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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Memories

懷念錄 (중학교 시절)

by 개인교수 2014. 2. 7.

1.

들꽃이름, 별자리, 곤충이름 외우며 친구들과 총싸움하며 야산을 뛰어다니던 국민학교 시절의 막바지 겨울, 얼굴도 아주 예쁜 여 선생님은 왠지 몰라도 나에게 특별히 잘 해주신 것으로 기억이 된다.

하긴 2학년 3학년 때는 아줌마 선생님들이 나를 자주 안아 주었다. 무슨 선생님 같지가 않고 엄마처럼 자주 안아준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새벽 일찍 학교에 간 적도 많았고, 어스름 초저녁 잠깐 졸다가 깜짝놀라 가방메고 학교 간적도 있었다. (아... 가방이 없어서 책보 가지고 다녔지... 이건 뭐 일제시대도 아니고... 참... 그 시절에 가방이 없어서 책보라니...)

5.6 학년때는 경필부, 독서회 같은 자유교양부 라는 써클 활동도 하였다. (참고로 이런곳은 공부를 잘하는 어린이만 들어갈 수 있음. ~~)

또 언젠가는 키다리 미스터킴을 부른 김상희씨가 사회봤던 "모이자 노래하자" 인가?? 아무튼 뭐 이런  TV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노래에 맞춰 춤도 췄던 기억이 있다.


집에 TV 있는 사람?, 전화기 있는 사람?, 자전거 있는 사람? ..........

내가 유일하게 거의 나 혼자 손 든 가정 조사 항목은 "어머니가 대학나온 사람?" 이었다. 

재산과 다른 생활에 관한 조사에서는 늘 손 한 번도 못 들었었다.


2.

참으로 아쉽게도 난 국민학교 시절의 사진이 통틀어 약 3장 정도 있는데 내 독사진이라기 보다는 어쩌다 우연히 뒤에서 찍힌것이고 나를 위주로 찍은 사진은 단 한장도 없다. 

가난해서 카메라는 당연히 없었지만  유일한 사진은 졸업앨범의 사진 인데, 그것마저 졸업하자마자 칼로 내 얼굴만 도려내서 지금은 아에 없다. 

국민학교 5학년 정도에 아무튼 누군가가 안치는 기타를 주었는데, 어떻게 치는지도 뭔 잡아야 하는지 그 아무도 알려주질 않았는데 기타 역시 피아노와 마찬가지로 어찌어찌 내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다.

국민학교의 기억은 거의 이게 전부다. 

엄마가 신학대학 나와 그 신앙심의 발로로 어린이집을 꾸려 나갔고, 난 그 덕분에 어디선가 가져온 만화 200권 간식으로 받아 온 굳은 우윳가루 뭐 그런것을 좀 더 먹었을 뿐이다. 그것도 다른 아이들 먹을때 같이 먹은거지 절대로 개인적으로 나에게 주지는 않았다. 밥먹은 기억은 거의 없고 매일 배급타온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만 먹은것 같다.

엄마가 동네애들을 위한 것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당신만의 일종의 직업정신이다. 난 늘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어린이 였을 뿐이다. 혹여 엄마가 이 글을 본 다면 서운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들 이라기 보다는 그들중의 하나 그야말로 One of them 정도 였던것 같다.


뭐 그렇다고 큰 불만도 없었던 것으로 보아, 내 스스로도 뭐 아들이라는 특별함을 포기 했던 듯 하다. 

늘 10원만 달래서 라면땅 사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조금씩 뜯어 먹던 기억 밖에 없다.

가끔 지난 호 소년중앙 어깨동무 몇십권씩 들어오면 그 책 보는게 유일한 취미였고,

10원에 마음대로 신간만 볼 수 있었던 만화가게에 가서 아주 여러시간을 앉아서 만화 보는데만 열중 했던것 같고,

혼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걸어다니는게 최상의 취미 였던것 같다. (그 취미는 지금도 여전함)


3.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던 성남서중에 들어갔다. 

참 내 인생에서 희한한 일은 전부 내 대 혹은 내 전 대에 입학 시험이 없어졌다는것 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면 바로 입학 시험제도가 없어지고 뺑뺑이로 바꼈고, 시험으로 갈 수 있는 유명 고등학교 (당시 수원 유신, 인천 제물포등등)는 중1때 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난 중3때 다시 고향인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어 역시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국민학교 4학년 5학년때 같은 반, 중학교도 같은 곳으로 입학하게 된 김진현 이란 친구는 마치 우리가 애인 사인것 처럼 서로 다른반이었는데도 늘 서로를 기다려 주었다. 혹여 내가 청소당번이 걸리면 그 친구가, 그 친구가 좀 늦게 끝나면 내가 늘 기다렸다. 

수업을 마치고 서중앞의 길을 건너 희망대공원 아랫길로 서로 노래도 부르면서 내려 오기도 하고, 어느 지점을 정한 다음 서로 모르게 미행하기 게임을 주로 했다. 서중에서 집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꽤 먼거리 였는데 버스비를 아껴서 친구랑 떡볶기 같은것도 사먹고 영화도 많이 본 기억이 있다.

아무튼 늘 놀면서 귀가를 하니 하교길은 거의 한시간에서 두시간 정도 걸렸던것 같다. 

집에 도착하면 각자 밥을 먹는둥 마는 둥 다시 만나서 들깨밭도 걷기도 하고, 만화 보러도 자주 갔다.


언젠가 하교길에 동네 학교 안다니는 애들 (그나마도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니던 애들이 있었음) 우리 한테 욕을 해댔는데 그 욕이 하도 웃겨서 우리 둘이 아주 오랬동안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애용하며 깔깔댔던 기억이 있다. 그 욕은 "씹탱이" 였는데, 그 때는 왜 그렇게 그 욕이 웃긴지 아에 입에 달고 살았었다. ㅡㅡ;


그러던 어느 날...

중3 3월 내가 서울 광화문으로 이사 오면서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광화문에 살면서도 차를 두 번 이상 갈아타며 토요일 마다 성남시에 갔다. 교회에서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간 것이었고 늘 갈때마다 친구집에서 자고 일요일 저녁 쯤 서울로 돌아 왔다.

그것도 고등학교 입학 시험 준비 때문에 여름방학 전에 흐지부지 되면서 나중에 성남시에 갔을 때는 그 친구가 이사가고 더 이상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서로가 가난하여 전화기 한대도 없던 시절 유일한 만남의 방법은 그 집을 찾아가는 것 이었는데......,


내 평생 이사 간 횟수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다녔던 학교도 서울 서강국민학교 - 성남국민학교 - 성남제일 국민학교 - 성남제이 국민학교 - 성남서중 - 서울 인창중 - 서울 중앙고 ... 참으로 많기도 하다...

살던 동네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나서 - 천안 신아원 - 서울 마포 - 광주군 중부면 탄리 - (후에 성남시로 개칭) - 성남 모란 - 서울 광화문 - 계동 - 대학로 - 종로6가 - 서대문 무악재 - 해외 대만, 싱가폴, 홍콩, 심천 - 관악 대림동 - 방배동 - 역삼동 - 사당역 남현동 - 용인 영덕 - 중국 위해, 청도, 동관 - 수원 영통....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도 여러번 이사 갔으니.. 끔찍하다 생각만 해도..


4.

뭐 특별한 슬픔도 기쁨도 사건도 없이 그렇게 어린이에서 사춘기의 학생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중 3 때 학원 다니며 만났던 홍승희 라는 애가 아마 내가 처음으로 데이트 했던 여성이었다. 그 전에 중1때 중3누나를 좋아했었는데 그건 나의 일방적인 짝 사랑이었지만..

아무튼 홍승희라는 여학생은 중3때 만나서 같이 남산도 놀러가고 명동 무교동을 같이 싸돌아 다니다 서로 시험준비 때문에 소원해졌다. 

나는 중앙고를 들어갔고 그애는 경기여고에 들어갔는데, 고 2때 인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보고 약 10분간 대화..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우리학교의 축제에 놀러온 그녀를 또 보았다. 그것도 축제 주점을 하고 있는 우리 주점으로 어떤 남학생과 들어왔다. 서먹서먹하게 둘이 잠시 나와 별 잡다한 얘기 하다 또 헤어졌다.

그 흔한 삐삐 하나 없던 시절, 청춘남녀의 만남은 그리 쉽지 않은것 이었다.


매일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낙엽을 밟고 무교동을 지나 남산의 미니 동물원에서 혼자 배회하며 그렇게 중학교의 마지막 학년은 가고 있었다. 





2014/02/07 - [Personal Pics] - 懷念錄(가난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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