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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vs Truth/Oriental

고대문자 : 배달국(倍達國)과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문자(文字)

by 개인교수 2006. 5. 15.
<고대문자 : 배달국(倍達國)과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문자(文字)>



1. 머리말

문자는 역사기록에 대한 도구이지만 우리나라 문자발달사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는 것 같다. 이러한 이유 중의 하나는 과거 당시의 문자 유물이 거의 없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문자에 대한 연구는 역사내용에 대한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훈민정음이란 좋은 문자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는 문자에 대한 연구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동안 연구 또는 발표된 문자에 관한 내용을 모아, 편집하였다. 이러한 자료가 우리나라 고대 문자에 관한 관심을 일깨우는 데 일조를 했으면 한다.

신시고각, 녹도문, 치우전목, 가림토 문자와 가림토문자의 발전형태로 추정되는 왜의 신대문자 등의 순서로 편집하였다.


2. 신시고각(神市古刻)

과거 역사에 대한 기록이 있기 위해서는 문자가 있어야 한다. 고구려의 『유기(留記)』라든지 백제의 『서기(書記)』같은 사서를 문자없이 어떻게 썼을까. 또 문자없이 율령(律令)을 어떻게 반포하였을까. 역서(曆書)는 또 어떻게 적었을까(주1) 고조선의 문화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당연히 문자를 만들어 썼을 것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이동면 낭하리 금산 바위에 고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에 관한 내용이다.





주1)

『단군세기』 13세 단군 흘달 50년 (BC1733년)에 기록된 “오성취루(五星聚婁) : 오성(수성, 금성, 화성, 금성, 토성)이 루 자리로 모이다.”란 천문 사실은 기록된 지 3726년만에 사실로 증명되었다. (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1933, 박창범, 라대일 참조, 다물지 100호 게재)

이런 천문 사실이 역사서에 채록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문자 또는 어떤 전달수단(내용을 모두 외우게 하는 방법으로)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3천7백여년전 (BC1733년) 기록이 사실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이 내용을 담고 있는 「단군세기」나 『환단고기』의 역사 상한(단군왕검은 4천3백년전, 환웅 배달국은 5천9백년전까지)부터 어떠한 문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가. 『환단고기』 해석


환단고기에는 “환웅천왕이 사냥 나왔다가 제(祭)를 삼신(三神)께 드리다.”로 해석되어 있다.(주2)

(주2) 『환단고기』, 임승국 역주, 정신세계사, 242쪽



나. 『조선사연구』 해석


①번 : 사냥개를 형상화한 것이다.

②번 :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②-1번 : 머리(모자)에 꽂은 두 개의 깃(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양식이다.)


②-2번 : 몸을 지탱하여 고삐를 잡은 것이 은밀히 요약됨을 볼 수 있다.
②-3변 : 뒷바퀴(車輪)
②-4번 : 분명치 않지만 소나 말이 수레를 끄는 형상. ②-3번과 ②-4번을 보면 뒤에는 수레바퀴가 있고 앞에는 수레를 끌고 가는 짐승을 표현하여 (움직이는 수레의 골격을) 모두 갖추었다.

③번 : 짐승이 화살을 맞은 형상이다.
③-1번 : (육지) 짐승
③-2번 : 화살촉 두 개가 짐승에 명중한 형상이다.

④-1번 : 두 마리의 새가 앞과 뒤에서 서로 연이어 날아가는 형상이다.
④-2번 : 화살촉. 대개 명중의 요체는 화살촉에 있으므로 화살촉을 그려 화살을 쏜 것을 보인 것이다.

⑤번 : 물고기류를 그린 것이다.
⑤-1번 : 물고기 지느러미
⑤-2번 : 꼬리를 비스듬히 그려 헤엄치는 것을 보임

⑥번 : 깃대위에 기수가 있고, 깃대에 두 개의 깃발을 묶는 것이 나와 있고 말뚝도 있어 그 깃대를 말뚝에 꽂았음을 표시한다.
⑥-1번 : 깃대
⑥-2번 : 旗手
⑥-3번 : 위 깃발(잠깐 말리어 자태가 좋다)


⑥-4번 : 아래 깃발 ( 쫙 펴져 날림)
⑥-5번 : 말뚝


이 모든 것을 종합해 그 배치된 순서에 의해 해석하면,

“ 사냥개를 뒤에 딸리우고 수레를 몰며, 옆으로 짐승을 쏘며 앞으로는 새를 쏘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건너서 기와 깃대를 꽂았으니 기간(旗竿)을 세우는 것은 요컨대 국경을 표시하던 것인데 물고기의 형상을 격지로 놓고 그 너머에 깃발을 세운 형상을 붙인 것을 보면 사냥하던 길에 한 물(경상남도 육지와 남해도 사이에 있는 바닷물)을 건너서 국경을 획정한 어떠한 제왕 대인의 기공명(紀功銘:공을 기록한 것)인 것 같은데 남해의 지형이 正히 육지에 가까운 섬이니 물고기상(像)을 중간에 놓음이 더욱 들어맞는 바이다.”

머리 위의 두 개의 획은 모자에 두 개의 새 깃털을 꼽는 우리나라 풍속과 이상히도 들어맞는다. (고구려 벽화, 백제, 신라 금관) 또한 깃발 끝이 둘,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용강고분 갑사수기도(龍岡古墳 甲士手旗圖)”를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각도 가로쓰기인 데 『속 박물지』에 “ 왜, 진여국, 혹 횡서 혹 좌서(倭, 辰餘國, 或 橫書 惑 左書)”라는 기록이 있다.주3)

주3) 담원 정인보 전집 4. 『조선사연구 하』, 연세대, 1983, 233 ~ 237쪽



다. 현지 안내판


“이 석각은 일명 서시과차(徐市過此:서기가 여기를 지나가다)라 불려지는 평평한 자연암에 새겨진 그림문자를 말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중국 진시황 때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시종인 서시가 동남동녀 500여명을 거느리고 이 곳 금산(錦山)을 찾아와서 한 동안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진시황 때는 이미 한문자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주4) 그 이전의 고문자가 아닐까 추측된다.
 
이 고문자는 동양 最古의 문자로서 금산 부소암의 가로 7m 세로 4m의 평평한 바위에 가로 1m 세로 50Cm 넓이로 새겨져 있다.“


주4)

진시황 때는 사용된 문자는 소전(한자에 가까움)이었으므로 서시가 소전이 아닌 “금산 부소암과 같은 그림문자”를 사용했을 리가 없으며, 안내판 자체도 이를 시인하면서도 유적의 유래를 추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각의 주인공이 “서시”가 아님을 알고서도 굳이 “서시의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닌가 한다.

환단고기에는 “진(秦) 때 서불(徐市)는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 바로 나패(유구국 = 오끼나와)에 이르러 다네시마(種島 = 대우국의 남포섬. 일본)를 거쳐 세포나이까이(일본 내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세(伊勢)는 옛날 서복(徐福)의 무덤이 있었다. 또는 단주(亶洲)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한다.” (임승국 역주, 『환단고기』, 267쪽)

(coo2.net 보충 주)
이주나 단주는 송나라 중국고지도를 보면 대만으로 표시하고 있다
왜는 7세기 이전 양자강 이남에서 활동하였다

3. 녹도문(鹿圖文)과 치우(蚩尤) 투전목(鬪佃目)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우리나라 고대 문자에 관한 간략한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신시에는 산(算)가지가 있고 치우에게는 투전목(鬪佃目)이 있으며 부여에는 서산(書算)이 있었다. 산가지(算目)과 투전목은 아래 그림과 같다. 단군세기 단군 가륵(嘉勒) 2년(BC2181년)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를 지었는 데 이를 가림다(加臨多)라 이르며, 이는 아래 그림과 같다.”

이태백전서 옥진총담에 이르기를 ‘대진국(大震國)에서 당나라에 글을 보낸 것이 있는 데 온 조정에 그것을 해독하는 사람이 없었는 데 이태백이 능히 해독하여 답주(答奏)하였다’ 고 했다.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헌강왕 12년 봄에 北鎭에서 아뢰되 대진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서 나뭇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갔는 데 마침내 그걸 가져다 바쳤다.

목서(木書)로 열다섯 자를 써 놓았으니 그 뜻은 ’보로국이 흑수국 사람과 더불어 신라국을 향하여 모두 사이 좋게 지낸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또 고려 광종 때에 장유(張儒)는 접반사로 이름이 났다.

처음에 난리를 피하여 오월(吳越)에 이르렀더니 월나라에 떠벌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문고 밑바닥에 우리나라의 한송정곡(寒松亭曲)을 물에 띄워 물결에 거슬러 보냈는 데 그들은 그 글을 해득하지 못하였다. 마침 장유를 만나 그 글의 뜻을 공손히 물으니 그가 즉석에서 한시로 풀이하여 말하였다. ‘한송정 달 밝은 밤에 경포호(鏡浦湖)의 물결이 잔잔한 가을, 슬피 울며 오가는 모랫벌의 저 갈매기 소식을 전해오네’ 아마도 거문고 밑바닥에 새겨진 글은 옛 가림토 종류였을 것이다.


원동중 삼성기 주에 이르기를 ‘신한?부여?왜국이 혹 가로쓰기를 하고 혹 새끼 매듭을 쓰고 혹 나무토막을 쓰기도 했는 데 오직 고구려만이 영법(潁法)을 모사(模寫)한 것을 보면 생각건대 틀림없이 환단 상세(上世)에 문자의 모각(摸刻)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최치원이 일찍이 신지의 옛 비석에 새긴 천부경을 구하여 다시 서첩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였다 하니 이것이 곧 낭하리 암각(신시 고각)과 더불어 그 실증의 자취라 하겠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 신시에는 녹서(鹿書)가 주5) 있었고 자부에게는 우서(雨書)가 있었으며 치우에게는 화서(花書)와 투전(鬪佃) 문속(文束)이 있었다 하니 이 모두가 그 남은 흔적이요 복희에게는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게는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 글자들의 백산(白山)?흑수(黑水)?청구(靑邱)?구려(九黎)의 지역에서 두루 쓰이다가 부여 사람 왕문이 비로소 전자(篆字)를 번거롭게 여겨 차츰 그 획을 덜어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적었다.

秦나라 때에 정막(程邈)이 사신을 받들어 조선에 왔다가 한수에서 왕문의 예서법을 얻어서 그 획을 따랐으나 조금 변형(變形)한 것이 지금의 팔분체(八分體)이다. 晉나라 때에 왕차중(王次仲)이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이제 그 글자의 근원을 찾아보면 모두 신시의 남긴 법이요 지금의 한자 또한 그 지류를 계승했음이 분명하다. 주6)

(주5)

신시의 전자 또는 녹도문으로 추정되는 첫 번째 유물은 1942년 발간된 『영변지』에 실린 16자이며 두 번째는 『대배달민족사』에 수록된 평양 법수교의 古碑文이며, 세 번째는 해강 김규진의 『서법진결』에 수록된 녹도문자 11자이며, 네 번째는 창힐의 고향인 중국 백수현 사관촌에 있는 「창성조적서비」에 조각된 녹도문자 28자이며, 다섯 번째는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녹도문자 2자 등이다.

(다물지 편집자 주 :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창힐의 비석에 새겨진 녹도문자이다. 창힐은 황제 헌원의 史官이었으며, 중국에서 문자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다. 물론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창힐이 공공?헌원?대요와 함께 신시 배달국의 자부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다고 되어 있다. 이런 창힐의 비석에 28자의 녹도문자로 추정되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신시 녹도문자의 존재를 방증하는 자료로 추정되는 것이다.)

(주6)
임승국 역주, 『환단고기』「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244 ~ 246쪽

4. 가림토 발전형태


가.  단군세기의 가림토문자 실체 확인


베일에 싸여왔던 고대문자인 가림토문자가 신비를 벗고 있다. 강단학자에게는 <실체없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백안시를 당해왔던 가림토문자, 반면 재야사학자들에게는 고조선 고유의 표음문자로 숭앙돼 왔던 문제의 고대문자 원형(原形)이 초대형과 대형의 금석문 형태로 2종이 동시에 공개(본보 1994년 12월 26일자, 일부지방 27일자 보도)된 것이다.

이 탁본은 우선 재야사학자 김인배-인문 형제가 지난 19일 공개했던 일본 마토노 신사 석비 4基의 고문자의 성격규명 작업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인 문제는 조작이라는 혐의 아래 아예 학문적 분석의 대상에서 제쳐져 있던 가림토 문자에 대한 실체 확인과 연구에 불을 댕길 것이 기대된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성학계와 재야사학계간에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고조선 등 상고사 연구에도 진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가림토 문자는 현재의 한글 자모와 형태가 비슷하고, 표음문자라는 밀접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세종이 독창적으로 창제했다고 알려져 온 훈민정음과 가림토와의 관계 등도 규명이 요구되고 있다.
 
우선 탁본의 솜씨와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만주탁본에 음각된 글자수 7백여개는 종래 수십자이거나 많아야 2백여 글자 안팎에 불과하던 금석문 발견에 비춰 국내 초유의 정보량 수록에 해당한다. 더욱이 이번 탁본은 모서리가 상하로 각각 잘려 있어 본래의 비석은 현 탁본보다 훨씬 컸음이 확실하다. 이 정도 비문이라면, 규모면에서만 봐도 상당한 국가권력이 동원된 기록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주탁본을 가림토 문자의 원형으로 보는 중요한 이유는 최근 들어 사서로서 가치를 부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토 38글자와 글자꼴이 너무도 흡사한데다가 자모의 상당부분이 겹친다는 요소 때문이다.

가림토 문자에 대한 근세적인 언급은 고려시대 이암(李?)의 저서 <단군세기>에 나온다.  제3세 단군 가름이 을보륵에게 정음 38자(상기 그림 참조)를 짓게 했다는 얘기와 함께 구체적인 자모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번 만주 탁본중에는 가림토 문자와 상당부분 자모가 일치한다. 또 가림토 자모와 형태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가림토 문자 음가(音價) 확인에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주는 흥미로운 자모도 있다. 만주 탁본을 본 김씨 형제는 탁본이 등장하는 U는 가림토 39글자의 U와 같은 것이자, 현재 한글의 ㅂ 과 같은 음가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일본의 마토노 신사의 비석에서 보이는 U ㅏ 의 음가를 현재 한글의 [바]로 읽을 경우 문맥이 바로 통한다는 점이다.

만주탁본의 성격 규명에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은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글바위골(경북 경산군 와촌면 강학동) 탁본이다. 기호로서 추상도가 높은 만주 탁본과 비교해 거의 상형문자에 가까운 점이 특징인 이 금석문은 자연상태의 균열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인공적 작업의 결과로 판명됐다.

그러나, 가까운 중세나 현대의 각인 솜씨는 아닌 것으로 보이며, 일본 신사비석은 물론 만주 탁본보다도 시기가 외려 앞서는 관계로 보아 가림토 문자가 정착되기 훨씬 이전 형성기의 금석문으로 보인다.

탁본을 공개한 정도화(鄭道和) 교수와 경상대 여증동(呂增東) 교수(61세, 국문학과)는 “만주와 글바위골의 탁본은 가림토 문자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말했으나 마토노 신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즉, 지난 19일 공개된 마토노 신사의 비문은 李寧熙씨의 견해처럼 神代문자의 한 종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는 얘기다. 정?여교수의 견해는 만주탁본과 일본 마토노 신사의 문자는 연계관계가 없는 각각 독립적인 기호 내지 문자라는 것이다.

반면 김인배, 인문 형제는 새로 공개된 2종의 탁본은 가림토 문자는 물론 일본 마토노 신사의 비문과도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주장, 정?여교수와는 상반된 새로운 시각을 보였다. 이런 가설을 세울 경우 미궁에 빠져 있는 가림토 문자의 음가추적과 해독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 김씨 형제의 적극적 견해다.

이에 따르면 글바위골 탁본은 가림토 문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라면, 만주탁본은 단군세기 38자 정착 직전의 자모꼴을 보여준다. 또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진공속에서 이뤄진 창조]라기 보다는 가림토 문자의 새로운 체계화 작업 결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자모를 늘어놓는 병렬형 글자인 가림토 문자를 자모를 조합시키는 형태로 바꿔 훈민정음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다음 기사 참조)

그렇다면 역시 조합형인 일본 마토노 신사의 비석의 문자란 가림토의 일본적 변형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훈민정음이 가림토의 15세기 한반도의 자체적인 변형이자 체계화라면 마토노 신사의 문자 역사 뿌리를 가림토에 두고 있는 또 다른 일본의 변형이라는 얘기다.

즉 신대문자란 것도 말 그대로 야요이 시대 등 일본의 신화시대 문자란 뜻인 데, 별도의 체계를 갖는 문자라기보다는 가림토 문자의 일본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경우 고조선의 강역이나 문화적 영향력이 만주를 비롯해 한반도와 대마도를 포함한 일본열도에서 광범위하게 퍼졌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김씨 형제는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가림토 문자로 된 금석문이 고형이든, 아니면 보다 발전된 형태이든 간에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일본지역에서 나오고 있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정?여교수도 동의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가림토 문자 금석문은 앞으로 중국지역과 티베트 지역 등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해온 고조선 문화의 강역에서 얼마든지 추가로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결국 이번 탁본의 동시 발견은 가림토 문자의 실체가 분명하다는 증거이자 아직은 미해독인 가림토 문자의 해독 가능성에 한발짝 다가 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가람토문자를 한글의 고문자이자 고조선의 고유문자로 보는 것을 다분히 <심정적인 好古취미>이자 국수주의 발로에 따른 비약이라는 기성학계의 외면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외면 태도는 아무리 가림토 문자이고 고조선이라 해도 보편성의 기반 위에서 거론돼야 한다는 시각 때문이다.

즉, 현재 거론되고 있는 가림토 문자의 경우 추정되는 제정 연대가 최고 기원전 200 내지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나일강 하구에서 18세기말 나폴레옹군에 의해 발견돼 훗날 해독했던 로제타스톤 위의 고대 이집트 문자(디모딕)만 하더라도 기원전 196년경의 문자로 판명이 됐다. 그렇다면 가림토 문자의 실체를 기원전 3000년으로까지 소급하는 것은 인류사의 발전단계와는 커다란 격차를 보이는 독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결국 이런 논란은 만주탁본의 내용이 해독될 경우 폭발적인 반향과 함께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주탁본의 공개에 따라 훈민정음과 가림토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이제 첫발을 딛게 됐다. 지금까지 기성 국문학계의 훈민정음에 대한 접근은 한글의 독창성을 [방어]해야 한다는 다분히 국민정서 차원이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만주 탁본과 글바위골 탁본의 공개는 훈민정음 제정의 모태이자 기반으로서의 가림토문자에 대한 주목의 계기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 경상대 국문학자 여증동교수는 중요한 전거를 들고 있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에 발문을 쓸 때 “ (훈민정음)의 글자꼴은 옛 글자를 모방했다 : 자방고전(字倣古篆)”고 뚜렸한 명문을 남겼다는 점이다.

이 때 [고전(古篆)]이라는 용어를 두고 지금까지 한글학자들은 몽고어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교수는 [전(篆)]이라는 말의 원뜻은 [꼬불꼬불한 글자]인 데 당시 정황으로 보아 일반 민중에게 알려져 있던 문자이고 이번 만주탁본에서 모습을 드러내 가림토를 참조한 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또 성삼문 등의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기초조사 단계에서 당대의 일급 언어학자인 몽고의 황찬을 여러 차례 찾아갔던 일화도 당시 이 지역에 남아있던 가림토 문자를 참조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여교수는 말했다.

이런 가설이 맞을 경우 훈민정음은 단순한 창작이라기 보다는 가림토의 후광(後光)아래 이뤄진 <가장 오래된 글자>중의 하나라는 새로운 특성을 더하게 된다.

연세대 문효근(文孝根)교수는 지난 3월 훈민정음의 창제 당시 중국 후한 때의 한자 해설서이자 언어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텍스트를 참조했다는 설을 발표한 바 있다.

문교수의 주장은 훈민정음이 15세기 당시까지 이뤄진 언어학의 주요성과들을 토대로 창제됐음을 말해주는 근거로 더욱 주목된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의 지평에 가림토 문자가 포함됐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다음은 이번 공개된 경산 글바위꼴 탁본과 만주탁본 및 일본 신대문자 비석의 탁본이다.

<문화일보>. 1994년 12월 28일 조우석 기자










(그림설명)
고(故) 이상백(李相佰) 前 서울대 교수가 1930년 만주지역서 작업한
길이 2미터의 탁본전체 모습
무려 700여자의 정보량을 담고 있으며 탁본상태가 극히 양호하다



나.  《수진전》의 일본 고대문자와 가림토 한글


근년에 《수진전》 원전을 발굴하고 연구에 전념하는 마쓰모토 젠노스케의 저서 《수진전》을 읽었다. 지금까지 다른 학자들의 번역 발표한 《수진전》은 한자본에서 옮긴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수진전》원전의 문자가 특별하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는 데 1992년 어느 날 버릇대로 자다 깨어 머리가 맑아진 시간 문득 《수진전》문자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다른 모든 일본 고대 문자가 한글의 모방 내지 영향인 데, 어찌하여《수진전》문자만이 유독 그렇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그 문자의 진상을 깨우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한 결과, 그 문자의 진상을 단시일에 알아냈다. 그것은 한글의 내용 그대로이며 원시 한글인 가림토에서 간 것이다. 나는 언어학자도 고대 문자 연구가도 아니지만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이나 아시라아, 수메르 등의 고대법을 비교?연구하여 얻은 문자 상식이 있었다. (중략)...
 

일본에는 한자에서 차용한 글자인 가다가나와 히라가나 외에 신자(神字)니 의자(疑字, 의심스러운 글자)니 하는 고대 문자가 31종이나 있다. 일본의 고대 문자에 대한 마쓰모토의 주장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일본말에는 순수한 화어(和語)와 한자에 맞춘 것이 있는 데 한자에 맞춘 것 중에는 무리하게 맞춘 것도 있다.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의 일본 상고 문자연구소 《신자일본문(神字日本文)》에 《수진전》문자를 포함해 31종의 신대(神代)문자가 실려 있다.
 
일본학자들에 의하면 소위 일본 신자(神字) 31종 가운데 《다케우치 문서》와 《상기》문자는 같은 도요쿠니(豊國) 문자를 쓰고 있는 데 이는 저급한 것이라고 한다. 신자의 대다수는 조선문자를 약간 고친 것이라고 해서 일찍부터 부정되었다가 최근 고대사 연구 물결을 타고 재등장하는 듯하다.

 
마쓰모토는 《수진전》문자가 《일본서기》《고사기》 이전의 가장 완전한 일본 고유 문자라고 주장한다. 《수진전》문자는 한눈으로도 그 외양이 한글과 아주 다르다. 과연 특이한 모양이고 또 가장 고급의 일본 고대 글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내가 알아본 바 《수진전》문자의 모양은 한글과 다르다 해도 그 내용은 한글 그대로인 것이다. 시가(詩歌)로 엮어진 《수진전》의 문자를 ‘아 이 우 에 오’로 추려놓고 보면 일본말에 소용될 것만을 골라 ㅏ ㅣ ㅜ ㅔ ㅗ 의 모음과 ㅇ ㄱ ㅅ ㄷ ㄴ ㄹ ...... 의 자음을 맞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글자의 모양만 보면 한글과 아주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실속은 자음과 모음으로 된 한글 그대로인 것이다. 모음 안에 자음을 집어넣으면 글자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일본의 고대 문자 중 모양이 한글과 가장 유사한 것 한 종류와 가장 특이한 《수진전》문자 중 내가 일본 가나의 음순으로 추려낸 것을 소개한다. 나는 밤잠도 못 자고 《수진전》문자의 진상을 연구하느라 애썼지만, 독자들은 내가 제시한 <1> <2>을 보면 당장에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독자가 알기 쉽도록 한글의 자음(초성), 모음(중성), 받침(종성), 합자(모듬 글자)와 비교한 《수진전》문자를 <3>으로 들겠다. 일본에서 필요한 것만을 한글에서 뽑아서 그 글자의 모양을 아주 다르게 만든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한글에서 간 일본말 이두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일본 임금이 ‘哀號’하면서 곡했다”는 고대 기록에서 애호는 ‘아이고(アイコ)’로 발음한다. 이 세상에서 ‘아이고’하면서 곡하는 종족은 한국인뿐이다. ‘이렇게 해놓고 어찌 살라고’란 뜻의 ‘타마호(우치사오, ウチサオ)’, ‘사등농(사라고, サラコ)’도 있다.

『인간단군을 찾아서』, 최태영, 학고재, 2000, 278 ~ 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