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배와 성혈 [ 14.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3 ]
A.D. 64∼74년의 반란이 있은지 약60년 후인 132∼135년에는 두 번째의 중요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소요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공식적으로 추방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로마의 도시가 되었다. 그런 첫 번째 반란이 일어났을 때조차도 성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왜곡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후 200년 동안은 실제로 아무런 기록도 없는 셈이다. 실제로 그 기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소위 '암흑기'의 유럽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밖엣이긴 하지만 그 나라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도 역시 그랬다. 또 에비온이라고 불리우는 유대 구역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유한한 존재인 예수를 예언자로서 존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실질적인 정신은 성지에서 떠났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임 주민의 대다수는 약 700년 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되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전 세계로 즉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고올, 영국, 북아프리카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A.D. 33년에 그 무렵에 일어났던 일에 관해 크게 모순되지 않은 기록들이 문명 세계의 도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콜레멘스, 이레나이우스, 그리고 그들의 동조자들에 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은 '이단'이라고 공식적으로 낙인이 찍히었지만 계속해서 번성하였다. 그들 중에 어떤 것들은 경건한 유대인들 및 에비온파와 같은 집단들--에비온파는 이러저러한 형태로 기독교로 개종된 유대교 개종자들이었다--에 의하여 보존된 모종의 직접 지식에서 유래되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기록들은 전설과 소문에 의존하였으며 이집트적·희랍적·그리고 미드라적 신비주의 전통과 같이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들을 혼합한 것에 의존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독특한 자료들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들은 '메시지 지지자들'에게 즉 위치를 다지고자 하는 정통주의자들에게 많은 불안을 안겨주었다.
초기 '이단들'에 관한 정보는 빈약하다. 그들에 관한 오늘날의 지식은 주로 그들의 적대자들이 행한 공격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그 지식은 자연히 게쉬타포 문서들로부터 밝혀질 수 있는 프랑스 혁명의 모습처럼 하나의 왜곡된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예수는 초기의 '이단자들'에 의해 둘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완전히 신으로 생각하여 인간적인 속성이 거이 없는--설령 있다손 치더라도--존재로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본질에 있어서 불타나 500년 후의 모하멧과 다르지 않은 하나의 유한한 인간적 예언자로 보았다.
초기 이단의 시조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생의 후반부를(A.D. 136∼65) 로마에서 보낸 발렌티누스였다. 그당시 발렌티누스는 대단히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는데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프톨레미우스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의 '비밀 가르침들'의 본체를 터득하고 있다고 주장한 그는 로마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인격적 지식이 어떤 외적인 지위보다도 더 앞선다고 단언했다. 당연히 발렌티누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레나이우스를 진노케 했을 것이다. 또다른 공격 대상은 마르키온이었다. 그는 부유한 선박왕이자 주교로 140년경 로마에 도착하여 4 년 후에 파문되었다. 마르키온은 '율법'과 '사랑'을 철저히 구분했는데 전자를 구약성서에 연관시켰으며 후자을 신약성서와 관련시켰다. 이들 마르키온적 사상들중 어떤 것은 1천년 후<펠레스보>와 같은 어떤 책속에서 나타났다. 마르키온은 성서의 정경 목록을 최초로 작성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정경목록에는 구약성서 전체가 제외되어 있다. 이레나이우스가 그의 정경목록을 작성한 것은 마르키온에 대한 즉각적인 웅수에서 였는데 그 목록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의 기초가 되었다.
세 번째 중요한 이단 창시자로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흥미있는 사람은 A.D. 120과 130년 사이에 글을 쓴 알렉산드리아 학자 바실리데스였다. 바실리데스는 희브리어 성서들과 기독교 복음서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이집트와 헬레니즘적 사상에도 심취되어 있었다.
그는 24개에 달하는 복음서 주석들을 썼다고 추정된다. 이레나이우스에 따르면 그는 가장 가증스런 이단을 전파했다. 바실리데스는 십자가 처형이 사기였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키레네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은 괴이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대단히 끈질기고 강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7세기경 코란도 정확하게 이와 동일한 주장을 하였다. 즉 어떤 대리인이--전하는 바로는 키레네 시몬이라고 알려져 있음--예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은 제 1장에서 논의된 문제의 편지를 쓴 사제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 편지는 대리 십자가 사건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에 대해서 언급했다.
초기 이단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집트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알렉산드리아였다. 그곳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학식있고 코스모폴리탄적 도시였으며 로마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대단히 다양한 신앙, 교훈, 그리고 전승의 집산지였다. 유대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반란 이후 이집트는 유대교의 도망자들과 기독교 도망자들 모두에게 있어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안식처임이 입증되었다. 그 도망자들의 대부분이 알렉산드리아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우리의 가정을 지지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증거는 소위 '영지주의 복음서들' 더 정확하게 말해 '나그 하마디 문서들(Nag Hammadi Scrolls)'에 수록되어 있었다.
1945년 12월 고지 이집트에 있는 나그 하마디란 마을 근처에서 부드럽고 비옥한 땅을 파던 한 이집트의 농부가 붉은 토기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 항아리에는 가죽으로 제본된 13개의 사본들 즉 파피루스 책들 또는 두루마리드이 들어 있었다. 그 발굴물의 증요성을 알지 못한 그 농부와 그 가족이 그 사본들중 일부를 불 지피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드디어 나머지가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중 하나가 이집트에서 밀반출되어 암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융 파운데이션(C.G. Jung Foundation)에 의해 구입된 이 사본의 일부에는 오늘날 잘 알려진 '도마복음'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편 이집트 정부는 나그 하마디 총서의 나머지 부분을 1952년에 국유화하였다. 그러나 1961년에야 비로소 국제적인 학자들의 모임이 소집되어 그 자료 전체를 복사하고 번역했다. 1972년에는 사진판의 제 1권이 출판되었고 1977년에는 두루마리 전체가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나그 하마디 문서는 본질상 영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성서본문 전체를 담고 있다. 그 문서는 4세기 후반이나 5세기 초에 즉 A.D. 400년경에 기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두루마리들은 사본들이다. 딸서 그것들이 베껴진 원본들은 휠씬 더 이전에 기록되었다. 그들 중 예를들면 도마복음, 진리복음, 이집트복음 등과 같은 것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콜레멘스, 이레나이우스, 그리고 오리게네스와 같은 최초의 교부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 두루마리들에 있는 본문들의 대부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약간은 A.D. 15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확정지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들 중 하나는 신약성서의 네 권의 표준 복음서들보다 휠씬 더 오래된 자료를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나그 하마디 총서는 초기 기독교 문헌들의 귀중한 보고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 문헌에 있는 것 중 어떤 것은 복음서들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들 중 어떤 것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정확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그것들은 후대의 로마 정통주의에 의한 검열과 수정을 피하였다. 둘째 그것들은 원래 로마의 독자가 아니라 이집트의 독자들을 위해 작성되었으며 따라서 왜곡되거나 로마화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것들은 목격자의 진술한 자료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 자료들은 성지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구술한 설명들인데 아마도 그 유대인들은 인간 예수의 친지들 또는 동지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복음서들이 보유할 수 없었던 역사적 충실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목격담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그 하마디 문서들이 정통주의와 '메시지 지지자들'에게 해로운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들면 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한 사본 즉 '셋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보면 예수가 바실리데스의 이단설에서와 똑같이 교묘한 대치작전에 의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음의 인용구에서 보면 예수는 일인칭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계획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그들에 의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들은 나를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들의 실수와 무지 때문에 그들에게 죽음이 임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편 사람을 못박아 죽였기 때문이다……쓸개와 신포도주를 마신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곧 그들의 아버지였다. 어깨에 십자가를 맨 사람은 다른 사람 곧 시몬이었다. 가시관을 쓴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들의 무지를 비웃고 있었다.
나그 하마디 총서에 있는 어떤 다른 작품들은 베드로와 막달라사이의 지속적인 씁쓸한 불화를 증언해 주고 있다. 그 불화는 '메시지 지지자들' 과 혈통지지자들 사이의 분열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마리아 복음서'에서 보면 베드로는 막달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이여, 우리는 주께서 당신을 다른 여자들보다 더 사랑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주님의 말씀을 말해 주십시오. 당신은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모릅니다.」 후에 베드로는 분개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가 실제로 한 여인과 몰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우리에게는 비밀로 하였는가? 우리는 돌이켜 그녀에게 모든 것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우리보다 그녀를 더 좋아하셨는가?」 그리고 휠씬 후에 제자 중 하나가 베드로에게 대답한다. 「확실히 주께서 그녀를 대단히 잘 알고 계시네. 그가 우리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신 것은 그 때문이지.」
'빌립 복음서'를 보면 이런 불화의 원인들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예를들면 거기에는 신방의 이미지가 거듭해서 강조되어 있다. 빌립 복음서에 따르면 「주님은 모든 것을 신비하게 하셨다. 세례도 성유식(聖油式)도 만찬도 그리고 신방도……」 확실히 그 신방은 언뜻 보기에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빌립 복음서는 보다 명백하다.
「주와 함께 언제나 동행했던 세 사람이 있었다. 곧 모친 마리아와 그녀의 누이와 예수의 동료라고 불리운 막달라가 그들이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동료(companion)'란 말은 '배우자(spouse)'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확실히 그렇게 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빌립복음서의 다음 구절을 보면 더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의 동료는 막달라 마리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녀를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셔서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기도 했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로 인하여 기분이 상했으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들은 그에게 「왜 당신은 우리 모두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십니까?」라고 말했다.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왜 나는 너희를 그녀처럼 사랑하지 않느냐?」라고 하셨다.
빌립 복음서는 그 문제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즉 「육체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 육체를 두려워하면 그것이 너희를 지배할 것이며 육체를 사랑하면 너희를 삼키고 불구로 만들 것이다.」
또 다른 곳을 보면 이러한 것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결혼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왜냐하면 결혼이 없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존재는 남자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남자의 존재는 결혼에 달려 있다.」
빌립 복음서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다. 「인자가 있고 인자의 아들의 아들이 있다. 주님은 인자이고 인자의 아들은 인자를 통하여 생산되는 사람이다.」
A.D. 64∼74년의 반란이 있은지 약60년 후인 132∼135년에는 두 번째의 중요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소요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공식적으로 추방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로마의 도시가 되었다. 그런 첫 번째 반란이 일어났을 때조차도 성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왜곡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후 200년 동안은 실제로 아무런 기록도 없는 셈이다. 실제로 그 기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소위 '암흑기'의 유럽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밖엣이긴 하지만 그 나라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도 역시 그랬다. 또 에비온이라고 불리우는 유대 구역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유한한 존재인 예수를 예언자로서 존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실질적인 정신은 성지에서 떠났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임 주민의 대다수는 약 700년 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되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전 세계로 즉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고올, 영국, 북아프리카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A.D. 33년에 그 무렵에 일어났던 일에 관해 크게 모순되지 않은 기록들이 문명 세계의 도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콜레멘스, 이레나이우스, 그리고 그들의 동조자들에 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은 '이단'이라고 공식적으로 낙인이 찍히었지만 계속해서 번성하였다. 그들 중에 어떤 것들은 경건한 유대인들 및 에비온파와 같은 집단들--에비온파는 이러저러한 형태로 기독교로 개종된 유대교 개종자들이었다--에 의하여 보존된 모종의 직접 지식에서 유래되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기록들은 전설과 소문에 의존하였으며 이집트적·희랍적·그리고 미드라적 신비주의 전통과 같이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들을 혼합한 것에 의존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독특한 자료들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들은 '메시지 지지자들'에게 즉 위치를 다지고자 하는 정통주의자들에게 많은 불안을 안겨주었다.
초기 '이단들'에 관한 정보는 빈약하다. 그들에 관한 오늘날의 지식은 주로 그들의 적대자들이 행한 공격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그 지식은 자연히 게쉬타포 문서들로부터 밝혀질 수 있는 프랑스 혁명의 모습처럼 하나의 왜곡된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예수는 초기의 '이단자들'에 의해 둘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완전히 신으로 생각하여 인간적인 속성이 거이 없는--설령 있다손 치더라도--존재로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본질에 있어서 불타나 500년 후의 모하멧과 다르지 않은 하나의 유한한 인간적 예언자로 보았다.
초기 이단의 시조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생의 후반부를(A.D. 136∼65) 로마에서 보낸 발렌티누스였다. 그당시 발렌티누스는 대단히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는데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프톨레미우스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의 '비밀 가르침들'의 본체를 터득하고 있다고 주장한 그는 로마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인격적 지식이 어떤 외적인 지위보다도 더 앞선다고 단언했다. 당연히 발렌티누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레나이우스를 진노케 했을 것이다. 또다른 공격 대상은 마르키온이었다. 그는 부유한 선박왕이자 주교로 140년경 로마에 도착하여 4 년 후에 파문되었다. 마르키온은 '율법'과 '사랑'을 철저히 구분했는데 전자를 구약성서에 연관시켰으며 후자을 신약성서와 관련시켰다. 이들 마르키온적 사상들중 어떤 것은 1천년 후<펠레스보>와 같은 어떤 책속에서 나타났다. 마르키온은 성서의 정경 목록을 최초로 작성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정경목록에는 구약성서 전체가 제외되어 있다. 이레나이우스가 그의 정경목록을 작성한 것은 마르키온에 대한 즉각적인 웅수에서 였는데 그 목록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의 기초가 되었다.
세 번째 중요한 이단 창시자로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흥미있는 사람은 A.D. 120과 130년 사이에 글을 쓴 알렉산드리아 학자 바실리데스였다. 바실리데스는 희브리어 성서들과 기독교 복음서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이집트와 헬레니즘적 사상에도 심취되어 있었다.
그는 24개에 달하는 복음서 주석들을 썼다고 추정된다. 이레나이우스에 따르면 그는 가장 가증스런 이단을 전파했다. 바실리데스는 십자가 처형이 사기였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키레네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은 괴이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대단히 끈질기고 강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7세기경 코란도 정확하게 이와 동일한 주장을 하였다. 즉 어떤 대리인이--전하는 바로는 키레네 시몬이라고 알려져 있음--예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은 제 1장에서 논의된 문제의 편지를 쓴 사제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 편지는 대리 십자가 사건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에 대해서 언급했다.
초기 이단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집트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알렉산드리아였다. 그곳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학식있고 코스모폴리탄적 도시였으며 로마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대단히 다양한 신앙, 교훈, 그리고 전승의 집산지였다. 유대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반란 이후 이집트는 유대교의 도망자들과 기독교 도망자들 모두에게 있어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안식처임이 입증되었다. 그 도망자들의 대부분이 알렉산드리아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우리의 가정을 지지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증거는 소위 '영지주의 복음서들' 더 정확하게 말해 '나그 하마디 문서들(Nag Hammadi Scrolls)'에 수록되어 있었다.
1945년 12월 고지 이집트에 있는 나그 하마디란 마을 근처에서 부드럽고 비옥한 땅을 파던 한 이집트의 농부가 붉은 토기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 항아리에는 가죽으로 제본된 13개의 사본들 즉 파피루스 책들 또는 두루마리드이 들어 있었다. 그 발굴물의 증요성을 알지 못한 그 농부와 그 가족이 그 사본들중 일부를 불 지피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드디어 나머지가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중 하나가 이집트에서 밀반출되어 암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융 파운데이션(C.G. Jung Foundation)에 의해 구입된 이 사본의 일부에는 오늘날 잘 알려진 '도마복음'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편 이집트 정부는 나그 하마디 총서의 나머지 부분을 1952년에 국유화하였다. 그러나 1961년에야 비로소 국제적인 학자들의 모임이 소집되어 그 자료 전체를 복사하고 번역했다. 1972년에는 사진판의 제 1권이 출판되었고 1977년에는 두루마리 전체가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나그 하마디 문서는 본질상 영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성서본문 전체를 담고 있다. 그 문서는 4세기 후반이나 5세기 초에 즉 A.D. 400년경에 기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두루마리들은 사본들이다. 딸서 그것들이 베껴진 원본들은 휠씬 더 이전에 기록되었다. 그들 중 예를들면 도마복음, 진리복음, 이집트복음 등과 같은 것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콜레멘스, 이레나이우스, 그리고 오리게네스와 같은 최초의 교부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 두루마리들에 있는 본문들의 대부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약간은 A.D. 15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확정지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들 중 하나는 신약성서의 네 권의 표준 복음서들보다 휠씬 더 오래된 자료를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나그 하마디 총서는 초기 기독교 문헌들의 귀중한 보고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 문헌에 있는 것 중 어떤 것은 복음서들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들 중 어떤 것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정확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그것들은 후대의 로마 정통주의에 의한 검열과 수정을 피하였다. 둘째 그것들은 원래 로마의 독자가 아니라 이집트의 독자들을 위해 작성되었으며 따라서 왜곡되거나 로마화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것들은 목격자의 진술한 자료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 자료들은 성지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구술한 설명들인데 아마도 그 유대인들은 인간 예수의 친지들 또는 동지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복음서들이 보유할 수 없었던 역사적 충실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목격담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그 하마디 문서들이 정통주의와 '메시지 지지자들'에게 해로운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들면 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한 사본 즉 '셋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보면 예수가 바실리데스의 이단설에서와 똑같이 교묘한 대치작전에 의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음의 인용구에서 보면 예수는 일인칭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계획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그들에 의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들은 나를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들의 실수와 무지 때문에 그들에게 죽음이 임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편 사람을 못박아 죽였기 때문이다……쓸개와 신포도주를 마신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곧 그들의 아버지였다. 어깨에 십자가를 맨 사람은 다른 사람 곧 시몬이었다. 가시관을 쓴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들의 무지를 비웃고 있었다.
나그 하마디 총서에 있는 어떤 다른 작품들은 베드로와 막달라사이의 지속적인 씁쓸한 불화를 증언해 주고 있다. 그 불화는 '메시지 지지자들' 과 혈통지지자들 사이의 분열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마리아 복음서'에서 보면 베드로는 막달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이여, 우리는 주께서 당신을 다른 여자들보다 더 사랑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주님의 말씀을 말해 주십시오. 당신은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모릅니다.」 후에 베드로는 분개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가 실제로 한 여인과 몰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우리에게는 비밀로 하였는가? 우리는 돌이켜 그녀에게 모든 것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우리보다 그녀를 더 좋아하셨는가?」 그리고 휠씬 후에 제자 중 하나가 베드로에게 대답한다. 「확실히 주께서 그녀를 대단히 잘 알고 계시네. 그가 우리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신 것은 그 때문이지.」
'빌립 복음서'를 보면 이런 불화의 원인들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예를들면 거기에는 신방의 이미지가 거듭해서 강조되어 있다. 빌립 복음서에 따르면 「주님은 모든 것을 신비하게 하셨다. 세례도 성유식(聖油式)도 만찬도 그리고 신방도……」 확실히 그 신방은 언뜻 보기에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빌립 복음서는 보다 명백하다.
「주와 함께 언제나 동행했던 세 사람이 있었다. 곧 모친 마리아와 그녀의 누이와 예수의 동료라고 불리운 막달라가 그들이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동료(companion)'란 말은 '배우자(spouse)'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확실히 그렇게 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빌립복음서의 다음 구절을 보면 더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의 동료는 막달라 마리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녀를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셔서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기도 했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로 인하여 기분이 상했으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들은 그에게 「왜 당신은 우리 모두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십니까?」라고 말했다.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왜 나는 너희를 그녀처럼 사랑하지 않느냐?」라고 하셨다.
빌립 복음서는 그 문제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즉 「육체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 육체를 두려워하면 그것이 너희를 지배할 것이며 육체를 사랑하면 너희를 삼키고 불구로 만들 것이다.」
또 다른 곳을 보면 이러한 것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결혼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왜냐하면 결혼이 없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존재는 남자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남자의 존재는 결혼에 달려 있다.」
빌립 복음서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다. 「인자가 있고 인자의 아들의 아들이 있다. 주님은 인자이고 인자의 아들은 인자를 통하여 생산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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