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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vs Truth

초고대 문명은 존재 하는가? - 1

by 개인교수 2006. 8. 18.
초고대문명  (1)   인류와  외계문명

우가리트 알파벳

 말이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기 까지에는 6천만년이 걸렸다.  개미의 조상은 1억 5천만년 전에 살았는데 현재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이에 비해 인류는 고작 200만년 동안에 해상과 육상, 공중뿐만  아니라  우주를날 수 있게 되었다.  인류의 획기적인 진화에 비해 인류의 친척쯤  되는원숭이들이 아직도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다니고 있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설명-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원형의날틀을 타고 하늘을나는 모습

 이같은 사실로 보아 인류는 존재가 밝혀지지 않은 다른 문명, 즉 인류의 조상보다 수백만년이나 더 나이를 먹은 다른 은하문명에 의해 특수한유전적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진화의 속도가 촉진되었다고  가정할  수도있는 것이다.

 특히 인류의 기억속에 남겨진 문명의 잔재를 살펴보면 인류  스스로의 힘만으로 진화하여 왔다는데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게 된다.

 인류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를 고작 6천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대 인도의 브라만은 우주의  존속기간을 43억 2천만년으로 계산하였다.  레바논의 드루스파는 천지 창조의 시작을 34억 3천만년 전으로 설정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63만년 동안 천체 관측의 기록을 계속하였다.

 고대 그리이스의 천문학자 하파프코스는, 앗시리아의 연대기는 27만년 전으로 소급된다고 하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게네스는 이집트의 천문학 기록은 B.C 49219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곳에 373회의일과 832회의 월식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비잔틴의 역사가 싱켈루

스는 이집트의 여러 파라오의 연대기는 36525년 동안 모든 일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카펠라는 이집트의 현자들이 세계에 지식을 나누어 주기  전에  4만년이상 몰래 천문학을 연구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바빌로니아아의 태음력과 이집트의 태양력의 시작은 기원전 11542년에 일치되어 있다.  인도의 달력은 기원전 11652년부터 시작되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아틀란티

스가 가라앉은 시기는 기원전 9850년이라고 했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책에는 시간의 시작이 기원전 9600년에 있었다고 하였다.

우가리트 알파벳

 보통 나일강 유역에 최초로 국가가 세워진 연대를  기원전  4천년으로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와 동시대 사람들은 1만7천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의 고문서를 보존하고 있다고  하였다.

게다가 이집트의 역사를 서술한 이집트의 신관 마네톤은 그의  저서에서 기원전 1만 7천년보다 훨씬 오래된 책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리고비잔틴의 역사가 스넬리우스는 이집트의 신관들이 3만 6천 5백 12년  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쓴 {고대연대기}라는 고문서에  대해서도  썼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는 알렉산더 대왕보다 4만 8천 8백 6십 3년이나 오래된 기록을 이집트의 신관들이 보관하였다고 썼다.    

 이러한 사실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약 5만년전에 인류가 벌써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문자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문명이 번창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

문이다.  분명 우리는 현 인류의 문명의 역사는 고작 6천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 이전의 역사는 역사라고도 할 수 없는 원시상태였다고만  배워왔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나에 대해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증거들은 최소한 인류의 문명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이상으로 오래 되었음을 입증한다.  또한 잊혀진 문명의 잔해들이  보여주는 문명 발달의 정도는 현대 인류에게 과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정확한인식을 요구한다.  현재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이 고대에 존재했었고, 어떤 이유로 일순간에 멸망해 버렸다는 증거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기 때문에 적어도 현대 인류가 6천년동안 이룩해 온 문명의 성과에 대해 오만해져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고대문명에서 읽게 된다.

 즉, 현재의 인류문명이전에도 고도로 발달했던 고대문명이 다수  있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후예들이라는 것이다.  그럼 그  문명의  출발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  그것이 앞으로 말할 외계의 문명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2) 잊혀진 황금시대

우가리트 알파벳

 안데스 산중에는 티아와나코라는 폐허가 된 고대도시가 있다.  이곳은 해발 4천미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해발에서는 인간이 생활하기  적합하지 않다.  그런데 이곳에서 항구의 흔적이나 조개껍질 등  바다동물의 화석 따위가 발견되었다.

즉 이 도시가 일찍이 바다근처에 있었거나 바다와 같은 높이에 있었음을 말한다.

 이 티아와나코의 근처인 티티카카호수에서는 깊이 8미터 지점에서  하나의 무게가 200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덩이로 만든 벽의 파편과 건물 파편 등이 인양된 바 있었다.  벽은 포장된 도로 양측을 따라 1킬로  이상이나 뻗어 있었다.

 타이와나코의 고고학연구소 소장 루벤윌레이 교수는 그 유적을 귀족의장례식이 행해졌던 해안사원이라고 단정지었다.

 인도에는 흑파고다라는 이름의 사원이 있는데 이 사원의 높이는  75미터이며 지붕은 2,000톤이 넘는 돌로 만들어져 있다.  이 정도의  무게를들어 올리려면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기중기의 10배 이상의 힘이 있어야움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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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보다 더 큰 건물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이다.  이 등대는 기원전  3세기경에 프롤레마이오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팔로스 섬 위에  세워졌는데 그 높이가 150~200미터에 달하였다.  대략 16층 정도의 건물의  높이와 맞먹는 셈이다.  인류가 이렇게 높은 건물을 만드는데 필요한 건축술을 익힌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외에 소멸된 고대문명의 거석 건축물은 많다.  이집트의 피라밋, 레바논의 바르베크에 있는 4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쥬피터 신전의 토대, 영국의 스톤 헨지의 규질사암열석군, 그래스톤베리 주위에 있는  30마일에달하는 석조 12궁 칼렌더, 바다 속까지 뻗어 있는 프랑스의  카르나크의 거대한 입석열주, 페루의 삭크사이와만에 있는 거대하지만 완전히  다듬어 만든 성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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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마야인들은 수레바퀴를 알지 못했으며  도자기나  철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정확하게 천체의 회전 주기를 알고 있었다.  지구가 태양주위를 회전하는 시간은 그레고리오력에 의하면 365.242500일인데  비해마야인들은 365.24219일이라고 계산하였다.  대단히 정확한  천문기기를갖춘 오늘날에는 1년의 길이를 365.242198일로 보고 있다.  또한 그들은태음력의 길이도 0.0004일의 오차밖에 나지 않을 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정확한 고도의 지식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대단히 먼 과거로부터 지식이 축적되었음이 틀림없다.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의  역사에는  일식이373회, 월식이 832회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 횟수의 일식과 월식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만년 이상에 걸친 관측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천체관측이 시작되었음을 밝히는  자료도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춘분 무렵에 태양은 별자리중  물고기자리 속에 있다.  그러나 2천년 전에는 양자리속에 있었다.  이렇게 태양은 2만 5천 9백 20년에 걸쳐서 천체를 일주한다.  그런데 2만 5천 9백  20년 이라는 숫자를 수메르의 수많은 고문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수메르인들이 2만 5천 9백여년 이상 천체관측을 했음을 알리는 간접적인증거가 된다.

 또한 18세기에 {걸리버 여행기}를 쓴 영국소설가 스위프트는 화성에 2개의 위성이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고대 학문과 고대서적 및 사본에대한 관심이 대단하였고, 이것들을 연구하는 도중에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더구나 이 당시에는 태양계의 행성에 위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는 성능 좋은 망원경도 없었다.  이후 156년이  지난 1877년에야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 사실이 증명되었다.  나아가  스위프트가 2개 이상의 회전시간과 성격에 대해 밝힌 내용은 후에 얻어진 정확한 정보와 많은 유사점을 가졌다.

 소위 보이니크 사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뉴욕의 고대 유물 수집가 보이니크가 로마에 가까운 어떤 옛성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는  상자속에서 이 사본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 사본에 붙어있는 종이에는 아리송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 이같은 스핑크스는 그 주인 이외의 명령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고.  이 사본은 암호해독가에 의해서도  컴퓨터에 의해서도 완전히 해독되지 못하였다.  이 사본은 13세기 혹은 15세기에 씌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알아 볼 수 있는 내용만으로도 식물학적, 천문학적, 생물학적 문제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  중에는 현미경을 사용해야만 관찰할 수 있을 정도의 잎이나 뿌리의 횡단면을 그린 그림이 있는가하면, 페가수스의 중심과 안드로메다의 띠와  카시오페아자리 등에 대한 그림이 있다고 한다.  1920년대에 이 그림을 연구한펜실베니아 대학의 둘리틀은 그 그림이 틀림없이 성운을 표시한다고  단정짓기에 이르렀다.

* 콜린윌슨의  세계불가사의백과 참조.

 1946년 프랑스 인류학자 그리올과 디틀렌은 당시 서부아프리카 말리공화국의 반디아가라 고원과 홈보리산 일대에 살고 있던 22만  명  정도의도곤족과 인근의 세 종족의 전설을 4년여간 수집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1951년 {수단 계통의 시리우스 시스템}이란 보고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보고는 1976년 언어학자이며 천문학자인  템플에  의해도곤족의 전설이 천문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도곤족은 50년마다 한 번씩시구이 축제를 벌인다.  이 축제의 날짜는 포 톨로라는 별을 보고  정하는데, 이 별은 약 50년을 주기로 제자리에 돌아오는 별인 것이다.  포라는 말은 도곤족이 먹는 곡식중 가장 알맹이가 작은 것의 이름이다.

* 그들이 기다란 호스 같은 것을 돌리며 그들 선조의 소리라고 하며 내는  소리는 UFO 가 내는 소리라는 것을 그방 알아챌 수 있다.

 도곤족에 대해서는 리더스다이제스트사의 세계의 진문기담 참조요.

 { 포는 남쪽 하늘에서 제일 밝게 빛나는 별을 50년에 한  번씩  돈다. 그러나 그 별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별이다.  포는 별들중에서 가장 무거운 별이며 사람의 눈에 잘 보이는 별의 주위를 돌면서  그  별의궤도를 결정하는 별이다 }

 우리는 남쪽 하늘에서 제일 밝은 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일명  개의별, 천랑성이라고 불리는 시리우스이다.  고대부터  알려진  시리우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19세기의 천문학자 베쎌은 1834년 시리우스의  궤도가 마치 뱀이 기어가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그 후 12년에 걸쳐 시리우스를 관찰한 결과 시리우스의 궤도가  미지의 천체의 인력으로 주기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미지의 별에 시리우스 -B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상되는 위치를 끈질기에 찾았지만 당시의 최고 성능을 지닌 망원경으로도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1862년에 대형 망원경으로 제작으로 유명한 클라크에 의해  제작된 73cm짜리 망원경으로 확인되었다. 바로 이 별이 도곤족들  사이에서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별, 포이다.

 오지에 사는 이들에게 누가 천문학적 지식을 알려 주었겠는가 ?  그들의 추장 오고템메리는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놈모의 후예라고 한다. 하늘 나라에서 놈모는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의 섬유를 가지고 지구에 왔다고 한다.  그는 땅을 만들고 식물과 동물을 만든 다음 사람을  창조했는데, 이들로부터 지상의 여덟개 종족이 생겨났으며 그들은 끝없이 오랜세월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전설의 사실이라면  그들은  시리우스-B에서 온 외계인의 후예라는 말이 된다.

 시리우스 별까지의 거리는 7, 8 광년이다.  현재의 과학으로도 시리우스까지의 비행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곤족들은 놈모를 기리는 축제를 50년마다 벌이고 있다.

 1633년 종교재판의 재판관들은 고문실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취조하였다.  그것은 갈릴레이가 지구는 둥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지구가 우주공간을 회전하는 구라는 사실은 이미  인류사의  여명기에도인도, 이집트, 아메리카 각지의 경전과 고문서 속에 씌어 있었다.  특히이집트인들은 이러한 사실이외에  지구가 다른 행성들과  같은  법칙에따라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천문기기나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지식도 없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가리트 알파벳

 플라톤은 지구는 공과 같고 그것이 회전하기 때문에 낮과 밤이 있다고 말했으며, 유대의 경전 {카바라}에는 인간이 사는 지구는 원처럼 회전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어떤 지역이 밤일 때 다른 어떤 지역은 낮이라고적혀있고 그 근거로 태고의 서적을 들고 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로마 교황에게 제출한 논문의 서문에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고대인들이 쓴 책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고대인들은 조수의 간만이 달과 관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자 셀레우코스는 바다의 간만을 달의 인력에 의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하였다.  중국에서도 해면 상승의 원인이 달의  인력이라는 것에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았다.  로마의 시저도 만월 때  조수가 만조가 된다고 기록하였으며, 영국에 상륙하기 위해 조수가 만조가될 때까지 기다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16세기의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가 조수의 간만은 달에  의해일어난다는 이론을 발표했을 때 그는 몹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반박할 수 없었다.  친척 중 한 사람이 마녀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고 그의 어머니는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죽었기 때문이다.

< 인디오의 경전 >

 슬라브인들은 먼 옛날 이 세상에는 물밖에 없었고 훗날 땅이 생겼다고 하였다.  인도의 {리그베다}도 세계는 우주를 가득 채운 엄청난  물에서 탄생하였다고 썼다.  중국의 고문서는 태초에 땅은 모두 물로 뒤덮여 있었고 후에 이 대양에서 생명이 탄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남북아메리카의 인디오의 경전 {포플 부흐}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한 마리의 동물도 없었다.   새도  없었다.

물고기도, 게도, 나무도, 돌도, 계곡도, 풀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하늘뿐이었다.  육지의 표면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차가운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뿐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세계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달력에도 이러한 일치가 나타난다.  수메르, 바빌론,  고대이집트, 고대 인도에서는 1년을 12개월로 나누었다.  그리고 마야에서는1년이 360일이었고 이밖에 불행의 날, 이름이 없는 날로서 5일이 더  있었다.  이 동안은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무엇이든 나쁜 짓을 할 수 있었다.  이와 똑같은 관습이 고대 이집트와 바빌론뿐만 아니라  인도에도 있었다.

3) 황금제국을 찾아서

 이밖에도 불가사의한 사실들이 있다.  그것은  지도에  관한  것이다.

지도는 알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과거 대륙의 모습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남겨진 지도에서 보면 그 제작자들은 현대인조차 20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발견한 곳을그려 놓았다.

   < 남극대륙이 그려진 지도 >

 1559년에 터어키인 하지 아하마트의 지도에는 북아메리카의  해안선이대략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1532년에 만들어진 오론티 피나우스의  지도에는 남극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1513년에 만들어진 피리 레이스의 지도는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룩한 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대서

양의 반대측에 있는 쿠바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카리브해의 섬들이나, 중미 안데스 산맥을 포함한 남미대륙의 동서연안, 심지어  남극대륙의 일부까지 그려져 있다.  1528년에 제작된 그의  지도에는  그린랜드,뉴펀들랜드, 캐나다의 일부,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의 플로리다가  나타나 있다.  그보다 묘한 것은 그의 지도에는 아프리카의 바로 밑까지 연장되어 전혀 이름이 없는 남극대륙을 표시하고 있으며, 현재는 빙하에  파묻힌 산들의 높이까지 표시하였는데 아직까지도 그 援湧?높이는  측량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햅굿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남극대륙의 지도는 정말로 얼지않았을 때에 제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 지도에  붙은  설명 가운데에 이 지도의 원본의 출처를 알렉산드리아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지도는 모두 중세에는 발견되지 않았고 수세기 후에나 발견된 육지

와 대륙에 대해서 상당히 정확한 윤곽을 묘사하였다.

 또한 이러한 지도의 작성자 자신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관된  지도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시대에 만들어진 고대지도를 베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대 지도의 작성자들이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알고 있어서 경도와 위도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세계의 곳곳을  여행하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더우기 오론티의 지도와 현대지도를 비교해보면 전자에는 남극에 많은하천과 그것이 흘러들어가는 피요르드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남극대륙에는 하천이나 피요르드가 전혀 없다.   대신에 오론티의 지도에서 하천이 있던 부분에 대양으로 천천히  흘러들어

가는 빙하가 있다.  이 사실은 오론티의 지도가 작성된 때는 빙하가  생기기 이전의 시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시기는 기원전 4천년경 남극 대륙이 얼음에 완전히  뒤덮이기  전이라고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수수께끼의 지도들로부터 많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미지의 문명이 존재했었고, 대양을 향해할 수 있는 배를  가지고  있었으며, 남극대륙과 그린랜드의 지도 제작에 필요한 천문학, 항해술, 수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옛 극지 탐험에 사용된 배는  크고

견고해야 했으며 고대의 이집트, 페니키아, 그리스 또는 로마가  소유하고 있던 배보다 훌륭해야 하였다.  이들 지도들은 이미  알려진  여타의 문명의 발생보다 훨씬 오래 전에 참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암시해 주는 증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야금술의 등장에도 의문점이 있다.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청동은 그 이전 단계인 구리시대가 거의 없이 전 유럽으로 퍼졌다.   최초의 청동제품은 매우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졌으며 사람들이 이 기술을 단계적으로 조금씩 익혀나갔다는 흔적도 없다.  멕시코에서도 유럽의경우

처럼 청동의 생산이 복잡한 고도의 기술적 수법을 동반한 형태로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 야금술과 금속 가공기술을 항상  자신의 힘으로 단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때때로 완성된 형태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는 가설을 성립케한다.

 이러한 가설을 뒷바침하는 사실 중의 하나는 청동을 최초로 이용한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에는 정련에 필요한 원료가 없었다는  점이다.  원료도 없는 상태에서 청동을 발명할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이들 문명국가들은 아연을 얻기 위해 카프카즈나 피레네 반도와 같이 엄

청나게 먼 곳까지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이보다 더 먼곳으로는  브리튼제도가 있었다.  페니키아인이 브리튼제도를 아연의 섬이라고 부는 것도이 때문이다

< 고대의 전지 >

 고대 수메르의 유적인 셀레우키아의 폐허에서 고고학자들은 유약을 바른, 높이 10센티미터의 작은 점토로 만든 그릇을 발견하였다.  그  속에는 외형상 산에 의해 부식된 것으로 보이는 철제 축과 납땜으로  용접된구리로 만든 실린더가 들어 있었다.  이런 출토품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

되었는데 이 수수께끼의 그릇이 일종의 전지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행해졌다.  끈질긴 연구 끝에 이 그릇을 본래 형태로  복원하자  놀랍게도 추정한대로 전기가 발생하였다.  고대 인도 문헌 중  {아가스티아  삼히타}에는 전지를 만드는 법이 적혀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주 깨끗하게 씻은 구리판을 도자기의 그릇속에  넣어라.   그것을우선 황산구리로 적시고 다음에 젖은 톱밥으로 덮는다.  다음에  편극을피하기 위해 톱밥위에 수은과 화합시킨 아연의 엷은 판을  덮는다.   그접촉은 미트라-바루나(Mitra-Varuna)라고  부르는  에너지를  생산한다.

이 흐름에 의해 물은 프라나바유(Pranavayu)와 우다나바유(Udanavayu)로분해된다.  100개의 항아리를 연결하면 대단히 활동적이고 유효한  힘을얻을 수 있다. "

< 고대의 알루미늄 >

 1963년 남아프리카의 프레토리아에서 열린 가로 조명과  교통에  관한 회의에서 다우니라는 사람은 뉴기니의 서반부, 이리안에 있는  빌헬미나산 부근의 정글속에서 20세기의 것과 비교하여 우수하지는 않지만  같은정도의 인공조명계기를 가지고 있는 한 마을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발견으로 그동안 풀 수 없다고 여겨져 왔던 문제를 설명할  수있게 되었다.  그것은 4세기경의 유명한 중국장수 주처의  묘에서  나온장식품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 묘에서 나온 장식품 중의 하나를 스펙트럼 분석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결과가 나왔다.  실험은 틀림없었다.   이장식품은 구리 10퍼센트, 마그네슘 5퍼센트, 알루미늄 85퍼센트의  합금제품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믿기 어려웠던 것은 알루미늄이었다.  알루미늄이 처음으로 추출된 시기는 전기분해법이 도입된 1808년이었다.

< 고대의 비행기 >

 또 어떤 출토품들은 현대의 발명품을 모방해서 만든 것 같아  보인다.

그중에서도 현대의 삼각날개 비행기와 흡사한 황금제 축척의 모형이  발견된 것은 1천 5백년 전 콜롬비아의 한 묘지에서였다.  이보다 더  오랜고대 이집트에서는 글라이더 모형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시인  굴원은 고비 사막의 하늘 높이 서쪽으로 만년 눈으로 덮여 있는 곤륜산맥을  향해 비취의 전차로 비행한 것을 기록하였다.  그는 그  비행기가  어떻게 바람과 고비 사막의 모래 먼지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또 어떻게 자기가 항공 측량을 하였는지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림설명: 콜롬비아 보고타의 황금비행기

 서기 1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기술자 해론은 터빈과 제트엔진 양쪽 원리를 구체화한 증기 엔진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적어도 주행 거리를 기록하는 속도계를 헤론이  발명한 것은 사실이다.  한편 에게해의 해저에서 건져 올린 청동제의 물체

는 몇년간의 연구 끝에 천문계산기로 판명되었다.  굴착기로 보이는  톱니바퀴, 차륜이 붙은 황금제 모형이 파나마에서 발견되었다. 확대렌즈가 고대 앗시리아의 유적과 에쿠아도르의 콜롬부스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 이집트의 사원에는 성수자동판매기가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성수의 양은 화폐투입구에 넣은 화폐의 무게에 직접 관련이 있었다.  이밖에 제우스 사원에도 꼭같은 자동제어 성수판매기가  있었다.  이밖에 자동기계들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 테베의  사원

에는 이야기도 하고 제스처도 할 수 있는 신들의 동상이 있었다.   교황 실베스터 2세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청동의 자동기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항성과 행성의 어떤 위상에서> 이 교황에 의해  제작 되었다.   이것은 정치와 종교에 관한 중요사건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마법의 두뇌는>는 교황이 죽은 다음 처분되었다.

 레겐스부르크의 주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화학, 의학, 수학 및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20년 이상 걸려 안드로이드(Android)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이 자동기계는 별에 의해 선택된  금속과  미지의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기계는 걷고, 이야기하고, 가정의  잡일을 하였다.  알베르쿠스는 그의 제자 아퀴나스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안드로이드가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  어느날 말하기 좋아하는 수다와  험

담으로 아퀴나스를 화나게 하여 아퀴나스가 망치로 깨뜨려 버렸다.

 콤퓨터에 관한 기록도 있다.  아테네에 있는 그리스 국립 고고 박물관에는 1900년에 안티키테라 섬 부근에서 해녀가 발견한 부식된 금속체 단편이 몇 개 있다.  그 기계의 복잡한 눈금판과 톱니바퀴는 고대  그리스의 어떤 제품과도 같지 않았다.  그 기계와 같이 발견된 항아리에  새겨

진 문자를 보면 이것은 기원전 65년경에 제작된 것이다.  그것은 박물관에 아스트롤라베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1959년 뉴저지의 프린스턴 대학 부속연구소에 근무하던 과학자 프라이스가 감정한 결과 현대 컴퓨터의 선조라고 단정짓게 되었다.

 텔레비젼의 선조라고 불릴만한 것도 있다. 소련작가 막심 고리키의 경험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유물론자이기도 한 그가 20세기 초 카자흐 지방에서 인도인 요가 수행자를 만났다고 한다.   인도 수도자는 앨범을꺼내 인도의 풍경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고리키가 앨범을  펼치자 엷

은 구리판 위에 인도의 아름다운 도시와 사원의 경치가 그려져 있었다고한다. 그런데 인도수도자가 앨범을 받아 입김을 불고는 다시 보여주었을때 앨범 속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구리판뿐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들이 비행기, 계산기, 굴착기, 전기, 컴퓨터, 텔레비젼 등이라고 알게 된 것은 그와같은 것들이 정식으로 발명되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먼 옛날 사람들도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는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고대 로마인은 복잡한 교통 시간에는 어떤 주요도로를  일방통행으로 제한하였다.  폼페이에서는 교통의 번잡을 피하기 위해 손을  흔드는 교통순경을 채용하였다.  바빌로니아에서는 2천 5백년 전에 도로표지가 사용되었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는 주차 금지표지가 사용

되었다.  안티오크는 고대 도시 중 처음으로 가로등을 설치한 도시이다.

아즈텍인들은 원활한 교통의 소통을 위하여 영구적으로  변색하지  않는착색 끈을 포장도로의 중간에 박아 넣었다.  이것은 오늘날 페인트로 그려놓은 차선의 역할을 하였다.

4)고대의 지식들

어떤 민족도 고대 잉카인이 만든 것 같은 5천km의 고속도로를  건설하지는 못하였다.  이 고속도로는 좁고 험한 계곡을 건너, 현채도  사용되고 있는 굴을 지나 산맥을 관통하고 있다.  파키스탄 및 모헨조다로  하라파와 칼리방카의 발굴은 4천 5백년 전에 도시계획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들 고대 도시의 도로는 똑 발랐고, 구획i  직사각형

이었다.  훌륭한 수도와 하수도도 발견되었다.  이들  도시에서  사용된 벽돌은 가마에서 구워낸 것이었다.  백년 전 영국인들은 이 벽돌을 카라치와 라호르 사이의 철도 건설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유럽에서 17세기말에 발명된 중앙 난방이나 온수 난방은  이미4천년 전 한국에서 온돌이라는 형태로 존재해 왔다.   석조의  하수구와 도자기제의 파이프를 가진 중앙집중 시스템의 가정용 수세식 변소는 4천년 전에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시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었다.  오리건 대학의 크레스먼 교수팀은 네바다 i주 동쪽의 라모스 동굴에서  섬유로  짠샌들 200켤레를 발견하였다.  어떤 훌륭한 기술자의 손으로 짜여진 것인데, 마이애미에서 오늘날 신고 다니는 비취샌들로 오인할 정도였다.  탄소측정 결과 이 샌들의 연령은 9천년을 훨씬 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림설명: 모헨죠다로의 유적지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할 것인가 ?  그 문명은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또 왜  절멸한  것인가. 이에 열거한 증거들은 인류의 여명기에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만약 그러한 i문명이 존재하였다면왜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알렉산더 고르보프스키는 "고대의 지식들이 일차적으로는 지식을 담당하던 사람들에 의해 숨겨졌기 때문이며  이차적으로는  고대문헌이 침략자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파괴되거나 소각당하는 운명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튼은 "위대한 연구자들은  금속의  변질이라는 비밀 외에 몇가지 엄청난 비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은 이유는 헤르메스가 쓴 진실을 입에 올리면  세계가 엄청난 위험에 빠지게 i홱명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고르보프스키는 비밀지식을 갖춘 자들은 특별한 계급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들의 명칭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브리튼제도에서는 드루이드, 인도에서는 바라문, 이?트에서는 신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집트의 경우 국가가 생겨났을 때 신관들이 지식의 독점을 이용하여 신관층을 만들고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토투스는  이집트의 신관을 방문하였을 때 대를 이어 계승되어 온 가장 훌륭한 신관의  입상을 341개나 보았다고 한다.i  이것으로 따져볼 때 그때까지의 신관제도가 적어도 1만년 이상이나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의 고전 {리그베다}에는 마법의 비밀을 터득한 자는 그것을  다른모든 사람에게 숨기고 지켜야 한다는 구절이 있으며,  이집트의  마법을 기록한 파피루스에는 <입을 다물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지식을 숨기기 위해 그것을 구전으로만  전하거나  지식을  암호화하였다. 연금술에 대한 수많은 초고는 특히 그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 수는 10만 종에 달하는데 이것은 약  10만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종이 또는 양가죽에 써서 후세에 남기려고 했음을 알려준다.  이것으로 보아 지식을 갖춘 자들은 스스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건 혹은 지식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전해  줌으로써 파생되는 손해를 막기 위해서건 철저하게 지식을 한정된 사람에게만  전수하거나 암호로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지식은 비공개적인 지식의 전수 방식 이외에도 인간 스스로가 지식을 파괴함으로써 제대로 남겨지지 못하였다.  1549년 스페인의 수도사디에고 데 란다는 종교 전파를 위해 정복한 지 얼마i 되지 않은 멕시코를 찾아갔다.  그는 마야의 신전에 고문서를 소장한 거대한 도서관이  있는것을 발견하건는 이교도 신앙의 중심 자체를 파괴하기 위해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과 기호가 가득 찬 옛 서적과 문서를 불태워 버렸다.  이런 식으로 마야의 모든 도서관은 파괴되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고서 세 점뿐이다.

그림설명: 해독불능의 글자들.에쿠아도르의 크레스피에 위치.

 잉카에서도 비슷한 비극이 일어났다.  잉카제국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통치자가 예언자에게 그 대책을 물었더니 예언자는 문자 사용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잉카의 모i든 문서와 책은  파과되었고 문자의 사용은 금지당하였다.  진시황제는 분서갱유를 통해 셀수 없이 많은 책을 없애버렸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천문학과점성술에 관한 모든 책을 소각시켰다.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에 있던 특별한 고문서를 20만권이나 소장한 도서관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하였는데  이들이멸망하자 이 고문서들도 모두 불태워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멤피스에 있던 푸타 신전의 도서관이나 예루살렘 신전의 도서관도 모조리 소실되었다.  또 로마의 디오크레i릿㈌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고강화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고대 문서를 파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각지의 문화 사이에는 여러 유사점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정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바빌로니아의 신관인 베로소스의 책에서는 다양한 언어의 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최초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너무 믿어 신을  경멸하고  자신들이 신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바빌론이 있는 곳에  높은 탑을 쌓았다.  이 탑이 하늘에 닿으려 할 때 갑자기 신이 있는  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시박하여 탑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그것을 쌓던 사람들은 땅 위로 떨어졌다.  탑의 폐허는 바벨이라 이름 붙여졌다.  사람들

은 이때까지 같은 어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은 그들에게 다른 말을  하게 만들었다.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11장에도 나온다.  한편 멕시코의  토르테카 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홍수 뒤에 몇명의 사람이 살아남아 차차 그 수가 늘어날 때 사람들은 높은 탑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갑자기 혼란되기 시작하여 그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는 곳을 바꾸려고 제각기  여러 지역으로 떠나갔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아메리카의 많은 민족들의 전설  속에는  <신의문>에 관한 몇가지 전설이 남아 있다.  그런데 바벨이란 말의 의미도 신의 문이다.  이밖에도 먼 옛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전설이 중동지방은 물론 이러한 내용이 씌어 있는 신전과 고서를  고대 인도나 고대 이집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민족의 차이는 있지만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가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고고학자 A.훔볼트는 이렇게 말했다.

 "아메리카의 많은 신화, 기념물, 시간계산법, 우주발생에 관한 사고는동아시아와 놀랄만큼 유사하다.  이 사실로 보아 태고 시대에는서로 어떤 관계가 잇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설명: 마야의 숫자체계

 한편 1933년 고고학자 바이덴라이히는 북경에 가까운 주구점 동굴에서 두개골과 해골을 발견하였다.  그 두개골 중의 하나는 나이 먹은 옛  유럽인의 것이었고, 또 다른 것은 좁은 머리를 가진  여자의  것이었는데, 특징적으로 보아 전형적인 멜라네시아인이었다.  세번째의 두개골은  뚜렷한 에스키모의 특징을 가진 젊은 여성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럽의

남자, 열대지방의 여자와 북극권의 여자가 중국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것이었다.

 서남 아프리카의 브란드베르그 산중의 바위에 그려진 그림은 백인  여자들과 같이 있는 부시맨들을 그린 것이다.  이 여자들은 아주 유럽적인 얼굴인 흰색 페인트로 그려졌으며 머리털은 붉은 색이나 노랑색으로  나타냈다.  또 옷에는 보석들이 있고, 조개 껍질과 보석으로 정성스레  치장했으며 가슴에 활과 물주머니를 차고 있다.  이 여자들은 구두를 신고 있는데 흑인들은 신고 있지 않다.  이들 젊은 여자들은 3천 5백년  전에 크레타 섬이나 이집트로부터 왔음에 틀림없는 용감한 여행자라고 생각하는 고고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 백인여자들에게는 기묘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1만2천년 전에 살고 있는 북아프리카의 카스피언과 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둘 다 허리가 길고, 활을 가지고 있으며, 머리 장식을 하였고, 다리에는양말 대님같은 같은 십자형의 리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촉은 동남아시아에서 태평양을 거쳐 아메리카의 해안에 이르는 길, 유럽 해안에서 유카탄에 이르는 길, 인도에서  남북  아메리카에 이르는 길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서로 수만  킬로  떨어진 민족간에 고도로 발달한 지식과 사고에서 놀랄만한 유사성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결합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 진원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다만 과학이  과거에 대한 정보와 사실을 축척함에 따라 문명이 발생한 근원지가 존재했었음이 틀림없다는 견해가 근거를 얻어가고 있을 뿐이다.  즉 문명의 여명기에는 모든 민족이 동일조건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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