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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vs Truth/Oriental

고대 한국과 일본

by 개인교수 2011. 2. 13.
출처 Network of Corea history - 21세기 한국역사 | 조의선인
원문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016380183

<한국과 일본>

고대 일본 열도는 미개한 선주민들의 터전이었다. 그곳으로 선진국 한반도의 삼국(신라,백제,고구려) 사람들이 대형 선박을 이용해 잇따라 건너갔다. 이때부터 미개의 터전인 일본 열도에 한반도의 선진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삼국 사람들과 선주민 간의 혼혈도 자연스레 이루어지면서 고대 한국인들은 일본 열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먼저 한반도 남쪽에서 일본 남쪽의 키타큐슈(北九州)지역으로 건너간 세력이 지베의 터전을 일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경)다. 그 후 4세기 후반 무렵부터 한반도인(주로 백제인)들은 서서히 일본 열도의 동쪽으로 지배의 터전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진국 한반도의 사람드링 동진함으로써 일본 내해(內海, 세토나이카이) 일대며 오늘의 오오사카 지방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의 지명은 카와치(河內)였다.

이 시대의 한국인 지배자들로는 오우진(應神, 4세기경)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 5세기) 천황 부자를 꼽을 수 있다. 이들 백제인 부자에 의해 고대 일본이 카와치 왕조가 세워졌다. 백제의 정복왕인 닌토구 천황에 의해 성립된 카와치 왕조는 오오사카 지방을 중심무대로 번성하게 된다. 그들이 한국인 정복왕이라는 사실을 토우쿄우 대학 교수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1917~)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우진 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의 일본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와세다 대학 교수였던 미즈노 유우도 오우진 천황과 닌토쿠 천황 부자가 백제국 왕가의 왕들이라며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일본과 한반도와의 교섭에 있어서, 특히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오우진, 닌토쿠 천황 시대 이후부터 서로의 관계 역사 자료가 눈에 띄게 많이 나왔다. 오우진, 닌토쿠 천황 등 닌토쿠 왕조(카와치 왕조)는 외래민족의 세력으로서, 일본에 침입하여 일으킨 정복 왕조다. 닌토쿠 왕조는 대륙적인 성격을 갖는 새로운 왕조였으므로 대륙의 사정에도 정통했다. 따라서 그쪽 정세에 관해서도 민감했으며, 특히 그 지배층이 백제국 왕가와 동일 민족계통(백제왕은 부여족)에 속한다.



<저명 일본 사학자들의 '한일동족론'의 발자취>

일본 천황들이 한국의 천신을 제사 지내왔다는 내용의 논문 때문에 토우쿄우 대학에서 파직당한 쿠메 쿠니다케는 그후 와세다 대학의 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쿠메는 계속해서 일본 고대 문서들을 섭렵 연구한 끝에 마침내 68세에 이르러 『일본고대사』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스사노오노미코도'가 신라의 신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처음에 신라에 살면서 '소의 머리(소시모리)라고 하는 강원도 춘천부(春川府) 우두주(牛頭州)에 갔다가 그후 왜나라로 건너왔다. 소의 머리는 곧 우두(牛頭)로서 걸맞은 지명이나 너무 진번국(眞番國)에 접근했고, 고구려인들의 터전도 이 근처고 보면 신라로부터 좀 깊게 들어간 것 같다. 그러나 진번과 요지(要地)를 쟁탈하기 위해 우두산에 갔다는 것은 앞으로 연구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뒷날 우두천왕(牛頭天王)으로 부르게 되었고, 또한 신라명신(新羅明神)이라고도 불러 모시게 되었다. 이분에 대한 민중의 열렬한 추앙은 식지않고, 오늘날 이 분을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京都市東山區사원)는 쿄우토 굴지의 사당이다. 그 유래를 따진다면 실로 거룩하며 외경스럽다.

쿠메는 『일본고대사』의 제29절 「일한(日韓)의 옛 종교」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똑같은 종족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기도 하다. 

우선 한반도는 우리(일본)와 동종(同種)으로 인정되는 진인종(辰人種)이다. 「후한동이전」(後漢東夷傳)에 마한(馬韓)을 기록하기를, "항상 5월의 모내기를 끝내면 신을 제사드리며 주야로 술모임을 갖고 무리 지어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을 춘다. 수십 명이 서로 어울려 땅을 밟고 구르는데 손과 발이 서로 잘 맞는다. 10월에 농사가 다 끝나면 다시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본의 신상제(新嘗祭)와 서로 닮았다. 다음으로는 소도(蘇塗)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을 걸어 귀신을 제사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일본에서 현목(賢木, 사카키)을 제신(祭神)의 나무로 삼는 것과 똑같다.

『일본서기』의 중애기(仲哀紀, 추아이기)에 나오는 오카현주(오카노 아가타누시, 지금의 후쿠오카현 온가군 지역의 지방장관)와 이도현주(이도노 아가타누시, 지금의 후쿠오카현 이토지마군 지역의 지방장관)는 두사람 모두 뱃머리에다 현목(賢木)을 세워서 천황을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도현주는 신라왕의 후예이며 오카현은 신라인들의 터전으로서, 이 고장에서 지내는 제사는 스사노오노미코도의 나라인 신라의 제례양식과 거의 똑같다.

그는 예(濊), 부여(扶餘), 고구려의 제천행사에 대해 언급하고는 이와 같은 나라들의 제례는 모두 일본의 풍명절회(豊明節會)와 똑같은 것이라 했다. 또한 그는 신라의 신 스사노오노미코도가 동해바다 맞은편의 일본 이즈모(出雲) 지방으로 건너왔다는 것과, 이 지역의 신라 신사(神社)들이 많은 사실도 일일이 지적하고 있다. 또한 신라의 국호를 '카라쿠니(辛國) 또는 '시라기'(白木, 신라의 이두식 표현)로 표기하는 것 등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동해안에서 마주 건너다 보이는 이즈모가 있는 시마네현(島根縣)이 고대 신라가 최초로 건너간 정복의 터전인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들이 입증하고 있다. 미즈노 유우는 신라인들이 이즈모 지방이 신라신 스사노오노미코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논술하고 있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본래 일본의 신도 이즈모의 신도 아닌 신라의 신이다. 그는 신라에서 이즈모로 건너온 외래신이고 손님신(客人神)이다. 그의 본거지는 신라 왕성의 성지였다. 이즈모로 건너온 신라인들의 집단은 서부 이즈모 지역에서 분포되었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이즈모에서 다시 키이(紀伊, 지금의 和歌山縣)로 갔으며 지금 키이에서는 스사노오노미코도를 '기이국소좌대신'(紀伊國所坐大神)으로서 받들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 논술에서 미즈노 유우는 경남 지역과 이즈모 지역 사람들의 형질적 특징이 거의 똑같다고 말한다. 특히 ABO식 혈액형 분포에 있어서 A형률은 경남이 42.16%이며 이즈모는 42.80%이고, AB형률은 경남이 10.23%이며 이즈모는 9.58%인 유사성도 지적하고 있다.

고구려 사신 이리지공이 신라의 우두산(牛頭山)에서 스사노오노미코도의 신위(神位)를 모셔다가 받들게 되었다는 곳은 쿄우토의 기온사(祈園社)인 오늘의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이다.

우두산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을 말하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해왕(奈解王, 196~229) 27년(222) 10월 백제군이 우두주(牛頭州)에 침략했다는 기록에서 이 신라의 지명이 나온다. 동국여지승람(권46)에는 우두주는 강원도 춘천부(春川府)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춘천의 우두산은 고대 신라의 스사노오노미코도, 즉 우두천왕(牛頭天王)의 터전이었다고 추정하게 된다. 신라신 우두천왕을 받들고 있는 쿄우토 야사카 신사의 일본 최대의 기온 마쓰리(祈園祭)는 이른바 한일동족론에 앞서서 우리가 크게 주목할 만한 대축제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신사들이 거행해오고 있는 성대한 제사 의식을 이른바 '마쓰리(祭)'라고 부른다. 이 마쓰리라는 것은 신을 맞이하는 '맞으리'에서 생긴 한국어가 어원이라고 본다. 우리의 신은 하늘에 계시므로 지상의 인간들은 거룩한 신을 맞이해서 제사를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강신(降神)을 맞이하는 '강신을 맞으리'가 바로 '마쓰리'인 것이다.

일본 각 지역에 있는 사당인 신사며 신궁에서는 해마다 성대한 제사를 지내면서, 신령을 모신 가마(神輿, 미코시)를 메고 수십 명의 혈기방장한 가마꾼들이 '왔소이, 왔소이'하는 구령을 소리 높이 오치면서 큰 거리를 누벼댄다. 그들이 소리지르는 '왔소이'는 다름 아니라 한국에서 신이 '오셨다'는 한국어이다.

일본 전국에서 손꼽히는 마쓰리 행사는 바로 쿄우토의 기온마쓰리(祇園祭)다. 이 제신 축제 행사는 해마다 7월 17일부터 24일(옛날에는 음력 6월 7일부터 14일)까지 거행된다. 마쓰리를 주관하는 곳은 쿄우토 시의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이다. 거리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수십만의 구경꾼들로 성시를 이루는 가운데 가마꾼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가마꾼들은 이른바 '야마'(山車)라고 부르는 4개의 큰 나무바퀴가 달린 집채 같은 수레들을 끌고 밀고 달리는 것이다. 이 대형 수레에는 신령(神靈)을 모셨다. 그 신령이란 다름 아닌 우두천왕(牛頭天王)이라는 신라에서 온 신이다. 이 신라신 우두천왕을 일본 고대 역사에서는 '스사노오노미코도'라고 불러 온다.

"스사노오노미코도는 한국에서 건너온 산이다"라고 하는 것은 쿠메 쿠니다케의 논술(日本古代史, 1907)로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황국사관을 신봉하는 극우 세력들이 쿠메 교수를 논박 질타했지만 일본 최초의 고문서학(古文書學)의 기초를 닦은 학자의 양식은 끝내 꺾을 수 없었다.

기온마쓰리에 참여하는 쿄우토 각 지역대표인 가마꾼들은 이른바 '야마'라고 부르는 신령을 모신 큰 수레들을 정해진 차례대로 거세게 몰면서 거리를 행진한다. 민속학자 니시쓰노이 마사요시는, "기온마쓰리에 등장하는 야마(山)와 호코는 오전 8시경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야마는 모두 14대(본래는 13대였다)고 호코는 6대다. 야마의 지붕에다 양날창을 곧추세운 것을 호코라고 부른다. 호코를 행렬의 선두에 세우고, 야마는 제비를 뽑은 순서대로 차례를 따라 쿄우토의 대로를 행진한 뒤 각기 자기 고장으로 향한다. 행진하는 것은 첫날인 7월 17일과 마지막 날인 24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 으뜸가는 제신 행사인 '기온마쓰리'가 신라에서 온 신인 스사노오노미노도(우두천왕)를 야사카 신사에서 모시는 것이라는 데 관한 옛 기록은 야사카 신사의 『유서기략』(由緖記略)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 655~661) 2년(656)에 고구려에서 왜왕실로 온 사신(調進副使)인 이리지(伊利之)가 신라국의 우두산(牛頭山)에 계신 스사노오노미코도 신을 쿄우토 땅(山城國八坂鄕)에 모시고 옴으로써 제사드리게 되었으며, 왕실로부터 팔판조(八坂造, 야사카노 미야쓰코)라는 사성(賜姓)을 받았다.

역시 야사카 신사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고문서인 『야사카어진좌대신지기』(八坂御鎭座大神之記)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분명하다.

사이메이 천황 2년에 한국의 조진사 이리지사주(이리지사주, 이리시노오미)가 다시 왔을 때, 신라국 우두산의 신 스사노오노미코도를 옮겨 모셔와서 제사드렸다.

즉 고구려의 사신 이리지가 당시(656) 왜나라에 온 것은 두 번째였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그때 신라의 스사노오노미코도신의 신위(神位)를 한국의 우두산에서 왜나라 야마시로(山城, 지금의 쿄우토의 야사카 신사 터전)로 모셔왔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역사 기사를 보면, "고구려에서 656년 8월 8일 대사달사(大使達沙)와 부사 이리지(伊利之) 등 모두 81명이 왔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바로 그 당시 고구려에서 고위 외교관들을 다수 파견한 것을 알 수 있고, 그들은 한국신인 스사노오노미코도의 신위까지 모시고 와서 이 쿄우토 지역을 새로운 한국신의 터전으로 삼아 사당을 크게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이리지 등 고구려 사신이 신라신의 신위를 모셔온 배경은 아직 사료가 없어서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둔다.

<조작된 역사서 『일본서기』에 대한 문헌비판>

우에다가 지적한 것처럼 일본서기는 허위 기사가 많이 있어서 매우 악명 높은 역사책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 기재된, 사실과 다른 기사들이 언제 어떻게 고쳐서 씌었는지는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이다.

8세기 초 일본서기며 고사기 등이 편찰될 당시부터 허위 기사가 실린 것인지, 아니면 뒷날 원본 기사들을 베끼던 과정에서 조작된 것인지는 아직 일본사학계에서 밝혀진 바 없다.

단지 지금까지는 기사가 조작되었다는 문헌적 비판이 계속되어 왔고, '진구우 황후의 신라침공설'이며 가야 지방의 소위 '임나일본부설'이 조작된 기록이라는 몇몇 사실만 확인됐을 뿐이다.

일본서기 등의 허위 기사들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가 무사정권을 집정하던 시기에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왜국이 신라와 백제왕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아온 사실들을 일본 역사 기록에서 뒤집어놓지 않고서는 조선 침략에 대한 명분 내지는 위신이 서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렇기에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를 칠지도(七枝刀)라고 하면서 공상(貢上)이니, 헌상(獻上) 따위의 글자로 터무니없이 조작하고, '진구우 황후의 신라침공설'이며 '임나일본부설'등 사실이 아닌 한반도 침략설을 들이대는가 하면, 실존하지도 않은 진무 천황(神武天皇) 등 9명의 인물들을 왕으로 만들어 일본사 연대를 윗대로 늘려놓는 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실존하지도 않은 일본왕 조작 기록에 대해서는 나오키 코우지로(直木孝次郞, 1919~)가 그의 저서 (『日本神話と古代國家』, 講談社 學術文庫, 1990)에서 이렇게 반박하고 있다.

천황의 기원을 가능한 한 오랜 옛날로 늘려잡기 위해 있지도 않았던 천황 이름을 조작하여 추가시켰다. 또한 참위설(讖緯說)에 입각해서 스이코 천황 9년(601)부터 1260년 전(BC 660)을 진무 천황의 즉위년으로 만들었다. 이 제1대 진무 천황의 이야기도 천황가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사실로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현대 일본 사학자들도 고사기며 일본서기 등 역사책들이 언제부터인가 조작, 변조된 것을 계속해서 논증, 비판해 오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저명한 사학자 김석형(金錫亨, 1915~96)도 "고사기의 원형 자체가 9세기 이후의 어떤 시기에 위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한다.

다시 칠지도 문제로 돌아가자. 칠지도가 중국 땅 동진(東晋)에서 만들어져 백제왕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됐다는 설은 쿠리하라 토모노부(栗原朋信)의 주장이다. 그는 칠지도 뒷면 명문에 있는 '성음'(聖音)이라는 글자를 '성진'(聖晋)이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백제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준 왜왕에게 상을 주기 위해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 해서공(海西公)이 칠지도를 만들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증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칠지도 명문에서 '성음'(聖音)을 '성진'(聖晋)으로 해독하는 경우, 문맥상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또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하사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는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기는커녕 한반도에서 막강한 국력을 한창 과시하던 시기였다.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백제는 태화(泰和) 4년(369)에 남하하던 고구려를 맞아 격렬하게 싸우면서 오히려 북진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371년에는 백제군이 고구려 왕도였던 평양에 침입했고,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전사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재일 사학자인 와코우(和光) 대학 교수 이진희(李鎭熙)도 쿠리하라 토모노부의 동진설은 "일본서기의 사실만을 중시하며, 칠지도의 명문 그 자체를 경시하고 있는 잘못"이라고 지적했다.(七支刀硏究の100年, 1974).

칠지도가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것은 1873년에서 1874년경의 일로 추찰된다. 이 칼을 찾아낸 사람은 스가 마사토모(管政友, 1824~97, '스가'(管)를 '칸'으로 읽는 사학자들도 있다)였다. 역사학자였던 스가가 이소노카미 신궁의 관리 책임자인 궁사(宮司)가 된 것은 1873년이었는데, 궁사 직책을 맡은 후 칠지도를 보고(寶庫)에서 찾아낸다고 한다.

그는 신궁에 부임한 초기에 이 칠지도를 꺼내보니 칼에 녹이 슬어 있어서 녹을 떼내니까 칼 몸체(刀身)에 금상감된 글씨가 나타났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칠지도의 그림을 그대로 본뜬 습본(摺本(접본), 지면을 접어서 펼쳐보도록 한 책)이 나온 것은 1875년 7월 15일의 일이다. 당시 니나카와 시키타네(권川式胤)가 이 습본을 펴냈는데, 크게 당황한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고대 백제왕이 왜왕을 후왕으로 거느리면서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명문이 습본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사이고다카모리(西鄕隆盛, 1822~77) 등은 1871년경부터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워 공공연하게 조선 침략을 획책하고 있었다. 또 1872년 11월 28일에는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재위 1867~1912)의 '징병고유'(徵兵告諭)가 포고되었다.

……예부터의 군제(軍制)를 보완해서 해군과 육군을 설치하며, 20세가 된 남자는 누구나 병적에 편입하여야 한다.……(法令全書)

이것이 바로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이었다. 급기야 1875년 9월 일본의 군함 운요우호(雲楊號)가 서해에 침공해서 '강화도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 군부는 이듬해인 1876년에는 쿠로다 키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를 특명전권대신으로 내세우고 군함 6척과 400여 명의 군인을 강화도에 보내 위협 시위를 하면서 조선 정부를 강압했고, 끝내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하던 시기에 칠지도 습본이 출판되었으니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았을까.


<천황의 한일동족 고문서 분서사건>

역사상 최초로 한일동족론을 세상에 공표한 사람은 일본 남조(南朝, 14세기)시대의 유력한 정치, 사상적 지도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1293~1354)다.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14세기 중엽)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한일동족론을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있으며, 한일동족론에 대한 분서사건의 놀라운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옛날 일본은 삼한과 동종(同種)이라고 전해 왔으며, 그 책들을 칸무(781~806) 천황 때에 불태워버렸느니라.'

칸무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고대 문헌 "袋草子"(1157경)에는 칸무천황의 생부인 코우닌(光仁)천황(770~781) 히라노신(平野神, 백제 성왕)의 증손임이 밝혀져있다. 그러기에 저명한 사학자 키타야마 시게오는 칸무 천황을 가리켜 "백제왕계 귀화인의 핏줄을 타고 났다"고 지적했다고 본다. 칸무 천황은 왕도인 헤이안경 북쪽(현재의 京都市 北區, 平野神社)에다 백제 성왕과 비류왕,초고왕 등 조상신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 지낸 일본천황이다. 그와 같이 백제왕들을 제신으로 섬기는 등 한반도인의 피를 이은 칸무 천황은 어째서 전국 각지의 관원들을 동원해서 한반도인과 일본인이 동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옛 서적(족보)들을 모두 불태운 것일까.

이 점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한일 양국 학자들 간에 전혀 논의된 바가 없다.

"신황정통기"의 저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는 예린한 역사관을 가진 학자며 정치가로, 전제군주 치하에서도 역사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올곧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칸무 천황 때의 한일동족 역사기록 분서사건을 지적할 수 있었던 근거는 9세기 초엽의 "코우닌시키(弘仁私記)"였다고 본다. 코우닌시키는 9세기의 일본왕인 사가(809~823)천황의 지시로 성립된 기록인데, 거기에는 단지 칸무 천황이 책을 불사르게 했다는 극히 짤막한 내용만이 실려 있다. 그러므로 분서 사건의 원인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더구나 일본 관찬 역사책인 '속일본기'와 '일본후기'의 칸무 천황조에는 분서사건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어서 그 원인 규명은 결코 쉽지 않다고 본다. 

분서사건에 대해서 몇가지 요인을 추찰하고 있다.

첫째는 원주민인 수많은 농민들의 조정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농민들은 백제인 왕가의 지배를 받으며 조공을 바치는 농노(농민 노예)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당시 징병과 부역에 강제로 징발되어 이러저리 끌려 다니며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이를테면 칸무 천황은 두 번씩이나 왕도를 옮기느라 수많은농민들을 징발해서 도성을 쌓게 했다. 785년 도성 축성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징발되어 온 농민은 자그마치 31만 4천 명에 달해다. 또 에미시(아이누족, 지금의 훗카이도 지역 등)의 침공으로 (783년부터) 토벌 전쟁에 농민들이 징병되어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등 농민들은 귀농하지 못하고 크게 시달렸던 것이다. 반면에 백제인 왕족과 귀족 및 승려들은 전국 각지의 산림과 농토를 소유하고 호의호식하며 부유하게 살았으며 지방관리들의 부패 또한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칸무 천황은 조정의 조신 등 고위 신하들을 백제왕족들을 중심으로 발탁했다.'(속일본기)

칸무 천황은 집권 후기에도 덕정을 베푸는데 힘썼으나 지방 귀족이며 토호(土豪)와 농민들 사이에는 날로 대립이 심해졌다. 그 당시에 키타야마 시게오는 이렇게 지적했다.

'칸무 천황의 2ㄹ대 정책인 군사와 조구에 의해 피폐해진 농민들의 형편은 이제 급기야 천황을 비롯해서 중앙의 권력자들을 위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천황은 만녀이 되자 천하에 덕정을 행하기로 마음속 깊이 결심했다. 이래서 제4차 에조 토벌의 중지와 헤이안궁 건설 공사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칸무 천황은 조정의 요직에 모두 백제인들을 앉혔다. 또 백제왕족인 조신들의 주청을 언제나 잘 들어주었던 내용들이 관찬 역사책 '속일본기'의 칸무 천황조에 허다하게 전하고 있다. 칸무 천황이 궁중의 백제왕족 조신들 중에서도 가장 총애한 신하는 백제왕 명신(明信, 메이신)이었다. '백제왕'이란 백제왕족의 통칭이다. 그 내용은 스가와라노 미치사네(管原道眞, 845~903)가 892년에 편찬한 '루이쥬 코쿠시'에 잘 나타나 있다. 795년 4월의 왕실 연회 때 칸무 천황이 몸소 명신(메이신)에게 와카(和歌)를 읊어주었다. 명신이 그 시가에 화답하지 않고 잠자코 있다 칸무 천황이 대신 화답했다. 

이와 같이 철두철미하게 백제왕족들을 거느리던 칸무 천황이 한일동족론 관련 서적들을 불태우게 한 이유는 모름지기 백제인 왜왕가가 '일본화'를 크게 서두른데 있다고도 추찰된다. 즉 고통받는 선주민 농민들이 백제인 천황가의 통치를 받으며 위화감과 열등감 등으로 불만이 고조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억제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본국인 백제는 이미 660년에 망한 지 벌써 백수십 년이나 되었고, 한반도는 백제를 멸망시킨 통일신라의 시대인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왜나라의 백제인 왕가는 통일신라 왕가에 분노와 적개심마저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오우진,니토쿠 천황이 백제왕족이라고 하는 미즈노 유우는 논술을 살핀 바 있다. 그런데 그는 그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게 된다.

'상고시대에 우리 왕조(일본왕조)는 끊임없이 백제와 연합했으며,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보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 유대적인 숙명을 지니고 왔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

즉 오우진,닌토쿠 천황은 백제인이고, 그러기에 왜왕가와 백제는 한 핏줄로서 신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연합해왔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이 삼한과 동족이다'라고 하는 발자취에 대해서 백제인 칸무 천황의 왕가는 비통한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하다.

그런데 칸무 천황 당대의 신라는 여러 왕의 계승이 이어졌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선덕왕(780~785), 원성왕(785~798), 소성왕(798~800), 애장왕(800~809)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전쟁이나 큰 충돌이 없었다. 한일 양국의 역사책을 보면, 우선 '삼국사기'에는 다음 두 대목의 기사가 있다. 

'애장왕 3년(802) 12월, 왕이 균정(均貞)에게 대아찬 벼슬을 주고 그를 가왕자(가짜왕자)로 삼아 왜국에 인질로 보내려고 했으나, 균정은 이를 거절했다.4년(803)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파견하고 황금 3백냥을 진상해 왔다. 

일본 관찬 역사책인 속일본기와 일본후기에 각기 칸무 천황 당시의 기사가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료에는 대신라 관계 기사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일본후기에만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칸무 천황 19년(799) 5월 29일 신라사 파견을 중지했다. 칸무 천황 24년 9월 18일 병부소승(兵部少丞) 정6위상 신마리를 신라국에 파견했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해둘 것은 일본후기의 칸무 천황조는 모두 13권이나 그중 네 권만이 전하고 나머지 아홉 권은 결권(缺卷)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결권들속에 '한일동족론 분서사건'의 기사가 그 어딘가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도 여기 덧붙여둔다. 결권에 관해서는 일본학자들도 원인규명이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우닌의 난(應仁之亂, 16세기)때 책이 흩어져 없어진 게 아닌가 한다'고 요시오카 마유키는 논술하기도 했다.(일본후기, 1975)

여하간 일본역사에서 한일동족론의 진원이 백제인 칸무 천황 당시에 불거져 나와 그것이 분서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면, 당시가 비록 전체 통치시대였다고 하더라고 그 파장은 왕가와 백성들 사이에 엄청나게 큰 것이 아니었던가 추찰케 한다. 한일동족론의 발설은 키타바다케 치카후사 이후 약 4백여 년이 지나야 다시 이야기된다. 

즉 한일동족론은 에도 시대의 토우테이칸(1732~97)을 비롯해서 메이지 시대(1868~1912)의 쿠메 쿠니다케(1839~1931) 일제 군국주의 치하의 키타 사타키치(喜田貞吉, 1871~1939) 카나자와 쇼사브로(1872~1967) 등의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다만 한 가지 미리 밝혀두자면 그들이 '한일동족론'을 어떤 목적으로 연구했건간에 '한국인과 일본인은 동일 민족'이라는 근본정신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의 다음과 같은 역사관은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라고 본다. 

고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한과 중국 대륙 및 남양 방면으로부터 일본 열도에는 끊임없이 씨족적으로 집단 이주해왔다. 그들은 어미 토우호쿠(東北) 지방의 변경지대며 이즈의 7개 섬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흩어져 토착하여 살았다. 또 당시는 아직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도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주해온 사람들은 어느 특정한 나라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부락민 또는 씨족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집단들과 뒤섞여 살게 되었다고 본다. 그런 가운데 그들 속에서 유력한 호족이 나타나게 되고, 본국으로부터 유력한 씨족들이 계속해서 건너옴으로써 차츰 중앙정권을 이루기 위한 권력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특히 바로 코앞에 있는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호족을 대표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이 일찍부터 일본 열도에서 조직적이고 강력한 세력을 이룬 한국인 호족들은 그들이 모시게 된 한국인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식민지 경영에 착수했다. 또 그들 역대 천황들은 사당(신사, 신궁)을 세우고 백제신, 신라신에게 신상제(新賞祭)라는 제사를 지냈다.


<백제인이 세운 일본 무사정권>

쿄우토의 히라노 신사에 모신 백제신들이 헤이씨의 씨신이 되었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헤이안 시대 후기의 최고 무장인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 1118~81)도 칸무 천황과 마찬가지로 백제인 후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타이라노 키요모리야말로 일본 역사상 겐씨(源氏) 가문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1123~60)를 무찌르고 왕조 국가의 군사력을 장악한 명장이다. 12세기 일본 무사시대는 백제인 타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멸망당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역시 백제인 무장이었다. 그는 백제인 세이와(淸和, 재위 858~876) 천황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 겐씨 가문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패배한 후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뒷날 '단노우라 전쟁'(1185)에서 헤이씨 가문을 멸망시킨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3남인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였다.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2년 왕도인 헤이안경(지금의 쿄토)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태평양 연안의 카마쿠라 땅에 무사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이른바 '카마쿠라 막부'였다. 쉽게 말해 그 당시부터 천황가는 실권을 빼앗긴 채 다만 상징적 존재로 머물기 시작한 것이다. 

1192년 7월 고토바 천황(1183~1198)은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운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무가 정치를 승인하면서 그를 '정이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이른바 '쇼군'(將軍)이라고 통칭되는 무단 정치는 이렇게 백제인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다. 정이대장군인 쇼군은 전국 각지에 부하 무장인 '다이묘'(大名)를 임명했고, 각 지역 다이묘들은 제 고장을 무력으로 관장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시대는 1336년에 두 번째 무사정권인 '무로마치' 막부를 탄생시킨다. 이것은 무장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58)가 이룩한 것이다. 1338년 그는 초대 쇼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무사정권은 200여 년이 지난 1573년에 막을 내린다.

이후 무장 오다 노부나가의 군사 독재 시대가 이어지고 계속해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의 군사독재 시대가 전개된다. 그러다가 1603년 지금의 토우쿄우에서 에도 막부가 탄생한다. 이 당시 무장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됨으로써 다시금 막부 무사정권 시대가 열렸다. 이 에도 막부 시대는 1867년 제 15대 장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마침내 천황 친정체제가 부활해서 1868년부터 이른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무상정권 시대의 발자취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무사정권은 백제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그 배후인 천황가 역시 백제인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황가에서 '니이나메사이(新嘗祭)라는 한국신 제사를 거행하고 있는 이유다. 

<백제인 혈통 입증하는 일본 고대문서> 

사실 한일동족론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역사시대는 8세기 칸무 천황 때를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일본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아스카(飛鳥, 592~645 또는 710) 문화 시대이다. 이 시기에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한번도 알려지지 않은 백제인 여왕이 존재했다. 일본 역사서에서는 이 백제인 여왕을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재위 592~628)이라고 부른다.

스이코 천황은 백제 왕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은 일본 최초의 정식 여왕이다. 신라의 선덕여황(재위 631~647)이 즉위하기 3년 전인 628년에 세상을 떠난 빼어난 여왕이었다. 선덕여왕이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여러 가지 업적을 쌓았다면, 백제인 스이코 천황 역시 당시 왜나라에서 한국 불교 문화의 눈부신 터전을 이루는 업적을 쌓았다.

스이코 천황은 백제불교를 바탕으로 '아스카 문화'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이 아스카 문화가 한반도에서 왜나라에 심어준 불교문화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8세기 초 왜왕실에서 편찬한 역사책인 일본서기에도 백제 불교가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스이코 천황은 백제의 관륵 스님을 모셔다가 천문지리학을 일으켰는가 하면, 백제의 음악가 미마지(味摩之)를 모셔다가 일본땅에 처음으로 한반도의 사자춤이며 아악을 이루었다.어디 그뿐인가. 고구려의 담징 스님을 모셔다가 호우류우지의 12면 금당벽화를 비롯한 미술 문화를 일으켰으며, 신라 진평왕의 환심을 사 대신라외교를 통해 신라 불교도 도입했다. 이처럼 스이코 천황은 모국인 한반도 3국(백제, 신라, 고구려)의 힘으로 아스카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운 슬기로운 여걸이었다. 그렇게나 출중한 그녀가 한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스이코 천황을 빼놓고는 '한일동족론'은 물론이고 '한일관계사'조차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스이코 천황에 관한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이른바 친일 식민사관이 아직도 이 땅에 잔존함을 입증하는 것일까.

<비다쓰 천황과 스이코 천황, 이복 남매간의 결혼>

킨메이 천황과 이시히메 사이에서 태어난 비다쓰 천황은 당연히 백제왕족이다. 그의 첫 번째 왕비는 히로히메였다. 비다쓰 천황은 왕위에 오른 지 4년이 된 575년 1월 히로히메를 황후로 맞이하였는데, 불과 10개월 만인 그해 11월 히로히메가 죽는 아픔을 겪었다. 히로히메의 사인은 밝혀져 있지 않다. 

히로히메 황후가 죽은 이듬해인 576년 3월 비다쓰 천황은 이복 여동생인 어여쁜 카시키야히메를 두 번째 황후로 맞았다. 이로써 왜나라 백제인 왕실에서 이복 남매간의 근친 결혼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이복 남매간의 근친 결혼은 흔한 일이므로 카시키야히메 공주로서도 자연스런 과정을 거쳐 결혼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 오늘날 일본 사가들의 시각이다. 일본서기는 스이코 천황이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용모가 아름답고,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여성이었다"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름답고 총명한 공주였던 카시키야히메는 상처한 이복오빠인 비다쓰 천황과 18세 때 결혼했다. 

스이코 천황과 비다쓰 천황의 사이는 원만했던 것같다. 물론 비다쓰 천황은 카시키야히메 황후 이외에도 여러 왕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카시키야히메 황후가 2남 5녀의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비다쓰 천황은 585년 48세로 죽고 만다. 그때 황후의 나이 32세였다.

미모의 젊은 과부는 남편과 사별한 후 즉각 거센 풍우에 휘말리게 된다. 죽은 남편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자들이 피비린내나는 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다쓰 천황이 승하하자 장례가 거행되었다. 일단 시신을 모시는 빈궁(모가리노미야)이 마련되었다. 당시 본국 백제에서는 왕릉을 마련하고 매장을 하기 전까지 3년간 빈궁에 시신을 가매장하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이 앞에서 살폈듯이 '백제의 대빈'이라고 일컫는 3년 국장이다. 비다쓰 천황의 시신은 히로세 땅에 마련한 빈궁에 가매장되었다. 히로세는 지금의 나라현으 코우료우쵸 백제였다.

카시키야히메 황후는 이 히로세의 빈궁 안에서 승하한 비다쓰 천황의 명복을 빌면서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조정 신하들도 빈궁에 찾아와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때 왕실 쪽에서 볼멘 소리를 하는 왕자가 한 명 있었다. 아나호베 왕자였다. 그는 이렇게 고함치며 다녔다. "어째서 죽은 왕의 빈소에만 모여들고 살아 있는 왕은 모실 줄을 모르느냐?"

혈수부 왕자, 즉 아나호베는 스스로가 왕위 계승권자라고 떠벌리고 다니면서 모두들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울분을 터뜨렸던 것이다. 

자칭 왕위 계승권자인 아나호베 왕자는 킨메이 천황과 그의 세 번째 왕비인 오아네키미 사이에 태어난 왕자였다. 즉 카시키야히메 황후의 이복오빠였다. 그는 행동이 난폭하고 경솔한 데다 엉뚱한 짓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이 무렵 아나호베 왕자는 모노노베노 모리야(515~587) 대련(大連, 조정 제2위의 벼슬)과 은밀하게 결탁하고 있었다. 즉 모노노베 모리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 계승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의 최고 권력자는 소가노 우마코(550~626)대신이었다. 그와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불교의 일본 전래에 대해 대립하고 있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숭불파였고,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배불파였다.

날이 갈수록 궁 안팎은 시끄러웠다. 마치 먹구름이 낀 폭풍 전야와도 같았다. 미모의 과부 카시키야히메 황후는 사태가 험악해지는 기미를 이미 알아차린 듯, 빈궁에서 꼼짝 않고 죽은 남편 비다쓰 천황의 명복만 빌 따름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심각한 대립을 막을 만한 묘수가 달리 없었다. 선왕 상중에 감히 누고도 함부로 일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또한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실제로 황후에게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빈궁 안에서 잘도 버텼다. 복상한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그 사이 새로 왕위를 계승한 것은 아나호베 왕자가 아닌 요우메이 천황이었다. 그는 이복형인 죽은 비다쓰 천황의 뒤를 이었다. 즉 그녀의 친 오빠가 남편 비다쓰 천황의 뒤를 계승한 것이다.

요우메이 천황을 옹립한 것은 최고대신이자 숭불파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카시키야히메 황후가 협의한 결과였다. 백제 불교의 철저한 옹호자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바로 백제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기 집(코우겐지)에 모셨던 죽은 소가노 이나메(505~570) 대신의 아들이다. 게다가 소가노 우마코는 카시키야히메 황후(뒤의 스이코 천황)의 친외삼촌이기도 했다 즉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친누님이 스이코 황후와 요우메이 천황의 생모였던 것이다.

5월의 어느날, 드디어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일본서기는 그 역사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5월, 초여름 어느날 아나호베 왕자는 카시키야히메 황후를 강간하려고 강제로 빈궁을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비다쓰 천황의 총신 미와노 키미사카후(三輪君逆)가 경비병들을 불러 아나호베 왕자의 침입을 막았다. 카시키야히메 황후가 혼자서 정숙하게 지키고 있는 빈궁에 왕자는 고함을 지르며 침입하려고 했으나, 그는 언쟁 끝에 쫓겨나고 말았다.

카시키야히메 황후는 미오노 키미사카후로부터 배다른 오빠인 아나호베 왕자의 난동을 보고받았다. 어느새 왕궁 안팎으로는 "왕위를 노리던 아나호베 왕자가 선왕의 황후를 욕보이려고 빈궁에 난입을 꾀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발끈한 아나호베 왕자는 빈궁을 지키면서 제 앞을 가로막았던 미와노 키미사카후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조정의 배불파(排佛派) 우두머리인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에게 미와노 키미사카후의 살해를 명령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부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미와노 키미사카후의 거처를 기습해 결국 죽여버렸다. 

드디어 왕궁을 둘러싸고 거센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아나호베 왕자는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일당과 반역을 모의해 마침내 요우메이 천황의 왕권을 뒤엎기로 작정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자신의 본거지인 아도(阿都, 현재 오오사카의 야오시)에서 반란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편 비다쓰 천황에 이어 왕위에 오른 요우메이 천황은 몸이 허약해서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친누이동생인 카시키야히메 황후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곧 병석에 눕게 되었던 것이다.

<한일 양국의 대실권자는 백제인 곤지왕자>

한편 동성왕의 아들들인 무령왕과 케이타이 천황을 각각 백제와 왜나라의 권력의 일인자로 등극시킨 할아버지 곤지왕자(昆支王子)야말로 당시 한일 양국에 걸쳐 막강한 '한왜연합왕가'(韓倭聯合王家)의 세력을 형성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에카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왜한연합왕국'(倭韓連合王國)의 왕(王)이라는 용어를 신라인 스진 천황(崇神天皇, 2~3세기경)에게 붙이기도 했다(『騎馬民族國家』, 岩波書店, 1967) 여하간 백제왕실에서 왜나라 왕실로 건너온 백제인 곤지왕자는 그 후에도 계속 왜왕실에서만 살다가 카와치(河內)땅에서 서거하게 된다.

지금 오오사카부(大阪府)의 하비키노시(羽曳野市)가 그 옛날 카와치의 아스카 터전인데, 이곳에는 유명한 '곤지왕 신사'(昆支王神社)가 있다. 이 신사는 요즘에 와서 주로 '아스카베 신사'(飛鳥戶神社)라고 부르는데, 곤지왕자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이 터전에 옛 문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유우랴쿠조(雄略朝)에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왕족인 곤지왕은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의 조상으로서, 이 터전을 본거지로 삼았다. 조선의 삼국사기의 고증에 의하면 그가 건너온 것은 유랴쿠조보다 좀더 거슬러 올라간 인교조(允恭朝) 무렵(5세기 초)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조상신(百濟)을 제사 모시는 씨신(氏神)으로서 아스카베 신사(飛鳥戶神社)를 창사(創社)했다. 또 한 씨사(氏寺)로는 아스카산 죠린지(飛鳥山 常林寺)라는 사찰을 산 남쪽 기슭에 세우고 있었다.(『古田文書』).

이와 같이 곤지왕자는 생전에 왜왕실에서 백제왕가의 조상신 제사를 도맡았으며, 죽어서는 왜나라 백제 왕부의 제신이 되었던 것이다. 아스카베 신사는 곤지왕자의 아들 중 하나인 비유왕(毘有王)도 중세 말까지 제사 지냈다고 한다.

현재 곤지왕 신사가 자리잡고 있는 일대는 곤지왕자의 후손들인 아스카베씨(飛鳥戶氏)·후나씨(船氏) 등 백제인 왕족들이 살고 있던 큰 고장이다. 그래서 이 일대에는 백제인 고분 수천 기가 있었고, 현재도 580여기의 옛 무덤들이 그 옛날의 백제인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카와치 아스카'(河內飛鳥)라고 일컬어지는 이 고장에서 주목받은 고분지대로는 우네비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고분들과 니이자와 천총(新澤千塚)을 들 수 있다.

특히 1960년 초 '니이자와 126호분'에서 발굴된 '방제형금관'(方製形金冠)은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왜냐하면 이 방제형금관과 똑같은 것이 1971년 백제 무령왕릉의 왕비 머리 부분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방제형금관과 똑같은 금관이 발굴된 '니이자와 126호분' 역시 모름지기 백제계 왜왕비의 무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뿐 아니라 이 무덤에서는 무령왕릉의 왕비 발끝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형태의 '청동 다리미'도 출토되어, 니이자와 126호분의 장법(葬法)이 모국 백제왕가의 장법과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실제로 니이자와 천총에서 발굴된 무덤들은 대부분 한반도 양식인 횡혈식 고분이라는 공통점도 보이고 있다.

한편, 니이자와 천총 바로 근처에 '센카 천황릉'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다음의 보고서를 보자.

니이자와 천총에 들어서면 곧 눈에 띄는 것은 왼쪽으로 보이는 센카 천황릉(宣化天皇陵)이다.......... 센카 천황릉 앞에서 서서 서쪽의 도로 양쪽으로 펼쳐지는 야트막한 구릉들을 바라보면 참으로 많은 고분들이 겹칠 듯이 있다.

이 보고서에서 주목할 것은 센카 천황(宣化天皇, 재위 535~539)이다. 무령왕의 동생인 케이타이 천황(繼體天皇)의 차남이 다름아닌 센카 천황이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의 유물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 출토된 니이자와 126호분, 그리고 니이자와 고분에서 바라보이는 센카 천황릉은 무령왕 조카의 무덤이고.......아무튼 니이자와 천총은 백제인 왜나라 왕부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물이다.


<근초고왕이 오우진 천황에게 하사한 칠지도>

그러면 1630여 년 전에 백제에서 만든 칠지도의 양면에 새겨진 한자어들을 살펴보자. 칼 앞면의 한자 명문은 다음과 같다.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年正陽造百練鐵七支刀以벽百兵宣

    供供侯王□□□□作

칼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先世以來末有此刀百滋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상과 같은 한자어 명문은 녹이슨 칠지도의 글자(금상감)들을 일본 학자들(福山敏男, 榧木杜人, 三品彰英, 栗原朋信)이 다각적으로 판독해낸 것이다. 이 한자어 명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서기 369년(태화 4년) 5월 16일 병오날 정양에 무수히 거듭 단근질한 강철로 이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적병을 물리칠 수 있도록 이 영도(靈刀)를 후왕에게 보내주는도다. □□□□작

(뒷면) 선대 이후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세자 귀수성음은 왜왕을 위해서 만들어주는 것이니, 이 칼을 후세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



이와 같이 당시 백제 근초고왕과 귀수세자(貴須世子, 후의 근구수왕, 재위 375~384)는 전대미문의 훌륭한 칠지도를 만들어서 왜에 있는 백제왕국의 후왕인 오우진 천황에게 보내주었다. 그 칼로 왜왕은 모든 적군을 무찔러 백제 식민지의 보전에 힘쓰며 번창할 것을 어명(御命)한 것이었다.

이 칠지도의 명문은 누가 읽더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하행문(下行文)임을 알 수 있다고 우에다 마사아키는 지적했다. 즉 본국 백제의 근초고왕과 귀수세자가 왜의 오우진 천황과 그의 후세를 축복하며 보낸 보도(寶刀)인 것이다. 당시 왜국이 백제인 후왕이 거느리던 백제의 터전이었음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말하자면 칠지도의 명문은 한일고대사에 있어서 백제가 일본을 백제왕부로서 다스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품인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일본 사학자들이 하사설을 뒤엎으려고 상납한 것이라는 헌상설을 내세우는 등 엉뚱한 주장을 하므로, 그들의 논의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어사전』(日本史辭典, 高柳光壽·竹內理三 編, 角川書店, 1976)의 칠지도 항목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검. 나라 텐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 신궁의 신역(神域)에서 출토, 이 칠지도는 일본서기의 진구우 황후 52년조 기록에 보이는 칠지도에 해당된다고 여겨진다. 전체 길이 약 75cm. 칼몸(刀身)의 좌우에 각 3개씩 양날의 가지칼(枝刀)을 서로 번갈아 뻗쳐 나오게 만든 생김새로 실용적인 칼은 아니다. 칼 몸체의 양면에는 금으로 상감된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칠지도는 당시 동아시아 각국의 이해와 갚이 관련되어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설(定說)은 밝혀지지 않았다. 369년 백제왕이 왜왕을 위해 만들었다고 추정되며, 백제에서 온 '헌상품'으로 보는 설이 있고,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물건'이라는 설, 그밖에 동진(東晋)에서 백제왕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한 물건'이라는 설이 있으며, 명문(銘文)을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의 왜왕에게 '바쳤다'(貢上)는 기사와 단순하게 연결짓는 점이 비판되고 있다. 국보.

먼저 쿄우토 대학 사학 교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의 하사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우에다는 칠지도를 연구 검토하기 위해 이소노카미 신궁을 3번이나 찾아가 칠지도를 직접 만져보면서 칼 앞뒷면의 명문을 조사했다. 우에다는 그의 저서(倭王の世界, 1976)에서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임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칠지도에 새겨진 60여 글자 중에 판독이 곤란한 부분도 있어서, 전문을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고심 끝에 해독하여 밝혀진 것을 따르자면 칼의 명문 그 어디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글귀는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는 일본서기의 진구우 황후 52년조 기록을 빙자하여 '헌상설'이 별로 의심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주장돼왔다. 명문 해석은 우선 명문 그 자체에 의거해야 한다. 일본서기는 귀중한 고전이기는 하되,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완성된 이 역사서에 의거해 칠지도의 명문을 해독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본다.

칠지도의 명문에는 백제왕이 '왜왕을 위해 만들어준 것이며, 이 칼을 후세까지 길이 잘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고 되어 있고, 따라서 이 칼을 만든 주체도 백제왕이다. 그뿐 아니라 칠지도처럼 생긴 칼이 중국에서 단 한 자루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동진(東晋)을 칠지도의 주체로 보려고 하는 설의 허점이다.

반면 한국에는 칠지도와 유사한 철기가 있다. 1962년 경북 칠곡군 인동면 황상동(仁同面 黃桑洞) 1호 고분에서 출토된 길이 24cm의 철기와 1971년 부산시 동래구 오륜대 유적에서 발굴된 길이 21cm 및 14.3cm의 이형(異形) 철기다. 이것들도 칠지도와 마찬가지로 칼의 좌우 양쪽에 가지(枝)가 3개씩 있다. 경남 함양 상백리(上栢里)의 고분군에서도 그런 것이 출토되었는데 의장용(儀仗用)이라고 한다.

당시 백제 세력은 한층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 위치에 있던 백제왕이 왜왕에게 복속(服屬)해서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하는 것은 백제 쪽 정세를 살필 때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다. 더구나 명문 자체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확증할 만한 글귀는 없다. 백제왕이 '모든 군사(百兵)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벽사(僻邪)의 주도(呪刀)를 만들어 왜왕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군사 동맹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었으리라. 

고사기의 오우진 천황조를 보면, '백제국의 근초고왕이 횡도(橫刀) 및 큰 거울(大鏡)을 바쳤다(貢上)'고 씌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횡도와 큰 거울을 칠지도와 칠자경으로 쓰고 있다. 어쩌면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칠지도가 실제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칠지도에 대한 기사를 쓴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에다 마사아키는 칠지도와 관련해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칠지도에서 없어진 네 글자>

칠지도의 명문을 살펴보면 명문 끝쪽의 4개의 글자가 깎여 있다. 즉 □□□□作으로 되어 있다. 누가 이 4개의 글자를 깎아버린 것인가. 우에다 마사아키는 그 4글자는 누군가 고의로 깎은 것이라고 했다.

칠지도 몸체의 앞뒷면에는 금상감으로 60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칼 아래쪽 약 3분의 1 되는 지점이 부러져 있으며, 명문(銘文)도 깎여 떨어진 부분이 적지 않고, 고의로 깎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石上神宮と七支刀, 1973)

이 칼을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처음으로 찾아내고 녹을 떼내 금상감이 된 명문을 세상에 알린 것이 스가마사토모였음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그가 칠지도의 녹만 떼어낸 것이 아니고 네 글자도 깎아버렸다는 말인가. 그는 칠지도 앞뒷면이 검게 녹슬어 있어서 모든 녹을 떼내고 금상감이 되어 있는 명문 글자들을 찾아냈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그는 1877년 이소노카미 신궁 궁사직을 떠나 일본 군국주의 내각이었던 태정관(太政官)의 편사국(編史局)으로 자리를 옮겨갔고, 1888년에는 토우쿄우 대학의 편사국 편사관이 되었다. 그는 편사국에서 일하면서 「임나고」(任那考, 『史學會雜誌』, 1893)라는 논문을 썼는데,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갖다 바쳤다는 일본서기의 헌상(獻上) 기사를 제시하고 일본서기의 허위 기사인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역설했다.

그가 이 논문을 발표한 시기는 25만 명의 일본군이 이미 조선반도에 들어와 머지 않아 청나라로 밀고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중책을 맡은 그도 아마 일본 군벌의 중압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임나고가 일본의 조선침략의 역사적 근거를 세우는 데 이용되지는 않았을까. 여하간 백제왕의 신보(神寶)인 칠지도 앞면의 네 글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깎인 것인가.

스가 마사토모가 이소노카미 신궁의 책임자(궁사)로 근무하던 시기(1873~77)였을까, 아니면 그 후의 일일까. 일본의 군국주의가 날로 팽창하여 '정한론'(征韓論)을 구체적으로 보강시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論吉)의 '탈아론'(脫亞論)이 주창된 1885년 3월 16일 이후의 일이 아닐까 추찰해 보기도 한다. 또 이런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군국주의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필경 깎여버린 그 넉 자는 '백제왕국' 이나 백제인 도검(刀劍)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온사 명칭 바꾼 군국주의자들>

야사카 신사의 축제를 기온마쓰리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 이 야사카 신사의 사당 명칭이 '기온사'(祇園社)였기 때문이다. 야사카 신사라는 사당의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이 지은 이름이다. 메이지 유신 때 일본 정부는 불교를 배척했다. 그래서 그때까지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신불 동일체의 종교적인 관습을 깨고 신만을 국가적으로 받들면서, 이른바 황국사상이라는 국수주의적인 종교 관념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러한 것이 군국주의 일본의 새로운 기치를 내거는 일이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에 의해 '기온사'는 이름이 '야사카 신사'가 되었고, 불교적인 요소는 제거되었다. 물론 기온사 사당은 고대부터 신라신인 우두천왕(스사노오노미코도)을 제신(祭神)으로 삼고 제사드려 왔다. 그러나 신사적인 성격보다는 불교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게 강했던 곳이다. 더구나 신라에서 기온사(祇園寺)라는 사찰을 진흥왕이 세웠는데, 이 사찰은 쿄우토의 기온사와 연관이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온마쓰리가 일본에서 가장 큰 제례 축제인 까닭은 기온사가 바로 마쓰리의 원류(源流)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3대 마쓰리는 쿄우토의 기온마쓰리, 오오사카의 텐만마쓰리(天滿祭)와 토우쿄우의 칸다마쓰리(神田祭)다. 그런데 오사카의 텐만마쓰리나 토우쿄우의 칸다마쓰리의 원류는 바로 기온사의 기온어령회(祇園御靈會)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고 보면 기온마쓰는 한국신 우두천왕제로서 일본의 모든 마쓰리의 총본산을 이루어오고 있는 것이다. 일본 천황가가 한국인 왕들에 의해 왜나라를 지배해 왔다는 것은 이와 같은 거창한 제신(祭神)의 마쓰리 전통 문화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는 데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쿄우토의 기온사인 야사카 신사는 전국 각지에 7만 9천1백52사(1992년 통계)를 지역 신사로 거느리고 있다. 이들 각지의 야사카 신사에서는 해마다 7월(음력 6월)에 한국신 우두천왕을 모시고 제사드리며 마쓰리를 성대하게 거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쿄우토의 야사카 신사는 총본사이거니와 이곳의 궁사(宮司, 최고 책임 신궁)는 고구려 사신이었던 이리지의 후손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고 야사카 신사의 궁사인 타카라 요시타다(高良美忠)씨는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야사카 신사는 이리지의 장남 마테(眞手)의 자손들이 대대로 야사카노 미야쓰코(八坂造, 齊明天皇이 고구려에서 온 사신 伊利之에게 내려준 양성)를 세습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八坂神社, 1972)

『신찬성씨록』에도 '야사카노 미야쓰코(八坂造)는 고구려인 이리지(伊利之)이다'라고 밝혀져 있다. 이리지는 옛 문헌에 고구려 사신 이리좌(伊利佐, 이리사)로도 간혹 표기되어 있으나 이리지와 틀림없는 동일 인물이다.

스이코 천황은 현재 우리 옷과 조금도 다름없는 고쟁이와 치마를 입고 코끝이 오똑한 버선을 신었다. 그녀는 596년 11월 백제식 대가람인 호우코우지(法興寺)를 준공시키면서 마침내 왜나라를 불교국가로 만들려는 기치를 높이 쳐들었다. 백제으 성왕이 왜나라 백제인 킨메이 천황에게 불교를 포교한 이후 불교는 배불파에게 두 번의 수난을 겪은 끝에 성왕의 포교 56년째인 반세기만에 왜나라 아스카(飛鳥) 땅에서 마침내 그 성업을 이룬 것이다.

스이코 천황은 아버지 킨메이 천황이 못다 이룬 불교국가를 이룩한 자랑스러운 한국 여성이다. 부왕인 킨메이 천황뿐만 아니라 부군 비다쓰 천황조차도 배불파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 대련 등에게 불교 배척의 시련을 겪은 것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본 스이코 천황은 이제 39세로 아스카 땅에서 등극한 왜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다행히 친외삼촌인 최고대신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0~626)가 목숨마저 내건 강력한 숭불 투쟁으로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당을 파멸시켰고, 드디어 아스카땅에 백제식 가람 호우코우지를 세웠다. 이 기쁜 소식을 스이코 천황은 본국인 백제의 위덕왕(威德王, 554~598)에게 즉시 알렸다.

위덕왕은 크게 기뻐했다. 부왕인 성왕의 큰 뜻이 이제야 비로소 왜나라 스이코 천황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위덕왕은 성왕이 554년에 서거한 뒤 그를 추모해서 훌륭한 불상을 만들었다. 그 불상은 녹나무(樟木)로 조각한 높이 1.7m의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이다.

위덕왕은 이 구세관음상을 잘 모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 왜나라에서 불교 포교에 앞장선 스이코 천황이 592년 등극한 것이다. 위덕왕은 매우 기뻐하며 구세관음상을 스이코 천황 원년에 보내주었다.(『부상략기』). 이 구세관음상은 현재 나라의 호우류우지(法興寺) 몽전(夢殿)에 모셔져 있는 일본 국보다. 더구나 이 구세관음상은 아무 때나 배관할 수 없는 호우류우지의 귀중한 비불(비불)로서, 봄 가을 두 번의 관람 기간에만 볼 수 있다.(4월 11~5월 5일, 10월 22일~11월 3일).

백제 위덕왕이 이 구세관음상을 스이코 천황에게 보내준 지 3년 만에 나라땅 아스카에서 호우코우지(아스카지)가 준공되었다. 588년 3월부터 백제인 최고 대신 소가노 우마코가 착공한지 8년 만인 596년 11월의 일이다. 그동안 이 호우코우지를 세우기 위해 백제에서 수많은 사찰 건축가와 각종 기사며 사신과 스님들이 왜나라로 건너왔다. 이 가람을 완성시키는데 앞장선 것은 소가노 우마코 대신만이 아니었고, 스이코 천황의 노력도 컸다. 또 독실한 불교신도인 성덕태자는 이 곳에 머물면서 고구려의 혜자(惠慈) 스님과 백제의 혜총(惠聰) 스님 문하에서 불경 공부를 했다. 법당들이 하나하나 세워지는 가운데 대패질이며 톱질소리, 주춧돌 쪼는 징소리를 온종일 들으면서 나이 어린 성덕태자는 불교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린 소년은 왜나라 땅에 불교를 포교시킨 성왕의 거룩한 뜻을 늘 가슴속에 아로새기며 호우코우지 완공의 날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성덕(聖德)'은 일종의 법명이며, 백제 성왕(聖王)의 덕(德)을 입었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본다.

호우코우지가 세워지면 불교국가를 이룩하겠다던 의지의 한국 여성 스이코 천황은 성덕태자의 친고모였다. 성덕태자는 스이코 천황의 친오빠 요우메이 천황(用明天皇, 588~587)의 왕자였다. 13세 때 부왕을 잃고 불경 공부에만 전념하던 성덕태자는 스이코 천황이 등극하자 소가노 우마코 대신에 의해 친고모의 태자가 되고 또한 정치적이 섭정이 되었던 것이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바로 성덕태자의 친외할아버지였다.

스이코 천황과 소가노 우마코 대신 그리고 성덕태자 이 세 사람은 아스카 시대 한국불교가 왜나라에 정착하는데 가장 공헌한 삼두마차였다. 이 세 사람이 없었다면 한국 불교의 왜나라 정착은 훨씬 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 고대 한국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아스카 문화, 곧 한국 불교 문화에 대해서 우리나라 역사책에도 상세하게 기록해두어야 한다.

<일본으로 전래된 고조선의 천신(天神) 신앙>

이 큰 나무인 솟대는 신목(神木)으로서 천신이 깃들이고 있는 신성한 나무다.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우리는 조상대대로 솟대를 섬기면서 마을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드리고 축제를 거행해왔다. 그와 같은 신목에 대한 솟대 신앙은 고대의 한국인 정복왕들에 의해 왜나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에다 마사아키는 솟대를 섬긴 고조선 사람들의 천신 신앙이 바로 일본의 신목제사(神木祭祀)터인 신리(神籬, 히모로기)임을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소도라고 부르는 별읍(別邑)이 있고, 그 곳에 큰 나무을 세워 방울을 걸어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하는 위지동이전의 한(韓)의 항목이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것은 실로 고대 일본의 신리(神籬, 히모로기)인 것이다. 신이 깃들이는 나무인 신목(神木)을 제사드리는 마쓰리(祭)였다.

일본의 고대 역사에서 신화시대에는 신성한 나무를 신목으로 삼고 신이 깃들이는 곳으로 삼아 신상제(新嘗祭, 니이나메사이)를 지냈던 자취들을 능히 살필 수 있다. 신화시대의 신들의 신상제는 가을의 수확을 농신(農神)에게 감사드리는 제례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제의를 거행한 신은 아메와카히코(天稚彦)와 야마사치히코(山幸彦)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뿐 아니라 농신에게 제사드린던 집을 '신상옥'(新嘗屋, 니이나메야)이라고 호칭했던 것이 고사기(古事記)에 실린 두 곡의 가요에 보인다. 그 내용을 보면 신상옥에는 신성한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지동이전의 고구려 항목에도 '궁실(宮室) 좌우에다 큰 집(大屋)을 세우고 신에게 제사지냈다'는 고구려 때의 제신(祭神) 유습의 기사가 있다. 즉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고구려의 동맹 또는 동명(東明) 제사 때 왕실에서 궁의 좌우에 천신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을 지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이와 같은 제례의식이 고대 왜나라로 옮겨간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왜나라 천황들이 한국신(백제신과 신라신)에게 제사드리는 신상제가 정식으로 기록된 곳이 일본서기다. 여기에는 코우교쿠 천황(皇極天皇(여왕), 642~645, 백제인 죠메이 천황의 황후) 원년 11월 16일 토끼날(卯日) 천황이 몸소 신상제를 거행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역대 천황들은 해마다 같은 날인 음력 11월의 두 번째 토끼날 신상제를 거행했으나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또 세이와 천황(淸和天皇, 858~876) 때는 11월 15일인 두 번째 범날(寅日) 거행한 일도 있다. 그후 히가시야마 천황(東山天皇, 1687~1709) 때부터 다시 거행되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3년부터는 천황가에서 신상제를 양력 11월 23일로 정했다. 한편 2차대전 패전 직후 미군점령기인 1947년부터는 이날을 '근로감사의 날'이라는 축일로 정했다. 당시 미군은 천황가를 견제했다. 이날이 일반국민에게는 평범한 공휴일의 하나지만 천황가의 궁중 신전에서는 여전히 신상제를 거행하며 지금에 이른다



<나라(奈良)는 '국가'라는 한국어>

아스카의 7당가람에서는 이제 누구든지 아스카의 호우코우지를 찾아가 예불할 수 있게 되었다. 감히 불전을 파괴한 국신파들은 모두 섬멸된 것이다. 그러기에 아스카의 '테라'로 사람들의 발길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절'을 말하는 일본어 '테라'는 한국어의 '절'에서 생긴 말이라고 불교사학자 타무라 엔쵸는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오늘의 평안도 사투리처럼 '절'을 '뎔'이라고 말했던 게 아닌가 한다. 호우코우지(아스카지)에 온 고구려 고승 혜자 스님 등이 '뎔'이라고 하는 말을 왜인들이 '뎌라' 등으로 발음하던 것이 '테라'로 변화한 것으로 본다. 여하간 아스카의 호우코우지로부터 본격적으로 '테라'라는 말이 퍼졌을 것 같다.

또 '나라'(奈良)로 말하자면 한국어의 '나라' 즉 '국가'를 말하는 이두식 한자어 표현이다. 그게 사실인가. 일본의 권위 있는 고어학자 마쓰오카 시즈오는 그의 명서 『일본어고어대사전』(1929)에서 일본어 '나라'는 한국어로 '국가'라고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나라'는 야마토(大和)의 지명. 도읍으로 유명하다. 나라는 한국어에서 국가라는 뜻이므로, 상고 시대에 이 고장을 점령하고 살던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마쓰오카 시즈오는 그후 8년 뒤인 1937년에 저술한 『신편 일본고어사전』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라(奈良):국가라는 뜻. 야마토의 옛 지명으로서, 상고 시대에 이 지역을 점거하고 살던 한국 출신의 이즈모족(出雲族, 신라인)이 쓴 이름이라고 본다.

나라(奈良)가 한국어의 국가라고 가장 먼저 밝힌 것은 저명한 역사지리학자 요시다 토우고(1864~1918, 문학박사)였다. 1900년에 간행한 저서에서 그는 "나라는 한국어의 국가다"라고 설명하면서 한글로 '나라'라고 굳이 표기하여(100쪽 도판의 표시부분) 주목을 끌었다.

일본 근대의 가장 권위 있는 국어학자 오오쓰키 후미히코(1847~1928)도 그의 저서인 『대언해』라는 일본어 사전에서 "나라는 조선어로서 도읍지(왕도)를 가리키는 말임"을 입증했다. 그밖에도 현대의 역사학자인 칸사이가쿠인 대학 교수 나가시마 후쿠타로우도 '일본역사학회'에서 편집한 그의 저서에서 나라는 한국어의 국가임을 입증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것이 있다. 현재의 일본 나라 지방을 가장 먼저 지배한 것은 신라인들이라는 점이다. 앞에 예시한 학자들이 '나라'라는 말을 만든 것이 신라인이라고 한 지적에서도 그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이 백여 년간 나라 땅을 지배한 후에야 그 고장으로 백제인들도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즉 카와치(오오사카) 지방에서는 4세기 후반에 백제왕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와치의 동쪽 멀이 떨어진 고장인 나라 땅에서 이미 2세기 말경부터 신라인들의 왕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오우진 천황과 닌토쿠 천황 시대(5세기) 이전에는 신라계의 스진(崇神) 천황이 3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정복왕으로서 나라 지방을 점거했던 것으로 본다. 그 과정은 토우쿄우 대학 교수 에카미 나미오가 쓴 『기마민족국가』(1948)에서의 '스진 천황의 왜나라 정복론' 및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 전설'등과 함께 밝히겠다.


<닌토쿠 천황이 천도한 백제군 터전 '나니와쓰'>

니이자와 천총의 고분들은 언제 누가 조성한 것일까. 카도와키 테이지(門脇禎二, 1925~)는 전체적으로 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형성된 후 6세기 전반기에 이르면서 쇠퇴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니이자와 천총은 백제인들이 키타큐우슈우(北九州)로부터 일본 내해(內海)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본토인 카와치 즉 지금의 오오사카 지방으로 상륙해 교두보를 탄탄하게 이루게 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당시 카와치 나루터는 그 이름이 나니와쓰(難波津)였고, 이 명칭은 백제인 왕인박사가 405년에 붙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노우에 마사오(井上正雄)는 일찍이 1922년에 "나니와쓰는 그 무렵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항구였으며, 이 항구를 본격적으로 건설한 것은 백제인들이었다"고 옛 문헌을 인용해 밝힌 바 있다. 나니와쓰로부터 동북쪽으로 인접한 곳에는 바로 백제인들의 무덤인 니이자와 천총이 자리잡고 있다.

또 나니와쓰, 즉 난파진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본국 백제에서 고대 왜나라 본토에 진입하는 데 가장 좋은 항구였다. 본국 백제에서 인력과 물자를 수월하게 지원받을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난파진 일대가 백제왕부의 새 터전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기에 오오사카 일대의 옛날 명칭은 '백제군'(百濟郡)이었다. 마치 영국 브리타니아의 가장 큰 도시였던 요크(York) 출신들이 대서양을 건너가 아메리카 땅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항구를 뉴욕이라고 이름붙였듯이, 고대 백제인들도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일본 열도에 건너가서 이룩한 새로운 식민지 항구를 난파진(나니와쓰)으로 명명하고 이 일대에 백제군이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 백제군이야말로 5세기 초 카와치 왕조(河內王朝)를 시작한 닌토쿠 천황의 본거지였다. 백제인 닌토쿠 천황은 부왕인 오우진 천황을 계승해서 왕위에 오른뒤 곧 지금의 오오사카땅인 카와치의 난파진 나루터에 왕궁(高津宮)을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파진은 카와치땅에서 닌토쿠 천황의 이른바 '카와치 왕조'의 번영의 터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노우에 마사오는 그의 저명한 고대백제 지정학사(地政學史) 격인 『오오사카부전지』(大阪府全志)에서 또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백제군에는 그 옛날 남백제촌(南百濟村)과 북백제촌(北百濟村)이 설치되어 있었다. 남백제촌에서는 응합촌(鷹合村)·사자촌(砂子村)·중야촌(中野村)이라고 하는 대단위 행정구역들이 있었다. 응합촌의 경우는 닌토쿠 천황 43년(5세기 중엽) 9월에, 아이고(阿耳古)가 잡은 매(鷹)를 백제인 주군(酒君, 사케노키미)에게 사냥에 쓸 매로 길들여 달라고 맡기면서 닌토쿠 천황이 이 터전에다 응감부(鷹甘部)라는 관청을 설치한 데서 생겨난 지명이다. 당시 닌토쿠 천황의 타카쓰궁(高津宮)은 난파진에 있었으며, 이 고장과 거리상 가까웠다. 백제의 주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 고장에서 장례를 지냈으며, 닌토쿠 천황은 그에게 '응견신'(鷹見神)이라는 제신(祭神)의 시호(諡號)까지 내렸던 것이다.

북백제촌에는 금재가촌(今在家村)을 비롯해서 신재가촌(新在家村), 금림촌(今林村) 등 큰 행정구역이 속해 있었다. 또한 천왕사촌(天王寺村, 현재의 大阪市 天王寺區)은 본래 백제군에 속한 큰 행정구역이었다. 그밖에도 석천백제촌(石川百濟村)과 백제대정(百濟大井)등의 지역이 난파진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군과 닌토쿠 천황의 교유는 일본서기에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닌토쿠 천황 43년 9월 1일 아이고가 이상한 새를 잡아다 천황에게 바치면서 "저는 항상 그물을 치고 새를 잡는데, 전에는 이런 새를 잡아본 일이 없습니다. 신기하기에 올리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천황은 주군(酒君)을 불러서 "이것이 무슨 새요?"라고 물었다. 주군이 대답하기를 "백제에는 이런 종류의 새가 많습니다. 잘 길들이면 사람을 곧잘 따릅니다. 또한 빠르게 날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새도 잡아옵니다"고 말했다. 이것은 지금의 매다. 왕은 매를 주군에게 길들이게 했다. 주군은 얼마 안 되어 매를 길들였다. 그는 가죽끈을 매의 발에 묶고 작은 방울을 꼬리에 달아 팔뚝에 얹어 천황에게 바쳤다. 이날 천황은 모즈노(百舌鳥野)에 납시어 사냥하게 되었다. 마침 암꿩이 많이 날았다. 매를 풀어서 잡으니 금세 수십 마리나 잡게 되었다. 이날 처음으로 응감부(鷹甘部)라는 부서를 설치했다.(日本書記).

닌토쿠 천황이 총애했던 주군은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백제에서 건너와서 카와치 조정에 근무했던 근신(近臣)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타계하자 천황이 애도하며 '응견신'이라는 시호까지 서슴지 않고 내렸던 것이다. 현재 카와치에는 커다란 주군의 비석이 서 있어서 그 옛날의 발자취를 입증해주고 있다.


<대 신라 외교에도 능통했던 슬기로운 스이코 천황>

길사반금은 신라에 갔다가 이듬해 4월 진평왕이 하사한 까치 두 쌍을 가지고 스이코 천황의 어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스이코 천황6년(598) 4월 사신 길사반금이 신라에서 돌아와 여왕에게 까치 두 쌍을 바쳤다. 여왕은 까치들을 난파(難派, 지금의 오사카 난바)의 사당(사당) 숲속에 풀어서 길렀다. 까치들은 나뭇가지에다 둥지를 틀더니 새끼를 쳤다. 8월 1일 신라에서는 공작도 한 쌍 보내주었다. 

백제인 스이코 천황이 신라의 진평왕에게 사신 길사반금을 친선차 보낸 것은 상호 두 국가의 화친은 물론 왜나라 불교 중흥을 위한 값진 외교 활동이었다. 진평왕에게 호우코우지가 준공된 사실을 알리면서 스이코 천황은 신라 불교의 지원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진평왕은 호감을 갖게 되어 당시 왜나라에는 없던 길조인 까치 두 쌍을 쾌히 보내준 것이다. 더구나 4개월 뒤에는 공작도 한 쌍 보내주었다. 스이코 천황이 난바(難波, 나니와)의 사당 숲에다 까치를 놓아 기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난바란 그 옛날 백제의 초기 닌토쿠 왕조가 자리했던 카와치의 항구이며, 그곳에는 백제의 왕가의 사당이 있었으므로 녹음이 짙은 숲에서 고국땅의 길조가 잘 자라기를 바랐던 것이다. 진평왕은 당시 왕위에 오른 지 19년째가 되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슬하에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덕만공주(德曼, 뒷날의 선덕여왕) 등 공주들만 있었다. 진평왕은 왜나라이 백제인 스이코 천황의 등극을 보고 덕만공주를 뒷날의 왕위 계승자로 삼고자 마음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서 왜나라 백제인 여왕의 존재는 신라 왕실과 신하들을 설득시킬 만한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스이코 천황이 진평왕에게 보낸 사신 길사반금은 백제인이 아닌 신라인 조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당시 나라땅의 신라인 호족 길사씨 가문의 후손이다. 그 무렵 스이코 천황의 조정에는 길사반금뿐 아니라 총애하던 또 한 사람의 신라인 조신 진하승(秦河勝, 하타노 카와카쓰, 6세기말~7세기경)이 있었다. 진하승은 그때 재무장관직을 맏았던 고관이며, 또한 야마사로(쿄우토) 땅 신라인 호족 진씨 가문의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스이코 천황의 조정에는 백제인 고관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신라인 고관들도 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조정의 고관으로서 선주민(先住民)인 왜인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왜인들은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들이며, 처음부터 한국인 정복왕(신라인 왕이나 백제인 왕)의 지배 아래 노예나 천민 등 하층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저명한 역사학자 세키 아키라의 저술(『歸化人』, 至文堂, 1968)에서도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문자를 다루는 일은 장기간에 걸쳐 귀화인(왜나라에 건너간 한국인) 씨족들이 도맡아서 전문적으로 처리해오고 있었다. 6세기 중엽이 되면 일본인(선주민)들 중에서도 조금씩이나마 문자를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생겼을 법한데도, 정치 관계 문서 등의 기록을 작성하거나 재물의 출납, 조세의 징수 또는 외교 문서의 취급과 같은 실무에 있어서는 역시 귀화계의 사람들, 즉 후히토(史, 한국인 고등 행정관리)들만의 독무대였다.'

이와 같이 한국인 정복왕조에서는 한국인 고관들이 선주민 왜인들을 지배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아스카 스이코 천황 시대에 특히 역량이 컸던 인물은 야마시로(山城, 지금의 京都 지역)의 호족 지배자며 부호였던 신라인 진하승이다. 재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재무장관을 지냈을 뿐 아니라 특히 섭정이던 성덕태자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스이코 천황이 진하승을 신라 진평왕에게 특사로 보낼 수도 있었으나 길사반금을 사신으로 보낸 것은 그동안 길사 가문이 대 한반도 외교에 솜씨를 발휘해 왔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을 보면 길사 가문에서는 외교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신라인 길사반금을 사신으로 보낸 것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두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무령왕과 케이타이 천황 형제 입증하는 '인물화상경'>

무령왕과 케이타이 천황이 친형제임은 고대 금석문이 그 내용을 입증한다. 무령왕이 503년에 아우인 케이타이 천황을 위해 왜나라로 보낸 청동거울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이 그 증거물이다. 이 청동거울이 '인물화상경'이라 불리는 것은 왕이며 왕족 등 말을 타고 있는 9명의 인물이 거울에 양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백제의 기마문화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무령왕이 아우에게 보내려고 만든 '인물화상경'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토우쿄우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 '인물화상경'을 처음에는 '스다하치만신사화상경'(隅田八幡神社畵像鏡)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한동안 우에노의 토우쿄우 국립박물관에 전시했지만 요즘에는 전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 박물관 어디엔가 보관해 놓은 것 같다.

이 '인물화상경'은 지름 19.8cm인 둥근 청동제 거울인데, 바깥 둘레를 따라 빙 돌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癸末年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柴紗加宮時, 斯麻, 念長壽, 遺開中費直穢人令州利二人等, 取白上銅二百早, 作此竟

이상과 같은 한자어 명문은 현대의 일본 역사학계가 판독하고 있는 글자들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503년 8월 10일 대왕(백제 무령왕)시대, 남동생인 왕(케이타이 천황. 오호도)이 오시사키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의 아들)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 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파견하는데,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이 명문은 무령왕이 친동생 케이타이 천황이 왜나라 땅에서 건강하게 오래도록 잘 살라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누가 읽거나 친형제간의 뜨거운 우애가 물씬 느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일본학자중에는 이 명문에 대해 엉뚱한 주장들을 펼치면서 본말을 전도하는 이들이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명문에 나타난 계미년(계미년)이 서기 몇 년을 가리키느냐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계미년을 443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63년 설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263년 설을 주장한 사람은 타카하시 켄지(高橋健自, 1871~1929)다. 그는 이 청동제 거울을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橋本市)에 있는 스다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라는 사당에서 찾아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 거울을 찾아낸 후 1914년에 논문을 발표하여 일본 사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263년 설은 오늘날 일본 학계에서는 근거 없는 것으로 묵살당하고 있다.

타가하시 켄지가 '263년의 계미년'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와다 아쓰무는 그것이 엉뚱한 주장이라며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타카하시설을 보면, 명문에 보이는 사마(斯麻)를 일본서기의 진구우기(神功紀)에 등장하는 사마숙니(斯麻宿녜 시마노스쿠네)와 연결짓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계미년에 관한 고증에는 무리가 있다.

사마숙니의 실존 여부를 떠나서 일본서기에 조신(朝臣)으로 묘사된 일개 신하가 주술적인 청동거울을 만들어 감히 왕에게 하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서기의 진구우기는 '가공의 조작된 기사'라는 게 공론화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사마숙니는 인물화상경의 '사마'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타카하시 켄지는 1911년에 왜국 왕가의 '3종(三種)의 신기(神器)', 즉 거울과 검(劍)과 옥(玉)에 관한 연구서 『鏡と劍と玉』를 써서 일본 사학계에 두각을 나타낸 고고학자다. 그런 그가 사마(斯麻)라는 휘를 가진 무령왕을 염두에 두지 않고 등장 인물조차 시대적으로 전혀 걸맞지 않은 사마숙니라는 일개 조신 쪽으로 논조를 몰고간 까닭이 석연치 않다. 그와 같은 터무니 없는 연대와 인물의 계기는 어쩌면 그가 의도적으로 무령왕을 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을 합병(1910년 8월 23일)한 직후였던 긴박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타카하시는 당시 토우쿄우 제실(帝室)박물관의 감사관이며 역사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한국 침략에 앞장선 서슬 퍼런 일제 고관들의 비위를 건드릴 만큼 어리석은 짓을 자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한반도를 무력으로 침략하는 비상시국에 하물며 고대 백제왕이 왜나라의 후왕(候王)의 친동생 케이타이 천황에게 장수를 기원하는 주술적 거울을 만들어 보낸 것을 스다하치 만궁에서 예부터 모셔왔다고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