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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Memories

懷念錄(8세)

by 개인교수 2006. 12. 17.

아주 추운 겨울
발을 동동구르며 집으로 돌아 와선
재빨리 아랫목에 펴 놓은 이불로 기어 들어가
지친 피로감에 그냥 눈이 스르르 감긴다.

어디선가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 잠이 깼을때는 이미 저녁밥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난 9시
엄마는 눈비비고 일어난 나를 보곤
소반에 밥과 김치를 차려놓고 나 숟가락 뜨기를 기다리신다.
엄마는 오늘 저녁 아침에 먹던 풀처럼 말라붙은 차가운 수제비를 숟가락으로 퍼 드셨을 게다.

밥 보단 시청에서 줄서서 배급 받아온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를 더 많이 먹었던 시절,
나의 8살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아직도 수제비 소리만 들으면 지긋지긋한데 최근엔 수제비만 파는 음식점도 생겼다고 하니 정말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수제비는 입맛을 돋우기 위한 특별식이 아니라, 쌀이 없어서 밥을 못 먹는 사람들이 배급받은 밀가루로 손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 이었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더 이상의 슬픔은 없었다. 단지 무거운 현실만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부실공사로 기록 된 와우 아파트가 내 눈 앞에서 반으로 꺽여서 무너지고 그걸 뒤로 한채 서강 판자촌 주민들은 강제 철거 이주 당해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으로 트럭에 몸을 싣고 터벅 거리며 떠나야만 했다.
그 행렬에는 8살의 나도 섞여 있었다.

강제 철거 당하기 한달전 부터 집 뒤에다 철망을 쳐 좋고 닭을 키우고 있었는데, 어짜피 차에 싣고 못 갈것이라고 하여 매일 닭을 잡아 먹었다.
거의 매일 한 마리씩은 먹은것 같다.

아마 8살에 나 처럼 매일 닭고기 한 달 이상 먹어 본 어린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어렸을 때 한 동안은 나의 자긍심을 부축이기에 충분한 아주 큰 사건 이었다.
그때 엄마가 닭 잡는 것을 하도 많이 봐서 아직까지 한번도 안 잡아 봤지만 지금이라도 내 스스로도 잡을 수 있을것만 같다.

닭의 목 아랫쪽을 발로 밟고 목을 살짝 비튼 다음 칼로 가볍게 목을 따 주면 몇 번 파닥거리다 바로 피 흘리며 쓰러진다.
마지막 생존을 위한 몇 번의 파닥거림이 전부이다.
닭은 그렇게 죽어갔지만 나는 파닥거리다 살아나고 또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세간살이를 실은 트럭은 어디론가 계속 가고 있고 나는 그 트럭 뒤에 타고 천천히 바깥 풍경을 감상하며 가고 있었다.
당시에는 트럭 뒤에 타면 걸렸는지 트럭을 천막으로 다 뒤엎어놓고 나는 그 천막안에서 숨 죽이며 있어야 했다. 그러다 심심하면 그 천막 틈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차와 막 보이기 시작한 2층 이상의 건물들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차는 말죽거리를 지났을 게다. 그리고 세곡동을 거쳐 광주군 중부면(지금의 성남시) 민둥산에 도착했다.


여기는 어렸을 적 우리집 건너편 산동네와 완전 흡사하다.



차가 어느 허허벌판에 도착하고 난 후 엄마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너 천막안에서 움직이는거 보면서 웃었어" 라고 하신다.
난민 신세가 되었지만 우리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사소한 일에 낄낄대면 웃었다. 아마 그 나이에서도 엄마와 같이 있고 아주 작은 일에도 가족이 함께 낄낄거릴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이미 작은 행복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난 어렸을 때 부터 애 어른 이라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많이 들었는데, 그것은 삶의 굴곡이 많았던 나로서는 당연히 취해야할 방어본능에 따른 것 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내 아들은 너무 빨리 커버리지 말길 지금 이 시간 바란다.)

그야말로 더도 덜도 아닌 산을 밤송이 벗겨 놓은듯 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그저 구획정리를 하여 20평 단위로 박아놓은 말뚝만 있다.
우리는 군용 인듯한 초록색 천막을 치고 생활을 시작 하였다.
그야말로 그 민둥산에는 곳곳에 천막이 늘어 나면서 그야말로 거지 소굴이나 다를바 없었다.

한편으로는 천막옆의 불하된 땅에서는 연일 집짓는 소리가 한창 이었다.
정부에서 땅은 꽁짜로 20평씩 준 것 같았다. 그러나 판잣집에 살던 철거민들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 1년이 지나도 천막에서 그대로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엄마가 누구에게 돈을 꿔서(대략 20만원 정도로 기억된다) 집을 빨리 지었다.
그리고 그 곳에 교회를 세우고 유아를 위한 어린이집을 꽁짜로 개원 했다.


아직도 오려 가지고 있는 당시 엄마에 관한 신문 기사..


아직도 갖고 있는 당시 신문 스크랩에는 "철거민 촌에서 평소에 아이들이 부모 전부 일하러 간 사이에 방치되어 있는것을 눈여겨 본 xxx여사는 부랑아들을 위해...... 개원 했다" 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개원 한 건지 신학대학을 나왔으니까 교회를 개척하려고 개원 한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리집은 남들보다 5~10평 정도의 땅을 더 사용했던것 같다.
그곳에 미끄럼틀, 시소, 그네, 뺑뺑이등을 설치해두고 교회 나오는 어린이와 당시 나 보다도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생활했다.

결국 그 집은 우리집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집의 3분의 2를 커다란 공간으로 사용하고 그 뒤쪽으로 골방 같은것 두개를 마련해서 우리는 거기서 생활을 했다.
나는 나중에는 다락방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게다가 갈 곳 없는것은 어린애들만이 아니었다. 그 어린애들을 봐주는 보모들도 갈곳이 없는 사람들이라 우리집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방 한쪽에는 외할아버지와 내가, 건너편 방에는 엄마, 누나 그리고 보모 2명 이런식으로 항상 지냈던것 같다. 난 어려서도 엄마랑 제대로 자 본 기억이 없는것 같다.


맨앞에 바지가 헐렁거려 히프의 골이 보이는 애가 바로 나다. 산토끼를 부르고 있는 중 같음.


엄마는 어린이집을 운영하려고 이리저리 도움의 손길을 구하러 다니셨다. 남들보다 배급 밀가루도 잘 타오시고, 가끔 유통기한과는 상관없는 지금의 스니커즈 초코렛바 등도 한박스씩 가져오시고, 가끔 만화책도 200권 300권씩 가져 오셨다.
그리고 시계랑 풍금이랑 전부 "차지철 기증" 이라고 써 있는것으로 보아 아마 박정희 죽을때 같이 총맞아 죽은 차지철 이라는 사람이 정치적 공세 비슷하게 선물을 준 모양이다.
그러나 엄마는 아이러니 하게도 10월유신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 하곤 하셨다.

누나랑 엄마랑 셋이 모여서 밀가루 반죽을 한다.
나도 나 나름대로 열심히 반죽하여 별 모양도 만들고, 달 모양도 만든다. 그리고 내가 만든것은 절대 남 못 먹게 한다. 하긴 드러운 손으로 코 닦으며 만든 수제비를 줘도 안먹었겠지만..
당시 유일한 재미는 그저 오손도손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얘기하면서 수제비 만드는것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수제비 라는게 아주 웃겨서 먹다 남은게 식으면 풀처럼 퍼진다. 어렸을때는 그것도 아까워서 떡 처럼 된 수제비를 한 숟가락 퍼서 그릇에 담아 김치 얹어서 그냥 꾸역꾸역 처 먹는다.

이건 음식을 먹는게 아니라 살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수제비 마저 배불리 먹어본 기억이 없다.

난 보릿고개 세대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작고 작은 부랑아 깡패들의 신 도시에서 그렇게 8살에 인생을 배워가고 있었다.

나의 8살 사진은 역시 단 한 장도 없다. 그러나 이전 보다는 훨씬 행복했다.



2006/12/17 - [Personal Pics] - 懷念錄 (5.6.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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