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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Memories

懷念錄(가난한 아이들)

by 개인교수 2014. 2. 7.


나는 어디 있을 까?



광주대단지의 철거민 아이들의 부모들은 대부분 서울 근교에서 막노동을 하고 축처진 어깨에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키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다.
그런일을 하는 정도만 해도 양반이고 그 외에는 그나마 일자리도 없어서 빈둥대기 쉽상이다.

대부분의 내 또래 아이들은 갈곳이 없었다.
끽해야 산에 올라가서 애들하고 새총놀이나 하고,
봄에는 진달래꽃 따러 다니고 (어린시절의 낭만을 위해서가 아닌 그야말로 먹기위해서 따는것임), 칡도 캐러 다니고, 여름이면 숫냇가 너머에 가서 달랑무 같은 것을 캐서 먹기도 했다.
그리고 가을에는 도토리나 밤을 그리고 겨울에는 토끼를 잡으러 다녔다.
그러나 토끼를 실제로 잡았던 기억은 없다.
단지 동네 어른들은 가끔 꿩 이나 토끼를 인근 야산에서 잡아오곤 했다.

이건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어정쩡한 아수라장에서 아이들은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나중에 남들에게 시골에서 살았다고 하기도 뭐하고 도시에서 살았다 하기도 뭐한것이, 아주 시골 스럽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아주 도시적이지도 않은 삶의 행태였다.
오히려 시골과 서울을 동시에 안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듯 싶다.
보릿고개를 경험할 나이가 아닌데도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경험했으니,
참으로 별 그지같은 이것저것의 경험을 다 해봤다고 할 수 있다.

대략 3학년 정도가 되면 가끔 아이스케키 장사하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아이스케키를 약 100개 정도 주고 80개 어치만 입금 시키면 나머지 20개는 팔든 먹든지 알아서 하면 되는 아주 바람직한 장사 시스템 이었다.
구두닦이 보다는 그래도 덜 챙피해서 많은 아이들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러 다녔다.
"아에스케키~~ 케키나 하드 있어요~~"라고 외치며 방과후에 동네를 누빈다.
그러다 친구라도 만나면 한 두 개 뺏기는 것은 기본이고,
뺏어 먹은 아이는 친구 따라 장사 하는 데로 같이 따라 다녀 준다.
어짜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난 누나랑 한번은 껌 팔이를 해 본적이 있다.
서울에서 오는 버스 정류장에 가서 내리는 사람들에게 껌을 파는 것 이었다.
엄마에게 걸리면 혼이 나므로 엄마 오는 시간을 피해서 몰래 몰래 했었다.
돈 만지는 재미 보다는 스피아민트, 쥬시후레시 껌을 맘껏 씹을 수 있기 때문에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도 싫증나면 아이들은 시장에 돈 줏으러 간다.
옛날에는 왜 그리 사람들이 돈을 흘리고 다녔는지 시장에 가면 큰 돈은 아니더라도 5원 짜리로 바뀌기 전의 흰색50환 짜리 같은 작은 돈은 얼마든지 줏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껌종이 수집하는게 붐이라서 아무튼 시장은 여러모로 아이들에게는 이익이 되는 풍요로운곳 이었다.
운이 좋으면 쇠못이나 신주로 만든 쇠붙이도 줏을 수 있었는데 얼마든지 인근 고물상에 돈주고 팔 수 있었다.
전기줄을 줍는 날이면 즉석에서 불을 붙혀서 나일론 수지로 된 외피를 불에 태운 후 그 안의 구리만을 고물상에 가져다 줄 정도로 다들 전문가들 이었다.
나이만 어릴 뿐이지 경제 돌아가는 시스템이나, 당시의 고철 시세등은 당시 그 동네 살던 아이라면 누구나 파악하고 있었던것 같다.
물론 개중에는 잘사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그런 애들은 우리들의 놀이에 끼여 주지도 않았다.
시장에 뭐를 줏으러 다니는 것은 일종의 놀이 였다.
게다가 돈이 되면 더 좋고......,

여름방학 내내 이 시장 저 시장을 돌아 다니며 뭔가를 줏어본 기억도 있다.
아무튼 특이한것은 전부 수집의 대상이었던것 같다.

개중에는 일부러 산으로만 올라가던 아이들이 있었다.
그 이유는 삐라를 줏기 위해서였다.
삐라를 줏어서 파출소에 갖다주면 연필 한자루나 공책 한권을 탈 수 있었다.

당시의 간첩 식별법은 다음과 같다.
-. 이른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 운동화나 군화에 흙이 묻어있는 사람
-. 밤 늦게 까지 이불 뒤집어 쓰고 라디오를 듣는 사람
-. 물가를 몰라서 자주 물어 보는 사람
-. 은연중에 동무나 호상간 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사람
등등 .. 내가 기억하는 이것 보다 더 웃긴 식별법이 많았다.

아무튼 삐라는 도대체 누가 뿌리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야산에 가면 삐라가 반드시 있었다.
삐라를 처음 본 순간 어린아이들의 마음에는 당장이라도 삐라에서 김일성이 튀어 나올것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김일성은 당시의 반공 포스터에 항상 뿔달린 마귀 정도로 묘사 됐었으니까 머릿속에 그 이미지가 박힐 만도 했다.

당시의 아이들은 김일성 조차 공책이나 연필을 바꿀 수 있는 대상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가난함과 굶주림 앞에서 북한이고 삐라고 김일성이고 그 무슨 나발이고 간에 다 필요 없는것이다.

겨울이면 피해갈 수 없는 일이 한가지 있는데
바로 연탄까스 중독 이었다.
겨울내내 머리가 띵해서 다닌적도 있었다.
누군가 학교에 안나오면 거의 100%는 연탄까스 맡아서 였다.
대충 김칫국이나 동치미 한사발을 마시고 (최근의 TV 프로로그램을 보니까 전혀 약효가 없다고 함) 비틀거리며 학교로 향한다.

오전 내내 헛 구역질이다.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선생님은 공낙금 안 가져 온 새끼들 복도에 나가서 손들고 서 있으라고 한다.
쓰린 속에 휭휭도는 머리로 손들고 추운 복도에 벌 선다.

이 어린시절이 빨리 지나가기를...
어른이 되면 돈 많이 벌어야지 하며
이를 악 물고 서있다 쓰러진다.

하늘이 노래지면서 결국 헛구역질을 해댄다.
먹은게 김칫국물이니 김칫국물만 나온다.

남보다 일찍 돌아온 집은 텅 비어있고
아침에 먹다만 수제비만 냄비에 차게 얼어있다.

힘없이 숫가락을 들고
김치 한조각을 얹어서 얼은 풀 수제비를 떠 먹는다.

아~~ 이 좆같은 어린시절은 도대체 언제나 지나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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