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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vs Truth

성배와 성혈 [ 7. 예수 왕조 ]

by 개인교수 2004. 1. 17.
성배와 성혈 [ 7. 예수 왕조 ]
만일 예수가 막달라와 실제로 결혼했다면 그러한 결혼은 어떤 특수한 목적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인가? 다시말해 그 결혼은 인습적인 결혼 이상의 어떤 것이었을 것인가? 그것은 정치적 관련성과 영향력을 가지는 모종의 왕조적 결혼이었을 것인가? 간단히 말해 그러한 결혼에 의해 이어진 혈통은 '왕족'이란 칭호를 충분히 보장해 주었을 것인가?


마태복음은 예수가 왕족이었음을, 즉 솔로몬과 다윗의 직계 후손으로 참된 왕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그는 팔레스타인 연합 왕국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자격은 합법적이기까지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부착된 죄패는 단순한 풍자적인 조롱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실제로 '유대인의 왕'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 있어서 그의 지위는 1745년의 보니 왕자 찰리의 지위와 유사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바로 그의 역할에 의하여, 즉 그의 나라와 유대 백성들을 통일시킬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헤롯과 로마에 모두 심각한 위협을 줄 수 있었을 제사장적 왕의 역할에 의하여 저항 세력을 유발시켰을 것이다.

어떤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헤롯의 '유아살해'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 사건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복음서들과 그 후의 전승에 의해 묘사된 것처럼 무시무시한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 헤롯측에서의 어떤 심각한 놀라움, 즉 자리를 빼앗기는 것에 대한 어떤 대단히 실제적인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헤롯은 극히 불안정한 통치자로 그의 신하들에 의해 미움을 받고 있었으며 단지 로마군대에 의해서만 지지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위치가 위태로왔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말해 어떤 신비적 또는 영적 구세주에 관한 소문에 의해 그렇게 심각한 위협을 받았을 리는 없다.

그런 소문은 이미 성지에서 어떤 방식으로건 널리 퍼져있었던 종류의 소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헤롯이 실제로 근심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대단히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위협, 즉 자기 자신보다 더 합법적인 왕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어떤 사람에 의해 야기된 위협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아살해'는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전승들은 헤롯측에서의 어떤 염려, 즉 어떤 경쟁적인 주장과 그 주장을 미리 제거하고자 하는 어떤 행동--이 행동은 헤롯측의 행동이 아님--에 관한 염려를 반영해주고 있다. 그러한 주장은 정치성을 띨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심각하게 생각되었음이 틀림없다.

예수가 그런한 왕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과는 상치된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었다는 것이 전혀 확실치가 못하다. '나사렛 예수'는 사실상은 '나사렛파 예수' 또는 '나사렛파의 사람 예수' 또는 '게네사렛의 예수'에 대한 와전 내지는 오역이다.

둘째, 나사렛이란 마을이 실제로 예수 당시에 있었느냐에 대한 상당한 의문이 있다. 그 마을은 어떤 로마의 지도, 문서, 그리고 기록들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곳은 탈무드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복음서들보다 먼저 작성된 사도 바울의 어떤 기록속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예수와 관련되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갈릴리의 군단들을 지휘했으며 그 지방의 마을들을 목록으로 작성한 그 시대의 가장 저명한 역사학자 요세푸스도 나사렛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해 나사렛은 68~74년의 반란 이후의 어느 때인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의 마을로 등장했을 것이며, 예수의 이름은 상당한 부분의 신약성서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의미론적 혼동--우연적이건 고의적이건--에 의하여 나사렛과 관련되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가 '나사렛'의 사람이었건 아니었건간에 그가 '가난한 목수'였다는 언급은 없다. 확실히 어떤 복음서도 예수를 그렇게 묘사하지는 않고 있다. 실제로 그들의 증거는 상당히 모순적이다. 예를 들면 그는 높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랍비 교육을 받았던 것처럼 보이며 가난한 사람들과 사귄 것만큼이나 빈번하게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사람들과도 사귀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와의 사귐이 그것이다. 그리고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잘 입증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결혼은 '평민'에 의해 행해진 검소한 예식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 잔치에는 적어도 수백명의 손님들이 참석한 호화스런 귀족적 모임의 모든 특징들이 다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마리아와 예수의 명령을 따르는 많은 하인들이 있다. '연회장'이 있다.


그 상황에 있어서 그는 일종의 집사장이었든가 아니면 심지어는 귀족이기도 했을 것이다. 가장 명백한 것은 엄청난 양의 포도주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을 때 그는 '복음성경'에 따르면 600리터에 달하는 포도주를 만들었다. 이는 800병 이상이 되는 양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소비된 술의 양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로 미루어 보아 가나의 혼인잔치는 귀족의 호화스런 잔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혼인잔치가 예수 자신의 잔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가 거기에 참석했으며 그의 모친이 참석한 사실은 그들이 동일 계급의 사람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렇게 볼 때에만 비로소 하인들이 그들에게 복종한 사실이 설명될 것이다.

만일 예수가 귀족이었다면, 그리고 그가 막달라와 결혼했다면 그녀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신분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그런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녀의 친구들 중에는 헤롯 궁중의 요직에 있는 관리의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훨씬 더 중요한 지위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소수도원 문서속에 있는 언급들을 추적하여 우리가 이미 발견했듯이 거룩한 도성이요,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원래 베냐민 지파의 소유지였다. 그후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은 다른 지파들과의 전쟁에서 대량으로 학살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도망쳤다. 그러나 소수도원 문서들이 주장하듯이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남아 있었다. 이 남은 자의 한 후손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는데 그는 자기가 베냐민 지파임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롬 11:1)

다른 지파들과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는 어떤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으며 이스라엘의 초대 왕실도 베냐민 지파였다. 그러나 사울은 결국 유대 지파의 다윗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리고 다윗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에게서 왕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수도를 세움으로써 그들의 정당한 소유지도 빼앗고 말았다.

모든 신약성서의 기록들에 따르면 예수는 다윗의 혈통이었으며 따라서 유다 지파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베냐민 지파에서는 그를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왕권 찬탈자로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베냐민 지파의 여인과 결혼하면 그러한 모든 적대감은 극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하나의 왕조적 동맹을 이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혼은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 결혼이었을 것이다. 그 결혼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강력한 제사장적 왕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이 원래의 정당한 소유자들에게로 환원되는 상징적 기능도 성취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결혼은 대중의 단결과 지지를 조장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며 예수가 가지고 있었을 그 왕권 또한 확고히 했을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막달라가 어느 지파였나를 암시하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러나 후세의 전승에서 보면 그녀는 왕족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베냐민 지파였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다른 전승들이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타당성이 있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한 그 결혼은 강력한 정치성을 띠고 있었다. 예수는 합법적인 왕권을 소유하고 있던 다윗 계열의 제사장적 왕이었을 것이다. 그는 상징적 의미를 띠는 왕조적 결혼에 의하여 그의 위치를 확고히 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는 그의 나라를 통일하고 그의 배후에 있는 민중을 동원하여 압제자들을 축출하고 꼭두각시를 폐위시키며 솔로몬 시대와 같은 왕국의 영화를 회복시킬 수 있는 안정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실제로 '유대인의 왕'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