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王들의 고민 | ||||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과 신라의 박혁거세, 김알지, 가야의 김수로처럼 알(卵)이나 상자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神話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神話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天孫神話는 기마민족들인 몽골 알타이 스키타이族들의 신화이고 卵生신화는 농경민족들인 대만의 빠이완族, 인도네시아의 자바族, 태국의 타이族, 인도의 문다族의 난생신화와 공통점이 있다. 이런 현상을 지도로 보면 천손신화는 한국보다 북쪽에 살던 기마민족들의 사유세계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열대와 아열대에 사는 사람들의 사유세계이다. 신라의 첫 번째 王인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날아온 말(馬)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날아다니는 말은 그리스 신화의 페가수스이다. 그런 신화의 내용이 스키타이를 거쳐 알타이 민족들에게까지 전달되어 신라王의 탄생에 접목되어 있으니 고대사의 전개과정은 참으로 복잡하다. 신라 金氏系 조상인 金閼智는 계림(木)에 달려 있는 상자 속에서 나오는 알(卵)에서 탄생하였다고 신화가 꾸며져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말은 기마민족의 상징이고 나무는 기마민족의 지도자인 칸(Khan)의 탄생과 관련 있는 토템(Totem)이다. 말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생명의 씨앗이 높은 나무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내용이 天孫降臨神話(천손강림신화)의 구조이다. 그런 기마민족의 신화에 웬 알이 등장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캐내어야 한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형식은 적석묘(Cairn 또는 Kurgan)로서 기마민족의 전통이다. 통나무집에다 주인공과 부장품을 집어넣고 그 위를 막돌로 덮는 모양이다. 그 풍속을 스키토-알타이式(Schytho-Altaic)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되고 그 주인공들은 모두 金氏系 인물인 내물(402년 死), 눌지, 자비, 소지, 지증 마립간(513년 死) 때에 해당되므로 핵심 기간은 400~500년 사이이다. 월간조선 2004년 1월호에서 말하였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어서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게다가 김알지 후손들의 무덤인 경주 신라 왕족들의 무덤들은 분명히 북방 기마민족들의 매장 전통을 보여주고 있는데 선조인 김알지는 남방 농경민족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으로 분장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천손신화계 인물인 부여의 고주몽이 실제로 태어날 때는 알에서 나온 인물로 분장되어 있는 것과 같다.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和合·타협 왜 그럴까? 기마민족이면 떳떳하게 기마민족式 신화인 하느님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天孫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처럼 꾸며져 있을까. 여기에 초창기 신라의 통치계층 인구들의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경주지방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는 수많은 고인돌이 증명하고 있다. 그 후에 소수의 기마민족이 移民(이민)해 왔다. 삼국지 위지 東夷傳에 기록되어 있는 辰韓(진한)族이다. BC 3세기 중국 서북쪽의 秦(진)나라에서 勞役(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민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민집단의 인구는 先주민들인 농경인구에 비하여 소수였다. 다수의 토착 농경인들 위에 통치자로 군림하기에는 인구가 턱없이 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여러 代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드디어 미추왕(麻立干) 때 처음으로 金氏系 인물이 최고통치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소수의 金氏系 인구가 다수의 농경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金氏系 조상인 김알지도 토착농경인들처럼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분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주인공이 북방계 토템인 신령스러운 나무, 즉 계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자기네들의 전통을 일단 유지한 채 알(卵)에서 태어난다는 난생신화의 요소를 가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기마민족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 땅의 先주민이고 탄탄한 농경기반과 많은 인구를 갖고 있던 농경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기마민족들의 딱한 입장이 보인다. 지도자는 민중에 영합해야 현대에 와서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개신교 교회의 장로인 후보자가 불교사찰에 가서 부처님 點眼式에도 참석하고 평소에는 자주 다니지 않던 시장에 가서 아주머니들의 손을 붙잡는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치권으로 부상하려는 사람들이 좀더 많은 대중에게 영합하려는 노력은 실로 눈물겹다. 그들의 변신술에는 시공을 뛰어넘어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필리핀의 대통령이었던 마르코스는 청년 시절부터 정치지망생이었다. 그래서 미스 마닐라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미인 이멜다와 결혼하였다. 부인의 대중적 인기를 자신의 인기에 덮어 씌워 상승효과를 노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과연 마르코스는 대통령이 되었다. 마르코스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그가 살던 궁전이 박물관으로 변하였을 때 필자가 구경가 보니 거기에 이멜다 여사의 탄생신화가 벽화로 그려 있었다. 이멜다 여사는 세상이 다 아는 스페인系 혼혈이다. 필리핀의 토착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제국주의 시절에 들어온 스페인 인구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토착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혈통인데도 불구하고 바다 속 진주조개에서 태어나 인어처럼 헤엄쳐 인간의 세계로 떠오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난생신화의 내용인 조개 속의 알(卵-진주)이 안에서 밖으로 나온다는 內(내)→外(외)의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는 마르코스 부부가 필리핀 원주민 사회에서 지도자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원주민의 생각인 「지도자는 난생신화의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믿음에 부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 벽화는 퍼스트 레이디의 출생을 민중의 구미에 맞게 粉飾(분식)해야만 했던 정치 지도자의 절박한 입장을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장면이었다. 신라 金氏系의 첫 번째 왕이 된 미추왕(味鄒尼師今)의 고민도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해석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조상 神話가 다른 두 사회의 만남 고대국가 이전의 한반도에는 先주민들이 있었다. 우선 신석기 유적을 수백 개 이상 남겨 놓은 사람들이 생활용기인 빗살무늬 토기를 무수하게 만들어 쓴 흔적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지만 그들의 생활근거는 주로 강변과 바닷가에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경제 방식은 사냥과 어로, 초기 형태의 농사를 하여 조·기장·수수 등 주로 한랭지대 곡물을 먹고 살았다는 것이 희미하게 알려져 있다. 그 시절에 自生하던 볍씨들이 경기도 김포와 충북 오창에서 가끔 발견되지만 어디까지나 자연식물이었고 인간이 적극적으로 경작하던 벼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이 먹고 버린 조개 껍질이 쌓여 패총을 이룬 것이 사천의 烟臺島(연대도), 부산의 동삼동, 안면도의 고남리, 시흥의 오이도에서 발견되었다. 그들의 문화를 이어받은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에 처음으로 벼농사 기술이 전달되었다. 경기도 흔암리를 시작으로 발견되기 시작한 볍씨의 흔적들은 모두 청동기시대에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의 집터에서 발견되고 그 시대는 대략 기원전 1000년경부터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이 때부터 한반도에 고인돌에다 사람을 매장하는 葬儀風俗이 생겨난다. 인도인은 아리아人 유학시절부터 나는 인도의 고인돌문화는 유럽-흑해-인도로 이어지는 선사시대 문화 벨트에 속하고 결국 고대 인도인 구성에 서양인인 아리아 인종의 이민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이론에 나는 큰 계시를 받았다. 인간 집단은 정치 사회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 때 사유세계와 풍속이 함께 이동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고인돌은 한국에도 무수하게 많은데 인도와 한국은 거리가 멀다고 관계가 없었을까. 「한국의 고인돌 문화는 유럽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1960년대까지 우리는 이렇게 배웠다. 매우 민족적 주체사상이 강한 생각이다. 유럽과 한반도는 지구의 반대쪽에 있으니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아니면 그렇게 주장해야 애국적인 연구자이고 민족정신이 투철한 교수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인도와 한반도 사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群島(군도) 어느 곳에서라도 고인돌이 발견된다면 인도와 한국 사이에 문화적 징검다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해가 걸리더라도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을 하나씩 탐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여기에는 걸림돌이 있었다. 우선 한국인들의 정서가 문제였다. 한국인의 형성과정에서 대륙계 북방인들과의 관계를 규명하면 그런 대로 수긍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남쪽의 여러 섬들과의 관계가 보이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정서가 우리에게 있었다. 아마도 중국 문화를 숭상하는 오랜 전통이 있어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쪽은 모두 야만이라는 南蠻思想(남만사상)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를 뒤지다 한반도 남쪽 부분에 살고 있던 선사시대 주민들은 南아시아의 주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을 가능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무슨 방법으로 정보를 교환하였을까. 혹은 지역 간에 인구의 이동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 문제는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나는 연구실에 앉아서 책만 읽으며 연구하는 소위 책상考古學(Desk Archaeologoy)을 과감하게 버렸다. 의문이 있는 땅을 직접 답사하면서 문제를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나의 인도네시아의 답사는 1979년부터 시작되었다. 연구비가 없으니까 조사단을 구성할 수는 없었고 나 혼자 1인 탐사를 계획하였다. 겨울 방학 때마다 섬 하나씩 조사하기로 작정하고 자바 섬부터 시작하였다. 인도네시아 考古局에 찾아가서 협조를 구하였더니 1920년대에 네덜란드 학자가 수마트라에서 발견한 고인돌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하이네 겔던이란 학자가 南아시아 고고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아시아에서 처음 구석기를 발견한 사람도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콰이강에 다리를 놓는 공사에 투입되었던 네덜란드 젊은이였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튼 현지에서 본 빛 바랜 고인돌의 사진들은 나를 기쁘게 하였다. 아마추어도 충분히 구별할 수 있는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이었다. 이 사진으로 나는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섬들에서 새로운 고인돌을 찾아 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나는 동서로 길다란 섬인 자바의 동쪽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세계 여러 나라 각종 형태의 고인돌 사진을 본 고고국장인 우카氏는 나에게 창광이란 마을을 권해 주었다. 그곳의 작은 박물관에서 붉은색 간토기(紅陶)와 청동제 팔찌가 발견된 지역을 안내 받았다. 그 곳에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이 여러 개 있었다. 도로 공사 중에 몇 개의 유물이 나와서 철책을 치고 사람들이 더 이상 파괴하지 않도록 조치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을 그 사람들은 고인돌인 줄 모르고 있었다. 받침돌이 아주 짧거나 아예 땅 속에 파묻혀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가지고 다니던 트라울(발굴용 꽃삽)로 바닥을 긁어 보니 가랑잎에 가려 있던 고인돌의 하부구조가 정연하게 나타났다. 고인돌의 초승달 이런 형식의 고인돌은 일견 자연석같이 보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고인돌인 줄 모르고 파괴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고인돌인 줄 모르기 때문에 도굴되지 않아서 유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창광 마을의 碁盤型 고인돌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자바 섬에는 탁자형 고인돌도 무수히 많았다. 모두 뚜껑 돌이 도굴꾼들 손에 파괴되어 땅에 나뒹굴고 있고, 하부구조인 받침돌들이 평면 직사각형의 石室로 남아 있었다. 현지인들은 이 石室을 돼지우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옛날 사람들이 돼지를 여기다 가두고 길렀을 것이라고 생각해 붙인 이름이다. 이런 구조의 고인돌은 말레이시아 정글 속에도 수없이 많은 것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다음 해에 발리 섬을 조사하다가 발리 동쪽의 섬인 숨바 섬에서는 현대에도 추장이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고인돌을 만드는 풍습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등 수확이 많았다. 고인돌에 관한 한 고대와 현대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인도네시아였다. 고인돌을 만드는 풍속은 현대인들에게 전달되어 있고, 씨족의 聖所(성소)를 만들고 아주 작은 형태의 고인돌을 세워 놓는 민속이 발리 섬의 텡아난 마을에서 확인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고인돌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 나는 힘이 솟았다. 이제부터 인도네시아와 한국 사이에 있는 필리핀, 대만, 오키나와 등지에서 고인돌을 발견하게만 된다면 인도와 한국은 고인돌 분포지도로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南아시아와 한반도는 바다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배나 뗏목을 타고 사람들이 옛날부터 이동했을 가능성을 타진하기로 하였다. 대만의 고인돌은 凌順聲(능순성) 교수가 보고한 적이 있고 나도 현지를 답사한 적이 있지만 한국의 고인돌처럼 완전한 탁자형이 아니었다. 완전한 것이 발견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필리핀과 오키나와를 답사해 볼 필요가 생겼다. 다음 해에 필리핀에 가서 국립박물관 사람들과 협의하여 고인돌을 찾아보려 하였지만 아쉽게도 필리핀 학자들 중에 고인돌이 그 나라에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옹기 그릇으로 만든 쌀독이 하르방 모양으로 두 손을 가슴과 배에 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어 촬영한 것이 그해 여행의 유일한 수확이었다. 겨울 방학 때마다 동남아의 여러 지역을 답사하여 드디어 아시아 고인돌의 분포지도가 완성되었다. 초승달 모양의 지도였다. 위 끝이 한반도에 걸리고 아래 끝이 인도 남부에 걸려 있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지도를 「고인돌의 초승달」(Dolmen Crescent)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또 한 가지 이 분포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 공통점은 이들 모두 난생신화를 믿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벼농사(경제방식)-고인돌(풍속)-난생신화(사유세계)가 일체가 되는 문화현상이다. 벼농사 민족의 고인돌 고인돌은 여러 개의 돌로 받침을 만들고 커다란 뚜껑 돌을 덮는 무덤구조로서 생긴 모양이 책상처럼 높은 것(북방식)과 바둑판처럼 낮은 것(남방식)이 있다. 고인돌의 발견지는 西유럽으로부터 지중해, 흑해로 이어지는 文化帶가 있고 인도에서 인도네시아, 오키나와, 한반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화대가 있다. 東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의 넓은 내륙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중국의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지방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문화적 특징이 있다. 東아시아에서는 한반도가 고인돌의 중심지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가까운 규슈 지방에서 발견되고 중국에서는 황해 연안에서만 발견된다. 고인돌의 발견지와 농업과의 관계로 보면 東아시아에서 고인돌 분포의 북방한계는 벼농사가 가능한 지역의 북방한계와 일치하는 현상이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한반도에 벼농사가 시작되는 청동기 시대가 열리고 나서 고인돌을 만드는 풍속이 생겨났다.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제일 쉬운 곳이 영산강 유역이다. 기후가 온난 다습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역이 우리나라 고인돌의 대부분이 발견된 지역이다. 생전에 벼농사 기술자들이 死後에 고인돌에 묻힌 것이다. 벼라는 곡물은 원래 열대 작물이다. 기원지에 대하여는 인도설, 태국설, 중국설이 있지만 해당 국가 간에 자존심 싸움에 휘말리기는 싫다. 분명한 것은 적도지대에서는 1년에 4회를 추수할 수 있고 대만도 年 3모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겨우 年 1회의 수확만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지구 전체로 보면 한반도의 날씨는 벼농사의 적격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한반도의 고대 주민들이 굳이 벼농사를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벼의 수확량이 다른 곡물에 비해 월등하게 많아서였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벼는 남한 지역에서 자란다. 그 이유는 남한 지역이 북한 지역보다 따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인공적으로 볍씨를 발아시켜 移秧(이앙)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봄에 날씨가 쌀쌀하면 농부들은 벼의 모를 키우지 못하여 애태우곤 하였다. 그만큼 벼는 날씨에 민감하다. 남방에 대한 거부감 한국인의 숙명적인 고민이었던 보릿고개를 없애 버린 일등공신인 통일벼의 후속으로 신품종인 「노풍」을 개발한 적이 있었다. 통일벼보다 맛도 좋고 수확도 많은 것으로 실험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정부는 농가를 독려하여 노풍을 많이 심었다. 바로 그해인 1978년에 냉해현상이 있어서 노풍이 자라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해의 날씨는 평균온도보다 섭씨 0.3도 낮았다고 한다. 벼는 이렇게 날씨에 민감한 식물이다. 그렇게 기르기 어려운 벼를 우리 조상들은 굳세게 길러 왔다. 어쩌면 쌀이 갖고 있는 습관성 식욕이랄까. 아니면 우리 민족이 모두 쌀 중독증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내용의 연구를 진행하던 중인 1981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한양대학이 공동 주최하여 서울에서 아시아 고인돌 연구 세미나가 있었다. 인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일본에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국에서 나름대로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고 자료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그 내용을 편집하여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Megalithic Cultures in Asia 1982). 아시아의 고고학자들도 그 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던 고인돌에 대하여 서서히 눈을 떠가고 있었다. 이 때 내가 발표한 고인돌 초승달 가설이 신문에 보도되자 金元龍 교수님이 전화를 하였다. 『고인돌 남방 유래설은 매우 용기 있는 주장이지만 한국의 기존 학계에서는 한국과 남쪽 문화의 관련에 대하여 정서적으로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니 좀더 완곡하게 표현하게』 老교수의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역력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그 옛날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설을 발표하여 일본의 만세일계의 황국신민 정서를 주장하던 극우파들을 잠재워 버리지 않았던가. 고고학은 과학이지 정서 따위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내게 있었다. 중국 학계에도 이상스러운 정서가 있다. 이 세상 모든 발명은 모두 중국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나라이다. 소위 중화사상이다. 그래서 중국의 고고학은 아직도 신비스러운 고대문화를 발견해 내는 데 주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중국 고대 문화에 서양의 기술인 그리스式 전차가 秦始皇帝(진시황제)의 전국통일에 사용되었다든지, 로마에서 개발된 벽돌건축 기술이 漢(한)나라 때 고분축조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중국인의 목소리로 세상에 알려진 게 아니다. 일본의 어느 고고학자는 세계 최고의 구석기 유물들을 여러 번 발견했다고 해서 일본의 매스컴들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지만 최근 모두 가짜였다는 게 밝혀졌다. 중국과 일본에서 이런 현상이 생겨나는 이유는 모두 지나친 나라 사랑이랄까 아니면 삐뚤어진 우월의식에 편승하여 인기를 얻어 보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름통 수백 개를 바다에…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대륙문화 짝사랑 현상이 있다. 그러나 고대 한국문화 요소들 중에 확실하게 보이는 非대륙계, 非중국적인 문화인자들인 고인돌 그리고 난생신화가 南아시아에서 발견되는 현상을 우리는 영영 장롱 속에 감춰두고 말 것인가. 향싼 종이에서 향내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 비린내 난다는 말이 떠오른다. 해류의 방향은 문화 전파의 방향을 암묵적으로 설명한다. 赤道지대에서 표류하여 해류를 타고 제주도까지 온다면 며칠이나 걸릴까. 나는 이런 엉뚱한 질문을 스스로 해 놓고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동물의 이동을 연구하기 위해서 새의 발목에 고리를 다는 방법을 쓴다. 고리에는 새의 고향, 고리를 단 날짜 등을 기록한다. 그 새가 멀리 이동하여 다른 지역의 연구자에 발견되면 그 새의 이동 경로가 밝혀진다. 최근에는 바다 속의 생물에도 음파 발신 장치를 달아 그 생물의 이동 범위를 연구하기도 한다. 이렇게 고급의 방법을 써보기에는 나는 너무 약했다. 나 같은 無名의 고고학 초년생에게 누가 그렇게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프로젝트를 인정해 주지도 않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연구비 신청을 아예 포기하였다. 대신 나 혼자만의 연구 방법을 고안해 내야만 하였다. 비용이 얼마 안 들고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름대로 지도를 보면서 생각에 잠기다가 사람 대신 해류 조사카드를 띄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즉 적도 지대에다 조사카드를 뿌려두면 해류를 타고 이리 저리 흘러가다가 혹시 단 한 개라도 한반도 근해에서 발견되는 행운이 있을 지도 모르고, 반대로 한반도 근해에서 뿌린 조사카드가 일본이나 알래스카 근해에서 발견된다면 더욱 흥미 있는 연구과제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행동으로 들어갔다 조수였던 추연식(現 고려大 교수)군과 상의하여 조사카드에 쓸 내용을 적어 보았다. 조사목적, 조사자, 발견자의 이름, 발견지, 카드를 보내 줄 주소 등을 썼다. 이 카드가 어느 누구의 손에 발견될지 모르니까 여러 나라 말로 써야 했다. 똑 같은 내용을 한국어와 영어로 써서 작은 종이에 인쇄하였다. 조그만 필름통을 수백 개 구하여 그 속에 카드를 넣고 물이 새지 않도록 밀봉하였다. 제주도로 내려가 배를 빌렸다. 그날 따라 안개가 심하여 視界(시계)가 매우 나빴는데도 선장은 나침반만 보며 우리를 마라도에 도착시켰다. 우리는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조사카드의 절반을 뿌렸다. 제발 이것들 중에 하나라도 멀리 태평양으로 나가서 누구에게 발견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뿌렸다. 해류는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나머지 절반은 인도네시아로 가지고 갔다. 마침 한국해양대학의 실습선이 때맞춰 자바 섬에 들른다는 정보가 있었다. 해양대학 실습선의 선장을 만나 조사의 목적을 설명하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사이에다 네 번에 나누어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서 나는 두 개의 회신을 받았다. 하나는 마라도에서 뿌린 것으로 일본 소속 어선이 오키나와 해안에서 건진 것이고, 또 하나는 자바 섬 북쪽 해안에서 뿌린 것으로 태국만 쪽으로 역류한 것을 미국인 관광객이 발견하고 보내 준 것이었다. 태국에 표착한 카드는 동남아 여러 나라의 민족들이 얼마든지 해류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자료로 충분하였고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카드는 제주에서 표류하면 오키나와에 도착할 수 있는 증거로 충분하였다. 부산 앞바다에서 해류를 타고 떠나면 일본 혼슈의 북쪽 해안에 도달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듣고 있었지만 마라도에서 떠난 카드가 오키나와 근해로 흘러간 것은 다소 의외였다. 정작 적도에서 떠난 조사카드가 제주도 부근에 도착한 것은 없었다. 도착한 것이 아주 없었는지 발견한 사람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나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때까지 나는 해류 전문가를 만나지도 않고 시골 서당의 훈장처럼 골방에 앉아서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연구한답시고 끙끙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은인을 만나는 법이다 그가 탐험가인 윤명철 박사이다. 그는 뗏목을 타고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다가 난파당한 경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시도하여 부산에서 규슈까지 무동력 항해를 성공시킨 용기 있는 지식인이다. 결국 윤박사는 중국 절강성에서 뗏목으로 출항하여 목포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는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해류의 방향도 중요하지만 해수 표면에 부는 바람의 방향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거기에 더하여 東아시아에서 계절에 따라 흐르는 해류들의 방향이 자세하게 그려진 지도까지 주었다.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무턱대고 해류 조사카드만 많이 뿌려두면 되는 줄 알았던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정확한 자연과학의 지식도 없이 의욕만 앞서서 문화관계를 연구한답시고 조사카드가 우편으로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순진한 짓인가? 우선 조사카드의 표류하는 방향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일치한다고 해도 그 확률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설사 누가 그것을 발견하였다고 해서 꼭 보내 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당시 대부분 가난했던 아시아의 경제수준으로 비싼 국제우편료를 내면서 이름 모를 한국의 한 연구자에게 연락해 줄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도 생각해 보았어야 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입만 벌리고 기다린 사람 꼴이 되고 만 셈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 정도가 내 지식의 한계였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때 바다에서 난파당한 사람이 해류에 떠밀려간 이야기에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흘러갔다는 표현이 있다. 조선 성종 때 사람인 崔溥(최부)가 쓴 「漂海錄(표해록)」이란 책이 있다. 관리의 신분으로 제주도에 출장 중 부친상을 당하여 급거 귀가하게 되었다. 바다를 건너오다가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어 천신만고 끝에 육지에 닿아 보니 조선 땅이 아니고 중국 절강성의 寧波(영파)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 선린관계에 있어서 崔溥는 우여곡절 끝에 육로로 조선까지 귀환했다는 내용이다. 이 사람이 난파당한 위치는 분명 제주도와 육지 사이였을 터인데 표착한 지점은 영파였다는 게 무척 흥미 있었다. 영파는 목포 부근 신안에서 발견된 중국 원나라 때 무역선이 떠난 항구이고 윤명철 박사가 뗏목을 타고 목포를 향해 떠난 항구이다. 즉 절강성과 한국 사이에는 해류와 바람으로 쉽게 오가는 바닷길이 뚫려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조선시대 文淳得(문순득)이라는 사람이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필리핀의 루손 섬에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다가 나의 해류 조사카드는 제주도 남쪽의 마라도에서 오키나와까지 가지 않았나? 제주도, 오키나와, 南중국, 필리핀이 해류나 바람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1991년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인도에서 일본까지의 해양문화를 조사하던 중 일본의 고인돌을 직접 답사할 기회가 생겼다. 그 때까지 일본의 고인돌은 규슈에만 있다고 보고되어 있었다. 우선 나가사키(長崎)와 구마모토(熊本) 지역의 고인돌 유적과 관련된 유물을 두루 살펴보고 나는 오키나와로 날아갔다. 제주도에서 떠난 조사카드가 오키나와에 도착할 수 있다면 제주도에 수많은 고인돌이 수백 년간 만들어지던 중에도 제주도 사람들 중 오키나와에 표류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 아닌가. 게다가 오키나와에는 고구려 사람의 후예들도 살고 있는 곳 아닌가? 黑潮를 타고 자연 移民 오키나와에서 며칠간 나하(那霞)를 중심으로 하여 고인돌이나 하르방 비슷한 유적을 찾는 작업을 하였다. 어느 날 오키나와 대학의 교수들을 만나 인류학적인 탐문을 하던 중에 새로운 뉴스가 들렸다. 여러 섬들 중에 미야코(宮古) 섬에 가보라며 그곳에 고인돌이 있다는 정보가 있다는 것이었다. 현지의 기념물 관리소에서 낸 책에 고인돌 같은 존재에 대하여 서술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지도를 보니 미야코 섬은 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외딴 섬이었다. 다음날 시골 비행기를 타고 미야코에 도착한즉 관리인이 나를 현장으로 안내하였다. 제주도의 火山石과 비슷한 돌로 만든 고인돌이 있었다. 나이가 백년이 넘는 고목에 기대어 탁자모양의 고인돌이 서 있었다. 큼직한 중형의 고인돌이었는데 발리 섬이나 숨바 섬에서 엊그제까지도 만들던 고인돌의 모습과 같았다. 아시아의 고인돌은 서서히 신비스러운 비밀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고 있었다. 아무리 감추고 있어도 결국 속에 숨어 있던 진실은 알려지고 마는 것 아닌가? 해류도를 자세히 보면 필리핀을 떠난 黑潮라는 해류는 빠른 속도로 제주도 쪽으로 올라온다. 이 해류의 방향이 일년에 몇 번씩 한반도에 몰아치는 태풍의 이동방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제주도에서 거꾸로 필리핀 쪽으로 가기는 힘들 것 같다. 아마도 文淳得은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일단 흘러갔다가 필리핀에 표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은 규슈의 나가사키를 떠나 필리핀 근해에서 난파하여 제주도로 떠밀려 온 사람이다(1653). 黑潮에 떠밀려 온 것임에 틀림없다. 어찌되었든 필리핀과 제주도는 바닷길을 통하여 上行과 下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류의 방향은 플랑크톤의 이동방향이다. 플랑크톤의 이동은 동물의 먹이사슬의 이동방향이고 그 먹이사슬의 제일 뒤에는 인류가 있다. 이쯤 생각하니 한반도에 南아시아 사람들이 해류를 타고 저절로 도착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 黑潮라는 해류는 어제오늘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지구의 自轉현상으로 생겨나는 적도 해류가 南美를 떠나 인도네시아까지 도달하는 결과로 발생한 傍系海流이다. 그러니 지구에서 마지막 빙하가 끝난 때인 1만3000년 전부터 이 해류는 지금의 속도로 흘렀을 터인데 이 해류의 방향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南아시아인들이 한반도 쪽으로 자연이민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짐작된다. 발리 섬의 돌하르방 신앙 발리 섬을 떠난 비행기가 홍콩에 기착하였을 때 어느 신문사 기자가 옆 좌석에 앉게 되었다. 그가 마침 대학 때 친구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발리 섬 돌하르방 이야기 나왔다. 발리 섬은 힌두교 사원이 매우 많은 곳이다. 그래서 서양의 어느 인류학자는 발리 섬을 神들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그중 파누리산이라는 이름의 힌두교 사원에서 나는 매우 우연하게도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돌하르방이 30개나 보관되어 있는 것과 마주쳤다. 왕방울 같은 눈에 두 손을 가슴에 대고 서있는 석상들은 제주도 돌하르방의 아이들처럼 작고 귀여웠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남녀노소가 모두 있고, 의관을 갖춘 것과 맨머리로 구별되었다. 아마도 하르방 세계에서의 사회적 위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였다. 현지 考古局의 수타바氏에게 문의하였더니 그 석상들은 힌두교의 유품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석상의 의미는 모르지만 非힌두교적인 민속품들로 바닷가 마을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반갑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하였다. 돌하르방이라면 제주도 아닌가. 제주민속 연구자들에 의하면 하르방은 13세기 몽골이 고려에 침입하였을 때 따라온 몽골 풍속이라는 게 상식처럼 되어 있는데 뚱딴지처럼 발리 섬까지 흘러 들어와서 나를 놀라게 하나. 나는 그에게 제주도의 돌하르방 사진들을 보내 주고 계속 연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1991년 다시 발리 섬에 조사하러 가서 수타바氏를 만났더니 그는 그 동안 하르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내게 고마워하였다. 그러면서 새로 수집한 100여 개의 하르방 사진들과 발리 섬 내의 분포도를 보여 주었다. 학자는 「관념 학살」을 경계해야 1980년에 하르방이 발리 섬에서 여러 개 발견되었다는 신문보도는 일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관광제주」라는 책에다 하르방을 南아시아 문화에다 관련시켜 해석하려는 의견에 못마땅한 글을 싣기도 하였고, 몽골의 元史(원사)를 전공하는 어느 교수도 부정적인 의견을 기고하였다. 그분들의 의견도 일리는 있으나 모두 몽골이나 발리 섬을 답사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의 정서적 반대를 하였다. 이런 현상을 관념 암살(Idea Assassination)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학원에서는 꼭 學史(학사)를 가르치면서 미래에 학자가 될 젊은이들에게 15세기 가톨릭 신부였던 코페르니쿠스가 당대에 전지 전능한 교회의 반대를 우려하면서도 地動說(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공헌인가를 인식시킨다. 제주도 관광의 대표 브랜드로 되어 있는 돌하르방은 선사시대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이 17세기 때 사람인 金夢奎가 남긴 「耽羅紀年」이라는 책에 翁仲石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사실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몽골에 하르방이 존재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한국의 학자들이 몽골에서 하르방을 찾으려고 여러 해 노력하였지만 우리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흔히 제주도하면 조랑말을 떠올리고 그 말들이 혹시 다리가 짧은 몽골 말과 혈통적으로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사라졌다. 제주도의 재래 말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제주도 말들의 혈청의 특징인 혈액 蛋白多型(단백다형)이 의외로 태국 말(學名으로는 광동마)과 같다는 연구가 있어서 더더욱 제주 말과 몽골 말의 관계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역시 제주도의 하르방 문화는 해류와 관계지어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확대해석하면 폴리네시아 群島인 이스터 섬 주변의 여러 섬에서 발견되는 대형 석상문화와 발리 섬의 석상들도 해류로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현 단계에서는 여기서 생각을 접는다. 유능한 기자는 뉴스의 사냥꾼이다. 나의 발리 섬 이야기를 듣던 기자는 귀국하자 곧바로 신문에 보도하였고, 이 보도는 다음날 영자신문인 코리아 헤럴드에 번역되어 실렸다. 그후 한 달쯤 지나서 어느 미국인이 편지를 보내왔다. 「저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학생입니다. 고대 인도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에 관한 학위논문을 제출하였었습니다만 불행하게 자료 불충분으로 불합격 처리되었습니다. 코리아 헤럴드를 읽고 보니 선생님이 고대 한국과 南아시아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하고 계신 듯한데 혹시 고고학적으로 인도와 한국의 관계를 증명할 자료가 있으시면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동병상련이랄까. 나도 그 몇 년 전에 영국에서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제출하면서 자료 부족으로 속을 태운 적이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 중에는 기존학설이나 통념을 깨는 경우가 자주 있다. 유럽 고고학 연구에서 불후의 명작인 「유럽문명의 여명」의 저자인 차일드(G. Childe)가 옥스포드 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논문인 「인도 유럽인 이민 (Indo-European Migration)」은 심사위원회에서 부결되었다. 그 내용은 현재의 인도인들이 기원전 17세기경 철기문화가 근동에서 발생하자 주변 사회들이 동요하여 유럽에 살던 아리안族이 인도로 이민을 가서 인도인과 인도 언어가 형성되었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 내용이었다. 그 때까지 아무도 그런 연구를 한 적이 없었을 때였다. 더군다나 영국인에게 인도는 식민지였다. 영국인은 우월한 민족이고 인도인은 열등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리안族은 유럽인을 대표하는 종족 중 하나이고 영국인을 형성한 앵글로 색슨族도 아리안族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영국인과 인도인은 조상이 서로 피를 나눈 사이가 된다. 이 점이 選民의식에 빠져 있던 영국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어찌되었든 차일드는 박사학위 없이 에딘버러 대학 교수가 되었고 다시 런던대학 교수로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古代문명사에 관한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차일드의 학위논문을 부결시킨 1925년의 옥스포드 대학의 심사위원들은 두고두고 후회하였으리라. 이런 學史的(학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을 기억하면서 나는 즉시 버지니아로 자료를 보냈다. 인도, 인도네시아의 고인돌과 선돌들의 사진을 한국 자료와 함께 보내 주었다. 한국어 속의 인도어 400개 그리고 또 몇 달이 흘렀다. 미국에서 박사학위가 통과된 논문이 내게 도착하였다. 「한국어와 드라비다語 관계의 재조명」이라는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의 논문을 읽어보니 매우 어려운 내용이었다. 언어학 논문은 꼭 수학 공식들을 써놓은 것처럼 기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드라비다語는 인도 토착어군의 총칭이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나를 놀라게 한 부분이 있었다. 한국어 속에 쌀, 벼, 풀, 씨 같은 농업용어는 모두 인도 토착어인 드라비다語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정보는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내게는 메가톤급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패전 후에 일본에서도 일본어와 드라비다語의 유사성을 연구한 학자가 있었는데 극우파 군국주의자들에 의하여 심한 핍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생각났다. 무슨 경로를 통했든지 한국어 속에 인도 어휘가 400개 이상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내게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고대 사회에서 새로운 종류의 농업기술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경제혁명을 의미한다. 그런 혁명적인 발전을 유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정에서 기술용어가 함께 소개된 것이다. 마치 한국에 자동차 기술이 들어올 때 기술용어인 엔진, 브레이크, 미션 등의 영어 용어가 함께 소개된 현상과 같은 정황이었을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다. 그 옛날 고대 인도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벼농사 기술을 한반도 주민에게 전수하면서 알려 준 말이 지금까지 한국어 속에 化石(화석)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다음 문제는 그 벼농사 기술자들은 봄이면 한반도로 농사지으러 왔다가 가을에 추수하면 그네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계절 이민자들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네들의 고향은 한 해에 서너 번씩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을 터인데 벼농사를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한반도로 계절이민을 다녔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들은 몇 년씩 또는 평생을 이 땅에서 살았음에 틀림없다. 나는 이 대목에서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반도에 고인돌을 세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고인돌이 많이 남아 있는 南아시아의 원주민들은 北아시아 기마 민족들에 비해 피부가 검다. 대체로 눈이 크고 얼굴은 사각형으로 하악골이 넓은 지역적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피부는 검지만 그 옛날 서양인들과의 혼혈로 얼굴 모양이나 체형은 서양인의 특징이 많다. 黃石里人은 서양人種? 그런데 한국의 고인돌 속에 실제로 묻혀 있던 주인공이 발견되었다. 1965년에 발굴된 충북 제천 황석리의 13호 고인돌에서는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신장이 170cm인 40代 남자였다. 사망연대는 기원전 410년경이었다. 발견지의 이름을 따서 황석리人이라고 부른다. 그의 두개골을 계측한 결과 한국 사람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서양사람처럼 코가 크고 두개골이 앞뒤로 뾰족한 사람이었다 학술용어로 超長頭型(초장두형)인 사람이었다. 여기서 체질인류학 이야기를 조금하겠다. 사람의 두개골 형태를 계측할 때 앞이마와 뒤통수의 거리를 頭長(두장), 귀와 귀 사이를 頭幅이라고 한다. 두장을 100으로 계산하여 두폭을 비교하는 수치를 頭蓋指數(두개지수·Cephalic Index)라고 하는데 이를 기초로 인종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 한국인의 평균 두개지수는 80 전후로 短頭型(단두형)이라 하고 서양인의 두개지수는 70 전후로 長頭型(장두형)이라 한다. 장두형은 머리가 앞뒤로 긴 모습이고 단두형은 얼굴이 넓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데 황석리人은 두개지수가 70 미만이었다. 얼굴이 좁고 뒤통수가 유달리 뒤로 빠진 北유럽인의 모습이다. 이건 심각한 내용이었다. 이 사람이 한국사람과 다른 인종이었다면 큰 문제가 시작되는 사건이었다. 한국인은 단일 민족이라는 정서를 감안했었는지 보고서를 담당한 서울의대 해부학교실의 두 교수는 이 사람의 생긴 모양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국에서 발견된 고인돌 사회의 주인공이 서양인의 체질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발표하면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 때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으로는 어려운 해부학 용어로 쓰인 황석리人의 체질적 특징이 서양사람에 가깝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만일 수많은 고인돌에 묻혀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현대의 한국사람과 다른 인종이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러나 고인돌에서 발견된 사람들이 모두 그런 체질적 특징을 갖고 있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에 남아 있는 고인돌의 수가 3만 개나 되니까 분명히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인의 조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때는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세월이 지나 조용진 교수가 컴퓨터로 복원한 황석리人의 모습은 완전한 서양인의 모습이다. 황석리에서 발견된 서양인 모습의 남자는 누구인가. 古代 아시아에서 고인돌 풍속이 있고 벼농사를 경제기반으로 하면서 서양인의 두개골 모습을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은 인도인밖에는 없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한반도에 올 수가 있었느냐 하는 소박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황석리人의 생존기간은 BC 450~410년이다. 한국사에서는 그 때가 선사시대이지만 유라시아에서 그 기간은 황금의 역사 기간이었다. 중국은 공자 이후 諸子百家(제자백가)의 시대이고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涅槃(열반)한 이후이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히포크라테스가 생존하던 시기이다. 고대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대규모의 관개기술을 성공적으로 실험하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역사시대에 일어난 일을 경악의 수준으로만 생각하면 판단이 어렵다. 황석리人의 한반도 도착을, 그 때까지 인류가 발전시켜 온 누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조감하면 아무런 경이도 아닐 수 있다. 고대사에 대한 나의 知的 호기심은 황석리人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호기심은 지난 30년간 고고학 주변의 여러 인접과학에 관한 연구결과를 살펴보게 하였고, 나와 가까이 지내는 여러 과학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히게 되었다. 인접과학 중 하나가 ATL이란 병이었다. 성인 T세포 백혈병(Adult T-Cell Leukemia)은 20세 전후에 나타나는데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父系遺傳(부계유전)이고 발병지역은 亞熱帶(아열대)지방이다. 중국으로 말하면 양자강 이남 지역이고 한국에서는 남부 해안지방에서 발병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이와 비슷한 통계로서 象皮病(상피병·Elephant Skin)이라는 것이 있다. 모기류에 물려서 다리가 코끼리의 다리(脚)처럼 붓고 피부가 거칠어지는 질병인데 조선시대까지 도서지방에서 자주 관찰되던 풍토병이다. 이 두 가지 현상은 더운 환경에서 나타나는 공통성이 있는데 혹시 南아시아에서 한반도 쪽으로 흐르는 黑潮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벼농사를 도입한 사람들과 함께 지역성이 강한 풍토병도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기마민족이 농경 방법을 배우다 고인돌의 주인공들은 기마 민족들보다 한반도의 先주민이고 그들의 농경사회는 잉여생산물 때문에 기마 민족들보다 인구도 많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기존의 농경사회에 뒤늦게 뛰어든 기마 민족들은 농경밖에 할 수 없는 땅에 와서 고생한 이야기가 陳壽(진수)의 三國志(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辰韓 사람들이 이주해 오니까 馬韓 사람들이 동쪽에 땅을 떼어 주어 살게 하였다. 辰韓 사람, 즉 후의 신라인들은 마한 땅의 토착인에게서 사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기마 민족이 오곡을 기르는 농경인이 되면서 육식에서 채식으로 입맛을 바꾸어야 했을 것을 생각해 본다. 한민족도 이렇게 복잡한 과정과 多端한 뿌리를 기초로 이루어진 백성이라는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과연 민족이라는 말에서 民(민)은 百가지의 姓(성-氏族)이 합쳐진다는 뜻이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계속)● |
'History vs Truth > Orienta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 읽어볼 꺼리 스크랩 (1) | 2010.10.13 |
---|---|
⑥ 두 마리의 물고기, 그 의미를 찾아 헤맨 40년 (0) | 2007.05.04 |
④ 韓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 馬ㆍ角杯ㆍ麻立干 (0) | 2007.05.04 |
③ 신라·가야·倭 지배층의 고향은 중국 서북방 알타이 지역 (0) | 2007.05.04 |
② 바이칼 호숫가의 자작나무숲, 그리고 新羅 金氏의 뿌리 (0) | 2007.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