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 vs Truth/Oriental

신미대사 한글창제설

by 개인교수 2013. 10. 2.
충청북도 영동의 영산김씨 가문에서 부친 김훈과 모친 여흥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 입산 전에 부친께서 진사벼슬에 등과한 후 태종 때에 영의정까지 지낼 수 있는 귀족가문 출신이기에 속가에서 사서삼경을 모두 섭렵하고 출가 입산하여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범서장경이 중국에 들어와 여러 고승들에 의하여 번역된 경전들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서로 된 원전을 보기 위하여 범어 공부를 하였다.


1.한글창제의 주역으로 발탁된 신미대사
조선조 제4대 세종대왕은 중국의 한문 글이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문맹이 많아 배우기 쉬운 우리글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아침조회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우리도 우리글을 한번 만들어 보자. 우리글을 만들데 집현전을 확장하고 장안에도 우수한 학자들이 많지만 이번엔 전국을 총망라하여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여 집현전에 초빙하여 가장 배우기 쉽고 이해하기 쉬워 누구나 속히 터득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중 승려로서 유일하게 충청북도 속리산 복천암에 주석하고 있는 신미대사가 세종대왕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게 되었다.
1443년부터 한글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하여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논의를 한끝에 신미대사는 모음, 자음, 소리글을 범서(梵書)에서 착안하여 한글을 마무리 짓고 시험할 때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인하여 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에 토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시험을 끝내고 우리글이 완성되었다고 세종대왕께 보고하니 임금님은 너무 기뻐하며 1446년 9월 상달에 우리글을 훈민정음이라 공포하였고 우리글이 만들어졌으니 우리글로 노래도 한번 지어 보라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등의 노래를 지었다. 그 후 세종대왕은 신미대사의 수고를 치하하고 보답으로 주석하고 있는 속리산 복천암에 주불 아미타불과 좌우보처관음세지 양대보살을 복각 조성 시주하시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시호를 선교도총섭밀전정법비지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 지어 문종에게 위임하여 문종이 부왕을 대신하여 신미대사에게 사호(賜號) 하였다.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세상에 공포한 후 집현전에 같이 참석하였던 성삼문, 정인지 같은 유생들이 말하기를 한글에 대하여 신미대사의 공은 인정을 하되 최초 발기(發起)를 세종대왕이 하셨으니 그 공을 세종대왕께 돌리자하여 신미대사가 쾌히 승낙하니 그 후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지은 것으로 되었고 모든 문헌 등에 신미대사가 집현전에 참석함까지도 밝히지 않고 공은 왕께로 돌리기로 하였기에 거기에 대하여는 모든 문헌에도 신미대사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으나 유일하게 영산김씨 족보엔 세종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되어 있다.
유생들은 신미대사가 승려의 신분으로 한글을 주도한데 대하여 과소평가하기 시작하여 언문인 부녀자들이 뒷방에 앉아서 친정에 하소연하는 편지나 써서 보내는 글이니 통시 글(쉽다는 말)이니 하며 이것이 무슨 글이냐 장부들이 배울 글이 못 된다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미대사는 세종대왕의 뜻에 따라 누구든지 배우기 쉽게 만든 것뿐이기에 유생들의 그러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아다. 유생들은 유서(儒書)에만 능했고 신미대사는 불경, 유서, 범서 등 모두에 능하였으므로 범서에서 착안한 한글 논의에 대하여 유생들은 일체 반론을 못했고 시종일관 신미대사의 뜻한 바대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집현전에서 4년간이나 학자들이 머무를 때 학자들을 보살피는 한글도감으로 세종대왕은 수양대군을 명하였다.


2 신미대사 창제 설 근거
속리산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500m 정도 발걸음을 옮기면 신미(信眉)대사 부도탑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 1416호로, 공 모양의 탑신이 부드러운 곡선과 함께 안정감이 있다. 이 부도탑의 주인공인 신미대사(1403∼1486ㆍ속세고향 충북 영동)가 근래 들어 세인들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다. 세종의 왕사였던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은 종종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올 상반기 한국세종한림원 총재 강상원 박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 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책을 내면서 이 설이 다시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지금까지의 설은
한글 창제와 관련,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이 명령을 했고,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이의 실무 작업을 맡았다.’ 정도로 알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 입 발음기관을 본떴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국어학자들은 ‘세종실록 계해년 그믐조’에 나타나는 ‘是月上親製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문장을 들어 이에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다. 직역하면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古篆을 모방하였다’ 정도가 된다.
이중 핵심어인 ‘倣古篆’은 ‘古 篆字를 모방했다’는 뜻으로, 정인지가 지은 ‘훈민정음 해례’에도 이 문장이 나오고 있다. (象形而倣古篆ㆍ‘古 篆字를 모방해 글자상형을 삼았다’)
이 문장 하나 때문에 ‘발음기관을 본떴다’라는 설은 전통한옥 창문도형, 단군시대 가림토문자, 일본 신대문자, 범어(산스크리트어), 몽고어, 고려 각필 모방설 등의 도전을 받고 있다.
◆ 어느 설이 가장 유력한가?
발음기관설 외에 현재 가장 유력시되는 설은 이른바 범자(梵字ㆍ산스크리트어) 모방설이다.
조선초기 유학자인 성현(1439~1504)은 그의 저서 ‘용재총화’에서 ‘基字體依梵字爲之’라고 밝히고 있다. 직역하면 ‘그 글 자체는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정도로, ‘용재총화’는 훈민정음 반포 30년후에 쓰여진 책이다.
이수광도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諺書)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我國諺書字樣全倣梵字)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상당수 학자들은 앞서 언급된 ‘篆字’를 ‘梵字’의 한자식 표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세종대왕이 범자를 모방해 한글을 창제했을 경우 그 중간에 범자를 능통하게 사용하는 스님이 존재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부분이 규명되지 않았다. 이의 규명작업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 현 복천암 선원장 월성(법랍 50)스님이다.
◆ 최소 7개 증거가 있다.
30년 넘게 이 부분을 연구하고 있는 월성스님은 “조선 초기 속리산 복천암에 거주하던 신미대사가 세종을 부름을 받아 최소 7년간 복천암∼한양을 오가며 한글 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단언했다.
월성스님은 그 근거로 ▶신미대사가 범어에 능통했던 점 ▶유학 성향이 강했던 세종이 이례적으로 복천암에 불상을 조성해 주고 시주를 한 점 ▶세종이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린 점 등을 거론했다.
이밖에 ▶수양대군 세조가 복천암을 손수 찾았던 점 ▶유학자들이 당시는 물론 세종이 죽자마자 부녀자 글, 통시 글(화장실 글) 등의 말로 훈민정음을 비난하고 험담한 점 ▶신미대사의 본관인 영산김씨 족보에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로 언급된 점 ▶한글 창제 후 실험적으로 지은 곡과 문장이 유교가 아닌 불교내용을 담고 있는 점 등을 거론했다.
◆ 구체적인 근거는 있나
월성스님은 첫 번째에 대해 유학자 김수온(1410∼1481)이 지은 ‘복천보장’을 인용, “신미대사는 불경에 통달했으나 한자에 오역을 많음을 느끼고 이른바 원어, 즉 범어를 공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이는 지난 1975년 서울 인사동에서 발견된 신미대사 ‘범어진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밝혔다.
‘慧覺尊者’(혜각존자)라는 법호에 대해서는 “세종이 대사에게 극존칭 법호를 내린 것은 신미대사가 유일하다”며 “그 앞에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뜻인 ‘祐國利世 글귀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한글 창제와 관련, 세종이 아닌 수양대군 세조가 등장하는 것은 다소 이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월성스님은 세조의 복천암 방문도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복천보장’을 다시 인용, “세종은 유생들의 극심한 반대를 예상하고 신미대사,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5인에게만 한글창제 작업을 극비리에 명령한다.”며 “이후 세조는 왕위찬탈에 대한 흉금을 말하기 위해 옛정이 있는 신미대사를 찾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는 온양과 초정에서의 목욕을 핑계 삼았지만 속리산 복천암 방문이 실제 목적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때 생긴 것이 이른바 ‘정이품송 전설’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월성스님은 이밖에 “조선은 유교국가라 한글창제 실험용 책도 당연히 유교적인 내용이 됐어야 했다.”며 “그러나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은 불교적인 내용을 담은 곡과 문장으로, 이것 역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월성스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창제에 신미대사 이름이 빠져있는 것에 대해 “세종 사후 유생들은 신미대사와 불교에 관련된 문구를 모조리 삭제했음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며 “다만 영산김씨 족보에 ‘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의 문구가 나온다.”고 밝혔다. 직역하면 ‘守省(신미대사 속명)은 집현원 학사를 지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정도가 된다.


3. 기타 한글기원설
한글 창제와 관련, 현재 정설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입 발음기관을 본떴다’라는 설이다. 그러나 세종실록 등 여러 사료에 ‘倣古篆’(옛 전자를 모방했다)이라는 표현이 보이면서 무려 20여개의 또 다른 기원설이 등장해 있다.
이중 가장 논란을 빚고 있는 설이 일본 신대문자, 고조선 가림토 문자 모방설, 고려 각필부호 유래설이다. 일본학계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신대(神代) 문자는 그 모양이 한글과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자는 일본 사찰을 중심으로 조선통신사 왕래이후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문자 열등의식을 느낀 일본 일부 계층이 한글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수용되지 않고 있다.
고조선 가림토는 기서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문자로, 자ㆍ모음 38자가 한글 자ㆍ모음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일제시대 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누군가 위작한 책으로 보고 있다.
고려 각필부호 유래 설은 지난 2001년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처음 제기했다. 당시 이 교수는 “고려불경을 조사한 결과, 무려 17개의 각필이 훈민정음 모양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설은 ▶고려~조선 초기 승려들이 불경한자를 쉽게 읽기 위해 각필을 사용했고 ▶그 각필은 범자(梵字)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추론을 낳고 있다. 이 설은 훈민정음 범자 모방설과 선이 닿아 있거나 근친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4. 기타 관련 칼럼

1) “훈민정음 창제 일등공신은 신미대사”
훈민정음과 신미대사’주제 특강 강 상 원 박사
“우리말의 뿌리는 실담(범어의 음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도 범어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 일등 공신은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신미대사인 것입니다.”
지난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속리산 법주사 강원에서 개최한 특별강연회에서 한국세종한림원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은 집현전 학자도 세종대왕도 아닌 신미대사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 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주제로 강연한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 해제본에 나와 있는 초기 표기법을 검토하면 실담에서 유래한 흔적이 매우 많다”며 “이는 훈민정음이 실담을 기초로 제작됐고 따라서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에 의해 훈민정음이 제작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박사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범어의 음가인 실담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훈민정음도 이런 범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 했던 사람은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바로 집현전 학자였던 신미대사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해 신미대사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강 박사는 “당시 숭유억불이라는 강력한 통치이념을 추진했던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고의적으로 누락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강 박사는 “영산 김 씨의 족보와, 『복천보장』에 등장하는 기록에 의하면 신미대사는 한학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범어에도 능통한 학승으로 집현전에 초빙돼 한글 창제에 임했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나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 박사가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한 것은 10여년 전부터다. 1994년 동국대에서 ‘원효의 중도사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경전을 영문화하는 작업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존 영문 경전 곳곳에서 오류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범어본 경전을 직접 번역해야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범어를 공부하게 됐다. 범어 사전을 통독한 것도 15회 이상. 범어에 대한 연구가 지속될수록 그는 한글과 범어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동국정운』에 나타난 한글 고어 표기법이 실담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도 알아냈다. 이를 근거로 그는 훈민정음이 실담에서 나왔고 따라서 범어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강 박사는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범어 관련설 이외에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이후 『능엄경』,『원각경』등 총 28종의 불교경전이 제일 먼저 한글로 번역했다는 점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신미대사와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권오영 기자

2) 의문투성이 한글기원…신미대사가 열쇠
성현-이수광-이능화의 梵字 기원설과 부합
□ 의문투성이 한글 기원 --- 신미대사가 열쇠
<사진설명>훈민정음 보급의 일등공신 신미대사는 범자(梵字)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했다.(좌) 그러나 유학자들의 질시로 그가 번역한 경전마저 나중에는 삭제되는 비운을 맞는다. 초판본(中). 초판본에 들어있던 신미대사 법호가 재판본에는 빠져있다.
지난 2001년 12월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발표한 "훈민정음 각필부호 유래설"은 신미대사가 한글창제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각필’은 고대 문헌에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한자 옆에 점과 선, 또는 글자를 새겨 넣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는 양식으로 이 교수가 고려시대의 불교경전을 조사해본 결과 각필 중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과 무려 17개가 일치하고, 자음과 모음의 체계까지도 대단히 유사함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러한 학설은 세종대왕이 수양대군 등 아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불교경전에 정통한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토록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사료를 통해 밝히고 있듯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대왕이 한글이 창제되기 4년 전부터는 정사를 돌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고, 이로 인해 가장 중요한 일과의 하나인 경연(經筵)조차 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신미대사는 당시의 대표적인 학승으로 범어를 비롯한 인도어와 티베트에도 정통했으며, 불교경전에도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신미대사가 세조 2년(1456) 범어계통의 인도 문자와 티베트어로 쓴 친필 진언과 부적류들을 분석한 허일범 진각대 교수는 "상당히 많은 분량임에도 오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한글창제와 관련해 수백년 동안 ‘범자(梵字) 기원설’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조선전기 학자인 성현(1439~1504)은 "훈민정음은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으며, 이수광(1563~1628)도 "우리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 모양을 본떴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언어학자인 황윤석(1729~1791)은 "우리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범자에서 근본하였으며 범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이능화(186 9~1943)도 한글글자법이 범자에 근원한 것이라며 비슷한 용례까지 들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미국인 학자 헐버트(1863~1949) 등 외국인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도에서 범어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봉태 목사도 지난 2000년 말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을 통해 한글의 기원이 범어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학설들 또한 여전히 많은 연구와 검증의 절차를 남겨 놓고 있음에도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적극 참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범자기원설은 한글창제 당사자들이 불교경전 및 그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고 있었음을 의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자연스럽게 당시 왕과의 교분이 깊고 언해본 간행을 비롯해 경전언어에 깊은 조예가 있는 신미대사를 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실록에서는 왜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일까. 동국대 황인규 박사는 "당시 억불숭유의 정치적 상황에서 승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더욱 거셌을 것"이라며 "이는 세종대왕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자 대의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교의 이데올로기만을 숭상했던 조선시대가 초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난 94년 작고한 이숭녕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미대사만치 유명한 고승이 후세에 남긴 법어나 시, 글 한편 없이 너무나 적막한 생애를 스스로 걸어갔다"며 "학덕이 높고 국어학사상 특기할 인물이었지만 사회의 냉랭함에서 쓸쓸히 입적한 가여운 인재"라고 애석해했다.
지난 550여 년간 이념의 벽으로 인해 스스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고승 혜각존자 신미대사. 이제 그의 위상과 업적을 올곧게 복원하고 선양해야 하는 것은 이제 후학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3)“한글창제 주역은 신미대사”
한글날 특집‘훈민정음과 불교’
梵字-티베트어에 능통…불경 간행 주도
세종이‘존자’칭호…‘집현전 참여’ 기록도
억불 정책으로 공헌 가려져…재조명 있어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손꼽히는 한글.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분명하지만 한글의 기원이나 문자를 만드는데 기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의문점이 남아있다.
본지가 한글날 558돌을 기념한 특별취재에 따르면 훈민정음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혜각존자 신미(信眉, 1405?~1480?)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을 뿐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특히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2300여 쪽은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를 훈민정음으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신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도 크게 기여했을 거라는 주장이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먼저 세종대왕과의 관계다. 비록 신미대사가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세종이 죽기 5년 전인 세종 28년(1446)이지만 그 관계가 대단히 친밀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죽기 몇 달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닌 윗사람의 예로 신미대사를 대하고 있으며, 당시 신미대사가 머무르던 속리산 복천암 불사를 지원하고, 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존자’라는 명칭이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대사에게 내리는 칭호고, 더구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 영산 김씨 족보에 ‘수성(신미대사)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과 신미대사의 친동생이자 독실한 불자였던 김수온이 한글창제 이전에 이미 중앙에 진출한 상태였다는 점도 이와 관련된다는 가설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는 불교의 신성 숫자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은 새로운 문자의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김광해 서울대 교수) “방대한 양의 불경이 한글이 창제 된지 얼마 안 되는 기간에 한문본이 편찬되고 번역까지 됐다. 이는 한글 반포 이전부터 불경에 정통하고 있었으며, 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운용법과 표기법에 통달하고 있던 인사들이 있어서 이 사업을 추진했다는 증거다.”(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 같은 기존 학자들의 주장도 그 당시 대표적인 학승이었던 신미대사를 상정할 경우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특히 얼마 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한글 기원은 고려불경의 각필부호”라는 학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견해가 많다.
지난 30년째 신미대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오고 있는 복천암 주지 월성스님은 “억불숭유의 시대로 말미암아 신미대사의 공헌은 철저히 가려지고 삭제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라도 그 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신미대사는?
신미대사는 부친이 태종 때 정승까지 지낸 양반 가문인 까닭에 입산 전 유학 경전을 섭렵할 수 있었으며 출가 후에는 대장경에 심취했다. 그러나 한문 경전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어와 티베트어를 직접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세종, 문종, 세조 때에는 경전번역 등 불사를 이끌었으며 예종이 불교탄압하려 할 때는 최초의 언문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2004-09-29/773호>

4) 한글어지 108자 … 월인석보도 108쪽
한글창제와 숫자의 비밀
어느 종교건 특정 숫자를 신성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불교는 유독 그런 성향이 강하다. 심지어 0에서 무한대에 이르기까지 숫자를 불교적으로 해석한 『대명법수』라는 책이 나올 정도다. 이런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표면적인 목적 외에도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은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대 국문과 김광해 교수의 ‘훈민정음과 108’론이 바로 그것이다.
김 교수는 그동안 『한글창제와 불교신앙』(불교문화연구 제3집) 등 일련의 논문을 통해 창제 과정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불교의 대표적인 신성수 ‘108’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의 의도적인 조절임을 주장했다.
김 교수가 먼저 주목한 것은 ‘나랏말싸미듕귁에달아…’로 시작하는 한글 어지(御旨)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되는 한문 어지다. 한글은 모두 108자고 한문 어지는 108의 꼭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 교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더부러’ 등을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등 적어도 4글자 이상이 탈락됐다는 것이다. 또 한문 어지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而己矣’를 사용하지 않고 ‘耳’를 사용하고 있는 등, 글자의 수를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담겨 있음도 함께 지적했다.
훈민정음 창제과정에 나타나는 숫자의 비밀은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 교수는 108글자의 세종 어지가 실린 『월인석보』 제1권의 장수(張數)도 108쪽임도 밝히고 있다. 특히 다른 권들과는 달리 일련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 별도의 권으로 만들면서까지 쪽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 또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의 경우 불교적인 우주관을 상징이라도 하듯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이들 경우 외에 다양한 사례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훈민정음의 창제 당사자들이 이렇듯 일련의 주도면밀한 노력을 은밀히 기울인 것은 불교 보급의 목적이 담겨 있다”며 “그러한 종교적 염원이 숫자를 조절하는 은밀한 방법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맺고 있다.
실제 세종에서 연산군 때까지 발간된 훈민정음 문헌의 65%이상이 불교관련 문헌이며, 유교 문헌은 단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

5)“집현전 학자들 한글창제 무관”
훈민정음에 대한 오해
한글창제는 지금까지 신숙주와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만들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이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없는 쪽으로 굳혀지고 있다.
한글창제 이후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이 집현전 학자들이며, 당시 집현전 부제학으로 실무담당을 맡고 있던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조차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상소를 올리는 것 등의 정황으로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이 돕기는 커녕 몰랐던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1443년 12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선언할 때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비밀리에 추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성삼문은 한글이 창제될 무렵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신숙주는 창제 2년 전에 들어왔지만 그 다음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록에도 전혀 그런 말이 없다. 잘못된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세종께서 이런 사실을 알면 통탄할 것”이라는 여증동 경상대 국문과 명예교수의 말처럼 집현전 학자 창제설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따라서 이들 집현전의 소장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종의 명을 받들어 훈민정음의 보급에 앞장섰을 뿐이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