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배와 성혈 [ 13.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2 ]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 정통주의가 걸어온 길은 대단히 잘 알려져 있으며 훌룡하게 문서화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길은 '메시지 지지자들'의 최종적인 승리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서구 문명의 지침적이고 주도적인 원리로 수용되기는 했지만 전혀 도전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몰래 도망쳤을 때부터 이미 그 가족의 주장들 및 그 가족의 존재는 강력한 호소를 발휘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 호소력은 로마의 정통주의를 크게 위협했다. 로마의 정통주의는 근본적으로 신약성서의 책들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 신약성서 자체는 4세기에 기원된 초기 기독교 문서들의 한 발췌일 뿐이다. 현재의 신약성서보다 더 먼저 씌어진 대단히 많은 다른 작품들도 있는데. 그중 어떤 것들은 공인된 기록보다 의미있고 때로는 논쟁적인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예를 들면 이단적이라 해서 성서에서 제외된 책들이 있는데 그 책들에는 오늘날 외경이라고 알려진 편집본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외경들에 있는 어떤 책들은 후대의 것으로 6세기에 기원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책들은 이미 2세기에도 널리 보급되어 있던 책들이며 따라서 원래의 복음서들 자체만큼이나 정확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책들 중의 하나가 <베드로 복음서>인데 그 책의 한 복사본이 1886년에 나일강 상류의 한 계곡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 책은 A.D. 180년에 안디옥의 주교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 책이다. 그 '외경적' 복음서에 따르면 아리마대 요셉은 본디오 빌라도의 친한 친구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십자가 처형이 눈속임이었을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다.
베드로 복음서도 역시 예수가 묻힌 무덤은 '요셉의 동산'이라고 불리우는 곳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한 최후의 말, 즉 「나의 능력이여 나의 능력이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 특히 주목을 끌고 있다.
또 다른 흥미있는 외경서는 2세기 중에 기원되었으며 그보다 더 이전에 기원되었을 수도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아복음서>이다.
이 책을 보면 예수는 뛰어나기는 했지만 대단히 인간적인 어린이로 묘사되어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격렬하고 다루기 어려웠으며 성질을 마구 부리며 그의 힘을 대단히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번은 그가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을 때려 죽였다.
어떤 독재적인 스승도 이와 유사한 경우를 당하였다. 그러한 사건들은 거짓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그가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신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당시에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었는가 하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어린시절에 예수가 한 좋지 못한 행위들 이외에도 유아복음서에는 하나의 기묘하고 중요한 단편이 있다. 예수가 할례받았을 때 그의 양피는 어떤 알 수 없는 노인에 의해 도난되었는데 그 노인을 그 양피를 희고 매끄러운 향유상자에 넣어 보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죄인 마리아가 입수하여 기름을 담았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와 발에 기름을 부었던 바로 그 상자이다」 그런데 공인된 복음서들에서처럼 여기에도 일반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도유식 즉 어떤 중대한 의식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도유식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 도유식이 오래전에 미리 예견되어졌고 준비되어 졌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건 전체는 비록 모호하고 뒤얽힌 사건이기는 하지만 예수가 30세 때 포교를 시작하기 오래전에 이미 막달라와 예수가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부모가 예수의 양피를 요구하는 그 첫 번째 노인에게 그것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비록 그렇게 기괴한 요구에는 비정상적인 어떤 점이 없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그 노인은 중요한 어떤 사람이거나 또는 예수의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어떤 사람임이 틀림없다. 막달라가 그후 그 기괴한 유물을 가지고 있었거나 그것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은 막달라와 그 노인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또다시 우리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였던 어떤 점을 희미하게나마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경의 여러 책들에 있는 어떤 구절들은, 예를 들면 예수의 어린 시절의 탁월함을 표현하는 어떤 구절들은 후세의 정통주의를 난처하게 했음이 분명하다. 그 구절들은 오늘날의 대부분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외경들도 신약성서의 공인된 책들처럼 '메시지 지지자들'에 의해 예수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작성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외경에는 그 '메시지'를 크게 손상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이 수록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그 '메시지'를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이란 분명히 예수의 정치활동에 관한 어떤 언급일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의 왕조적 야심들에 관한 언급일 것이다. 그러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에 대한 증거를 위해서 우리는 다른 곳을 조사해야 한다. 예수 당시의 성지에는 대단히 많은 서로 다른 유대교적 그룹들, 당파들, 종파들 그리고 소종파들이 있었다. 복음서들에는 이들 중 오직 두 파만이, 즉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만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두 파는 모두 악한 역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악역은 로마 정부와 협력했던 사두개파에게만 적용되어야 했을 것이다. 바리새파는 계속 로마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예수 자신도 실제로 바리새인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근본에서는 바리새적 전통 안에서 활동했다. 로마화된 청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복음서들은 로마를 무죄로 취급하고 유대인들을 모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잘못 전달되어져야 했으며, 왜 사두개인들과 함께 의도적으로 낙인찍혀야 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왜 복음서속에는 열성당원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는가?
열성당원들이야말로 로마인들이 철저히 악당들로 간주했을 호전적인 민족주의자 '자유투사들'이었으며 혁명가들이었다. 복음서속에서 그들이 생략된 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예수는 그들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연관은 부인될 수 없었을 것이며 단지 그럴 듯하게 꾸며저 은닉될 수밖에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브랜던(Brandon)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복음서들이 열성당원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예수와 이들 국수주의자들 사이의 관계를 암시해 주고 있음이 분명한데,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관계를 밝히려 들지 않았다.」
열성당원들과 예수의 관련이 무엇이든간에 그가 열성당원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는 그 두 사람은 '레스타이'라고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이것은 로마인들에게 알려져 있던 열성당원들에 대한 칭호였다. 예수 자신이 열성당원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서속에서 때때로 열성당원들과 아주 유사한 공격적인 군국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유명한 한 구절에서 그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주검을 주러」왔다고 선언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보면 그는 검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추종자들에게 검을 사라고 지시하고 있다.(눅 22:36). 그 후 그는 유월절 음식을 마친 후에 그들이 검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눅 22:38). 제4복음서를 보면 시몬 베드로는 예수가 체포될 때 실제로 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언급들을 전통적이고 온화하고 평화주의적인 구세주 상과 조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러한 구세주가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특히 그가 그 위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한 사랑하는 제자가 검을 소지하는 것을 허락했단 말인가?
예수 자신이 열성당원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복음서들의 외적으로 나타나는 바와는 달리 예수와 열성당과의 관련성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예수와 바라바를 관련시킬 수 있는 설득력있는 증거가 있다. 그리고 바라바도 역시 '레스타이(도적)'로 묘사되어 있다. 야고보, 요한 그리고 베드로는 모두 그들이 열성당과 연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열성당에 동조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는 칭호들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권위있는 학자들에 따르면 가롯 유다(Judas Iscariot)라는 이름은 '시카리 유다(Judas Sicarii)'라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시카리'는 '레스타이'대신 사용될 수 있었던 열성당의 또다른 용어였다. 실제로 시카리는 열성당 계열에 속하는 하나의 엘리크로 직업적인 암살자였던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시몬이라고 알려져 있는 제자가 있다. 히랍어 마가복음 성서을 보면 시몬은 '카나나이오스'라고 불리워지는데 이것은 열성당에 대한 아랍어의 음역이다.
KJB성서에서 보면 그, 희랍어 단어가 잘못 번역되어 시몬이 '가나안 사람 시몬(Simon the Ganaanite)'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몬은 분명히 열성당원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KJB성서조차도 그를 '열성당 시몬'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의 열성당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는 논란의 여기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복음서속에 열성당원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면 엣세네파가 둥장하지 안흔 것도 역시 그렇다. 예수 당신의 성지에서는 엣세네파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만큼이나 중요한 종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가 그들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그에 관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세례 요한은 엣세네파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엣세네파에 관한 모든 언급을 삭제한 것은 열성당에 대한 모든 언급을 삭제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말해 엣세네파와 예수의 관련성은 열성당과 그의 관련성처럼 너무나 밀접하고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부정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련성은 그럴 듯하게 꾸며져 은닉됐을 뿐이다. 당시의 역사가들과 연대기 저자들의 기록에서 보면 엣세네파는 성지전역에 공동체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곳에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B.C. 15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구약성서을 사용했지만 그것을 해석할 때는 실제적인 역사적 사실로서보다는 비유적인 것으로서 취급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를 반박하고 태양숭배와 피타고라스적 사상의 요소들을 혼합했던 것처럼 보이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지지했다. 그들은 입고 있는 백색 옷에 의해 쉽게 구분되었다.
그 문제에 관한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쿰란에서 발견된 유명한 사해 두루마리들이 본질적으로 엣세네파의 문서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쿰란에 살고 있던 그 금욕주의적 종파가 엣세네파의 사상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엣세네파의 가르침처럼 사해 두루마리들도 이원론적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다윗의 혈통을 가진 메시아, 즉 '도유식을 받은 자'의 출현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들은 또한 특수한 역법(曆法)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역법에 따르면 유월절 의식은 금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에 거행되었다.
이는 제4복음서에 나타나는 유월절 의시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많은 중요한 점에 있어서 그들은 예수가 가르친의 어떤 것과 일치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의 가르침을 그들과 일치시켰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해 두루마리 전문가에 의하면 그 두루마리들은 「신약성서에 있는 많은 사건들이 단순히 메시아에 관해 기대되었던 것들을 예수 자신의 역사 속에다 투시시킨 것들임을 믿게 해주는 추가적인 근거라고」한다.
쿰란 종파가 정확하게 엣세네파였건 아니었건간에 예수는 비록 그가 공식적인 엣세네파의 훈련을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엣세네파의 사상에 정통하여 있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많은 가르침들은 엣세네파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유 능력도 마찬가지로 어떤 엣세네파적 영향력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들을 보다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엣세네파는 예수의 경력에 휠씬 더 중요하게 관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엣세네파 사람들은 그들이 입고 있는 휜 옷에 의해 쉽게 구분될 수 있었다. 그러한 복장은 그림과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당시 성지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널리 통용되고 있지는 않았다. 삭제된 '비밀' 마가복음에서 보면 휜 베옷은 중요한 의식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후세의 공인 성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만일 예수가 베다니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신비교의 입회식을 행하고 있었다면, 그 휜 베옷은 이 의식들이 엣세네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더구나 휜 베옷에 관한 주제는 후에 네 권의 복음서속에 다 나타나고 있다. 십자가 처형 후 예수의 시체는 '기적적으로' 무덤에서 자취를 감추며 대신 적어도 한 명의 휜 옷 입은 인물이 그 무덤을 지키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그 인물은 「눈처럼 흰 옷을 입고 있는」 천사이다(마28:3). 마가복음에서 보면 「흰 옷을 입은 청년」이다(막 16:5). 누가복음은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하여 (눅 24:4), 제4복음서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요 20:12)
이 기록들 중 두 곳을 보면 그 무덤에 있는 인물 또는 인물들에게는 아무런 초자연적 지위도 부여되지 않고 있다. 아마 이 인물들은 제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그렇게 보인다--철저하게 유한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들이 엣세네파의 신유 능력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가정은 휠씬 더 타당성이 있게 된다.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옮겨졌을 때 그저도 살아 있었다면 신양요법을 아는 자들의 도움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가 이미 숨이 끊어져 가망이 없었다 해도 역시 그들은 참석했을 것이다.
우리의 각본에 따르면 예수의 몇몇 지지자들이 빌라도와 결탁하여 개인 소유지에서 거짓 십자가처형을 꾸몄다. 특히 그 처형은 메시지 지지자들에 의해 꾸며졌다기보다, 혈통 지지자들, 다시 말해 직계 가족이나 다른 귀족들, 또는 내부조직의 단원들에 의해 꾸며졌을 것이다.
이들은 엣세네파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으며 또은 엣세네파 단원들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추종자들의 '대오'를 이루고 있던 '말씀 지지자들'--시몬 베드로가 그 대표적인 인물임--에게는 그 책략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으로 옮겨지자 예수는 의약적인 치료가 필요했을 것이며 이를 위해 엣세네파의 신앙요법사가 초빙되었을 것이다. 그후 그 무덤이 빈 것으로 발견됐을 때 '대오'를 이루고 있는 제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한 명의 사자가 다시 필요했을 것이다.
이 사자는 의심하지 않는 메시지 지지자들을 격려해야 했을 것이며,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중개인으로서 행동해야 했을 것이며, 로마인들이 무덤을 도굴했다는 혐의를 받지 않도록 미리 조치해야 했을 것이다. 이 소문이 알려지면 위험스런 시민적 소요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각본이 정확하건 정확하지 않건간에 예수가 열성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만큼이나 엣세네파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언뜻 보면 이것은 약간 기묘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열성당과 엣세네파는 종종 서로 양립할 수 없다도 생각되기 때문이다. 열성당은 공격적이고 격렬하며 호전적이고 암살과 폭동도 꺼리지 않았다. 반대로 엣세네파는 대체로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경건하고 평화적이며 점잖은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열성당원들 가운데는 많은 엣세네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열성당은 하나의 종파가 아니라 정치적 당파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당파로서 그들은 반로마적인 바르새파로부터 지지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들만큼이나 철저하게 민족주의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엣세네파로 부터도 지지되었다.
열성당과 엣세네파의 연합은 당시의 팔레스타인에 관해 많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요세푸스의 기록들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요셉 벤 맛디아(Joseph ben Matthias)는 A.D. 37년에 유대의 귀족으로 태어났다. A.D. 66년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갈릴리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배치된 군대를 지휘했다.
군사적 지휘관으로서의 그는 아주 무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곧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사로잡혔다. 거기서 그는 퀴슬링(Quisling)으로 갔다. 플라비우스 요셉푸스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로마 시민이 되었고, 그의 아내와 이혼하고 로마의 공주와 결혼했으며 황제로부터 후한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 중에는 황제의 궁전에 있는 개인저택과 성지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몰수한 토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죽을 무렵인 A.D. 100년에는 그 시대에 관한 그의 방대한 역사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전쟁>에서 요세푸스는 A.D. 66년과 74년 사이의 반란에 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그 후의 역사가들은 그 비참한 반란, 예루살렘의 약탈, 그리고 성전의 파괴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을 요세푸스의 글에서 취하였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저작에는 사해 남서부에 위치해 있던 마사다 요새가 A.D. 74년에 함락된 것이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약 120년 후의 몽세귀르처럼 마사다도 후에 전혀 승산이 없는 불굴의 의지, 용맹, 그리고 헌신을 상징하게 되었다. 몽세귀르처럼 마사다로 다른 모든 조직적인 저항이 실제로 종식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해서 침략자에 저항했다. 여타의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맹공으로 붕괴되었지만 마사다는 여전히 함락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러다 A.D. 74년에야 그 요새는 함락되었다. 강력한 공격 무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포격을 가한 끝에 로마인들은 사다리를 설치하여 그 방어 진지를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4 월 15일 밤에 그들은 대공세를 준비했다. 같은 날 밤에 그 요새에 있던 960명의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은 집단으로 자살하였다. 다음날 아침 로마인들이 성문을 부수었을 때 거기에는 불타다만 시체들만이 뒹글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4 월 16일 아침에 마사다성으로 진군해 들어간 로마군병들을 따라갔었다. 그리고 그 시체더미를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했으며 그 중 세 명의 생존자들을 만나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한 명의 여인과 두 명의 아이들로서, 나머지 수비대들이 자살하는 동안 성채 밑에 있는 하수도에 숨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요세푸스는 이 생존자들로부터 전날밤에 일어났던 일을 자세리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 수비대의 대장은 엘르아잘(Eleazar)이란 사람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이 이름은 나사로의 별명이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이 그런 무서운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은 그의 설득력있고 카르스마적인 웅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는 그의 역사책에서 세 명의 생존자들에게서 들었다고 하는 엘르아잘의 연설을 되풀이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연설은 퍽 흥미가 있다.
역사에 의하면 마사다는 호전적인 열성당에 의해 방어되었다. 요세푸스도 '열성당(Zealots)'과 '시카리(Sicarii)'라는 말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엘르아잘의 연설은 전통의 유대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엣세네적, 즉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가깝다. 그의 연설은 이렇다.
원시인이 생각하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의 조상들의 행동과 정신에 의해 지지된 신들의 말씀은 한결같이 삶은 인간의 불행이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며 어떤 불행도 맛보지 않을, 그들 자신의 순수한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 영혼들이 유한한 육체에 갇혀 육체의 슬픔을 나눠가지는 동안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 영혼들은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유한한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것은 가장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육체에 갇혀 있을 때애도 커다란 일을 할 수 있기는 합니다.
확실히 그렀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각기관입니다. 영혼은 자유로이 움직이며 유한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땅에 매이게 하는 짐을 벗어버리고 그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진실로 영혼은 축복된 힘과 전혀 얽매이지 않는 힘을 소유하게 되며 하나님처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영혼이 육체 안에 들어오며 보이지 않게 떠납니다. 영혼은 불멸의 존재가 되지만 육체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살고 꽃을 피웁니다. 영혼이 떠난 것은 무엇이든 말라 죽습니다. 영혼은 그처럼 엄청난 불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명을 자연에게 바쳐야 할 일종의 봉사로 간주하여, 주저하지 않고 영혼을 육체의 속박에서 풀어주는 사람들은 진정 용기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불행도 그 영혼들을 억누르거나 쫓아내지 못합니다. 불멸의 삶에 대한 욕망이 끓어오를 때 영혼은 오히려 친구인 육체를 떠나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한 어떤 학자도 이 연설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연설들은 많은 자극적인 의문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느 점에서도 정통적인 유대교는 '영혼'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며 영혼의 불멸성에 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실제로 영혼이라는 개념과 불멸성이라는 개념은 유대교적 전통과 사상의 주류와는 조화되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월성,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일치, 그리고 삶을 악한 것이라고 저주하는 것 등도 역시 유대교와는 조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들은 신비주의적 전통에서 비롯되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런 태도들은 분명히 영지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이다. 그리고 마사다와 같은 상황에서는 엣세네파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물론 이러한 태도가운데 어떤 것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적'이라고 묘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그후 편집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말은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 예를들면 제4복음서에서 죽음에 의해 나사로와 일치하고자 한 추종자들에게 적용되었을 수도 있다. 마사다의 수비대원들 중에는 예수의 혈통을 지지하는 몇몇 지지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A.D. 66에서 74년까지의 반란기간 동안에는 유대인들만큼이나 격렬하게 로마인들에 대항하여 싸운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사실 많은 열성당원들은 오늘날 '초기 기독교인들'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얼마가 마사다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요세푸스는 이런 점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설령 그가 제시했다 할지라도 후세의 편집자들은 그것을 삭제했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요세푸스에게서 예수에 관한 어떤 언급을 기대하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편집한 요세푸스의 작품속에는 그러한 언급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언급들은 이미 확립된 정통주의가 제시하는 대로 예수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언급들은 콘스탄틴 시대보다 더 이르지 않은 때에 생긴 그럴 듯한 가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요세푸스의 저작이 러시아어로 번역된 그 본문 자체는 대략 1261년경에 기원되었다. 그 본문을 베낀 사람은 정통적인 유대인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전 기독교적' 언급들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세푸스의 이 역본에 있는 예수는 인간적인 존재로서 묘사되어 있으며 하나의 정치적인 혁명가로 묘사되어 있고 '통치하지 않는 왕'으로서 묘사되어 있다. 그는 또한 「나실인들의 관례대로 그의 머리 중앙에 하나의 계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많은 정력을 기울여 오늘날 「슬라브어 요세푸스」라고 불리우는 것의 진정성 여부를 논의했다. 결국 우리는 그것이 다소 진실된 것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즉 그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문서 파괴에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으며 콘스탄틴 통치하에서 회복된 정통주의의 편집망을 피한 요세푸스의 한 사본 또는 사본들로부터 번역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결론짓는 데에는 많은 타당성 있는 이유들이 있다. 예를들면 만일 슬라브어 요세푸스가 위조품이었다면 그것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위조되었을 것인가?
예수를 왕으로 묘사한 것은 13세기의 유대교 독자들에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인간으로 묘사한 것도 13세기의 기독교도들을 조금도 만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3세기 초에 저작 활동을 한 교부 오리게네스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부인하는 요세푸스의 한 역본을 암시해 주고 있다. 원래는 진정한 '표준'역본이었을 수 있는 이 역본이「슬라브어 요세푸스」의 본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 정통주의가 걸어온 길은 대단히 잘 알려져 있으며 훌룡하게 문서화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길은 '메시지 지지자들'의 최종적인 승리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서구 문명의 지침적이고 주도적인 원리로 수용되기는 했지만 전혀 도전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몰래 도망쳤을 때부터 이미 그 가족의 주장들 및 그 가족의 존재는 강력한 호소를 발휘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 호소력은 로마의 정통주의를 크게 위협했다. 로마의 정통주의는 근본적으로 신약성서의 책들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 신약성서 자체는 4세기에 기원된 초기 기독교 문서들의 한 발췌일 뿐이다. 현재의 신약성서보다 더 먼저 씌어진 대단히 많은 다른 작품들도 있는데. 그중 어떤 것들은 공인된 기록보다 의미있고 때로는 논쟁적인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예를 들면 이단적이라 해서 성서에서 제외된 책들이 있는데 그 책들에는 오늘날 외경이라고 알려진 편집본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외경들에 있는 어떤 책들은 후대의 것으로 6세기에 기원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책들은 이미 2세기에도 널리 보급되어 있던 책들이며 따라서 원래의 복음서들 자체만큼이나 정확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책들 중의 하나가 <베드로 복음서>인데 그 책의 한 복사본이 1886년에 나일강 상류의 한 계곡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 책은 A.D. 180년에 안디옥의 주교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 책이다. 그 '외경적' 복음서에 따르면 아리마대 요셉은 본디오 빌라도의 친한 친구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십자가 처형이 눈속임이었을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다.
베드로 복음서도 역시 예수가 묻힌 무덤은 '요셉의 동산'이라고 불리우는 곳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한 최후의 말, 즉 「나의 능력이여 나의 능력이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 특히 주목을 끌고 있다.
또 다른 흥미있는 외경서는 2세기 중에 기원되었으며 그보다 더 이전에 기원되었을 수도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아복음서>이다.
이 책을 보면 예수는 뛰어나기는 했지만 대단히 인간적인 어린이로 묘사되어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격렬하고 다루기 어려웠으며 성질을 마구 부리며 그의 힘을 대단히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번은 그가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을 때려 죽였다.
어떤 독재적인 스승도 이와 유사한 경우를 당하였다. 그러한 사건들은 거짓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그가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신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당시에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었는가 하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어린시절에 예수가 한 좋지 못한 행위들 이외에도 유아복음서에는 하나의 기묘하고 중요한 단편이 있다. 예수가 할례받았을 때 그의 양피는 어떤 알 수 없는 노인에 의해 도난되었는데 그 노인을 그 양피를 희고 매끄러운 향유상자에 넣어 보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죄인 마리아가 입수하여 기름을 담았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와 발에 기름을 부었던 바로 그 상자이다」 그런데 공인된 복음서들에서처럼 여기에도 일반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도유식 즉 어떤 중대한 의식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도유식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 도유식이 오래전에 미리 예견되어졌고 준비되어 졌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건 전체는 비록 모호하고 뒤얽힌 사건이기는 하지만 예수가 30세 때 포교를 시작하기 오래전에 이미 막달라와 예수가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부모가 예수의 양피를 요구하는 그 첫 번째 노인에게 그것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비록 그렇게 기괴한 요구에는 비정상적인 어떤 점이 없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그 노인은 중요한 어떤 사람이거나 또는 예수의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어떤 사람임이 틀림없다. 막달라가 그후 그 기괴한 유물을 가지고 있었거나 그것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은 막달라와 그 노인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또다시 우리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였던 어떤 점을 희미하게나마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경의 여러 책들에 있는 어떤 구절들은, 예를 들면 예수의 어린 시절의 탁월함을 표현하는 어떤 구절들은 후세의 정통주의를 난처하게 했음이 분명하다. 그 구절들은 오늘날의 대부분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외경들도 신약성서의 공인된 책들처럼 '메시지 지지자들'에 의해 예수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작성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외경에는 그 '메시지'를 크게 손상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이 수록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그 '메시지'를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이란 분명히 예수의 정치활동에 관한 어떤 언급일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의 왕조적 야심들에 관한 언급일 것이다. 그러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에 대한 증거를 위해서 우리는 다른 곳을 조사해야 한다. 예수 당시의 성지에는 대단히 많은 서로 다른 유대교적 그룹들, 당파들, 종파들 그리고 소종파들이 있었다. 복음서들에는 이들 중 오직 두 파만이, 즉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만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두 파는 모두 악한 역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악역은 로마 정부와 협력했던 사두개파에게만 적용되어야 했을 것이다. 바리새파는 계속 로마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예수 자신도 실제로 바리새인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근본에서는 바리새적 전통 안에서 활동했다. 로마화된 청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복음서들은 로마를 무죄로 취급하고 유대인들을 모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잘못 전달되어져야 했으며, 왜 사두개인들과 함께 의도적으로 낙인찍혀야 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왜 복음서속에는 열성당원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는가?
열성당원들이야말로 로마인들이 철저히 악당들로 간주했을 호전적인 민족주의자 '자유투사들'이었으며 혁명가들이었다. 복음서속에서 그들이 생략된 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예수는 그들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연관은 부인될 수 없었을 것이며 단지 그럴 듯하게 꾸며저 은닉될 수밖에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브랜던(Brandon)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복음서들이 열성당원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예수와 이들 국수주의자들 사이의 관계를 암시해 주고 있음이 분명한데,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관계를 밝히려 들지 않았다.」
열성당원들과 예수의 관련이 무엇이든간에 그가 열성당원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는 그 두 사람은 '레스타이'라고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이것은 로마인들에게 알려져 있던 열성당원들에 대한 칭호였다. 예수 자신이 열성당원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서속에서 때때로 열성당원들과 아주 유사한 공격적인 군국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유명한 한 구절에서 그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주검을 주러」왔다고 선언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보면 그는 검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추종자들에게 검을 사라고 지시하고 있다.(눅 22:36). 그 후 그는 유월절 음식을 마친 후에 그들이 검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눅 22:38). 제4복음서를 보면 시몬 베드로는 예수가 체포될 때 실제로 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언급들을 전통적이고 온화하고 평화주의적인 구세주 상과 조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러한 구세주가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특히 그가 그 위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한 사랑하는 제자가 검을 소지하는 것을 허락했단 말인가?
예수 자신이 열성당원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복음서들의 외적으로 나타나는 바와는 달리 예수와 열성당과의 관련성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예수와 바라바를 관련시킬 수 있는 설득력있는 증거가 있다. 그리고 바라바도 역시 '레스타이(도적)'로 묘사되어 있다. 야고보, 요한 그리고 베드로는 모두 그들이 열성당과 연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열성당에 동조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는 칭호들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권위있는 학자들에 따르면 가롯 유다(Judas Iscariot)라는 이름은 '시카리 유다(Judas Sicarii)'라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시카리'는 '레스타이'대신 사용될 수 있었던 열성당의 또다른 용어였다. 실제로 시카리는 열성당 계열에 속하는 하나의 엘리크로 직업적인 암살자였던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시몬이라고 알려져 있는 제자가 있다. 히랍어 마가복음 성서을 보면 시몬은 '카나나이오스'라고 불리워지는데 이것은 열성당에 대한 아랍어의 음역이다.
KJB성서에서 보면 그, 희랍어 단어가 잘못 번역되어 시몬이 '가나안 사람 시몬(Simon the Ganaanite)'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몬은 분명히 열성당원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KJB성서조차도 그를 '열성당 시몬'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의 열성당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는 논란의 여기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복음서속에 열성당원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면 엣세네파가 둥장하지 안흔 것도 역시 그렇다. 예수 당신의 성지에서는 엣세네파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만큼이나 중요한 종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가 그들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그에 관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세례 요한은 엣세네파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엣세네파에 관한 모든 언급을 삭제한 것은 열성당에 대한 모든 언급을 삭제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말해 엣세네파와 예수의 관련성은 열성당과 그의 관련성처럼 너무나 밀접하고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부정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련성은 그럴 듯하게 꾸며져 은닉됐을 뿐이다. 당시의 역사가들과 연대기 저자들의 기록에서 보면 엣세네파는 성지전역에 공동체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곳에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B.C. 15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구약성서을 사용했지만 그것을 해석할 때는 실제적인 역사적 사실로서보다는 비유적인 것으로서 취급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를 반박하고 태양숭배와 피타고라스적 사상의 요소들을 혼합했던 것처럼 보이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지지했다. 그들은 입고 있는 백색 옷에 의해 쉽게 구분되었다.
그 문제에 관한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쿰란에서 발견된 유명한 사해 두루마리들이 본질적으로 엣세네파의 문서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쿰란에 살고 있던 그 금욕주의적 종파가 엣세네파의 사상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엣세네파의 가르침처럼 사해 두루마리들도 이원론적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다윗의 혈통을 가진 메시아, 즉 '도유식을 받은 자'의 출현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들은 또한 특수한 역법(曆法)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역법에 따르면 유월절 의식은 금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에 거행되었다.
이는 제4복음서에 나타나는 유월절 의시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많은 중요한 점에 있어서 그들은 예수가 가르친의 어떤 것과 일치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의 가르침을 그들과 일치시켰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해 두루마리 전문가에 의하면 그 두루마리들은 「신약성서에 있는 많은 사건들이 단순히 메시아에 관해 기대되었던 것들을 예수 자신의 역사 속에다 투시시킨 것들임을 믿게 해주는 추가적인 근거라고」한다.
쿰란 종파가 정확하게 엣세네파였건 아니었건간에 예수는 비록 그가 공식적인 엣세네파의 훈련을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엣세네파의 사상에 정통하여 있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많은 가르침들은 엣세네파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유 능력도 마찬가지로 어떤 엣세네파적 영향력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들을 보다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엣세네파는 예수의 경력에 휠씬 더 중요하게 관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엣세네파 사람들은 그들이 입고 있는 휜 옷에 의해 쉽게 구분될 수 있었다. 그러한 복장은 그림과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당시 성지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널리 통용되고 있지는 않았다. 삭제된 '비밀' 마가복음에서 보면 휜 베옷은 중요한 의식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후세의 공인 성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만일 예수가 베다니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신비교의 입회식을 행하고 있었다면, 그 휜 베옷은 이 의식들이 엣세네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더구나 휜 베옷에 관한 주제는 후에 네 권의 복음서속에 다 나타나고 있다. 십자가 처형 후 예수의 시체는 '기적적으로' 무덤에서 자취를 감추며 대신 적어도 한 명의 휜 옷 입은 인물이 그 무덤을 지키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그 인물은 「눈처럼 흰 옷을 입고 있는」 천사이다(마28:3). 마가복음에서 보면 「흰 옷을 입은 청년」이다(막 16:5). 누가복음은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하여 (눅 24:4), 제4복음서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요 20:12)
이 기록들 중 두 곳을 보면 그 무덤에 있는 인물 또는 인물들에게는 아무런 초자연적 지위도 부여되지 않고 있다. 아마 이 인물들은 제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그렇게 보인다--철저하게 유한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들이 엣세네파의 신유 능력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가정은 휠씬 더 타당성이 있게 된다.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옮겨졌을 때 그저도 살아 있었다면 신양요법을 아는 자들의 도움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가 이미 숨이 끊어져 가망이 없었다 해도 역시 그들은 참석했을 것이다.
우리의 각본에 따르면 예수의 몇몇 지지자들이 빌라도와 결탁하여 개인 소유지에서 거짓 십자가처형을 꾸몄다. 특히 그 처형은 메시지 지지자들에 의해 꾸며졌다기보다, 혈통 지지자들, 다시 말해 직계 가족이나 다른 귀족들, 또는 내부조직의 단원들에 의해 꾸며졌을 것이다.
이들은 엣세네파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으며 또은 엣세네파 단원들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추종자들의 '대오'를 이루고 있던 '말씀 지지자들'--시몬 베드로가 그 대표적인 인물임--에게는 그 책략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으로 옮겨지자 예수는 의약적인 치료가 필요했을 것이며 이를 위해 엣세네파의 신앙요법사가 초빙되었을 것이다. 그후 그 무덤이 빈 것으로 발견됐을 때 '대오'를 이루고 있는 제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한 명의 사자가 다시 필요했을 것이다.
이 사자는 의심하지 않는 메시지 지지자들을 격려해야 했을 것이며,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중개인으로서 행동해야 했을 것이며, 로마인들이 무덤을 도굴했다는 혐의를 받지 않도록 미리 조치해야 했을 것이다. 이 소문이 알려지면 위험스런 시민적 소요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각본이 정확하건 정확하지 않건간에 예수가 열성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만큼이나 엣세네파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언뜻 보면 이것은 약간 기묘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열성당과 엣세네파는 종종 서로 양립할 수 없다도 생각되기 때문이다. 열성당은 공격적이고 격렬하며 호전적이고 암살과 폭동도 꺼리지 않았다. 반대로 엣세네파는 대체로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경건하고 평화적이며 점잖은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열성당원들 가운데는 많은 엣세네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열성당은 하나의 종파가 아니라 정치적 당파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당파로서 그들은 반로마적인 바르새파로부터 지지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들만큼이나 철저하게 민족주의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엣세네파로 부터도 지지되었다.
열성당과 엣세네파의 연합은 당시의 팔레스타인에 관해 많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요세푸스의 기록들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요셉 벤 맛디아(Joseph ben Matthias)는 A.D. 37년에 유대의 귀족으로 태어났다. A.D. 66년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갈릴리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배치된 군대를 지휘했다.
군사적 지휘관으로서의 그는 아주 무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곧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사로잡혔다. 거기서 그는 퀴슬링(Quisling)으로 갔다. 플라비우스 요셉푸스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로마 시민이 되었고, 그의 아내와 이혼하고 로마의 공주와 결혼했으며 황제로부터 후한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 중에는 황제의 궁전에 있는 개인저택과 성지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몰수한 토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죽을 무렵인 A.D. 100년에는 그 시대에 관한 그의 방대한 역사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전쟁>에서 요세푸스는 A.D. 66년과 74년 사이의 반란에 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그 후의 역사가들은 그 비참한 반란, 예루살렘의 약탈, 그리고 성전의 파괴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을 요세푸스의 글에서 취하였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저작에는 사해 남서부에 위치해 있던 마사다 요새가 A.D. 74년에 함락된 것이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약 120년 후의 몽세귀르처럼 마사다도 후에 전혀 승산이 없는 불굴의 의지, 용맹, 그리고 헌신을 상징하게 되었다. 몽세귀르처럼 마사다로 다른 모든 조직적인 저항이 실제로 종식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해서 침략자에 저항했다. 여타의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맹공으로 붕괴되었지만 마사다는 여전히 함락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러다 A.D. 74년에야 그 요새는 함락되었다. 강력한 공격 무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포격을 가한 끝에 로마인들은 사다리를 설치하여 그 방어 진지를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4 월 15일 밤에 그들은 대공세를 준비했다. 같은 날 밤에 그 요새에 있던 960명의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은 집단으로 자살하였다. 다음날 아침 로마인들이 성문을 부수었을 때 거기에는 불타다만 시체들만이 뒹글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4 월 16일 아침에 마사다성으로 진군해 들어간 로마군병들을 따라갔었다. 그리고 그 시체더미를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했으며 그 중 세 명의 생존자들을 만나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한 명의 여인과 두 명의 아이들로서, 나머지 수비대들이 자살하는 동안 성채 밑에 있는 하수도에 숨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요세푸스는 이 생존자들로부터 전날밤에 일어났던 일을 자세리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 수비대의 대장은 엘르아잘(Eleazar)이란 사람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이 이름은 나사로의 별명이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이 그런 무서운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은 그의 설득력있고 카르스마적인 웅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는 그의 역사책에서 세 명의 생존자들에게서 들었다고 하는 엘르아잘의 연설을 되풀이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연설은 퍽 흥미가 있다.
역사에 의하면 마사다는 호전적인 열성당에 의해 방어되었다. 요세푸스도 '열성당(Zealots)'과 '시카리(Sicarii)'라는 말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엘르아잘의 연설은 전통의 유대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엣세네적, 즉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가깝다. 그의 연설은 이렇다.
원시인이 생각하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의 조상들의 행동과 정신에 의해 지지된 신들의 말씀은 한결같이 삶은 인간의 불행이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며 어떤 불행도 맛보지 않을, 그들 자신의 순수한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 영혼들이 유한한 육체에 갇혀 육체의 슬픔을 나눠가지는 동안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 영혼들은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유한한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것은 가장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육체에 갇혀 있을 때애도 커다란 일을 할 수 있기는 합니다.
확실히 그렀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각기관입니다. 영혼은 자유로이 움직이며 유한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땅에 매이게 하는 짐을 벗어버리고 그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진실로 영혼은 축복된 힘과 전혀 얽매이지 않는 힘을 소유하게 되며 하나님처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영혼이 육체 안에 들어오며 보이지 않게 떠납니다. 영혼은 불멸의 존재가 되지만 육체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살고 꽃을 피웁니다. 영혼이 떠난 것은 무엇이든 말라 죽습니다. 영혼은 그처럼 엄청난 불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명을 자연에게 바쳐야 할 일종의 봉사로 간주하여, 주저하지 않고 영혼을 육체의 속박에서 풀어주는 사람들은 진정 용기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불행도 그 영혼들을 억누르거나 쫓아내지 못합니다. 불멸의 삶에 대한 욕망이 끓어오를 때 영혼은 오히려 친구인 육체를 떠나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한 어떤 학자도 이 연설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연설들은 많은 자극적인 의문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느 점에서도 정통적인 유대교는 '영혼'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며 영혼의 불멸성에 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실제로 영혼이라는 개념과 불멸성이라는 개념은 유대교적 전통과 사상의 주류와는 조화되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월성,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일치, 그리고 삶을 악한 것이라고 저주하는 것 등도 역시 유대교와는 조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들은 신비주의적 전통에서 비롯되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런 태도들은 분명히 영지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이다. 그리고 마사다와 같은 상황에서는 엣세네파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물론 이러한 태도가운데 어떤 것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적'이라고 묘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그후 편집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말은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 예를들면 제4복음서에서 죽음에 의해 나사로와 일치하고자 한 추종자들에게 적용되었을 수도 있다. 마사다의 수비대원들 중에는 예수의 혈통을 지지하는 몇몇 지지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A.D. 66에서 74년까지의 반란기간 동안에는 유대인들만큼이나 격렬하게 로마인들에 대항하여 싸운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사실 많은 열성당원들은 오늘날 '초기 기독교인들'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얼마가 마사다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요세푸스는 이런 점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설령 그가 제시했다 할지라도 후세의 편집자들은 그것을 삭제했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요세푸스에게서 예수에 관한 어떤 언급을 기대하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편집한 요세푸스의 작품속에는 그러한 언급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언급들은 이미 확립된 정통주의가 제시하는 대로 예수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언급들은 콘스탄틴 시대보다 더 이르지 않은 때에 생긴 그럴 듯한 가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요세푸스의 저작이 러시아어로 번역된 그 본문 자체는 대략 1261년경에 기원되었다. 그 본문을 베낀 사람은 정통적인 유대인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전 기독교적' 언급들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세푸스의 이 역본에 있는 예수는 인간적인 존재로서 묘사되어 있으며 하나의 정치적인 혁명가로 묘사되어 있고 '통치하지 않는 왕'으로서 묘사되어 있다. 그는 또한 「나실인들의 관례대로 그의 머리 중앙에 하나의 계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많은 정력을 기울여 오늘날 「슬라브어 요세푸스」라고 불리우는 것의 진정성 여부를 논의했다. 결국 우리는 그것이 다소 진실된 것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즉 그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문서 파괴에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으며 콘스탄틴 통치하에서 회복된 정통주의의 편집망을 피한 요세푸스의 한 사본 또는 사본들로부터 번역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결론짓는 데에는 많은 타당성 있는 이유들이 있다. 예를들면 만일 슬라브어 요세푸스가 위조품이었다면 그것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위조되었을 것인가?
예수를 왕으로 묘사한 것은 13세기의 유대교 독자들에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인간으로 묘사한 것도 13세기의 기독교도들을 조금도 만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3세기 초에 저작 활동을 한 교부 오리게네스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부인하는 요세푸스의 한 역본을 암시해 주고 있다. 원래는 진정한 '표준'역본이었을 수 있는 이 역본이「슬라브어 요세푸스」의 본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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