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클럽 발췌
한반도에 가야는 없었다. 가야는 양자강 하류에 있었다. 한반도에 가야가 있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지역에서 출토되는 갑옷은 백제와 신라의 것이 혼재되어 있다.
몽고발형투구? 몽고는 몽고고원에 없었다. 대진국이 시베리아에서 일식관측한 기록이 일본 역사책에 일본의 일식기록으로 둔갑해 있다. 고구려는 몽고고원 이서, 이동에서 일식관측했다. 몽고고원 역시 고구려 땅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고구려가 없었다. 온조가 황하 하류에서 스타노보이산맥로 이어지는 영토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몽고발형투구는 백제의 투구였던 것이다.
몽고발형투구가 북방민족의 영향이 강한 투구? 북방민족은 없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를 훔치면서 날조해냈을 뿐이다. 중토 너머 타림분지에는 북흉노와 선비 등이 있었고, 중토의 서쪽에는 남흉노와 예맥이 있었다. 모두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은 종족이다. 당연히 우리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가야 고분에 부장된 중국계, 북방 유목민족의 물품? 한수 하류와 발해만은 백제 영토였고, 양자강 이북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오르도스형 동복? 오르도스는 고구려 영토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서 갈라진 나라이기 때문에 똑같은 문화를 갖고 있었다.
유목민족을 중국이 날조한 몽한이나, 금한, 요한 등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몽한, 금한, 요한은 고려의 역사를 배당받은 나라다. 유목민의 실체는 지금의 몽고고원이나, 티벳고원의 유목민을 보면 알 수 있다. 천박 하나 쳐놓고, 온 가족이 기거하며, 천막만 걷어서 손쉽게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이주하는 민족이다. 오늘날 몽고의 도시나 티벳의 도시는 현대화된 산물이다. 그 옛날 몽고가 그처럼 우수한 문화를 개발했다면, 몽한 이후에는 퇴보만 거듭했다는 건가. 일례로 몽고족의 일파인 예맥족은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다.” 몽고족이 중앙아시아에서 살 때도 그랬다.
한반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은 유물로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375년이 백제에 한자가 들어온 해라 했다. 그러나 한자는 우리나라가 개발했다. 한자의 원형 갑골문자가 발견된 현황하 하류는 삼국의 영토가 맞댄 곳이다. 글자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이 발견되는 지역도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 등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발해만 북쪽에서 출토되었다. 지금의 한자꼴은 발해만과 산동반도에서 먼저 나타났다. “병신년(B.C. 925)에 한수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번한세가) 이 당시 벌써 한자가 개발되었기에 이두법을 지었다. 한자조차 우리나라가 개발한 문자다. 한자는커녕 갑골문자조차 중국이 개발한 문자가 아니다. 375년에 신라가 한반도로 침공한 것이다. 우리나라를 모두 집어넣은 한반도에 신라가 상륙작전을 펼쳤다고 할 수 없어서 백제에 한자가 들어온 해라 날조했다.
신라는 백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내물왕 37년(393)에 이르러 고구려 편으로 돌아선다. 고구려가 강성하다 하여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인질로 보냈다고 하지만, 실은 백제 땅 한반도를 침공한 탓에 백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를 감추느라 신라가 강자 편에 붙었다고 날조했다.
400년의 이 사건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이 끝나면서다. 4세기 말까지도 금관가야는 고분 묘광의 크기가 10m 이상이고, 그 안에서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는 아주 광대한 세력이었다. 그런데 5세기 초 이후에는 김해지역에서 묘광 크기가 2m 이상 되는 고분이 나오지 않는다.
400년 무렵부터 철갑옷을 함께 묻은 대형 고분들이 돌연 자취를 감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가야가 멸망한 6세기 중엽까지 계속 만들어지던 대형 고분이 가야의 출발지이자, 절대적인 맹주였던 금관가야에서만은 5세기 초엽에 중단된다.(역사스페셜 1권)
금관가야가 고분에 철갑옷을 부장품으로 넣지도 못할 만큼 무장해제되었다면, 맹주의 지위를 다른 가야가 넘겨받았다면, 상식적으로 국력이 신장된 나라가 금관가야를 멸망시켰을 것이다. 그 결과 금관가야 지역에는 새로 떠오른 가야가 지배자를 파견했을 것이고, 여전히 대형 고분에, 철갑옷이 발견되어야 한다.
신라가 375년에 한반도를 침공하고, 393년에는 고구려 편으로 돌아섰다. 전투가 한창인 지역에 대형 고분을 만들 수 없었던 건 당연하다. 철갑옷 제작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탓에 전쟁 중에 부장품으로 넣어줄 수도 없었다. 금관가야로 착각하는 지역에 신라가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신라는 청구대륙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했으므로 고분 제작자를 충분히 동반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사자의 집은 만들어야 하니까, 고분의 크기를 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세기를 기준으로 목곽묘의 부장품 위치가 달라진 것도 신라 진출이 원인이다.
동북아 전체가 백제 영토인 상황에서 중국 동부의 신라가 배 타고 황해를 건너와서 한반도에 직접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륙작전은 육상작전보다 훨씬 어렵다. 신라는 남해의 섬을 전진기지화했던 것이다. 전진기지는 진공목표지점에서 가까운 대마도다.
신라의 대규모 전함이 황산강을 따라 나와 동지나해 및 황해를 항해했으므로 백제도 신라가 한반도를 침공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연히 황해에 상륙할 것이라 예상하고, 서해안 수비를 강화했다. 그래서 신라는 상륙지점으로 김해를 선택했다.
김해는 3세기에는 수심 5m 내외의 만이었고, 4세기에는 평야였다. 김해가 육지화되었다면, 만이 물러난 지역에 상륙했다. 한반도는 백제인의 휴양지 같은 곳이라, 제왕의 근위대 및 치안유지군에 급파된 전투병력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1만 내지 2만 명으로도 한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 교두보 확보에 성공하면, 증원군은 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한반도로 직행했다. 고도의 철기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백제였다.
787년 이후의 신라 일식의 최적관측지가 경주보다 저위도다. 신라는 한반도 기상관측을 5백년부터 했다. 기상관측만 하고 천문관측은 후대로 미루지 않았다. 북애도 규원사화(1675년)에서 첨성대가 천 수백 년이 지났다고 했다. 화하와 예맥은 신라가 한반도에서 건국했다고 날조했으므로 첨성대 건립 연도까지 날조할 이유는 없다. 신라가 한반도에서 천문관측하기 시작한 것은 400년 이전이었던 것이다. 교두보를 확보하자마자 천문대부터 세웠던 것이다. 문무 4년(679) 8월 10일(양력) 새벽에 일어난 태백입월 현상도 경주가 아니라, 남해안에서 관측했다.
경주로 첨성대를 옮긴 것은 이씨조선이다. 한 장소에서 천문관측했다면 통상 수도에서 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예에서 우리나라는 영토를 확보하면, 천문대부터 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나타나는 이씨조선 초의 하늘이 38.4°(38°가 아니라,)인 것으로 보아, 신라는 삼국 통일 후 한반도에서 두 군데(남해안과 38.4°)에서 천문관측했다.
“가야가 멸망한 6세기 중엽까지 계속 만들어지던 대형 고분이 가야의 출발지이자, 절대적인 맹주였던 금관가야에서만은 5세기 초엽에 중단된” 것은 신라가 교두보를 넓혀가면서 신라의 지휘관들도 전쟁터에서 죽어갔기 때문이다. 이미 김해지역은 신라의 후방이 되었던 것이다.
4세기 이후 편두(두개골이 뒤쪽으로 치우치게 인위적으로 만든 머리)인골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김해지역을 백제가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인은 편두인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반도 일대의 무수한 고분 벽화의 등장인물 가운데 편두인은 없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라는 삼국지가 사실이라면, 청구대륙 중부와 황하 하류에서 다수의 편두인골이 발견되어야 한다. 삼국지는 위, 촉, 오의 역사로 배당한 책이고, 위, 촉, 오는 3세기에 존재한 나라다. 진한을 물려받은 나라가 고구려고, 백제가 고구려에서 나왔으므로 결국 고구려인과 백제인이 모두 편두라는 소리다. 백제인이 편두라면, 백제 식민지 일본에서도 편두인골이 발굴되어야 한다. 그런데 편두인은 이 땅의 사학자들이 가야라고 착각하는 협소한 지역에서 극소수만 출토되었을 뿐이다. 고구려, 백제인은 편두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편두인은 어디서 왔을까. 중토다.
백제가 가릉강 이서 즉 티벳고원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티벳고원 북부는 중토였다. 백제는 과거 오, 월, 연, 제, 노가 있었던 중토의 상당부분도 지배하고 있었다. 한위노라는 말까지 만들지 않았던가. 말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백제인 상당수가 화하를 노예로 삼았다. “백제왕은 곤핍해서 남녀생구 일천인과 세포 천필을 내어 헌납하였다.”는 날조기사에서 보듯이 옛날에는 사람으로 조공을 하기도 했었다. 중토의 남조로 날조된 나라들은 자신들의 노예를 백제에 바친 것이다. 백제인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화하 출신의 노예들도 함께 데려온 것이다. 신라는 중토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화하를 노예로 삼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5호가 중토에 나라를 세운 지도 백년이 지났을 때라, 편두 풍습은 거의 사라졌다. 5호가 중토의 토착민에게 편두를 강요할 리 없고, 5호를 막기에 여념이 없던 남조(?)에서도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있어 편두풍습도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제에 화하의 노예는 꽤 있었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편두를 강요하지 않으므로 2세 이후로는 무시무시한 풍습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중노가 편두였다는 사실은 현역사책에도 남아 있다. 삼국지에서는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라고 했고, 후한서에서는 “진한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 한국의 마한 땅이 적당할 것 같아 마한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진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진한이라고 하였다.”고 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라는 기술은 진나라 유민 다시 말해 중노가 편두라는 뜻이다. 중노는 역사책을 날조하면서도 제 조상들이 편두였다는 사실을 없애지 못한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편두가 그 당시 미인의 조건이었을 거라고 추정하는데, 그랬다면 전세계로 편두풍습이 퍼져야 했다. 오히려 편두는 희귀풍속이다. 그보다는 종족식별을 위해 고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오지 한웅의 정벌 이후 중토로 우리민족이 상당수 이주했다. 중토의 미개 토착민들이 우리민족의 노예로 전락했으리라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중노사에도 우리민족이 세운 은나라가 노예사회였다고 했다. 화하를 노예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전적 교류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남자들은 적극적으로 토착민 여자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토착민 여자를 괴상한 모습으로 바꾸었던 게 아닐까. 편두가 미의 조건이었다면, 중노는 기꺼이 제 역사라 인정했다. 편두가 노예식별 표시라서 중노가 제 풍속임을 부정했던 것이다.(종교의식과 관련된 고대 이집트 조각품에 등장하는 6천 년 전의 여인이 편두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무녀는 신에게 바쳐진 처녀다. 편두는 태어난 직후에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므로 스스로 원해서 무녀가 된 것이 아니다. 일반인과 생김새가 똑같다면, 모든 무녀가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요컨대 종교의식을 신성시하는 시대에 무녀의 도주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서 간난아기를 데려와 편두로 만들고 무녀로 키운 것이다.)
그러나 편두인골이 중토에서 발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토의 예속민들은 죽은 자를 땅에 묻지 않았다.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송서에 “옹관은 동호의 풍습”이라 했다. 그렇다면 “염(殮)을 할 때도 관에 넣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장사지내는 도구가 없으면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두었다.”는 풍습은 누구의 풍습인가. 고려도경의 저 미개 풍습은 명초까지 지속된 중토의 풍습이다. 그러나 티벳고원은 산사태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그때 죽은 사람들의 인골이 토굴이나 땅속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209년 진승의 난 때 번조선에 귀순한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인”의 상당수도 편두인이었을 것이고, 백제가 요서를 지배할 당시, 화하를 노예로 거느렸으므로 티벳고원 남부에서도 편두인골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백제 땅에서는 중노들도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두”는 걸 자제했을 것이므로 티벳고원 남부에서 편두인골이 발견될 가능성이 더 높다.
순장제도는 백제문화(고구려문화)다. 그러나 순장제도의 특성상, 피매장자나 매장자의 선호에 달렸지, 모든 지배자의 무덤에 순장을 한 것은 아니다. 3세기 말부터 등장하는 순장제도는 백제가 수도에서 한반도에 제왕을 파견한 시기가 3세기 중반 이후라고 추정할 근거가 못 되는 것이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다 동굴로 옮겨서 천신과 나란히 모시고 이어 제사지냈다. 뒤엔 혹은 땅을 평평히 하고 장사지내는 자도 있고, 둘레에 박달나무・버드나무・소나무・잣나무 등을 심어 이로써 표시를 하였다. 이는 신시의 시절엔 능이나 묘를 쓰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중고시대에 이르러 나라는 풍부해지고 민족은 강성하게 되었으니 점차 번거로워져서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르게도 되었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가 있었고, 묘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였으며, 높이・크기・넓이・폭 모지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생겼으며, 안쪽은 벽과 바깥쪽은 덮는 것까지 고르게 정밀하고 교묘하였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태백일사 신시본기)
고구려 때 기술이 따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중고시대는 조선시대다. 국왕이라 함은 배달의 제후들이다. “땅을 평평히 하고 장사지낸다.” 함은 고인돌을 말한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조선을 부정하기 때문에 모든 분묘를 삼국시대의 것으로 몰아간다. 삼국사를 기술하는 것을 보면, 이 땅의 사학자들 대부분이 배달, 조선사를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옹관묘는 기원전부터 사용된 고대 무덤 양식의 하나인데, 황해도 일부와 경기 이남 전지역에서 해안에 고루 분포한다. 특히 영산강 유역의 수많은 옹관들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늦은 6세기 중반까지 이어진다.(역사스페셜 1권)
옹관묘가 분포하는 지역이 해안이나 평야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인구가 적은 시대에는 살기 편한 해안과 평야에 몰리는 게 당연하다. 영산강을 비롯해서 한반도 서해안은 우리나라 중심지가 있는 청구대륙으로의 연안항해도 가능한 교통의 요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전쟁은 내륙, 해안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 전역을 무대로 벌어졌다. 그러므로 백제와 신라가 옹관을 만들었다면, 해안, 내륙을 가리지 않고 옹관묘가 분포해야 한다.
한반도에는 배달시대의 고인돌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전세계 고인돌의 60~70%가 한반도에 몰려 있다. 신시가 현요수 하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조선시대의 고분은 없다. 물론 이 땅의 사학자들이 조선을 부정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날조사에서 주나라, 한나라로 접어들면서 옹관 사용이 점점 쇠퇴·소멸했다고 한 점에서 옹관은 조선시대의 풍습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송서에 “옹관은 동호의 풍습”이라 쓰여 있는 걸로 보아 소멸시기에는 시차가 있다. 송서를 기준으로 옹관이 6세기까지 사용됐다고 하는데, 역사책은 그 나라가 존속할 당시의 풍속을 적는 거지, 역사책을 쓸 당시의 풍속을 적는 게 아니다. 더구나 명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끼면서 연대를 일치시키지 않았으므로 5세기까지 옹관이 사용됐다고 단정할 근거조차 못 된다. 옹관묘가 한반도에서 사라진 시기는 몇 백 년은 더 빠르다. 큐슈의 옹관묘는 기원전 3세기부터 한반도인들이 건너가서 만들었다.
나주평야가 있고, 영산강이 흐르는 지역을 백제군이 순순히 포기할 리도 없고, 신라군이 지나칠 리도 없다. 신라는 영산강 유역을 확보하고 나서 청구대륙의 본국에서 증원군이 도착하는 항구로 사용했다. 영산강 유역은 지형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백제군과 신라군의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전략적 요충지다.
6세기 중엽까지는 한반도 남해안 대부분이 전장으로 화했다. 남해안 동부에서는 위쪽으로 밀려난 백제군이 상실한 땅을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하고, 신라군은 남해안 서부로 진출하고 있었다.
375년에 상륙작전을 실시했는데, 2백년 가까이 남해안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건 그만큼 전쟁이 치열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신라군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백제군이 점점 더 고분을 제작할 여력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백제의 반격이 거세질수록 신라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고분을 제작할 여력이 없으므로 대안을 찾아야 했다.
영산강 유역의 상당수 옹관들은 이전 옹관의 피매장자를 바꾸면서 부장품까지 새로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에 이겼다 해도, 다음 전투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므로 서둘러 무덤을 마련해야 했다. 사망자는 계속 나오고 고분을 만들 시간은 없고 해서 이전 무덤의 피매장자를 꺼내고, 사망자를 매장한 것이다.
고분에 묻히는 인물은 승자의 지휘관급에 해당하는 귀족이므로 나주에 있는 500~600개(상당수의 고분이 멸실되었다고 보면, 원래 고분의 수는 그보다 더 많았다.)에 달하는 고분의 피매장자 전부가 전사자는 아닐 것이다. 나주 고분의 피매장자 상당수가 전사자인지 아닌지는 시신의 성별을 확인하면 간단히 알 수 있다. 전사자는 남자지만, 평화 시에는 부부가 같이 묻히거나 인근에 묻히기 때문이다.
나주 복암리 3호분 96석실에서 출토된 나주 금동신은 백제나 신라 것과는 다르다? 장인이 다르면, 작품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옹관묘가 다수 있는 걸로 보아 한반도인의 무덤이고, 7세기 초의 부장품이 있는 걸로 보아 신라가 나주를 차지한 후에 완성된 고분이다. 나주 복암리 3호분은 수십 기의 무덤이 있는 걸로 보아 가족묘로 시작했다. 가족묘로 사용할 고분을 만든 걸 보면 그 지방의 지배층에 속하는 집안이었을 테니, 신라 진출 후에도 그 땅에 눌러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소한 상층의 고분은 가족묘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가지형 금동관? 고작 교두보만 마련한 지역에 왕급 인물을 파견했을 리도 없고, 무덤 부장품으로 일반적으로 만드는 물건으로 추정된다.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역시 신라 것이다. 한반도의 왕이라면 백제 후왕과 6세기 말 이후의 신라 후왕뿐이다.
한반도 동남부 일각에서 일찌기 꽃핀 가야문화를 포용한 신라문화에는 상층문화건 기층문화건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로마문화의 흔적이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흔적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신라 고분 유적과 유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비교문화적인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확연하지는 않지만, 소재와 형식, 기법 등을 감안하면, 대체로 로마문화와 공유성을 갖고 있는 것과 로마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 그리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것 등 세 가지 내용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것은 신라문화 특유의 국제성과 진취성, 독창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신라문화와 로마문화의 공유성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유물로는 나무가지를 형상화한 수목형 금제 관식을 들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이러한 관식을 단 고대 금관은 합해서 10점밖에 안되는데, 그 중 7점이 가야(1점)와 신라의 것이다.
신라의 유물 중에는 교류를 통해 로마문화를 고스란히 그대로 수용한 것들도 다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각종 유리제품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리용기류는 총 80여 점에 달하는데, 그 중 출토지가 분명한 22점은 모두가 9기의 신라 고분에서 나왔으며, 그 소재나 제조기법, 장식무늬, 색깔 등으로 보아 거의가 후기 로만유리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특이한 유물로는 미추왕릉지구에서 발굴된 유명한 ‘미소짓는 상감옥’ 목걸이가 있다. 지름이 1.8cm밖에 안되는 이 작은 상감옥 속에는 정후면에 모두 6명(그 중 2명은 왕과 왕비로 추정)의 인물과 6마리의 백조, 2개의 나무가지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 작은 유리구슬 속에 이렇게 많은 조형물을 그토록 정교하게 상감하여 장식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물은 피부가 희고 눈이 동그라며 눈썹이 맞닿아 있다. 또 콧날이 오뚝하고 얼굴이 길며 목걸이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백조가 사는 북방계 백인종(아리안)임에 틀림없다.
로마세계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 중에는 장식보검이란 특이한 단검이 하나 있다. 미추왕릉지구의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36cm의 황금장식보검(일명 계림로단검)이 바로 그것인데, 칼자루는 반타원형이고 칼집은 끝이 넓으며 표면은 금알갱이와 옥으로 상감하는 등 이른바 다채장식 양식(필리그리기법)으로 꾸몄다.
가야와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손잡이 달린 토기잔이나 용기류가 적지 않은데, 이것은 분명히 로마세계로부터 들여온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을 비롯한 중국이나 일본 등 동양문명권에서는 잔이나 용기에 손잡이를 달지 않는 것이 고금의 관행이지만, 로마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손잡이를 붙이는 것이 전통이다. 이런 것이 바로 문명간의 이질적 요소로서 교류의 증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의 유물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용기가 거의 발견되지 않아서 신라문화만이 갖는 "로마문화성"을 증언하고 있다.(비단길 따라온 로마, 로마를 넘어선 신라, 한겨레)
우선 신라는 375년에 한반도를 침공했는데, 4세기 말이 아니라 4세기인 점, 가지형 금동관이 가야라고 단정한 지역에서도 발견된다는 점, 미추왕은 262년에 즉위해 282년에 붕어했다는 점에서 소위 “로마문화의 영향”은 신라가 한반도를 침공하기 전부터 있었다. 삼국 말까지도 한반도 남부는 전쟁터였으므로 “교역품”은 절대 아니다. “신라의 위상이나 교류상을 실증하는 귀중한 보물”이 아닌 것이다.
한반도는 후국이었다. 한반도 남부는 가장 후미진 곳이 아닌가. 전쟁 전에도 “로마나 그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에서 교역을 위해 찾아올 리도 없고, 후국에서 본국이 있는 청구대륙을 넘어 교역에 나섰을 리도 없다. 교역이라면, 로마 문화의 영향을 본국이 있는 청구대륙이 더 크게 받아야 한다. 청구대륙이 동서 교역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청구대륙에서는 “로마 문화의 영향”이 발견되지 않는가.
기행(奇行)? 그 어떤 서양인이 청구대륙은 지나치고, 작디작은 한반도로 교역을 하러 온단 말인가. 명, 청을 휘젓고 다니던 그 수많은 서양인도 한반도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역사는 상식이다. 교역품이나 선물이라면, 청구대륙에서도 똑같은 것들이 발견되어야 한다. 당연히 삼국이, 우리나라가 청구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자 중국이 의도적으로 감추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로마 문화의 영향”이 아니라, “한문화 가운데서도 한반도 문화가 서방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결론이다.
전투에서 패한 백제는 퇴각하면서 철기술자 등 전쟁 무기나 운반수단을 만드는 기술자는 모조리 데려갔겠지만, 전쟁과 관련 없는 물건을 만드는 장인까지 일일이 후방으로 이송할 여유는 없었다. 청구대륙에서 바다 건너 상륙한 소규모 신라군도 격퇴하지 못할 정도면, 기습을 당한 것이므로 전쟁 초기에는 더욱 급박했을 것이다. 한반도로 진출한 신라도 고급 지휘관 및 행정관이 있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장인은 신라로 넘어간 지역에서 계속 거주하면서 생활필수품을 만들고, 이들의 무덤에 넣을 부장품을 만들고, 그들의 기술을 다음 세대에 가르쳐 발전시켜 나가도록 해야 했다.
수목형 금제 “관식을 단 고대 금관은 합해서 10점밖에 안되는데, 그 중 7점이 가야와 신라의 것”? “지금까지 출토된 유리용기류는 총 80여 점”? 이걸 알아야 한다. 노예국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한반도를 강점했을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 고분을 모조리 파헤치고, 유물을 쓸어가 숨겨놓고 있다는 사실. “손잡이 달린 토기잔이나 용기류”도 반응이 신통치 않거나 유행이 변하면, 더 이상 안 만든다.
또한 청구대륙에는 교역 등을 위해서온 백인종이 드물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강역은 우랄산맥 이서와 흑해까지였다.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 백부인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다.”(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발레곡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가 썼다. 시베리아에도 백조는 살았던 것이다.
황금이 넘쳐나는 황제나 권력자에게 황금 장식품을 선물해봤자, 환심을 살 수 없다. 뒤떨어지는 기술로 만든 것이라면 냉담한 반응일 것이다. 차라리 신기한 동물을 선물하는 것이 낫다. 기린이나 코끼리는 운반하기가 힘들지만, 백조 같이 작은 동물은 쉽게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코끼리는 동남아에도 살았다. (티벳의 신화에도 코끼리가 나오지만, 티벳은 명 이전까지 중앙아시아에 있었으므로 티벳고원에 코끼리가 있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런데 단군세기에는 33세 단군 감물 2년에 주나라 사람이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고 했다. 중토 역시 무역을 했으므로 주나라가 코끼리 가죽을 바치는 것은 문제가 없다. 티벳고원에 무역할 만한 게 있었을까. 은이 노예사회였다는 건 중국도 인정한다. 중토는 노예무역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비용도 황금 장식품보다 엄청 싸게 먹힌다. 본국에 가본 적이 있는 장인이라면, 다른 장인과의 차별성 부각을 위해서라도 이왕이면 그가 본 특이한 것을 만들려고 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쨌거나 한반도 남부까지 서양인들이 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반도에서 로마까지 영향을 미치려면, 우선 청구대륙의 본국부터 영향을 미치거나 최소한 한반도 이북의 만주에서도 가지형 금동관이나 유리제품 등을 만들었어야 했다. 결국 중국 및 일본이 수많은 유물을 감추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태백일사에도 백제가 왜를 시켜 신라를 침범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가야를 침범했다는 기록은 없다. 가야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백제 영토와 직접 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무한 일대에서 건국한 신라는 황산강(양자강) 이남의 백제 영토까지 진출하며 성장한 나라다. 백제는 고구려와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으므로 신라가 자국 땅을 침공할 여력을 갖지 못하도록 왜로 하여금 신라를 수시로 침입하게 한 것이다.
왜가 신라성을 함락시킨 것(광개토경대훈적비)은 시기적으로 신라가 한반도를 침공한 뒤에 일어난 사건이다. 신라가 한반도를 침입하자, 백제가 보복에 나선 것이다. 백제가 왜를 사주한 것이지, 가야군이 주축이 되어 왜와 합동작전을 펼친 것이 아니다.
6가야. 부여라는 이름은 3천년을 두고 6번이나 등장한 나라지만, 가야는 동시에 여섯 나라나 있었다고 한다. 여섯 나라가 일시에 가야라는 국호를 사용했다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 신라 동쪽에 소국이 여섯이나 된다면, 당장 신라에게 정복되고 만다. 광개토경대훈적비에도 가야라고 나오지 가야가 6국이라는 언급은 없다. 이 역시 우리나라의 전쟁을 가상의 나라에 배당하기 위한 수법이다. 또한 중앙집권국가로서 발달하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고 날조하기 위해서다. 연맹체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중토의 나라다. 삼성기전 상편의 “연나라 ‘추장’이었던 위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국사기에서 가야에 관한 기술을 대량으로 빼버린 것은 성계와 주원장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중국사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인가 있는 것은 삼국의 역사였지만, 삼국의 역사를 훔치면서 가야의 역사를 남겨두면, 삼국사기가 아니라, 가야국사가 되므로 같이 빼버린 것이다. 하긴 가야국사도 유용하게 써먹을 것이다. 5호 16국의 소국들이나 춘추전국 시대의 소국들에 배당해야 할 역사도 있어야 하니까.
일본의 최초왕은 응신이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신무가 최초의 왕이라고 적혀 있지만, 18세기 이후 역사왜곡하면서 꾸며낸 것이고, 다무라 엔초 등 일본학자들도 응신 혹은 인덕을 일본 최초의 왕으로 본다. 일본 최초의 왕은 응신이다. 인덕(닌토쿠 313~399. 간지 두 바퀴에 해당하는 120년만큼 끌어올려졌다는 이노우에 미쓰시다의 주장에 따르면, 인덕은 대략 433년에서 519년 사이에 백제 후왕으로 있었던 인물이다.)이 매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덕이 생전 처음 보는 새를 보고 주군(酒君)에게 무슨 새냐고 묻자 주군이 “백제에는 이런 종류의 새가 많습니다. 잘 길들이면 사람을 곧잘 따릅니다. 또한 빠르게 날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새도 잡아옵니다.”고 대답했다. 이 매를 길들이고 실제로 매가 수많은 꿩을 잡은 날, 비로소 응감부라는 부서를 설치했다고 일본서기에도 나온다. 중국왜라면, 매가 백제, 신라 땅에는 날아가면서, 신라, 백제와 인접한 왜만 피해 날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인덕은 열도에서 태어났고, 응신이 일본 최초의 왕이다.
열도왜가 중국왜가 옮겨간 것이 아니라면, 倭라는 국명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倭는 지극히 아름답지 못한 이름이라서 왜(倭)가 아니라면 倭라 이름 붙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구당서) 의미가 좋지 않은 말이라서 일본도 왜(倭)라고 부르는 것을 엄청 싫어한다. 그래서 일본은 18세기 이후 倭 외에도 和, 大倭, 大和(왜는 백제 식민지고, 대화는 신라 식민지다. 하지만 일본사를 늘리기 위해 중국왜도 열도왜에 슬쩍 포갠 일본이다. 신라 식민지도 백제 식민지에 포개버렸다.)까지 만들어냈다. 倭, 和, 大倭, 大和의 이두식 발음이 모두 야마토라고 하면서. 이유는 응신이 중국왜의 왕이었거나 왕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응신은 백제 출신이다.
倭는 왜 혹은 위라는 두 가지 음에 왜국, 두르다, 순하다, 추하다는 뜻이다. 왜국은 왜(倭)라는 국명이 생겨난 후에 파생된 의미다. ‘왜소하다’라는 뜻도 있다고 하지만, 편두인골이 난장이라는 지적은 없다. 왜인은 청구대륙 끝으로 이주하기 전, 금사강 상류 너머 호수 일대에 살았다. 화하인 것이다. 화하가 난장이가 아닌데, 같은 종족 왜노가 난장이일 수는 없다. 왜가 왜소하다는 뜻이면, 백제인들이 처음 열도로 건너가 나라를 세울 때 왜라고 했겠는가. 키 작은 백제인들만 건너갔던가.
‘왜소하다’는 말은 일본의 선주민 아이누족과의 생물학적 교배가 활발히 이루어진 후에 생겨난 말이다. 기모노섹스, 혼욕, 요바이가 성행한 천 년 전에. 무엇보다 왜소하다는 말이 국명조차 바꿀 정도로 “아름답지 못한” 이름은 아니지 않는가.
주목할 것은 옛날에는 ‘순종하다’라는 의미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르다, 순하다에서 파생된 의미라고 한다.(http://www.paikmagongja.org/new_files/outside/japen_3.htm) 백제의 군사식민지로 한반도를 침공한 신라를 격퇴하기 위해 세운 나라의 국명으로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중국왜가 화하족 출신이다 보니까, 중노가 옥편을 만들면서 삭제해버린 것이다. 倭의 의미가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라서 상국 백제가 멸망하자, 국명을 바꾸었다.
칠지도는 백제황제가 신라군을 협공할 목적으로 응신을 왜왕으로 임명하면서 하사한 칼이다.
태화4년 5월 16일 병오날 정양에 무수히 거듭 단근질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적병을 물리칠 수 있도록 이 영도를 후왕에게 보내주는도다. □□□□작 (앞면)
선대 이후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 왕세자 귀수성음은 왜왕을 위해서 만들었으니 이 칼을 후세에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뒷면)
태화가 근초고제의 연호라면, 태화 4년은 369년이 된다. 하지만 신라는 375년에 한반도를 침공했다.
칠지도는 이소노카미 신궁 궁사직에 있던 스가 마사토모가 자신이 손을 댔다고 실토했고, 깎인 명문도 있다. 그 뒤 스가 마사토모의 행적에서도 칠지도가 날조됐음을 알 수 있다. 스가 마사토모는 일본 내각과 도꾜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갖다 바쳤다며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날조명문에도 供侯王이라 되어 있다. 후왕에게 준다는 뜻이다. 왜가 식민지라는 뜻이다. 후왕이 바쳤다면 侯王供라고 써야 한다. 이런 것도 내버려두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우긴 것이다. 칠지도가 고작 후왕이 바친 칼이라면, 일본이 오늘날까지 신보로 삼아 보관하고 있겠는가.
판독됐다는 칠지도 명문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글이다. 백제의 태자가 자신을 세자라 하고, 부황을 왕이라 부를 수는 없다. 이 당시 백제는 가릉강 이서에서 양자강 이남, 중국 동부, 동북아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다수의 제왕과 제후를 거느린 아시아 제1의 대국이었다. 태백일사도 백제가 제, 노, 오, 월 등의 땅을 평정하고 땅을 나누어 왕과 제후를 봉했다고 했다.
백제 태자가 만들게 한 칼이라면, 백제황제가 하사한 칼조차 아니다. 그러나 태자가 후왕을 임명할 수는 없다. 칼 한 면은 백제황제가, 다른 면은 태자가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것도 우습다. 일부만 깎아내고 다시 쓰면 그 부분이 함몰되니까, 새로 만들었거나 양면 혹은 한 면 전체를 다 깎아내고 새겼을 것이다. 고구려 황제를 열제라 불렀다. 백제황제도 온조제, 다루제, 기루제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백일사에 보면 장수홍제호태열제가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와 남쪽 평양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고 했다. 그런데 매금이라는 호칭은 비칭이 아니라고 한다. 신라가 세운 울진봉평비에서도 신라황제를 매금왕이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 ......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태백일사)
소서노는 북부여 6세 단군 고무서의 둘째 공주로 주몽성제와 혼인했으니, 고구려의 황후다. 그런데 주몽성제가 또 다시 어하라에 책봉할 수 있는가. 지위가 높다한들, 고구려 황후만하겠는가, 고구려 황제와 동격이겠는가. 소서노를 어하라에 책봉했다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 다음에 오는 글도 모조리 엉터리다.
어하라가 신하의 지위에 해당한다면, 백제 황제는 어하라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백제와 고구려는 모든 면에서 경쟁국이었다. 광개토경대훈적비에 나와 있는 백제 황제에 대한 비칭은 잔주(殘主)다. 고구려 황제를 열제라 하고, 신라왕을 매금이라 하는 것처럼, 백제 황제는 어라하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칠지도의 원문을 되살려보면 아래와 같다.
선대 이후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 황제 아신 어하라가 왜왕을 위해서 만들었으니 이 칼을 후세에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
칠지도는 369년(근초고제 4년)이 아니라, 395년(아신제 4년)에 만든 칼이다. 395년에 일본 최초의 나라가 성립한 것이다. 응신은 백제 황제가 한반도의 신라군을 구축하기 위해 식민지왕으로 임명한 인물이다. 응신을 왜왕으로 봉하면서 신라군을 물리치라며 칼을 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을 다하라고 하사한 칼이지, 응신과 그의 후세를 축복하기 위해 하사한 보도조차 아니었다.
백제 황제가 칠지도는 하사했지만, 열도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은 한반도의 후왕에게 일임했다. 담징도, 왕인도, 아직기도 다 한반도의 후왕이 보내줬다. 응신을 제외하면, 왜를 세운 백제인들은 대부분 한반도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응신이 세운 나라는 백제 후왕의 지원을 받는 2류 후국이었던 것이다. 개로제가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뒤로는 백제 황족들이 안전한 열도로 가서 살았으니, 이후에는 백제 황제의 직접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열도에 식민지를 세우는 계획이 얼마나 갑작스레 결정되었는지, 응신이 열도에 도착한 지 14년 후에야 재봉사를 보내줬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근데 이 역시 백제왕이 바쳤다고 뜯어고쳤다. 재봉사도 한반도의 백제 후왕이 보내주었다. 그래놓고도 이때 간 재봉사 진모진이 일본의 의봉시조라는 대목은 내버려 두었다.
토우테이칸(藤貞幹)은 충구발(衝口發)에서 일본결척(日本決尺)을 인용해서 이렇게 밝혔다.
응신 천황 시대에 봉녀(縫女) 두 명을 보내주어서,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韓服)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배달시대부터 양잠을 하고 베를 짰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옷을 입지 않았을 리는 없고, 선주민을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에는 열도에 짐승마저 귀해서 인덕은 매조차 본 일이 없고, 신라와 백제가 온갖 동물을 하사했다. 그러니 나라가 서기 전에는 짐승 가죽조차 걸칠 수 없었다.
토우테이칸은 에도시대 사람이다. 한복이라 함은 이씨조선의 복식과 똑같다는 얘기다. 청구대륙을 차지한 주원장이 고려의 복식을 그대로 입자, 성계는 해결책으로 그 옛날 백제의 복식을 되살렸던 것이다.
그 당시 스이코(추고) 여왕을 비롯해서 백제계 여왕들은 한국식과 조금도 다를 데가 없는 똑같은 모양의 비단 치마인 어상과 양 어깨와 소매에 걸쳐서 큰 용을 수놓은 곤룡포인 어대수를 입었다. 지금의 한국 버섯과 똑같은 코끝이 오뚝한 버선을 신었다. ...... 그뿐 아니라 왕이 정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던 면류관, 왕의 신발인 어석, 심지어 여왕과 왕후들의 옥패물인 어옥패 등등 이 모든 왕실 복식 제구 등은 고대 한국 왕실의 복식 제구와 동일한 것들이다.(일본문화사, 홍윤기)
고대 한국 왕실은 이씨조선을 말한다. 왜는 백제의 후국이다. 이씨조선도 명의 후국이다. 그러므로 이씨조선왕이나 일본왕은 백제 황제의 복식과 제구를 할 수 없었다. 백제 후왕의 복식, 제구였던 것이다.
응신은 급히 열도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책 한 권 안가지고 가서 응신의 아들들이 성인이 되자, 왕인이 건너가서 글자부터 가르쳐줘야 했다. 그러므로 왕인이 건너간 것은 405년이 아니라, 420년대다.
한반도 남해안을 잠식한 신라군을 협격하려면 왜군의 출발지점은 어디라야 하는가. 북구주다. 바로 야마다이국(사마대)이 있었다고 우기는 곳이다. 하지만 사마대는 청구대륙에 있었다. 응신은 북구주에 일단 도착했다가, 카와치로 향했다. 북구주는 군사기지화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한반도인들을 병사로 훈련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시노가리 유적은 기원전 3세기에 건너간 한반도인의 거주지에 4세기 말에 건너간 백제인이 세웠다.
배달은 기원전 27세기에 철기시대로 진입했는데, 기원전 3세기에 건너간 한반도인이 청동기를 사용한 이유는? 미개 땅으로 이주하고픈 철기제작자는 없다. 한반도에 있어도 대우받고 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인이 열도까지 간 이유는 한반도에서는 희망이 없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열도로 간 극소수의 한반도인은 문명이 후퇴하여 청동기부터 다시 제작해야 했다. 고인돌 역시 한반도에서는 배달시대에나 사용했던 분묘제도다. 열도로 건너간 한반도인들은 전체적으로 문명이 퇴보한 것이다.
왜는 국가차원에서 전격적으로 건설한 식민지이고, 원래 목적이 열도의 군사기지화에 있었기 때문에 철기제작자들을 이주시킨 것이다.
“농경적, 주술적이고 평화롭게만 살”던 열도의 한반도인이 어째서 12m나 되는 망루대가 필요했을까. 바다풍경을 감상하려고? 왜군이 백제군과 협격하자, 신라군이 북구주까지 공격범위에 넣었던 것이다.
400년 무렵 일본열도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난다. 갑작스레 새로운 형태의 철갑옷이 출현하는데, 여기에는 가야의 정결기법이 그대로 도입되어 있다. 이때를 경계로 일본 철갑옷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도 심상치 않은 조짐이라고 할 수 있다.(역사스페셜 1권)
한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한 신라군을 협공하기 위해서 왜에서도 철갑옷을 만든 것이다. 당시 일본에는 철 수입권을 장악하는 것이 힘을 키워나가는데 중요했다는 말은 사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주장이다. 그러므로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파형동기, 벽옥제품, 청동투검창 등은 교역의 산물이 아니라 백제가 만들었다. 열도가 백제 식민지라서 백제의 물건들이 건너간 것이다. 수혜기(스에키)도 가야가 아니라, 백제 토기다.
농경적, 주술적이고 평화적인 성격의 유물은 기원전 3세기 이후 건너간 한반도인의 유물이다. 5세기 이후가 되면서 철검, 마구, 갑주와 같이 전투적이고 한편 귀족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갑작스런 변화를 보이는 것은 응신이 건너갔기 때문이다. 신라를 한반도에서 구축하기 위해 백제가 열도에 왜를 세우고, 무기를 제작했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미미했던 고령의 대가야 지역에서 400년대에 접어들며 이전까지 전혀 보이지 않던 철갑옷이 등장하는 것이다. 같은 시기 일본에 출현한 판갑과 같은 양식이다. 환두대도를 위시한 권위의 상징물도 출토된다. 이를 통해 대가야 지배층의 권력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역사스페셜 1권)
한반도는 백제인들의 휴양지라 전투부대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가 침공하자, 그제서야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신라 침공을 미리 감지했지만, 예상 상륙지점이 빗나가 엉뚱한 곳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신라는 성공리에 교두보를 마련했으므로 전장에만 군대가 몰렸다.
금관가야라고 착각하는 지역을 신라에 빼앗긴 결과, 밀려난 지역에서 또 다시 철갑옷을 만들고 무기를 제작해야 했다. 그 지역을 이 땅의 사학자들은 대가야라고 부른다. 철갑옷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 변화되어 가는 것도 백제군이 계속해서 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권력이 넘어갔다는 역사스페셜의 저 글은 유적, 유물의 자의적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청구대륙의 우리 유적, 유물을 중노의 것으로 쉽게 둔갑시켰던 것이다.
열도왜가 신라군을 구축하기 위해 세운 백제 식민지이므로 백제와 같은 무기, 같은 유물이 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당시 궁월군이 열도의 왜군을 지휘한 것이다.
전라북도 미륵사가 삼국유사에 써 있는 대로다? 삼국유사는 한단사부터 철저히 날조된 책이다. 삼국유사가 얼마나 날조됐는지는 조선에 대한 기술이 하나의 기준이 된다. 완전 엉터리다. 삼국유사는 어이없게도 중토로 들어간 3황 5제로 시작한다.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둘러싸 복희를 낳았고, 용이 여등과 관계를 맺어 염제를 낳았으며......”
기이(紀異) 같은 소리! 다 사람 자식이다. 무지개가 아니라 태우의 한웅이고, 용이 아니라 소전이다. 결국 신모(神母)의 실체는 태우의 한웅의 비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태우의 한웅의 장자는 6세 한웅이 되어 대제국 배달을 다스리는 폼 나는 최상의 직업을 가졌지만, 막내 복희는 중토로 들어가 미개 토착민과 더불어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했다. 기술하는 투가 누구라도 중노가 뜯어고쳤다고 하지, 우리나라 사람이 썼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삼국유사가 1200년경에 쓰여졌다니까, 2천 년 전이면 기원전 800백년이라는 소리다. 그럼에도 요와 같은 시기라고 했다. 요는 기원전 2400년 때 인물이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요는 단군왕검의 제후였다. 하도 무능한 인물이라, 단군왕검이 내쫓아버렸다. 그래도 중국은 태평성대였다고 주장한다. 이건 더 중요한데, 3황 5제는 중토의 토착민이 아니고,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단수로 내려온 1세 한웅 거발한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고 했지만, 단군왕검은 18세 한웅 거불단의 아들이다. 한웅 거발한과 혼인한 웅녀는 웅족의 여왕이었고, 한웅 거불단과 혼인한 웅녀는 웅족의 왕녀였다. 웅족이 왕검(배달의 제후)을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배달 개천으로부터 천년이 지나서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던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그 후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살면서’ 산신이 되었다.” 주나라는 11세기인지 12세기인지 개국연대가 아리송한 나라다. 단군왕검이 기원전 800년경에 있었다면서 마지막 단군이 11세기인지 12세기에 생존했다는 것이다. 기자조선도 없었던 게 기자는 성탕의 후손으로 기씨가 아니라 성씨였다. 티벳고원 북부의 기라는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기자라고 불렀다.(대청일통지) 사람들이 땅 이름을 따서 기자라고 부른다고 냉큼 기씨로 바꿨단 말인가.
그런데도 이 땅의 사학자들은 삼국유사 기이편이 민족 자주적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민족 자주적일 필요가 없는 나라다. 아시아의 주인이었으니까. 민족 자주적은 우리나라의 속국이었던 중국, 일본 등이나 찾아 헤매야 할 시각이다.
“아! 사악이여. 넘실대는 홍수는 넓은 땅을 뒤덮고 질펀한 물은 산을 잠기게 하며, 언덕 위에 오르는 거친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아래로 백성들이 이를 한탄하고 있는데, 누가 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하고 요 임금이 묻자 모두 곤이라는 사람을 추천했다? 티벳고원에 홍수가 날 수 있는가. 450mm 밖에 안되는 건조기후대다. 그 옛날에는 중토의 연간강수량이 4500mm였던가.
단군세기에도 갑술 67년(B.C. 2267) 태자 부루가 도산에서 우사공에게 오행치수법을 전해줬다고 했지, 홍수가 났다는 기술은 없다. 중토가 건조기후라 관개농사법을 알려준 것이다. 오행치수법으로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는 태백일사는 역사가 날조된 이씨조선 중기의 책이다. 정사 50년(B.C. 2284) 조선에 홍수가 났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인왕검이 팽오에게 물을 다스리게 한 것을 곤으로 슬쩍 바꿔치기한 것이다.
중노는 팽오를 삭제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단군이 홍수를 만나자 팽우(彭虞)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였다”가 한서·식화지에서는 이렇게 바뀐다. “무제가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팽오(澎吳)가 예맥 및 조선과의 길을 터놓았다.” 이 당시 예맥은 중토 서부에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책을 가져가 문장 하나 놓치지 않고 다 베꼈다면, 우리나라 역사책은 얼마나 방대해야 하는가. 기원전 58년(한단고기에 따른 고구려 건국 연도)부터 해서 668년까지의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역사를 한, 신, 위, 촉, 오, 서진, 동진, 5호 16국, 송, 제, 양, 진, 수, 당의 역사로 분해했다. 삼국사기는 40권이 아니다. 고구려 유기도 100권이 아니다. 대진국사도, 고려실록도 실로 방대한 문헌이었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를 다 빼가고 남은 것이다. 그 뿐인가. 조선, 북부여의 역사는 하, 은, 주, 한이 차지했다.
유적, 유물을 보고 문헌을 고치는 것은 가장 저렴한 역사날조 방법이다. 무왕(무제)의 승부수라면서 청구대륙이 아닌, 한반도에다 세울 수는 없다. 더구나 7세기에 한반도 남부는 신라가 점령했다. 신라의 가람을 백제 황제가 건립한 미륵사라고 날조한 것이다. 미륵사라고 우기는 유적이 신라 감은사지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미륵사 지하공간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는 경주 근처의 감은사지, 통일신라 때 창건된 감은사 금당터에도 이런 지하공간이 있다.(역사스페셜 1권)
이러면서도 미륵사는 백제 가람, 감은사지는 신라 사찰이라 우기는 게 이 나라 사학자들이다.
무왕(무제)의 모친은 사비 남쪽에 살았다면서 무슨 익산의 몰락귀족 서동? 12번(?)이나 전투를 했다는 전초기지에 수십 년의 국력을 결집해서 건축물을 세우는 경우도 있는가. 전쟁하면서 미륵사를 허물겠다는 소리밖에 안된다.
익산 왕궁평의 성벽은 신라가 진출하기 전 백제가 쌓았다. 그래서 안압궁(?)의 성벽과 건축기법이 같다. 백제의 성벽을 신라가 진출하면서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왕궁리 5층 석탑이 백제 석탑을 모방한 통일신라의 석탑? 신라가 만들었으니까, 신라 석탑과 비슷할 수밖에.
교토 청련원에서 발견되었다는, 중국 6조 때 편찬된 관세음응험기에 “백제 무광왕은 지모밀지로 천도했다”고 나온다고? 중국에 6조가 어디 있는가. 티벳고원 북부, 그것도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서 6조니, 남조니 하면서 부를 수 있는가. 청련원이 중국 천태종을 섬기는 사찰로 대대로 중국 문물을 수입했다고? 날조 중국 6조 때 왜는 자력으로 청구대륙에 갈 수가 없었다.
일본의 이른바 국풍 문화라는 것은 헤이안 시대 후기인 10세기 이후의 일본문화를 일컫고 있다. 지금까지 1천여 년 간 거의 완전히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일본문화였다. 그런 가운데 9세기 이후부터는 당나라 문화도 조금씩 수용하게 되었다.
설령 일본이 당나라의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일본에는 당나라에 갈 만한 큰 선박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일본의 견당사나 학승들은 백제배나 신라배를 얻어 타고 고생스럽게 대당 외교나 불교 유학을 겨우 다닐 수밖에 없었다.(일본문화사, 홍윤기)
마쓰키 사토루, 다무라 엔쵸는 견당사(?)가 당나라(?)에 갈 때도 신라 선박을 이용했다고 밝혔다. 당나라가 아니라, 대진국이다. “일본의 당나라 학문승이 신라의 송사(送使)편에 일본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신라를 경유”(다무라 엔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진국이 내륙국이라서 청구대륙의 해안을 다 차지한 신라의 선박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송사(送使)가 아니고, 왜로 왔다가 본국 신라로 돌아가는 귀사(歸使)편이다. 그 외에도 신라의 무역선을 이용해서 왜는 대진국을 드나들었다.
백제 식민지 왜는 백제선박에 얹혀서 청구대륙의 백제를 드나들며 백제문물을 수입했다. 청련원은 한국 천태종을 섬기는 사찰로 대대로 한국 문물을 수입했던 것이다. 무광왕? 관세음응험기가 진서라면, 무광제라고 써 있어야 했다. 18세기 이후 있지도 않은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을 떠벌리면서 날조했던 것이다. 일본의 역사 문헌치고 날조 안 된 것은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신라는 나라조차 없는 땅 열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반도를 침공했다. 선점만 하면 되는 땅을 놔두고 한반도에서 수백 년간 처절하게 싸워댔다. 열도가 가치를 가진 적은 딱 한 번뿐으로 2차 대전 후의 메국이 유일하다. 열도는 문화의 흔적조차 없는 땅<응신이 열도에 도착했을 당시, 열도는 옷조차 없어서 벌거벗고 있었다.(충구발, 토우테이칸藤貞幹) 벼이삭은 5세기 말까지도 손으로 쥐어뜯어 수확했다.(고대국가와 천황, 타무라 엔쵸), 집? 그딴 거 없었다. 6세기까지도 그냥 흙구덩이에서 풀로 지붕이나 가리고 살았다.(타무라 엔쵸)>이었다. 백제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열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서는 수 세기를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제가 열도에 왜를 세워 협격하자, 신라도 열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왜를 견제할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다.
“변한에서 철이 난다. 韓, 예맥, 왜가 모두 이것을 가져간다. 마치 돈처럼 사용하며 두 군(낙랑과 대방)에 공급한다.”는 심국지 위지, 동이전 역시 날조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책의 내용을 바꾼 것이다. 우선 고구려 때 중토에서 기어나온 예맥은 채달목분지로 들어가 고구려의 속민이 되었다. 속민 스스로 철을 가져다 무기를 만들 수는 없다. 고구려의 감시 하에 농기구나 만들었을까. 그러나 채달목분지는 너무 추워 농사에 적당치 않은 지역이다. 그래도 일본인 영충이 쓴 편지에 의하면, 밭농사는 지은 모양이다.
고구려, 백제 둘 다 스스로를 漢이라 했다. 서로가 한민족을 대표한다고 해서. 우리나라는 기원전부터 고려시대까지 桓, 韓이 아니라 漢을 즐겨 사용했다. 韓이라 한 것은 조선의 삼한이다. 중국은 역사날조하면서 연대를 일치시키지도 않았고(이 경우는 연대를 일치시키면 우리나라가 고도문명을 이룩했다는 실토니까.), 우리나라 강역 전체의 풍속을 번한이나 마한 등 특정지역의 풍속으로 한정시키는 버릇이 있다. 일례로 후한서, 삼국지에는 “마한 사람들은 잠상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고 했다. 진한이 잠상을 모르고 솜과 베를 만들 줄 몰랐겠는가. 미개 화하는 송 때까지도 “신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 설마 비단을 가지고 “신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고는 생각하는가. 자오지 한웅 때 중토로 이주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규원사화)지 않았기에 그로부터 4백년 뒤 후직이 중토의 노예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쳐야 했다. 자오지 한웅 때 중토로 이주한 한족은 극소수였던 것이다. 이들은 화하를 노예로 부리며 살았다.
철전을 만든 나라는 변한이 아니고, 조선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강역 전체에서 철전을 사용했다. “계묘(B.C. 2238) 9월,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단군세기) 부여가 8만호라는 삼국지의 날조기사는 은나라나 주나라의 인구라고 전술했다. 8만호는 토굴 속에 살던 미개 화하족까지 포함한 수치다. 부루 단군이 계량형과 가격을 통일할 때, 중토에는 돈을 사용할 만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중국왜는 원래 금사강 너머에 있었다가 금사강 상류까지 기어나오고 이어서 청구대륙 남동단까지 이주했다. 5세기 무렵까지 왜는 철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때 등장하는 철정은 가야에서 건너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역사스페셜 1권) 열도 최초의 나라 왜가 395년에 성립했다. 당연히 5세기 이전에는 철을 생산할 수가 없었다.
일본에 있는 철정은 가야가 아니고, 백제가 만들었다. 그러나 화폐가 아니다. 조선시대에 사용한 철정이 삼국시대까지 화폐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신라가 교두보를 마련한 가야라 착각하는 지역의 고분에는 철정이 많이 발견된다. 전쟁터에서 죽은 장수의 무덤에 화폐를 가득 넣어두었단 말인가. 백제의 고분이 아니라 평화롭던 조선시대의 고분이라면, 가능하다. 백제의 화폐는 철정이 아니라 군곡리 패총에서 발견된 화천이다. 중국 신나라의 화폐로 날조당했으나, 티벳고원 북부에 화폐가 있다면, 고구려나 백제의 화폐로 교역을 할 때나 사용했다.
그렇다면 전투 중에 무기로 제작할 수 있는 철정을 부장품으로 넣었단 말인가. 한반도는 백제 영토니, 철기로 생활용품이나 농기구 등을 충분히 제작하고 있었다. 신라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 동부에서 철기술자를 다 데려와야 했다. 전쟁터에는 사람이 살 리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으므로 백제의 철기제작자는 무기제작자로 변신하면 된다. 한반도의 철기술자는 백제가 신라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패해서 후퇴하는 마당에 철제품을 방치하고 간다면 신라가 사용할 것은 뻔한 일. 그렇다면 어딘가 감추는 편이 훨씬 백제에서 유리하지 않은가. 집안에 숨겨봤자, 주민들이 떠난 집들은 신라군이 이용했으므로 당장 발각된다. 그래서 백제는 고분에다 남은 철정을 보이는 곳에 쌓아두지 않고 바닥에 묻어둔 것이다.
백제군이 무덤 속에 철정을 감춘 걸 신라군은 알았지만 당장 쓸 것만 꺼낼 수밖에 없었다. 다음 전투지까지 운반할 수레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아무리 항해술과 조선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청구대륙 동부에서 선박으로 병력과 말을 수송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수레 제작자까지 충분히 데려오지는 않았다. 신라는 현지에서 전리품으로 조달하려고 했고, 백제는 후퇴하면서 수레를 모두 파괴하고, 수레제작자는 모두 데려갔다.
일본 최초의 화폐는 천무(텐무) 때 도읍한 신라의 부본전인데, 통용시키지는 못했다. 일본이 본격적인 화폐경제로 전환한 것은 임진왜란 후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이씨조선의 국부를 모조리 긁어갔다. 정명가도? 홋가이도조차 정복하지 못했다. 더구나 명 이전에 청부터 정복해야 한다. 현 양자강 이북에는 성계 당시부터 청이 있었다.
왜성은 일본으로 끌고 갈 조선인이 잠시 머물던 임시 수용소의 역할을 했다. 왜성을 통해 일본에 포로로 건너간 조선인은 15만 명이 넘는다. 왜성은 문화 약탈의 중심지였던 것이다.(역사스페셜 6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에 축조한 왜성은 남해안을 따라 28곳이나 되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 장수들도 이들 왜성에서 전쟁기간의 절반을 주둔했다는 사실은 임진왜란이 이씨조선의 국부를 약탈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은 우리민족이 5500년 동안 축적해온 동북아의 막대한 재화와 보물뿐만 아니라(일본은 이씨조선의 전 영토를 침공하지는 못했다.), 도공과 기타 예술가들까지 납치해갔다. 납치된 도공 등이 상품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만든 상품으로 이른바 쇼군들은 서양과 교역을 해서 부를 축적했다. 이렇게 손에 쥔 부는 다시 쇼군 밑에 있는 사무라이들을 거쳐 상인들에게 흘러들어갔다. 자연히 화폐경제가 발달한 것이다. 그래서 에도시대는 상인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씨조선통신사의 가르침과 넘쳐나는 부로 창출한 것이 바로 겐로쿠 문화다. 겐로쿠 문화의 특징은 한 마디로 퇴폐성이다. 기껏 우리나라 문화재와 부를 약탈하고 이씨조선의 도공과 예술가를 납치하고 이씨조선통신사를 초빙해서 한다는 짓이 섹스고 퇴폐문화의 융성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일자무식했던 사무라이들도 덩달아 겐로쿠 문화에 참여했다.
사무라이들은 미개했던 왜노 땅에서 이씨조선통신사에 의해 계몽된 마지막 집단이었다. 이씨조선통신사에 의해서 먼저 깨쳐난 것은 도시 상공인들이었다. 사무라이들이 이씨조선통신사에 의해 직접 계몽됐다고 할 수는 없다. 사무라이들이 문맹상태에서 벗어나기로 분연히 일어선 계기는 바로 퇴폐문학의 한 형태인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였기 때문이다.
왜노의 퇴폐문화는 문학에만 그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가부키가 있다. 가부키의 ‘키’는 원래 기생 기(妓)자였던 것을, 메이지 때 재주 기(伎)자로 고쳤다. 가부키가 기생들의 연희로 출발한 퇴폐적인 것임을 은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자 표기를 보면, 가부키가 얼마나 음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歌:노래), 무(舞:춤, 환롱: 자유자재로 꾸며 농락하다), 기(妓:기생)를 쓴다. 한때 가부키는 성의 문란을 가져온다고 해서 퇴폐적인 일본 정부조차 폐지명령을 내렸을 정도다. 그 때문에 300여 년간 남자가 여자 역할을 맡아왔다.
무령왕릉은 가짜다. 어째서 일본은 다른 고분은 모조리 도굴해갔으면서 무령왕릉(?)만은 온전히 남겼는가. 무령왕릉(?) 역시 도굴되었었다. 다만 부장품을 바꿔놓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작은 무덤이라서 한반도가 왜의 속국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백제는 황해를 건너지 않았다. 황해에서 발해만으로 해안을 따라 연안항해를 했다.(기원전 2세기에서 3세기까지 형성된 군곡리 패총에서 원양어업용 낚시바늘이 나왔다. 백제는 원양어업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항해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사람 및 물품 수송은 가장 안전한 항로를 택하기 마련이다.) 육로가 빠르다면 육로를 택했겠지만, 당시 육로수송은 마차가 전부로 대량수송은 배로 했을 것이다. 황해를 왕래한 나라는 신라였다.
백제 영토 한반도에 신라가 진출하면서 남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열도왜는 한반도 북부까지 배(백제 선박)로 가서 육로로 이동하거나 역시 발해만을 거쳐 연안항해를 했다.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다면, 열도를 식민지화하지 않았다. 열도는 중국 동부, 발해만에서 황해를 오가면서 식민지를 경영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더구나 식민지를 건설한 5세기 이후의 백제는 청구대륙과 한반도에서 고구려, 신라와 전쟁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백제가 열도를 식민지화하지 않고, 군사기지화하는 것으로 그쳤다면, 백제의 운명은 달랐을 것이다. 식민지로 삼았기 때문에 문명이라고는 전무한 땅에 온갖 것을 이식해줘야 했다. 그것도 청구대륙에서는 고구려, 신라와, 한반도에서는 신라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만주가 안전지대임에도 백제의 황족부터 줄줄이 열도에 가서 살았다. 기후가 동북아에 비해 온화해서였겠지만, 이때부터 고구려에 밀리기 시작해서 서압록강(가릉강+백수강) 이서와 황산강(양자강) 이남을 상실했다. 게다가 황제로 즉위해야 귀환한 탓에 본국의 귀족들과도 틈이 벌어지고, 정치혼란이 초래된 것이다.
백제 멸망 전쟁에서도 열도라는 물러설 곳이 있어서 쉽게 무너졌다. 백강 전투에서 패한 부여용은 열도로 가서 왕위(24대 천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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