의 통치자가 그 유대인들의 왕으로서 공식적으로 취임했다. 그 이야기에서 보면 그는 애메리(Aymery)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록들에 따르면 그는 프랑크의 귀족으로 인정되자 데오도리쿠스 또는 티에피라는 이름을 취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데오도리쿠스느 귀염 드 겔론느의 아버지였다. 그는 페팽과 바그다드의 칼리프에 의해 '다윗 왕가의 씨'로서 인정되었다.

우리가 이미 조사해 보았듯이 현대의 학자들은 데오도리쿠스의 출신과 배경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는 메르빙 왕조의 후손이었다. 즈커맨에 따르면 바그다드 출신이었다고 한다. 즉 바벨론 포로기 이후 바벨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후손이었다. 한다. 그러나 바그다드 출신의 그 왕은 데오도리쿠스르르 축성하기 위해 바그다드에서 왔는데 그후의 기록들이 그 두 사람을 혼동했을 수도 있다. 즈커맨 교수는 '서방의 왕들'은 동방의 왕들보다 더 '순수한 혈통'이었다는 묘한 주장을 하고 있다.

'서방의 왕들'은 메르빙 왕조의 왕들이 아니라면 누구였겠는가? 왜 메르빙 왕조의 한 개인이 유대인의 왕으로서, 즉 유대인 공국의 통치자요 '다윗 왕가의 씨'로서 인정되었는가? 메르빙 왕조의 왕들이 실제로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유대인이었음이 분명하다.

데오도리쿠서는 샤를르마뉴의 숙모이자 페팽의 누이인 알다(Alda)와 급히 결혼함으로써 페팽의 위치는 물론이고 자기의 위치도 더 확고히 했다. 그후 셉티마니아의 그 유대인 왕국은 번영을 누렸다. 그 왕국에는 카롤링 왕조의 군주들로부터 자유 보유권으로 보유된 부동산들이 증여되었다. 그 왕국은 또한 교황 스테파누스 3세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용적의 교회 부지도 주어졌다. 셉티마니아의 유대인들의 왕인 데오도리쿠스의 아들은 귀염 드 겔론느였는데 그는 바로셀로나의 백작, 툴루즈의 백작, 오베르뉴의 백작, 그리고 라제의 백작이란 칭호를 가지고있었다. 그의 부친처럼 귀염도 메로빙왕조의 한 사람이었을 뿐만아니라 왕족의 피를 받은 유대인이기도 했다. 그 왕족 혈통은 카롤링 왕가, 갈리프, 그리고 교황에 의하여 다윗 가라고 인정되었다.

그후에 그것을 은폐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학문적 탐군는 귀염의 유대교가 논쟁의 여지가 없었음을 입증했다. 그가 오랑쥬의 제후 귀염으로서 나타나는 이야기들에서 조차도 그는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모두 능통하게 구사했다. 그의 방패 도안은 동방 왕들의 도안과 동일하였다. 즉 유다의 사자 다윗 가와 그후의 예수가 속해 있던 지파가 그것이다. 그는 매부리 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 중에조차도 그는 안실일과 장막절을 지키느라 애쓰고 있다. 즈커맨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포위와 함락을 원초적으로 기록한 그 역사가는 사건들을 유대교의 달력에 따라 기록하였다 ……. 나르본 툴루즈의 공작이자 그 원정군의 지휘관이었던 윌리암은 유대교의 안식일들과 성일들을 엄격히 지켰다. 이런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는 루이 왕의 완전한 협력을 얻게 되었다.
귀염 드 겔론느는 소위 ‘샤를르마뉴의 동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즉 그는 일반적 정식과 전승에 있어서 롤랑과 올리비에와 같은 그러한 전설적인 인물들과 동등한 권위있는 역사적 영웅이었다. 샤를르마뉴의 아들 루이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운 사람은귀염이었다. 루이는 「윌리암, …… 나의 혈통은 당신의 혈통과 같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계열이 전혀 모호해 보이는 사람에게 주어진 언급임을 볼 때 대단히 이상한 언급이다. 동시에 귀염은 전사 이상의 인물이었다. 792년 직전에 그는 겔론느에 하나의 학술원을 창설하였으며 학자들을 초청하고 하나의 유명한 도서관을 만들었다. 겔론느는 곧 유대교적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교적' 플레제타니가 배출된 것은 그러한 학술원으로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볼프람에 따르면 성배의 비밀을 프로방스의 가요에 한정시켰던 솔로몬 후손의 히브리 학자였다.

806년에 귀염은 실제 생활에서 물러나고 학교로 은돈하였는데 812년경 그는 죽고 후에 그 학교는 현재의 유명한 생 귀염 르 데세르(Saint Guillelm Ie Desert)라는 수도원으로 개조되었다. 그,러나 귀염이 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겔론느는 유럽에서 막달라 마리아 숭베를 위한 곳으로 최초로 알려진 장소 중의 하나가 되었었는데 막달라 마리아 숭배는 여기서 유대인학교와 함께 매우 의미있는 듯이 융성되었다.

예수는 유대지파며 다윗의 왕가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배--승계승 또는 '왕가의 피'--를 프랑스로 가져갔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8세기에는 프랑스 남부에서 유대임금으로 인정된 유대지파 다윗 왕가의 주권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적인 유대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메르빙 왕조였다. 볼프람 폰 에센바하의 시를 보면 그와 그의 가족은 성배와 관계가 있다.

다윗의 후손

여러 세기 후 셉티마니아의 유대인 왕국의 행적에 대한 기족들을 모두 말살하려는 간절한 시도가 여러번 있었던 것 같다. 고트인과 유대인의 빈번한 혼란은 이 검열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검열이 완전히 성공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휠씬 뒤 1143년 클러니의 존사 피터는 프랑스의 루이 7세에게 연설을 하는 중에 자기들 가운데 왕이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나르본의 유대인들을 비난하였다.

1144년에 캠브리지 수도승 데오발트단 사람은「스페인에 거주하면서 왕가의 후손이 거주하는 곳인 나르본에 모이는 유대인 주요 귀족들과 랍비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1165∼6에는 유명한 여행가요 연대기 저술가인 투들라의 베자민은 나르본에 「현자들, 권력자들 그리고 귀족들이 있는데 이들의 우두머리는 그의 족보에 진술된 것처럼 다윗가문의 한 후손이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12세기경 나르본에 거주하던 다윗의 후손은 누구든지 그외의 다른 곳에 살던 어떤 후손보다도 덜 중요하였다. 족보의 나무들은 두갈래로 나뉘어져 퍼져 나가며, 다시 자게 나뉘어져 실질적인 숲을 형성하였다. 만일 데오도릭과 귀염 드 겔론느의 어떤 자손들이 나르본에 머물렀다면, 그 사이에 4세기에 걸쳐서 더욱 정당한 영역을 획득한 다른 자들이 있었다. 12세기경 이러한 영역들에는 기독교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지역인 로렌느와 예루살렘의 프랑크 왕국이 포함되었다.

9세기에 귀염 드 겔론느의 혈통은 최초의 아퀴텐느의 공작드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또한 브리타니의 공작가와 합쳐졌다. 그리고 10세기에는 '메부리코'란 별명을 지녔으며 다고베르와 귀염 드 겔론느의 직계후손인 위그 드 플랑타르란 사람이 블로뉴의 최초의 백작인 외스타슈의 아버지가 되었다. 외스타슈의 손자는 로렌느의 공작이요 예루살렘의 정복자 고드프라 드 부용이었고, 고드프라에게서부터 왕조와 '왕가의 전통'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시온의 반석'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장점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을 다스리던 자와 동등시되었다. 만일 메르빙왕조가 진시로 예수에게서 흘러 나온 자손이라면 메르빙왕조의 혈통적 왕손 고드프라느 예루살렘 정복시에 자기의 정당한 유산을 다시 얻는 것이다.

고드프라와 그의 뒤를 잇는 고렌느의 가문은 물론 평상시에는 가톨릭교도였다. 당시 기독교화된 세계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그들은 가톨릭교도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원들은 적어도 몇몇 진영들에게서는 알려져 왔던 것 같다.

후대에 16세기에 이르러 귀즈의 공작 앙리 드 로렌느가 샹파뉴지방에 있는 죙빌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영접되었다. 이 군중들 가운데 몇몇 개인들은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라고 찬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이 1966년에 인쇄된 로렌느의 현대사 속에서 상술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저작에는 오늘날 로렌느의 유명무실한 공작이며 예루살렘의 유명무실한 왕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쓴 특별한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성배와 성혈 [ 14.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3 ]
A.D. 64∼74년의 반란이 있은지 약60년 후인 132∼135년에는 두 번째의 중요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소요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공식적으로 추방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로마의 도시가 되었다. 그런 첫 번째 반란이 일어났을 때조차도 성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왜곡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후 200년 동안은 실제로 아무런 기록도 없는 셈이다. 실제로 그 기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소위 '암흑기'의 유럽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밖엣이긴 하지만 그 나라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도 역시 그랬다. 또 에비온이라고 불리우는 유대 구역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유한한 존재인 예수를 예언자로서 존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실질적인 정신은 성지에서 떠났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임 주민의 대다수는 약 700년 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되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전 세계로 즉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고올, 영국, 북아프리카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A.D. 33년에 그 무렵에 일어났던 일에 관해 크게 모순되지 않은 기록들이 문명 세계의 도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콜레멘스, 이레나이우스, 그리고 그들의 동조자들에 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은 '이단'이라고 공식적으로 낙인이 찍히었지만 계속해서 번성하였다. 그들 중에 어떤 것들은 경건한 유대인들 및 에비온파와 같은 집단들--에비온파는 이러저러한 형태로 기독교로 개종된 유대교 개종자들이었다--에 의하여 보존된 모종의 직접 지식에서 유래되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기록들은 전설과 소문에 의존하였으며 이집트적·희랍적·그리고 미드라적 신비주의 전통과 같이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들을 혼합한 것에 의존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독특한 자료들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들은 '메시지 지지자들'에게 즉 위치를 다지고자 하는 정통주의자들에게 많은 불안을 안겨주었다.

초기 '이단들'에 관한 정보는 빈약하다. 그들에 관한 오늘날의 지식은 주로 그들의 적대자들이 행한 공격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그 지식은 자연히 게쉬타포 문서들로부터 밝혀질 수 있는 프랑스 혁명의 모습처럼 하나의 왜곡된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예수는 초기의 '이단자들'에 의해 둘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완전히 신으로 생각하여 인간적인 속성이 거이 없는--설령 있다손 치더라도--존재로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본질에 있어서 불타나 500년 후의 모하멧과 다르지 않은 하나의 유한한 인간적 예언자로 보았다.

초기 이단의 시조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생의 후반부를(A.D. 136∼65) 로마에서 보낸 발렌티누스였다. 그당시 발렌티누스는 대단히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는데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프톨레미우스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의 '비밀 가르침들'의 본체를 터득하고 있다고 주장한 그는 로마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인격적 지식이 어떤 외적인 지위보다도 더 앞선다고 단언했다. 당연히 발렌티누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레나이우스를 진노케 했을 것이다. 또다른 공격 대상은 마르키온이었다. 그는 부유한 선박왕이자 주교로 140년경 로마에 도착하여 4 년 후에 파문되었다. 마르키온은 '율법'과 '사랑'을 철저히 구분했는데 전자를 구약성서에 연관시켰으며 후자을 신약성서와 관련시켰다. 이들 마르키온적 사상들중 어떤 것은 1천년 후<펠레스보>와 같은 어떤 책속에서 나타났다. 마르키온은 성서의 정경 목록을 최초로 작성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정경목록에는 구약성서 전체가 제외되어 있다. 이레나이우스가 그의 정경목록을 작성한 것은 마르키온에 대한 즉각적인 웅수에서 였는데 그 목록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의 기초가 되었다.

세 번째 중요한 이단 창시자로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흥미있는 사람은 A.D. 120과 130년 사이에 글을 쓴 알렉산드리아 학자 바실리데스였다. 바실리데스는 희브리어 성서들과 기독교 복음서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이집트와 헬레니즘적 사상에도 심취되어 있었다.

그는 24개에 달하는 복음서 주석들을 썼다고 추정된다. 이레나이우스에 따르면 그는 가장 가증스런 이단을 전파했다. 바실리데스는 십자가 처형이 사기였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키레네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은 괴이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대단히 끈질기고 강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7세기경 코란도 정확하게 이와 동일한 주장을 하였다. 즉 어떤 대리인이--전하는 바로는 키레네 시몬이라고 알려져 있음--예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은 제 1장에서 논의된 문제의 편지를 쓴 사제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 편지는 대리 십자가 사건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에 대해서 언급했다.

초기 이단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집트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알렉산드리아였다. 그곳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학식있고 코스모폴리탄적 도시였으며 로마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대단히 다양한 신앙, 교훈, 그리고 전승의 집산지였다. 유대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반란 이후 이집트는 유대교의 도망자들과 기독교 도망자들 모두에게 있어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안식처임이 입증되었다. 그 도망자들의 대부분이 알렉산드리아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우리의 가정을 지지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증거는 소위 '영지주의 복음서들' 더 정확하게 말해 '나그 하마디 문서들(Nag Hammadi Scrolls)'에 수록되어 있었다.

1945년 12월 고지 이집트에 있는 나그 하마디란 마을 근처에서 부드럽고 비옥한 땅을 파던 한 이집트의 농부가 붉은 토기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 항아리에는 가죽으로 제본된 13개의 사본들 즉 파피루스 책들 또는 두루마리드이 들어 있었다. 그 발굴물의 증요성을 알지 못한 그 농부와 그 가족이 그 사본들중 일부를 불 지피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드디어 나머지가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중 하나가 이집트에서 밀반출되어 암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융 파운데이션(C.G. Jung Foundation)에 의해 구입된 이 사본의 일부에는 오늘날 잘 알려진 '도마복음'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편 이집트 정부는 나그 하마디 총서의 나머지 부분을 1952년에 국유화하였다. 그러나 1961년에야 비로소 국제적인 학자들의 모임이 소집되어 그 자료 전체를 복사하고 번역했다. 1972년에는 사진판의 제 1권이 출판되었고 1977년에는 두루마리 전체가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나그 하마디 문서는 본질상 영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성서본문 전체를 담고 있다. 그 문서는 4세기 후반이나 5세기 초에 즉 A.D. 400년경에 기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두루마리들은 사본들이다. 딸서 그것들이 베껴진 원본들은 휠씬 더 이전에 기록되었다. 그들 중 예를들면 도마복음, 진리복음, 이집트복음 등과 같은 것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콜레멘스, 이레나이우스, 그리고 오리게네스와 같은 최초의 교부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 두루마리들에 있는 본문들의 대부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약간은 A.D. 15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확정지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들 중 하나는 신약성서의 네 권의 표준 복음서들보다 휠씬 더 오래된 자료를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나그 하마디 총서는 초기 기독교 문헌들의 귀중한 보고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 문헌에 있는 것 중 어떤 것은 복음서들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들 중 어떤 것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정확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그것들은 후대의 로마 정통주의에 의한 검열과 수정을 피하였다. 둘째 그것들은 원래 로마의 독자가 아니라 이집트의 독자들을 위해 작성되었으며 따라서 왜곡되거나 로마화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것들은 목격자의 진술한 자료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 자료들은 성지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구술한 설명들인데 아마도 그 유대인들은 인간 예수의 친지들 또는 동지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복음서들이 보유할 수 없었던 역사적 충실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목격담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그 하마디 문서들이 정통주의와 '메시지 지지자들'에게 해로운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들면 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한 사본 즉 '셋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보면 예수가 바실리데스의 이단설에서와 똑같이 교묘한 대치작전에 의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음의 인용구에서 보면 예수는 일인칭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계획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그들에 의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들은 나를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들의 실수와 무지 때문에 그들에게 죽음이 임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편 사람을 못박아 죽였기 때문이다……쓸개와 신포도주를 마신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곧 그들의 아버지였다. 어깨에 십자가를 맨 사람은 다른 사람 곧 시몬이었다. 가시관을 쓴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들의 무지를 비웃고 있었다.
나그 하마디 총서에 있는 어떤 다른 작품들은 베드로와 막달라사이의 지속적인 씁쓸한 불화를 증언해 주고 있다. 그 불화는 '메시지 지지자들' 과 혈통지지자들 사이의 분열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마리아 복음서'에서 보면 베드로는 막달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이여, 우리는 주께서 당신을 다른 여자들보다 더 사랑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주님의 말씀을 말해 주십시오. 당신은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모릅니다.」 후에 베드로는 분개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가 실제로 한 여인과 몰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우리에게는 비밀로 하였는가? 우리는 돌이켜 그녀에게 모든 것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우리보다 그녀를 더 좋아하셨는가?」 그리고 휠씬 후에 제자 중 하나가 베드로에게 대답한다. 「확실히 주께서 그녀를 대단히 잘 알고 계시네. 그가 우리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신 것은 그 때문이지.」

'빌립 복음서'를 보면 이런 불화의 원인들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예를들면 거기에는 신방의 이미지가 거듭해서 강조되어 있다. 빌립 복음서에 따르면 「주님은 모든 것을 신비하게 하셨다. 세례도 성유식(聖油式)도 만찬도 그리고 신방도……」 확실히 그 신방은 언뜻 보기에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빌립 복음서는 보다 명백하다.

「주와 함께 언제나 동행했던 세 사람이 있었다. 곧 모친 마리아와 그녀의 누이와 예수의 동료라고 불리운 막달라가 그들이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동료(companion)'란 말은 '배우자(spouse)'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확실히 그렇게 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빌립복음서의 다음 구절을 보면 더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의 동료는 막달라 마리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녀를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셔서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기도 했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로 인하여 기분이 상했으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들은 그에게 「왜 당신은 우리 모두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십니까?」라고 말했다.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왜 나는 너희를 그녀처럼 사랑하지 않느냐?」라고 하셨다.
빌립 복음서는 그 문제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즉 「육체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 육체를 두려워하면 그것이 너희를 지배할 것이며 육체를 사랑하면 너희를 삼키고 불구로 만들 것이다.」

또 다른 곳을 보면 이러한 것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결혼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왜냐하면 결혼이 없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존재는 남자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남자의 존재는 결혼에 달려 있다.」

빌립 복음서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다. 「인자가 있고 인자의 아들의 아들이 있다. 주님은 인자이고 인자의 아들은 인자를 통하여 생산되는 사람이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성배와 성혈 [ 13.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2 ]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 정통주의가 걸어온 길은 대단히 잘 알려져 있으며 훌룡하게 문서화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길은 '메시지 지지자들'의 최종적인 승리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서구 문명의 지침적이고 주도적인 원리로 수용되기는 했지만 전혀 도전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몰래 도망쳤을 때부터 이미 그 가족의 주장들 및 그 가족의 존재는 강력한 호소를 발휘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 호소력은 로마의 정통주의를 크게 위협했다. 로마의 정통주의는 근본적으로 신약성서의 책들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 신약성서 자체는 4세기에 기원된 초기 기독교 문서들의 한 발췌일 뿐이다. 현재의 신약성서보다 더 먼저 씌어진 대단히 많은 다른 작품들도 있는데. 그중 어떤 것들은 공인된 기록보다 의미있고 때로는 논쟁적인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예를 들면 이단적이라 해서 성서에서 제외된 책들이 있는데 그 책들에는 오늘날 외경이라고 알려진 편집본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외경들에 있는 어떤 책들은 후대의 것으로 6세기에 기원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책들은 이미 2세기에도 널리 보급되어 있던 책들이며 따라서 원래의 복음서들 자체만큼이나 정확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책들 중의 하나가 <베드로 복음서>인데 그 책의 한 복사본이 1886년에 나일강 상류의 한 계곡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 책은 A.D. 180년에 안디옥의 주교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 책이다. 그 '외경적' 복음서에 따르면 아리마대 요셉은 본디오 빌라도의 친한 친구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십자가 처형이 눈속임이었을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다.

베드로 복음서도 역시 예수가 묻힌 무덤은 '요셉의 동산'이라고 불리우는 곳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한 최후의 말, 즉 「나의 능력이여 나의 능력이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 특히 주목을 끌고 있다.

또 다른 흥미있는 외경서는 2세기 중에 기원되었으며 그보다 더 이전에 기원되었을 수도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아복음서>이다.

이 책을 보면 예수는 뛰어나기는 했지만 대단히 인간적인 어린이로 묘사되어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격렬하고 다루기 어려웠으며 성질을 마구 부리며 그의 힘을 대단히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번은 그가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을 때려 죽였다.

어떤 독재적인 스승도 이와 유사한 경우를 당하였다. 그러한 사건들은 거짓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그가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신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당시에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었는가 하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어린시절에 예수가 한 좋지 못한 행위들 이외에도 유아복음서에는 하나의 기묘하고 중요한 단편이 있다. 예수가 할례받았을 때 그의 양피는 어떤 알 수 없는 노인에 의해 도난되었는데 그 노인을 그 양피를 희고 매끄러운 향유상자에 넣어 보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죄인 마리아가 입수하여 기름을 담았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와 발에 기름을 부었던 바로 그 상자이다」 그런데 공인된 복음서들에서처럼 여기에도 일반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도유식 즉 어떤 중대한 의식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도유식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 도유식이 오래전에 미리 예견되어졌고 준비되어 졌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건 전체는 비록 모호하고 뒤얽힌 사건이기는 하지만 예수가 30세 때 포교를 시작하기 오래전에 이미 막달라와 예수가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부모가 예수의 양피를 요구하는 그 첫 번째 노인에게 그것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비록 그렇게 기괴한 요구에는 비정상적인 어떤 점이 없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그 노인은 중요한 어떤 사람이거나 또는 예수의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어떤 사람임이 틀림없다. 막달라가 그후 그 기괴한 유물을 가지고 있었거나 그것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은 막달라와 그 노인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또다시 우리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였던 어떤 점을 희미하게나마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경의 여러 책들에 있는 어떤 구절들은, 예를 들면 예수의 어린 시절의 탁월함을 표현하는 어떤 구절들은 후세의 정통주의를 난처하게 했음이 분명하다. 그 구절들은 오늘날의 대부분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외경들도 신약성서의 공인된 책들처럼 '메시지 지지자들'에 의해 예수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작성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외경에는 그 '메시지'를 크게 손상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이 수록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그 '메시지'를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이란 분명히 예수의 정치활동에 관한 어떤 언급일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의 왕조적 야심들에 관한 언급일 것이다. 그러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에 대한 증거를 위해서 우리는 다른 곳을 조사해야 한다. 예수 당시의 성지에는 대단히 많은 서로 다른 유대교적 그룹들, 당파들, 종파들 그리고 소종파들이 있었다. 복음서들에는 이들 중 오직 두 파만이, 즉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만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두 파는 모두 악한 역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악역은 로마 정부와 협력했던 사두개파에게만 적용되어야 했을 것이다. 바리새파는 계속 로마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예수 자신도 실제로 바리새인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근본에서는 바리새적 전통 안에서 활동했다. 로마화된 청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복음서들은 로마를 무죄로 취급하고 유대인들을 모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잘못 전달되어져야 했으며, 왜 사두개인들과 함께 의도적으로 낙인찍혀야 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왜 복음서속에는 열성당원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는가?

열성당원들이야말로 로마인들이 철저히 악당들로 간주했을 호전적인 민족주의자 '자유투사들'이었으며 혁명가들이었다. 복음서속에서 그들이 생략된 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예수는 그들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연관은 부인될 수 없었을 것이며 단지 그럴 듯하게 꾸며저 은닉될 수밖에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브랜던(Brandon)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복음서들이 열성당원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예수와 이들 국수주의자들 사이의 관계를 암시해 주고 있음이 분명한데,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관계를 밝히려 들지 않았다.」

열성당원들과 예수의 관련이 무엇이든간에 그가 열성당원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는 그 두 사람은 '레스타이'라고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이것은 로마인들에게 알려져 있던 열성당원들에 대한 칭호였다. 예수 자신이 열성당원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서속에서 때때로 열성당원들과 아주 유사한 공격적인 군국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유명한 한 구절에서 그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주검을 주러」왔다고 선언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보면 그는 검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추종자들에게 검을 사라고 지시하고 있다.(눅 22:36). 그 후 그는 유월절 음식을 마친 후에 그들이 검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눅 22:38). 제4복음서를 보면 시몬 베드로는 예수가 체포될 때 실제로 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언급들을 전통적이고 온화하고 평화주의적인 구세주 상과 조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러한 구세주가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특히 그가 그 위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한 사랑하는 제자가 검을 소지하는 것을 허락했단 말인가?

예수 자신이 열성당원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복음서들의 외적으로 나타나는 바와는 달리 예수와 열성당과의 관련성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예수와 바라바를 관련시킬 수 있는 설득력있는 증거가 있다. 그리고 바라바도 역시 '레스타이(도적)'로 묘사되어 있다. 야고보, 요한 그리고 베드로는 모두 그들이 열성당과 연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열성당에 동조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는 칭호들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권위있는 학자들에 따르면 가롯 유다(Judas Iscariot)라는 이름은 '시카리 유다(Judas Sicarii)'라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시카리'는 '레스타이'대신 사용될 수 있었던 열성당의 또다른 용어였다. 실제로 시카리는 열성당 계열에 속하는 하나의 엘리크로 직업적인 암살자였던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시몬이라고 알려져 있는 제자가 있다. 히랍어 마가복음 성서을 보면 시몬은 '카나나이오스'라고 불리워지는데 이것은 열성당에 대한 아랍어의 음역이다.

KJB성서에서 보면 그, 희랍어 단어가 잘못 번역되어 시몬이 '가나안 사람 시몬(Simon the Ganaanite)'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몬은 분명히 열성당원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KJB성서조차도 그를 '열성당 시몬'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의 열성당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는 논란의 여기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복음서속에 열성당원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면 엣세네파가 둥장하지 안흔 것도 역시 그렇다. 예수 당신의 성지에서는 엣세네파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만큼이나 중요한 종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가 그들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그에 관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세례 요한은 엣세네파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엣세네파에 관한 모든 언급을 삭제한 것은 열성당에 대한 모든 언급을 삭제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말해 엣세네파와 예수의 관련성은 열성당과 그의 관련성처럼 너무나 밀접하고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부정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련성은 그럴 듯하게 꾸며져 은닉됐을 뿐이다. 당시의 역사가들과 연대기 저자들의 기록에서 보면 엣세네파는 성지전역에 공동체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곳에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B.C. 15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구약성서을 사용했지만 그것을 해석할 때는 실제적인 역사적 사실로서보다는 비유적인 것으로서 취급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를 반박하고 태양숭배와 피타고라스적 사상의 요소들을 혼합했던 것처럼 보이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지지했다. 그들은 입고 있는 백색 옷에 의해 쉽게 구분되었다.

그 문제에 관한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쿰란에서 발견된 유명한 사해 두루마리들이 본질적으로 엣세네파의 문서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쿰란에 살고 있던 그 금욕주의적 종파가 엣세네파의 사상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엣세네파의 가르침처럼 사해 두루마리들도 이원론적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다윗의 혈통을 가진 메시아, 즉 '도유식을 받은 자'의 출현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들은 또한 특수한 역법(曆法)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역법에 따르면 유월절 의식은 금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에 거행되었다.

이는 제4복음서에 나타나는 유월절 의시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많은 중요한 점에 있어서 그들은 예수가 가르친의 어떤 것과 일치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의 가르침을 그들과 일치시켰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해 두루마리 전문가에 의하면 그 두루마리들은 「신약성서에 있는 많은 사건들이 단순히 메시아에 관해 기대되었던 것들을 예수 자신의 역사 속에다 투시시킨 것들임을 믿게 해주는 추가적인 근거라고」한다.

쿰란 종파가 정확하게 엣세네파였건 아니었건간에 예수는 비록 그가 공식적인 엣세네파의 훈련을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엣세네파의 사상에 정통하여 있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많은 가르침들은 엣세네파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유 능력도 마찬가지로 어떤 엣세네파적 영향력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들을 보다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엣세네파는 예수의 경력에 휠씬 더 중요하게 관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엣세네파 사람들은 그들이 입고 있는 휜 옷에 의해 쉽게 구분될 수 있었다. 그러한 복장은 그림과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당시 성지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널리 통용되고 있지는 않았다. 삭제된 '비밀' 마가복음에서 보면 휜 베옷은 중요한 의식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후세의 공인 성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만일 예수가 베다니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신비교의 입회식을 행하고 있었다면, 그 휜 베옷은 이 의식들이 엣세네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더구나 휜 베옷에 관한 주제는 후에 네 권의 복음서속에 다 나타나고 있다. 십자가 처형 후 예수의 시체는 '기적적으로' 무덤에서 자취를 감추며 대신 적어도 한 명의 휜 옷 입은 인물이 그 무덤을 지키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그 인물은 「눈처럼 흰 옷을 입고 있는」 천사이다(마28:3). 마가복음에서 보면 「흰 옷을 입은 청년」이다(막 16:5). 누가복음은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하여 (눅 24:4), 제4복음서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요 20:12)

이 기록들 중 두 곳을 보면 그 무덤에 있는 인물 또는 인물들에게는 아무런 초자연적 지위도 부여되지 않고 있다. 아마 이 인물들은 제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그렇게 보인다--철저하게 유한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들이 엣세네파의 신유 능력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가정은 휠씬 더 타당성이 있게 된다.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옮겨졌을 때 그저도 살아 있었다면 신양요법을 아는 자들의 도움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가 이미 숨이 끊어져 가망이 없었다 해도 역시 그들은 참석했을 것이다.

우리의 각본에 따르면 예수의 몇몇 지지자들이 빌라도와 결탁하여 개인 소유지에서 거짓 십자가처형을 꾸몄다. 특히 그 처형은 메시지 지지자들에 의해 꾸며졌다기보다, 혈통 지지자들, 다시 말해 직계 가족이나 다른 귀족들, 또는 내부조직의 단원들에 의해 꾸며졌을 것이다.

이들은 엣세네파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으며 또은 엣세네파 단원들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추종자들의 '대오'를 이루고 있던 '말씀 지지자들'--시몬 베드로가 그 대표적인 인물임--에게는 그 책략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으로 옮겨지자 예수는 의약적인 치료가 필요했을 것이며 이를 위해 엣세네파의 신앙요법사가 초빙되었을 것이다. 그후 그 무덤이 빈 것으로 발견됐을 때 '대오'를 이루고 있는 제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한 명의 사자가 다시 필요했을 것이다.

이 사자는 의심하지 않는 메시지 지지자들을 격려해야 했을 것이며,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중개인으로서 행동해야 했을 것이며, 로마인들이 무덤을 도굴했다는 혐의를 받지 않도록 미리 조치해야 했을 것이다. 이 소문이 알려지면 위험스런 시민적 소요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각본이 정확하건 정확하지 않건간에 예수가 열성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만큼이나 엣세네파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언뜻 보면 이것은 약간 기묘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열성당과 엣세네파는 종종 서로 양립할 수 없다도 생각되기 때문이다. 열성당은 공격적이고 격렬하며 호전적이고 암살과 폭동도 꺼리지 않았다. 반대로 엣세네파는 대체로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경건하고 평화적이며 점잖은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열성당원들 가운데는 많은 엣세네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열성당은 하나의 종파가 아니라 정치적 당파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당파로서 그들은 반로마적인 바르새파로부터 지지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들만큼이나 철저하게 민족주의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엣세네파로 부터도 지지되었다.

열성당과 엣세네파의 연합은 당시의 팔레스타인에 관해 많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요세푸스의 기록들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요셉 벤 맛디아(Joseph ben Matthias)는 A.D. 37년에 유대의 귀족으로 태어났다. A.D. 66년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갈릴리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배치된 군대를 지휘했다.

군사적 지휘관으로서의 그는 아주 무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곧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사로잡혔다. 거기서 그는 퀴슬링(Quisling)으로 갔다. 플라비우스 요셉푸스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로마 시민이 되었고, 그의 아내와 이혼하고 로마의 공주와 결혼했으며 황제로부터 후한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 중에는 황제의 궁전에 있는 개인저택과 성지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몰수한 토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죽을 무렵인 A.D. 100년에는 그 시대에 관한 그의 방대한 역사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전쟁>에서 요세푸스는 A.D. 66년과 74년 사이의 반란에 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그 후의 역사가들은 그 비참한 반란, 예루살렘의 약탈, 그리고 성전의 파괴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을 요세푸스의 글에서 취하였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저작에는 사해 남서부에 위치해 있던 마사다 요새가 A.D. 74년에 함락된 것이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약 120년 후의 몽세귀르처럼 마사다도 후에 전혀 승산이 없는 불굴의 의지, 용맹, 그리고 헌신을 상징하게 되었다. 몽세귀르처럼 마사다로 다른 모든 조직적인 저항이 실제로 종식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해서 침략자에 저항했다. 여타의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맹공으로 붕괴되었지만 마사다는 여전히 함락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러다 A.D. 74년에야 그 요새는 함락되었다. 강력한 공격 무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포격을 가한 끝에 로마인들은 사다리를 설치하여 그 방어 진지를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4 월 15일 밤에 그들은 대공세를 준비했다. 같은 날 밤에 그 요새에 있던 960명의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은 집단으로 자살하였다. 다음날 아침 로마인들이 성문을 부수었을 때 거기에는 불타다만 시체들만이 뒹글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4 월 16일 아침에 마사다성으로 진군해 들어간 로마군병들을 따라갔었다. 그리고 그 시체더미를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했으며 그 중 세 명의 생존자들을 만나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한 명의 여인과 두 명의 아이들로서, 나머지 수비대들이 자살하는 동안 성채 밑에 있는 하수도에 숨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요세푸스는 이 생존자들로부터 전날밤에 일어났던 일을 자세리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 수비대의 대장은 엘르아잘(Eleazar)이란 사람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이 이름은 나사로의 별명이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이 그런 무서운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은 그의 설득력있고 카르스마적인 웅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는 그의 역사책에서 세 명의 생존자들에게서 들었다고 하는 엘르아잘의 연설을 되풀이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연설은 퍽 흥미가 있다.

역사에 의하면 마사다는 호전적인 열성당에 의해 방어되었다. 요세푸스도 '열성당(Zealots)'과 '시카리(Sicarii)'라는 말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엘르아잘의 연설은 전통의 유대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엣세네적, 즉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가깝다. 그의 연설은 이렇다.
원시인이 생각하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의 조상들의 행동과 정신에 의해 지지된 신들의 말씀은 한결같이 삶은 인간의 불행이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며 어떤 불행도 맛보지 않을, 그들 자신의 순수한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 영혼들이 유한한 육체에 갇혀 육체의 슬픔을 나눠가지는 동안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 영혼들은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유한한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것은 가장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육체에 갇혀 있을 때애도 커다란 일을 할 수 있기는 합니다.

확실히 그렀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각기관입니다. 영혼은 자유로이 움직이며 유한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땅에 매이게 하는 짐을 벗어버리고 그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진실로 영혼은 축복된 힘과 전혀 얽매이지 않는 힘을 소유하게 되며 하나님처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영혼이 육체 안에 들어오며 보이지 않게 떠납니다. 영혼은 불멸의 존재가 되지만 육체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살고 꽃을 피웁니다. 영혼이 떠난 것은 무엇이든 말라 죽습니다. 영혼은 그처럼 엄청난 불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명을 자연에게 바쳐야 할 일종의 봉사로 간주하여, 주저하지 않고 영혼을 육체의 속박에서 풀어주는 사람들은 진정 용기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불행도 그 영혼들을 억누르거나 쫓아내지 못합니다. 불멸의 삶에 대한 욕망이 끓어오를 때 영혼은 오히려 친구인 육체를 떠나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한 어떤 학자도 이 연설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연설들은 많은 자극적인 의문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느 점에서도 정통적인 유대교는 '영혼'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며 영혼의 불멸성에 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실제로 영혼이라는 개념과 불멸성이라는 개념은 유대교적 전통과 사상의 주류와는 조화되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월성,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일치, 그리고 삶을 악한 것이라고 저주하는 것 등도 역시 유대교와는 조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들은 신비주의적 전통에서 비롯되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런 태도들은 분명히 영지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이다. 그리고 마사다와 같은 상황에서는 엣세네파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물론 이러한 태도가운데 어떤 것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적'이라고 묘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그후 편집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말은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 예를들면 제4복음서에서 죽음에 의해 나사로와 일치하고자 한 추종자들에게 적용되었을 수도 있다. 마사다의 수비대원들 중에는 예수의 혈통을 지지하는 몇몇 지지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A.D. 66에서 74년까지의 반란기간 동안에는 유대인들만큼이나 격렬하게 로마인들에 대항하여 싸운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사실 많은 열성당원들은 오늘날 '초기 기독교인들'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얼마가 마사다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요세푸스는 이런 점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설령 그가 제시했다 할지라도 후세의 편집자들은 그것을 삭제했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요세푸스에게서 예수에 관한 어떤 언급을 기대하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편집한 요세푸스의 작품속에는 그러한 언급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언급들은 이미 확립된 정통주의가 제시하는 대로 예수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언급들은 콘스탄틴 시대보다 더 이르지 않은 때에 생긴 그럴 듯한 가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요세푸스의 저작이 러시아어로 번역된 그 본문 자체는 대략 1261년경에 기원되었다. 그 본문을 베낀 사람은 정통적인 유대인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전 기독교적' 언급들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세푸스의 이 역본에 있는 예수는 인간적인 존재로서 묘사되어 있으며 하나의 정치적인 혁명가로 묘사되어 있고 '통치하지 않는 왕'으로서 묘사되어 있다. 그는 또한 「나실인들의 관례대로 그의 머리 중앙에 하나의 계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많은 정력을 기울여 오늘날 「슬라브어 요세푸스」라고 불리우는 것의 진정성 여부를 논의했다. 결국 우리는 그것이 다소 진실된 것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즉 그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문서 파괴에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으며 콘스탄틴 통치하에서 회복된 정통주의의 편집망을 피한 요세푸스의 한 사본 또는 사본들로부터 번역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결론짓는 데에는 많은 타당성 있는 이유들이 있다. 예를들면 만일 슬라브어 요세푸스가 위조품이었다면 그것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위조되었을 것인가?

예수를 왕으로 묘사한 것은 13세기의 유대교 독자들에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인간으로 묘사한 것도 13세기의 기독교도들을 조금도 만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3세기 초에 저작 활동을 한 교부 오리게네스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부인하는 요세푸스의 한 역본을 암시해 주고 있다. 원래는 진정한 '표준'역본이었을 수 있는 이 역본이「슬라브어 요세푸스」의 본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성배와 성혈 [ 12.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1 ]
물론 우리는 우리의 각본이 기존의 기독교적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보다 많이 연구하면 할수록 수세기에 걸쳐 유래된 그 가르침들은 고도의 발췌 편집으로 그럴듯하게 삭제되고 개정되었음이 그만큼 더 명백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신약성서는 예수와 그의 시대를 어떤 특권층 즉, 기 문제에 중요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그리고 아직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어떤 그룹들과 개인들의 필요에 따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손상시키거나 난처하게 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은-- 예를 들면 마가의 '비밀 복음서'처럼-- 당연하게 삭제되었다. 사실 너무나 많은 것이 삭제되어 일종의 빈 공간이 생겨났다. 이 빈 공간에서는 추측이 정당하고 필연적이다.
만일 예수가 합법적인 왕권 소유자였다면 그는 비교적 소수의 대중 즉 갈릴리의 그의 직계 가족, 그 자신의 귀족적 사회 계급에 속한 어떤 다른 사람들, 그리고 유대와 예루살렘에 전략적으로 베치된 몇몇 대표자들에 의해 지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한 추종자들은 탁월하기는 했지만 그의 목적 실현을 보장하기에는, 즉 왕좌를 차지하려는 그의 노력을 성사시키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다른 계급들로부터 보다 확고한 추종자들을 모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보니 왕자 찰 리가 이전의 지위를 추구하지 위해 1745년에 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대규모의 추종자들을 모집할 수 있는가? 그들의 충성과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의도된 메시지를 전파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메시지는 현대의 정치가들의 메시지처럼 냉소적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고상하고 강력한 이상을 곁들인 선한 신앙의 형태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종교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현대의 정치가들의 목적과 동일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짓밟히고 고통받고 약탈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약속의 메시지였다.

만일 오늘날의 독자가 그 문제에 관해 편견과 선입관을 버린다면 그는 현대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수법, 즉 대의명분으로 백성들을 규합하고--언제나 그랬듯이--독재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기구를 설치하는 수법과 아주 유사한 점을 간파해 냈을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윤리적인 동시에 정치적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메시지는 정치적 동기에 따라 특수층의 대중에게 지향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대규모의 추종자들을 모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억압받고 짓밟히고 약탈당하고 고통받는 자들 가운데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정복에 굴복하였던 사두개인들은 역사상의 모든 사두개인들만큼이나 그들의 소유를 나누어 주기 싫어했으며 그들의 안전과 안정이 위협받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복음서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메시지는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독특한 것도 아니다. 예수 자신은 바리세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는 바리새적 교리의 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사해 두루마리들이 입증해 주고 있듯이 그의 가르침속에는 엣세네의 중요한 사상적 측면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 자체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수단은 독창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 자신은 대단히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병을 치유하고 , 그런 유의 다른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니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는 생생한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재능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의 청중은 전혀 세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그것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예수는 그이 엣세네파 선배들과는 달리 메시아의 강림을 예고하는 데에만 국한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그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휠씬 더 권위가 있었을 것이며 그의 말에 신빙성이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무렵 예수는 이미 추종다들을 다 모집해 놓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추종자들은 그들의 관심이 서로 상충되는 다른 두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편에는 소수의 핵심적인 추종자들, 즉 직계 가족과 다른 귀족 회원들 및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지지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주요 목적은 그들의 지지자가 왕좌에 즉위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에는 보다 많은 '일반 백성' 즉 그 운동의 대오(隊俉)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주요 목적은 그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포함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이들 두 파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정치적 목적 즉, 예수를 왕좌에 앉게 하려는 목적은 동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들은 근본적으로 달랐을 것이다.

그 거사가 완전히 실패하자 이들 두파 즉 '메시지 지지자들'과 '가족 지지자들' 사이의 부자연스런 결속은 붕괴되었을 것이다. 붕괴와 임박한 학살의 위험에 직면하자 그 가족은 오래 전부터 왕가에 가장 중요하였던 하나의 요소, 즉 어떤 희생을 치뤄서라도, 필요하다면 도망하여서라도 혈통을 보존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지 지지자들'에게는 그 가족의 미래는 알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혈통 보존은 이차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 메시지를 영속화시키며 전파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첫 몇세기 동안 전개되어 드디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수된 기독교는 '메시지 지지자들'의 산물이다. 기독교의 보급과 발전과정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대단히 광범위하게 설명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도 바울과 함께 '그 메시지'는 이미 구체적이고 명확한 형태를 가지기 시작했으며 이 형태는 기독교의 전체 신학체계가 근거한 토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북음서들이 작성될 무렵에 그 새로운 종교의 교리는 사실상 완결되었다.

그 새로운 종교는 무엇보다도 로마의 청중 또는 로마화된 청중을 주요 목표로 하였다. 따리서 예수의 죽음에 있어서의 로마의 역할은 필연적으로 미화되었으며 책임은 유대인들에게로 전가되었다. 그러나 로마 세계에 맞도록 사건들을 왜곡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로마 세계는 그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이저는 이미 공식적으로 신으로 취임했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예수도 신격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바울에 의해 그는 신격화되었다.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로마와 서유럽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으로 전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 새로운 종교는 먼저 그 지역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종교는 기존의 신조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것을 고수할 수 있어야 했다. 간단히 말해 그 새로운 신은 힘과 권위와 기적들의 목록에 있어서 그가 대치하고자 하는 신들에 필적해야만 했다. 만일 예수가 당시의 로마화된 세계에서 지반을 다지고자 했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완전한 신이 되어야 했다.

옛날 의미에서의 메시아가 아니고 제사장적 왕이 아니라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의 고전적인 신들처럼 지하계와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고 봄과 함께 다시 소생한 성육신한 하나님이 되어야 했다. 부활에 관한 사상이 최초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점에서였으며, 대단히 명백한 이유 때문이었다.

즉 예수를 타무스, 아도니스, 아티스, 오시리스 그리고 그들 시대의 세계와 의식을 모두 섭렵한, 소멸하고 소생하는 모든 다른 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 한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처녀탄생의 교리도 선포되었다. 죽음과 부활의 축제인 부활절 축제는 당시의 다른 종파들과 신비교의 봄의식에 일치하게 되었다.

하나의 신을 선포할 필요가 생기게 되자 그'신'의 실제적인 육신상의 가족과 그의 이야기에 나오는 정치적이고 왕조적인 요소들은 불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특수한 시간과 공간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그의 주장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보편성의 주장을 더 촉진시키기 위해 모든 정치적·왕조적 요소들은 예수의 전기에서 엄격하게 삭제되었다.

따라서 열성당원들과 엣세네파에 대한 모든 돤계들도 역시 신중하게 제거되었다. 그러한 관계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난처하게 하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이 복잡하고 일시적인 정치적·왕조적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도 실패로 끝난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도 실패로 끝난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온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복음서들에 수록된 것 이외의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복음서속에 로마에 의해 점령된 1세기의 팔레스타인에서 단지 우연히 일어나 엄격하고 신화적인 얘기만 기록되었다.

'그 메시지'는 이러한 형태롤 발전되었지만 그 가족과 그 지지자들은 근거가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1세기의 작가 울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예수의 살아남은 친척들이 유대 귀족들의 족보를 파괴하여 왕좌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모든 증거들 제거한 헤롯 왕가의 통치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친척들은 A.D. 66년과 77년 사이의 반란기간 동안 문서 파괴를 겨우 모면하고 남아 있던 어떤 족보들을 가지고 전세계에 흩어졌다고 한다.
새로운 신화의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이 가족의 존재는 못마땅한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존재는 언젠가 위험 요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일을 직접 증명할 수 있었던 그 가족은 그 신화에 대한 위험스런 위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가족은 직접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그 신화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태에 관한 일체의 언급이 억압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태의 냉소적 현실이 인정되어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의 정체를 폭로할 수 있는 그 가족 자체는 가능하다면 제거되어야 했다. 따라서 그 가족측에서는 극도의 비밀이 요구되었다. 초대 교회교부들은 그들이 부과하고자 했던 정통주의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도 묵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반유대주의적 기원들 중의 하나가 생겨났을 것이다. 결국 '메시지 지지자들'과 신화의 선전자들은 유대인들을 비난하고 로마인들을 무죄로 함으로써 이중적인 목적을 성취했을 것이다.

즉 그들은 그 신화와 '메시지'를 로마의 청중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 유대적이었기 때문에 그 가족의 신뢰를 비난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유발시킨 반유대적 감정으로 인하여 그들의 목적은 휠씬 더 촉진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 가족이 로마 제국내에 있는 어떤 유대 공동체로 도망했다면 당시에 널리 행해지고 있던 일반적인 박해로 인하여 위험스런 증언들이 간단하게 침묵되었을 것이다.

로마 청중의 비위을 맞춰주고 예수를 신격화하며 유대인들을 희생제물로 삼아, 그 후기독교적 정통주의가 된 새 신화의 보급은 성공이 보장되었다. 이런 정통주의의 입장은 주로 A.D. 180년경의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나이우스에 의하여 2세기에 결정적으로 견고하게 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레나이우스는 어떤 초대 교부들보다도 더 기독교 신학에 확고하고 일관성 있는 형태를 부여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단 반박(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이라는 방대한 책에 의하여 이를 이룩했다. 그의 철저한 저서에서 이레나이우스는 정통주의에서 빗나간 모든 것들을 열거하여 그것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단을 한탄하면서 그는 오직 하나의 확고한 교회가 있을 뿐이며 그 교회 이외에는 어떤 구원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단언에 도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단이라고 선언하였으며 따라서 축출되고 가능하다면 멸종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초대교회의 많은 이단들 중에서도 이레나이우스에 의해 가장 신랄하게 공격받은 것은 영지주의였다. 영지주의는 게인적인 경험 즉 신과의 개인적인 영합에 의존하였다. 이레나이우스가 볼 때 이러한 영지주의는 자연적으로 성직자들과 주교들의 권위를 손상시켰으며 통일성을 지향하려는 노력에 방해가 되었다. 결국 그의 영지주의를 제거하는데 몰두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공상을 금지시키고 고정된 도그마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을 권장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또한 신학적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개인에 의한 어떤 해석도 용납하지 않는 법전화된 교리 체계가 필요로 되었다. 개인적인 경험과 지식에 대한 반대로 이레나이우스는 사도적 기초와 계승에 의존하는 단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를 고집하였다. 그러한 교회의 창시를 보충하기 위해 이레나이우스는 명확한 정경(政經) 즉 권위있는 저서들의 고정된 목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당시 널리 유포되어 있는 책들을 발췌하여 어떤 것은 포함시키고 어떤 것은 배제함으로써 그러한 정경을 편집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오늘날의 정경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신약성서 정경을 편집한 최초의 인물이다.

물론 그러한 조치들이 초기 이단들의 확장을 막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이단들은 점점 더 융성하였다. 그러나 이레나이우스와 함께 '메시지 지지자들'에 위해 선포된 기독교 유형인 정통주의는 일관성있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후 계속 잔존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레나이우스가 콘스탄틴누스 황제 통치기간과 그 직후에 발생했던 일을 위해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콘스탄틴누스황제의 보호하에 로마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제국이 되었다.

기독교의 역사와 발전에 있어서의 콘스탄틴누스 황제의 역할은 위조 되었으며 잘못 제시되었으며 오해되어 왔다. 9장에서 논의된 8세기의 가짜 '콘스탄틴누스의 기증'은 후대의 작가들이 보기에 문제를 휠씬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 지지자들'의 결정적인 승리는 때로 콘스탄틴누스의 공으로 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부당한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니는 그들 더 철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에게 돌려진 보다 환상적이고 그럴 듯한 업적들 중 어떤 것을 배제해야 한다.

후대의 교회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동정적인 입장을 물려받았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처음에는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기독교인들의 수효는 상당히 많았으며 콘스탄틴은 그의 왕좌를 노리는 막센티우스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도움이라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A.D. 213년 막센티우스는 '물비안다리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따라서 콘스탄틴의 왕좌는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 결정적인 교전이 있기 직전에 콘스탄틴은 하늘에 걸려있는 빛나는 십자가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 환상은 후에 예언자적인 꿈에 의해 재강조되었다. 그 십자가를 가로질러 하나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고 추정된다.

「In Hoc Signo Vinces(이 징표를 사용하면 승리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이러한 하늘의 징조를 쫓아 군병들의 방패에다 기독교의 상징적인 징표, 즉 Xpcotos라는 단어의 첫 머리인 Xp를 장식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몰비안다리에서의 막센티우스에 대한 콘스탄틴의 승리는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기적적인 승리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콘스탄틴이 종종「로마제국을 기독교화시켰다」고 생각되어지는데 근거하는 일반적인 기독교 전승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콘스탄틴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가 행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정확하게 짚어보기 위해 우리는 그 증거를 보다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첫째, 콘스탄틴의 '개종--이 단어가 적절하다면 --은 결코 기독교적인 개종이 아니라 이교적인 개종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보스게스(Vosges) 또는 아우툰(Autun) 근처에 있는 이교적인 아폴로 신적의 경내에서 모종의 환상을 보았거나 신비한 경험을 했던 것처럼 보인다.

당신 콘스탄틴 군대를 따라간 어떤 목격자에 따르면 그 환상은 즉 「무적의 태양(Sol lnvictus)」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어떤 종파가 숭배하는 신인 태양신의 환상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틴이 환상을 보기 직전 솔 '인빅투스'의 의식에 참석했었다는 증거가 있다. 어쨌든 원로원은 물비안 다리의 전투 이후 콜로세움에 승리의 문을 세웠다. 이 문에 새겨진 비문에 따르면 콘스탄틴의 승리는 「그 신의 격려 덕분」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그 신은 예수는 아니었다. 그 신은 이교의 태양신인 '솔 인빅투스'였다.

전승과는 달리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로마의 공식적인 국교로 삼지 않았다. 사실 콘스탄틴 통치하에서 로마의 국교는 이교적인 태양신 숭배였다. 그리고 콘스탄틴은 일생동안 그 태양신 숭배 의식의 제사장으로 활동했다. 실제로 그의 통치는 「태양의 제위(帝位)」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솔 인빅투스'는 제국국기와 화폐를 포함한 모든 곳에 등장하였다.

콘스탄틴이 열렬한 기독교 개종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콘스탄틴 자신은 337년까지 세례조차 받지 않았다. 그때 그는 임종 직전이었으며 너무 허약하고 너무 무감각하여 세례를 거부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Xp라는 징표를 사용한 것도 그의 공로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징표를 가지고 있는 한 비문이 폼페이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콘스탄틴보다 250년 전에 기원된 것이다.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은 시리아에서 기원되었으며 콘스탄틴보다 100년 전에 로마 황제들에 의해 그들의 신하들에게 숭배하도록 명령되어졌다. 그 의식에는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원래 단일신론적인 의식이었다. 결국 그 제의식은 태양신을 모두 다른 신들의 모든 속성들을 다 가진 총화로서 간주하였다. 이리하여 그 제의식은 아직 발달하지 않은 모든 제의식들을 포용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역시 널리 행해지고 있었으며 태양 숭배를 내포하기도 했던 미드라스(Mithras)와도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콘스탄틴이 볼 때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은 편리한 방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정치, 종교 그리고 영토에 있어서의 통일이었다. 모든 다른 제의식들을 내포하고 있는 제의식 즉 국가종교는 이러한 목적에 도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기독교가 그 위치를 확고히 한 것은 '솔 인빅투스' 제의식의 후원하에서 였다.

기독교적 정통주의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솔 인비투스 제의식의 묵인하에 방해를 받지 않고 번성할 수 있었다. 솔 인빅투스 제의식은 본래 단일신론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단일신론을 위한 길을 닦아 놓았다. 그리고 솔 인빅투스 제의식은 다른 측면들 즉 기독교의 전파를 변경시킨 동시에 용이하게 하였다는 측면에서도 역시 편리하였다. 예를들면 A.D. 321년에 선포된 칙령에 의하여 콘스탄틴은 「신성한 일요일」에는 법정이 쉬도롤 명령했으며 이 날을 휴일로 선포하였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유대교의 안식일 즉 토요일을 거룩한 날로 지켰었다.

그러나 그후 콘스탄틴의 칙령에 따라 기독교는 신성한 날을 일요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는 기존 정부와 조화를 이루게 됐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적 기원에서 더 멀어지게 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4세기까지는 예수의 출생일이 1월 6일에 지켜져 왔었다.

그러나 솔 인빅투스에 있어서는 일년의 결정적인 날이 12월 25일이었다. 그날은 태양의 탄생(또는 재탄생)을 기념하는 나탈리스 인빅투스 축일로 낮의 길이가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었다. 이 점에서도 역시 기독교는 정부와 기존의 국교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은 다행히도 미드라스의 제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그 둘이 때로는 서로 혼동될 정도였다. 그 둘은 모두 태양의 지위를 강조했으며 일요일을 신성한 날로 지켰고 중요한 탄생 축일를 12월 25일에 거행했다. 결국 기독교도 미드라스의 제의식과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기독교는 미드라스 제의식이 영혼불멸, 미래의 심판,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을 강조했던 것보다 더 그것들을 강조했다. 통일을 위하여 콘스탄틴은 기독교, 미드라스 제의식 그리고 솔 인빅투스 사이의 차이점을 조정하고자 했다. 즉 그들 사이의 어떤 모순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신격화된 예수를 솔인비투스의 지상적 현현으로 생각하여 묵인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 교회를 세웠을 것이며 동시에 시벨레(cybele)여신의 동상과 태양신 솔 인빅투스의 동상도 세웠을 것이다. 솔 인빅투스는 콘스탄틴의 형상으로 그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절충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조치들 속에서 우리는 통일성에 대한 강조를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콘스탄틴에게 있어서 신앙은 정치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통일성에 도움이 되는 신앙은 어떤 것이든 인내를 가지고 처리되었다. 그러므로 콘스탄틴은 후대의 전승이 묘사하고 있는 '선한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통일과 일률성이라는 명목으로 기독교적 정통주의의 입장을 견고하게 해 주었다. 예를들면 A.D. 325년에 그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부활절의 날짜가 확정되었고 주교들의 권위를 명백히 규정하여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힘의 집중을 예비해 준 규칙들이 제정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니케아 공의회가 예수는 하나의 유한한 예언자가 아니라 신이었다는 것을 투표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다시 콘스탄틴의 가장 중요한 생각은 경건이 아니라 통일성과 정치적 방편이었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신으로서의 예수는 솔 인비투스와 쉽게 조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유한한 예언자로서의 예수는 적응시키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기독교적 정통주의는 그 공식적인 국가종교와 정치적으로 바람직하게 혼합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 있어서 콘스탄틴은 기독교적 정통주의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니케아 공의회 1년 후에 콘스탄틴은 정통주의적 가르침들에 도전하는 모든 저서를 즉 '이단적인' 기독교인들의 저서들은 물론이고 예수에 관해 언급하는 이교적 저자들의 핵도 몰수하고 소멸시킬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또한 교회에 고정된 수입이 할당되도록 조치하기도 했으며 로마의 주교를 라테란 궁에 취임시켰다. 그후 A.D. 331년에 그는 새로운 성서 사본들을 만들도록 위탁하였으며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들 중의 하나였으며 기독교적 정통주의 즉 '메시지 지지자들'에게 미증유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4반세기 전인 303년에는 이교적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눈에 띄는 모든 기독교 서적들을 파괴했다. 결국 기독교적 문서들, 특히 로마에 있는 기독교 문서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콘스탄틴이 이들 문서들의 새로운 판들을 위탁했을 때 정통주의의 후원자들은 그들의 자료를 그들의 교리에 따라 적절하다고 생각한 대로 개정하고 편집하고 재집필할 수 있었다.

신약성서에 있는 결정적인 변형독본들 중의 대부분은 이때에 만들어졌을 것이며, 예수가 그후 지금까지 알려져 온 대로의 독특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도 이 때이다. 콘스탄틴의 위탁이 가지는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 5천 개의 현존하는 초기 신약성서 사본들 중에서 4세기 이전의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오늘날의 신약성서는 본질적으로 4세기의 편집자들과 작가들을 보호하는데 기득권을 가진 정통주의 지지자들 곧 '메시지 지지자들'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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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성혈 [ 11. 시나리오 ]
우리는 이미 예수로부터 이어져 온 혈통에 관하여 하나의 시론적인 가정을 살펴 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 가정을 더 넓히기 시작했으며, 훨씬 더 시론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결정적인 단서들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전반적인 묘사는 일관성있고 타당성이 있게 되었다. 예수는 제사장적 왕, 즉 귀족이면서 합법적인 왕권을 소유한 자로 그의 정당한 유업을 다시 찾으려고 하였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한 것처럼 보였다. 예수 자신은 로마 정부에 대한 적대 세력의 전통적인 온상인 갈릴리 출신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역에 명성있고 부유하며 영향력 있는 많은 지지자들을 포섭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지지자들 중의 하나이며 강력한 한 산헤드린 회원은 그의 친척이었을 수도 있다. 더구나 베다니라는 예루살렘 근교에는 그의 부인의 집, 또는 부인 가족의 집이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기 전에 그 야심적인 제사장적 왕은 이곳에 머물렀다. 여기에다 그는 자신의 종파를 위한 중심지를 세웠다. 여기에서 그는 그의 처남의 입회식을 포함하여 의식적인 입회식을 행함으로써 그의 추종자들을 확장했을 것이다.
그러한 야심적인 왕은 불가피하게 로마 행정부및 사두개파를 비롯한 강력한 유대교적 세력에서 강한 반발을 받았을 것이다. 이 세력들 중 한둘은 왕좌를 차지하려는 그의 노력을 좌절시키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를 제거하려는 노력에 있어서 그들은 바랐던 것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왜컸玖?그 제사장적 왕은 높은 직위에 있는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친구들은 부패하고 쉽게 매수된 로마의 총독과 결탁하여 개인 소유지에서 몇명만 접근할 수 있는 거짓 십자가 사건을 꾸몄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 대중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가운데 처형이 시작되었다.

그 처형에서 제사장적 왕 자신은 실제로 죽지 않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것이다. 먼지가 일어 한층 시야가 가려질 무렵 '몸'이 인접해 있는 무덤으로 적시에 옮겨졌으며, 그 무덤으로부터 하루나 이틀 후 '기적적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만일 우리의 각본이 정확하다면 예수는 그후 어디로 갔는가? 혈통에 관한 우리의 가정에 관한 한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이슬람 및 인도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동방의 어느 곳에선가 살만큼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가장 빈번하게 주장되고 있는 장소는 캐시미어이다. 한편 어떤 오스트레일리아의 저널리스트는 예수는 마사다의 요새가 A.D 74년 로마인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그곳에서 죽었다는 흥미있고 설득력있는 논증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의 나이는 거의 80세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지에 따르면 렌느 르 샤토에서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발견된 문서속에는 예수가 A.D 45년에 살아있었다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장소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하나의 그럴듯한 가능성은 이집트와 특히 알렉산드리아일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오르무스(Ormus)라는 현자가 보다 이전의 전기 기독교적 신비들과 기독교를 혼합시켜 '장미 십자단'을 창설했다고 한다. 예수의 미이라가 렌느 르 샤토 부근의 어디엔가 은닉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암시되기도 했다. 이것은 소니에르의 양피지들에 있는 암호로 된 메시지 [ILEST LAMORT(그가 거기에서 죽었다)]를 설명해 줄 것이다.
그가 가족을 동반하고 마르세이유로 갔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다. 사실 상황으로 보아 그것은 타당성이 없을 것이다. 그는 여행을 할 만한 형편이 못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함께 있으면 친척들의 안전에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형제 야곱처럼 예루살렘에 계속 남아 그의 목적들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요약하면 우리는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하여 복음서들 자체가 제시해 주는 것 이상의 어떤 실제적인 제안도 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예수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보다 그의 가족 특히 그의 처남,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자녀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의 각본이 옳다면 그들은 아리마대 요셉과 어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예루살렘을 몰래 빠져 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마르세이유 해변에 도착했을 때 막달라는 실제로 '성배' 즉 다윗가의 후손인 '왕족'을 프랑스로 가져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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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성혈 [ 10. 십자가 사건의 실상 ]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많은 자녀를 낳았을 법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십자가에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죽지않고 살았다면 자손들의 수는 훨씬 더 증가될 것이다. 예수가 실제로 십자가에서 살아남았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또는 십자가 사건은 모종의 사기였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복음서들에 있는 그에 관한 묘사를 볼 때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그의 적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기존의 유대교 세력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적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들은 그 문제에 로마를 끌여들이지 않고도 자발적으로 그들 자신의 권한에 의거하여 예수를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는 로마와 아무런 특별한 충돌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로마법을 어기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로마법과 로마적인 절차에 따라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는데 이것은 제국에 대한 반역죄를 범한 죄인들에게만 적용된 처벌 형식이었다. 만일 예수가 실제로 십자가에 달렸다면 그는 복음서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비정치적이었을 수 없다. 반대로 그는 틀림없이 유대적인 것과 반대되고 로마적인 분노를 자극하는 어떤 행동을 했음이 분명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죄목이 무엇이든간에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모순 투성이다. 왜 그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서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운명적이어야 했는가 하는 데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음이 아주 분명하다. 십자가 사건에 관한 논쟁은 보다 정확하게 조사해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의 관습은 대단히 정확한 절차들을 거쳐 진행되었다. 선고된 후 죄수는 채찍질되어졌을 것이며 그후 피를 흘림으로써 약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그의 벌려진 양 팔이 그의 목과 어깨를 가로질러 수평으로 놓여진 무거운 나무토막에 고정되었을 것이다.

고정시키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죽 끈이었지만 때로는 못을 박아 고정시키기도 하였다. 이 나무토막을 매고 그는 그 다음 단계로 처형 장소로 끌려갔을 것이다. 여기서 죄수를 매어 단 그 통나무가 들어올려져 수직의 기둥에 부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손만 고정시켜 매어 달면 죄수가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발도 십자가 위에 고정시켰는데 이것은 그가 발을 딛고 서서 가슴에 받는 압력을 경감시킬 수 있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발이 고정되어 달린 사람은, 특히 컨디션이 좋고 건강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최소한 하루나 이틀은 살아남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죄수들은 퓐恝?목마름 또는 못이 사용되었다면 피흘림으로 인하여 죽기까지 일주일이 걸린 예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죄수의 다리나 무릎을 부러뜨림으로써 고통은 보다 빨리 극도에 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들에서 보면 예수의 처형자들이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되자 그만 두었다. 다리나 무릎을 부러뜨리는 것은 고통을 더하게 하려는 새디스트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빨리 죽게해 주려고 하는 자비의 행위였다. 그를 밑에서 받쳐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죄수는 가슴에 받는 압력을 견딜 수 없게 되어 곧 질식하게 될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제4 복음서만이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목격자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제4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발은 십자가 위에 고정되었으며--이리하여 그의 가슴에 받는 압력이 경감되었다--그의 다리는 부러뜨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틀이나 사흘 동안은 족히 살아있어야 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그렇지만 그는 십자가에 달린 지 불과 몇시간만에 죽었다고 선언되었다. 마가복음에서 보면 빌라도조차도 그렇게 빨리 죽은 사실에 놀라고 있다.(막 15:44)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그의 옆구리를 찌른 창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복음서들은 창이 그를 찌르기 전에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요 19:33) 단 하나의 설명만이 가능하다. 즉 피로와 허약함과 채찍에 의한 상처가 합하여져 죽음을 재촉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조차도 그렇게 빨리 죽게한 치명적인 요인들이었을 리는 없다.

물론 그것들이 치명적인 요인들이었을 수도 있다. 즉 생리학적 법칙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때로는 비교적 충격이 없는 단 한번의 타격에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어떤 것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4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처형자들은 그의 죽음을 촉진시켜 주려고 막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려 하였다. 그가 이미 다 죽어가고 있었다면 왜 그렇게 하고자 했는가? 간단히 말해 죽음이 실제로 임박해 있었다면 예수의 다리를 부러뜨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복음서들에서 보면 예수의 죽음은 아주 편리하고 아주 적절한 순간에 일어났다. 그 죽음은 아주 적절한 때에 일어나서 처형자들이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으로써 그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권위있는 학자들은 예수가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그러한 예언들에 따라 그의 삶을 아주 자연스럽게 추구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그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할 수 있었던 나귀가 베다니에서 구입되어야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의 세부적인 것들도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의 예언들을 이루기 위해 조정된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말해 예수가 명백하게 그리고 적절한 때에 '죽었다는 사실'은--이로 인하여 그는 아슬아슬하게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죽음을 면하게 되엇으며 예언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아무리 보아도 의심스럽다. 그것은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그 사실 이후에 가필된 것이거나 주의깊게 고안된 계획의 일부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고안된 계획임을 제시할 수 있는 많은 증거가 있다.
제4 복음서에서 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목마르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불평에 대한 응답으로 그에게 미리 신 포도주에 적셔둔 해융이 주어진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들에도 나타나는 사실이다. 이 해융은 일반적으로 새디스트적인 조소의 또 다른 행동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는가? 신 포도주는 소금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는 일시적인 흥분제이다. 그것은 갤리선(노예나 죄수에게 젓게 하였던 돛과 노가 많이 달린 범선)에서 노를 젓던 노예들이 힘이 빠지면 그 노예를 소생시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상처를 입고 지쳐있는 사람에게 신 포도주는 소생적인 효과를 주었을 것이며 순간적으로 힘이 솟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경우에는 그 효과가 정반대였다. 해융을 맛보자마자 그는 유언을 하고 죽었다. 신 포도주에 대한 그러한 반응은 생리학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반응은 신 포도주가 아니라 모종의 수면제, 예를 들면 당시 중동에서 널리 사용되던 아편과 아마릴리스의 복합제에 적신 해융과 똑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 수면제를 주었을까? 그렇게 한 행위는 십자가 처형의 다른 모든 요소들과 함께 하나의 복합적이고도 교묘한 술책, 즉 그 죄수가 실제로 아직 살아있었지만 죽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고안된 책략의 요소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책략은 예수의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의 메시아 예언들을 성취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에는 그러한 책략을 가리키는 다른 비정상적인 측면들도 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는 골고다, 즉 '해골의 장소'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십자가에 달렸다. 후세의 전승은 골고다를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뻗어있는 메마르고 다소 해골모양을 한 언덕과 동일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복음서들 자체에서 보면 십자가 처형이 일어난 장소는 메마르고 해골모양을 한 언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제4 복음서는 그 문제에 관해 가장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즉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힌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요 19:41) 그렇다면 예수는 메마르고 해골모양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어떤 '공개적인 처형 장소'에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

그는 개인 무덤이 있는 동산에서 또는 그 동산의 바로 인접한 곳에서 십자가에 달렸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의 개인 소유였다. 그런데 모든 복음서들에 따르면 아리마대 요셉은 부유한 사람이며 예수의 숨은 제자였다.
일반적인 전승은 십자가 처형을 군중이 접근할 수 있었으며 수천명의 사람들이 참관한 대규모의 공개적인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복음서들 자체는 대단히 다른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따르면 십자가 처형은 여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멀리서'(눅 23:49)목격되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공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개인 소유지에서 벌어진 개인적인 처형이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많은 현대의 학자들은 십자가 처형의 실제적인 장소는 아마도 겟세마네 동산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겟세마네가 실제로 예수의 숨은 제자들 중의 한 개인의 소유지 였다면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왜 그처럼 자유로이 그곳에 들락거릴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줄 것이다.

개인 소유지에서의 개인적인 십자가 처형이었다면 눈속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거짓 꾸며진 십자가 처형이었으며 교묘하게 계획된 의식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몇명의 목격자들만이 직접 참석하였을 것이다. 일반 대중은 그 연극을 공광복음서들이 확증하듯이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거리에서 보면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연극에는 본디오 빌라도의 또는, 로마 행정부의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의 묵인과 결탁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묵인과 결탁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 빌라도가 잔인하고 폭군적인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부패한 관리였으며 또한 뇌물에 상당히 약한 관리였다. 복음서들에서 또한 묘사된 빌라도와는 반대되는 실제의 빌라도는 상당한 액수의 돈과 더 이상 정치적 선동을 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교환 조건으로 하여 예수의 생명을 살려준데 불과했을 것이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었든간에 빌라도가 그 사건에 어떤 방법으로든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예수의 권한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예수의 죽음이 그처럼 빨리 일어났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또는 거짓 놀라는 체했다. 그리고 그가 예수의 시체를 아리마대 요셉에게 허락했다는 것이 모든 것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일 것이다. 당시의 로마법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결코 장사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실제로 보초들은 친척이나 친구가 죽은 자의 시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관례적으로 지켰다.

죄수의 시체는 십자가 위에 그대로 방치되어 새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절차를 크게 무시하고 예수의 시체를 아리마대 요셉에게 선뜻 내주었다. 이것은 빌라도 측에서의 어떤 공모가 있었음을 분명히 입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것들도 역시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영역본들에서 보면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요청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으며 백부장과 상의한 후 만족하여 요셉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타당성이 있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희랍어 역본에서 보면 그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진다. 희랍어 역본에서 보면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요구할 때 그는 soma(소마)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살아있는 몸에게만 적용된 단어이다. 그 요구에 동의하는 빌라도는 '시체'를 의미하는 ptoma(프토마)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희랍어에 따르면 요셉은 분명히 살아있는 몸을 요구하고 있으며 빌라도는 그에게 죽은 자의 몸이라고 생각한--또는 그렇게 생각하는 체 한--것을 허락하고 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장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요셉이 어떤 몸이건 받았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상하다. 무슨 근거로 그는 그 몸을 받았는가? 그는 예수의 몸에 대하여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가?

만일 그가 숨은 제자였다면 그는 예수의 비밀 제자임을 밝히지 않고서는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빌라도가 요셉이 예수의 비밀 제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요셉에게 유리한 어떤 다른 요인이 연루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리마대 요셉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복음서들은 단지 그가 예수의 숨은 제자로 큰 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보호하에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공동체를 다스린 산헤드린이라는 장로들의 회의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요셉은 영향력있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빌라도와 그의 교섭 및 그가 개인 묘지를 포함한 광활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확증된다.

중세의 전승은 아리마대 요셉을 성배의 보관자라고 묘사하고 있다. 다른 후세의 전승들에 따르면, 그는 예수와 예수의 가문과 약간의 혈연적 관계가 있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예수의 몸에 대하여 약간 타당성있는 요구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처형된 죄수의 시체를 전혀 낯선 사람에게는 거의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뇌물을 받고 그 죽은 자의 친척에게 시체를 내어주기는 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요셉이 실제로 예수의 친척이었다면, 그는 예수가 귀족계급임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된다.

그리고 만일 그가 예수의 친척이었다면 성배(왕족)와 그의 연개성은 훨씬 더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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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성혈 [ 9. 바라바는 누구였는가? ]
예수가 실제로 자녀를 가지고 있었다는 어떤 증거가 복음서들에 있는가?
명백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랍비들은 자녀들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사실로서 요청되었다. 만일 예수가 랍비였다면 그가 자식 없이 지낸 것은 가장 이례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랍비였건 아니었건 간에 자식이 없이 지냈다는 것은 이례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논증들 자체는 아무런 결정적인 증거도 되지 못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특수한 종류의 증거가 있다. 그 증거는 복음서들에서 바라바로 나타나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 바라바--왜냐하면 마태복음 원문에서 보면 그는 바로 이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로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밖의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일치는 놀라운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바라바(Barabbas)'라는 말의 어원과 의미를 확실히 알지는 못하고 있다. '예수 바라바'는 '예수 베라비(Berabbi)'의 와전 일 수도 있다. '베라비'는 최고의 그리고 가장 존경받는 랍비에게 붙여진 칭호로 그 랍비의 본명 뒤에 붙여 쓴다.

그러므로 '예수 베라비'가 예수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바라바'는 원래 '예수 바르 랍비(Bar Rabbi)' 즉 '랍비 아들 예수'이었을 수도 있다. 예수 자신의 아버지가 랍비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자신의 이름을 따라 이름지은 아들이 있었다면 그 아들은 '예수 바르 랍비'였을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즉 '예수 바라바'는 '예수 바르 아바(Bar Abba)'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그것이다. 그런데 '아바'는 히브리어로 '아버지'이기 때문에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름은 그 아버지가 어떤 방식으로건 특수한 인물이 아니라면 대단히 무의미한 명칭이다. 만일 그 '아버지'가 실제로 '하늘의 아버지'였다면 바라바는 또 다시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바가 될 것이다. 한편 예수 자신이 그 '아버지' 였다면 '바라바'는 또 다시 그의 아들을 가리키는 바가 된다.

그 이름의 어원과 의미가 무엇이든간에 바라바라는 인물은 대단히 호기심을 끄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에 관한 사건을 생각하면 할수록 불법적인 어떤 것이 진행되고 있으며 어떤 누군가가 어떤 무엇인가를 은폐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첫째, 막달라의 이름처럼 바라바의 이름도 고의적이고 조직적으로 모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전승에서 막달라가 창녀로 묘사되어 있는 것과 똑같이 거기에는 바라바가 '도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바라바가 그의 이름이 제시하는 것들 중의 어떤 것이었다 할지라도 일반적인 좀도둑이었을리는 없다. 그렇다면 왜 그의 이름이 모함되었는가? 그는 신약성서의 편집자들이 후세에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던 어떤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엄격하게 말하면 복음서들 자체는 바라바를 도적으로 기술하지는 않고 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그는 정치범, 즉 살인과 폭동의 혐의로 고소된 반역자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보면 바라바는 '유명한 죄수'로 묘사되어 있다.(마 27:16)

그리고 제4 복음서에서 보면 바라바는 'lestai(레스타이:도적)'라고 한다.(요 18:40) 이 말은 '강도'나 '산적'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그 말은 상당히 다른 어떤 것을 의미했다.
'Lestes(레스테스)'는 사실은 로마인들에 의하여 열성당원들에게 관습적으로 적용된 용어였다. 그런데 열성당원들은 얼마동안 사회적 봉기를 조장했던 호전적인 민족주의적 혁명가들이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바라바가 폭동죄를 지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으며 마태복음도 이러한 단언에 모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바라바는 열성당원이었다는 결론을 내려도 좋을법하다.
그러나 이것은 바라바에 관하여 입수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는 아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그는 그 도시에서 일어난 최근의 '소란' '선동' 또는 '폭동'과 연루되어 있었다. 역사는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어떤 소란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들은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는 불과 며칠 전에 시민적 소요가 있었다. 즉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었을 때의 소동이 그것이다. 바라바가 연루되어 그로 인하여 체포된 소동은 이것이었는가?

그것은 확실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럴경우 하나의 분명한 결론이 내려진다. 즉 바라바는 예수의 측근자 중의 하나였다는 결론이다.

오늘날의 학자들에 따르면 유월절에 한 명의 죄수를 놓아주는 '관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관례가 있었다 할지라도 예수대신 바라바를 선택했다는 것은 전혀 타당성이 없을 것이다. 만일 바라바가 실제로 일반범, 즉 살인범이엇다면 왜 백성이 그의 생명을 구하려 했을 것인가?

그리고 만일 그가 실제로 열성당원 또는 혁명가였다면 빌라도가 무해한 환상가 대신 그처럼 위험성 있는 인물을 석방했을 것이란 사실은 거의 타당성이 없다. 그 환상가는 분명히 빌라도에게 넘기기로 마련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서들에 있는 모든 모순들과 불일치들과 불가능성들 중에서도 바라바를 선택한 것은 가장 두드러지며 가장 불가해한 것이다. 분명 그처럼 서투르고 곤란한 조작의 배후에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현대의 작가는 하나의 흥미있고 그럴듯한 설명을 제안했다. 그는 바라바는 예수의 아들이었으며 예수는 합법적인 왕이었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라바를 선택한 것은 곧 이해될 것이다.

우리는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 즉 그의 출현 이전에 그처럼 많이 약속되었던 메시아의 임박한 죽음에 직면한 억압 받는 대중을 상상해야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개인보다는 왕조가 더 중요하지 않았겠는가? 혈통을 보존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며 따라서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지 않았겠는가? 두려운 선택에 직면한 백성은 차라리 그들의 왕의 자손과 혈통이 보존되도록 하기 위하여 왕이 희생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겠는가? 왕의 혈통이 보존된다면 적어도 미래에 대한 희망은 있을 것이다.
바라바가 예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노상 터무니 없지도 않다. 예수는 일반적으로 B.C 6년에 태어났다고 믿어지고 있다. 십자가 처형은 A.D 36년경에 일어났으며 그때 예수는 많아야 42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33세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그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그는 16세나 17세에 때 결혼했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결혼했다 할지라도 그는 13세가 되는 한 아들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13세가 되면 어른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어린이들은 모든 점에서 성인으로 인정될 수 있었을 것이며 또는 십자가 형에 관하여 그렇게 인정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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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성혈 [ 8. 십자가 사건 ]
간디가 성취한 업적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충분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정신적 지도자는 기존 정부에 위협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정당한 왕권을 가지고 있으며, 왕조를 수립할 자녀들을 가지고 있는 결혼한 사람은 훨씬 심각한 위협을 준다. 복음서속에는 예수가 실제로 로마인들에 의해 그러한 위험 인물로 간주된 증거가 있는가?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 서 있는 동안 그는 거듭해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려진다.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이러한 칭호의 죄패가 그의 십자가에 부착되기도 했다. 메사츄세츠 대학의 브랜던(S.G.F.Brandon) 교수가 주장하고 있듯이 십자가에 부착된 죄패는 신약성서에 있는 어떤 것 만큼이나 진정한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첫째, 그것은 사실상 아무 변경이 없이 네 권의 복음서들에 나타나고 있다. 둘째, 그것은 너무나 모욕적이고 난처한 사건이기 때문에 후대의 편집자들이 고안해 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마가복음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한 후에 거기 모인 고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막 15:12) 이것은 적어도 어떤 유대인들은 실제로 예수를 그들의 왕이라 불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네 권의 복음서 모두에서 보면 빌라도도 역시 예수에게 그러한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그가 조롱조로 그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제4 복음서에서 보면 그는 반대자들의 함성에도 불구하고 그런 칭호를 상당히 확고하고 심각하게 고집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세 권의 공관복음서들에서 보면 예수 자신도 그 칭호에 대한 빌라도의 주장을 인정하였다.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막 15:2) 영어 번역에서 보면, 즉 '네가 말했도다' 이러한 대답은 양면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아마 고의로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희랍어에서 보면 그 대답의 의미는 상당히 명백하다. 그것은 단지 '네가 옳게 말하였도다'라고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그 구절이 성서의 다른 곳에서 나타날 때는 언제나 이렇게 해석되고 있다.
복음서들은 A.D 68~74년의 반란 기간 동안과 그 후에 작성되었다. 즉 유대교가 조직적인 사회적, 정치적 군사적 힘으로서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작성되었다. 더구나 복음서들은 그리스 로마의 청중들을 위해 작성되었으며 필연적으로 그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했었다.

로마는 유대인들에 대한 처절한 싸움을 막 끝냈었다. 결국 유대인들이 악당들의 배역을 가지고 등장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더구나 유대인의 반란이 있은 직후였기 때문에 예수는 정치적 인물, 즉 전쟁을 유발시킨 선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된 인물로써 묘사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예수의 재판과 처형에 있어서의 로마인들의 역할은 미화되어져야 했으며 가능하면 동정적으로 묘사되어야 했다. 따라서 빌라도는 복음서들에서 십자가 처형을 마지못해 동의한, 죄가 없으며 책임감 있고 인내력 있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역사를 제멋데로 날조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에 있어서의 로마의 입장은 알만하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는 유대교의 장로회의인 산헤드린에 의해 최초로 정죄되었다. 그후 산헤드린의 장로들이 그를 빌라도에게 데리고 가 그 총독에게 그를 재판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것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세 권의 복음서들에서 보면 예수는 유월절 밤에 산헤드린에 의해 체포되어 기소된다. 그러나 유대의 율법에 보면 산헤드린은 유월절동안 모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복음서들에서 보면 예수의 체포와 재판은 산헤드린 앞에서 밤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산헤드린은 개인의 집에서, 또는 성전 경내 이외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밤에 모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복음서들에서 보면 산헤드린은 사형선고를 내릴 권한이 없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예수를 빌라도에게 데리고 간 이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사형선고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물론 십자가에 매달 형이 아니라 돌로 쳐 죽이는 사형선고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산헤드린이 예수를 제거하고자 했다면 그 자신의 권한에 입각하여 그를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구태여 빌라도를 귀찮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이 죄책을 로마로부터 전가시키려는 많은 다른 시도들이 있다. 그러한 시도들 중의 하나는 빌라도가 분명히 제시한 하나의 처방, 즉 군중이 선택하는 한 명의 죄수를 석방하겠다는 그의 제안이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따르면 이것이 '유월절의 관례'였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현대의 권위있는 학자들에 의하면 어떠한 정책도 로마인측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예수나 바라바 중에 하나를 석방하겠다는 제안은 순전히 허위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빌라도가 예수를 마지못해 정죄했다는 사실과 폭도의 위협에 마지못해 굴복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허위적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로마의 총독이, 그것도 빌라도처럼 잔인한 총독이 폭도들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러한 거짓 꾸밈의 목적도 아주 분명하다. 즉 로마인들을 무죄로 하고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로마의 청중이 예수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전적으로 무죄이었을 수는 없다. 아무리 로마 정부가 왕권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적 왕을 위험인물로 간주했다 할지라도 자극적인 행위를 공공연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전면적인 반란을 야기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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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성혈 [ 7. 예수 왕조 ]
만일 예수가 막달라와 실제로 결혼했다면 그러한 결혼은 어떤 특수한 목적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인가? 다시말해 그 결혼은 인습적인 결혼 이상의 어떤 것이었을 것인가? 그것은 정치적 관련성과 영향력을 가지는 모종의 왕조적 결혼이었을 것인가? 간단히 말해 그러한 결혼에 의해 이어진 혈통은 '왕족'이란 칭호를 충분히 보장해 주었을 것인가?


마태복음은 예수가 왕족이었음을, 즉 솔로몬과 다윗의 직계 후손으로 참된 왕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그는 팔레스타인 연합 왕국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자격은 합법적이기까지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부착된 죄패는 단순한 풍자적인 조롱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실제로 '유대인의 왕'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 있어서 그의 지위는 1745년의 보니 왕자 찰리의 지위와 유사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바로 그의 역할에 의하여, 즉 그의 나라와 유대 백성들을 통일시킬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헤롯과 로마에 모두 심각한 위협을 줄 수 있었을 제사장적 왕의 역할에 의하여 저항 세력을 유발시켰을 것이다.

어떤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헤롯의 '유아살해'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 사건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복음서들과 그 후의 전승에 의해 묘사된 것처럼 무시무시한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 헤롯측에서의 어떤 심각한 놀라움, 즉 자리를 빼앗기는 것에 대한 어떤 대단히 실제적인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헤롯은 극히 불안정한 통치자로 그의 신하들에 의해 미움을 받고 있었으며 단지 로마군대에 의해서만 지지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위치가 위태로왔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말해 어떤 신비적 또는 영적 구세주에 관한 소문에 의해 그렇게 심각한 위협을 받았을 리는 없다.

그런 소문은 이미 성지에서 어떤 방식으로건 널리 퍼져있었던 종류의 소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헤롯이 실제로 근심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대단히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위협, 즉 자기 자신보다 더 합법적인 왕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어떤 사람에 의해 야기된 위협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아살해'는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전승들은 헤롯측에서의 어떤 염려, 즉 어떤 경쟁적인 주장과 그 주장을 미리 제거하고자 하는 어떤 행동--이 행동은 헤롯측의 행동이 아님--에 관한 염려를 반영해주고 있다. 그러한 주장은 정치성을 띨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심각하게 생각되었음이 틀림없다.

예수가 그런한 왕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과는 상치된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었다는 것이 전혀 확실치가 못하다. '나사렛 예수'는 사실상은 '나사렛파 예수' 또는 '나사렛파의 사람 예수' 또는 '게네사렛의 예수'에 대한 와전 내지는 오역이다.

둘째, 나사렛이란 마을이 실제로 예수 당시에 있었느냐에 대한 상당한 의문이 있다. 그 마을은 어떤 로마의 지도, 문서, 그리고 기록들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곳은 탈무드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복음서들보다 먼저 작성된 사도 바울의 어떤 기록속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예수와 관련되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갈릴리의 군단들을 지휘했으며 그 지방의 마을들을 목록으로 작성한 그 시대의 가장 저명한 역사학자 요세푸스도 나사렛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해 나사렛은 68~74년의 반란 이후의 어느 때인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의 마을로 등장했을 것이며, 예수의 이름은 상당한 부분의 신약성서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의미론적 혼동--우연적이건 고의적이건--에 의하여 나사렛과 관련되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가 '나사렛'의 사람이었건 아니었건간에 그가 '가난한 목수'였다는 언급은 없다. 확실히 어떤 복음서도 예수를 그렇게 묘사하지는 않고 있다. 실제로 그들의 증거는 상당히 모순적이다. 예를 들면 그는 높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랍비 교육을 받았던 것처럼 보이며 가난한 사람들과 사귄 것만큼이나 빈번하게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사람들과도 사귀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와의 사귐이 그것이다. 그리고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잘 입증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결혼은 '평민'에 의해 행해진 검소한 예식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 잔치에는 적어도 수백명의 손님들이 참석한 호화스런 귀족적 모임의 모든 특징들이 다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마리아와 예수의 명령을 따르는 많은 하인들이 있다. '연회장'이 있다.


그 상황에 있어서 그는 일종의 집사장이었든가 아니면 심지어는 귀족이기도 했을 것이다. 가장 명백한 것은 엄청난 양의 포도주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을 때 그는 '복음성경'에 따르면 600리터에 달하는 포도주를 만들었다. 이는 800병 이상이 되는 양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소비된 술의 양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로 미루어 보아 가나의 혼인잔치는 귀족의 호화스런 잔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혼인잔치가 예수 자신의 잔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가 거기에 참석했으며 그의 모친이 참석한 사실은 그들이 동일 계급의 사람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렇게 볼 때에만 비로소 하인들이 그들에게 복종한 사실이 설명될 것이다.

만일 예수가 귀족이었다면, 그리고 그가 막달라와 결혼했다면 그녀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신분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그런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녀의 친구들 중에는 헤롯 궁중의 요직에 있는 관리의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훨씬 더 중요한 지위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소수도원 문서속에 있는 언급들을 추적하여 우리가 이미 발견했듯이 거룩한 도성이요,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원래 베냐민 지파의 소유지였다. 그후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은 다른 지파들과의 전쟁에서 대량으로 학살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도망쳤다. 그러나 소수도원 문서들이 주장하듯이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남아 있었다. 이 남은 자의 한 후손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는데 그는 자기가 베냐민 지파임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롬 11:1)

다른 지파들과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는 어떤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으며 이스라엘의 초대 왕실도 베냐민 지파였다. 그러나 사울은 결국 유대 지파의 다윗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리고 다윗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에게서 왕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수도를 세움으로써 그들의 정당한 소유지도 빼앗고 말았다.

모든 신약성서의 기록들에 따르면 예수는 다윗의 혈통이었으며 따라서 유다 지파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베냐민 지파에서는 그를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왕권 찬탈자로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베냐민 지파의 여인과 결혼하면 그러한 모든 적대감은 극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하나의 왕조적 동맹을 이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혼은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 결혼이었을 것이다. 그 결혼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강력한 제사장적 왕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이 원래의 정당한 소유자들에게로 환원되는 상징적 기능도 성취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결혼은 대중의 단결과 지지를 조장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며 예수가 가지고 있었을 그 왕권 또한 확고히 했을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막달라가 어느 지파였나를 암시하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러나 후세의 전승에서 보면 그녀는 왕족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베냐민 지파였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다른 전승들이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타당성이 있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한 그 결혼은 강력한 정치성을 띠고 있었다. 예수는 합법적인 왕권을 소유하고 있던 다윗 계열의 제사장적 왕이었을 것이다. 그는 상징적 의미를 띠는 왕조적 결혼에 의하여 그의 위치를 확고히 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는 그의 나라를 통일하고 그의 배후에 있는 민중을 동원하여 압제자들을 축출하고 꼭두각시를 폐위시키며 솔로몬 시대와 같은 왕국의 영화를 회복시킬 수 있는 안정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실제로 '유대인의 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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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성혈 [ 6. 사랑하는 제자 ]
만일 막달라와 베다니의 마리아가 동일 여인이라면 그리고 이 여인이 예수의 부인이었다면 나사로는 예수의 처남이었을 것이다. 복음서들에는 나사로가 실제로 그러한 처남의 지위를 누렸음을 암시하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나사로는 누가복음, 마태복음, 그리고 마가복음에는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그의 '죽의 자로부터의 부활'은 원래 마가복음 기록에 수록되어 있다가 그후 삭제되었지만 말이다. 결국 나사로는 제4 복음서인 요한복음을 통해서만 후세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죽음에서 일어난' 자에게 대한 대우 이상의 어떤 특혜적 대우를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점에서 볼 때 그는 제자들 자신보다도 더 예수와 가까운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복음서들은 그를 제자들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제자들과는 달리 나사로는 실제적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다. 제4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도 죽이기로 결정했다.(요 12:10) 나사로는 어떤 방법으로든 예수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 중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언급될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다. 이론상으로 볼 때 그는 한명의 제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로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도 역시 십자가 처형 시에 참석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예수에게 자기의 생명을 빚지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뻔뻔스런 배은망덕의 행위이다. 그는 그에게 직접 위협이 닥치고 잇었기 때문에 숨으러 갓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음서들에서 더 이상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극히 이상한 일이다.

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결코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찌 되었는가? 우리는 그 문제를 더 면밀하게 조사하고자 한다.

베다니에서 3개월 동안 머문 후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루 거리쯤 떨어진 요단강 기슭에 은거하였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나사로가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그에게 급히 전하였다. 그러나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은 나사로의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는 그 병든 사람을 대단히 중요한 어떤 사람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즉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이 들었나이다.(요 11:3)] 이 소식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분명히 이상하다. 그가 사랑한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을 도우러 황급히 돌아오기는 커녕 오히려 그는 그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처리한다.

즉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느님의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요 11:4)] 그리고 그의 말이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라면 그의 행동은 훨씬 더 그렇다. 즉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6)] 간단히 말해 예수는 그가 받은 급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요단강에서 이틀을 더 보냈다.

드디어 그는 베다니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때 그는 나사로가 이미 죽었다고 제자들에게 말함으로써 그의 이전 진술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놀라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나사로의 죽음이 어떤 목적에 기여했다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으며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1)] 라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네 절 뒤에서 그는 실제로 그 사건 전체가 주의깊게 조종되었으며 미리 배열된 사건이었음을 인정히고 있다. 즉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요 11:15)] 그러한 행동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행위라면 제자들의 반응도 적잖이 그렇다.

즉 [디모두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 (요 11:16)] 이것이 무슨 뜻인가? 만일 나사로가 실제로 죽었다면 제자들은 집단 자살을 함으로써 나사로를 따르려 하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예수 자신의 부주의, 즉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그가 들었을 때 취한 무관심과, 베다니에 돌아오는 것을 지체한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져야 하는가?

그 문제에 관한 설명들은 몰톤 스미드 교수가 주장하고 있듯이 다소간 표준적인 '신비 학파'의 입회식에 달려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스미드 교수가 설명하고 있듯이 그러한 입회식과 그에 부수되는 의식들은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에서 상당히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그 의식들에는 때때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수반되었다. 즉 상징적인 죽음과 재생, 재생의 모태가 되었던 무덤에의 격리, 오늘날 세례라고 불리워지는 의식, 즉 상징적인 침례, 그리고 그 예식을 주재하는 예언자나 마술사의 피와 동일시 되었던 한 잔의 포도주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컵으로부터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제자는 그의 스승과의 상징적 일치를 성취한다. 즉 제자는 그의 스승과 신비적으로 '하나'가 된다. 사도 바울이 세례의 목적을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하여서인데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예수 자신도 최후의 만찬에서 동일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스미드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예수의 행적은 그 당시의 다른 마술사들, 치유자들, 기적을 행하는 자들의 행적과 대단히 유사하다. 예를 들면 네 권의 복음서들 전체를 통하여 그는 언제나 그가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은밀하게 만나거나 아니면 그들하고만 조용하게 이야기 한다. 그후 그는 때때로 그 일어난 것을 누설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일반 대중에 관한 한 그는 언제나 은유적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예수가 요단강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전형적인 의식에 입회하여 그러한 의식들이 전통적으로 행했듯이 상징적인 부활과 재생에 이르는 절차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여기에 비추어 볼 때 '그와 함께 죽고자 한' 제자들의 바램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달리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사건 전체에 대한 예수의 자기만족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다는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정말로 나사로가 죽은 줄 알고 당황해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그 관습을 오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의식이 무엇인가 잘못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그 사건 전체는 교묘하게 고안된 하나의 연출로 그 참 성격 목적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었을 수도 있다.

만일 나사로 사건이 의식적인 입회식을 반영하고 있다면 그는 대단히 특혜적 대우를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제자들 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입회식을 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제자들은 나사로의 특권을 결정적으로 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대체 왜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베다니의 이 젊은이가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하는가? 왜 그는 제자들이 그처럼 그와 함께 하고 싶어하는 경험을 해야 하는가? 왜 카르포크라테스파의 사람들처럼 후세의 신비적 경향을 띤 이교도들이 그 문제를 그렇게 많이 다루었는가? 그리고 왜 그 사건 전체가 마가복음에서 삭제되었는가? 아마도 나사로는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예수가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나사로는 예수와 어떤 특별한 관계, 즉 처남의 관계와 같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둘 다 일지도 모른다.

예수가 나사로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 것은 정확하게 말해 나사로가 예수의 처남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그 사랑은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다. 예수가 베다니에 돌아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하여 울 때 또는 울음을 가장할 때 구경꾼들은 소식을 전한 자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 하여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요 11:36)]라고 하였다.

나사로 이야기가 나타나는 요한복음의 저자는 어디에서도 자기를 '요한'이라고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가장 독특한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받는 제자','예수가 사랑했던 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가 그의 동료들보다 더 독특하고 특혜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예를들면 최후의 만찬에서 그는 예수와 그의 개인적인 친밀성을 과시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밀고자를 가르쳐 준 것도 그에게만이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3)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요 13:24)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주여 누구오니까(요 13: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어셔다가 가롯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요 13:26)

제4 복음서가 그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는 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누구인가? 모든 증거가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사실상 '예수가 사랑하시는 자'인 나사로이다. 그렇다면 나사로와 '사랑하시는 제자'는 하나의 동일 인물이며 나사로가 '요한'의 실제 정체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거의 불가피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만이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유명한 성서 신학자이며 사해 두루마리들에 대한 일류 전문가들 중의 하나인 윌리엄 브라운리(William Brownlee)교수에 따르면 "제4 복음서에 있는 내적 증거를 보아......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다니의 나사로라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나사로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하나의 동일 인물이라면 수많은 예외들이 설명되어질 것이다. 나사로가 불가사의하게 성서기록에서 사라진 것과 그가 십자가 처형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설명되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나사로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나사로는 십자가 사건에 참석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가 그의 모친의 보호를 의탁한 것은 나사로에게였을 것이다. 예수가 한 말들은 처남에게 하는 말들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 19:26)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신지라(요 19:27)

이 인용구의 마지막 말이 특히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에 있는 그들의 집을 떠나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사실상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사로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집은 예수 자신이 때때로 묵었던 베다니에 있는 집이었다.

제사장들이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다고 언급된 이후로 나사로라는 이름이 다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가 실제로 '사랑하시는 제자'라면 그는 결코 자취를 감추지 않고 제4 복음서의 끝까지 그의 활동들이 추적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의 연구를 보충해 주는 묘한 사건이 있다. 제4 복음서의 끝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죽음을 예언하며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한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로다.(요 21:20)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요 21: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라(요 21:23)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 21:24)

어법이 애매하기는 하지만 이 구절의 취지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랑하시는 제자'는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도록 지시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본문 자체는 이 오심이 '재림'이라는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반대로 그것은 훨씬 더 현세적인 어떤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그의 다른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한 후 '사랑하시는 제자'를 위한 어떤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본문은 마치 그들이 특수하고 구체적인 타협을 이루어야 하며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만일 '사랑하시는 제자'가 나사로라면 다른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그러한 결탁은 어떤 전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십자가에 다리기 전 주에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였다. 그리고 메시아에 관한 구약성서 예언들과 일치되게 하기 위하여 그는 멍에를 매지 않은 나귀를 탔음에 틀림없다.(슥 9:9~10) 따라서 나귀가 구입되었음에 틀림없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는 두 제자를 베다니로 파견하며 그곳에 가면 나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그 나귀 주인에게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라고 말하도록 지시된다. 모든 것이 예수가 예언한 바 그대로 일어나자 그것은 기적의 일종으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그 사건에는 실제로 어떤 점이 있는가? 그 사건은 단지 주의깊게 짜여진 계획임을 입증해 주지 않는가? 그리고 지정된 때에 나귀를 준비한 베다니의 그 사람은 나사로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것은 휴 손필드(Hugh Schonfield)교수의 결론이다. 그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배열들은 나사로에게 맡겨졌으며 다른 제자들은 그것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의 추종자들 중에는 하나의 내부적 모임, 즉 협력자들의 핵심, 음모 단원들, 또는 가족들이 있었는데 예수는 그들에게만 자기의 비밀을 털어 놓았음이 입증된다.

숀필드 교수는 나사로도 그러한 모임의 일원이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의 확신은 베다니에서의 입회식 또는 상징적인 죽음에 의하여 나사로가 특혜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스미드 교수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베다니는 예수가 주도한 독특한 의식들을 위한 제의적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다른 수수께끼적 베다니 사건을 설명해 줄 수도 있다. 시온 수도회는 렌느 르 샤토에 있는 베다니의 문을 '베다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소니에르는 시온 수도회의 요구에 따라 그의 별장을 '빌라베다니아'라고 명명하였다.

어쨌든 '베다니 사람'으로부터 나귀를 끌어내는 것처럼 보이는 그 결탁은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그가 돌아올 때까지 남아있으라고 명령하는 제4 복음서의 수수께끼같은 종결에서 다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와 '사랑하시는 제자'는 수행해야 할 계획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들에는 예수 집안을 돌보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십자가에 달릴 때 그는 이미 그의 모친을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돌보도록 부탁했었다. 만일 그가 부인과 자녀들이 있었다면 아마 그들도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물론 '사랑하시는 제자'가 실제로 그의 처남이었다면 이것은 훨씬 더 그럴듯 할 것이다. 훨씬 후세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모친은 제4 복음서가 쓰여졌다고 하는 에베소에서 망명 생활중 사망했다. 그러나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의 모친을 생전에 모셨다는 어떤 언급도 없다. 숀 필드 교수에 따르면 제4 복음서는 에베소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어떤 희랍인 장로가 거기에서 그 복음서를 자기 생각에 맞추어 집필하고 개정하고 편집하였을 것이다.

만일 '사랑하시는 제자'가 에베소에 가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만일 그와 나사로가 동일 인물이라면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승에 따르면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 상당히 명백하기 때문이다. 전승에 따르면 어떤 초대교회의 작가들은 물론이고 나사로, 막달라, 마르다, 아리마대 요셉과 몇몇 다른 사람들도 배를 타고 마르세이유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요셉은 빌립에 의해 성직임명을 받았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그는 영국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글래스터버리에다 한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나사로와 막달라는 고올(Gaul)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막달라는 액생 프로방스(Aix en Provence)가 아니면 생 봄므에서 죽었으며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 최초의 주교관구를 설치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들의 동료들 중의 하나인 생 막시밀리앙은 나르본에 최초의 주교관구를 창설했다고 한다.

만일 나사로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그들이 동시에 사라진 것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참 '사랑하시는 제자'인 나사로는 그의 누이와 함께 마르세이유에 상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승에 따르면 나사로의 누이는 성배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망명을 위한 준비는 제4 복음서의 끝부분에서 예수가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와 함께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성배와 성혈 [ 5. 예수의 아내 ]
만일 예수가 결혼했다면 복음서속에는 그의 부인에 관해 어떤 암시들이 있는가?
언뜻 볼 때 두 명의 가능한 후보자들, 즉 그의 어머니 이외에 복음서속에서 그의 측근자들로 거듭하여 언급되고 있는 두 명의 여인들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들중 첫번째 여인은 막달라, 즉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갈릴리의 미그달(Migdarl) 또는 막달라(Magdala)라는 마을 출신의 마리아이다.

네 복음서 모두에서 이 여인의 역할은 대단히 모호하며 고의로 불명료하게 다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기록에서 보면 그녀는 상당히 후에 가서야 비로소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그녀가 등장하는 것은 십자가 처형 당시 유대에서이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의 추종자들 중에 포함된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 보면 그녀는 예수가 아직 갈릴리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인 예수 사역의 비교적 초기에 등장한다. 따라서 그녀는 갈릴리에서 유대까지 예수를 따라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그 두 지방 사이를 예수의 시녀처럼 따라다니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것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가와 결혼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해 준다.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동행도 없이 여행하는 것은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어떤 종교적 교사와 그의 측근인이 동행하지 않고 여행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전승들은 이런 곤란한 사실을 잠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때로 막달라는 예수의 제자 중 누구인가와 결혼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예수와 그녀의 특별한 관계 및 예수에 대한 그녀의 친밀성 때문에 그들은 둘 다 간음의 혐의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소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전승과는 달리 막달라는 복음서의 어디에서도 창녀로 언급된 바가 없다. 그녀가 누가복음에서 처음 언급되고 있을때 그녀는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예수가 행한 일종의 귀신 축출을 언급하는 것으로, 막달라가 '귀신 들렸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구절은 동시에 모종의 종교의식이나 또는 의식적 입회식을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들면 이스타르(Ishtar) 또는 아스타트(Astarte)의 제사의식은 일곱 단계의 입회식을 포함하고 있었다. 예수와 만나기 이전에 그녀는 그러한 제사의식과 관련을 맺고 있었을 수도 있다. 미그달 또는 막달라는 '비둘기 마을'이었다. 그리고 제사용 비둘기들이 실제로 그곳에서 사육되었다는 어떤 증거가 있다. 그런데 비둘기는 아스타트의 거룩한 상징이었다.

막달라에 관하여 말하기 전의 한 장에서 누가는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부은 한 여인을 언급하고 있다. 마가복음에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여인이 기름을 붓는 유사한 사건이 있다. 누가도 마가도 이 여인을 막달라와 분명하게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가는 그녀가 '타락한 여인' 곧 '죄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의 주석자들은 막달라는 일곱 귀신이 들렸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죄인이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근거하여 볼 때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과 막달라는 동일인물로 간주 되어졌다.

사실 그 둘은 동일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만일 막달라가 비교적 제사의식에 관련을 맺고 있었다면 그것 때문에 누가 뿐만 아니라 보다 이후의 필자들도 역시 그녀를 '죄인'으로 간주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만일 막달라가 '죄인'이었다면 그녀는 일반적인 전승의 '창녀'이상의 어떤 인물이기도 하였음이 아주 명백하다. 그녀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면 누가는 그녀의 친구들 중에는 헤롯 궁중의 고관의 아내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재원으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지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도 역시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마가복음에는 그 의식이 수행되는데 사용된 향유의 귀중함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기름부음 사건 전체는 상당히 중요한 사건인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왜 그 사건은 복음서속에서 그처럼 강조되었는가?

그 사건의 성격으로 보아 그것은 일시적인 충동 표현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인다. 그 사건은 주의깊게 미리 계획된 의식인 것이다. 우리는 기름을 붓는 것은 왕들의 전통적인 특권이며 '기름부음 받은자'를 의미하는 '정당한 메시아'의 전통적인 특권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볼 때 예수는 그의 기름부음에 의하여 진정한 메시아가 된다는 결론이 생긴다. 그리고 그런 장엄한 역할로 그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막달라가 예수 사역의 말기에는 극히 중요한 인물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세권의 공관복음서속에서 보면 그녀의 이름은 언제나 예수를 따른 여인들의 명단 맨 앞에 나타난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남자 제자들의 명단 맨 앞에 나오는 것과 똑같다. 분명 그녀는 십자가 처형 후에 빈 무덤을 목격한 최초의 증인이었다. 모든 예수의 신봉자들 가운데서도 예수가 그의 부활을 최초로 드러내 보여준 것은 막달라에게서였다.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보면 예수는 막달라를 독특하고 우선적인 태도로 대하고 있다. 그러한 대우는 다른 제자들에게 시기심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후대의 전승은 막달라의 배경을 추하게 만들고자 했음이 아주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를 창녀로 묘사한 것은 예수와의 관계가 그들 자신의 관계보다 더 밀접했던 어떤 여인의 명성을 공격하고자 하여 지나치게 인간적인 시기심이 발동한 어느 좋지 못한 추종자의 지나친 보복이었을 수도 있다.

예수의 생존 동안이건 그 후이건간에 다른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영적 지도자와 막달라와의 독특한 결속을 시기했다면 후세의 눈에 그녀가 좋지 않게 보이도록 의도했을 수도 있다. 그녀가 하잘것 없는 여자로 격하된 데는 이의가 없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녀를 창녀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에는 창녀들의 집을 '막달라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복음서 자체는 그녀의 이름이 이러한 창녀로 낙인 찍힐 아무런 이유도 없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막달라의 지위가 무엇이든간에 그녀만이 예수의 부인이 될 후보자는 아니다. 제4 복음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베다니의 마리아, 즉 마르다와 나사로의 누이와 동일시될 수 있는 또 다른 여인이 있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예수와 대단히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부자 이기도하여 예수와 그의 측근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집을 예루살렘 근교에 가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나사로 사건은 이집에는 개인 무덤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개인 무덤은 당시로서는 사치한 장식이었으며, 부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귀족적 혈통을 입증해 주는 지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모든 현대의 도시에서처럼 성서시대의 예루살렘에서도 땅은 아주 귀하였다. 그래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유 묘지를 가질 수 있었다.

제4 복음서에 보면 나사로가 병이 걸렸을 때 예수는 몇일동안 베다니를 떠나 그의 제자들과 함께 요단강에 머물고 있었다. 나사로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는 이틀을 더 지체한 후--이 것은 참으로 기이한 반응이다--베다니로 되돌아 왔다.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들어간 후였다.

그가 도착하자 마르다가 그를 맞으러 뛰어나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요 11:21)라고 울부 짖었다. 도대체 왜 예수의 몸이 그곳에 있었다면 그 남자가 죽지 않았을 것인가? 그것은 난처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중요성은 마르다가 예수를 맞으러 나올 때 그녀가 혼자였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도 그녀와 함께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으며 예수가 그녀에게 나오라고 명하기까지 그녀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마리아가 집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유대의 관습에 따라 그녀는 상복을 입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녀는 예수가 돌아 올 때 마르다와 함께 맞으러 뛰어 나오지 않았는가? 그것은 명백히 설명될 수 있다. 그 당시 유대교의 율법에 의하면 상복을 입고 있는 여인은 그녀의 남편이 명령할 때 이외엔 그 집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이 사건에서 예수와 베다니의 마리아의 행동은 유대의 남편과 부인의 전통적인 처신에 부합된다.
예수와 베다니의 마리아가 결혼했을 가능성에 대해 추가할만한 증거가 있다. 그 사건은 누가복음에서 다소 그릇되게 나타나고 있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며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 10:38)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 10:39)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누나.(눅 10:41)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


마르다의 간청으로 볼 때 예수가 마리아에 대하여 모종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예수의 대답이다. 어떤 다른 문맥에서라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이 대답을 결혼에 대한 암시라고 해석할 것이다. 어쨋든 그것은 베다니의 마리아가 막달라 만큼이나 열성적인 제자였음을 암시함이 분명하다.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과 막달라를 하나의 동일 인물로 간주하는 데에는 확고한 이유가 있다. 이 인물이 나사로와 마르다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동일 인물일 수는 없을까? 복음서 속에서 서로 다른 3개의 문맥에 나타나는 이 세 여인들이 실제로는 단일 인물일 수는 없을까?

중세의 교회는 그들을 단일 인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며 일반적인 전승도 그렇게 생각했다. 많은 성서학자들도 오늘날 일치하고 있다. 그러한 결론을 지지하는 많은 증거가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은 모두 막달라를 십자가 사건에 참석하고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들 중 어느 것도 베다니의 마리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베다니의 마리아가 그처럼 헌신적인 제자였다면 그녀가 참석하지 않은 것은 나태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가--그녀의 오라비 나사로는 말할 것도 없고--예수 생애의 절정의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함이 믿을 수 있는 일인가? 그러한 생략은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분명 그녀는 참석했는데 복음서에 의해서는 막달라란 이름의 사람으로 인용되었음이 분명하다. 막달라와 베다니의 마리아가 하나의 동일 인물이라면 베다니의 마리아가 십자가 사건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막달라는 베다니의 마리아와 동일시 될 수 있다. 막달라는 또한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과 동일시 될 수 있다. 제4 복음서는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을 베다니의 마리아와 동일시하고 있다. 실제로 제4 복음서의 필자는 그 문제를 상당히 명백하게 다루고 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요 11:1)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더라.(요 11:2)

다시 한 장 뒤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요 12:1)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요 11:2)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수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따라서 베다니의 마리아와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은 동일 여인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명백하게 동일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이 여인이 또한 막달라이기도 하다는 것은 확실히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만일 예수가 실제로 결혼했다면, 그의 부인에는 단 하나의 후보자 즉 복음서들에서 서로 다른 명칭들로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거듭해서 나타나는 한 여인만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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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성혈 [ 4. 예수의 결혼 ]
복음서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복음서들을 식별해 내려고 했을 뿐이다. 즉 가능성 또는 타당성 있는 진리의 어떤 단편들을 발견해 내어 그 단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장식적인 틀로부터 그 진리의 단편들을 골라내고자 했을 뿐이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아주 정확한 성질의 단편들, 즉 예수와 막달라라는 여인과의 결혼을 입증해 줄 수 있는 단편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한 증거들은 명백하지 않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증거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글에 나타난 것 이외의 것을 알아내야 하며, 어떤 괴리들을 채워야 하며, 어떤 휴식과 생략을 설명해야 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생략된 것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며, 풍자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며 애매한 언급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의 증거를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우리는 결혼에 도움을 주었을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증거도 찾아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탐구에는 명백히 구별되지만 밀접하게 관련된 수많은 질문들이 포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질문들 중에서 가장 분명한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복음서속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간에 예수가 실제로 결혼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물론 그가 결혼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어떤 진술도 없다. 반대로 명확하게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진술도 없다. 이것은 언뜻 보기보다는 더 흥미있고 더 의미심장한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게자 베머스(Geza Vermes) 박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예수의 결혼에 관해서는 복음서들이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대 유대 사회에 있어서 그러한 태도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더 탐구해 볼 만하다. 복음서들은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를 들면 베드로가 결혼했다는 것을 진술해 주고 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예수 자신은 독신생활을 옹호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마태복음에서 보면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19:4~5) 이러한 진술은 독신생활에 대한 명령과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예수가 독신 생활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았다면 그가 독신생활을 했다고 추측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 당시 유대의 관습에 따르면 남자가 결혼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어떤 공동체에 속한 일부의 엣세네파 사람들을 제외하면 독신생활은 강한 비난의 대상이었다. 1세기 후반의 어떤 유대교 작가는 고의적인 독신생활을 살인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 하나 뿐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유대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위해 부인을 찾아주는 것은 그의 아들이 할례를 받았음을 보증하는 것만큼이나 의무화되어 있었다. 만일 예수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은 대단히 이채로왔을 것이다. 그 사실은 주목거리가 되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예수를 특징짓고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데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로 인하여 그는 어떤 중대한 의미에서 그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소외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서 기록들 중에 적어도 하나는 그처럼 두드러진 관습으로부터의 이탈을 다소라도 언급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만일 예수가 실제로 후세의 전승이 주장하는 것처럼 독신주의자 였다면 그러한 독신생활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독신생활에 관한한 예수가 그 당시의 전통과 문화에 따랐음을, 즉 간단히 말해서 그가 결혼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복음서들이 그 문제에 침묵하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것이다. 그 논쟁은 한 존경받는 현대의 신학자에 의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런 문화적 배경이 확실하다고 볼 때 예수가 그의 포교를 시작하기 전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만일 그가 독신생활을 강조했다면 하나의 소동, 즉 거부 반응이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흔적은 다소나마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속에 예수의 결혼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결혼 가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강한 논증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의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독신생활을 하거나 그를 옹호하는 것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따라서 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남아있었을것이다.

결혼 가설은 복음서 속에서 예수에게 빈번히 적용된 '랍비(Rabbi)'라는 칭호에 의하여 훨씬 더 확고하게 된다. 물론 이 용어가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단순히 자칭 교사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교육수준--예를 들면 그가 성전에서 장로들에게 그의 지식을 과시한 것--으로 보아 그는 자칭 교사 이상의 사람이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으로 보아 그는 모종의 공식적인 랍비 훈련을 받았으며 공식적으로 랍비로서 인정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를 엄격한 의미에서의 교사로서 묘사하고 있는 전승에 부합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엄격한 의미에서의 랍비였다면 결혼은 개연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확실하였을 것이다. 유대교의 미슈나 율법은 그 문제에 관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교사가 될 수 없다]라고 상당히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다.

제4 복음서에서 보면 결혼과 관련된 하나의 사건이 있다. 그것이 사실은 예수 자신의 결혼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사건은 가나의 혼인잔치이며 대단히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친숙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두드러진 문제들이 수반되고, 그 문제들은 모두 정당한 이유가 있다.

제4 복음서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가나의 결혼잔치는 검소한 시골 예식, 즉 신랑과 신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전형적인 시골 결혼식인 것처럼 보인다. 이 결혼 잔치에 예수가 특별히 초대되었다. 이것만으로도 기이하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사실상 그의 포교를 시작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훨씬 더 기이한 것은 예수의 어머니가 바로 그 잔치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참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그의 아들에게 포도주를 보충해 달라고 귀띔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에게 명령하고 있다. 그녀는 마치 주인처럼 행동하고 있다. [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에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2:3~4) 그러나 마리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 아들의 항변을 무시한다.

[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하라 하니라 ](5) 그리고 그 하인들은 마치 그들이 마리아와 예수로부터 명령 받는데에 익숙해 있기나 한 것처럼 즉시 따르고 있다.
그녀와의 관련성을 부인하려는 예수의 명백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그를 설복시킨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첫번재 이적, 즉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적을 행한다. 복음서에 관한한 그는 그때까지는 그의 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의 그런 이적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 타당성이 없는 일이다. 설령 타당성이 있다 할지라도 왜 그러한 독특하고 거룩한 재능을 그처럼 일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했는가? 왜 마리아가 그의 아들에게 그러한 요청을 했는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왜 결혼 잔치에 참석한 두 명의 '손님들'이 음식장만을 책임져야 했는가? 그것은 관습상 주인의 책임인 것이다. 당연히 가나의 혼인 잔치는 예수 자신의 혼인 잔치이다. 그렇다면 포도주를 준비하는 것은 실제로 그의 책임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가 실제로 예수 자신의 혼인 잔치였다는 그 이상의 증거도 있다. 그 이적이 행해진 직후에 연회장(예식 감독자)이 새로 내 온 포도주를 맛보았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요2:9~10) 이 말들은 분명히 예수에게 한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말을 '신랑'에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분명한 결론은 예수와 '신랑'이 하나의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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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성혈 [ 3. 복음서들의 역사 ]
복음서들은 확인할 수 있고 구체적인 역사적 실제로부터 생겨났다. 그것은 억압의 실체였으며 시민적 사회의 불평의 실체였으며 정치적 불안의 실체였으며 끊임없는 박해와 간혈적인 반역의 실체였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에를 태우는 약속, 소망, 그리고 꿈으로 가득찬, 즉 의로운 왕이 나타날 것이며 영적 세속적 지도자가 나타나 자기 백성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소망과 꿈으로 가득찬 실체이다.
정치적 자유에 관하여서는 그러한 열망들이 66년과 74년 사이에 있었던 비참한 전쟁에 의하여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하지만 전적으로 종교적 형태로 변형된 그 열망들은 복음서들에 의해 영속화되어졌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새 힘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복음서들이 예수의 생존시에 생겨나지 않았다는 데에 모두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대부분의 복음서들은 유대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커다란 폭동, 즉 66년에서 77년 사이의 폭동과 132년에서 135년 사이의 폭동이 일어난 중간 기간에 기원되었다. 물론 복음서들의 설명들이 그 폭동들의 중간기보다 더 이전의 것에 근거하고 있음은 거의 확실하긴 하지만 말이다.이러한 이전의 설명들은 기록된 문서들--그 문서들은 첫번째 반란 으로 모든 기록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을 포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전도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이 구전들 중의 어떤 것들은 대단히 과장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제2, 제3, 제4의 인물에게서 왜곡되어 받아들여졌고 전달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밖의 다른 것들이 예수의 생존시에 살아있었으며 심지어는 예수를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을 수도 있는 사람들로부터 기원되었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 당시에 젊었던 사람은 복음서들이 작성될 때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복음서들 중 최초의 것은 일반적으로 마가복음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후대의 그럴 듯한 추가물인 부활에 관한 기사를 제외하면 66년~74년의 반란 기간중의 어느 때이든가 아니면 그 반란 직후에 작성되었다. 예수의 원래 제자들 중의 하나는 아니었지만 그는 예루살렘 출신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사도 바울의 동료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복음서는 바울적 사상의 분명한 흔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가는 예루살렘 출신이었지만 그의 복음서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진술하고 있듯이 로마에서 작성되었으며 그리스 로마 문화권의 청중에게 보내어졌다.

이것은 대단히 타당성이 있다. 마가복음이 작성되었을때 유대는 한창 반란이 진행되고 있었거나 아니면 반란이 그 반란이 막 끝났었다. 그리고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로마 정권에 대한 반역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만일 마가가 그의 복음서가 계속 잔존하여 로마의 청중에게 감명을 주길 바랬다면 그는 예수를 반로마적인 인물로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마가는 예수를 결코 정치적 경향을 띤 인물로 그럴 듯하게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메시지가 확실하게 잔존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로마인들을 죄가 없는 것처럼 다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즉 당시의 견고한 정권을 변호하고 메시야의 죽음을 어떤 유대인들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안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서만 채용되었을 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 교회에 의해서도 채용되었다. 그러한 방안이 아니었다면 복음서들도 교회도 살아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누가복음의 연대를 A.D 80년 경으로 잡고 있다. 누가 자신은 희랍인 의사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로마 중심지인 가이사랴의 어떤 고위 로마 관리를 위하여 그의 복음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므로 누가에게 있어서도 역시 로마인들을 회유하고 달래며 책임을 다른데로 전가시키는 것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마태복음이 작성되었을 무렵인 A.D 85년 경에는 그러한 책임 전가가 기정 사실로 인정되었던 것처럼 보이며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마태복음은 원래 희랍어로 작성되었으며 특별히 희랍적 특징들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실 그 책의 절반 이상은 마가복음에서 직접 연유된 것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유대인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데 팔레스타인에서 피난온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는 마태라는 이름의 제자와 혼동되어서는 안되다. 마태라는 제자는 훨씬 이전에 살았을 것이며 아마도 아랍어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복음,누가복음 그리고 마태복음은 통틀어 '공관복음서'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의견이 일치하다] 또는 [같은 목적을 가지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복음서들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그것들이 구전 전승이든 그후 소실된 기록 문서이건간에 하나의 단일 공통 자료에서 유래되었음을 암시하는 충분한 공통점이 있다. 이로 인하여 그 복음서들은 상당히 다른 기원을 가지는 요한복음과는 구별된다.
제4 복음서의 저자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실제로 그의 이름이 요한이었다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세례 요한을 제외하면 요한이란 이름은 그 복음서의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복음서의 저자가 요한이라 불리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후대의 전승으로 간주되고 있다.

제4 복음서는 신약성서에 있는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나중의 것으로 A.D 100년경 그리스의 에베소 근방에서 작성되었다. 그 복음서는 독특한 특징들을 나타내 거기에는 출생 장면이 없으며 예수의 출생에 관하여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다. 서론 부분은 거의 영지주의적이며 그 본문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훨씬 더 신비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도 다르다.
다른 복음서들은 무엇보다도 갈릴리 북방에서의 예수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남쪽에서의, 즉 유대와 예루살렘에서의 사건들--십자가 사건을 포함하여--에 관해서는 간접적인 지식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4 복음서는 갈릴리에 관해서는 비교적 적게 언급하고 있다.

그 복음서는 예수의 행적이 끝을 맺고 있는 유대와 예루살렘에서의 사건들을 남김없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에 관한 그 복음서의 설명은 어떤 직접적인 목격자의 증언에 궁극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복음서는 또한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수많은 사건들도 수록하고 있다. 즉 가나의 혼인잔치,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이 한 일들, 그리고 나사로를 일으킨 것 등이 그것이다.--나사로의 사건은 마가복음에 한때는 수록되어 있었다--그러한 요인들에 근거하여 오늘날의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비록 후에 작성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4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 장확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복음서들 중에서도 특히 요한복음은 마가복음,누가복음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없는 다른 자료들에 의존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예수와 동시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전승들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현대의 연구자는 그 복음서가 A.D 66년의 반란 이전의 예루살렘에 관한 분명히 직접적인 지형학적 지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바로 그 연구자는 [제4 복음서 배후에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무관한 하나의 고대 전승이 놓여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한 사람만의 의견이 아니다. 사실 그러한 견해는 현대의 성서 학자들 사이에 가장 널리 퍼져있는 견해이다. 또 다른 사람에 따르면 요한복음서는 마가적인 편년체적 체계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 연대가 훨신 후대의 것이긴 하지만 원초적이며 확고부동한 것임이 틀림없는 예수에 관한 어떤 전승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자신의 탐구에 근거하여 우리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즉 제4 복음서는 비록 그것도 다른 복음서들처럼 손질되고 편집되고 삭제되고 개정되긴 하였지만 신약성서의 책들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다.

우리의 탐구에 있어서 우리는 네 개의 복음서들에 모두 의존해야 할 이유가 있으며 많은 부수적인 자료들에도 의존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지론적인--아직은 그렇다--가정을 위해 가장 설득력있는 증거를 발견한 것은 제4 복음서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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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성혈 [ 2. 예수시대의 팔레스타인 ]
1세기의 팔레스타인은 대단히 어수선한 곳이었다. 얼마동안 성지는 왕조적인 투쟁들, 피비린내나는 싸움, 그리고 때로는 전면적인 전쟁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B.C 2세기에는 마카베 형제들에 관한 두권의 외경서들에 의해 기록되어 있듯이 다소 통일된 유대 왕국이 잠시 동안 수립되었다. 하지만 B.C 63년이 되자 그 땅은 다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었으며 정복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예수의 출생 50여년 전에 팔레스타인은 폼페이우스의 군대에게 함락되었으며 로마의 법률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로마는 너무나 광대하였으며 로마 자신의 사건들로 골치를 앓고 잇엇기 때문에 직접적인 통치에 필요한 행정적인 조직체를 설치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로마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 통치할 일련의 분봉왕들을 세웠다. 이 분봉왕 계열은 유대인이 아니라 아라비아인이었던 헤롯 집안이었다. 그 계열의 첫번째 인물은 B.C 63년에 팔레스타인의 왕좌를 차지한 안티파터(Antipater)였다. 그가 B.C 37년에 죽자 그의 아들 헤롯대왕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는 B.C 4년까지 통치하였다.

우리는 무력으로 유지되는 꼭두각시 정권에 의해 통치된 피정복 국가와 피정복 백성을 상상하게 된다. 그 나라의 백성은 그들 자신의 종교와 관습을 보존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인 권위는 로마였다. 이러한 권위는 로마법에 따라 수행되었으며 로마군대에 의해 강화되었다. 얼마후 영국에서도 그랬었다.--즉 영국의 식민지 정책과도 비슷하다.

A.D 6년에는 그 상황이 더 급박하게 되었다. 이 해에 그 나라는 행정적으로 두 개의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즉 유대와 갈릴리로 분할되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왕이 되었다. 그러나 정신적 세속적 중심지였던 유대는 직접적인 로마법에 종속되게 되었으며 가이사랴에 근거를 둔 로마의 총독에 의해 다스려졌다. 로마 정권은 야만적이고 독재적이었다. 로마가 유대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을때 2천명 이상의 저항자들이 즉석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약탈되고 더럽혀졌다.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다. 고문이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A.D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의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도 호전되지는 않았다.

그에 대한 성서적인 묘사와는 반대로 현존하는 기록들은 빌라도가 잔인하고 부패한 인간으로 전임자의 학대를 계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강화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서들에 로마에 대한 비판이 없으며 로마의 멍에의 짐에 대해서 조차도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이다. 적어도 언뜻 보기에는 그렇다 실제로 복음서 설명들은 유대의 거주자들이 평온하였으며 그들의 운명에 만족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만족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은 전혀 평온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 성지에 있던 유대인들은 대개 여러 분파들로 나뉘어질 수 있었으며 더 작은 분파들로 세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적지만 부유한 지주계급으로 로마인들에게 협조한 반역자들이었는데 이것이 동족들의 분노를 샀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에 많은 개혁을 도입하였으며 복음서들에 있는 묘사와는 달리 소극적이긴 하였지만 로마에 강하게 저항하였던 진보적인 무리이다.

엣세네파는 엄격하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띤 종파. 이 종파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거나 추정되는 것보다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고 영향력도 컸다. 보다 작은 분파들 가운데는 그 정확한 특징이 오래 전에 역사에서 사라져 정의하기가 곤란한 많은 분파들이 있다. 하지만 나실인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수세기 전의 삼손도 그중의 하나였으며 예수 시대에도 여전히 그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처럼 보이는 '나사렛파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도 유익하다. 실제로 원 희랍어 신약성서는 예수를 '나사렛파 예수'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영어로 번역될 때 '나사렛 예수'라고 잘못 번역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나사렛 예수'는 독특한 분파적인 용어이며 나사렛이란 지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수많은 다른 그룹들 또는 분파들도 역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우리의 탐구에 특히 적절함이 입증되었다. 로마가 유대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A.D 6년에 갈릴리의 유파라고 알려진 한 바리새파 랍비가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모두로 구성되어 있는 대단히 군사적인 혁명 단체를 창설하였다. 이 파의 추종자들은 열성당원(zealot)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열성당원들은 종파는 아니었다. 그들은 수많은 종파들로부터 온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운동이었다. 예수의 선교 무렵에는 열성당원들이 성지의 사건들에서 점점 더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아마도 예수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배경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 오랜 후에도 열성당원의 활동은 줄지 않고 계속되었다. A.D 44년 경에는 이 활동이 대단히 강화되었었기 때문에 모종의 무력 충돌이 이미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A.D 66년에 드디어 무력 충돌이 발생하여 전 유대는 로마에 대한 조직적인 혁명에 가담하였다. 그것은 필사적이고 끈질긴 투쟁이긴 했지만 결국에는 아무 이익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가이사랴에서만도 2만명의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되었다. 4년만에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성전을 샅샅이 뒤져 약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의 유대 직계후손에 의해 통솔된 마사다 산의 요새는 그후 3년 동안 함락되지 않고 계속 보존되었다.

유대에서 혁명의 여파로 대량의 유대인들이 성지에서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약 60년 후인 A.D 132년의 또 다른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모든 유대인들을 유대에서 축출하라는 법을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사실상 로마의 도시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u Capitolina)로 개칭되었다.
예수의 생애는 대개 140여년 동안 계속된 폭풍 기간중 첫 35년에 해당된다. 그 폭풍은 예수가 죽을때도 끝나지 않고 100년 동안 더 계속되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은 심리학적 문화적 부산물들을 생산하였는데 여기에는 불가피하게 압제자에 대한 계속적인 반항이 수반되게 되었다.

이 부산물들중의 하나는 그 백성을 폭군의 멍에에서 구출해 낼 메시아에 대한 대망이었다. 이 메시아란 용어가 특별히 예수에게만 적용되어지게 된 것은 오로지 역사적 의미론적 사건 때문이었다.

예수의 동시대인들에게는 어떤 메시아도 신적인 인물로 간주된적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신적 메시아에 관한 바로 그 사상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색한 것이었을 것이다. 메시아에 대한 희랍어는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스'이다. 히브리어에서이건 희랍어에서이건 메시아란 용어는 단순히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왕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따라서 다윗은 구약성서에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아주 명백하게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리고 다윗 가의 그후의 모든 왕들은 바로 그 명칭으로 알려졌다. 로마가 유대를 점령한 기간 동안에조차도 로마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은 '제사장적 메시아' 또는 '제사장적 그리스도'로서 알려졌다.

하지만 열성당원들 및 로마를 적대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꼭두각시 제사장은 말할 것도 없이 '거짓 메시아'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란 '참 에시아'는 대단히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참 메시아'는 합법적인 '상실된 왕' 즉 자기 백성을 로마 제국에서 구출해 낼 다윗가의 알려지지 않은 후손을 의미하였다.

예수의 생존시에는 그러한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극에 달하여 병적인 상태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리고 이런 기대가 예수의 죽음 후에까지도 계속되었다. 실제로 A.D 66년의 폭동은 주로 메시어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열성당의 선동에 의하여 촉발되었다.

그렇다면 '메시아'란 용어는 결코 신적인 것을 의미하는 용어는 아니었다. 엄격하게 말해 그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의미하는데 불과했다. 그런데 그 용어가 대중의 정신 가운데서 자유케하는 자이기도 하면서 기름부음 받은 왕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시말해 그것은 특별히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는 용어, 즉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후대의 사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용어였다. 예수에게 적용되어졌던 것은 이와같이 세속적인 정치적 용어였다.

그는 '메시아 예수'라고 일컬어졌으며 희랍어로 번역될 때는 '예수 그리스도(Jesus the Christ)'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후에 이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라고 축약되었으며 순전히 기능적 명칭이었던 것이 고유명사로 왜곡되었다.
Posted by PD 개인교수
1세기의 팔레스타인은 대단히 어수선한 곳이었다. 얼마동안 성지는 왕조적인 투쟁들, 피비린내나는 싸움, 그리고 때로는 전면적인 전쟁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B.C 2세기에는 마카베 형제들에 관한 두권의 외경서들에 의해 기록되어 있듯이 다소 통일된 유대 왕국이 잠시 동안 수립되었다. 하지만 B.C 63년이 되자 그 땅은 다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었으며 정복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예수의 출생 50여년 전에 팔레스타인은 폼페이우스의 군대에게 함락되었으며 로마의 법률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로마는 너무나 광대하였으며 로마 자신의 사건들로 골치를 앓고 잇엇기 때문에 직접적인 통치에 필요한 행정적인 조직체를 설치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로마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 통치할 일련의 분봉왕들을 세웠다. 이 분봉왕 계열은 유대인이 아니라 아라비아인이었던 헤롯 집안이었다. 그 계열의 첫번째 인물은 B.C 63년에 팔레스타인의 왕좌를 차지한 안티파터(Antipater)였다. 그가 B.C 37년에 죽자 그의 아들 헤롯대왕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는 B.C 4년까지 통치하였다.

우리는 무력으로 유지되는 꼭두각시 정권에 의해 통치된 피정복 국가와 피정복 백성을 상상하게 된다. 그 나라의 백성은 그들 자신의 종교와 관습을 보존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인 권위는 로마였다. 이러한 권위는 로마법에 따라 수행되었으며 로마군대에 의해 강화되었다. 얼마후 영국에서도 그랬었다.--즉 영국의 식민지 정책과도 비슷하다.

A.D 6년에는 그 상황이 더 급박하게 되었다. 이 해에 그 나라는 행정적으로 두 개의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즉 유대와 갈릴리로 분할되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왕이 되었다. 그러나 정신적 세속적 중심지였던 유대는 직접적인 로마법에 종속되게 되었으며 가이사랴에 근거를 둔 로마의 총독에 의해 다스려졌다. 로마 정권은 야만적이고 독재적이었다.

로마가 유대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을때 2천명 이상의 저항자들이 즉석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약탈되고 더럽혀졌다.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다. 고문이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A.D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의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도 호전되지는 않았다.

그에 대한 성서적인 묘사와는 반대로 현존하는 기록들은 빌라도가 잔인하고 부패한 인간으로 전임자의 학대를 계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강화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서들에 로마에 대한 비판이 없으며 로마의 멍에의 짐에 대해서 조차도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이다. 적어도 언뜻 보기에는 그렇다 실제로 복음서 설명들은 유대의 거주자들이 평온하였으며 그들의 운명에 만족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만족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은 전혀 평온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 성지에 있던 유대인들은 대개 여러 분파들로 나뉘어질 수 있었으며 더 작은 분파들로 세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적지만 부유한 지주계급으로 로마인들에게 협조한 반역자들이었는데 이것이 동족들의 분노를 샀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에 많은 개혁을 도입하였으며 복음서들에 있는 묘사와는 달리 소극적이긴 하였지만 로마에 강하게 저항하였던 진보적인 무리이다.

엣세네파는 엄격하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띤 종파. 이 종파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거나 추정되는 것보다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고 영향력도 컸다. 보다 작은 분파들 가운데는 그 정확한 특징이 오래 전에 역사에서 사라져 정의하기가 곤란한 많은 분파들이 있다.

하지만 나실인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수세기 전의 삼손도 그중의 하나였으며 예수 시대에도 여전히 그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처럼 보이는 '나사렛파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도 유익하다.

실제로 원 희랍어 신약성서는 예수를 '나사렛파 예수'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영어로 번역될 때 '나사렛 예수'라고 잘못 번역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나사렛 예수'는 독특한 분파적인 용어이며 나사렛이란 지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수많은 다른 그룹들 또는 분파들도 역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우리의 탐구에 특히 적절함이 입증되었다. 로마가 유대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A.D 6년에 갈릴리의 유파라고 알려진 한 바리새파 랍비가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모두로 구성되어 있는 대단히 군사적인 혁명 단체를 창설하였다.

이 파의 추종자들은 열성당원(zealot)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열성당원들은 종파는 아니었다. 그들은 수많은 종파들로부터 온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운동이었다. 예수의 선교 무렵에는 열성당원들이 성지의 사건들에서 점점 더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아마도 예수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배경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 오랜 후에도 열성당원의 활동은 줄지 않고 계속되었다. A.D 44년 경에는 이 활동이 대단히 강화되었었기 때문에 모종의 무력 충돌이 이미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A.D 66년에 드디어 무력 충돌이 발생하여 전 유대는 로마에 대한 조직적인 혁명에 가담하였다. 그것은 필사적이고 끈질긴 투쟁이긴 했지만 결국에는 아무 이익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가이사랴에서만도 2만명의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되었다. 4년만에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성전을 샅샅이 뒤져 약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의 유대 직계후손에 의해 통솔된 마사다 산의 요새는 그후 3년 동안 함락되지 않고 계속 보존되었다.

유대에서 혁명의 여파로 대량의 유대인들이 성지에서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약 60년 후인 A.D 132년의 또 다른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모든 유대인들을 유대에서 축출하라는 법을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사실상 로마의 도시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u Capitolina)로 개칭되었다.

예수의 생애는 대개 140여년 동안 계속된 폭풍 기간중 첫 35년에 해당된다. 그 폭풍은 예수가 죽을때도 끝나지 않고 100년 동안 더 계속되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은 심리학적 문화적 부산물들을 생산하였는데 여기에는 불가피하게 압제자에 대한 계속적인 반항이 수반되게 되었다.

이 부산물들중의 하나는 그 백성을 폭군의 멍에에서 구출해 낼 메시아에 대한 대망이었다. 이 메시아란 용어가 특별히 예수에게만 적용되어지게 된 것은 오로지 역사적 의미론적 사건 때문이었다.

예수의 동시대인들에게는 어떤 메시아도 신적인 인물로 간주된적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신적 메시아에 관한 바로 그 사상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색한 것이었을 것이다. 메시아에 대한 희랍어는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스'이다. 히브리어에서이건 희랍어에서이건 메시아란 용어는 단순히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왕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따라서 다윗은 구약성서에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아주 명백하게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리고 다윗 가의 그후의 모든 왕들은 바로 그 명칭으로 알려졌다. 로마가 유대를 점령한 기간 동안에조차도 로마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은 '제사장적 메시아' 또는 '제사장적 그리스도'로서 알려졌다.

하지만 열성당원들 및 로마를 적대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꼭두각시 제사장은 말할 것도 없이 '거짓 메시아'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란 '참 에시아'는 대단히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참 메시아'는 합법적인 '상실된 왕' 즉 자기 백성을 로마 제국에서 구출해 낼 다윗가의 알려지지 않은 후손을 의미하였다.

예수의 생존시에는 그러한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극에 달하여 병적인 상태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리고 이런 기대가 예수의 죽음 후에까지도 계속되었다. 실제로 A.D 66년의 폭동은 주로 메시어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열성당의 선동에 의하여 촉발되었다.

그렇다면 '메시아'란 용어는 결코 신적인 것을 의미하는 용어는 아니었다. 엄격하게 말해 그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의미하는데 불과했다. 그런데 그 용어가 대중의 정신 가운데서 자유케하는 자이기도 하면서 기름부음 받은 왕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시말해 그것은 특별히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는 용어, 즉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후대의 사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용어였다. 예수에게 적용되어졌던 것은 이와같이 세속적인 정치적 용어였다.


그는 '메시아 예수'라고 일컬어졌으며 희랍어로 번역될 때는 '예수 그리스도(Jesus the Christ)'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후에 이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라고 축약되었으며 순전히 기능적 명칭이었던 것이 고유명사로 왜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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