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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vs Truth/Oriental

고조선의 개시 연대

by 개인교수 2005. 10. 21.
1. 고조선 개시연대에 대한 세 가지 주요 학설.

단군의 고조선 건국연대에 관해서는 남북학계를 통틀어 크게 세 가지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

그 첫째는 남한학계의 통설로 자리잡고 있는 서기전 10C 전후 개시설이다.

그 둘째는 남한의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서기전 24C 건국설이다.

그 셋째는 지금 북한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학설로 서기전 30C 건국설이다.

첫째로 언급한 서기전 10C 전후 고조선 개시설은 한반도와 남만주의 청동기 개시연대를 가지고 고조선의 개시연대를 추정한 것으로서, 한반도의 청동기 개시연대에 대한 학자들의 시각차에 따라 서기전 12C로까지 올려보는 학자도, 서기전 7C즘으로 내려보는 학자도 존재한다. 그러나 세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청동기문화의 개시와 고조선의 개시연대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참고로 현행 국정교과서는 서기전 10C 개시설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건국이나 개국이 아닌 개시라고 한 것은 서기전 10C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 대다수가 이때의 고조선을 `성읍국가`니 `부락연맹`이니 `군장국가`니 하는 것들로 명명하고있는 현실 때문이다. 실로 `성읍국가`니 `군장사회`니 하는 용어들은 신진화주의자들이 사회발전단계상에서 국가(state)가 개시하기 이전의 미개한 사회를 일컫는 chiefdom의 번역으로서, 이러한 chiefdom의 한국식 번역들을 가지고 `개국(開國)`이니 `국가(國家)`니 하는 용어들과 함께 사용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요즘 널리 인정받고 있는 신진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회발전단계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band-tribe-chiefdom-state (Elman R Serviec - Primitive Social Organization)
이중 band는 고고학에서 말하는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며, 채집과 사냥이 주로 행해진다. tribe는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며, 이때에 이르러 원초적인 농축업도 행해진다. chiefdom은 초기청동기시대에 해당하며, 이때에 비로소 미개하나마 일정의 권력층이 형성되며, 이러한 chiefdom사회가 더욱 발전된 단계가 바로 state(국가)이다.

문제는 오늘날 고조선 개시에 대한 여러 학설들 중 연대가 그나마 가장 뒤늦은 서기전 10C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때(서기전 10C)의 고조선을 chiefdom으로밖에 보지 않는 반면, 그보다 수 천년 앞서 고조선이 성립했을 것이라 주장하고있는 일단의 학자들은 그때(BC 30~24C 전후)의 고조선이 이미 chiefdom 단계를 지나 state(국가)단계에 이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고조선 초기의 사회발전상을 보는 학자들의 견해차는 이렇듯 수 천년의 차이조차 우스울 만큼 심각한 견해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첫째의 서기전 10C 전후 고조선 개시설이 청동기의 개화라는 고고학적 측면에 강력한 기반을 두고 있다면, 둘째의 서기전 24C 전후 건국설은 한국문헌들에 이리저리 흩뿌려져 있는 고조선 개국관련 기록에 기인하고 있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고려시대 역사서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비롯하여 동국통감, 동사강목, 해동역사 등 숱한 조선시대 문헌들에는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연대가 서기전 24~23C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셋째의 서기전 30C 고조선 건국설은 가장 근래에 북한에서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는 학설로서, 북한에서는 이미 정설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93년도에 북한에서 재차 발굴한 단군릉(평양시 강동읍 소재)에서 발견된 두구의 유골을 단군 부부의 것으로 보고, 이에 따라 `전자상자성공명법`이라는 연대측정법을 사용하여 나온 유골의 연대를 토대로 나온 것이다.

당시 북한측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단군릉에서 발굴된 유적의 연대측정결과는 발굴당시(1993년)로부터 5011년 전이었다고 한다("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제1, 2, 3차 학술발표 론문" - 관련 논문들은 살림터에서 「단군과 단군조선」, 「단군과 고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있다 - 이형구 엮음)


2. 각 학설들의 간략 분석.

첫째의 주장, 서기전 10C 고조선 개시설의 맹점이라면, 단군왕검의 실종을 들 수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서기전 10C 고조선 개시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이론 속에는 여러 문헌기록들과 전승, 금석문 등에 고조선의 건국자라고 분명하게 전해오는 단군왕검을 일체 배제하고선, 청동기의 개시만을 가지고 고조선의 개시 년대를 추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는 말이다.

실로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하면, 떼어놓고 설명할 수가 없는 존재가 바로 단군이다. 단군이 있기에 고조선이 있고, 고조선이 있기에 단군이 있다. 그런 민족정서와 현실상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10C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이론 속에는 오로지 청동기의 개시연대가 있고, 단군과 그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기록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청동기의 개시가 국가의 개국, 혹은 군장사회의 출현을 증빙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하나 중국의 하가점하층문화(요서지방의 초기청동기문화)를 가지고 하나라의 개국연대를 주장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한반도와 만주 어디에 청동기가 발견되었다고 무조건 고조선과 연결짓는 식의 이론에도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결국 우리에게 있어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주는 가장 강력한 일차자료는 청동기가 아니라 바로 문헌자료가 될 수밖에 없다. 중국과 한국의 문헌들 속에 흩뿌려져있는 단군과 고조선의 기록이 있기에 우리는 고조선과 건국자 단군의 존재를 알 수가 있었다. 만약 이러한 문헌자료들이 없었던들 한반도와 만주에 수 천년 전의 청동기가 발견되든, 비파형동검이 수없이 발견되든 그 주인을 확인할 길이 없지 않은가? 어차피 고조선 시대의 금석문이 따로 발견되지 않는 한에야 고조선 연구의 가장 기본은 문헌사학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문헌자료들에는 분명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서기전 24C~23C라고 기록해놓고 있다. 서기전 24C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된 문헌자료들을 바탕으로 고조선 역사를 실컷 논하고 나서는 개시연대는 청동기만을 바탕으로 멋대로 바꾸어 책정해버리는 식의 이론을 어찌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역사라 믿고 따를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라면, 차라리 서기전 12C경에 청동기 개시설을 주장하고선 기자조선에 대한 문헌자료들과 은나라 계열의 유적들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조선의 개국자를 기자로 바꿔치기 한 예전 사학자들의 주장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청동기의 개시를 국가의 개시와 동일시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 전부를 고조선의 개시와 연결짓는 것이 무리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서기전 10C 고조선 개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고조선이 시작부터 한반도와 만주를 아울렀던 강대한 강역국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조선이 초기청동기 시대에 만주와 한반도에 점점이 흩어져 살았을 숱한 군장들 중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세력으로서 서기전 4C를 전후해서 그나마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이론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군장들이 병존했을 당시의 초기청동유적들을 반드시 고조선의 건국연대와 일치시키려하는 학자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고조선이 우리민족이 건국한 가장 첫째의 시조국가라는 기존의 상식을 깨트리게 만든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의 청동기를 반드시 고조선과 연결시키려 하는 자들도 그들이다. 도대체 무엇이 실증적인 역사란 말인가?

둘째, 서기전 24C 고조선 건국설을 살펴보자. 필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서기전 24C설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장엔 고고학적(청동기) 자료 외에 문헌자료의 기록까지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이 서기전 10C설 보다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문헌자료의 기록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다만 이들의 주장 중에서 무리가 따르는 이유는 고고학적 자료의 절대부재와 함께 일부 고고학 자료의 과장해석에 있다.

예를 들어 하가점하층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으로 보는 주장에 일면 동조할 수는 있지만,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언급하면서 하가점하층문화는 물론 양평과 영암의 청동기유적까지 함께 언급한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하가점하층문화의 개시연대는 서기전 20C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무리하면 24C로까지 올려볼 수 있다(이 문화층에서 발굴된 유적들은 대부분 서기전 20C를 넘지 않는 것들이지만, 방사선탄소연대측정결과 내몽고 적봉시 유적의 경우엔 교정연대가 서기전 2410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양평과 영암의 유적 또한 방사선탄소연대측정결과 서기전 25C로 측정되었다고 한다.

이런 서기전 24C 고조선 건국을 전해주는 문헌자료를 비롯하여, 하가점하층유적과 양평과 영암 유적 등의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고조선이 개시연대부터 한반도와 요서 요동까지 아우르는 강대한 강역 국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것이 하가점하층문화와 양평과 영암 유적의 경우는 그 동질성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동일 시기의 동일 국가영역 내에서 그렇게나 다른 계통의 청동기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더구나 이른 시기의 유적이 발굴된 두 지역 사이에는 요동과 한반도 북부라는 넓은 공간이 존재하는데, 적어도 하가점하층문화와 양평, 영암의 유적이 동일 시기의 고조선 강역내의 유적이라면 요동과 한반도 북부에서도 요서와 한반도 남부지역의 청동기들을 무리 없이 연결해주는 동일 시기의 동질성이 보이는 유적, 유물들이 꾸준하게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러한 연계성을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하가점하층문화와 만주와 한반도 유적은 그 내용이 너무나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두 유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승발전된 것으로 볼 수는 있어도, 동일한 시기의 동일 국가 내에서 동일 민족들이 사용한 유적으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을 개국부터 한반도와 요서 요동을 아우르는 강대한 강역 국가라는 식의 주장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오점에도 불구하고, 문헌자료의 강력한 뒷받침과 함께 지금처럼 이른 시기의 청동기유적이 계속 발견된다면 서기전 24C 고조선 건국설은 앞으로도 발전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그럼 마지막으로 북한학계에서 단군릉의 측정년대를 바탕으로 주장하고 있는 서기전 30C 고조선 건국설을 살펴보자. 남한의 일부학자들은 북한내의 위기상황을 단군민족주의로 극복하고자 하는 일종의 `정치쇼`즘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그럴까? 북한학계에서 정말 정치쇼를 하는 것인가?

남한학계가 제일먼저 비판하는 부분이 바로 단군릉이 고구려 고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며, 서기전 30C 당시로서는 결코 사용할 수 없는 철제 못 등의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것을 강력한 비판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학계에서는 단군릉이 고구려 고분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 시대에 개축된 흔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철제 못의 경우에도 같은 이유 때문에 무덤 속에 들어간 것이라고 반론한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 고구려시대에는 단군 계승의식이 없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단군릉을 개축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재반론도 있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곰과 호랑이가 같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발견된다는 이유를 들어 고구려시대에 이미 단군신화가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단군 계승의식도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비판이나 반론들에 모두 그럴듯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무조건 옳다, 틀리다는 식의 주장은 독선이 될 뿐이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확실히 해둘 것은 일부 남한학자들 사이에서 무책임하게 내뱉어진 정치쇼 발언은 재론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수 십 명이 넘는 북한 최고의 박사들과 연구자들이 모여 연구와 토론을 거듭한 끝에 결론지어 결과물을 내놓았을 것인데, 이들이 애초에 정치쇼를 목적으로 단군릉을 발굴하고, 발표했던 것이었다면, 철제 못이니 무덤형식이니 하는 `정치쇼`라는 목적에 지장을 줄만한 자료들은 사전에 충분히 제거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발굴이후에 자리를 옮겨 피라미드 형식의 단군릉까지 새로 만든 북한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이 정치쇼를 목적으로 하면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을까? 필자라도 단군릉을 조작한다고 하면, 제일 먼저 철제 못의 존재부터 제거했을 것이다.

까짓 정치쇼하는 김에 제대로나 하지, 철제 못 이야기는 왜 꺼냈던가? 왜 지금까지 보지 못한 단군 시대 고유의 고분형식이라고 뻥을 치지 못했던가? 어차피 남한학자들이 근접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터인데 말이다.

결국 철제 못이라는 정치쇼론의 제1 근거자료의 존재가 되려 북한학자들이 정치쇼를 목적으로 발굴자료를 조작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반증이 되고만 것이다.

두 번째로 남한학자들이 많이 비판하는 부분이 바로 측정방법이다. 바로 전자상자성공명법이라는 측정방법인데, 지금까지 남한학자들은 이러한 측정방법은 적어도 만년이상의 석기시대 유물이나 측정할 수는 있어도 단군릉과 같은 5000년 전의 청동기유물을 정확히 측정하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비판해왔다

그러니깐 방사선탄소연대측정법이라는 세계적으로 공인된 측정법을 놔두고 왜 하필 논란의 소지가 많은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단군의 유골을 측정한 것인가 하는 비판인 것이다. 그에 대해 북한학계의 반론은 명확한 것 같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사용할 경우에는 많은 양의 시료가 필요하게 되는데, 수 천년만에 처음으로 발견된 민족의 시조 단군의 유골을 측정을 위한 시료로 모두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비교적 시료가 적게 들어가는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이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 남측에서 단군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그 조심스런 상황은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렇다면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사용했다고 무조건 나무랄 수만은 없는 상황이 아닌가? 결국은 남한학자들의 주장처럼 전자상자성공명법이 과연 그렇게 측정법으로서 터무니가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핵심이 모아진다.

필자도 처음에는 남한학계에서 그렇게 자신 있게 비판을 하는 것으로 보아 문제가 많은 측정방법인줄 알았다. 그러나 실제 역사스페셜 단군릉편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전자상자성공명법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일정의 공인을 받은 측정법으로서 그렇게 허무맹랑하기만 한 측정법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남측의 고고학자인 S씨나 물리학자인 J씨 같은 이들도 언론 등을 통해서 측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일부에서 제기되어왔던 측정방법에 대한 비판도 그리 정당한 것 같지 않다.
(이상 "단군과 고조선력사를 정립하는 데서 나서는 몇 가지 문제" - 주영헌(조선문화보존연구소, 교수 박사) 「단군과 고조선」에서 참고),

솔직히 말하자면, 남한학계에서 북한학계에 원하는 것은 방사선탄소연대측정법이 아닐 것이다. 북한학계에서 방사선탄소연대측정법으로 그러한 결과를 얻었다고 주장한다고 남한학계에서 "그래 옳다구나 맞다. 고조선은 서기전 30C에 건국되었을 것'이라고 인정하게 될까? 결코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미 방사선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서기전 25C, 혹은 서기전 15C의 것으로 판명된 양평이나 영암, 남양주의 청동 유적이 고조선의 개시연대는 물론, 한반도 청동기 개시연대에 조차 아무런 영향을 주고 있지 못하는 현실만 보아도 확실하지 않은가.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측정결과나 정치쇼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통설을 과감하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연구결과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한학계의 잘못된 풍토 탓이다. 차라리 떳떳하게 속내를 말하자. 우리는 너희 북한학자들을 학자 취급도 하지 않으니 잡소리 말라고..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학자들의 입에서 정치쇼 발언 따위가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필자는 도리어 북한학계의 주장이라면 무조건 매도하고 비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일부 남한학자들의 행태야 말로 다분히 정치적이지 않는가 되묻고 싶다.

남한학계의 정치적인 비판을 배제하고 나서, 북한학계의 주장을 들여다보자. 우선 문제로 작용하는 것이 문헌의 건국연대와 북한의 주장과는 지나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북한학계에서는 남한학계에서 단군관련 기록을 배제하고 청동기만을 바탕으로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추정하는 것에 비해 엄격하게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북한에서 내놓은 자료들을 보면, 단군릉주변엔 서기전 40~30C가 넘는 청동기 유적이 숱하게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런 결과는 당시의 평양지역이 국가가 개국되기에 충분한 문화적, 정치적 역량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북한에서는 적어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남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청동기라면 죄다 고조선의 개국과 연관시키는 식의 우를 저지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제1, 2, 3차 학술발표 론문"을 참고)

북한학자들은 단군 관련 문헌과 전승기록들을 배제하고서는 한반도에서 바른 고조선상을, 고조선 건국연대를 찾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청동기가 아닌 단군 전승이 살아 숨쉬는 단군릉을 먼저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단군릉에 대한 측정결과에 따라 그들은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서기전 30C로 결론지었다.

어떻게 보면 북한학계의 주장이야말로, (그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것을 전제로) 현재로서는 가장 모순이 적은 고조선상과 개국연대를 추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물론 단군릉에 대한 세세한 내용이 알려지기 전까지 일부에서는 단군릉의 존재자체에 대해 의문을 표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있는 단군릉의 존재는 이미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들에 이미 전해져오며, 삼국사기에도 그때 이미 평양이 선인왕검의 집이라고 하여 평양이 애초부터 단군과 고조선의 발상지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관련기록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하「단군과 단군조선」에서 발췌함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에 2기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그 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으며 둘레가 410자이고 민간에서 단군묘로 전한다.
「숙종실록」 - 숙종이 강동의 단군묘와 평양의 동명왕묘를 해마다 수리할 것을 상주한 이인엽의 제의를 승인하였다.
「정조실록」 - 정조가 평양 감사에게 단군릉을 수리하고 제사 지내도록 지시했다.

그 이외에 일제시대에는 일제에 의해 도굴된 단군릉을 수리하고 기적비를 세운 기록이 있고, 현진건의 「단군성적순례기」에도 도굴당한 이후의 단군릉을 살펴보며 한탄하는 내용이 적혀있기도 하다]


3. 맺음말

이상과 같이 고조선의 건국연대에 대한 세 가지 학설을 대략적으로 살펴본 결과 `어느 주장이 완벽하다` `어느 주장은 틀렸다` 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역사의 진실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어느 훌륭한 학자라도 사람이기에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된 역사를 진실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주장하는 학설과 틀리다고 무조건적이 비난이나 적대감을 표방하는 일부 한국사학자들의 연구태도나, 북한학계의 주장이라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각이 반드시 청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우리 사학계에 진정 필요한 것은 똑똑한 머리도 바른 한문해석도 식민사학 청산노력도 아닌, 새로운 연구성과 그에 따른 이설이라도 과감하게 인정하고, 존중해줄 수 있는 열린 학문풍토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일제의 식민사학이 진정 잘못된 학문이었다면) 식민사학도 청산이 될 것이다.

가끔 필자는 대화방 등지에서 사학전공을 꿈꾸는 어린 학생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상과 스승이 고집하는 학설이 상반될 경우에 학점을 적게 받을 작정을 하고, 혹은 논문통과가 안될 것을 각오하고, 그것을 비판할 수 있겠느냐고?

물론 필자의 이러한 질문에 자신 있게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고 대답하는 학생을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보지 못했다. 필자라도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사학교수님들께도 이런 질문을 해볼까? 아직 피도 안 마른 젊은 사학도들이 교수님의 학설을 냉철하게 비판할 경우,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고 정당한 학점을 줄 수가 있겠느냐고..

마지막으로 이 글이 대다수 선량한 사학자님들과 사학도들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결코 특정인을 비난하거나 혹은 옹호하고자 쓴 글도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둔다.