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배와 성혈 [ 4. 예수의 결혼 ]
복음서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복음서들을 식별해 내려고 했을 뿐이다. 즉 가능성 또는 타당성 있는 진리의 어떤 단편들을 발견해 내어 그 단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장식적인 틀로부터 그 진리의 단편들을 골라내고자 했을 뿐이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아주 정확한 성질의 단편들, 즉 예수와 막달라라는 여인과의 결혼을 입증해 줄 수 있는 단편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한 증거들은 명백하지 않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증거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글에 나타난 것 이외의 것을 알아내야 하며, 어떤 괴리들을 채워야 하며, 어떤 휴식과 생략을 설명해야 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생략된 것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며, 풍자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며 애매한 언급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의 증거를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우리는 결혼에 도움을 주었을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증거도 찾아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탐구에는 명백히 구별되지만 밀접하게 관련된 수많은 질문들이 포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질문들 중에서 가장 분명한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복음서속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간에 예수가 실제로 결혼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물론 그가 결혼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어떤 진술도 없다. 반대로 명확하게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진술도 없다. 이것은 언뜻 보기보다는 더 흥미있고 더 의미심장한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게자 베머스(Geza Vermes) 박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예수의 결혼에 관해서는 복음서들이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대 유대 사회에 있어서 그러한 태도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더 탐구해 볼 만하다. 복음서들은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를 들면 베드로가 결혼했다는 것을 진술해 주고 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예수 자신은 독신생활을 옹호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마태복음에서 보면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19:4~5) 이러한 진술은 독신생활에 대한 명령과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예수가 독신 생활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았다면 그가 독신생활을 했다고 추측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 당시 유대의 관습에 따르면 남자가 결혼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어떤 공동체에 속한 일부의 엣세네파 사람들을 제외하면 독신생활은 강한 비난의 대상이었다. 1세기 후반의 어떤 유대교 작가는 고의적인 독신생활을 살인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 하나 뿐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유대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위해 부인을 찾아주는 것은 그의 아들이 할례를 받았음을 보증하는 것만큼이나 의무화되어 있었다. 만일 예수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은 대단히 이채로왔을 것이다. 그 사실은 주목거리가 되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예수를 특징짓고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데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로 인하여 그는 어떤 중대한 의미에서 그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소외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서 기록들 중에 적어도 하나는 그처럼 두드러진 관습으로부터의 이탈을 다소라도 언급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만일 예수가 실제로 후세의 전승이 주장하는 것처럼 독신주의자 였다면 그러한 독신생활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독신생활에 관한한 예수가 그 당시의 전통과 문화에 따랐음을, 즉 간단히 말해서 그가 결혼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복음서들이 그 문제에 침묵하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것이다. 그 논쟁은 한 존경받는 현대의 신학자에 의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런 문화적 배경이 확실하다고 볼 때 예수가 그의 포교를 시작하기 전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만일 그가 독신생활을 강조했다면 하나의 소동, 즉 거부 반응이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흔적은 다소나마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속에 예수의 결혼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결혼 가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강한 논증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의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독신생활을 하거나 그를 옹호하는 것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따라서 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남아있었을것이다.
결혼 가설은 복음서 속에서 예수에게 빈번히 적용된 '랍비(Rabbi)'라는 칭호에 의하여 훨씬 더 확고하게 된다. 물론 이 용어가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단순히 자칭 교사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교육수준--예를 들면 그가 성전에서 장로들에게 그의 지식을 과시한 것--으로 보아 그는 자칭 교사 이상의 사람이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으로 보아 그는 모종의 공식적인 랍비 훈련을 받았으며 공식적으로 랍비로서 인정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를 엄격한 의미에서의 교사로서 묘사하고 있는 전승에 부합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엄격한 의미에서의 랍비였다면 결혼은 개연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확실하였을 것이다. 유대교의 미슈나 율법은 그 문제에 관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교사가 될 수 없다]라고 상당히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다.
제4 복음서에서 보면 결혼과 관련된 하나의 사건이 있다. 그것이 사실은 예수 자신의 결혼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사건은 가나의 혼인잔치이며 대단히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친숙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두드러진 문제들이 수반되고, 그 문제들은 모두 정당한 이유가 있다.
제4 복음서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가나의 결혼잔치는 검소한 시골 예식, 즉 신랑과 신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전형적인 시골 결혼식인 것처럼 보인다. 이 결혼 잔치에 예수가 특별히 초대되었다. 이것만으로도 기이하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사실상 그의 포교를 시작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훨씬 더 기이한 것은 예수의 어머니가 바로 그 잔치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참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그의 아들에게 포도주를 보충해 달라고 귀띔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에게 명령하고 있다. 그녀는 마치 주인처럼 행동하고 있다. [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에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2:3~4) 그러나 마리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 아들의 항변을 무시한다.
[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하라 하니라 ](5) 그리고 그 하인들은 마치 그들이 마리아와 예수로부터 명령 받는데에 익숙해 있기나 한 것처럼 즉시 따르고 있다.
그녀와의 관련성을 부인하려는 예수의 명백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그를 설복시킨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첫번재 이적, 즉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적을 행한다. 복음서에 관한한 그는 그때까지는 그의 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의 그런 이적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 타당성이 없는 일이다. 설령 타당성이 있다 할지라도 왜 그러한 독특하고 거룩한 재능을 그처럼 일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했는가? 왜 마리아가 그의 아들에게 그러한 요청을 했는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왜 결혼 잔치에 참석한 두 명의 '손님들'이 음식장만을 책임져야 했는가? 그것은 관습상 주인의 책임인 것이다. 당연히 가나의 혼인 잔치는 예수 자신의 혼인 잔치이다. 그렇다면 포도주를 준비하는 것은 실제로 그의 책임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가 실제로 예수 자신의 혼인 잔치였다는 그 이상의 증거도 있다. 그 이적이 행해진 직후에 연회장(예식 감독자)이 새로 내 온 포도주를 맛보았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요2:9~10) 이 말들은 분명히 예수에게 한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말을 '신랑'에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분명한 결론은 예수와 '신랑'이 하나의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복음서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복음서들을 식별해 내려고 했을 뿐이다. 즉 가능성 또는 타당성 있는 진리의 어떤 단편들을 발견해 내어 그 단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장식적인 틀로부터 그 진리의 단편들을 골라내고자 했을 뿐이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아주 정확한 성질의 단편들, 즉 예수와 막달라라는 여인과의 결혼을 입증해 줄 수 있는 단편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한 증거들은 명백하지 않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증거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글에 나타난 것 이외의 것을 알아내야 하며, 어떤 괴리들을 채워야 하며, 어떤 휴식과 생략을 설명해야 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생략된 것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며, 풍자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며 애매한 언급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의 증거를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우리는 결혼에 도움을 주었을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증거도 찾아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탐구에는 명백히 구별되지만 밀접하게 관련된 수많은 질문들이 포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질문들 중에서 가장 분명한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복음서속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간에 예수가 실제로 결혼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물론 그가 결혼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어떤 진술도 없다. 반대로 명확하게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진술도 없다. 이것은 언뜻 보기보다는 더 흥미있고 더 의미심장한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게자 베머스(Geza Vermes) 박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예수의 결혼에 관해서는 복음서들이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대 유대 사회에 있어서 그러한 태도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더 탐구해 볼 만하다. 복음서들은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를 들면 베드로가 결혼했다는 것을 진술해 주고 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예수 자신은 독신생활을 옹호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마태복음에서 보면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19:4~5) 이러한 진술은 독신생활에 대한 명령과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예수가 독신 생활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았다면 그가 독신생활을 했다고 추측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 당시 유대의 관습에 따르면 남자가 결혼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어떤 공동체에 속한 일부의 엣세네파 사람들을 제외하면 독신생활은 강한 비난의 대상이었다. 1세기 후반의 어떤 유대교 작가는 고의적인 독신생활을 살인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 하나 뿐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유대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위해 부인을 찾아주는 것은 그의 아들이 할례를 받았음을 보증하는 것만큼이나 의무화되어 있었다. 만일 예수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은 대단히 이채로왔을 것이다. 그 사실은 주목거리가 되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예수를 특징짓고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데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로 인하여 그는 어떤 중대한 의미에서 그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소외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서 기록들 중에 적어도 하나는 그처럼 두드러진 관습으로부터의 이탈을 다소라도 언급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만일 예수가 실제로 후세의 전승이 주장하는 것처럼 독신주의자 였다면 그러한 독신생활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독신생활에 관한한 예수가 그 당시의 전통과 문화에 따랐음을, 즉 간단히 말해서 그가 결혼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복음서들이 그 문제에 침묵하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것이다. 그 논쟁은 한 존경받는 현대의 신학자에 의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런 문화적 배경이 확실하다고 볼 때 예수가 그의 포교를 시작하기 전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만일 그가 독신생활을 강조했다면 하나의 소동, 즉 거부 반응이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흔적은 다소나마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속에 예수의 결혼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결혼 가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강한 논증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의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독신생활을 하거나 그를 옹호하는 것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따라서 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남아있었을것이다.
결혼 가설은 복음서 속에서 예수에게 빈번히 적용된 '랍비(Rabbi)'라는 칭호에 의하여 훨씬 더 확고하게 된다. 물론 이 용어가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단순히 자칭 교사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교육수준--예를 들면 그가 성전에서 장로들에게 그의 지식을 과시한 것--으로 보아 그는 자칭 교사 이상의 사람이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으로 보아 그는 모종의 공식적인 랍비 훈련을 받았으며 공식적으로 랍비로서 인정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를 엄격한 의미에서의 교사로서 묘사하고 있는 전승에 부합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엄격한 의미에서의 랍비였다면 결혼은 개연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확실하였을 것이다. 유대교의 미슈나 율법은 그 문제에 관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교사가 될 수 없다]라고 상당히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다.
제4 복음서에서 보면 결혼과 관련된 하나의 사건이 있다. 그것이 사실은 예수 자신의 결혼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사건은 가나의 혼인잔치이며 대단히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친숙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두드러진 문제들이 수반되고, 그 문제들은 모두 정당한 이유가 있다.
제4 복음서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가나의 결혼잔치는 검소한 시골 예식, 즉 신랑과 신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전형적인 시골 결혼식인 것처럼 보인다. 이 결혼 잔치에 예수가 특별히 초대되었다. 이것만으로도 기이하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사실상 그의 포교를 시작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훨씬 더 기이한 것은 예수의 어머니가 바로 그 잔치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참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그의 아들에게 포도주를 보충해 달라고 귀띔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에게 명령하고 있다. 그녀는 마치 주인처럼 행동하고 있다. [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에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2:3~4) 그러나 마리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 아들의 항변을 무시한다.
[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하라 하니라 ](5) 그리고 그 하인들은 마치 그들이 마리아와 예수로부터 명령 받는데에 익숙해 있기나 한 것처럼 즉시 따르고 있다.
그녀와의 관련성을 부인하려는 예수의 명백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그를 설복시킨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첫번재 이적, 즉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적을 행한다. 복음서에 관한한 그는 그때까지는 그의 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의 그런 이적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 타당성이 없는 일이다. 설령 타당성이 있다 할지라도 왜 그러한 독특하고 거룩한 재능을 그처럼 일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했는가? 왜 마리아가 그의 아들에게 그러한 요청을 했는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왜 결혼 잔치에 참석한 두 명의 '손님들'이 음식장만을 책임져야 했는가? 그것은 관습상 주인의 책임인 것이다. 당연히 가나의 혼인 잔치는 예수 자신의 혼인 잔치이다. 그렇다면 포도주를 준비하는 것은 실제로 그의 책임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가 실제로 예수 자신의 혼인 잔치였다는 그 이상의 증거도 있다. 그 이적이 행해진 직후에 연회장(예식 감독자)이 새로 내 온 포도주를 맛보았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요2:9~10) 이 말들은 분명히 예수에게 한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말을 '신랑'에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분명한 결론은 예수와 '신랑'이 하나의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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