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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Memories

懷念錄(국민학교 시절 풍경)

by 개인교수 2006. 12. 18.


난민수용소 같던 작은 교회에세 아이들이 율동을 하고 있다. 부모들은 다 일 나가고 갈데가 없는 아이들이다. 달콤한 간식을 기대하며 억지로 춤 추고 있는 듯 슬퍼보인다.


1.
그러고 보면 난 국민학교를 약 3-4번 전학 갔던 것 같다.
8살에 무너진 와우아파트 근처에 있는 서강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2반 이었던것으로 기억되며 내 짝궁은 상당히 예뻤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광주대단지로 철거 가서도 자주 생각 났던것으로 미루어 봐서 상당히 예뻤을게 틀림없다. 그리고 아마 그 아이는 우리동네 판자촌이 아닌 조금 잘 사는 동네의 아이 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와우 아파트가 무너지고 서강 똥물 옆에 살던 사람들은 강제 이주를 당해서 광주대단지 라는 생판 들어 본 적도 없는 볼모의 땅으로 떨궈졌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짜피 무허가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은 항변할 권리가 없었다.
허가가 안된곳에 임의로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엄마는 대졸 젊은 여자라 하여 그 동네 반장을 하고 있었고 연일 이어지던 데모에 주동적으로 참석을 했던것으로 기억된다.

데모라는거 참 우스운 것이다.
자기 땅도 아닌곳에 임의로 집 짓고 살면서 땅을 개발해야 하니 나가달라는 정부의 요구에 데모를 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누구인가? 독재는 했어도 빈민자들에게는 그리 야박하지 않던 시절 이었다.
아무튼 아이러니칼 하게도 명분 없는 데모의 결과 그 소산으로 광주 대단지 민둥산 20평을 얻은 것이다.

데모에 관한한 지금도 나의 생각은 아주 시니컬 하다.
원래 자기것도 아닌데 가져간다고 데모를 하지 않나, 아니면 그야말로 Not in my back yard 처럼 지역 이기주의의 일환으로 데모를 하는것이다.
데모,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것을 얻고자 하는 행위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렇게 하면 다들 다 같이 잘 살수 있을것 처럼 포장하며 남들에게 동조를 구하는것에 불과하다.
물론, 순수 권리를 주장하는 항의나 시위는 제외다.

거의 여름 쯤에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로 가서 성남 국민학교 라는곳으로 전학 갔다. 그리고 2개월만에 성남 제일 국민학교 라는곳으로 전학 갔다가 다시 일개월 후 성남제이 국민학교라는 곳으로 갔다. 성남제이국민학교가 내가 졸업한 학교이다.

원래는 민둥산을 대충 금 거놓고 무작위로 집을 지었기 때문에 주소도 없었다. 그러다 약 1-2년이 지난 후 대략 마을이 형성되자 우리에게도 주소가 생겼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 22-44호가 바로 민둥산 위에 지어 진 우리집 주소였다.

나중에 안 이야기 지만 그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대부분은 왕십리, 서강 등등 아무튼 서울에서 제일 더럽고 지저분 한곳에 있던 판자촌 주민들이었다.
당시 난 그렇게 여러지역에서 철거당해서 그리로 간줄은 모르고 있다가 약 8년전 성남시에서 살았다던 윤모씨를 만나서 그때야 알았다.

2.
처음으로 전학간 성남국민학교 라는 곳은  대략 지금의 성남시청 정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마침 당시 6월 장마가 한창 시작될 무렵 이어서 우리집 까지 오는길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개울도 건너고 조그마한 야산도 넘어야 했다.
난 1학년 밖에 안됐고 누나는 4학년이 었으므로 수업 끝나는 시간이 달랐다.

난 누나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학교 운동장을 빙빙 배회하거나 근처 개울가로 가서 돌맹이 쌓기 장난도 치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다 멀리서 누나가 보이면 너무나도 기뻐서 눈물이 날 정도 였다.
학교에서 집까지 8살 짜리 혼자 가기란 그리 쉽지 않은 코스였다.
그래서 대부분은 같은 동에 사는 애들끼리 모였다가 같이 걸어 오곤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화에서 처럼 노래를 부르면서 걸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단지 빨리 집에가서 수제비나 끓여 먹어야지 하는 생각 밖에 안했을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초여름의 여치, 방아깨비, 메뚜기, 사마귀 같은것을 잡으면서 놀았을 것이고, 이름모를 들꽃을 꺽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왔을 것이다.

집에 오면 난 항상 혼자였다.
엄마는 서울가고, 누나는 또래 아이들과 놀러 나간다.
나는 누나를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누나는 나 몰래 집을 빠져 나간다.

난 이방 저방 빈둥거리며 다니다가 집에 있는 만화책을 보다가 어린이 집에 있는 풍금을 치면서 놀았다.
아무도 가르쳐 준 사람 없었지만 이미 혼자 노는것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왠만한 국민학교 교과서에 있는 노래는 다 칠 줄 알았다.

그것도 심심하면 우리집 안에 있던 놀이터로 가서 미끄럼도 타고 그네도 탔다.
동네 아이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 본다.
그러면 나는 몰래 문을 열어주어 걔들을 들어오게 해서 같이 놀 곤 했다.

초여름 밤
미끄럼대 위에 등대고 누워서 별자리 관찰도 하고, 동네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그것도 심심하면 집앞의 들깨 밭에서 총싸움을 하였다.
그리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면 내 옷은 온통 들깨냄새로 범벅이 되곤 했다.

3.
그러던 중 가을 쯤에 우리집 뒤에 국민학교가 생겼다. 바로 성남제이국민학교 였다.
敎舍는 4층짜리 한동만 달랑 있고 운동장은 상당히 넓었다.
윗쪽으로는 계속해서 다른 교실 공사중이었다. 결국 그 공사는 내가 거의 4학년때 쯤해서 끝났던것 같다.
당시 가장 재수 좋았던 철거 이주민들은 바로 이 국민학교 앞의 도로에 집을 지은 사람들 이었다. 우리집은 학교 골목 바로 옆의 옆집 이었고, 학교 앞 도로에 들어선 집들은 100% 국민학교 학생들 상대로 장사를 했다.
가게도 하고 문방구도 하고..
당시 성남제2국민학교는 거의 학년별 10반 이상씩 있었고 (기억이 가물가물..) 한 학급에 학생이 거의 70명 가량 되었으니까, 그 애들에 의한 수요 창출도 엄청 났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 기억으로 약 260원 이던 공낙금 조차 제대로 못내서 복도에서 손들고 서 있어야 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에 돈 못냈다고 벌서고 집으로 돌아 왔어도 난 한번도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한적이 없었다.
대충 한번정도 "엄마 선생님이 공낙금 가져오래.." 이렇게 말 하곤 그대로 끝이었다.
그러나 누나는 달랐다. 누나는 끝까지 엄마를 괴롭혀서라도 돈을 받아갔다.

내가 착한아이라서 그랬을까? 반문해 보면 그것만은 아닌것 같았다.
"돈 안내서 학교 못 다니면 안 다니고 말지 뭐..." 라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라서 그리 그런것에 매달리지 않았던것 같다.

도데체 어린 나이에 계속해서 현실을 탈출하고 싶었던 이유와 원인은 뭘까?

난 한 때 정말로 엄마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내가 너무나 간절히 소망했던 탓일까? 엄마가 실제로 죽는 꿈도 많이 꿨다.
그때마다 꿈속에서 흐느껴 울다 일어나면 실제로 베게맡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엄마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난 그냥 자유롭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 인생을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참을수가 없다.

최근에도 난 항상 이혼을 꿈꾼다.
이유는 없다.
그냥 자유롭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뭘 해도 누구든 나에 대해서 신경 쓰는 자체가 싫은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난 지금도 아들하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산다.

고아원 시절에 몸에 배인 습관일까? 난 지금 이 나이에도 누가 조금만 참견하면 그게 그렇게 싫다. 하다못해 밥 먹으라는 와이프의 부르는 소리 조차 싫다.

실제로도 국민학교 때 부터 지금도 엄마는 절대 두 번 이상 밥 먹으라, 혹은 뭐 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어렸을 때 부터 신경질적으로 싫어했다.
내가 한번 안 먹는다고 대답 했는데도 또 한번 밥먹으라고 부르면 아에 1-2끼를 안먹어 버린다. 일종의 반항심은 아니다. 난 그저 항상 착한 아이였다.
뭐 시키면 하고..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아이였다.
공부도 학급에서 항상 1-2등 이었다.
그래서 학교건 집이건 거의 트러블이 없었다. 나에게 한 얘기 또 하지만 않는다면...

학창시절 내가 죽도록 싫어하는게 바로 단체 기합이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아이의 잘못으로 나 까지 벌받아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억울해서 운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아마 선생님은 내가 맞아서 아퍼서 운줄 알것이다.
사실 정확하게 얘기 하자면 너무 억울해서 운 것이었다.

4.
여전히 어린이집의 아이들은 즐겁게 율동을 한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도 제법 우리 교회에 많이 모인다.
걔들의 목적은 단 한가지다.
구호물자로 들어온 과자나 사탕을 타 먹기 위해서 이다.

단 돈 10원이면 라면땅 한봉지 사가지고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깨어 좋고 몰래 조금씩 꺼내먹던 동네의 코흘리개 아이들..
겨울이면 얼굴에 동상이 걸려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손등은 트기 시작한다.
요즘 TV에서나 볼 수있는 몽골초원의 얼굴 빨간 아이들 바로 그런 모습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을것 같고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죽을것만 같았던 그 시절의 아이들
그리고,
왜들 그렇게 코는 흘리고 다녔는지
국민학교 입학식때면 왼쪽 가슴에 코 닦을 수 있는 수건을 달고 다녔던 그때의 그 아이들..

지금은 다들 나처럼
그때를 추억 하겠지?


곱게 모은 두 손으로 기도하는 어린 영혼들.. 개중에는 저렇게 눈뜨고 장난치는 애도 있었다. 난 맨 오른쪽에서 두 손 꼭 모아 기도 하고 있는 착한아이 였다. 다들 잘되어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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