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릉만 파고든 고 이근직 교수 유저서 주장 … 다시 논란
이 교수 주장의 근거
① 12지신상 그 시대엔 없던 양식
② 무열왕릉보다 신하 무덤이 화려
③ 왕 아래 무덤 쓰던 풍습과 어긋나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김유신 장군 묘. 이근직 교수는 ‘김유신은 금산원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장군의 무덤은 들판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유신 장군 묘에는 봉분을 둘러가며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근직 교수 등은 12지신상과 난간 둘레석 등은 김유신 시대보다 후대인 성덕왕 이후에 등장 한다고 주장한다(사진 왼쪽). 김유신 장군 묘 앞에 세워진 비석.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고 적혀 있다.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당시 구전 등을 토대로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오른쪽).24일 경북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이곳에선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평일이지만 적잖은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묘의 왼쪽 앞에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 쓰인 비석이 보인다. 경주시 이채경(51) 학예연구사는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짚어가며 “비석은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웠다”고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595∼673)이라면 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재위 654∼661)을 도와 삼국을 통일한 주역이다.
묘 앞에 어린이 키만 한 상석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봉분을 돌아가며 난간 둘레석과 12지신상이 장식돼 있다. 1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화려하고 장엄함이 느껴지는 무덤이다.
태종무열왕릉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새겨진 귀부가 발견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신라 왕릉 7곳 중 하나다. 신하인 김유신과 동시대 왕의 능인데도 김유신 묘에는 설치된 난간 둘레석도 12지신상도 없이 소박하다. 김유신 장군 묘를 나와 2㎞쯤 떨어진 태종무열왕릉을 찾았다. 능 입구에 비석은 사라지고 귀부(받침돌)만 남은 태종무열왕릉비(국보 25호)가 있다. 무열왕은 김유신과 동시대 인물이다. 『삼국유사』 등에 전하듯 무열왕의 왕비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며, 왕은 김유신보다 12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무열왕릉은 서악 고분군 앞 평지에 들어서 있다. 여기엔 화려한 난간 둘레석이나 12지신상은 없다. 봉분만 있는 소박한 왕릉이다. 신하인 김유신 묘와 비교하면 더 그렇다. 고(故) 이근직(1963∼2011) 교수는 이런 의문들에 매달렸다. 26일 경주에서 열린 『신라왕릉 연구』 출판기념회는 그의 유고작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대 문화재학과에 몸담았던 이 교수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신라 왕릉 고증에 천착했다.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와 이제는 ‘사실’로 굳어져 있는 신라 왕릉의 주인공을 바로잡는 일이다.
“김인문묘가 진짜 김유신묘” 태종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묘.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근직 교수는 이 김인문 묘를 김유신 장군 묘로 보았다. 신하는 왕 근처에 매장하는 ‘배장’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주=프리랜서 공정식] 이 교수는 왕릉의 주인공이 확실한 곳은 무열왕 등 7곳뿐이라며 나머지는 구전과 사실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곳이 김유신 장군 묘다. 이채경 학예연구사는 이 교수의 주장을 현장에서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 묘의 상석과 분묘 난간 둘레석은 분묘 형식으로 보아 훨씬 후대인 33대 성덕왕 이후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 ‘김유신은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원(原)은 봉우리가 아닌 들판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동시대 왕인 무열왕릉보다 신하의 무덤을 더 화려하게 했다는 건 상식에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왕릉 연구』에서 이런 논리적 근거를 내세우며 김유신 장군 묘를 35대 경덕왕릉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 묘를 김유신 묘로 보아야 한다고 기록했다. 그의 주장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무덤 위치가 들판이며, 당시 신하는 왕 아래 무덤을 쓰는 ‘배장(陪葬·딸린 무덤)’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무열왕릉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 묘 사이에 9대손 김양의 무덤이 있는 것도 김인문 묘가 되기 어려운 이유다.
신라 왕릉 논란은 30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조선 영조 때 경주 선비 유의건은 “(영조 6년·1730년) 이름 없던 고분 17기의 피장자를 왕으로 바로잡는 과정에서 고증을 거치지 않고 능지기의 전언에 의존한 건 문제”라고 본격 문제를 제기했다.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56왕을 배출한 박·석·김 문중이 중심이 돼 구전을 바탕으로 당시 왕릉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왕릉 이름 바로잡기는 이후 추사 김정희, 한학자 정인보, 사학자 이병도로 이어졌다. 이병도 박사도 김유신 장군 묘는 왕릉이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김유신 장군 묘를 이 교수와 달리 45대 신무왕릉으로 보았다.
이러한 학설 때문에 경주시는 사적 안내문 등에 한동안 확실치 않은 곳은 이름 앞에 ‘전해 온다’는 뜻으로 ‘전(傳)’이라는 글자를 붙였다. 문중의 항의로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 지금은 이 글자가 사라졌다.
김유신 장군 묘에 제례를 올리는 김해 김씨 등 해당 문중은 이 교수의 깊이 있는 학설로 문제에 봉착했다. 이 교수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교과서의 관련 내용도 고치고 경주 지역의 수많은 안내문과 표지판도 바로잡아야 할 판이다. 김유신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숭무전 김성식(79) 전참봉은 “한 사람의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지만 학설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유물이 발굴돼 입증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경주시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문화재의 명칭 변경은 문화재청이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통과시켜야 한다는 절차 때문이다.
이 교수 주장의 근거
① 12지신상 그 시대엔 없던 양식
② 무열왕릉보다 신하 무덤이 화려
③ 왕 아래 무덤 쓰던 풍습과 어긋나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김유신 장군 묘. 이근직 교수는 ‘김유신은 금산원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장군의 무덤은 들판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유신 장군 묘에는 봉분을 둘러가며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근직 교수 등은 12지신상과 난간 둘레석 등은 김유신 시대보다 후대인 성덕왕 이후에 등장 한다고 주장한다(사진 왼쪽). 김유신 장군 묘 앞에 세워진 비석.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고 적혀 있다.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당시 구전 등을 토대로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오른쪽).24일 경북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이곳에선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평일이지만 적잖은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묘의 왼쪽 앞에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 쓰인 비석이 보인다. 경주시 이채경(51) 학예연구사는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짚어가며 “비석은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웠다”고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595∼673)이라면 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재위 654∼661)을 도와 삼국을 통일한 주역이다.
묘 앞에 어린이 키만 한 상석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봉분을 돌아가며 난간 둘레석과 12지신상이 장식돼 있다. 1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화려하고 장엄함이 느껴지는 무덤이다.
태종무열왕릉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새겨진 귀부가 발견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신라 왕릉 7곳 중 하나다. 신하인 김유신과 동시대 왕의 능인데도 김유신 묘에는 설치된 난간 둘레석도 12지신상도 없이 소박하다. 김유신 장군 묘를 나와 2㎞쯤 떨어진 태종무열왕릉을 찾았다. 능 입구에 비석은 사라지고 귀부(받침돌)만 남은 태종무열왕릉비(국보 25호)가 있다. 무열왕은 김유신과 동시대 인물이다. 『삼국유사』 등에 전하듯 무열왕의 왕비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며, 왕은 김유신보다 12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무열왕릉은 서악 고분군 앞 평지에 들어서 있다. 여기엔 화려한 난간 둘레석이나 12지신상은 없다. 봉분만 있는 소박한 왕릉이다. 신하인 김유신 묘와 비교하면 더 그렇다. 고(故) 이근직(1963∼2011) 교수는 이런 의문들에 매달렸다. 26일 경주에서 열린 『신라왕릉 연구』 출판기념회는 그의 유고작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대 문화재학과에 몸담았던 이 교수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신라 왕릉 고증에 천착했다.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와 이제는 ‘사실’로 굳어져 있는 신라 왕릉의 주인공을 바로잡는 일이다.
“김인문묘가 진짜 김유신묘” 태종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묘.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근직 교수는 이 김인문 묘를 김유신 장군 묘로 보았다. 신하는 왕 근처에 매장하는 ‘배장’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주=프리랜서 공정식] 이 교수는 왕릉의 주인공이 확실한 곳은 무열왕 등 7곳뿐이라며 나머지는 구전과 사실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곳이 김유신 장군 묘다. 이채경 학예연구사는 이 교수의 주장을 현장에서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 묘의 상석과 분묘 난간 둘레석은 분묘 형식으로 보아 훨씬 후대인 33대 성덕왕 이후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 ‘김유신은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원(原)은 봉우리가 아닌 들판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동시대 왕인 무열왕릉보다 신하의 무덤을 더 화려하게 했다는 건 상식에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왕릉 연구』에서 이런 논리적 근거를 내세우며 김유신 장군 묘를 35대 경덕왕릉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 묘를 김유신 묘로 보아야 한다고 기록했다. 그의 주장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무덤 위치가 들판이며, 당시 신하는 왕 아래 무덤을 쓰는 ‘배장(陪葬·딸린 무덤)’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무열왕릉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 묘 사이에 9대손 김양의 무덤이 있는 것도 김인문 묘가 되기 어려운 이유다.
신라 왕릉 논란은 30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조선 영조 때 경주 선비 유의건은 “(영조 6년·1730년) 이름 없던 고분 17기의 피장자를 왕으로 바로잡는 과정에서 고증을 거치지 않고 능지기의 전언에 의존한 건 문제”라고 본격 문제를 제기했다.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56왕을 배출한 박·석·김 문중이 중심이 돼 구전을 바탕으로 당시 왕릉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왕릉 이름 바로잡기는 이후 추사 김정희, 한학자 정인보, 사학자 이병도로 이어졌다. 이병도 박사도 김유신 장군 묘는 왕릉이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김유신 장군 묘를 이 교수와 달리 45대 신무왕릉으로 보았다.
이러한 학설 때문에 경주시는 사적 안내문 등에 한동안 확실치 않은 곳은 이름 앞에 ‘전해 온다’는 뜻으로 ‘전(傳)’이라는 글자를 붙였다. 문중의 항의로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 지금은 이 글자가 사라졌다.
김유신 장군 묘에 제례를 올리는 김해 김씨 등 해당 문중은 이 교수의 깊이 있는 학설로 문제에 봉착했다. 이 교수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교과서의 관련 내용도 고치고 경주 지역의 수많은 안내문과 표지판도 바로잡아야 할 판이다. 김유신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숭무전 김성식(79) 전참봉은 “한 사람의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지만 학설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유물이 발굴돼 입증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경주시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문화재의 명칭 변경은 문화재청이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통과시켜야 한다는 절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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