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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Memories

懷念錄 (5.6.7세)

by 개인교수 2006. 12. 17.

1.

서강의 오염된 하수도에는 부글부글 끓는 물이 오물과 함께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우마차 두 대 정도 비껴갈 만한 다리 위에는 소똥 만 질펀히 널 부러져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에 이리저리 채인다.

동대문을 떠난 전차는 이곳 서강을 지나 마포 종점으로 들어간다.
김두환 시절 우미관 골목에서 좌회전 하면 나오는 종로 위를 지나다녔던 그 전차를 6-7살의 나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전속력으로 뛰어서 잡아 타곤 했다.
마포 종점까지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가서는 돌아 올 때는 전찻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오곤 했다.

아마 그게 그 시절 가장 재미있었던 일과였을 게다.
당시의 부모들은 여섯 살 먹은 당신 자식들이 위험하게 달리는 전차를 잡아타는 놀이를 하는데도 전혀 손쓰지 못할 만큼 다들 어려웠었다.

아이들은 그저 부모님이 남겨주신 아침밥까지 실컷 먹고 하루 종일 집 밖에 나가서 놀다가, 아랫목에 묻어놓은 점심 챙겨먹고 다시 나가서 놀다 해가 뉘엿뉘엿 해질 무렵 집으로 기어들어오는 게 하루의 일과였다.

그것도 심심하면 집 앞에 아파트를 지으려고 잔뜩 쌓아둔 타이루(타일)따먹기를 하면서 놀았다. 아무것도 없던 어린 시절에 본 타일은 그야말로 어린애들의 최고의 놀이감 이었다. 형형색색의 타일을 모아서 블록 쌓기 놀이도 하고 땅을 파서 집을 짓듯이 쌓아 올리기 놀이도 하였다.


2.

마포나루의 배 근처에서 20대의 젊은 엄마는 먹고 살기 위해 고등어 임연수 등의 생선을 떼다가 동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파셨다.


집안에 하인을 둘 정도로 부유했던 집이 빛 바랜 흑백 사진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가 내 나이 1 살 무렵 돌아가신 다음, 깡패 청산을 목표로 군바리들이 날 뛰던 시절 당시 깡패였던 당신의 오빠 때문에 가산을 거덜나듯 다 빼앗기고 죽지 못해 살아가고 계셨을 것이다.


말이 좋아 건달이지 기업체의 사장들에게 협박하여 삥땅 뜯고, 건설 입찰 조작 하고, 행동대원들 몰고 다니며 선거 판 아작 내던 큰 외삼촌은 내 어린 시절의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삼촌은 내가 대학 졸업할 때 쯤에도 여전히 내 앞에서 “너 어디 취직 하고 싶어? 삼성? 내가 이병철이 한테 전화 넣어 줄까?” 이런 식으로 대단한 유세를 떨고 계셨다.


선 잠이 들 무렵 큰삼촌은 6.25때 신던 워커발로 쿵쿵거리며 우리 집에 쳐 들어와 돈 달라고 소란 피우다가 집안의 귀중품을 강제로 빼앗아 갔고, 심지어는 당시 인쇄업을 하고 계시던 엄마의 작업실로 쳐 들어가서 인쇄 기계를 모조리 팔아 먹는 등 그 행패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결국은 삼촌 때문에 전 재산을 잃고 마포나루에 가서 생선을 떼어다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나와 누나는 엄마 따라 마포나루 까지 갔다가 그만 돌아가라는 손짓에 울면서 뒤 돌아 섰다.
어렸을 때는 왜 그리 엄마가 보고 싶은지, 심지어는 엄마가 옆에 앉아 있어도 보고 싶었던것 같다.
코 질질 흘리며 누나와 나는 전찻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4살에서 5살로 넘어갈때 쯤 인것 같다. 유일한 사진이다. 근데 불현듯 의문이 떠오른다. 왜 엄마는 갑자기 이런 사진을 찍으려고 하셨던 걸까? 혹시 이 사진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고 찍은 것은 아니겠지....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족 셋이 영원히 깨어나지 못 할 뻔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생활고에 시달려 엄마는 연탄불을 방안에 피워놓고 자살을 시도 하셨던 것이다.
5살 어린 꼬마에게 9살 어린 소녀에게, 그리고 20대의 젊은 엄마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닥칠 무렵

아주 먼 친척인 이모가 그 날 새벽 우리 집에 들이 닥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슬픈 현실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갔을 것이다.
얼마나 살기 어려웠으면 20대의 젊은 나이에 자살을 선택 하셨을까?
평생의 혹 같은 자식 둘 때문에 젊은 어머니는 운신의 폭이 좁았을 것이다.


같은 날 밤 신앙심이 깊으신 이모는 새벽에 기도하던 중 “동쪽에 있는 과부를 구하라” 라는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워낙 우리 집과는 내왕이 없던 먼 친척이라 동쪽에 있는 과부가 누군지 계속 궁금하게 여기다가 그 새벽에 우리 집까지 뛰어 오신 것이다.

우리는 병원으로 옮겨져 죽을 고비를 넘겼을 것이다. 이 때가 바로 나 다섯 살 때의 일 이었다.


나는 참 희한하게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한다. 당시 살던 동네 등 아주 소소한 것도 다 기억난다.

이런 것은 기억에서 지워져도 좋으련만 당시를 상상할수록 더욱더 또렸해진다.

종교의 힘에 감동한 엄마는 아주 이상한 결심을 하신다. 신학대학을 다니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5살로 향할 무렵의 누나와 나, 나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이사진과 위의 사진이 10살 이전까지의 유일한 사진이다. 옷 차림에서 가난이 묻어 나온다. 오른손에 과자를 꽉 쥐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현재의 내 아들 모습니다. 그 자식 참..


어린 나와 누나는 그 덕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천안의 신아원 이란 곳으로 보내졌다.



(아! 여기구나 6-70년대 정도의 천안 삼거리 사진을 인터넷에서 어렵게 구했다)

3.

신작로의 아스팔트가 아직 굳지 않아, 고아원의 아이들은 아스팔트 원료인 검정 고무 같은 것을 껌 처럼 씹고 다녔다. 나도 그곳의 형들을 따라 열심히 아스팔트를 주어 먹는다. 화학물질 특유의 향이 입에 감돌면 그것도 하나의 맛으로 뇌는 인식 하나보다.


원래는 과자나 사탕이 없어서 먹었을 테지만 나중엔 습관이 되서 고아원 앞의 신작로가 다 말라 버리면 좀 더 먼 여정을 해서라도 공사하는 곳까지 가서 아스팔트를 씹었다.


고아원의 생활은 참으로 단조롭다. 여름이면 수박 먹고, 가을이면 도토리나 밤을 따러 다니고, 겨울이면 미국 원조로 들어온 옥수수가루로 만든 떡을 해 먹는다.

그리고 가끔 우유가루 같은 것을 먹어 보기도 한다. 그런데 원래는 가루였는지 몰라도 상당히 뭉쳐져서 이미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것을 망치 등으로 잘라서 아이들에게 한 입씩 나눠 주곤 했다.


당시 나는 상당히 귀여움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나는 유독 보모들이 챙겨주기도 하고 상급반에 있던 누나가 가끔 먹을 것을 가져와 주기도 했다.


무서운 현실이 다가올 때면 나는 벽장에 숨 곤 했다.

일년에 몇 번씩 외국 사람들이 선물을 잔뜩 가지고 나타나서 우리들과 즐겁게 놀아 주기도 하고 원장과 무슨 상담을 하기도 하였는데, 가끔씩 같이 놀던 친구들이 없어진 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 마수가 이미 나에게 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신아원은 원래는 고아들이 있는 곳인데, 가끔 나같이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맡아서 기르고 있는 기관 이었다. 누나는 나와 네 살 차이가 났으니까 아마 거기 부근의 국민학교를 다녔던 것 같다.


아무튼 외국인들은 특히 나에게 잘 해주었다. 최신형 덤프트럭 자동차도 나를 따로 주고 항상 그 다음번을 기약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렴풋이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고, 그들이 돌아간 다음 그들이 주고 간 장난감과 차들을 산속에 버려버렸다.
그러곤 낮에 가끔씩 버린 자동차를 다시 보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가곤 했다.
슬픈 6살 꼬마의 눈에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안떨어지는 발길을 돌려 숙사로 내려왔을 것이다.
당시 내가 자동차 종류를 워낙 좋아 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나를 찍은 그 외국인은 정기적으로 차 종류를 선물 하곤 한것 같다.


가끔 건달 삼촌이 신아원을 찾아와서 “이 개 같은 년 지 자식을 이런데다 놔두고.. 이런 식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나에게는 어린이들이 만져볼 수 없는 큰 돈과 카스테라 그리고 당원 3곽 (하얀 사카린 덩어리) 등을 사주고 가셨다.
어린 고사리 손으로 당원의 곽을 열어 알약같이 생긴 당원을 입에 넣고 음미한다.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며 6살 짜리 꼬마의 입가엔 환한 웃음이 솟는다.
너무 달아서 차라리 쓴맛이 난다.
마지막 곽의 당원을 거진 다 먹을 무렵이면 당원에 대한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하나하나 정성껏 빨아 먹는다.
그리고 아쉬움에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돈은 있지만 당원을 사려면 신작로를 따라 10리 이상을 더 걸어가야 한다. 아니 그보다 더 멀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단 한번도 내 돈으로 당원을 사 먹은 적이 없었다.

삼촌이 주고 간 그 귀한 당원은 주머니 안 쪽 깊숙이 숨기고 몰래 하나씩 꺼내 먹는다. 그 때의 그 맛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삼촌이 가고 난 후 나는  과거 무섭던 삼촌에 대해서 점점 호감을 가지는 쪽으로 변모해 갔다.


근데 참 이상하지?
내가 신아원에 있던 2년 동안 엄마가 나를 찾아 왔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 당연히 찾아 왔겠지만 이상하게 그런 기억은 하나도 없다.
엄마를 만나 너무 울어서 기억이 지워진 걸까? 아니면 정말 한 번도 안 찾아 온걸까?
아니면 정말로 마음 약해질까봐 찾아 왔다가 나 뛰어노는 모습만 보시고 가셨는지도 모른다.
누나만 살짝 만나고 서울로 올라 가셨을 수도 있다.


어느 해 초겨울 나를 좋아하던 외국인은 원장과 모종의 쇼부를 본 모양이다.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한 모양 이었다. 사실 그 해 여름부터 나는 그들이 오면 산 속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었다. 항상 어떤 보모 선생님이 나를 산으로 올려 보냈다.
왜냐하면 외국인들이 와서 맘에 드는 꼬마애들을 아무나 마음대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보호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엽다는 이유로 그들의 눈에 많이 띄었나 보다.
그래서 그들이 오늘날 이면 보모는 아에 나를 산 속으로 올려 보냈던 것이었다.
그들의 원조로 신아원 살림을 꾸리는 원장은 "저 애는 부모가 있으니 안됀다" 라는 말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었나 보다.


누나와 같이 산으로 올라간 6살의 나는 이름 모를 꽃도 따고, 가을이면 도토리도 줍고 하면서 하루 종일을 소비해야만 했다.

누나가 먼저 내려가서 손님들 가셨나 망 본 다음에야 나는 내려갈 수 있었다.


초겨울 엄마가 데려가기로 약속 한 날짜가 되 갈 무렵 그 외국인들은 다시 나를 찾아 왔고 나는 보모 선생님 방의 벽장 속에 숨어 있었다. 원장과 외국인 간에 모종의 쇼부가 이루어 졌다보다.
사실 당시에는 돈 조금 받고 일부러 자식을 외국인에게 파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최근 외국에서 한국을 찾아 온 당시 입양아들은 실제로 부모가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보호자의 양육이 어려워서 신아원에 보내진 나같은 꼬마아이 외국 보내는것은 아주 쉬운일이 었을 게다.
나를 숨겨중 보모 선생님은 급박하게 외숙모에게 연락해서 엄마에게 연락이 닿았는지 우리는 그날 새벽 마치 영화처럼 그 신아원을 도망쳐 나왔다.


난 항상 이 때의 일만 생각하면 울음이 복 받친다. 그러나 나보다 더 복받칠 엄마를 생각해서 내 인생에서 단 한번도 엄마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아마 엄마는 하도 어릴 적의 일이라 내가 잊고 있으리라고 생각 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4.

서울로 돌아온 7살의 나는 이미 상당히 삐뚤어져 있었다. 신아원에서는 심지어 여자애들과 섹스하는 흉내까지 냈었고, 이미 입은 거칠 대로 거칠어져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밥을 먹다가 난 엄마에게 “씨발년” 이라고 말을 하고 집을 나와 버렸다. 누나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나를 쫓아왔지만 나는 그 서강의 똥물이 흐르는 다리 밑으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머리 속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일단 당시에 가장 유행하던 구두닦이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는 돈 벌면 장사도 해서 큰 돈을 벌면 보란 듯이 다시 나타나고 싶었다.
한편으론 신아원에 있을 때 그 양부모를 따라 미국이든 어디든 갈걸 하는 생각에 다시 천안으로 혼자 내려갈 생각도 했었다.


7살 짜리 어린아이의 머리 속으로 이러한 계산을 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지만, 당시에는 어린아이가 구두닦이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흔한 풍경 이었다.

일부러 잡히기를 바랬을까? 하루밤을 세우고 그 다음날 날 찾으러 온 누나의 손에 끌려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엄마는 펑펑 우셨을 것이다.
나는 그 우는 모습 조차 외면 해버릴 정도의 차가운 아이였다.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며 평생 눈물로 사셨을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 하다.


그러나 난 마음 한 켠에 항상 생각해 왔다.

내 자신이 받은 어린 시절의 엄청난 스트레스는 내가 계획한 게 아니었다.

어린 나는 아무 계획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엄마와 주위 사람들이 나의 환경을 결정지은 것이었다. 오로지 그들의 성공과 이익을 위해서 어린 나를 희생시킨 것이다.


나의 7살 시절은 전차 잡아타기 놀이나 하면서, 타이루 따먹기 놀이나 하면서 그렇게 흘러갔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다.

그러나 아무런 후회도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그래도 자꾸 눈물이 나는 이유는 왜 일까?


엄마 얼굴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오고

누나 얼굴을 떠올려도 눈물이 나오고

아들 얼굴을 떠올려도 눈물이 나오고

내 스스로를 떠올려도 가슴이 미어진다.


한때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통곡도 해 봤다.

한때는 내 자신을 속이며 어린 시절을 낭만으로 기억하기로 마음 먹은 적도 있었다.


내 나이 7살

마포 나룻가에서 조개 잡다가 현기증으로 쓰러진다.

기억이 몽롱하다.

그래! 아마 그 강가에서의 허상이 지금의 기억으로 남은 걸 거야.

어린 놈이 너무 과하게 상상한 걸 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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